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한철연 3월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 안내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월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 안내

 

  “B급 철학자들과 함께하는 정치수다”

–  [B급 철학](알렙)의 필자들과 함께하는 난상 시국토론

 

 

1. 일시 및 장소 : 2017년 3월 25일(토) 오후2시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세미나실

 

2. 토론 주제 : 2017년 대한민국의 정치를 논하다. 광장의 ‘정치’가 단순히 ‘통치’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또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촛불혁명(?)은 과연 진정한 변혁을 가져올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선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3. 진행방식 안내

– 처음 시도하는 편안한 파티 다과식 난상토론 : 생맥주 1잔, 간단한 안주와 다과.

– 단순한 책소개가 아니라, 책에서 논의된 주제들과 연관된 질문을 미리 선별해서 필자들과 공유 토론하고, 참석한 모든 사람들과 함께하는 자유로운 토론의 장.

– 사회 및 진행 : 조은평(웹진 편집주간) / 이지영(학술1부장)

– 토론자 : [B급철학]의 필자 3인

  : 유현상(숭실대 강사), 한길석(가톨릭대강의교수), 박종성(호원대 강사)

 

– ※ 추신 : 토론회를 마치고 참여한 외부 회원분들 중 5명을 선정해서 [B급철학](알렙) 책을 선물로 드립니다.

 

* 본 토론회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학술1부와 웹진 (e)시대와 철학의 공동기획으로 진행합니다. 앞으로도 1년에 2회 정도 월례발표회 대신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기획을 마련할 예정입니다. 한철연 회원님과 독자님들 및 철학에 관심을 가지 모든 분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오시는 길 : 2호선 합정역 2번출구, 도보10여분, 태복빌딩 3층

 

살아있는 죽음 [퍼농유]

우쑵니다.

정치는 쑈라고 하지만 정치는 쇼이어야만 한다는 강고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쇼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지겨움을 넘어 역겨울 지경입니다. 애덜의 쇼에는 그래도 천진난만함이라도 있지 이건 뭐 비열함만이 가득합니다. 어찌 헤쳐나가야할지 신의 가호가 아니라 신뢰의 연대와 냉정한 지혜가 있기를 ……. 물리적으로 너무 바쁜 10월입니다. 간단한 글하나 올립니다. 꾸뻑

82113073, 3/26/07, 2:55 PM, 8C, 4074x5354 (958+1512), 100%, Winogrand_11x1, 1/60 s, R78.0, G63.3, B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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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어릴 적 고생을 몰랐다. 아버지 덕택이다. 아버지는 2016년 2월 15일 응급실에서 돌아가셨다. 한밤중에 응급실에서 깨어났을 때 아버지의 “뭣 하러 왔어”라는 무심한 한마디에 “어서 주무세요, 아침에 다시 올께요”라고 했지만 아버지의 눈빛을 제대로 쳐다 볼 수가 없었다. 왜 그랬을까에 대한 답변은 알고 있는 듯 모르는 척하는 듯 말할 수 없지만 다시 새벽 병원 응급실에서 아버지는 이미 의식을 잃고 계셨다. 아버지는 이 자식의 작별 인사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너무 성급하게 떠나셨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했던 그런 때가 있었다. 그때 우연치 않게 손에 들었던 책이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죽어가는 자의 고독》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난 추상적인 죽음을 알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구체적인 사람들의 죽음, 죽은 사람들,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알고 싶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엘리아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시대에 죽어가는 사람들 곁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각별하다고 할 당혹감은 죽음과 죽어가는 사람이 사회생활로부터 최대한 배제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다른 이들로부터 철저히 격리한다는 사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사람들은 마땅히 할 말을 알지 못한다.”
난 죽어가는 아버지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었을까. 아니 난 죽어가는 아버지에게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말았어야 했다. 살아 있는 아버지께 무엇을 말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했으며 살아 있는 아버지께 “어서 주무세요, 아침에 다시 올께요”라고 말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었다.
엘리아스는 죽음의 병상에서 무덤으로 너무도 완벽하게 처리되는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독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 죽어가는 사람들은 병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사회 그 어딘가에는 이 사회가 철저히 배제해버린 살아있으면서도 죽은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죽음은 은폐되고 삶은 전시되고 있다. 죽어가는 자들은 음침한 뒷골목으로 내몰리고 산 자들은 양양한 대로를 뻔뻔하게 거닐고 있다. 하여 자신은 이 양양한 대로를 뻔뻔하게 걸을 생각만을 하면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어서 주무세요, 아침에 다시 올께요”라고, 나는 어쩌면 우리는 그런 무심한 말을 죽은 듯 살아있는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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