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용 성형, 외모지상주의? 자기 배려?[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미용 성형, 외모지상주의? 자기 배려?[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김세서리아(성신여대 연구교수)
현대 사회에서 몸은 문화를 전달하는 하나의 매체로 활용된다. 먹는 것, 입는 것, 사회적 의사소통 장치로서의 제스처, 보디랭귀지를 표현하는 것 등의 일상 하나하나가 모두 우리의 몸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신체 튜닝’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미용성형은 외모지상주의의 산물”이라는 여성주의 비판은 아직도 유효한 것일까?
압구정동에 가본 일이 있는가? “성형은 압구정으로!”이라는 광고 문구가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늘어선 성형외과들은 이 시대 성형에 대한 우리의 행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쌍꺼풀 수술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이슈가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불과 십여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분위기가 대세였던 것 같다. 그 시절, 우리 모두는 성형은 자연성에 위배되는 인위성이고 비정상성이라고 그래서 어느 정도 부정적으로 이해되었다. 때문에 혹 성형을 하더라도 드러내놓고 그것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요즘은 어떤가? 보톡스, 턱 깎는 수술, 눈 트임 수술, 코 높이기, 가슴 성형 등의 단어가 그리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비만 치료, 피부 관리, 날씬한 몸, 다이어트, 거식증, 폭식증 등의 단어 역시도 익숙하며, 이들은 오히려 현대 문화를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개념인 것처럼 이해된다. 얼굴을, 몸을 고치는 데 얼마가 들었다는 이야기부터 앞으로 어디를 어떻게 더 고치고 싶다는 욕망을 드러내는 것조차도 흉이 되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 “내 애인이 성형을 한다면 혹은 하였다면, 내 기분이 어떠한가?”는 질문이 심심치 않게 T.V. 버라이어티 쇼에 등장하였지만, 이제 이런 질문들은 식상하다. 성형을 하는 것은 이미 당연한 것으로 전제되고,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로 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몸은 이제 더 이상 주어진 대로 그저 보존해야 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기술을 이용하여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방 흡입술을 받다가 목숨을 잃었다는 여대생의 이야기, 쌍꺼풀 수술 이후 부작용으로 우울증에 빠져 자살을 했다는 어느 여자 승무원의 이야기도 심각한 수준에서 논의되지 않고 그저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는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된다.
자기 배려로서의 미용 성형
한 두 해 전, 몸짱 열풍을 일으킨 아줌마가 있었다. 주인공은 결혼 10년 차이며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삼십대 후반의 여성이다. 그 나이 대에 유지하기 어려운 신체적 조건인 162센티의 키에 50킬로그램의 몸무게, 게다가 탄탄한 근육을 지닌 몸매는 그 여성을 ‘봄날 아줌마’‘몸짱 아줌마’로 호칭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중년에도 20대의 몸매를 유지할 수 있다는 의미로 지어졌다는 ‘봄날 아줌마’의 호칭은 한 때 전국을 강타한 화제의 이름으로 떠올랐다.
잘 관리된 몸짱 아줌마의 몸매는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과 감탄의 대상이 되었고, 한국 사회에 몸매 관리 열풍을 일으키며 지방 흡입 수술, 유방 확대 수술 같은 몸매 관리 열풍을 부추기는 한 요인이 되었다. 아니, 그보다 더 나아가서 자기 관리를 잘한 주체적인 여성의 전형으로도 이해되었다. 젊음을 유지하거나 회복함으로써 단지 노화된 얼굴에 대한 거부 차원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재기획하는 주체로 해석되는 것이다.
