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그마르 베리히만의 영화 [겨울 빛 ]
이 영화는 빛에 관한 영화이다. 영화는 시작하면서 성찬식 의례를 보여준다. 시간은 정오이다. 밖에는 이미 눈이 내렸고 앞으로 또 눈이 내릴 듯이 캄캄하다. 북유럽의 겨울 빛은 차갑고 약하다. 겨울 빛은 마치 불투명한 잿빛 유리를 통과하는 것처럼 어렴풋하게만 드러난다. 그 겨울 빛 아래 박수근의 그림에서 나오는 듯한 나목이 간신히 버티고 있다.
성당 안은 어두컴컴하다. 감독은 영화의 사운드를 아예 죽여 놓아, 성당 안에는 정적만이 흐르고 있다. 성찬식에 모인 신도들은 손으로 헤아릴 정도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종교는 인간의 삶으로부터 유리된 것으로 보인다.
그 정적 속에서 성당(루터파 교회)의 목사인 토마스가 성찬식을 거행하고 있다. 그는 내적으로 고독하다. 불확실한 현실의 온갖 짐들과 불행으로부터 그를 감싸 안아 왔던 아내가 죽은 이후, 그 충격 때문에 그는 더 이상 신앙심조차 유지할 수 없다. 그런 가운데 그는 내적으로 신앙을 되찾으려는 필사적 고투를 펼치고 있다. 그는 성찬식을 힘겹게, 의무를 위한 의무로서 수행하고 있다. 그의 필사적 고투를 바로 겨울 빛 그리고 또한 그 아래 앙상한 나목이 상징한다.
영화 [겨울 빛]은 베르히만 감독이 모색해 왔던 미니말리즘(minimalism)의 영화 또는 ‘실내악적(chamber) 영화’가 완성된 첫 번째 작품으로 말해진다. [겨울 빛]은 정오에서 시작하여 오후 3시에 끝난다. 장소는 몇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정오 미사와 오후 미사가 이루어지는 두개의 교회에 한정되어 있다. 사건은 교회의 한 신도의 자살과 목사와 그의 애인 사이의 만남에 한정된다. 그러나 미니말리즘 회화가 그렇듯이 평범한 사건 뒤에 은폐된 채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다루는 핏빛 사건이 전개된다. 베르히만은 여기서 죽음의 절망에 처했던 목사의 구원과 신앙이라는 극적인 사건을 보여준다.
신의 부재와 인간의 자유
영화에서 첫 장면에 이어서 목사 토마스의 절망을 더욱 철저하게 만드는 사건들이 벌어진다. 그 가운데 첫 번째 사건은 교회의 몇 안 되는 신도 중의 하나인 어부 페르손의 자살이다. 성찬식이 끝난 뒤 페르손 부부가 목사를 찾아온다. 침묵하는 페르손을 대신해 그 부인이 남편이 감추고 있는 두려움을 토마스에게 전해준다.
페르손은 개인적인 불행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페르손은 세계가 앞으로 맞이하게 될 파국에 대해 두려워한다. 페르손은 중국의 아이들이 증오를 먹고 자라나고 있으며 중국이 곧 핵개발을 마치게 된다 하니 언젠가 세계가 파멸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이 영화가 62년에 만들어 졌다는 것을 고려하자) 이를 믿는다. 페르손은 이런 세계적 파국을 신이 막아줄 것을 기대한다. 페르손은 침묵하는 가운데서도 간절하게 토마스를 쳐다보지만, 토마스는 그 시선 앞에서 무기력하다. 토마스는 자신이 페르손을 구하지 못하면 페르손이 자살할 것이라는 것을 직감한다. 그래서 아무런 도움도 못 받고 실망해서 떠나려는 페르손에게 ‘무조건적으로 살아야 한다(you must live)’고 말하면서 막아 보려했지만 이 말에 담긴 토마스의 뜻을 페르손은 이해하지 못한다.
페르손이 30분 정도 뒤에 다시 온다고 약속한 다음 토마스는 안절부절못하면서(그 심정은 이 영화에서 강박적으로 들리는 시계 초침소리로 표현된다) 페르손이 다시 오기를 기다린다. 그 사이 그는 애인인 마르타의 편지를 읽고 잠시 잠이 들었는데, 꿈인지 생시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다시 페르손을 만난다. 이제 토마스는 자신의 진심을 페르손에게 털어 놓는다.
