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히만의『침묵』[철학적 인간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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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히만의 영화 침묵은 그의 ‘실내악적 영화’의 간결성이 형식적으로 처음 완성된 영화라고 평가된다. 이 영화에서 소년 요한과 그의 어머니 안나 그리고 이모 에스더는 함께 외국 여행에서 고향 스웨덴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새벽에 기차 안에서 기침 발작을 일으킨 에스더 때문에 이들은 언어가 통하지 않는 외국의 어느 낯선 도시 티모카의 한 호텔에서 잠시 머무르게 된다. 영화는 기차 안에 발작이 일어나는 새벽에서부터 그 다음날 오후 2시 다시 기차를 타고 떠나기까지 극히 제한된 시간을 다룬다.

먼저 간단히 줄거리를 요약해 보자. 우선 호텔에 들어가 요한과 안나가 간단히 낮잠을 자는 사이, 에스더는 외로움 때문에 술을 먹고 마스터베이션을 한 후 잠이 든다. 곧 이어 낮잠에서 깬 소년은 미로 같은 호텔을 돌아다니면서 호텔 관리인인 노인과 다섯 난쟁이들을 만난다. 그 사이 안나가 깨어나 욕망의 불을 켜고 도시 여행을 떠난다. 안나는 레스토랑에 들러 웨이터를 만나고, 이어 극장에서 난쟁이 극단의 공연과 객석에서 일어나는 남녀의 실제 정사를 엿본다.

그 사이 소년은 돌아와 어머니가 없자 에스더와 식사를 한다. 식사를 마칠 무렵 안나가 돌아온다. 안나의 더렵혀진 옷을 보고 에스더가 안나를 경멸하자, 안나는 도발적으로 다시 방을 나가, 약속한 웨이터와 함께 호텔의 이웃 객실에 들어간다. 그때 안나와 에스더의 싸움 때문에 방 밖으로 쫓겨나 있던 요한은 안나가 웨이터와 함께 객실에 들어가는 것을 본다. 충격에 빠진 요한은 에스더에게 이를 말하고, 에스더는 안나가 정사를 벌리는 방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둘 사이의 감추어왔던 대립이 마침내 폭발한다.

안나가 다시 한 번 더욱 동물적으로 웨이터와 섹스하는 사이 방 밖에서 이 소리를 지켜 듣고 있던 에스더는 마침내 그 자리에서 쓰러진다. 아침에 안나는 웨이터를 남겨두고 빠져나오면서 문밖에 쓰러진 에스더를 발견한다. 안나는 결국 병든 에스더를 호텔 방에 내버려 두고, 요한과 기차를 타고 다시 떠난다.

이 영화는 플롯의 많은 부분을 생략했다. 요한의 아버지는 대화중에 간단히 그 생존만 언급될 뿐 함께 사는 지 아니면 따로 사는 지 명백하지 않다. 에스더는 결혼했는지, 자매의 죽은 아버지는 언제 죽었는지, 그리고 이 두 사람이 어디로 왜 여행 갔는지, 에스더의 병이 어떤 것인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또한 안나와 에스더 사이에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토록 극단적인 갈등을 보이는지, 그저 모든 것이 모호할 뿐이다. 이 영화는 마치 스케치로 대강 윤곽만 그려진 풍경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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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는 영화를 통해 새로운 사유에 이르려고 했다. 그가 주목했던 영화들은 현대 영화 곧 60년대 뉴웨이브 영화이다. 그는 그런 영화들의 특징은 주인공들이 더 이상 행동하지 못하고, 다만 응시할 뿐이라는 데 있다고 한다. 그것은 주인공들이 가공할 만한 현실에 직면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곤경에 처했기 때문이다. 이런 곤경 앞에서 외면적으로 얼어붙은 주인공들은 내면에 있어서 생성의 길에 들어선다. 그들은 습관적 기억이 지배하는 현재라는 시간 평면을 떠나, 무의식적 기억이 잠재된 과거의 시간 평면 속으로 들어간다. 현재의 지각과 과거의 기억은 이제 쌍을 이루고 있는 이미지이다. 여기서 양자는 서로 구분되면서도 어느 것이 실제이고 어느 것이 가상(잠재성)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그는 이런 이미지를 크리스털 이미지라 명명했다. 그는 이 크리스탈 이미지가 곧 직접적인 시간(곧 생성)의 이미지라 한다.

