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닭 한마리 대신 갚아주게나! [철학의 유언]
친구! 닭 한마리 대신 갚아주게나! [철학의 유언]
이순웅(숭실대 강사)
‘철학의 유언’이라니. ‘철학자의 유언’이 아니라서 다행이긴 하다만 여전히 마음은 무겁다. 아마도 ‘유언’이라는 말 때문일 것이다. 유언이라면 죽음과 떼어놓을 수 있는 단어가 아니지 않는가.
얼마 전 김재현 선생님은 [미디어스]에 기고한 글에서 법정 스님을 철학자로, 본인을 철학교수로 규정하였다. 철학을 가르치는 자로서 철학자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 나름 겸손한 규정이리라. 그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그럼 난 뭐지?’였다. 선생님의 내공을 따라가려면 아직 먼 나로서는 그저 ‘아직 멀었다’고 할 수밖에.
하이데거의 권고와는 다르게 사실 난 죽음을 멀리하고 산다. 어쩌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막걸리 두 잔 먹고 죽음에 대해 잠깐 생각할 때도 있지만 일명 ‘비(非)본래적인 삶’, 이게 내 삶의 대부분이다. 여기에다 냉소주의와 허무주의를 얹으면 훨씬 더 내 모습에 가까울 것이다. 강의 시간에는 내가 아는 이론이나 지식을 들먹이며 “죽음과 정면 승부하라”고 하이데거가 말했다면서 고상한 척도 했지만 실은 나조차도 자신 없는 ‘거짓말’이다.
어쨌든 나에게 ‘철학자의 유언’이란 어울리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철학자는 아니다. 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사람들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면서 적당히 폼이나 잡는 사람이라고 하면 지나친 겸손일까. 몇 년 전, 친척 중 한 사람이 내 생년월일을 묻더니 컴퓨터 점을 쳐준 적이 있다. 고지식하다, 공무원이 어울린다 등등 하나같이 ‘정답’이었는데, 공부를 한다면 겉멋으로 한다는 말도 이어졌다. 나는 곧바로 ‘엉터리’라고 응수했지만 어찌나 뜨끔하던지 얼굴이 화끈거렸던 기억이 있다.
‘철학의 유언’이라면 젊은 시절 열심히 교회에 다니면서 천국행 티켓을 얻기 위해 신에게 고백을 했듯이 내 삶의 일부를 고백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자기 삶을 한번쯤은 반성해 봐야 죽음 이후에 대한 평가가 좀 나아지지 않을까. 철학은 ‘맨땅에 헤딩’하는 것이지만 ‘난 자신이 없다’는 고백, 일단 이것이 나의 ‘철학의 유언’이다.
인생을 가치 있게 산 사람들
어떤 사람이 잘 살았는가 못 살았는가는 그가 죽었을 때 더 잘 드러나는 것 같다. 난 작은 시골 마을에서 자랐는데 어느 날 옆 마을 어떤 부잣집 아저씨가 돌아가셨다. 그런데 문상을 다녀온 사람 말이, 문상객이 별로 없더란다. 돌아가신 그 아저씨는 대지주였고 우리 마을 사람 대부분은 그의 땅을 부쳐 먹던 소작농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인심을 잃을 대로 잃은 뒤라 그런 쓸쓸한 장례식을 맞이했을 것이다.
초등학교 교장이었던 아버지가 정년퇴임을 했을 때 아버지의 ‘작은 죽음’을 보았다.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버렸다. 아마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공허함, 쓸쓸함을 모를 것이다. 물론 정년퇴임이란 게 없는 나로서는 죽을 때까지도 아버지의 심정을 모를 것이다. 다만 안타까웠던 것은 왜 실무를 그만 두면 저렇게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날개 없는 천사처럼 무기력해져야 하는가. 권력은 사라졌어도 권위는 남아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교장에서 할아버지로 전락한 아버지는 ‘옛날에 교장이었음’이라는 이름표라도 달고 싶은 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죽을 때까지 존경을 받으면서 주변 사람, 나아가서는 사회 구성원에게 이런저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람,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산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며 존경을 받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잘 살기가 그만큼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처럼 살아야 한다는 의무감을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것이 기독교도라면, 잘 살았던 그 소수의 사람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의무일 것이다.
그렇다면 예를 들어 근대 사회에 들어 인생을 가장 가치 있게 산 사람들은 누구일까. 나는 감히 동학농민군, 빨치산, 그리고 1980년 5월의 광주에서 끝까지 총을 놓지 않았던 사람들을 꼽고 싶다.
연속극이네 뮤지컬이네, 지금 우리 사회는 명성황후 영웅 만들기에 여념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일제의 자객에 의해 도륙당한 그이 뒤에는 일본군의 총칼에 스러져간 수만 동학농민군이 가려져 있지 않은가. 그들이야말로 그 시대의 영웅이다. 진리가 시대적인 것이고 역사적인 것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첨단 화력 앞에 죽창 들고 맞선 그들, 이길 수 없는 전쟁, 그렇지만 꺾을 수 없는 확신, 새 세상을 향한 그들의 열정은 죽음도 두렵지 않게 했다.
