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 부회장 구속영장 기각에 대한 유감과 분노 [시대와 철학]

이정호(방송대 문화교양학과) 

 

누군 3만원의 떡을 감사표시로 줘도 범법이고

누군 400억의 돈을 갖다 바쳐도 범법이라 단정할 수 없다니

형식논리적 법적용의 배후에 여전히 힘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되네요.

 

역사와 현실, 시대정신을 망각한 지식 모리배들에게

논리는 그저 탐욕의 노예일 뿐입니다.

역사는 그들의 부역을 심판할 것입니다.

 

2500년전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플라톤의 <국가> 338c)라고 외친

소피스트 트라쉬마코스의 망령에 맞서

약자들이 싸워온 정의의 역사에

왜 피가 배어있는지 새삼 뒤돌아 보게 되는 오늘입니다.

 

정의의 씨앗

열매를 맺지 않아도 이어지는 그  알 수 없는 신비!

아마도 불멸의 투쟁과 연대 그리고 희망 때문일 것입니다.

끝내 우리는 정의의 열매를 만끽하게 될 것입니다.

끝내 우리는 이길 것입니다.

 

spes immortalis

-희망은 불멸이다

 

 

우리 모두의 삶과 플라톤의 ‘동굴’ [평이의 궁시렁]

‘우리 모두는 스스로 세상과 이 사회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똑같은 지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모두의 지적인 능력도 때론 망각되거나 왜곡되면서, 그 어떤 외부의 상황과 조건에 눌려 변형될 수밖에 없다.

플라톤이 자신의 대화편 [국가] 7권에서 제시하는 ‘동굴’ 이야기는 바로 이런 외부의 조건에 대한 재미난 비유이기도 하다. 태어날 때부터 동굴에 갇혀 동굴의 벽면에 비치는 현란한 그림자의 세계를 보며 자라온 죄수들에 대한 이야기. 그 동굴 속에서 죄수들은 동굴 밖의 세계에 찬란히 진리의 태양(플라톤에게는 ‘좋음의 이데아’)이 빛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동굴 입구에서 타오르는 횃불에 의해 생겨나는 현란한 그림자의 세계만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과 사회, 세계에 대해 판단하고 토론하며 산다.

아마 이 비유를 들으면, 당연히 여러 영화의 이미지들이 떠오를 것이다. 기계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매트릭스’라는 가상현실을 주입받으며 알처럼 매달려 사육되는 미래세계를 다룬 영화 <매트릭스>부터, 생방송 세트장에서 어린 시절부터 방송을 위해 사육되는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트루먼 쇼>까지.

그런데 과연 이런 이야기가 단지 영화 속 이야기에 불과한 것일까? 사실 우리도 내가 어찌할 수 없이 속하게 된 수많은 외부적인 조건에 휘말려 자신의 자아와 정체성, 심지어 욕망까지도 좌우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닐까?