토마스는 자신이 어릴 때는 어머니가 모든 고통과 위험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해 주어서, 요람 속의 아이처럼 현실의 잔인함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는 목사가 되어 포르투갈 리스본에 있는 선원들의 사목이 되었을 때 스페인 내전을 무대의 맨 앞줄에서경험하게 되었고 거기서 현실의 잔인함을 알게 되었지만, 그것을 보고 인정하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어머니를 대신해서 자신을 보호해 주는 신의 품 안으로 도피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나와 신은 이 편에 특별하게 정돈된 세계에 살고 거기서 모든 것은 의미가 있었다네. 실제 삶의 참상들은 도처에 있었지만 나는 그것들을 보지 않았고, 오직 나의 신을 향해서만 응시했었을 뿐이었네”
토마스에게서 이 신은 ‘불가능한, 전적으로 개인적인, 아버지와 같은 신’이며 그 신은 “인류를 사랑하지만, 무엇보다도 자기를 가장 사랑하는 신”이라고 했다. 토마스에게 이 신은 “나를… 죽음의 두려움, 삶의 두려움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신”이었다.
그런데 토마스는 이미 그런 신이 가짜 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신이 내가 믿고 있다고 생각했던 신이었어. 이 신은 내가 여러 전거들로부터 빌려와서, 내 손으로 주조한 신이라네. 이해하겠나?”
무릇 누군가를 보호해 주는 신이라면, 이 신은 동시에 그를 능욕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기에 토마스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본 현실과 이런 신을 마주하게 할 때마다 나는 알게 되었네. 그가 곧 추하고, 반역적이며, 거미 같은 신(a spider god)이라는 것을. 즉 괴물이지. 그 때문에 나는 그런 신을 빛으로부터 항상 숨겨왔었어. 나의 어둠과 외로움 속에 나는 그를 꼭 껴안고 있었지. 내가 이런 신을 드러내 보여준 유일한 사람이 내 아내였다네. 그녀는 나를 지지해 주고, 격려하고, 도와주었고, 함정에 빠진 나를 건져 올렸지. 그 함정이란 바로 나의 꿈을 말하는 것이네.”
토마스에게서 자기를 보호해 주는 신을 현실에서 대신해 주는 것이 바로 그의 아내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가 죽은 이후, 그를 보호해 주는 신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토마스가 부딪힌 신의 침묵이다.
토마스는 인류의 파멸 앞에선 페르손의 고뇌가 사실은 토마스 자신과 마찬가지로 두려움으로부터 자신을 구해줄 신을 찾으려는 데서 나왔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페르손에게 이런 그 자신이 체험하고 있는 신의 침묵을 말하였던 것이다.
토마스는 페르손에게 이런 의미에서 신을 찾는다면 그런 신이 굳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잔인하고, 이해할 수 없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에 못지않게 행복과 평화가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확실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행복과 평화 역시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다가오는 것일 것이다. 토마스는 이 모든 것들은 자연에 맡겨진 질서라고 말한다. 여기에 굳이 창조자인 신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허공에 떠있는 별이나, 세계, 그리고 하늘, 이 모든 것은 스스로 발생하고, 서로 서로 발생시킨다네. 창조자란 없고, 이 모든 것을 조화롭게 조정하는 자란 없다네. 또한 우리의 머리를 돌게 만드는 불가해한 생각이란 것도 없다네.”
이윽고 토마스는 페르손에게 말한다.
“그러니 어둠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아니고, 당신도 곧 당신의 딸기밭과 꽃향기를 얻을 것이니,… 멀지 않아 지상의 천국도 나타날 것이라네.”
토마스는 그래서 페르손에게 그때가 오기까지 살아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토마스의 이런 고백은 페르손을 더욱 절망하게 만든다. 페르손에게는 이제 그가 찾는 신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페르손은 토마스를 떠나 결국 자살하게 된다. 페르손이 떠난 다음 토마스는 절망에 사로잡혀서 마침내 이렇게 외친다.
영화 [겨울 빛]의 한 장면
“오 주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말은 신의 부재에 대한 증명이다. 그러나 그런 부재증명은 자신을 보호하는 신, 아니 자신을 능욕하는 거미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이다. 토마스 자신에게도 이런 고백은 처음이었다. 그의 고백은 그의 마음속에 맴돌고 있는 생각이 비로소 뚜렷한 형상을 얻은 것과 같았다. 그러기에 그는 마침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자유이다. 마침내 자유이다.”
토마스의 이 고백은 마치 카뮈의 이방인에서 주인공이 사형당하면서 외치는 말처럼 들린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베르히만은 극적인 역설을 보여준다. 이 장면을 잘 보면, 거미 신의 부재를 확인하고, 자신의 자유를 확인한 순간, 마침내 죽음의 절망에 사로잡혀 무릎을 꿇고 있는 그에게 처음으로 빛이 비추어진다. 하지만 이 빛은 아직 겨울 빛이다. 그의 절망은 아직도 캄캄하다.
