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미학산책41-회화에서 구성의 문제[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41-회화에서 구성의 문제

 

1) 회화

회화의 질료는 색채다. 헤겔은 회화의 질료 자체가 이미 가상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즉 빛은 요소로 분화되면서 색채로 되고, 그 색채의 상호 관계를 통해, 대립과 조화를 통해 대상을 표현한다.  색채는 이런 관계 속에서 의미를 지니므로,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못하며, 자기 부정성을 지닌 가상적인 것이다.

질료의 특성상 회화는 특칭적 주관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평면적 형상은 특정한 주관적 시점에서 선택된 것일 수밖에 없고 색채의 대비 역시 주관적 심정에 작용하기 때문이다. 회화는 특칭적 주관성의 눈에 보이는 현실 즉 구체적 현실을 그려낼 뿐이다.

그 때문에 회화는 일반적 정신을 형상화하는 데서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고대나 고전 시대에도 회화가 있었지만 이 시대 주된 관심의 대상인 신과 영웅 자신은 항상 조각을 통해 자신을 드러냈으니, 조각은 장르의 특성상 일반적 정신을 표현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회화가 만일 신과 영웅을 표현하게 된다면, 그것을 특칭적 주관으로 만들어 인간화해 버리고 마니, 이 시대 회화라는 장르는 기피될 수밖에 없었다.

이 시대에도 회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집트 무덤 벽화나 그리스 도자기 회화가 다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시대 구체적 현실에 대한 관심은 부차적일 수밖에 없었으니 이를 표현하는 무덤 벽화나 도자기 그림은 다만 장식적인 의미를 지닐 뿐이었다.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 다시 구체적 현실에 대한 관심이 출현했다. 자기를 부정하고, 이행하고야 마는 그야말로 우연하고 허망한 현실이 이 시대에는 오히려 진정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마치 시장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지배하듯이 이런 우연성과 허망함 속에 진정으로 실체적 정신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 회화는 그 표현 가능성이 돋보이게 되면서 건축과 조각을 대신하여 주도적인 예술로 등장하게 된다.

 

2)

낭만주의 예술은 구체적 현실 즉 우연하고 허망한 현실을 그 자체로서 만족스러운 현실로 다루는 것은 아니다. 낭만주의 예술은 구체적 현실을 통해 그 시대 정신을 드러내려 한다. 구체적 현실은 자기를 부정하는 운동 가운데서 일반적 정신으로 복귀한다.

헤겔은 이런 자기 부정하는 운동 속에 있는 현실을 가상이라 규정했다. 구체적 현실에서 나타나는 이런 자기 부정의 운동성이 곧 ‘영적 생기[geistige Beseelung]’다. 이런 가상성은 개인의 주관적 모습 속에서는 그 속에 담긴 내밀한[innig] 심정으로 드러난다.

 

“회화는 색채들의 특수화를 통한 형상화, 평면으로의 확장이라는 감각적 요소 속에서 움직이며, 이를 통해 눈에 보이는 대상성의 형식은 정신에 의해 정립된 예술적 가상[schein]으로 변화하며, 회화에서는 이 가상이 실제의 형상 자체를 대신한다.”[1]

 

[외물의 현실적 현존재] “더 이상 그 자체로서 궁극적 타당성을 간직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이 실재성 속에서 정녕 자체가 내적 정신이 단순하게 빛나는 가상[Scheinen]으로 격하되어야 한다.”[2]

 

조각에서의 고전적인 이상화에서와 달리 회화에서 외적 형상은 자연적 명랑성, 지복, 자족성을 지니지 않으며, 오히려 외적 형상은 “분열 속에서 자기를 유지하고 그로부터 벗어나 자기 안으로 회귀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명랑성, 지복, 자족성은 어디까지나 정신적인 것이어야 하며, “전체가 정신의 내면성으로 전이되어야 한다.”[3]

 

3)

그러나 회화에서 가상성을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는 문제이다. 회화는 색채를 통해 만들어진 평면적 형상을 중심으로 전개한다. 그것이 지닌 색채의 음악과 색채의 마법은 어디까지나 공간적 평면 위에 펼쳐진 것이다. 평면적 형상은 일단 외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비록 그 형상이 질료의 측면에서 보면 조각에서처럼 공간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아니고 평면 위에 그려진 가상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마치 외적인 사물처럼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회화에서 표현된 그 모습을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간주한다.

그 모습이 부정적인 모습 즉 고통 당하고 죽어가는 모습으로 나타날 경우, 이는 단순한 고통과 죽음으로만 여겨질 뿐, 이를 통해 자기 내로 복귀하는 모습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거꾸로 긍정적인 모습, 아름답고 즐거운 모습으로 나타날 경우 그 역시 단순한 아름다움과 즐거움으로만 여겨지며 이 아름다움과 즐거움이 정신적인 아름다움이며 즐거움이라는 사실은 간과된다.

장르의 특성상 외적인 형상을 자립성을 가질 수밖에 없으니 회화 그 자체는 외적 형상을 넘어설 수 없다. 회화는 시문학처럼 어떤 형상이 그런 자기를 부정해 나가는 운동 자체를 표현할 수는 없다. 그것이 하나의 자기 부정적인 가상이라는 사실은 단순히 평면적 형상을 통해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회화는 구체적 현실의 가상성, 자기 부정의 운동, 영적 생기, 내밀한 심정을 그려낼 수 있을까?

우선, 관람객이 눈으로 또는 마음으로 외적 형상을 읽으면서 그 운동을 따라갈 때 비로서 음악과 마법이 출현한다. 이런 마음의 운동이 없다면 회화에서 영적 생기가 출현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마음의 운동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무언가 그런 운동을 암시하는 요소가 평면적 형상 속에서 제시되어야 한다.

여기서 회화의 다양한 특수한 기법이 출현한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한 화면 속에 다양한 군상을 통해 또는 삼면화나 벽화 등 연속된 그림 통해 가능한 한 이런 운동을 표현하는 것이다. 회화에서 이런 경향 때문에 회화의 구성의 문제가 등장한다.

 

4)

헤겔은 회화를 다루면서 색채라는 질료가 드러내는 가상의 측면 못지 않게 회화 속에 다양한 대상들 사이의 상황과 행위, 모티브 그리고 인물의 구성에 주목한다.

조각은 이상적인 모습을 가지고 고요하게 머무르며, 아무런 배경 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한다. 왜냐하면 조각은 이념이 자기를 구현한 것이어서 자립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조각도 점차 생동적으로 되면서 상황과 운동 속에서 순간적으로 존재하는 모습으로 등장하며 그리고 다른 조각상과 함께 집단적인 군상을 이루거나 연속적인 부조로 발전한다.

회화의 경우 이런 측면을 더욱 발전시킨다. 우선 회화는 구체적 현실 속의 특수한 인격, 구체적 상황, 특정한 행위를 통해서 ‘극적 생명성[dramatische Lebendigkeit]’을 표현할 수 있다. 회화 속의 인물은 특정한 개성을 지니고, 외적 상황과 생생한 관계 속에 있어야 하며, 특정한 동기를 지닌 구체적 행위로 자기를 표현한다. 이 행위는 곧 전체적인 극적 운동 가운데 가장 극적인 어떤 순간에 일어나는 행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외적 상황과 구체적 행위 속에 있는 특수한 인격은 불가피하게 여러 인물을 끌어들이니, 인물의 군상이 회화 속에 들어오게 된다. 그 뿐만 아니라 회화는 하나의 평면 공간 속에 시, 공간적으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이 동시에 표현되며, 때로는 연속된 회화 장면(예를 들어 삼면화와 같이)을 통해 이 다양한 사건이 표현되기도 하니, 회화의 이런 기법은 조각에서 등장한 기법을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상황 속에서 다른 인물과 관계 속에서 어떤 인물의 행위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독특한 구성이 필요하게 된다. 여기서 근본적인 것은 정신의 운동을 공간적 구성 속에 표현하는 것이다. 그 구성은 지상에서 천상으로 상승하기도 하고, 혼란 속에서 결정적 행위를 하는 인물로 집중되기도 한다.

 

“조각적 구상방식을 이렇듯 포기하고 고요하고 부동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고 생생한 인간적 표현과 특성적 개성을 이렇듯 추구하고 각 내용을 주관적 특수성과 그 다채로운 외면성 속으로 이렇듯 투입하는 가운데 회화의 발전이 이루어진다.”[4]

 

헤겔은 회화에서 이런 공간적 구성이 단순히 공간적 형태의 구성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 구성은 동시에 색채의 대비, 조화를 통해 표현되어야 한다. “회화의 생명성의 화룡첨정은 오직 색채를 통해서만 표현 가능”[5]하기 때문이다.

 

“회화는 색조들 및 서로를 비추고 서로 유희하는 그 조화와 대비의 단순한 향기와 마법 속에서 완전히 음악으로 건너가기 시작한다.”[6]

 

5)

회화는 정신의 운동을 색채로 만들어지는 공간적 형상으로 보여주는 것이므로, 아직 음악이나 문학과 같이 운동을 시간 속에서 생성하는 측면에서 파악하지는 못한다.

이런 한계 때문에 회화는 운동을 표현하는 시문학의 도움을 받으려 한다. 헤겔은 이런 시도를 뒤셀도르프 화가의 시화전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이런 시화는 당대의 시인의 시를 회화로 그려냈는데 헤겔에 따르면 유감스럽게도 이런 시도는 장르의 특성을 제대로 알지 못함으로써 혼란만 자아냈다고 한다.

시문학은 언어적 표상을 질료로 하면서 사태를 시간적인 계기를 통해 서술해 나간다. 반면 회화는 색채를 질료로 하여 공간적 형상을 공존적으로 가시화한다. 회화는 평면의 공간을 떠날 수 없다. 그러므로 회화는 시간적 계기 가운데 어떤 극적인 장면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과거나 미래는 동일한 평면 공간 속에 표현된 잔재나 암시를 통해 표현할 수밖에 없다. ,

그에 못지 않게 더 중요한 것은 시는 추상적 언어로,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며, 이런 감정이 전환하고 진행하며 고양하는 과정을 서술할 수 있다. 그러나 회화는 감정을 외적 형상을 통해 표현할 수밖에 없는데, 추상적으로는 신체의 자세나 얼굴의 표정을 통해서 표현할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는 행위를 통해서, 즉 특정 상황에서 일어나는 열정적 행위를 통해서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열정은 색채의 대비를 통해서 드러나게 된다.

이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뒤셀도르프 화가들은 시를 회화로 표현하려 했으니, 아주 단순한 장면을 선택했으며 감정을 주로 표정과 자세를 통해서 묘사하는 데 그쳤다. 대표적으로 헤겔은 샤도프의 미뇽을 예로 들고 있다.

헤겔은 이런 한계를 지적하는 가운데, 시를 회화로 표현하려면 공간 속에 과거와 미래의 상황을 보여주는 풍부한 감각적 형상이 필요하며, 심정은 색채의 마법을 통해 제시되는 행위의 열정을 통해서 표현하여야 하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성서의 이야기를 회화로 표현하려 했던 르네상스 화가의 노력을 더 높이 평가한다. 정신이 현실의 극적 생명성 속에 표현된 대표적 작품으로 헤겔은 라파엘로의 ‘그리스도의 변용’이나 팔마 베키오의 그림 ‘야곱과 라헬’을 들고 있다.

하나의 그림 속에 여러 장면이 구성되어 있다.

6)

회화는 이처럼 특수한 주관성을 통해 이념을 표현하는 한, 그것이 내밀하게 표현되든 아니면 운동 속에서 표현되든, 회화 속에는 이미 작가 자신의 주관성이 포함되어 있다. 회화가 그려낸 특수한 주관성이 곧 작가 자신의 주관성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주관성은 곧 독자의 주관성을 의미하는 것이니, 회화 속에는 이미 작가뿐만 아니라 독자의 주관성이 전제되어 있다. 회화는 작품 속의 특수한 주관성을 통해 작가 자신의 주관성과 독자의 주관성 사이의 매개와 전달을 가능하게 한다.

이점은 회화를 다시 조각과 비교하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념이 자립적으로 출현한 조각의 경우 이 조각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작가 자신의 주관적 관점이 들어있지 않다. 따라서 조각은 무시간적 공간 속에 전시되며, 이 공간은 관객의 주관성 조차 배제된다. 그러므로 헤겔은 회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회화는 주관적인 것을 표현하는 것이므로 이제 그 전체 표현방식을 보더라도 오직 주관을 위해, 감상자를 위해 현존할 뿐 독자적으로 그 자체로서는 현존하지 않는다는 규정을 보여준다. 관조자는 말하자면 처음부터 작품에 같이 있으며, 함께 고려되고 있으므로 예술작품은 주관이라는 확고한 점에 대해서만 오로지 존재한다.”[7]


[1] 미학강의 3권, 27쪽

[2] 미학강의 3권, 27쪽

[3] 미학강의 3권, 45쪽

[4] 미학강의 3권, 92쪽

[5] 미학강의 3권, 92쪽

[6] 미학강의 3권, 93쪽

[7] 미학강의3, 32쪽

헤겔미학산책40-색채의 음악, 색채의 마법[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40-색채의 음악, 색채의 마법

 

1)

회화의 질료는 공간적 형태가 아니라, 색채이다. 헤겔은 빛이 어둠과 관계하여[즉 물체의 평면에 반사하면서] 색채가 출현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색채는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물체의 평면을 떠날 수 없다.

그 때문에 회화가 처음 시작했을 때, 색채보다는 공간적 형태가 중심적 위치를 차지했다. 조각이 삼차원적인 공간적 형상을 보여준다면, 회화의 경우 공간적 형태는 이차원 평면에 한정된다. 그런데 헤겔은 회화는 그 출발점인 평면화에서부터 동시에 특칭화가 일어난다고 말한다.

조각과 같은 입체적 형상은 관찰자와 상관없이 자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은 객관성을 지닐 수 있으므로, 정신의 이상을 표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회화적 형상은 사물의 공간적 단면을 이루는 외곽선을 본 따서 만들어지는데, 사물의 외곽선이란 관찰자와 무관하게 존재할 수 없다. 사물은 입체적이므로 관찰자의 위치에 따라 사물의 외곽선은 달라진다. 더구나 관찰은 단안 시각이 아니라 양안 시간이며 관찰자 역시 끊임없이 움직이는 중에 있으므로, 사물의 외곽선을 객관적으로 그려낸다는 것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그 결과 주관은 자신의 관점에서 일정한 외곽선을 선택하게 되면서 회화는 이미 형상에서 주관성을 표현하게 되어 있다. 회화의 평면적 형태는 불가피하게 특수한 주관성을 표현할 수밖에 없다. 조각에서 작품은 그 자체에서 완결적이고 자립적이라면, 회화의 형상은 “내적으로 특칭화된 내면성”을 간직할 수밖에 없다.