때로는 ‘한국’이나 ‘대한민국’이라는 자부심 강한 정체성을 부여받으며, 국가가 제공한 다양한 감정과 자부심에 휘둘려 한때 우리도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우리들의 젊음을 그 자랑스럽다 여긴 국가에 헌신하지 않았던가? 또한 지금도 ‘남성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엄마’라는 이름으로 무언가 사회가 강요하는 틀에 맞춰 스스로는 자유롭다고 착각한 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사실 우리는 모두 동등한 지적 능력을 갖고 태어나지만, 동시에 비슷한 사회적 환경과 조건 속에서 태어나 엇비슷한 상황 속에 휘말려 나름의 시대적인 동굴 속에서 세상과 사회에 대해 판단하며 산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 모두는 결코 세상을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보며 살 수 없다.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현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생각이나 관념 더 나아가 그런 제도들’까지도 지칭하는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지적인 능력을 늘 그렇게 굴절시킨다. 누구보다도, 어느 시대보다도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우리도 사실상 여전히 우리 외부의 그 어떤 동굴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에서는 노예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우리 외부의 미디어 환경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대중매체가 제공하는 이미지들이 조금이라도 왜곡되고 굴절된다면 그 파괴력은 막강하다. 일부 보수 언론 매체에 사로잡힌 보수적인 어른들, 또 매순간 자극적이고 성적인 이미지들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러한 영향력은 쉽게 감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플라톤이 말하는 진리의 태양을 볼 수 없는 것일까? 사실 그렇다. 오늘날 현대 철학의 지형은 더 이상 그 어떤 명확한 진리의 세계도 확인할 수 없고, 때로는 그런 진리를 내세우는 일이 폭력적이고 전체주의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비판한다. 예를 들어 무언가 진리를 내세워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철학은 마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내세웠던 과거의 마르크스주의처럼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어느 정도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럼에도 문제는 우리 현대인들이 이런 진리 추구의 방향성을 상실한 채, 지금의 현실을 어쩔 수 없이 수긍하기만 한다는 데 있다. 새로운 사회를 꿈꾸던 희망은 그저 헛된 이데올로기였기에,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최선의 체제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철학이란 늘 자신의 시대에서, 스스로가 갇혀 있는 시대의 ‘동굴’을 감지하면서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인을 꿈꾸려는 지적인 노력의 일환이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진리를 제대로 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모두 자신이 갇혀 있는 ‘동굴’의 실상을 몸소 경험하며 나름의 괴로움을 공유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시대적인 괴로움을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다면, 이로부터 시작해 ‘동굴’로부터 탈출하려는 우리들의 지적이고 실천적인 노력은 여전히 계속될 수밖에 없다.

나 역시 우리가 함께 속해 있는 ‘동굴’의 상황을 몸소 느끼며 경험한다. 때때로 내가 느끼는 괴로움과 외로움, 삶의 고통과 고뇌, 물질적인 고민과 절망 때문에 늘 혼자 안으로만 썩어 문드러지는 내 모습을 본다. 그럼에도 이런 나의 모든 괴로움이 나만의 문제는 아닐꺼라 생각하며 다시 딛고 일어선다. 아마도 이런 우리의 모습이 서로 만남과 실천을 이루어낼 때, 조금이나 동굴이라는 상황은 변화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은 채.

사진출처 :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멋진 학생.

사진출처 :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멋진 학생.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보고 플라톤의 동굴과 연결한 발표문 중 캡쳐.

소크라테스와 시민불복종의 문제[고전은 숨쉰다]

이기백(정암학당 연구원) 

시민불복종과 관련한 소크라테스의 역설.
공자는 “나이 일흔에는 마음이 하고 싶어 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았다(논어 위정편 4장)”고 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바로 그 나이에 사형이라는 극형을 선고 받고 독배를 든다. 과연 그는 그런 극형을 선고받을 만큼 뭔가 심각하게 법도를 어건 것일까? 그의 죄목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나라가 믿는 신을 믿지 않고 다른 새로운 영적인 것들을 믿는다는 것이었다. 이 죄목으로 봐서는 그가 윤리적· 종교적인 면에서 심각하게 법도를 어겼다는 혐의를 받은 셈이다.
그러나 이 죄목은 구실이고, 그가 기소된 진짜 이유는 당시 집권을 한 민주정권의 정적들 중 일부를 이들이 젊은 시절에 소크라테스가 교육시킨 적이 있기 때문이라는 설도 유력하게 제시되곤 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죄목이 부당하다고 여겨 법정에서 무죄를 입증하고자 했고, 또한 선고 후에도 크리톤과 대화하는 가운데 배심원들의 판결이 정의롭지 못했다는 생각을 넌지시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크리톤≫ 50c, 54c). 하지만 그는 친구인 크리톤의 탈옥 권유를 물리치고 독배를 든다. 그가 탈옥을 거부한 이유는 ≪크리톤≫에서 접할 수 있는데, 여기서 그는 국가와 법의 명령에는 그것이 무엇이든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식의 견해를 제시했던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래서 그는 악법, 즉 정의롭지 못한 법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철학자로 이해되곤 한다.
하지만 ≪변론≫에서는 악법은 단호히 지키지 않을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접하게 된다. 이를테면 아테네 법이 철학하는 것을 금한다면, 소크라테스는 이에 불복종하고 철학함을 그의 사명으로 부여한 신에게 복종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여 준다. 그리하여 그는 시민불복종과 관련해 ‘소크라테스의 역설’이라 해도 좋을 큰 논란거리를 후세에 남겼다.
그가 보여준 일견 모순된 측면들은 그를 완고한 준법정신의 화신으로, 혹은 시민불복종의 선구로 해석되게 했고, 전문 학자들뿐 아니라 일반인의 수준에서도 격론을 불러일으켜 왔다. 과연 소크라테스의 실제 입장은 무엇일까? 그는 시민불복종을 어떻게 보는 것인가? 그는 악법이나 악한 법적 명령도 지켜야 한다는 보는 것인가, 아닌가?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은 소크라테스의 사전에 없다

