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미즈, 반다나 시바(下)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2. <에코 페미니즘>, 마리아 미즈, 반다나 시바 (下)

 

이지영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에코페미니즘이 자연의 훼손과 생태계 위기의 맥락이 여성에 대한 그것과 같다는 통찰 아래에서 시작되었음은 이미 설명하였다. 에코페미니즘은 서구 근대 주류 사상이 근대 과학과 자본주의를 뒷받침한다고 파악한다. 페미니스트는 여성의 남성-되기 열망을 되돌아보아야만 한다. 과학은 서구인들이 믿는 것처럼 만인을 위한 보편 이익에 봉사하지도, 인류 전체를 해방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과학에 대한 맹신에 가까운 서방세계의 믿음은 이전 초월적 신에게 부여했던 신성의 자리를 대체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주류 믿음들은 자연과 여성을 파편화하여 물질/신체로 다루기 때문에 이들의 창조적 재생 및 갱신의 능력을 훼손한다. 이러한 환원의 기계론적 은유와 이에 대한 통제/지배는 자연과 여성을 소외시켜 통치하는 것을 객관과 보편이라는 거짓 이름으로 합리화한다.

부분과 원자로 자연을 분해할 수 있다는 서구 남성 중심주의적 믿음, 환원주의는 우연이 아니라 서구 근대화 개발 과정과 호응하며 서로를 증폭시킨다. 근대화 개발론은 효율과 이윤의 극대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므로 상업적 이윤과 맺는 관계가 작은 부분은 무시하고 소멸시킨다. 상업적인 자본주의는 획일화된 상품 생산이 목적이기에 자연 자원의 획일성이 거기에서 따라 나온다. 숲은 상업적 목재로, 목재는 펄프와 종이 생산을 위한 섬유소로 환원된다. 그것은 숲을 이루는 생명체의 다양성과 유기적 연결성에는 무관심하다. 파괴하든 돈이 되는 종만 키워 생태계를 단순화시키든 이윤을 극대화시킬 수 있으면 그만인 것이다. 여성 또한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근대화와 맞물려 자본주의가 침투해올수록 기존의 여성 노동 또한 상품 생산과 무관한 것이기에 비노동, 수동적 노동으로 평가 절하되고 무시된다. 그것이 경작이든 가사 노동이든 간에 동일한 경로를 밟는다. 자연은 공짜로 이용 가능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생산력이 무시되듯 여성의 숙련된 노동의 가치 또한 무시되는 것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여성 노동은 남성 중심적 노동 사회를 발전, 존속시키기 위한 희생물로 유령화된다.

 

  • 따라잡기식 개발 신화 뒤집어 보기

 

전세계로 서구식 사고와 자본주의가 퍼져나갈수록 미국 유럽 일본과 같은 국가의 윤택한 생활이 하나의 이상적 모델로 자리잡는다. 비서방 국가들과 여성들 또한 이들 서방 세계 사람들의 생활수준을 따라잡아야 하며 이들 서방 세계가 걸어온 산업화, 과학 기술화, 자본 축적의 노선을 되풀이하는 것이 정답이라는 의식이 팽배해진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하다는 생각 혹은 그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거짓 신화에 불과함은 쉽게 밝혀진다.

첫째, 서방 세계가 풍요롭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풍요가 비서방 주변부 국가인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아시아 등의 지배와 억압, 착취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란 역사적 사실은 쉽게 망각된다. 이 풍요는 서구 남성들의 폭력(무력을 앞세운 식민 지배 등)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고 풍요의 유지 존속 또한 주변부 국가들을 계속해서 착취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주변부 국가가 개발을 통해 서방화된 경우는 매우 드믈 뿐이라는 것을 망각한다. 수다한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 국가들이 여전히 서방 국가의 풍요를 위한 각종 물적, 인적 자원을 저렴하게 제공하면서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저렴한 자원과 값싼 노동력의 공급지 역할을 하며 정작 이들 국가의 경제 시스템은 외국 자본의 힘과 내부 남성 지배 집단 사이의 결탁에 의해 더 뒤틀리고 여성들의 천착해온 생활 근거지는 이들에 의해 파괴된다. 이런 비서방 국가에 대한 착취와 빈곤의 최대 피해자가 여성과 그 아이들인 것이다.