베르히만의 영화 ?침묵? 역시 들뢰즈의 이런 시간 이미지를 보여준다. 우선 이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그들이 머물던 도시 티모카의 삶과 단절되어 있지만, 이 도시의 삶의 환경은 주인공들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온다. 특히 이런 위협은 이제 막 의식을 갖고 세상으로 들어가려는 소년에게 더욱 강한 힘으로 다가온다.

첫 장면에서 기차 안에서 새벽에 깨어난 소년은 창문 밖으로 모든 것을 검게 불태우듯이 떠오르는 흰 태양을 본다. 우연히 엿본 이웃 객실에 승무원의 얼굴을 경악에 의해 짓이겨져 있다. 소년이 창문 밖을 보자 열차에 실려 포신을 세운 탱크들이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줄지어서 실려 간다.

 

이런 위협적인 환경 속에서 주인공들은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다. 그들의 행동은 허공에 걸려 있다. 그것은 마치 에스더가 병에 걸려 호텔 방에 머무르게 된 것과 유사하다. 안나는 이런 환경 속으로 뛰어들어 보지만, 도시의 혼잡 속에서 무관심하면서도 적대적인 사람들에 부딪힐 뿐이다.

그것은 바로 들뢰즈의 말한 시청각적 상황이다. 여기서 영화 제목 ‘침묵’이 암시하듯이 이 영화에서 대화는 극히 억제되어 있고, 거의 대부분의 대화를 채우는 안나와 에스더의 갈등도 극히 암시적으로만 말해질 뿐이다. 반면 이 영화에서 풍부하고 다양한 이미지들이 출현한다.

베르히만은 이 영화에서 풍부한 시각적 이미지들은 말할 것도 없이 다양한 감각들을 실험한다. 영화에서의 침묵은 다양한 사운드에 의해 더욱 강조된다. 기차 안에서의 장면 내내 마치 열차의 쇠바퀴가 철로에 스치면서 내는 마찰음 소리가 이어진다. 처음 호텔 안에서 요한이 창밖을 내려다보는 장면에서 도시의 무관심을 강조하듯 신문팔이의 외침이 강조된다.*** 영화는 안나가 호텔방에서 웨이터와 더불어 정사하기 직전 요한이 밖에 엿듣고 있음을 암시하기 위해 팔에 찬 팔찌들의 찰랑거리는 소리를 클로즈업한다. 또한 이튿날 에스더는 안나와 요한이 점심 먹으로 나간 사이 마치 죽음이 다가오듯이 시계가 똑딱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이 영화에서 더욱 충격적인 것은 바로 촉각적이거나 후각적 이미지들이다. 낮잠을 자기 전 목욕한 이후 안나는 요한의 몸에 스킨을 발라주는데, 요한이 그 냄새를 맡는 동작을 통해 후각적 이미지가 강조된다. 이어서 안나가 웨이터와 함께 호텔 객실 안으로 들어가고 에스더는 잠들어 있을 때, 요한은 발바닥으로 방바닥이 떠는소리를 감지한다. 이어서 물 컵들이 선반에서 부딪히면서 내는 소리를 들으며, 요한이 창밖으로 다가가 보자, 탱크들이 다가온다. 이런 이미지는 마지막 장면에서도 이어진다. 에스더를 버려두고 기차를 타자, 비가 온다. 이때 안나는 창문을 열어 온몸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그대로 맞는다.

이런 풍요한 시각적, 청각적, 촉각 후각적 이미지들 외에도 침묵에 나오는 이미지들은 독특한 특징을 지닌다. 우선 들뢰즈가 말하는 불연속적인 파편화된 이미지가 이 영화에서 자주 발견된다.

그런 이미지의 파편성은 요한이 어머니의 발을 보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요한이 호텔 방안의 바닥에 앉아 방안에서 분주하게 돌아다니는(실제로는 아무 것도 하는 일이 없는) 어머니의 발을 응시하고 있자, 어머니가 ‘왜’라고 묻는다. 그러자 요한은 이렇게 대답한다.

