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소 [퍼농유]

우쑵니다.

어제 광화문에 홀로 나가 나에게도 이런 감정이 있었던가를 느끼며 박근혜 퇴진을 외치며 싸돌아 다녔습니다. 그곳에서 한철연 식구들을 만나 술한잔 했습니다. 아! 이런 인연이! 빈속에 마구 쐬주를 들이켰던지라 마니 취했습니다. 노래방까지 가는 호기를 부렸지만 체력적 한계를 느껴서 인사도 제대로 드리지 않고 도망가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우철이형 미안해 ㅠㅠ) 고3때에도 밤샘을 하며 공부하지 않았던 체력인지라 급격한 노화로 제대로 버티지 못했습니다.
이런 엄중한 시기에 또다시 욕 들어 먹을 짓을 하려고 합니다. 홍보질입니다. 부끄럽기 짝이 없는 짓인 줄 왜 모르겠습니까. 박최순실의 짓거리에 비한다면 새 발의 피라고 혜량해 주시기 바랍니다. 책을 한 권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책을 낸다는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 책에는 뭔가 남다른 사연과 감회가 있습니다. 하나의 계기라고 생각합니다. 출발선상에서 다시 마음 다잡고 신발끈 매고 몸을 푸는 마라톤 선수의 심정이라고 할까요. 제목은 ‘마흔의 단어들’입니다. 살만큼 살았음에도 아직 살아야할 날들이 많이 남은 마흔들이 가진 애환들을 묶어보았습니다. 마음은 아직 젊은데 사회에서는 밀려나기 시작하기에 더 이상 젊지 않은 사정들이 절박한 마흔의 감정들을 모아보았습니다. 다음 주에 책이 나올 예정입니다. 부끄럽고 염치없지만 널리 홍보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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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한 꼭지 올려봅니다.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냉소적 이성비판]이라는 책을 중심으로 구성해보았습니다. 니체의 이런 말을 좋아합니다. “너희는 사자가 먹이를 갈구하듯이 그렇게 지식을 갈구하는가?” 과연 우리는 철학을 통해 진리 그 자체를 그렇게도 목말라 갈구했었던 것일까요? 회의적입니다.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이 점에 대해서 냉소적입니다. 그는 철학이 임종의 순간을 맞이했다고 선언하고 있더군요. 그러나 아직 그 임무를 다하지도 못해서 죽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임종을 맞은 철학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거창한 주제들은 모두 핑계였고 신이나 우주, 주체나 객체, 의미나 무 등의 추상적 주제들은 모두 사실 아무 것도 아니라고.
슬로터다이크는 칸트의 사유, 아니 철학적 사유 자체와 접촉할 때 안게 되는 위험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더군요. 우숩지만 멋진 표현입니다. “격렬하고 급작스러운 노화 현상.” 철학을 한다는 것은 급격하게 늙어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곤 이렇게 묻더군요. “과연 지식에 대한 혈기왕성한 젊은 의지는 지금 철학에 어느 정도 남아 있는가?”
그는 이성과 비판의 힘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계몽의 신화는 무너지고 있다고 진단하더군요. 전통적 이데올로기 비판은 냉소주의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냉소주의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냉소주의를 계몽된 허위의식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계몽주의는 종교적 환상을 비판했고 형이상학적 허구를 비판했고 도덕적 허구를 비판했고 관념론적인 상부 구조 등을 비판했습니다. 이제 계몽된 의식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러나 계몽되었지만 무감각해졌을 뿐 아니라 냉소적이 되었다. 어떻게 해야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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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슬로터다이크는 현대인들의 냉소주의에 맞서 유머, 욕설, 아이러니, 반항적 몸짓 등 고대적 냉소주의의 선구자인 디오게네스의 미덕들을 제시하더군요. 슬로터다이크는 철학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이해를 바탕으로 한 몸(physis)과 정신(logos)의 상호작용이 철학이지, 그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철학은 아니다.” 슬로터다이크는 비판정신과 저항정신을 잃은 근대인들은 실제로 저항도 못하면서 그저 머리로만 사회적 부정의를 냉소하고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닐까요? 근성도 오기도 없이 너무도 허약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저하는 허약한 사유가 아닙니다. 개 같은 곤조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정치적 상황 속에서는 개 같은 곤조와 함께 더욱더 냉정한 사유가 필요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더욱더 교활한 정치적 상상력, 더욱더 냉정한 법적인 태도, 더욱더 강직한 도덕적 힘들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입니다.