해방 이후 남북한의 권력 수립과정에서는 북쪽이 남쪽보다 권력의 정통성을 훨씬 더 많이 갖고 있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퇴로가 차단된 빨치산의 외로운 투쟁 역시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비록 소설이기는 하지만, 난 『태백산맥』의 김범우보다는 염상진과 함께 자폭한 빨치산의 삶이 훨씬 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값지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죽음을 앞두고 두려워하기는커녕 염상진에게 ‘덕분에 사람답게 살다 죽는다’며 고마워했다. 유엔군과 토벌군에게 졌지만 정의가 이긴 자 편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안 빨치산이 비전향 장기수로 가는 길은 너무나 당연한 길이었으리라.
주로 ‘먹물’로 이루어진 지도부가 투항을 결정했을 때, 끝까지 도청을 지켰던 ‘5월의 시민군’은 계엄군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저항한 거 아닐까.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그들의 판단 잣대는 오직 그것뿐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들처럼 살 수 있는가 – 부끄러운 자화상
전두환 씨가 대통령을 할 때 난 학생운동에 몸담았었고 당시에는 교과서적으로 정해진 코스인 노동 현장에도 들어가 봤다. 돌이켜 보면 그때는 목숨을 버려도 아깝지 않을 만큼 열심히 산 것 같다. 산다는 것에도 자신이 있었다. 그때 같이 움직였던 사람들과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지금도 여전히 피를 나눈 형제와도 같은 우정이 있다. 그리고 한때는 그 옛 기억을 자랑스럽게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나 이런 사람이었다’며 그때 일을 주위 사람들한테 은근히 얘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내 과거를 거의 말하지 않는다. 특히 참여정부가 들어서고부터는 입을 닫은 것 같다. 내가 보기에는 운동권이 권력을 잡은 게 아닌데, 주위 사람들은 “운동권이 권력을 잡았지만 별 볼일 없다”고 했다. 참여정부를 이끌어가는 사람들과 똑같은 생각을 가진 무리로 취급 받는 게 싫었다. 노무현 탄핵 반대는 탄핵을 한 국회(의원)에 대한 반발이었지 노무현 살리기는 아니었다. ‘니들이 뭔데 탄핵질이야!’
그런데 내가 입을 닫은 또 다른 이유는 운동권에도 있다. 90년대 초반쯤으로 기억된다. 노동현장을 나와 방황하다가 대학원에 들어가고 한철연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정파적 특성이 강한 어떤 ‘꼴통’ 운동권의 주변인으로 잠깐 활동한 적이 있다. 나의 견해가 자신들의 정파적 입장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즉시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를 들어 나를 퇴출시킨 것까지는 그래도 이해하겠다. 하지만 그 이후 ‘재정이 부족하니 돈을 내라’며 나를 찾아왔던 것은 지금도 이해가 안 된다. 이미 냈던 수십만 원도 돌려달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말이다.
난 상식조차도 없는 그들의 행태를 보면서 ‘이런 사람들이 권력을 잡으면 큰일 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제발 당신 같은 사람들은 권력을 가지면 안 된다며, 만일 나에게 힘이 있다면 아예 운동을 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했을 거라고 말할 정도로 말리고 싶었다. 돌이켜 보면 아나키즘이 왜 주목을 받는지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군사 정부가 끝나고 조금씩 ‘좋은 세상’이 오니 그에 비례해서 ‘자격 없는’ 운동권도 그만큼 늘어갔던 것일까.
하지만 여기까지는 마치 고고한 학처럼, ‘까마귀 노니는 곳에 나는 가지 않았노라’라고 하는 결벽증 섞인 오만함이 배어있다. 거창하게도 동학농민군이네 빨치산이네 5월의 시민군이네 했지만, 정작 나는 그렇게 살 수 있는가. ‘자신 없다’는 것이 내 대답이다.
학생운동 시절, 유인물 뭉치를 가지고 가다가 불심검문에 걸린 적이 있다. 경찰은 내 허리띠를 빼고 바지 뒤쪽을 움켜쥐더니 경찰서로 끌고 갔다. 그런데 우연히 후배가 그 장면을 보는 바람에 연행 사실이 알려졌고 내 동료는 내가 ‘조직’을 발설할 것에 대비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소위 ‘이빨을 맞추러’ 열심히 뛰어다녔다. 우리 과(科)도 아니면서 우리 과 엠티에, 그 먼 곳까지 택시 타고 와서는 ‘조치’를 취할 정도였다. 그런데 재수가 좋게도 나를 조사하던 형사의 형이 우리 아버지가 교장으로 있는 학교의 옆 학교 교장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바람에 나는 ‘훈방’되었다. “니네 아버지 땜에 살았는 줄 알아, 짜샤!”
