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르티니의 ‘악마의 트릴’ [유철의 유럽방랑기] -3

타르티니의 ‘악마의 트릴’ 

슬로베니아 남서쪽 끝자락 크로아티아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작디 작은 마을, 피란Piran. 수도 루블라냐에서 5시간, 국토 대부분이 산악지역으로 이루어진 슬로베니아에서 버스 외에는 변변한 교통수단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특히 피란은 바다를 앞에 두고 산으로 둘러 쌓인 지형을 갖고 있기 때문에 기차를 탄다 하더라도 근처 도시인 코페르Koper에서 버스나 택시로 갈아타야 한다.
벅차 오르듯 넓디 넓고, 새파란 바다가 보고싶어 떠나온 여행이었다. 그래서 내가 택한 길은 베니스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피란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피란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이탈리아 두이노, 미라마레, 슬로베니아의 코페르, 이졸라의 아름다운 경관은 내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그러나 이를 그저 지나쳐 갈 수 밖에 없는 그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그저 다음에, 그리고 언젠가 다시 오리라 나를 위로해 본다.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해안도로를 빠져나와 피란으로 들어가는 길, 산비탈을 굽이굽이 넘어 내려오자 눈 앞에 펼쳐지는 경관은 황홀경에 빠지게 한다. 배의 선수처럼 뾰족하게 톡 튀어 나와 있는 마을, 피란. 그리고 이를 둘러싼 새파란 바다가 눈 앞에 펼쳐진다. 유난히 맑은 하늘, 바다와 하늘을 가르는 수평선의 경계는 모호하다. 이는 마치 아드리아 해가 하늘로 쏟구쳐 나를 삼킬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저 감탄사만 나올 뿐이었다.
옆 좌석에 앉은 노부부는 그런 나를 보며 웃는다. 그러나 그들도 나와 다를바 없다. 들썩이는 할아버지의 궁둥이나, 목을 내뺀 할머니의 모습에 나도 웃음이 나왔다. 살짝 몸을 비틀어 드리자, 할아버지는 들썩이는 엉덩이를 들어 상체를 쑤욱 내밀며 오래되어 보이는 자동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다.

‘찰칵, 지잉…’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중간쯤 어딘가의 카메라가 정겹다. 그러나 장담 컨데 그 사진엔 내가 나올 수밖에 없었을 뿐더러 반사광에 바깥 풍경은 그저 하얗게 나올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럼에도 내게 ‘엄지 척!’ 하며 웃으신다.
어린 시절, 아직 남은 필름이 들어있는 사진기를 집에서 몰래 들고나가 이것 저것 찍었던 기억이 난다. 난 그저 그 안에 있는 사진을 빨리 현상하고 싶었고, 이를 위해선 24방, 36방을 빨리 채워버려야만 했다. 지금같이 원하는 것을 골라서 현상하거나 혹은 컴퓨터에 저장해 놓고 생각날 때 클릭해서 보는 그런 시절과 다르다. 무엇이 찍혔을지, 혹은 어떤 필름이 들어 있는지 하는 기대가 있었고, 그 필름이 현상되어서 나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설렘이 있었다. 그런 노부부의 카메라를 보니 문뜩 그때 그 시절의 그리움이 싹튼다.

버스에서 내리자, 눈 앞에 펼쳐진 아드리아 해와 오늘따라 유난히 파란 하늘에 그 수평선 마저 모호한 그 곳에 내가 마치 던져져 있는 듯한 느낌이다.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듯한 그런 느낌… 방파제 끝에 서로 마주한 초록과 빨강색 등대들은 더욱 또렷하게 보인다. 드라마 ‘디어 마이 프랜즈’에서 고현정과 조인성이 이 방파제에 기대어 저 두 등대를 배경삼아 둘이 와인을 마시던 장면이 문뜩 떠오른다. 그러니 여기에 로멘틱함도 더해진다. 한국인으로 보이는 커플이 그 자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런 데서 셀카를 찍는 건 촌스러운거야!’ 셀카를 찍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가볍게’ 그곳을 지나친다.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호수 같이 잔잔하고 깨질듯 맑은 아드리아 해를 곁에 두고 그리고 그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걷는다. 그러자 눈 앞엔 타르티니 광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곳 한 가운데에는 피란이 자랑하는 이탈리아 바이올린 비루투오소이자, 작곡가인 쥬세페 타르티니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한 그의 동상이 자리잡고 있다. 그렇다. 사실 둘러보면 이 곳 마을은 타르티니 일색이다. 광장 입구에는 타르티니 호텔이 있으며, 동상 맞은 편 건물에는 타르티니의 생가라고 크게 쓰인 현수막이 걸려 있다. 그의 동상 뒷 편 언덕 중턱의 성 프란시스 성당에도 마찬가지다. 성당에는 찬송가가 아니라 타르티니가 작곡한 소나타가 하루 종일 흘러 나온다. 지금 내가 서 있는 타르티니 광장도 마찬가지다. 타르티니 광장 한 가운데서 어린 꼬마의 바이올린 연주가 한창이다. 바이올린 케이스를 열어 두고선 타르티니의 명곡, ‘악마의 트릴’을 연주한다. 지나가는 관광객들이 동전을 하나 둘씩 던져주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도도한 표정으로 입술을 살짝 깨문 채 고개를 휘저으며 연주에 집중하는 꼬마 모습이 당돌해 보인다.