신의 침묵과 신의 현존
죽음의 절망에 사로잡혀 있는 토마스에게 또 하나의 시련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를 짝사랑하는 마르타의 고백이다.
마르타는 이미 오래 전에 토마스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보냈다. 토마스는 지금껏 이 편지를 그의 지갑에 넣어두고 펼쳐보지 않았다. 그런데 안절부절못하며 페르손을 기다리는 중에 마치 위안을 얻으려는 듯이 그 편지를 꺼내 읽는다.
베르히만은 이 장면에서 편지를 읽는 토마스에 대한 쇼트로부터 편지의 내용을 낭독하는 마르타의 얼굴에 대한 클로즈업으로 바로 넘어간다. 가운데 잠시 플래시백 화면이 삽입되지만 무척이나 긴 이 장면 내내 마르타의 얼굴에 대한 클로즈업이 롱 테이크로 이어진다. 마르타는 정면에서 눈도 한번 깜빡거리지 않고 관객을 응시한다. 이런 브레히트적인 응시 때문에 관객은 마르타로부터 소원화될 것처럼 생각되는데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마르타와 동일시되어 스스로가 마르타의 내면을 깊숙하게 들여다보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편지에서 마르타는 자신의 누추한 삶을 고백한다. 못생긴 모습, 서투른 솜씨, 온 몸에 번지는 습진 등. 마르타는 이런 누추함 때문에 불만이다. 그녀는 자신의 누추함 때문에 아무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주여, 나는 그렇게 스스로 말했어요, 왜 당신은 나를 영원히 불만족한 인간으로 창조하였나요? 그렇게 두려워하고 그렇게 씁쓸하도록 말이에요. 왜 나는 내가 얼마나 비참한가를 이해해야 하나요? 그리고 왜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조차 무관심하게 사는 이 지옥 속에서 고통을 받아야 하나요?”
그녀는 유물론자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누추한 삶에 지친 그녀는 내기를 건다. 자신에게 신이 은총을 베풀어 그녀의 손바닥의 습진을 고쳐준다면, 신의 종이 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은 그런 기적을 행사하지는 않았다. 절망 속에서 그녀는 새로운 내기를 건다. 비록 신이 자연을 뜯어고치는 기적을 행사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는 있지 않을까? 그녀는 그렇다면 자기에게 그런 의미를 달라고 악을 쓴다.
“만일 나의 고통 속에 어떤 목적이 있다면, 그게 뭔지 말해 주세요. 나는 내 고통을 불평 없이 참아나가겠어요. 나는 강하답니다. 당신은 나를 육체에서나 정신에서 그렇게 무섭도록 강하게 만들었어요. 그러나 당신은 나의 강함으로 할 일을 주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나의 삶에 의미를 주세요. 나는 당신에게 노예처럼 복종하겠어요.”
결국 마르타가 포착한 의미란 바로 토마스에 대한 사랑이었다. 마르타는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기를 토마스에게 강요한다.
“이 가을, 나는 내 기도를 들어주셨음을 깨달았어요. 아마 여기서 당신이 웃으실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 마음이 분명해지기를 기도했어요. 마침내 나는 그런 명료함을 얻었어요. 나는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나는 내 힘을 적용할 임무를 기도했어요. 그리고 그걸 얻었어요. 그건 바로 당신이에요.”
마르타의 이런 신앙도 왜곡되어 있다. 마르타는 자신의 삶에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집착한다. 그런데 이런 집착은 자신의 누추함에 대한 보상에 불과하다. 더구나 이 의미는 타인의 동의 없는 일방적으로 부여한 것이며 절대적인 것이 된다. 그러기에 마르타는 자기 스스로 부여한 의미를 신의 명령으로 축성한다.
베르히만이 여기서 그려낸 마르타의 사랑은 우리에게는 상당히 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받아왔지 않는가? 그런데 어머니의 사랑은 어디서 나오는가? 어머니의 사랑은 남편으로부터 받은 상처에 대한 보상이 아닌가? 그러기에 그 사랑은 일방적이고 절대적이다.
베르히만은 후일 마르타의 이런 사랑을 [안나의 열정]에서 본격적으로 다룬다. 여기서 안나는 자신의 삶에 대한 보상으로 자신의 사랑을 이상화한다. 그리고 그 이상이 현실에 실현되고 있다고 자기를 기만한다. 결과적으로 그 사랑에 의해 상대방은 질식하고 그가 이를 벗어나려 하자, 안나는 심지어 그를 죽이려고까지 시도한다. 관객은 그녀의 집착과 기만이 그녀의 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보상이었음을 알고 그녀를 안타까워하면서도 그녀의 집념을 무서워한다.