악법도 지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악법도 법인가 하는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왜냐하면 악법도 법이라는 말은 악법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명시적으로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했음을 보여주는 전거는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더욱이 그는 당시 아테네 법이 악법이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크리톤≫ 54c).
그는 자신이 유죄판결을 받은 것은 법이 아니라 배심원들의 잘못된 판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그건 훗날 누군가가 ≪크리톤≫의 일부 내용을 참작해서 만들어 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가 ‘악법도 법이다’ 혹은 ‘악법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전히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지켜야 한다고 본 것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플라톤의 대화편인 ≪크리톤≫과 ≪변론≫은 이런 문제를 검토할 수 있는 일차적인 자료일 뿐 아니라, 우리가 왜 국가와 법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가, 우리에게는 시민불복종의 권리가 있는가 하는 정치철학적 혹은 법철학적 문제 뿐 아니라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윤리적 문제에 대해서도 깊은 성찰을 보여준다. 여기서는 위의 두 대화편을 악법 즉 정의롭지 못한 법이나 그런 법적 명령에도 복종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초점을 맞춰 살펴볼 것이다.

 

≪크리톤≫과 ≪변론≫에서 상충되는 측면들
≪크리톤≫과 ≪변론≫에서 시민불복종 문제와 관련해 상충된 것으로 보이는 점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우선 ≪크리톤≫ 자체 내에서 그런 점을 짚어보고, ≪크리톤≫과 ≪변론≫ 사이에서도 그런 점을 검토해보기로 한다.
≪크리톤≫은 의인화한 법률과 국가가 등장하는 지점(50a6)을 중심으로 전반부(46b-49e)와 후반부(50a-53a)가 구분된다. 후반부는 특히 복종의 의무를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여기서도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법률과 국가가 시민을 어린이와 노예에 비유하여 연설하는 대목이다(50c-51c). 그 중 일부를 인용해보자.
“조국이 무언가를 겪어내라고 지시하면 두들겨 맞는 것이든 투옥되는 것이든 잠자코 겪어내야 하며, 조국이 당신을 전쟁터로 이끌어 당신이 부상을 당하거나 죽게 되더라도 지시사항을 이행해야 한다. 이와 같은 것이 정의로운 것이다… 나라와 조국이 지시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행하거나, 아니면 정의로운 것이 본래 어떠한지에 대해 나라를 설득해야 한다”(51b-c).

여기서 ‘…무엇이든 이행하든가 아니면…설득해야 한다’는 구절은 해석하기에 따라 시민불복종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대체로 위 인용문은 국가와 법의 명령에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곤 한다. 이렇게 이해되는 게 옳다면 소크라테스는 정의롭지 못한 법적 명령에도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철학자가 된다.