 

 

사실 타르티니의 악마의 트릴에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타르티니의 친구였던 프랑스 천문학자 요셉 랑드의 일기에는 그 이야기가 적혀있다.
음악에 심취한 타르티니는 좋은 악상을 떠올리기 위해 매일 밤을 전전긍긍하며 보냈다고 한다. 아마도 성직자가 되길 바랬던 부모를 배신하고, 사랑하는 여인을 선택한 그리고 다시 그 사랑하는 여인을 버리고 음악을 선택한 그에게 남은 건 음악, 바이올린 그것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타르티니는 꿈을 꾼다. 그리고 거기에서 악마와 마주하게 된다. 어둠 가득한 곳에서 나타난 붉은 모습의 악마는 타르티니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살고 싶다면 당장 네 영혼을 내놓아라. 네가 영혼을 내놓는다면, 내가 너의 소원을 들어주마.”

마치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한 제안을 마르티니가 받은 것이었다. 악마의 제안에 타르티니는 자신의 바이올린을 악마에게 건내며 망설임 없이 답한다.

“이 바이올린으로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가장 황홀한 연주를 내게 들려 주시오.“

그러자 악마는 그와의 약속에 따라 타르티니를 위해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한다. 악마가 들려준 트릴은 타르티니가 지금까지 평생에 들어보지도 상상해보지도 못한 아름다운 것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그는 꿈 속에서 들은 악마의 연주를 오선지에 옮겼는데, 그것이 ‘악마의 트릴’이라고 한다.

타르티니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작곡한 악마의 트릴, 만약 악마가 타르티니에게 한 제안을 누군가에게 한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답할까? 당장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신앙상의 문제를 들먹이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평화? 남북통일? 그 순간 이렇게 거창한 것을 말하는 이도 많지 않을 터, 그럼 박근혜의 종신형? 영생이나 막대한 금은보화? 그것도 아니면 세월호에서 숨진 이들의 생환?…

문뜩 동네에서 만난 백발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떠오른다. 아직 볕이 귀했던 영국의 겨울 어느 날, 오랜만에 허락된 햇볕을 만끽 하고픈 마음에 잽싸게 밖을 나섰다. 지금 해가 떠도 5분 뒤 비가 올 수 있는 것이 영국 겨울 날씨다. 시내를 거니는데 어디선가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 온다. 오랜만에 허락된 햇볕과 함께 들려오는 바이올린의 선율은 내 감수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바이올린 소리에 이끌려 간 곳은 광장 한 귀퉁이. 그곳에는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백발의 아시아계 노인이 있었다.
낡디 낡은 테일드 코트에 잘 다려진 흰색와이셔츠, 검정색 등산복 바지에 반짝반짝 광나는 구두를 신은 백발 노인. 군데 군데 하얗게 빛 바랜 바이올린은 그 기능이나 할까 싶지만, 그 노인의 활 놀림에 응답하며 아직 수명을 다하지 않았노라 외친다. 인상을 쓰다가 살짝 미소 짓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짓는 애잔한 그의 표정은 그 울림에 깊이를 더 하는 듯 하다.
초라하지만 나름 갖춘 그의 복장과 그의 바이올린 연주실력에 길을 걷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그 앞에서 발길을 멈춘다. 연주를 마친 그는 관객에게 정중하게 인사하고는 파란 하늘을 향해 키스를 던진다. 그리고 관객에게 말한다.