 

“회화의 대상은 공간적 현존재의 면에서 정신적 내면의 가상으로 존재할 뿐이며 그런 까닭에 공간적으로 현전하는 현실적 실존의 독자성은 해체되고 또 조각작품의 경우보다 관조자와 훨씬 밀접하게 관계한다.”[1]

 

2)

고전적 예술의 관점에서 본다면 회화적 형태가 지닌 이런 주관성은 약점이자 한계가 될 것이다. 조각이 객관적인 형상을 드러냄으로써 정신적 이상을 표현한다면, 회화적 형상은 주관성을 항상 지칭하고 있으므로 그런 이상을 표현할 수 없었다.

낭만주의 시대에 들어오면서 예술이 이제 특칭적 주관성을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하게 되면서, 조각을 대신해서 회화가 예술의 주도적 장르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회화는 특칭적 주관성을 드러내려는 시도를 더욱 본격화하기 시작했으니, 그것이 바로 르네쌍스 시대 등장한 원근법이다.

여기서 사물의 형상은 관찰자와의 거리에 따라서 크기가 조절된다. 가까운 것은 크게 먼 것은 작게 그려지면서 거꾸로 회화의 형상은 이제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부정성을 통해 관찰자를 지시하는 하나의 가상이 된다.

 

3)

회화의 공간적 형태가 원근법을 통해 관찰자의 주관성을 표현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관찰자 시점이 놓인 위치만을 드러낼 뿐, 비록 그것은 관찰자의 처지와 입장을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것이라 하더라도 직접 그 자체로는 관찰자의 주관적 내면성을 드러낼 수 없다.

헤겔은 여기서 회화가 공간적 형상을 떠나서 색채의 마법을 발전시키는 동인이 있다고 한다. 낭만주의 시대에 이를수록 이제 중요한 것은 특칭적인 주관성이다. 이 특징적 주관성이 지닌 내밀한 심정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단순한 원근법적 공간적 형상만으로 불충분하다. 여기서 색채가 회화의 본질적 질료로 등장하게 된다.

색채는 빛이 분화된 것이다. 빛을 분화시키는 수단으로 다른 수단도 가능하지만 주로 물감(또는 벽화나 아상불라주 등에서는 물체 자체의 표면이 직접 이용되기도 한다)이 개입한다. 물감은 일정한 빛의 파장 외에는 반사하지 않으니, 이로부터 다양한 색채가 분화되고 화가는 이런 색채를 마음대로 조합할 수 있다. 공간적 평면 위에 색채들의 유희가 펼쳐지는데, 이런 색채의 유희는 다양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우선 공간적 원근법 대신 색채 원근법이 가능해진다. 밝은 색은 가까이 보이고 어두운 색은 멀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헤겔은 회화에서 원근은 선 원근법 즉 추상적 원근법보다는 “상이한 색채를 통해 표현되어야 한다”고 즉 “빛과 그림자가 색을 지녀야 한다고”[2] 말한다. .

 

“빛은 이제 형상 거리 등과 같은 대상들의 차별성을 가상화함으로써.. 이 대상들이 인식되게끔 만든다.  왜냐하면 …명암 자체는 …가상화된 대상들과 우리 사이의 거리에 관계하기 때문이다.”[3]

 

4)

색채가 명도를 통해 원근법을 만들어내는 데 그치는 것은 아니다. 색채는 서로 대비된다. 색채는 서로 충돌하고 서로 조화됨으로써 하나의 색채 음악을 만들어낸다. 헤겔은 르네상스 화가 다빈치 등이 시도한 스푸마토 효과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대상을 결여한 채 독자적으로 전개되는 색채의 유희가 등장하는데, 이 유희는 채색의 가장 극단적인 정점에까지 이르러, 색채가 서로 침투하고 빛[Schein]이 반조하니, 이 반조의 빛은 다른 가상 속으로 비추어 들어가면서 너무나 섬세하고 유동적이어서 영혼을 드러내며 음악의 영역으로 넘어 들어가기 시작한다.”[4]

색채의 음악

이 색채음악은 특칭적 주관이 지닌 감정을 촉발한다. “영혼적인 것은 회화가 색채를 사용함으로써 비로소 생생하게 현상한다”[5]는 것이다. 헤겔은 색채가 전개하는 이런 마법을 여러 가지 예를 통해 소개한다.

 

“푸른색이 무저항의 어두움을 원칙으로 삼는 한, 그것은 비교적 온유한 것, 온당한 것, 비교적 고요한 것, 예민한 내면의 응시에 상응하며 반면에 밝음은 차라리 저항적인 것, 생산적인 석, 활기한 것, 명랑한 것이다. 녹색은 무차별적이고 중립적이다. 이러한 상징성에 따라서 예컨대 마리아는 대관을 한 하늘의 여왕으로 표상되는 곳에서는 종종 붉은 망토를, 반면 어머니로 나타나는 곳에서는 푸른 망토를 걸치고 있다.”[6]

 

네델란드 화가는 색채를 다루는 데서 탁월한 솜씨를 발휘한다.

 

“색채의 마법으로 이루어진, 그리고 이러한 마법사적인 예술가 특유의 정신에 의해 영혼의 빛남이[Schein]이 이러한 관념성, 이러한 내적 교호, 반사와 색채 빛남[Schein] 사이의 이러한 왕래, 이행의 이러한 변화와 유동을 통해 명료함, 광휘, 깊이, 색채의 부드럽고 감미로운 조명과 함께 화폭 전체에 퍼진다.”[7]

 

회화의 본질에 대한 헤겔의 설명, 르네상스 스푸마토 기법에서 발견한 색채의 음악, 네델란트 작품에서 보이는 색채의 마법은 20세기 등장한 모더니즘 회화를 헤겔이 미리 선취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칸딘스키가 추상화를 전개하면서 음악의 기법을 회화에 도입하려 했던 시도를 헤겔은 이미 르네상스나 네델란드의 작품에서 발견한 것이다.

 

5)

회화는 세잔느 이후 공간적 형상이 아니라 색채로 그 본질적 질료로 삼았다. 20세기 등장한 다양한 모더니즘 유파 즉 입체화나 추상화, 아상블라주, 꼴라주, 드립핑 등이 등장할 때만 해도, 회화는 색채와 평면이라는 질료적 한계 안에서 움직였다.

오늘날 개념 미술에 이르면 아예 평면과 색채도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회화는 이제 문학적 표상을 질료로 삼는다. 많은 설치 미술의 경우, 회화는 조각을 닮아가며, 비디오 미술은 삼색화나 만화처럼 시각적 요소 속으로 언어나 운동이나 내러티브를 다시 도입하려 했다. 회화의 평면을 찌르거나 칼로 베면서 그 흔적을 남기거나 입체적 공간 속에 조명을 비추기도 한다.

이런 회화를 벗어나려는 시도를 통해 회화는 조각, 건축, 문학 장르로 넘어 들어가기도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여전히 색채와 평면이라는 질료적 특성을 떠나지 않는다. 회화 장르의 현대적 확장은 그런 점에서 장르의 경계선상에 머물러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어떻게 본다면 그 모든 시도는 색채와 평면의 확장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헤겔이 회화의 본질적 질료는 색채이고 이 색채는 평면을 떠날 수 없다는 주장은 여전히 타당하다고 보겠다.


[1] 미학강의 3권, 32쪽

[2] 미학강의 3권, 78쪽

[3] 미학강의 3권, 36쪽

[4] 미학강의 3권, 86쪽

[5] 미학강의 3권, 75쪽

[6] 미학강의 3권, 79쪽

[7] 미학강의 3권, 86-87쪽

헤겔미학산책39-괴테의 색채론과 헤겔의 색채론[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39-괴테의 색채론과 헤겔의 색채론

 

1)

회화의 질료란 무엇인가? 공간적 평면인가 아니면 색채인가? 헤겔은 회화의 질료가 일단 공간의 평면화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본다. 이런 평면화로부터 예술은 조각에 이르기까지 지배적이었던 구체적 물체에 대한 종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헤겔은 여기서 머무르지 않고 한 걸음 더 나가 색채로 넘어가면서 색채를 본질적 질료로 삼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회화가 사용하는 물리적 요소가 어떤 종류인지 묻는다면 대상성 일반을 보편적으로 가시화하는 빛이 그것이다.”

“더욱 추상관념적인 이러한 측면의 성질로 인해 빛은 회화의 물리적 원칙이 된다.“[1]

 

역사적으로 볼 때-예를 들어 알타미라 동굴 벽화 등에서 보듯이- 회화는 처음에 아마도 사물의 외적 형태 즉 평면적 형상을 따오는 방식으로 출발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평면 형상은 조각과 달리 실재 물질을 통해 표현되지 않았다. 그것은 벽면이라는 공간에 다만 외적인 형태만 닮은 선으로 표현되었다. 물론 이때에도 색채가 그 외적 형태를 채우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지만 색채는 아무래도 종속적이었다.

사물의 형태는 선이 아니라 색채로 만들어진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화가 세잔느는 평면적 외적 형태가 확고하게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심하면서, 사물의 형태를 새롭게 창조하려 했다. 그는 수없이 다양한 색채의 중첩을 통해 하나의 외적 형태를 창조해 냈다. 세잔느의 이런 시도를 통해 회화의 본질이 평면적 형태가 아니라 색채에 있다는 사실이 확립되었었다. 그 후 모더니즘은 아예 형태 자체를 제거한 추상화로 나가면서 색채를 회화의 본질적 질료로 삼았다.

색채가 본질이라는 생각이 세잔느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색채가 회화의 본질적 질료라는 헤겔의 생각은 얼마나 시대를 앞선 통찰이었는가? 놀랍기 짝이 없는 생각이다.

 

2)

헤겔은 왜 색채가 평면적 형태보다 더 본질적이라고 보았는가? 색채(즉 빛)가 회화의 본질적 질료더라도 회화가 공간적 평면 없이 가능할까? 헤겔 역시 회화의 출발점으로서 공간적 평면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므로, 그에게서 회화에서 색채와 공간적 평면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먼저 색채라는 개념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헤겔은 색채라는 개념에 괴테의 색채론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괴테의 색채에 대한 개념과 헤겔의 색채에 대한 개념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색채에 대해 괴테는 <색채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선 빛으로부터 노랑색이라는 색이 생겨나며, 또 다른 색은 암흑으로부터 생겨나는데, 그것은 파란색이라는 이름으로 표기된다.”[2]

 

우선 괴테가 빛뿐만 아니라 어둠도 나름대로 빛을 내는 광원이라고 본다는 것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물론 어둠이 내는 빛은 밝은 빛이 아닌 어둠이라는 빛이지만 그것도 역시 빛을 발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빛에서 색채가 나온다. 빛에서는 노랑색이 나오며, 어둠에서는 파란색이 나온다.

그러면 빛(빛과 어둠)으로부터 색채(노랑색과 파란색)가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은 색채론 4장, 색채의 속성에 대한 일반적 견해에서 찾을 수 있다. 괴테는 프리즘 현상을 알았지만, 빛이 분화되면서 색채가 된다는 생각은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괴테는 빛이 색채로 변화하는 조건으로 굴절이나 반사라는 과정을 들고 있으며, 이런 과정이 흐린 매체를 통해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들고 있다. 즉 물체의 어떤 성질 즉 ‘흐림’이 빛이 색채로 나타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3].

여기서 매체의 ‘흐림’이란 어떤 의미일까? 괴테도 물체가 지닌 어떤 성질이 빛에 일정한 영향을 주면서 빛이 색채로 나타난다고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괴테는 자신의 짐작을 확대하여 물체의 압력, 회전, 열기, 입김 그리고 물체의 움직임과 변화, 물체의 구성성분조차 색채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4]

괴테는 일단 빛이 색채로 변화하면, 색채는 서로 대립된 것의 상호 작용을 통해 다양한 색채가 출현하는 것으로 본다. 빛에서 두 대립된 색채인 노란색과 파란색이 출현하면, 나머지 색채는 이 두 색채의 조합에 의해 출현한다. 이 두 색채의 작용이 중화되면 즉 “서로 완벽한 균형을 유지하면”, 녹색이 출현하며, 두 색채가 조화로우면 즉 “두 색채의 순도를 높이거나 짙게 하면” 빨강색이 나온다[5].

 

“만일 그것들이 아주 순수한 상태에서 혼합되어 서로 완벽하게 균형을 유지하게 된다면, 제3의 색을 낳게 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녹색이라 이름 붙인다. 그러나 앞의 두 색은 순도를 높이거나 짙게 하면 그 각각의 색으로부터 새로운 현상을 불러일으킨다. 말하자면 그것은 붉은 색을 띠게 된다.”

 

괴테는 색채 현상의 기본 원리로 세 가지 원리를 들었다. 양극성의 원리와, 상승의 원리, 총체성의 원리이다[6]. 이 세 가지 원리는 서로 대립하는 것 사이의 대립과 조화라는 관계라는 개념을 낳았다. 그의 색채론은 오늘날 보기에는 상당한 오류가 존재하지만, 철학적으로는 자연을 대립물의 통일을 통해서 설명하면서 뉴톤적인 기계론적 세계관에 대립하는 새로운 세계관을 발전시켰다. 헤겔의 변증법도 괴테의 색채론의 영향권 아래 놓여질 수 있을 것이다.

 

4)

이제 헤겔의 색채론으로 넘어가 보자. 헤겔에 따르면 빛은 “가볍고”, “저항이 없으며”, “자기와 순수하게 통일되어 있어서” “최초의 관념적 존재”이며 “최초의 자아” [7]이다. 헤겔은 그 특성을 탈자성[脫自;Aussersichsein]에 두었다.

 

“물질의 추상적 자아로서 빛은 절대적으로 가벼운 것이며 물질로서는 무한한 탈자적 존재이다. 그러나 순수한 현현이고 물질적 관념성인 한에서 불가분적인 단순한 탈자적 존재이다.”[8]

 

상당히 관념적 언어로 서술되어 있지만 이런 표현은 빛이 질량[무게]을 지닌 물체와 대립하는 것 오늘날로 말하자면 일종의 에너지라는 것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빛은 물체적인 것을 넘어선 관념적인 것이다. 빛은 여전히 물질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므로 최초로 관념화된 것 즉 물질의 자아가 된다. 즉 관념화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아직 개인의 정신적 주관에 내재하는 관념은 아니라는 뜻이다.

