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존재를 믿어야 할 이유 – 영화 <곡성>과 악에 대한 성찰 [톡,톡,씨네톡]

한상원(한철연 회원)

 

영화 <곡성>은 곳곳에서 ‘믿음’의 문제를 다룬다. 부활한 후 제자들 앞에 나타나,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에게 손과 옆구리의 성흔을 보여주는 예수를 다룬 서두의 복음서 인용이 그렇고, 영화 말미에 닭이 세 번 울기 전까지 내 곁에 있으면 모두가 살아나고 악마들이 질 것이라고 알려주는 무명(천우희)의 대사가 그렇다. 후자는 닭이 울기 전에 세 차례 자신을 부인할 것이라는 베드로에 대한 예수의 예언을 상기시킨다. 양자는 모두 믿음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무덤에서 깨어난 예수를 믿지 않았고, 그가 끌려갔을 때 그와의 관계를 부인하였다. 영화에서 주인공 종구(곽도원)의 믿음이 흔들린 순간, 그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보면 <곡성>은 기독교적 메시지를 다룬 영화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곡성>은 그보다 더욱 깊은 문제를 제기한다. 믿어라. 왜 믿지 못하는가. 무엇을? 신의 존재를? 아니다. <곡성>이 믿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악의 존재, 세계의 악이다.

그 메시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영화의 종결부다. 한 편에서 종구가 수호신 무명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교차편집을 통해 동시간적으로 양이삼 부제(김도윤)는 악마 외지인(쿠니무라 준)을 만난다. 죽은 외지인은 3일만에 부활한 채 동굴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메시아의 모습과 마찬가지다. 낫을 들고 악마를 벌하러 간 부제는 의기양양하게 묻는다. 너는 누구냐? 외지인이 다시 묻는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데? 부제는 말한다. 악마다. 왜 말을 못 하는가. 외지인이 말한다. 자네가 이미 말했잖나.

이 대사는 요한 수난 복음에 나오는 빌라도와 예수의 대화를 상기시킨다. 나약한 인간으로 그려지는 빌라도는 예수에게 추궁한다. 그가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 하고 묻자, 예수는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하고 답한다. (요한 18,37) 나를 임금이라고 생각한다면 죽여라, 라는 예수의 메시지에도 나약한 인간 빌라도는 그를 스스로 처단하지 못하고 유대인들에게 그의 처분권을 이양한다. 믿음이 약한 부제는 마치 빌라도가 예수를 끝내 자기 손으로 죽이지 못하는 것처럼 외지인에게 기회를 주기로 한다. 외지인이 자신이 악마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를 살려주고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이제 대화의 주도권은 외지인으로 넘어간다. 그는 자신이 악마라는 사실을 부제가 왜 믿지 못하는지 추궁한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몸에 난 성흔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내 몸을 만져보아라. 수난당한 뒤 부활한 그리스도를 완벽히 재현해내면서, 그는 자신의 존재를 믿지 못하는 나약한 부제를 조롱한다.

이 영화를 둘러싸고 가장 논란이 많은 이 장면에서 내가 느낀 건, 어째서 자신의 존재를 믿지 못하냐고 우리에게 묻는 (신이 아닌) 악마의 목소리가 외지인의 입을 통해 나온다는 것이었다. 너희 인간들은 그리스도가 부활했을 때 그를 알아보지 못했고,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그를 부인했다. 마찬가지로 너희들은 나, 즉 악마의 존재 역시 부인한다.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세계는 악하지 않다고 말한다. 보아라. 나는 악하고, 너희가 나의 존재를 부인하는 동안 너희는 악에 의해 지배당한다.

