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은품과 ‘교양인’, 정치가[철학적 인간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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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은품.

나는 직업상 폰 마케팅의 적합한 대상이 된다. 그래서 연구실에 앉아 있으면 거의 매일 폰 마케팅과 싸운다. 어떤 때는 하루 내내 누구도 만나지 않고, 심지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적도 있으니, 연구실 안에 전화기 벨이 울리면 반가운 마음에 덥석 수화기를 들어보면 영락없이 폰 마케팅이다. 하도 자주 당하는 일이라 나도 요령이 있다. 그런데 최근 사은품을 준다는 말에 그만 속아 넘어간 일이 있어 여기 나의 경우를 고백하려 한다.

나는 지난 20년 동안 어떤 은행카드를 써왔다. 그러다 보니 거기에 제법 많은 포인트가 쌓였던 모양이다. 얼마 전 어떤 사람이 카드회사라고 자칭하면서 전화를 해 왔다. 그는 카드 포인트가 은행에 쌓여 있다고 말하면서 나도 잊고 있는 카드 포인트의 점수까지 밝혀 주었다. 나는 수많은 폰 마케팅을 겪어 보았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전화를 받아 본 적은 없었다.

내 머리 속에 “나도 모르는 포인트를 자기들이 어떻게 알아?”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고 그래서 나는 “옳다구나 이게 바로 ‘보이스 피싱’이라는 거로구나”라고 생각하여 더 이상 대답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런데 끊자마자 또 전화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는 속으로 화가 났다. 이놈들이 나를 만만하게 보는 군, 내가 그 정도 거짓말에 넘어 가겠어?” 하면서 나는 계속 벨이 울리는 것을 지켜보면서 속으로 내가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정확하게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전화벨은 한 스무 번 정도 울렸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일주일 정도 뒤에 이런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다시 어떤 전화를 받았는데, 받고 보니 똑 같은 사람의 전화였다. 이번에는 다시 끊는다는 것이 미안해서, 그 사람이 카드 포인트를 말하자 마자, 나는 대뜸 “아, 당신이 내 포인트를 어떻게 알아요?” 하고 반문했다.

나의 반문에 그 사람은 자기는 카드 회사가 맞고 그러니 정확하게 카드 포인트를 아는 거라고 대답해 주었다. 바로 이 대답 한 마디가 나의 아킬레스의 힘줄을 찌르고 말았다. 내가 ‘보이스 피싱’이라고 의심하였다는 것을 그 사람이 알게 되고, 그 사람이 그걸 안다는 것을 내가 다시 알게 되자,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기에, 그 부끄러움이 나를 창으로 찌르고 말았던 것이다. 내가 얼떨떨하게 있는 그 순간, 그 사람이 재빠르게 그 카드 포인트에 해당되는 사은품을 나에게 보내주겠다고 한다.

나는 ‘사은품’이라는 말이 그때 왜 그렇게 듣기가 싫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갑자기 화가 나서, “글쎄요, 그냥 쌓이게 그냥 나두면 안될까요?” 나의 말은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바로 이 순간이 내가 그가 쳐둔 그물에 걸리고 만 순간이다. 그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에게 최후의 일격을 먹였다.

“카드 포인트가 5년 이상 지나면 무효라는 것 아세요?” 지금 생각해보면 분명 그 말은 거짓말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얘기를 들어 본적이 없었으나 그 말을 들으니 정말 그 말이 맞는 것 같고, 그러자 갑자기 포인트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더욱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 속에서 욕망의 그림자가 일렁거리기 시작했으니 이미 싸움은 나의 일방적인 패배나 마찬가지였다.