 

“자연은 빛에서 처음 주관적으로 되기 시작하며 … 아직은 특칭성으로 나아간 것 개체성 및 점과 같은 내적 완결성으로 수렴된 것이 아니다.[9]

 

괴테와 비교해 볼 때 우선 헤겔은 괴테가 말한 어둠이라는 독자적 광원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명시작용을 하는 것은 오직 빛뿐이다.

그렇다면 색채는 어디서 나오는가? 색채는 빛의 명시작용 즉 가시화 작용으로부터 나온다.

 

“빛은 명시작용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명시작용은 여기 자연에서는 가시화됨 일반으로서만 나타날 뿐이다. 이를 통해 드러나는 것의 특수한 내용을 자신의 외부에서 대상성으로 가진다. 이 대상성은 빛이 아닌 빛의 타자이며 이로써 어두움 속에 존재한다.”[10]

 

“어두운 것은 빛과 상이하면서 독자적으로 존립하는 한, 빛은 다만 이 일단 불가침투적인 것의 표면에 관계한다. 그와 같은 표면은 빛이 관계하면서 현현하며, 마찬가지로 불가분적으로 자기를 현현하면서 즉 타자에서 빛나게 된다.”[11]

 

빛은 자신의 타자 어둠과 만나서 색채를 만들어낸다. 언뜻 보면, 여기서 괴테도 헤겔도 어둠을 빛에 대립하는 독자적 광원으로 제시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헤겔이 말한 어둠이라는 광원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한 어둠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빛을 어둡게 하는 것 즉 물체이다.

헤겔은 사물의 표면이 빛을 흡수한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는 몰랐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물의 표면이 빛에 대해 어떤 작용을 한다고 보았고, 그것을 어둡게 하는 작용이라 보았던 것이다. 빛이 이렇게 물체에 의해 어둡게 되면서, 색채가 나온다. 그러므로 빛의 명시작용은 “빛에 의해 드러나는 것의 특수한 내용[즉 색채]을 대상성으로서 갖는다.”[12]

헤겔은 색채를 빛과 물체의 관계를 통해 설명하려 했으므로, 괴테가 색채 사이에 설정한 양극성의 원리나 상승의 원리, 전체성의 원리를 거론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빛은 색채로 변화하면서 다양한 색채로 분화된다고 본다. 이처럼 색채가 분화되면서, 색채는 서로 결합될 수 있다.

 

5)

헤겔은 빛이라는 광원만 인정했으니 어둠이라는 광원을 독자적 설정한 괴테에 비하면 현대 물리학에 좀 더 가깝다. 그가 역시 빛을 물질적인 것이지만 물체적인 것은 넘어선 것이라고 본 점도 장차 등장하는 빛 에너지 개념을 연상시킨다. 그럼에도 그는 빛 자체가 여러 파장의 빛으로 구성된다는 빛의 분화라는 사실을 이해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회화와 연관하여 중요한 것은 우선 헤겔에서 빛이 불투명한 물체의 표면에 관계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회화의 질료가 색채라고 하더라도 이 색채가 표면적 공간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잘 설명해 준다. 마치 조각의 질료는 물질적, 형상이지만 그 형상은 그것과 대립하는 물질의 덩어리를 떠날 수 없듯이 회화 역시 색채가 그 질료이지만 이 질료는 평면이라는 공간을 떠날 수 없다. 그러나 마치 조각에서 공간이 형상의 이면일 뿐 그 자체가 질료가 아닌 것처럼, 회화에서 색채가 본질적 질료이며 공간적 평면은 이런 색채가 현존할 수 있는 조건에 불과하다.

또 하나 회화의 측면에서 중요한 것은 색채가 분화된다는 사실이다. 색채가 분화되면서, 그 자체가 가상화된다. 색채는 그 자체로서 어떤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오직 상호 관계를 통해 어떤 것을 의미하게 된다. 이런 상호 관계 속에서 어떤 색채는 다른 색채에 대해서 자기를 규정하면서 자기 부정적인 존재 즉 가상적 존재일 뿐이다. 색채가 지닌 이런 가상성은 회화가 색채의 마법, 색채의 음악을 통해 특칭적 주관성을 그려낼 수 있는 토대가 된다.


[1] 미학강의 3권, 35, 36쪽

[2] 괴테, 색채론, 장희창 역, 민음사, 2003, 43쪽

[3] 괴테는 구체적으로 밝은 빛이 불투명한 대기 속에서는 노랑색으로 보이며, 어둠은 불투명한 대기 속에서 파란색으로 보인다고 한다. 색채론, 앞의 책, 88쪽 §150 참조

[4] 이 부분에 관해서는 색채론, 앞의 책, 226쪽 §691 참조. 괴테는 오늘날 누구나 알고 있듯이 매체가 빛의 일부를 흡수하거나(반사) 속도에 영향을 주면서(굴절) 색을 나타나게 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러면서도 매체가 지닌 물체의 성격이 빛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했고 빛의 색으로의 변화는 일종의 변용으로 보았다.

[5] 그렇다면 청색에서 황색에 이르기까지 중간 색은 두 색의 혼합 비율에 따라 서로 달라지며, 노랑색에서 파란색에 이르는 다른 색은 순도를 조절하면 나오게 될 것이다. 괴테는 색채의 현상을 생리색(지각적인 색)이나 물리색(반사나 굴절에 의한 색), 화학색(물체 자체의 가열에서 생기는 색) 등으로 구분했다. 빛에서 색이 나오는 과정은 주로 물리색에서 다루어진다.

[6] 양극성의 원리란 색채에 노랑색과 파란색이라는 두 가지 대립된 것이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상승의 원리는 노랑색과 파란색이 더욱 짙어지면서 둘 다 빨강색을 향해 상승한다는 뜻이다. 총체성의 원리는 어떤 색의 지각은 그것과 대립되는 색의 지각을 배경으로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빨강색의 지각은 그에 대립하는 녹색을 동시에 지각하게 만든다.

[7] 미학강의 3권, 36쪽

[8] 헤겔, 철학강요, §276

[9] 미학강의 3권, 36쪽

[10] 미학강의 3권, 36쪽

[11] 헤겔, 철학강요, §277

[12] 미학강의 3권, 36쪽

헤겔미학산책38-낭만적 예술 장르가 가능한가?[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38-낭만적 예술 장르가 가능한가?

1) 낭만적 예술 장르

헤겔은 예술의 역사적 형식을 예술이 표현하려는 정신과 예술 작품 사이의 기호적 연관관계를 통해서 규정했다. 세 가지 기호의 형식 즉 상징, 현상, 가상에 따라 세 가지 예술 형식이 출현했다. 그것이 곧 상징주의 고전주의 낭만주의이었다.

 

헤겔은 심지어 예술 장르조차 세 가지로 나누어, 상징적 장르, 고전적 장르, 낭만적 장르로 구분했다. 그것은 작품과 정신의 관계와 유사하게 질료가 의미에 대해 어떤 관계를 지니는가에 따른 것이다. 앞에서 건축의 질료인 무규정적 매스는 그 의미를 자기 밖에 지니므로, 상징적 장르다. 조각은 구체적 물질성이 질료이니, 그 자체에서 정신적 형상을 표현할 수 있다. 조각은 고전적 장르이다.

 

그렇다면 낭만적 예술장르에서 질료는 무엇이며, 그것은 의미와 어떤 연관성을 갖는가?  그것은 낭만적 예술 형식과 어떤 연관성을 지니는 것일까?

 

낭만적 예술 장르로 헤겔이 포괄하는 장르는 회화, 음악, 그리고 시문학이다. 어떻게 보면 대부분의 예술 장르가 낭만적인 장르에 속하게 된다. 이런 다양한 장르는 언뜻 보기에 너무나 이질적이어서 어떤 하나의 공통적인 질료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의문조차 든다.

 

2)

헤겔에서 회화의 질료는 색채이고, 음악의 질료는 음이다. 시문학의 질료는 음소나 문자와 같은 것이 아니라 언어적 관념[표상]이다. 일반적으로 보면 색채나 음은 물질적인 것이다. 반면 언어적 관념은 물질적인 것에 대립하는 관념이니, 그 사이에 어떤 공통성이 전혀 있을 것 같지 않다.

 

하지만 헤겔의 자연철학적 관점에서는 생각이 달라진다. 헤겔에서 색채나 음은 언어적 관념은 아니지만 일종의 관념적인 것이다. 우선 색채를 보자. 색채는 빛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사물의 표면에 반사되면서 색채가 된다.[1] 색채의 원천이 되는 빛이 물체의 질량에 대립하는 순수한 에너지라는 점에서 헤겔이 색채가 이미 관념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음도 마찬가지다. 음은 사물 자체의 울림[Klang]이며, 그것은 마치 빛과 같은 것인데, 사물에 외적으로 존재하는 빛이 아니라 사물 자체에서 나오는 빛 즉 진동[Erzittern]이다. 사물은 진동 속에서  자기를 상실하지만 다시 자기를 회복하니, 헤겔은 이런 진동을 물질의 관념적 운동이라 규정한다[2].  

 

헤겔은 색채와 음을 언어적 관념과 마찬가지로 관념적인 것으로 본다. 하지만 이것들 사이에 일정한 단계적 구분이 존재한다. 색채는 빛 자체가 아니라 빛이 물체의 표면에 반사된 것이다. 그러므로 색채는 물체의 표면 공간을 떠날 수 없으며, 색채는 표면 공간에 의존하고 그것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3]

 

반면 물체의 진동인 음은 스스로 소멸하면서도 자기를 보존해 나가는 시간적 존재이며[4] 따라서 색채보다 더 발전된 의미에서 관념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물질은 외재성{Aussereinandersein:  병존성}을 벗어나서 탈자적[Aussersichsein: 소멸성] 존재가 된다. 이런 탈자적, 시간적 존재조차 여전히 물질의 진동인 한에서, 물질성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언어적 관념에 이르러 음소나 문자와 같은 언어의 물질성은 관념을 지시하는 기호에 지나지 않고, 그것이 지시하는 관념은 물질성으로 완전히 벗어나 자유롭게 된 순수한 관념적 존재가 된다. 이런 관념성은 공간성뿐만 아니라 시간성마저 상실하고, 관념과 관념은 오직 논리적[언어적] 관계만 갖는다.

 

3)

낭만적 질료라 규정한 색채와 음, 언어적 관념이 관념적인 것이라는 공통성을 지닌다고 해서 단순히 그런 공통성이 그런 질료를 낭만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근거는 아닐 것이다. 관념적인 것이 낭만적인 것이 되어야 할 이유가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낭만주의 예술형식의 경우 그 기호는 가상이라고 규정되었다는 것을 상기해 보자. 가상이라는 것은 현상과 같이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정하면서, 의미를 지시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자기 부정성은 달리 말하자면 자기 내 복귀를 말한다. 이를 통해 무한한 주관성으로서의 정신이 자기를 드러낸다.

 

구체적으로 말해 낭만주의 예술 형식에서 개별적 사건이나 특칭적인 주관성은 실제로 존재하는 대로 리얼하게 제시되지만 이것은 그 자체로서 부정되는 가운데 정신 드러낸다. 개별적 사건이나 특칭적 주관성은 생성과 소멸이라는 운동성 속에 제시되기에 가상이라 규정된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보카시오의 데카메론과 같은 모험 소설이나 셰익스피어의 리어왕과 같은 성격 희곡일 것이다.  

 

낭만주의의 말기 즉 근대 자본주의 시대에 개별적 사건이나 특칭적 주관성이 긍정적인 방식으로 제시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이런 긍정성은 무한성, 즉 자기복귀라는 자기 부정적 운동을 잠재적 배경으로 깔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는 대체로 외적 자연, 즉 이런 자연의 개별화되고 특칭적인 것으로 된 대상들이 표현되기도 하지만, 이 경우 이것들은 아무리 충실하게 취급되더라도 이 경우 이런 대상들에게는 자기 자신에서 정신적인 것이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이 가시화되어야 한다. 그런 대상은 이미 그 예술적 실현 방식을 통하여 정신이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 또 대상에 대한 자신의 이해가 생동적이고, 외면성의 최종적 극단에조차 심정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 함, 한마디로 내적 관념적 요소를 가시화한다.” [5]

 

이런 가상 개념을 생각해 볼 때, 헤겔이 색채와 음, 언어적 관념과 같은 관념적 질료를 낭만적 질료라고 규정했다면 그 이유는 그런 관념적 질료가 자기 부정적이거나 자기 복귀라는 가상적인 성격을 지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낭만적 질료에 대해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 주관적인 것이 … 이 질료 속에 이입된다면, 내면은 내면으로서 비치기 위해 이 질료에서 한편으로는 공간적 총체성을 제거하고 또한 공간의 직접적 현존재를 그와 반대되는 것으로 즉 정신에서 야기된 가상으로 변화시켜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형상 및 그 외적 감각적 가시성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내용이 요구하는 갖가지 특칭화하는 현상방식들을 추가로 도입해야 할 것이다”[6]

 

여기서 헤겔은 낭만적 정신이 무한한 주관성이라는 전제 아래서 이런 무한한 주관성을 예술적 질료가 표현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 그 질료에서 공간성을 제거하고 ‘정신에서 야기된 가상’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런 가상성 외에도 갖가지 특칭화하는 현상방식 즉 특수 기법을 끌어들여야 한다고 말하는데, 역시 전체의 핵심은 가상 개념에 있다. 낭만적 질료가 되려면 가상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4)

하지만 관념적인 질료가 가상적인 근거가 쉽게 파악되지 않는다. 관념적인 것이 가상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가상성이란 자기 부정성, 자기 내 복귀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는데, 관념적인 것은 이런 개념과 필연적 연관성을 지니는 것일까?

 

여기서 헤겔의 관념성에 대한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헤겔이 물질은 외재적[Aussereinandersein]인 것이다. 그것을 극복하여 상호 내재적이 되면 관념적으로 된다. 즉 어떤 것이 자기에 대립하는 타자에 의해 규정되면, 이 경우 타자는 자기의 부정이며 자기는 이 타자의 부정, 즉 이중 부정이 되면서 관념적인 것으로 된다.

