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철학의 유언]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철학의 유언]
지미정( 2012교육강좌 수료)
얼마 전 가끔 소식을 전하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배 죽음을 알리는 부고를 받았다고·····. 이유는 물론 외로워서이기도 하겠지만, 270만원 때문에 목을 맸다면서 자기 속이 까맣다고 했다. 그러면서 친구가 물었다. “그 선배가 철학적이었다면 살아있을까?” 나는 철학을 했어도, 또 죽음의 원인이 100만원이었어도 자살은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친구에게 “철학을 했어도..”라는 말을 쉽게 내뱉었지만 ‘어쩌면 철학을 했으면 조금은 다를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처음 돈의 액수를 들었을 때, 나는 죽음의 원인이 단순히 돈의 액수로 환원되는 것 같은 느낌에 거부감이 들었다. 물론 친구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왜 돈 때문에 사람이 죽어가야 하는지를 나와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것을 안다. 아마도 뒤늦게 철학을 공부하겠다고 용을 쓰는 친구이기에 어떤 말인가를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친구에게 철학을 했다면 다를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철학을 공부했을 때, 어떤 면에서는 현실을 바라보는 고통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철학을 공부했을 때 생을 바라보는 관점이 조금 다를 수 있다. 그래서 현실을 비관하기도 하지만 현실을 바꾸려는 의지도 생기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친구 질문의 의도를 그 선배가 철학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힘을 가졌다면 돈의 고통과 외로움을 죽음으로 끝내지는 않았을 거라는 말로 이해한다.
삶과 철학
내가 생각하는 철학 공부의 의의는 우리 사회가 가진 여러 가지 모순에 눈을 떠 현실을 비판하는 이성을 가질 수 있다는 데 있다. 또 철학의 힘은 개인의 행복을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찾음으로써 주체적 삶을 살아가는 노력을 가능하게 만든다. 인간 삶의 모습과 사유 방식을 통해 좀 더 깊이 인간 본성을 탐구하는 일도 결국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의 물음에 답을 얻는 일이다. 철학은 지혜를 주는 학문이다. 어떤 사람은 종교에서 위로를 받지만 나는 철학 공부에서 위로를 얻었다. 나는 씨알 함석헌 선생을 통해 철학에 눈뜨고 비교 종교학 책을 몇 권 보던 중, 비트겐슈타인을 만났다. 그렇게 내 철학사랑은 시작했다. 비트겐슈타인은 현대 영미 분석철학자로 세상에 더 많이 알려졌지만, 나에게 비트겐슈타인은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철학자로 다가왔다.
비트겐슈타인(1889~1951)우리는 삶에 공허를 느끼면서 행복할 수 없다. 나는 대학 3학년 때 만난 지금의 남편과 3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 의미도 모른 채 어린 나이에 시작한 결혼 생활이 나름 행복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원하는 삶이 이게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까지 나는 내 꿈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고 내 꿈이 무언지조차 모르고 살았다. 그래서 삶은 늘 공허했고 불만족스러웠다. 주부로 살면서 아이들의 교육에 내 에너지 대부분을 소진했지만 얼마 안 가 그것도 나를 만족시키진 못했다. 나는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들도 행복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오기 시작했다. 그 시기가 아마 내 존재에 대한 물음이 시작된 시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처음에 아이들의 논술 지도를 위해 시작한 공부는 어느새 배움의 열망으로 변했고 아이들의 교육비를 대기도 어려운 현실에서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학부 편입을 했다. 공학을 공부한 나는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인문학 공부가 필요했다. 뒤늦게 찾은 철학 공부의 즐거움은 그 어느 즐거움에 비할 수가 없었고 가족을 집에 두고 새해 첫날에도 도서관을 찾을 정도였다. 나의 철학에 대한 애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석사와 박사 과정을 꿈꾸게 했다.
