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신술을 사용하는 철학자가 있다면?
홍길동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듯이 우리에게도 ‘두 장소’에 동시에 나타나는 재주가 있다면 어떨까? 두 장소가 아니라 ‘한 장소’에 동시에 나타나는 분신술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무슨 일을 하게 될까? 만약 한 장소에 동시에 나타나는 재주를 지닌 사람이 ‘철학자’라면, 철학자는 그 재주를 어디에 사용할까?
아마도 철학자 분신들은 동일한 주제에 대해 자신들과 반대 입장을 지닌 사람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힘을 합쳐서 상대방을 한 목소리로 공격할 가능성이 높다. 천하무적의 분신들.
그러나 만약 그 자리에 반대 입장을 지닌 사람은 없고 ‘단지 분신들만 존재’한다면, 어떻게 될까? 분신들끼리 서로 반대 입장을 취하여 끝나지 않는 논쟁을 벌일지도 모른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지독하게 물고 늘어지는 분신들.
동일한 분신들이 환상 세계가 아니라 ‘현실 세계’에 실제로 나타나서 반대 주장을 펼친다면, 우리는 그들을 양보 없는 논쟁을 벌이는 집요한 철학자로 간주하기보다는 반성 능력이 부족하여 논리적 모순을 범한다는 둥, 오류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둥, 철학자로서 자질이 부족하다는 둥, 심지어는 자아 분열, 다중 인격 운운하면서 비판을 그치지 않을 것이다.
철학사를 들쳐보면, 청년기 때의 생각이 바뀌어서 말년에 자신의 생각을 번복하거나, 간혹 모순되는 주장을 펼치는 철학자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바뀌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후대 사람들이 동일한 주장에 대해 ‘해석’ 내지 ‘가치 평가’를 달리 하여 대립각을 이루기도 한다. 그 중에는 너무도 당연해서 도저히 ‘그 해석’과 ‘그 가치 평가’를 바꿀 수 없는 것까지도 전적으로 뒤집어서 세인들에게 충격을 주는 경우도 있다.
현대에 들어 충격파를 만들어내는 한 예로 고대 철학자를 들여다보자. 억울한 누명을 쓰고서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와 그 적들인 소피스트들을.
상투적 대립 – 소크라테스는 좋은 놈, 소피스트는 나쁜 놈
반드시 철학계가 아니더라도 일상 세계에 타산지석의 모델 내지 반면교사로 평가되던 소피스트들, 그들은 상투적 관점에서 보면 인류 역사상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 소피스트는 잘못된 의견과 궤변이 난무하는 폴리스 안에서 두려움 없이 쓴 소리를 한 강직한 소크라테스를 미워하여 – 허위를 유포하고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는 – 억울한 누명을 씌워 독배를 마시게 했으니, 소피스트가 나쁜 놈의 대명사가 된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단지 ‘한 인간’을 죽인 것이 아니라, 사상적 유산을 어느 정도 만들어낼지를 가늠하기 어려운 ‘위대한 천재 철학자’를 죽인 것이며, 그것은 곧 그가 부르짖는 ‘보편 규범과 보편 도덕’을 죽인 것이며, 궁극적으로 ‘진리’, ‘보편 진리’ 자체를 살해한 것이 된다.
진리 살해, 진리 매장은 소피스트가 주장하는 의견(잘못된 주장, 억견:doxa)을 진리(episteme)로 부각시키는 것을 동반하기 때문에, ‘진리 대 억견의 대립 구도’뿐만 아니라 ‘진리’와 ‘진리 인식 가능성’까지도 거부하는 것이 된다. 소피스트에게 보편 진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진리 인식은 불가능하며, 그래서 진리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이고, 결과적으로 진리는 의견이라서, 절대 진리를 주장하는 소크라테스는 죽음에 처해져야 한다.
소피스트에게 진리는 논쟁에서 이기는 자의 주장이며, 논쟁을 펼치는 정치의 장에서 이기기만 하면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 그에 반해 진리 다양성을 비판하면서 보편 진리와 보편 규범을 들고 나온 소크라테스와 진리 일원성은 소피스트에게는 가장 껄끄러운 적이다. 소크라테스는 집단행동을 통해 제거되어야 할 걸림돌이기 때문에, 소피스트는 나쁜 놈이 되더라도 소크라테스를 죽여서 그의 보편 진리까지 살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모순을 드러내는 분신 – 소크라테스의 이중성
나쁜 놈들의 수작에 맞서서,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라고 주장하는 행태를 비판하고 동시에 진리 일원성과 보편 진리를 관철시키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과업이다. 그러므로 좋은 놈의 면모를 철저히 발휘하여 소피스트가 나쁜 놈임을 증명해야 하는데, 그 와중에 소크라테스는 청소년을 타락시킨다는 죄목으로 소피스트에게 고발당한다.