“이번 곡은 제 아내를 위한 곡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들려줄 수가 없어요. 얼마 전 그녀는 세상을 떠났거든요. 그녀를 대신해 여러분들께서 감상해 주시면 좋겠어요.”

그의 말에 관객들은 박수를 보낸다. 노부부는 다시금 손을 꼬옥 부여잡았고, 맞은편 어린 아이는 그녀의 부모를 꼬옥 끼어 안는다. 아직 찬 공기에 나는 손을 모아 입김을 불고는 두 손을 비벼본다.
호흡을 가다듬은 노인은 다시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한다. 그의 활이 바이올린의 현과 마찰하며 이전과는 또 다른 깊은 울림을 만들어 낸다. 그건 건반악기가 주는 그런 직관적인 감동과는 다르다. 여러 개의 모노코드를 박자에 따라 혹은 화음 만들어 감상자에게 전달하는 감동과는 다른 감동, 찰현악기가 내는 소리는 이보다 훨씬 감성적이다. 그 소리는 심장을 요동치게 한다. 눈물이 흐르는 소리라고나 할까? 그의 연주에 나도 모르게 그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마도 악마가 저 백발의 바이올리니스트에게 나타나 타르티니에게 한 제안을 한다면, 분명 그는 ‘마지막으로 내 아내에게 나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려주게 해다오’ 하고 말했을 것이 분명하다. 먼저 떠난 아내에게 바치는 그의 연주는 무척이나 애절했고,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꼬마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를 뒤로 하고 광장을 떠나려고 하는데, 좀 전에 버스에서 마주한 노부부가 서로 번갈아 가며 광장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필름 돌아가는 손맛이 그리웠던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제가 두 분을 찍어드릴까요? 두 분 같이 서 보셔요!”

할아버지가 내게 카메라를 건내려 하자,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잡아 끈다. 괜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내게 카메라를 건내려 하자, 그녀는 마지 못해 그의 옷자락을 놓는다. 아마도 낯선 동양청년에게 ‘귀중품’을 맡긴다는 것이 불안했나 보다.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메고 있던 가방을 잠시 바닥에 눕히고 그 위에 내 핸드폰을 놓았다. 그러자 비로소 되찾은 그녀의 미소.

“할머니! 할아버지랑 더 가까이 붙으셔요. 좀 더! 굿! 자, 찍습니다. 하나, 둘, 저매니~”

‘찰칵, 지잉..’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말하는 독일인 노부부, 할머니는 언제나 마지막 여행이라 생각한다고 한다. 그래서 날씨가 좋아지는 시기인 봄, 그리고 절정인 여름마다 여행을 다닌다고 내게 말한다. 할아버지는 이에 덧붙이며 말한다.

“그래서 나는 늘 다음 여행을 미리 예약해. 낸 돈이 아까워서라도 죽을 순 없지. 이번 여름에는 두브로브니크!”
그러자, 할머니는 웃으시며 말한다.
“그래요. 두브로브니크, 갑시다. 그러려면 당신도 계속 운동해야 해요.”

할아버지는 손을 번쩍들며 여전히 자신이 건강하다고 표현한다. 아마도 이 노부부에게는 다음 여행, 그리고 그 다음 여행, 또 그 다음 여행이 악마와의 거래 대상이 될지 모르겠다.

그럼 나는? 나는 악마에게 무엇을 요구할까? 지금 내가 내 영혼과 맞바꿀 정도로 갈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 처지를 생각해 보면 아마도 박사학위 정도라 답하지 않을까? 박사논문 서론에 내 연구의 의의랍시고 쓴 거창한 포부는 말하기도 부끄럽다. 하지만 이것이 죽은 아내를 위한 바이올린 연주나, 늙은 노부부의 다음 여행과 같이 그 다지 로맨틱하지도, 그렇다고 작지만 영혼과 맞바꿀 정도로 절실하거나 절박한 것 같지도 않다. 어찌 보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은 그저 시작했기에 하고 있는 것이고, 이를 마무리 짓기 위해 필요한 것들일 뿐 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 내가 갈구하는 그것이 가치 없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그것은 누군가로부터 그냥 주어진 것이라면 영원히 가치가 부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마와 거래에서 이를 요구한다면 그건 하찮은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 노부부와 백발의 바이올리니스트의 바람이 가치 있는 건 그들 인생의 전부를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 했는가? 내가 이 과정에 충실해야 할 이유는 거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진/글 :  이유철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uchul83)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낚시[퍼농유]

우쑵니다.

