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와 구세의 길, 운명적 불화 – 한용운 [길 위의 우리 철학] – 11

한용운의 발자취를 찾노라면 동분서주도 모자라 남분북주를 해야할 판이다. 고교시절 방영된 국경일 기념 드라마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겨 당시 윤동주 시인과 함께 나의 필통 데코레이션을 담당한 인물이었지만 3.1운동과 님의 침묵에 관한 잔상 이외에 그에 관한 지식은 전무했기 그의 발자취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불충분하다. 어떤 운명인지 충청도에서 자라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강원도와 인연을 맺은 뒤 우연한 기회에 인제의 만해마을과 백담사를 찾아 오래전 추억을 떠올렸다. 만해마을 전시실에서 한용운이 한 세기 전에 지금 내가 보는 음빙실문집을 보았다는 사실이 신선하게 다가왔고 총으로 주권자를 학살하고 권좌를 누리고 지금도 호위호식하는 사람의 흔적만 백담사에 남아있었음은 충격이었다. 이미 8년 전 일이고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

 

만해 대신 정치적 도피를 한 독재자를 기념하는 백담사

 

홍성에서 나고 자라 강원도 산사에서 출가했으며 배움을 찾아 러시아로 길을 떠났고 불교 인사로서 남도의 여러 사찰을 돌며 강연하고 조선의 독립적 종단 건설을 위해 승려들을 설득했으며 경성에서는 신문 잡지를 내며 본인의 목소리를 내고 생을 마쳤다. 한용운은 이렇듯 여러 지역에 족적을 남겼으니 그의 발자취를 따르려면 한 두군 데 공간만 찾는 것으론 역부족이다. 5개 지자체가 손을 잡고 대학의 만해연구소가 협조하여 선양사업의 의지를 보인 것도 여기서 기인한 바가 없지 않다. 게다가 불교 개혁을 주장하고 불교 대전을 펴내서 불교 이론을 심화하고, 조선 독립의 서로 억압의 역사에 저항하는 족적을 남기고 만년에는 시와 소설로 문학인으로서의 면모(본인은 문학으로 나서는 것을 부끄러워했지만)도 남겼기에 한용운의 내면을 전면적으로 파악하려면 길고도 어려운 여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가 동북아시아를 주유하며 몸소 겪은 일들은 공간적으로도 활동 영역으로도 다채로운 그의 역정을 열정적인 독립운동가로 그리며 영웅적 행적이라고 기리고만 끝낼 수 없게 만든다. 승려가 된 후 그는 세계를 관심대상으로 품었고 세계의 현안에 적극적으로 맞섰으며 그의 길은 고단한 투쟁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한용운은 첫 출타부터 고난을 겪었다. 출가 초기 중국에서 들어온 영환지략, 해국도지, 음빙실문집을 읽고 세계를 경험하리라는 꿈을 품은 한용운은 가정을 버리고 출가했듯 일본에서 떠나 조선을 거쳐 러시아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러시아를 거쳐 미주까지 가는 것이 당초 계획이었으나 그 계획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좌절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현지 조선인이 그를 일진회로 오인해서 죽이려고 했다. 일단 풀려난 뒤에도 다시 조선인에게 봉변을 당하던 도중 현지 경찰에 발견되어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생을 마칠 뻔한 경험에 한용운은 세계일주의 결심을 접게 된다. 국권이 위태롭던 시기 그의 길에서 위협을 준 이들은 역사의 현실이 만들어낸 동포의 배타심과 경계심이었다.

 

얼어붙은 블라디보스토크의 겨울바다

 

 

일본에서 유학하며 불교를 배운 경력이 있지만 불교 종단을 총독부가 통제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던 시기 그가 넘어야 할 큰 산은 총독부 권력을 이용해서 종단 내 본인의 권력을 굳히려던 친일 승려였다. 3.1운동을 준비하던 시기에도 식민지 권력이 준 주지라는 자리에 취한 승려들의 비협조로 불교계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한용운도 당시 종단의 유력인사도 은둔의 수도승이 아니었지만 세간에 대한 처신은 사뭇 달랐다. 그리고 그 차이를 결정하는 주요 변수는 식민지 권력이었다.

식민지 권력에 맞서는 일에서도 그가 겪은 것은 결코 동지적 단결만이 아니었다. 임제종 운동이 끝난 후 고국의 현실을 알리려 만주에 갔지만 그곳에서 블라티보스토크의 악몽이 재현되었다. 정탐으로 오인한 그곳 조선인이 한용운을 총으로 쏘았던 것이다. 이회영은 신흥무관학교 학생이 총격을 가했을 것이라고 회고한다.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이들이 훗날 조선독립운동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되는 이를 오인사살할 뻔한 일화다. 한용운은 이 일화를 「죽다살아난 이야기」로 남기기도 했다. 훗날 독립에 뜻을 같이 한 이들과의 불화, 불일치도 한용운의 역정에서 심심찮게 발견된다. 벗이었고 3.1독립선언을 주도한 최린과 여러 인사들이 훗날 변절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독립선언을 준비할 때도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서정주의 입으로 전해진 한용운에 대한 현상윤의 첫인상은 “껌정 두루마기에 껌정 고무신에 얼굴은 가무잡잡 불그레하고 키는 나지막한 청년”이었고 현상윤은 그를 “꼭 무슨 첩자가 아닌가”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눈에 한용운은 “처음 우리 판에 와서부터 어떻게나 열심히 한몫 끼워 달라고 조르던” 사람이었다. 일본 유학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했고 독립선언도 ‘우리 판’이라고 생각했던 이에게 한용운은 이방인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불교에서도 권력과 멀었고 지식인 사회에서도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던 비주류였다. 신간회가 출범한 후에도 한용운을 찾아온 기자가 한용운의 입장을 민족주의에 끼워맞추려고 취재하려다 크게 혼쭐이 나서 돌아간 일화도 전해진다. 독립을 당연시 하는 후세의 시각에서는 당시의 민족운동을 단순하게 보기 십상이지만 상황이 빚어낸 오해든, 생각의 변화든, 퇴행적 네트워크 문화의 발로에서든 한용운은 갖가지 불화를 겪었다. 이러한 불화에 그는 “훼예를 무시하는 호담이 있어야 만인의 이상을 초월하는 쾌사를 창조할 수 있다.”(「훼예毁譽」)라며 결연히 응답했다.

 

심우장에 설치된 한용운의 동상

 

심우장에 동상으로 남아있는 한용운의 인상은 매우 고단해보인다. 2017년에는 심우장에서 그를 기리는 뮤지컬도 상연되었고 심우장은 서울특별시 기념물이다. 이렇듯 그에 대한 기억은 지속되고 있지만 이곳에서 그의 삶은 고달팠고 병을 얻어 해방 1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민적을 거부해서 인권 없이 살았던 탓이기도 하지만 출가 이후 불교개혁을 위해 조선 독립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일 못지 않게 그가 겪은 ‘조선인’들과의 불화도 그를 힘들게 한 요소가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친딸에 의해 정치가로 회고되고 불교에 투신한 것이 정치활동에 대한 갈망이라고 스스로도 밝히고 있지만 시대를 불철저하게 인식하거나 지배권력과 타협하며 그와는 다른 ‘정치’를 하고 있던 조선인들도 그의 삶을 더욱 핍진하게 했으리라 짐작해본다. 스스로도 고단했다고 회고하는 삶의 동력은 어디에서 왔을까? 우리는 그 흔적을 그의 열정적인 활동의 자산으로 남은 그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용운이 유명세를 탄 것은 3.1 독립선언 이후 투옥된 후 발표한 「조선독립의 서」이지만 그 생각의 연원은 불교사상이었다. 그는 고려대장경의 문구를 발췌해서 『불교대전』을 편찬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정의로운 차원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기를 기원”한다며 편찬 의도를 밝혔다. 그는 불경을 통해 현실의 사악함을 제거하고 선과 정의를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에게 “불교의 교지(敎旨)는 평등”이고 불교의 사업은 “박애(博愛)요, 호제(互濟)”였기 때문이다. 또한 선(善)은 “죽어 지내는 소극성이 아니라 우자가 되고 승자가 되어 뭇 사람들을 보호하고 만물을 애육하는 자가 되는 것”이요 “대등하고 평등한 세상에서 자아를 실현하여 사랍답게 사는 일”이다. 악은 “열자와 패자가 되어 남들에게 동정받는 자가 되고 사물에게 부림을 받는 자가 되는 것”, “차등과 불평등을 자초하면서 사람답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억압과 차등의 제국주의를 용납할 수 없었다.

일천하게 만해의 삶을 엿보는 동안 종교를 혁명운동의 중요한 계기로 삼자던, 장타이옌, 동시에 지식인과 수많은 불화를 겪다 병으로 세상을 떠난 루쉰, 그리고 루쉰이 그려낸 끝없이 고난의 행군을 하는 나그네가 떠올랐다. 동시에 이런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 현재는 만해가 기념사업도 하고 공연도 열리며 기려지지만 권력의 자장 안에서 위선적 정치인, 나약하고 허위적인 지식인, 기레기, 그들의 네트워크가 공고한 오늘의 현실에서 만해가 살아있다면 비난받지 않고 불화를 겪지 않을 수 있을까? 답은 굳이 말하지 않겠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는 한용운

 

 

기고자: 송인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HK교수)

중국현대사상을 공부하고 있다. 실험과 시련, 행운을 불균등하게 겪으면서 좌충우돌하고 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5.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 김세리
  6. 국가의 철학, 철학의 부재(不在), 안호상 – [길 위의 우리 철학] – 6 : 박민철
  7. 정치의 중심에서 주변을 배회한 타고난 근대인 몽양(夢陽) 여운형 [길 위의 우리 철학] – 7 : 유현상
  8. 우리, 나라, 사랑 – 윤치호와 관련한 애국에 대한 단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8 : 배기호
  9. 서일- 잊혀진 어느 무장투쟁 사상가의 초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9: 김정철
  10. 현상윤, 최초의 근대적 체제의 조선사상사를 짓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0: 윤태양

현상윤, 최초의 근대적 체제의 조선사상사를 짓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0

윤태양

 

1.

1945년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이했다. 일제치하에서는 그토록 어려웠던 ‘민립대학’의 설립이, 광복과 함께 속속 진행되기 시작했다.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도 1946년 9월, 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초대총장 현상윤(玄相允, 1893~1950?)은 1946년 2월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취임해, 대학 승격과 함께 총장이 되었다. 지금 고려대학교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대학원 건물 앞 두 동상 중 서양식 옷차림에 동그란 안경을 낀 인물이 바로 그이다.

 

 

현상윤은 고려대학교 대학원의 첫 박사이자, 국내 1호 박사이기도 하다. 1953년 3월 25일, 고려대학교는 그의 저서 『조선유학사』로 그에게 문학박사학위를 수여했다. 하지만 그에게 직접 전할 수는 없었다. 1950년 7월, 한국전쟁 때 납북된 뒤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2.

현상윤은 고려대학교 총장으로 재직하던 중인 1948년부터 한국 사상사를 직접 강의했다. 이 강의는 훗날 『조선유학사』로 우선 발전·정리되었다. 『조선유학사』는 1948년 11월 25일 완성, 12월 5일 민중서관에서 초판이 출간되었으며,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의 전통사상에 대해 근대적 체제를 갖추어 쓴 첫 사상사 저술로 평가된다. (그는 이어 『조선사상사』를 탈고했지만, 출판사에 넘긴 원고가 난리통에 유실되는 바람에 일부만이 전해질 뿐이다.)

 

 

『조선유학사』는 이 땅에 유학이 처음 전해졌다고 여겨지는 신라와 고려시대로부터 시작하여 근대의 척사위정파와 그 이후까지를 다루고 있는 통사적 사상사 저술이다. 현상윤은 우리나라의 오랜 유학적 전통에 있어 특히 조선시대의 유학을 으뜸으로 여겼다. <서문>에서 그는 ‘상고와 중고 시대 신교와 불교에 비해 유교는 이지적이고 귀족적인 성격 탓에 다수의 이해를 받지 못했고, 그러므로 조선 유학이라고 한다면 조선시대의 유학만이 탐구의 가치가 있는 것’이라며 그 까닭을 댔다. ‘중국에 비교해도 뛰어났던 조선 성리학의 이론적 수준’과 ‘일본 유학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 역시 까닭 중 하나였다.

 

 

사실 조선 유학사에 대한 근대적 탐구는 그 전에도 있었다. 아마도 그 최초의 것은 일제의 관학자인 다카하시 도루(高橋亨, 1878~1967)의 식민사관에 기초한 「이조유학사에 있어서 주리파와 주기파의 발달」(1929)일 것이다. 141면에 달하는 방대한 논문에서 그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주리파와 주기파로 분류하고 이들의 계통이 조선정치계의 붕당을 형성했으며, 이들 붕당 간의 당쟁이 조선사회를 지배했다고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조선민족이 고착적이고 창의적이지 않으며 낙천적이고 문약하고 형식주의적이며 당파적이라고 폄훼했다. 그의 폄훼는 조선총독부의 입맛에 맞춘 편협한 것일 뿐 아니라 조선사상의 특정한 사례들로부터 민족적 특성을 부정적으로 도출하는 근거없는 논리적 비약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소지가 다분하다.

