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원의 <철학자 구보 씨의 세상 생각> [철학자의 서재]
문성원의 <철학자 구보 씨의 세상 생각> [철학자의 서재]
김정철?(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구보 씨 또 다시 등장하다
철학자를 바라보는 시선- Y의 돌직구
세상과 소통하려는 어떤 철학자의 곁에 Y 같은 인물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는 것은 정말 큰 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철학자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데다, 정곡을 찌르는 날카로움까지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Y가 정확히 구보 씨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격 없이 친한 사이인 것만은 분명하다.
철학이라는 행위는 항상 어떠한 반론을 전제로 진행된다. 반론은 학자들 사이에서만 가능한 일이 아니다. 공감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다면 반론의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런 점에서 가끔은 Y의 참견을 반기기도 하고, Y가 없는 곳에서도 Y가 반론하는 환청을 듣는 철학자 구보 씨는 그야말로 천상 철학자다.
사실 철학자는 본의 아니게 사람들에게 남다른 취급을 받는 경우가 꽤 있다. 구보 씨의 강의를 들은 익명의 강의 평가만 들여다봐도 철학자의 모습이 일반적으로 어떻게 비치는지 알 수 있다.
“쉬운 얘기를 너무 어렵게 한다.”(247쪽)
전공자가 듣기에도 정곡을 찔리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구보 씨가 전혀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한 답이 없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기 때문에 철학은 원래 골치 아픈 거라는 생각이다. 고민은 곧 생각하는 일이다. 생각이 없이는 철학을 할 수 없다. 구보 씨는 철학자들의 사유를 따라 평상시 깊게 따져보지 못했던 문제들을 들추고 파헤치다 보면 세상을 바라보는 색다른 시야가 열릴지도 모른다고 항변하기도 한다. Y의 말은 보다 구체적이다.
“철학자라는 사람들은 대개 텍스트에 갇혀 살잖아. 그러다보니 쉽게 할 수 있는 말도 이런저런 개념을 통해서 하려고 하고 그 덕택에 얘기가 쓸데없이 길어지는 거라구. 구보, 네가 좀 심하긴 하지만, 너만 그런 건 아닐 거야.”(251쪽)
한편으로는 정말로 맞는 말이다. 그래서 얘기가 길어지고 졸리는 것이다. 하지만 구보 씨는 꿋꿋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개념을 통한 사유는 보다 근본적인 것들에 대한 고민을 반영한다. 게다가 철학자들은 무조건 텍스트에 갇혀서 헤매기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시대에 맞는 적절한 개념들을 찾아내려거나 만들려고 노력한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철학자들의 노력이 드러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들이 철학자들과의 소통을 어려워하는 이유는 보통 이 지점에서 발생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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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소통을 말하다
‘소통’은 그동안 정치권과 언론에서 지겹도록 들어온 말이지만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모자람이 없다. 그만큼 현실의 영역에서 소통이라는 것이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구보 씨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 문제에 그치지 않고 자연과 인간, 자연과 문명 사이의 소통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구보 씨는 자꾸 소통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우리가 양분법적인 사고에 익숙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일단 세상은 나와 내가 아닌 것으로 나눠져 있고, 내가 아닌 것 역시 내게 좋은 것과 나쁜 것, 내게 유리한 것과 불리한 것으로 구분된다. 사람들이 편을 가르고 양분법적 사고를 선호하는 이유를 이런 저런 방식으로 설명해보려 하지만 잘 안 되는 구보 씨에게, Y는 이렇게 일갈한다.
“문제는 자연이냐 문명이냐가 아니라, 또 감정이냐 이성이냐가 아니라 이해관계라구. 그건 마르크스 이래 상식이잖아. 네 얘기를 듣다보면 이렇게 뻔한 사실이 사라지고 지엽적이거나 부수적인 게 중요한 문제처럼 등장해. 그게 바로 지식인들의 전형적인 수법 아냐? (…) 알량한 논리나 지식이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치장해야 너네들의 존립기반이 마련되지 않겠어? (…) 그러니까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거야. 이해관계를 좇는 보통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척하면서 역시 이해관계를 좇는 지식인 나부랭이들.” (87쪽)
소통이니 어쩌니 말하는 지식인이라는 사람들도 결국은 이해관계 영역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다. ‘지식인 나부랭이’라는 말에 욱하기도 하고 당황스러워 하기도 했던 구보 씨는 이래서 소통이 될 수 없다며 다시 푸념하고 만다.
철학자들의 말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는 그들이 사용하는 개념이나 방법이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문제라고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현실에서는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비춰지고 달리 쓸 곳도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념과 방법의 쓸모는 결국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보이기 쉽다. Y의 날선 일갈은 바로 이런 생각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지 이해관계에 따른 행위만 있고, 근본적인 의미의 소통은 정말로 불가능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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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소통과 가짜 소통
철학자 구보 씨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누군가에게 열심히 이야기를 한다. 이야기는 일단 만남을 전제로 한다.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만 듣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비로소 이야기가 성립한다. 구보 씨의 이야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Y나 친구들은 각자의 생각을 말하고 격 없이 상대를 비판한다.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를 설득하며 알아가는 일. 이것이 바로 근본적인 의미의 소통이 아닐까?
유학의 고전인 <중용>은 배움의 과정에 대해 “견문을 넓히고(博學), 의심이 없도록 자세히 묻고 따지며(審問), 신중히 생각하고(?思), 확실하게 판단해서(明辯), 독실하게 실천하라(篤行)”고 말한다. 재미있는 것은 전통 유학이 다양한 경험과 자세한 질문을 시작 지점으로 삼고 적극 권장한다는 점이다. 다양한 경험은 최소한의 객관성을 확보해 줄 수 있다. 판단과 실천은 그 다음의 일이다. 넓게 보면 이 구절은 일종의 합리적인 실천 지침인 셈이다. 견문을 넓히는 일의 기본은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 의심되는 부분을 자세히 묻는 일은 곧 오늘날 말하는 소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만나지 않는 것은 물론,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면서 편을 가르고 독실하게 실천하기만 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이는 인터넷의 수많은 악성 댓글들만 봐도 알 수 있다. 댓글의 주인공들은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는 애초에 관심도 없다. 당연히 말을 건넬 필요도 없다. 단지 자기 생각과 다르면 무조건 모두 적으로 규정해버리고는 분노를 표출하고 우월감을 느낀다. 그래서 정이천은 앞에서 말한 <중용>의 5가지 덕목 가운데 하나라도 결여되면 진정한 배움이라고 할 수 없다고 했나 보다.
이제는 더 나아가 명백하게 드러난 과거의 사실을 묻고 따지기만 해도 ‘종북’ 딱지가 붙는 시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인정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다. 그들은 아무래도 확실히 판단과 독실한 실천만 할 줄 아는 듯하다. 단순한 만큼 실천하기도 쉽지만, 그건 일방통행일 뿐이다. 일방통행만 있으면 길은 결국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다.
소통(疏通)이란 바로 서로 오갈 수 있도록 막힌 길을 터주는 일이기도 하다. 이 길을 통제하면서 흐르는 시간은 과연 누구의 편이 될까?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소통을 말한다. 말뿐인 소통은 아무 의미 없는 가짜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Y의 돌직구를 감상해보자.
“그러니까 구보야, 세상에는 두 종류의 소통이 있는 거야. 소통을 떠들지만 진짜 소통에는 관심이 없는, 무지하거나 교활한 가짜 소통과, 소통이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고 감정이나 생각을 나누는 진짜 소통. 고상한 가짜와 투박한 진짜. 구보야, 너는 어느 쪽이니?” (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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