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 사상과 정신과 육체의 문제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다석 사상과 정신과 육체의 문제

 

이종철(연세대)

 

일전에 다석 류영모 선생의 사상을 발표할 때 받은 질문 중의 하나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나도 정신과 육체를 대립적으로 생각하는 다석의 사상이 문제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날 나온 질문은 훨씬 더 심각했다. 과연 인간의 몸과 마음은 별개인가, 몸은 플라톤이 생각하듯 마음의 감옥이고 이 몸을 벗어날 때 비로소 해방될 수 있고 참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까? 다석도 플라톤처럼 몸나인 제나와 정신을 가리키는 얼나를 구분하고, 식과 색에 사로잡힌 제나를 버릴 때 얼나를 깨달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다석은 일일 일식으로 식을 최소화하고, 부인에게 해혼식을 선언하면서 색도 끊었다. 그의 이런 행위는 자기 생각을 직접 실천에 옮긴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조금만 곰곰히 생각해본다면, 과연 몸이 식과 색의 기능만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것에 대해 의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라는 말도 있듯, 육체의 건강이 정신에 미치는 영향은 말할 수 없이 크다. 몸이 불편하면 짜증이 나고 힘이 들고 생각도 귀찮아지기도 할만큼, 정신은 육체의 구속을 절대적으로 받고 있다. 데카르트는 정신과 육체를 두 개의 서로 다른 실체인 res cogitans(정신)과 res extensa(물질)로 간주했지만, 그 역시 육체와 정신의 상관성 문제를 마냥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가 생각해낸 것이 인간의 머리 뒤편에 송과선이 있어서 이곳을 통해 정신과 육체가 상호 작용한다는 억지 이야기까지 꾸며대기도 했다. 그 이후 서양 근현대 철학에서 mind-body 문제는 양자의 상호작용을 어떻게 설명하느냐의 차이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반면 동양의 오랜 전통 사상에서는 몸과 마음은 일종의 대대 관계를 유지하면서 상관성과 상호관계를 이루고 있다. 넓은 의미에서 희노애락과 같은 인간의 감정도 육체의 영역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의 성리학에서 수백 년 동안 전개되었던 이기 논쟁도 따지고 보면 정신으로서의 리와 감정으로서의 기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하는가의 문제였다.

역사를 통해서 보면 정신과 육체를 별개로 생각하고, 육체를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는 종교나 철학의 전통이 꾸준히 이어져 왔다. 기독교와 그에서 파생된 영지주의, 플라톤과 데카르트 그리고 칸트로 이어지는 형식주의 철학이 그렇고, 동양의 불교 사상을 위시한 대부분 종교도 같은 계열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인간의 육체가 죄의 근원이고 모든 고통의 원인으로 간주 되므로 가능한 한 몸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고 해탈로 간주한다. 정신의 자유와 해방은 육체의 영향을 극복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정신주의의 전통은 각 문화권에서 크고 작은 형태로 늘 반복되고 있다. 오늘날에도 요가나 명상 그리고 참선을 수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원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되고 있다. 다석 류영모의 제나와 얼나 사상도 이런 계열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식과 색은 인간의 육체를 유지하는 필수적 기능이다. 외부의 영양소를 섭취하고 소화와 배설이 반복적 순환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우리 몸의 건강이 유지된다. 마찬가지로 색은 인간종의 재생산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인간에게 유희와 쾌락을 주기도 한다. 그러므로 식과 색을 떠난 인간을 생각하기는 힘들다. 일일 일식과 해혼과 같은 금욕도 사실은 식과 색의 영향을 최소한도로 만드는 것일 뿐 완전히 단절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운동과 수행을 통한 육체의 단련은 정신에 생기와 활력을 주고, 이것이 사고 활동을 크게 진작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활력이 없다고 한다면 사유의 기능도 유지하기가 힘들다. 우리가 극한의 운동이나 노동, 혹은 수행을 하는 상황에 있다 보면 무엇이 육체이고 무엇이 정신인지, 나누기가 어려운 묘한 경계나 정신과 육체의 합일 감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 이런 단계에 이르는 데도 육체의 절대적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육체는 부정적이고 수동적인 의미 이상으로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의미도 많이 가지고 있다. 만일 육체와 정신의 관계를 대립적으로만 간주한다면, 앞서 말한 육체와 정신의 상호성과 합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탈세계적인 이데아론을 비판한 것처럼 극단적인 정신주의에 반발해서 정신과 육체의 합으로서만 인간이 존재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설명이 훨씬 더 건전한 이성에 맞고 합리적이라 할 수 있다. 육체를 떠난 정신이 어디에 있을 수 있고, 정신이 없는 육체란 그저 비곗덩어리에 불과한 물질일 뿐이다. 사후의 영을 이야기하는 종교나 철학의 설명은 그저 설명되지 않은 가설에 불과한 것이다. 고대 세계에서 영혼과 죽음에 관해 가장 빼어난 문헌 중의 하나로 간주 되는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는 육체가 영혼의 감옥이고, 철학은 육체의 구속을 벗어나기 위한 ‘죽음의 연습’이고, 사후에 인간의 영혼은 참다운 이데아의 세계에서 진리와 자유를 갖는다고 이야기를 한다. 스승을 감옥에서 빼내러 왔던 제자 크리톤은 소크라테스의 이런 확신에 찬 말을 듣고 감히 도망가자는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한다. 하지만 마지막에 소크라테스가 한 말에 더 주목할 일이다. “나도 직접 그 세계에 가본 것은 아니고 들은 이야기야.”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이야기가 경험적으로 확인한 것이 아니고 다만 전언일 뿐임을 확인시켜 준 것이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경험적으로 절대 검증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가설이고 종교적인 믿음에 속할 뿐이고, 과학의 세계와는 도저히 양립 불가능한 것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보자. 제나와 얼나를 절대적으로 대립시키고, 제나를 버리고 얼나를 취할 때 비로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한 다석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있을까? 그것은 다석의 취지를 십분 이해한다고 해도 지나친 ‘정신주의’의 한 표현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의 긍정성을 받아들인다 해도 이런 형태의 정신주의를 무조건으로 따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정신주의가 지나치는 경우 깨달은 소수의 엘리트주의(선민사상)에 빠질 위험도 있다. 이런 형태의 엘리트주의는 근대가 이룩한 민주주의 체제에 역행할 수도 있다. 많은 문제가 있더 하더라도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에 기초한 사회체제이다. 소수의 깨달은 자가 요구된다 하더라도 그들을 중심으로 사회를 운영할 수는 없다. 만약 무리하게 그것을 실행하려 할 때 그것은 불가피하게 파시즘이나 인종주의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 초인사상을 주장한 니체가 왜 반민주주의자인가를 알 수가 있다. 과거 하이데거의 철학이 나치의 파시즘에 부역한 현실도 그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다석의 사상을 신학적 세계관의 한계를 넘어서 보편화시키려 할 때 이러한 인간관의 한계도 동시에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청와대와 제왕적 대통령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청와대와 제왕적 대통령

 

이종철(연세대)

 

새 대통령에 취임할 윤석열 당선자의 사고에서 ‘공간’이 갖는 의미는 다소 특별한 것 같다. 그는 공간에 대해 지금까지 두 번인가 새로운 말을 했다. 하나는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 …… 결단하지 않으면 제왕적 대통령 못 벗어나”이고, 다른 하나는 “일단 청와대 경내에 들어가면 제왕적 권력의 틀을 벗어나기 힘들다”이다. 이 말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기 전에 그가 이렇게 공간 문제에 집착하는지 이유를 알고 싶을 정도이다. 그는 왜 그렇게 공간의 문제를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혹시 풍수와 연관 지어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인가. 그리고 공간, 좀 더 구체적으로는 청와대 공간이 제왕적 대통령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절대 청와대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억지를 부릴까? 이런 반응은 다소 분석이 필요할 만큼 특이하다.

 

첫째, 공간과 의식의 상관성을 부정하기는 어렵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 과거의 풍수지리설은 그런 맥락에서 나왔다. 가령 섬나라나 반도 기질을 이야기하거나 혹은 대륙의 기질을 이야기하는 것도 섬이나 반도 혹은 대륙이라는 공간이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성격이나 행동에 일정하게 영향을 미친다는 전제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섬은 독립적인 공간이다 보니 외부에 대해 극도로 배타적이거나 개방적일 수 있고, 외부(대륙)로 진출하려는 경우 공격성을 띠는 경우가 있다. 일제가 조선 침략을 정당화할 때 반도론을 사용한 것은 한반도가 대륙과 해양 세력 간의 변도에 따라 타율적으로 변화해 왔으며, 중화 모화사상도 반도론의 연장 속에서 해석했었다. 대륙은 워낙 땅덩어리가 넓다 보니 인구 밀도도 낮아서 서로 간에 직접적으로 부딪힐 필요가 없고, 설령 부딪힌다 해도 피할 수 있는 공간이 넓다. 그런 의미에서 대륙의 기질은 타자에 대한 관용의 여지가 넓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어쨌든 이런 것들은 공간이 인간의 의식과 행동 그리고 삶에 일정한 영향을 준다는 좋은 예이다. 하지만 양자의 상관성은 일정한 경향이나 상대적 영향이지 결코 절대적 의미를 띠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그런 공간 구속성에 절대적으로 갇히기보다는 그것을 넘어서려는 초월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둘째, 공간과 의식의 상관성을 인정한다고 해도 청와대라는 공간이 제왕적 권력과 직접적 혹은 절대적 상관성이 있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지난 수십 년의 정치사를 돌이켜 보면 한때 청와대의 주인이었던 대통령이 제왕적 권력을 누린 사실을 인정한다 해도 그것은 대통령이라는 인간이 그렇게 한 것이지 청와대라는 공간이 그렇게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제왕적 권력의 책임을 청와대라는 공간에 묻는 것은 근거가 약할뿐더러, 이런 주장에는 합리적 근거가 뒷받침되어야만 할 것이다. 양자 간의 필연적 관계를 입증하거나 설득하지 않고 무조건 청와대는 제왕적 권력의 산실이고, 그 안에 들어가면 절대로 제왕적 권력을 벗어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에 가깝다. 만에 하나 이런 형태의 상관성을 대통령 집무실을 옮기기 위한 구실로 사용하기 위해 주장한다면, 그것은 억지이자 불통이고, 그 이면에 무슨 다른 의도가 있지 않나 의심이 갈 수밖에 없다. 이런 의도와 관련해 세간에는 수많은 썰들이 난무하고 있다는 것을 신임 대통령은 알아야만 한다. 이런 썰들이 증폭될수록 갈등과 혼란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윤 신임 대통령 스스로 소통과 협치를 강조하면서 청와대라는 공간이 제왕적 권력의 원인이라고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을 편다면 어느 누가 쉽게 동의를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식의 태도는 오히려 의식이 공간을 결정한다는 주관주의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조건 공간이 의식을 결정하고, 청와대가 제왕적 권력의 원인이라고 주장하기보다는 그 근거부터 합리적으로 제시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셋째, 사실 앞서 제시한 명제처럼 청와대라는 공간과 제왕적 권력의 절대적 관계를 주장하기보다는 이런 권력이 어디서 비롯된 것이고, 왜 지금까지 그것을 제한하거나 비판하지 못했는가라는 제도적이고 정치적인 차원에서 풀어나가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다.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대통령의 권력은 헌법에 규정되어 있고, 그 하위 법률과 시행령 등에 제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막연하게 공간을 죄인 취급하지 말고 지난 수십 년 동안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이 어떻게 비정상적으로 탄생했는지를 검토하면서 헌법의 무엇이 문제이고, 그것을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 지가 더 해결해야 할 선결문제라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문제를 정확히 할 필요가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번 대선에서도 나타났듯 민주주의 국가(헌법 제1조 ①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고 규정하고 있다)에서 단 0.7% 우위를 갖고 절대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심각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따라서 이러한 승자 독식의 제도부터 풀어나갈 수 있는 사회적 합의가 대통령 집무실을 청와대에서 용산의 국방부로 옮기는 문제 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승자 독식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오직 승자 1인만을 뽑는 소선거구제도 문제이고, 아주 소수의 표 차로 진 후보를 지원한 모든 표는 그냥 사표가 되는 시스템도 문제이다. 이런 일등주의가 승리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하고 정치 공간을 밀림의 왕국보다 더 살벌한 투쟁의 공간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제왕적 권력의 원인을 엉뚱하게 공간이나 청와대에 미루기보다는 법 제도의 개혁을 모색하는 것이 훨씬 더 합리적이고 정치적인 해법이라 할 수 있다.

