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은 크나큰 불효(不孝)이다[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4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은 크나큰 불효(不孝)이다[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4

나태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수 백 명 고등학생들이 부모에게 불효를 범했다. 부모 가슴이 숯처럼 타 들어가게 했다. 부모 가슴을 송곳으로 후벼 팠다. 국가는 제대로 저들의 불효를 막지 못했다. 선거개표조작으로 대통령 자리 훔친 박근혜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뭔지 구분하지 못했다. 자신이 아르바이트도 해 본 적이 없었기에 나타난 현상이다.

박성미 감독이 말한 것처럼

‘돈은 걱정하지 말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세월호에 탄 사람 모두를 구하라!’

박근혜가 이리 말했으면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군함 몇 척, 다이빙벨, 바지선, 크레인을 모두 동원해서 사람들을 구했을 것이다. 군함 몇 척이 동원 되었으면 세월호에 밧줄을 매달아 약 1.6키로 떨어진 육지로 세월호를 끌고 갔을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는 ‘책임 묻겠다. 엄단하겠다.’ 이런 말을 해서 오히려 현장에서 구조하는 공무원들을 주눅들게 만들었다.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겁먹은 공무원들은 구하는 하는 시늉만 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윗물이 지혜로울 때 아랫물이 속 편하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그건 국가가 아니다.

우리 국민 한사람을 못 지켜낸

노무현 대통령은 자격이 없으며

나는 용서할 수가 없다’

– 박근혜가 했던 말

(알카에다에게 김선일 씨가 피살당했을 때)

 

 

 

세월호의 침몰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도 몰락하다![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3

세월호의 침몰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도 몰락하다![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3

 

김성우(ⓔ시대와철학 편집위원장)

 

세월호 침몰 속에서 자유 민주주의의 민낯이 드러났다.?자유 민주주의에서 자유와 민주는 언제나 실현되는 이념이 아니라 구실이나 핑계일 뿐이다.?자유는 시장과 재벌의 자유로 전락하고 민주는 일정 기간 동안 정해진 대로 부여된 투표권으로 나타난다.?언론의 자유는 자본과 권력에 종속되어 자유 민주주의의 불편한 진실을 은폐하고 관심의 방향을 다른 쪽으로 돌린다.?지금 우리나라의 자유 민주주의는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민주화의 모든 노력과 성과를 뒤로 하고 자유와 민주의 장애물이 되었다.

이러한 자유 민주주의에 포퓰리즘이 더해지면 대중독재의 파시즘이 출현한다.?자유 민주주의는 선거가 경쟁적이지만 파시즘은 대단히 일방적이고 공세적이다.?파시즘은 이를 위해 언론과 방송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극도로 이데올로기 작업에 매진한다.?예를 들어 나치 정권의 히틀러는 [나의 투쟁]이라는 저서에서 독일인들에게 닥친 패배,?경제위기,?도덕적?‘타락’과 같은 모든 불행 뒤에는 단 하나의 악의 원인이 있다고 단언한다.?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단 하나의 원인은 유대인의 음모이다.?마찬가지로 군사독재정권인 유신 정부에서도?‘빨갱이의 음모’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미국에서도 전후에는 매카시가 부추긴?‘공산주의자의 음모’가 부시 정권에서는?‘테러리스트의 음모’가 존재했다.

이와 같이 사회적 불행의 모든 현상을 다 설명해주는 단 하나의 언어(순수한 시니피앙)가 바로 라캉과 지젝이 명명한?‘누빔점’이다.?지젝은 [가장 숭고한 히스테리 환자]에서 프랑스의 보수와 진보 진영 사이에서 뜨거운 논란이 된?‘드레퓌스 사건’을 통해 이 누빔점의 효과를 언급한다.?누빔점은 소급효과를 통해 혼란과 우연의 역사에 의미와 필연성을 부여한다.

1898년?8월?30일 프랑스 정보부(우리나라로 말하면 국정원)의 새 책임자인 앙리 중령이 체포된다.?그가 드레퓌스를 국가반역죄로 기소하기 위해 하나의 비밀문서를 조작했다는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그는 다음날 구치소에서 자살했다.?이로써 드레퓌스에 대한 재판이 다시 열리고 무죄가 선언될 분위기였다.?이때 하나의 신문 기사로 인해?‘기적적 반전’이 일어난다.?그 기사의 제목은?‘첫 번째 피’이고 글쓴이는?30세의 젊은 무명작가 샤를르 모라스였다.?그가 한 것은 보충적 정보를 제공한 것도 아니고 반박도 제시하지 않은 채 모든 사건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게 만든 전체적인 재해석뿐이었다.

모라스에 의하면 자살한 앙리는 추상적인 정의보다 애국적 의무를 다한 영웅적 희생자가 된다.?유대인의?‘배신 집단’이?‘날조가 아닌 위조와 같은 작은 사법적 실수’를 물고 늘어져 프랑스의 삶의 기반을 파괴하고 군대를 무력하게 만든 것을 참지 못한 앙리는 나라가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해 소소한 애국적 잘못한 저지른 것뿐이다.?이제 사건의 초점은 판결의 정의나 합법성이 아니라 프랑스라는 나라의 국운이다.?결과적으로 진정한 희생자는 억울하게 기소된 유대인인 드레퓌스가 아니라?“프랑스의 안녕을 위해 모든 것을 건 고독한 애국자인 앙리 자신”인 것이다.

