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열정 또는 광기의 줄다리기[시대와 철학]

월드컵, 열정 또는 광기의 줄다리기[시대와 철학]

박민철(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하나의 유령,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이 유명한 알레고리를 다시금 떠올리는 이유는 다음과 같이 바꿀 수 있을 듯해서이다. ‘하나의 유령, 붉은 악마라는 유령이 한반도를 떠돌고 있다.’ 붉은색이라면 마치 알레르기처럼 민감하게 반응하던 나라에서 붉은색이 현 시기를 상징하는 색이 되어버렸다는 점을 볼 때, 이 유령은 19세기 초 유럽을 뒤흔들던 공산주의만큼이나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다.

전자의 알레고리는 그 동안 굉장히 많이 인용되어온 맑스의 말이다. 그는 19세기 당시 ‘공산주의’에 대한 전 유럽의 적대적 반응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런데 최근 대한민국의 상황은 이와 좀 다르다. 이 유령에 대한, 즉 월드컵에 대한 광적인 열광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이 광적인 열광은 지나치게 뜨겁게 느껴지고, 그만큼 위험해 보인다. 거대한 열광의 흐름에 순응하지 못하는 마이너리티의 자괴감인지 아니면 열광적인 응원이 요구하는 강요가 싫어서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이 불편한 감정은 맑스의 목소리가 전달하는 그것과 다르지 않다.

월드컵에 대한 불순한 생각들

 

박노자는 월드컵에 대한 한국인들의 열광에서 파시즘의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이 불순한 발언들로 인해 그는 큰 곤욕을 치러야만 했지만, 그의 말은 ‘정확하게 얘기해서’ 맞는 얘기다. 역사적 사실이 이것을 증명한다. 예컨대 무쏠리니는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파시즘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했다. 시간이 지나도 이 고유한 틀은 남아 있다.

월드컵 경기는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의 총성 없는 전쟁으로 묘사되고, 그 속에서 우리 유령들은 ‘우리나라’인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인 그리스,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를 밟아주길 고대한다. 이러한 ‘배타적 민족주의와 강한 애국주의를 부추기는 월드컵’이라는 의견은 월드컵에 대한 불순한 생각들 중 하나이다.

또한 월드컵을 거대자본의 논리에 물든 공허한 행사로 바라보는 불순한 의견도 있다. 쉽게 알 수 있듯이, 수 십 개의 월드컵 공식 후원기업이 있고, 그들의 광고는 월드컵 경기장 안의 광고판에서 뿐만 아니라 띄엄띄엄 주어지는 쉬는 시간에 TV를 통해서도 보여진다. 거대 기업들은 월드컵에 대한 열정 속에 은밀하고 치밀하게 자본의 논리를 집어넣는다. 그 결과, 월드컵에 대한 열정은 자본에 희석되고 마침내 자본을 위해서 열정이 존재하는 전도된 상황에 놓이고야 만다.

기업들은 점점 더 우리의 열정을 조장한다. 그래서 우리는 최신 과학기술의 집합체로 여겨지는 월드컵 공인구가 사실상 제 3세계 어린 아이들의 절실한 바느질로 탄생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즉 스포츠는 이제 그 고유한 순수성을 잃고 거대산업자본의 논리에 따라 이윤을 창출하는 대리체로 전락하고 만다.

이 관점에서는 월드컵에 대한 대한민국의 열광 역시 체제화된 자본의 논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자본주의적으로 코드화된 열광인 것이다. 예컨대, 서울 광장에서의 거리 응원전만 하더라도 월드컵의 후원기업인 현대자동자의 주관과 SK의 참여로 이루어지지 않는가.

이 밖에도 고리타분한 이야기일수도 있지만, 월드컵은 국가권력의 스포츠를 통한 우민화 장치라는 불순한 의견도 있다. 이것 역시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천안함 사건, 4대강 사업, 사회적 자본의 민영화 등과 같은 굵직굵직한 국가적 관심사들은 온갖 미디어가 주야장천 보도하는 월드컵의 내용에 묻혀 잊혀져버렸다. 월드컵의 열광적인 분위기를 조장하는 국가권력의 작업 속에서 우리들의 관심은 온통 월드컵에만 쏠려있다. 결과적으로 월드컵에 대한 대한민국의 열광에는 이러한 국가적 관심사에 대한 무관심이 수반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순한 생각들을 통해 규정한 월드컵의 성격을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것일까? 누군가에겐 월드컵이 배타적 민족주의의 선동방법이며 누군가에겐 거대한 자본의 시장이며, 누군가에겐 국가권력의 지배 장치임을 다시금 지적하고 강조하는 건 이제 별 쓸모가 없을 듯하다. 사람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진부하다고 생각하여 개의치 않거나, ‘그래서 어쩌라구? 내가 좋아서 하는 건데.’라는 식의 반응들을 보여줄 뿐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관점들은 ‘월드컵에 대한 나의 자발적인 참여’ 부분을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월드컵을 미시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월드컵 행사 자체의 성격에 대한 거시적인 논의보다는, 월드컵에 대한 사람들의 자발적인 열광을 인정하고 그 열광을 추동하는 우리들의 욕망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필요하다.

일탈의 욕망이 부추기는 강요된 열광

 

월드컵에 대한 미시적 관점은 내가 응원하고 있는 나라가 이기길 바라는 ‘욕망’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미시적 관점은, 예컨대 파시즘에 동조하고 파시즘을 만들어가는 대중의 심리적 과정을 욕망과 관련시켜 분석한 빌헬름 라이히의 방식처럼, 월드컵과 월드컵 응원에 대한 우리들의 열광이 어떻게 배타적인 민족주의와 공명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런데 조금 더 미시적으로 들어가서 월드컵에 대한 열광, 그 열광을 부추기는 우리들의 욕망 자체를 알아보는 것이 더 절실해 보인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에서 월드컵에 대한 열광은, 거리응원을 위해 유아기에 벗어던진 기저귀를 다시 차며 16강 진출의 감격을 한강 투신으로 표현하듯 이제 광적인 상태로 들어섰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16강 진출을 확정지은 6월 23일 새벽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대한민국을 소리쳐 외치며, 입간판을 발로 차고, 온갖 괴성을 질러댔다. 이것은 마치 답답한 일상을 벗어나려고 하는 개개인의 욕망이 표현되는 것처럼 보인다. 도덕, 법, 성별, 나이, 정파, 계급, 신분, 지역 등의 정해진 틀과 그 틀에 의한 구속은 인간 개개인의 마음속에서 일탈의 욕망이 자라게 한다. 그리고 모든 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하나로 어울리고픈’ 강렬한 열망을 추동한다.

다시 말해 월드컵에 대한 광적인 응원은 정해진 틀과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일탈의 욕망이 현상적으로 가장 농도 짙게 표현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탈의 욕망에서 무엇이 문제가 될 수 있는가? 일탈의 욕망이 추동하여 생긴, 자유롭게 서로 어울리고픈 강렬한 열망은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첫째는, 일탈의 욕망 그 자체가 갖는 ‘무의미함’과 ‘거짓됨’이며, 둘째는 ‘자유롭게 서로 어울리고픈 강렬한 열망’이 역설적으로 포함하게 되는 ‘강제성’과 ‘유아성’이다.

일탈의 욕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욕망 자체가 아니라 일탈이다. 욕망이 중심에 설정된 것이 아니라 일탈이 중심에 설정되어 있다. 여기서는 일탈이 목적이고 욕망은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이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월드컵의 광적인 열광을 추동하는 욕망은 가타리의 말처럼 ‘탈 영토화되고 탈 영토화하는 유목적 욕망’의 해방적 가능성으로만 그려질 순 없다.

욕망이 중심에 설정되고 그것에 맞는 내용과 특징, 의미 등이 수반될 때에만 욕망 자체가 담보하고 있는 해방과 자유의 가능성에 주목할 수 있다. 욕망이 중심이 아닌 경우 ‘내’가 있을 공간이 없게 되어 욕망의 표현은 무의미한 반복행위로 전락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해방과 자유의 가능성인 욕망의 고유한 흐름 역시 고정된 틀에 갇히게 된다.

월드컵의 광적인 열광에 주목했던 우리들은 2002년 이후 그것이 어떠한 자유와 해방의 가능성으로도 표현되지 않았던 사실에 실망하지 않았던가.

또한 욕망이 포함하는 내용, 특징, 의미 등이 수반되지 않을 경우, 그것은 유사(類似)욕망, 또는 거짓욕망의 모습을 띠게 된다. 이것이 욕망의 내용과 특징, 의미 등에 대한 강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욕망이 특정한 시점에 마주하게 되는 내용, 특징, 의미 등을 도외시하고, 욕망을 단순히 일탈에만 고정시킨다면, 생생한 흐름과 역동적인 가능성을 내포하는 욕망은 단순한 일탈의 수단과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월드컵 16강 진출을 축하하기 위해 한강에 뛰어든 사람들처럼, 거짓욕망은 극단적인 욕망 분출 행위로 나타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일탈의 욕망이 추동하는 ‘자유롭게 서로 어울리고픈 강렬한 열망’은 반대로 ‘자유롭지도 못하고 서로 어울리지도 못하는 열망’으로 변하게 된다.

일탈의 욕망은 일탈이라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정해진 틀과 구속으로부터 탈출하지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일탈의 욕망은 이내 자본, 국가권력, 미디어가 정해놓은 강요된 공간속으로 ‘자유롭게 서로 어울리고픈 강렬한 열망’을 밀어 넣는다. 즉 일탈의 욕망은 자신의 고유한 자유로움 속에 있지 못하고 다시금 정해진 틀과 구속에 의해 자리 잡혀지게 되면서 역설적이게도 ‘강제성’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일탈의 욕망은 내 의지와 욕망과는 상관없이 월드컵에 열광케 하고, 나아가 그 열광에 속하지 못하는 사람을 마치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매국노이거나 놀 줄 모르는 숙맥이거나 특이한 돌연변이로 취급한다. 그리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붉은 옷을 걸치고 ‘대~한민국!!’이라는 공허한 구호를 외치도록 강요한다.

이러한 강요된 열광과 함께, 일탈을 욕망하는 주체들은 각 개인들이 보여줄 수 있는 해방과 자유의 가능성을 잃게 되고, 고립되고 독선적인 주체로 전락하게 된다. 월드컵의 광적인 열광 속에서는 타자의 욕망이 자리 잡을 공간이 없다. 거짓욕망의 거대한 장에서 타인의 특수한 욕망은 거짓욕망의 블라인드에 갇히게 되고, 단 하나의 욕망만이 허용될 뿐이다. 여기에는 ‘응원의’, ‘응원에 의한’, ‘응원을 위한’ 욕망만이 허용된다.

이 절대적인 강제성으로 인해 타자의 욕망이 자리 잡을 공간이 없어지게 되면서 동시에 타자의 존재성, 타자의 타자성 역시 고려될 공간이 없다. 즉, 월드컵에 대한 광적인 응원에는 주위 사람들의 존재를 배려하도록 허용된 공간이 없다. 기간의 과정을 살펴보면, 무의미하고 거짓된 일탈의 욕망은 독선적이고 강압적인 열광을 낳았고, 그것이 우려스럽게도 대한민국의 광적인 응원으로 나타나고 있는 건 아닐까.

일탈의 욕망에서 욕망의 일탈로. 욕망의 상호인정으로서 월드컵

 

월드컵 기간 대한민국에서 나타난 광적인 열광은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욕망이 지닌 특수한 조건들을 인식함으로써 극복될 수 있다. 이것은 일탈의 욕망을 ‘욕망의 일탈’로 바꾸는 것에서 가능할 것이다. 욕망의 일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일탈이 아니라 욕망 그 자체이다. 욕망 그 자체가 목적이고 일탈은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욕망의 일탈에는 ‘욕망하는 내’가 중심에 있다.

욕망이 시작되는 최소한의 출발지점으로서 ‘나’는 내 삶을 규정하는 최소한의 내용, 특징, 의미 등을 가지고 있다. 이제 내 삶의 내용과 특징, 의미를 통해 규정된 ‘나’의 욕망은 일탈이라는 과정을 통해 보다 다양한 내용과 의미 등을 담보하게 된다. 예컨대 일탈의 욕망이 광적인 월드컵 응원에서 그 목적을 다하게 된다면, 욕망의 일탈은 단순히 월드컵만을 위한 광적인 응원을 넘어서 일탈이라는 수단을 통해 금지된 다양한 의미와 가치 등을 욕구하게 된다.

