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가 토카르추크 『방랑자들』 (3) – 블라우 박사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올가 토카르추크 『방랑자들』 (3) – 블라우 박사

 

이병창(한철연 회원)

 

1)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 <방랑자>의 핵심 키워드는 ‘방랑’이다. 작품 속에는 이 방랑의 문제와 연관된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쿠니츠키, 블라우 박사, 날뛰는 여인 등이다.

왜 집을 떠나는가? 앞의 글에서 소개한 쿠니츠키라는 인물은 방랑자가 영원히 방랑하게 된 동기를 설명해 준다.

쿠니츠키가 여행 중 들렀던 어느 섬에서 아내와 아이가 사라진다. 그는 아내의 흔적을 찾아 뒤지던 중 아내의 핸드백에서 카이로스라는 글자를 발견한다. 그다음부터 그에게 세계는 카이로스를 가리키는 편집증적 신호이다. 그는 이 카이로스를 찾아 떠난다. 아니 거꾸로 카이로스가 그를 끝없는 방랑의 한 가운데로 불러냈다.

이번에는 블라우 박사라는 두 번째 인물을 보자.

2)

올카 토카르추크의 이 소설에는 생체를 고정하는 기술에 대한 호기심이 이상하리 만큼 집요하게 등장한다. 예를 들어 밀납인형이라든가 미이라, 포르말린 용기에 담긴 동물이나 인간의 신체 부분, 분더카세(Wunderkasse: 기이한 물건의 수집해 놓은 방), 미니아처, 신체를 순간적으로 영원히 얼리는 플라시티네이션(Placitination: 특수 고형화 기술), 사진술 등이다.

이런 호기심은 처음엔 독자들에게 마치 컬트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심지어 그 끔찍한 아름다움 때문에 어떤 섹슈얼한 느낌조차도 발생한다. 아래 인용문을 읽어보라.

“마치 피 묻은 커다란 입술처럼 간이 위를 에워싸고 있다. 자궁의 위쪽으로 연결된 콩팥과 수뇨관도 보인다. 그것들은 맨드레이크의 뿌리를 연상시킨다. 자궁은 눈으로 감상하기에 즐거운 근육이다.”

그러나 작가에게 이런 기술들은 단순한 호기심은 아니다. 그것은 그에게 철학적 의미가 있다. 그것은 카이로스, 방랑이라는 개념과 연관된다. 방랑은 모든 고정된 것, 법칙적인 것, 기계적인 것을 파괴하면서 카이로스를 즉 흐름이고 우연적 만남이며 개별적인 것을 찾아 떠나게 만드는 힘이다.

이런 방랑의 힘에 대립하는 것이 생체를 고정하려는 기술이다. 이 기술은 모든 개별적이고 우연하고 흘러가는 것을 다시 영원히 얼어붙게 만든다.

3)

작가는 마침내 움직이는 것을 영원히 고정하고자 하는 인간의 광기를 형상화한다. 블라우 박사가 그런 인물이다. 작가는 2개의 단편에 나누어서 블라우 박사를 서술한다.

블라우 박사는 플라시티네이션 전문 학자이다. 박사는 플라시티네이션 분야에서 지금 최고의 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의대를 나와 의학 박물관에 들어가 유리병에 보관된 신체 장기를 연구한다. 그의 관심은 의학적인 것이 아니라 신체 장기를 어떤 방식으로 보존했는가에 있다.

그의 목표는 인간의 육체를 완전하게 보관하는 것이다. 고대의 미이라는 인간의 표면만 남기는 것이니 오히려 온전한 육체를 파괴하는 것이다. 현대의 플라시티네이션 기술의 발전은 그의 희망을 실현하게 해 주었다.

그의 취미는 사진을 찍는 것이다. 사진 역시 순간을 영원히 보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과 관계 한 여성의 질을 사진으로 찍어 보존한다. 그의 희망은 실제의 질을 수집해 유리병에 보존하는 것이다.

“신체의 모든 부위는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 모든 인간의 몸은 보존해야 마땅하다. … 만약 블라우박사에게 세상을 창조하도록 했다면 우리에게 별 필요도 없는 영혼은 필멸로 만들고 아마도 육체에 불멸을 허용했을 것이다.”

단편 1은 블라우 박사가 플라시티네이션에 흥미를 느끼게 된 과정을 서술한다. 단편 2에서는 블라우 박사가 몰 교수 부인의 초대를 받아 그의 집으로 찾아가면서 전개된다. 몰 교수는 이 분야에서 블라우 박사를 능가하는 인물이다. 몰 교수의 기법은 같은 동료 학자들에게 비밀이었다.

4)

몰 교수는 사고로 죽었지만 블라우 박사는 그가 남긴 보존 기법을 통해 무언가 배우고자 한다. 몰 교수의 집은 바닷가에 있고 그를 맞이한 부인은 바다에서 수영하다 물에 젖은 몸으로 그를 맞이한다.

하지만 블라우 박사는 그녀의 몸에 무관심하다. 그의 관심은 온통 몰 교수의 집에 있다. 그는 몰 교수의 서재와 실험실을 방문하면서 그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몰래 기록한다.

블라우박사는 몰 교수가 남긴 고양이 플라시티네이션 작품을 보게 된다. 이 고양이는 마치 살아 있을 때와 똑 같이 부드러운 털을 갖고 가볍고 따뜻하다. 마치 살아 있는 고양이가 그렇게 하듯 건드리면 온몸을 웅크리고 펼치고 한다.