 

다카하시 도루는 이 논문을 발표하기 전, 『조선유교연원』(1917)을 쓴 장지연(張志淵, 1864~1921)과 논쟁을 벌인 바 있다. 양자의 논쟁은 1915년 <매일신보>와 <경성일보>를 통해 수차례 진행되었는데, 요점은 조선 성리학자들에 대한 다카하시 도루의 비판에 대한 장지연의 대응이었다 할 수 있다. 다카하시 도루의 비판은 경전연구와 수양에 치중한 조선 성리학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유학의 본령을 잊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장지연은 그러한 것은 단지 일부 ‘썩은 학자들(腐儒)’의 문제였다고 대응했지만, 다카하시 도루의 주장을 완전히 뒤엎지는 못했다.

 

분명 다카하시 도루의 비판 중 일부는 납득할 만한 것이 있으며, 또한 당쟁 등의 문제는 당시 민족학자들 역시 공통적으로 지적한 것이긴 하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명백히 식민사관에 기초하고 있으며, 특히 그러한 학문적·정치적 사례로부터 민족성으로 일반화시키고이를 통해 조선의 사상과 민족을 폄훼한 저의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4.

현상윤은 1913년 보성학교를 졸업 후 1914년(22세)부터 1918년(26세)까지 일본 와세다 대학 사학급사회학과에서 유학했다. 귀국 후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1921년, 29세의 나이로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교사로 재직하던 1919년, 송진우, 최린, 최남선, 김승훈, 이승훈 등과 함께 3.1 운동을 주도했고, 2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에게 저 일본 유학기간은 최신의 학문을 배우고 익혔던 기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다카하시 도루의 관점 자체에 대한 직접적이고 전적인 비판의식을, 그는 가지지 못했는지 모른다.

 

 

조선 유학에 대한 현상윤은 관점은 일견 다카하시 도루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조선 유학의 죄(罪)로 ‘모화사상(慕華思想)’, ‘당쟁(黨爭)’, ‘가족주의의 폐해’, ‘계급사상’, ‘문약(文弱)’, ‘산업능력의 저하’, ‘상명주의(尙名主義)’, ‘복고사상’ 등을 지적했다. 모화사상이나 당쟁, 문약 등은 모두 다카하시 도루가 조선 유학의 문제로 지적한 것들이다. 나아가 조선 유학의 영향으로 한국 민족의 사상과 민족적 성격이 바뀌었다는 것은 이런 것들이 우리의 민족성이라는 말에 다름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조선유학사』는 다카하시 도루와 같은 식민사관에 머물러있지만은 않았다. 그는 조선 유학에 공(功) 역시 있으며, 그것은 ‘군자학(君子學)의 면려(勉勵)’, ‘인륜도덕의 숭상’, ‘청렴절의의 존중’ 등이라고 주장했다. 조선 유학에 대한 당시의 비판적 지적들을 거론하면서 그와 함께 조선 유학의 긍정적 이면을 조명한 것이다.

 

5.

현상윤이 흔들어 놓은 조선 유학에 대한 비판 일변도의 관점은, 이후 한국 유학에 대한 더 많은 연구가 이뤄짐에 따라 이제 더 이상 주류 해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현상윤이 제시한 조선 유학의 공은 전부 인정하고, 그가 언급한 과 역시 유학 자체의 문제는 아니라고 주장했던 이상은(李相殷, 1905~1976)의 「한국에 있어서의 유교의 공죄론」은 현상윤에 이은 가장 가까운 되치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유학에 대한 연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뤄지고 있다. 과거에 대한 근래의 연구를 분석하는 것은 과거 자체에 대한 연구만큼이나 중요하다. 그것이 특히 바로 ‘우리의 철학’에 대한 것이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현상윤은 우리 철학을 돌아보는 것의 중요성을 일치감치 깨닫고 있었다. 우리의 철학은 곧 우리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맹목적인 찬양도 근거없는 비판도 우리는 부수고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정신, 우리 철학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이 길 위에서.

 

 

기고자: 윤태양(건국대학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건국대학교에서 순자로 석, 박사를 마쳤다. 교양으로서의 인문학을 지역시민에게 퍼뜨리는 것과 권리중심사회에 걸맞는 도덕철학의 규명에 관심을 두고 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5.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 김세리
  6. 국가의 철학, 철학의 부재(不在), 안호상 – [길 위의 우리 철학] – 6 : 박민철
  7. 정치의 중심에서 주변을 배회한 타고난 근대인 몽양(夢陽) 여운형 [길 위의 우리 철학] – 7 : 유현상
  8. 우리, 나라, 사랑 – 윤치호와 관련한 애국에 대한 단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8 : 배기호
  9. 서일- 잊혀진 어느 무장투쟁 사상가의 초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9: 김정철

서일- 잊혀진 어느 무장투쟁 사상가의 초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9

김정철

 

1.

흔히 “강을 건넌다.”는 말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다는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이미 결정이 되어 돌이킬 수 없거나,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상황에서 마지막 수단으로 “강을 건넌다.”라고 말한다. 일제의 탄압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독립을 위해, 생계를 위하여 국경의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갔다. 특히 함경도 지역은 예로부터 척박하고 살기 힘든 땅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에서 2천리나 떨어진 이곳에 귀양을 보내거나 이 지역 출신 사람들을 차별한 사례도 보인다.

도리이 류조(鳥居龍蔵)가 1910년 무렵 경원 동림고성에서 촬영한 두만강의 모습. 이 무렵 많은 사람들이 이 강을 건너 만주지역으로 넘어갔다.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http://dryplate.museum.go.kr)

 

특히 경원(慶源)은 조선시대에 6진으로 개척한 최북단 지역이다. 이성계의 조상이 묻혀있는 곳이라 하여 “경사의 근원”이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인데, 두만강만 건너면 바로 중국으로 이어지는 국경에 위치한 탓에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땅이었다. 그럼에도 이 지역은 “산세가 높고 척박하며, 춥고 곡식이 자라기 힘든 곳이었다. 가끔씩 호인(오랑캐)들과 소금이나 고기를 거래하여 겨우 삶을 유지하는데, 이마저 없으면 굶으며 떠돌기 십상”이라며, 갖가지 지원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일제의 지배 이후에도 이 곳은 여전히 살기 힘든 지역이었지만, 독립투쟁을 전개하고자 했던 이들에게는 기회의 땅이기도 했다. 생존을 위해 북간도로 건너간 사람들이 이미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었고, 국내에서 더 이상 활동이 어려워진 독립운동가들은 북간도로 넘어가 다음 기회를 노리고자 하였다. 무장투쟁을 주도한 다수의 인물들이 북간도 지역을 거점으로 삼았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2.

필자가 소개할 서일(徐一, 1881~1921) 역시 경원 지역 출신으로 두만강을 건너간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서일은 어렸을 때 한문을 배우고 함일사범학교의 전신인 경원유지의숙을 졸업한 뒤 교육활동에 종사하였다.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 해박한 지식과 설명방식은 이 시기에 길러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0년 국내활동이 어려워지자, 서일은 가족들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가 명동학교를 세웠다. 그러다 1911년 무렵 대종교를 접하고 입교한 뒤 북로군정서의 전신인 중광단을 조직하였다. ‘중광(重光)’은 나철이 잊혀진 한얼의 정신을 “다시 드러내 밝혔다”는 뜻으로 쓴 말이다. 서일이 죽을 때까지 지속한 무장투쟁과 종교적 수행의 시작이었다.

백포(白圃) 서일(徐一, 1881~1921)의 초상화

 

그는 나철의 가르침을 빠르게 깨우치며 대종교의 중심인물이 되었고 교세 확장에 앞장섰다. 여기까지의 행적만 보면 서일은 교육자 출신으로 대종교에서도 그 능력을 인정받아 대종교를 이끄는 길로 나갈 듯하다. 실제로 나철이 죽은 뒤 대종교의 2세 교주 김교헌은 1919년 대종교의 도통을 서일에게 물려주려 하기도 했다. 하지만 서일은 이를 거절하고 5년을 보류하였다. 종교적 지도자가 되는 길보다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이 더 우선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본이나 종교적인 권력을 세습하려고 애쓰는 오늘날 보기에는 참으로 낯선 광경이다.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무장투쟁의 성과가 바로 청산리 전투이다. 서일은 이 청산리 전투를 주도한 북로군정서의 총재였다. 북로군정서는 서일이 만든 중광단에서 시작된 조직이었다. 여기에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김좌진과 이범석 등이 소속되어 있었는데, 당시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중에서도 최정예로 꼽혔다.

 

놀라운 것은 서일이 무장투쟁에 임하던 중에도 종교적 수행과 교리 연구를 병행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그는 군영 안에 수도실을 따로 설치하여, 매일 수행과 연구를 거듭했다고 전해진다. 그 성과는 <오대종지강연五大宗旨講演>(1914) <회삼경會三經>(1917) <삼문일답三問一答>(1921) <진리도설眞理圖說>(1921) <구변도설九變圖說>(1921) 등의 저술로 나타났다.

 

1918년 당시 편집된 대종교 경전 <사책합부四冊合附>를 살펴보면(「사책합부(四冊合附)」, 『국학연구』, 국학연구소, 2012 참조) 기본 경전인 <신사기神事記>, 나철이 지은 <신리대전神理大全>을 제외하고는 <회삼경會三經>과 <도해삼일신고강의(圖解三一神語講義)>가 거의 대부분의 분량을 서일의 저작이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분량만으로 그 중요도를 따지기는 어렵고, 서일의 저작이 기본 경전들에 대한 상세한 주석의 성격을 지닌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서일에게 뛰어난 교리 해석 능력은 물론 교육활동에 매진했던 이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서일이 그만큼 대종교의 교리를 명확히 이해했고, 완성도 있는 저술을 했다는 뜻이다.

 

3.

그렇다면 대종교는 사상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 먼저 대종교를 다시 드러내 밝힌[重光] 나철은 <신리대전>을 지어 최고의 존재인 한얼이 이 세계의 인간과 어떤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지 ‘삼일三一’의 원리를 통해 밝혔다. 곧 나철은 한얼(一)과 인간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원리를 드러낸 것이다. 나철의 중광은 사상적으로도 의미가 크다. 개인적인 깨달음이나 외래 사상에 의존하지 않고 역사적으로 가려져 있던 고유정신을 ‘재발견’해 낸 점은 대종교 특유의 주체의식을 잘 보여준다.

 

서일의 <회삼경> 역시 나철이 드러낸 주체의식을 더욱 구체화시킨 결과였다. <회삼경>에 대해 대종교의 3세 교주 윤세복은 “철리(哲理)를 인생철학으로 집대성한 책”이라고 평하였는데, 그의 말대로 <회삼경>은 인간이 왜 이 세계에서 방황하고 길을 잃게 되었는지, 또 어떻게 하면 다시 한얼과 하나가 될 수 있는지 당시의 말로 풀어서 설명하고 있다. 곧 한얼과 하나가 될 수 있는 회삼귀일(會三歸一)의 구체적 과정을 제시한 것이다.

 

<회삼경>에서 서일은 인간을 느끼고[感] 숨쉬며[息] 부딪히는[觸] 세 길(三途) 위에서 방황하며 고통 받는 존재로 설명하였다. 그는 이러한 방황과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한얼의 정신을 회복하는 것뿐이라고 이해했다. 한얼 정신의 회복이란 곧 우리가 어디로부터 나왔는지에 대한 깨달음을 말한다. 깨달음은 감정을 절제하고(止感), 호흡을 조절하며(調息), 신체의 정결함을 유지하는(禁觸) 개인적인 세 가지 수행법에 그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는 세 검(三神)을 거쳐 이 세계를 창조한 최고의 존재인 한얼(一)로 향하고, 문화적으로는 외래의 정신인 세 나(三我), 곧 유불도(儒佛道)를 아우를 수 있는 근본정신인 한얼(一)로 향하게 된다.

 

이렇게 <회삼경>에 드러난 대종교의 주체의식은 매우 중요하다. 일제의 침략에 나라를 잃고, 외래의 각종 사상이 범람하던 무렵 서일을 비롯한 대종교인들은 주체의식을 외부가 아닌 근원적인 정신에서 찾고자 하였다. 대종교 계열의 지식인들이 역사연구(김교헌)와 한글연구(주시경, 김두봉)에 적극적이었던 이유도 대종교 특유의 주체의식과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다.

 

서일이 일제와의 치열한 무장투쟁 속에서도 교리 연구를 병행해야만 했던 배경은 무엇일까? 독립군을 양성하고 운용하는데 있어 대종교의 교세 확장은 매우 중요했다. 철저히 무장한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군비와 무기를 꾸준히 조달해야 했고, 독립군을 양성하는 과정에서도 강력한 주체의식을 고취할 필요가 있었다.

 

대종교의 교세가 불과 몇 년 사이에 크게 확장될 수 있었던 이유는 대종교의 주체의식 속에 조국의 독립과 새로운 민족국가의 건설이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만주는 단군이 처음으로 민족을 다스린 지역이나 다름없었기에 이 지역 주민들은 대종교에 자발적으로 협력할 수 있었다. 실제로 서일의 활동 시기는 대종교의 전성기로 표현된다. 서일의 교리 연구 병행도 이러한 맥락에서 평가할 수 있다.