둘째, 서방 세계 따라잡기 신화에 사로잡힌 이들은 높은 물질적 생활수준을 삶의 진정한 윤택함으로 착각한다. 에너지를 과잉 사용하고 더 많은 사치재를 소비하며 즉석 식품과 가공 식품을 먹으면서도 건강을 유지하고 각종 다양한 산업 폐기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맑은 공기, 맑은 물, 오염되지 않은 식재료는 서방 국가 사람들의 일상에선 이루어지지 않는 꿈일 뿐이다. 만일 서방 세계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추동질하는 것처럼, 비서방 세계 다수가 서방 세계 만큼 풍요로워진다면 서방 세계의 오늘날의 풍요로움은 불가능해지고 지구 자원은 믿기 힘든 빠른 속도로 고갈될 것이고 지구 생태계는 완전히 붕괴할 것이다. 또 비서방 세계의 자연과 노동력을 착취하고 각종 폐기물을 이곳에 버림으로써 자신들의 풍요가 유지되고 있다는 진실 또한 모르거나 회피한다. 주요 서방국가 중 미국 한 국가의 예를 보자. 전세계 인구의 6프로를 차지하는 미국인들이 화석 연료 총생산량의 30프로를 소비한다. 그런데 가난한 국가의 인구가 전 세계 인구의 80프로를 넘는다. 이는 나머지 국가의 사람들이 미국인들과 같은 양의 에너지를 소비하기란 결단코 불가능한 일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셋째, 서방 세계 사람들의 삶은 더 행복한가하는 점이다. 여성과 아이의 삶은 어떠한가. 서방 세계 다수의 국가에서 빈부 격차는 나날이 벌어지고 있다. 특히나 빈곤 여성과 어린이의 가난은 더 극심해지고 있으며, 이들이 주타겟인 남성 범죄의 증가 또한 무시 못 할 수준으로 높아지고 있다. 게다가 근대화 이전 지역 공동체는 붕괴하여 개인들은 점점 더 원자화되고 고립된다. 서방 세계의 물질적 풍요 또한 중산층 이상 계급에게 한정되는 일이라는 사실, 이 사회의 물질 분배의 양극화가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눈을 감는다.

요약하자면, 성장과 이윤 창출은 사실상의 식민지인 자연, 여성, 이민족을 착취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백인 여성들, 페미니스트들 또한 이러한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자신들이 누리는 풍요가 기반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직시해야한다는 뜻이다. 자신들 또한 자연과 이민족 여성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존엄을 훼손함으로 현재의 풍요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또한 서방 세계의 사실상 식민지 일부가 서구화되면 자원은 더 급속히 부족해질 것이고 이는 곧 자원을 둘러싼 국제 전쟁으로 비화될 것임도 분명하다. 우리는 걸프전이 석유 자원 지배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전쟁임을 안다.

 

  • 제3세계 여성, 인도 여성의 시선으로

 

『에코페미니즘』의 공저자인 반다나 시바는 서방의 주류 페미니스트들이 인도 여성들 또한 자신들처럼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표명한다. 앞서 말했듯이 그것은 자연과 신체를 타자와/대상화하여 정신적 존재되기를 꿈꾸는 남성 되기와 다름없는 것이며, 불가능하고 더 나아가 바람직하지도 않은 것이다. 과학 기술을 앞세운 개발은 자연, 여성, 이민족에 대한 거대한 착취 없이 가능한 것이 아니기에 불의하고, 주변부 국가가 서방 국가를 따라잡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저급한 노동 착취가 개발 과정에서 일상화되며, 노동 집약적 산업과 생태계 오염 산업이 주변부 국가로 이전되고 이러한 발전 과정이 설사 순조롭게 진행된다고 해도 그 동안 서방 세계는 또 다른 발전 단계로 접어 들어간다.

서구인들, 나아가 서방 세계 여성들이 저개발 국가의 여성의 처지를 동정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잣대로 주변부 국가 여성들을 재단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반다나 시바는 인도의 자발적 여성 에코 운동인 ‘칩코 캠프 운동’을 예로 든다. 많은 인도인들은 서구인들과는 달리 자연과 훨씬 많이 가깝고 친숙하다. 자연은 이들에게 서구식 개발, 조작, 소유의 대상이 아니다. 서구인들은 그 사실을 망각했지만 자연은 인도인들에게 살아 숨 쉬는 삶의 터전이다. 맑은 물, 깨끗한 공기, 일용할 양식을 나눠주는 진정한 어머니-자연인 것이다. 이곳에서 인도의 여성은 소외되지 않은 노동을 한다. 이러한 인도 여성은 농사에 필요한 종자들을 관리하며 숲 속의 다양한 생명체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생명 다양성의 관리자이자 수호자들이다. 남성 노동은 쟁기질과 같은 힘쓰는 노동에 한정돼 있을 뿐, 자연에 대한 풍부한 지식은 여성들의 것이다. 여성들은 인정받는 노동의 중요 축을 담당하고 그 노동에 의해 가족과 자신이 먹고 사는 자급자족의 생활을 한다. 서구 여성들의 망각해버린 역사가 아직 이들에게선 살아 숨 쉰다. 서구 17세기 말, 18세기에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던 마녀 사냥의 이유가 자연의 다양한 생명체들에 대한 여성 지식과 독립적 지위의 삭제에 있었다는 사실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이들에겐 상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마녀 사냥으로 죽어간 여성들은 대개 자연의 생명체들을 적합하게 사용할 줄 알았기 때문에 주변의 존경을 받았고, 배품의 대가로 받은 돈으로 독립적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여성들이었다. 서구의 광기 어린 마녀 사냥은 여성의 자급자족 능력을 제거하여 무임금 유령 노동인 가사 노동으로 여성들을 가두고 더욱 남성 의존적 삶을 살게 만든 서구 근대화의 역사와 그 흐름을 같이 한다.