몰 교수 부인은 그를 성적으로 유혹하지만, 그는 그런 부인의 유혹이 오히려 불편하다. 부인이 그에게 바다에서 수영하자고 하자 그는 달갑지 않지만, 하는 수 없이 함께 나체로 수영한다. 이야기 마지막에 저녁에 식사 후 와인을 마시며 부인이 그의 손을 잡아 끌자 그는 이를 거부하고 부인의 집을 나간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대체 무엇 때문에 살아서 꿈틀대는 늙고 뜨끈뜨끈한 몸뚱이에 자신의 신체 일부를 쑤셔 넣어 가며 따분한 짓을 견뎌야 한단 말인가?”

5)

작가가 창조한 블라우 박사라는 인물은 흥미롭다. 이 인물은 살바도르 달리가 만든 서랍이 달린 비너스라는 조각품을 연상시킨다. 또는 오늘날 자신의 신체를 완벽한 칼날처럼 가다듬는 선남선녀와도 닮았다.

그는 무엇 때문에 살아 있는 육체와의 접촉이 아니라 죽어 있는 신체의 영원한 보존에 관심 가지게 된 것일까? 에리히 프롬이라면 이런 인물을 저장형 성격이라고 하면서 자본가의 성격으로 파악했을 법하다.

작가는 주인공 블라우 박사가 몰 교수 부인의 집으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떠올렸던 생각을 소개한다. 혹 이 생각과 블라우 박사의 성격이 연관된 것이 아닐까?

“그의 손은 여성의 몸을 통해 수천 번이나 확인한 끝에 그 안에서 어떤 균열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이미 포기한 상태였다. …. 어쩌면 인체의 내부는 전혀 복잡하지 않고 단순할지도 모른다. …. 세상에서 가장 영리한 여행자도 자신의 짐 가방을 이처럼 [우리 몸 안의 장기처럼] 완벽하게 정리하여 꾸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블라우 박사는 비행기 안에서 잠에 빠져들었다고 했다. 신체에 균열이 없다는 사실이 블라우 박사에게 편안함과 행복감일 주었다는 것이다.


올가 토카르추크의 『방랑자들』 (2) – 구멍 뚫린 사내 쿠니츠키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 『방랑자들』을 읽고 (2) – 구멍 뚫린 사내 쿠니츠키

 

이병창(한철연 회원)

 

1)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 방랑자들 속에는 여러 인물이 나온다. 지하철을 통해 끊임없이 이동하는 노숙자, 인간의 육체를 영원히 보존하려는 집념을 지닌 권력자, 오래전의 첫사랑을 안락사 해 주러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인 등.

그 가운데 쿠니츠키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방랑자가 방랑을 떠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이 인물은 소설의 앞 부분에 연속된 두 편의 단편에 걸쳐 등장하고 한참을 뛰어넘어 소설 끝날 무렵 한 편의 단편에 다시 등장한다. 앞의 두 단편의 제목은 <쿠니츠키-물1, 2>이고 마지막 단편의 제목은 <쿠니츠키-대지>이다.

물과 대지라는 대비가 흥미롭다. 물의 이미지는 이 작품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2)

첫 번째 단편에서 쿠니츠키는 아내와 세 살 아이와 함께 크로티아를 가로질러 비스섬으로 여행을 갔다. 거기서 아내와 아이가 함께 사라진다. 그는 사흘을 작은 섬에 머무르며 아내와 아이를 찾지만 찾지 못한다.

아내와 아이가 실종된 곳이 섬이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섬이란 물, 바다에 갇혀 위태롭게 떠 있는 존재가 아닌가? 그런 섬이라면 언제라도 실종이 일어날 수 있다. 그곳은 세상에 구멍이 뚫리는 약한 곳이다.

두 번째 단편은 아내와 아이를 찾는 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는 그 흔적을 찾는다. 그는 아내가 남긴 소지품을 뒤진다. 그리고 핸드백 속에 우연히 남아 있는 ‘카이로스’라는 글자를 발견한다. 이 글자는 그에게 갑작스러운 빛을 비추어준다.

이 글자를 발견한 이후 그는 아내의 소지품을 뒤지면서 마구 내 던진 물품들이 어떤 형상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때 그는 “역겨운 공포의 냄새”를 맡는다.

알 수 없는 존재가 그에게 보내는 신호, 그 신호를 통해 드러나는 시꺼먼 허무의 세계, 세계는 이제 무너졌다. 그 앞에서 그는 공포에 떤다. 이 공포가 역겨운 냄새로 표현된 것이 독특하다.

3)

세 번째 단편에서 밝혀지는 일이지만 그는 편집증 환자로 환상을 보고 있다. 아내와 아이를 잃고 돌아온 다음 어느 날 그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의 아파트 벽은 흥건하게 물이 젖는다.

“그는 발목까지 차오르는 물속을 걸어서 자동차로 다가갔다. 차를 타고 좀 더 높은 지역에 있는 이웃 마을로 도망쳐 보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알고 보니 그곳 역시 물의 덫에 갇혀 버렸다.”(504쪽)

물이란 이미지가 이렇게 섬뜩하게 그려진 소설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물이 자주 자살자를 끌어당기는 이유를 알겠다.