“여기에 정립되는 관념성은 이중적인 부정으로서 변화를 의미한다. 물질적 부분이 상호 외부적으로 존립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마찬가지로 부정되니, 그것의 상호 외부적 존재와 그 응집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 관념성은 서로를 지양하는 규정성의 교체로서의 관념성, 물체의 자기 내부에서의 진동 곧 음이다.” [7]

 

이처럼 자기가 타자에 의해 규정되는 경우 이제 의미는 개별적인 것 그 자체에서 주어지지 않는다. 관념적인 것은 오직 상호 관계를 통해 타자를 통해서 자기가 규정되니, 이것이 관념적인 것에서부터 가상적인 것이 출현하는 근거가 된다. 관념적인 것은 자기 부정을 통해서 자기 내로 복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건축이나 조각에서 물적 질료는 그 의미가 상징적이든 고전적이든 간에 개별적 질료가 그 자체로서 어떤 의미를 지닌다. 개별적 질료는 서로 독자적인 것이며, 비록 외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하더라도 그 관계는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관념적 질료인 색이나 음, 그리고 언어는 그 자체로서 고립적으로 규정되지 않으며 항상 타자에 대해서 반성적으로 규정된다. 그러므로 이런 질료는 개별자 자체로서는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것은 항상 서로 대립하는 질료 사이의 관계를 통해서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예를 들어 빨강색은 파란색이나 노랑색에 대해서 규정되는 것이며, 그러므로 빨강색은 이런 파란색이나 노랑색과 관계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닌다. 실제로 헤겔은 회화의 근본적 성격을 설명하면서 색채의 마법을 서술한다. 이 색채의 마법이란 곧 여러 가지 색채가 상호 대립과 조화를 통해 전체적으로 정신적 형상을 보여주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음악의 음도 마찬가지다. 도미솔은 각자 고유한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다. 도미솔은 서로의 관계를 통해서 규정되며 따라서 각자의 의미는 이런 음들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헤겔은 건축을 얼어붙은 음악이라 했듯이 음악은 음들로 이루어진 건축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개별적 질료 사이의 반성적 관계는 언어적 관념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개별 단어는 항상 다른 단어와의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 단어가 그런 관계 속에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구조주의 언어학의 등장 이래로 일반 상식이 된 것으로 보인다.

 

5)

물론 색채와 음, 언어적 관념 사이에서 각각이 갖는 상호 관계는 다르다. 색채는 다른 색채와 공간적 관계를 맺으며 하나의 음과 다른 음은 시간적 관계 속에 있다. 색채나 음에서 그 관계는 마치 역학적인 인력과 척력의 관계처럼 대립과 조화, 또는 비례라는 단순한 수적인 관계에 머무른다. 이런 관계는 감각적 감정을 건드릴 수는 있지만, 이것을 통해 구체적 사태를 그것도 생성 소멸하는 운동 속에서 그려낼 수는 없다.  

 

반면 언어적 관념에서는 이제 주어와 술어라는 고유한 언어적 논리적 방식이 출현하게 된다. 이런 관계는 가장 관념적인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구체적 사태를 그려낼 수 있고 그 사태를 운동하는 것 속에서 그려낼 수 있으니, 예술 가운데 가장 풍부한 질료가 될 수 있다.  

 

이처럼 관념적 질료는 반성적 상호 관계 속에 있다. 그것은 이제 그 자체로서 규정되지 못하며 타자에 대해서 규정된다. 그러므로 관념적 질료는 자기 부정성이나 자기 내 복귀라는 성격을 지니게 되니, 헤겔은 이런 관념적 질료를 가상적 질료라 하면서, 낭만적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1] 이 빛은 물질적인 것이지만 이미 물질적인 것이 “자기 내로 복귀한 것”이니, 헤겔에 따라면 빛은 “물질적 관념성”, “불가분적이고 단순한 탈자태[Aussersichsein]”, “물질의 자아[Selbst der Materialitaet]”이다. (헤겔, 철학강요, S. 280)

[2] 이 진동은 “물체에서 나타나는 물체의 관념성[am Materiellen als dessen Idealitaet]” 또는 “역학적인 영혼성[mechanische Seelenhaftigkeit]”이다. (헤겔, 철학강요, S. 297)

[3] 아래 구절을 참조하라. “동시에 빛과 상이한 어두운 것[물체]은 독자적으로 존립하는 한, 빛은 이런 일단 불투명한 것의 표면에 관계한다.” (헤겔, 철학강요, S. 280)

[4] 아래 구절을 참조하라. “규정성의 특수한 단순성, 이 우선 내적인 형식은 물질적인 외재성[Aussereinandersein] 속에 잠겨 있던 것을 뚫고 지나가면서 그의 외재성이 독자적으로 존립하는 것을 부정하는 가운데 자유롭게 된다. 이것을 통해 물질적 공간성이 물질적 시간성으로 이행한다.” (헤겔, 철학강요, S. 297)

[5] 미학강의 3, 18쪽

[6] 미학강의 3, 18쪽

[7] 헤겔, 철학강요, S. 297

헤겔미학산책37-조각의 회화화[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37-조각의 회화화

 

1) 고전 이전

헤겔은 조각의 발전 과정을 건축처럼 예술형식에 따라 구분하지 않고, 그리스 로마 시대 고전적 조각을 기준으로 그 전과 그 후로 나누었다. 고전조각의 특징은 이상성과 생동성, 그리고 자족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전과 그 후의 조각이 지닌 특징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헤겔은 고전 이전의 조각을 대표하는 것으로 이집트 조각을 들고 있다. 이집트 조각은 아직 정신이 자각되지 않은 상태이어서 정신은 동물적 형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인간적 형상이 출현하더라도, 머리는 여전히 동물적인 형상을 지닌 이집트 신이나 몸은 동물의 형상이지만 머리는 인간의 형상인 스핑크스에서 그런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런 형상은 경직되었으며, 양식적인 것에 머물렀으니, 구체적 생동성을 결여했다. 진지했으나 생동성을 결여했다. 그 결과 조각 작품과 그 의미 즉 정신과의 관계는 단절되어 있었고 그 의미는 비밀스러운 것으로 남아 수수께끼적인 상징에 머물러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예술가의 능력이 서투른 것 때문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다른 부분에서는 고도로 사실적인 모습도 출현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경직성과 양식성은 그 시대 정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보인다.

이집트 시대 정신은 아직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므로 예술은 상징적 형식에 빠졌고 그 결과 경직성과 양식성이 출현했다. 즉 이집트 조각은 “신상과 그 비밀스러운 고요함에 관한 근원적 직관”을 반영하는 것이니 그런 작품에서 나타나는 부동성 즉 “상황이나 행위의 결여는 이런 [정신적] 부동성과 불가분으로 결부되어 있다.”[1]

헤겔은 이집트 사회와 유사한 그리스 로마 이전의 민족 즉 에기나인이나 에트루리아인의 조각에서도 똑 같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2) 조각의 쇠퇴

조각은 구체적 질료를 사용하므로, 아무리 구체적이고 생동적이라고 하더라도 정신 자체의 특수한 주관적 본질을 표현하지는 못한다. 개인의 “고통과 고뇌, 가책과 참회, 죽음과 부활, 정신적이며 주관적 인격, 깊은 감정, 사랑, 가슴과 심정 등”[2]을 표현하는 조각은 발견하기 어렵다. 조각의 질료를 가장 잘 다루었던 고전 조각조차도 일반적 정신을 정지 상태의 형상 속에서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니, 움직임을 표현하는 일이나 또는 특수한 주관성을 표현해는 것은 쉽지 않다.

 

조각은 “다만 개별성이 지닌 일반적인 것만을 표현할 수 있으며, 즉 그것이 겉의 육체에 표현될 수 있는 한에서 비연속적인 특정한 한 순간 속에서만 표현할 수 있으며, 그것도 생생하게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행위가 아닌 부동자세로만 표현 할 수 있다”[3]

 

조각의 이런 한계 때문에 조각은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 쇠퇴하기에 이른다. 낭만주의 시대 예술은 개인적 주관성의 특수성을 생성하는 운동 속에서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조각은 예술의 주도적인 역할을 상실하고 점차 다른 낭만주의적 예술 장르가 지배적으로 된다.

 

“이러한 [낭만적] 주관성은 비록 외적인 것 속에서 현상하지만 그것을 그 특칭성에 따라서 독자적인 것으로 둘 뿐, 조각의 이상이 요구하는 것처럼 그것과 내적 정신적 요소의 융합을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4]

 

낭만주의 시대에도 남아 있는 조각은 그 시대 정신은 낭만적임에도 불구하고 형상화의 방식은 여전히 고전적인 방식을 답습했다. 과거의 신과 영웅을 대신하여 그리스도와 성인이나 시민적 영웅의 형상이 등장하는데, 그 표현 방식은 그리스도와 시민적 영웅을 이상화한다.

그와 같은 시도는 르네상스 시대에서나 신고전주의처럼 그리스적 양식을 예술의 이상으로 삼았던 시대에 특히 유행했다. 성당을 장식한 성인 상이나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이나, 헤겔 자신이 찬탄을 금하지 않았던 라우흐의 괴테상 등에서 그 흔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미학강의에서 헤겔 자신이 자기를 미혹했다고도 표현했던 미켈란젤로의 ‘나소 백장 능묘’도 이런 경향을 표현한다. 헤겔은 이 작품이 “고대인의 조형 예술의 원칙과 낭만적 예술의 영활 방식이 생산적 독창성으로 결합한다”[5]라고 한다.

 

3) 고전 이후의 조각

자체 내 한계에도 불구하고 조각 역시 낭만주의 시대 리얼리즘적 경향을 따라 운동성과 특수한 주관성을 표현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헤겔은 그런 발전 경향을 명시적으로 서술한 바는 없으나 그의 서술 가운데 그런 경향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이런 발전은 청동과 같은 가소성이 풍부한 질료를 다루는 기술의 발전에 의해 가능해졌다. 청동은 이미 고대에서부터 조각의 질료로 다루어졌으나, “각종 표현에 쓰일 수 있으며, 또한 대단히 다양한 그 색조와 무한한 조형 가능성 및 유동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가능성은 근대에 들어와서 고도로 발전했다고 한다[6].

이어서 헤겔은 조각 표현방식의 발전을 설명하면서, 군상과 부조를 거론한다. 조각은 운동성을 표현하기 위해 하나의 개별 입상에 머무르지 않고 여러 조각품이 함께 어우러진 군상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미 고전 시대의 말기에 등장한 라오쿤 군상 등에서도 그런 경향이 등장했지만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아무래도 낭만주의 시대 이후다. 특히 고딕 성당을 둘러싸고 있는 조각상은 여러 성인의 집단적 인물군이다.

조각 작품은 부조를 통해 평면 위에 표현되기 시작하면서 연속된 평면 위에 드라마틱한 역사적 이야기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같은 사건이 서술한다. 헤겔은 이런 부조는 조각이 “회화의 원칙을 향해 의미 있는 발걸음을 뗀 것”[7]이라고 평가한다.

고전 조각은 하나의 독립적 작품이었다. 그것은 고유한 공간에 자립적으로 서 있다. 그러나 군상과 부조는 이제 그 자체 자립적인 작품이 되지 못하고, ‘건축의 장식물’로 전락한다. “성자들은 대개 탑과 내력 벽의 벽감 속이나 현관문에 서 있는 반면, …[성서 속의] 위대한 광경은 그 내적 다양성으로 인해 즉시 교회 정문이나 교회의 벽, 성수반 합창대석 등등에서 부조로 표현되었다”[8].

낭만적 조각의 또 하나의 경향은 주관적 특수성을 표현하려는 시도이다. 헤겔은 조각 장 마지막 부분에 서술된 기독교 조각에 대한 서술에서 이를 설명한다. 그 결과 역사상 실제 인물을 닮은 초상화적인 조각상이 곳곳에 세워졌으니, 이런 작품은 인물이 지닌 특수한 주관적 정신을 표현한다. 헤겔은 그 예로서 뉘른베르크 시장의 거위상인이나 그 외 성 제발트 교회에서 발견되는 조각을 들고 있다.

조각은 채색되고 과장, 왜곡되면서 회화를 닮아간다

“고전적 조각에서는 객관적 실체적 개별성이 중심점을 제공하였다…. 하지만 그런 까닭에 여기서 ..묘사된 인간은 온전한 인간 즉 모든 것이 구비된 구체적 인간이 아니다. 왜냐하면 온전한 개성이, 주관의 전 영역이 현실의 무한한 권역에서 내용과 표현방식의 원칙으로 현상하려면, 그는 ..객관적 보편성으로서의 인간성뿐만 아니라….주관적 개체성, 인간적 약점, 특수성, 우연성, 자의 직접적 개별성, 열정 등등의 계기 역시 구비해야 하기 …때문이다.”[9]

 

이런 초상화적인 조각은 회화를 닮아가면서 특수한 주관성을 표현하기 위해 과장이나 왜곡이 들어가게 되며, 무엇보다도 지금껏 배제되었던 색채와 눈의 시선이 표현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헤겔은 이런 주관화의 경향은 조각의 질료상 한계에 부딪히면서 예술적 표현의 또 다른 감각적 질료를 요구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곧 회화이다.


[1] 미학강의 2, 486쪽

[2] 미학강의 2, 494쪽

[3] 미학강의 2, 382쪽

[4] 미학강의 2, 495쪽

[5] 미학강의 2, 497쪽

[6] 헤겔은 구체적으로 프러시아에서 그런 기술이 발전했다고 말하면서 그네센의 청동교회문, 베를린과 블레슬라우에 있는 블뤼허 상, 비텐부르크의 루터 상, 쾨니스베르크와 뒤셀도르프에 있는 청동상 등을 들고 있다.

[7] 미학강의 2, 472쪽

[8] 미학강의 2, 496쪽

[9] 미학강의 2, 498쪽

헤겔미학산책36-조각의 형상화[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36-조각의 형상화

 

1)

앞에서 조각의 질료는 구체적 물질성이며, 그것의 형상화는 현상 즉 닮은 꼴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조각의 역사적 발전 과정을 앞에서 말한 건축의 발전 과정과 상이하다.

건축의 경우 그 의미가 내적 공간에 상징적으로 주어질 뿐이었다. 이때 내적 공간은 그 의미에 대해 수단적인 적합성을 지닌다. 내적 공간이 축조되면서 만들어지는 외면적 형태가 그 시대 정신에 의해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는데 건축은 이를 통해 상징적 건축, 고전적 건축, 낭만적 건축으로 구분된다.