 

아직 신임 대통령의 임기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청와대를 국방부로 옮기는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끌벅적하다. 청와대 이전의 책임을 신권력에 대한 구권력의 저항으로 몰고 가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이와 관련해서는 내가 몇 차례 포스팅한 적이 있으므로 더는 언급하지 않겠다. 그리고 이런 식의 주장 이면에 만에 하나라도 ‘천공’ 운운하는 도사의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풍수설이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면 지나가는 소도 웃을 일이다. 그러므로 윤석열 신임 대통령은 집무실 이전과 관련해서 애매하게 청와대라는 공간 때문에 제왕적 권력의 틀을 벗어날 수 없다고만 하지 말고 먼저 그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가 극구 제왕적 대통령을 벗겠다고 주장한다면, 이런 설명과 설득의 과정이 새로운 대통령의 모델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이런 설명이 없는 상태에서 계속 절대로 청와대 경내로 들어가는 일은 없다는 식으로 몽니를 부린다고 한다면, 그를 지지한 많은 국민에게 크나큰 실망을 안겨 줄 뿐만 아니라 산적한 국정과제는 완전히 뒷전으로 몰린 채 정치적 갈등과 혼란만 가중될 수 있다. 그리고 신임 대통령 주변의 참모나 인수위에 참여한 사람들도 무조건 대통령의 생각이 옳다고 하면서 이런 억지 주장에 앞장서서 나팔을 불어댄다면, 그것이 제왕적 대통령을 만드는 지름길이고, 아울러 그런 제왕적 대통령의 말로가 비참하게 끝났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젤렌스키의 애국심과 서방 세계의 어설픈 인도주의적 개입이 우크라이나 국민을 사지로 몰고 있다.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젤렌스키의 애국심과 서방 세계의 어설픈 인도주의적 개입이 우크라이나 국민을 사지로 몰고 있다.

 

이종철(연세대)

 

푸틴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침공을 한 지 벌써 3주가 넘었다. 21세기 광명 천지에 이런 형태의 전면전을 벌일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처음에는 단기전으로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이 이제는 장기화 조짐을 보인다. 물밑에서 종전을 위한 협상이 전개되고 있기는 하지만 서로 간의 협상 조건의 차이가 커서 쉽사리 매듭을 지을 것 같지는 않다. 이 전쟁으로 인해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와 인근 도시가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을 받아서 초토화되고 있고, 마리우폴 같은 경우는 항복 유도와 결사 항전이 팽팽히 맞서면서 도시 기능을 완전히 상실할 정도로 파괴되고 있다. 이제 러시아는 흑해 연변의 아름다운 항구 도시 오데사에 대해 미사일 공격을 시도하고 있다. 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양측의 군인들뿐만 아니라 민간인 사상자도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난민은 이미 천만에 육박하고 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지 77년이 되는 시점에서 인류는 다시금 우크라이나 발 세계 대전의 가능성을 우려할 시점에까지 이르렀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대개의 전쟁이 그렇듯 이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경우에도 일방적이고 단편적인 해석은 위험천만하다. 이번 전쟁이 히틀러 같은 푸틴의 노욕 때문에 일어났고, 그런 의미에서 푸틴을 악마화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다. 푸틴은 오래전부터 NATO의 동진에 대해 우려와 경고를 보내왔고,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에 대해 극력 반대를 해왔다. 소비에트가 무너지면서 동유럽의 많은 위성 국가들이 서방 세계로 기울어 NATO에 가입을 했다. 이런 상태에서 러시아의 앞마당이나 다름이 없고, 오랜 역사를 통해 영토와 민족 구성원을 공유하고 있는 우크라이나가 NATO에 가입하는 현실은 러시아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일 수도 있다. 이 점에 관한 국제 정치학적 시각을 외면한다면 이 전쟁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젤렌스키 대통령은 끊임없이 NATO의 문을 두드려왔다. 정치적 경험이 일천한 그가 대통령을 맡은 상태에서 소영웅주의를 표방한 것이 우크라이나의 미래에 먹구름을 끌고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실책을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지적해 볼 수 있다.

 

첫째로 그는 NATO 가입을 최우선 외교정책으로 삼고 친서방 주의를 노골적으로 표방했다. 불확실한 서방 세계의 지원을 현실적인 것으로 확신을 하고, 현실적인 러시아의 위협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외면한 것은 초보 정치인의 미숙한 정치적 판단이다. 국제 정치의 냉엄한 적자생존의 논리를 그릇 판단한 대가는 너무나 크다. 일국의 책임자라고 한다면 지나치게 인기에 영합 하고 비현실적인 이상으로 국민들의 생각을 호도해서는 안 된다. 포퓰리즘이 달리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둘째로, 그는 러시아의 침공을 받자마자 피아간의 전력 차를 무시하고 오로지 열정적인 애국심에 호소하면서 결사 항전을 시도했다. 물론 지도자로서 그가 가진 마음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위험천만해 보인다. 서방 세계는 이러한 그의 용기가 풍전등화 상태의 우크라이나를 구할 것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진정한 용기는 실력과 역량이 갖추어진 상태에서 생기는데 반해, 그런 것들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열정적인 용기를 내는 것은 만용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만용으로 인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쟁터에 뛰어들어 희생을 당했고, 그 이상으로 민간인 희생자와 난민이 발생했다. 지혜로운 지도자라고 한다면 이런 상황에서 고개를 숙일 줄도 알아야 하고 절치부심해서 다음을 위해 역량을 키우려 노력할 것이다. 이와는 정반대로 행동한 희생의 대가는 이제 회복 불가능할 정도이다. 셋째, 그가 이런 만용을 부린 데는 순진하게도 서방 세계의 개입과 지원을 너무 낙관한 점이다. 미국을 위시한 나토의 회원국들은 그 누구도 러시아와 직접적으로 대결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간접적으로 무기와 식량과 구호품들, 그리고 강력한 금융제재로 지원을 하고는 있지만 확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결코 러-우 전쟁에 직접적으로 개입을 시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UN이 종이호랑이가 된 것은 이미 오래전이다. 이런 상태에서 우크라이나가 결사 항전을 시도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젊은 군인들과 국민을 희생양으로 모는 어리석은 행위일 뿐이다. 현재 러시아도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서 전쟁을 더는 끌고 싶어 하지 않는다. 무언가 출구 전략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조건을 내걸고 있는데, 초보 운전자나 다름없는 젤렌스키는 영토는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식으로 버티는 것 같다. 앞으로 시간을 끌면 끌수록 우크라이나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는 것을 왜 외면하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다 들어주고 제발 전쟁을 그만하자고 애원을 해도 시원찮을 젤렌스키가 국민의 고통과 희생을 볼모로 밀어부친다면 우크라이나의 미래는 더욱더 불투명해질 것이다.

다음으로 이 전쟁은 서방 세계가 부추긴 면도 없지 않다. 그들은 젤렌스키의 결사 항전의 의지에 손뼉을 치면서 앞으로 얼마간만 더 버티면 이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식으로 낙관적인 정보를 흘렸다. 그들은 약자를 돕는다는 어설픈 인도주의(Humanism)를 명분으로 우크라이나에 전쟁 무기 등 여러 가지 지원을 하면서 이 전쟁을 계속 끌어가도록 부추겼다. 만일 우크라이나가 무너지면 자신들도 오래지 않아 러시아의 침략의 희생물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하면서 어떤 형태든 우크라이나가 버텨야 한다는 논리를 공유하고 확산시켰다. 하지만 그들은 우크라이나가 완전히 초토화되고 망할 지경에 이른다 해도 결코 이 전쟁에 직접적으로 참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도 러시아의 군사력을 두려워할 뿐 아니라 전쟁에 대한 푸틴의 확고한 의지를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가급적 자신들에게 불똥이 튀지 않기만 바라고 있을 뿐이다. 만일 서방 세계가 좀 더 지혜롭고 현명하게 나가려 했다면,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 신청 단계부터 단호하게 막고, 전쟁 이후에도 이 전쟁이 물리력의 격차로 인해 더 진행돼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시그널을 보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서방 세계들은 어설픈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인도주의적 개입을 시도함으로써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만 한 꼴이 되고 말았다. 그로 인해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고통을 겪고 있는 이 전쟁의 배후에서 웃고 있는 세력들은 미국의 군산복합체일 뿐이다. 그들은 단순히 러-우 전쟁을 지원하는 무기만 팔아먹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개발한 신무기들을 이 전쟁을 통해 실험도 하고 있으니 금상첨화가 아닌가? NATO 회원국들은 러시아의 직접적인 위협을 빌미로 군비 증강에 나서고 있고, 독일 같은 구 전범 국가는 70여 년 만에 금기로 간주했던 재무장까지 선언하고 있다.

이처럼 미래의 잠재적인 고객들이 폭증하는 현실을 보면서 군산 복합체들은 샴페인을 터트리고 브라보를 외쳐도 시원찮을 전쟁 특수를 맞은 것이 아닌가? 이보다 더 좋은 게임이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약자를 돕는다는 명분도 있고, 현실적인 두려움도 대비한다고 하면서 마구마구 무기 생산을 독려하지 않겠는가? 앞에서는 값싼 눈물을 흘리면서 뒤에서는 연신 밀어닥치는 달러를 세느라고 그들은 잠잘 시간도 없을지 모른다. 도대체 이 얼마나 코미디 같은 현실인가? 코미디언 출신의 선무당이나 다름없는 정치인이 세상 돌아가는 판세도 모르고 칼춤을 추어대는 마당에서 군산 복합체들은 구경꾼들에게 치명적 독성을 품고 있는 약을 연신 팔아대고 있는 형국이 아닌가?

 

나는 결코 푸틴의 전쟁을 미화하거나 그에게 면죄부를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인도적 관점에서 볼 때 누구도 전쟁을 통해 자신들의 목적을 관철하려는 자가 있다고 하면 그가 바로 악마이다. 하지만 악마들이 더욱 득세하고 기승을 부리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행위에도 우리는 경계의 눈을 크게 뜨고 살펴야 한다. 러-우 전쟁은 정치를 모르고 열정적 의지만 가진 초보 정치인이 애국심을 볼모로 무리하게 결사 항전을 하는 것과 아울러 어설프게 인도주의적 개입을 명분으로 불난 집에 부채질만 한, 미국을 위시한 서방 세계의 책임도 크다. 그리고 보다 노골적으로는 전쟁에 대한 공포심을 빌미로 최신 무기를 팔아먹는 미국의 군산 복합체 세력의 책임이 크다. 결과적으로 이 전쟁의 진정한 승자는 이들 군산 복합체 세력이고, 그 이면에서 가장 크게 희생을 당하고 고통을 겪고 있는 자들은 이 전쟁에 끌려 들어간 수많은 젊은이들,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국민뿐이다.