그의 환상 속에서 아내와 아이는 돌아와 그에게 그 섬에서 실제 일어났던 일에 대해 감춘다. 처음에 이게 사실인 것처럼 독자는 속는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이것이 그의 환상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4)

환상 속에서, 그는 아내에게 실종이 일어난 다음의 일에 대해 집요하게 캐묻지만, 아내는 그의 말을 무시한다. 그럴수록 그의 의심은 더 강해진다. 그는 아이를 정신분석학자에게 데려가 무의식을 탐구하려 한다. 하지만 그는 정신분석학자의 음모(?) 때문에 실패한다.

그는 도서관에 들러 사전을 뒤지고 인터넷에 물어 아내의 소지품에서 발견한 ‘카이로스’라는 말의 의미를 탐구한다. 여기에 무슨 단서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카이로스, 이 말은 그에게 만물에는 보이지 않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가 탐구할수록 그의 만물은 의미를 잃어버리고 무언가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가 보내는 신호가 된다.

“표시 너머에 다른 표시를 가리키는 표시가 있고 다른 표시에서 야기된 표시들이 있었다. 표시의 음모, 표시의 네트워크, 그의 등 뒤에서 표시들끼리 서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무관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게 다 중요했다. 전부 끊임없이 이어지는 커다란 퍼즐이었다.”(515쪽)

5)

아내를 미행했다가 들켜서 아내와 함께 돌아와 집에 들어오는 순간, 현관을 열면서 갑자기 그의 환상이 중단된다. 그의 집에는 아내도, 아이도 없다. 오직 아내가 남겨놓은 옷가지, 아이의 장난감만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그는 그 흔적 사이를 유령처럼 돌아다닌다. 그는 “스스로 벽을 통과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방랑을 떠난다. 알 수 없는 존재가 보내는 그 의미, 그때를 찾아서 말이다. 소설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9시쯤 그가 진하게 커피를 탄다. 그리고 나서 욕실에 있던 면도용품 일부와 옷장 안에 있던 셔츠 몇 벌, 그리고 바지를 챙겨서 가방에 넣었다. …. 그는 체코와의 국경을 향해 화살처럼 똑바로 꼿꼿하게 남쪽으로 향했다.”(539쪽)

그저 간단한 여행을 떠나는 듯 그는 떠났다. 체코를 지나야 비스섬으로 갈 수 있다. 세계가 구멍 뚫린, 그 섬 말이다.

6)

여기서 우리는 갑자기 혼란에 빠진다. 마지막 단편 끝에서 그가 비스섬으로 떠난다는 사건은 어쩌면 처음 단편에서 그가 처음 아내와 아이와 함께 비스섬에 도착했다는 사실과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가 아내와 아이를 심문하는 것이 환상이듯이 비스섬에서 아내와 아이가 실종되었다는 사실도 환상이 아닐까?

갑자기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에서 환상인지 모호해진다. 이런 모호성 때문에 그에게 역겨운 냄새가 등장한 것이 아닐까? 하이데거라면 이를 불안이라 했을 것이고 사르트르라면 이를 구토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역겨운 냄새를 맡는다.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하이데거나 사르트르에서 새로운 세계는 진리의 세계이다. 하지만 쿠니츠키 앞에 역겨운 공포의 냄새로 떠오른 세계는 그저 알 수 없는 세계다. 이전의 세계와 새로운 세계 가운데 어느 세계가 현실이고 어느 세계가 환상인지도 알 수 없다.

불안과 구토에서 사람은 구원의 세계로 들어간다. 하지만 역겨운 냄새가 풍기는 모호한 세계에서 그는 방향이 없이 다만 방랑할 뿐이다. 그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노숙자 되고, 세계를 여행하는 여행자가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소설이 끝나는 곳에서 소설은 시작된다. 이제부터 소설은 방랑하는 인물, 물과 같은 존재와 그런 방랑을 고정하려 드는 존재, 대지와 같은 존재를 탐구하는 서사시가 될 것이다.

이 소설에서 끔찍한 이미지는 흘러가는 존재를 고정하려는 자의 집요한 노력이다. 그는 이를 인체를 투명하게 보존하려는 자의 노력 속에서 발견한다. 다음엔 이 이야기를 들어보자.


 

올가 토카르추크의 『방랑자들』 (1) – 카이로스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 『방랑자들』을 읽고 (1) – 카이로스

 

이병창(한철연 회원)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 『방랑자들』을 읽었다. 이 소설은 2019년에 노벨상을 받은 작품이다. 그는 폴란드 태생의 작가라는 것밖에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하지만, 이 소설은 내게 정신적인 충격을 주었다.

소설은 낭만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슐레겔이 그의 철학 단편에서 이상으로 삼았던 문학 형식인 ‘보편 문학’의 원리에 따른다. 이 소설은 수많은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심지어 한 인물을 다루는 이야기조차 소설의 여러 부분에 흩어져 있다. 이 소설에 포함된 단편은 그 형식도 갖가지이니, 본래의 소설 즉 이야기도 있고 심리학적 연구나 철학적 단상도 있다. 전체적으로 하나의 중심이 보이지 않으니 슐레겔이 ‘중심이 무한한 소설’이라고 말한 것에 적합하다.