칩코 여성 캠프 운동으로 널리 알려진 인도 여성들의 자연 생태계 보호 운동은 외부의 누군가가 들어와 운동을 조직하고 선동하여 이루어진 운동이 아니다. 1980년대 중반 인도 둔 계곡의 나히낄라 마을의 여성 차문데이 등이 주도하여 석회석 광산개발을 빌미로 자행된 숲 파괴를 저지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화되었다. 무려 20여 년간 지속된 개발 저지 운동은 생활 터전인 숲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맑은 물과 공기, 약초, 열매 등 숲의 배품이 지속되길 희망했다. 숲이 사라짐은 자신과 아이들이 가꾸며 먹고살아온 자급자족의 터전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는 자유의 박탈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들은 정부가 제안하는 임노동 일자리를 자유로운 삶을 앗아가는 것이기에 거부한다. 개발이 이들이 오래 유지해온 마을 공동체를 파괴하고 뿔뿔이 흩어지게 할 것임을 안다. 이들은 개발로 인해 자유를 잃고 자연적 공동체성을 상실하길 진심으로 원하지 않았다. 하여 트럭을 몰고 밀어붙이는 남성들의 무력을 죽음을 불사하며 막아섰던 것이다. 자급자족은 팔 수 있는 상품 생산 노동이 아니므로 자본주의의 입장에서는 생산 노동이 아니지만 그것은 다만 서구인들의 기준일 뿐이다. 이들에겐 숲에서의 자급자족이야말로 예속이 아닌 자유의 원천이며 생명의 자연스러운 생존 방식인 것이다.

 

  • 자기 결정 – 생식 능력에서의 해방에 얽힌 문제들

 

반다나 시바와 마리아 미스의 『에코페미니즘』은 한국 여성들에게도 중요 이슈로 떠오른 자기 결정, 자기 신체와 삶에 대한 권리문제에 대해서 또한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낙태권에 대한 시각은 결정적이다. 자기 재산과 신체에 대한 소유권은 서구 근대 부르주아 시민 혁명의 근본 과제였다. 당시 교회와 봉건 왕권의 절대적 권력의 압제에서 자유롭게 벗어나기 위한 시도로 개인의 불가침의 권리가 주장되었다. 이렇게 생명권, 자유권, 소유권은 자유 시민의 권리가 되었으며 이 중에서도 근대 자유민주주의를 견인한 부르주아지들은 특히 소유권의 획득과 행사를 위해 투쟁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여성이 이 시민권을 부여받기까지는 수백 년에 걸친 기다림이 필요했다. 서구 근대 사회에서 여성은 한 국가 공동체의 시민임에도 공적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해온 시민권을 인정받기 위해 투쟁했으며 여권 운동이 ‘참정권’ 획득 운동에서 시작한 이유이기도 하다. 참정권을 얻은 여성들은 교육권, 재산권, 사회권 등의 폭넓은 시민권을 보장 받기 위해 투쟁해왔으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페미니즘 운동의 주요한 한 분파로 자리 잡고 있다. 낙태권 또한 시민권의 인정 및 행사라는 동일 맥락에서 주장되는 것이다. 여성의 생식기관과 출산 능력은 가부장적 남성 중심 사회에 의해 통제되어왔으며 여성 억압의 근본 원인이기도 했다. 남성과 가부장제의 식민지였던 여성의 자기 신체에 대한 권리를 되찾는 문제는 따라서 이러한 식민 상태의 종결과 해방을 의미하므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반다나 시바와 마리아 미스는 낙태의 권리를 둘러싼 자기 결정, 자율적 결정권의 문제를 두 가지 각도에서 재고할 것을 제안한다. 하나는 서방 세계에서 주장되는 여성 생식 능력, 여성성에서의 해방이고 두 번째는 제 3세계 여성들의 다른 입장이다. 두 가지 재고는 모두 남성중심의 근대 데카르트적 사유, 자연 과학 기술의 확대, 자본의 제국주의적 지배 등과 관련되어 있다.