모라스에 의한 새로운 누빔점이 제시됨으로써 전체적인 논쟁의 장이 다시 구성되면서 여기에서 정의와 법치는 사라지고 애국심과 매국적인 음모만 남게 된다.?진보 진영은 분열되고 보수 진영은 단결한다.?보수적인 포퓰리즘이 등장하고 반유대주의가 증가한다.?이데올로기의 장에서 이렇게 누빔점의 역할은 대단한 것이다.?이러한 모라스를 본받아 우리나라에서도 역시 유신 잔당의 공안세력과 국정원이 주도하여 경제민주화라는 시대적 과제를 외면하고?‘종북 세력의 음모’라는 새로운 누빔점을 지난 일여 년 동안 열심히 세우려고 노력했다.?이들의 노력은 성과를 거의 거두는 듯했다.?올해?6월 지방선거에서 야당도 안보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세월호가 침몰했다.?공안세력이 장악한 박근혜 정부는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이 여전히 종북 세력의 음모에 휘말려 청와대와 정부에 대한 불신과 분열을 조장한다고 말하고 싶었다.?그러나 세월호 침몰은 단순한 사고나 실수가 아닌 기존의 이데올로기 장을 뒤집는 폭발력이 있는?‘사건’이다.?사건이란 바디우가 말하듯이 기존 존재 질서에 균열을 내는 진리의 도래이다.이 진리는 불편한 진리이다.?이번 사건을 통해서 지금까지 신봉된 신자유주의적인 국가시스템의 문제점과 박근혜 정부의 무능이라는 화장 안 한 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그렇게 애써서 작업한 공안세력이 역공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이 사건 앞에서 박근혜 정부의 살 길은?‘국가개조’가 아니라 청와대와 정부에서 공안세력을 내쫓고 감세와 규제쳘폐의 기조에서 벗어나 공약대로 경제민주화를 과감하게 추진해야 한다.?즉,?정권의 혁신과 정책의 기조의 환골탈태가 필요한 것이다.?만약 박근혜 정부가 사건의 도래로 알려진 시대적 과제를 외면하고 계속해서 공안세력의 보수적 포퓰리즘을 자극하는 누빔점을 다시 설정하려고 노력한다면 간헐적으로 들리기 시작한?‘하야’?목소리가 진짜로 커질 것이다.?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려면 박근혜 정부는 파시즘으로 나아가는 보수적 포퓰리즘을 버리고 언론의 자유와 법치와 같은 자유 민주주의의 원칙이라도 제대로 실천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을 절대 용서하지 말라![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2

대한민국을 절대 용서하지 말라![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2

유현상(숭실대학교 강사)

 

 

대한민국을 절대 용서하지 말라!

 

외면당한 꽃들이여!
너희들을 외면한 어른들을 절대 용서하지 말라.
쉽게 용서받은 자들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껏 항상 누군가를 외면하면서 살아온 자들이다.

외면당한 꽃들이여!
너희들을 외면한 대한민국을 절대 용서하지 말라.
반성하지 않는, 과거로부터 배우지 못한 나라는 용서받을 자격도 없다.
이 땅은, 이 나라는 너희들에게 희망이 아니었고 삶의 터전도 아니었다.

외면당한 꽃들이여!
용서와 화합을 외치는 자들을 절대 용서하지 말라.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용서는 책임회피의 뜻이며,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화합은 은폐와 망각의 염원일 뿐이다.
이 땅은, 이 나라는 부끄럽게도 그러한 용서와 화합의 덮개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외면당한 꽃들이여!
이 땅의 모든 어른들을 용서하지 말라.
이 땅의 모든 어른들은 너희들을 예전부터 외면해왔다.
이 땅의 모든 어른들은 너희들의 미래를 착취하면서 살아 왔다.
이 땅의 모든 어른들은 나라를 팔아먹은 자들을 너무 쉽게 용서하고,
이 땅의 모든 어른들은 백성을 압살한 대통령들을 너무 쉽게 용서하고,
황금에 눈이 멀어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몬 자본들을 너무 쉽게 용서하고,
국민의 안전과 행복한 삶을 외면한 정치인들을 너무 쉽게 용서하고,
그들의 나팔수들을 너무 쉽게 용서했다.

외면당한 꽃들이여!
남아 있는 우리 모두를 절대 용서하지 말라!
사무친 원한을 품고 우리들을 매서운 칼바람으로 다그쳐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 수많은 꽃들을 외면하게 될 것이다.
수많은 꽃들을 짓밟을 것이다.
부디 남아 있는 우리 모두를 절대 용서하지 말라!

외면당한 꽃들이여!
너무나 아까운 그대들이여!
미안하다. 그대들을 그 어두운 곳에 그 차가운 곳에 버려두었구나.
정녕 미안하다. 그러나 부디 용서하지 마라.
이 땅의 누구에게고 용서의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하라.
분노하게 하라. 내일 또 다른 꽃들이 버려지고 짓밟힐 것이다.

외면당한 꽃들이여!
부디 너희들을 잃고 비탄에 잠긴 너희 부모들을 위로하라.
너희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부디 용서하고 위로하라.
그들은 너희가 차가운 바다에서 버려지는 동안 가슴을 쥐어뜯고 울부짖으며,
너희들을 진정 그리워하는 그들만을 용서하고 위로하라.