“발이 엄마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게 하고 있어요.”

요한은 사물을 개념적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사물의 세부를 지각하면서 각각의 지각은 파편화되어 독자적으로 살아있다. 요한의 이런 지각적 특징은 푸르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책에서 제시했던 지각적 특징을 연상시킨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애인인 알베르틴이 친구들과 함께 걸어오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파편화된 지각들의 몽타주를 드러내 보인다.

이 영화의 이미지들 가운데 압권은 바로 가상과 현실의 착종이라고 하겠다. 안나가 레스토랑을 나가서 극장으로 갔을 때 무대 위에는 난쟁이 극단의 공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동시에 객석의 뒷자리에서 남녀가 실제 정사를 벌린다. 두 가지 이미지들은 내용적으로 서로 연관된다. 난쟁이들이 벌리는 이미지는 마치 지네와 같은 모습으로, 실제 일어나는 남녀 간의 정사의 모습과 닮았다. 베르히만은 두 장면을 시각적으로 유사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무대 공연은 실제 정사에 대한 논평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것은 객관적인 느낌이 든다. 거꾸로 실제 정사는 마치 포르노 영화를 찍듯이 찍혀져 있어서 연극성이 강조된다. 이런 이미지들 속에서 실제와 환상, 현실과 무대가 서로 교차되는 듯이 보인다.

 

 

영화 침묵에 나오는 가상과 실제의 착종은 들뢰즈가 말한 시간의 크리스털 이미지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들뢰즈의 크리스털 이미지는 이 영화에서 안나와 에스더를 통해서 드러난다. 안나와 에스더는 서로 대립하지만, 구분되지 않는 이미지들이다. 그것은 안나와 에스더의 갈등 장면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3

이 영화에서 호텔에 머무르던 소년의 어머니 안나와 이모 에스더의 내면적 갈등이 폭발한다. 마치 전쟁 중인 듯 거리 한 가운데로 탱크가 굴러 오기도 하는 위협적인 현실, 결과적으로 호텔 방안에 갇혀서 벗어날 수 없는 중압감, 더구나 거의 죽어가고 있는 에스더의 고통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둘 사이의 갈등을 악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둘 사이의 갈등은 근본적으로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욕망 구조에 원인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안나와 에스더의 욕망 구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호텔에 들어서 목욕 장면에서 드러난다. 안나가 옷을 벗고 탕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베르히만은 침대에 누워있는 에스더의 시선에서 포착한다. 그것은 에스더가 안나를 엿보고 있는 관음증의 장면이다. 거꾸로 이 장면은 안나가 에스더의 시선에 자신의 벌거벗은 육체를 일부로 노출했다고도 볼 수 있다. 안나의 욕망 역시 에스더에게로 향해 있다. 안나와 에스더 사이의 욕망은 동성애적인 욕망구조와 유사하다.

 

두 사람은 이런 감추어진 욕망을 지니면서도 서로 대립한다. 이런 대립은 이 욕망이 금지된 것이고 그래서 자기의 상대방에 대한 금지된 욕망은 감추려 하는 데서 발생한다. 무의식적 욕망은 자연히 누설되므로, 이를 감추려는 억압은 강화된다.

각자는 타인을 오해한다. 둘 사이에 존재하는 서로에 대한 근원적 욕망은 각자로부터 그 스스로가 의식하지 못한 채 몸을 통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그런데 각자는 이렇게 타인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증상을 자기 자신의 욕망 구조에 의해 즉 자신의 의식을 통해 재해석한다. 그 결과 서로는 서로를 오해한다.

먼저 에스더는 자기 스스로 아버지의 금기를 받아들인다. 에스더의 욕망은 신경증적인 증상을 통해 발산된다. 그 점은 에스더의 성적 욕망에 대한 혐오감을 통해 잘 드러난다.

“정액 냄새가 역겹습니다…..배란하게 되면 생선 썩는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찌르죠.”

이런 에스더는 안나의 욕망이 사실은 자신에 대한 비밀스러운 욕망의 표현임을 알지 못한다. 에스더는 안나에게도 자신과 같은 도덕적 금기를 부여하려 한다. 그러나 안나는 이런 금기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래서 에스더는 안나가 도덕적 금기를 지킬 정신적 능력이 없는 육체적 욕망을 추구하는 동물이라고 해석한다. 에스더는 안나를 경멸의 대상으로 삼는다.