결론은 간단하다. 이 전쟁이 더 큰 희생을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전쟁을 중단하기 위해서는 우크라이나가 무조건 항복 선언을 해야 한다. 다른 답이 없다. 그것이 약소국의 비애이자 운명이고, 약소국이 생존을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이다. 우크라이나가 이번의 경험을 와신상담하고자 한다면 절치부심하면서 자신들의 역량을 키우는 수밖에 없다. 애국심은 전쟁터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자신들의 국가를 키우는 데도 무엇보다 애국심이 필요하다. 지금은 그 애국심을 유보할 때이다. 그리고 푸틴도 그가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려 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전쟁으로 인한 희생을 중단시키고, 왜 과거 소비에트 위성 국가들이었던 수많은 나라들이 ‘러시아의 길’을 외면하려 하는지 깊이 성찰해야 할 것이다. 그것만이 러시아를 살릴 수 있고, 동구권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독재와 전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전쟁은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해도 악마만이 선택하는 최악의 길이다!

이방원의 권력과 문재인의 권력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이방원의 권력과 문재인의 권력

 

이종철(연세대)

 

매주 주말마다 하는 KBS의 역사 드라마 <이방원>이 점입가경, 흥미진진하게 전개되고 있다. 대단한 권력의지를 가진 태조의 5남 이방원이 드디어 조선을 설계한 삼봉 정도전을 살해하고 궁궐의 권력을 일시에 장악했다. 오늘날 식으로 표현하면 쿠데타에 성공한 것이다. 방원은 확실히 권력 게임에서 절묘한 타이밍을 잘 읽고 순발력 있게 움직이는 인물이다. 과거 포은 정몽주 선생이 고려에 대한 절개를 강조하면서 이성계의 혁명을 반대하자 방원은 거침없이 그를 선죽교에서 살해했다. 마찬가지로 방원은 조선을 설계하고 조선의 통치 이념으로 성리학을 앞세우면서 신료들의 국가를 건설하겠다고 다짐한 삼봉 정도전이 잠깐 방심한 틈을 탄 사이에 그를 살해했다. 권력 게임에서 순간의 방심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그는 이어서 이복동생인 세자 방석을 살해하고, 이복동생의 매제도 죽인다. 권력 앞에서는 피를 나눈 것이 오히려 장애가 될 뿐이라는 것이 그의 냉정한 판단이다. 태조 이성계는 그가 이처럼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을 일찍이 파악했지만 차마 자기 자식을 죽일 수 없어 미적거리다가 그 자식에 의해 완전 무장 해제를 당하고 권력을 상실한 자의 온갖 수모도 겪고 있다. 그것이 부모의 업보라는 데에는 참으로 말할 수 없는 큰 고통이 깔려 있다.

 

방원이 궁중 권력을 장악했지만 바로 용상에 오를 수는 없다. 이른바 권력의 정당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해서 둘째 형 방과를 임시 세자로 세워 아버지 태조와 자신 사이에 완충지대를 형성해 놓고 태조의 합법적인 동의를 구하고자 한다. 하지만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개국한 태조가 그렇게 쉽게 당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는 둘째에게 자신이 당한 모욕을 씻어 달라고 하자 둘째 방과가 그에 따라 움직이려 하고, 셋째와 넷째는 저들 나름대로 방원을 죽이고 왕권을 장악하기 위해 모의를 시작한다. 드라마 <이방원>은 이번 주 딱 여기까지만 방영되었다. 잘 알다시피 이방원은 제2차 왕자의 난도 진압을 하면서 왕의 자리에 오르고, 태조는 자신의 정치적 배경이라 할 수 있는 함흥으로 돌아가 칩거를 한다.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면서 ‘권력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갖고 이 이야기를 풀어나가 보고자 한다.

 

방원은 누구보다 왕의 권력 속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권력을 쟁탈하는 과정에서 무자비하게 정적을 살해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정치의 도덕성 운운한다면 그를 잘못 보아도 한 참 잘못 보는 것이다. 그는 “군주는 인자함을 보여줄 것인가, 잔인함을 보여줄 것인가?”라는 화두를 던진 마키아벨리즘의 화신답게 왕의 권력을 행사하는 데 장애가 되는 모든 제도와 경쟁자들을 일거에 제거해버린다. 여기에는 쿠데타 공신들과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헌신적으로 돕고 희생을 했던 처가의 장인 민제와 처남들(민무구,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외척의 영향력을 차단하겠다는 것이 명분이다. 이쯤 되면 과연 방원은 인간의 탈을 쓴 야차나 다름없지 않냐, 이런 자가 어떻게 왕이 될 수 있겠냐라고 그를 비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도대체 왕의 권력의 정당성이 어디에 있냐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태종 방원은 신료 중심에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6조 직계제(왕이 6조에게 명령하고 6조가 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제도)’를 실시하고 각종 제도적인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개국한 지 얼마 안 되는 조선왕조의 틀을 잡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런 맥락에서 태종 방원은 초지일관 권력을 장악하고 그 권력에 방해가 되는 제도나 인물을 제거하고 그 권력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려 했다는 점에서 권력의 화신이라 할 수도 있겠다. 사실 어떻게 보면 태종 이후 세종대에 이르러 조선이 안정기에 이르고 거의 모든 면에서 태평성대를 이루게 된 것은 태종이 이렇게 밑거름을 깔아주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왕의 권력의 정당성 문제를 사적인 도덕의 차원과 동일 차원으로 생각할 수 있겠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왕의 권력이 인자함을 표방하는 순간 백성의 삶이 피폐해질 가능성이 크다. 왕의 권력이 비록 잔인하다 해도 그 권력의 중심에 백성을 세우고 있다면 그런 권력은 얼마든지 정당성을 띨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런 방원의 권력 문제를 21세기 한국의 전임 대통령 노무현과 이제 얼마 안 있으면 퇴임하게 될 문재인 대통령의 경우와 대비시켜보자. 오랫동안 인권 변호사로 활약을 했던 노무현에게 권력은 억압적인 폭력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재임 기간 중 이런 권력을 해체해서 분권화하고 분리하려는 노력을 많이 했다. 그는 절대 권력이라 할 대통령의 권력을 총리와 나누려 했고, 서울 중심을 해체해서 지방 분권화를 시도했고, 실제로 세종시로 수도를 옮기려 했다가 반대가 심해서 그친 경험도 있었다. 그에게 권력은 늘 억압적이어서 민주주의에 반대가 되고 그 권력이 집중될 경우 언제든 독재와 파시즘으로 발전할 수 있는 부정적(negative)인 의미만 가졌다. 그의 권력에 대한 인식은 어쩌면 상당한 수준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당대의 현실에 어울리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가 판단하듯 권력이 그렇게 부정적인 의미만 가지는 것도 아니다. 프랑스의 포스트 모던 철학자 미셸 푸코가 적절히 지적했듯, 권력에는 이런 부정적인(negative) 의미 외에도 생산적이고 긍정적인(positive) 측면도 있다는 것을 노무현은 몰랐다. 이런 긍정적 권력을 통해 권력이 생산하고 실현할 수 있는 가치는 수도 없이 많다. 한편으로 그런 권력은 이데올로기적인 억압 기구를 해체할 수 있고, 재벌 중심의 경제체계도 흔들어 놓을 수 있고, 오늘날 문제가 되는 법조 권력에 균열을 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다. 조선의 태종 이방원이 보여준 모습은 바로 그런 생산적 권력을 통해 각종 제도적 개혁과 외척이나 공신 세력의 저항을 물리침으로써 세종이 안정적 기반 위에서 국가를 경영할 수 있게끔 해준 것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권력을 희화화하고 부정적으로만 생각한 것은 노무현의 단견이라 할 수 있다. 결국에 그는 희대의 사기꾼과 같은 이명박에게 양탄자를 깔아준 셈이 되고 말았으니까 완벽하게 실패한 대통령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노무현이 심어 놓은 가치와 철학이 촛불 혁명의 거름이 되기도 했지만, 이런 가치와 철학이 실현되는 데는 너무 많은 우회와 희생이 따른 점도 외면할 수가 없다.

 

 

이른바 촛불 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의 경우는 어떻게 봐야 할까? 그는 밥상을 차려 주고 수저까지 쥐고 있었으나 그것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고, 아울러 잘못 판단해서 그 권력을 상대에게 넘겨주는 우를 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윤석열이 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고 극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데는 조국 사태가 크게 기여했다고 하지만 사실 윤석열을 검찰총장의 자리에 앉힌 것은 문재인 대통령이다. 그는 이런 인사를 하는 과정에서 윤석열이란 인물이 과연 시대적 화두인 검찰 개혁에 적절한 인물인지에 대해 결정적으로 오판을 한 셈이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 반복했다. 인사 검증 시스템을 제대로만 돌려 보았어도 어떻게 윤석열이란 인물을 고속 승진을 시켜 검찰총장이란 막강한 자리에 앉힐 수 있었을까, 그리고 조국 사태가 빚어지는 과정에서 그것이 가져올 파괴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것이 자신이 의도했던 검찰 개혁에 얼마나 방해가 될 수 있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윤석열 체제가 순탄 대로를 걸을 수 있게 했는가 등을 돌이켜 생각한다면 문재인의 정치적 판단력과 권력 행사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윤석열이 정치인으로 변신해서 성장할 때마다 탄력을 받을 수 있도록 기름을 부어 주기까지 한 셈이다. 이런 면에서 그는 윤석열이나 이번에 종로구 보궐선거로 당선된 전 감사원장 최재형이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정치적 후원자인 셈이다. 문재인은 전임 대통령 그 누구보다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고, 총선에서 무려 180석 이상을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어떻게 행사할 줄 모르고 좌고우면하면서 결과적으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정치 개혁을 거의 시도도 하지 못하고 만 것이다. 문재인은 노무현이 죽음으로써 보여준 현실도 이해하지 못한 채 양손에 쥔 권력을 어벙하게 들고만 있다가 당하고 만 것이다. 그가 이런 정치적 오류를 범한 데에는 앞서 말한 것처럼 그의 정치적 판단력의 부재와 더불어 권력을 도덕과 분리하지 못함으로써 권력에 대한 사적 인식의 한계가 크게 작용한 때문이다. 한 마디로 그는 대통령의 권력과 사적인 문재인의 권력 차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순돌이에 불과했다. 오래전 서양의 마키아벨리가 말해주었고, 그보다 더 오래전에 조선의 태종이 보여주었던 왕의 권력 속성에 대해 너무나 무지했다.

 

권력은 한 가지 얼굴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장자가 비유했듯 칼과 같아서 강도가 들고 있으면 흉기로 변하지만, 주부가 요리할 때 사용하는 칼은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맛있고 영양가 높은 음식을 만들어 줄 수 있다. 그래서 같은 칼이라도 어떤 상황과 맥락에서, 그리고 누가 그것을 가지고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모습을 달리하면서 결과도 다르게 빚어낼 수 있는 것이다. 무릇 권력을 쥐려고 하는 자는 권력이 갖는 이처럼 다의적이고 다면적인 모습을 이해하고, 그것을 어떻게 행사할 수 있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권력의 이런 속성을 알지 못한 채 그저 동물적인 권력욕만 가지고서 권력을 소유하려고 한다면 오랜 역사가 보여주고 있듯, 그런 권력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고통에 시달린 현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이른바 ‘정권교체론’에 대해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 아래 글은 2022년 3월 4일 <내외 신문>(http://www.naewaynews.com/) [이종철 칼럼]에 게재된 원본 기사에 일부 사진을 첨부하여 <ⓔ 시대와 철학>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코너에 게재한 것임을 밝힙니다.