부끄럽고 염치없습니다.

냉소

1.
이방인의 뫼르소가 정오의 태양빛이 너무 강렬하여 방아쇠를 당긴 일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니다. 모든 것이 태양 빛 아래 노골적으로 드러나서, 명명백백해지는 순간 그는 권태를 느꼈던 것은 아닐까? 이 따분한 권태가 그로 하여금 방아쇠를 당기게 했던 것은 아닐지. 아! 이 너무나도 뻔한 세상의 가증스런 노골(露骨)이란! 세상이란 고작 이런 것이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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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정오를 맞이한 40대는 그 정오의 태양 아래에서 뻔하게 그 몰골을 드러내는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며 무엇을 느낄까? 뫼르소가 느낀 따분한 권태가 아닐까? 이 한낮의 뙤약볕 무기력에는 어떤 섬뜩함이 있다. 무관심, 냉담, 냉소, 불안, 분노, 탐욕, 외로움이 자리한다. 그리고 이 섬뜩한 무기력의 정체는 바로 권태이다. 내가 살아온 삶이 고작 이런 것이었단 말인가!
그러나 이 섬뜩한 권태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스벤젠(Svendsen)은 지루함의 철학이란 책에서 “존재 차원의 지루함, 다시 말해 삶 자체와 결부된 지루함은 근대에 들어서 생겨난 현상”이라고 분석한다. 근대 이전에 귀족만이 누렸던 여가의 상징이었지만 이제는 근대인 모두가 가진 특권이 되었다. 그러나 왜 근대와 함께 존재 차원의 권태가 시작되었을까?
근대는 종교의 시대에서 과학의 시대로, 신비의 세계에서 합리의 세계로 이행했던 시대이다. 그래서 신의 세계에서 이성의 시대로 전환된 것이다. 이 과학과 이성의 시대에서 세상은 정확하게 계산되고 명증하게 드러난다. 이해하지 못할 신비의 영역은 사라지고 이해 가능한 합리적인 영역이 펼쳐진다.
그런데 왜 이러한 명증하고 합리적인 세계인 근대로부터 권태가 시작할까? 어쩌면 권태란 세계의 무의미에서 오는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권태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의미의 명백함에서 온다. 모든 것의 의미가 뻔하게 이해될 때 오히려 의미가 없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의미의 결여에서 권태가 오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과잉에서 권태가 온다.
이제 세상은 명백해졌고, 미지의 세계는 사라져 버린다. 이제 낯선 두려움도, 흥미도, 설렘도 없게 된다. 모든 것을 드러낸 세상은 뻔해진다. 뻔해진 세상은 뻔하기 때문에 알 필요가 없어진다. 권태가 시작되는 것이다. 근대의 권태와 함께 과시적인 스펙타클한 소비의 시대가 시작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중년에 찾아오는 권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삶을 살아볼 만큼 살아본 나이이기에 이제 세상은 뻔해진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뻔해진 세상의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중년들은 뻔뻔해진다. 뻔뻔함은 중년들의 특권이다. 뻔한 세상에 중년에게 찾아온 뻔뻔함, 이것은 이 시대에서 성공을 위해 필수적인 조건이 되었다.
그래서 바야흐로 뻔뻔스러운 시대이다. 모진 사람이 이기고 뻔뻔한 사람이 성공한다. 어진 사람은 바보취급 당하고 어수룩한 사람은 언제나 실패한다. 뻔뻔함은 강한 자기 확신이며 배짱이다. 일을 성취하려는 현실주의자의 추진력이다.
자신의 이익과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도 그것에 대해 비난을 하는 사람에게 “왜 이래 아마추어처럼”하며 오히려 역정이다. 1억을 거절하는 청렴에 대해서는 “10억이면 되겠어?”라며 떠본다. 성적 유혹을 부끄러워하는 순진함에 대해서는 “왠 내숭이야, 내숭떠니 더 섹시한데?”라며 수치심을 조롱한다.
뻔뻔함은 인간의 탐욕과 욕망과 쾌락에 대한 신념으로 무장하고 있다. 너도 별 수 있겠어라는 의심에 기초한다. 이것은 인간의 도덕성과 선함에 대한 무의식적 불신에 근거한다. 이러한 냉소적 의심은 뻔뻔함의 철학적 토대다.

