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근원’과 여성의 몸 [청춘의 고전 시즌2]-②
?[청춘의 고전 시즌2 /그림으로 읽는 철학] – ②
??? 일시: 2012. 4. 14.?(홍대입구 상상마당 강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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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근원’과 여성의 몸
– 구스타브 쿠르베의〈세상의 근원〉에 대한 여성주의 철학자의 시선 –
강연:? 이현재 (서울시립대 HK교수)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구스타브 쿠르베의 작품을 둘러싼 사회문화적, 법적 담론이 이루어지고 있다. 유명 영화감독이 이 작품을 소재로 영화를 제작한 바 있으며, 방송통신심의위원인 법학자가 표현의 자유와 음란물 판단 기준에 관한 법적 토론을 목적으로 이 작품을 블로그에 게재한 후, 법적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이 작품을 여성주의 철학자의 시선으로 보면 어떤 이야기가 가능할까?
청춘의 고전(2) ‘그림에 say’의 두 번째 강연자로 나선 이현재 서울시립대 HK교수(이하 이교수)는 우리나라에서 여성주의를 연구하는 대표적인 여성 철학자이다. 이교수는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후 지금까지 줄곧 논문과 책들을 통해서 여성주의에 관한 일관된 철학적 담론을 제기하고 확산시키고 있다. 이교수가 이번 강연에서 주제로 제시한 것은 ‘쿠르베의과 여성의 몸’이다.
구스타브 쿠르베의 작품은 곧 ‘세상의 근원이 여성의 성기임’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여성의 성기는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해 여러 가지 서사를 통하여 ‘여성의 성기는 세상의 근원이다’라고 답하는 것은 결국 동어반복에 불과한 것으로, 이 답으로부터는 아무런 추론을 이끌어낼 수 없다. 이 물음에 대해 철학적으로 답하는 것은 그 ‘무엇’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한 이교수의 답은 이것이었다. “여성의 성기는 ‘없음’이다.” 이 답은 단순한 추론을 넘어선 차원의 해석이다. 이 해석은 쿠르베의 작품에서부터 “여성의 성기는 ‘없음’이다.”라는 명제가 직접적으로 도출될 수 없다는 점에서 추론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림 앞에선 감상자의 단순한 느낌도 아니다. 이 해석은 그러한 차원을 넘어선 철학적 해석이다.
1. 쿠르베의 시선
이교수가 여러 수강생들에게 쿠르베의 작품을 보여주고 그림이 어떻게 보이는 지를 물었을 때, 수강생들이 답한 느낌은 다양했다. 강의실에는 지난 첫 번째 강의에서처럼 남녀노소의 다양한 수강생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만큼 답도 다양했다. 이교수는 수강생들의 반응을 살핀 후, 크리스틴 오르방이 쓴 소설 『세상의 근원』(함유선 역, 열린책들, 2001)을 소개하면서 쿠르베가 그림을 그릴 때 그림의 모델이 되었던 여성의 몸을 바라보는 쿠르베의 시선을 이야기하며 본격적인 강의를 시작하였다. 이 소설을 통해서 이교수가 찾아낸 시선은 여성의 몸을 마치 법의학자와 같이 보는 시선이다. 즉, 치밀하게 계산하고 분석하고 철저하게 따져보는 시선이다. 그러면서 대상을 완전히 주관에 따라서 만들어 내는 시선이다. 이 시선은 단지 화가 쿠르베의 시선이라기보다는, 남성적인 시선이다. 그리고 이 남성적인 시선이 대상을 규정하는 서양 철학의 근본 원리이다. 이 남성적인 시선을 통해서 대상을 보아왔기 때문에 서양 철학은 본질적으로 남성중심주의에 빠져있다는 것이 이교수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이 시선이 서양 철학에 뿌리 깊게 박혀 있었기 때문에 철학은 여성과 남성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위를 도식화 해왔다는 것이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위는 사실 서양 철학이 은폐하고 있었던 소위 불편한 진실이었다. 이교수에 따르면, 서양 철학은 남성과 여성을 둘로 나누면서 이 둘을 수평적인 둘이 아니라, 위계적인 둘로 구분하였다. 