 

이른바 ‘정권교체론’에 대해

 

이종철(연세대)

 

한국인들의 역동적인 변화 요구는 유별나다. 일본은 수십 년 된 자민당이 아무리 문제가 많어도 당명을 바꾸지 않는데 한국은 선거철만 되면 수시로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당명도 너무 자주 바꿔서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는 한 그 정체를 판단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다. 미국이나 영국 등 대부분의 선진국의 정당사를 보아도 거의 변화가 없는데 왜 한국은 이렇게 여와 야,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당명을 바꾸는지 알 수가 없다. 이것을 한국 정치의 불안정성으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한국인들의 정서 불안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아니면 한국인들의 다이나믹한 정치의식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아니면 그것들 모두가 함께 작용해서 그런 것인지 당췌 알기가 쉽지 않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한국인들은 끊임없이 바꾸기를 좋아한다는 것만은 진실일 듯 싶다.

오래전 대통령 선거에서 로고 송으로 당시 유행하던 가수의 노래가 사용된 적이 있다. 그 당시도 정치 변혁에 대한 욕구가 강해서 그런지 이 로고 송이 선거판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바로 이정현의 “바꿔”라는 노래다.

 

“모두 제정신이 아니야 다들 미쳐가고만 있어

어느 누굴 믿어 어찌 믿어 더는 못 믿어

누가 누굴 욕하는 거야 그러는 넌 얼마나 깨끗해

너나 할 것 없이 세상 속에 속물들이야.

바꿔 바꿔 바꿔 모든 걸 다 바꿔

바꿔 바꿔 사랑도 다 바꿔

바꿔 바꿔 거짓은 다 바꿔

바꿔 바꿔 세상을 다 바꿔”

 

“바꿔 바꿔 바꿔 모든걸 다 바꿔” 라는 가사는 가수 이정현의 호소력 있는 고음과 함께 그해 선거판의 변화 욕구를 여지없이 채워주었다. 한 마디로 대중가요가 정치판의 욕구를 아싸리하게 풀어준 셈이다.

주역의 계사전에도 이런 변화에 대한 기술이 있다. 우리는 흔히 ‘궁즉통’이란 말을 사용하는데, 계사전에 표현된 정확한 내용은 이렇다. ”궁즉변이고, 변즉구이고, 구즉통이다.“ 다시 말해 어려움에 처하면 변화와 개혁을 시도하고, 이러한 시도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 오래 지속할 수 있고, 그 때 비로소 만사가 형통해진다는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바로 궁즉통이 아니라 중간 과정에서 지속적인 변화와 개혁을 할 때 비로소 궁즉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변화와 개혁이 수반되지 않는 상태에서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의 대선판에서 가장 큰 화두는 ‘정권교체론’이다. 야당은 이 ‘정권교체론’을 전면에 내세워 대통령 후보로서의 자격이나 자질이 크게 미달한 윤석열을 밀고 있다. 앞서 몇 차례의 글에서 지적했듯, 그들은 윤석열이 대통령 깜이 안 되는 후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중심으로 보수 야권과 중간 지대의 회색 집단까지 대거 끌어들이는 전략을 펴고 있다. 윤석열은 과거 조국 사태에서 보여주었듯 거의 편집증 환자처럼 일단 공격 목표가 세워지면 좌고우면하지 않고 돌격하는 멧돼지 스타일이다. 윤석열의 이러한 스타일이야말로 절치부심 정권교체를 바라는 보수 기득권 세력들이 보기에는 자신들의 욕구를 풀어줄 수 있는 화신이나 다름없다. 이런 맥락에서 현재의 대선가도에서 보수 기득권 세력이 말하는 이른바 ‘권교체론’이 가장 핵심 주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결론 부터 말하면 나는 이런 요구가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극우 보수주의자들의 탐욕을 위장한 허구적 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미 검찰 개혁을 무산시키려는 수많은 집단적 반발에서 보았듯, 개혁의 화살이 자신들의 심장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때문에 개혁이 아니라 그저 이 정권을 뒤집어서 다시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을 저 구실 좋은 ‘정권 교체론’으로 위장한 것이다. 이런 ‘정권 교체론’은 전략적으로도 어느 정도 성공해서 대선 정국에서 정치 지형을 야권의 의도대로 짜는데 유리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정권 교체론’은 앞에서 문재인 정권의 경제 정책 실패, 부동산 정책 실패, 최저 임금제의 실패, 방역 대책 실패 등 한 마디로 총체적 실패, 부패와 무능 등 온갖 수식어를 동원해서 현 정권을 바꿔야지만 살 수 있다고 공갈도 치고 협박도 하는 것이다. 오죽하면 중간 지대에서 눈치만 열심히 보던 지식인 집단들도 대거 보수 우파로 이동해서 정권을 바꿔야지만 현재의 고통을 피할 수 있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있는 지경이 되었을까? 한 마디로 보수 기득권의 ‘정권 교체론’의 선전 선동 효과는 어느 정도 약발이 미친 셈이다. 그토록 절대 단일화는 없다고 여러 차례 맹세하다시피 한 안철수가 막판 시간에 쫓겨 윤석열의 팔을 들어주면서 한 소리도 정권교체를 위한 불가피한 결정이라고 공갈을 쳤겠는가?

하지만 조금만 정신을 차리고 보더라도 보수 기득권 세력의 ‘정권 교체론’은 허구적인 기만에 불과하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바꾸자는 것이 분명하지 않고, 왜 바꾸는가에 관해서도 근거가 너무나 희박하기 때문이다. 최저 임금을 빠르게 올려서 자영업자들을 힘들게 했다, 부동산이 가파르게 올라서 청년 세대와 집 없는 서민들의 희망을 꺽었다, 실패한 방역 대책 때문에 자영업자들의 생존을 벼랑 끝으로 몰아갔다는 등 여러가지 이야기가 많다. 남북 관계는 도로 옛날이고, 한미 관계도 예전같지 않다 등등이다. 하지만 그 내력을 상식적으로 따져만 보아도 지나치게 현상을 과장하고 호도한 측면이 많다. 많은 이들이 급격한 부동산 가격의 상승을 가장 큰 정책적 실패라고 지적하지만, 이 문제는 부동산을 투기의 수단으로 간주하는 국민 대다수의 욕망과 관련이 깊어서 단순하게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기대 욕망이 급격하게 늘어나면 정책적으로 잡는 데도 한계가 있다. 이런 현상은 주식 판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비슷해서 꼭대기를 찍지 않는 한 결코 막을 수가 없는 일이다. 결국 이런 투기판에서 희생 당하는 자들은 안타깝게도 뒤늦게 뛰어든 초짜들만 당하는 것이다. 정부는 이런 투기판을 막기 위해 각종 부동산 정책을 썼지만 한 번 달구어진 투기 수요를 바로 차단하기는 어렵다. 이런 정책들의 효과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야지만 나타나는데, 금년 들어 꺽인 부동산 가격 조정이 바로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 자체를 부동산 정책의 실패라고 본다면 그것은 시장을 거시적으로 보지 못하는 피상적인 분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부동산 문제는 인구 절벽 현상을 고려해야 하고, 각종 세제 및 제도개혁 문제와 국토균형발전 문제를 총체적으로 고려해서 풀어야 할 과제이다. 덧붙여서 하나 더 지적을 한다면 왜 노무현 정권이나 문재인 정권에서 보듯, 진보 정권에서 더 부동산 투기 심리가 발흥하는가를 풀어줄 필요는 있겠다. 문제는 이런 것들을 막무가내 정치적으로 해석하려는 보수 기득권 세력의 음모가 더 크다고 하겠다.

방역 대책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의 대 코로나 방역 대책은 OECD 내의 그 어떤 국가들에 비해 성공적으로 잘 이루어진 편이다. 이런 경우는 다른 국가들과의 비교 분석을 하면 잘 드러난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영향과 관련해 가장 주목할만한 면은 이른바 선진국이라 생각했던 영미권과 유럽권이 초토화되면서 그들의 의료제도와 국민들의 방역 의식의 민낯이 완전히 드러났다는 점이다. 과거 이런 질병 문제는 의료 서비스 제도의 수준이 떨어지고 국민들의 예방 의식도 낮은 저개발 국가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던 현상이었다. 그런데 코로나 바이러스는 그런 일반적 상식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세계 최선진국이라 할 미국과 유럽의 각국은 코로나 바이러스 정국을 거치면서 수십만의 인명을 상실했고, 그로 인한 사회적 혼란과 천문학적 비용을 댓가로 지불했다. 과거에는 상상도 하기 힘든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으로 치면 이것은 완전한 패배에서 기사회생한 상황이라 할 수 있는데, 아직도 그 여파를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한국은 그런 상황과 비교 자체가 의미가 없을 정도로 사망자 숫자나 확진자 숫자가 절대적으로 작다. 이런 점은 전 세계 언론이 인정을 해서 오죽하면 K-컨텐츠와 빗대서 K-방역이란 신조어까지 만들어졌을까? 그런데 이런 차이를 외면하면서 국내의 보수 언론들은 국민들을 바보 취급하듯 허구헌 날 방역 실패 타령만 하고 있다. 언론은 무엇보다 팩트에 기초한 공정한 비판을 사명으로 삼아야 할텐데, 오로지 비판을 위한 비판만 일삼으니 그런 언론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극에 달하고 있다. 물론 방역과 관련해 문 정부가 무조건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 당장 생계 의 벼량 끝에 내몰린 자영업자들의 현실을 제대로 살폈는지, 왜 그들만 코로나 방역의 짐을 일방적으로 지게 되었는지의 문제를 생각하면 정책 판단의 미스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지나치게 획일적으로 방역 기준을 적용하다 보니 산과 들 그리고 해변과 같은 지역에서도 똑같은 기준을 적용한 점과 확진자 숫자 위주의 기계적 판단으로 인해 질적인 정성 판단을 하지 못해 좀 더 세심하게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면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은 인류가 처음 경험해 보는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지, 그것 자체를 영미권이나 유럽권에서 빚어진 최악의 상황과 비견될 수 있는 것처럼 비난하는 것은 비판의 과녁을 벗어나도 한 참 벗어난 것이다. 이제라도 중요한 것은 코로나를 거치면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자영업자들의 영업 수준을 회복시켜주고 제도적으로 보상해주는 대책에 있다. 그들이 피부로 느끼는 개선이 없다면 문 정권을 향한 원성이 하늘을 찌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정책적 문제들 역시 야당이 주장하듯 아전인수격으로 ‘정권 교체론’을 내세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다른 문제들도 오십보 백보다. 오히려 문정권은 경제 문제와 관련해서 볼 때 실보다는 득이 훨씬 많다고 할만큼 선방했다. 일본의 반도체 공격에 대해 적극 방어함으로써 오히려 일본의 공급망 채널이 무너지고 한국의 반도체 부품 산업을 키운 것이 그렇다. 또한 견고한 수출 드라이브를 배경으로 한국의 수출 규모는 코로나 이전을 넘어서 가장 큰 무역 흑자를 냈다. 이런 현상은 OECD 내의 어떤 국가들보다 앞선 것이다. 결국 그들이 주장하는 ‘정권 교체론’이라는 것은 그저 바꾸기 위한 막무가내식 요구일 뿐 전혀 합리성이나 대안이 없는 정치적 선전에 지나지 않는다. 보수 야권은 명박-근혜 10년을 거치면서 4대강 사업의 삽질로 국토를 뒤집고 사대 강을 오염 천지로 만들어 놓았고, 피로 이룩한 한국의 민주주의를 무너뜨렸고, 최순실 비선과 같은 실정으로 인해 마침내 추운 겨울날 국민들이 거리에서 촛불을 들고 ‘이게 나라냐’라고 분노하는 상황까지 만들었던 세력들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석고대죄를 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과오에 대해 철저하게 반성을 했다는 이야기를 나는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 세력들이 어느 날 갑자기 어벙이 강화 도령 같은 윤 석열을 앞세워 ‘정권 교체’를 요구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국민을 호도하는 행위다. 그것은 기득권 세력의 탐욕과 무능을 감추는 정치적 선전 선동이고 비열한 술책이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저간의 한국 정치의 문제를 조금이라도 반성을 했다고 한다면 작금의 대한민국에서 요구되는 것은 5년마다 단임제 대통령 선거 제도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과 비용, 승자독식을 부추기는 선거제도, 기득권의 세습을 가능케 하는 각종 제도들, 군부 통치가 끝나자 마자 법을 앞세워 여전히 국민 위에서 군림하는 법조 세력들 등을 둘러싼 낡은 법적, 정치적 제도들, 낡은 교육과 사회 시스템들을 뜯어고치는 일이다. 사실 이런 문제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개혁의 화두이자, 미래를 향한 대한민국호의 순항하기 위한 선결 조건이다. 이런 ‘정치 개혁’, ‘사회 시스템 개혁’을 외면하고 그저 선동과 선전에 불과한 ‘정권교체’를 주장하는 것은 한국의 정치 현실을 바꾸는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그것은 개혁의 초점도 없고, 대안도 없고, 목표도 없는 공허한 구호일 뿐이다. 왜 보수 기득권 세력이 윤 석열을 앞세웠겠는가? 자신들의 공허한 막가파식 ‘정권 교체론’을 선무당처럼 떠들기에 윤 석열 만큼 적합한 인물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제 우리는 좀 더 냉정해져야 한다. 지금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가장 큰 과제는 산적한 ‘정치 개혁’과 ‘사회 시스템개혁’을 통해 미래의 혁신적 대한민국호를 만드는 일이다. 이제 더는 과거처럼 정확한 목표도 없고, 그것을 이끌어갈 역량도 갖추지 못한 체 달톰한 말로 국민의 귀를 속이는 정권 교체론’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선거 구호에 불과한 것인지를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 개혁’을 어떤 세력이 맡고, 어떤 지도자가 가장 어울리는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만이 기로점에 서 있는 대한민국호를 구하는 일이다.