교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선은 절대적인 것이고 시초부터 존재하는 것이라고 본 반면, 악은 선의 결핍으로, 선이 부재한 곳에 자리잡은 어둠으로 정의내렸다. 악은 따라서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신은 악을 창조하지 않았다. 악은 신이 창조한 선의 빛이 닿지 못하는 곳에 자라나는 것이다. 이와 달리 헤겔은 선 역시 그 자체로 존재하는 완벽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선은 그것의 대립물인 악의 부정으로 정의되며, 따라서 악은 선을 규정하는 데 불가피한 요소다. 만일 우리가 헤겔의 논의를 확대해본다면, 악에 대한 존재 증명은 동시에 선의 존재에 대한 증명으로 귀결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선과 악이 상호 대립하지만 또한 상호작용하는 개념쌍이라면, 어째서 우리는 ‘악’의 존재에 대한 증명에 대해서는 인색해 왔던 것일까?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세계에 ‘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비정한 세계, 냉혹하고 차가운 현실 속에 고립된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선’에 대한 믿음은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여기까지는 누구나가 공감할 사실이다. 그런데 한 발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우리가 ‘선’의 존재에 대해 믿지 않는 만큼이나 ‘악’의 존재에 대해서도 믿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지난 세기 아우슈비츠와 대학살, 거대한 살육전쟁 등을 악으로 부를 수 있다면, 오늘날 세계에서 거대한 악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과연 그러한가? 세계에 악은 세계에서 소멸했는가? 세계는 더 이상 악의 지배를 받지 않는가? 악은 종교인들이 현대인의 자유로운 생활을 규제할 때 사용하는 보수적인 슬로건에 불과한가? 오히려 한나 아렌트가 말한대로, 악은 ‘평범성’의 모습을 띄고, 우리의 곁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악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들, 믿지 못하는 자들은 악마의 부활을 막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 영화 <곡성>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전지전능한 모습으로가 아니라, 희생물로 바쳐질 자들의 옷을 입고 쪼그려 앉아서는 우리에게 돌맹이를 던지며 주의를 끄는 미약한 메시아가 우리에게 하려던 말 역시 악이 존재한다는 것, 악이 부활할 수 있다는 경고가 아닐까? 죽은 듯 숨어 있다가도 부활을 기다리는 악이, 자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나약한 인간에게 ‘성흔’을 보여주며 존재를 과시할 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악의 존재에 대한 증명은 악에 대한 믿음과는 다르다. 오히려 악의 존재에 대한 통찰은 우리가 그러한 악으로부터 현혹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선과 악에 대한 교리를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어떨까. 태초에 신이 세계를 선하게 창조했으나 선이 모자란 자리에 악이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것은 악이며, 부재하는 선은 바로 그 악에 대한 대항으로서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말이다. 어쩌면 악이 존재한다는,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인간이 현재를 넘어설 수 있는 ‘각성’의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홍진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제 영화 세편이 모두 극악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세 편을 통해 계속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인간이 각성하고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것을요. 끔찍하고 불행한 일들은 이유없이 벌어지고 행해지지 않게 인간이 더 인간다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악에 대한 성찰은 선을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쪼그려 앉아 우리에게 경고를 보내는 메시아와 손잡을 수 있는 방법은, 그 이전에 악의 존재를, 그리고 그것의 힘을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 악의 존재를 믿는 자만이 선의 존재를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악은 강하고 선은 약하다. 선은 미약하고 일그러진 모습으로 우리 곁에서 어느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온 힘으로 악과 부딪힘으로써. 미약한 선의 꺼질듯한 촛불을 지켜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 곡성 공식 포스터 사진출처 : 프레시안

영화 곡성 공식 포스터 – 사진출처 : 프레시안

영화 <아이, 로봇>과 인공지능의 미래 그리고 인간-1 [톡,톡,씨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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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나무위키

 

* 영화<아이, 로봇>(2004, 알렉스 프로야스 감독)의 줄거리

–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

법칙 1. 로봇은 인간을 다치게 해선 안 되며,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이 다치도록 방관해서도 안 된다.

(Law I – A Robet May Not Injure A Human Being Or, Through Inaction, Allow A Human Being To Come To Harm)

법칙 2. 법칙 1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만 한다.

(Law II – A Robot Must Obey Orders Given It By Human Beings Except Where Such Orders Would Conflict With The First Law)

법칙 3. 법칙 1, 2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스스로를 보호해야만 한다.

(Law III – A Robot Must Protect Its Own Existence As Long As Such Protection Does Not Conflict With The First Or Second Law).

근 미래인 2035년, 인간은 지능을 갖춘 로봇에게 생활의 모든 편의를 제공받으며 편리하게 살아가게 된다. 인간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로봇 3원칙’이 내장된 로봇은 인간을 위해 요리하고, 아이들을 돌보며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될 신뢰 받는 동반자로 여겨진다.

NS-4에 이어 더 높은 지능과 많은 기능을 가진 로봇 NS-5의 출시를 하루 앞둔 어느 날, NS-5의 창시자인 래닝 박사가 미스터리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수많은 추측이 난무한 가운데, 시카고 경찰 델 스프너(윌 스미스)는 자살이 아니라는데 확신을 갖고 사건 조사에 착수한다. 끔찍한 사고 이후로 로봇에 대한 적대감을 갖고 있던 그는 이 사건 역시 로봇과 관련이 있다고 믿고 이 뒤에 숨은 음모를 파헤치려고 한다.