그래서 서양 철학에 의해서 남성과 여성은 남성이 여성의 위에 있는 위계적인 이분법으로 구분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위계적인 이분법의 의미가 은폐되어 있는 철학의 근본 개념들이 바로, 이성과 감성, 마음과 몸, 문화와 자연의 구분이다. 이 구분에서 앞에 있는 것이, 플라톤 이래로, 줄곧 뒤에 있는 것에 대한 우위를 점유하고 있었다고 이교수는 언급하였다. 여기에서 이교수는 “앞에 있는 것은 스스로가 자기를 정립하는 능동적인 힘이 있는 것이었으며, 그에 반해서, 후자의 것은 전자에 의해 정립될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것으로 취급되었다”고 말하면서, “서양 철학사에서 이성적인 것은 항상 남성적인 것이었고, 감성적인 것은 여성적인 것이었다”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남성적인 것을 여성적인 것에 앞서는 위계적인 이분법을 고수하기 위해서 서양 철학이 끊임없이 정립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남성적인 것의 근원이었다. 다시 말하면, 이성의 근원, 마음의 근원, 문화의 근원이었다. 그런데 이 근원을 정립하고자 할 때 철학이 목표로 삼았던 것은 사실 ‘남성적인 것의 근원은 다름 아니라 남성적인 것에 있다’라는 결론이다. 그 남성적인 것이 우월함을 확인하기 위해서 서양 철학이 탐구하였던 것이 바로 남성적인 것의 근원을 보다 높은 곳에 있는 것, 고귀한 것, 다시 말하자면 현실을 초월해 있는 것, 이상적인 것에 두는 것이었다. 그 근원은, 간단하게 말해서, ‘있음’과 ‘없음’ 중에서 ‘있음’이며, ‘있음’ 중에서도 ‘꽉 차 있음’이다. 그래서 이교수에 따르면, 서양의 철학은 바로 이 ‘꽉 차 있음’에서 출발해서 그것으로부터 모든 것이 나온다는 것을 정립한 것이다. 그 근원으로부터 위계질서를 세우면, 사유와 세계는 보편성, 완전성, 절대성에 따라 법칙화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의 철학은 남성 우위의 철학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의 이데아에서부터 헤겔의 절대정신에 이르기까지 모든 철학이 바로 남성 우위의 철학이었다”고 이교수는 말하였다.
2. 쿠르베의 혁명성과 한계
이교수는 쿠르베를 양가적으로 해석하였다. 하나는 혁명성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계였다. 우선, 쿠르베는 남성적인 것의 시선이 감추고 있던 진실을 들추어냈다는 점에서 혁명적이었다. 쿠르베가 들추어낸 진실은 남성적인 것의 시선을 아무런 미화나 신비화 없이 추하고 구체적인 것으로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즉, 높은 곳, 천상적인 곳, 이상적인 곳으로 향하던 남성적인 것의 시선을 낮은 곳, 지상적인 곳, 구체적인 곳으로 되돌리면서 남성적인 것의 시선이 지닌 문제를 사실적으로 들추어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쿠르베가 여성의 성기가 세상의 근원임을 보여줌으로써, 이전까지 믿어왔던 남성적인 것의 근원이 남성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여성적인 것이었다는 진실이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남성들이을 보고 느끼는 불편함은 곧 세상의 근원이 남성적인 것이 아니라 여성적인 것임을 인정하게 함으로써 여성에 대한 남성 우위의 도식이 위협 받는 불안감에 기인한다고 이교수는 설명하였다. 여기서 쿠르베는 동시에 한계를 드러내게 되는데, 그 한계는 사물을 주체가 아니라 수동적 대상이 되게끔 하는 남성적인 시선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작품에서 그려진 여성의 몸은 마치 해부학 실험실에 놓여 있는 죽은 몸 혹은 덩어리로 보이게 하며, 그러하기에 여성의 몸은 아무런 움직임 없이 그대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앞에 고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더욱이 그림에서 그려진 여성의 몸은 가슴에서부터 성기까지 잘라졌기 때문에 말을 할 수 있는 입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래서 쿠르베의 시선은 여전히 대상을 수동적으로 바라보는 과거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이교수는 지적하였다.