억지로 하나의 중심을 찾으라 하면 아마도 카이로스[kairos]라는 개념이 아닐까 한다. 카이로스는 그리스어로 ‘때’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흘러가는 시간이라는 개념과 다른 또 하나의 시간 개념이다. 예수가 “아직 내 때가 되지 아니 하였나이다”라고 말할 경우 또는 시인 릴케가 ‘가을의 시’에서 “주여 때가 왔습니다”라고 기도할 경우 사용되는 개념이다. 한자어로는 기회라고 번역될 수 있겠다.

이 ‘때’라는 개념은 그리스에서 신격화되었다. 소설의 마지막 쯤에 작가는 그리스 연구자인 한 교수를 등장시킨다. 그는 은퇴한 후 그리스 유적지를 오가는 유람선에서 그리스에 대해 강의하면서 이 카이로스라는 신을 소개한다. 교수는 실제 모델이 되는 이탈리아 토리노 박물관에 소장된 리시포스의 부조를 소개하면서 그 부조와 연관된 포세이디포스의 시를 소개한다. 그 시는 이렇다.

 

“모든 것을 길들이는 카이로스

왜 항상 발돋움을 하고 있는가?

쉼 없이 세상을 뛰어다니고 있으니까.

무엇 때문에 당신의 두 발에는 날개가 달렸는가?

바람과 함께 날아다니기 때문이지.

당신의 오른 손은 무엇 때문에 면도칼을 들었는가?

세상의 모든 날카로운 것보다 더 날카롭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기 위한 표시지.

머리카락은 왜 눈을 가렸는가?

나와 정면으로 마주치는 사람이 내 앞머리를 붙잡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지.

세상에, 당신의 뒷머리는 왜 하나도 없는가?

한번 지나치면 날개 달린 발로 빠르게 달아나 버리기 때문에

아무리 원해도 그 누구도 날 뒤에서 붙잡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지.”

 

소설에서 교수는 이 시를 읊고 나서 마침내 그의 때를 얻었다. 그는 발작을 일으켜 죽음에 이르렀다.

이 시는 때, 기회라는 개념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라 하겠다. 눈앞에 보고도 놓친 수많은 기회, 이미 떠나가면 아무리 한탄해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 기회를 생각하면 이해될 것이다.

때라는 개념이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그 개념이 방랑자 개념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위의 시에도 카이로스 신은 쉼 없이 세상을 돌아다닌다. 마찬가지로 이 카이로스를 만나기 위해서는 온 세상을 돌아다녀야 하지 않을까? 아마 잠들 수도 없을 것이다. 그가 잠든 사이에 신부가 왔다 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젊은 시절, 방황했던 적이 있다. 무언가를 만나기 위해 그리하여 때를 얻기 위해 잠들지 못하고 늘 거리를 서성거렸다. 지금은 이미 포기했고 병든 삶에 안주한다. 이런 나 앞에서 소설은 그만큼 정신적 충격이었다.

이 작품에서 카이로스가 등장하는 것은 이 작품 중에 세 군데 걸쳐 나누어져 등장한 한 쿠니츠키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다. 이제 쿠니츠키 이야기를 해 보자.


연재를 마치며 [유운의 전개도 접기]

연재를 마치며

 

이유운

 

저는 지금껏, 이런 연재를 마치는 마지막 글로 ‘연재를 마치며’ 라는 제목을 다는 게 참 멋없고 촌스럽고 성의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마지막 글을 쓰게 되니까, 이 제목만큼 담담하고 모든 걸 말할 수 있는 제목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마지막 연재를 편지 형식으로 대신한다는 것도요. 뻔한 결말이 되어서 아쉽습니다만, 뻔한 게 아니라 구관이 명관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편지라는 건 정말 내밀한 형식의 글이죠. 편지가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하나의 조건이 필요합니다. 바로 유일의 독자. 물론 저도 카프카나 생로랑이 친구들, 연인들, 사랑과 주고받은 편지가 책으로 나왔을 때 환호했지만, 그 글들은 유일의 수신자가 아니라 제게 읽혔다는 점에서 이미 편지가 아니게 된 셈입니다. 편지의 형식을 가지고 있는 다른 글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 제가 쓰는 편지도, 제가 수신자를 모르고 있으며 그 수신자가 유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편지가 아니게 되는 셈이지요. 이런 구구절절한 변명을 모두 대면서도 편지로 마지막 인사를 드리려고 합니다. 그 방법이 저와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 간의 거리를 좁히고, 또 아주 친한 벗인 척 할 수 있는 가장 편리하고도 빠른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마지막 편지로는 이런 말을 하려고 합니다. 저는 사랑시를 자주 씁니다. 제 「전개도 접기」라는 연재를 꾸준히 보아준 성실하고 다정한 독자들이 얼마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 시가 대부분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은 숨겨진 비유 같은 건 아닙니다. 필름을 덮지 않은 새 휴대폰 화면에 덕지덕지 묻은 지문처럼 그대로 드러나 있으니까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데뷔하고 나서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사랑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니까 그런 것 같아요. 글쎄요, 그건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겠습니다. 저는 엉망이 된 세계에서 자꾸 허물어지고 다시 자신을 세우는 인류가 좋습니다. 제가 그런 특성을 가진 종의 한 일원이라고 생각하면 퍽 즐거워집니다. 생물에는 종마다의 특성이 있지 않습니까? 인류의 종적 특성은 허물어지고 다시 서는 것 같아서요. 그리고 저는 그 허물어지는 이유도, 세우는 힘도 모두 사랑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한 방법으로 사랑을 선택한 인류, 전 그런 걸 좋아합니다. (물론 그런 인류 중 한 개체가 저에게 다가와 말을 거는 건 좀, 별개의 일입니다.) 저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정말정말 좋아요. 술을 마시면 저는 이런 이야기들을 자주 합니다. 얇고 흑심이 여기저기 묻은 더러운 손을 흔들며 담배를 피우는 오래 전의 사람을 기억하기도 하고, 저를 연필로만 덧그리는 사람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런 다른 결의 생각들이 모두 제 안에서 시작된다는 건, 논리적인 사고로는 아무래도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 논리 바깥에 있는(뛰어넘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 뭉글뭉글한 것, 시각보단 촉각에 가까운 것, 아폴론보다는 디오니소스에 가까운 그 무언가를 사랑이라고 지칭합니다. 연애로 축소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어디까지 포괄할 수 있을지, 그런 것들을 상상하는 건 퍽 즐겁지 않습니까? 적어도 저는 그래서 시를 쓴답니다.