반면 조각의 경우 그 질료인 물질성 자체가 정신을 직접 현상한다. 따라서 조각의 발전은 이런 현상 즉 닮은 꼴이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는가에 따라서 구분된다. 헤겔은 이때 고전적인 표현방식 즉 이상화된 표현방식을 기준으로 그 이전과 그 이후로 구분할 뿐이다. 그러므로 먼저 조각에서 고전적 형상화의 방식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다.

 

2)

조각에서 고전적 형상화는 그리스 로마 조각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기준으로 한다. 고전적 형상화의 가장 근본적인 특징은 아름다움 즉 조화와 균형에 있다.

고전적 형상화는 그리스 조각에서 잘 보이듯이, 부분적으로는 실제 대상을 구체적으로 모사한다. 그 구체적 모습은 창을 던지거나 뱀에 물린 것과 같은 운동하는 모습이며 그런 운동이 정점에 이른 한 순간을 표현한다. 이런 점에서 고전적 형상화는 매우 구체적인 생동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이런 구체적 모습 때문에 고전적 조각은 자주 리얼리즘적 예술의 모범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고전적 형상화는 리얼리즘적 경향성을 지닌 것은 아니다. 오히려 리얼리즘은 있는 그대로의 실제 대상을 보여주려는 낭만적 예술 형식이 지닌 특징이다. 반면 고전적 형상화는 부분적으로 구체적인 사실적 모습 사이의 이상적인 관계를 표현한다. 이런 이상적 관계는 조화와 균형에 따른 이성적인 비율이니 대표적인 것이 황금분할의 비율이다. 이런 비율 때문에 고전적 형상화는 미의 이상에 도달했으며, 그 형상화된 모습은 인간의 모습 가운데 가장 탁월한 모습을 보여준다.[1]

하지만 이런 탁월한 모습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이성을 통해 이상화하여 구현한 모습일 뿐이다. 그것은 아름답지만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플라톤적 이데아이다.

 

‟생명의 향기, 전체 부분들의 부드러움과 이상성, 합일의 정신은 영혼을 부여하는 정신적 숨결로서 전체에 스며들어 있다.”[2]

 

여기서 실체적 정신과 감각적 형상 사이에는 완전한 합일이 출현한다. 외적으로 표현되는 것은 어느 것이나 내면이 스며들어 있으므로, 외적인 것은 전체적으로 유기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연적이거나 일시적인 현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헤겔은 이렇게 개체 내에서 유기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는 형상을 본격적인 조각이라고 규정한다.

 

“지엽 말단의 것도 합목적적으로 존재하며 일체의 것은 자신의 차별성, 고유성 그리고 탁월성을 소유한다. 그러하되 그것은 끊임없이 유동하면서 전체 속에서만 타당하게 살 뿐이니 편린들에서도 전체가 인식되며, 또 그렇듯 고립적인 부분이 온전한 총체성의 관조와 향유를 보장한다.”[3]

 

고전적 형상화가 그 부분의 관계를 이상화하는 까닭은 바로 이것이 고전 문화를 이끈 민족을 대표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개인이 아닌 통일된 민족의 정신, 실천적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적 표상을 통해서는 그리스 민족신으로 등장하며 예술적으로는 아름다운 이상화된 모습으로 현상한다.

 

3)

그러므로 고전적 형상화는 이중적이다. 한편으로는 이상화된 모습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구체적 모습이다. 고전적 형상화는 두 가지 측면을 통해 한편으로 실체적 정신을 다른 한편으로 생동적인 모습 가운데서 표현한다.

실체적 정신이 어떤 구체적 모습으로 출현하는가? 그 생동적 모습은 예술가 자신의 개성을 통해 포착된 것이므로 여기서 예술가 자신의 탁월성이 드러나지만, 이 현상 자신은 정신이 자신의 내면성을 가장 완전하게 표현되는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그 내용은 본래 대체로 신화나 전설 속에서 객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완전하게 표현되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은 예술가의 개별적 독창성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동일한 내용이라도 예술가마다 독특한 표현이 출현하게 된다. 마땅히 예술가는 이런 극적인 순간을 형상화하기 위해 신체의 운동하는 모습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갖추고 이를 형상화하는 솜씨를 지녀야 할 것이다.

이런 생동적 구체적 모습은 예술가 자신의 독특한 관점에 따라 달라지지만 그 속에 표현된 일반적 정신은 어느 경우에나 동일하니, 이런 점에서 일반적 정신은 구체적 모습에 대해 냉담하며 무차별하게 보이며 그 스스로 고요하고 단순하게 머무르는 것과 같다. 헤겔은 이런 특징 때문에 그리스 조각 작품은 대체로 명료하고, 명랑하고, 자족적인(자유로운] 느낌을 주게 된다고 말한다.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상

“조각은 … 객관적 정신성 속에서, 독립적 고요 속에서, 타자에 대한 관계로부터 벗어나서 포착하고 형상화한다.” “언제나 실체적인 것이 본질적 기초를 이루며,…신들과 인간성들의 영원성이 자의와 우연적 이기심을 벗은 채 그 맑은 명료성에 따라 표상되어야 한다.”[4]

 

생동성과 자족성은 어쩌면 서로 대립적인 것처럼 보인다. 실체성이 강조되면 자족적인 느낌이 강화되며 반면 구체성이 강조되면 생동성이 강화된다. 같은 그리스 고전 조각이라도 초기에 실체성이 강조된 경우 자족적인 것을 넘어 엄숙하게 느껴지며, 그리스 말기에 이르면 조각 작품은 구체성이 더 강화되면서 심지어 매력적인 것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4)

그리스의 조각이 인간을 나체로 표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리스 조각이 모두 나체는 아니다. 때로는 의복을 통해 단순히 외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부분을 가리면서 오히려 정신적인 것을 표현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체는 “정신이 스민 인간의 신체성을 그 자체로 발전시키고”, “단순 감각적 욕구에 대한 냉담함으로 인해”, 명료하며 명랑하고 자족적인 느낌을 살리는 데 적합하다.

나체인 조각은 다루어진 소재에 그 순수한 이상적 모습을 표현하니 각기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린아이 경우에는 나체는 솔직함과 천진난만함을 표현하며, 영웅의 경우에는 용기와 강함, 인내를 표현하며 마지막으로 운동선수의 경우에는 유연성과 자유 자재한 신체의 놀림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조각이 색채를 거부하는 것도 이런 실체적 일반성과 관련된다. 회화에서 색채는 색채의 마법을 통해 주관적으로 특수한 정신의 움직임을 표현할 수 있다. 색채는 슬픔과 기쁨, 고통과 열정 등을 외부적 자극에 의해 변동하는 정신의 움직임을 표현한다.

조각의 경우 표현되는 일반적 정신은 고요하며 명랑하며 자족하다. 조각에서 만일 색채를 가미하게 된다면 일반적 정신의 고요와 자족을 해치면서 특수한 주관적 정신이 개입하게 된다. 그러므로 조각은 색채를 지운 순수한 색 즉 흰색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1] 미학강의에서 헤겔은 그리스 조각상의 얼굴 모습을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코와 귀를 잇는 선과 이마와 코를 잇는 선이 직각으로 교차해야 하며, 이마에서 턱밑으로 이어지는 선은 두개골 천정과 직각으로 교차해야 한다. 등등.

[2] 미학강의 2, 411쪽

[3] 미학강의 2, 411쪽

[4] 미학강의 2, 394쪽

헤겔미학산책35-조각과 미술의 차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35-조각과 미술의 차이

 

1)

헤겔은 예술 장르를 질료의 특성으로부터 도출한다. 조각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조각의 질료에 관해서 앞에서 건축과 비교하면서 간단하게 소개한 적이 있다. 건축의 질료는 공간적이고 연장적인 덩어리[Mass]이며 무규정적이고 연속적이었다.

반면 조각의 질료는 질적이고 규정적인 물질성[Materialitaet]이다. 조각은 덩어리가 지닌 물질적 특성을 이용해 정신을 형상화한다. 예를 들어 돌과 나무와 같은 사물이 지닌 자연적 특성 자체가 그 형상화의 수단이 되고 있으니, 헤겔은 조각의 질료를 ‘직접적인 것’이라 한다.

 

“[조각] 예술은 질료 속에서, 그것도 그야말로 직접적인 질료 속에서 정신적 개별성의 현상을 형상화하도록 요구 받는다.”[1]

 

물질성과 덩어리는 동전의 이면이다. 양자는 서로 대립하면서도 떼어낼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 건축적 질료가 외적인 형태를 가질 수밖에 없듯이 조각적 형상은 일정한 연장성과 공간성 안에 들어 있을 수밖에 없다. 건축적 공간이 그 외면적 형태에 상응하듯이, 조각 작품은 그것의 질료인 공간에 영향을 받는다. 이 공간은 주변의 환경 즉 조각이 세워져 있는 주변 공간으로까지 확장되며, 주변 환경에 의해서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에 관해 헤겔 자신은 이렇게 말했다.

 

“조각은 그 환경에 본질적으로 관계한다. 조각상이나 군상은 특히 부조는 작품이 위치해야할 장소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제작될 수 없다.”(미학강의 2, 380쪽)

예를 들어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은 원래(1546년경) 피렌체 대성당에 세워지는 12개 성서 인물상 중의 하나로 아고스티노에 의해 제작되었으나 완성되지 못했다. 그 후(1501-1504) 미켈란젤로가 이를 다시 다듬어 완성했다. 완성 후 세워질 장소에 관해 원래 장소로 가는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가 피렌체 시청 앞에 세워지게 되었다. 이것은 이 시기 피렌체 도시 내 벌어진 메디치 가문과 공화파 시민 사이의 갈등에서 민주파의 승리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민주파는 다비드 상을 시청 앞에 세움으로써 독재에 대항하는 시민 정신을 상징하게 만들었다. 만일 다비드 상이 원래 인물군 속에 포함되었더라면, 아마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2]

 

2)

조각의 질료가 지닌 성격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조각의 질료를 다시 회화적 질료와 비교해 보자. 조각의 질료가 구체적 물질성이고 이 물질성은 입체적 공간 속에 들어 있다면 회화의 질료는 단적으로 평면 위에 출현하는 색채이다.

색채는 빛에서 나오는데, 헤겔에서 빛은 물질이면서도 자기 내로 복귀한 물질적 중심, 자아이다. 이런 빛이 물체의 표면에 반사되어 나온 것이 색채이다. 색채가 존재하는 평면은 입체적 공간을 추상화한 공간이며, 조각에서 공간과 물질성은 상호 무차별한 것이지만 색채는 그 평면과 내적으로 합일되어 있다.

일반적으로는 조각이 구체적 물질성을 질료로 하므로 더 구체적 형상화가 가능하니, 정신을 더 충실하게 표현하는 것이 가능할 것으로 보이지만, 헤겔은 이런 생각에 반대한다. 조각의 질료는 구체적 사물인 한 그만큼 다루기 힘들며 실체적 정신의 일반적 측면을 표현하는 정도만 가능하다. 따라서 조각의 질료는 구체적 주관적 정신, 개인마다 특칭적인 정신을 표현하기 힘들다.

헤겔은 이런 점에서는 회화가 조각보다 더 충실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 한다. 조각의 질료는 색채이고 이 색채는 자기 내로 복귀한 빛에서 나오는 것이며, 따라서 내적으로 다양한 색으로 분화되고 다시 하나의 빛으로 통합될 수 있는 것이다. 색은 분화와 통합을 통해 다양한 조합을 형성하면서 형상화를 이루니 여기서 색채의 마법이 출현한다. 이런 색채의 마법은 개인의 주관적이며 구체적 정신을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 헤겔은 조각의 질료와 회화의 질료를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각의 대상은 형상이지만 이 형상은 사실상 구체적 인간 신체의 추상적 측면에 불과하다. 그 형식들은 특칭화된 색채와 행동들의 다양성을 갖지 못한다.” “조각은 이 점에서 회화에 뒤쳐진다. 왜냐하면 회화에서는 정신의 표현이 안색과 그 명암을 통해 한층 규정된 압도적인 정확성과 생동성을 얻기 때문이다.”[3]

 

3)

눈의 시선과 색채

조각의 질료가 건축적 질료와 회화적 질료가 구분되는 구체적 물질성[Materialitaet]에 있으므로, 이런 질료적 특성으로부터 조각적 형상화의 독특한 가능성이 제시된다.

조각적 질료는 그 자체 구체성을 지닌 것이므로 건축과 달리 간접적인 방식이 아니라 직접적인 방식으로 정신을 표현할 수 있다. 건축이 그 의미를 자기 밖에 지니는 것과 달리 그 의미를 자기 속에 지니게 되며 조각적 형상은 정신의 현상 즉 닮은 꼴이다. 그 때문에 헤겔은 건축은 상징적 예술이라면 조각은 고전적 예술이라고 한다.

조각적 형상화는 회화에서 나타나는 형상화와 구분된다. 회화적 형상화에서 형상은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로 복귀하는 가운데 주관적 정신을 표현한다. 반면 조각적 형상화는 형상은 정신의 닮은 꼴 즉 현상이므로 그 자체가 정신을 가시적으로 표현한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조각적 표현은 외면적이라고 말한다. 즉 “정신에 속하고 동시에 정신을 표현하는 신체 속에 정신이 고유하게 현존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상자는 조각 작품 속에서 정신의 외적인 모습을 보는 것이지, 조각 작품을 통해 정신 자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반면 회화의 경우 감상자는 작품을 넘어서 그 정신 속으로 직접 뛰어들게 된다.

 

[조각에서] “정신은 그 속[외면성]에 주입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이 외면성에서 자기 안으로 철수하여 내면으로 현상하는 것은 아니다.”[4]

 

이런 차이점 때문에 헤겔은 조각에는 눈의 시선이 결여된다고 말한다. 조각에서 눈은 영웅의 눈을 가시적으로 보여줄 뿐이니 굳이 눈동자를 그릴 필요는 없다. 눈동자는 내면을 들여다보는 통로이며 내면이 그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각의 눈은 닫혀 있고 시선이 보이지 않는다.  반면 회화에 이르게 되면 눈동자는 모든 나머지 신체가 자기를 넘어 복귀하는 지점이며, 그것을 통해 정신이 쏟아져 나오므로 눈동자는 열려 있고 시선이 빛을 뿜는다.