 

4.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승리 이후 일제의 토벌작전은 더욱 집요해졌고, 만주지역의 독립군들은 서일과 홍범도를 주축으로 ‘대한독립군’을 구성하여 시베리아로 떠났다. 이때 노령 자유시에는 대한독립군단 외에도 여러 독립군 집단이 집결해있었는데, 러시아는 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들에게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이를 거부하는 과정에서 독립군 내부에서도 군통수권 갈등이 일어났고, 결국 공산당에 포위되어 사살되거나 포로로 잡혔다. 대한독립군의 상당수를 잃자, 서일은 조직을 재정비하려고 했으나 밀산에서 다시 마적의 습격을 받으며 결국 자결하고 말았다. 무장투쟁과 종교적 교리 연구를 쉼 없이 병행했던 서일은 이렇듯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였다.

중국 길림성 청파호에 있는 대종교 삼종사 묘역. 나철(羅喆), 김교헌, (金敎獻) 서일(徐一)이 안장되어 있다.

(출처: 통일뉴스 http://www.tongilnews.com/)

 

이 모든 일들은 서일이 대종교에 입교한 뒤 불과 10년 사이에 일어났다. 북로군정서의 총재로서 무장투쟁의 선봉에 섰던 모습과 대종교의 교리 연구와 교세 확장에 힘쓰던 두 가지 모습은 지금 생각해보면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서일이 대종교의 주체의식을 몸소 실천한 결과였다.

 

불과 100년 전에 있었던 일임에도 오늘날 우리가 서일을 직접 접할 수 있는 공간은 중국 길림성 청파호에 있는 삼종사 묘역(사진) 뿐이다. 경전의 형태로나마 그의 목소리가 전해진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대종교의 존재 자체가 낯설어진 현실은 안타깝지만, 서일이 보여준 사상가로서의 면모와 실천적 행보는 지금 생각해도 놀라울 따름이다.

 

40년 남짓한 세월동안 서일은 같은 시기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지식인들과 비교해보더라도 지극히 어려운 길만을 선택하며 살아갔다. 처음 가족들과 두만강을 건너는 길에 서일은 앞으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을까? 매순간 거리낌 없이 어려운 선택과 실천의 길을 걸어간 그의 모습에, 실천의 순간마다 머뭇거리며 방황하는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기고자: 김정철(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현재 17세기 조선의 예학사상과 관련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음악 없이는 하루도 살지 못하며, 역사와 문화 전반에 관심이 많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5.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 김세리
  6. 국가의 철학, 철학의 부재(不在), 안호상 – [길 위의 우리 철학] – 6 : 박민철
  7. 정치의 중심에서 주변을 배회한 타고난 근대인 몽양(夢陽) 여운형 [길 위의 우리 철학] – 7 : 유현상
  8. 우리, 나라, 사랑 – 윤치호와 관련한 애국에 대한 단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8 : 배기호

 

 

 

 

 

 

 

 

 

우리, 나라, 사랑 – 윤치호와 관련한 애국에 대한 단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8

배기호

 

좋은 이름 없을까? 지방의 한 고등학교 교실에 앉아 있던 필자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어른들이 지나가듯이 이종사촌동생의 이름을 생각해보라는 말에, 정작 학업은 뒷전으로 하고 말이다(솔직히 노상 공부는 뒷전이었다). 그렇게 생각해낸 이름이 ‘나라’였다. 당시 우리말 이름이 유행이었던 것도 있지만, 그냥 부르기 쉽고 하늘을 나는 새처럼 동생이 자유롭게 꿈을 향해 날아다녔으면 좋겠다는 유치한 진심을 담은 결과였다. 그리고 믿기지 않게 동생의 이름은 ‘나라’가 되었다. 이렇게 ‘나라’는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 필자가 직접 이름을 붙인 아이니(아, 지금은 엄연한 어른이다) 이상할 것은 없다.

 

‘나라’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쏟은 사람이 필자만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손에 꼽기 힘들 정도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국충정(憂國衷情)을 노래했던가. 그리고 그 노래는 끝없는 돌림노래 형식을 취했는지, 여전히 누군가에 의해 불리기도 하고 우리 주위에 울리기도 한다. 그런데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같을지라도 그것의 표현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는 맹점은 간혹 우리를 헛갈리게 만든다.

 

여말선초(麗末鮮初) 시기의 정몽주와 정도전은 우국충정의 대명사다. 다만 어떠한 ‘나라’에 대한 충정이었느냐에 따라 그 구체적 내용이 달라졌고, 그에 대한 평가가 나뉠 뿐이다. 그렇게 400여 년이 지난 시점에 우국충정의 노래는 아주 강렬하게 울렸다. 열강들의 간섭과 침략으로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상태에 놓인 ‘나라’를 걱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에 각각의 창법과 가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이른바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 개화파(開化派), 동도서기(東道西器), 서도서기(西道西器), 동도변용(東道變容) 등과 같은 말이 나오게 되었다.

 

당시는 어찌할 수 없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였음에는 긴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다. 상대적으로 그들의 부강함이 당시 이 땅의 현실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결정적으로 이 땅을 유린한 것은 서양이 아닌, 동양의 한 섬나라였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300여 년 전에도 그랬듯이 서양의 세(勢)를 앞서 배우고 익혀 이 땅을 넘본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그들로 인해 짓밟힌 ‘나라’를 걱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여실히 행동으로 옮긴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 그들에게 우호적이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역사는 그들을 독립운동가와 친일파 · 반민족행위자로 평가하고 있다.

 

그 중 윤치호(尹致昊, 1865~1945)는 2009년에 나온 『친일인명사전』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그런데 그에 대한 간단한 소개는 최초의 근대적 지식인, 문신, 고위관료, 정치가, 외교관, 언론인, 독립협회 회장, 민족운동가, 종교운동가, 교육운동가 등으로 다양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면, 그에 대한 평가는 개화를 주장하며 민족의 실력양성을 주도했다는 공과 친일행위를 했다는 과로 나누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연구에 국한했을 때이다.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고등학생의 67% 이상이 윤치호를 모른다고 한다(최훈, 「윤치호 연구」, 『慶州史學』 第39·40合輯, 85쪽 참조). 이는 그의 친일·반민족행위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모든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이력과 행태를 세세하게 알리기에는 여러 가지 한계가 있을 수 있지만, 이른바 당대를 주름잡던 지식인이라고 소개할 정도의 인물임을 감안하면 황당하기 그지없는 현상이다. 또한 윤치호는 1883년부터 1943년까지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일기로 남겼다. 그리고 그 일기는 그에 대한 연구의 기초자료가 되고 그를 알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가 된다. 그런데 현재 그 일기의 몇몇 내용이 어록이라는 미명아래 인터넷을 떠돌고, 나아가 현실적이면서도 미래지향적인 시각을 가졌다는 칭송을 하는 경우도 있으니 황당하다 못해 당황스럽다.

 

 

윤치호는 일찍이 일본과 청, 미국 등에서 유학했다. 그러면서 서양이 발전하고 일본이 열강의 반열에 오른 건 모두 서구의 발전된 문물과 종교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이 땅도 개화하여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국주의 중심의 사회진화론을 철저히 따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그런 생각 저변에는 힘의 논리와 열등감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부강한 자가 그렇지 못한 자보다 정의롭고 도덕적이며, 이 땅은 부강하지도 않고 그럴 만한 능력도 없기 때문에 부강한 자에게 의탁해야 한다고 여겼다. 심지어 이 땅이 일본의 치하에 들어가는 것이 축복이라고까지 말했다. 일본을 같은 황인종이며, 동양이면서도 서구 열강에 버금가는 부강한 나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 땅은 아직 아이이기 때문에 일본에 의탁해 배우고 익혀 어른이 된 후에 독립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1912년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일제에 체포되었다 3년 만에 출감하면서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고, 1938년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사건을 거치며 그의 친일·반민족행위는 노골적으로 변했다.

 

배우고 익힘의 결과는 무섭다. 교육의 힘을 누구보다 믿고 실천한 윤치호 자신이 더욱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일방적이고 무비판적인 차원이라면 무서움을 넘어 재앙에 가깝다. 이는 일제강점기뿐만 아니라, 지금과 가까운 시기에서도 여실히 드러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기대어 이 땅의 독립을 이룩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종교인으로서의 믿음이라면 모를까, 교육운동가나 지식인으로서의 믿음이라고 보기에는 순진하다 못해 가볍고 어설프다.

 

애국계몽운동가. 윤치호를 이렇게 부르기도 한다. 그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익혀 근대적 사고를 할 것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매우 어리석은 질문이 든다. 그가 사랑한 ‘나라’는 무엇이고, 새로움은 무엇이며, 근대는 무엇인가?

 

 

지금도 애국, 곧 ‘나라’ 사랑의 노래는 곳곳에서 여러 사람의 입에서 독창, 합창, 제창 등의 형태로 흘러나오고 있다. 어쨌든 ‘나라’를 사랑한다니 참으로 좋은 일이다. 겉으로만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관심을 갖고 ‘나라’를 사랑한다면 말이다. 그럼으로써 이 땅이 다시는 윤치호 같이 열등감에 사로잡힌 우월감을 가진 이중인격자가 나오지 않는 곳이 된다면 더욱 좋은 일이다.

 

몇 해 전, ‘나라’의 하나 뿐인 언니는 ‘우리’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그래서 이모의 SNS에는 ‘우리나라 사랑해’라는 문구가 항상 적혀 있다. 밝히기 쑥스럽지만, 필자 역시 ‘우리’·‘나라’를 사랑한다. 그리고 더불어 드는 생각… 동생들은 자기 이름의 무거움과 무서움을 알까? 괜히 미안한 생각에 ‘우리’·‘나라’가 보고 싶다.

 

기고자: 배기호(한국철학사상연구회)

순자의 철학사상을 연구해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자판기 커피를 들고 벤치에 앉아 멍하니 있기를 좋아한다. 잡기에 능하며 가끔 공부도 한다. 사람의 일, 정치에 관심이 많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5.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 김세리
  6. 국가의 철학, 철학의 부재(不在), 안호상 – [길 위의 우리 철학] – 6 : 박민철
  7. 정치의 중심에서 주변을 배회한 타고난 근대인 몽양(夢陽) 여운형 [길 위의 우리 철학] – 7 : 유현상

정치의 중심에서 주변을 배회한 타고난 근대인 몽양(夢陽) 여운형 [길 위의 우리 철학] – 7

유현상

 

‘길 위의 우리 철학’에 걸 맞는 원고를 완성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서울에서 강변북로를 따라 덕소를 지나 6번 도로로 들어서서 양수리를 지나 신원역 옆길로 600미터 언덕길을 오르면 몽양 여운형(1886년~1947년)의 생가와 기념관이 나타난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 길을 택하지 않았다. 약간 돌아가기는 하지만 글쓴이가 사는 곳 역시 양평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길을 나서기는 했으나 그리 먼 길도 낯선 길도 아니었다. 하지만 몽양 여운형은 여전히 낯선 느낌이다. 일차적으로야 나 자신의 무식과 무관심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몽양에 대한 몰이해는 한국 현대 정치사의 불행과도 연관되어 있다.

