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덕분에 이혼하지 않은 여자[철학의 유언]

Spread the love

철학 덕분에 이혼하지 않은 여자[철학의 유언]

박은미(건국대교수)

 

웃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이다. 나는 정말 철학 덕분에 이혼하지 못했다. 철학이 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철학이 뭐냐. 한 마디로 체계적으로 따지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해 끝까지 따지는 것이다. 제대로 따지면 인식의 편파성이 드러나게 되어 있는 법이라 ‘나만의 옳음’에 빠지지 않게 된다.

싸움을 한 사람들이 싸움의 과정을 설명하다보면 그 설명 자체가 편파적이라며 다시 싸움을 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곤 한다. “이 사람이 사람을 이상하게 만들어버리네!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당신이 ~~~ 하니까 내가 —한 거 아니야? 자기 잘못은 쏙 빼놓고 나만 이상한 사람을 만들어!” 누구나 자기 방식으로 인식한다. 그런데 철학은 보편적 인식을 하자고 나서는 것이다. 그래서 철학이 어렵다.

세상을 좀 살아본 사람들은 질문을 가지게 된다. ‘도대체 상식은 어디에 있는가?’ 내가 보기엔 이게 상식인데 다른 사람은 저게 상식이란다. 나에게 상식인 것이 그에게는 상식이 아니라니 정말 답답할 노릇이다. 그래서 속이 탈대로 탄 사람들은 말한다. ‘다 제 멋대로 사는 거지 뭐. 인생에 정답이 어디 있어?’ 어차피 인생에 정답은 없다. 그런데도 철학은 따지겠단다. 어차피 답 안 나오는 것을 왜 그리 따지려 드는지.

철학자들은 말한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말한다. ‘지가 배를 안 곯아봐서 그렇지, 사흘만 배곯아봐! 그런 소리가 나오나!’ 내가 아는 어떤 철학교수님은 늘 말씀하신다. 철학은 철이 안 나서 철나려고 하는 거라고 말이다. 묘하게 진실이 배어있는 말씀이다.

누구나 자기 방식대로 편파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인간의 숙명적인 한계일진대 이놈의 철학은 주제를 모르고 따지겠단다. 그것도 ‘전체’를 ‘체계적으로’ 따지겠단다. 이 답 안나오는 싸움을 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철학연구자들이다.

나는 철학하는 남자랑 산다. 철학하는 남자와 철학하는 여자가 부부싸움을 하면 어떻게 될지 궁금들 하시지 않은가? 여하간 그 스토리를 다 소개할 수는 없고 철학을 하든 뭘 하든 인간 인식의 한계는 너무나 분명하다는 것이 나의 소회이다.

철학을 하지 않는 사람보다 철학을 하는 사람의 인식의 폭이 조금 더 넓을지는 몰라도 남이 틀리고 내가 옳아 보이는 인간 인식의 한계에 부딪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뭐 좀 안다고 설치는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은 인식하지 못한 채 타인의 잘못을 파악하는 데에만 더 골몰하는 경우가 많다. 즉, 자신의 잘못을 파악하는 데에 보다는 타인의 잘못을 파악하는 데에 훨씬 더 유능하다!

나는 보편, 너는 편파?

지식인에게 환멸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사실 분명하다. 지식인이라 해도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을 일반적인 세상 사람들보다 현격하게 잘 하지는 못한다. 자기 외부의 것에 대해서는 일반인들의 서너배에 해당하는 분석력과 성찰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자기 자신에 대한 분석력과 성찰력은 일반인들의 1.2배 혹은 1.3배 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지식인들의 경우 자신에 대한 성찰력과 타자에 대한 성찰력의 차이가 일반인들보다 훨씬 많이 난다는 것이다. 철학이 아니라 철학 할아버지를 해도 자신에 대한 성찰력을 현격하게 많이 가지기는 힘들다. 그러니 우리 부부의 부부싸움이 어땠을지 짐작이 가지 않는가?

처음엔 남편의 상식과 나의 상식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상당히 놀랐다. 나는 분명히 싸이코와 결혼하지 않았는데 내 앞에 있는 저 사람은 저렇게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수없이 생각했다. 나는 철학을 ‘어떤 의견을 접하든지 그 의견이 타당할 가능성의 근거와 타당하지 않을 가능성의 근거를 균형적으로 고려함으로써 전체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정의한다. 그래서 나는 남편의 생각이 타당할 가능성과 타당하지 않을 가능성을 균형적으로 고려하려고 노력했다.