외면당한 꽃들이여!
살아 돌아온 꽃들이여!
이 땅의 수많은 꽃들이여!
죄스런 삶을 사는 이 땅의 모든 어른들을 용서하지 말라!
바라건대 대한민국을 절대 용서하지 말라!

닭대가리[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1

닭대가리[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1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세월호 사고가 터지면서 우리 사회의 안전관리, 재난관리 시스템이 도마 위에 오른다. 사실 2시간 가까이 두 눈 멀뚱이 뜨고서 수 백 명이 탄 배가 침몰하는 광경을 구경만하는 나라에서 재난시스템을 말한다는 게 우스을 지경이다. 허둥지둥 대처 시스템의 맨 위에 있는 청와대는 한 술 더 떠 재난 안전청을 만들겠다고 하고, 언론들은 안전관리 매뉴얼 타령만 하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보다보면, 나는 이들이 정말 닭대가리 같다는 느낌마저 든다. 과연 이들이 이 사회의 최고 엘리트층이고,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층인가 싶을 정도이다. 만약 그렇다면 국민들만 불쌍할 뿐이다. 지금 그런 관리청이 없어서 대처를 못하고, 매뉴얼이 없어서 허둥지둥거리는가? 수 십 년 동안 민방위 훈련을 하고 있지만 유사시 그것이 얼마나 형식적이었는가를 뼈저리게 알지도 모른다. 안전 관리나 생명 보호는 단순히 기술이나 기구의 문제가 아닌 생명을 중시하는 문화와 철학의 문제이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식민지도 경험하고 전쟁도 경험하고 보릿고개도 경험하면서 경제발전을 이룩하기 위해 숨 가쁘게 달려온 우리에게 아마도 안전과 생명은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자살율과 재해사고율, 교통 사망율이 OECD 1위이고, 출산율은 세계 최저이다. 우리 스스로 위험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고 느끼다보니 더 이상 내 새끼들을 이런 사회 속에서 살아가게 하고 싶지 않는다는 징표이다. 이런 문화와 사회 시스템이 바뀌리라고는 누구도 기대하지 않을지 모른다. 재난 사고가 생길 때마다 온갖 호들갑을 떨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그냥 망각해버린다. 일종의 푸닥거리를 하는 느낌이다. 정부는 온갖 재난 대책으로 도배하고, 언론은 진실 여부와 상관없다는 식으로 속보 경쟁만 하고, 국민은 분향소를 찾아 눈물 흘리는 것으로 면죄의식을 한다. 일종의 거대한 현대판 제의와도 같다. 이 제의는 무엇보다 사회적 망각을 감싸줌으로써 시간이 흐르면 다시 같은 일을 반복한다. 우리 모두가 이 푸닥거리의 공범이 아닌지 모를 일이고, 그래서 우리들 모두가 닭대가리인지도 모를 일이다.

 

오래 전에 [소방관이 된 철학교수](F. 맥클러스키, 이 종철 역, 북섬, 2007)라는 책을 번역한 책이 있다. 이 책은 철학교수가 지역 소방관 활동을 자원봉사하면서 겪은 생생한 체험을 철학자의 눈으로 성찰한 책이다. 긴급 재난 활동가로 유명한 한비야가 추천한 탓에 한 때는 베스트셀러의 목록에도 오르고, 전국 소방관들의 필독서라는 우스갯소리도 들었다. 이 책의 말미에 썼던 역자 후기 일부의 문제 상황은 지금 읽어봐도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다.

 

“모름지기 소방관들은 그 파괴의 현장에서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인내와 헌신을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누구도 접근하기 꺼리는 곳으로 뛰어들어 파괴의 불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영웅들이다. 미국에서는 청소년이 바라는 직업의 1순위에 올라 와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 소방관의 이미지가 그와 같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드물다. 가끔씩 티비 화면을 통해 큰 불을 끄다 순직한 소방관들 이야기를 보다 보면 그것은 기껏해야 고되고 위험해서 젊은이들이 지원하려 하지 않는 3D 업종 정도로 인식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화재나 재난은 일순간에 한 가정이나 사회를 송두리째 흔들어 버릴 수 있는 위험한 사건이고, 날마다 화재 현장에 뛰어 들어 목숨을 아끼지 않고 헌신하는 소방관들의 활동이 없다면 우리의 재산과 안전을 누가 보호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매일 같이 일어나는 화재 현장에서 생사를 가늠하는 전투를 벌이면서 인명 구조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경험을 드물게 전쟁 상황에 비교해 볼 수 있는데, 문제는 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이러한 영웅적 전투가 이 사회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주고 있음에도 그들에 대한 사회적 인지도가 낮다는 점이다. 왜 그런 걸까?

 

그 이유 중의 상당 부분은 소방 활동을 표피적으로만 보도하는 대중 매체에 기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의 저변에서 묵묵히 헌신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배려가 낮은 우리 사회의 전반적 경향에 기인한다. 또한 소방 현장에서 남다른 경험을 겪는 이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일반인들이 공감하는 형식으로 전달하는 작품이 드물다는 것도 이유가 될 수 있다. 이런 가운데에 형제 소방관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다룬 외화 [백드래프트]나 사이코 방화범과 소방관의 심리전을 다룬 방화 [리베라메]같은 영화는 일반인들이 소방관들의 위험하고 영웅적인 행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드문 케이스라 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대학의 철학교수가 10여년을 묵묵히 자원 소방관으로 활동하면서 느낀 체험을 기록한 이 글은 그 자체만으로 감동의 여지가 있을뿐더러 소방관들과 그들의 고난의 현장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많다.”

