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급 문화와 B급 철학 [피켓2030]

아래 글은 우리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최근 출판한 [B급 철학](알렙, 2016)을 읽고 대학교 2학년 학생이 보내온 서평입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리고, 다른 측면에서 이 책에 관한 서평을 쓰고 싶으신 분들도 언제든 대환영이니 원고를 보내주시면 검토해서 게재하고 약소하지만 소정의 원고료도 드립니다.


권유리(건국대 건축학과 2학년)

2014년 1000만 관객을 이끌어낸 <겨울왕국>. 이 애니메이션에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열광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겨울왕국의 주인공 ‘엘사’와 엘사의 테마곡 ‘Let it go’는 이미 아이들에게 영웅과 다름없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아이들의 이런 공감을 이끌어 냈는가? 이처럼 질문을 갖는 것이 바로 대중문화를 제대로 마주하게 되는 첫걸음이다. 밤늦게까지 학원을 다니는 학생들, 집안일과 회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현대인들에게 주인공 ‘엘사’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부르는 ‘Let it go!’는 그들의 억압된 일상으로부터의 해방을 대신해준다. 많은 사람들은 ‘엘사’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엘사’라는 캐릭터는 [피로 사회](한병철 저)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안 되는 ‘규칙사회’에서 모든 것이 가능한 ‘성과사회’로 전환된 사회에서 느끼는 현대인들의 단절감, 우울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공감하며 때론 멀리 떨어진 입장에 서서 캐릭터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자신도 모르게 제시한다.

정해져 있는 결말과 흔한 스토리, 한회만 봐도 앞뒤 내용까지 이해할 수 있는 드라마 <상속자들>을 보자. 안방에 앉아 동생과 보고 있자면 현실과 동떨어진 드라마 속 상황에도 분개하며 “재는 왜 저래?”, “친아빠 맞아?” 라는 말을 주고받는 것은 흔한 모습이다. 이런 단순한 질문 속에서 우리는 공자의 ‘효 사상’과 연결고리를, 또 ‘부의 추구’에 대한 연결고리를 스스로 찾아 낼 수 있을까?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되물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대중매체를 접할 때 주체가 아닌 하나의 소비자가 될 뿐이다.

일본 만화 <진격의 거인>은 기괴한 스토리와 암울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수많은 독자들을 가지고 있다. 인간을 잡아먹는 거인과 이를 막기 위해 거대한 장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 정말 생존을 위해 살고 있는 만화 속 캐릭터들에게 정의와 선(善) 같은 인간의 기본적 권리는 무시될 수밖에 없다. 언제라도 잡아먹힐 수 있다는 공포에 떠는 인간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방법은 소수들에 의한 철저한 지배이다. 비현실적이고 잔인한 설정에도 많은 사람들이 전율을 느끼며 계속해서 이 애니메이션을 찾는 이유는 일본과 한국인 속에 잠재되어있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 단 한가지의 목적을 위해 나아가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마치 황제군의 모습으로 비추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진격의 거인>은 사람들 속에 잠재되어있는 피해의식을 자극한다.

지금과는 다르게 오랜 시간동안 문화는 대부분이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들, 즉 부르주아 계층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것이었다. 현재는 기술, 미디어, 언론, 오락, 드라마, 영화 등의 발달로 문화는 훨씬 더 널리 보급되었고 일부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산유물이라는 타이틀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아직도 클래식과 오페라, 전통음악은 고급문화로, 소위 말하는 대중문화는 깊이가 덜한 문화로 무의식중 인식된다. 친구와 함께 카페에서 칸트의 [순수 이성비판]과 쇼펜하우어, 헤겔을 찾는다면 지적인 대화이고, 어제 저녁에 보았던 드라마를가지고 이야기한다면 수준 낮은 대화라고 할 수 있을까? 과연 문화에 A급과 B급으로 나눌만한 척도가 있는 것일까?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문화는 다름의 차이일 뿐 더 우월하고, 더 낮은 문화는 없다. 오히려 대중문화는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시뮬라시옹’의 프레임으로 우리를 이끌어 다양한 공감과 동질감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만화와 게임, 영화, 애니메이션 같은 대중문화를 문화로 사유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수고가 따른다. 바로 ‘자기화’의 과정이다. 대중문화는 좁게는 자신을 넓게는 대중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 이 거울을 바로 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왜?”라는 질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대중문화는 필자의 말처럼 햄버거 포장껍데기처럼 단순 소비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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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가? [피켓2030]

[피켓2030] 코너를 새로 시작합니다. 20대/30대의 사회에 대한 분노와 고발의 목소리를 담아내려 합니다. 회원분들께서는 주변의 젊은 지인들에게 많은 소개 부탁드립니다. 리포트로 작성한 글이든, 페북이나 다른 SNS에서 썼던 글이든 우리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나름의 전망을 제시하는 글이 있다면 언제든 추천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본 코너의 정치적인 의견이나 입장은 전적으로 필자 개인의 견해이며, 본 웹진의 공식적인 입장과는 다를 수 있다는 점도 알립니다.


나는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가?

– 한병철의 ‘피로사회’로 바라본 내 자신 –

최민국(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3학년)

하루하루가 피곤하다. 언제부터인가 이 피로감은 가실 생각을 하질 않는다. 잠을 푹 자고 일어나도 피곤이 몸에 걸린 족쇄처럼 나를 따라 다닌다. 이 피로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무것도 제대로 하고 있는 건 없다. 모든게 귀찮고 아무것도 하기 싫다. 공부도 노는 것도 전부 귀찮다. 그냥 매대에 널린 생선들처럼 침대에 가만히 누워 빈둥대고 싶다. 뭔가를 한다는 것에 대한 의욕이 없어 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내 자신이 한심해지고, 내 자신을 구박한다. 남들과 나를 비교하고 초라해진다.