신기한 건, 전 아무에게도 이 질문을 되돌려 준 적은 없어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니? 그 질문을 했을 때 사실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대답할까봐 두렵기도 했고, 그가 한 대답이 저를 실망시키게 되면, 제가 또 뭐라고 그에게 실망했다는 점 때문에 슬퍼질 것 같기도 했고,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궁금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사랑을 뭐라고 정의하는 게 대체 저랑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사랑과 다정이라는 건 아주 다른 결입니다. 그렇지요?) 아마 저와 같은 정의로 사랑을 공유하는 사람은 없을테고 바로 그런 점이 재미있는 건데요. 그래서 사실 전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치사하다고 생각합니다. 대답하는 저는 아주 많은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거니까요. 그렇다고 그간 한 많은 인터뷰들을 싫어했다는 건 아닙니다. 치사하다는 건 못된 건 아니잖아요.

오히려 ‘치사하다’는 어감도 귀엽다고 생각하거든요. 이건 다른 이야긴데, 저는 가끔 ‘내 맘도 몰라주고 정말 치사해.’ 라고 제게 누군가 써준 쪽지를 읽어봅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짝꿍을 같이 하지 않은 어떤 친구에게 받은 쪽지인데요, 옆에는 야무지게 악마도 그려뒀습니다. 왼손잡이였는지 옆으로 죄다 글씨가 번져 있어요. 이렇게 솔직하면서도 하나도 해롭지 않은 애정이 필요할 때 가끔 이 쪽지를 읽어봅니다. 귀엽지요. 사족이 길었습니다. 아무튼, 그래도 가끔, 물어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면, 내가 지금 사랑이 궁금한 게 맞나? 내가 누군지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은 게 아닌가? 라는 의문이 들어요. 사랑과 저를 혼동한다는 건 슬픈 일이니까, 아무래도 질문하지 않는 편이 좋은 것 같습니다.

그저께 벗과 한철연에서 연재한 시 중에 가장 최근의 시, 「서울극장-인디아 송-」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사실 이것은 제가 퍽 공을 들이고 있는 『서울극장』 연작시 시리즈 중에 하나인데요, 서울극장은 제가 상경해서 처음으로 마음을 붙인 장소입니다. 사람이 별로 없는, 3시간이 넘는 영화를 보면 허리가 아픈, 단차가 높은 극장에서 타인의 고통이나 슬픔을 멀리서 관찰하면 제가 겪고 있는 일들은 가짜가 되었거든요. 그 순간이 소중했어요. 그래서 누구는 영화 감독을 꿈꿀 때, 저는 ‘돈을 많이 벌어서 서울극장을 인수해야겠다’ 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제가 적당한 돈을 모으기도 전에 문을 닫았네요. 애석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래서 서울극장에 관련된 시들을 많이 썼습니다. 팝콘 기름 때문에 영화를 보고 나면 손이 반질거리던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언제나 로맨스 영화만 고르던 사람은 어떤 결말을 원해서 자꾸 그런 영화들만 골랐을까, 사실 그 결말에 내가 없는 걸 원했기 때문에 쉼없이 그런 영화들을 골랐던 게 아닐까, 영화를 보고 나오면 길거리에 돌아다니던 술에 취한 늙은 남자들의 얼굴은 어디서 연원했을까, 서울극장이 허물어지고 나면 내가 자주 앉던 의자는 어디에서 소각될까, 이런 질문들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면 슬퍼지니까요, 오래 슬퍼하지 않기 위해서 시를 썼습니다. 시를 쓰고 나면 둥그렇게 헐어버린 마음이 남습니다. 슬픔은 잠시 없어지고요. 저를 슬픔이라는 감정에 한해서 소강 상태로 만들어주는 건, 서울극장 다음으로는 시를 쓰는 순간이 있겠네요.

최근에 자주 꾸는 꿈이 있습니다. 제가 시에서 만들어낸 생명들이 태어나 저를 공격하는 꿈입니다. 보통 사랑하는 마음으로 쓴 시들은 저의 편에 서고, 제가 증오하는 마음으로 쓴 시들은 저를 죽이고 잡아먹으려 들어요. 그 시들이 서로 싸우고 피가 발목까지 고일 정도로 끔찍한 전쟁에서 저는 좀 못되게도, 그걸 바라보고만 있습니다.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은 실제로 아무것도 찢지 않으니까요. 그 꿈을 꾸고 나면 항상 생각합니다. 사랑은 정말 증오보다 강한 걸까? 대부분 사랑시들이 지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허물어진 마음을 세워서 다시 시를 쓰게 하는 건 아무튼 사랑의 일이지만…….

