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려쳐라,죽음을 선호하는 철학자를[철학의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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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려쳐라,죽음을 선호하는 철학자를[철학의 유언]

이정은(연세대외래교수)

 

*이 글은 필자가 노년이 되었다고 가정하여 유언장 형식으로 쓴 것입니다. (편집자)

정신이 자꾸 흐려진다. 몸을 가누기도 힘들다. 빨리 죽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지만, 지금까지 삶을 성찰하는 철학자로 살았으니 조용히 정리하면서 죽음을 기다려보자. 그런데 삶에 대한 정리가 지극히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죽음을 눈앞에 두었으니 부담스러운 것이 당연하다고 하겠지만, 죽음 자체 때문에 이러는 것은 아니다.

젊었을 적부터 일찍이 철학적 삶을 동경했기 때문에, 유언도 철학자의 면모에 걸맞게 하고 싶어서 이러는 것이다. 철학자로서 품격과 사명을 고수하느라 힘들었는데, 유언장을 쓰는 이 마당에도 철학이 나를 힘들게 하는구나. 그래도 내가 철학에서 평생 무엇을 추구했는지, 그것이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 알려야 하지 않겠는가!

이 글을 접하는 후손들에게라도 삶의 현장에서 철학적 끈을 가늠하고 철학적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줄 때, 내 삶이 무가치하지 않았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겠으니 말이다.

나도 여느 철학자처럼 위인들이 추구하는 ‘진리’를 찾으려고 별의별 노력을 다하면서 무척이나 방황했다. 그러다가 불현듯 “나는 왜 진리를 찾는가?”라는 의문에 휩싸였다. 여기에서 생기는 공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철학을 전공하게 된 초발심이 무엇인가로 거슬러가게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내 삶은 고통과 갈등의 연속이었고,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은 유년기의 잠깐 시절이었다. 학교에 가는 것도 즐겁지가 않았기에 고통스런 현실을 헤쳐 나가기 위해 성찰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삶에 대해 구체적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해주리라는 기대에서 철학을 선택하게 되었다.

철학을 배우면서 알게 된 것은 철학자는 진리 찾기에 여념이 없다는 것이다. 나도 진리를 찾게 되면 고통과 갈등이 눈 녹듯이 사라지리라 기대했지만, 진리를 가르쳐주는 철학사는 쉽게 접근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내용이었다. 진리는 어마어마한 것이고, 쉽게 찾아지지 않는 신비로운 것이라는 선입견을 한때는 갖기도 했다.

그러는 와중에 위대한 철학자들의 삶은 진리 체계의 위대함과는 달리 엄청난 박해와 고통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경우가 많았음을 발견하였다. 그들을 위대하게 만든 진리 체계는 고통스런 삶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고, 박해의 고단함은 진리를 찾는 에너지로 반전되었던 것이다. 철학자가 속한 세계의 모습은 철학적 문제의식과 체계를 형성하는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나도 나를 둘러싼 현실에 대한 고민을 철학적 문제의식으로 승화시켜 나가기로 했다. 내가 속한 공동체, 그 속에 나타나는 사회적 정치적 현상들, 이것을 통해 진리와 현실, 진리와 사회, 진리와 정치의 관계를 조명하는 철학의 방향타를 만들어 나갔다.

개인과 사회의 관계, 사회와 철학의 관계, 정치와 철학의 관계에 대한 도움을 받기 위해 들여다보게 된 사상들은 나와 동일한 관심사에서 출발하는데도, 그 관심사를 넘어서서 형이상학, 인식론, 방법론의 문제로 진입하곤 했다. 그 속에서 깨닫게 된 것은 형이상학과 사회 철학의 긴밀한 관계, 방법론과 정치 철학의 긴밀한 관계이다. 그래서 나는 학위논문을 헤겔
논리학으로 쓰게 되었고, 학위를 받은 다음에는 사회 철학, 정치 철학 연구로 손쉽게 궤도 전환을 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사회-정치철학 연구를 해왔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철학자가 철학과 정치의 관계를 고민하기는 쉬워도, 관계를 풀어내기는 지독히 어렵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위대한 철학자들도 분명 자신의 삶에 대한 고민에서 성찰을 시작해도, 결국은 인간에게 부여된 삶의 상황과 조건을 무시하는 체계를 만들거나 그 상황을 떠나려는 경향을 강하게 지니기 때문이다.

가령 플라톤을 보자. 그는 소크라테스 같은 위대한 사람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정의로운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철학자가 정치를 하는 철인왕’ 제도를 고안해낸다. 그렇다면 철학과 정치가, 철학자와 정치가가 일치하는 진리 체계를 만들어야 하는데, 플라톤은 정치를 위해 필요한 철학자의 행보가 정치인의 행보와 다르다는 점, 정치에 필요한 철학적 진리를 파악하기 위해 철인왕은 정치에서 벗어나서 정치로부터 한가한 상태(schole)로 들어가야 한다는 점을 궁극적으로 주장한다.