여성은 시민권 획득 운동을 통해 남성의 여성 지배에 대해, 가부장적 여성 지배에 대해 싸워왔으며 이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제 여성은 생식 능력, 여성성이라고 불려왔던 것들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도 싸우고 있는 것이다. 낙태의 권리는 대표적 안건이다. 이 싸움이 가능해진 것은 과학 기술 진보에 빚진 바 크다. 파이어스톤의 급진 여성주의의 주장 즉 과학 기술을 이용하여 출산과 양육에서 여성을 해방시키는 것이 여성과 인간 해방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주장은 매우 상징적 사건이다. 근대 서구 남성들이 정신의 자유를 신체/자연을 식민화하고 통치하면 된다는 사유와 믿음에 근거하여 구체화시켜온 것처럼, 여성의 자기 신체에 대한 권리와 통제 역시 그러하다. 여성이 자기 신체를 타자화/대상화하고 식민화시키는 과정, 그것이 정당하다는 믿음을 통해서만 여성의 자기 신체에서의 해방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는 임신 기간 동안 여성의 신체와 한 몸으로 연결된 태아 또한 자기 신체의 일부로 여기고 자기 신체를 타자화/대상화하는 방식으로 태아 역시 타자화/대상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타자화된 여성의 신체와 태아는 기계론적 세계관에 의해 분해하고 조작할 수 있는 물질로 환원된다. 그리고 현대 의학이 마련해 놓은 기술적 처방의 제한적 선택지들 중에 한두 가지를 선택해 신체와 태아를 과학 기술이 처리하도록 내맡기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근대 남성 중심주의 사상의 주요 전제들과 적용(신체에 대한 정신 우위 및 신체/자연의 기계화)을 그대로 답습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면서 또 다른 현실적인 문제를 심화시키고 있다. 남성은 성적 접촉의 결과인 여성의 임신에 대한 책임에서 더욱 더 자유로워지고 여성들은 자신의 신체를 기술에 맡기는 타율성에 종속되는 것이 그것이다.

낙태와 그 권리를 둘러싼 문제와 접근은 단언하여 해답을 제안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적어도 소유권과 자유권을 내세운 자유주의적 해법이 내재하고 있는 문제는 제기되어야만 한다. 여성의 신체가 기계가 아니듯 태아는 소유물이 아니다. 모체와 태아는 서로 다른 존재들의 맺는 공생 관계이며 이는 생태적 관계의 표현이기도 하다. 낙태권에 대한 국가 기구의 공격은 여성의 폭력에서 태아를 보호해야한다는 전제로 펼쳐진다. 여성이 자신의 일부인 동시에 다른 생명체인 태아의 적으로 설정되는 것이다. 가부장적 가족 관계, 어린이에게 적대적인 환경, 육아와 고용의 양립 불가능성, 현대 사회의 극심한 실용주의와 물질주의, 물질적 풍요에 대한 병적 집착 등 여성이 아이를 낳아 키우기 힘들게 만드는 조건들은 모두 면죄부를 받거나 제외된다.

제3세계 여성들에게 낙태권이 가부장제와 결탁한 국가주의의 또 다른 직접적 폭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도 서방세계 여성들은 인지해야만 한다. 남미, 아프리카, 인도 지역 등에서 펼쳐지는 국가에 의한 강제 불임 수술과 낙태는 이 지역 여성들이 한 줌의 식량, 옷가지 등과 맞바꾸는 강제된 선택의 결과물로 시행된다. 이 지역 여성들에게 자율적 선택과 지역 공동체에서의 독립은 자유의 획득이 아니라 삶의 나락으로 떨어져 생존 자체를 바로 위협받는 길로 이어진다. 서방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사회적 환경 위에 그들이 서 있기 때문이다. 이 지역 여성들은 가족 안에서 살고 가족들에 둘러싸여 사망하길 원한다. 서방 세계 여성들의 독립된 혼자만의 집과 요양원에서 홀로 맞이하는 죽음은 이들에게 씁쓸한 귀결로 여겨진다. 또 서방 세계 여성들의 임신할 자유, 권리를 위한 대리모 찾기가 제 3세계 여성들의 신체를 빌려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도 회피하지 않고 직시해야 한다. 모체와 태아 사이의 관계를 기계적 연결 관계로 보고 과학 기술로 조작하는 이 행위가 가진 생태적인 폭력, 과학 기술의 오남용 여부는 서방 세계 여성들이 자신의 신체와 태아를 기술에 내 맡기는 원리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이다.

 

  • 자연, 신체, 여성적인 것의 재고

 