또한 욕망의 일탈에는 타인과 타인의 욕망을 향한 배려가 자리 잡을 공간이 있다. 나의 욕망은 본질적으로 대상, 객체, 타자와의 매개를 통해 충족되기 때문이다. 욕망의 충족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타자가 요구된다는 것은 내 욕망이 충족되기 위해선 타인의 욕망도 충족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때 타인의 욕망을 인정하면서 나의 욕망도 인정받게 되는 욕망의 상호인정이 가능하다. 욕망의 일탈이 추동하는 욕망의 상호인정 가능성은 일탈의 욕망이 갖지 못한 소통과 해방, 자유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우리들의 강요된 열광을 조직하는 환상적인 틀, 즉 국가, 자본, 미디어로부터 최소한의 거리를 유지하고 이것들의 영향을 제한할 수 있는 토대는 바로 일탈의 욕망을 욕망의 일탈로 전환했을 때 마련된다. 즉 우리자신들의 욕망이 갖는 특수한 조건들을 인식할 때, 욕망이 갖는 해방의 가능성은 마련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탈의 욕망을 욕망의 일탈로 바꾸는 것을 통해 월드컵은 ‘우리인 나, 나인 우리’를 가능하게 해주는 하나의 사건이 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적으로 동참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필요하다. 내 욕망의 조건들 속에는 타인의 욕망이 전제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개인적인 각성 차원의 문제만은 아니다. 월드컵에 동참하지 않거나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사회적 차원의 공간을 마련해줘야만 한다.

‘붉은 악마’는 더 이상 ‘붉은 악마’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색을 담을 수 있는 ‘회색 악마’가 되어야 한다. 또한 욕망의 일탈이 유지되기 위해선 우리들의 욕망이 갖는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 우리들의 순수한 욕망을 지키기 위해선 거대기업과 자본이 유도하는 거리응원도, 국가권력이 정해놓은 서울광장도, 미디어의 온갖 부추김도 단호하게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자본, 국가, 미디어를 향해 이제 그만 사라져 주길 요구해야만 한다.

어쩌면 우리들은 월드컵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통해서 그 동안 떨어져있던 타인을 부둥켜안고 싶어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철저한 개인주의 사회에서 서로가 소통하고자 하는 몸부림. 극단적인 애정결핍의 또 다른 반작용으로서 타인과 부대끼고 싶어 하는 몸부림. 다시 말해 애초부터 이미 우리들은 월드컵을 통해 욕망의 일탈을 꿈꾸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6.2 지방선거와 지식인의 역할 [시대와 철학]

6.2 지방선거와 지식인의 역할 [시대와 철학]

이성백(시립대 교수)

 

6.2 지방선거의 정치적 의미

 

지방선거가 며칠 앞으로 바싹 다가왔다. 이번 지방선거에는 다른 때보다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번 선거가 갖는 중요성은 무엇보다도 MB정부와 한나라당에 대한 국민의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데에 있다. 지난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MB정부는 정말 엄청나게 많은 ‘일’을 벌여왔다. MB정부가 보여온 반민주적이고 반민중적인 정치적 행태들에 대해서는 이미 국민들 스스로 충분히 겪어왔기 때문에 여기에서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자리를 빌어 한 가지 언급하자면, 지난 2년간의 MB정부와 한나라당의 모습은 한국의 보수지배세력의 현주소가 어디인지를 확인시켜주었다는 것이다. 한국사회가 형식적인 수준에서나마 정치적 민주화가 이루어져 오는 동안 보수지배세력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이들은 민주사회의 일원으로 성숙하지 못했고, 군사독재 시절부터 몸에 밴 반민주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하비투스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였다.

‘잃어버린 10년’ 동안 한국의 보수세력은 지배계급이 갖추어야 할 인격적, 사회적, 문화적 지도력을 하나도 갖추지 않았다. “큰집에서 조인트 깠다”는 K씨의 물의를 빚은 발언은 바로 이런 사실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서구의 부르주아가 기득권을 지키려는 반민주적 보수세력인 귀족계급에 대항하여 민주주의를 주도했다면, 한국의 부르주아는 보수반동적인 반민주적 세력이 되고 있다. 지난 2년 동안의 MB정부의 정치적 행태들은 단지 MB와 그에 의해 동원된 특정 정치집단들에 의해 빚어진 보수세력 일부의 파행이 아니라, 한국 부르주아의 보수적 반민주성이 전면에 드러난 것이다.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비겁한 정치보복, 국민을 국민으로 여기지 않는 용산참사에서의 공권력의 폭력성, KBS와 MBC를 위시한 언론 장악과정의 치졸함,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검찰의 부도덕함, 이런 것들을 보면서 어떻게 한국 지배세력의 수준이 이것밖에 안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번 지방선거에 국민의 관심이 늘어나게 된 또 하나의 계기는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의 무상급식이 몰고 온 사회적 파장이다. 교육감 선거도 같이 실시되는 이번 지방선거는 친환경 무상급식이 최대의 정책적 쟁점으로 부각되면서 국민들의 선거에 대한 관심을 끌어모으고 있다. 무상급식을 좌파의 정책이라고 비난하던 한나라당마저 선거공약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될 정도로 무상급식이 이번 선거에 몰고 온 사회적 파장은 대단하다.

특히 무상급식은 시장으로부터 복지로 방향을 트는 계기를 제공함으로써 시장과 성장이란 보수적 이데올로기에 대해 이렇다 할 정책적 대안이 없어 고민해왔던 한국의 진보진영에게 앞으로 추구해야 할 이념적이고 정책적인 방향의 첫 물꼬를 터주었다. 무상급식을 시작으로 하여 진보진영은 신자유주의를 넘어 21세기의 새로운 물질적 조건에 부합되는 보편적 분배와 복지 체계를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진보대연합과 좌파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

이번 지방선거를 포함하여 최근 한국의 사회적, 정치적 정세는 한국의 좌파가 유효한 정치세력의 하나로 발돋움하는 호기가 될 수 있다. MB정부의 정치적 무능과 실정으로 한나라당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땅에 떨어졌고, 그렇다고 해서 한나라당에 대한 지지율 하락이 민주당의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참여 정부 시절 정치적으로 분열된 중도파는 조직적으로나 정책적으로나 아직 새로운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민으로부터의 추락된 신뢰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보수파와 중도파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던 정치적 흐름 속에서 생겨난 빈 공간은 좌파 진보세력이 정치적으로 진출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이 될 수 있다.

물론 좌파는 이런 기회를 활용할 수 있는 역량이나 여건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하다. 좌파로서의 정치적 차별성을 부각시키지 못한 채 민주당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한 다 합해도 지지율이 아직 한자리수를 넘지 못하는 소수정파에 불과한 좌파는 조직적으로도 사분오열되어 있다. 민주노동당으로부터 진보신당이 떨어져 나왔으며, 그 외 정치 및 운동 조직들은 조직들대로 따로 움직이고 있다. 현재의 정치적 상황을 좌파가 약진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좌파의 내부적인 재구성이 필요하다. 그 첫 번째가 흩어지고 분열되어 있는 진보세력의 연대의 틀을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진보세력의 연대, 즉 진보대연합은 좌파의 정언명령이다.
이런 필요성이 좌파 내부에서 감지되면서 작년부터 진보대연합을 촉구하는 논의가 가시화되기 시작하였다. 『진보평론』이 녹?보?적 연대를 40호 특집으로 다루면서 좌파의 연대 문제를 제기하였고, 이어서 한국사회포럼과 학술단체협의회가 좌파의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연대 문제를 학술대회의 중심 주제로 삼아 연대에 대한 논의를 공론화시켰다. 연대에 대한 논의가 구체성을 띠면서 좌파 진영의 연대를 구성하기 위해 우선 연구자들부터라도 연대모임을 만들자는 데로 의견이 모아지게 되었고, ‘진보정치세력의 연대를 위한 교수,연구자 모임'(진보교연)이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진보교연은 이번 지방선거를 위해 만들어진 한시적인 모임이 아니라, 선거 이후에도 계속하여 좌파 진영의 연대를 위해 필요한 활동과 사업을 추진해 나갈 것이라 한다. 진보교연은 앞으로 정치 조직이나 현장 운동 조직들과 같은 실천적 조직들과 나란히 하는 연구자들의 이론적인 모임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돌이켜보면 20세기 서구의 좌파운동이 거대한 대중적 물결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회적 헤게모니를 창출하는 데 실패한 것도 정치적 분열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20세기 전반기의 공산주의와 사민주의의 대립이 그러한 것이었고, 후반기 68혁명 시기의 구좌파와 신좌파의 분열이 그러한 것이었다. 80년대 이후 한국의 좌파운동에는 분파주의 의식이 서구보다 더 강하게 작동하였다. 생각과 입장이 다르면 이는 곧 결별로 이어지는 분열 의식이 강하였고, 입장이 다르더라도 서로 차이를 인정하면서 같이 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연대 의식이 취약했다. 좌파의 힘의 원천이 강력한 대중적 연대의 구축에 있다는 것이 좌파 정치의 기본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좌파는 연대가 아니라 분열에 골몰하였고, 그 결과로 사분오열의 처지에 몰리게 되었다.

앞으로 좌파 연구자들이 한국 좌파운동을 위해 해야 할 이론적이고 정책적인 과제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좌파운동의 자기파괴적인 심리적 기제로 작동해 온 분열주의 의식에 대한 비판적인 반성과 연대 의식을 강화하는 담론의 활성화가 가장 기본적인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진보대연합론과 관련하여 가장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문제가 민주대연합과의 관계이다. 여러 사람들이 MB정부와 한나라당에 대한 심판이 현 상황에서 중요하고 따라서 민주대연합이 우선인데, 왜 진보대연합을 주장하는가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좌파 진영 내에서도 아직도 민주대연합이 우선이고, 이를 위해 진보대연합은 뒤로 미루어도 된다는 민주대연합 우선론이 상당히 힘을 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민주대연합과 진보대연합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진보대연합을 하자고 해서 민주대연합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 아니고, 민주대연합에 손상을 입히는 것도 아니다.

좌파는 ‘민주당 2중대’라는 냉소적인 표현에서 보듯이, 그동안 한국 사회의 민주화 운동의 역사 속에서 민주대연합 우선론에 의해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이루지 못했다. 이제 좌파는 더 이상 민주당에 끌려다닐 수 없다. 좌파는 진보대연합을 통해 정치적 입지를 구축해야 하며, 더 이상 끌려다니는 민주대연합이 아니라, 일정한 독자성을 확보하는 민주대연합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좌파대연합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선결과제이고, 그 다음으로 제대로 된 요건을 갖춘 민주대연합의 구성이 가능하다.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의 모색

신자유주의의 시대가 역사의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벌써 미래 저 앞에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것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성숙과 단계가 바로 그것의 몰락이 시작하는 때이다”라는 헤겔의 말은 역사적인 것의 역사성이 가시적 사건으로 드러나는 순간에 그 빛을 발한다. 얼마 전까지 ‘역사의 종언’을 선언하며 절정을 과시하던 신자유주의가 지구적 경제공황을 통해 체제에 균열이 나는 것을 보면서 다시금 우리는 헤겔의 말을 실감하게 된다.

미국의 신자유주의가 한창 절정일 때, 감히 어느 누구도 미국이 망할 때가 오리라고 생각하지 못하였다. 미국이 휘청이고 있는 현재에도 어떤 이는 “그래도 미국인데?”하면서 이 변화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그렇지만 이번 미국의 금융위기는 일시적인 교란이 아니라 그동안 내부적으로 팽창해오던 신자유주의적 축적체제의 구조적 모순이 폭발한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축적체제는 더 이상 그대로 유지될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하였고, 이제 다른 새로운 축적체제로의 전환이 필요하게 되었다. 물론 이 새로운 축적체제는 자본주의적 사회체제 내에서의 것일 수도 있고,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적 사회체제로의 이행의 것일 수도 있다.

이제 좌파도 새로운 전환을 준비할 때가 되었다. 그동안의 수세적 상황을 넘어서 탈신자유주의의 시대를 열어나가는 데에 힘을 모아야 한다. 좌파의 현재 상황은 매우 열악하다. 세력적으로 힘이 미약할 뿐만 아니라, 각 정치와 운동 조직들이 뿔뿔이 흩어져 그 미약한 힘마저 제대로 결집시키지 못하고 있고, 좌파 내지 진보적 이론과 연구 부문의 상황 또한 마찬가지이다. 한때 왕성한 활동을 보이던 진보적 학술단체들은 연구의욕이 위축되어 있고, 이론적 회의주의에 젖어 있다. 진보적이라고 부를 만한 지식인들이 얼마 남아있지 않다. 가장 심각한 것은 진보적 이론 생산을 계승할 후속세대가 거의 단절될 상황에 있다는 것이다.

좌파는 매우 힘겨운 시기를 지내왔다. “당신은 나를 꿈꾸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나 혼자만은 아니야.”라는 이메진의 가사처럼 나 혼자만이 아니라 그래도 내 옆에 나 말고도 한 사람이라도 더 있다는 생각으로 위로하며 힘겹게 버텨왔던 시기였다.