그러나 ≪크리톤≫ 전반부에는 후반부와 상충되는 것으로 보이는 내용이 있다. 거기서는 정의의 원칙들이 제시되는데 가장 기본적인 정의의 원칙은 “결코 정의롭지 못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49b)는 것이다. 이 원칙에 따르면, 정의롭지 못한 법적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용인되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정의롭지 못한 짓을 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크리톤≫의 전반부와 후반부 사이에는 상충되는 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변론≫에서도 ≪크리톤≫ 후반부와 다른 논조를 접하게 된다. ≪변론≫에서 소크라테스는 철학―고발자들은 철학하는 일을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일이라고 말했다―을 그만둔다는 조건 아래 배심원들이 자신을 석방해주되 계속 철학을 하다가 붙잡히면 죽게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경우를 상정한다. 그리고 그는 이런 조건으로 자신을 석방하고자 한다면 배심원들보다는 철학함을 자신의 사명으로 부여한 신에게 복종하겠다고 단호하게 말한다(29c-d).
소크라테스가 해온 철학적 활동은 사람들이 몸이나 돈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혼이 훌륭하게 되도록 혼에 대해서 마음을 쓰도록 설득하는 것이었는데, 그는 이런 일 말고 “다른 일을 하진 않을 것이며, 설령 몇 번이고 죽는다 할지라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30a-c)라고 결연한 의지를 보인다.

이 예를 통해 우리는 정의롭지 못한 법적 명령에 대해선 단호히 복종을 거부할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접하게 된다. 이처럼 목숨보다도 철학을 더 귀하게 여긴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배심원들이 그를 석방해주되 철학을 금하는 판결을 내렸다고 해보자.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처신했을까? 너무도 분명하지 않은가?
그런데 철학을 금하는 법적 명령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불복종은 실제 상황이 아니라 단지 가정적 상황이다. 그리고 아테네의 재판 절차상 현실적으로는 배심원들이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을 금하는 조건으로 석방을 제의할 수도 그런 판결을 내릴 수도 없었다. 브릭하우스와 스미스는 이런 점을 주목하여 소크라테스가 시민불복종의 한 사례를 보여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견해를 편다.

그러나 우리는 철학 금지령의 예를 통해 소크라테스가 크게 정의롭지 못한 법적 명령에 어떤 태도를 취할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 예가 가정적 상황 속의 이야기라 하더라도 여기서 분명히 유추할 수 있는 것은, 현실 속에서 그가 크게 정의롭지 못한 법적 명령을 받았을 때 그가 단호히 복종을 거부했으리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의지는 ≪변론≫의 또 다른 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과두정의 주요 인물인 크리티아스와 카르미데스를 한때 교육시킨 바 있다고 해서 과두정을 옹호하는 인물로 오해받기도 했지만, 실은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30인 과두정권의 명령을 거부한 일도 있었다.
이 정권이 살라미스 사람 레온을 부당하게 사형에 처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를 포함해 다섯 사람에게 그를 연행해 오도록 지시했을 때, 그는 이 일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보아 연행에 가담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이 일을 회고하며 배심원들에게 “만약 그 정권이 빨리 무너지지 않았다면, 아마도 저는 이 일로 해서 처형되었을 겁니다”라고 말한다(32c-d).