그 뒤부터는 헤게모니는 그 사람의 손에 넘어갔고 나는 그저 따라가기에 급급할 뿐이었다. 내가 거의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그럼, 어떤 사은품이 있어요?” 하고 말하니, 그 사람은 나의 포인트에 적절한 사은품의 종류를 박연폭포 떨어지듯 읊어대면서 이런, 저런 것들을 섞어서 보낼 터이니 이런 주소로 보내면 되냐고 물었다. 대체로 주방용품이고 등산용품인데, 이미 있는 것들이고 다시 있어도 무방하지만 없어도 아무 문제없는 그런 것들이라 나는 그저 “예, 예, 수고하세요!” 하고 말하는 것 밖에는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끝나고 나서 냉정함을 되찾아 이 싸움을 복기해 보니, 과연 마케팅이란 게 명불허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문제는 ‘사은품’이란 말 자체에 있다. ‘사은품’이란 정말 좋은 말이다. 정말로 감사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더라도, 그것은 무언가 상호이익이 될 만한 것이 아닐까? 그런데 왜 나한테 그 말은 무언가 사기 같고 음모와 같은 것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그 말에 대한 반감 때문에 오히려 나는 쉽게 역전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교양인

‘사은품’이란 말에서 느껴지는 이 느낌 때문에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언급했던 ‘교양인’이라는 개념이 떠올랐다. 헤겔의 교양인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형성할 시기에 등장한다. 교양인은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여행자이다. 그는 이런 여행을 통해서 자신의 고루한 개인적 목적을 벗어나게 된다. 그는 이 세상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배운다. 이렇게 배움으로써 그는 교양인이 된다.

이런 교양인은 아직 루소적인 일반의지를 자각하는 존재는 아니다. 그의 교양은 세상의 경험을 일반화하지만 이런 일반화는 부분적으로만 일어난다. 그는 그가 겪어왔던 여행을 통해서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세상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교양이 이처럼 부분적이라는 것을 아주 어렴풋이 느낀다. 왜냐하면 헤겔에 있어서 근대인은 이미 무의식적(헤겔적 표현으로는 ‘즉자적’)으로 이 세상의 보편적 원리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인에게서 이런 이해는 자각되지 못하기 때문에 보편적 원리는 막연한 동경으로 출현한다. 이 막연한 동경 때문에 그는 이 세상을 향하여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근대 교양인이 여행을 통해 얻은 교양이란 자기 부정의 산물이다. 즉 세상을 경험하면서 그는 자신이 고루한 목적에 사로잡혀 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 자리에 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의 자리를 버림으로써만 비로소 세상을 이해한다는 것이 근대 교양인의 아이러니이다.

반면 그가 이 세상의 여행 가운데 어떤 자리에서 자기를 긍정하는 순간, 그는 다시 패배하도록 운명 지어져 있다. 그것은 사실 운명이 아니라, 그 자신의 책임이다. 그의 지금까지 얻은 교양이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고, 그것이 실제 세상의 보편적 원리와 대립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보편적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에게 자신의 삶은 운명에 의해 실패하게 된 것처럼 보인다.

막연한 동경, 그리하여 세상을 전전한 끝에 그가 마침내 도달한 절망감 앞에 그는 세상의 허무를 느끼게 된다. 헤겔은 이런 허무감이야 말로 세계의 일반적 원리가 이해되는 밑바탕으로서 새로운 전환의 계기가 된다고 한다. 하지만 교양인은 헤겔이 이해하고 있는 그 너머를 보지 못한다. 교양인에게 세상은 그저 허망할 뿐이다. 그는 멜랑콜리하다. 우리가 보기에 교양인의 절망감은 우스꽝스럽기조차 하지만 그 자신은 자신의 멜랑콜리에 너무나 진지하다.

이런 교양인의 타인과의 관계를 보자. 헤겔은 교양인은 세계를 부분적으로 일반화하기 때문에, 그의 개념은 일반성이지만 사실은 개인적 관점, 입장, 처지가 그 일반성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고 본다. 헤겔은 개념적으로 이런 일반성을 특수성이라고 하며, 따라서 모든 교양인들은 나름대로의 특수성을 가지고 서로 관계를 맺는다.

이들의 특수성은 서로 중첩될 수도 있다. 그러기에 이런 경우 교양인들은 서로 살가운 피붙이를 만난 듯 반가워한다. 그들은 서로의 우정이 영원하기를 맹세하고 그들 자신은 자신이 일반적 원리를 지킨다고 생각하므로 서로의 우정은 영원할 것이라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들의 특수성은 곧바로 드러나고 만다. 그들의 삶이 조금만 더 진행된다면 그들은 곧 세상의 흐름에 따라 이리 저리 흩어지고 만다.