에코페미니즘은 자연/신체/여성의 상징적이며 언어적 연결성에 주목하고 여성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친화성을 긍정한다. 이들은 자연의 재생산력과 창조적 변화 능력이 여성의 생식 능력과 맞닿아 있음을 말하며 남성중심주의에서의 자연 해방, 보호가 곧 여성을 해방시키고 보호하는 것이라고 파악한다. 살펴보았듯 근대 남성 중심주의적 사유 방식과 이에 기초한 과학 기술, 자본주의는 자연을 파괴하고 훼손하였으며 동일 맥락에서 여성 또한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여성과 여성이 돌보는 아동은 이 억압과 착취, 피해의 일차적 피해자이며 당사자이므로 자연을 지키는 방식으로 자신을 돌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에코페미니즘의 입장은 여성주의 1차 웨이브를 이끌었던 자유주의 페미니즘 및 이 노선과 상응하는 권리 중심 페미니즘에 반해 등장한 다양한 입장들 중 하나인 것은 사실이다. 60년대 후반에 시작되어 70년대를 풍미한 서구 제2물결 페미니즘의 일부 분파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무시하며 벗어나고자 했던 여성성과 신체의 가치를 재평가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여성을 자연 본질론에 묶어둔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반다나 시바, 마리아 미스 또한 에코페미니즘의 근본 가정에 대한 이러한 비판을 알고 있으며 『에코페미니즘』에서 이러한 비판에 대해 응답한다.

에코페미니즘은 여성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연결시키며 이 중심에 자연의 생산 능력과 여성의 출산 능력의 상징적, 유비적 유사성이 있다. 핵심어는 ‘모성’이 될 것이다. 반다나 시바와 마리아 미스는 이 ‘모성’이 우파에 의해 낭만화되고, 좌파에 의해 탈자연화된 것을 지적하며 양자를 모두 경계해야함을 말한다. 마리아 미스는 미국 등의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여성의 자연 본질화로 비판받는 모성과 자연의 연결이 좌파의 입장과 유사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이들 여성주의자들은 모성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적인 것임을 주장하며 모성과 자연 연결성을 이야기하는 이들을 비난한다. 좌파는 맑스의 견해를 견지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맑스는 반자본주의자의 입장에 서 있으나 자연을 인간 이성에 의해 개발하고 자연의 힘에서 벗어나게 하는 생산력의 발전에 의해 인류가 진보하고 결국 그릇된 생산 관계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쟁취한다고 봤다는 점에서 반자연적이다. 포스트모던한 사회 구성주의를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들이나 좌파는 모두 자연적인 것을 부정한다. 이들은 자연적인 것의 실재함, 자연/신체/모성의 가치 재평가를 주장하는 입장, 모성과 자연의 연결 등을 다 비합리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거부한다.

이 반대에 있는 것이 우파의 입장이다. 독일의 경우 모성의 강조, 모성과 자연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것은 흔히 독일 파시즘의 흔적으로 치부되며 공격의 대상이 된다. 우파와 극단적 우파인 파시즘이 모성과 자연의 보호를 말하며 어머니-땅-민족을 찬양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연/신체/여성/모성을 온실 속의 화초처럼 낭만화하며 이상화한다는 공통점을 보여주며 아버지-국가-남성의 보호를 받아야할 존재로 대상화시킨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런데 좌파나 우파 나아가 포스트모던한 입장은 사실상 자연/문명, 자연/합리, 여성/남성 등의 이분법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음을 망각하고 있다. 자연은 실재하며 여성이 아이를 낳는다는 것도 실제하는 현실이다. 이분법의 망령에서 벗어나 자연/여성/신체/모성이 국가나 자본의 조작,지배, 통제 대상이 아님을 이들은 인지해야하며 그것이 인류 전체의 행복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근대 남성일지라도 여성에게서 태어나며, 땅에서 난 음식을 먹고, 장차 죽어 땅으로 돌아가리라는 사실을, 나아가 자연의 공생관계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만 살아있을 수 있고, 건강할 수 있으며 성취 또한 가능함을 인정해야만 한다.”

중요한 것은 이분법에서 탈피하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이성 능력 또한 자연의 산물임을 인정하며 자연을 떠난 생존은 불가능함을 깨닫는 것, 우리가 모두 연결되어 있는 유기적 존재라는 사실을 남성들 또한 깨닫는 것이야말로 남성 중심주의와 그 변주들을 벗어나는 길일 것이다.

좌파나 우파의 생각과 달리 실제 자연 안에서의 여성은 ‘자연 안에서 여성은 강인하게 노동하고 자립하여 생활하고 동시에 주변을 돌본다.’

 

  • 『에코페미니즘』의 현재성

 