 

지금 와서 하나 더 덧붙이자면 비용이고 경제논리이다. 우리 사회는 이런 사고와 재난관리에 들어가는 비용을 불필요한 우연적 비용 정도로 생각하고, 관련 인력도 사정이 어려울 경우 정리 대상 일순위이다. 신자유주의에 세뇌된 정부는 기업의 이익을 보호한다고 안전관리에 관련된 규제부터 풀어버린다. 기업은 수익 극대화를 위해 노후 선박을 들여와 증개축을 한 것도 모자라 과적을 정상으로 만들어버린다. 먹이 사슬로 얽힌 관리 감독청은 감독의 책임을 로비 비용이나 접대로 눈감아 버린다. 이들에게 국민과 승객의 안전을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할 정도이다. 그동안 사고가 안 난 것이 우연인지 모르겠다. 세월호의 경우, 지난 한 해 안전과 관리된 선원 교육비용은 54만원인데 반해 접대비용은 6천만원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6,800톤급 선박의 항해 책임자가 1년 계약직이고 선원들의 절반 이상이 고용 1년이 안 된 계약직이라고 한다. 선내 서비스를 담당하는 대부분의 승무원들도 계약직이다. 승무원들의 연봉도 타 선사의 2/3 정도뿐이 안 된다고 한다. 이렇게 비용을 절감해서 거둔 수익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 유병언 일가가 십 몇 년 사이에 청해진과 그 계열사로부터 무려 천억을 거두어갔다고 한다. 결국 걸레 짜듯이 쥐어 짜가지고 소수의 고액 연봉자들의 배를 채워 주는 셈이다. 이런 구조와 시스템에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아울러 다수가 이런 불안한 삶을 이어가는 상황에서 소수의 탐욕자들의 삶과 지위가 과연 안전할 수 있는가? 과연 이것이 세월호만의 문제이고, 우리 사회의 다른 부분은 이로부터 자유로운가? 이번 사고를 처리하는 과정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는 것은 산 자들의 몫이리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⑨ 중단 없는 ‘저항’이라는 이름으로!

이제 이등 시민들은 이 모욕을 갚을 것이다. 중단 없는 ‘저항’이라는 이름으로!

 

박민미(동국대 강사)

 

품위 있는 사회를!

 

아비샤이 마갈릿은 [품위 있는 사회]에서 제도가 사람들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를 주장했다. 품위 있는 사회는 제도를 통해 그 권한 아래 있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사회이다. 마갈릿은 품위 있는 사회에는 ‘이등 시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마갈릿은 ‘이등 시민’에 대한 비판을 통해, 특권화된 시민과 그에 비해 차별 받는 시민을 만들어내는 사회를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은 서구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정치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느끼지만 여전한 배제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 가령 외국인 노동자, 성적 소수자에 대한 편견어린 시선을 비판하기 위한 맥락이다. 만일 한 사회의 시민 부류에서 외국인 노동자, 성적 소수자를 제도적이건 문화적이건 차별적으로 대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들을 모욕하는 것이라는 비판이다. 그들을 문화적 차원에일지언정 특정인을 이등 시민으로 강등함으로써, 주류적인 시민이 일등 시민이라는 우월감을 느끼는 현상마저도 특권화라고 비판하는 정교한 자의식이다.

그런데 단 한 명의 특권화된 시민을 만들어내기 위해 모든 시민을 이등 시민으로 전락시킨 사태가 2012년, 버젓이 민주주의 공화국,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다. 전체 시민은 이 사건으로 인해 철저하게 모욕당했다.

‘박 대통령은 일찍이 퍼스트레이디 훈련을 받은 덕택에 최고의 품위와 격을 갖춘 정치인’으로서 ‘박 대통령이 역사에 남는 훌륭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역사와 대화하기에 앞서 민심과 대화해야 하며 순교자주의를 버리고 땅으로 내려와야 한다’(경향신문, 2013년 8월 25일 오피니언)고 말한 손호철(서강대 교수·정치학) 교수에게 이의를 제기한다. ‘품위’라는 말이 수사적인 용어가 아니라 ‘이념’의 어휘라는 것을 놓치지 않기 바란다.

선거에서 피선거권자가 누린 특권을 사소하게 취급하는 순간, 이 땅에 사는 모든 시민은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헌법 제1조 1항과 2항의 가치를 훼손한 것이며, 동시에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는 헌법 11조 1항의 가치를 훼손한 것이다. 헌법 제7조 1항의 규정대로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라는 의무를 받아들인다면, 박근혜 대통령은 선거법 위반으로 인해 누린 특권을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에 대해 ‘이제는’ 늦었지만, ‘답을 해야 한다!’. 그것만이 자신의 특권을 위해 전체 국민을 이등 시민으로 강등시킨 이 모욕에 값하는 길일 것이다.