2.
서양의 근대적 이성이 낳은 결과는 무엇일까? 중세적 세계관을 비판하면서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의외의 답안을 내놓은 사람은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이다. 그는 근대 문화가 가진 새로운 특질을 냉소주의(Zynismus)로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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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계몽주의자들이 중세적 세계관에 현혹되었던 대중들을 대하는 이데올로기적 태도는 무엇인가? “그들은 그들이 행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나 행한다.”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대중은 계몽되어야 했다. 자신이 속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했다. 계몽적 태도는 권위적이다.
계몽을 통해 무지몽매한 대중들은 자신이 속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정체를 깨닫고 계몽된 삶을 살았을까? 아니다. 슬로터다이크에 따르면 그들의 논리는 이러하다. 그들은 계몽되었다. 자신들이 모르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런데도 여전히 그대로 행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상황 논리나 자기 보존의 욕망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렇게 행하는 것이다.”
근대의 계몽된 인간들은 근대 사회의 자본들이 현혹하는 이데올로기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속이는 것을 알지만 그 이데올로기에 따라서 그대로 행한다. 근대적 인간들은 그들이 가진 이데올로기의 문제점을 비판하더라도 꿈적하지 않는다. 냉소적이 된 것이다.
자본가들의 뻔뻔한 탐욕과 염치없는 비도덕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비판하더라도 그들은 냉소할 뿐이다. “그래서 어쩔 건데. 억울하면 돈 벌던지.” 이 냉소주의적 태도는 단지 자본가들만의 태도는 아니다. 현대 대중이 가진 일반적인 태도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쩌라고? 어쩔 수 없잖아.”
슬로터다이크에 따르면 이런 태도는 비도덕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현실적으로 바보로만 살지 않겠다는 계몽된 인간들의 행동 방식이다. 냉소주의자는 바보가 아니다. 여러 가지 피치 못할 사정과 이유를 대면서, 그래 그렇지만 그렇게 행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슬로터다이크는 이러한 냉소주의를 ‘계몽된 허위의식’이라고 규정했다. 중세시대의 거짓과 억압의 환상에서 스스로 계몽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에는 근대적 먹고사니즘의 실존적 한계에 무릎을 꿇는다.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중세의 신학적 세계관에서 근대의 과학적 세계관으로 변했다. 신이 죽은 음울한 회색빛 공간에 과시적인 스펙타클한 소비의 문화가 들어섰다. 돈이 신이 된 시대다. 그리고 돈이 신이라는 것이 환상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돈을 섬긴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교활한 어른이 되어야 했다. 뻔뻔함은 이 계몽된 허위의식이 낳은 어른들의 불행한 의식이다. 삶이 너무 각박해지고 있다. 각박한 세상에서 ‘계몽된 허위의식’은 냉소할 뿐이다. 그래봐야 어쩔 수 없다고 냉소한다.
문제는 계몽된 허위의식의 뻔뻔함은 스스로 고결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스스로 고상한 도덕적 탈을 쓰면서 유체이탈 현상이 일어난다. 뻔뻔한 사람들은 자신의 뻔뻔함이 자기 확신적 도덕에 근거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무거운 표정으로 진지한 자신의 도덕을 늘어놓곤 한다.
뻔뻔한 철면피들을 대중들은 증오한다는 뻔한 사실을 뻔뻔하게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뻔뻔한 사람들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도덕적이고 근엄하다. 어느 대기업 그룹 회장은 “모든 국민이 정직했으면 좋겠다. 거짓말 없는 세상이 돼야한다.”고 심각하게 말했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믿는 척하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이 믿는 척하는 태도에 담긴 이데올로기는 무엇일까? 믿는 척하는 자기기만적 태도를 유지해야 안락한 삶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결하고 깨끗하며 우아하다고 생각한다. 계몽된 허위의식의 이러한 태도를 키치(kitsch)적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키치적 삶이란 무엇인가?