마르타의 이런 보상을 위한 사랑 앞에서, 토마스는 다시 한 번 깊이 절망에 빠진다. 토마스는 마르타의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녀를 외면한다. 마침내 페르손의 자살 소식을 듣고 토마스는 서둘러 현장으로 간다. 계곡물이 굉음을 내면서 흘러가는 다리목에 페르손이 죽어 있다. 카메라는 롱 쇼트로 토마스의 움직임을 쫒는다. 주요한 것은 이 모든 사건들을 덮고 있는 굉음이다. 그 굉음은 모든 것을 무의미하고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토마스는 뒤따라온 마르타와 함께 그녀가 선생으로 일하는 학교에 들른다. 여기서 토마스는 마르타에게 단절을 선언한다.
“나는 당신의 사랑과 염려에도, 나에 대한 당신의 안달에도, 당신의 좋은 충고에도, 당신의 작은 촛불자루에도 그리고 식탁보에도 지쳤소. 나는 당신의 근시, 서투르게 보이는 손, 당신의 불안과 사랑할 때의 소심함에 물렸소. 당신은 내가 당신의 신체조건, 당신의 나쁜 위장과 당신의 습진, 당신의 월경, 당신의 얼은 뺨에 압도되도록 강제했소. 단연코 이 모든 쓰레기들을 이 백치 같은 상황들의 덩어리를 나는 버리겠소. 나는 이 모든 것에 그리고 당신과 관련된 모든 것에 지쳤소.”
토마스의 이 말은 거꾸로 마르타의 일방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의 강요를 입증해 준다. 토마스는 마르타의 신앙이 결국 마르타 자신의 삶의 누추함을 보상하기 위한 시도였다는 것을 폭로한다. 이런 폭로와 더불어 토마스는 구토를 느낀다. 토마스는 마르타에게 이렇게 외친다.
“…나를 평화롭게 내버려 둘 수 없소? 입 다물어 줄 수 없소”
영화 [겨울 빛]의 한 장면
이렇게 단절은 선언하는 토마스의 모습은 마치 심판을 내리는 정의의 신의 모습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혹한 심판이지만 거기에는 생명이 깃들어 있다. 이 장면에서 베르히만은 토마스의 모습 뒤에 보이는 창가에 화분을 놓아두었다. 거기에는 꽃이 피어 있다.
그리고 자살한 어부 페르손이 나간 다음 성당 안에 겨울 빛이 비추어들었듯이, 이제 마르타의 보상하는 신을 폭로한 다음 교실 문을 나서려는 토마스 앞에 있는 창문틀에는 ‘아니다’를 의미하려는 듯 X 표식이 있다. 그것은 카프카의 작품에 나오는 듯한 알레고리와 같이 기능한다.
토마스는 그 표식 앞에서 문득 멈추고 뒤로 돌아서서 마르타에게 손을 내민다. 함께 가자고.
“나와 함께 프로스트나스 교회(오후 예배의 장소)로 가지 않을래요? 역겨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할게요”
하이데거와 신
이 영화를 통해서 베르히만은 신이 부재함을 확인한다. 이제 인간에게 안전을 확보해 주고, 보상을 제공하던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신은 인간의 심리의 필연성에 따라서 만들어진 가짜 신, 곧 심리적 신이다. 그렇다면 이제 인간은 신을 코트 위에 붙은 먼지처럼 가볍게 떨쳐 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인간은 이 벌거벗은 물질적 현실 속에서 살아가야 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일까?
베르히만의 대답은 ‘아니다’는 것이다. 즉 X이다. 이 물질적 현실 속에는 베르히만이 추구하는 인간의 자유와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자유와 사랑은 비-물질적인 것 따라서 신적인 것이다.