그리하여 어떤 순간 서로 부딪히지 않던 삶들이 부딪히는 순간 그들의 삶은 서로 대립한다. 그들의 대립은 자기가 일반성의 원리를 따른다고 생각하므로 더욱 치열하다. 사실은 사소한 이익의 대립이지만 그들의 대립은 그것을 넘어서 일반성의 대립으로 간주되고 그들의 혈투는 이제 세계를 건 혈투가 된다. 우정에 대한 영원한 맹세와 세계를 건 혈투가 거듭되는 세계가 곧 헤겔이 말하는 교양의 세계이다.

타인에 대한 이런 관계 때문에 교양인은 이중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교양인은 항상 타인과 더불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할 자세를 가지고 있으며 실제로 그는 기가 막히게도 이런 공동의 이익을 찾아낸다. 이런 점에서 주위에서 이런 교양인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다른 한편으로 교양인이 제시하는 공동의 이익 뒤에는 항상 그 자신의 이익이 감추어져 있다. 교양인의 모습에는 항상 사기꾼이나 허풍선이의 모습이 감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교양인을 만나면 항상 찝찔하다. 무언가 자기도 모른 채 어떤 음모에 연루되고 말았다는 느낌이 항상 잔존한다.

정치가

‘사은품’과 ‘교양인’, 이 두 가지는 근대 자본주의 시대를 상징하는 개념이다. 이 두 가지 말에는 한편으로는 상호의 이익이라는 개념이 들어 있다. 동시에 다른 한편 사기와 음모라는 느낌이 감추어져 있다. 이런 느낌은 다시 ‘정치가’라는 말을 연상시킨다.

나의 대학시절 친구들 상당수는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투쟁가였다. 그들은 이제 어느덧 한국의 중견 정치가들로 성장했다. 여러 그룹으로 분산해서 각기 정치에 참여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들은 하나의 동창회 비슷한 서클을 형성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젊었을 때의 우정을 생각해 이름을 올려 두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한 번도 그 모임에 나가 본 적은 없다.

젊었을 때 그들은 일종의 지사였다. 그들은 한 뜻을 지니고 나는 그 뜻에 공감했으며 그러기에 그들을 만나는 것이 기쁘고 비록 나 자신 한 일은 없지만 마치 그들이 한 일이 내가 한 일인 것처럼 가슴 뿌듯했다. 그들이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들기 전까지는 그들을 만날 기회가 있으면 만사 제치고 나가보곤 했다.

그런데 그들이 현실 정치가로 입문한 다음부터는 이상하게도 그들을 피하게 되었다. 의식적으로 피하자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런데 마치 프로이트의 실수처럼 이런 저런 일로 그들과의 만남이 회피되어졌다. 솔직히 미안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그들과 만날 기회가 되면 항상 다른 일이 생기곤 하니 나의 무의식을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게 아닌가?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생각해 보니, 결국 ‘정치가’라는 말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치가란 정치학 개론에 나오듯이 사회의 다양한 집단들의 이익을 조정하는 자가 아닌가? 한 사회를 위해 이렇게 이익을 조정하는 자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런 사회적 조정은 자신의 이익과 대중의 이익 사이의 조정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가 자신의 이익이 없다면 정치가에게 그런 조정 행위를 할 동기가 결여될 것이 아닐까?

그런데 문제는 바로 나다. 이런 정치가들이 그저 친구들이었을 때 나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정치가가 된 이후 그들을 만나면, 왠지 내가 그들에게 무언가 부탁할 것이 있어 그들을 만나러 왔다고 그들이 생각할 것 같았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솔직히 내 마음 깊이 어떤 욕망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욕망을 무의식적으로 내가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내가 감추고 있는 진실이 드러날까 두렵다. 그래서 지금껏 그들의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언제 다시 내가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을 때가 오기를 기대한다. 두 가지 중의 한 가지 경우가 아닐까 한다. 그 하나는 내가 성인이 되어 더 이상 어떤 욕심도 없게 되는 경우이다. 다른 하나는 내 친구들이 이제 늙어서 현실 정치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는 경우이다. 아마 후자가 더 빠르지 않을까 한다.

이병창(동아대,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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