자아실현의 삶
요즘엔 ‘자아실현’을 위해 무언가를 감수한다고 하면 조롱거리가 되는 듯하다. 돈 앞에서 자아실현에 대한 욕망은 초라해졌지만 인간에게 ‘자아실현’만큼 중요한 일도 없다. 심리학자 매슬로(Maslow, Abraham H)는 인간의 욕구 단계 가운데 자아실현의 욕구를 가장 상위에 두었다. 자아실현의 욕구는 인간의 생리, 안전, 사랑, 존경의 욕구가 충족된 후에 생기는 욕구라고 한다. 우리는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자신의 꿈을 접고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보면서도, 자신의 꿈을 포기 못해 처자식을 고생시키거나 자기 길만을 가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작년 초, 한 시나리오 작가의 아사 소식은 우리 사회 곳곳의 부조리함을 일깨운 사건이자 내겐 인간의 자아실현 욕구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그 사건은 우리에게 그녀의 창작에 대한 고통에 비해 최저 생계비로만 살 수밖에 없는 문화예술계 구조 문제를 일깨워 주었다. 더 나아가 나는 그녀가 자신이 선택한 그 일을 좀 더 일찍 그만두거나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병행하지 못한 이유가 궁금했다. 그녀에 대해 잘 모르는 나는 그냥 추측해본다. 그녀에게 작가로서의 삶은 단지 생계비 마련을 위한 일이 아니라 창작의 고통을 감내할 만큼의 희열을 주는 일이었으리라. 그녀가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병행하지 못한 것은 그녀가 생을 만만하게 보아서도 아니고 현실과 타협하기 싫어서도 아닌, 다른 일과 병행하면서는 마음먹은 작품을 도저히 써낼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녀에게 창작은 자아실현 욕구와 관련한 것으로, 생의 위협 앞에서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일이 아니었을까? 그녀가 흥행을 위해 그녀 작품을 상업적으로 만들었다면 어쩌면 궁핍한 예술가로 살다 가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물론 그녀의 작품이 내 추측과는 달리 작품성이 떨어졌을 수도 있다. 그래서 혹자는 나의 이런 추측을 비판할 수 있다. 어쨌든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매슬로의 이론이 그녀에게는 예외적이라는 것이다. 매슬로가 인간은 가장 기본적인 생리 욕구가 해결되지 않고는 상위의 욕구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우리 주변에는 배고픈 예술가들이 많다. 또 만인의 존경을 받는 명예가 없어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자아실현의 삶을 사는 이들이 많다. 여기서 그들 모두는 생리적 욕구와 다른 욕구를 뛰어 넘는 자아실현의 욕구가 강한 자들이었음이 드러난다.
내 삶의 주인으로 살기
나는 30대 초반에서야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고민했다.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그 때 깨달았다. 현재 내가 추구하는 삶은 부조리한 사회 구조와 관습에 얽매이지 않으며 물질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삶은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며 어쩌면 유토피아로, 우리 사회에서 공감을 얻기 어려운 삶일 수 있다. 내 삶은 주인이 된다는 것은 주체적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을 때만이 가능하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물질과 지위와 권력의 소유에 집착하는 삶과 “존재 양식”으로서의 삶을 말한다. 프롬이 말하는 “존재 양식”의 삶은 “소유하지 않고도 즐거운 마음으로 자신의 재능을 생산적으로 사용해 세계와 하나가 되는 삶”을 말한다. 프롬이 말하는 “생산적”이라는 말은 창조하는 능력과는 무관한 것으로 활동의 산물보다 활동의 질에 있다. 즉 “스스로를 깊이 의식하는 사람, 자연을 그냥 지나쳐서 보지 않고 진정으로 투시하는 사람, 한 편의 시를 읽고 시인의 표현을 느낄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은 창조와 연결되지 않아도 생산적”이라고 말한다. 철학을 공부한 후에 나의 삶에도 변화가 생겼다. 나의 존재 가치를 외부에서 찾으려 했던 내 20대와는 다르게 지금 나는 의·식·주를 위한 최소한의 물질에 만족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내 삶의 주인으로 살면서 주변을 돌아보고 가끔은 그들을 위해 내 재능을 나누며 살고 싶다.
이 글을 친구와의 전화 이야기로 시작한 이유는 우리가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존재를 의식하기 위한 끊임없는 공부가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우리는 우리의 자존감을 위해 배워야 한다. 배우지 않으면 우리의 자존감은 상처입고 절망에 빠진다. 최근에는 지역마다 평생 교육차원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이 개설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철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동안 철학은 돈이 안 되는 학문이라는 이유로 외면 받아왔다. 대학의 교육도 실용적인 학과만을 남기고 통폐합하기 시작한지 오래다. 이런 교육 현실은 많은 사람들이 삶의 방향을 잃고 소유하는 삶을 지향하게 만든다. 소유가 존재라 믿는 현대인의 병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소유지향의 태도는 타인을 배제하고 자신의 재산을 지키는 일 외에는 자신을 위한 다른 노력을 하지 않게 만든다. 지식의 소유도 마찬가지다. 지식을 소유하려는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에 대한 반박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자기의 이론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노력만 한다. 그러나 타인의 이견을 열린 자세로 대하는 사람은 지식의 소유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이다. 물질이든 지식이든 소유를 지향하지 않는 삶의 태도는 공부를 해야 얻을 수 있다. 나는 공부가 부족해서인지 아직 지식을 갈망한다. 지금 내가 알게 된 것을 과거에는 몰랐고, 모른다는 사실도 모르던 내가 알게 되는 기쁨을 맛보는 것이 내 공부의 즐거움이다. 나에게 평생 하고 싶은 일을 찾은 것은 행운이다. 남들보다 많이 늦었지만 나는 내 북장단에 발맞추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