현실은 현실이다. 이런 열악한 현실을 인정하고, 여기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연구해야 할 이론적인 과제들은 많은데 지식인은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할 수 있는 것이라도 해야 한다.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분산되어 있는 연구자들이 모일 수 있는 공동의 공간을 만들어 연구역량을 효율적으로 배치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대안 담론의 생산이라는 전체적 전망 속에서 현재 필요한 이론적이고 정책적인 과제를 공동으로 수행하고 이를 사회적으로 소통시키는 연구 공간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

현실에의 실천적 참여 또한 지식인의 역할이기도 하나, 지식인의 일차적인 역할은 이론적 실천에 있다.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에게는 이제 시작되고 있는 역사적 이행기를 맞이하여 ‘이론적 실천’의 새로운 장을 열어나가야 하는 과제가 부과되고 있다. 무상급식의 예처럼 현실 속에서 대중적인 관심과 참여를 끌어낼 수 있는 구체적인 정책들의 생산에서부터 일반적인 정치경제학이나 사회이론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이론적 생산을 통하여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진보적 사회운동에 동참해야 한다.

그동안 외롭게 미래를 꿈꿔왔다. 이제부터는 미래를 그려 보자. 그리고 바꿔 보자.

 

구제역이라는 정치적 질병[썩은 뿌리 자르기]

“한 마리의 죽음은 대수롭지 않았지만 100만 마리의 죽음은 비극”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데 우리는 너무도 많은 시간을 써버렸다. 300만이 넘는 생명을 빼앗은 지금에서야 인간이라는 어리석은 동물은 다시금 반성의 동물인 양 살처분이 구제역의 대안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다. 아니 최소한 매몰이라는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눈으로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 인간의 얄팍한 속성 때문일까? 우리는 구제역에 걸린 소를 먹어도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말과 함께 흘러나오는 대량 살처분이 의심스러우면서도 그들이 흘린 피가 땅에서 솟아오르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무시무시한 구제역 이야기를 들으며 살처분이 정당화되는 사회구조 속에서 도대체 “구제역이 어떤 질병이기에 그토록 많은 생명을 빼앗은 것일까?”라는 물음과 함께 “살처분은 어떻게 구제역을 통제하는 명약이 되어버렸을까?”라는 물음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리고 이 글은 부족하지만 본인이 찾아 본 그에 대한 간략한 답변이다.

구제역(Foot and Mouth Disease)

구제역 증상에 대한 기술은 1514년 이탈리아의 수도승 프라카스토리우스(H. Fracastorius)가 베로나(Verona)에서 유행한 소전염병에 대한 것이 최초다. 그 후 1897년에 독일의 뢰플러(F. L?ffler)와 프로시(P. Frosch)에 의하여 병인체가 최초로 증명되었다. 우리의 기록을 살펴보면 조선왕조실록의 우역(牛疫)에 관한 기록들과 허균의 『한정록』에서 그 증상을 찾을 수 있다. 또 다른 기록에는 일제강점기 1911년과 1934년 구제역에 관한 기록들이 있다. 사실 여기서 언급된 소전염병, 우역, 구제역은 모두 같은 질병은 아니다. 현대적인 분류에 따르면 우역(rinderpest)은 폐사율이 100%에 달하는 질병으로 구제역과 구분되지만 당시의 과학적 수준을 생각할 때 이러한 기록들 속에 구제역도 포함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구제역은 과연 어떤 질병인가? 말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구제역은 ‘발과 입에 걸리는 질병’이다. 정확하게 말해 소와 돼지, 양 등 발굽이 둘로 갈라진 우제류(偶蹄類)에게 발굽이나 혀에 수포 또는 괴사병변이 일어나는 질병이다. 폐사율은 성체의 경우 1~3%이고, 어린 동물의 경우 최대 55% 정도로 알려져 있다. 미생물 분류학적으로 구제역 바이러스(FMDV)는 피코르나바이러스과(Picornaviridae) 아프토바이러스속(Aphthovirus)에 속하는 아주 작은 RNA 바이러스이다. 또한 구제역 바이러스의 혈청형(血淸型)에는 A, O, C, SAT-1, SAT-2, SAT-3, Asia-1 등 7가지의 기본형과 53~80여 가지의 아형(亞型)이 있다. 사람에게도 실험적으로 감염된 예가 있지만 그다지 큰 증상과 병소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인수(人獸) 공통 전염병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간단하게 말해 구제역은 그렇게 심각한 질병이 아니라는 얘기다. 어린 동물이 치사율이 높은 이유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면역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구제역의 진원지는 중동이나 인도 정도로 추정을 하고 있지만 사실 구제역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질병이다. 전라도 사투리로 ‘아구창’이라고 불리는 이 질병은 치료만 잘하면 나을 수 있는 질병이다. 서양 사람들은 병이 돌기 시작하면 농장 입구에 죽은 양이나 소의 머리를 매달아 가축 상인이나 방문객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런 다음 나머지 소들에게 따듯한 쇠죽과 부드러운 건초를 먹이고 깔짚을 갈아주었다. 병든 짐승들이 쓰라린 상처를 핥지 않도록 발굽에 타르를 발라주고 타마린드, 칠리고추, 혹은 물에 불린 인도 머구슬나무 잎사귀로 수포를 치료했다. 허균의 『한정록』양우(養牛)편에는 “우역은 훈김[熏蒸]에 서로 전염되는 수가 많으니 다른 소가 있는 곳에 데려가지 말고 나쁜 기운을 제거하면서 약을 쓰면 살릴 수도 있다”고 썼다. 다시 말해 예전부터 잘 보살피면 나을 수 있는 병으로 취급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제역이 심각한 질병으로 취급을 받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먼저 구제역 바이러스의 감염 경로가 감염 동물이나 오염된 가축 또는 축산물, 해외여행자의 신발, 의복, 지참물을 통해서 감염이 이루어 질뿐만 아니라 공기로도 전염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사안은 치료약이 없다는데 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자연치유가 가능한 질병임에도 불구하고 대량 확산과 치료약이 없다는 이유가 대량 살처분을 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여기서 잠시만 판단을 유보하고 살처분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자.

살처분 정책(Stamping Out)

살처분의 역사는 조금 더 흥미롭다. ‘란치시 칙령(Lancisi’s Recommandation)’이라고도 불리는 살처분은 18세기 유럽 로마 부근에서 전염병으로 소들이 떼죽음을 당하자 교황 클레멘트 11세(Papa Clemente XI)가 주치의에게 해결책을 찾아보라고 지시한 것에서 유래한다. 당시 주치의였던 란치시(G. M. Lancisi)는 병을 막는 최선의 방법은 교역을 제한하고, 정기적으로 육류 검역을 실시하고, 병든 가축은 석회를 뿌려 매장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아울러 통제된 방식의 살처분을 통해 병이 퍼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당시 이 통제된 방식의 살처분이란 병든 가축을 곤봉으로 때려죽이는 방법이었다. 또한 소상인이 이 규칙을 어기면 목을 매달고, 내장을 꺼낸 다음 사지를 찢어 죽였다. 신부나 승려가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노예선으로 보내버렸다.

이런 방법을 통해 당시에 비교적 빠르게 전염병을 막을 수는 있었다. 그리고 ‘란치시의 칙령’은 잔인하고 살벌하기는 하지만 지금까지도 가축 전염병을 통제하는데 근간이 되는 방법으로 인정받고 있고, 우리는 현재 그것을 살처분 정책(Stamping Out)이라고 부른다.

란치시의 칙령이 현대의 살처분 정책과는 다르다고 강변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내용을 비교해 볼까 한다. 살처분 대상 가축을 곤봉으로 때려죽이는 일은 분명 현대에는 없다. 그러나 영국의 경우 살처분 조치로 총으로 쏘거나 천자(Pithing-칼로 척수를 자르는 행위)를 시행했다. 우리의 경우 안락사 약제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생매장을 했다(생매장이 곤봉으로 때려죽이는 것보다 좋은 점이 있다면 누군가 나에게 설명해 주길 바란다). 살처분을 거부하는 농부에 대한 능지처참은 분명히 사라졌다. 그러나 또 다른 종류의 형벌이 기다린다. “살처분 명령 위반농가는 가축전염병예방법 규정에 의거 3년 이하의 징역 및 1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으며, 살처분 보상금 삭감(최소 20%이상) 등 불이익을 받게 된다.”우리의 농가가 대부분 영세농이라고 가정하면 이러한 형벌은 사형에 가까운 처사이거나 강제로 명령을 이행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또한 살처분에 동원된 공무원들은 정신적 충격과 스트레스, 과로사까지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분명 자연 치유가 가능한 구제역이라는 질병을 살처분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처리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그 이유를 살펴보고자 한다.

헛소리(Foot in Mouth Disease)

구제역과 살처분이 환상의 짝꿍이 된 또 다른 이유에는 영국의 종축업자들이 있다. 의회 의원 겸 영국왕립농업학회 회원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휘두르던 종축업자들은 구제역에 특히 순혈종의 소들이 큰 피해를 입은 반면, 일반적으로 우유와 고기를 생산하는 품종은 피해가 덜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영국의 종축업자들은 구제역 때문에 사료 소비가 늘고 우유생산량이 줄어들고 유전적으로 균질적인 순혈종 가축의 성장 기간이 길어진다는 이유에서 영국 정부에 압력을 행사했고, 영국 정부는 1871년 이 병을 신고의무 질병으로 지정했다. 이 후 영국은 스스로 만든 ‘구제역 청정국’의 지위를 이용해 무역을 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구제역 청정국’지위란 무엇일까?

간단하게 말해 ‘구제역 청정국’지위는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육류 무역업자들을 위한 것이다. ‘구제역 청정국’은 간단한 절차에 의해 육류 무역을 할 수 있는 반면 오염국의 경우 절차가 까다롭다. 또한 오염이 되고 나면 일정기간이 지난 후에 청정국의 지위를 회복할 수 있고, 오염국이 되고 나면 다른 오염국의 축산물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아니면 제소를 당할 수도 있다. 백신이 개발되었지만 백신 사용을 꺼리는 이유도 이 청정국 지위와 관련된다. 살처분 매몰 방식은 마지막 구제역 발생 이후 3개월 동안 구제역 발병이 없으면 청정국의 지위가 회복되는 반면 백신접종은 고비용일 뿐만 아니라 100% 확실한 예방법도 아니고 또한 접종 중단 뒤 1년 후에 청정국 지위를 회복할 수 있다는 이유도 포함된다.

이러한 헛소리를 바탕으로 구제역과 살처분 정책은 지금도 병행이 되고 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보면 구제역이라는 정치적 질병이 가진 허구성이 들어난다. 먼저 구제역은 자연 치유가 가능한 질병이다. 소의 면역력만 충분하다면 구제역은 자연 치유된다. 둘째, ‘구제역 청정국’지위가 없어도 국내에서는 육류 판매가 가능하다. 먹어도 건강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것도 그 이유다. 셋째, 돼지를 출하하는데 최소 1년, 소를 출하하는데 최소 3년이 걸린다고 일반적으로 가정하면 청정국의 지위를 상실하더라도 3개월에서 1년이면 회복할 수 있는 ‘구제역 청정국’지위는 그야 말로 헛소리에 불과하다. 또한 우리의 경우 육류 수출량이 아주 미비한 수준이다.

사실 구제역은 조류독감이나 기타 여러 가축 전염병과는 달리 식품 안전이나 인간의 건강을 전혀 위협하지 않는다. 또한 구제역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치명적인 형태로 진화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비록 구제역 바이러스가 강력한 살생 능력을 지니지는 못했지만 가축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고열이 나고 동물의 발톱과 입에 수많은 수포가 생긴다. 이 병에 걸린 가축은 발과 입이 몹시 아파 먹지도 못하고 발을 절뚝거린다. 새끼를 밴 짐승의 경우 유산을 하고 젖이 마른다. 원래 몸이 약하거나 나이 어린 짐승은 열 때문에 목숨을 잃기도 하지만 치사율은 약 1%정도이고 합병증이 있는 경우 최대 55%가 될 수 있다. 그 밖의 짐승들은 면역력이 약해진 탓에 수포가 박테리아에 감염되지 않는다면 보름 안에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 그러나 구제역이 한번 휩쓸고 지나가면 고기와 우유 생산량이 15~20% 정도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 다시 말해 생산성이 감소한다.