그랬더니 자꾸만 ’남편이 타당하지 않을 가능성‘에 너무 치우쳐 생각하게 되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타당하고 남편이 타당하지 않을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연상이 이루어지는데 ’내가 타당하지 않고 남편이 타당할 가능성‘은 머리를 쥐어 짜내도 생각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래서 균형을 잡기 위해 ‘내가 타당하지 않고 남편이 타당할 가능성’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완전한 균형은 잡기 어려웠다.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타당하고 남편이 타당하지 않을 가능성’이 연상되는 것이 70%, ‘내가 타당하지 않고 남편이 타당할 가능성’을 쥐어 짜 생각하는 것이 30% 정도나 될까.

그런데 그 파워는 놀라웠다. 점점 남편의 생각과 행동의 패턴이 보이게 된 것이다. 남편의 생각의 패턴에 나는 공감할 수 없었지만 생각의 패턴이 보이기는 했다. 그래서 저런 구조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이러이러하게 말해야 나의 본뜻을 알아듣겠구나 하는 판단이 섰다.

철학은 보편적 인식을 지향하는 것이다. 물론 완전히 보편적인 인식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인식이 보편적인 인식이라는 것을 보증해줄 제 3의 존재자가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철학은 타당할 가능성과 타당하지 않을 가능성을 50:50으로 균형적으로 고려하려고 노력한다. 물론 50:50으로 생각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의 목표는 51:49로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타당할 가능성을 51% 생각하고 상대방이 타당할 가능성을 49%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이 최선이리라!

그리하여 우리 부부를 지탱해준 힘은 철학이다. 철학을 한다는 사람이 남만 비판하고 자기는 비판하지 않으면 웃긴다고 생각해서 스스로에게 창피하지 않으려고 열심히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덕에 이혼하지 않고 지금까지 살고 있다. 그리도 싸우던 5년여의 시간을 넘겨 이제 15년에 육박하고 있으니 이제는 귀찮아서라도 이혼을 못할 판이다.

철학, 편파적 인식을 극복하려는 지속적인 노력

철학은 전체를 체계적으로 따져서 가장 보편적인 인식에 도달하려는 노력이다. 그래서 철학을 하다보면 자신의 인식의 한계,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 있는 가능성을 늘 의식해야 한다는 요구에 봉착하게 된다. 딱딱하게 말해서, 자신의 생각을 상대화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일례를 들어보자. 나는 내가 어떻게 남을 배려했는가는 알기 쉽지만 내가 어떻게 배려받았는가는 모르기 쉽다. 그런 경험들 있지 않은가? 내가 배려해줬는데 상대방은 내가 배려했다는 사실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 내가 생색을 내기 전에는 상대방이 나에 의해 배려받았음을 모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남편이 나에게 말하지 않고 해준 배려는 의식하지 못하고 내가 한 배려만 의식하는 것을 발견하곤 했다. 내가 말하지 않고 배려하는 것이 있듯이 남편도 말하지 않고 배려하는 것이 있을 터이다. 그래서 다음의 생각에 이르렀다.

내가 어떻게 남편을 배려했는가, 그리고 남편은 어떻게 나를 배려하지 않았는가를 기억하느라 세월을 낭비하는 것은 정말 아깝다는 생각! 철학을 한 덕에 인간의 인식의 한계를 잊지 않으려 노력할 수 있었고 그 덕에 서로에 대해 과도한 감정소비를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인간은 누구나 편파적인 인식을 한다. 이러한 인간들이 모여 철학을 한다고 해서 갑자기 보편적 인식을 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 진리가 어디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체계적으로잘 따지기 위해서는 다양한 생각 각각을 두고 타당할 가능성과 타당하지 않을 가능성을 균형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이 작업을 하다보면 A라는 (편파적) 인식은 B라는 (편파적) 인식에 의해 그 편파성이 드러나고 B라는 (편파적) 인식은 C라는 (편파적) 인식에 의해 그 편파성이 드러나며 C라는 인식은 A라는 인식에 의해 그 편파성이 드러나는 식으로 각각의 인식의 편파성이 잘 드러나게 된다.

철학의 힘은 여기에 있다. 지속적으로 끝까지 따지면서 개별적 인식의 편파성을 드러낸다. 그러면서 가장 편파적이지 않은 인식이 무엇인지 찾아간다. 물론 완전히 편파적이지 않은 인식은 세상에 없다. 그러나 가장 보편적인 인식을 찾으려는 노력이 우리를 그나마 덜 편파적이게 만들어준다. 그래서 철학은 누군가의 말대로 ‘다양한 관점들의 공존가능성을 극대화해주는 보편적 틀을 찾아나가는 작업’이 된다.

보편적 틀을 찾아나가려다 보면 ‘넘어서’ 생각해야 한다.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현실을 넘어서 생각해야 하고, 현실을 넘어서서 현실을 바라보아야 한다. ‘넘어서’ 생각하는 것을 상위(메타)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이라고 한다. 조감도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땅위에 있는 건물을 완전히 전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조감도를 만든다. 철학은 세상과 삶에 대한 조감도를 그리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세상과 삶에 대한 조감도를 그리려면 세상과 삶에 너무 밀착되어서는 안 된다. 밀착되면 부분만 보게 되지 전체를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무엇을 볼 때는 그것과 거리를 취해야 그것이 제대로 보이는 법이다. 그리하여 철학 자체가 객관적으로 보편적 틀을 찾아나가려다 보니 철학이 자꾸 세상과 그리고 삶과 멀어지는 일이 벌어진다.