서양의 많은 현자들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예수도 그러했고 아테네의 등에를 자처하며 사람들을 일깨우고자 했던 소크라테스가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공자는 처형당하기는커녕 천수를 누렸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철학을 엘렝코스(elenchos)로 규정했더군요. 논박술입니다. 나중에 플라톤이 변증술이라고 불렀던 원조라고 할 수 있죠. 루이-앙드레 도리옹(Louis-Andr Dorion)이라는 사람이 쓴 소크라테스>라는 책에 따르면 엘렝코스는 질문하고 대답하는 대화를 통해 논증을 전개하는 과정입니다. 답변자가 어떤 주제에 관해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음을 질문자가 드러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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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옹은 독특한 설명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엘렝코스의 논리적 요소에만 관심을 가졌지 정작 그 목적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합니다. 엘렝코스의 논리적 방법은 도덕적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엘렝코스의 목적은 상대의 논제를 논파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화자를 더 훌륭하게 만드는 데에 있습니다. 상대의 영혼을 정화시키려는 것이죠. 영혼의 정화는 행복의 조건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논리가 아니죠.
소크라테스는 상대가 참이라고 믿어왔던 것이 거짓으로 드러날 때 그 영혼이 겪게 될 충격과 수치심을 강조합니다. 수치심을 느꼈다는 것은 철학을 시작할 수 있는 징후이기 때문입니다.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은 허위의식이 깨졌음을 의미하므로 이제 함께 철학적 탐구에 들어설 조건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논박을 당할 때 느끼는 수치심을 소크라테스는 ‘유익한 수치심’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엘렝코스는 일종의 교육적 장치로서 도덕 교육을 위해 필요한 것이지 논리적 논박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치심은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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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것은 이 엘렝코스가 주술(呪術)로 비유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엘렝코스는 합리적인 논변의 양식인데 어째서 마법의 주문인 주술에 비유되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효과적인 측면에서 그렇다고 합니다. 대화자들을 마비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죠. 홀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소크라테스에게 논박당한 이들 가운데 그의 이런 좋은 뜻을 이해하고 고마워했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저는 ‘유익한 수치심’을 다른 측면에서 보고 싶더군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하는 논리적 궁지는 ‘유익한 수치심’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개쪽’입니다. 쪽팔림입니다. 현자라고 알려진 사람들은 더욱더 그렇겠죠. 권력자들과 기득권자들 말입니다.
물론 유익한 수치심에 의한 도덕적 자각을 이룬 사람이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실제로 논박당한 사람들은 대부분 고마움을 표하기는커녕 소크라테스에게 적의를 드러냈다고 합니다. 도리옹의 말이죠. 특히 소크라테스를 모방했던 젊은이들에게 논박당한 사람들은 오히려 소크라테스에게 원한을 품고 복수를 다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법정에 고발당한 것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무력하게 논박당하면서 모순덩어리인 자신이 발가벗겨지듯이 드러나는 순간 모멸감과 수치심을 느낀 이들이 소크라테스에게 분노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까요.
소크라테스가 의도했듯이 수치심을 통해 영혼의 정화가 이루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분노와 복수심을 불러일으킨다면 논박술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당하는 마지막 법정에서 죽어 지옥에 가서라도 엘렝코스를 멈추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좋은 의도가 현실에서는 최악의 결과를 산출하는 이 모순을 어찌 설명할까요.
공자는 어떠했을까요. 공자도 많은 제후들과 군주들에게 도덕적 깨달음을 위한 유세를 하러 다닌 사람이 아니던가요. 유세가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이듯이 공자도 유세가였습니다. 유세가였던 공자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장자 「어부(漁父)」 편에 나온 평가는 그렇게 긍정적이지 못합니다.
「어부」에서 공자가 제자들과 산책할 때 어부를 만납니다. 근데 왜 공자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필 어부를 만났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전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부는 강가에서 물고기를 낚지만 지식인과 신하들은 현실 정치에서 군주의 마음을 낚습니다. 사실 어부는 군주의 마음을 낚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유세가이죠. 어부는 낚시의 최고 고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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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明代) 화가 오위(吳偉)의 독조한강설