헌법과 현실의 괴리, 이제 이등 시민들은 이 모욕을 갚을 것이다. 중단 없는 ‘저항’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⑧“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⑧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구태환(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개인이나 사회마다 추구하는 목표나 가치가 있다. 이러한 목표나 가치를 개인은 좌우명이라 하고, 학교는 교훈이라 하고, 회사는 사훈이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명문화하거나 구호화하여 붙여두기도 한다. 어떤 이는 어릴 적부터 ‘내 꿈은 대통령’이라는 구호를 붙여놓고 노력한 결과 실제로 대통령이 되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목표는 무엇일까? 다시 말해서 대한민국이 나아가고자 하고, 대한민국에서 최상의 가치를 가지는 것은 무엇일까? 입헌국가인 대한민국에서 그 목표나 가치는 당연히 [헌법]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목표는 ‘민주주의’이며, 민주주의란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행정부의 수장인 대통령이란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할 존재인가? 대통령은 취임 당시에 자신의 목표를 선언문 형식으로 낭독하게 되어 있는데, 이 역시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헌법] 69조) 즉 대통령은 헌법을 준수하는, 즉 헌법에 명시된 민주공화국 건설을 목표로 삼아야 할 존재다. 행정부 수장의 목표가 그러하다면, 대통령 소속이면서 대통령의 지시와 감독을 받는([국가정보원법] 제2조) 국정원의 목표 역시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2012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국정원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뿌리째 뒤흔드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것은 ‘분명히’ 대통령의 뜻에 반하는 행동일 것이며, 따라서 대통령은 마땅히 그 수장과 담당자를 질책해야 한다. 대통령 자신의 임무인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서 말이다. 물론 전임 대통령 재임 기간에 일어난 일이기에 현 정권에는 책임이 없다고 변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국정원의 만행은 대통령 개인의 목표나 가치가 아니라 대통령이라는 직분의 목표와 가치에 어긋나는 것이기에, 그리고 전임 대통령은 이미 권력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현재의 대통령이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그런데 대통령은 이에 대해서 “제가 댓글 때문에 당선됐다는 건가요”라는 격앙된 반응을 보였을 뿐이다. 대통령이 분노해야 할 것은 국정원의 부당한 개입으로 선거가 부정하게 치러졌다는 사실 아닐까. 그러한 선거 부정은 자신의 목표인 민주주의 수호에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대통령은 국정원의 부당한 개입에 대해 적절한 말이나 대응이 없다. 이것은 임무 방기다.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수호하고 그것을 목표로 나아가야 할 대통령이 그러한 가치와 목표를 짓밟은 행동에 대해서 방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통령의 수수방관은 국정원의 부당한 개입에 대해서 대통령이 방조하지는 않았나 의심을 불러온다.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할 행정부의 수장이 되고자 한 사람이 자신의 당선을 위해서 자기 직속 기관이 될 조직의 불법행위를 방조했다? 그리고 당선 후에도 그러한 불법행위에 대해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방관한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대통령으로서 우리 사회의 목표인 ‘민주주의’의 수호와 달성을 위해 노력하리라고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불신이 심화된다면 대다수의 대한민국 구성원은 민주주의라는 우리의 이상을 스스로 수호하기 위해서 이러한 구호를 내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타도! 박근혜 정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⑦ 쥐구멍에 강제로 볕들게 하기

쥐구멍에 강제로 볕들게 하기

 

김성우(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맑스의 저작 중에서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은 대단히 희귀하지만 주옥같은 정치 분석에 해당한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60여 년간의 혼돈의 과정에서 겨우 획득한 의회공화정이 결국 4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독재체제로 붕괴되었다. 그것도 그토록 평범한 한 인물인 루이 보나파르트의 쿠데타가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양상을 분석하면서 맑스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한다. “헤겔이 어딘가에서 언급한 바에 따르면 세계사의 모든 거대한 사건과 인물은 말자하면 두 번 일어난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즉,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인민혁명당 사건은 1974년 4월 군사독재에 맞서 대학생들이 궐기하자 당시 중앙정보부가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23명을 구속기소했으며 법원은 이 중 8명에게는 사형, 15명에게는 무기징역 및 징역 15년의 중형을 선고한 사건이다. 사형이 선고된 8명은 대법원 상고가 기각된 지 20여 시간 만에 형이 집행됐다. ……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자체 조사결과,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 당시 반국가 단체라고 발표된 인혁당은 서클 수준의 단체였으며 수사과정에서 각종 고문이 자행됐다는 점이 인정됐다. 그리고 2차 인혁당 사건의 중심이었던 ‘인혁당 재건위’는 실재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박문각) 결국 이 사건에 관해서 2007년 서울중앙지법의 재심 판결은 1975년의 판결을 뒤집고 무죄를 선고했다.

87년 민주화 이후 여러 번의 정권 교체를 이뤄낸 개명된 대한민국의 2013년 무더운 한여름에 인혁당 사건이라는 비극이, 맑스의 경구처럼 다시 희극으로 일어난다. 유신독재시대의 중앙정보부가 다시 국가정보원으로, 인혁당이 다시 이석기를 필두로 한 지하혁명조직(일명 RO)으로 바뀌어 등장한다. 이 사건이 희극적인 이유는 관련 당사자가 모두 현실을 거부한다는 데 있다. 극소수가 비현실적이고 시대착오적인 환상을 논의하는 장면이 있다. 그들 스스로도 이를 농담이라고 변명한다. “국가안보 수호”에 전념하는 한 국가기관의 원칙은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無名)의 헌신”이다. 그래서 그 기관은 은밀하게 불법적인 정보조작으로 대선에 개입한다. 결국 그 국가기관은 자신의 불법 행위를 규탄하는 국민들의 잇따른 촛불 시위와 정치권에서의 조직개혁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수세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은 그 기관이 억압과 거짓을 향한 무명의 헌신에 전념한 까닭이다. 반전을 꿈꾸며 그 기관은 무명의 헌신이라는 원칙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이번에는 유명(有名)의 헌신에 착수한다.