풀려난 나는 너무나 당연한 조치를 취했던 동료에게 섭섭하다 말했다. 설마 내가 발설을 하겠느냐, 나를 못 믿었던 거냐, 너의 행동은 불필요한 것이었다는 따위의 말들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런 말이 그야말로 오만함의 극치였다는 것이 드러나는 데는 채 1년도 걸리지 않았다. 타 대학 학생들과 연합 거리 시위를 주도하다가 잡혀 조사를 받던 중 ‘견딜 수 있을 만큼’ 맞았을 때, 동료에게 했던 말과 정신은 온데간데없었다. 그 경찰관이 ‘조직을 불라’고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넘어갔을 뿐, 만일 그런 요구를 했더라면 난 오래 버티지 못하고 발설했을 것이다.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길 원한다 했지만 조직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내가 혐오하던 ‘입만 살아있는 사람’에서 나 역시 예외일 수 없다는 생각은 지금까지도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트라우마’로 자리 잡고 있다.
난 고문을 받은 적은 없지만 폭력을 경험했고 그 앞에 무력하게 무너졌다. 그런 내가 죽음과 정면 승부한다고? 어림도 없는 소리다. 내 청춘을 다 바쳤던, 그래서 죽음도 두렵지 않을 것 같았던 그 시절, 막상 닥치고 보니 죽음은커녕 잠깐 동안의 폭력에도 저항하지 못하는 나약한 나를 보았다.
남은 인생은 어떻게
거창하게 역사적인 삶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미래는 지금 우리가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달려 있지 않은가. 내 죽음 이후에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기억할지는 내 삶이 결정할 것이다. 그런데 철학은 맨땅에 헤딩하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헤딩할 자신이 없는 나. 철학은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할 수 없는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하는 것은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안 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자신이 없다는 것. 이제 남은 것은 희망사항뿐이다. 그저 다음과 같은 2인칭 죽음을 꿈꿀 뿐.
장켈레비치(Vladimir Jankelevitch, 1903~1985)는 죽음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먼저 1인칭 죽음은 ‘나의 죽음’으로서 경험할 수 없는 죽음, 수수께끼 같은 죽음이다. 3인칭 죽음은 ‘그의 죽음’으로서 그가 맡았던 기능이나 역할을 곧 다른 사람이 대신한다. 2인칭 죽음은 ‘너의 죽음’으로서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없는 죽음이다. 2인칭 죽음은 어디까지나 타인의 죽음이지만, 한쪽 팔이 잘려나간 듯이 아파하거나 망연자실해버릴 수 있는 죽음이다. 바로 이 2인칭 죽음을 겪을 때 죽음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이고, 슬픔 속에서도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인간의 참모습을 통감할 수 있다.
철학자도 아니고 철학교수라고 하기에도 많이 부족한 나로서는 그저 ‘철학하는 삶’을 희망할 뿐이다. 나는 공자를 잘 모른다. 그런데 우연히 어떤 책에서 공자에 관해 언급한 것을 보니 역시 공자는 철학자라는 생각이 든다. 공자가 지나가고 나자 뒤따르던 제자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단다. “저 사람은 누구인가요?” “공자입니다.” “아,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하는 사람 말이지요.”
사람들이 나의 죽음을 2인칭 죽음으로 받아들인다면 나는 잘 산 것일 게다. 그런데 죽음 이후에는 내 삶이 어떻게 평가되는지 알 도리가 없으니 이제부터라도 죽음을 연습해야겠다. ‘작은 죽음’ 말이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기도 하기에 선택 전에는 언제나 끝맺음이 있기 마련이다. 끝맺음을 잘해나가면 생물학적 죽음 이후의 나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추상표현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는 1958년, 본사 건물 1층 레스토랑에 그림을 그려주는 대가로 3만5천 달러, 현재의 한화 가치로 따지면 약 28억을 주겠다는 씨그램 회사의 청을 거절한다. 이유는 “그렇게 비싼 돈을 주고 밥을 먹는 사람들에게 내 그림을 보여줄 수 없다”는 것. 1970년, “가장 상업적인 것은 가장 예술적인 것이고 가장 예술적인 것은 가장 상업적인 것이다”라고 말하며 예술과 상업성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앤디 워홀 등의 팝아트가 유행하던 시절, 그는 갑작스럽게 자살한다. 그의 회상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우리에겐 잃을 게 없었고 꿈만 있었다. 그때가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
내 젊은 시절은 내 인생의 황금기였고 가장 행복했던 때였다. ‘해야 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괜찮을 것 같았던 때. 그런데 그 시절이 이제는 더 이상 자랑이 아닌 때가 왔다. 그리고 결말이 불확실한 긴 여행을 떠나는 자유인이기에는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 보여 불안하다. 그렇지만 추억에서 벗어나, 꿈을 향한 발걸음을 좀 더 힘차게 내딛으려면 꿈만 있는 지금을 행복한 때로 여겨야 할 것 같다.
유언이란 뭔가 미흡한 것이 있을 때 하는 거 아닌가. 닭 한 마리 빌린 거 갚아달라고 말하며 죽음의 길로 간 소크라테스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지 않았을까. 유언이 필요 없는 죽음, 그게 내가 맞이하고 싶은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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