더구나 에스더는 자신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가는 욕망이 안나에 대한 근원적 욕망임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에스더는 자신의 욕망을 안나에게 도덕적 금기 부과함으로써 충족하려 한다. 그런데 에스더는 자기의 욕망이 안나에게는 육체적 욕망으로 이해된다는 것으로 짐작한다. 그러므로 에스더는 안나로부터 굴욕감을 느낀다. 에스더는 자신은 도덕적 금기를 부과하려는데 안나는 그것을 육체적 욕망으로 오해한다고 생각하여 이 차이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

이런 에스더의 오인은 마찬가지로 안나에게도 일어난다. 안나는 자신의 근원적 욕망을 육체적 욕망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어떤 정신적 관계도 배제한다. 안나의 욕망은 도착적인 혹은 나르시시즘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웨이터와 성관계를 맺으면서 안나는 이렇게 말한다.

“다행이야,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서 참 다행이야”

안나는 에스더에게서 흘러나오는 욕망이 사실은 자기를 향한 근원적 욕망임을 알지 못한다. 안나는 에스더의 욕망을 정신적 우월감 또는 지배욕으로 해석한다. 이런 해석은 안나가 물질-정신이라는 개념들로 에스더를 보기 때문이다.

더구나 안나는 자기의 욕망이 사실은 에스더에 대한 비밀스러운 욕망의 표현임을 모른다. 안나는 자신의 욕망을 에스더에게 감추기 위해 그것이 (모르는 남자에 대한) 육체적인 욕망인 것처럼 보이도록 위장한다. 그러면서 안나는 이런 육체적 욕망을 에스더가 단순한 동물적 욕망으로만 해석하는 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 그 결과 에스더의 도덕적 금기를 부과하는 태도에 부딪히면서 반발감을 느낀다. 안나는 자신의 위장을 에스더가 간파해 주지 못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것이다.

안나와 에스더 사이의 서로 간의 근원적 욕망과 동시에 서로 간의 오인으로부터 안나와 에스더 사이의 갈등은 더욱 더 악화된다. 베르히만이 그려낸 안나와 에스더의 대결은 말하자면 ‘지상에서의 지옥’의 모습이다. 이제 영화장면을 통해서 에스더가 느끼는 굴욕감과 안나가 느끼는 증오감을 확인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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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대립은 안나가 낮잠을 잔 이후 나가려고 할 때부터 발생한다. 에스더가 기다리라고 하자, 안나는 이에 대해 ‘왜’라고 묻는데, 이 ‘왜’라는 반문이 에스더의 감추어진 비밀한 욕망을 안나가 알고 있다는 것을 폭로한다. 그래서 에스더는 곧 이어 자기 말을 취소하면서 자기의 욕망을 감추려 하지만 안나는 그냥 나가버린다. 이때 에스더는 자기의 욕망이 안나에게 육체적 욕망으로 오인되었다는 생각 때문에 굴욕감을 느낀다.

영화에서 두 사람의 대결은 안나가 극장에서 돌아왔을 때 더욱 심화된다. 에스더는 안나의 방으로 안나를 따라와서 안나가 벗어놓은 원피스를 주워 보면서 엉덩이 부분이 더럽혀진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경멸조의 미소를 짓고는 돌아가서 자기 방에서 무심한 듯 타자를 친다. 에스더는 안나의 욕망을 오인하고 단순히 육체적 욕망으로만 파악한 것이다.

그런데 안나는 에스더의 이런 태도를 자신에 대한 근원적 욕망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에스더의 정신적 우월감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옷을 갈아입자, 안나는 에스더의 등 뒤로 다가와서 앞으로 자기를 ‘감시’하지 말라고 한다. 이런 ‘감시’라는 표현 속에 에스더가 부과하려는 도덕적 금기에 대한 증오감이 들어 있다. 안나는 앞으로 더욱 더 도발적으로 육체적 욕망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저녁시간에 잠시 바흐의 음악을 통해 두 사람 사이에 친근감이 되살아나지만, 안나가 웨이터를 만나기 위해 떠나려 하자, 둘 사이의 대립은 더욱 악화된다. 두 사람은 요한을 잠시 밖으로 내쫒고 다툰다.