 

[2011년에 복원된 몽양 여운형의 생가(양평군 양서면 신원리에 위치)]

 

몽양은 1886년 4월 지금의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골에서 명문 양반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역시 백사 이항복의 11대 손녀였다. 어린 시절 여운형은 아버지보다는 조부인 여규신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본래 소론파의 야인이었던 여규신은 갑오년(1894)에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일가를 이끌고 모두 동학에 가담하여 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부터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벗들을 사귀었던 몽양에게 인간 평등을 핵심적인 가치 중 하나로 삼는 동학의 가르침은 자연스럽게 수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부친의 상을 치른 후인 1908년 몽양이 집안의 종들을 모아 놓고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해방시켜 준 일은 당시로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몽양의 근대적인 인간관은 단지 동학의 영향에 의한 결과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는 1900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서구적인 근대식 교육을 받았고, 1907년에는 기독교에 정식으로 입교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에 자신의 생가 인근에 근대적 신학문을 가르치는 광동학교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비록 동학과 기독교의 뿌리는 다르지만 몽양은 두 종교 모두에 내재한 보편적 가치를 수용하여 근대적 세계관을 가슴에 품게 된 것이다. 종교와 사상의 경계에 구애받지 않은 몽양의 삶은 이후로도 평생 이어져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를 거리낌 없이 넘나들게 만든다. 그럼에도 그는 한결같이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삶을 살았으며, 실질적인 목표를 성취하려는 정치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독립을 위해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시기인 1919년 당시 몽양은 김규식(1881~1950)등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정당인 신한청년당을 창당하여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비록 일본 대표단의 집요한 방해로 파리 강화회의 본회의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 사건은 국내의 독립 운동 열기를 자극해 3.1 운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3.1 운동을 계기로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 운동 세력들은 임시정부라도 서둘러 세워 국권회복을 위한 중심을 잡고자 하였다. 하지만 몽양은 정부 형태보다는 운영에 부담이 적은 당조직을 중심으로 하자는 입장이었다. 이는 이상적인 방법보다는 현실적인 방법을 먼저 고민하는 몽양의 실리추구의 면모를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또한 국호에 ‘대한’을 붙이거나 황실을 우대하는 임시 정부 수립과 연관된 원칙들에 의견을 달리한 몽양은 임시정부 외무부 차장 임시 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하기도 했으나 주로는 교포 사회인 거류민단을 중심으로 한 활동에 매진하였다. 몽양이 임시정부의 황실 우대의 원칙에 반대한 것도 봉건적 체제를 거부하는 근대적 정치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3.1 운동의 실질적 배후가 몽양이라는 사실을 파악한 일제의 하라 내각은 그를 회유하기 위해 일본으로 초청하였다. 일제는 당시 독립운동을 자치운동으로 유도하는 모양새를 취해 독립운동의 열기를 가라 앉히려는 계획에 몽양을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몽양은 당시 일본 유학생들과의 만남에서 자신은 자치를 구걸하러 온 것이 아니며 독립을 위한 담판을 짓기 위해 왔노라고 말한다. 당시 34세의 몽양은 실제로 일본의 고관들과 만나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굽힘없이 주장하였고, 동경 제국호텔에서는 500여명의 전 세계 기자들을 모아놓고 기자회견을 열어 일본의 식민 지배를 강력히 규탄하고 조선 독립의 당위를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상해에 머물던 시절의 가족사진(몽양 여운형 생가에 전시)]

 

1920년에 몽양은 공산당이 조선 독립 운동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하여 고려 공산당에 가입하여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의 조선 대표로 참가하여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이후 주로 상해에서 독립을 위한 활동을 이어가다 1929년 영국 경찰에 체포되어 일본 경찰에 넘겨져 국내로 송환된다. 일제에 의해 3년의 옥고를 치르고 나온 몽양은 1933년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여 언론을 통한 독립운동의 길을 이어간다. 그러던 중 1936년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가 손기정의 베를린 마라톤 우승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발간하는 이른바 ‘일장기 말소사건’이 빌미가 되어 신문사 사장에서 물러난다.

 

1940년대 초에는 몇 차례의 동경 방문 경험을 통해 일본 패망을 확신하고 1944년에 이미 광복 이후를 대비한 건국동맹을 조직하였다. 건국동맹의 결성은 당시 여운형이 얼마나 국제정세에 밝은 인물이었던가를 알 수 있게 한다. 한편, 건국동맹은 해방 이후 건국준비위원회로 이어졌으나 그 결실을 맺지는 못하고 말았다. 해방 정국에서의 몽양은 그 누구보다도 견실하게 독립국가 건설을 준비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좌우의 극한 대립과 여러 독립 운동 세력의 갈등 사이에서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청년기 시절부터의 이력이 보여 주듯이 몽양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종교나 세계관에 구애받지 않고 연대하려는 태도를 유지했다. 조선 독립이라는 대의에 비하면 사상이나 종교 이념의 차이는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모양새다. 달리 말하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균형 감각을 잘 유지한 정치 사상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삶의 영역에서도 몽양은 정신의 개발 못지않게 신체의 단련도 매우 중요시했다는 점에서 일관성을 유지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몽양의 균형은 정적들에게는 공격의 빌미가 될 수도 있는 요소가 되었다.

 

[운동으로 다져진 여운형의 모습]

 

오랜 시절 동지였던 김규식과 더불어 여운형은 해방 정국에서 좌우합작을 실현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하게 된다. 또한 1946년에는 북한의 김일성과도 총 6차례의 회담을 하면서 남북 합작의 길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노선으로 인해 여운형은 좌우 양 진영으로부터 기회주의자라는 공격에 시달리게 된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위기 상황일수록 극단적인 정치적 목소리가 온건한 주장을 압도하는 경향이 있다. 극단적 정치 노선은 정치적으로 더 선명하고 원칙에 충실한 입장처럼 비춰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진보적 민족주의자임을 자처했던 몽양의 정치적 입장은 사회적 갈등이 강하게 부각되지 않을 경우에는 원만한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하기에는 더할 나위없이 바람직한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립의 결과가 생사를 결정할 정도의 치열한 상황이라면 중도는 양쪽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한때 고려 공산당원이었던 이력을 고려했을 때 강경 사회주의자들에게 여운형은 회색 지대에 서 있는 변절자라는 공격을 받기 십상이다. 또한 기독교에 입교하였으며 민족 자결주의를 주장한 민족주의자로서의 면모를 고려하면 우파들에게도 여운형은 사회주의로 전향한 변절의 아이콘으로 삼기 좋은 먹이감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식민 통치 후반기에 국내에서의 활동 역시 그를 더욱 고립시키는 빌미가 되기도 하였다. 1942년 몽양을 다시 체포한 일제는 그를 풀어주면서 억지로 전향서를 쓰게 하고 친일성명서를 작성한 것처럼 날조해 그에게 오욕의 상처를 새기고 말았다. 이 사건은 독립운동가로서의 몽양을 변절자로 몰아가게 하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몽양은 건국준비위원회를 기반으로 1945년 11월에는 조선 인민당을 창당하여 위원장으로 취임하고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모색하게 된다. 또한 1945년 9월에 출범한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부주석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비록 미군정은 인공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 시기 여운형은 사회주의 인사들과의 적극적인 협력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46년 1월에 좌익계 단체를 중심으로 결성된 ‘민주주의민족전선’ 내에서 미소공동위원회의 입장에 협조하기로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신탁 통치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몽양의 입지는 찬탁을 주도한 박헌영에게 밀려 급격하게 줄어들게 된다. 박헌영이 소련의 요구를 수용하고 이북 공산당의 지원을 받은 반면 반탁 입장을 고수한 여운형은 좌파로부터도 외면당하고,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았다는 이유로 우파로부터도 고립을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몽양은 이에 그치지 않고 통일전선 구축을 위해 김일성과 담판을 지으려고 시도하였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통일정부를 구성할 수 있도록 힘을 모으자는 의견에 서로 동의한 바 있다. 하지만 여운형은 남한에서의 박헌영의 활동에 비판적이었고 좌파 중심의 민주주의민족전선 활동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은 이에 적극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다. 대의는 유사했으나 방법론적 차이가 결국은 회담의 목표를 이루지 못하게 한 것이다.

 

[1946년 2월의 박헌영과 여운형(사진출처-Naver)]

 

결국 몽양은 박헌영과의 노선 갈등에서 주도권을 빼앗기고 좌우를 아우르는 통일전선 구축이라고 하는 목표 역시 김일성의 미온적인 태도로 인해 달성하지 못하게 된다. 더욱이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로 인해 좌우합작의 가능성은 더더욱 낮아지게 되었고 이승만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면서 몽양은 좌우로부터 모두 소외당한 채 극우파 한지근(韓智根)에 의하여 1947년 7월 18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2발의 총탄을 맞고 암살당하고 만다.

 

국가의 철학, 철학의 부재(不在), 안호상 – [길 위의 우리 철학] – 6

박민철

1

한반도 분단은 ‘분단체제’라 규정될 정도의 자기재생산 매커니즘을 갖는다. 한반도 차원에서 발생하는 적대적인 상호의존 관계가 그것이다. 이러한 적대적 상호의존 관계는 ‘반공주의(반미주의)’, ‘국가주의’라는 이데올로기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반복된다. 이렇듯 반공주의, 국가주의 모두는 강력한 상호 결합을 통해 결국 분단을 지속시키는 이념적 공모자들이다. 이때 우리는 이것과 관련되어 한국현대철학의 여러 인물들 중에서 안호상을 만나게 된다.

 

분단 이후 남북은 상대에 대한 배타적 우월성을 획득하려는 노력과 함께, 분단국가의 ‘국민 만들기’에 열중했다. 당시 집권세력은 1948년 말 ‘여순사건’ 이후 증폭된 해방정국의 혼란을 공산주의 사상의 배타적 극복과 대한민국 국민의 정체성 확립이라는 이중 과제의 달성으로 돌파하고자 했다. ‘일민주의(一民主義)’는 바로 그 시기에 등장했다. 1949년은 이승만의 「일민주의란 무엇?-헤치면 죽고, 뭉치면 산다」, 「일민주의와 민족 운동」 그리고 양우정의 『일민주의의 개술』이라는 글이 출간된 해이다. 그리고 안호상의 『민족의 소리』 역시 이 해에 출간되었다.

 

[(왼쪽부터) 이승만, 양우정, 안호상]

 

1949년 「민족의 소리」에서 “우리에게 독특하고도 위대한 사상의 무기가 있어야 한다”고 했던 안호상의 주장은, 1950년 「일민주의의 본바탕」에서는 그러한 사상적 무장이 “모든 반민족 사상을 여지없이 격파”해야 하며, 그것을 위해서는 혈연적 동일성과 통일성에서 비롯되는 ‘일민주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로 구체화되었다. 분명 안호상은 일민주의의 대표적인 이론가였다. 그리고 그러한 만큼 안호상의 철학은 분명 국가주의 철학과 일치했다. 오늘날 학문영역 중 역사학과 정치학에서도, 심지어 그가 몸담았던 철학에서도 안호상을 국가주의 철학자로 평가하는 것은 더 이상 낯선 입장이 아니다. ‘서양철학수용1세대’ 혹은 ‘한국철학1세대’로 평가되는 이들 중에서 안호상만큼 극적인 자기변화를 보이고 있는 이는 찾기 힘들다. 철학의 지향점에 대한 ‘이론 대 실천’의 구도 속에서 항상 이론의 측면에서 서 있었던 인물도, 독일과 일본의 유학경험에서도 매우 극단적인 내용과 방법으로 ‘민족적인 것’에 침잠했던 인물도, 또한 역설적이게도 반공과 국가주의의 이데올로그였지만 훗날 반공법 위반을 스스로 선택한 인물도 찾기 힘들다. 이런 점에서 어떤 연구자는 안호상의 철학을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안호상의 ‘철학함’은 ‘오늘, 우리들’에게 어떻게 기억되어야 하는가?

 

 

2

안호상(1902-1999)는 1902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에는 항일운동가인 집안 어른들의 영향을 받아 신학문을 접했으며 그 인연으로 청소년 시기 대종교에까지 입교했다. 1922년 상해로 가 당대 조선의 민족지도자들을 만나면서 영향을 받았으며 그 후 독립을 위해 보다 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함을 느끼고 독일 유학을 떠났다. 1929년 독일 예나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다. 1931년 다시 일본 경도제국대학으로 건너가 연구했으며, 1933년 귀국 후 보성전문학교 교수가 되었다. 이 시기부터 안호상은 동시대의 한국철학1세대들과는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암묵적이든 명시적이든 조선의 독립을 위한 실천철학적 관점을 강하게 표명했던 당대의 지적 분위기와 달리, 실천보단 순수한 이론철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해방 후엔 이승만 정권의 초대 문교부장관을 역임했고 이후 단군사상에 기초하여 민족계몽운동에 투신하고 대종교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민족사상’의 확립이라는 목적이 곧 철학에 입문한 계기였다. 하지만 그 목적은 곧 민족사상으로서 ‘일민주의’의 이론적 기초를 정립하고 홍익인간이념을 교육이념으로 내세우는 등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까지 국가철학의 이념적 토대를 제공하는 것으로 그를 이끌었다. 1947년 『우리의 부르짖음』, 1948년 「민족교육을 외치노라」, 1949년 「민주적 민족교육의 이념」 등에서 이미 전체로서의 ‘우리’ 그리고 우리의 존재 근거로서 ‘국가공동체의 강조’ 등을 찾아볼 수 있다. 서구 근대의 정치적 지향이 민족국가의 건설이듯, 유년시대와 독일 유학의 경험 속에서 그러한 이념적 지향을 강하게 흡수한 안호상의 철학 역시 민족과 국가의 강한 일치화로 전개된다. 특히 반공주의는 근대적 정치주체로의 자기성장 과정을 겪지 못했던 한반도에서 민족과 국가를 맹목적으로 일치시키도록 돕는 이념적 접착제였다. 「민주적 민족교육의 이념」에 등장하는 ‘빨갱이 개아들’이라는 용어는 그래서 섬뜩하다.

 

실제로 일민주의에서 민족주의는 반공주의와 결합해 더욱 배타적으로 변모한다. 안호상은 혈연성에 기초한 민족과 일민의 구분, 즉 동일한 혈통은 ‘일민’의 필수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이 될 수 없으며, 이 충분조건은 일민주의라는 단일 이데올로기에 충실하고 반공정신으로 무장된 개인이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총선거와 남북협상」). 즉 동일한 혈통을 갖는 같은 민족일지라도 반공의 의식이 없으면 그러한 일민에 포함될 수 없는 적대적인 타자인 것이다. 또한 안호상은 1950년 『일민주의의 본바탕』에서는 이승만을 최고 영도자로 명명했으며, 반공이라는 의지 속에서 국가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이들만이 국민으로 규정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렇듯 안호상은 일민주의의 핵심이 동일혈통과 동일운명에 있음을 끊임없이 강조했으며, 그 강조는 결국 ‘국가’로 수렴되었다. “일민에는 일국가, 한민족에는 한국, 곧 한 백성에는 한 나라를 있게 함이 일민주의의 민족철학이요 국가철학이다.”(『일민주의의 본바탕』)

 

안호상의 철학 속에서 민족, 국가, 반공의 ‘신성한 삼위일체’가 이렇게 완성되었다. 이승만의 시선 속에서 분명 안호상은 매력적인 국가주의 이데올로그였으며, 안호상의 입장에서 이승만은 삼위일체의 현실적 대리자였다. 이 둘의 결합은 1949년 안호상이 문교부장관의 직무 아래 전국의 교원 5만 여명을 대상으로 한 사상경향의 조사를 하고 그 중 ‘불순분자’를 파면한 결과로 이어졌다. 오늘날 지난 정권과 지지난 정권의 ‘블랙리스트’는 어찌 보면 ‘애교의 수준’이랄까.