이 예도 브릭하우스와 스미스는 시민불복종의 사례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적어도 시민불복종이 성립하려면 30인 과두정권이 적법하게 집권하고 적법하게 명령을 내렸다고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 정권이 적법하게 집권하거나 적법하게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하더라도, 레온의 예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적법성 여부와 상관없이 정의롭지 못한 명령에는 단호하게 복종을 거부했으리라는 것이다. 실상 그는 레온의 연행이 불법적인 일이어서가 아니라 정의롭지 못하고 불경건한 것이어서 명령을 거부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시민불복종과 관련해 소크라테스의 일관된 모습 찾기
적어도 ≪변론≫의 두 예와 ≪크리톤≫ 전반부에서 나오는 정의의 원칙은 소크라테스가 악법을 지켜선 안 된다는 입장, 즉 시민불복종의 입장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면 ≪크리톤≫ 후반부에 나타난 의인화한 법률과 국가의 입장 즉 법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식으로 준법을 중시하는 입장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크리톤≫ 후반부가 논란거리가 되는 것은 이 부분의 의인화한 법률과 국가를 소크라테스의 대변자처럼 봄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보게 될 때, 같은 소크라테스의 견해가 대화편의 전반부와 후반부에서 왜 달라졌는가가 문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점을 피하는 한 가지 방식은 후반부에서 의인화한 법률과 국가의 견해를 소크라테스의 견해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소크라테스는 법률과 국가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웨이스가 이런 관점을 취하고 있다. 그녀는 법률과 국가가 등장하는 후반부를 탈옥을 권유하는 크리톤을 설득하기 위한 ‘고상한 거짓말’ 즉 한갓 수사적 연설로 이해한다. 이러한 해석은 크리톤이 이해력이 부족하고 비철학적이어서 소크라테스가 그와 철학적 논의를 하는 것을 포기한 것으로 전제한다.

그러나 크리톤을 철학적 논의가 불가능한 인물로 보는 것이나, 소크라테스가 단지 설득만을 위해 자신의 생각과 다른 견해를 제시했다고 보는 것이 과연 옳은지는 의문이다. 소피스트들을 상대로 논쟁하는 때에는 이들의 논리를 역으로 이용해 설득만을 위한 논의를 전개하는 경우가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런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크리톤≫과 같은 플라톤의 초기대화편에서는 말이다.
그리고 웨이스의 해석에서는 ≪크리톤≫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단절적으로 보는데 이것도 적절한 이해로 보이지 않는다. 주의 깊게 살펴보면 소크라테스가 전반부에서 정의의 원칙에 관한 논의를 한 후에 후반부에서 그 원칙들에 근거해서 탈옥의 문제를 검토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는 ≪크리톤≫의 전반부와 후반부의 관계를 웨이스처럼 단절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연속적인 것으로 본다. 하지만 이런 해석들 사이에도 큰 관점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소크라테스가 시민불복종의 옹호자로서 일관된 모습을 지닌 것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이와 반대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우선 소크라테스를 시민불복종을 부정하는 철학자로 보는 해석부터 검토해보기로 한다.

브릭하우스와 스미스는 ≪크리톤≫의 전반부에 나오는 정의의 원칙도 ≪변론≫의 두 예도 시민불복종의 예가 아니라고 본다. 그들은 특히 정의의 원칙을 철저한 준법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하기까지 한다. 이런 해석은 일단 수긍이 잘 안 간다. 왜냐하면 “결코 정의롭지 못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은 정의롭지 못한 법적 명령에 복종해선 안 된다는 것을 함축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정의롭지 못한 법적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결국 정의롭지 못한 짓을 하는 셈이 되니 말이다.

그러나 브릭하우스와 스미스는 소크라테스가 정의롭지 못한 법적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정의롭지 못한 짓이 아니라 정의로운 일로 보았다고 해석한다. 법이 정의롭지 못하더라도 준법 자체는 정의로운 일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크리톤≫의 전반부와 후반부 다 철저한 준법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그 두 부분 사이에 상충되는 점을 해소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러나 문제는 소크라테스가 준법 자체를 정의로운 것으로 보고, 그래서 정의롭지 못한 법에 복종하는 것까지 정의로운 것으로 보았다는 그들의 해석이 옳은가 하는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변론≫의 두 예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적법하게 내려진 명령이라 하더라도 정의롭지 못한 명령에는 단호히 불복종할 의지를 갖고 있으며 실제로 불복종 행위를 할 철학자라는 것이다.