이처럼 얼굴 가꾸기, 외모 만들기 등이 하나의 트랜드가 되어 버린 지금, 성형을 단지 아름다운 외모를 가꾸기 위한 욕망의 허구성을 비판하는 차원에서 논의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제 미용 성형의 문제는 단지 외모가 아니라 자기 정체성과 관련하여 이해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꽤나 설득력 있게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주장의 사람들은 성형을 여성들이 자아와 맺는 관계성과 관련된 실천이라는 것에 입각한다. 미용 성형을 예뻐지기 위함으로만 이해하면서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현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라는 비판이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실제로 성형을 하는 여성들의 삶과 몸의 서사에 대해서는 적절하게 거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성형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고,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기쁨과 설레임을 맛볼 수 있다고 말한다. 거기에는 단지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내 몸을 혹사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날 위해 무언가를 투자하는 것이며 나만을 위해 계획하고 돈을 쓰는 것이라는 주체적 의식이 담겨 있다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미용 성형을 자기 주체성을 드러내는 하나의 방편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미용 성형을 하는 여성들이 구사해내는 다양한 서사에 주목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즉 이들은 몸을 자신이 배려해야 하는 일차적인 대상으로 이해하는 소비문화의 담론 안에서 성형을 통해서 자기를 사랑하며 주체적으로 인식할 줄 아는 여성들이며, 이들이야말로 당당한 자기 배려를 하는 여성이라는 것이다.
신체 변형 행위 자체를 무조건 혐오하던 전통적 시선은 점차 사라지고 미용 성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담론이 보편화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속에서 성형을 하는 여성들의 선택과 결정을 이해하고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더 나은 모습으로 재현하기 위해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구성하는 하나의 새로운 긍정적인 담론 구성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순응의 몸짓인 미용성형
미용 성형이 그것을 선택하는 자아에게 자신감과 주체성을 확보하는 계기가 된다고 보고 미용 성형을 선택하는 여성들의 구체적인 경험과 서사에 주목해보는 것은 미용 성형에 대한 또 다른 하나의 통찰 지점을 준다. 하지만 이 같은 입장은 몸을 주체 스스로가 온전히 자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논쟁적이다. 미용 성형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제시하는 이유와 수술 선택이 과연 전적으로 개인 내면에서 나오는 것인지, 미용성형이 진정한 주체성의 발현인지 등의 문제는 좀 더 꼼꼼히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다.
성형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외모는 어디에서 오는가? 외모의 기준 역시도 스스로의 내면에서 산출되는 것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아무리 그것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외부적 압력의 또 다른 방식일 뿐이며, 그것에 저항하거나 대항하는 몸짓이 아니다. 수잔 보르도는 미용 성형에 대한 자기 배려 담론이 여전히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외모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 지적한다. 사실 많은 여성들이 못생겼다고 간주되는 외모로부터 벗어나고 늙어서 도태되었다고 여겨지는 외모로부터 벗어나 아름다운 외모를 성취함으로써 자신감, 자기 배려의 느낌 같은 것을 받으며 심리적 쾌락을 갖는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것은 미용 성형을 통해 얻게 된다는 허구적이고 불안정한 자기 주체성일 뿐이다.
잘 생긴 외모, 못생긴 외모의 구분은 누가 마련하는 것인가? 키가 작은 사람은 루저라는 의식, 뚱뚱함과 날씬함의 상반된 가치, 이들은 누구의 권력과 연결되어 있는가? 왜 많은 사람들이 못생김, 작은 키, 뚱뚱함을 열등감으로 느끼는가? 왜 외모가 항상 우리의 자신감과 연결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어디로부터 부여되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채로 아름다운 외모를 찾는 것을 자기를 위한 투자라고 간주하는 것은 여전히 문제를 지닌다.
왜냐하면 성형 미용을 통해 획득된 외모는 일시적인 자신감일 수는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이는 여성을 몸으로 환원하는 것이며, 성별 권력 관계를 재생산하는 가부장적 권력을 재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미용 성형을 선택하는 많은 여성들이 느끼는 자신감, 자기 배려라는 효과는 진정한 자기 사랑, 자기 배려가 아니라 가부장 사회가 부여하는 단일한 아름다움의 기준을 향해 끝없이 질주해야만 하는 불안정한 심리일 뿐은 아닌가? 또한 그것은 가부장제 의해 통제되는 억압적 쾌락이며 거짓 주체성일 뿐인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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