자유와 사랑의 근거가 신이라면, 신의 존재가 확인되어야 비로소 자유와 사랑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신은 이 지점에서 더욱 침묵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신의 침묵이야말로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 아닐까? 그가 안전과 보상의 신을 버린 이후에도 여전히 신의 침묵을 뼈아프게 느끼고 있다는 것은 그에게 그만큼 사랑과 자유에 대한 갈망이 깊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갈망은 어디서 유래했는가? 물질적 현실이 이런 갈망의 근거는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과 자유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있다는 것은 신이 그를 통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은 하이데거의 철학적 물음을 상기시킨다. 하이데거는 인간 현존재는 물음의 존재라고 한다. 그는 형이상학적 물음을 던진다. 그런데 인간을 제외한 다른 존재자들은 모두 성스러운 어둠 속에 있을 뿐이다. 인간만이 고통스럽게도 이런 형이상학적 물음을 던진다. 왜 그런가? 하이데거에 의하면 그것은 인간이 바로 현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존재자이면서 이미 존재의 세계로 넘어 들어가 있는 존재자이다. 그러기에 그는 존재에 관한 형이상학적 물음을 던질 수 있고 던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망하고 있는 토마스에게 바로 이 절망을 통해 진정한 깨달음으로의 길이 열린다. 토마스 앞에 출현한 ‘겨울 빛’과 ‘표식 X’는 이런 것을 암시하는 알레고리가 아닐까? 토마스에게 이미 빛이 비추어져 있다. 그러나 토마스 자신은 아직 이를 모르고 있다. 마침내 토마스 자신이 자신 속에서 이미 활동하고 있는 내적인 빛을 느끼게 된다. 이 내적 빛의 확인을 향한 최종의 길을 토마스와 마르타가 함께 간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들은 프로스트나스의 교회에서 이루어진다. 토마스는 교회지기 곱사등이 알고와 대화한다. 반면 마르타는 교회 피아니스트 블롬의 유혹을 받는다. 이 두 시컨스는 서로 교차되면서 이 사이에 마르타와 토마스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교감(communion)이 이루어진다.
먼저 교회지기 알고의 고백이 이어진다. 알고는 성경을 연구하다가 토마스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즉 그는 예수의 수난은 결코 육체적인 것에 그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육체적 고통이라면 겨우 4시간 정도에 거친 것이고, 그래서 곱사등이로 평생을 산 자기의 고통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의 진정한 고통은 그의 제자들이 그가 제시했던 삶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배반하고 도망쳤다는 데 있다고 한다. 예수는 그의 삶이 무의미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신이 정말 존재하는가에 대해 회의에 빠졌고, 그러기에 마침내 “주여, 오 주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쳤다는 것이다.
알고의 설명을 토마스는 다만 듣고 있다. 신의 침묵 앞에서 절망에 빠진 그의 심정은 알고가 설명한 예수의 심정을 이해하게 만든다. 동시에 그 순간 그는 이 절망이야말로 곧 신의 존재에 대한 증거라는 것을 깨달은 것 같다. 그러기에 베르히만은 고뇌하는 그의 얼굴 위에 조그만 등불을 달아맨다.
알고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마르타는 문밖에서 알고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이때 마르타에게 교회 피아니스트 블롬이 접근한다. 블롬은 토마스가 죽음과 부패의 손아귀에 빠져 있다고 밝히고, 떠날 수 있을 때 떠나라고 말한다. 블롬은 마르타에게 물질적 현실의 세계로 돌아가라고 유혹한다. 그러나 마르타는 침묵한다. 그녀의 침묵 속에는 이미 어떤 결단이 내려져 있다.
영화 [겨울 빛]의 한 장면
마르타의 사랑은 비록 처음에는 보상의 욕망에서 출현했지만 그녀의 헌신적 사랑은 이미 새로운 각성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다. 그리고 토마스의 단절 선언을 통해 마르타는 보상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난다. 아니 보상의 욕망은 실패하고 만다. 그 순간 이미 그녀는 물질의 세계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그녀는 토마스가 건네 온 손을 잡고 프로스타나스로 오는 내내 침묵한다. 이 침묵은 신의 침묵에 대응하는 인간의 침묵이다. 신의 침묵이 보상과 보호의 거부라 한다면, 인간의 침묵은 물질적 현실의 거부이다. 마르타의 침묵은 곧 블롬의 유혹에 대한 침묵이다. 이 침묵 속에서 마르타는 이미 사랑으로의 길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간 것이다. 이처럼 인간에게 사랑이 있다면, 그리고 자유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신의 존재가 아닐까? 신은 인간의 사랑이며 곧 자유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알고는 신도라고는 마르타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예배를 시작할 것인가를 묻는다. 그리고 토마스가 대답하기 전에 이미 알고는 스스로 대답하면서 예배시작을 알리는 불을 켠다. 토마스는 일어나 예배를 시작한다. 이 영화에서 마르타의 깨달음과 토마스의 깨달음이 마치 연도처럼 서로 교차편집되어 있어 아름다운 화면을 이루고 있다. 서로의 눈에 보이지 않는 교감이 전기처럼 우리 관객에게 전달되어 온다.
이병창(동아대,철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