반다나 시바와 마리아 미스의 『에코페미니즘』이 고전이 된 이유는 여러 가지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인간의 역사 이래 지속되어왔던 자연과 여성, 자연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사이의 언어적, 실재적 친연성에 근거하여 생태의 위기는 곧 여성의 위기임을 주장한다. 남성중심주의적 사고 방식과 그에 기초한 근대 자연 과학 기술 및 자본주의가 자연/여성적인 것들을 어떻게 억압, 통제, 착취해 왔는가를 보여주면서 자연/여성을 해방시켜야함을 말한다. 여성은 자연 생태계가 그러하듯 남성 중심적 세계의 피해자이며 당사자임이므로 자연 생태계를 지켜내는 것은 여성 자신을 지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엇보다 이 책이 빛나는 것은 서로 다른 역사, 문화, 환경에 놓인 두 여성의 공저이며 아직 주변부 국가에 속하는 인도 여성의 입장을 살펴볼 수 있는 책이기 때문 아닐까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차이와 다양성’은 대립과 갈등의 원인이 아니라는 사실, 서로 차이나는 것들의 공존과 상호 유기적 연결성이야말로 그 자체로 살아 숨 쉬는 생태계의 속성이라는 사실이 에코페미니즘의 기본 전제이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 여성 특히 도시 생활에 익숙한 여성은 사실 서구 세계 따라잡기에 성공한 드믄 국가의 일원, 서방 세계의 일원이나 다름없기에 이들 에코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을 불편해한다는 것을 종종 목격한다. 낙태의 권리에 대한 이들의 비판이 그러하고 제3세계 여성들의 바람을 이해하는 것도 어려운 문제다. 제1세계에 속하는 한국 여성이 이 책을 주장을 수긍하기 위해서는 많은 선입견을 버리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페미니즘의 역사가 여성성, 신체의 속박에서의 자유를 여성의 자유와 등치시키는 경향이 강하게 존속해 왔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상 백인 남성중심적 시각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반다나 시바 등의 지적은 틀리지 않다. 우리가 서구, 중산층이 아닌 계급의 여성 및 서방이 아닌 지역의 여성들을 이해해야할 필요성이 나날이 급박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는 만큼 다른 상황과 입장에 공감하는 상상력의 극대화가 절실하다. 칩코 여성들의 운동과 바람이 보여주듯 그들은 그들의 입장과 환경에 맞춘 여권 신장 운동과 지속 가능한 삶을 꿈꾸며 움직이고 있다. 세계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는 것만큼 서방 세계 여성들이 걸어왔던 것과 다른 방식의 여성주의,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무엇이 그들 안에서 태동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반다나 시바와 마리아 미스의 『에코페미니즘』은 근대 서구 주류 사상이 뒷받침하는 근대 과학과 자본주의 비판에 많은 장을 할애한다. 세계의 모든 것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이 모두 자연 안에서 벌어지는 것임을 주장하는 것의 옳음을 증명하듯 서방 세계 여성들의 권리 신장과 풍요로움은 자연, 제3세계 여성과 아동, 그 지역 거주민들을 착취하고 그들의 삶의 체계를 뒤흔드는 방식을 숨기고 있음을 직시해야할 필요 또한 더 이상 외면하기 힘든 현실일 것이다. 1세계 소비의 80프로가 생필품이 아닌 사치재에 치중되어 있으며 그 가공되지 않은 원자원과 노동력이 대부분 3세계 착취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지국 온난화, 미세 먼지의 습격, 플라스틱 등 생활 폐기물 처리의 곤란함, 오염되는 물, 자원의 고갈 위협, 핵의 위협 등 헤아리기도 힘든 생태계 파괴의 위협을 받고 있다. 자연에 대한 앎과 개발이 자연, 지구, 인류를 포함한 현 생태계 생명체의 궤멸 위기로 치닫고 있음에도 우리는 이것을 모르는 척 한다. 우리는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 이 무지의 무지를 깨우쳐야 하고 그것이 바로 여성의 문제이자 여성이 해야 할 일임을 에코 페미니즘은 힘주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들이 주장하듯 자연/문명, 여성/남성, 신체/정신 등의 이분법을 깨고 존재하는 모든 것, 근대의 남성들이 그토록 높이 평가했던 이성마저도 오로지 유일하게 실재하는 자연에서 나온 것임을 분명히 인지하는 것에서 재출발해야할 필요성을 깊이 성찰해 봐야할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끝)

 

– 마리아 미즈, 반다나 시바의 『에코페미니즘』은 여기까지 입니다.

– 다음주부터는 게일 루빈의 『일탈』이 연재됩니다.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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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미즈, 반다나 시바(上)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1. <에코 페미니즘>, 마리아 미즈, 반다나 시바 (上)

 

이지영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 에코페미니즘Ecofeminism의 등장과 그 맥락

 