 

[일민주의 체계표 – 출처: 한국의 지식콘텐츠]

 

3

민족적 단일성에 대한 수사학적 강조 그리고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은 이승만, 박정희 정권에 이르기까지 오롯이 이어진다. 그리고 안호상의 여정은 이승만 정권의 초대 문교부 장관에서부터 박정희 정권의 국민교육헌장 기초위원 및 재건국민운동중앙회장에 이르기까지 독재권력 아래에서 그들과 함께 했다. 물론 여러 연구들을 살펴볼 때, 일민주의는 누구의 것이라는 규정할 수 없으며 해방과 분단의 과정 속에서 일군의 이데올로그가 공동으로 논리적으로 체계화하고 보급했던, 즉 한반도 분단의 파생적 이데올로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호상이 분명 그 일민주의의 철학적 정당화에 몰두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이승만 정권 이후 안호상은 주로 대종교의 보편성이나 단군왕검의 역사적 위상을 설파한 계몽운동가로 활동하게 된다. 상고(上古)시대와 단군사상에 대한 깊은 관심을 바탕으로 민족뿌리찾기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이 속에서 안호상은 1964년 배달문화연구원장, 1968년 국민교육헌장 기초위원, 1974년 국사찾기협회 회장, 1992년 대종교 총전교를 역임했다. 이러한 대종교인으로서의 본격적인 활동 속에서 안호상의 철학은 국가주의 철학과 조금씩 거리감을 갖기 시작한다. 물론 안호상이 일민주의라는 국가철학을 자신이 속해 있는 단군사상으로부터 이끌어내는 작업에 주력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대종교의 총전교로 선임된 이후 철저한 반공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단군을 크게 존숭하자 정부의 불허가 방침을 위반하고 단군릉 참관을 위한 방북을 강행할 정도로 그의 신심은 확고했다.

 

[대종교 총본사,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중앙로 3길 89 – 출처: 통일뉴스]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에 가면 여전히 우리들에게 계승되고 있는 대종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대종교는 단군을 교조로 삼고 단군정신을 통해 일제에 대한 항거, 민족의 단결과 부흥 및 국권을 회복해야한다고 주장하는 한반도의 자생적 종교이다. 나철, 김교헌, 윤세복 등 대종교 지도자들을 제외하고 항일운동을 설명하긴 힘들다. 그리고 지금 그 위세는 예전보다 줄었지만, 단군과 홍익인간은 여전히 한반도의 결속을 가져오는 상징으로 자리하고 있다.

 

안호상 역시 변화했다. 그는 1985년 「무력재침은 민족의 자멸행위」라는 글에서 북한과의 대화와 협력을 통한 평화를 주장한다. “‘고려 연방제’도 서로 만나서 이야기해 봐야 할 것이 아닌가”라고 얘기할 정도로 전향적인 자세를 취한다. 최근 들어 안호상 철학의 의의와 한계를 세심히 살펴보자는 문제제기도 많이 등장하고 있다. 국가주의 철학의 정립이라는 ‘과(過)’가 있으나 서구사상의 수용과 변용을 통해 주체적인 한국의 철학사상을 정립했던 ‘공(功)’이 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공감하고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과연 그 공을 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주체적인 한국철학사상의 정립이 향한 목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안호상의 철학이 오늘, 우리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어쩌면 ‘국가는 과연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제기의 필요성일지도 모른다. 한국철학의 여러 인물들 중 1950년대와 60년대에 활동한 이들 중에서 국가주의로부터 자유로운 이들을 찾기는 힘들다. 박종홍이 그러했고, 김계숙과 최재희 역시 그러했다. 다시 질문이 주어진다. ‘오늘 우리들에게 국가는 무엇인가?’

 

기고자: 박민철(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헤겔철학을 중심으로 한 서양철학수용사와 관련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본 분과에서 여러 동학들과 함께 한국(근)현대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한국현대철학사, 한반도사상사 및 지성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5.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 김세리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김세리

 

“문간에 검은 말이 끄는 검은 마차가 날 데리러 왔으니 떠나야겠소. 어린이를 두고 떠나니 잘 부탁하오.”

 

평생 어린이를 마음에 품고 불꽃같은 열정으로 살았던 그. 33세 짧은 삶을 마감하는 방정환 선생의 유언이다. 생의 끝자락에서도 그의 생각은 오직 어린이에 대한 염려와 걱정뿐. 과연 그에게 어린이는 어떤 의미인가.

 

조선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어린 사람들은 어른의 예속물 또는 부속물 정도로 간주되어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인간이기 보다는 하나의 소유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차별되고 무시당하는 사례들이 비일비재하였다. 물론 어린이라는 개념도 없었으며 불평등하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입장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린이라는 사회적 약자를 하나의 존재로 이끌어내고 그들의 인격을 존중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몸소 할 수 있는 모든 활동을 시도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소파 방정환(小波, 方定煥, 1899~1931) 선생이다. 우리나라에서 ‘어린이’ 개념이 탄생하고 완성된 것은 1920년대 방정환에 의해서였으며, 그 이전에는 ‘소년’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었다. ‘어린이’라는 말이 근대성을 갖기 시작한 것을 1914년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청춘』 창간호에 ‘어린이의 꿈’을 게재하는 것에 기원을 두나 용어가 근대적 개념으로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1920년대 들어와서이다.

 

 

 

 

 

 

 

 

 

[방정환 사진 – 출처:네이버백과]
[색동회 회원 (앞줄 왼쪽부터) 조재호 고한승 방정환 진장섭,
(뒷줄 왼쪽부터) 정순철 정병기 윤극영 손진태 – 출처:한국잡지백년2]

 

방정환을 떠올리면 다양한 수식어가 함께 따라간다. 한국 근대 아동문학의 선구자, 아동교육가이자 아동문화운동가, 소년운동가, 언론·출판인, 천도교 청년운동가, 동화 구연가, 민족운동가 등 그가 살았던 짧은 인생속에서 어떻게 그 수많은 일들을 해내었는지 참으로 의문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모든 활동들은 결국 ‘어린이’를 위한 운동으로 귀결된다. 독립운동가인 그는 나라운명이 미래어른인 어린이에 의해 좌우될 것으로 예측하였다. 그는 여러 강연에서도 “어른이 어린이를 내리 누르지 말자. 삼십년 사십년 뒤진 옛사람이 삼십 사십년 앞사람을 잡아끌지 말자. 낡은 사람은 새 사람을 위하고 떠 받쳐서만 그들의 뒤를 따라서만 밝은 데로 나아갈 수 있고 새로워질 수가 있고 무덤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라며 당장의 현상이 아닌 미래를 예측하는 눈으로 어린이를 대할 것을 강설하였다. 그리고 미래의 희망인 어린이를 대함에 상당히 주체적인 인격으로 분리해야 함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그의 천도교적 정신이 투영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방정환 동상 – 출처:네이버]

 

[소파 방정환 망우산 연보비]

 

천도교 3대 교주 손병희의 셋째 사위이기도 한 그는 천도교청년회, 천도교소년회의 중심일원이었다. 그리고 이미 어린이 시절부터 천도교의 소년입지회 등의 활동을 통해서 천도교 사상을 자연스럽게 터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1대 교주 최제우의 시천주(侍天主)교리, 2대 교주 최해월의 사인여천(事人如天), 3대 교주 손병희의 인내천(人乃天)사상 등으로 이어지는 천도교의 만민평등사상, 인간존중 사상은 방정환의 사회문화운동, 어린이 운동의 바탕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어린이를 하나의 존중의 대상, 인격으로 보고자 하는 바탕에는 그들이 차별에서 벗어난 존재론적 동등성을 부여 받을 수 있다는 기본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소파의 어린이에 대한 애정과 끝없는 사랑과 존중 이면에는 동학의 정신과 나라의 살리고자 하는 구국정신이 동시에 내포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의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선생의 정신적 배경은 잊혀지고, 그저 어린이의 아버지로만 불리고 있으니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있다.

 

[소파 방정환의 동상을 남산에서 어린이 대공원으로 옮기던 날(1987년), 윤석중 선생 – 출처:네이버]

 

 

‘어린이날의 노래’의 시를 지은 윤석중 선생이 회고하는 방정환을 대표하는 두가지는 말은, “정성스러워라”와 “나를 버리라”였다고 한다. 이는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를 버리고 한울님의 한 마음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천도교의 ‘동귀일체(同歸一體)’의 정신과도 일치하는 부분이다. 나를 버린다는 것은 나의 이기심을 버려 비움의 나를 만드는 것이고, 세상을 정성스럽게 맞이한다는 것은 비워진 나를 그 무엇이라도 담을 수 있는 큰 그릇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를 통해서 그러한 세상을 꿈꾸었던 것 같다. 이기적인 것들을 버리고 타인을 배려하는 사회, 어린이가 그러한 마음을 가진다면 그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도 그러할 것이고 그것을 바라보고 배우는 새로운 어린이들도 자연스럽게 따라 성장할 것임을 꿈꾸었던 것은 아닐까?

 

방정환. 그는 짧았던 인생 내내 어린이를 위해 살았다. 소외되었던 어린이의 존엄과 격(格)을 찾아주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였으며, 나아가 어린이를 통해 건설적인 국가 미래를 꿈꾸고자 하였다. 민족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던 그는 1931년 7월 무리한 활동으로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투병하게 되고 33세의 짧은 삶을 마감 하였다. 타계 직전까지 어린이를 위한 동화 집필과 구연에 몰두하였다.

 

“나는 여태 어린이들 가슴에 ‘잔물결’을 일으키는 일을 했소.
이 물결은 날이 갈수록 커질 것이오.
뒷날에 큰 물결, 대파(大波)가 되어 출렁일 터이니
오래오래 살아 그 물결을 꼭 지켜봐 주시오.”

 

기고자: 김세리(한국철학사상연구회)

다산 정약용의 소통과 관련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본 분과에서 동학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으며, 다도(茶道)철학과 오감(五感)을 통한 인간미감(人間美感)을 연구 중에 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한국철학은 누가 세우겠나 [최종덕의 책과 리뷰] -13

최종덕(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한국철학은 누가 세우겠나

 

오늘의 서평 책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처음 읽는 한국 현대철학』 동녘, 2015

 

1. 우리의 철학을 찾아서

 

어린이날이 왜 좋을까? 사랑하는 아이들이 있어서, 아니면 공휴일이라서? 어린이날하면 방정환 선생이 떠오른다.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날을 직접 제정한 것은 아니지만, 방정환 선생이 만드신 <색동회>가 오늘의 어린이날 전신이었다. 여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런데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를 어린이답게 만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동학에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개천절이 어떻게 국가공휴일로 되었는지, 주시경 선생으로부터 촉발된 한글날이 왜 한국철학과 연관되는지를 알게 되었는데,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쓴 『처음 읽는 한국 현대철학』(동녘, 2015)을 읽은 덕분이다.

 

이 책 『처음 읽는 한국 현대철학』은 “우리에게 철학은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이 책은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쉽게 만들었으며 매우 분명한 문제의식을 세우고 있다. 이 책에서 한국현대철학의 문제의식을 대신한 한 마디의 표현이 있는데, 일본 제국주의자를 비판적으로 흘겨본다는 표현이다. 독립운동가 신규식이 일제에 항거하며 독약을 마시고 한쪽 눈을 잃었는데, 그 이후 그는 자신의 호를 한쪽 눈으로 흘겨본다는 뜻으로 예관晲觀이라고 붙였다.(344쪽) 예관이란 반성하고 비판하며 행동하는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한철연의 책은 우리에게 철학이 어떤 의미인지 지식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이 철학함의 출발이라고 말한다. 출세와 입신양명의 도구로 전락한 지식을 비판하며, 권력에 결탁하는 학문을 거부하는 새로운 비판과 부정, 저항과 혁명의 철학이 현대한국철학의 기초였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341쪽) 한철연의 한국현대철학은 부제로 “동학에서 함석헌까지, 우리 철학의 정체성 찾기”에서 암시하듯이 철학의 의미를 스스로 질문하며 나아가 분열의 시대를 마주한 현대인의 철학적 지혜를 모색하고 있다.