에스더는 안나에 대해 캐묻고 싶은 욕망을 감출 수 없다. 그 욕망은 안나의 육체적 욕망을 확인하고 그것을 경멸함으로써 자신의 근원적 욕망을 채우려는 태도이다. 안나는 자신이 에스더가 세운 도덕적 금기를 깨뜨린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에스더의 지배 밖에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 한다. 그래서 자신이 극장에서 본 남녀 정사의 모습을 전해주고, 이어서 바의 웨이터와 정사를 가졌다고 고백한다.

이어서 안나는 웨이터와 호텔 객실에서 정사를 나누면서도 계속 에스더를 의식하고 있다. 성관계 중 안나는 독백을 통해 에스더가 자기를 지배해 왔음을 비난한다. 이런 둘 사이에 결정적인 대립은 요한이 알려준 대로 안나가 웨이터와 함께 정사를 나누는 방으로 에스더가 찾아갔을 때 벌어진다.

“언니는 항상 자신의 원칙만 내세우며 살아 왔잖아.”

“언니에게 주요한 것은 자존심이야. 언니는 우월감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지. 모든 것에 대해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살잖아.”

“언니는 항상 자신을 증오하듯이 나를 미워했던 거야”

원칙, 우월감, 증오 이것은 안나가 이해하는 에스더의 모습이다. 안나는 이런 에스더를 무너뜨리려 한다. 반면 에스더는 안나를 동물적 존재로 이해한다. 그러면서 이런 안나를 구원하려 한다. ‘사랑’이란 그런 우월감의 표현이다.

“나는 너를 사랑해”

이런 대화 속에서 두 사람의 내면적 갈등은 폭발한다. 이 영화에서 ‘침묵’은 바로 안나와 에스더 사이의 소통불능을 말한다. 이런 소통불능은 두 사람이 서로 자신의 시각으로 상대방을 오인함으로써 일어난다. 사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근원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이 근원적 욕망의 관계에서 서로의 위치는 다르다(안나는 나르시시즘적인 욕망구조를, 에스더는 신경증적인 욕망구조를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는 타인을 자신과 상상적으로 동일시하여 자신의 방식대로 타인을 해석하면서 이런 오인이 일어난다. 이런 오인이 거꾸로 서로의 적대감을 키우게 한다.

5

두 사람은 갇혀 있다. 그것이 베르히만이 이 영화 침묵에서 보여주는 침묵의 세계이다. 그러나 베르히만은 이런 ‘지상에서의 지옥’으로부터 해방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미 행동을 통해서 그들은 서로의 대립을 벗어날 가능성을 보여준다. 에스더는 안나가 웨이터와 정사를 벌리는 호텔 문 앞에 있다가 끝내 그 앞에서 쓰러진다. 그것은 에스더의 간절한 욕망을 암시한다. 그것은 안나도 마찬가지이다. 안나는 웨이터와 성관계를 가지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죄책감을 느낀다. 성관계를 갖는 안나의 표정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져 있다. 안나와 에스더의 이런 행동들은 그들의 해방을 암시하지만, 그들은 아직도 그자신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안나와 에스더의 욕망 구조가 고정되어 있어서 두 사람은 어떤 벗어날 수 없는 감옥 속에 영원히 갇혀 있다는 느낌을 준다. 베르히만은 지옥을 벗어날 가능성을 오히려 소년 요한을 통해서 보여주려는 것으로 생각된다. 요한의 경우 그의 욕망 구조는 영화 속에서 어떤 전환을 겪게 된다. 이 전환이 곧 들뢰즈가 말한 시간의 생성과 연관된다.

