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은 뿌리 자르기]
헌법 9조의 개정과 일본의 제국주의
– 일제와 현대-
이유철 (코뮤닉스 회원)
올해로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고 100년이 지났다. 여기에 맞춰 수많은 성명서들과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일본 현 정권의 수장인 간 총리의 한일병합조약 체결 100년 ‘즈음’한 담화이다. 1995년 무라야마 전 총리가 ‘전후 50년’을 기념하여 발표한 ‘아시아 제 국가들’을 대상으로 발표한 담화 이후 15년만의 일이다. 이를 두고 대부분의 여론은 과거 식민지에 대한 담화라는 점에서 긍정적이라는 의견이다.
그러나 진보진영과 시민사회단체들은 여전히 해결되고 있지 않은 위안부문제, 독도문제, 역사교과서문제 등을 거론하며 100년 전이나 현재나 일본의 제국주의적 경향은 변화하지 않았으며,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 부터의 사과’를 뛰어넘는 담화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의 식민지배를 경험한 대부분의 아시아 나라들의 입장도 마찬가지이다. 한일병합 100년이 지난 현재 일본의 제국주의의 현주소는 어떠한가?
반세기만의 정권교체와 헌법 9조의 개정 가능성
지난해 일본에서는 반세기만에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중의원 선거에서 일본 민주당이 압도적인 차이로 지난 54년간 정권을 유지해온 일본 자민당을 물리친 것이다. 당시 선거의 화제는 일본의 신자유주의와 이에 따른 병폐였으나 국내와 다르게 주변국들은 對아시아 외교를 선언한 민주당의 이후 행보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았다.
한국에서는 얼마 전 사임한 하토야마 전 총리의 영부인이 한류 광팬이라는 것부터 시작하여 민주당 실세인 오자와 전 간사장의 한국에 대한 애착 등을 근거로 내세우며 과거사 해결을 비롯해 한일관계 개선 등에 대한 핑크빛 전망을 그렸다. 물론, “정권교체 당시 제국주의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참배를 하지 않겠다”, “과거 식민지는 잘못된 것”이라는 등의 발언을 하며 과거 자민당과는 어쩌면 180도 다른 행보를 보이는 이들에게 건 기대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과거사에 대한 청산과 對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경향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경향을 인식하는데 있어 중요한 잣대가 되는 것은 헌법 9조, 일명 ‘평화헌법’이다. 일본 헌법 9조는 2차 세계대전 후 승전국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일본의 ‘전력보유(군대) 금지’와 ‘국가 교전권 불인정’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즉 이는 제국주의 일본을 전망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잣대이며, 이 조항에 대한 개정은 또다시 일본이 제국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교두보가 될 것이다.
따라서 완전한 제국주의 국가로서의 일본을 만들기 위한 일본 국내 보수주의자들은 이에 대한 개정을 꾸준히 시도하고 있다. 이는 적어도 외면적으로는 과거 자민당 아베 전 총리에 의해 명문개헌이 제기되면서 적극적으로 추진되지만 민주당의 반발로 무산되고 만다. 이러한 외면적 과정이 주변국들을 안도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 상황을 살펴보면 일본 민주당도 어쩔 수 없이 포기한 것일 뿐이다. 그 이유는 첫째, 민주당이 개헌수속법에 대한 자민당과의 협의를 비토한 것은 헌법 9조 수호를 위한 ‘9조회’의 활동이 커지면서 여론의 움직임을 반영한 결과이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당시 오자와 민주당 대표가 선거를 앞두고 자민당과의 대결노선을 취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과거 민주당의 행보를 살펴볼 때, 개헌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2005년까지 일본 민주당의 기본적인 입장은 명문개헌에 긍정적이었다. 특히 주목해 볼만한 점은 2003년 당시 민주당 대표이자 현 일본 총리인 간 나오토가 작성한 메니페스토와 현 민주당 간사장인 오카다 카쓰야가 작성한 2005년 민주당 메니페스토이다. 당시 민주당 메니페스토는 ‘헌법창조’라는 표현으로 개헌입장을 명확히 하고 있었다.
2007년 오자와 전 간사장의 취임으로 민주당의 자민당 대결노선이 취해지지만 의원 개개인으로 살펴볼 경우에는 민주당 소속 의원들의 개헌입장은 변함이 없다. 예를 들어 개헌파 의원 모임인 ‘신헌법제정 의원동맹’에서는 아베 개헌 좌절 후 새롭게 민주당 내 개헌파를 임원으로 영입하는데, 2008년 3월 의원동맹총회에서 다름 아닌 당시 민주당 간사장이었던 하토야마 유키오와 현 칸 정권의 외무대신인 마에하라 세이지가 그들이다. 이러한 요인들은 일본 민주당도 언제든지 개헌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다.
최근 사민당과의 연립이 깨지면서 국민여론이라는 장애물만 해결되면 개헌의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이는 복고적 형태의 제국주의 일본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미국의 군사개편과 일본
이러한 일본의 움직임은 일본 헌법 9조 개정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 이사국 진출로 이어지고 있다. 결국 일본은 제국주의적 경향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지원하는 것은 다름 아닌 미국이다.