출처 : 내외신문(http://www.naeway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2225)

안철수+윤석열의 1+1이 왜 마이너스…믿었던 국민들 분노폭발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 아래 글은 2022년 3월 5일 <내외 신문>(http://www.naewaynews.com/) [이종철 칼럼]에 게재된 원본 기사에 일부 사진을 첨부하여 <ⓔ 시대와 철학>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코너에 게재한 것임을 밝힙니다.

 

안철수+윤석열의 1+1이 왜 마이너스…믿었던 국민들 분노폭발

 

이종철(연세대)

 

• 믿었던 많은 국민들은 ‘내 표 돌리도’라고 분노하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정치적 야합이 벌어졌다고 비난

• 정치적 야합 행위는 우리가 처음 제기한 원 + 원이 빚을 수 있는 최악의 수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편의점이나 마트에 장을 보러 가다 보면 특판 상품이라고 해서 원 플러스 원 상품이 있다. 기왕의 상품을 하나 사면 하나 더 끼워 주는 것이다. 물건 한 개 값으로 2개를 구할 수 있으니까 소비자의 기쁨이 배가 되고, 판매자 입장에서도 재고를 빨리 소진할 수 있으니까 좋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원 플러스 원 제도는 일종의 시너지 효과를 유발하는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이런 형태의 프로모션 제도는 마케팅에서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원 플러스 원이 똑같이 그런 형태로 나타나는가? 가령 1+1은 얼마일까라고 묻는다면 어린 애들도 금방 2라고 답을 한다. 그런데 반드시 그럴까? 1+1은 2라는 산술적 결과만 존재할까?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자. 물방울 2개를 합치면 몇 개가 될까? 이 경우는 당연히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1=2라는 산술적 결과가 옳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또 다른 면에서 1+1은 2도 아니고 1도 아닌 경우가 있다. 앞서 든 원 플러스 원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산술적 결론을 넘어서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서 이런 결과를 볼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 이런 대표적인 경우는 인간과 인간이 만날 때 나타날 수 있는 효과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아주 특별하다. 인간은 상형문자인 인(人)에서 보듯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기도 하고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 사회적 동물이고, 인간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타자의 인정이 중요하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인간을 만난다. 가장 먼저 부모를 만나고, 그다음에는 형제자매를 만나고, 좀 더 크면 동네 친구들을 만나고, 그러다가 유치원이나 학교에 입학하면 그곳에서도 친구들을 만난다. 한 인간이 성장한다는 것은 이처럼 매 순간 매 단계마다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소통하면서 놀이하고 학습하고 함께 일하면서 성장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성장에서 누구를 만나는가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나는 늘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이런 만남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인간을 만나는 것은 길을 걷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새로운 길이 열리고, 나쁜 사람을 만나면 있던 길도 막혀 버린다는 것이다. 새로운 길이 열리면 그 길로 인해 또 다른 새로운 길이 열리면서 그 이후의 효과나 가능성은 처음 생각하기 힘든 효과를 낳기도 한다. 그렇게 본다면 1+1은 결코 산술적 의미에서 2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가늠하기 힘든 잠재적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만일 이런 생각을 정치판에 끌어들이면 어떨까? 대선을 며칠 앞둔 요즘 끊임없이 이합집산이 이루어지고 있다. 국민들 앞에서 완주를 하겠다고 하늘 같이 맹세를 했다가도 판세의 유불리나 정치적 효과에 대한 전망에 따라 하루아침에 식언하고 안면을 바꾸고 단일화를 하는 경우가 그렇다. 물론 그들 말마따나 단일화가 1+1=1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결코 축소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단일화를 통해 훨씬 큰 시너지 효과를 낳기 위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처음 의도했던 것과 다르게 시너지 효과를 낳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1+1=0 혹은 마이너스 게임이 되는 경우도 있다. 의도는 늘 결과와 불일치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최근에 이루어진 안철수와 윤석열 간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단일화의 결과는 어떻게 될까? 과연 그들이 원하는 것처럼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서 정권교체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죽도 밥도 안돼서 서로를 죽이는 게임이 될 것인가?

출처  http://www.naeway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2242

나는 안철수와 윤석열 간의 단일화를 보면서 그들의 인간적 결정을 가지고 시비를 걸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얼마나 정권교체에 대한 욕구가 강했으면 그간 자신들이 해왔던 수많은 말들을 식언하고, 국민들에게 했던 수많은 약속들을 하루아침에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칠 수 있었겠는가? 정치인들에게 국민에 대한 약속은 절대 깨서는 안 될 금과옥조나 다름없다. 신뢰를 먹고사는 정치인들이 국민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다면 그는 정치인으로서 더는 성장할 수 없다. 오래전 피타고라스가 이야기했듯, 정치인들은 신뢰를 바탕으로 명예를 추구하는 집단인데 그런 신뢰를 내팽개친 상태에서 어떻게 정치를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윤석열은 말할 것도 없고 안철수는 정치인으로 도저히 하기 힘든 행동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의 행동을 보면서 과연 철수답다는 생각이 든다. 안철수의 그런 행동을 통해 그의 본질을 단박에 알게 되었다. 왜 사람들이 그를 보고 끊임없이 초딩이라고 했는지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그는 초딩 만큼이나 자기 행동에 대해 일말의 책임도 지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책임은 자유로운 성인만이 질 수 있는 것인데 초딩이 무슨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그러니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단일화를 선언한 것이 아닐까? 요즘 영악한 초딩들은 범법 행위를 하고서도 촉법소년을 핑게로 빠져 나가기도 한다. 아마도 안철수 역시 그런 영악한 초딩처럼 행동하려고 했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렇길래 성인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식언을 하고 대국민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그를 믿고 그에게 표를 던졌던 해외 동포들의 신뢰를 나몰라라 행동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문제는 이런 초딩 정치인이 윤석열과 같은 모지리 정치인과 단일화를 했을 때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가 더 궁금해지는 데 있다. 추측컨대 아마도 여기서는 변증법적 종합이 일어나기 보다는 기계적 결합이 일어나지 않을까? ‘모자른 초딩’ 혹은 ‘초딩스런 모지리’. 그리하여 따로따로 움직일 때보다 서로 합칠 때 마이너스 효과를 빚어서 서로의 표를 깍아 먹는 것이 아닐까?

당장 그들의 전격적인 단일화를 보고서 그들을 믿었던 많은 국민들은 ‘내 표 돌리도’라고 분노하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정치적 야합이 벌어졌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그것은 원칙도 없고, 명분도 없고, 마침내 실리도 잃어버리는 그런 단일화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이런 정치적 야합 행위는 우리가 처음 제기한 원 + 원이 빚을 수 있는 최악의 수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모자른 초딩 혹은 초딩스런 모지리가 어느 날 갑자기 합친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그저 헛한 웃음만 나올 뿐이다. 애들아! 세상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란다.

필자: 이종철 철학박사

출처 : 내외신문(http://www.naeway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2242)

 

필자의 다른 글

어떻게 일으켜 세운 나라인데.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 아래 글은 2022년 3월 3일 <내외 신문>(http://www.naewaynews.com/) [이종철 칼럼]에 게재된 원본 기사에 일부 사진을 첨부하여 <ⓔ 시대와 철학>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코너에 게재한 것임을 밝힙니다.

 

어떻게 일으켜 세운 나라인데.

 

이종철(연세대)

 