3.
키치(kitsch)란 단순하게 말하자면 고급예술과는 다른 통속예술이다. 천박하고 저속한 모조품 또는 대량 생산된 싸구려 예술 상품을 이르는 말이다. 모나리자 그림이 있는 시골이발소 풍경이 키치의 전형이다.
주목해야할 것은 통속 예술 작품과 관련한 키치보다는 하나의 삶의 태도와 관련된 키치이다. 키치는 바로 근대적 존재 양식이다. 신의 죽음이 선언된 근대에서 그 죽음이라는 빈 공간속에 색칠해 놓은 환상과 소비의 과시적 세계이다.
우리는 대량으로 생산되고 모방되는 다양한 상품들을 소비하고 향유한다. 귀족들이 가진 고급 예술과 삶의 양식을 근대 이후 경제적인 성공을 이룬 신흥 계급이 키치로서 즐긴다. 마찬가지로 경제적 성공을 이룬 중년들도 귀족적 삶의 양식을 키치적으로서 즐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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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이 아니라 아저씨하면 떠오르는 모습은 후줄근하고 촌티 나는 행색이다. 요즘 이런 아저씨들은 어디를 가도 환영받지 못한다. 꽃중년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외모, 패션, 건강, 운동, 자기계발 등 치장이나 옷차림에 금전적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피부 관리, 두발, 성형도 불사한다. 몸짱은 기본이다. 적지 않은 돈이 필요하다. 꽃중년의 삶은 이제 외모에서 태도에 이르기까지 엘레강스하고 클래식하거나, 스마트하고 모던하다. 최신형 자동차를 사고, 유행에 따라 옷을 입으며, 맛집을 찾아 식도락을 즐기고, 고급 상품을 소유하고, 독특한 취미생활로 삶의 의미를 찾는다. 그것도 예술적으로. 물론 키치적이다.
계몽된 허위의식을 가진 중년들은 바로 키치적인 삶을 살고 있다. 의미를 찾으려 하지만 의미가 없는 뻔한 세상의 권태와 부조리를 키치가 메꾸고 있다. 이 키치적 삶을 살고 있는 중년의 삶의 태도가 냉소주의다. 다 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행한다.
밀란 쿤데라의 키치에 대한 정의는 이렇다. “키치는 어떤 세계관에 의해 뒷받침된 미학, 거의 철학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건 인식이 제외된 아름다움이고 사물을 아름답게 만들어 남에게 환심을 사려는 의지이며 총체적인 순응주의입니다.”
“인식이 제외되”었다는 것은 그것에 대해 의심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때문에 총체적인 순응주의이다. 순응할 수밖에 없다고 굴복하지만 거기에는 다른 욕망이 숨어 있다. “너희들만 즐기냐? 나도 좀 즐기자”거나 “너희들만 고상하냐? 나도 좀 고상하게 살아보자”는 욕망이다.
고상하게 즐기기 위해서는 세상에 존재하는 부패와 부조리와 부정의는 은폐되어야 한다. 은폐되어야할 것은 우리들의 삶의 추악함이다. 세상이 부패했고 부조리하고 부정의하다는 것 쯤 나도 다 알어. 하지만 나도 좀 즐기자.
밀란 쿤데라는 그래서 키치를 이렇게 정의한다. “똥이 부정되고, 각자가 마치 똥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처신하는 세계를 미학적 이상으로 삼는 것이다. 바로 이런 미학적 이상을 키치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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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말한다면 똥이 부정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부패와 부조리와 부정의는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은폐되는 것이다. 은폐란 세상의 청렴과 합리와 정의를 냉소하는 것이고, 다 알지만 모르는 척 무관심하게 지루해하는 것이다. 권태로운 것이다.
계몽된 허위의식은 실존적 한계를 잘 알고 있지만, 키치적 삶을 욕망하고 있다. 똥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 아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세상에서 총체적 순응주의자들인 중년은 진심으로 고상한 신사의 품격을 지니고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은 키치적이다.