아무튼 제가 여기저기서 허물어지는 과정과 다시 세우는 일들을 시로 썼습니다. 이런 시들을 올리며 저는 꽤 행복했던 것 같은데요, 작가와 독자의 마음은 분리되어야 하니까요. 제가 행복했다는 사실이, 당신의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 거잖습니까? 그래도 즐거웠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습니다. 마지막 인사는 이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저는 다음 계절, 책이라는 물성을 가지고 여기저기서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당신의 얼굴을 모르지만, 당신은 나의 얼굴을 알게 될 겁니다. 저는 당신의 글을 모르지만, 당신은 제 목소리도 알게 될 겁니다. 저는 아주 멀리도 있고 바로 곁에도 있습니다. 참 멋진 일이지요. ■

 

지금까지 이유운 작가의 코너 [유운의 전개도 접기]를 애독해 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개인적으로 작가의 글들을 또 다른 곳에서 만나보길 고대합니다. 너무 멀리 있지는 말기로~   – 편집주간 –

 


지난 작가 소개 글: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유운(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온 이름.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

서울극장 ― 인디아 송(1975) / 어둠이 닿기 전에 [유운의 전개도 접기]

서울극장

― 인디아 송(1975)

이유운

 

 

글자의 단위로 해체된 영원의 풍경 앞에

우리가 있다

 

이 사이에서 서로의 배역을 침범할 수 있다

우리는 깨진 단어들을 주워서 서로에게 이름을 붙였지

 

나는 너를 위해 이교도의 신에게 고해하는 자

미움을 가지고 네게 도박을 하고 있어

 

우리는 결국 서로를 세 번 부정할 것이다

 

그런데도

손을 나누어 잡고 팝콘 통에서 가끔 손등을 부딪히고 비슷한 장면에서 자세를 고쳐 앉는 것도 가능했다

 

영화가 끝나면 사이도 배역도 없어지겠지

 

차가운 물에 뺨을 댄 채로

이방인을 예감했다

 

새로 켜진 얼굴이 나를 보고 있었다

네 뺨은 결말도 모르고 훌쩍 자랐지

 

헐어 쓰고 버린 마음처럼 매끄럽게

 

너는 그걸 무심하게 바라보는 게 사랑이라고 했지만 글쎄 나는 잘 모르겠어, 새로운 슬픔이나 기쁨, 사랑이나 전쟁을 마음에 더 이상 들이지 않는 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연약한 것을

 

우리는 사랑의 정의에 대해 토론을 하는 대신

서로의 뺨을 만지며 유일이라고 말을 하면서

무심결에 사랑을 너무나 잘 해낼 수도 있었다

 

저기 봐,

우리가 포개진 장면이 나온다

 

애써 익힌 사랑을 다음 세대로 전달하지 않는다는 동물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니

 

내가 배운 건 영화를 위해 진실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

 

너는 입맞춤을 받기 위해 새롭게 만든 이마를 내게 보여준다

검정색 머리카락을 커튼처럼 걷어올리고

 

너는 사라진 것들을 많이 닮았어

너는 대답 대신 웃고 있지

 

희미한 빛 속에서 네 모양을 본다

 

왜 사랑의 장면은 이토록 희고 푸르러야 하는 걸까

 

 

어둠이 닿기 전에

 

 

사랑에 대해 오래 생각한다는 건 나 자신에 대해 오래 생각한다는 말과도 같다. 자신에 대해 오래 생각하는 것은 큰 고통과 두려움을 동반한다. 종이접기를 하면 손톱으로 꼭꼭 모서리를 눌러 접어도 뒤집으면 언제나 하얗게 벌어진 부분이 있었다. 내가 내 안으로 들어가 나를 뒤집으면 그런 흰 부분이 너무 많았다. 이기적인 마음, 사랑에 대해 욕심을 부리는 마음, 겁이 많아 이기심과 욕심을 사랑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마음, 그 거짓말이 남긴 흰 자국을 보면서 나는 절대로 누군갈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던 마음. 그런 마음들은 항상 뒤엉키고 함께 자란다. 아무리 예리한 칼로도 그것을 도려낼 수 없다. 나를 들여다 보는 마음에서 나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자란다는 건 애석하고 슬픈 일이다. 시시한 사람이 되기 싫어서 그랬다. 나는 대단하고 비범한 사람이고 싶었는데 나를 뒤집었다가 다시 덮을 때마다 여러 자국이 생기고 나는 조금씩 비참하고 구겨질 뿐 조금도 대단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자국이 남은 종이들은 점차 부드러워지기 마련이다. 뺨에 닿을 정도로 부드러워지면 나는 종이로 태어나 광목이 될 수도 있다. 그런 가능성은 멋진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나의 선생님께 자주 편지로 보냈다. 나는 이 편지들을 오래 읽어본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도 이 글이 위로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2018년 11월 15일 오전 2시 49분] 난들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학창 시절은 미래가 자신에게 다가와 있기 때문에 장래의 입장에서 자신이 만나는 사람이나 제도를 진부한 것이고 형편없는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또 한편 기존의 언어와 생활 관습을 익히거나 알지 않으면 그들을 넘어설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마치 어린이가 부모의 언어를 배우다가 부모에 항의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 그러니 아무 염려 말고 하고 싶은 연구를 끝까지 해야 한다. 단절은 연속이 없이는 있을 수 없다. 기존의 진부한 습관을 모르는 사람은 창조적 실천도 할 수 없다. 너는 늙은 세대가 아니니 너그러운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미래는 삼류 정객들의 시대, 덜 떨어진 학자들의 시대가 아닐 것이다. 우리 모두 새로움을 바라보고 있다. 너무 심각하니 그냥 웃어 넘겨도 된다. 지나치게 신경 쓰면 건강에 해로우니 항상 명랑하여라.