낮잠 자기 전 목욕 장면에서 요한이 어머니 안나의 등을 밀다가, 어머니 등에 얼굴을 갖다 대는 장면은 요한이 아직 어머니로부터 분리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소년 요한은 낮잠을 잔 후 장난감 권총을 허리춤에 꽂고 호텔의 내부로 모험을 떠난다. 소년의 모험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세 가지이다. 이 모두는 소년의 성적 욕망과 관련되면서, 소년이 외디푸스적 국면을 지나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먼저 소년은 복도에 붙어 있는 그림에 부딪힌다. 세 번이나 반복해서 지나가면서 이 그림을 본다. 이 그림의 내용은 판 신이 요정을 붙잡는 것이다. 벌거벗은 요정의 모습은 요한에게 어머니를 향한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어서 소년은 난쟁이들이 머무르는 객실로 들어간다. 이 난쟁이들은 안나가 들렀던 극장에서 공연하던 그 난쟁이들이다. 이들은 소년에게 여자 옷을 입히는데, 이는 동성애를 암시한다. 이 동성애는 정신분석학적으로 근친상간적 욕망의 합리화의 한 형태이다. 소년은 난쟁이들과 함께 놀다가 밖으로 나와서 호텔 복도에 오줌을 누는데, 그것은 성적 이미지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년은 호텔관리인을 만난다. 호텔관리인은 소년에게 자기 부모의 죽은 모습을 보여준다. 동시에 그는 양상추에 싼 소시지를 베어 먹는 시늉을 낸다. 이것은 명백히 거세 위협을 암시하는 장면이라고 하겠다.

결국 호텔 안에서 소년의 모험은 외디푸스적 국면을 거쳐 가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겠다. 이런 외디푸스적 국면이 지나간 다음 소년은 에스더로부터 언어를 배우게 된다. 이 언어는 소년에게는 상상계를 벗어나 상징계의 질서 속으로 들어왔음을 알리는 것이기도 하다.

소년은 상징계로 들어오면서 어머니로부터의 분리를 경험하게 된다. 처음 기차 안에서 요한이 어머니 바로 옆에 앉았지만 떠나는 기차 안에서 소년은 어머니를 마주 대해 앉아있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6

이 영화는 두 가지 내러티브로 직조된다. 그 하나는 안나와 에스더의 동성애적인 갈등이며, 베르히만은 이것을 닫힌 세계의 상징으로 삼았다. 그 세계가 침묵의 세계 곧 증오감과 굴욕감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그것은 ‘지상에 있는 지옥’의 풍경이다

또 하나는 소통이 가능한 세계이다. 이 영화에서 소통은 소년 요한의 외디푸스적 성장을 통해 제시된다. 베르히만이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요한이 상상계(나르시시즘)에서 상징계(신경증)로 진입했다는 것이 아니다. 주요한 것은 욕망의 구조적 전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외디푸스적 성장은 이런 전환의 한 가지 방식만을 보여줄 뿐이다. 외디푸스적 전환이 존재한다면, 거꾸로 신경증에서 나르시시즘으로 전환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렇게 욕망의 구조적 전환이 가능하다면, 이런 전환을 통해 인간들 사이의 소통도 가능하지 않을까? ‘지상에서의 지옥’이 서로 다른 욕망 구조를 지닌 사람들 사이의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욕망구조의 전환을 통해 타인을 이해할 가능성이 열리지 않을까? 그런 이해가 가능하다면 이제 지상에서 더 이상 지배와 증오와 같은 현상들은 사라지지 않을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타나는 언어의 세계는 단순히 상징계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언어는 곧 번역을 의미한다. 하나의 언어구조에서 다른 언어구조로의 번역이 가능하다면, 이것이 곧 서로 닫힌 언어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방식이 아닐까?

닫힌 세계에서 안나와 에스더는 서로 마주보면서도 동일한 거울영상이다. 그런 점에서 들뢰즈가 말한 크리스털 이미지에 속한다. 열린 세계에서 요한은 욕망의 구조적인 전환에 직면한다. 이런 구조적 전환이 바로 들뢰즈가 말한 시간의 생성이다. 요한은 시간 이미지이다. 그런데 크리스털 이미지와 시간 이미지는 서로의 이면이다. 안나와 에스더의 갈등은 요한의 생성을 축성한다. 이 영화에서 에스더가 끌어 모은 번역이 요한에게 전달된다는 것은 이런 시간이 지옥의 풍경에서 생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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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본에는 신문팔이의 외침에 대해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이 소리들은 억압적인 침묵을 깨트리는 유일한 소리이었다.”

이병창(동아대,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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