마지막 재판에서 소크라테스는 재판관과 방청객이 그의 무죄를 수긍할 수 있도록 자신들을 설득시켜 보라는 주문을 재판관으로부터 받는다. 사형 언도 권한을 지니는 재판관 앞에서 만약 소크라테스가 수사술을 통해 이들을 ‘감동’시킨다면 그는 무죄를 ‘설득’시키는 셈이 되고, 소크라테스에 대한 사형 판결은 철회될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설득적 연설을 해야 하는 곳에서 수사술이 아니라 변증술을 사용하여 상대방을 논박한다. 결국 논쟁에서 이기기는 하지만, 상대방을 감동시키거나 설득시키지는 못 한다. 감동받지 못한, 설득당하지 못한 재판관은 소크라테스에게 사형 판결을 내린다.
희랍 당대에는 자신의 주장을 상대방에게 관철시키는 방법으로 변증술과 수사술을 사용했다. 변증술은 철학적 논증을 하는 기술로서 철저한 논쟁술이며, 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이다. 그에 반해 수사술은 상대방을 설득하는 정치적 연설의 기술이며, 다수를 향하여 이루어지는 웅변술이다.
철학적 진리를 논증하기 위해 변증술을 견지하는 소크라테스에 반해, 소피스트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견을 설득시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수사술을 악용하여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의견을 진리처럼 오독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소크라테스가 재판정에서 요구받은 것은 다수를 감동시키고 설득시키는 수사술임에도 불구하고 – 그가 변증술과 수사술의 차이를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은 탓인지, 아니면 실수인지 모르지만 – 변증술을 사용한다. 그래서 대화 상대자와의 논쟁에서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그리고 다수를 감동시키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소피스트만이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결정적 실수도 한몫하고 있는 셈이 아닐까? 수사술을 사용해야 할 곳에서 변증술을 사용했다면, 그가 변증술과 수사술을 구별하지 못한 것이며, 그러한 미구별은 ‘진리를 다루는 변증술’과 ‘의견을 다루는 수사술’의 미구별로 이어진다. 달리 말하면 진리와 의견을 구분하지 않거나, 구분하지 못하는 실수를 범한 셈이 된다.
변증술과 설득술을 구분하지 않은 것은 진리(episteme)와 의견(doxa)을 구분하지 않은 것이 되고, 그로 인해 소크라테스가 주장하는 진리도 ‘하나의 의견’으로 전락한다. ‘소크라테스 대 소피스트의 대립’은 ‘진리 대 의견’의 대립이 아니라 – 진리가 의견이 됨으로 해서 – ‘의견 대 의견’의 대립이 된다.
소크라테스가 범한 실수는 그의 죽음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간 데에서 그치지 않고 소크라테스 자신을 소피스트로 전락시킨 것이 된다. 소크라테스, 그는 또 하나의 소피스트인가?
소크라테스는 각자의 정신을 들여다보면 누구나 진리를 도출할 수 있다고 하면서 진리의 일원성과 보편성을 강조한다. 소크라테스의 대표 방법인 산파술을 보자. 산파는 산모가 아이를 낳는 것을 도와줄 수는 있지만, 산모에게 아이를 만들어줄 수는 없다. 인간 누구나 보편 진리라는 아이를 임신하고 있으며, 산파는 단지 임신한 아이를 낳도록 도와주는 것일 뿐이며, 그러한 산파가 바로 소크라테스이다. 산파술은 변증술로 전환되며, 변증술은 진리의 일원성에 기초하는 보편 진리를 찾는 방법이 된다.
소크라테스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진리가 있으며, 진리 인식은 변증술에 의해 누구나 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 재판정에서는 변증술과 수사술을 혼동하는 실수를 범함으로 해서 진리와 의견의 차이를 불분명하게 만든다.
아렌트는 『정치의 약속』에서 소크라테스의 실수를 언급하면서 소크라테스가 보편 진리와 진리 인식을 그 자체로가 아니라 ‘의견’ 가운데서 드러내는 방식으로 전개한다고 주장한다. 아렌트가 보기에 소크라테스에게 의견은 파괴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진리가 오히려 의견의 작동 가운데서 산출되며, 의견은 언제나 진리와 유착(48쪽)해 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진리는 의견을 통해 드러난다는 발상이 암묵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폴리스 공동체에서 ‘의견들의 대립’, ‘소피스트들의 대립’,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의 대립’은 ‘진리를 드러나게 하는 대립’이다. 이때 소크라테스는 진리를 위해 정신에 몰두하기보다는 ‘타인의 의견’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야 하며, 달리 말하면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가 되어야 한다. 소피스트화된 소크라테스라면, ‘소크라테스 대 소피스트의 대립’은 ‘소피스트 대 소피스트의 대립’이 된다.
의견들의 대립 속에서 진리를 드러내려면 자신보다는 다른 의견을 지니는 타인에게 귀를 기울여야 하며, 타인의 의견을 통해야 하므로, 진리 발견과 진리 주장은 외로운 철학자의 작업이 아니라 다수 속으로 침투해 들어간 소피스트의 작업이 된다.
또 하나의 모순적인 분신 – 진정한 민주주의자로서 소피스트?
