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바닥에서 진리를 찾은 이- 장일순 [길 위의 우리 철학] – 15
구태환
1. 원주역과 장일순의 얼굴
열차가 정차하는 역에는 그곳을 거치는 사람들만큼 많은 사연이 쌓이게 마련이다. 전국적으로 도로망이 촘촘해진 지금에야 열차보다 편리한 것이 고속·시외버스이지만, 예전에 큰 도시로 가는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은 열차였다. 그리고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열차 시간을 알아보고 좌석까지 예매하지만, 예전에는 열차 시간을 알아보거나 열차표를 예매하기 위해서, 그리고 벗이나 자녀를 배웅하고 맞이하기 위해서 가야 할 곳이 열차역이었다. 이래저래 열차역에는 많은 사람이 모이게 되고, 그 많은 사람들은 대상으로 한 식당, 여인숙 등이 주변을 차지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곳의 상인이나 여객들을 노린 깡패, 소매치기, 사기꾼들도 적지 않았다. 한 마디로 열차역과 그 주변은 온갖 인간 군상의 집결지였다.
원주역도 다른 도시의 역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오가고, 상권이 형성되고, 소매치기, 깡패 등이 순박한 시골 사람들을 노리기도 했던 곳이다. 적어도 대학생인 필자가 치악산에 가기 위해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고 처음으로 원주역에 도착했던 1980년대 후반 당시에는 그랬다. 그 이후 원주를 다녀갈 때에 열차를 이용했던 기억은 별로 없다. 한참 후에 필자는 원주에 있는 대학에 강의를 다니게 되었고, 간혹 원주역에서 열차를 이용하게 되었는데, 역의 승강장에서 무위당(无爲堂) 장일순(張壹淳, 1928~1994)을 만나게 되었다. 한때(2013년~2016년) 원주역의 승강장 벽에 그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장일순은 자신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원주역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들과 어울렸다고 한다. 그러한 어울림은 많은 일화를 낳았고, 그러한 일화들은 그의 인간에 대한 태도를 잘 보여준다. 그 중 하나가 떠오른다.
원주역을 지나던 아주머니 한 사람이 딸의 결혼 비용을 소매치기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황한 아주머니에게 주위 사람들이 이곳에서는 어려운 일을 장일순이라는 사람에게 상의하면 해결되기도 한다고 알려주었고 그녀는 그를 찾아가 하소연한다. 사정을 들은 그는 원주역 주변 일대를 돌면서 그 소매치기를 찾아내고 결국 소매치기한 돈을 받아 아주머니에게 돌려줬다는 일화다. 참 영화 같은 이야기이다. 장일순이 그 동네를 주름잡던 깡패 두목 정도라면 모르겠지만 힘을 쓰는 사람도 아닌 그가 어떻게 소매치기를 설득했을까?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후 장일순은 그 소매치기를 다시 불러 술 한 잔 대접했다고 한다. 이 이유인 즉 피치 못할 사정으로 당신에게 소매치기한 돈을 돌려받았지만, 결국 내가 당신 영업을 방해한 것이니 미안하다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 사건은 사람을 대하는 장일순의 태도를 알 드러내준다. 그대가 도둑일지라도 나는 그대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는다는 태도, 그리고 나는 그대를 인간으로, 그리고 소매치기라는 당신의 직업을 생업으로 인정한다는 태도 말이다. 타인 위에 군림하고 가르치려 하지 않는 태도 말이다.
2. 생애
장일순은 원주에 세거한 집안에 태어나 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원주에서 보냈고, 원주에서 삶을 마감했다. 그의 유소년기를 살펴볼 때에 필자의 시선을 끄는 인물이 몇 있는데, 특히 그의 조부와 모친은 예사롭지 않으면서도 예전의 우리 주변에서 간혹 볼 수 있는 현명한 이들의 전형이라 할 것이다.
조부 장경호(張慶浩)는 가족들에게 “밥 한 그릇을 우습게 봐서는 아니 되느니! 온 우주가 힘을 합해야 그게 만들어지지 않더냐. 쌀 한 톨이라도 버리는 짓은 큰 죄를 저지르는 일이야.”라고 하면서 땅에 떨어진 한 알의 곡식도 허투루 지나치지 않았다. 젊은 시절에 장사를 통해 상당한 부를 축적한 그의 조부가 이처럼 한 알의 곡식도 아끼는 행동은 자린고비의 그것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조부는 걸인이 오면 상을 차려 대접하도록 하는 등 결코 자신만의 호의호식을 위해 곡식을 아끼거나 자신보다 가지지 못한 자를 무시한 태도를 보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집에는 수많은 묵객들이 드나들었고, 그의 어머니 역시 시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걸인 상을 차릴 때에도 정성을 다하였고, 소작농에게는 더운밥을 대접하고 자식들에게는 찬밥을 주는 그런 이였다.