에코 페미니즘(ecofeminism)은 세계에 존재하는 주요 억압들이 언어적, 상징적 의미들과 깊은 상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성찰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의식과 무의식을 결정하는 ‘기본 사고틀’에 의해 세계와 인간에 대해 사유하고, 사유는 실천으로 이어진다. 에코 페미니즘은 인간 중심의 단순한 자연 보호 개념이나, 가장 큰 근본 모순을 보지 못하는 남성 중심적 생태주의(ecology)에서 벗어나야 함에 주목한다. 여성의 관점에서 생태계가 처한 문제를 바라보고 논의할 때 생태계가 처한 위기의 본질적 위기를 고찰하고 근본 문제 해결에 대한 접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생태주의는 단순한 자연 보호의 호소에서 시작했다. 근대 산업 사회가 초래한 자연 파괴와 이로부터 예견되는 미래의 황폐함에 대한 경고는 서구의 경우 이미 194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핵 위험, 각종 오염 물질, 산업 폐기물, 무분별한 개발 등 유해하고 치명적인 물질들 및 기술들이 공기, 토양, 강, 바다를 오염시키며 파괴하고 있으며 이러한 자연 파괴는 결국 ‘우리 인간’의 생존과 지속적 발전에 큰 가시적 위협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 인간, 자손의 미래를 위해서는 이런 오염, 파괴 물질을 정화시키거나 안전하게 처리할 기술을 개발하고 환경 파괴를 저지해야한다는 호소는 근대 산업 사회 구성원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 보호의 입장이 근대적 ‘인간 중심’의 표피적인 사고에 불과함을 지적하며 ‘생태 중심적’ 혹은 ‘생물 중심적’ 사고로 자연을 바라봐야함을 말하는 심층 생태주의가 등장한다. 이 생태주의는 자연이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한다는 기본 가정, 망상을 버릴 것을 촉구한다. 자연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은 그 자체로 살아 숨 쉬며 자기 자신을 재생산하는 거대한 하나의 생명체다. 인간은 이 커다란 생명체 위에 존재하며 군림하는 존재일 수 없다. 인간은 다른 여타 비인간 생명들과 동일하게 이 지구라는 거대 생명체를 구성하는 부분들의 작은 하나일 뿐이며 모든 부분들은 모두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1970년대, 자연이 총제적인 하나의 유기체이듯이 인간 세계의 억압들이 상호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하나의 해방이 또 다른 종류의 해방들과 무관하게 얻어질 수 없다는 의식 아래 자연 해방과 여성 해방을 동일 맥락에서 바라봐야만 한다는 주장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생태학이 간과한 지점이 이 연관성이며 심층 생태학자들이 말하는 ‘인간 중심주의’는 ‘인간 중심’이 아니라 ‘남성 중심주의’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인간에 의한 자연 착취, 지배 전략이 남성에 의한 여성 지배 정당화 맥락과 본질적 유사성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로 접어들면서 자연과 여성에 대한 평가 절하가 한층 더 강화되긴 하지만, 이성/신체, 정신/정서, 문명/자연, 남성/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와 전자의 후자에 대한 가치 우월성은 플라톤 이후 서구 지성사의 기본 아이디어였던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출산하는 재생산 능력과 자연의 재생산 역량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 남성보다 여성을 자연에 보다 가까운 존재로 바라봐온 것에 주목해왔다. 여성은 자연화되고 자연은 여성화되어 사유되고 상상되어 왔다. ‘어머니 자연’, ‘여자는 땅, 남자는 하늘’ 등의 표현이 전혀 낯설지 않은 것은 우연의 산물이 아닌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이분법의 계열화 목록이 상호 포괄적인 것이거나 동등한 권리를 가진 것으로 개념화되기보다, 나아가 사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연에서 기원한 것임을 인식하는 방향이 아니라 상호 배타적인 것으로 수용되어왔고 문명, 남성…계열의 목록이 자연, 여성…계열의 목록에 속하는 것들을 지배할 자격을 가지는 것으로 정당화되어 왔다는 것에 있다.

앞으로 살펴볼 마리아 미스(1931 ~), 반다나 시바(1952. 11. 5 ~)『에코 페미니즘』 또한 이와 같은 자연과 여성의 본성 연관성 및 동일한 착취, 지배, 억압의 맥락을 수용한다. 생태주의는 여성의 문제와 함께 논의되어야만 하고 여성은 자연의 일부이자 자연과 함께 남성중심주의에 의해 고통당하는 당자자로서 생태계 보호의 주체가 되고 있으며 또 되어야만 한다.

 

  • 3 세계 여성과 1 세계 여성의 만남 – 반다나 시바 & 마리아 미스

 

여성주의 생태학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에코페미니즘』은 널리 알려져 있는 것처럼 제 3세계인 인도 여성인 반다나 시바와 대표적 제 1 세계인 독일 여성인 마리아 미스의 공저로 탄생했다(1993). 이 책의 가치는 바로 이 지점에 놓여 있을 것이다. 반다나 시바는 핵물리학자 출신으로 환경 문제 연구와 운동에 투신하여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마리아 미스는 사회학자로 자본주의의와 더불어 여성, 환경, 제 3세계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제 3 세계와 제 1세계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놓여 있다. 기반하고 있는 입장과 지역성의 간극 즉 독일 여성과 인도 여성으로서, 서로 다른 맥락 속에 놓인 구체적인 여성이라는 커다란 ‘정체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이 차이를 경쟁과 투쟁, 착취, 억압, 지배의 원인으로 놓고 대적하기보다 공동의 기반을 찾아 생태계의 위기를 ‘함께’ 논의하기로 한다. ‘차이와 다양성’은 대립과 갈등의 원인이 아니라는 사실, 서로 차이나는 것들의 공존과 상호 연결성이야말로 그 자체로 살아 숨 쉬는 생태계의 기반임에 이 두 사람이 공감하고 의견을 함께 했기 때문이다.