 

“조각의 형상에는 … 눈의 시선이 결여되어 있는데, 이유인즉 조각 형상이 가시화하는 정신은 신체에 잠긴, 그리하여 전체 형상에서 드러날 수밖에 없는 정신이기 때문이다.”[5]

 

조각에 시선이 없다 할 때 그런 조각은 대체로 고전적인 조각에 한정된다. 근대에 들어와 조각은 주관적 특수한 정신을 표현하려 시도한다. 이런 경우 조각은 다시 회화에 가까워지면서 눈동자가 등장하게 되니, 예를 들어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에는 눈동자가 따로 그려져 있다. 그럼에도 다비드 상의 눈동자를 통해 그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는 없다. 그의 눈동자는 눈동자이지만 그저 영웅의 눈동자를 닮은 외면적 가시적 눈동자이다. 그런 점에서 조각에서 눈동자와 시선이 없다는 헤겔의 말은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1] 미학강의 2, 379쪽

[2] 참고로 지금은 보존을 위해 원본은 우피치 박물관 안에 보관되어 있으며, 사본이 시청 앞에 놓여 있다. 피렌체 외의 지역에도 복사품이 다수 존재한다.

[3] 미학강의 2, 382쪽

[4] 미학강의 2, 384쪽

[5] 미학강의 2, 385쪽

헤겔미학산책34-고딕 건축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34-고딕 건축

 

1)

낭만주의 예술 형식 시대에 건축 역시 낭만적 건축으로 변화된다. 낭만적 건축 가운데 특히 헤겔이 주목하고 그가 다룬 주요 내용은 고딕 성당에 관한 것이다.

이 시대 아라비아 건축은 제쳐놓는다고 하더라도 중세 말에는 고딕을 대체하여 르네상스식, 바로크 식, 로코코 식 건축이 출현했으며, 헤겔 당시에는 신고전주의가 대두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헤겔은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함이 없이 건축 장의 마지막 3절인 낭만 건축 절을 마치고 만다. 그만큼 고딕 건축에 대한 헤겔의 관심이 압도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한다.

고딕 건축에 대한 헤겔은 지극한 관심은 괴테 때문으로 보인다. 그는 미학강의에서 고딕건축이 괴테의 연구 때문에 다시 인정받게 되었다고 말한다[1]. 괴테는 균형과 조화를 강조하는 신고전주의를 비판적으로 보면서 일견 추악한 외면적 형태 때문에 비난 받던 고딕 건축을 찬미했다. 괴테는 1772년 <독일 건축술에 관해>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딕 건축은] “영원한 자연의 작품처럼 … 형태를 이루고 모든 것이 전체를 지향하면서 수많은 작은 부분들로 살아나는 거대하고 조화로운 덩어리”이다.[2]

 

괴테의 평가는 언뜻 생각하면 조화와 균형이라는 고전적 아름다움을 고딕 건축에서 다시 발견했다는 말로 들리는데, 이 평가는 고전적 조화와 균형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여기서 괴테가 강조한 것은 “전체를 지향하면서 수많은 부분들로 살아나는 것”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다. 그것은 지극한 다양성과 동시에 지극한 통일성 즉 수많은 작은 부분과 전체, 다시 말하자면 서로 모순적인 것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헤겔이 말하는 낭만주의 예술 형식의 원리 또한 동일하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낭만주의 예술 형식은 정신이 개별성이라는 가상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고전적 이상화와 구별되는 개별적인 다양성이 강조된다. 그럼에도 이 개별적 다양성은 가상에 불과하니 스스로 자기를 부정하면서 정신적 통일성으로 복귀한다. 여기서 개별적 다양성과 정신적 통일성 사이에 대립의 통일이 출현하니, 이런 관계를 헤겔은 고딕 건축에서 괴테 덕분에 다시 발견하였던 것이다. 아래 헤겔 자신의 말을 직접 들어 보자.

 

“비로소 최고의 특수화, 분화 그리고 다양성이 고도의 유희 공간을 얻는데, 그렇다고 총체성이 단순한 특수성이나 우연적 개별성으로 분열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예술의 위대성은 여기서 이러한 갈라짐과 분열됨을 철저히 예의 단순성으로 다시 돌려 놓는다.”[3]

 

괴테와 함께 헤겔은 고딕 건축의 어떤 측면을 돌아보면서 이와 같은 평가를 내렸는지 이제 살펴보기로 하자.

 

2)

고딕 성당은 단순한 신전이 아니다. 그것은 곧 교회이다. 신전이 신이 현전하는 공간이라면 성당은 성령이 현전하는 공간이다.

성령은 추상적 신과 개별화된 그리스도의 합일을 통해 나온다. 성령은 개인과 개인의 사이에서 불의 혀처럼[4] 펼쳐지는 것이다. 이 성령에 기초하여 교회[Gemeinde]가 이루어진다. 교회는 하나의 공동체이다. 개인과 개인 사이의 사회적 관계가 교회 공동체이며, 그들을 통일하는 정신[Geist]이 곧 성령[Geist]이다[5]. 성당이란 교회란 현전하는 터전이다.

그러므로 성당은 단순히 신을 경배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삶의 모든 측면을 포괄하는 건물이다. 실제로 성당 속에서는 다양한 일이 동시에 일어난다. 한쪽에서는 기도를 드리며 다른 쪽에서는 장례를 치르며 또 다른 쪽에서는 제의가 행해진다. 그런 다양한 일들은 다시 신에 대한 경배라는 하나의 목적을 통해 통일된다.

헤겔은 성당에 두 측면이 있다고 한다. 한편으로 “다양성이 고도의 유희 공간을 얻는다”. 다른 한편으로 성당 내부 공간의 “장엄함과 숭고한 고요” 속에서 개인은 “무한한 내면 자체로 고양된다.” 성당은 “이러한 갈라짐과 분열됨을 철저히 예의 단순성으로 다시 돌려 놓는다.”

헤겔은 이런 점에서 성당은 개신교의 교회와 다르다고 한다. 개신교 교회는 오직 기도만이 일어날 뿐인 단순한 공간이다. 그러므로 개신교 교회는 “신도석만 제외하면 마구간처럼 아무것도 없는 상장 같은 형태”라고 말한다.

반면 성당 속에서 그 어떤 개별적 활동도 ‟전체를 채우지 못하며” ‟점들처럼 분산되며 일순간의 활동은 그 스침 속에서만 보일 뿐이니”, 따라서 성당은 ‟거대하고 무한한 공간들의 견고하고 한결같은 형식과 구조를 지니며” “일체의 특정 목적을 초월하여” “자립적으로 현존한다.” 여기에서는 “합목적성이 아무리 현존하더라도 그럼에도 그것은 다시 사라지고 전체에는 자립적 실존의 모습이 남는다.”[6]

형식적으로 본다면 성당의 목적인 교회 공동체는 성당이란 내적 공간에 대해 외적으로 관계하며, 성당은 이런 목적에 대해 가장 합목적적인 수단에 불과하다. 그러나 성당의 그 무한한 공간 속에는 이미 그 모든 교회 공동체적 활동이 잠재적으로 열려 있으니 이미 교회라는 목적이 성당에 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성당은 외적인 목적을 갖는 건축으로서 의미를 벗어나서, 스스로 독자적으로 실존하는 조각으로 발전하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헤겔은 성당의 자립적 실존을 강조한 것이다.

 

3)

고딕 성당에서 내적 공간은 자신의 봉사하는 목적을 자기 내에 가지는데, 내부 공간이 다양한 활동을 통일하는 가능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외적 형태 역시 이에 적절한 수단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 때문에 외부 형태는 고유한 독자적 형태를 가지게 된다.

헤겔은 고딕 성당의 외적 형태를 서술하면서 그 대표적 특징이 곧 첨두 아치[리브 볼트]에 있다는 사실을 밝힌다. 첨두 아치는 한편으로 기둥이면서 그 수많은 갈래는 서로 만나 궁륭을 이룬다. 이 궁륭은 마침내 중앙의 궁륭에서 첨탑으로 올라간다. 다른 한편으로 첨두 아치는 기둥이면서 동시에 벽이 되니, 아치가 천장까지 이어지면서 하나의 완전한 원구를 이룬다. .

 

[고딕 성당은] “궁륭을 이루는 숲, 즉 늘어선 나무 가지들이 서로에게 기울어 하나로 모이는 숲”[7]과 같다.

헤겔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스트라스부르크 대성당

그 결과 고딕 성당은 한편으로는 벽으로 에워쌈을 원리로 하는 고대 건축과 다른 한편으로 기둥으로 되어 지탱을 원리로 삼으며 고전 건축의 종합이라고 말한다. 고딕 성당은 양자의 종합을 통해 새로운 형태를 보여준다. 우선 고딕 성당은 고전 건축에서 출현한 지탱의 원리를 더 발전시켜, 천상으로 자유롭게 상승하는 치솟음으로 나아간다. 다른 한편 그것은 고대 건축에서 출현한 에워쌈을 더 발전시킨다. 고딕 성당에서 만들어지는 폐쇄적 공간은 원환을 이루어 무한한 내면성의 공간이 된다.

 

“그리스 사원의 명랑한 개방성과 달리 한편으로는 외적 자연과 세속적 일반으로부터 떨어져 내면으로 집중하는 고유한 심정의 인상을 다른 한편으로는 오성적으로 제한된 것을 넘어가려 치솟는 엄숙한 숭고함의 인상을 산출해야 한다.”[8]

 

그것은 한편으로 ‟세속 일반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내면으로 집중하면서 심정의 고요함이라는 인상을 산출하며 다른 한편으로 지성적으로 제한된 것을 넘어가려 치솟는 엄숙한 숭고함의 인상을 산출한다.”[9]

 

닫혀있으면서 안으로 열려 있고 지탱하면서도 초월하는 첨두 아치의 기본 형식은 곧 낭만주의의 대립하는 것의 상호 통일이라는 원리를 가장 전형적으로 표현한다.

 

4)

고딕 성당은 외적인 형태를 통해 다양한 낭만적 원리를 보여준다. 낭만적 원리는 곧 무한한 주관성의 원리, 정신의 자기 내 복귀의 원리인데 “내적인 것은 외적인 것 속에 반영하고 또한 그로부터 벗어나 자신을 자기 자신으로 되돌려야 한다”[10].

대표적인 원리는 평면의 분할이다. 성당 내부의 공간은 다양하게 분할되어 있다. 남북과 좌우가 구분되며, 측랑 가운데 신랑이 있으며, 앱스와 네이브, 격실, 지하 교회, 합창석 등 다양한 공간이 분할되어 있다. 그런 가운데 각 개별 공간은 좌우와 남북이 만나는 중앙의 거대한 공간에서 만나게 된다.

 

“종교적 예배가 각인의 심정과 삶의 관계들이 갖는 형형색색의 독특함을 관류하여 가슴 속에서 보편적이며 확고한 표상들을 흔들림이 없이 심어주듯이, 단순한 건축학적 기본 전형들 역시 극히 다양한 격실, 격벽, 치장들을 언제나 앞의 주 윤곽선들 속으로 다시 흡수하여, 이 선들과 대비할 때 가뭇없도록 만들어야 한다.”[11]

 

서로 대립적인 다양성과 통일의 상호관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첨두 아치의 각 기둥을 이루는 것도 수많은 작은 돌로 나누어져 있으면서 하나로 합일하고,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 기둥 자체가 서로 교차하면서 다시 통일된다.

 

“[낭만] 건축은 …지극한 내면성 자체를 가능한 한 가시화한다. 그러한 질료의 경우에는 덩어리 자재의 질료성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그것을 전면적으로 깨고 조각내어 거기에서 그 직접적 응집력과 독립성의 가상을 빼앗아야만 비로소 표현이 가능해 진다. ..이토록 거대하고 무거운 돌덩어리를 견고하게 맞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쾌하고 장식적인 전형을 이토록 완전하게 보존한 건축은 없었다.”[12]

 

다양성의 통일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형상이 곧 현관 바로 위에 있는 장미창이라 하겠다. 이 장미창은 원들로 이루어진 원이며 다름 아닌 낭만주의의 원리인 내적 무한성을 상징한다.

 

5)

이처럼 고딕 성당의 모습은 내적 공간뿐만 아니라 외적 형태에서 이미 낭만성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  고딕 성당은 그 의미조차 다양성의 통일이니, 고딕성당은 전면적으로 낭만적 원리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물론 내적 공간은 잠재적으로만 의미를 내포할 뿐 여전히 그 의미에 대해 외적 합목적적으로 관계하니, 상징적 건축은 틀림없다. 하지만 외적 형태와 내적 공간, 그리고 그 의미는 모두 낭만성의 원리를 따르고 있으니 서로 공명하는 듯하다.


[1] 이 부분은 미학강의 2, 353쪽인데, 낭만 건축에 대해 서술에 들어가는 도입부이다.

[2] 괴테, 독일 건축술에 관해, Goethes Werke Bd. 12, C. H Beck, 1982, S. 7 서정혁. 헤겔의 미학과 예술론, 소명출판, 2023, 35 쪽에서 재인용.

[3] 미학강의 2, 354쪽

[4] 사도행전 22장 3절: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5] 독일어 Geist는 정신을 의미하는 동시에 성령을 의미한다. 헤겔은 그러므로 성령을 거꾸로 정신으로 즉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정신으로 규정한다. 복음이 사랑을 선포하는 이유는 성령의 정신이 공동체 정신이고 그런 공동체 정신의 출발점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6] 이상 인용문은 모두 미학 강의 2, 354쪽을 참조하라.

[7] 미학강의 2, 359쪽

[8] 미학강의 2, 355쪽

[9] 미학강의 2, 365쪽

[10] 미학강의 2, 369쪽

[11] 미학강의 2, 368쪽

[12] 미학강의 2, 369쪽

헤겔미학산책33-고대 건축과 고전 건축[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33-고대 건축과 고전 건축

 

1)

앞에서 설명했듯이 건축의 질료는 공간적이거나 연장적인 것, 비어 있거나 충만한 덩어리[Mass]이다. 이 질료는 무규정적이고 연속적인 것이다. 건축은 어떤 외면적 형태를 갖든 간에 그 본질은 무규정적 연속적인 덩어리 즉 공간[또는 연장]에 있다. 내적 공간은 무규정적이니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지 못하며 외부에서 의미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헤겔은 그 때문에 건축은 본래 상징적인 예술이라 한다.