결국 문제는 산업 논리이자 정치 논리였던 것이다. 구제역을 정치적 질병(political disease) 또는 경제적 질병(economic disease)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픈 짐승을 잘 보살피는 데에는 그 만한 시간과 돈이 들어간다. 백신 값은 비싸고 효율성도 떨어진다. 백신을 투약해도 소는 대략 85%의 항체가 생기지만 돼지는 40%미만이다. 게다가 지속적이지도 못하다. 결국 값싼 원료와 값싼 고기만을 생산하려는 공장식 축산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방식인 것이다. 생산성은 줄어드는데 비용을 들일 수는 없다는 반복되는 자본의 논리 속에서는 더 이상 대안이 없다.

그러나 2010년 11월 구제역 발생 이후 기르던 가축을 매몰해야만 하는 농민 그 누구도 자신의 소와 돼지를 땅에 묻으며 슬퍼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어쩔 수 없이 매몰 작업에 내몰린 공무원들도 충격을 받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번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100만 명의 죽음은 통계에 불과하다”는 스탈린의 말을 생각해 본다. 이제 우리에게 300만은 더 이상 통계가 아니다.

강경표(중앙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

죽음을 부르는 죽음 – 살처분은 답이 아니다[썩은 뿌리 자르기]

“피할 수도 있었을 일로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면, 그것은 죄를 지은 것이다. 어떤 사람이 서둘러 중요한 일을 하려다가 무심결에 벌레 한 마리를 밟아 죽였다면, 그것은 죄를 지은 것이다.” – 로자 룩셈부르크, 1918년 11월 18일

300만 마리의 동물들이 죽었다. 구제역 때문이다. 그중 상당수는 구제역에 걸리지 않았음에도 피해 예방 차원에서 도살당했다. 예산도, 인력도 없어서 생매장한 돼지들도 있다. 이 모든 게 구제역 때문이다.

동물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는 것이 우스워 보일 수도 있다.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는 사람들도 널렸는데 동물의 죽음에 슬퍼하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건 단지 죽어간 동물들의 고통 때문만이 아니다. 죽어간 동물들을 보면서 더욱 가슴이 아픈 것은 첫째로 300만 마리의 동물들을 잔인하게 죽일 수 있는 우리 인간의 폭력성이 안타깝고, 둘째로 2차 환경재앙을 비롯해 그들의 죽음이 우리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미칠 악영향에 두렵고, 마지막으로 구제역 파동을 불러온 축산시스템과 자본주의 경제의 근원적인 상관관계에 수치심이 들어서다.

집단적 죽음이 주는 정서적 효과, 그 치명적 트라우마

자식처럼 키우던 소와 돼지를, 그것도 병에 걸리지도 않은 동물들을 행정기관의 살처분에 내맡겨야 하는 시골 축산농가 주민들은 울분을 토한다. 그들은 사실상 정신적 공황상태를 겪고 있다. 살처분에 동원되는 수의사들도 마찬가지다. 동물을 사랑해서, 동물을 살리고 싶어서 수의사의 길을 택한 사람들이 동물 집단 살처분에 동원된 뒤 심각한 회의에 빠졌다는 인터뷰를 우리는 신문에서 보았다.

살처분은 물론 구제역을 막기 위한 대책의 일환이다. 그러나 그것이 유일한 방법일까? 심지어 구제역에 걸리지 않은 동물들까지 예방적 차원에서 살상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일까? 물론 아니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소와 돼지를 살처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근본적인 문제를 망각하게 된다. 살처분이 유일한 해결책은 아니지만, 확실한 것은 살처분은 적어도 단기적인 차원에서는 가장 ‘실용적인’해결책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살처분은 ‘실용정부’MB정권의 관점에서는 유일한 해결책인 셈이다. ‘실용성’을 위해서는 광우병에 노출된 쇠고기를 수입하고, ‘실용성’을 위해서는 4대강에 인위적으로 공사를 해서 자연생태계를 해치고, ‘실용성’을 위해서는 노인복지예산을 삭감해버리는 이 정권의 관점에서는 죽임으로써 구제역을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실용적’인 해결책인 셈이다.

그러나 실용성을 위해 300만 마리의 동물을 죽이는 행위가 인간의 정서와 가치관에 미칠 해악적인 영향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해본 사람이 있을까? 단지 실용적이라는 이유로, 효율적이라는 이유로 생명을 대량살상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그 논리를 확장했을 때 장애인 아이들을 안락사하고 나병환자들을 강제로 불임수술을 시키는 것도 허용하지 말란 법은 없다. 장애인이나 나병환자들을 돌보는 것을 ‘사회적 비용’의 차원에서 계산해보면, 그것은 위정자들의 ‘실용적’인 계산에서는 ‘낭비’로 취급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명박은 대통령 후보시절, 장애인들은 낙태를 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낸 일이 있다(2007년 5월 12일인터뷰). ‘실용성’을 기준으로 생명을 취급하며, 생명 그 자체를 소중하게 취급하지 않는 사고방식은 궁극적으로는 인간 생명 역시 ‘실용성’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살처분정책의 문제는 이렇게 생명을 소홀히 취급하는 사고방식이 사회에 만연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데 있다. ‘실용성’을 근거로 생명을 죽여도 좋다는 사고방식이 암암리에 사람들의 뇌리에 자리잡게 될 것이다. 무엇이든지 처음 겪는 일은 놀랍게 느껴지지만 자주 반복되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처음에 바로 옆에서 죽어가는 벌레 한 마리에 연민을 느끼던 사람도, 수백만 마리의 동물들이 죽었다는 뉴스에 슬픔을 느끼지 않는다. 소와 돼지의 죽음이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해 느끼는 무감각함. 사회 전체적으로 생명에 대한 정서가 메말라갈 때, 그것이 특정한 사회적 위기의 순간에는 어떤 종류의 광기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기우에 불과한 것일까?

이미 시작된 재앙

환경부는 2월 7일, 낙동강 상류지역의 구제역 매몰지 89곳을 정밀조사 한 결과 61곳에서 안전하지 않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밝혔다. 조사 결과 매몰지 89곳의 절반을 넘는 45개 매몰지에서 침출수 유출이나 비가 많이 올 경우에 사면 붕괴 등의 위험이 있었으며, 16곳에서 침출수 유출 오염이 우려됐고, 23곳은 경사가 심한 곳에 위치해 붕괴나 유실가능성이 있었으며, 이 두 가지 문제가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곳이 6곳이었다. 집중호우 때 문제가 될 수 있어 빗물 배수 시설이 필요한 곳도 16개로 나타났다.(, 2월 8일, “구제역 매몰지, 3월이면 다 썩는다.”)

재앙은 이미 시작됐다. 이미 매몰지에서는 침출수가 유출되고 있고, 결국 지역당국은 분뇨차를 동원해 침출수를 퍼다가 하수처리장이나 분뇨처리장으로 이송하고 있다고 한다. 날이 풀리는 3월이 되면 피해는 본격화할 것이다. 병에 걸린 동물들의 사체에서 나온 피와 물이 토양을 오염시키고 강물로 흘러들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생태계를 파괴시킬 때 그 피해는 결국 인간 스스로 지게 된다. 이것이 생태계의 부메랑 효과다. 인간이 자연생태계의 전과정을 합리적 이성으로 파악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계몽주의적 믿음이 사실은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미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에서 밝힌 바 있다. 문제는 무지한 인간의 오만이 인간 자신에게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베트남전쟁에서 살포한 고엽제에 노출된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그 후유증을 겪고 있음을 상기해 보자. 자연생태계를 훼손한 대가는 결국 인간 자신이 지게 되어 있다(그것도 가난한 하층계급이 지게 되어 있다).

구제역 예방을 목적으로 과도하게 살충제를 살포하는 행위 역시 인간과 환경 모두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하얀 가루가 자동차에 묻어 전국으로 유포되고 있는데 이 약성분이 아이들의 눈이나 입으로 들어갈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에 대해서 정부는 아무런 경고도 하지 않고 있다. 또 살충제와 함께 뿌리는 항생제 때문에 대기중에 있는 불특정 미생물의 내성이 급격하게 증가하여 결국 새로운 슈퍼박테리아의 탄생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정부 집권자의 머리 속에는 오직 구제역이라는 보기 싫은 질병을 제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만 자리잡고 있을 뿐이다. 살처분과 살충제 대량살포 이후에 벌어질 문제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국민들이 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근본적인 축산 시스템의 문제는 잊혀지고 있는 것이다.

먹거리의 상품화와 생태위기

현대인은 너무 많은 고기를 먹는다. 너무나 많은 동물들이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 사육된다. 그 결과 대규모 축산업이 성행하게 됐고 이 때문에 지구 환경은 재앙을 맞고 있다. 사람이 하루에 마시는 물은 평균 5리터 가량이며, 생활용수를 포함해 하루 150리터 정도를 사용한다. 1kg의 쌀을 수확하기 위해서는 2,000~5,000리터 정도의 물이 쓰인다. 그런데 소를 키워 쇠고기 1kg을 얻기 위해 들어가는 물의 양은 24,000리터다. 육식을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채식을 하는 것보다 최소한 5배의 물을 사용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런데 인간은 이렇게 물을 많이 소비하는 소를 대규모로 사육하고 있다. 전 세계에 고기를 전달하고 맥도날드와 같은 대규모 패스트푸드 체인점에 햄버거 페티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지구의 건조화로 인해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 많은 물을 소 사육에 쓰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소 사육을 위해 수풀과 삼림을 개간하여 거대한 방목지를 만드는 행위 역시 지구 사막화에 동조한다. 중남미 대륙에는 수백만 에이커에 달하는 열대 우림 지역이 이미 소 방목용 목초지로 개간 중이며 이 때문에 사하라 이남과 미국, 호주 남부 목장지대에서는 대규모로 사막화가 진행 중이다. 사육장에서 흘러나오는 축산폐기물도 심각한 문제다. 소 1만 마리를 사육하는 사육장에서 배출되는 유기폐기물은 11만 인구의 도시에서 발생하는 쓰레기 양과 맞먹는다고 한다. 강으로 배출되는 오물이 일으키는 문제, 소가 배출하는 이산화탄소가 대기오염에 미치는 영향 등을 고려해볼 때, 이처럼 대규모로 소를 사육하는 것은 생태계에 치명적이다.

우리나라에 구제역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된 것 역시 과도한 축산밀도의 원인이 크다. 소와 돼지를 좁은 우리에 가둬놓고 사육하다보니 동물들이 비위생적인 환경에 노출되기 쉽다. 거기에 동물들의 운동량이 적어 면역력 역시 떨어진 상태다. 이렇게 좁은 축산밀도로 많은 수의 동물들을 사육하는 현재의 축산시스템이 구제역 사태의 진정한 원인이다.

만일 고기를 비롯한 먹거리가 자본주의적 상품으로 둔갑하지 않았더라면, 소, 닭, 돼지가 교환을 통한 이윤축적을 위해 대량으로 생산되는 사회가 아니라면 과연 이런 문제가 발생했을까? 문제는 육식 그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육식은 도덕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나친 육류 공급과 과도한 육식에 있으며, 이러한 과도한 육류의 소비와 공급을 야기한 것은 자본주의적 대량생산 시스템이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먹거리 문화를 바꾸는 운동이 요구된다. 생태계에 좋은 것은 인간에게도 좋은 것이다. 인간 역시 생태계의 일원으로 지구의 생태적 순환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이다. 친환경적인 먹거리 문화가 정착될 수 있도록 축산정책 자체의 변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한 나라의 정책개선만으로 달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나라에서 친환경적으로 축산시스템을 바꾼다고 해도, 대규모 방목을 통해 값싸게 공급되는 외국산 육류와 경쟁이 되겠는가? 소비자들은 당연히 값싼 외국산 육류를 찾을 것이고 국내 축산업계는 망할 것이다. 따라서 전지구적으로 자본주의적 먹거리문화에 대한 깊은 반성이 필요하고, 이를 통해 현재의 과도한 육류소비문화를 개선하는 일이 시급하다. 3백만 마리의 소와 돼지를 살처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 모든 사실들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상원(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인간의 무한욕심이 결국 인간을 공격한다[썩은 뿌리 자르기]

구제역, 위기의 대한민국

작년 11월 안동에서 시작된 구제역이라는 가축전염병의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고 여전히 전국을 강타하고 있다. 문제는 구제역 자체보다 가축을 생매장한 이후의 일이 더욱 심각하다. 열악하고 지저분한 축사에서 나와 찰나의 상쾌함을 느꼈을 돼지들이 황당하게 죽어나간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작업에 동원된 공무원과 수의사들이 가축들의 비명소리에 환청과 불면으로 정신과치료를 받아야 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이것은 비단 축산업계의 상업적 손실과 경제적인 문제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고통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천문학적인 숫자의 매몰로 농림수산식품부가 배포한 구제역 긴급행동지침이 지켜질리 만무하다. 같은 장소에 너무 많은 양의 가축들을 산채로 매장하였고 생매장당하는 가축들의 발버둥으로 오염방지용 비닐이 파손되면서 매몰지에는 가축들의 핏물이 땅위로 솟아오르거나 지하수에 섞여 나왔다. 이 뿐만 아니라 매몰가축을 들짐승들이 뜯어먹어 제2차전파의 가능성이 있다는 보고도 있다. 환경학자들은 이러한 환경오염이 앞으로 20년 정도 지속될 것으로 내다본다.