그래서 이교수는 “쿠르베가 여성의 성기를 세상의 근원으로 발견했지만, 그 여성의 성기는 결핍, 없음으로 규정된다”고 말하였다. 여기에는 남성의 우월성을 표현하는 철학적 논리가 그대로 적용되는 데, 그 논리는 바로 ‘있음’으로부터 ‘없음’을 규정하는 이분법적 규정이다. 이교수는 ‘있음’과 ‘없음’을 기호로 표현하면, A와 ~A가 된다고 언급하면서, ‘없음’은 다름 아니라 ‘있지 않음’을 뜻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전자가 곧 남성이고 후자가 곧 여성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교수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끌어들이면서 프로이트가 주목한 것은 바로 “남성의 성기는 ‘있음’이고, 그 ‘있음’이 ‘있지 않음’으로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남성에게 있어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형성한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두려움이란 곧 ‘없음에 대한 두려움’인데, 그 두려움이 생기는 이유는 그 ‘없음’이란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없음’은 한편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을 탐구하고자 하는 신비감을 주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끝까지 알 수 없는 것으로 남게 되면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없음’ 대해서 이교수는 라캉의 말을 인용하면서 깜깜한 동굴, 구멍, 비어 있음을 통해 설명하였다. 그러면서 이교수는 “무엇을 안다는 것은 곧 알지 못하는 공포의 대상으로부터 오는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 그 대상을 정복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다시 말하면, 인식은 곧 정복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곧 서양의 주류 철학사이자 서양 중심의 문명 형성사였다. 다시 말하면, ‘있음’을 통해서 ‘없음’을 정복하여 대상화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오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곧 철학을 통한 계몽의 과제이자 문명의 발달 과정이었다. 이 과정의 근저에 깊게 흐르고 있는 것이 남성 우월주의였다. 이런 의미에서 이교수는 “‘있음’으로서의 남성은 구멍, 비어 있음, 무지의 세계를 참지 못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없음’이 주는 공포감과 불안을 남성은 떨쳐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럴 때 ‘없음’으로서의 여성의 몸은 정복의 대상이 된다.
3. 남성/여성의 위계적인 이분법을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은?
플라톤 이래로, 육체는 가시적이고 감각적인 것과 동일시되는 열등한 것으로 간주되고, 인간은 가지적인 세계인 이데아에 도달하기 위해 육체를 영혼에 복종시켜야 한다는 것이 서양 철학의 주류를 형성하였다고 이교수는 말하였다. 그러면서 이교수는 “여성을 비본질적이고 종속적이기만 한 육체로 보았다는 통념에 문제가 있음을”지적하면서, 여성주의 철학자들이 여성에 대한 이러한 종속적 규정을 벗어날 수 있는 다른 개념을 철학사에서 찾고자 노력해왔고 그 성과를 세 가지로 설명하였다.
그 세 가지 가능성을 찾는 핵심은 여성의 몸이 위계적으로 구분되어 오직 남성만 자기규정성을 가지고 있는 ‘있음’에 의해 수동적으로 규정되는 ‘없음’이 아니라, 여성의 몸이 자체적인 힘을 가지며 스스로 자기 규정성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개념을 찾는 것이다. 그러면서 위의 노력을 통해서 여성의 몸에 대한 기존의 철학적, 남성적 담론을 넘어선 새로운 담론의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 있는 성과가 마련되었다고 설명하였다. 이교수는 “위계적인 이분법을 넘어서서 ‘여성의 몸’이라는 개념의 능동적인 자기 규정성을 찾는 것이 여성주의 철학자의 과제”였다고 언급하면서, 이 개념을 찾기 위해 전 세계의 여성주의 철학자들이 끊임없이 노력해 왔음을 이교수는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 노력의 결과를 플라톤의 ‘코라(chora)’, 이리가레의 ‘두 입술’, 그로츠의 ‘뫼비우스’에서 찾을 수 있다고 제시하였다. 즉, 위의 세 개념을 통해서 남성/여성의 위계적인 이분법을 넘어설 수 있는 여성의 몸에 대한 새로운 규정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교수는 이 가능성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강의 자료를 통해 준비해 왔으나 아쉽게도 약속한 강의 시간이 다 되어, 이 교수는 개략적인 설명을 통해 언급한 이후에 강의를 마무리했다.
강의가 끝난 후 곧바로 이어진 질문 시간에는 다양한 수강생들의 열띤 질문이 이어졌고 이교수는 하나하나 충실히 답하였다. 질문은 계속 이어져 8개의 질문과 답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대부분의 수강생들은 진지하고 열의 있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 열의는 다음 강연까지도 이어질 것이다. 다음 세 번째 강연은 4월 28일 6시에 상상마당 4층 강의실에서 열리며, ‘살바도르 달리의 과 아도르노의 『미학 이론』’이라는 주제로 김성우 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이 강연자로 나선다.
후기: 김민수 (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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