러시아의 침공을 받은 우크라이나를 보다 보니 약소 국가의 비애와 그 국민들이 겪는 고통이 나에게도 아프게 느껴진다. 나라가 적의 군화 발에 밟히는 슬픔은 겪어보지 않은 국민들은 알지 못한다. 이스라엘은 나라를 잃고 2천년 동안 전 세계에 흩어져 디아스포라의 고통을 겪었다. 그들이 사방에 아랍 국가들에 둘러싸인 상태에서 죽자 사자 나라를 지키려고 애를 쓰는 것은 자신들의 조상이 겪은 나라 잃은 슬픔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서 일게다. 이런 이야기가 한국인들에게는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한 세기 전만 하더라도 조선은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자신들의 운명이 좌지우지되는 경험을 겪었고, 마침내 일제의 식민지 치하로 들어가는 치욕도 경험했다. 나라를 잃고서 우리 선조들은 만주 벌판을 떠돌며 풍찬노숙하면서 배를 곯기도 했다. 한국인들은 유태인 다음으로 ‘디아스포라'(Diaspora)를 많이 겪은 민족이다. 과거 약소국가에서 탈출한 한국인들은 여전히 세계 곳곳에 퍼져 있다. 스탈리 체제 시절 20만명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 곳곳으로 강제 이주되면서 무려 2만 5천명이 죽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도 한국은 여전히 국가를 지킬 힘이 없다 보니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다. 남과 북으로 갈라져 동족 간에 피를 흘리는 전쟁을 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이 민족이 힘이 없어서 벌어진 일이다. 그 당시 막 일기 시작한 냉전의 최전선에 서서 이념 전쟁의 대리를 비극적인 한민족이 떠맡게 된 것이 아닌가? 힘이 없으면 언제든 타율적 강제에 의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평화는 결코 떠벌이 입이 아니라 강한 힘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한국인들은 전쟁이 끝나고 세계 최빈 국가의 상태에서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 지난 수십 년 동안 정말 열심히 일을 했다. 비록 유신 독재의 쓰라린 경험도 겪었지만 국력을 강하게 하자는 데는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노력했다. 이런 뜨거운 애국심은 독재 체제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세우는 데도 똑같았다. 드디어 한국은 세계의 모든 국가들이 선망하는, 경제와 민주주의를 동시에 이룩한 국가가 되었다. 이제 한국은 고래 등쌀에 시달리는 새우가 아니라 모든 국가가 선망하는 돌고래와 같은 위치에 올라와 있다. 어떻게 본다면 ‘한강의 기적’이란 말이 그저 말하기 좋은 수식어가 아니라는 것을 그 어두운 터널과 같은 시대를 통과한 한국인이라면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이렇게 수십 년 동안 축적된 국가의 에너지는 단순히 경제 발전으로만 나타나고 있지 않다. 이른바 ‘한류’ 붐에 따른 K-컨텐츠는 노래와 드라마, 영화, 만화 등등 다양한 문화 컨텐츠들을 타고서 전 세계인들을 열광시키고 있다. 이런 현상은 과거 일본이 서구에 소개되면서 일으켰던 붐을 능가하는 것이다. BTS는 전 세계의 아미들이 신화처럼 떠받들고 있고, ‘설국 열차’나 ‘기생충’, 그리고 윤여정의 ‘미나리’ 같은 한국 영화들은 이제 서구인들의 안방에까지 침투해 들어갔다. 새롭게 만들어진 넷플리스 같은 문화 플랫폼은 한국의 드라마들이 맘껏 놀 수 있는 앞마당을 만들어준 격이 되었다. ‘오징어 게임’이나 ‘지금 우리 학교는’ 같은 드라마들은 만들어지자마자 수십억 전 세계인들의 감성을 뒤흔들면서 세계 1위 권을 너무나 쉽게 차지하고 있다. 이제 한국의 문화 컨텐츠들은 과거 아시아인들이 영국의 비틀즈를 따라 부르면서 서구적 감성에 공감하던 것처럼, 반대로 서구인들이 모방하면서 감성적 일체감을 형성할 정도이다. 이런 현상은 한 세대가 지나면 그 여파가 지레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크게 드러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세운 거대한 대한민국호의 지도자로 국정에 대한 아무런 경험이 없는 강화 도령 같은 어벙이를 세울 수 있는가? 나라를 세우는 데는 수십 년의 피와 땀이 요구되지만 그것을 덜어 먹는 데는 단 몇 년이 걸리지 않는다. 일본이 ‘잃어버린 30년’의 수령에 빠진 사실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이제는 자국의 유명 정치인들까지 일본이 2류 국가로 전락했다고 통탄을 하고 있고, 한국은 이제 점점 더 ‘넘사벽’이 되어 가고 있다고 부러워하기도 한다. 도대체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거기에는 무엇보다 아베와 같은 극우 보수 정치인들의 책임이 크다. 이들은 일본을 폐쇄적으로 운영하면서 과거 제국주의의 영광만 집착하고 미래를 개방적이고 진취적으로 이끌지 못한 잘못이 크다. 한국도 잘못하면 이런 일본식 모델에 발목 잡힐 가능성이 크다. 일본 못지않게 급격하게 고령화되어 가서 인구 구성에서 생물학적 탄력을 상실해가고 있고, 경제의 규모에 따른 저성장은 과거와 같은 고도성장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지정학적으로도 한국은 미국과 패권주의를 다투는 거대한 중국과 언제든 대륙으로 진출하고 싶어 하는 극우 일본에 둘러싸여 있다. 여전히 남북 간에는 냉전 상태의 긴장이 높아서 평화를 이야기하기가 요원한 상태이다. 때문에 한국은 잠시도 한 눈을 팔거나 정체에 머무를 수 없는 것이다.

1963년 영화 <강화도령>(감독 신상옥)의 한 장면ㅣ출처: NAVER 영화 ttps://movie.naver.com/movie/bi/mi/photoView.naver?code=19690&imageNid=1850137#tab

한국이 반도체나 몇몇 분야의 산업에서 선도 그룹을 형성하고 있고 수출에 전력 투구룰 하고는 있지만 지금 세계 경제는 그 어느 때보다 기술 패권주의가 심하고 국가 간의 경쟁도 심하다. 4차 산업 혁명에 들어선 현재 인공지능과 로봇 산업, 유전 공학과 사물 인터넷과 같이 산업의 다양한 부문에서의 국가 간 경쟁은 과거와 비교될 수 없을 만큼 극심한 상태이다. 이런 상태에서 중요한 정책을 잘못 판단한다면 언제든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은 하루아침이다. 때문에 21세기의 한국은 나라의 운명이 앞으로 더욱 커질 것인가, 아니면 다시 과거로 후퇴할 것인가의 기로 점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통령을 한 사람 뽑는 것은 그저 하기 좋은 정치인 한 명을 내세우는 것과 질적으로 차이가 난다. 이런 상태에서 정치적 경험이나 식견이 없고, 수십 년 동안 폐쇄적인 검찰 조직에서만 성장한 인물이 도대체 어떻게 대한민국호를 이끌겠다고 나설 수가 있는가? 그야말로 언감생심인데, 윤석열은 ‘조국사태’와 같은 기형적인 사건에서 등장한 인기 스타일 뿐 전혀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는 보수 기득권 세력이 막가파식 ‘정권 교체’를 위해 내세운 허수아비나 다름없다. 이런 극우 보수 세력은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에서 보듯 대한민국을 다시금 과거의 망령에 가두어버릴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명박-근혜 10년 동안 피로 세운 한국의 민주주의를 무너뜨린 세력이고, 여전히 대한민국에게서 부패 공화국의 오명을 떼지 못하게 만든 세력이다. 미국의 성조기를 자신들의 분신으로 내세우고, 심지어 이스라엘에서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찾는, 국가를 이끌어갈 자신감이나 주인 의식이 하나도 없는 세력이다. 이런 세력과 그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윤석열이 어떻게 대통령이 돼서 약진하는 미래의 대한민국을 이끌 수 있겠는가? 그 앞날은 불을 보듯 뻔할 정도가 아니겠는가?

다시 한번 묻는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어떻게 세운 나라인가? 이 나라를 다시 과거로 추락시킬 것인가, 아니면 미래 세계 3대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나라의 초석을 다지게 할 것인가? 지금은 기득권자들의 탐욕으로 치장된 ‘정권 교체’가 아니라 낡은 수구 정치의 제도나 법들을 뜯어고칠 수 있는 ‘정치 개혁’이 무엇보다 필요한 시대이다. 만일 대한민국호가 향후 몇 년 동안 이런 낡은 시스템들을 개혁할 수 있다면 한국은 한 시대 안에 세계 3대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중요한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 한국인들의 에너지를 모을 수 있는 개혁적 지도자가 등장한다면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인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그런 역동적인 삶을 살아왔다. 그렇게 만든 나라인데 어떻게 모지리 강화 도령 같은 인물에게 덥석 맡길 수 있겠는가?

 

출처 : 내외신문(http://www.naeway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2139)

 

문제는 ‘악의 평범성’이 아니라 ‘도덕적 용기의 부재’이다.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 아래 글은 2022년 3월 1일 <내외 신문>(http://www.naewaynews.com/) [이종철 칼럼]에 게재된 원본 기사에 일부 사진을 첨부하여 <ⓔ 시대와 철학>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코너에 게재한 것임을 밝힙니다.

 

문제는 ‘악의 평범성’이 아니라 ‘도덕적 용기의 부재’이다.

 

이종철(연세대)

 

미국의 여성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나치 전범 학살자인 아이히만의 법정을 참관하고 내놓은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본인이 유태인으로서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아렌트 입장에서는 도대체 나치 전범들은 어떻게 생겨 먹은 인간들이기에 그런 반인륜적 범죄를 저질렀는가가 궁금했다. 아렌트는 이 법정을 참관하기 위해 한 학기 강의를 반납하기까지 했다.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법정 진술을 오랫동안 관찰하고 나서 내놓은 진단은 너무나 평범했다. 아렌트는 유태인 학살과 같은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아이히만이 괴물 같은 존재가 아니라 그냥 이웃집에서 평범하게 만날 수 있는 사람 좋은 아저씨 같다고 했다. 실제로 아이히만은 대단히 가정적이고, 딸아이들 한 테는 좋은 아빠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어떻게 그런 범죄를 저질렀을까? 여기서 아렌트가 내놓은 진단이 저 유명한 ‘악의 평범성’이다. 범죄를 저지르는 괴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이웃들이 그런 짓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이런 평범한 사람들이 아무런 생각 없이 행동하다 보니 저런 범죄에 휩쓸리고, 자신의 범죄 행위에 대해 아무런 반성도 하지 않은 것이다. 사고의 부재가 저런 엄청난 범죄를 야기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 전혀 사고를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아렌트는 여기서 제대로 사고하지 않았다고, 말하자면 반성적이고 비판적으로 사고를 하지 않다 보니 저런 행동을 했다고 덧붙인다. 아렌트가 여기서 도출한 ‘악의 평범성’은 나치의 행태에 대한 거의 고전적인 해석처럼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젊은 시절 하이데거와 야스퍼스 밑에서 철학을 공부한 명민한 학생이 보기에 나치에 부역한 그녀의 스승 하이데거가 별 생각 없이 행동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철학자의 나라 독일, 유럽에서도 가장 지성적이라고 자부했던 독일의 국민이 과연 아무런 생각 없이, 비판적이거나 반성적인 사고를 하지 않아서 나치에 열광하고, 유태인 학살과 같은 인종 청소에 동조를 했단 말인가? 나는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라는 진단이 틀렸다고 본다.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 없이 행동해서 저런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사소한 일을 할 때도 무수히 많은 생각을 한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파스칼의 말이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생각과 이성적 사고는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구분하는 종적인 차이(종차)이기도 하다. 그런 인간이 생각이 없이 행동했다는 말은 그 말의 의미를 백분 이해한다 하더라도 적확한 진단이 아니다. 인간은 생각이 없이 행동하다가 범죄를 저지르고 악에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기적 욕망에 휩쓸리고 도덕적인 판단과 행동을 이끌 수 있는 용기가 부족해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도덕은 오래 전 플라톤이 이야기했듯 인간을 구성하는 이성이나 욕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사(military man) 들의 용기의 원천인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도덕은 원인과 결과를 따지는 이성에 의해 자동적으로 발휘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본능적인 감성과 욕구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나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전장 터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무릅쓰고 싸움에 임하는 전사들의 용기와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길래 플라톤은 이성의 덕이 지혜이고, 욕구의 덕이 절제라고 한 반면 의지의 덕은 전사들에게 요구되는 용기라고 말했다.

도덕적 행동을 의지에서 찾는 플라톤의 전통은 근대의 도덕 철학을 종합하고자 한 칸트에게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칸트는 “이 세계 안에서, 아니 그 밖에서조차 우리가 무제한적으로 선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선의지(Good will)뿐이다.”라고 말했다. 고대인들이 덕(virtue)이라고 간주했던 우수한 두뇌, 강인한 체력, 뛰어난 판단력 같은 것들도 그 밑에 선 의지가 깔려 있지 않다면 오히려 가장 큰 악덕이 될 수 있다. 빼어난 재능을 가진 자들이 얼마든지 가장 나쁜 악인이 될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선의지만이 선한다고 칸트는 말한다. 그런데 이런 선 의지는 저절로 발휘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인’의 이야기를 보자. 밤에 산길을 가는데 한 사람이 부상을 당해 신음을 하고 있는 광경을 보자. 산길을 갈 때 가장 두려운 존재는 산짐승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이다. 그런데 밤중에 산길에서 부상당한 사람을 보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대부분은 머리끝이 솟는 두려움을 느끼면서 자기도 똑같이 저런 봉변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설 것이다. 이 경우 감성적 판단은 끊임없이 두려움을 피하고 싶어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하는 이성적인 판단에 따르더라도 이성은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이 합리적 행동이라고 자위하고 싶어할 것이다. 하지만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도덕적인 양심이 있는 사람은 두렵기도 하고 도망치는 것이 상책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 사람을 내가 구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연민이 앞서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도덕적 행동은 이런 감정적 두려움과 이성적 판단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서 부상당한 사람을 돕는 것이다. 도덕이란 이처럼 전사들이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의무감에 따라 행동하듯, 감정과 이성을 넘어서 마땅히 선의지(양심)가 명령하는 바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내가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에 반대하는 이유는 그들이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기적 욕망을 나치가 대변하고 있고, 그들이 반대할경우 닥칠 수 있는 불이익이 두려워서 나치에 동조하거나 적극적으로 부역 행위를 하는 데 있다. 그것은 결코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본능적인 욕구와 합리적인 이유에 따른 행동인 것이다.