중요한 것은 벌써 100여만 마리가 살처분 당한 지금의 상황이 천재(天災)라기 보다는 인재(人災)라는 점이다. 인간의 과도한 이욕(利慾)이 낳은 참사다. 가축(家畜, livestock)이라는 의미 자체가 인간 삶의 복지를 위해 야생동물의 생태를 개량하여 인간의 영역 안에 붙잡아둔 것이다. 따라서 가축의 생명활동에 지장이 있다면 사육자인 인간이 1차적 책임을 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책임처리에 있어 많은 잘못이 발생했다. 불가피하게 가축을 도살해야 할 경우 안락사 시키는 것이 원칙이지만 살처분 약품의 부족으로 집단 생매장했다. 유럽연합 등에선 동물을 도축한 뒤 소각하는 게 원칙이고 일본도 마취제를 놓은 뒤 독극물을 주사해 살처분 하고 있다.

또 그 이전에 대한민국이 ‘구제역 청정국’임을 입증하여 육류의 수출?입 거래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알량한 욕심’으로 구제역 백신 접종을 소홀히 한 문제가 크다. 더 근본적으로는 사람들의 육류소비가 증가하면서 육류를 공급할 축산농장이 대규모로 공장화되었지만 그 설비는 양적 규모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사육시설이 가축 전염병에 취약해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구제역이 본격적인 가축 전염병으로 자리 잡은 것은 2000년 이후 축산시설이 대형화된 시점과 일치한다. 농림수산식품부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2000년 이후 구제역을 비롯한 각종 가축 전염병으로 살처분한 소?돼지?닭 등은 1,980만6,972마리에 육박한다.

자연과 인간을 쪼개버리니 더 커져버린 이욕과 만물일체의 자연관

2008년 MB정권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 이후 드러난 미국의 축산업 현실은 대규모로 기업화된 축산농장이 얼마나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지 여실히 드러내었다. 미국 네브라스카주 한 농장은 8만5천 마리의 소를 한꺼번에 사육하고 있는데 축사의 위생문제는 물론이고 동물성 사료의 비율도 높아 소들이 광우병이나 구제역에 걸릴 확률이 매우 높다. 이것은 동물학대에 가깝다. 지금 인류는 엄청나게 많은 양의 고기를 소비하고 이러한 인간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가축의 대량생산이 필요하다. 그러나 방목으로는 이것을 충족하지 못하므로 가축들은 대규모 공장식 농장에서 사육된다. 게다가 연한고기를 얻기 위해 우리를 더욱 협소하게 하여 엄청난 고밀도 축사를 만들어 내고 있다.

피터 싱어(Peter Singer)의 경우 인간의 이익이 동물의 이익보다 더 크다면 인간을 위한 동물의 희생이 정당화되지만 인간의 아주 작은 사소한 이익을 위해 동물들이 희생된다면 정당화될 수 없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즐기고 있는 육식은 과거 인류가 생존을 위해 야생동물을 사냥하던 때와는 상황이 전혀 다르고 단순히 기호의 한 단면일 뿐이다. 맛을 위한 행위는 생존을 위한 행위보다 더 클 수 없다. 물론 싱어의 이런 주장이 모든 육식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극지에 살고 있는 주민이나 아프리카나 남미의 오지에 사는 사람들의 경우 영양공급원을 보장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그들 공동체 나름대로의 생활방식으로 적극적인 육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대국가에서 살고 있는 대부분 인류의 엄청난 육류소비는 극?오지의 상황과는 달라서 인간의 미각적 즐거움을 위한 사치에 가깝다. 사치행위를 위해 대규모 공장식 사육시설이 창궐하고 있는 것이다. 사치행위는 인간의 욕심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욕심을 불러오는 것은 자연과 인간을 이분법적 구도로 나누는데서 출발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미국이 서부 개척시대 때 서부라고 하는 자연대상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은 것처럼 현재의 전지구적 생태위기는 근대과학의 태동 이후 산업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자연을 생명이 없는 인간역량의 실현 대상으로 파악하는데서 비롯되었다. 인간중심의 도구적 자연관은 자연을 인간의 욕망충족과 복지확충의 도구로 판단한다.

이와 관련하여 비토리오 회슬레(V. Hoesle)는 「생태계 위기의 정신사적인 기반」에서 자연과 인간에 대한 관계를 다음과 같이 비유한다. ‘자연’과 ‘인간’이라는 단어사이의 접속어 ‘과’에 대한 시각에 있어서 예를 들면 ‘식물과 동물’의 ‘과’는 양자를 서로 대립시키는 기능을 하지만 ‘심장과 신체’의 ‘과’는 인간 내부의 장기와 그것을 포괄하는 인간 신체와의 관계를 나타낸다. 그리고 이 두 예시의 유형이 바로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동시에 나타나는 유형이라고 말한다. 인간중심관점에서 자연계와 인간을 대립적으로 나누어보는 입장이 있다면, 자연과 인간을 하나의 유기체적인 형태로 보는 입장이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전자는 데카르트의 자연개념을 기반으로 하는 근대 자연과학에 근거하고 후자는 동양의 전통적 자연관에 근거한다.

이런 비유와 일치하지는 않지만 유사한 논리를 중국 명대의 왕양명(王陽明, 1472~1529)이 제출한 적이 있다. 『전습록(傳習錄)』에서 어떤 사람이 왕양명에게 묻기를 “회암 선생(주희:朱憙)이 ‘사람이 학문하는 까닭은 마음(心)과 이치(理)에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어떻습니까?”(晦庵先生曰 人之所以爲學者, 心與理而已. 此語如何)라고 하자, 양명은 주희의 발언을 비판하면서 “마음이 곧 본성(性)이며, 본성이 곧 이치이다. ‘마음과 이치’의 중간에 ‘과(與)’라는 한 글자는 마음, 이치를 두 가지로 삼음을 아마도 면할 수 없을 것이다.”(心卽性, 性卽理, 下一與字, 恐未免爲二)라고 했다. 왕양명의 견해는 주희의 이원화 관점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주희는 사물에 정해진 이치가 있다고 하여 대상 사물 속의 이치를 구하려는 입장이다. 이는 결국 마음과 이치를 둘로 가르게 하고 인식 주체와 대상 객체를 분리한다. 그러나 왕양명은 인간에게는 본래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양지(良知)가 있어서 마음에 있는 양지를 사물에 이르게 하여 사물이 모두 그 이치를 얻는 방법을 취한다. 왕양명은 천지만물과 사람은 본래 한 몸이어서 해와 달, 별, 비, 바람, 산, 강을 비롯하여 금수(禽獸)와 초목에 이르기까지 인간과 자연계가 총체적인 우주를 구성하며 그 자체로 하나의 유기적인 생명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만물일체(萬物一體)의 자연관으로 자연과 인간이 나누어질 수 없는 하나의 생태임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생태계 위기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나?

북송의 철학자 주돈이(周敦?)는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오직 인간은 그 빼어난 기운을 얻어 가장 영특하다(惟人也得其秀而最靈)”고 했지만 이 명제를 해석하는 주희와 왕양명의 태도는 차이가 있다. 주희의 관점이 자연을 주관(主觀)한다면 왕양명의 경우 자연과 인간이 일체이고 그 속에서 가장 정묘한 것이 인간이므로 인간을 천지의 마음으로 본다. 따라서 인간은 총체적 자연계에서 주체(主體)적인 입장에 있고 자연계의 모든 사물을 보살피고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 따라서 왕양명의 관점에서 인간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 가축에 대한 책임문제는 철저히 인간 자신에게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왕양명이 말한 자연적(저절로 그러한)인 양지가 굳어버렸고 인간과 자연사물의 감응통로인 양지를 상실하면서 인간의 생명에 대한 감통(感通) 자체가 사라진다. 기술문명의 발달로 인한 인간중심적 합리주의가 인간 이외의 것에 있어야할 생생한 ‘생명성’을 함몰시켜 버린 것이다. 중국 당대 이감(李甘)의 글 「찬리설(竄利說)」중 한 구절은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생명에 대한 감응과 그 감응을 상쇄하는 인간의 이욕을 자세히 꼬집어 설명한다. 다음은 그 한 구절이다.

“지금 탐욕 부리는 사람은 본디 인자한 마음이 없지만, 항상 잔인한 마음이 있는 것은 이욕의 침해 때문이다. 땅강아지나 지렁이가 사슴보다 크다면 인정하겠는가? 그 대답을 인정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땅강아지나 지렁이를 보면 발을 피해 밟아서 살려줄 것이고 실수로 땅강아지나 지렁이를 밟아 죽인다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가슴 아파할 것이다 그런데 다시 사슴을 본다면 활을 잡고 쫓아서 사슴을 맞추면 외마디 탄성을 지르며 기뻐하는 법이니 큰 것에 잔인하고 작은 것에 인자하게 함은 무엇 때문인가? 사슴은 입과 배에 이롭고 땅강아지나 지렁이는 이롭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모할 만한 이익이 있다면 비록 큰 사슴이라도 잔인하게 하고 도모할 만한 이익이 없다면 땅강아지나 지렁이라도 잔인하게 하지 않는 것이다.”(今是頑人, 曾無不忍之心, 然常獨有忍心者, 由害於利也. 且謂??大於?鹿, 則許之乎. 聲不許也. 然人顧而遭??則迂足而活之, 過而傷??則失聲而痛之, 顧而見?鹿 則援弓而逐之, 幸而中?鹿則失聲而喜之, 忍於大者, 不忍於小者, 何歟. ?鹿利於口腹也, ??不利也. 故居於利則雖?鹿忍也, 不居於利則??不忍也)

자연을 대상화하면 동물도 대상화된다. 가축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하지만 자연을 철저히 대상화시킨다 하더라도 인간이 이익에 대한 탐욕을 절제하지 못하면 무너지는 자연생태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회피할 겨를도 없이 직접적인 타격을 받는다. 구제역과 관련한 문제뿐 아니라 4대강 사업이라든지 골프장건설에 의한 산림파괴, 지구온난화 문제 등이 그렇다. 이런 문제에 가장 1차적으로 책임을 져야할 것은 국가정부에 있다. 구제역의 경우 지금 한국의 축산업계가 적절한 설비 없이 우후죽순으로 방대해진 원인은 국가이익을 극대화 하려한 정부정책에 있고 구제역의 예방과 발생한 이후의 안일한 대처도 정부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1차적 책임소재의 문제를 떠나, 예를 들면 지금 논의하는 구제역과 같은 가축 질병의 원인을 대규모 공장화한 사육시설의 소유주에게 전적으로 떠넘기는 것도 옳은 시각은 아닌 것 같다. 소비자들도 공동의 책임이 있지 않을까. 개인이 대규모 사육이나 도축 과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점잖게 식당에서 고기만 구워먹었다고 해서 자신이 구제역이라는 결과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알리바이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개개인 역시 갈라지고 나누어져 양지를 상실한 사회시스템을 구성하는 하나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맹자(孟子)의 ‘존심양성(存心養性)’은 아마 이런 개개인에 쓰여야 할 말이 아닐까?

불인지심(不忍之心)

구제역 파동이 연일 TV화면에 보도되면서 안타깝게 죽어나간 동물들의 처참한 모습도 볼 수 있지만 유독 눈길을 끄는 장면은 농촌의 돼지농장 주인들이 가슴아파하며 돼지들을 목 놓아 부르는 모습이다. 아마 누구라도 그 모습을 보면 자신이 기르던 가축에 대한 농민의 애정이 어떠했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농민들의 그 모습이 경제적 이익의 문제 때문인지 인간적 정감의 발동인지는 확실히 구별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런 모습이 적어도 『맹자』에서 전국시대 제선왕(齊宣王)이 흔종(?鐘:제사)에 사용될 소가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고 양으로 바꾸어 쓰라고 했던 모습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소를 양으로 대체하라는 발상은 우습지만 그래도 맹자는 다른 제후국들의 왕에 비해 그런 제선왕의 마음을 두고 족히 왕 노릇 할 수 있다고 격려하지 않았던가. 그 농민들의 마음이야 말로 ‘불인지심(不忍之心)’의 발로에 가깝다. 하지만 구제역에 대응하고 처리하는 정부와 관계기관의 모습을 보면 사람으로서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이 있어 차마 하지 못할 일을 버젓이 하고 있다. 이제 갑자기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려하고 있으니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해야할 문제다.