 

『처음 읽는 한국 현대철학』은 현대인이 한국의 현대철학을 이해하도록 안내하는 입문서로서 최소한의 한국현대철학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동학의 최제우, 대종교의 나철, 양명학의 박은식, 민족주의형 무정부주의의 신채호, 사회적 휴머니즘의 신남철, 실천철학의 박치우, 국가주의의 박종홍, 씨알철학의 함석헌의 철학을 잘 풀이해주고 있다. 동학의 최제우에서 씨알 함석헌에 관통하는 철학은 이념적으로 평등과 자유에 있었으며, 방법론으로 저항과 실천에 있었으며, 내재적으로는 주체와 성찰에 있었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2. 생명존재론

 

이 책에서 주로 다룬 동학이나 대종교 그리고 당대 양명학은 인격의 선천적 동등성을 강조한다. 당대에서 문제된 인격의 선천적 동등성이란 계급 차별, 직위 차별, 남녀 차별, 부자간 차별과 나이 차별의 역사적 질곡에서 벗어나려는 생명의 존재론이다. 생명의존재론이라는 말은 서평자 마음대로 붙인 것이지만 나름대로 전체 맥락을 상징한다고 보기 때문에 이런 브랜드를 붙어보았다.

 

인격에서 존재론적 동등성의 실현되면 그것이 비로소 삶의 자유이다. 인격적 동등성을 누릴 수 있다는 민중의 희망이 자유를 실현하며 이런 자유의 실현이 당대의 일제 침략으로부터 자신의 자존감을 지킬 수 있다. 동학과 대종교 그리고 당대 양명학에서 말하는 생명의 자유론은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의 기초가 된다는 뜻이다. 특히 자유를 희망하는 당대의 동학은 계급에 대한 탈피와 일제에 대한 저항이라는 두 가지 통과제의를 거쳐야 했다. 탈피와 저항이 바로 동학의 기본정신이다. 저항과 탈피는 거창한 독립운동 이데올로기나 종교 경전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저항과 탈피는 일상생활에서 남녀 혹은 부부 사이에 가로놓여진 사회적 차별이나 어린이를 함부로 다루는 어른들의 관습을 버리고 동등한 관계임을 실천하는 것에서 실현된다는 것이 동학의 기본 철학이다.

 

서평자는 이 책을 읽고 교훈이나 경험담을 민중에게, 여성에게, 학생에게, 어린이에게 억지로 가르치려들거나 강요하지 말라는 뜻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 어린이와 같이 모르는 사실이 세상으로부터 어떻게 복잡한 세상사를 배워갈 것인지 의문이 들 수 있다. 간단하다. 아이들도 혹은 학생들도 다 알고 있거나 크면 자동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어른들은 그저 올바르고 제대로 돈 행동과 생각을 하면 아이들이 모방을 하고 따라서 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나쁜 짓하면 어린이도 따라서 할 것이다. 자기 자식을 아비가 원하는 어떤 방향으로 잘 키우고 싶으면 아비가 그렇게 하고 싶은 방향대로 잘 행동하면 될 뿐이다. 이런 선천성의 가능성이 바로 존재론적 동등성이다. 좀 어려운 말이지만 존재가 서로 동등해야만 비로소 존재의 생명성이 부여된다는 점에서 존재론적 동등성은 생명 존재론의 전제이다. 쉽게 말해서 생명존재론이란 일상생활에서 남녀, 부부, 계급, 직위, 나이의 차이가 사회적 차별로 이어지지 않는 철학적 토대이다.

 

특히 동학에서 생명존재론의 생명이란 풀 한 잎, 한 잎의 작은 생명이 우주의 생명을 반영하고 있다.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계급이나 성별, 지식이나 재산에 관계없이 누구나 생명의 소중함을 안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백성은 계몽의 대상이 아니라 백성 한 사람마다에게서 대생명의 흔적을 찾아내어 되살릴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동학의 생명존재론은 조선 전통의 성리학 전통과 결정적으로 다르다. 기존 성리학에서 대인은 소인이 지향해야할 모델이며, 거꾸로 소인은 합리적인 절차에 따라 계도되어야 할 계층이었다. 기존의 유가적 수양론에 의하면 성인의 훈교를 통해 무지한 자는 무지로부터 벗어나게 되며, 무지한 자가 훈교되지 않는다면 계속 무지한 채로 남게 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반면 동학으로 촉발된 생명존재론은 일방향적 군주정치나 성인정치의 그늘에서 벗어나 있다. 동학은 빈한한 유랑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크나큰 인간관의 변혁을 일으켰다. 군자가 소인을 훈교하도록 정초된 성리학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동학은 세상의 도탄을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생명존재론의 씨앗은 일방적 계몽정치를 부정한다. 오히려 개인들 즉 백성은 이미 남녀의 평등성, 아이와 어른의 평등성, 양반과 상인의 평등성의 마음을 선천적으로 구비한 상태다. 단지 그런 마음이 미발현 상태일 뿐이라는 철학적 존재론을 표명한다. 이 책에서는 이런 미발현 상태의 인격적 잠재성을 조선 양명학으로 설명하고 있다.

 

미발현의 마음을 발현되도록 도와주기만 하면 사람들은 생명과 자유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바로 조선말 생명 존재론의 고유성이며 독특성이다. 그런 변화로의 반등을 촉발하는 철학적 기반은 조선 양명학이다. 중국 명나라 시기 왕양명에서 시작된 양명학이라는 철학은 대학의 격물치지를 양지良知라고 해석했다. 즉 생명의 힘과 자유의 권리는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에 관계없이 임금이나 신하에 관계없이 동등하게 이미 내재되어 있으며 그런 내재된 자기를 발견하는 힘이 바로 양지인 것이다. 자기 안에 이미 군자가 들어 있는 것이며 그래서 소인도 자기 안에서 군자를 찾아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 양명학의 인식론은 조선말에서 일제 압정기로 거치면서 생명사상의 뿌리로 발전했다. 양명학에서 말하는 양지의 사유구조는 평등과 주체, 자립과 현존을 세울 수 있는 철학적 기초이다. 또한 양지는 양명학의 인식론적 기초인 몸과 마음이 하나 되도록 하는 생명사상의 근간인 지행합일의 논리 위에 정초되어 있다.

구체적인 사례를 하나 들어보기로 하자. 2대 교조 해월(1827-1898) 선생은 35세 동학에 입교하였는데, 입교한지 불과 2년만인 37세에 교조가 되었다. 그렇게 가능한 이유는 동학 안에 내재된 양명학에서 말하는 양지良知와 맥을 같이하는 인내천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천적 양지가 있었기에 단박에 도를 깨칠 수 있는 것이고, 도를 깨치면 누구나 교조가 될 수 있다고 1대 교조 수은 선생은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한울이니 사람을 한울처럼 섬기라”는 평등사상은 백성 한 사람마다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무계급의 철학을 포함한다. 나아가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77쪽)는 말이 내 안의 시천주侍天主에 대한 확신의 표현이라고 이 책에서 잘 설명되고 있다.

 

방정환 선생의 예를 더 말해보자. 일본에서 막 돌아온 방정환 선생은 이런 동학의 인내천 철학을 처음 접했다. 그리고 방정환 선생의 심장이 휘둥그레졌었다. 이런 인내천의 철학이 어린이에게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방정환 선생이 깨달았다. 이후 그는 짧았던 인생기 내내 어린이를 위해 살았다. 철학에서 별로 혹은 크게 다루지 않은 어린이를 새로운 관점에서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실제로는 새로운 관점이 아니라 원래 우리 안에 이미 양지(良知)로 있었지만 감춰져있었거나 억압되어 드러나지 않았던 관점일 것이라고 재해석할 수 있다. 그런 관점을 읽을 수 있고 덧붙여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이 이 책을 읽는 행운이다.

 

3. 동학 말고 한국철학의 다른 주제들

 

단군교로 시작한 대종교의 창시자 나철(1863-1916)은 단군을 부흥시키는 일에 머물지 않고 일제탄압에 정면으로 맞서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한다. 천지인, 혹은 한인-한웅-한검이라는 3의 구성체는 단순히 절대적인 구원의 길을 제시한 단순 종교적 특성을 넘어서서, 인간이 살면서 겪는 “느끼고 숨 쉬고 부딪치는” 세 가지를 가리켜 ‘세 길’이라고 부른다고 하며, 인간은 이 세 길에서 방황하며 살아가는 존재라고 했다.(112쪽)

 

황성신문을 창간한 박은식(1859-1925)은 사회진화론을 도입하여 서양과학에 친화적인 양명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책은 박은식이 말하려는 양지를 잘 요약해주었다. 양지는 주자학의 주지주의적 도덕론에서 벗어나 있으며, 오히려 맹자가 말한 측은심의 기반이라고 했다. 후천적으로 습득한 것이 아닌 내재된 도덕적 정감의 의미를 포함하는데, 공정함과 시비선악의 기준으로서 성선함의 기초라고 설명한다. 특히 박은식은 양지를 자연을 밝게 통찰하는 앎, 순일하고 거짓없는 앎, 끊임없이 유행하며 쉬지 않는 앎, 두루 감응하며 막힘이 없는 앎, 성인과 어리석은 사람과 차이가 없는 앎, 우주와 인간을 합일하는 앎이라고 쉽게 풀어주었음을 이 책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149쪽)

 

우리에게 민족 개념이 들어온 역사는 짧다. 그나마도 박정희 군부독재 국가주의를 옹립하기 위한 이념적 도구로서 ‘단일민족’이라는 선전구호로 왜곡되었다. 이념적 도구가 아닌 주체로서의 민족 개념을 처음으로 안착시킨 철학자는 바로 신채호(1880-1936)였다.(173-6쪽) 신채호는 성균관 박사(교수 지위)로 임용되었지만 과감히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첫째 이유로서 전통이 유교적 세계관으로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보았으며, 둘째 이유는 자신의 스승 신기선을 포함해서 당시 유가적 전통을 따르는 집단이 친일 행위를 하는 것을 보고 분개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외적 역사와 내적 성찰을 거치면서 신채호는 군주와 양반 중심의 일방향적 군주 사회가 아니라 백성과 민중이 주인되는 민족 개념을 형성하였다. 신채호의 민족주의는 오늘날 해석에 따르면 ‘방어적’ 민족주의에 해당한다. 민족이란 민중이 주인 되는 주체의 국민을 의미하며, 서구식으로 말하면 시민에 해당한다. 신채호는 나중에 국가 차원의 주인성보다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더 중시하게 된다. 결국 신채호의 철학적 관심은 1928년 이후 민족주의에서 탈피하고 사회진화론의 영향력에서도 벗어나서 아나키즘으로 변화한다.(190쪽) 이런 점에서 신채호의 철학은 한국현대철학에서 중요한 위상을 갖는다. 한철연 책은 신채호에 대한 기존의 이미지가 지나치게 민족주의자와 독립투사로만 부각되어 있음을 지적했다. “사회를 구성하는 각각의 주체들이 자기성찰과 자기각오를 통해 궁극의 자유를 창조하는 사유의 발판”을 신채호가 마련했다는 점에서(194쪽) 신채호 철학의 의미는 과거에 그칠 일이 아니라 미래의 지표로 될 수 있음을 이 책은 강조했다.

 

브렌타노 현상학 논문으로 경성제대 철학과를 졸업한 신남철(1907-1958)은 헤겔과 고대그리스 자연철학 연구를 지속해 왔다. 헤겔의 정신철학 연구에서 신남철은 역사철학과 인식론을 연결시켰고, 나아가 철학을 현실역사에 접목시켰다.(215쪽) 신남철은 헤겔의 정신철학을 단순한 관념의 발전이 아니라 세계와 인식주체 사이의 끊임없는 실천적 상호작용으로 해석한 점이 독특하다.(215쪽) 결국 신남철의 관심은 서구 르네상스 문화가 조선역사에 출현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묻는 실천적 질문이었다. 신남철은 그 답을 계몽과 인간 그리고 자유라는 세 가지 키워드에 초점 맞추었다. 1942년 7월 1일 매일신보에 실린 신남철의 “자유주의 종언” 은 그의 현실참여형 정치철학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그 글에서 첫째 대동아공영권 개념을 강조한다. 이 점으로부터 신남철을 비롯한 당대의 많은 지식인들이 일본의 제국주의 야욕을 세계보편주의로 오해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서구 국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위상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셋째 국가를 떠나서는 자유를 실현할 수 없다고 했다. 넷째 자본주의를 비판한다.(226-7쪽) 이후 중국식 사회주의에 영향을 받고 월북한다. 신남철은 1948년부터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서양철학사를 강의하다가, 나중에 자유주의자로 낙인찍힌 후 1958년 사망했다. 결국 그는 정치적으로 남한 정부나 북한 정부에도 적응할 수 없었으며, 자유주의와 이상주의를 영원히 품고 있었던 휴머니스트였을 뿐이다.