원주에서 소학교를 마친 장일순은 서울의 배재중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공업전문대학(서울대 공대의 전신)에 입학하지만 ‘국립대학 설립안’에 반대하다가 제적당하고 원주로 내려온다. 하지만 주위의 권유로 다시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했지만, 4학년인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학업을 중단하고 원주로 돌아온다. 그후 교육에 뜻을 두어 당시의 성육고등공민학교를 인수하여 1954년 대성중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이사장으로 봉직하는데, 교사 부족 때문에 교사로도 활동한다.
그는 1958년과 1960년에 모순된 현실 사회를 바꾸기 위해 국회의원에 입후보하지만, 현실 정치 현실에 대한 지나친 낙관과 정치적 탄압으로 인해 두 번 모두 낙선하고 만다. 그런 그는 1961년 5.16 쿠데타 직후에 평소 주장하던 중립화 평화통일론을 빌미로 체포되어 3년 동안 옥고를 치르게 된다. 외세를 배제하고 남북한 당사자가 만나 평화통일을 협의하자는 주장이 북한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출소 이듬해에 대성학원 이사장에 복귀하여 교육 사업에 몰두하고자 하지만, 박정희 독재정권은 그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사회안전법’ 등으로 그의 모든 활동을 감시하고 방해했으며, 결국 1965년 대성학교 학생들이 굴욕적인 한일외교 반대운동으로 구속되자, 장일순은 학생들의 석방을 조건으로 이사장직을 포기하게 된다.
독재정권의 이러한 부당한 탄압 때문에 현재 우리가 장일순의 사상을 파악하는 데 한 가지 애로점이 생기게 된다. 일찌감치 군사독재정권으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지목된 그는 자신의 글로 인해서 자신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피해가 미칠까봐 저어하여 글을 남기지 않은 것이다.
이후 그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관심을 집중하여, 망가져가는 농촌과 광산촌을 살리기 위한 신용협동조합 운동에 펼치게 되고, 1971년 이후에는 지학순 주교와 함께 민주화 운동의 조력자로서 역할을 했다. 이러한 민주화 운동의 조력자로의 그의 역할로 인해서 박정희에서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많은 민주인사들이 정권의 탄압을 피해 원주에 와서 장일순에 몸을 의탁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의 협동조합운동은 ‘원주소비자협동조합’의 설립으로 드러나며, 특히 현재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갖고 있는 ‘한살림 생협’의 창립에 많은 공헌을 했다. 생산자와 소비자를 잇고, 결국 생산자와 소비자, 나아가 땅과 생명을 살리는 운동에서 차지하는 장일순의 역할은 지대했다고 평할 만하다.
병든 세상을 고쳐보고자 평생을 노력한 그에게도 못된 병이 찾아왔으니, 1991년 위암이 발병하여 결국 1994년에 그 ‘병을 모시고’ 이 세상을 등졌다.
3. 걸어다니는 동학
암을 앓으면서 “병을 모시고 간다”던 장일순은 자신의 병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자연도, 지구도 암을 앓고 있고, 자연 전체가 암을 앓고 있는데 사람도 자연의 하나인데 사람이라고 왜 암에 안 걸리겠어요. 그러니까 큰 것을 나한테 가르쳐주느라고, 결국은 지금 뭐냐 하면 너 좀 앓아봐라 하고 그러시는 것 같아요.”
누군가가 ‘진리는 단순하다’고 했다. 사람들이 ‘진리’라고 이야기하면 대단히 거창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의 삶의 참된 이치가 진리이고, 결국 진리는 우리 삶 속에 녹아있고, 우리는 진리 속에서 살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모르고서 말이다. 지구의 급격한 환경 변화, 그러한 변화의 급격함에 적응하지 못하는 우리의 몸, 그 결과 드러나는 내 몸의 이상 현상인 병은 서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고, 그것은 참된 이치이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먼저 아는 것은 내 몸이다. 그런데 우리는 가장 가까운 내 몸이 아는 것을 무시하고 다른 고차원적인 것에서 진리를 찾는다. 장일순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런 것 아니겠는가?