삶 전체를 보려니 삶과 거리를 두어야 하는데 거리를 두다 보니 삶과 유리되기 쉬워진다. 이것이 지금 철학의 현주소다. 삶에 거리를 취하려 노력하다 보면 삶과 유리되기 쉽고 삶과 유리되지 않으려 하다보면 삶에 거리를 취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남은 볼 수 있으나 나는 볼 수 없는 게 인간의 운명일진대 삶 안에서 삶과 거리를 취해야 하는 철학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은 여러모로 철학을 설명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속담이다. 우물 안 개구리는 자신이 우물 안에 있을 때는 우물 안에 들어있는지를 모른다. 우물 밖으로 나와 봐야만 자신이 그동안 우물 안에 있었음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인간의 인식은 항상 뒷북치는 형국에 있다. 사태가 벌어지고 있을 때는 사태에 대한 인식을 할 수 없게 된다. 사태를 ‘넘어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사태가 벌어지고 나서야 그것이 어떠어떠한 사태였는지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우물 밖으로 나오는 것, 즉 상위차원으로 올라가는 것 그리고 사태가 벌어진 시간이 지나는 것, 이 두 가지가 이 보편적 인식의 기초적 조건이 된다.

이 시대에 철학을 한다는 것은 싸운다는 것이다.

현실을 넘어서 생각하기 위해서는 현실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현실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해서는 현실을 넘어서서 생각할 수 없다.

철학은 모든 것에 대해 체계적으로 따져묻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 대중들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도 그것을 좋아하는 것이 타당한가 타당하지 않은가, 그것을 좋아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바람직하지 않은가를 따진다. 그러느라 현실에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갖추기 어려워진다. 현실을 주어진 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모저모 따지기만 하니 생기는 것은 없고 머리만 아프게 된다. 그래서 도무지 현실에서 편하게 살 수가 없다. 현실에 일어나는 일 하나 하나 따지느라 바쁘니 말이다.

그리하여 철학을 한다는 것은 현실과 싸운다는 의미가 된다. 현실의 문제에 대해 체계적으로 따진다는 것은 바로 현실을 비판한다는 것이다. 현실을 비판하는 것은 괴롭고 힘든 일이다. 철학자 역시 그 현실에 발을 딛고 서서 살아야 하는 한 명의 자연인이기 때문이다.

학교의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면서도 아이를 학교에 보내야 하고 사회가 어떻게 잘못 되었는지를 알면서도 그 사회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나 누군가는 문제를 얘기해야 현실의 문제가 조금씩이나마 극복되어간다는 것을 철학자들은 믿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열심히 발언해야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살아간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말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절망을 머리에 잔뜩 이고서 말이다.

인생은 어느 하나의 요소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요즘에는 모든 것이 돈으로 환원되고 있지만 말이다. 이 시대에 철학자들은 ‘돈 없이 살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돈만으로도 살 수 없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 ‘살아가는 과정이 곧 죽어가는 과정’이라는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한다.

철학자들은 보이는 것 뒤에 이면이 있음을 자꾸 드러내려 한다. 그래서 보이는 면과 이면을 모두 전체적으로 고려할 것을 요구한다. 철학자들은 이런 진실들을 통해 사람들이 각자의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기를 바란다.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을 사상이라는 그물로 엮는 철학자는 행복하다.” 이 말은 헤르만 헤세의 말인데 내가 철학을 선택한 이유를 잘 표현해준다. 나는 내 인생에서 이러한 행복을 얻고 싶은 것 같다. 내가 아는 지인은 철학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나는 철학도 사랑이라고 믿는다.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면 굳이 그렇게 머리 아픈 철학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자기만족을 위해서 하는 철학은 사람에게 울림을 주지 않는다. 철학이 현실과 유리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전적으로 철학자의 잘못이다. 현실과 유리되는 철학은 철학자가 자기만족을 위한 철학을 했다는 혐의를 가지게 한다.

그리하여 나는 삶에 닿아있는 철학을 하고 싶다. 이혼도 막아주고 타인을 보다 더 잘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그런 철학을 하고 싶다. 그리하여…나 자신이 한계에 갇혀 있다는 것을 늘 의식하면서 그 한계를 끊임없이 넘으려 노력하여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덜 편파적인 인식에 도달하고 싶다.

 

0 replies

Leave a Reply

Want to join the discussion?
Feel free to contribute!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