 

총을 든 빨치산 철학자로 알려진 박치우(1909-1949)의 삶은 정말 실천철학의 범례였다. 박치우의 실천은 사회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인민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실현하는 데 있다고 한다. 박치우는 경성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숭의실업전문학교 교수와 조선일보기자로 있다가 월북했다. 그는 문학평론가이며 마르크스 철학의 학자였지만 유격투쟁의 일선에서 삶의 실천을 더 중시했다. 그는 빨치산으로 남파되어 활동하다 1949년 태백산에서 사살되었다. 그는 근대철학의 방법론을 배우고 실천하려 했던 최초의 강단철학자로 평가받기도 한다.(233쪽) 그는 현실에서 실천으로 이행하는 철학적 단계를 그의 책 <사상과 현실>(1946)에서 해명하였다. 그것은 ‘교섭적 파악’, ‘모순적 파악’, 그리고 ‘실천적 파악’의 세 단계이다. 위기의 파악과 극복은 이성에 근거하지만 실제로는 ‘실천’으로만 현실화될 수 있다는 것이 박치우의 기본 명제이다. 이를 그는 “로고스와 파토스의 변증법적 결합”이라고 불렀다.(239쪽) 철학이 이론으로만 머물 때 가장 호사스러우면서도 가장 허울에 찬 것에 지나지 않음을 박치우는 강조한다. 우리는 박치우의 실천 행로가 꼭 옳은 것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철학의 할 바가 무엇인지를 박치우를 통해 배울 수 있다고 본다. “철학은 오늘. 이 땅, 우리에게 있어서 ,,,, 어떤 책임을 분담해야만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박치우는 한시라도 떨어진 적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243쪽) 한철연은 박치우에 대한 평가를 다음의 한 마디로 하고 있다. “한국에도 사유와 삶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분투한 철학자가 있었습니다”.(267쪽)

 

이 글을 쓰는 서평자는 어렸을 적 학교에서 박정희 군부독재의 의식화 사업의 하나였던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우지 못해 선생님에게 매를 맞은 일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 국민교육헌장을 작성한 이가 박종홍(1903-1976)이다. 근대의 폭력적 권력이 전근대의 전제적 왕권보다 더 잔인하다는 것을 알게 해준 퇴행의 역사, 박정희의 ‘10월 유신’이라는 이름도 박종홍이 붙인 것임을 서평자도 이 책에서 처음 알았다. 박종홍은 신남철이나 박치우처럼 경성제대 철학과 출신이었으며, 1968년 서울대 철학과 교수로 평온하게 은퇴했다. 다른 한국현대철학자들이 철학과 현실을 접목시키려 시도한 지식인으로 평가된다면, 박종홍은 철학과 현실에 권력까지 접목시킨 국가주의 지식인이었다. 그의 청년 지식기는 헤겔과 하이데거 그리고 퇴계를 통해서 전통철학과 서구철학을 연결하는 데 있었다고 이 책은 말한다. 박종홍은 그의 후반기로 이행하면서 개인의 자유와 평등보다는 집단의 운명을 강조한다. 집단의 공동체적 운명이 자각과 자유를 지닌 개체로서의 ‘나’보다 선행한다고 했다. 이러한 박종홍의 입장은 그가 향후 왜 독재권력에 적극적으로 승차한 정치적 이유를 알게 해준다. 그의 철학은 보통 ‘부정과 창조의 철학’으로 이름 붙여지기도 하는데, 그 내용인즉 부정을 통해 집단성의 힘을 창조한다는 데 있다. 박종홍에게 주체는 개체가 아니라 철저히 우리 민족이라는 결론에 이른다.(294-9쪽) 해방 후 미군정 중심으로 경성제대를 편성한 ‘서울국립종합대학안’을 많은 지식인이 반대했지만 박종홍은 관여하지 않았으며 이승만 독재에 대해서도 박종홍은 묵인의 함구를 했다. 이러한 사실과 대조적으로 박정희 군사 쿠데타 이후 박종홍은 대통령교육문화담당 특별보좌관을 역임하는 둥 적극적인 권력참여를 했다.

 

씨알의 철학자로 알려진 함석헌(1901-1989)은 억압에 대한 저항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 젊은 함석헌의 오산학교 시절은 일제 저항의 민족적 정신과 스승 유영모를 통한 노자 철학 그리고 개신교와 세계의 문화적 보편성에 다층적으로 영향받은 시간이었다. 이후 일본 유학기에 범신론적 종교성, 평화주의, 반자본주의, 노장 사상의 현대적 해석을 통해 실천적 지식의 지평을 넓혔다. 함석헌의 철학은 평화사상과 생명사상으로 줄여 표현할 수 있다. 평화와 생명은 저항으로부터 온다는 점을 강조한 것은 함석헌 씨알 사상의 핵심이기도 하다. “비폭력, 불복종, 총단결”로 요약되는 ‘민주시민을 위한 헌장’(1974)은 앞서 말한 박종홍의 국가주의 칙령인 국민교육헌장에 정면으로 맞서는 씨알의 지표였다. 한철연의 책에 써진 그대로 씨알의 의미를 서평자가 대신 요약하면, 씨알이란 진보의 역사를 끌고 가는 주체, ‘고난의 역사와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의 역사’의 주체이다. 서평자는 이 책에서 가장 기억나는 함석헌의 말이 있어서 인용한다. “저항하는 것이 사람이고, 저항할 줄 모르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334쪽) 서평자는 함석헌을 현대 생명사상의 기초를 다져준 지식인으로 평가한다. 나의 이런 평가는 전적으로 이 책을 읽고 나서 생겼다. 함석헌의 생명의 원리는 첫째 자연적이며, 둘째 스스로 드러나며, 셋째 환경에 맞서 고난하며, 넷째 자유로우며 능동적이다.(321-8쪽) 즉 생명 자체가 평화의 근원임을 보여준 것은 함석헌 철학의 역사적 혁명이었다.

 

4. “다시 읽는 한국현대철학의 탄생을 위하여

 

서평자는 이 책 <처음 읽는 한국현대철학>을 꼼꼼히 읽으면서 새로운 시각으로 나의 한국을 바라볼 수 있었다. 내가 몰랐던 것이 너무 많았고, 내가 아는 척 한 것이 너무 많았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 책은 단순히 한국의 현대철학사를 나열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사는 삶의 이유를 스스로 묻게 해주었다. 철학은 답변이 아니라 질문이라는 점을 정말로 실감하게 해 준 책이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여름휴가 동안 한번 읽어 보시도록 주변 사람들에게 강하게 추천한다.

 

한마디 더 붙여보자. 2017년 7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름 학회는 <동학>을 주제로 열린다고 들었다. 이번 학회의 주제를 토대로 하여 “처음 읽는 한국현대철학”에서 “다시 읽는 한국현대철학”의 탄생이 있기를 한 번 더 강하게 기대한다. i) 서구의 사유를 배제하진 않지만 스스로 창발된 한국철학, ii) 자아민족주의에 빠지지 않는 한국철학, iii) 정서적 믿음이 아닌 엄밀한 지성에서 쌓아올려진 한국철학의 탄생은 이미 이 책 “처음 읽는 한국현대철학”에서 예고된 것이기 때문이다. <끝>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3

구태환

 

1.

최시형 기념비
(사진출처: 구태환)

 

원주역에서 자동차로 20분 거리인 호저면 송곡의 길가에는 기념비가 하나 서있다.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을 기리는 무위당(无爲堂) 장일순(張壹淳, 1928~1994)의 마음이 표현된 기념비이다. 여기에서 해월 최시형이라는 사상가에 관한 글을 시작한다.

 

기념비의 검은 돌에 희게 음각한 상단의 글은 “모든 이웃의 벗 崔보따리 선생님을 기리며”이다. 여기에서 ‘최보따리 선생님’은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을 가리킨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많이 배우지도 못해 품팔이로 생활해나가던 도중 나이 서른 다섯에 동학에 입도한다. 최시형이 입도한지 얼마 되지 않아 동학의 교주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는 조선 정부에 의해 처형된다. 모든 인간이 ‘천주를 모시고 있으며(侍天主 시천주)’, 기존의 질서가 전복되고 ‘다시 개벽(開闢)’되는 새 세상이 도래했음을 선포한 최제우를 조선의 기득권 세력은 ‘좌도난정(左道亂正. 사이비 도로 올바른 유학을 어지럽힘)’이라는 죄목으로 처형한 것이다. 최제우로부터 도통을 전수하여 세상에 동학사상을 전파할 임무를 띤 최시형은 ‘이단’으로 규정된 동학에 대한 탄압을 피해 각지를 떠돌 수밖에 없었고, 그때 언제나 등에 보따리 하나를 지고 다녔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성인 ‘최’에 ‘보따리’가 합쳐진 ‘최보따리’라는 별칭을 얻게 된 것이다.

 

이 글귀에서 필자의 눈길을 끈 것은 ‘모든 이웃의 벗’이라는 표현이다. 이 간단한 표현은 최시형의 사상과 행적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기념비 하단의 글을 살펴보면서 이야기해보겠다. 흰 돌에 검게 음각한 하단의 글은 “天地卽父母요 父母卽天地니 天地父母는 一體也니라 海月先生님 法說에서(천지는 곧 부모이고 부모는 곧 천지이니, 천지와 부모는 한 몸이니라. 해월선생님 법설에서).”로, 최시형의 사상을 압축적으로 잘 보여준다. 최시형은 모든 사람이 한울님을 모신 존재라는 최제우의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발전시킨다. 여기에서 ‘천주’는 한울님으로서 우주 만물의 근원, 시원, 출발을 가리킨다. 모든 것의 근원을 궁구해보면 거기에는 한울님이 있으며, 인간 개개인들도 자신의 근원을 따져보면, 부모→조부모→시조…→한울님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울님을 뜻하는 천지는 부모와 마찬가지로 나의 근원이다. 그리고 모든 인간이 이 근원으로서의 한울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한울님이며, 따라서 사람을 한울님처럼 섬겨야 한다(人是天 事人如天. 인시천 사인여천).” 모든 이웃은 나와 같은 근원을 가진 존재요, 나의 벗이요. 나의 한울님이다.

 

처형당하기 직전의 최시형
(이미지 출처: http://blog.daum.net/ky1002027/6582293)

 

최시형의 인간에 대한 존중은 특히 사회적 약자에 집중되어 있었다. ‘베 짜는 한울님’이라는 유명한 일화가 이를 잘 보여준다. 그가 청주의 서택순이라는 동학교도 집에 갔을 때 베를 짜는 소리가 들렸다. 이에 서택순에게 누가 베를 짜는 것인가를 물었는데, 최시형의 질문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서택순은 자기 며느리가 베를 짜고 있다고 답한다. 하지만 최시형에게 그 베 짜는 소리는 며느리의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며느리는 사람이고, 사람은 한울이니, 며느리가 베 짜는 소리는 한울님이 베 짜는 소리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어린아이에 대한 그의 언급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그는 특히 아이를 때리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는데, 아이를 때리면 아이에 깃든 한울님이 다치기 때문이다. 이처럼 당시 사회의 약자들에게도 한울님이 깃들어 있음을 설파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존중을 강조했다.

나아가 산에서 우는 새 소리를 듣고 ‘시천주’의 울음소리라고도 한다. 인간만이 아니라 우주 만물에도 우주의 근원인 한울님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의 모든 대상을 대할 때 한울님을 대하듯 해야 한다. 그 대상에는 음식도 포함된다.

 

2

우리는 밥 없이는 살 수가 없다. 밥은 그야말로 하늘과 같은 존재이다. 따라서 한때 한국 사회의 병폐를 날카롭게 지적했던 시인 김지하의 “밥은 하늘입니다”라는 시구는 어떤 해설도 필요없이 우리에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이 시구의 연원을 따져보면, 김지하의 스승 장일순 그리고 최시형에게 닿게 된다. 우주 만물에 한울님이 깃들어있다는 최시형의 사상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우주 만물에 한울님이 깃들어 있다면, 우리가 접하는 밥, 먹을거리에도 한울님은 깃들어 있다. 따라서 우리가 먹는 음식은 한울님이기에, 최시형은 “곡식은 천지의 젖이다”고 한다. 아이가 어머니의 젖으로 살아가듯이 우리는 천지가 주는 곡식을 먹고 살아간다.

 

장일순의 제자 부부가 운영하는 원주 한 식당에 걸려있는 장일순의 글씨
(사진출처: 구태환)

 

이처럼 우리가 먹는 곡식, 즉 밥이 한울이므로 밥을 먹는 행위는 곧 한울님을 접하는 행위이다. 최시형은 이를 한울님으로써 한울님을 먹이는 행위, 즉 ‘이천식천(以天食天)’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밥을 먹는 행위는 단순히 주린 뱃속을 채우는 행위를 넘어 한울님을 접하는 행위이다. 한울님은 우주의 근원이고, 우주의 진리이다. 따라서 최시형은 “모든 일을 아는 것은 밥 한 사발을 먹는 것에 달려있다(萬事知, 食一碗. 만사지, 식일완).”고 한다. 위의 사진에 나오는 장일순의 글 “일완지식 함천지인(一碗之食 含天地人. 한 사발의 밥에는 하늘과 땅과 인간이 담겨 있다)”은 최시형의 이 말을 변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 사발의 밥에 우주의 근원, 진리가 담겨 있으니, 밥 먹는 행위는 진리에 접근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흔히들 우주의 근원, 진리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학문 등 수행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수행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기 때문에, 결국 생존을 위한 노동으로 인해 시간과 여력이 부족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학문과 수련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최시형이 제시하는 수련은 아주 단순하다. 밥에 담긴 한울님을 접하면 된다. 물론 밥을 짓는 과정, 밥 먹기 전에 한울님께 고하는 행위 등 몇 가지 격식을 갖출 것을 요구하여, 한편으로는 번거롭게 여겨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낳기는 한다. 하지만 “밥이 한울이다”라고 입으로 떠들지 않더라도, 쌀 한 톨을 얻기 위해 수많은 땀을 흘린 노동하는 민중들에게 이미 밥은 한울과 같은 존재이며, 그러한 밥을 대할 때 요구되는 약간의 격식은 결코 번거로운 것이 아니리라. 밥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땀 흘리지 않고 밥을 얻는 이들의 그것과는 애초에 다를 수밖에 없다. 최시형은 그러한 태도에 격식을 더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노동하는 인민들이 진리에 접근할 길을 열어준 것이다.