 

그것은 “육중하고 물질적인 것 즉 특정한 것이기는 하지만 본래 구체적이거나 진정으로 정신적인 형상이 가능하지 않은 것”[1]이다.

 

내적 공간은 삶의 터전으로 사용되니, 건축의 목적은 이런 삶에 있으며, 건축의 의미는 삶을 위한 봉사에 있다. 예를 들어 건축은 주거이거나 신전 또는 광장이거나 시장 그 외 일상적 생활을 위한 공간이다. 삶 자체가 시대적으로 변화한다. 고대 신과 고전적 신은 다른 정신을 표현하니, 그에 따라 신전은 다른 형태의 내적 공간을 요구할 것이다. 고대 도시는 정치 중심지였다. 중세부터 시장을 중심으로 새로운 도시가 출현했다. 그에 따라 도시는 다른 형태의 공간이 될 것이다.

삶의 목적은 그에 적합한 수단으로서 공간을 요구하니 양자 사이에는 합목적성이라는 관계가 존재한다. 이런 합목적성의 관계는 동일한 공간이 다른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도록 한다. 그래서 고전 시대의 광장이었던 곳이 근대에 시장으로 사용될 수도 있고, 고대 신전이 개조 되어 근대 신전으로 변한 경우도 많다.

 

2)

건축의 외면적 형태는 건축을 축조하는 방식을 통해 나타난다. 공간의 외면적 형태는 내적인 공간과 느슨하게 나마 상호 연관을 갖는다. 그것은 병과 그 내용처럼 거의 무관한 것은 아니며 옷과 신체처럼 느슨하게 서로 들어맞는다. 건축의 외적 형태는 “독자적으로 형상화된 의미의 단순한 덮개나 환경은 아니”더라도 “자신을 통해 하나의 의미 내용을 내비치는 형식”[2]을 갖는다.

외적 형태는 이런 내적 공간을 매개로 그 공간이 봉사하는 목적과 간접적인 관계를 가진다. 공간의 목적이 공간의 내적 형태를 합목적적으로 제약하고 이 공간의 내적 형태는 그것을 축조하는 외적 형태와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적인 형태는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그 시대 정신이나 그것을 표현하는 예술적 형식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헤겔에 따르면 건축의 외적 형태는 “자기 자신을 통해서 사유하는 것을 제공하며 보편적 표상들을 일깨워야 한다.”[3] 건축은 “소리가 없을지언정 그 자체로 인해 현전하는 언어로서 정신에 대해 존재한다.[4]

건축은 다양한 외적인 형태를 가지게 된다. 이 형태는 위에 말한 것처럼 간접적으로 느슨하게 나마 그 시대 삶을 표현하는 예술 형식에 영향을 받는다. 물론 건축적 질료는 육중하고 거대하기에, 무게와 균형의 법칙과 같은 자연의 법칙을 지배 받아 마음대로 형상화될 수가 없으며 대체로 직선과 직각, 수평면의 요소를 기본으로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한계 내에서는 부분적으로 자유롭게 그 시대 예술 형식을 닮은 요소를 받아들인다. 곡선이 들어오고 열주가 늘어서고 궁륭과 돔이 만들어진다.

건축의 질료인 내적 공간은 그 의미에 대해 상징적인 연관을 갖지만, 이런 외적 형태는 부분적 형태를 통해서 그 시대 예술형식과 정신을 드러낸다. 정신을 표현하는 예술 형식이 상징적, 고전적, 낭만적 형식으로 전개됨에 따라 건축 역시 상징적 건축, 고전적 건축, 낭만적 건축으로 발전한다.

 

2)

최초 고대 국가의 건축은 거의 무차별적인 덩어리이어서 외면적 형태도 없다. 예를 들면 바벨탑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그저 흙덩어리를 몇 개 단에 걸쳐 쌓아 올린 것이며, 내부에 빈 공간도 없는 충만한 흙덩어리 자체이다[5]. 외적 형태에는 예를 들어 7개의 기단과 같이 추상적인 수가 할당되어, 간신히 사유의 흔적을 남겼다. 헤겔에 따르면 최초 건축은 민족이 공동으로 만들어 낸 것이어서 민족적 통일을 상징할 뿐이라 한다.

좀더 발전하면 다음 단계에서 오벨리스크처럼 거대하지만 추상적 형식을 갖거나, 남근상이나 스핑크스, 멤논 상처럼 자연형상을 부분적으로 모방한 형태를 갖는다. 이런 건축물은 조각과 닮았는데, 조각은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외적인 형태는 중요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이것이 세워져 있거나 쌓여 있어서 하나의 거대하고 육중한 덩어리가 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런 덩어리로서 의미를 자기 밖에 지닌다. 이 축조된 돌 덩어리가 무엇을 상징하는가는 지금은 알지 못하며, 남근이라든가 스핑크스와 같은 외적 형태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 의미를 짐작할 뿐이다.

조각품적인 건축의 경향은 이집트 사원 건축에 이르면 상당히 발전하는데, 이는 스핑크스의 회랑, 기둥 숲, 상형 문자의 벽, 멤논 상, 성소, 사각형의 돌 등으로 이루어진 복합체이다. 여기서는 상징적 수수께끼가 흩어져 있으니 헤겔은 이집트 사원 건축은 자연 속에서 어떤 본질적인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을 엿볼 수 있게 한다고 한다.

이집트 룩소르 신전 정면, 스핑크스, 오벨리스크, 멤논상, 기둥 숲  등의 모습이 보인다.

“자의식은 아직 영글거나 자체로서는 완성되지 않았으니, 그것은 전진하고 탐색하고 예감하고 끝없이 생산적이었으나 절대적 만족을 찾지 못했으며 또한 그런 까닭에 안녕이 없었다.”[6]

 

다음 단계에서 건축은 드디어 충만한 덩어리를 넘어 빈 공간을 만들어낸다. 벽으로 에워싸고 기둥으로 지탱하면서 만들어진 건축적 공간은 삶에 관련된 의미를 가진다. 헤겔은 이런 건축의 예로서 지하동굴이나 피라미드(무덤)[7], 왕궁을 거론한다. 이제 건축은 삶의 터전이 되니 전 단계 조각을 닮은 자립적인 건축에서 삶의 목적에 봉사하는 수단적 건축으로 이행한다.

여기서 외적 형태는 여전히 거대하고 육중한 형태를 보여준다. 특히 장엄한 스핑크스의 대열이나 기둥 숲의 열주는 이 시대 상징주의 예술에서 나타나는 환상성이나 숭고함을 닮았다. 건축물은 아직 직선이나 직각, 수평면과 같은 단순성과 추상성, 균일한 크기, 간격 똑바른 열 등의 규칙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고전적인 비례, 조화와 같은 유기적인 아름다움에 이르지는 못한다.

헤겔은 고대 건축에서 나타나는 아라베스크 문양이 보이더라도 이는 추상적 규칙성에서 유기적 아름다움으로 건너가는 과정에서 생겨난 중간적 형태라고 말한다. 이것은 중세 이슬람 사원에서 나타나는 무한성을 보여주는 아라베스크 문양과 달리 “식물 형태가 건축학적으로 변형되어, 원통형 오성적인 것 규칙성 직선형에 근접하여” “아라베스크라 불리는 것과 비슷하게 보일”[8] 뿐이다.

이런 추상적 규칙성의 요소는 일반적으로 상징주의적 예술 형식을 닮았다. 여기서 직선이나 수평면이 그 자체로 상징적인 기호라는 뜻이 아니다. 즉 직선은 숲의 나무를 상징하고 수평면은 바다를 상징한다는 것이 아니다. 직선이나 수평면이란 마치 무규정적인 공간이 그렇듯이 무차별적이고 ‘탈자적인’ 요소이므로 상징적으로 된다.

 

4)

그리스 시대 고전 건축에 이르면[9] 이제 건축의 목적은 분명하게 자각된다. 그 목적은 곧 삶의 터전이니, 건축은 주택이거나 신전, 광장이나 도로 등이 된다. 건축적 공간은 삶에 봉사하며, 그런 한에서 자신의 봉사하는 삶에 대해 가장 합목적적인 수단이 되어야 한다. 아름다움이나 외적 형태가 아니라 이런 합목적적 수단으로서 공간이 건축을 지배하는 기본적 원리가 된다.

파르테논 신전, 조화로운 비례가 중요하다.

“목적이 작품의 전체를 지배하는 규제적인 원리이며, 작품의 근본 형태와 골격구조를 동시에 규정하는 원리가 된다.”[10]

 

신은 민족의 삶을 통일하는 종교적 상징이므로, 개인적 삶을 위한 주택보다는 신의 거처인 신전이 이시대 건축의 최고 형태가 된다. 여기서도 목적이 지배자이며, 형태의 아름다움은 부차적일 뿐이다.

이런 합목적성은 삶 자체에 봉사하는 것이므로, 삶이 실행되는 자연적 환경 즉 기후나 입지 경관 등에도 적합해야 하니, 이로부터 고유한 민족적 건축물이 세워지게 된다. 그리스적 건축물과 게르만적 건축물 동아시아적 건축물은 각기 자연환경에 대한 적응이라는 과제를 가장 충실하게 수행했다[11].

건축은 축조되면서 외적 형태를 지니게 된다. 고전적 건축은 내적 공간적 형태가 그 목적에 가장 적합하게 형성될 뿐만 아니라 외적 형태 역시 그 시대 예술적 형식에 영향을 받는다. 고전적 예술 형식은 정신을 현현하는 이상적인 형태이니, 고전적 건축 형식 역시 이상적 형태를 닮으려 한다. 하지만 건축은 기본적으로 자연법칙에 따라 축조되는 한계가 있으니, 이상성은 이제 건축의 부분적 요소 사이의 균형과 조화, 비례라는 방식으로 출현한다.

헤겔은 고전적 건축의 외적 형태가 지닌 몇 가지 원리를 소개하는데, 직사각형이 정사각형보다 우세하다거나, 너비는 길이의 반이라는 등 원리이다. 헤겔은 이런 특징을 ‛음악적 관계’라는 말로 설명한다. 그는 슐레겔의 말을 빌려 건축은 ‘얼어붙은 음악’이라고 한다.

고전 시대 건축의 형태적 특징 가운데 핵심은 기둥이다. 기둥은 내리누르는 무게를 들어올리면서 정신의 비상을 암시한다. 헤겔은 특히 그리스 신전의 기둥을 주목하는데, 이 기둥은 지붕을 떠받치는 비상의 힘을 상징한다. 헤겔은 이런 신전 건축의 기둥을 지배하는 원리를 지탱이라 한다. 그것은 이제 에워싸는 담이나 벽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롭게 독립적으로 세워지며”[12], ‟하중과 유희하듯, 너무 약하지도 너무 강하지도 않으며 억눌려서도 안되며, 공중으로 너무 높고 가볍게 솟아서도 안 된다”[13]고 평하였다.[14]

아래는 그리스 고전적 신전에 대한 헤겔의 평가이다. 외적 형태에서 한마디로 다양성을 하나로 통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리스 건축은 곧 고전주의적 예술형식에 속한다.

 

“그들의 완성된 아름다운 작품들은 단순한 덩어리로 바닥에 눌려 있거나 그 너비에 대비해 과도하게 높이 솟거나 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 점에서 아름다운 중용을 유지하며 또한 동시에 그 단순성 속에서도 적절한 다양성을 위해 필요한 유희공간을 제공한다.”[15]

 

“이는 고전적 이상에서 보편적 실체가 자신의 생동성을 담지 하는 우연자와 특수자를 지배하면서도 그것들을 자신과 조화시킬 만큼 힘 있는 것으로 머무르는 것과 꼭 마찬가지이다.”[16]

 

이런 그리스 신전은 이제 에워싸는 동굴과 같은 이집트 신전과 달리 개방적인 형태를 갖는다. 사람들은 그 신전의 열주 사이로 ‟둘러서거나 이리저리 배회하거나 오락가락하면서” ‟진지하지 않고 명랑하며 한가롭고 떠들썩한 머무름의 표상을 얻는다.”[17] 이런 형태는 그리스 건축이 자신의 목적인 그리스적인 삶 특히 도시 폴리스의 정치적 역할에 적합한 형태로 발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헤겔은 이와 같이 간접적이지만, 목적을 자각하고 이를 건축 속에서 구현하려 하는 건축을 봉사적 건축이라 이름 붙인다.


[1] 미학강의 2, 292쪽 참조. 공간은 내적으로 텅 비어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규정성 아래 있다. 이 규정성 때문에 그것은 동시에 충만한 연장성을 지니는데, 이 규정성에 따라서 다양한 공간이 출현할 수 있다. 그러므로 헤겔은 “규정되어 있지만 본래 구체적이지 않다”라고 한다.

[2] 미학강의 2, 292쪽

[3] 미학강의 2, 292쪽

[4] 미학강의 2, 292쪽

[5] 헤겔은 후일 헤로도토스가 전한 벨로스 탑에는 정상에 신전이 만들어졌으나 초기의 바벨탑에는 이런 신전조차 없고 그저 몇 개의 단에 걸쳐 흙덩어리가 쌓였다고 한다.

[6] 미학강의 2, 307쪽

[7] 피라미드에는 미이라가 안치되어 있다. 헤겔은 미이라는 신체를 불멸하게 만드는데, 영혼이 개별적이라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개별적 영혼은 불멸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신체가 보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체는 자연적 개체성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8] 미학강의 2, 321쪽

[9] 헤겔에 따르면, 고대 건축의 에워싸는 벽을 기본 원리로 한다. 이를 위해 석조가 유리하며 상징적 건축이나 낭만적 건축은 대개 석조다. 반면 고전 건축은 지탱하는 기둥을 기본 원리로 한다. 이를 위해서는 목조가 유리하다. 그리스 건축은 후일 석조로 바뀌지만, 여전히 목조의 형태를 보존한다.

[10] 미학강의 2, 326-327쪽

[11] 그리스 건축에서 에워싸는 벽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건축은 지붕과 기둥으로 이루어질 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반면 한국의 건축물은 겨울의 추운 기후와 여름의 무더운 기후를 반영하며 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방과 열린 넓은 마루, 두터운 지붕으로 이루어진다.