왜일까? 나는 왜 이렇게 변해 버린 걸까? 시간을 거슬러 고등학교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그때는 하나의 확고한 목표가 있었다. 대학에 가는 것. 수능을 잘 보는 것. 이 두 가지 목표만을 향해 나를 채찍질 해왔다. 가끔은 내가 이렇게 공부해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고 그럴 생각을 할 시간조차 부족했다. 그렇게 나를 다그쳐 달려온 길에는 몇 가지 타이틀이 놓여졌다. 그리고 그 길은 그 곳이 끝이었다. 그 길은 내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전혀 알려주지 못했다. 나는 내가 정작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 알지도 못했고 그저 이 허울만을 위해 달려 왔던 것이었다. 그때는 거창한 목표였던 줄 알았던 그것이 실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목표를 이루게 되면 나의 삶도 자연스레 다음 과정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다. 나는 어느새 사회의 한가운데 덩그러니 던져져 있었고 그 속에서 나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아이와 같이 어디로 갈지를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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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온 인생은 어쩌면 한병철이 제시한 ‘성과주의의 피로사회’에 충실한 삶이 아니었나 싶다. 내게 세상은 언제부터인가 ‘너는 할 수 있다.’ 라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개천에서 용 나듯 바닥부터 시작하여 성공한 사람들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너희도 노력하면 이렇게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아프다하면 ‘힐링’이라는 명목으로 다 괜찮다고 말했다. 그때는 원래 아픈 거라면서. 노력하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회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하도록 재촉했다.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있으면 뒤쳐지고 노력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성공과 실패에 대해 나는 ‘노력’이 부족한 나 자신을 탓하게 됐다. 성과에 매몰된 삶을 살았던 나는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사회에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 이전에 나의 결점을 찾게 된 것이었다. 처음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똑바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더하여 가장 중요한 점은 이러한 일들을 해 가는데 있어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전혀 고려가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자신에 대한 성찰도 없이 그저 사회가 제시한 목표를 따라 충실하게 일을 수행하는 그런 삶을 살아 왔던 것이다. 또한 이런 삶속에서 내 자신을 끊임없이 착취했고 그 끝에 탈진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 상태까지 도달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한병철은 나와 같은 사람들이 사색할 여유를 가지고 긍정적 피로를 만들어 낸다면 더 이상 이러한 성과에 집착하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좀 아쉽다. 지금 이 사회를 살아가는 청년들이 자기 자신의 성찰과 사색이 부족해서 이렇게 성과를 만들어 내는데 집착하는 것일까?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돌아 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이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나는 오히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달려가는 사람들이 좌절하는 모습을 보았다. 왜 그렇게도 노력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자신의 꿈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야하는 것일까? 이러한 상황은 성과에 대한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구조가 문제들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에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도 합당한 보상을 받을 수도 없는 환경에서 사색을 통한 성찰만이 힘을 발휘하기는 어렵다. 쉽게 말하자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더라도 돈벌이가 안 된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 일만을 하면서는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사회는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마치 대기업에 들어가거나 사회에서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돈을 많이 버는 것을 이상적인 삶의 형태로 만들어내고 사람들이 그 방향을 향해 달려나가기를 강요한다. 하지만 사회가 제시하는 주류에 속하는 길은 너무도 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길에 들기 위해 열심히 경쟁하고 다른 사람들을 누르고 밟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 길에 들어서지 못한다면 삶의 질이 현저하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사회와 기업의 좋은 부품이 되기 위한 레이스같다.

이런 치열한 레이스 속에서 내가 여유롭고 싶다고 여유로워 질 수 있을까? 그렇다면 과연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한 가지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사회 구조를 하나하나씩 바꾸어 나가는 것. 말로는 너무나 쉽다. 하지만 요즘 들어 무력감을 느끼는 것은 이러한 구조가 바뀔 수 있냐는 의문이다. 사람들이 이러한 상황을 모르고 구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왜 움직이지 못하고 이러한 상황을 바꾸지 못하는 것일까? 결국은 자신이 당장 먹고 살길이 없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하루 살기 급급한 상황에서 결국에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내 눈앞에 던져진 문제들뿐일 것이다. 더 큰 문제들을 알더라도 애써 그것들을 무시하고 다시 일상의 문제들로 눈을 돌린다. 악순환의 반복이다.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것이다. 무척이나 절망적인 상황이 아닐까 싶다.

그렇지만 절망할 수는 없다. 이 상황 속에서 적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무것도 없지는 않다. 먼저 우리는 이 문제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들이라고 치부해 버릴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이 문제들을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질 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불씨라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 사회를 똑바로 보고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것들에 대해 의문을 가지며 잘못된 것들에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잘못된 것들을 잘못된 줄 모르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은 없게 하여야 한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을 통해 자기 자신을 확립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렇게 서서히 작은 일상의 사소한 부분부터 바꾸어 나간다면 지금 당장 바뀌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우리의 미래가 그리 절망적이진 않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성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즉 우리가 생각한 것을 행동으로 옮길 때에만 어떤 것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바꿀 수 있는 것은 우리다. 우리가 변화 하지 않으면 바뀌는 것은 없다. 나는 무엇을 위해 노력하는가? 오늘도 질문을 던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