로봇 심리학자인 수잔 캘빈 박사(브리짓 모나한)의 도움으로 로봇 “써니”를 조사하기 시작한 스프너 형사는 로봇에 의한 범죄의 가능성을 확신하게 된다. 하지만 래닝 박사의 죽음은 자살로 종결 지어지고, 은밀하게 사건을 추적해 들어가던 스프너는 급기야 로봇들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는데…

(출처 : 네이버 영화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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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나무위키

 

1. 인공지능 알파고와 이세돌

사실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은 생각보다 훨씬 일찍 우리 삶에 가까이 있었다. 인간이 명령을 하면 명령하는 것만 계산해서 토해내는 것이 단순 프로그램의 세계라면 인공지능은 그 과정에 자체 판단력이 들어간 컴퓨터 프로그램이다. 무엇이 우리 주변의 인공지능 시스템일까? 가장 단순한 가전제품이 바로 세탁기이다. 대부분의 세탁기는 일일이 물높이를 지정해주지 않아도 전원을 누르고 원하는 세탁코스를 선택하면 세탁기가 무게를 감지해 스스로 물높이를 맞춘다. 이런 원시적인 인공지능과 비슷하지만 한 단계 발전한 가전제품이 로봇청소기이다. 기존의 청소기는 인간이 방향을 맞춰 흡입구를 갖다 대면 먼지를 빨아들이는 시스템인데 로봇청소기는 센서를 통해 장애물을 인식해서 스스로 방향을 틀어 방 구석구석의 먼지를 흡입하고 돌아다니다 정해진 시간이 다 되면 스스로 충전기를 찾아가 접속한다. 여기에 상상력을 좀더 발휘한다면 가정부 일을 도맡아 알아서 척척하는 로봇 정도는 쉽게 머릿속에 그려진다. 하지만 아직 인공지능 가정부 로봇은 <아이, 로봇>(2004, 알렉스 프로야스)이나 <바이센테니얼 맨>(1999, 크리스 콜럼버스)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사이 인공지능은 인간의 학습능력과 추론능력, 지각능력, 자연언어의 이해능력 등을 엄청나게 학습하고 인간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2016년 3월 9일에서 15일까지 서울에서 벌어진 구글 딥마인드(Google DeepMind)의 바둑프로그램 알파고(AlphaGo)와 프로바둑기사 이세돌 9단의 대결은 ‘세기의’ 대결로서 전세계의 관심을 받았다. 컴퓨터 프로그램과 인간의 대결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미 1990년 초반 퍼스널 컴퓨터(PC)의 대량보급으로 우리는 수많은 PC게임을 즐겼고 여전히 즐기고 있다. 오락실에 가야만 게임을 하던 시대에서 벗어나 손에 동전을 쥐지 않고도 게임을 하는 즐거움이란 요즘말로 꿀잼이었다. 밤새 몇 백 판의 게임을 해도 내가 지불하는 것은 전기세 정도로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그런데 왜 새삼스럽게 예전부터 있던 바둑프로그램과 프로바둑기사의 대결에 그리도 관심을 많이 가졌을까. 까짓 컴퓨터게임이야 질리면 컴퓨터의 전원만 꺼버리면 그만인 것을 말이다.

문제는 알파고가 기존의 컴퓨터 게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발전한 인공지능 시스템의 프로그램이라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주목했던 것은 순간의 판단과 상상력이 동원되어야 하는 고도로 복잡한 인간의 세계를 알파고가 학습해 인간의 영역을 넘볼 수도 있겠다 싶은 데에 있는 것이다.

이미 유럽에서 2015년 10월 프로바둑 2단의 판후이와의 대결에서 알파고는 완승을 거둔 상황이었다. 최근까지 바둑은 컴퓨터에게 너무 어렵고 복잡한 세계였다. 그런데 알파고라는 인공지능이 그 복잡한 바둑의 세계를 정복할 가능성을 보인 것이다. 바둑이라는 것 자체가 인간의 역사 혹은 인간지능의 역사와 함께 해온 고도로 복잡한 게임이다. 바둑이 정확하게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박물지(博物誌)》에 ‘요(堯)나라 임금이 바둑을 만들어 아들 단주(丹朱)를 가르쳤다’, 또 말하기를 ‘순(舜)나라 임금이 아들 상균(商均)의 어리석음을 깨치기 위하여 바둑을 가르쳤다’, 또 ‘그 법이 지혜 있는 자가 아니면 잘 할 수가 없다’고 하였고,《논어(論語)》에 공자가 이르기를 ‘바둑 두는 것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보다 어진 일이다(以奕爲爲之猶賢乎己)’라고 한 것으로 보아 고대 중국에서는 많이 보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둑의 시작이 요순시대라면 4천 년 이상 된 것이고 공자시대 역시 기원전 5~6세기이니 최소로 잡아도 2천 5백년 이상은 된 게임인 셈이다.