우리는 ≪국가≫ 1권의 논의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거기서 소크라테스가 트라시마코스에게 “그러나 그들(통치자들)이 제정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스림을 받는 이들로서는 이행해야만 하고, 또한 이게 정의로운 것이겠군요?”하고 묻는다. 이 물음은 옳게 제정되지 못한 법, 곧 정의롭지 못한 법을 지키는 것이 정의로운 것인지를 묻는 것인데, 논의 맥락을 볼 때 소크라테스는 이 물음에 대해 부정적 답을 갖고 있다.
즉 정의롭지 못한 법에 복종하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정의롭지 않은 것이라면 그로서는 불복종하는 것이 정의로운 일이 된다. 그러니까 ≪변론≫과 ≪국가≫의 예들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옳다면 ≪크리톤≫의 정의의 원칙도 시민불복종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는 게 적절하다.

그러면 브릭하우스나 스미스와 달리 소크라테스를 시민불복종의 옹호자로 보고, 웨이스와 달리 ≪크리톤≫의 전후반의 논의에 단절이 없다고 볼 때 이 대화편의 후반부는 어떻게 처리할 수 있을까?
크라우트는 ≪크리톤≫의 후반부에서 준법을 가장 강력하게 강조한 부분(50c-51c)이 “나라와 조국이 지시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행(복종)하거나, 아니면 정의로운 것이 본래 어떠한지에 대해 나라를 설득해야 한다”(51b-c)는 결론에 이르고 있음을 중시한다. 설득이라는 선택지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법에 대한 불복종의 여지를 남기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전반부에서 언급된 또 하나의 정의의 원칙, 즉 “합의한 것들은 이행해야 한다. 그것들이 정의로운 한에서.”란 원칙도 중시한다. ‘그것들이 정의로운 한에서’라는 단서는 불복종의 여지를 남긴다는 것이다. 크라우트의 견해는 주목할 만한 견해이긴 하나 그와 관련해 많은 논란이 있어서 여기서는 그 논의로 들어가는 것은 생략하고, 그 대신 기존의 해석과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모색해보기로 한다.

≪크리톤≫의 후반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크라테스가 “신이든 인간이든 더 훌륭한 자에게 불복종하는 것은 나쁘고 수치스런 것이라는 점을 나는 알고 있다”(≪변론≫ 29b)는 말을 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인용문에서 더 훌륭한 자에는 신과 인간에 더하여 법률이나 국가도 포함될 수 있을 텐데, 이들의 명령들이 서로 상충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분명 소크라테스는 더 상위의 훌륭한 자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그는 ≪변론≫에선 재판과정에서 철학할 것을 지시한 신의 명령에 복종할 것인가, 철학을 금하는 법적 명령(배심원들의 명령)에 따를 것인가의 기로에서, 그는 주저 없이 법적 명령에 불복종하고 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쪽을 택하고자 했다. 여기서 신의 명령이란 단순히 종교적인 의미는 아니라는 점을 언급해 두는 게 좋을 것 같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종교적인 신념을 위해 법적 명령에 불복하고자 했다기보다, 철학함이라는 보편적으로 가치 있는 활동을 위해 그렇게 했다. 그가 지키고자 한 것을 단순히 철학하는 일보다는 비판적 사고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 차원으로 확대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크리톤≫에서는 법이나 국가의 명령과 상충되는 신의 명령이 상정되어 있지 않다. 이 대화편의 후반부를 이해할 때 이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분에서는 국가나 법의 명령이 무엇이든 그것에 복종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법의 명령과 신의 명령이 상충되는 경우에도 오직 법적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크리톤≫에서는 국가나 법의 명령과 상충되는 신의 명령이 상정될 상황이 아니어서 준법이 강조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크리톤≫에서는 왜 신의 명령이 상정되지 않은 것인가? 소크라테스가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던 ≪크리톤≫의 상황은 ≪변론≫의 상황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이미 재판에서 그는 국가의 법적 명령에 복종하기보다는 철학하라는 신의 명령에 복종하겠다고 했고, 몇 번을 죽게 된다 하더라도 철학을 그만둘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이는 그가 사형에 처해진다 해도 철학을 그만둘 수 없다는 의지의 표명이며, 그 결과 그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는 사형 대신 해외 추방형을 택할 수도 있었고, 이는 당시 아테네 사람들도 원했던 것이기도 했지만, 그것을 거부했다. 추방되어 신의 명령대로 철학하는 일이 더 이상 가능한 상황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변론≫37c-38b).―≪크리톤≫에서는 탈옥해서 다른 나라로 갈 경우 철학하며 지낼 수 없으리라는 이야기가 나온다―그러니 이제 그에게 남은 길은 법정의 사형선고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친구인 크리톤이 탈옥을 권유하지만, 그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이었다.
혹 탈옥이 신의 뜻이라고 그가 생각했다면 ≪크리톤≫에서도 법의 명령과 상충되는 신의 명령(탈옥하라는 명령)이 상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의 명령이 상정되지 않았다. 그러니 그는 탈옥이 신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보는 게 적절하다. 이 점은 이 대화편의 마지막 구절에서 확인하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신께서 이렇게 인도하시니, 그대로 하세나.”라는 말로 탈옥 반대 논변을 마무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시민불복종론에서 본 소크라테스의 탈옥 문제
끝으로 오늘날의 시민불복종론에 입각해보다면, 소크라테스가 탈옥을 거부하고 독배를 든 것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롤즈가 시민불복종의 요건으로 거론하는 것을 정리해보면, 불복종은 공개적, 비폭력적, 양심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불복종자는 처벌을 받아들이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소크라테스는 시민불복종의 요건들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롤즈가 말하는 요건들은 당연히 수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요건들은 소크라테스의 행위를 이해하는 데 잘 들어맞기 때문이다.

