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충만, 간극의 현존>?[8월 월례발표회 후기]
?[2013년 8월 월례발표회]
<존재의 충만, 간극의 현존>
후기: 박은미 (건국대)
어렵다. 책 제목 너무 멋있는데 멋있는 만큼 내용이 어렵다. 토론 사회를 맡은 죄(?)로 6만원이 넘는 거금을 책값에 투여하고 두꺼운 책을 마주 했다. ‘으와 좋겠다, 광제형은…이렇게 멋있는 강해서를 내시다니! 나는 흉내도 못 내겠는 걸!’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런데 막상 강연회에서 나는 사회를 보느라 내 질문을 삼켜야 했다. 열띤 질문을 비집고 사회자가 끼어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글은 후기라기보다 사회자의 못 다한 질문을 하는 글이 될 것이다. 사실 질문이라기보다는 나의 이해가 맞는가 하는 확인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후설 연구서로 『의식의 85가지 얼굴』(그린비), 퐁티 연구서로『몸의 세계, 세계의 몸』(이학사)등을 써오신 내공으로 이제 퐁티의 원류라고도 할 수 있는 사르트르 강해까지 쓰셨으니 현상학을 거의 다 훑으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책으로는 쓰지 않으셨지만 하이데거와 푸코에 대한 연구를 거쳐 사르트르에까지 이르셨으니 이렇게 말해도 될 것이다.
철학의 제 1의 물음이 ‘도대체 이 모든 것은 왜 존재하는가?’임은 철학에 관심 가진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다. 그리고 이 문제가 궁금하지 않은 인간이 있을까? 사실은 이 질문 때문에 우리 모두는 그리도 외로운 것이다. 자신이 그렇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든 모르든 말이다. 자기 안의 어두움이나 막막함을 외면하고 회피하기만 하는 사람은 자신이 이 질문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겠지만 사실 우리 모두는 이 질문에 시달리고 있다. 도대체 왜 존재해서 이렇게 고통스럽냐는 말이닷!
모든 철학자들의 철학은 이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는 특히나 이 질문을 상당히 성실히 물고 늘어진 역작이라 생각된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즉자 존재의 우연성’을 열심히 입증하고 있다. 존재는 단적이다. 존재가 왜 존재하느냐 하는 질문은 인식에서 나온다. 이 놈의 존재는 인식과 상관없이 ‘그저 있다’.
“존재는 그 자신으로 꽉 차 있고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존재는 그 자신에게 불투명하다”고 사르트르는 말한다. 존재는 존재 자체를 의문시하지 않는다. 존재가 스스로를 의문시한다면 이미 그 존재는 그저 단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조광제 선생님은 강해에서 “사르트르는 즉자를 무한한 밀도를 지닌 존재의 충만으로 보고, 그 존재의 감압에 의해 의식 즉 대자가 생겨난다고 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걸 어떻게 쉽게 표현할까?
생각해보자. 우리 아이를 기를 때 나는 아이를 기르는 과정이 ‘행복하다’고 의식하지 못했다. 지나놓고 보니 행복했다. 아이가 걷고 말을 하고 재주를 하나씩 늘려 갈 때마다 순수하게 기뻐했다. 그 성장에 순수하게 기뻐하면서도 나 스스로 기뻐하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 때도 생활비 걱정, 어르신들 걱정이 있었으니 다른 걱정거리에 마음을 뺏겨서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그 순간만큼은 기뻤던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그게 아니라 인식은 늘 미네르바의 올빼미처럼 늦게 찾아오기 때문인 것 같다. 행복은 사라진 후에야 빛을 낸다는 영국 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정말 행복하면 자신이 행복한지 어쩐지 판단할 새 없이 그 순간 충분히 행복해서 행복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 행복하기에 바빠 행복하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참으로 인식에로 저주 받았다. 행복할 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행복이 달아날까봐 무서워요” 이렇게 말하는 순간, 이미 그 사람은 행복하지 않다. 행복한 순간에도 행복하지 않을 순간에 대한 걱정을 미리 당겨 함으로써 행복을 상실한다. 행복할 때 그저 행복하면 좋을 것이다. 슬플 때 그저 슬프면 될 것이다. 왜 나는 슬퍼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편할 것이다. 그러니까 쇼펜하우어 말이 맞다. 인간은 고통 때문이 아니라 고통에 대한 표상 때문에 괴롭다! 존재는 그저 존재하면 되고 존재는 누군가에게 인식되기를 기대하지 않는데 인간은 특이하게도 중뿔나게도 그 놈의 인식을 해댄다.
그러니까… 존재의 충만, 간극의 현존이라는 책 제목이 나올 수 있는 이유는 나에게는 이렇게 이해된다. 존재는 그 자체로 충만하다, 그런데 인간 인식이 존재를 존재로 인식하는 순간 즉, 존재로만 충만하지 않게 되는 순간, 간극이 현상적으로 존재해버린다. 그래서 이 간극으로 인해 인식이 가능해진다. “즉자라는 존재 속에는 최소한의 공백(le moindre vide)도 없다. 즉 무가 끼어들 수 있는 최소한의 틈(la moindre fissure)도 없다.” 존재에 이 놈의 무를 집어넣는 것이 인간들이 하는 짓거리다. 이 놈의 무를 집어넣지 않고 그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게 두면 될 것을! 그래서 니체가 말하는 어린아이로 살면 될 것을! 그게 바로 해탈일 것인데 말이다….
무를 집어넣지 않으면 현존과 존재가 분리되지 않을 것이고 그리하여 우리는 괴롭지 않을 것이다. 즉 그 순간이 바로 사르트르가 말하는 ‘즉자대자적인 신적인 경지에의 욕망’이 실현되는 순간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인간은 그러한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존의 삶을 이끄는 우리로서는 끝없이 존재와의 완연한 일치를 알게 모르게 추구한다.”는 조광제 선생님의 설명은 해탈 열반의 경지에 오르고자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터이다. 나도 잊고 너도 잊고 나와 너의 관계도 잊는 순간을 인간은 영원히 추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존재하는 한, 우리는 이런 순간을 단지 순간으로서만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저주받은 인간의 존재양식이므로!
제가 제대로 이해했나요?
P.S. 조광제 선생님께서는 박은미 선생님의 질의에 대해 ‘잘 이해했다’는 답변을 주셨습니다.(학술1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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