그 기관은 극소수의 비현실적인 환상이 내란음모죄에 해당한다며 수사를 선언한다. 그것도 공익을 빌미로 불법으로 녹취한 자료를 가지고서 말이다. 내란이란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을 문란하게 할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키는 행위를 말하며 음모란 이를 위해 모의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극소수의 비현실적인 환상의 담론이 이러한 폭동을 모의하는 구체적인 행동일 수 있을까? 혹시 이러한 비상식적인 관점은 “국가안보 수호”를 ‘전가의 보도’로 사용하여 자신의 불법 행위를 망각하게 하고픈 그 국가기관의 오래된 망상은 아닐까? 이와 같이 이번 수사에 대해 국민적인 의혹이 가시지 않는 이유는 그 기관이 자신의 원칙인 무명의 헌신을 저버리고 국가의 정치판을 모조리 뒤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음지에서 양지로 나온 그 기관에 햇볕이 잘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국민에게는 커다란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이런 까닭에 국민은 역사적으로 반복된 이토록 웃기는 사건을 접하면서도 웃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⑥-잔적(殘賊)의 도당은 전복된다

잔적(殘賊)의 도당은 전복된다

 

진보성(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에 대한 국정감사가 끝났다. 결과는 뻔했다. 누구는 할 말을 당당하게 했지만 한 톨의 거짓 없이 사실을 실토해야 할 사람은 장막 뒤에 숨어, 있던 일은 없다하고 없던 일은 있다했다. 영혼 없는 공복(公僕)이라고 했던가. 영혼 없는 공복은 사복(私僕)이다. 이들은 이제 충성스런 사복을 자임하며 자신들의 과오를 한 여름 이슈로 마감하려 한다. 하지만 아직 추억의 사건이 되기에는 이르다. 누가 그만두라고 했나?

국정원 심판에 대한 국민들의 의지는 아직 불탄다. 시내거리에 촛불을 든 시민들, 언론?지식인들, 각 처의 운동가들, 정치관계자들까지 모두 지난 대선의 진실을 폭로하고 이를 통해 상식을 벗어난 행정수반과 정치권의 행태를 리셋시켜 그들이 초심으로 귀환함을 확인해야 할 것이다. 물론 앞으로 벌어질 수많은 정치공작들과 교묘한 장난질에 실로 감탄(?)을 표할 일이 많아질 것은 예상되는 바이다.

그런데 그 장난질이 도를 넘었다. 고인을 관에서 끄집어내 시정에서 조리돌리듯 하는 것도 모자라 검증이라는 이유로 남북 국가정상의 회담내용까지 공개해버리고 이제는 유신정권에서 자행되었던 내란음모죄까지 부활시키고 있다. 그러나 정작 대한민국 내부의 혼란을 조장하고 국가를 전복의 위기로 몰아가는 것은 국정원의 행태다. 국정원이 자행한 결과로 발생한 조직 내부의 불안과 위기를 민주주의와 사회의 진보를 지향하는 시민, 인사들에게 떠넘기고 있다.

맹자는 “인(仁)을 헤치는 것을 잔(殘)이라 하고 의(義)를 헤치는 것을 적(賊)이라 일컫는다.”고 했다. 지금 국정원은 국민들 사이의 믿음과 신뢰를 잃어버리게 했으니 인을 헤쳤고, 헌법을 유린하며 자행한 불법을 스스로 묵과하고 또 다른 정치공작을 벌이고 있으니 의를 헤쳤다. 인의를 뭉개버린 무리는 ‘시정잡배’일뿐이며 전복의 대상이다. 또한 그 사태를 관망만 하고 있는 박 대통령은 맹자의 말대로라면 필요 없는 지도자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생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한낱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의 기강을 문란하게 하고 헌법질서를 뿌리째 뒤흔들고 있는 것은 국정원과 청와대이다. 지금이라도 다시 조속히 대선개입 의혹에 대한 정확한 수사와 진실 규명이 이루어져야 한다. 민주주의의 주체는 국민이고 시민이다. 민주주의에서 개혁의 대상이 개혁을 요구하는 주체를 역으로 공격한다면 맹자가 말한 잔적(殘賊)을 헛갈려 아는 것이다. 잔적은 민생을 돌보지 않고 국민을 기만하며 국론분열을 조장하는 교활한 권력에게 붙이는 말이다. 잔학하고 교활한 권력은 개혁의 대상에서 곧 전복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⑤-‘민주주의’라는 유령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민주주의’라는 유령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조은평(건국대 비정규직 교수 노동자)

 

‘민주주의’라는 하나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이 유령에 맞서 집권세력들은 ‘종북’과 ‘안보’라는 낡아빠진 카드를 들이밀며 이 유령의 출몰에 대응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허울 좋은 명목을 내세워 낡고 늙은 보수주의자들의 결집을 호소한다.