4.
계몽된 허위의식은 계몽을 통해서 해결할 수는 없다. 그들은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척하면서 행하기 때문이다. 대안은 있을까? 슬로터다이크가 제안하는 바는 이렇다. 이 계몽된 허위의식의 ‘냉소주의’(Zynismus)의 대안으로 고대 희랍시대의 ‘견유주의’(犬儒主義, Kynismus)를 제안한다. 왜 그럴까?
냉소를 뜻하는 영어의 ‘시니컬’(cynical)은 원래 고대 그리스어의 ‘퀴니코스’(kynikos)에서 나온 말이다. 슬로터다이크는 현대의 시니컬한 냉소주의를 그리스어인 ‘퀴니코스’로 대응하고자 했던 것이다. ‘퀴니코스’란 ‘개 같다’는 뜻이다. 그래서 ‘견유주의’(犬儒主義)라고 번역되었다.
왜 개 같다고 했을까? 디오게네스의 삶 자체가 개 같은 삶이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사람들은 디오게네스를 개라고 불렀다고 한다. 우리도 ‘개 같다’라는 말을 욕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개는 개 같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원리에 따라 사는 도덕적 동물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디오게네스를 개 같다고 욕을 했을 때 디오게네스는 그래 나는 개라고 말한다. 그러나 너희들은 개만도 못한 위선적인 놈들이라고 폭로했던 것이 아닐까? 개가 자연적으로 살 때 인간은 유체이탈의 위선을 범하면서도 개를 욕하며 자신의 위선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Alexander and Diogenes exhibited 1848 Sir Edwin Henry Landseer 1802-1873 Bequeathed by Jacob Bell 1859 http://www.tate.org.uk/art/work/N00608

Alexander and Diogenes exhibited 1848 Sir Edwin Henry Landseer 1802-1873 Bequeathed by Jacob Bell 1859 http://www.tate.org.uk/art/work/N00608

똥이 없는 듯이 세상을 고결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이상화하는 뻔뻔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비도덕적이거나 사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뻔뻔한 냉소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바보는 아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뚜렷한 명분이나 냉철한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모르고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하기 때문이다.
슬로터다이크는 이런 계몽된 허위의식의 뻔뻔한 냉소에 대해서는 더더욱 개 같은 냉소로 맞서기를 권한다. 머리로 싸움하려고 하지 말고 직접 몸으로 보여준다. 똥을 무시하는 그들의 고상함에 대해서 똥과 오줌과 정액으로 조롱한다. 무관심한 냉소가 아니라 몸으로 보여주는 냉소를 권유하고 있다.
알면서도 모른 척 고상한 태도로 뻔뻔한 냉소를 취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고상함에 감춰진 똥들을 폭로하면서 맞서라는 얘기다. 그들의 계몽된 이성에 맞서 육체적인 분노와 조롱으로 그들의 계몽된 허위의식을 일깨우라는 말이기도 하다.
슬로터다이크의 계몽된 허위의식에 대항하는 방법은 뻔해진 세상의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뻔뻔해진 중년들의 냉소와 권태와 무관심에 대항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뻔뻔한 키치에 저항하라. 그것이 디오니게스적 저항이다.
뻔해진 세상에 뻔뻔해진 중년들은 그래서 알고도 행하는 허위의식에 빠진 뻔뻔스러움보다는 디오니소스적 냉소를 실천해 볼만하다. 그래 나는 개다. 하지만 개만도 못한 너희들보다는 적어도 자연스럽다. 그러니 웃자. 이것이 슬로터다이크가 뻔뻔해진 중년에게 권하는 디오게네스적인 냉소와 유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