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외상태와 합리성의 신화적 퇴행 : 한국 사회의 심리적 병리상태에 대하여
?한상원(베를린 대학)
예외상태의 일상화. 벤야민과 슈미트를 이어받아 아감벤이 사용한 개념이다. 아감벤은 일상, 즉 규칙이 되어버린 예외상태 속에서 법의 지배가 실현된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 개념이 한국사회만큼 잘 적용되는 곳도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정치적 영역부터 사적 영역까지 우리의 사고를 규정하는 건 일상이 아니라 일상이 되어버린 예외상태가 아닐까? 현직 국회의원이 간첩이었고 내란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선동하면, 국정원이 선거에 개입하고 호남인들을 죽이자고 선동해도 정상참작이 된다. 일상이 예외를 규정하는 게 아니라 예외가 일상을 지배한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일상이 된 예외상태의 사례는 분단이다. 한국은 70년 가까이 남북간 준전시상황이고, 성인 남성은 2년간 전쟁훈련을 받으며, 실제로 북한정권은 핵무기 쏘겠다고 툭하면 협박해온다. 이러한 일상적 위기를 계기로 삼아 국가권력은 아래로부터의 힘으로 쟁취한 형식적 민주주의의 원칙에 대해 공격을 감행한다. 2010년 북한이 연평도에 미사일 공격을 하자, 이 패닉상태 속에서 여당은 과감하게 예산안 날치기를 감행한 바 있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 비판이 일자, 여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NLL 포기발언을 했다면서 쟁점 전환을 시도했다. 툭 하면 등장하는 맹목적인 ‘종북’ 여론몰이를 보면, 이러한 낯선 타자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자기반성적 이성의 목소리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인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북한 트위터 계정을 리트윗했다는 이유로 누군가가 몇 년간 구속과 압수수색 그리고 재판에 시달려야 하는 이 상황은 온라인 매체까지 스며든 일상화된 예외상태의 사례다.
분단 문제는 한국인들의 일상 속에 숨어든 병리적 심리항태의 사례 중 하나다. 외부의 적(북한)에 대한 공포와 이로 인한 내부의 적(우리 안의 간첩)에 대한 광기 외에도, 양적 경제성장에 대한 비이성적 집착, 외적인 국가적 상징(한류, 김치, IT 등)에 대한 과도한 우월의식 등, 한국인들의 심리상태는 그야말로 병적이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한국에서 야당을 지지하는 정치적 경향의 사람들은 흔히 ‘상식이 통하는 사회’라는 모토를 즐겨 사용한다. 이 용어는 한국 사회를 상식(형식적 민주주의와 법치)이 아니라 비상식(부패, 학벌, 권위주의, 지역감정 등)이 지배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여기서 ‘상식’이라는 단어는 철학적으로 볼 때 ‘합리성’이라는 단어와 조응하는 듯하다. 즉 이성적인 견지에서 볼 때, 한국 사회는 합리성이 아닌 비합리성에 의해 지배된다는 비판이다. 이런 비판이 겨냥하는 궁극적 목표는 따라서 ‘합리성이 그 순수한 형태로 관철되는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자본주의’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비판이 놓치고 있는 점은,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비상식’, 즉 ‘비합리성’이 실은 그 대립물인 ‘합리성’의 산물이라는 점에 있다. 한국 사회에 있어서 합리성의 기획, 근대적 계몽의 기획은 매우 늦게 추진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5?16 쿠데타 이후 등장한 박정희와 군부세력에 의해서였다. 여기서 말하는 합리성이란 물론 르네상스적 인문적 의미의 계몽주의와도, 유럽에서 시민사회와 보편선거권 이후 도입된 정치적 의미와도 구분되는, 산업혁명 이후 유럽을 지배한 경제적, 양적 합리성과 유사한 개념이다. 다시 말 해, 군부정권이 추진한 ‘위로부터의’ 합리성 기획은 합리성 개념이 포괄하는 다양한 맥락을 추상해버리고, 오로지 양적 성장을 지상과제로 설정한 일면적인 합리성인 셈이다.
4?19 혁명의 주요한 요구 중 하나는 ‘자립경제 건설’ 이었다. 이것은 곧 미국의 원조에 종속된 국가를 근대적 자주국가로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를 반영한다. 쿠데타 이후 집권한 박정희와 군부세력은 이승만의 자유당도, 4?19혁명 이후 정권을 잡은 민주당도 수행하지 못한 급속한 근대화를 추진하여 원조경제에서 탈출하고, 자립적인 근대적 산업국가를 만든다. 이 점에서 5?16은 4?19의 계승이라는 우파들의 역사관은 일부나마 타당성을 인정받는다. (물론 그것이 5?16과 독재를 정당화하지 않는다는 점은 이 글에서 논하지 않겠다.) 이 점에서 박정희는 한국 사회에서 유럽의 17~18세기 절대왕정 내지 계몽군주에 상응하는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일종의 합리성 기획이라고 볼 수 있는 박정희의 근대화 프로젝트는 동시에 한국사회의 병리적 퇴행을 낳는 원인이기도 했다. 양적 성장에 대한 집착과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결과론적 규범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성장에 이바지하지 못하는 모든 것은 쓸모없는 것으로 배척당한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담론은 성장의 논리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오늘날 국정원이 대선에 개입했으며, 이를 무마하고 여당 후보에게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기 위해 경찰 수뇌부가 수사를 방해했다는 증거와 증언들이 등장함에도 박근혜 정부의 지지율이 고공행진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도 멀리 보면 이러한 한국 근대화의 실패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의 ‘계몽군주’ 박정희는 ‘신화'(일인숭배, 딸로 권력세습)로 퇴행했다. 이 퇴행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에 등장하는 ‘신화가 된 계몽’ 개념과 놀라울 정도로 부합한다. 합리성(자본축적과 경제성장)은 비합리(박정희 신화와 독재 정당화)로 변증법적으로 전화된다. 이러한 설명도식은, 한국사회의 비합리적, 병리적 심리상태를 설명해줄 수 있는 여러 각도의 이론적 설명 중 하나로 자리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심리적 병리상태를 “비합리성으로 전도된 합리성”으로 규정하고 그 배경에 1. 일상화된 예외상태로서 분단, 2. 지난 세기 이뤄진 합리성 프로젝트의 실패가 있다고 규정한다. 이를 개념규정하기 위해 나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을 차용하였다. 그런데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비판이 지적하는 급진적인 핵심은 합리성이 양적이고 도구적인 성격으로 후퇴하는 것이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합리성 프로젝트(계몽)의 필연적 귀결이라는 점에 있다. 교환원칙과 이윤축적 원칙에 기반을 둔 근대 자본주의 사회는 합리성이 지닌 여러가지 잠재력을 하나의 것 ? 경제적, 양적, 도구적 이성 ? 으로 환원하는 근본적 배경이다. 위로부터의 근대화라는 합리성 기획이 신화로 퇴행한 것은 애초에 합리성을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만 사고하게 만든 교환원칙과 이윤축적의 메커니즘이었다. 따라서 한국사회의 특수한 심리적 병리상태에 대한 진단은 교환원칙과 이윤축적이라는 보편적 구조에 대한 변화와 결부되어 있음은 자명하다. 그러나 보편적 구조의 근본적 변화가 당장 실현될 수 있는 과제가 아닌 한에서, 어떻게 제한된 조건 하에서 한국 사회의 특수한 병적 상태들이 치유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은 여전히 우리를 무거운 고민 속으로 이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