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pspd1994/30325336114/in/photostream/

추운 겨울날 박근혜 정부가 저지른 행태에 대해 ‘이게 국가냐’고 분노하면서 촛불을 든 시민들이 5년도 채 되지 않아서 정권 교체를 강하게 요구하고, 석고대죄를 해도 시원찮을 한나라 당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당명만 바꿔서 활개를 치고, 게다가 특수부 검사 출신이 어느 날 갑자기 편집증 환자 같은 수사로 하루아침에 스타가 돼서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는 현실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을 할 수 있을까? 문재인 정권이 과거 명박-근혜로 이어지는 보수당의 실책과 같은 큰 실수를 저질렀거나 나라를 덜어 먹을 만큼 부패한 정권도 아닌데 ‘정권 교체’를 강하게 요구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문재인 정부가 최저 임금을 가파르게 상승시키다 보니 자영업자들에게 부담을 준 측면이 있고, 부동산이 급등함에 따라 적지 않은 국민의 원성을 산 부분이 있지만 그것 자체는 정책적인 실수일 뿐 커다란 실책이라고 볼 수는 없다. 문 대통령이 윤 석열처럼 화끈하게 행동하지는 못해도 늘 노심초사 국민을 생각하면서 정치를 한 노고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적인 자질이나 자격 면에서 크게 부족한 윤 석열이 대선 가도에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러한 대열에는 단순히 태극기 부대나 보수적인 노인네들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기존 정부와 정치에 참여했던 정치인들과 법조인들, 그리고 대학의 지식인들도 대거 참여하고 있다. 과연 이들의 이런 행동에 대해 아렌트처럼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것이라고 딱지를 붙일 수 있을까? 만약 그렇게 단순화시킨다면 본질을 크게 벗어난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세력들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꼴 보수의 경우처럼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지지하는 세력이 있다. 이들은 진영 논리에 나포된 경우가 있고, 자신들의 욕망을 진영 논리와 일체화시키는 경우가 있다. 몽골의 초원에서 경험한 것이다. 어린아이 한 두 명이 수많은 양떼들을 몰고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양들의 정신이 아이의 정신에 의해 나포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나치를 지지하던 수 많은 동조자들은 이런 식으로 히틀러의 나치에 의해 정신적으로 나포되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다. 이런 현상은 멀리 갈 것도 없이 트럼프 체제하에서도 별로 다르지 않게 나타나기도 했다. ‘영혼이 없는 대중’이란 바로 이들을 가리키는 적절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진영 논리에 자신의 정체성을 일치시켜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세력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보수적 욕망의 대리인이나 대변자를 윤석열과 국민의 힘에서 찾고 있는데, 이처럼 정치가 원시적 욕망에 기대는 순간 부패하고 타락한 예는 역사적으로 많다. 한국의 보수는 보수 본래의 가치를 존중하고 고수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 것 -내 가족, 내 아파트, 내 진영 등-을 지키려는 원시적 욕구를 우선시 하는 데서 더 정체성을 찾기가 쉽다. 보수의 정치 평론가 조 갑제가 올바로 이야기했듯, 한국의 보수는 ‘가진 게 돈 뿐’이란 말이 보수의 탐욕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물론 이런 욕구가 한국 경제의 성장에 큰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정치적 차원에서의 효과는 정반대다. 이런 원시적 욕망이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해주기 때문에 그들을 대변하는 국민의 힘 당과 정치 초년병인 윤 석열을 앞세우려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상황에 따라 양쪽 진영을 오락가락하는 이른바 회색 집단의 경우가 있다. 이들이 과거 일말의 양심으로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섰는 지는 몰라도 지금 이들은 기득권을 위협한다는 명분하에 탐욕적인 보수의 뒷전으로 숨고 있다. 지식인 집단과 같은 하이 클래스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들도 윤 석열이 세계 10권 안에 든 대한민국 호를 이끌기에는 자질이나 자격 면에서 크게 부족하다는 것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윤 석열의 지지 대열에 서는 것은 양심을 지키기에는 그들의 도덕적 의지가 미약한 탓이 크기 때문이다. 과거 독일에서 히틀러가 등장할 때 가장 지적으로 우수한 독일의 지성인 집단이 보여준 행태가 이와 비슷하다. 그들은 아렌트가 지적한 것처럼 생각 없이 행동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히틀러 체제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인식했지만 그것을 비판하기에는 자신들이 입게 될 불이익에 대한 정서적 두려움과 이성적 고려를 더 중시하는 세력이다. 한 마디로 자신들의 알량한 양심을 지키기에 필요한 전사들의 용기가 너무나 부족한 세력이다. 이런 자신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감추려고 막무가내 정권 교체의 명분을 내세워서 자신들이 보기에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윤 석열을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지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윤 석열에 대한 그들의 지지와 동조는 기득권 세력이 보일 수 있는 가장 비겁하고 부끄러운 행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 히틀러 체제하에서 보여주었던 지식인 집단의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출처: Daum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73869#photoId=972168

아렌트가 말한 것과 다르게 ‘생각 없는 행동’이나 ‘제대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악은 단순히 선의 부재가 아니라 적극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훨씬 더 이기적이고 교활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선과 악을 결단하는 삶의 매 순간에서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려는 선의지와 그것을 관철시키려는 전사의 용기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의지와 전사의 용기야말로 플라톤과 칸트가 강조해 마지않았던 도덕의 본질이고 도덕적 인간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덕목을 외면하는 자가 대한민국의 미래의 지도자가 될 수는 없다.

필자: 이종철 철학박사

출처 : 내외신문(http://www.naeway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2083)

 

필자의 다른 글

“사랑은 아무나 하나”….한 나라의 대통령을 아무나 할 수 있는가?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 아래 글은 2022년 2월 23일 <내외 신문>(http://www.naewaynews.com/) [이종철 칼럼]에 게재된 기사임을 밝힙니다. <ⓔ 시대와 철학>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코너에 게재를 허락한 필자와 <내외 신문> 측에 감사드립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한 나라의 대통령을 아무나 할 수 있는가?

 

이종철(연세대)

 

  • 사랑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서로 눈이 맞고, 기쁨과 슬픈 히스토리를 함께 만들어나갈 때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

 

“사랑은 아무나 하나”

 

오래전 유행하던 노래가 하나 있다. 가수 태진아가 간드러지게 몸을 흔들면서 불렀던 노래이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눈이라도 마주쳐야지

만남의 기쁨도 이별의 아픔도

두 사람이 만드는 걸

 

어느 세월에 너와 내가 만나

점 하나를 찍을까

사랑은 아무나 하나

어느 누가 쉽다고 했나”

 

사랑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서로 눈이 맞고, 기쁨과 슬픈 히스토리를 함께 만들어나갈 때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개인들 간의 사랑도 그럴진대, 하물며 한 나라의 대통령을 아무나 할 수 있는가? 일국의 지도자를 어중이 떠중이가 맡을 수는 없을 것이다. 지도자가 되려면 그만한 역량과 노력이 있어야 하고, 국민에 대한 애정과 헌신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 한국 정치사를 되돌아보면 그런 덕을 쌓고서도 대권을 앞에 두고서 좌절한 정치인들이 수도 없이 많다. “면장이라도 하려면 논두렁 정기라도 받아야 한다”고 하는데 하물며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는 일은 훨씬 그렇다. 그런데 그런 노력 없이, 그리고 역량에 대한 검증도 없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유력한 야당의 대선 후보로 등장을 하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그것도 행정이나 정치에 문외한으로 일방통행을 일삼는 특수부 검사에서 평생 경력을 쌓은 사람이 마른 하늘에 번개치듯 대권 후보로 등장하는 현실이 과연 정상일까? 조선 시대도 아닌데, 어리벙벙한 강화도령을 데려다가 임금이라고 앉혀 놓을 수 있을까? 정치가 코메디인가, 가수왕을 선발하는 것인가? 대통령 자리는 경험을 쌓고 역량에 대한 테스트를 하는 자리가 아니다. 대통령은 지금까지 쌓은 역량을 최고로 발휘해서 국리민복을 위해 봉사하는 최고 지도자의 자리다.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는 순간 그의 능력과 역량에 대한 불신 때문에 국정은 대혼란에 빠질 수 있다. 도대체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공화국』에서 ‘철학자 왕을 주장한 것은 유명하다. 플라톤에 따르면 일국의 지도가 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부문에서 무수한 훈련을 거친 다음, 최종적으로 인간과 세계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는 변증법(Dialectic)도 공부를 해야 한다. 그만큼 이론과 실천에 대한 경험과 학습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도자는 누구보다 공을 앞세우고 사를 부정해야 하기 때문에 극단적인 ‘처자 공유제’까지 주장을 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당시에도 너무나 급진적으로 받아들여져서 플라톤 자신도 후기에는 포기했다.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은 동양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전통적으로 중국에서는 왕이 되는 과정에서 제왕학을 필수적으로 학습하고 엄격한 수련을 거치는 것은 왕의 비중과 역할이 일국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데 크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의 경우처럼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의 지위를 세습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인위적으로 키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본인이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그만한 경험을 쌓고 그만한 역량을 키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윤석열은 이러한 일반적 기준에 미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첫째 앞서도 지적했듯, 그는 정치나 행정과는 전혀 무관한 특수부 검사에서 경력을 쌓았고, 그런 경력으로 인해 고속 승진을 해왔으며, 마침내 조국 일가를 도륙하는 고도의 편파적 수사로 일약 스타가 된 인물이다. 특정한 사건으로 인해 스타가 되는 경우는 연예계나 스포츠계에서는 가능할지 몰라도 정치에서는 없지는 않아도 힘든 경우다. 게다가 검사는 대화 상대가 있는 변호사나 사건 전체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판사와도 다르게 자신들이 세운 수사 기획에 따라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집단이다. 물론 그들이 법정에서 변호사와 공방을 벌인다할지라도 그들이 유명세를 타는 것은 법정이 아니라 수사 현장과 그 과정에서 일 뿐이다. 만일 이런 식으로 국정을 처리한다면 과거 유신 독재나 군사 독재와 비슷한 검찰 독재가 가능할 때와 비슷해질 것이다. 윤석열의 정치에 대해 우려하는 많은 사람들이 ‘검찰 공화국’ 운운하는 것은 전혀 근거 없는 말이 아니다. 지금은 한낱 우려일지 몰라도 그가 대통령이 된다면 그것은 재앙으로 판명될 것이다. 때문에 일시적인 인기에 편승해서 정치인 행세하는 것이나 아무런 검증도 거치지 않은 인물에 환호하는 것은 전형적인 파퓰리즘의 형태나 다름없다.