진보성(대진대 강사) /

자살공화국인가 살인공화국인가[썩은 뿌리 자르기]

대한민국은 살인공화국이다

‘자살(自殺)’의 사전적 의미는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 행위이다. 생명의 존엄성이라는 도덕적 원칙에 비추어보면 자살은 비록 타인에게 해를 가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생명을 단절시켰다는 점에서 존엄성의 원칙에 어긋나는 부도덕한 행위가 된다. 심지어 서양의 근대에서는 위법한 행위로 규정되어 자살한 자의 시체에 대해 처벌을 가하거나 그 사람의 재산이 몰수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삶이 죽음보다 소중하다는 것은 매우 자명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이 계기가 되어 소극적 안락사에 해당하는 존엄사 논쟁이 벌어졌다. 존엄사란 회복이 불가능한 환자에 대해 무의미한 연명조치에 해당하는 의료행위(생명연장을 위한 기계장치)를 중단해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면서 죽음을 자연스럽게 맞이하게 하는 조치를 뜻한다. 이러한 존엄사라는 명칭이 부담스러운 의학계에서는 ‘연명치료중지’라는 말을 내세우기도 한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아직 연명 가능한 환자를 더 이상 치료하지 않음으로써 일찍 죽음을 맞이하게 한다는 점에서 간접적인 자살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의료행위 중단은 당사자의 자발적 선택에 따른 후속 조치이기 때문이다.

존엄사를 찬성한다는 것은 단순히 기계적으로 양적인 측면에서 삶을 연장한다면 그 질적인 의미와 가치가 무시되어 인격 자체의 존엄성을 크게 훼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죽음보다 못한 삶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런데 존엄사와 다른 자살의 유형이 한국에서 번지고 있다. 지난해 대한민국은 OECD국가 중 자살률 1위를 기록했다. 1만2270명이 자살을 하였으므로 하루에 약 34명이 자살을 하는 셈이고 약 40분에 한 사람씩이 우리 곁에서 자살로 사라지고 있으며, 20대의 자살률이 심지어 12.8%이다.

2008년 10월 2일 유명한 국민여배우인 최진실은 악성루머와 우울증 때문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동생 최진영도 1년 3개월 후에 자살했다. 계속해서 여러 연예인들이 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런데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측면에서) 더 큰 사건이 일어났다.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낸 노무현이라는 정치적 거목이 운명이라고 유언을 남기고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리며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누가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있는가? 본인 탓으로는 사업실패나 생활고를 비관해 자살하거나 우울증을 심하게 앓다가 자살하거나, 유명인이 자살하는 것을 모방해서 자살하거나, 자신의 주변사람들에게 후환이 갈 것을 두려워하여 자살하거나, 모두 기본적으로 자신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에 자살한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세계 1등을 너무 좋아하는 우리 대한민국이 자살률 1등을 한 것에 자부심을 느껴야 하는가? 일차적으로 우리 권력지식층의 의식과 행동 그리고 그들이 적극적으로 추진한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이런 상황이 벌어진 데 커다란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자살공화국이 아니라 자살을 유도한 살인공화국인 셈이다.

우리는 자살을 찬미하는 민족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생명을 중시한 민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이 쉽게 일어나는 까닭은 그 삶이 죽음보다 못하거나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살자를 자살로 몰아가는 사회적 요인과 이를 정책적으로 추진하고 구조화한 세력이 있다. 이런 이유로 자살은 개인 심리학적으로 고찰할 것이 아니라 사회 심리학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자살의 심리적 충동을 야기한 사회적 요인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자살은 자살로 몰린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선 자살이 아닌 살인이라는 논의의 앞서 서양과 동양의 죽음관의 특징부터 살펴보자.

서양의 죽음관과 이원론

서양은 전통적으로 “육신을 경멸하고 영혼의 찬란한 해방을 광신”(김지하 시인)하는 플라톤 철학과 기독교라는 종교가 삶보다 죽음을 더 가치 있게 여긴 문명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중의 하나인

자살은 질병이 아니다! [썩은 뿌리 자르기]

자살은 질병인가?

자살을 질병으로 규정하고자 했던 노력은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 에스퀴롤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자살은 정신병의 모든 특징을 보여 준다고 생각했으며, 인간은 미쳤을 때만 자살한다고 생각했다. 오늘날에도 사회학?정신의학?심리학 등 소위 공공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학문들은 자살을 질병 다루듯 취급한다. 그들은 우울증?조울증?자살 관련 유전자 등, 의학과 과학의 힘을 빌려 자살이 질병이라는 확신을 심어주고자 노력한다.

질병이 원인인 자살은 분명히 있다. 우울증?조울증과 같은 증상은 충분히 자살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질병의 고통 때문에 자살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자살이 질병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을 질병으로 규정하고자 하는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먼저 자살은 전염성이 강하다. ‘베르테르 효과’라고 불리는 자살의 전염이 그것이다. 최진실씨가 죽었던 달에는 자살자가 전달에 비해 66% 증가했다.

부모가 자살을 하면 그 자손도 결국엔 자살을 한다는 속설은 자살이 유전 질환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OECD 국가 중 자살률이 1위라는 것도 자살을 질병화 하고픈 이유일지도 모른다.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가운데 자살률이 유독 높다는 것은 국가 체면과 관련된다. 지금도 수많은 종교와 윤리에서 자살에 대해 열띤 논쟁을 하지만 자살이 질병이 아닌 시대도 있었다. 그 때 자살은 종교적 구원의 문제이자 철학적인 문제였다. 그러나 이제 자살은 의학의 문제이며 과학의 문제다. 자살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만이 자살을 질병화 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다.

그러나 자살을 직접적인 질병이라 보기에는 무언가 논리적인 설명이 부족하다. 그래서인지 말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자살은 사회적 질병이다.”, “우울증 유발 유전자”, “자살의 진화생물학”, “동물도 자살을 하는가?”등 자살이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얘기들이 기사화된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다. 자살을 과학으로 설명하려고 하면 할수록 자살은 그들이 과학적인 설명에 포함하고 싶었던 윤리?도덕과는 거리가 멀어진다는 것이다. “동물도 자살을 할까?”라는 물음에 “예”라는 대답은 자살은 인간만의 특수한 문제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아폽토시스(apoptosis)’라는 세포 자살 현상은 도덕과 무관한 생명현상일 뿐이다.

아직은 과학이 자살을 설명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살을 과학적으로 질병화 하는 이면에는 단 하나의 장점만이 존재한다. 자살을 일으키는 또 다른 원인인 경제적인 문제를 개인의 질병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말을 조금만 바꾸면 된다. “경제적 빈곤의 문제는 상대적인 것입니다. 당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를 보세요. 그 사람들도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행복한 느낌을 갖지 못한다면 당신은 우울증에 빠진 것입니다. 혹시 조상 중에 우울증으로 자살한 사람이 있나요? 그렇다면 당신도 우울증에 걸릴 수 있습니다.”

이타적 자살, 영웅 만들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는 질병이 아닌 자살도 있다. 뒤르켐에 의하면 이것은 ‘이타적 자살’이라고 불린다. 이타적 자살은 개인이 사회에 통합 정도가 지나치게 높을 때 발생한다고 하지만, 사회를 강력하게 통합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유일하게 질병화되지 않은 자살은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추앙받으며 영웅 만들기로 이어진다. 영웅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있었다.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제국주의는 제국주의 체제를 위한 영웅을 필요로 했고, 식민지 국가들을 독립을 위한 영웅을 필요로 했다. 그들이 조국과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침략이든 테러든 자신을 희생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런 희생도 학문적으로는 ‘이타적인 자살’일 뿐이고, 여기서 다시금 문제가 발생한다. 좋은 자살과 나쁜 자살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 이기적 자살은 나쁜 것이고 이타적 자살은 좋은 것인가? 자살이라는 질병이 사회를 병들게 만든다면 이타적 자살도 사회를 병들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이타적 자살도 사회를 병들게 만들 수 있다. 가미가제를 생각하면 된다. 젊은이들이 비행기를 몰고 적에게 돌진하는 것은 아름다운 행위가 아니라 사회적 병폐의 한 단면일 뿐이다. 21세기에는 한국에도 영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한국형 영웅 관리 모델 수립’이라는 목표를 세웠다. 그들은 영웅을 만들지 못하는 사회는 위대한 성취를 만들어 낼 수 없다고 한다. 이제 그들의 목표는 교과서다. 교과서를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인간형을 영웅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강재구 소령의 이야기도 한주호 준위의 이야기도 가슴 속에 기억할 만한 이야기이지만 교과서가 아닌 다른 글에서 만나야만 한다. 아니면 서정주의 「오장 마쓰이 송가」와 다를 바가 없다. 그것도 아니면 백선엽 장군처럼 만주군 간도 특설대에서 친일을 하다가도 전쟁에 나가서 잘 싸우면 당신도 오성장군이 될 수 있고, 영웅이 되어 나중에는 국립묘지에 갈 수도 있다고 교과서에 실어 주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죽은 영웅보다 살아있는 영웅이 더욱더 모범이 되지 않겠는가! 독일의 시인이자 극자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말한다. “영웅이 필요 없는 나라는 행복하다.”지금 우리에게는 영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생업에 종사하면서 빈곤 때문에 자살을 하지 않는, 그래서 행복을 꿈꾸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빈곤도 질병이 아니다

그러나 빈곤층의 자살이 자꾸만 증가한다. 범죄도 증가하고 있다. 빈곤층의 자살을 질병으로 파악하려는 사람들은 이렇게 진단한다.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에의해 우울증에 빠진 빈곤층 중에 자살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약물 치료를 받으며, 행복해지려고 노력해야 하고, 상담을 받고, 교육을 받으면 된다. 슬그머니 우울증이 유전 요인 때문이라는 말도 한다.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는 부탄”이라는 기사와 함께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정작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의 대상인 우리의 부자들은 제외된다.

그러나 우리는 OECD 국가 중 자살률만이 1위가 아니라 저임금 근로자 비중도 1위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높은 것은 경제적인 문제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다. 예전에 빈곤을 사회생물학적인 견지에서 설명하려는 일련의 시도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들은 실패로 끝났다. 과학이라는 그럴싸한 포장지로도 빈곤을 질병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그러나 가난하면 질병에 걸릴 수 있다. 가난하면 질병을 치료받지 못해 죽을 수도 있다. 가난하면 질병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자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난 자체는 질병이 아니다. 또한 빈곤에 의한 자살도 질병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과학과 의학의 힘으로 자살이라는 질병의 치료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해결책을 찾아야만 한다. 경제적 분배 정의를 실천하는 것, 저임금 근로자를 줄이는 것,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 바로 이것이 빈곤에 의한 자살을 줄일 수 있는 방법들이다.

과학과 의학이 해야 할 일은 자살을 질병으로 규정하고 치료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가난해서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치료하고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다. 거기에 우리의 국가가 해야 하는 일은 경제적 분배 정의를 실천해서 가난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을 막는 것이지 ‘이타적 자살’을 미화해서 정치 의도에 맞는 영웅으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국가가 나서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게 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동물의 자살 사례로 자주 회자되는 이야기 중 동물학자 제인 구달이 관찰한 ‘플루’와 ‘플린트’이야기가 있다. ‘플린트’는 어미인 ‘플루’가 죽자, 식음을 전폐하고 주검을 지키다 결국 목숨을 잃었다. 야생 동물의 세계에서 독립하기 전 새끼가 어미 곁에 붙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어미의 부재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미가 없는 동물은 먹이를 얻어먹을 수가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빈곤층일수록 가족동반자살이 많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진정한 경제적 분배 정의를 다시금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적당한 가난은 ‘검소하다’라는 말로 위로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끼니가 없어 비관하는 사람들에게, 그래서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자살이라는 질병에 걸렸다”는 말이 어떤 위로가 될 수 있을지는 의문만 남을 뿐이다.

강경표(중앙대학교 철학 박사수료) /

“나와 그것(I-It)”의 관계가 압도하는 사회의 끝 – 자살[썩은 뿌리 자르기]

최근에 소개된 임상심리학자 토마스 조이너의 “자살에 대한 오만과 편견”에 따르면, 자신이 누군가에게 ‘짐이 된다’는 생각과 아무데도 속해있지 않는다는 ‘소속감 부재’의 두 심리상태가 장기간 지속될 때 자살에 대한 생각이 강해진다고 한다. 특히나 핵가족화 및 개인주의화가 강화되는 시대가 됨에 따라 물질적인 문제보다는 관계성과 정체성의 위기로 자살을 선택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보고가 있다. 내가 ‘짐스런 존재’라는 것은 자신이 중심으로 들어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이란 의미를 강하게 내포한다. 그런데 인생을 살다보면 항상 주인공으로만 살 수는 없다. 살면서 맺는 수많은 관계에서 자신이 중심이 될 수도 있고 엑스트라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외형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회에 길들여진 현대인에게는 이런 상황이 감정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붕괴시켜 극단적인 결말에 치닫게 한다는 것이다.