지난 2007년 미국에서는 對아시아 정책에 관한 흥미로운 보고서가 제출되었다. 일명 아미티지-나이 보고서가 그것이다. 미국 대외정책의 싱크탱크인 CSIS에서 나온 이 보고서는 전?현직 미의회 의원들도 다수 참여한 영향력 있는 보고서로, 미국 대외정책의 전망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이 보고서의 대략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Pan-Asia(중국-러시아)에 대항한 Ocean-Asia(미국-일본-호주)의 강고한 연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협조체제 구축에 있어 핵심이 미일관계 구축이다. 따라서 이 보고서에서는 미국이 세계전략을 세우는데 있어 일본의 확대된 역할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서 헌법 9조의 개정과 나아가 일본의 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 이사국 진출의 필요성에 대해 제언하고 있다.
이 보고서 작성의 주된 역할을 한 학자 중 한 명인 미국의 대표적 친일파 인사인 조셉 나이가 현재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대외정책 고문을 맡고 있다는 점은 이 보고서가 현재에도 매우 유효한 것임을 의미한다.
그러한 미국이기에 2009년 일본 민주당이 선거를 앞두고 보인 태도변화는 충격적이면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테러대책특차법연장 반대와 미일지위협정 재검토, 오키나와 기지이전을 내세운 일본 민주당에게 미국은 즉각적으로 대응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자신의 착각-이라크 전쟁 반대로 미국 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오바마도 이해해 줄 것이라는-에 대한 책임을 고스란히 자신이 떠안아야만 했다. 미국의 동북아 안보정책에 있어 핵심기지인 오키나와 기지 문제 등에 대한 일본의 요구들은 미국 군사개편의 핵심사항이며 당장 필요한 문제였기에 미국의 입장에서는 그 무엇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미국의 압력으로 하토야마는 오키나와 현 외 기지이전을 포기했을 뿐더러, 5년간 아프가니스탄에 50억 달러, 2년간 파키스탄에 10억 달러 지원에 관한 정책마저 통과시켰다. 그리고 그는 사퇴했다. 재계의 압력에도 꿋꿋하게 복지정책 추진을 주장했던 하토야마였지만 미국의 압력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 부분은 미국의 압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과정들은 일본 스스로의 제국주의적 야망과는 별도로 미국의 압력 하에 군사대국화 정책이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군사적, 경제적 패권을 쥐고 세계를 뒤흔들었던 미국은 중국이라는 새로운 패권국의 등장과 세계금융공황을 계기로 급격히 흔들리고 있다.
바야흐로 포스트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선택할 수 있는 최적의 파트너는 일본이다. 왜냐하면 일본은 풍부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미국과 경쟁하는 패권국이 유일하게 존재하는 동아시아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이 일본을 비롯해 한국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본의 제국주의와 그 전망
일본의 제국주의적 경향성은 외면적으로 정체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민주당에 대한 그릇된 인식은 이에 대한 오해를 확대시켰다. 헌법 9조를 둘러싼 개헌에 대한 입장은 기본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자민당 주도의 보수주의적 보통국가론(명문개헌론)이든 민주당 주도의 자유주의적인 보통국가론(해석개헌론)이든 대외적인 군사활동을 목적으로 하기는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본의 헌법 9조 개헌을 둘러싼 제국주의적 경향성에 제동이 걸린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도 국민들의 반발에 있다. 그리고 9조회를 중심으로 한 호헌운동이 그 중심에 있다.
2004년 6월 자위대의 이라크파병과 명문개헌론이 대두되면서 이에 위기감을 느낀 9인의 제언으로 만들어진 9조회는 매년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2009년 현재 그 수가 8000명에 육박하게 되었다.
9조회의 특징을 살펴보면 구성원들의 연령대는 대부분 과거 전쟁세대인 50~70대가 중심이며, 개인 멤버십형태인 이 조직의 이념적 스펙트럼은 진보부터 보수까지 아우르며 헌법 9조 개정 반대라는 단 한 가지 원칙에 동의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광범위성은 결국 2004년 당시 개헌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찬성 65%였던 여론을 2008년에 이르러서는 뒤엎고 만다. 당시 집권당도, 현재 집권당도 개헌정책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아가 이들 9조회 구성원들 중 일부 좌파들은 9조+25조(생존권) 운동으로 이를 확장시키면서 반신자유주의 운동으로까지 확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국민적 반발에도 불구하고 평화헌법 개정과 일본의 군사대국화 야욕이 다시금 표면화될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정치 안보지형적 요인, 정치세력의 폐쇄성, 미국의 압력 등은 그러한 요인들이다.
일본 정치세력의 입장에서 개헌 및 군사대국화라는 과제는 사회양극화의 급격한 확대에 따라 나타나고 있는 일본 내 국민들의 계층, 계급간의 위화감을 잠재우고 이들을 하나로 묶어 내면서 동시에 이들을 보수정치의 집표기계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유일한 기제이다.
또한 중국의 패권국 부상과 북한의 핵개발, 러시아의 자원 패권주의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한편으로 독자적인 패권유지가 어려워진 미국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서도 이들 이슈는 계속해서 제기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요인들을 극복하거나 견제하기 위해서는 ‘전쟁’이라는 공통적인 경험(두려움)에 기반한 각국 시민사회 간의 교류 및 협력체제 구축이 필요할 것이다. 현재 일본의 제국주의적 경향은 일국적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패권국들 간의 제국주의적 경쟁을 지양하고 억제해 나가기 위한 동북아 시민사회들 간의 가칭 ‘동북아 평화를 위한 시민사회 6자회담’은 하나의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힘의 논리가 전부인 국제사회에서 피해자로 남을 수밖에 없는 국민들이 스스로 전쟁에 대한 공포를 공유하고 평화를 지켜나가기 위한 협력 및 교류는 이기적 행위자의 폭주를 막기 위한 유일한 기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