사람이 자연의 일부이고, 자연이 병들면 사람도 병들 수밖에 없다는 장일순의 사고는 예전부터 있어왔지만, 가까이에서 그 연원을 찾자면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을 떠올릴 수 있다. 인간과 만물은 모두 한울님을 모신 존재이고 만물과 내 몸에 깃든 한울님은 같은 존재다. 그리고 만물을 아우르는 하늘과 땅은 만물을 낳았으니, 내 부모와 한 몸이다. 따라서 최시형은 나막신을 신은 아이가 뛰어다니는 것을 마뜩치 않게 생각한다. 나막신이 딸각거리며 땅을 울리면 땅에 깃든 한울님, 내 부모가 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울님, 내 부모가 상하면 그 자식인 우리 역시 상하게 된다. 만물과 나는 천지라는 같은 부모의 품에서 생장하는 존재이니, 천지가 병들었는데 내 몸이 병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장일순은 ‘국대안 반대 투쟁’으로 제적당해서 원주로 내려왔을 때 먼 친척형인 오창세를 통해 해월 최시형을 접하여 그의 사상에 심취하게 된다. 상당히 젊은 나이에 접하게 된 것이다. 그후 그의 사상 행적 곳곳에서 최시형의 흔적이 보이는데, 원주시 호저면 고산리 송골의 최시형이 관군에게 체포된 곳에 기념비를 세우고 직접 글씨를 남긴다.
특히 그는 만물이 한울님을 모신 존재라고 한 최시형의 사상에 심취한 것 같다. 사람만이 아니라 곡식 한 알, 돌멩이 하나, 벌레 하나도 한울님이니, 이러한 한울님을 무시하고서 멋대로 개발하는 행위는 한울님을 해치게 되고, 결국 인간 역시 살아갈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한울님을 어떻게 섬겨야 할까?
장일순은 ‘알뜰함’을 꼽는다. 수많은 농부의 땀과 하늘과 땅이 일체가 되어 한 사발의 밥이 나오는데, 그 밥을 소중하고 알뜰하게 다뤄야만 남는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한 사발의 밥을 알뜰하게 다뤄서 이웃과 서로 나누는 것이 ‘한살림’ 정신이라고 강조한다. 음식에도 한울님이 있으니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 한울님을 영접하는 행위라고 강조한 최시형의 생각을 그러한 한울님이 깃든 음식을 알뜰하게 다뤄 주변 사람과 함께 먹음으로써 모두가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데에까지 확장했다고 할 수 있다. 한울님이 깃든 음식을 많다고 해서 허투루 낭비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이러한 생각은 자연을 무한정 착취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고 그것을 인간의 의도에 맞게 개발하고 변형함으로써 더욱 풍요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인간중심주의적 사고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다.
4. 밑으로 기는 자세
자연을 인간의 이용과 지배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태도에 대한 그의 비판은 타인에게 군림하지 않는 그의 사상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가 제자들에게 항시 했던 말 가운데 하나는 “기어라”이다. 장일순 자신 앞에서 기라는 것이 아니라 남과 맞서서 내가 잘났다고 내가 힘있다고 우기지 말고 남들 밑에 처하라는 말이다. 이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제자 한 사람이 얼큰하게 취한 상태에서 길을 걷다가 장일순을 만났다. 그는 술김에 선생님께 치기를 부려 “선생님은 맨날 저희보고 기어라, 기어라 하시지만 당신께서는 언제나 저희에게 대접만 받지 않습니까”라고 따졌다. 이러한 제자의 치기어린 투정에 대한 장일순의 답변은 그 자리에 납작 엎드리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 제자는 술이 확 깼을 것이다. 그의 말이 알맹이 없이 입으로만 뱉어내는 것이 아님을 드러내는 일화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타인 발밑을 기라는 그의 말은 무슨 의미일까? 많은 이들은 장일순의 이러한 사고의 연원을 『노자』에서 찾으며, 필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의 호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무위당’도 노자에서 차용한 것이며, 장일순의 구술을 제자 이현주가 풀어냈다고 하는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라는 책이 있는 것도 주지되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기어라’와 관련되는 노자의 대표적인 언급은 “가장 선한 것은 물과 같다(上善若水)”고 했다. 이러한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스스로의 공을 뽐내지 않는다. 그리고 산에 있는 물은 아래로 흘러 계곡에 모인다. 노자는 이처럼 물이 모이는 계곡의 신은 죽지 않는다고 하면서 계속의 신을 오묘한 암컷의 생식기에 비유하는데, 이러한 암컷의 생식기에서는 만물이 탄생한다. 노자는 이 말을 통해서 남들 위에 군림하려고만 하고 남 밑에서 기고 싶어 하지 않는 세태를 비판했다. 