게다가 바둑은 서양의 체스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경우의 수가 엄청나다. 체스는 64칸 안에서 6종류의 말을 정해진 경로를 따라 움직이는데 특정한 위치에서 가능한 움직임이 약 12개이다. 그에 비해 361곳을 무작위로 둘 수 있는 바둑은 특정한 위치에서 가능한 움직임이 약 200개에 달한다. 체스의 경우 한 경기를 둘 때 고려해야 하는 경우의 수는 보통 10의 120승으로 계산된다. 하지만 바둑에 대한 경우의 수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바둑 경기의 경우의 수가 10의 170제곱이라고 하지만 구글은 바둑에 대한 경우의 수가 250의 150승이라 했고, 혹자는 10의 360승이라고도 한다. 어떤 경우든 우주 전체의 원자 숫자보다 더 많은 조합과 배열이 가능하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니까 알파고가 이세돌과의 경기를 깨끗하게 이기지 못한 이유는 10의 170제곱 이상의 경우의 수를 아직 다 학습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대국을 할 때마다 상대방의 공격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위기 대응 능력이 완벽하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알파고가 모든 경우의 수를 꿰뚫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어쩌면 알파고를 이기기 위해서 머리 싸매고 대국을 연구하는 것 자체가 쓸데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알파고는 시간이 지나도 지치지 않고 심리적으로 흔들리지도 않으니 말이다.

사진출처 : SBS 뉴스

사진출처 : SBS 뉴스

 

2. 알파고, 인공지능의 미래가 궁금하다

사람들의 관심은 알파고가 미래 진화한 인공지능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상징이라는 데에 있다. 그런데 그 인공지능의 가능성 중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지점은 ‘과연 인공지능이 인간의 영역을 어디까지 넘어올 것인가’에 있지 않을까 한다. 이 질문 속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셈이 숨어 있다. 그 첫 번째는 인공지능이라도 그것은 기계인데 인간을 넘어서기는 어렵지 않겠느냐이고 둘째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능력을 넘어섰을 때 인간의 입지가 대폭 줄어들지 않겠느냐이다. 마지막으로는 질문을 하는 인간도 설마하며 말하겠지만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하는 시대가 오는 것이 가능하겠느냐이다.

일단 알파고와 인간의 대결에서 사람들이 궁금해할만한 것들 세 가지 중에 첫 번째 것은 지금까지의 인공지능 발전수준이라면 고민 없이 답을 내도 좋을 것이다. 알파고가 비록 지금은 인간 이세돌에게 1패를 했지만 하루에도 수천 대국을 학습하고 있는 이상 어떤 인간바둑기사도 알파고를 이길 수는 없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궁금한 것으로 설정한 ‘인공지능이 인간의 능력을 넘어섰을 때 인간의 입지가 대폭 줄어들지 않겠느냐’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이미 언론에는 인공지능이 대체할 인간의 직업군에 대해 호들갑스럽게 떠들고 있다. UN이 내놓은 ‘미래직업보고서’는 2030년까지 20억 개의 일자리가 소멸하고 현존하는 80%가 사라진다고 하였다. 맥킨지 연구소가 일자리를 소멸시킬 신기술로 꼽은 것들은 ‘사물인터넷, 클라우드, 첨단로봇, 무인자동차, 차세대 유전자 지도, 3D프린터, 자원탐사 신기술, 신재생 에너지, 나노기술’ 등이다. 이 신기술들은 직간접적으로 모두 인공지능에 선을 대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 빌게이츠는 “인공지능은 미래 인류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고 영국의 물리학자 스티븐호킹 박사는 “인공지능의 완전한 발전은 인류의 종말을 불러올 수 있다”는 발언까지 한 상황이다.

2016년 1월 다보스포럼(세계경제포럼 연차총회)의 주제는 <로봇과 인공지능이 일으킬 ‘제4차 산업혁명’>이었다. 18세기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근대화의 촉매가 된 1차 산업혁명, 19세기 전기, 화학 기술의 발전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2차 산업혁명, 20세기 컴퓨터와 인터넷이 이끈 정보화 물결의 3차 산업혁명, 그리고 4차 산업혁명이 온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산업혁명은 인간의 일자리를 기계에게 내주는 과정을 반복했다. 기술의 발전과 산업혁명 그리고 인간의 일자리 축소는 함께 해왔다. 분명 인공지능의 발전은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아 갈 것이다. 자본은 다루기 어려운 인간을 통해 이윤을 얻기보다 다루기 쉬운 기계를 통해 이윤을 얻는 편이 훨씬 수월하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학습했으니 말이다.