아무튼 어부는 공자가 어떤 사람인지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제자 자공은 충신(忠信)과 인의(仁義)를 실행하고 예악(禮樂)을 닦고 인륜(人倫)을 정하며 위로는 임금에게 충성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교화하여 천하를 이롭게 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대한 어부의 질문이 독특합니다. 공자가 땅을 가진 군주냐 아니면 왕을 보좌하는 신하인가를 묻습니다. 물론 그 어느 것도 아니죠. 공자는 신하도 아니고 군주도 아니었습니다. 지위가 없는 사람이 지위에 걸맞지 않는 참견을 하는 사람입니다.
어부의 충고가 재미있습니다. 공자는 인한 사람이긴 하지만 화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어부는 충고합니다. 좋은 뜻을 가진 사람이지만 결과적으로 재앙을 면치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공자가 이를 듣고 쫓아가 가르침을 청합니다. 어부는 사람들이 흔히 범하게 되는 8가지의 잘못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어부가 말하는 잘못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상대의 속셈을 고려하면서 말하는 ‘아첨’, 옳고 그름을 분간하지 않고 말하는 ‘아부’, 다른 사람의 단점만 말하기를 좋아하는 ‘험담’, 친구사이를 배제하고 친한 사람을 갈라놓는 ‘이간질’, 교활한 속셈과 거짓으로 칭찬하면서 이를 통해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망치는 ‘사악함’, 선악을 가리지 않고 양측 모두 좋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음험함’ 등 입니다. 공통적으로 모두 말하는 방식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권력자에게 간언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당시 말이란 정치적 맥락을 가집니다.
그 가운데 첫 번째와 두 번째가 공자에 해당합니다.

자신의 일도 아닌데 간여하려는 것을 ‘참견’이라고 하고, 이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구태여 말하려는 것을 ‘잘난 체’라고 한다.(非其事而事之, 謂之摠, 莫之顧而進之, 謂之佞.)

이 말은 공자가 군주냐 신하냐라고 물었던 어부의 질문과 관련된 대답입니다. 공자에게 군주도 신하도 아니면서 직분에 어긋난 일로 잘난 체하며 참견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말재주를 부리고 다니면 화를 당한다는 것이죠. 주목해야할 점은 정치에 개입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개입하는 방식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합니다.
어부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정치에 개입을 했는데 왜 사람들은 나에게 원한을 가지느냐고 다시 묻습니다. 그때 어부가 말하는 것이 자신의 그림자가 두렵고 발자국이 싫어서 그것으로부터 떨어지려고 달아난 사람에 대한 상징적인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그림자와 발자국을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쉬지 않고 달리다가 죽었다는 이야깁니다. 무슨 이야기일까요.
재미난 상징적 이야기이지만 전 처음에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빛이 있다면 그림자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등불을 가지고 타인의 허물을 지적한다는 것은 타인의 그림자를 만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등불의 빛을 가지고 타인을 평가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생기게 마련이고 땅을 밟으면 발자국의 흔적이 남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더라도 진리의 빛을 독단적으로 비추면 그림자가 생기고 무분별하게 개입하게 되면 상대에게 원한의 흔적이 남습니다. 예기(禮記) 「곡례(曲禮)」 하편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신하된 자의 예는 군주의 추악함을 드러내면서 간언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 번 간하였는데도 듣지 않는다면 직위를 버리고 떠난다.(爲人臣之禮, 不顯諫, 三諫而不聽, 則逃之.)