이러한 세태와는 달리 물은 모두가 싫어하는 밑으로 흐르면서도 만물에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타인과 다투고 그 위에 군림하고자 하면, 결국 모두가 다칠 뿐이다. 중요한 것은 다툼이 아니고 함께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타인에게 군림하려는 태도는 어디에서 오는가? 장일순은 그 태도가 자신을 내세우는 데 있다고 본다. 그리고 자신을 내세우는 것은 자신을 채우기 때문이라고 한다. 노자의 말처럼 비어있어야만 다른 무엇인가를 채울 수 있다. 즉 다른 이를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나를 성장시키는 것이다. 그러할 때 비로소 우주 만물과 그에 속하는 나와 우리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기어라’ 역시 만물과의 함께 삶을 추구하는 고민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5. 그의 자취
모든 사람, 그리고 자신을 괴롭히는 몹쓸 병과도 함께 살아가고자 한 장일순의 자취를 파악하는 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그는 의도적으로 글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한 사람의 사상을 파악하기 위해서 반드시 그가 남긴 글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인류 역사에서 성인으로 숭상되는 공자, 소크라테스, 석가, 예수 가운데 누구도 글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말과 행동은 제자들을 감복시켰고, 그 제자들이 스승의 말과 행동을 글로 남겨서 아직도 우리는 그 성인들의 위대한 사상에 젖어 있는 것이다. 장일순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의 사상 행적은 우선 제자들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의 서화도 우리에게 그의 사상의 단편을 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는 어렸을 적에 할아버지의 묵객 가운에 한 사람인 차강(此江) 박기정(朴基正)에게 서예를 배웠는데, 글을 쓸 수 없는 처지인 그에게 서화는 자신이 생각을 펼치는 수단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사람의 얼굴 모습을 한 ‘의인란(擬人蘭)’은 일품이라 할 것이다.
윗 사진의 그림은 장일순의 대성학교 제자와 그의 부인이 운영하는 식당에 걸려 있는 것이다. 단아한 얼굴 모습을 한 꽃과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곧게 선 꽃대, 그리고 휘어져있지만 강한 생명력을 함유한 듯한 두 이파리는 그 그림의 주인공인 제자의 부인과 꼭 닮아 있다. 이 그림에는 삶의 역경을 견뎌내면서 자신의 길을 꿋꿋이 가는 사람에 대한 장일순의 무한한 애정이 담겨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의 흔적은 그의 활동 공간에서 잘 드러난다. 인간을 포함하는 모든 생명체를 살리고자 설립하거나 설립에 도움을 준 협동조합은 이미 전국적인 단위로 확산되었고, 많은 이들이 협동조합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원주 중앙동에 위치한 ‘밝음 신협’은 그 가운데 하나로서 그곳에는 아담한 규모이긴 하지만 ‘무위당 장일순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흔적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곳이 1955년에 장일순이 스스로 지었다는 봉산동의 집이다.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북적였을 이곳을 여전히 그의 부인이 지키고 있다. 안뜰에 잡초가 뒤섞인 온갖 생명체를 안고 소박하게 자리하고 있는 이 집은 자연을 인간을 위한 도구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같은 생명을 가진 존재로 보는, 그래서 그 위에 군림하지 않는 장일순의 모습이 아닐까. 그는 봉산동 집을 나서 원주천 제방을 따라 원주역까지 걸어다니곤 했다고 한다.
이 봉산동 집 부근의 작은 길에는 ‘무위당길’이라는 명칭이 붙여져 있다. 혹자는 이처럼 작고 초라한 길에 장일순처럼 큰 스승의 이름이 부여된 것이 불만스러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필자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자 한 그에게 큰 길을 선사하는 것은 오히려 모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중요한 것은 이 작은 길에서라도 그의 삶과 그의 정신을 기억하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것 아닐까 한다.
기고자: 구태환(한국철학사상연구회)
최한기의 인체론과 관련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본 분과에서 동학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으며, 배타적 소유권에서 벗어난 ‘인권’의 가능성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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