<소크라테스와 악처 크산티페>[철학자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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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와 악처 크산티페>[철학자의 서재]

박지용(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예수님, 석가님, 공자님, 그리고 소크라테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수많은 철학자들 중에서도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철학자들의 목록을 작성한다면 단연 1순위 후보에 오를 인물은 소크라테스다. 소크라테스는 생존 당시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대중적으로 알려진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 플라톤의 저작에서 주요 논객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또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라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연역 삼단논법에서도 소크라테스의 이름이 남아 있다. 이런 배경에서 오늘날까지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철학자 하면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하면 철학자를 연상한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대변하는 가장 상징적인 인물로서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남겼다.

 

(프리드리히 로렌츠 지음, 박철규 옮김, 도원미디어 펴냄). ⓒ도원미디어

<소크라테스와 악처 크산티페>(프리드리히 로렌츠 지음, 박철규 옮김, 도원미디어 펴냄). ⓒ도원미디어

?그런데 역사적으로 소크라테스의 이름을 그 이름에 걸맞게 그토록 빛나게 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를테면 플라톤 하면 이데아, 헤겔 하면 변증법, 마르크스 하면 역사유물론, 칸트 하면 비판철학, 대강 이런 굵직굵직한 주제어들이 철학자들의 이름과 결부되어 왜 그 철학자가 유명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빛나는 이름과 함께 알려진 것은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언과 “악법도 법이다”라는 명언 정도다. 이 두 가지 명언도 소크라테스 본인이 직접 말한 것이 아니라는 의혹이 있다. 우선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가 태어나기 전부터 델피의 아폴론 신전에 남겨진 낙서(?)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을 통해서 확인된 바 있는 역사적인 사실이니 그리 큰 반론의 여지는 없다. 설령 소크라테스가 그 말을 했다 치더라도 그 말의 유래는 소크라테스가 아닌 것이다.

 

또 혹자들은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도 정확하게 소크라테스의 주장으로 볼 수 없다고 하는데, 그 의혹의 대강은 이렇다. 시민들로 하여금 무조건적인 준법정신을 강제하려는 의도를 가진 이데올로그들이 소크라테스의 명성을 빌려 시민들의 비판정신과 저항적 실천을 약화시키고 독재자의 논리를 강화시킬 목적으로 그 말을 날조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소크라테스를 비판하거나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을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의 한 구실로 삼은 모종의 정치세력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의 명성은 소크라테스가 주장했다고 알려진 명제들과의 관계에서 보자면 허구에 기초한 것이 되어버린다. 쉽게 말하자면, ‘어? 소크라테스가 그런 말 안 했대? 그렇다면 왜 소크라테스가 유명한 거지?’라는 황당한 상황으로 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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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소크라테스에게 남는 건 무엇인가? 예수와 석가는 인류 구원이라는 엄청난 프로젝트를 맡으셨고, 공자도 유교라는 유사종교의 신격화된 숭배 대상인 점을 감안해 볼 때, 소크라테스가 성인의 반열에 속하기에는 뭔가 임팩트가 떨어져 보인다. 인류 전체를 통틀어 네 명의 성인을 선발하는 특별한 의미가 있어야 하는데, 소크라테스에 대한 평가는 과장된 것이 아닌가라는 의혹이 불거질 수 있다. 예수의 위대함을 부정할 경우에는 테러를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겠지만, 소크라테스를 4대 성인의 반열에서 격하시키자는 목소리는 그리 충격적인 문제제기는 아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둘러싼 두 가지 상반된 시선

 

역사적인 실존 인물인 소크라테스를 조망하기 위한 기본 자료는 재판에 대한 기록이다. 그 기록은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법정에서 배심원들의 법적인 판결을 통해 사형을 받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과 크세노폰이 각각 그 기록을 남겼고 이 기록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역사적 인물로 승화되게 된다. 이 재판과 소크라테스에 대한 사형 선고는 이후 역사적인 사건으로 비화되고 민주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되었다. 즉 무지한 대중이 죄 없는 뛰어난 현자 소크라테스를 죽게 했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 사건을 기화로 민주주의의 적대자가 되고 이상국가론, 철인정치를 펼치게 된다.