 

항상 명랑하여라. 이 어려운 말을 위해 마음을 털어내고 키운다.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유운(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온 이름.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

 

 

 

영화 <디태치먼트>와 우리 사회의 무심함에 대해 [톡,톡,씨네톡]

영화 <디태치먼트>와 우리 사회의 무심함에 대해

 

김다혜(상지대학교 재학)

 

‘디태치먼트(Detachment)’는 무관심, 고립, 분리, 거리를 둠이라는 의미로 정의된다.

영화 <디태치먼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문제를 가지고 있다. 밀려드는 문제들 속에 고립된 그들은 각자 고통의 바다에서 표류 중이다. 모두가 고통 속에서 울부짖고 있지만, 모두가 서로에게 무관심하다. 그들은 왜 서로 돕지 않는 걸까?

 

영화는 “어느 하나에 이러한 깊이를 느끼지 못했고 내 스스로 격리되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느낌이다.”라는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소설 속 한 문장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영화가 시작된 지 1분도 채 되지 않아 등장하는 이 문장은 내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나의 20대는 딱 그런 식이었다. 스스로 고립되어 누구에게도 먼저 다가가는 법이 없었다. 그 누구도 나에게 쉽게 다가오지 못할 정도로 예민했다. 눈앞에 세상이 있는데도, 내가 섞여들지 못하는 이 세상이 나에게는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출처 https://sprdthemssg.wordpress.com/2018/07/13/%EB%B6%84%EB%A6%AC/

나는 차가움이 싫었다. 살면서 만난 모든 사람이 차갑지는 않았지만, 차가움은 항상 내 마음에 시리도록 큰 상처를 남겼다.

김경미 시인이 쓴 <다정이 나를>이라는 시가 있다. “누가 다정하면 죽을 것 같았다. (…) 다정이 나를 죽일 것만 같았다.” 라고 이야기하는 시다. 누군가의 냉소가 나를 휩쓸고 간 후에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이 시처럼 마냥 서러웠다.

어른의 차가움을 가장 크게 느꼈던 그 날은, 벌써 20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선명하다. 내 나이 열 살 때, 아빠가 큰 빚을 지고 말 그대로 야반도주를 했다. 엄마와 동생들은 외할머니가 계신 시골에 들어갔고, 학교에 다녀야 했던 나는 가족들과 떨어져 홀로 시내의 삼촌 댁에 맡겨졌다. 당시엔 소위 말하는 ‘놀토’가 없었던지라 내가 엄마를 볼 수 있는 시간은 일주일에 하루, 일요일 오전 몇 시간이 고작이었다. 삼촌 차를 타고 다시 시내로 나갈 때마다 나는 뒷좌석에서 혼자 숨죽여 울곤 했었다. 사건이 있던 날은 엄마와 두 시간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삼촌 차를 타는 대신 몇 시간 뒤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신다는 숙모와 함께하기로 했던 날이다. 숙모는 화가 많은 사람이었고, 나는 혼날까 봐 무서워 버스를 기다리며 숙모에게 물었다. 제가 귀찮게 해서 집에 가면 저를 혼내실 거냐고. 버스 정류장에서 숙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집에 들어가는 순간 바로 내 멱살을 잡고는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한참을 날 향해 온갖 삿대질과 입에 담지 못할 말을 쏟아붓는데, 그 자리에서 나를 도와주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삼촌은 숙모 옆에 서서 그저 멀뚱히 쳐다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때의 그 얼굴들, 눈빛들, 나를 향한 그 사람의 말도 안 되는 뜨거운 분노, 그 차가움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어렸다.

왜 그랬을까? 좀 더 따뜻하게 대해 줄 수는 없었던 걸까? 하루아침에 가족들과 뿔뿔이 흩어져버린 외로운 아이를 가만히 안아줄 수는 없었던 걸까.

 

차가운 사람들을 보면 나는 화가 났다. 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지, 왜 서로에게 좀 더 다정할 수는 없는지 의문이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그들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가장 큰 이유는 남의 불행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그들 모두가 불행해 보인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들은 다정함이 결핍된 무심한 사회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영화 <디태치먼트>는 20대의 내 시선으로 본 세상과 많이 닮아있다.

영화 속의 인물들이 모두 그러하듯 주인공인 헨리 역시 많은 문제를 가진 미성숙한 인물이다. 그는 겉보기에 감정을 잘 다스리는 성숙한 어른처럼 보이지만, 스위치가 눌리면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해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노력한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고통에 잠겨 절규하는 이들의 외침을 외면하지 않기 위해 그는 노력한다. 거리에서 매춘생활을 하며 사는 여자아이를 데려와 보살펴주고,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모두가 투명인간 취급하는 동료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기도 한다. 거리 생활을 하던 여자아이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게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일이었던지 고맙다는 인사 대신 “왜 이래요.”라고 말한다.