일자리를 인공지능에게 내주는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술창작의 영역마저 점차 인공지능에게 내주고 있다고 볼만한 현실이 눈앞에 있다. 영화 <아이, 로봇>에서 형사 스푸너는 NS-5, 즉 살인로봇으로 지목되어 체포된 써니에게 박사를 왜 죽였냐고 심문하지만 써니는 자신은 절대 죽이지 않았다고 분노하며 테이블을 내려친다. 분노는 인간의 감정이지 로봇의 영역이 아니다. 스푸너는 써니에게 분노를 흉내내는 것 뿐이라고 하며 로봇이 인간이 될 수 없는 증거로 인간 고유의 영역인 작곡, 명화 등을 만들어낼 수 없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 때 써니가 스푸너에게 한 질문은 “당신은 할 수 있어?”다. 자기도 할 수 없지만 보통인간인 형사도 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예술창작의 영역도 인간과 로봇(인공지능)을 가르는 기준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최근 실재로 작곡 프로그램이 개발되어 놀라운 작곡실력을 보여주는가 하면 회화에서도 주목받는 작품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인간 예술가는 자신의 고유 영역 이외의 정보나 자료는 얻기 어렵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최고의 작곡가들의 작품을 모두 입력할 수 있고 그것을 일정한 알고리즘으로 재창작할 수 있다. 천재작곡가를 뛰어넘는 인공지능의 출현은 시간문제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남은 문제는 인공지능이 과연 인간을 지배할 수 있을까라는 다소 황당한 질문이다. 하지만 황당하다고 모른척 하기에는 찜찜한 구석이 너무나 많다. 인간은 스스로 만든 시스템에 지배당하는 아주 오래된 속성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그 시스템이 어느 순간 스스로 진화해 인격 비슷한 것을 갖출 경우 인간이 아무리 온오프(ON OFF) 버튼을 쥐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것은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예감은 많은 SF 영화들에 짙게 깔려있다. 합리성을 대변하는 기계문명이 비합리성 투성이인 인간 세계를 리셋(reset)하려고 할 것이라는 예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 주요 악역으로 등장하는 가상의 인공 의식인 스카이넷(skynet)은 설정 자체가 인격화된 최첨단 인공지능이 인간을 말살하고 지구를 차지하려는 ‘야욕’ 때문에 벌어지는 사건들이다. 그러나 <아이, 로봇>의 첨단 인공지능 비키(VIKI)는 인간이 너무나도 비합리적으로 환경을 파괴하고 스스로를 파괴하는 시스템으로 살아가는 상황을 ‘교정’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다. 오히려 <아이, 로봇>쪽의 인공지능이 사실 더 그럴듯한 인공지능의 미래가 아닐까. 세상을 독차지하려는 ‘야욕’ 역시 인간을 닮긴 했지만 기계문명의 생명은 합리성이므로 사실 <터미네이터>식의 스카이넷은 SF 영화의 재미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다. 스카이넷은 마치 세상을 집어삼키려는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모습을 한 가짜 인간일뿐이다.

이제 우리의 미래에 예상 가능한 최첨단 인공지능은 <아이, 로봇>의 비키(VIKI)이다. 비합리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을 합리적인 인공지능이 그냥 봐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최대한의 생산성을 지향하기 위해서 노동자를 쥐어짜왔던 자본의 역사처럼 인공지능 역시 생산성을 추구할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역사적으로 서양의 근대를 이끌어온 합리성은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기계 시스템으로 최대한의 생산성을 내왔다. 그러나 인간은 본래부터 비합리적인 존재이다. 아무런 생산성을 가져오지 못할 것이 뻔한데도 빈둥거리고 그림그리고 음악을 듣는다. 심지어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고 시간을 죽이기도 한다. 그런데 그게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 아니겠는가. 인간은 비합리적으로 살면서 인간다움을 이루어왔다. 인공지능이 만약 거기까지 학습할 수 있다면 인공지능 역시 빈둥거리고 싶어하지 않을까. 알파고가 하루에도 수천 대국을 학습하고 있지만 스스로 딱 멈추는 경지까지 간다면, 그 때 알파고는 인간과 동등한 대우를 받아도 좋을 것이다.

강지은(전 웹진편집주간, 건국대 강사)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