또 하나의 관점은 소크라테스에 대한 법적 심판을 플라톤의 기록에만 의존하지 않고 당시 역사적인 배경, 정황, 사건들을 통해서 민주주의자의 입장에서 접근하는 방식이며, 소크라테스가 일방적으로 희생당한 것은 아니라는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당대의 정치적인 역관계 속에서 소크라테스를 조망하는 것이므로 다양한 맥락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소크라테스는 충분한 혐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법적 판결에 있어서도 문제가 없었다는 입장인 것이다. 이 후자의 관점들은 주로 현대에 들어서 제기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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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둘 중 어느 관점이 옳은 것인가를 생각할 수도 있으나, 양자택일적으로 대립된 관점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 있다. 전자의 관점에서는 소크라테스를 사형시킨 민주정치의 오류가 지적되고, 또 후자의 관점에서는 피할 수 있었던 사형을 의도적으로 피하지 않은 소크라테스의 잘못이 지적된다. 여기서 드러나는 대립적 관점은 ‘역사적인 실존 인물 소크라테스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로 한정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문제시될 수 있는 철학적인 현실비판의 의미와 관련하여 소크라테스의 법정을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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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인 관점에서 정당화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단순히 생각해보기만 해도, 그 자체로는 올바르다고 할 수는 없는 현실적인 논리들이 있다. 유대인을 학살할 때 사람들은 그 현실을 당연하게 여겼으며, 분단 이후 반공 집회에 동원되는 사람들도 그것을 당연하다고 믿었다. 이처럼 현실에서 나타나는 인간과 사회의 야만성을 당연한 현실로 인정할 것을 강요하고, 또 철학과 철학자로 하여금 하나의 당파를 강요하는 논리는 언제나 현실 논리에 기초해서 작용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추구한 철학의 보편성은 민주정치냐 과두정치냐의 양자택일적 상황 자체를 거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철학은 잘못된 현실 자체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소크라테스의 법정은 철학적인 사유의 합법적인 권리 주장의 법정으로 볼 수 있다.

계몽주의 시대에 칸트는 ‘이성의 법정’에서 인간의 이성은 여러 현실적인 사안들을 검토하여 현실에 대해 어떤 주장을 펼칠 수 있고, 그러한 권리는 당연히 현실적으로도 보장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칸트는 당시 금기시되었던 종교적인 주제마저도 철학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이성의 공적 사용 권리를 과감하게 주장하였지만, 너그러운 계몽군주마저도 그러한 주장은 현실적으로 수용할 수 없다고 금지시켰다. 철학은 권력의 검열 앞에서 어려움에 봉착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철학적인 사유에서는 금기와 경계가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철학이 짊어진 사회적인 역할이다.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를 귀찮아하는 문제에 대해 계속 문제제기하고 공개적으로 간섭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그러한 자신을 일컬어 쇠파리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사람들의 무뎌진 의식을 일깨우는 존재라는 뜻이다.?

잘못된 대립구도에서 강요된 선택의 문제를 지적하려면 그 대립구도 자체가 잘못이라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아도르노가 ‘잘못된 사회에서 올바른 삶이란 없다’고 지적한 것을 떠올릴 수 있다. 철학은 잘못된 선택을 강요받는 삶을 조장하는 사회를 비판해야 한다. 민주냐 독재냐의 양자택일적 상황이 갖는 위험성을 잘 알고 있던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삶의 방식은 철학적인 물음을 끝없이 던지는 것이었다. 당시 아테네가 좀 더 여유로운 상황이었더라면 소크라테스를 애써 법정에 내세우지는 않았을 것이며, 소크라테스를 희생시켜 아테네의 몰락에 대한 책임을 물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비판의식이 마비된 극단화된 사회에서 철학적인 물음 제기는 위험한 행위로 오인될 수 있다는 내적 두려움을 극복할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이처럼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생각함에 있어서 아테네 민주주의자들의 잘못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는 음흉한 의도를 경계해야 함과 동시에, 과거의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해석의 문제로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철학적인 문제로 다룰 경우에는, 그러한 잘못이 인간적인 삶의 가치와 안정성을 위협하는 요소로서 여전히 잔존해 있다는 현실 비판이 결부되어야 한다.

 

소크라테스의 사생활 속으로, 악처 크산티페

 

대학 시절 나는 학과에서 새로운 소크라테스 해석을 배우게 되었는데, 그것은 작고하신 권창은 교수의 강의였다. 그분은 소크라테스의 논쟁자들이었던 소피스트들의 민주주의적 가치에 주목하셨고, 소크라테스-플라톤 연계로 이어지는 보편실재론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피력하셨다. 당대의 정치적인 권력관계 속에서 민주정치와 철학의 현실적 관계에 주목해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다. 그렇지만 소크라테스가 왜 죽었어야만 했는가라는 의문은 내 생각 속에서 말끔하게 정리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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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죽음은 그의 철학적인 기행과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소크라테스의 기행은 그 개인의 기행이 아니라, 철학이라는 학문의 고유한 것이고 본래적인 기행이었다. 그가 보인 기이한 행동의 목록은 대략 다음과 같다. 자기 일이 아님에도 시시콜콜 참견을 하고, 대화 상대자의 잘못을 조목조목 지적하여 기분을 상하게 하고, 홀로 생각할 때는 너무 골똘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이 정신이 나간 것으로 알고,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데몬이라는 분열된 자아와 대화를 나누는 그런 행동 방식이다.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자기 내면에서 명령하는 데몬이 법정에서 단호히 나서라고 말했다고 변론인들에게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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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전날 밤, 아마도 소크라테스는 삶과 죽음을 결정지을 법정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를 골똘히 생각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영혼(데몬)은 소크라테스에게 죽으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 상황은 마치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할 수 있으면, 잔을 물러달라’고 호소했다가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하고 자신에게 부과된 운명적인 짐을 진 예수의 고뇌와도 비견된다. 이 비교 자체는 매우 위험한 것인데, 인간 소크라테스를 성자 예수와 동급에서 비교하는 데에서가 아니라 유다와 바리새인들의 역할이 아니토스와 민주주의자들에게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한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고 단순하게 말하자면, 자기 자신과의 대화 행위이다. 그것도 대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죽음 일반이 아니라 자신의 현재적인 죽음, 죽은 자신과 나눈 대화의 경지는 그야말로 철학적이다. 그 철학적인 깊이는 한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자기사유의 정점이 아니겠는가. 사유는 일종의 자기분열 행위이며, 이 분열은 때에 따라서 다중적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철학자들은 분열증이라는 직업병을 겪지 않는데, 대화하는 의식이 집에서 나갔다가 항상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영혼인 데몬과의 대화에서 죽은 소크라테스에서 삶을 얻게 된 것이다. 육체적인 삶을 이끄는 소크라테스의 영혼은 이제 그 삶을 버리고 영혼 속에서 안주하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소크라테스는 철학적인 삶이자 철학적인 죽음의 아이콘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은 자신의 영혼에 대한 철학적인 자기 구제인 것이다.