유태인 철학자 마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는 그의 저서 『나와 너』(I and Thou)에서 인간을 관계 속에 있는 존재로 보고, 살아가면서 맺는 관계의 형태를 크게 “나와 너”(I and Thou) vs. “나와 그것(I-It)”의 두 가지로 분류했다. 전자인 ”나와 너“는 한마디로 인격과 인격이 만나 서로 진정한 소통과 나눔을 통해 한 인격이 성장하고 성숙되도록 돕는 이상적인 관계다. 이러한 관계와 관계가 모여 한 인간의 삶을 견고하게 지탱시켜주기 때문에 삶의 위기가 와도 뿌리째 뽑히지 않고 오히려 ”비 온 뒤 땅 굳어진다“는 속담을 자신의 삶으로 증명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반면 ”나와 그것”은 말 그대로 상대는 철저히 도구격이 됨으로써 그 상대 앞에 있는 “나“는 피상적이 되어버리고 만다. 내 앞에 있는 상대방은 수단이 되고, 효용가치로 스캐닝(scanning)이 되어 점수가 매겨지며, 어떤 필요에 의해 만남이 일시적으로 이뤄지는 관계기에 수명도 짧은 경향이 있다. 일명 안 보면 그만인 관계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나-그것”의 관계, 다시 말해 도구적이고 외형적인 관계만으로 점철된 삶을 사는 현대인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는 데 있다.

“나”의 실체와는 상관없는 외형적인 세상에서 사는 데 보다 익숙해져있기에 지속적으로 힘들고 우울할 때 관계 속에서 도움을 받기보다는 그렇게 도움을 청하는 것 자체를 “짐스런 존재”가 된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라 생각하고 혼자서 파괴적인 외로움을 겪다가 자살이란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된다. 결국 “나와 그것”의 관계가 나와 나의 생명 사이의 관계까지를 지배하는 것이다. 나는 사회의 그것이고, 생명은 나의 그것이다. 사회가 짐이 되는 나를 떼어 놓듯이, 나도 짐이 되는 나의 생명을 떼어 놓게 된다.

산업사회를 지나 풍요와 풍족을 누리는 사회로 진입한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 역설적이게도 더 이상 자살뉴스는 특별한 뉴스가 아니다. 최근 유명 연예인들의 연이은 자살뉴스로 다시 자살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뜨겁게 달궈졌었다. 대부분의 자살자들이 오랫동안 우울증으로 신경안정제에 의존하다시피 하루하루를 보내고, 장기간 약물복용에 따른 역치현상 혹은 부작용으로 또 다른 의존을 낳아 본질적 치료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 속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자살을 한 인간이 속한 관계, 그 관계의 나뭇가지들의 본류인 사회적 맥락을 간과하고, 생물학적인 관점에 치중하여 접근해 버리는 바람에 ‘약물만능주의’로 빠진 경우라 할 수 있다(물론 여기서 약물치료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복용기간이 장기화가 될 경우의 치료계획은 다각적이고 신중해야 한다는 의미다).

별도의 치료계획 없이 약물치료에만 의존하는 이들을 보면 결국 관계적인 맥락을 통한 완쾌가 제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우울증 치료가 비교적 보편화되어 있는 미국 등의 선진국에서도 심리치료는 약물과 인지행동치료 같은 여러 치료방법들이 병행되어 이뤄진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마음을 터놓는 치료과정이 쉽사리 생략되고, 사는 것이 바쁘다는 핑계로 배식 받듯이 약을 받는 경우가 빈번히 이뤄진다. 더욱 당혹스러운 문제는 이러한 방식의 치료과정이 정작 자살 시도나 자살 이후 이를 유일하게 설명하는 근거로 탈바꿈한다는 것이다. 당초 그를 자살로 몰고 간 실질적 동인(動因)과 망자에 대한 진정한 이해보다는 왜 자살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기계적 설명만이 그의 삶의 마침표가 되어 버린다.

마틴 부버가 『나와 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은 관계를 떠나 생각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모든 인간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세밀하게 연결되어 살아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는 점이다. ‘살아있음’을 나타내는 라틴어는 ‘inter hominem esse’로 ’사람들 사이에 있음‘을 뜻한다. 반면. ‘죽다’라는 표현은 ’inter hominem esse desinere’로서 ‘더 이상 사람들 사이에 있지 않다’라는 의미이다. 건강한 유기체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자기 기능을 효과적으로 수행한다. 그러나 병든 유기체는 그 연결고리가 단절되어 있거나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단절된 유기체는 결국 죽음을 뜻한다. 그 유기체에 속한 모든 것이 죽는 것이지 개중의 우월(?)한 세포나 근육질은 살고 그렇지 못한 것만 선별적으로 죽는 게 아니란 말이다. 썩은 유기체 안에서 모든 세포는 어쩌면 이미 죽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개인의 실재를 지탱해주는 일차적 자양분은 개인과 긴밀히 연결된 다양한 “나와 너”의 관계를 통해서 얻어진다. 자신을 둘러싼 관계와 상황에 대한 재해석을 건강하게 수행하는 과정을 통한 근본적인 치료가 막혀버린 자의 자살선택은 어디까지나 한 개인의 실패로만 치부하여 해석하는 것은 전혀 옳지 않다. 이것은 마틴 부버가 지적하고 있는 바와 철저히 대치한다. 다시 말해, 오로지 ”나와 그것“의 관점만으로 인간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이뤄질 수는 없다.

“내 끝 속에 내 시작이 있다” – T.S Eliot

박진영(서일리노이대 심리학과 졸업) /

학벌사회 다시보기[썩은 뿌리 자르기]

‘대학’이라 쓰고 ‘학벌’혹은 ‘낙인’이라 읽는다

한국사회에서 학벌 문제와 부동산 문제를 속 시원히 말하기 어려운 것은 집권자들과 시민 모두 자본의 이해관계를 내면화하여, 주로 그것을 자신들의 안녕을 위한 도구와 수단으로 간주하고 이용하면서도, 그 욕망구조가 까발려지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은 아닐까. 물론 그것은 국가의 교육과 주택에 관한 역할과 정책이 그 문제들을 완화하는데 거의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문제의 현상은 신자유주의 속에서 어떻게 하든 홀로 살아남기, 자본주의가 가르쳐 준 원리를 습득해서 보다 더 경쟁적이고 탐욕적인 사람이 되기로 드러난다. 배우고 가르치는 교육에 관한 문제가 서열화, 사교육, 학벌의 문제로, 사람이 살아가고 서로 어울리는 주택과 토지의 문제가 과도한 대출, 투기, ‘먹튀’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 말이다.

그런데 학벌이라는 사회적 자본과 부동산-불로소득이라는 경제적 자본을 통해 무엇인가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든, 그것들에 대해서 기대할 것도 잃을 것도 없으면서 ‘나도 언젠가, 혹은 나의 자식들은 언젠가…’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든, 모두 그 문제에 연루되어 있고 그 병폐를 공고화하는 공범이기는 마찬가지이다. 가진 것이 많기에 잃어버릴 것이 불안한 자의 두려움과, 가진 것이 없기에 끊임없이 탐하고 불안한 자의 두려움은 그 근원이 같을까, 다를까. 학벌사회와 부동산사회 때문에 고통 받으면서도 그것을 여전히 작동시키는 원인을 제공하는 인민들의 욕망구조는 대학을 학벌 혹은 낙인이라 부르게 만들고, 육아와 교육과 주거와 노후복지를 모두 ‘경제문제’라고 보게 만든다. 그리고 그 굴레에 갇혀 악다구니하는 한 이 지루한 논쟁과 입시지옥이라는 제자리걸음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인다.

사람을 도구로 여기며 이윤만 추구하도록 강요하는 자본의 논리가 계속 강고해지고 그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내려는 사람들의 존재양식은 변함이 없는데, 혁신적인 제도 개선과 의식 개혁이 일어날 수 있을까. 서울대가 기초학문 연구중심의 대학원 체제로 재편되고 평준화된 국립대 네트워크가 만들어지면 대학서열화가 사라질까. 대학서열화 문제가 완화되더라도, 높은 사교육비를 감당할 만큼 부모가 경제력이 있고 비교적 똑똑하고 성실하지만, 사회의 지배원리에 대한 의심은 희박한 아이들이 모이는 ‘유사서울대’가 다시 만들어지지 않을까. 얼마나 ‘경쟁력 있는’재단이냐에 따라, 즉 얼마나 대학교와 고등학교가 기업화되느냐에 따라 더 세분화된 서열이 매겨지지 않을까. 이렇듯 학벌 문제는 한국의 뒤틀린 경제성장 속에서 ‘괴물’이 된 입시교육이라는 암 덩어리의 대표적인 증상일 뿐이다. 그래서 학벌 문제는 교육 문제이지만,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결코 교육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과 같은 대학 중심의 패러다임으로는 세부 교육정책이 아무리 바뀌더라도 부모들은 한숨 쉬고 아이들은 더 피곤해질 뿐이며, 사교육산업 자본과 거기에 기생하는 스타강사만 덩달아 미친 춤판을 옮길 뿐이다. 교육 시장을 지배하는 이러한 원리가 우리를 훈육하고 규율하는 한 학벌에 의한 사회의 보수화, 과도한 사교육비 지출과 입시교육열에 의한 개인적?가정적?국가적 ‘자해 쇼’는 계속 될 것 같다.

국가와 학벌

과연 한국사회의 강고한 기득권 세력은 땅값과 집값이 떨어지고 대학서열화가 약화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까. 서울시장은 학교의 무상급식은 퍼퓰리즘 정치일 뿐이고, 보편적 복지가 아니라 ‘무차별적’복지이기 때문에 뭔가 두려운 것인가 보다. 그렇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지속적으로 격차와 차별, 불평등과 경쟁이 이 땅의 지배원리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화법은 무척 단순해서 자신들이 느끼는 두려움을 말하기위해 늘 국가의 존립과 자유민주주의 정체성이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가져다 쓴다. ‘그들’이 그렇게 목 놓아 외치는 국익에 대한 심대한 위협이라는 것이 단지 그들의 지배체제와 이익구조에 대한 위협을 말하는 것임을 마치 아무도 모르고 있다는 듯이.

서울대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 시절부터 학벌은 ‘국가’에 의해 형성되고 강화되어 왔다. 물론 현재의 학벌체제는 봉건시대의 엘리트를 규정지었던 족벌과 문벌의 근대적 형태이기는 하지만 일제가 이식한 제국주의와 국가주의의 산물이기도 하다. 국가를 위해 헌신할 유능한 관리를 양성하고 국가권력에 종속된 엘리트에 의한 지배체제와 그것을 확대재생산할 교육체제의 마련을 위해, 그 피라미드 체제의 정점에 거의 무한대의 상징가치를 부여하는 것. 물론 이러한 원리는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의 교육‘인적자원’부 시절에도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국가가 보증하는 학벌로서의 서울대는 오늘날 다른 대학에 비해 압도적인 수로 고등고시 합격자를 배출하는 것만 봐도 여전히 일본 제국주의를 위한 경성제국대학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으며, 동시에 가장 창의적이지는 않지만 필기시험에 가장 능한 인재들을 배출하는 최고의 학벌인 것은 틀림이 없다.

학벌투쟁은 계급쟁투인가

부모의 재산 정도에 따라 대학이 달라질 경향이 크고, 졸업한 대학에 따라 소득의 격차가 여전히, 아니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면 이미 현재의 ‘학벌투쟁’은 개인과 가족의 사회적 자본을 쟁취하고 계급적 수준을 결정할 중대한 사명을 띤 계급쟁투의 현장이며, 더할 나위 없이 정치적인 사안이다. 그런데 말이다. 만약 불공정한 게임에 참여하고 있더라도 그 게임의 룰을 벗어나는 것이 곧 그 세계에서의 회복불능을 뜻하거나, 게임의 진행방식에 대해 이의 제기를 하는 것이 곧 지독한 패배를 뜻하는 것이라면, 그냥 그 불공정한 게임의 법칙을 용인하는 것이 최선은 아니라도 차선의 선택이 될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형식적 민주화를 견인했던 386, 이제는 486이 된 ‘그들’도 대부분 그러했다. 그들은 좋은 학벌도 대기업 취업에 바로 써먹히지는 않는 요즘 같은 시대에 20대로 살아가지 않는 것에 안도했다. 그들은 양화된 격차에 따라 차등적으로 한정된 사회적 자본을 미리 배분받아 버리고 자신의 등급을 스스로 낙인찍게 만드는 이 불합리한 게임에 대리인으로 임하며, 그들의 자녀들이 (80년대의 그들처럼) 이의제기를 하기보다는 기꺼이 그 게임의 승자가 되어주기를 원했다. 물론 이 학벌 따기 게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별로 없지만 그 게임에서 승자가 될 확률이 높은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다. 이 게임을 벗어나 또 다른 ‘게토’에 소속되더라도 대학졸업장을 요구하는 사회의 요구에 뒤늦게 그 게임 판에 한 발을 넣을 수밖에 없는 곳이거나 외국 대학을 준비하는 비싼 게토이다. 그런데 교육과 대학입시 문제, 나아가 취업을 위한 그 다음의 쟁투를 ‘제로섬 게임’과 ‘죄수의 딜레마’로 바라보는 이 모든 관점 자체가 우리의 지적?실천적 탈출구를 닫아버리고 있다.