여기서 ‘추악함을 드러내면서 간언하지 않는다.’라고 번역한 말의 원문은 ‘불현간’(不顯諫)입니다. 군주의 과실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놓고 간언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당나라 때의 유학자인 공영달(孔潁達)은 ‘군주의 추악함을 분명하게 말하여 군주의 아름다움을 빼앗지 않는다.’고 주석을 달고 있습니다.
잘났건 못났건 군주는 군주로서의 지위에 맞게 대우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군주라는 명예를 흠집 내고 역린을 건드려 인간적인 모멸감을 주면서 간언하지 말고 예의를 갖추면서 옳고 그름을 설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조건 군주의 비위를 맞추며 아부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오해해서는 안 되겠죠. 설득과 아부는 다릅니다.
때문에 상대의 심리적 상태가 어떠한지 현실적 조건이 어떠한지에 대한 정보를 알지 못하고서 먼저 모든 것을 솔직하게 날 것으로 드러내면서 자신의 옳음을 말하는 것은 정직의 미덕이 아니라 일을 망칠 수도 있는 조급함의 악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진리에 대한 지나친 확신이 있을 때 앞도 뒤도 좌우도 돌아보지 않고서 직설적으로 내뱉게 되는 것이 인간의 심리 아닐까요. 그러나 자신이 옳다는 확신을 가지고 상대의 부정을 공격한다면 상대는 자신의 부정을 인정하기보다는 저항하고 회피하기 쉽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부정한 사람으로 규정하려 하는 상대를 죽이려 하겠죠. 자신이 부정하다는 증거가 되니까요. 증거를 없애고서 피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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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유세란 그 당시에 어려웠던 일었습니다. 말이란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의사소통의 문제죠. 의사소통이란 하버마스처럼 이상적인 상태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성적인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이상적인 대화가 의사소통은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도 의사소통을 해야 합니다. 이성적인 인간들과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은 이상적인 현실을 말합니다. 인간은 이성적이지 않습니다. 현실에서는 복잡한 것이 인간입니다.
논어를 읽다보면 공자의 이런 모습이 엿보입니다. 유비(孺悲)라는 사람이 공자를 만나려고 했습니다. 유비라는 사람을 공자는 매우 싫어했던 듯합니다. 공자는 병을 핑계로 만나주지 않았죠. 그 명을 전달하는 사람이 문밖으로 나가자마자 공자는 거문고를 꺼내 노래해서 유비가 일부러 듣게 했다고 합니다.
왜 병을 핑계로 만나주지 않고 일부러 노래를 듣게 했을까요. 만나고 싶지 않다는 공자의 의도를 전달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유비는 만나고 싶지 않은 혐오스런 인간일 수 있습니다. 이성적인 대화가 통할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만나서 난 너가 싫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권력자입니다.
그렇다면 왜 유비에게 직접 만나고 싶지 않다는 뜻을 전달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병을 핑계로 만날 수 없다고 해 놓고 얼핏 보면 야비하게 거문고를 꺼내 노래함으로써 나는 아파서 너를 만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는 암시를 주려고 했을까요.
정말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예의의 격식을 차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의를 차린답시고 만나고 싶지 않다는 의도가 전달되지 않는다면 유비에게 어떤 깨우침을 주지 못하고 공자에게도 감정적인 앙금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나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서 만나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전달해야 하는 모순적인 의사소통 방식이 더욱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상대는 상처를 받지 않으면서 스스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좀 극적이죠.
물론 논어에서는 유비가 그것을 깨달았는지 어떤지 혹은 무엇을 깨달았는지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모순적인 의사소통 방식은 우리들의 일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이런 극적인 장면은 연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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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참 묘한 인간의 심리입니다. 직접적으로 표현되지 않는 감추어진 영역에서 통찰해내는 진실을 읽어냄으로써 오히려 상대를 전적으로 신뢰하게 됩니다. 이것은 상대의 조건을 이용하고 상대를 모르게 한다는 모순적인 의사소통 방식입니다. 폭력적이고 권력적인 방식이 아니라 다소 시적인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진리를 직접적으로 깨닫게 하려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공자는 진리를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계기를 줄려는 시적이면서도 모순적인 방식을 택했습니다.
뭐랄까요. 인간은 좀 모순적이고 복잡합니다. 진리도 말할 만한 사람에게 말해야지 통하지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원한을 받을 수 있죠. 사람에게 자신의 의도를 통하게 하는 방식은 직설적인 방식 말고도 우회적인 방식이 다양합니다. 이 우회적인 방식이 단지 비겁하다고 폄하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춥습니다. 이제 가을입니다. 우쑤, 저는 가을이 왠지 기다려지는군요. 단지 쏘주 한잔 때문만은 아니지만 쏘주가 그리운 계절입니다.

섦[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8

영혼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만질수도 없고 기억할 수도 없는

머나먼 고향의 길을 찾아가는

검은 새의 바람은 향기롭다.

자신이길 거부하는 날개짓은 고요하여

여전히 태양을 향해가는 식지 않은 열정으로

암흑속에 가물가물 춤을 추고 있다.

영원히 지지않는 깃털은

가볍게 흐르는 그의 생명을 불어 넣는다.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이시대와철학201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