socrates지금까지 소크라테스의 삶과 철학을 평가함에 있어서 조명되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던 인물이 그의 아내 크산티페가 아닐까 한다. 철학자는 저작으로 자신의 사상을 전달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선대 철학자들도 저작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았다. 구전된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낮 시간 아고라에서 나눈 수많은 대화들로 전승된다. 하루 종일 철학 토론을 한 소크라테스의 삶의 방식이 철학적 텍스트라 할 수 있다면 그의 아내 크산티페도 소크라테스 철학의 한 부분이어야 한다. 모두가 떠나 캄캄해진 아고라의 밤, 소크라테스는 유일한 대화 상대자 크산티페가 있는 집으로 가야 했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크산티페가 묘사된 유일한 곳은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신 날을 서술한 <파이돈>이다. 독배를 마셔야 할 시간이 되어 소크라테스가 크산티페와 소크라테스의 어린 아들을 집으로 먼저 보냈다는 기록이 있을 따름이다. 크산티페는 소크라테스라는 무능하고 비현실적인 철학자와 어떻게 평생을 살 수 있었을까?

법정에서도 밝혀졌듯이, 소크라테스의 철학 토론 수업은 전체 무료강좌였다. 당시 소크라테스가 누렸을 유명세를 생각한다면 요즘 대치동 스타강사 정도는 되었을 수도 있었는데, 유독 소크라테스는 무료강좌 원칙을 정했다. 다른 소피스트들은 소규모 사설학당을 차려 많은 수업료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라는 저작에서는 재산가 크리티아스가 자기 자식들을 위해 엄청난 돈을 들여 프로타고라스를 가정교사로 초빙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 당시 아테네는 스파르타와의 장기간에 걸친 전쟁으로 경제적인 위기 상태였지만, 소크라테스는 돈벌이를 하지 않아 크산티페가 겪었을 생활고는 불을 보듯 뻔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남루한 옷을 입고 심지어 신발도 없이 맨발로 다녔다고 한다. 일생 연봉 무일푼인 그가 그래도 70세까지도 짱짱한 건강을 유지했다는 건 철학적인 사유가 건강에 좋은 영향을 미친 것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그의 주된 사유 대상은 절제, 용기와 같은 도덕적인 덕목들이었다.

고대 아테네라고 해서 가정생활을 꾸리는 재테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크세노폰이 남긴 소크라테스의 대화록 <경영론>에서 소크라테스는 구체적이고 상세할 뿐만 아니라 최선의 재산축적 방법을 가르친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 집안 살림에는 나 몰라라 했으니 크산티페는 얼마나 화가 났을까? 그러니 크산티페를 대놓고 악처라고 폄하하는 것은 공정치 못한 처사인 것이다.

소설 <소크라테스와 악처 크산티페>는 역사적인 배경 묘사에서, 소크라테스의 철학 사상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다소 빈약한 감이 들게 하지만 아내 크산티페의 관점에서 비친 소크라테스를 조망했다는 점에서 소크라테스 이해의 새로운 지평을 보인다. 소설이므로 저자는 상당 부분 문학적인 상상력으로 묘사하고 있음에도, 현실감 있는 언어로 소크라테스의 부부관계를 잘 전달하고 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크산티페의 최초의 구타를 소크라테스가 도덕적인 덕목으로 이겨냈다는 점이다. 경제적인 능력과 활동을 희생한 대가로 소크라테스는 상습적인 구타를 얻게 되어 고통을 즐기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는다. 크산티페는 평생을 불평하고 소크라테스를 개조시키려 노력했지만, 결국 그의 철학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용서하게 된다. 철학의 지속을 위해서는 아내의 용서를 구해야 하고 때때로 폭력을 감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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