하지만 정작 ‘민주주의’라는 유령의 출몰을 초래한 것은 바로 집권세력 자신들이다. 국정원의 대선개입 사건이 국정조사를 통해 어느 정도 그 실체가 드러나면서, 곳곳에서 민주주의의 죽음을 애도하며 분노하는 외침이 시작되었다. 가장 기본적인 민주주의적 절차에 국가 기관이 개입한 사건. 그래서 대통령 선거라는 중요한 민주주의적 절차를 훼손한 사건.

이런 민주주의의 죽음을 애도하며 전국에서 촛불이 타오르고 있다. 그 긴 세월을 거쳐 비로소 민주주의 공화국을 탄생시킨 시민들은 민주화의 역사를 과거로 되돌리려는 현실에 분노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라는 유령이 배회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상황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미 ‘민주주의’는 죽어 있었다. 우리 모두는 그저 ‘민주공화국’에 살고 있다고 믿으면서, 보다 민주적인 현실이 실현되리라 기대하고만 있었을 뿐이다. 민주주의라는 실재는 단지 ‘지연된 미래’에 불과하다는 걸 우린 잘 알고 있었다.

언론이 제대로 된 말을 전하지 않고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무참히 쫓겨나 자살을 택했을 때, 빈민들이 거리로 내몰리고 교육 현장이 더 이상 제대로 된 현실을 가르치지 않게 되었을 때, 이미 ‘민주주의’는 한 걸음 씩 뒤로 밀려나 죽어가고 있었다는 걸 말이다.

그럼에도 이런 ‘지연된 미래’에 대한 기대감마저 철저히 무너져 내렸을 때, 오늘날처럼 ‘민주주의’라는 유령은 다시금 그 봉합된 틈새를 뚫고 출몰하는 법이다. 어쩌면 그렇기에 그 유령이 배회하는 오늘날의 상황은 더 의미심장하다.

집권 세력은 점점 더 초조해 하며, 이 유령의 출몰을 어떻게든 봉쇄하려할 것이다. 하지만 일단 출몰한 유령은 사람들에게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한다. 거리를 채우고 있는 촛불의 물결은 이제 점점 더 큰 물결로 넘쳐날 것이다. 그리고 그 물결 속에서 사람들은 민주주의라는 사건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사건을 경험한 우리들이 단지 책임 있는 사과나 국정원의 개혁만을 요구하며 머뭇거릴 때, 앞으로 또 다시 새로운 ‘민주주의’의 유령은 언제든 다시 출몰할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말하고 싶다. ‘만국의 민주주의자들이여 단결하라! 각자의 민주주의 슬로건으로 이 유령의 출몰에 함께하라!’고. 아마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민주주의자들은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하기에 이 슬로건은 터무니없다고.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유령의 요구가 무엇인지. 어쩌면 바디우가 말한 ‘모두의 귀족되기!’, 그래서 우리 모두가 우리 삶을 좌우하는 현실에 관여할 수 있기를 요구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령이 요구하는 민주주의다. 당신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이게 아닌가? 그렇다면 당신들이 원하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명확히 드러내라! 그리고 함께 이 유령의 출몰을 맞이하자!

 

 

한국 사회의 특수한 병적 상태들은 치유될 수 있을 것인가[시대와 철학]

예외상태와 합리성의 신화적 퇴행 : 한국 사회의 심리적 병리상태에 대하여

 

?한상원(베를린 대학)

 

예외상태의 일상화. 벤야민과 슈미트를 이어받아 아감벤이 사용한 개념이다. 아감벤은 일상, 즉 규칙이 되어버린 예외상태 속에서 법의 지배가 실현된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 개념이 한국사회만큼 잘 적용되는 곳도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정치적 영역부터 사적 영역까지 우리의 사고를 규정하는 건 일상이 아니라 일상이 되어버린 예외상태가 아닐까? 현직 국회의원이 간첩이었고 내란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선동하면, 국정원이 선거에 개입하고 호남인들을 죽이자고 선동해도 정상참작이 된다. 일상이 예외를 규정하는 게 아니라 예외가 일상을 지배한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일상이 된 예외상태의 사례는 분단이다. 한국은 70년 가까이 남북간 준전시상황이고, 성인 남성은 2년간 전쟁훈련을 받으며, 실제로 북한정권은 핵무기 쏘겠다고 툭하면 협박해온다. 이러한 일상적 위기를 계기로 삼아 국가권력은 아래로부터의 힘으로 쟁취한 형식적 민주주의의 원칙에 대해 공격을 감행한다. 2010년 북한이 연평도에 미사일 공격을 하자, 이 패닉상태 속에서 여당은 과감하게 예산안 날치기를 감행한 바 있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 비판이 일자, 여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NLL 포기발언을 했다면서 쟁점 전환을 시도했다. 툭 하면 등장하는 맹목적인 ‘종북’ 여론몰이를 보면, 이러한 낯선 타자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자기반성적 이성의 목소리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인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북한 트위터 계정을 리트윗했다는 이유로 누군가가 몇 년간 구속과 압수수색 그리고 재판에 시달려야 하는 이 상황은 온라인 매체까지 스며든 일상화된 예외상태의 사례다.