[12] 헤겔은 이점과 연관하여 괴테의 말을 인용한다. ‟기둥의 본성은 자유자재이다”. ‟벽들은 어떤 기둥을 갖는다기보다는 일체의 기둥을 배척한다.” (헤겔 미학강의2, 339에서 재인용)

[13] 미학강의 2, 332

[14] 헤겔은 괴테가 “기둥의 본성은 자유 자재이며” “주택은 네 기둥에서 성립하지 않으며, 사방의 네 벽에서 성립하며 이 벽은 … 일체의 기둥을 배척한다”고 말했다 한다. (헤겔 미학강의 2, 339쪽)

[15] 미학강의 2, 342쪽

[16] 미학강의 2, 342쪽

[17] 미학강의 2, 343쪽

 

헤겔미학산책 32- 이것은 건축인가 조각인가?[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 32- 이것은 건축인가 조각인가?

 

1) 건축의 질료

건축의 질료는 ‛역학적으로 무거운 물질[즉 Mass], 또는 무게의 법칙에 따라서 형상화될 수 있는 물질’[1]이다. 예를 들어 돌멩이나 나무와 같은 것이니, 그것은 직접적으로 존재하는 자연적 물질이거나 아주 간단하게 다듬어진 물질이다.

건축의 질료는 직접적인 자연 물질이지만 다른 예술로 갈수록 그 질료가 추상화되고 점차 관념화된다. 조각의 경우 이미 형상화가 가능한 물질로 제한되며, 회화나 음악에 이르면 물질이더라도 이미 관념화된 빛이나 소리가 질료로 사용된다. 시문학의 질료는 표상이니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건축이 예술 장르 가운데 가장 단순한 계기를 이루며, 역사적으로 가장 빨리 등장한 예술 장르가 되었다고 한다.[2]

그 가운데 건축과 조각은 사용하는 질료를 놓고 보면 동일하게 보여서, 양자를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다. 성채이나 부처상은 둘 다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소나무가 장승이 되면 조각이고 기둥이 되면 집이 된다. 헤겔은 정신이나 형상이 아니라 질료를 통해 건축과 조각을 구분했는데 그 차이는 무엇일까?

어떤 물체[Matter] 예를 들어 돌멩이나 나무 토막은 이중적 측면을 지닌다. 한편으로 그것은 공간적 연장적 양적인 특성을 지니니, 이런 점에서 하나의 덩어리[Mass]이다. 다른 한편 이런 물체는 그것에 대립하는 규정성, 질적 특성을 지니니, 이런 측면을 물질성[material]이라 할 수 있다. 덩어리의 측면은 물체의 부정적, 무의 측면이라 한다면, 물질성의 측면은 긍정적, 존재의 측면이다.

물체는 공간적 연장적 측면에서 축조되면서 특정한 덩어리의 결합체를 만들어내니, 덩어리는 주변과 분리되면서 독자적인 것이 된다. 이런 덩어리 결합체가 곧 건축이다. 반면 물체의 규정적 질적 특성은 조각의 질료가 된다. 물체의 규정성과 질적 특성은 서로 결합하면서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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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체의 전면 즉 긍정적[positive] 측면과 부정적 측면, 물질성과 덩어리는 서로 대립하지만 떼어낼 수 없다. 규정성이 없는 연장성은 없고, 공간성 없는 형상도 없다.  양자는 서로의 이면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공간 자체를 구축하는 건축 예술과 물질성을 조형하는 조각도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다. 일정한 형상화 없이는 건축도 없으며 일정한 연장성 없이는 조각도 있을 수 없다. 건축을 거꾸로 보면 조각이 되고, 조각을 거꾸로 뒤집으면 건축이 된다. 건축과 조각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서로의 이면이 된다.

그러면서도 건축과 조각이 서로 구분되는 것은 그 의미가 부여되는 방식 때문이다. 건축의 경우는 규정적 형상적 측면은 공간적, 연장성의 측면을 다른 것과 구분하는 데 기여할 뿐,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곧 공간성과 연장성이다. 이런 공간성과 연장성은 무규정적이고 연속적인 측면이니 그 자체로서는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없다. 그것은 다만 자기 밖에 의미를 지닐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질료의 특성상 그것의 의미를 자기 밖에 가지기 때문에 건축이 된다.

반면 조각에서 공간적이고 연장적인 측면은 질적이고 규정적인 측면이 존재하기 위한 토대, 장소가 될 뿐이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질적이고 규정적인 측면이 만들어내는 고유한 형상이 된다. 이런 고유한 형상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이처럼 자기 내에서 의미를 지닐 수 있으므로 그것은 조각이 된다.

헤겔은 건축과 조각의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면에서 보면 조각에 감각적인 것 자체를, 즉 질료를 질료적 공간적 형식으로 형상화하는 , 그것은 아직 건축과 같은 단계에 있다. 하지만 조각은 건축으로부터 구분되기도 하는바, 까닭인 즉 조각은 정신의 타자인 비유기적 물체를 정신에 의해 제작된 하나의 합목적적 환경으로 가시화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목적을 자신의 외부에 두는 형식들로 변형하지 않고 정신성 자체를 … 신체적 형상에 투입하여 신체와 정신을 불가분으로 통일된 전체로 가시화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건축이 단순 외적인 자연과 환경으로서 정신에 봉사한다는 규정을 갖는다면, 조각의 형상은 여기서 탈피하여 자기 자신을 위해 현존한다. 이러한 탈피에도 불구하고 조각상은 그 환경에 본질적으로 관계한다. 즉 조각상이나 군상은 특히 부조는 작품이 위치하는 장소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제작될 수 없다. ”

 

여기서 헤겔은 건축은 “질료를 질료적 공간적 형식으로 형상화”하며, “그 목적을 자신의 외부에 둔다고” 규정한다. 반면 조각은 “물체를 정신에 의해 제작된 하나의 합목적적 환경”으로 만들며, 정신의 형상이 “자기 자신을 위해 현존하는”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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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구분은 많은 의문을 자아낸다. 무엇보다도 헤겔 자신이 고대 건축의 출발점으로 들고 있는 것이 남근상이라든가 스핑크스, 멤논 상 등인데, 이런 것들은 어느 정도 구체적 형태를 갖추고 있어서 일반적으로 조각이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그런데도 헤겔은 이들을 건축 속에 집어넣어 다루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런 혼란은 건축의 질료인 덩어리[mass]가 지닌 이중적 측면 때문이다. 즉 공간적이고 연장적인 측면이다. 공간적 측면은 비어 있는 것인 반면 연장적 측면은 오히려 충만한 측면이다. 이렇게 대립하면서 둘 다 내적으로 무규정적이며 연속적이라는 측면에서 동일하다. 모든 공간은 한편으로 충만되어 있는 것이며, 모든 충만한 것은 다른 편으로 비어있는 공간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화강암 덩어리를 보자. 화강암 덩어리는 화강암적 물질로 충만한 것이며 너무나도 충만해 있어서 그 속에 차별도 없고 연속되어 있다. 이런 무규정성과 연속성의 측면만 보면 그것은 비어있는 것이다. 거꾸로 우리 눈에는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공간을 보자. 그것은 무규정적이고 연속적 공간이다. 그러나 사실 이 공간은 정말로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이 아니다. 공기가 가득 채우는 있으니 그것은 공기의 덩어리라 할 수 있다.

이런 공간성과 연장성, 비어 있음과 충만함이 같은 것임을 이해한다면, 이제 남근상이나 스핑크스, 멤논상을 헤겔이 왜 조각이 아니라 건축이라 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비록 부분적으로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축조된 것이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형태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지닌 거대함과 육중함이다. 그것은 육중한 돌 덩어리와 거대 나무 토막을 세우거나 쌓아놓은 것이다. 이런 거대하고 육중한 것은 비록 비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충만한 것으로서 연장적인 것이며 곧 건축의 질료가 된다.

이런 점은 오벨리스크나 카바석 등을 살펴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이런 것들도 수직적이거나 정육면체라는 일정한 형태를 지니지만, 이것이 건축물인 이유는 여기서 중요한 것이 그 형태가 아니고 그것이 지닌 거대하고 육중한 질료적 측면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워지거나 누여져 일정한 방식으로 축조되어 있다.

현대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에 이르면 모더니즘 건축이 지녔던 단순성, 기하학적 형태가 사라지고 다시 구체적 형상성이 되돌아 온다. 개미집과 닮은 음식점이나 프랑크 게리의 춤추는 건물을 보라. 그럼에도 이런 건물이 조각이 아니라 건축이 되는 것은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형태가 아니라 그런 형태를 축조하면서 만들어낸 공간성 또는 연장성 때문이다.

프랑크 게리의 춤추는 빌딩, 이것은 건축인가 조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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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도 축조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현대의 많은 조각 작품은 그 사이에 빈 공간을 담고 있고, 어쩌면 그런 공간 자체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냐 하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공간이 비어있는 것만이 아니라 충만한 연장성을 지니기도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거대한 덩어리를 깎고 다듬은 조각 작품은 차라리 건축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더구나 많은 조각 작품은 마치 사탑처럼 다양한 형태를 지닌 물질 덩어리를 쌓아놓았으니, 더욱 그런 의문이 든다.

이런 작품들 역시 건축이 아니라 여전히 조각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조각 사이의 빈 공간은 어디까지나 조각의 형상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바탕으로서 역할을 할 뿐이며 깎고 다듬어진 거대한 덩어리에서 작가가 드러내려는 것은 덩어리가 아니라 그것이 지닌 고유한 물질성이니 그런 물질성이 지닌 양감이나 촉감 시각적인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탑처럼 축조한 조각 작품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작가는 이렇게 축조된 덩어리가 아니라 그런 덩어리가 지닌 규정성을 드러내려 하기 때문이다.

그 어느 경우에도 그 의미는 작품의 형상 자체에 내재하고 있다. 만일 작가가 그런 작품에서 공간성, 또는 연장성 다시 말해 그 덩어리로서 물체에 중점을 둔 것이라면, 그런 덩어리는 그 자체로 무규정성이나 연속성을 지니는 것이기에 고유한 의미를 자기 밖에 지닐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그럴 경우에 비로소 그런 작품은 건축이 된다.

예를 들어 조각가 문신이 올림픽 공원 입구에 세워놓은 작품이 사찰 앞에 서 있어서 사찰의 경계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목적을 지닌 것이라 한다면, 이제 그 작품은 조각이 아니라 건축이 될 것이다. 여기서는 그것이 지닌 덩어리가 경계로서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천사지 탑처럼 국립박물관 안에 옮겨지면 그것은 건축이라기보다 오히려 조각작품이 되면서 그것이 지닌 형상성, 질적 규정성, 감각적 느낌 등이 문제가 된다.

문신 1988올림픽, 이것은 건축인가 조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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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은 축조를 통해 특정한 덩어리를 만들어 낸다. 이 덩어리는 비어 있거나 충만한 것이다. 덩어리는 어느 방식이든 무규정적 연속적이기에 그 자체로서는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그 의미는 자기밖에 가질 수밖에 없으니 건축적 공간은 외적인 의미에 대해 합목적적 수단이 된다. 그러므로 건축은 근본적으로 상징적이다.

건축은 축조하는 가운데 외적인 형태를 가지는데, 그 외면적인 형태와 내적인 공간은 서로 동전의 이면이다. 두 측면은 서로 대립하면서 서로 관계한다. 여기서 외적 형태는 내적 공간과 엄밀하게 관계하기보다 느슨하게 관계할 뿐이다.

건축이 상징적으로 지니는 의미와 그것의 축조된 외적 형태 사이에서도 내적인 공간을 매개로 하여 간접적 관계를 갖는다. 축조된 외적 형태는 자신의 이면인 내적 덩어리를 느슨하게나마 규정하고 이는 다시 그것과 상징적으로 연관된 의미와 합목적적으로 관계하니, 외적 형태는 의미를 간접적으로 제약하는 관계를 지니게 된다.

 

“건축은 공간에 경계를 설정하고 이를 에워싼다…. 왜냐하면 이런 건축 예술은 독자적으로 현존하는 형태를 쌓더라도 정신이 자신에 적합한 신체적 형상 속에서 현상하는 자유로운 아름다움의 목적을 추구하지 않고 대체로 본래 하나의 표상을 암시하고 표현하는 상징적 형식을 제시할 뿐이다.”[3]

 

“왜냐하면 건축의 소명은 독자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정신에게… 외적 자연을 울타리로 세우는 것인데 … 그러므로 그 의미를 더 이상 자신 안에 지니지 않고, 그것을 제3의 것에서 … 발견하면서 자립성을 포기하고 만다.”[4]

 

건축의 질료인 덩어리를 축조하는 법칙은 주로 무게의 법칙이며 건축은 지성에 의해 계산된 안정과 균형의 관계에 따라 정돈된다. 이런 법칙의 결과 축조에서 나타나는 형태는 주로 직선이나 직각, 수평면과 같은 비유기체적인 형태에 머무른다.

건축적 질료를 통해 그 의미 즉 정신과 간접적으로라도 관련되기 위해서는 무게의 법칙을 벗어나려는 노력이 기울어져야 한다. 무게의 법칙이 밑으로 하강하는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이라면, 건축에 담긴 정신성은 내리 누르는 힘에 대해 지탱하거나 들어 올리는 힘 즉 상승하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이런 상승은 유기적인 형태 즉 곡선이나 사선, 수직면을 통해 도입된다.

비유기체적 형태와 유기적인 형태가 어우러지면서 건축 자체가 일정한 고유한 형태를 가지게 된다. 예를 들어 그리스 신정의 형태나, 고딕 건축물의 형태가 그와 같다. 이와 같이 형태가 축조되는 가운데 건축은 조화, 대립과 같은 관계 방식이 사용되니, 마치 음악에서 음이 조화와 대립을 이루며 발전하는 것과 같다. 음악에서 이런 발전은 시간적으로 일어나지만 건축에서 그런 관계는 공간적으로 공존한다. 그러므로 헤겔은 슐레겔의 표현을 빌려 건축은 ‘얼어붙은 음악’이라고 말한다.


[1] 미학강의 2, 275쪽

[2] 과연 건축이 역사적으로 최초의 예술인가? 아놀드 하우저는 선인류의 동굴벽화에서 예술사를 시작하니, 그런 관점에서 헤겔의 주장은 옳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헤겔은 이렇게 반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동굴벽화가 있기 전에 먼저 동굴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최초 인간이 살고 있는 동굴도 자연동굴을 거칠게나마 다듬은 것이니 이미 건축에 속하지 않을까?

[3] 미학강의 2, 288쪽

[4] 미학강의 2, 2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