≪변론≫에서 보는 재판 상황에서 그가 한 이야기에 따를 경우, 법정이 그를 석방시켜주되 철학을 금하는 명령을 내렸다면, 그는 그 명령에 불복종했을 것이다. 우선 그는 불복종행위로서 철학하는 일을 일반범죄자처럼 은밀하게 하지 않고 당당하게 공개적으로 했을 것이고, 처벌을 피하고자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런 불복종의 자세는 레온에 대한 부당한 체포 명령과 관련해서 그가 실제로 보여주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변론≫의 두 예를 보면 소크라테스는 시민불복종의 요건들에 맞게 불복종 행위를 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한 철학자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옳지 않은 법적 명령에도 복종해야 하는 경우가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점은 ≪크리톤≫에서 보게 된다. 거기서 그는 사형 판결이 정의롭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50c, 54c), 탈옥을 거부하고 그 판결에 복종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가 탈옥을 거부한 것을 시민불복종의 요건들에 비춰서 검토해 보자. 그 요건들에 비춰볼 때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 감옥에 있던 소크라테스가 법정의 판결에 불복종하고 탈옥을 했다면 그것은 시민불복종이라고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우선 그 일은 비폭력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해도 공개적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교도관에게 뇌물을 써서 감옥을 나오고 변장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행위를 양심적인 것으로 보기도 힘들뿐더러, 그렇게 탈옥하는 그에게는 처벌을 받으려는 의지가 있다고 볼 수도 없을 것이다. 탈옥해 해외로 간다는 것은 아테네 법정에서 내리는 일체의 법적 처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탈옥했다면 그는 일반 범죄자와 다를 바 없었을 것이고, 시민불복종자와는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가 법정의 사형판결에 불복종하여 탈옥을 감행하지 않은 것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올바른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정의롭지 못한 판결에 복종하여 독배를 들고 탈옥을 거부했다고 해서 그를 시민불복종의 옹호자가 아니라고 본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그는 분명 시민불복종의 선구라 할 수 있다. 다만 롤즈도 그랬듯이 그는 시민불복종의 요건을 충족시키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구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