이 둘은 우선 생태 문제가 여성 및 아동 문제와 달리 논의될 수 없는 것임에 동의한다. 그리고 자연과 여성이 동일한 맥락 아래에서 특히 서양 근대 남성 가부장제, 남성 중심주의에 의해 착취되고 평가 절하되어 왔음에 동의한다. 현재 생태계가 처한 위기의 근본 원인이 바로 서양 근대 남성 가부장제인 것이다. 서양 근대 남성 중심주의가 기반하고 있는 근대성의 성격이 남성으로 하여금 자연 위에 군림하며 자연을 착취하고 파괴하고 조작하는 것을 정당한 것으로 수용하게 이끌었다. 파괴되는 생태 속에서 같이 신음하고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극심하게 고통 받는 것은 여성과 그 여성이 돌보는 아이들이다.

 

  • 서구 근대성과 남성 중심주의

 

앞서 언급했던 문명/자연, 남성/여성, 이성/감성, 정신/신체, 백인/유색인종의 상호 배타적, 전자의 후자에 대한 우월적 이분법은 비단 서구 근대만의 특성은 아니다. 이는 서구 플라톤의 사고 체계가 이후 사상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유지되어 왔다. 그런데 데카르트가 『성찰』을 통해 ‘생각하는 나의 존재’를 만학의 토대로 선언한 이래 이러한 이분법은 더욱 강화된다. 인간은 개인으로 원자화되고 이런 원자적 개인의 합리성, 의지, 자율성이 강조되기 시작한다. 이에 얽힌 커다란 문제는 우선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서구 근대가 자연을 기계로 파악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생명체를 포함하여 자연을 구성하는 것들은, 물리적 인과 법칙들 안에서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운동한다. 이 운동에는 목적도 의미도 없다. 자연이라는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는 것은 분해 가능한 무의미한 부분들이며 이와 반대로 이 부분들을 결합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한 조작 대상들이다. 이러한 기계적 자연관은 자연을 하나의 조작 대상, 물리적 기계와 유사한 것으로 파악하게 만들었다. 인간 앞에 놓인 미래는 자연의 법칙을 알아내는 인간 이성을 잘 사용하고 발전시키는 것에 있다. 또 다른 커다란 문제는 이 서구 근대가 찬양하는 ‘인간 이성’에서 여성, 비백인은 제외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루쏘에 이르는 서구 주요 사상가들의 저서에 의해 분명히 드러나듯 이 ‘생각할 줄 아는 존재’는 백인 성인 남성에 한정된다. 여성, 아동, 비백인은 자연적 존재로서 취급하며 지도 편달과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근대적 인간관과 자연관이 자본주의와 결합하면서 개발 명목의 ‘자연 즉 여성적인 것’에 대한 착취, 억압, 통제가 정당화되면서 만연하게 된 것은 지당한 일일 것이다.

 

  • 기존 주류 페미니즘 비판 여성적인 것, 자연, 신체의 재개념화

 

반다나 시바와 마리아 미스는 서구 1세계 페미니즘의 큰 줄기들을 비판적 맥락에서 고찰한다. 그중 하나인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페미니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시몬느 드 보브와르(1908. 1. 9 ~1986. 4. 14)에 대한 비판은 사실 이젠 페미니즘을 아는 이들에겐 상식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이 비판의 맥락은 다양한 여성주의 운동과 파이어스톤의 래디컬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확장시켜 고찰해 볼 수 있게 만든다. 페미니즘에 관심을 둔 이들에겐 많이 알려진 것을 다루는 이 절에서의 논의보다 훨씬 큰 쟁점의 시발점이 될 수 있는 이 비판은 이어지는 다른 절에서 다루겠다.

보브와르는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선언으로 페미니즘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보브와르는 남성이 여성을 타자화(의식의 대상화)하는 방식을 통해 스스로를 의식적 주체로 설정하였음을 지적한다. 이때 남성은 자유로운 정신으로, 여성은 재생산하는 신체로 개념화된다. 신체로서의 여성은 남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그들에 의해 강제된 것이다. 보브와르는 이 여성이 이 신체의 주박에서 벗어나 남성과 같은 정신의 존재가 될 때 자유를 획득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반다나 시바와 마리아 미스는 이러한 주장이 여성 내부에서 진행된 신체, 자연의 타자화가 남성 중심의 정신/신체, 문명/자연의 배타적 이분법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를 강화하고 확대 재생산시키는 사유임을 지적한다. 자연, 신체, 여성의 타자화, 평가 절하는 페미니즘 안에서도 행사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