삶의 구체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삶의 현장에서 벗어나서 다른 세계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동굴에서 벗어나서 동굴 밖으로 나가야 하고, 감각계에서 벗어나서 이데아계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데아계는 감각계에 속해 있는 우리의 현상세계를 벗어나서 사유를 통해 도달하는 곳이며, 이성보다도 더 우위에 있는 정신(nous)의 힘을 필요로 하는 곳이다. 이때 정신의 힘은 아무나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특별한 능력을 지닌 철학자가, 그래서 왕이 될 가능성을 지니는 철학자가 발휘한다. 철인왕은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듯 철인왕을 통해 설명되는 플라톤의 진리 체계는 철학사에서 고유한 사유 전통을 만들어낸다. 달리 말하면 경험적, 정치적 삶의 세계보다는 지적 직관에 의해 도달하는 관조의 세계를 최고로 간주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태도로 곧바로 전이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폴리스 시민으로서 탁월한 덕을 발휘하여 실현되는 정의’와, ‘그 덕도 초월하는 철학자의 관조’를 구분하면서, 시민은 전자의 정치적 삶에서 정의를 실현하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정치적 삶보다는 후자의 관조적 삶이 더 고귀하다고 주장한다.

철학사에서 탁월한 진리 체계를 형성했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로운 국가, 좋은 인간과 좋은 시민이 합일되는 정치학 등을 고안해냈어도, 결국 철학과 정치가 분리되는 이론, 정치는 철학으로부터 소외되고, 삶의 구체적 문맥은 철학적 진리로부터 괴리되는 이론으로 나아가게 된다.

나는 이런 상황을 미처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철학사에 빠져들었고, 진리가 무엇인지, 진리가 내 삶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사회 철학 내지 정치 철학은 형이상학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채 연구를 계속해 나갔다. 삶의 현장은 진리가 존재하지도, 진리가 실현될 수도 없는 공간이 되어버린 줄도 모르고서.

그렇다면 진리는 언제, 어디에서 제대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플라톤은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서 ‘부정의한 감각계에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라거나 ‘진리를 찾기 위해 동굴을 떠나야 한다면, 결국 진리를 찾기 위해 죽어야 한다.’는 것, ‘철학의 진리 찾기는 죽음에 대한 연습, 죽음을 위한 연습’이라는 발상들을 드러낸다.

플라톤의 이런 주장은 후대 철학자들로 하여금 죽음에 대한 선호, 죽음을 향하는 철학자의 사명, 삶보다는 죽음이 더 위대하다는 생각을 암암리에 하게 만들었고, 자신의 삶과 사회-정치 공동체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죽음을 위해 삶과 정치 철학을 유보하고 희생시키라는 식으로 이해하게 만들었다.

사회 철학, 정치 철학을 하겠다고 자처한 나는 정치적 활동 공간에서 도대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사회 철학자, 정치 철학자로서 철학적 삶을 표방하는 나 또한 철학자이기에 정치적 행위공간에서 삶이 아니라 죽음을 선호하는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진리를 찾기 위해 죽어야 한다면, 플라톤처럼 죽음이 대안이라면, 철학자는 살아도 제대로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아직 죽지 않았는데도 이미 죽은 삶이나 마찬가지이다. 유언장을 쓰고 있는 나 또한 죽음을 향하는 삶이고, 이미 죽어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나에게는, 즉 철학자로서 나에게는 유언장이 필요 없다. 그냥 죽으면 되는 것이지, 부질없는 이 세계에 통찰력을 남긴들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저 “후손들이여! 빨리 죽어라!”라고 외치면 그만이다.

그러나 나는 “철학자가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가 철학자의 말을 기꺼이 경청해야 한다”(『미와 숭고에 관한 고찰들』)라고 주장하면서 플라톤을 비판하고, 더 나아가 관조적 삶을 위해 정치적 삶을 폄하하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겨냥하여 정치와 철학의 위계질서를 비판적으로 조명한 칸트를 만나게 된다. 칸트의 주장은 철학적 진리를 이론에서 실천으로 반전시키는 맑스의 유물론, 관념론과 이원론에 대한 맑스의 비판보다도 더한 상상력과 가능성을 나에게 주고 있다.

유물론인가, 관념론인가, 일원론인가 이원론인가라는 싸움은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철학적 진리와 철학적 실천의 문제를 동시에 담아내면서 삶의 현장에서 철학을 녹여내고, 철학과 정치의 관계, 형이상학과 정치 철학의 관계를 다르게 조명하는 방식, 즉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 철학적 소외, 철학에서 정치가 배제되는 이론, 삶보다는 죽음이 더 진리에 가깝다는 이론 때문에 죽음을 선호하는 방식 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정신이 자꾸 몽롱해지는 이 늙은 나이에 와서야 나는 그동안 천착했던 철학적 진리들에 대해 거리를 두고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 거리가 도출해낼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이 시점에, 나의 정신이 혼미해져서 죽음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실수를 위대한 철학자들과 똑같이 범하고 싶지는 않다. 진리를 찾는다는 설렘에 현혹되어 기꺼이 죽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철학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늦기는 했지만, 철학과 정치가 분리되었던 철학사의 전통을 이제 깨달았으니, 철학자들이 선호하는 죽음 때문에 가로막혔던 삶의 역동성을 적극적으로 들여와서, 이 삶을 정치 철학적 차원에서 해석하고, 변화시키고, 풍요롭게 만들기 전에는 결코 죽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아직 죽을 수 없다. 죽음이 나를 후려쳐서 더 이상 나의 이런 강고함을 내버려두지 않을 때까지,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면서 철학적 진리를 정치 철학적 삶과 유기적으로 연결해야겠다.

죽음이 나를 후려쳐서 내가 쓰러진다면, 부디 후손들에게 그 뒤를 당부한다. 나의 사후에도 여전히 죽음을 선호하는 철학자들이 있다면, 그들을 기꺼이 후려쳐라. 삶을 선호하는 철학을 견지하지 못하는 철학자가 있다면, 언제든지 그들을 기꺼이 후려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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