입시교육의 상처와 신화를 응시하기

자의반 타의반 진보적인 지식인이라는 교수님들도 어느 순간에 경기고와 경북고를 따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어린 시절 입시전쟁의 ‘승자’로서의 우월감은 그들의 도덕적 삶과 학문적 업적 형성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그리고 필자가 고교시절 경험했던 우열반과 보통반의 극심한 차별은 필자의 의식 깊은 곳에 어떤 열패감을 남겨 놓았을까. 일류 대학을 나온 부모들은 그 사회적 특혜를 잘 알기 때문에, 나머지 대다수 사람들은 그 차별과 서러움을 알기 때문에 흔히 어느 집이나 ‘잘 키운 자녀’는 ‘좋은 대학에 들어간 자녀’가 된다. 학벌투쟁은 온갖 부당거래와 비리가 관행이 된 기업 중심의 사회체제를 혁신하는 동시에, 85%가 대학에 진학하면서도 학벌의 권능에 벌벌 떨어야 하는 우리 내면의 욕망과 두려움을 극복해야 하는 문제여서 접근하기가 아주 어렵다. 가수 타블로의 학력 위조 문제를 제기했던 ‘타진요 사건’같은 해프닝을 검경?언론이 진지하게 다루고 뒤쫓을 만큼 우리에게 학벌 (혹은 누군가의 특권) 문제는, 우리 사회의 배후와 우리 내면에 깊은 생채기를 가져왔다. 저마다의 내면이 응시되고 조금씩 말과 행동으로 변화하지 않으면 국가의 정책과 제도도, 학교와 교육도, 아이들과 우리 모두의 미래도 바뀌지 않는다.

자녀의 교육 문제를 자녀가 앞으로 살아갈 생존수단이자 혹시 모를 사회적 안전망이라는 입시문제로 축소?환원시켜버리고 그 게임에서 충실한 플레이어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욕망을 먼저 성찰할 때 어린 세대들의 폭력적이고 불안정한 내면을 들여다보고 매만질 수 있지 않을까. 자율성과 다양성이 존중받는 학교, 창의성이 피어나는 교실은 그 다음에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10대들의 삶을 저당잡고 그들에게 이것은 인생을 건 멋진 한 판 싸움이라고 사기 치는 건 이제 그만하자. 그들에게 하루에 한 시간만이라도 비정규직의 실상과 그들이 장차 ‘교수님’이라고 부를 대학 시간강사들의 현실에 대해 알아가고 고민하고 토론할 시간 같은 것을 주면 10년 후 세계는 어떻게 변할까. 바보야, 문제는 사람이야!

조배준(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대학서열화 폐지를 위한 물음은 우문우답(愚問愚答)인가? [썩은 뿌리 자르기]

질문놀이

나이가 들면서 혼자 망상(妄想)하는 습관이 생겼다. 망상놀이의 즐거움은 엉뚱한 질문과 대답이다. 단순한 예로, 쥐가 낙동강을 헤엄쳐 건널 수 있을까? 오리발로 헤엄쳐서? 전용보트를 만들어서? 아! 보로 건널 수 있겠구나! 이 놀이의 시작은 질문이며, 조금씩 변형시켜 계속 질문한다. 윤리적 규범을 생각하면 우문현답(愚問賢答)을 해야겠지만, ‘혼자만의 산책’이기에 ‘우문우답(愚問愚答)’으로 끝난다. 사춘기에 끝냈어야 할 놀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나이가 들수록 더 심해지는 것 같다. 나의 경우 건망증뿐만 아니라, 이러한 유치함이 더 큰 문제다.

한국사회에서 학벌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잘못된 질문일까 아니면 풀 수 없는 질문일까? 만약 풀 수 있고, 사회적 의제의 중요도에 따라 순서를 정한다면 몇 번째에 해당할까? 한국사회는 학벌사회일까? 이에 대해 몇 %나 반대할까? 한국의 학벌사회가 공정하다는 주장에 대해 몇 %나 찬성할까? 만약 불공정하다면 그것을 극복할 의지를 가진 사람은 몇 % 정도일까? 만약 그 의지가 있다면 전국의 모든 대학을 없앨 수 있을까? 모두 없애지 못한다면 그 대학들을 평준화할 수 있을까? 평준화를 할 수 없다면 대학입시만이라도 없앨 수 있을까? 대학입시를 없앨 수 없다면 선발방식이 아니라 추첨방식은 안될까?

이 질문들을 보고 화가 나신 분들은 건전한 상식을 가진 분들이고, 오히려 재미있다고 생각하신 분들은 우문우답(愚問愚答)의 동호회원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대답은 질문 속에 있고, 인간은 자신이 풀 수 있는 문제를 제기하기 마련인데, 질문의 연쇄가 현실적으로 공감을 얻어내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학벌사회에서 부모님과 나는 전우(戰友)

‘학벌사회’문제가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교육문제이면서 아니기 때문이다. 교육은 한국사회의 커다란 욕망거울이었고, 국가와 자본의 이해관계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바꿔왔다. 그리고 그 정책의 지렛대는 언제나 대학과 그 입시의 변화로 나타났다. 그렇기 때문에 매년 반복되는 대학입시에 대한 관심은 예나 지금이나 큰 차이는 없는 것 같다. 물론 입시전형이 다양화되면서 소위 ‘수능’에 대한 관심은 과거 ‘학력고사’에 대한 관심보다 줄었다. 그러나 과거 고사장 앞에서 엿을 붙이고 기도했던 부모님의 모습보다 각 대학 입시설명회장을 뛰어다니는 부모님의 모습이 더 강조될 뿐이다. 형태는 바뀌어도 ‘병목현상’처럼 대학입시에 집착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우리의 교육현실은 크게 변한 것 같지는 않다. 오늘날 졸업생의 85%가 넘게 대학에 들어가기 때문에 양적으로 보면 대학입시와 관련된 경쟁이 없어진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최근 모 일간지에서 학벌사회에 관련된 대안을 모색하고자 기획보도를 마련하였다. 기사 내용 가운데 2006년 대학졸업자 월평균 소득을 소개했다. 1-5위권 대졸자 227.5만원, 6-10위권 대졸자 205.4만원, 11-30위권 대졸자 193.9만원, 그 외 4년제 대졸자 169.0만원, 전문대졸자 158.0만원. 이를 기계적 방식으로 분석하면, 대학이 등수로 매겨져 있다는 것이고, 그에 따라 소득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즉 대학의 서열화와 소득의 등급이 연동할 뿐만 아니라 대학의 등급이 소득의 등급을 결정한다. (기사원문)

예시가 소득 차이만을 제시해 단편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자신의 경험이든 가공된 공포 혹은 불신의 이야기든 학력과 소득의 격차가 존재한다는 것은 한국사회의 뿌리 깊은 현상이다. 물론 이것이 반례(反例)적 개인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이러한 구조와 믿음 속에서 대학 서열의 정점에 오르려는 이 전쟁에서 내 부모, 나 그리고 내 자식은 쉽게 ‘전우(戰友)’가 된다.

학벌사회 속에 강화되는 불공정한 경쟁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전장(戰場)’은 진보와 보수 모두에게 비판을 받는다. 보수진영의 경우 교육정책의 ‘개혁’의 외양은 기회와 선택의 다양성이다. 단순한 학력고사에 따른 단순한 서열화보다 다양한 전형을 통한 기회와 선택의 다양성을 제공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에 부합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진보진영의 경우도 학력고사에 따른 서열화의 문제점에는 공감한다. 그러나 정부가 추진해 온 다양화가 기회와 선택의 다양성보다는 사교육을 매개로 사회적 양극화의 재생산이라는 점을 비판한다.

지난 달 30일 전국 모든 초·중·고교의 학교별 2010년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 소위 ‘일제고사’의 결과가 공개되었다. 그 결과를 보도한 신문의 내용을 인용하면, “서울지역 초등학교에선 사립학교가, 중학교에선 강남3구(강남·서초·송파)가, 고등학교에선 특수목적고(외국어고·과학고·국제고)가 성적 상위 20위권을 휩쓴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하위 20위권에는 경제 여건이 상대적으로 열악한 지역의 학교가 다수를 차지해, 지역에 따른 학력 양극화가 극심한 것으로 드러났다.” (기사원문)

물론 이 속에서도 ‘개천의 용’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작년 11월에 내놓은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의 ‘외고 교육 실태’보고서를 인용한 모 주간지의 보도를 보자. “외국어고 학생 가운데 가구 소득이 500만원을 넘는 비율은 49.4%지만, 일반고에서는 그 비율이 절반 이상 떨어진다(23.8%). 사교육 참여도도 달랐다. 외국어고 학생 10명 가운데 9명꼴(88.7%)로 사교육을 받지만, 일반고에서는 65.3%만이 사교육을 받았다. 월평균 사교육비도 외국어고 학생이 45만3천원으로 일반고 학생(22만원)의 두 배를 넘었다.” (기사원문)

인용문을 끌어들인 것은 현재 초·중등 교육과정이 출발점부터 불공정한 경쟁을 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교육제도는 ‘학력고사’에 의한 전국적 서열화를 개혁한 것이 아니라, 기회와 선택의 다양성이란 가면을 쓴 부모들의 돈 잔치의 형태로 변화한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불공정한 정글 속에서 경쟁은 오히려 강화된다. 그 속에서 대학의 서열화뿐만 아니라 이제 특수목적고를 매개로 한 초·중등 교육기관의 서열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대학서열화의 극복 없이 학벌사회의 변화는 불가능하다

그럼 대안은? 그 동안 많은 교육학자와 정당 및 시민단체들이 대안들을 제시해왔다. 많은 논의과정은 학벌사회의 극복이란 총론적 방향에 동의하지만, 그 실현의 구체적 정책 수단에 대해서는 다양함을 보여준다. 진보정당의 경우 ‘국공립대의 통합네트워크’내지 ‘통합단과대 체제’를 통해 최소한 국공립대부터 서열화를 폐지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제시한다.(기사원문)

그러나 이러한 진보진영의 대안 제시는 현실의 벽 앞에서 항상 외면을 당한다. ‘누더기 법’같은 교육 정책의 변화는 교육 정책에 강한 불신과 공포가 자리 잡게 만들었다. 따라서 교육 정책이 어떻게 변하든 사교육을 통한 내 자식 밖에 믿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전장(戰場)’에서 우리는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된다.

따라서 학벌사회의 극복을 위한 대안 제시는 어려우며, 먼 길이다. 그러나 모든 교육과정에 대한 합의가 불가능하더라도, 최소한 대학의 서열화를 폐지 내지 축소해가기 위한 계기를 어떻게 만드느냐가 학벌사회를 해결하기 위한 작은 출발임을 확신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초·중등 교육과정을 정상화하더라도, 대학의 서열화가 존재하는 한 사교육에 대한 열망과 공교육 과정의 파행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대학서열화에 근거한 프리미엄의 유혹과 공포를 우리가 벗어나지 않는 한 학벌사회를 극복하기 위한 첫걸음 내딛기 어렵기 때문이다.

축구에 대해서 많은 남자들이 전문가라고 생각한다. 특히 ‘군대스리가’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축구대표의 경기력이 조금이라도 나빠지면 포털의 토론장은 벌집이 된다. 교육문제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교육의 경우 대부분 부모님이 전문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육정책의 방향을 크게 전환할 경우 벌집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대학서열화 방지를 위한 고등교육제도의 변화와 그 입시제도의 근본적 변화 없이 학벌사회의 변화가 있을 수 없다면, 그 벌집을 우리는 건드릴 수밖에 없다. 현실적-정책적 어려움 속에서도 교육 자체의 목적과 규범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벌집 건드리기 놀이가 고통스럽지만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놀이과정에서 질문은 100년을 내다보는 큰 물음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비록 우문우답(愚問愚答)이더라도.

김광호 (서울시립대 석사과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