 

해월이 관군에 체포된 곳(해월피체지), 원진녀의 생가
(사진출처: 구태환)

 

최제우가 열고 최시형이 넓힌 이 길을 그때까지 진리로 나아가는 길을 독점했던 조선 사회의 기득권자들이 좋아했을 리가 없다. 진리에 대한 접근권은 세상을 해석하고 운영할 권리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기득권자들의 탄압은 이어졌고, 최시형은 탄압을 피해 조선 각지의 길을 떠돌았다. 그 결과 동학사상을 널리 전파했고,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사건을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모든 이웃들과 벗하여 ‘다시 개벽’된 세상을 맞이하려는 그의 꿈은 실현되지 않았고, 결국 위 사진 속 원진녀의 집에서 인생행로를 끝마친다. 이곳은 최시형 당시 동학교도인 원진녀라는 사람의 집으로서 최시형이 관군에게 체포된 곳(이곳을 ‘해월피체지’라고 한다)이다. 이 생가는 1990년 원주의 ‘치악고 미술동우회’에서 복원한 것으로, 첫 사진의 기념비는 바로 이곳 초입에 세워진 것이다. 최시형이 꿈꾸던 ‘다시 개벽’된 세상에 대한 꿈은 이곳에 기념비를 세우고, 피체지를 복원하고, 그의 말을 실천해나가는 여러 사람들에 의해 다시 꿈꿔지고 있는 것이다.

 

에필로그

원래는 해월 최시형과 함께 무위당 장일순도 다룰 예정이었다. 장일순은 ‘걸어다니는 동학’(전호근, 한국철학사, 메멘토)이라고 불릴 정도로 동학적인 삶을 살았으며, 앞에서의 해월 기념비 건립, 원진녀 생가 복원, 글씨 등에서 보이듯이 최시형에 대한 그의 애정이 각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사상가를 한꺼번에 다루기에는 지면이 부족했다. 이번에는 먼저 해월 최시형에 대해 이야기 하고, 무위당 장일순은 다음 기회에 다루기로 한다.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기고자: 구태환(한국철학사상연구회)

최한기의 인체론과 관련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본 분과에서 동학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으며, 배타적 소유권에서 벗어난 ‘인권’의 가능성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 다음에는 “신남철(이병태)”의 글이 이어집니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이지

 

1.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결정을 선고하였다. 헌법과 법률에 따라 부여된 공적 권한을 사적으로 남용하여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였고 헌정질서를 유린하였기 때문이다. 선고를 하였던 재판관이 모두발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국가기관의 존립근거는 헌법에 있고, 그 헌법을 만들어 내는 힘의 원천은 바로 국민이다.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파행적인 정치체제와 국정운영이 낳은 폐단을 버텨내는 것은 국민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그 고단한 일상에 함몰되지 않았다. 자기 삶에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고자 하는 의식은 시민의 촛불이 되어 광장을 조용히 밝혔고 강하게 연대하였다. 이를 두고 촛불혁명이라고도 하고 시민혁명이라고도 하며 민주주의의 승리를 감격해한다. 충분히 감격할 일이다. 그러나 혁명은 무혈이건 유혈이건 파괴를 본질로 한다. 이제 무너뜨린 그 자리에 건설을 시작해야 할 때이다. 감격에 취해있기에는 우리 앞에 놓인 숙제가 너무 많다.

 

탄핵심판선고 / 광화문촛불
(사진출처: 연합뉴스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

우리 역사에서 대통령의 탄핵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탄핵된 대통령은 또 있었다. 바로 이.승.만. 우리는 대부분 그를 ‘초대대통령’으로 기억한다. 1948년 정부수립과 동시에 그는 대한민국의 초대대통령으로 취임하여 1960년 4월까지 3대에 걸쳐 연임한다. 그리고 4.19 혁명 직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다. 그 때 이승만은 탄핵된 것이 아니라 하야(下野) 형식을 취했다. 그렇다면 그가 대통령으로서 탄핵되었다는 것은 어떤 사건을 두고 말하는 것인가?

 

이승만이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전에 우리 역사에서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던 이가 3명 있었다. 그 중 첫 번째가 손병희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에 이와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이 기획되었다(<조선독립신문>제2호, 1919년 3월 3일자 보도). 그리고 국내외 여러 곳에 임시정부가 세워졌는데, 그 가운데 러시아령 대한국민의회정부가 가장 먼저 임시정부수립을 선포하였다(1919. 3. 21). 이 곳은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이 외에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던 임시정부가 3곳이 더 있다. (당시 여러 임시정부 중 한성정부(1919. 4. 23)에서는 대통령격인 집정관 총재에 이승만이 추대되었다.)

 

이후 국내외에 다수로 분열되어 있던 임시정부를 통합하여 하나의 통합대한민국임시정부를 상해에 두게 된다(1919. 9. 6). 통합되기 전 다수의 임정 가운데 한 곳이었던 상해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에 수립하면서(4월 13일 언론에 공포),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결정하고 <대한민국 임시헌장>(10개조)를 제정하여 민주공화제를 채택하였다. 처음에는 내각책임제였는데, 이후 통합하면서 임시헌법을 개정하여 전문을 포함한 8장 57개조의 민주공화국 헌법을 만들었다(1919. 9. 6). 개정된 헌법은 대통령중심제와 의원내각제를 절충한 대통령제를 채택하였는데, 이 헌법이 보장하는 임시정부의 초대대통령이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이 손병희 다음에 대통령으로 불린 두 번째 인물이라면, 세 번째가 박은식이다. 1920년경 박은식은 독립운동가로서 상해 임시정부를 적극 후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임정은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을 비롯한 갖가지 문제를 두고 내부 분열이 심화되어 있었다.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젊은 독립운동가들이 박은식을 차기 지도자로 추대하였고, 박은식은 ‘임시대통령 불신임안’, ‘임시대통령 유고안’, ‘임시대통령 탄핵안’ 등이 걸려 있던 이승만 문제를 일단락지은 후 임시정부 2대 대통령으로 추대된다(1925. 3). 그러나 박은식은 곧바로 개헌하여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제를 신설해 내각책임제로 바꾼 후 5개월간의 대통령직을 사임한다. 이후 1948년 정부수립 후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까지 우리 정부에서 대통령으로 불린 인물은 없었다.

 

이승만은 초대대통령을 두 번 역임한 셈이다. 통합임시정부 초대대통령과 대한민국정부 초대대통령. 그리고 그는 임시정부초대대통령으로서는 탄핵당했고, 대한민국초대대통령으로서는 하야 후 망명하였다.

 

손병희 / 이승만 / 박은식
(사진출처: 네이버)

 

3.

20세기 우리의 독립운동은 두 가지 문제를 떠안고 있었다. 하나는 외세의 위협과 침략으로부터 자주독립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일로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정치사회체제를 건립하는 일이었다. 군주를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왕조체제와 신분질서체계는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해가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물론 군주제와 신분제의 모순에 저항하고 이를 전복시키는 혁명의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어 모든 백성들이 이른바 시민의식을 고취할 만한 확장된 경험의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외세의 식민통치를 받아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데에 요구되는 이념과 체제는 밖으로부터 그리고 위로부터 주어졌다. 백성들은 여전히 신분제의 굴레 속에서 타고난 신분적 제약을 운명으로 받아들였고, 통치체제에는 군주제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민주의 개념과 의식이 성장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어떠한 정부형태의 수장도 왕의 다른 이름으로 간주되기 십상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시대의 독립운동가들은 대중계몽과 교육운동에 헌신했었던 사람들이 많다.

 

박은식(朴殷植, 1859~1925) 역시 경술국치 이후 만주로 망명하기 전에는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활동하면서 많은 논설을 발표하고 학교 설립과 교사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일제의 침략위협이 강하게 압박해올수록 그는 개혁론을 주창했었다. 제도와 형식의 개혁 이전에 국민 개개인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가오는 새로운 사회에서 책임 있게 주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먼저 배워야 한다고 하는, 일종의 교육을 통한 의식개혁을 도모한 것이다. 군주제 몰락 이후 민주공화의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였기에, 국민 개개인의 의식의 개화가 가장 시급한 일이었다. 새로운 사회를 감당할 수 있는 의식이 자생할 수 있는 역사적 경험을 갖지 못한 이들에게 교육은 수단으로서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지배계층이 전유하다시피 하였던 교육의 대상을 확대하고 어려운 한문이 아닌 국문을 사용하여 속도감 있는 교육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또한 그는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전통적 유가지식인들이 스스로 개혁할 것을 촉구한다. 본래 유학의 정신은 군권을 존중[尊君權]하는 데에 있지 않고 백성을 중요시하는[民爲重]하는 데에 있음을 지적하면서 전통성리학자들이 갖는 제왕주의적 사고를 비판하고 “공자의 진정한 정신을 계승하고 이 학문의 공덕을 발휘하여 백성에게 행복을 주고자 한다면, 이것을 개량해 맹자의 학문을 넓혀서 인민사회에 널리 미치는 노력을 해야”한다고 제안한다. 전통적 사고방식의 본래성을 회복하여 민주공화적 의식으로의 개혁을 도모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사고의 바탕에는 양명학이 있다. 그의 개혁론은 양지가 주체가 되는 실천적 변혁이다. 더불어 그는 의식의 개혁과 성장이 선행되지 않은 채 제도와 형식의 변화가 일어난다면 새로운 제도와 형식은 구체제 의존적인 의식에 의해 파행적으로 운영될 것임을 예상하고 그 위험을 경계하였다.

 

1911년 만주로 망명한 후에 박은식은 역사서 집필에 주력하며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여 항일투쟁를 적극 후원하였다. 그가 저술한 『한국통사(韓國痛史)』(1915)는 1864년부터 1911년까지 한국의 애통한 역사, 그러니까 일제침략사를 중심으로 서술한 것이다. 그는 최근의 우리 역사를 동포 한 사람 한 사람이 읽고 제대로 이해하기를 간절히 바랬다. 이 책은 국내외에서 크게 반향을 일으켰고 일제는 이에 당황하여 조선사편수회를 설립하게 된다. 1920년에 저술한 『독립운동지혈사(獨立運動之血史)』는 1884년 갑신정변부터 1920년 독립군전투까지 일제침략에 대한 한국인의 독립투쟁사를 3.1운동을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여기서 동학농민혁명을 ‘우리나라 평민의 혁명’으로 평가하고, 의병을 자세히 다루면서 민중의 역할과 민권의 중요성을 두드러지게 강조한다. 이처럼 혁명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개진하면서 3.1운동의 의미를 밝히는 데에 주력하였다.

 

그는 임시정부에 전면에 나서서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신한청년단의 기관지를 맡았고, 여운형 등이 중심이 되어 있는 상해거류민단의 활동을 지도하였다. 상해임시정부의 내부분열을 수습하기 위하여 부득이 대통령직을 받아들였던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그는 통합된 민족의 독립과 독립된 대한민국에서 민주와 공화의 정신을 민중 속에서 실현할 수 있는 체제를 고민하고 준비하였던 것이다.

 

박은식이 작성하고 한국 민족대표 26인의 명의로 발표한 선언서.  
(출처. 네이버)

 

4.

탄핵된 대통령들은 대통령을 왕의 다른 이름쯤으로 여겼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통령의 이름으로 군림하던 군주를 끌어내린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패한 독재자를 처단하기 위함이 아니라 민주공화의 정신을 실현하는 일이다. 본래적으로 평등한 이들이 자유롭게 연대하여 본래의 평등을 사회적으로 구현하려는 것이다. 신분제적 질서를 바탕으로 군주가 통치하는 왕조체제는 이미 종식되었다. 그러나 체제는 변하였어도 의식이 여전하다면 유사왕조체제가 운영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20세기 초 독립운동가들은 끈질기게 고민하였다. 독립이후 건설해야 하는 민주공화적인 대한민국을 말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해방 후에도 오랜 시간동안 변형된 유사왕조체제가 거듭되었다. 또한 역시 자주적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끈질기게 분투해왔다. 그리고 지금 오랜 왕조의 종식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20세기 초 독립운동가들이 했던 민주와 공화의 고민은 지금 우리의 고민이다. 

 

기고자: 이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이화여대)

왕양명 철학과 최한기 철학을 연구하여 석박사를 받았다. 철학은 역사와 더불어 생성되고 철학 연구도 역사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현재 이화여대에서 동양철학을 강의하고 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 다음에는 “최시형과 장일순”(구태환) 에 대한 글이 이어집니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 박영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