분신술을 사용하여 소크라테스를 소피스트로 만들고, 진리를 의견 가운데 드러내도록 함으로써 진리가 의견이 되고, 의견이 진리가 되는 상황을 펼쳐 보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지지자인 플라톤은 아렌트와 달리 의견을 수용할 수 없다. 그래서 설득을 사용하여 대중을 다루는 것은 ‘폭력’과 폭력에 의한 ‘지배’라고 본다. 차후에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변론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기는 하지만, 설득에 의한 방법을 거부한 결과는 독배를 마시는 죽음일 뿐이었다.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고 간 소피스트는 주관주의, 진리 상대주의에 기초하여 진리 다양성을 주장하며, 이로 인해 이기주의와 유아독존을 심화시키는 부정적 태도를 낳는다. 게다가 그들은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치졸한 방법, 속임수까지 사용하여 의견을 진리로 둔갑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소피스트가 이렇게까지 타락하여 억울한 죽음을 만들어낼 때 그들이 속한 폴리스 공동체가 실제로 추구한 것은 자유와 평등이다. 자유민의 자유는 논쟁 과정에도 그대로 투영되는데, 자유의 근간이 되는 희랍의 이소노미(isonomy)라는 단어는 후대 사람들이 소피스트의 정신적 기반을 상당히 오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폴리스 공동체는 민주 질서를 갖췄지만, 민주정보다는 ‘비지배’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아렌트의 『혁명론』에 따르면, 아테네의 민주정은 “지배받지 않는 조건 아래서 시민들이 함께 생활하는 정치조직,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구분하지 않는 정치조직”(97쪽)이다. 그래서 자유는 비지배를 의미하는 이소노미로 간주된다. 만약 어떤 사람이 권력을 강화하여 타인을 지배하게 된다면, 그는 이소노미에 의거하여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 된다. 자유민의 자유는 노예와 대비시키면 타고난 것일 수 있지만, 구체적 내용을 실현하는 정치적 행위 공간에서는 비지배를 관철시키는 것이라서 – 타고난 것이 아니라 – 폴리스적 삶을 통해 만들어내는 것이다.
자유와 평등이 인간적 노력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자유민은 각자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서 정치적 행위의 장으로 나와야 한다. 이때 자신의 의견이 없는 사람은 논쟁의 한 축을 이룰 수 없다.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서 논쟁의 장으로 뛰어들 때, 그들은 정치적 입장뿐만 아니라 진리에 대한 입장도 동시에 지니게 된다. 소피스트에게 철학적 진리는 의견이지만, 의견의 대립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자유로서 비지배’가 견지되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그들에게 ‘진리가 하나이다.’라는 전제는 무의미하다.
오랫동안 권모술사라는 철학사적 지탄을 받았던 소피스트가 정치적 행위와 논쟁의 장에 들어서려면, 반드시 의견을 지녀야 하고, 다양한 의견만큼 다양한 충돌 가운데서 진리를 구체화해야 한다. 이때 중요한 점은 자신의 의견을 진리로 격상시키는 과정에서 반드시 상대방을 만나야 하고, 상대방과 대화를 해야 하고, 상대방을 무력화시키는 과정에서 비지배가 견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격다짐으로 자신의 주장을 상대방에게 관철시키는 폭력, 그로 인한 억압과 지배는 배제되어야 한다.
소크라테스의 보편 진리조차도 의견 가운데서, 다양한 의견 가운데서 드러난다면, 보편 진리를 위해 타인과 만나야 하고, 타인과 대화를 해야 하고, 타인과 만나는 공적 토론의 장에서 타인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민주적 태도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소피스트가 보여준 것은 자유분방한 토론의 장에서 각자의 의견을 거쳐서 진리를 드러내려면 언제나 ‘타인’이 필요하고, ‘타인의 의견’이 필요하고, ‘타인과의 대화’가 필요하고, 그러다 보니 보편 질서 내지 보편 규범과 보편 진리를 내세워 의견을 일방적으로 억압하는 태도를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양한 의견 가운데서 진리를 드러나게 하는 비지배적인 태도에 비추어 보면, 하나의 진리를 관철시키려고 하는 것은 폭력이고 억압이며 비민주적인 철학적 독소가 된다.
분신술로 인해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소크라테스는 독재적이고, 소피스트는 민주적이며, 소피스트는 반성 능력을 발휘하는 비지배적 대화를 하는 자이고, 소크라테스는 우격다짐으로 소피스트를 억압하는 또 다른 소피스트가 아닌가? 소피스트가 자유, 비지배, 그로 인한 다양한 의견, 의견 대립 속에서도 타인과의 대화를 지속하는 민주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태도와 정신은 망각되고 억울한 죽음을 야기한 집단행동만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비지배적인 자유정신을 실현하기 위해 타인과 대화의 장을 만드는 모습, 즉 ‘망각된’ 소피스트의 모습을 소통이 단절된 우리 사회에서 다시 부각시켜야 한다. 공적 토론과 소통의 장을 실현하기 위해 비지배적 자유가 필요하다는 것은 일방적이고 억압적인 현 정부가 낯선 타인으로 간주하는 서민들이 필요하고, 서민의 의견과 행동이 필요하며, 궁극적으로 의견 난립 속에서 상호 공존하는 방법이 필요하다는 메시지이다.
이정은(연세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