분단 문제는 한국인들의 일상 속에 숨어든 병리적 심리항태의 사례 중 하나다. 외부의 적(북한)에 대한 공포와 이로 인한 내부의 적(우리 안의 간첩)에 대한 광기 외에도, 양적 경제성장에 대한 비이성적 집착, 외적인 국가적 상징(한류, 김치, IT 등)에 대한 과도한 우월의식 등, 한국인들의 심리상태는 그야말로 병적이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한국에서 야당을 지지하는 정치적 경향의 사람들은 흔히 ‘상식이 통하는 사회’라는 모토를 즐겨 사용한다. 이 용어는 한국 사회를 상식(형식적 민주주의와 법치)이 아니라 비상식(부패, 학벌, 권위주의, 지역감정 등)이 지배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여기서 ‘상식’이라는 단어는 철학적으로 볼 때 ‘합리성’이라는 단어와 조응하는 듯하다. 즉 이성적인 견지에서 볼 때, 한국 사회는 합리성이 아닌 비합리성에 의해 지배된다는 비판이다. 이런 비판이 겨냥하는 궁극적 목표는 따라서 ‘합리성이 그 순수한 형태로 관철되는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자본주의’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비판이 놓치고 있는 점은,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비상식’, 즉 ‘비합리성’이 실은 그 대립물인 ‘합리성’의 산물이라는 점에 있다. 한국 사회에 있어서 합리성의 기획, 근대적 계몽의 기획은 매우 늦게 추진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5?16 쿠데타 이후 등장한 박정희와 군부세력에 의해서였다. 여기서 말하는 합리성이란 물론 르네상스적 인문적 의미의 계몽주의와도, 유럽에서 시민사회와 보편선거권 이후 도입된 정치적 의미와도 구분되는, 산업혁명 이후 유럽을 지배한 경제적, 양적 합리성과 유사한 개념이다. 다시 말 해, 군부정권이 추진한 ‘위로부터의’ 합리성 기획은 합리성 개념이 포괄하는 다양한 맥락을 추상해버리고, 오로지 양적 성장을 지상과제로 설정한 일면적인 합리성인 셈이다.

4?19 혁명의 주요한 요구 중 하나는 ‘자립경제 건설’ 이었다. 이것은 곧 미국의 원조에 종속된 국가를 근대적 자주국가로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를 반영한다. 쿠데타 이후 집권한 박정희와 군부세력은 이승만의 자유당도, 4?19혁명 이후 정권을 잡은 민주당도 수행하지 못한 급속한 근대화를 추진하여 원조경제에서 탈출하고, 자립적인 근대적 산업국가를 만든다. 이 점에서 5?16은 4?19의 계승이라는 우파들의 역사관은 일부나마 타당성을 인정받는다. (물론 그것이 5?16과 독재를 정당화하지 않는다는 점은 이 글에서 논하지 않겠다.) 이 점에서 박정희는 한국 사회에서 유럽의 17~18세기 절대왕정 내지 계몽군주에 상응하는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일종의 합리성 기획이라고 볼 수 있는 박정희의 근대화 프로젝트는 동시에 한국사회의 병리적 퇴행을 낳는 원인이기도 했다. 양적 성장에 대한 집착과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결과론적 규범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성장에 이바지하지 못하는 모든 것은 쓸모없는 것으로 배척당한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담론은 성장의 논리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오늘날 국정원이 대선에 개입했으며, 이를 무마하고 여당 후보에게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기 위해 경찰 수뇌부가 수사를 방해했다는 증거와 증언들이 등장함에도 박근혜 정부의 지지율이 고공행진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도 멀리 보면 이러한 한국 근대화의 실패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의 ‘계몽군주’ 박정희는 ‘신화'(일인숭배, 딸로 권력세습)로 퇴행했다. 이 퇴행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에 등장하는 ‘신화가 된 계몽’ 개념과 놀라울 정도로 부합한다. 합리성(자본축적과 경제성장)은 비합리(박정희 신화와 독재 정당화)로 변증법적으로 전화된다. 이러한 설명도식은, 한국사회의 비합리적, 병리적 심리상태를 설명해줄 수 있는 여러 각도의 이론적 설명 중 하나로 자리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심리적 병리상태를 “비합리성으로 전도된 합리성”으로 규정하고 그 배경에 1. 일상화된 예외상태로서 분단, 2. 지난 세기 이뤄진 합리성 프로젝트의 실패가 있다고 규정한다. 이를 개념규정하기 위해 나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을 차용하였다. 그런데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비판이 지적하는 급진적인 핵심은 합리성이 양적이고 도구적인 성격으로 후퇴하는 것이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합리성 프로젝트(계몽)의 필연적 귀결이라는 점에 있다. 교환원칙과 이윤축적 원칙에 기반을 둔 근대 자본주의 사회는 합리성이 지닌 여러가지 잠재력을 하나의 것 ? 경제적, 양적, 도구적 이성 ? 으로 환원하는 근본적 배경이다. 위로부터의 근대화라는 합리성 기획이 신화로 퇴행한 것은 애초에 합리성을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만 사고하게 만든 교환원칙과 이윤축적의 메커니즘이었다. 따라서 한국사회의 특수한 심리적 병리상태에 대한 진단은 교환원칙과 이윤축적이라는 보편적 구조에 대한 변화와 결부되어 있음은 자명하다. 그러나 보편적 구조의 근본적 변화가 당장 실현될 수 있는 과제가 아닌 한에서, 어떻게 제한된 조건 하에서 한국 사회의 특수한 병적 상태들이 치유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은 여전히 우리를 무거운 고민 속으로 이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