둘째, 윤석열에 대한 이런 우려는 실제로 그가 지난 몇 개월 동안 보여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더욱 설득력 있게 드러나고 있다. 여러 공개적인 장소에서 시선을 한 곳에 집중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고개를 흔드는 동작을 반복하는 행위는 차라리 애교로 봐줄 수 있다. 윤석열의 캠프 안에서도 이에 대한 지적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바꾸라는 충고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는 것을 보면 그는 타인의 충고에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는 독선적 성격의 소유자일 가능성이 높고, 자신의 좁은 식견이나 시야에 대해 별로 반성하지 않는 소아병 환자일 가능성도 높다. 겸손한 사람일수록 먼저 자신을 되돌아보고 문제가 있을 경우 기꺼이 고치려 드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이처럼 독선과 아집에 빠진 자가 최고 권력자로 독주한다면 그다음은 상상하기도 두려울 정도다. 이미 그는 조국 일가에 대한 수사를 할 때 거의 편집병 환자처럼 이 잡듯 수사를 단행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수사를 보고 ‘도륙’이라는 표현까지 쓴 것은 검찰 수사가 한 가정을 파탄낼만큼 편파적이고 참혹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 사건을 지켜보면서 수많은 사람들은 “아, 저런 식의 수사가 나에게도 닥칠 수 있겠구나”라는 두려움과 공감 때문에 서초동 검찰 청사 앞에 몰려와 ‘조국수호’를 외친 것이다. 왜 이런 단순한 진실을 외면하려 하는가? 이것은 대통령을 선출하는 문제와 상관없이 인륜의 파괴이고 심각한 정의의 손상인 것이다. 이것을 정당한 수사권 행사 운운하는 작자들은 지옥의 사자나 다름없다. 21세기 민주주의 국가에서 요구하는 지도자는 외골수 편집증 환자가 아니라 진정으로 국민과 소통하면서 대화와 설득을 시도하고 타협을 하고자 하는 건전한 이성의 소유자이다. 과거 김대중 대통령이나 얼마 전 물러난 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하나의 전범이 될 수 있다.

셋째, 정치 지도자로서 윤석열의 경험이나 경륜, 그리고 자질이 부족한 현상은 여러 가지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그는 여전히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남북 관계의 위험에 대해 일반인 정도의 상식도 없이 ‘선제 타격’을 말했다. 그는 과거 한국 정치의 쓰라린 상처와 고통을 치유하기보다는 오히려 다음 정권하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식으로 ‘정치 보복’을 시사하기도 했다. 대중과 소통하는 민주적 훈련을 받지 못한 그는 대중 앞에서 카메라를 받고서 수 분 동안 말을 하지 못한 채 침묵함으로써 그를 지켜보는 국민들에게 트라우마를 안겨 주기도 했다. 그는 이해관계가 다양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토론을 부정하는 투의 말을 하면서 외면하기도 했고, 실제로 토론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최소한의 기본조차 의심될 만큼 무지를 거침없이 드러냈고, 이를 안하무인 격으로 오만하게 치부하는 태도도 보여주었다.

도대체 이처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일시적인 인기 하나로 대통령을 꿈꾼다는 것 자체가 21세기에 가능할 법한가? 이것은 여와 야를 떠나서 세계 10대 강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호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서도 절대 인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한다. 지금은 한낱 우려에 지나지 않을지 몰라도 그것이 현실이 되는 순간 대재앙으로 나타날 것이다. 바로 이전의 박근혜 정권의 몰락을 추운 겨울날 거리에서 분노했던 심정을 벌써 다 잊었는가? 한 번의 실수는 병가지상사라지만 두 번의 실수를 거듭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종철 철학박사

출처 : 내외신문(http://www.naeway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1841&fbclid=IwAR1VQ9170rHHuz5yyex_vBhuOgPk6g2UgxGaaG2XadjeMNi1NPCNIQhvAoQ)

여우가 무서워 피했더니 호랑이를 만나다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 아래 글은 2022년 2월 20일 <내외 신문>(http://www.naewaynews.com/) [이종철 칼럼]에 게재된 기사임을 밝힙니다. <ⓔ 시대와 철학>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코너에 게재를 허락한 필자와 <내외 신문> 측에 감사드립니다.

 

여우가 무서워 피했더니 호랑이를 만나다

 

이종철(연세대)

 

이번 대선은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박근혜 정부의 실정을 탄핵하기 위해 추운 겨울 날 촛불을 들고 나섰던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다시 현 정권 교체를 요구하는 드라이브가 아주 강력하기 때문이다. 아직 5년도 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실정으로 퇴진한 정부를 다시 지지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가능할까? 퇴진한 당이 그 사이 분골쇄신했다는 이야기도 없이 구태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요상한 수수께끼라고 해도 이상하지가 않을 정도이다. 아마도 이렇게 된 데는 강력한 기대를 걸었던 문 정권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실망이 컸기 때문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하지만 지난 4년 동안 국민의 기대에 미흡한 면이 있을지 몰라도 문 정권이 크게 실정한 것은 없다. 그럼에도 정권 교체를 강하게 원한다는 데는 아마 다른 이유가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 중 하나는 조국 사태 거치면서 민주당 기득권 세력의 안하무인격 내로남불에 대한 실망과 함께 그 *이 그 * 아닌가라는 판단이 있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역시 조국 사태가 키운 불씨지만, 헤성처럼 등장한 윤 석열을 영웅시하는 분위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나는 이 두 가지가 다 잘못 판단한 것으로 보고, 정권 교체라는 것도 허구에 지나지 않다는 것임을 주장하고자 한다.

첫째, 조국의 처가 자식을 위해 동양대 문서를 위조한 사실 관계는 이미 그로 인해 대법원 판결을 받아 4년 징역형을 받았으니까 그것 자체를 변호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수사 당시부터 문제가 되었지만 엄청난 인력과 자원을 투입한 것 까지는 인정해준다 해도. 별건 수사로 저인망 훑듯 표적 수사한 결과는 너무나 초라한 것이다. 대학의 입시 당국도 별로 의미 부여를 하지 않는 표창장 하나로 기소를 한 것은 지나가던 소도 웃을 일이다. 이런 식의 수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들이 누가 있을까? 이는 법을 앞세운 횡포나 다름없다. 요리를 하라고 칼을 쥐어 주었더니 뒷골목의 강도로 돌변한 것과 다르지 않다. 사정이 그렇다고 한다면 박사학위 논문을 표절하고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혐의를 받고 있는 처 김건희나 의료보험료를 부정 수급하고 통장 잔고를 위조한 혐의로 재판이 진행중인 장모의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그렇게 관대할 수 있을까? 내로 남불이 따로 없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원칙은 근대 법치주의의 기본 정신이다. 하지만 법은 추상적인 원리와 원칙만을 천명하고 있기 때문에 법 자체가 평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법을 다루는 수사기관들이나 법원은 다른 누구들보다 공정성을 위배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형평의 저울을 사법부의 상징으로 삼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조국 일가를 도륙할 때의 검찰의 태도는 과잉을 넘어서 위법적 수준까지 넘나든 정도이다. 그래 놓고도 법을 앞세우니 국민들이 법에 대해, 그리고 사법 기관에 대해 극도의 불신감을 갖는 것이다. 내로 남불이 따로 없고,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식으로 법이 운용된다면 누가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조국 가족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대표적인 공정성 파괴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데 그 책임을 조국 전 장관에게만 미룬 것은 이른바 기득권 보수 신문들이 씌워 놓은 프레임일 뿐이다. 현명한 국민은 반드시 이런 진실을 올바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윤 석열 자신도 공공연하게 이야기하듯 자신을 키운 것은 조국이라고 이야기했다. 그가 검찰에서 수사 검사로 명망이 높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름의 영향권은 제한되어 있다. 그런데 조국 사건을 진행하면서 전국적 인물로 등장했고, 이제는 한 나라의 대권을 다투는 유력한 야당의 대표가 되었다. 이쯤 되면 “개천에서 용난다”는 정도를 넘어서 일약 스타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다. 보수 신문들은 이런 현상을 보면서 약삭빠르게 그를 대권 후보로 치켜 세웠고, 문 정권의 미지근한 태도에 실망한 국민들은 그를 난세를 구할 수 영웅으로 떠 받들기 시작했다. 이런 열풍이 마침내 “차기 대통령은 윤석열이다”는 신화를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윤석열이 그만한 인물이 될 수 있을까? 그를 한 커풀만 벗겨 보아도 이런 신화가 허구적이고 기만적임을 알 수 있다.

앞서도 지적했듯, 검찰 수사를 지휘한 윤석열의 태도는 공정성을 크게 위반한 대표적인 형태이다. 그는 검찰을 바로 세워 달라는 문 대통령의 기대를 저버린 채 엉뚱하게 조국 수사의 파문을 일으키면서 엄청난 물량과 인적 자원을 투입했다. 만일 이런 식으로 개별 수사를 진행한다면 검찰청이 백 개가 되어도 범죄 수사를 제대로 단행할 수 없을 것이다. 때문에 수사 기관은 한정된 자원과 인력을 합당한 사건의 성격에 맞추어 어떻게 효율적으로 배치를 할 것 인지를 고심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조국 사태처럼 무대포식의 수사는 공정성의 위배이자 판단력의 부족이라 할 수 밖에 없다.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개입된 수상한 수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일국의 대통령이 이렇게 공정성과 형평성을 상실하고 편벽된 통치를 한다면 그 나라의 미래가 불행하게 마감한 박근혜 정부 이상으로 파행을 거듭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대체로 이런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의 유형이 있다. 경험이 작은 우물안 개구리일 수록 그저 자기가 믿는 세상이 세상 자체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오랫동안 검찰의 특수부에서 활동해온 윤석열의 좁은 시야가 그렇다. 게다가 그의 행동은 오래전 TV 드라마에서도 보여졌던 우직한 돌쇠 이상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일단 결정하면 ‘앞으로 돌격!’하는 돌쇠의 우직함이 있었기 때문에 그처럼 공정성을 크게 위반한 수사를 단행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이런 사람이 일국의 대통령이 될 경우 그 앞날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윤석열은 이미 선거 과정에서도 위험한 발언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대표적으로 그가 말한 ‘선제 타격’은 한반도의 특수한 남북간 군사적 대치상황을 감안한다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 수가 있다. 게다가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 이런 발언을 했다고 한다면 “무식한 자가 용감하다”는 위험한 인물에게 나라의 명운을 맡기는 도박이나 다름이 없다.

지금 대한민국은 기로점에 서 있다. 미래로 나아갈 것인가, 과거에 발목 잡힐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중요한 시점이 지금이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지도자가 되는냐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과거 승승장구하던 대한민국 경제가 IMF를 당했을 때 많은 전문가들은 한국경제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면서 앞으로 20년은 더 걸려야 IMF 체제를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새로 정부를 맡은 김대중은 대한민국을 이런 위기로부터 벗어나게 했을 뿐더러 미래 성장과 통일을 위한 발판도 마련했다. 덕분에 한국은 몇 년 지나지 않아 IMF 체제를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고 한국 경제도 새로운 도약 단계를 맞이할 수 있었다. 그만큼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통독 후 독일이 유럽의 중심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메르켈이라는 걸출한 여성 지도자의 역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현재의 한국은 그와 비슷한 상황에 있다. 문재인 정부가 촛불 혁명의 결실을 거두지 못한 점에 대해 충분히 실망할 수는 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국민들과의 약속을 수행하기 위해 성실하게 노력을 해온 것은 사실이다. 이런 문재인 정부에 대해 실망을 했다고 해서 과거의 실정에 대한 반성 여부도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치인으로 전혀 검증이 되지 않은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내세운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도박이나 다름이 없다.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다”는 말은 그저 하기 좋은 표현이 아니다.

 

출처 : 내외신문(http://www.naeway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1686&fbclid=IwAR0nnJ7mLI2WoRKUU73RjH8uMAwyZgVWUBEBdcYh8n_iBZUaekmtGqhhw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