철조망에 매달려 온몸으로 고독함과 고통스러움에 매일 몸부림치는 같은 학교의 동료 선생에게 주인공 헨리가 다가가 괜찮냐고 물어보는 장면은, 내가 지금까지 봤던 모든 영화를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영화 속 장면이다. 단지 이 장면 하나 때문에 굳이 이 어려운 영화를 인용하며 이 글을 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금 전까지 투명인간이었던 선생은 의아한 듯 되묻는다. “내가 보여요?”라고. 헨리가 다시 “네, 보여요.”라 답하자 선생은 “세상에 드디어… 고마워요. 고마워요.” 연신 고맙다 인사하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난다.

나는 이 장면이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 관심으로 변하는 순간.

출처 https://wpalss.tistory.com/765

20대의 나는 상처 받지 않기 위해 긴 시간 벽을 쌓고 잔뜩 날을 세운 채로 고립된 삶을 살았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의 말을 빌리자면 당시 내 인간관계는 모두 ‘나-그것’이었다. 그때 만난 모든 사람에게 나는 ‘그것’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참 많은 실수를 했다. 그저 시간이 지나가기 만을 바라며 살았다. 지나가라, 얼른 지나가. 지나가면 이 고통이 끝날 줄로만 알고. 그러나 20년이 흘렀어도 선명한 그 날의 기억처럼 어떤 상처는 시간도 해결해주지 못했다. 나의 실수를 가만히 감싸준 어른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나는 달라질 수 있었을까? 모르겠다. 내가 나에게 박했던 건지, 세상이 나에게 박했던 건지 그 순서조차 이제는 모르겠다. 단지 그 시간이 쌓이고 쌓여 내가 지금의 내가 되었다는 사실만은 정확히 알 수 있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그 시간을 지나온 지금의 나는 제법 성장했다. 적어도 항상 화가 나 있는 상태는 아니다. 지금은 화를 내는 대신 냉소적인 사람들에 대해 오히려 어떤 연민의 정을 느낀다. 고통 속에 스스로 고립되어 사는 사람인 것만 같아서.

최근에 『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쇼펜하우어는 “삶이 고통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사람들에게 너그러워진다.”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그 정도로 성숙한 인간은 아니지만, 어쩌면 그 비슷한 단계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법정 스님이 생전 남기신 글 중에서는 더운 날 나무의 그늘이 얼마나 시원한 쉴 곳이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사람의 그늘은 덕인데, 눈앞의 사소한 이해타산에 걸려 덕의 그늘을 펼칠 줄 모른다. 나무의 그늘에 견줄 때 우리들 사람의 그늘은 얼마나 엷고 빈약한가.”라는 내용을 담은 글이 있다.

나는 아직 누군가의 그늘이 되어줄 만큼 큰 사람은 아니다. 나 한 사람은 너무 작다. 그러나 적어도 내 세상을 조금씩 바꿔가려는 노력은 계속 진행 중이다.

오늘은 이런 일이 있었다. 아파트를 청소해주시는 분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어 인사를 나눈 후, 마침 점심때라 식사는 하셨는지 여쭈어보았다. 그랬더니 자기는 먹었다면서 자신의 안부를 물어봐 줘서 고맙다고 마음을 다해 몇 번이나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나는 덕분에 아파트가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으니 오히려 제가 더 감사드린다고 인사를 드렸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시며 마지막으로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나는 그게 참 마음에 남았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몫만큼 감당해야 할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고립된 채로는 오래 버틸 수 없다. 상대방이 무심코 내뱉는 말과 행동에 상처받기도 하지만, 또 별거 아닌 일에 크게 감동하기도 하는 게 사람이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겐 오늘을 버틸 힘이 되어줄 수도 있다. 한 사람이 고립되지 않도록 돕는 것도 마땅히 우리 사람이 할 일이 아니겠는가.

무조건 타인을 도우며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남을 돕기 전에 우리는 먼저 자기 자신을 구원해야만 한다. 그게 순서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 마음을 지키는 일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 나를 돕지 못하는 사람이 남을 도울 수는 없다.

 

영화 <디태치먼트>의 주인공 헨리는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학생들 앞에서 이렇게 설교한다.

“하루는 24시간이고 삶의 대부분을 죽도록 일하다가 끝마칠 거야.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보호하고 무뎌지는 것과 싸우기 위해서 배우는 거야. 상상력을 자극하고 의식과 신념을 발전시키기 위해 이 모든 기술이 필요하지. 우리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소설가 김영하는 독서를 왜 하느냐는 물음에 ‘내면을 구축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는 “나, 고유한 나, 누구에게도 털리지 않는 내면을 가진 나를 만들고 지키는 것으로서의 독서. 그렇게 단단하고 고유한 내면을 가진 존재들, 자기 세계를 가진 이들이 타인을 존중하면서 살아가는 세계가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세계의 모습입니다.”라고 이야기한다.

마음을 지키는 데 책이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기꺼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내가 그랬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대신 책을 읽으며 마음을 달래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 따위의 고민에 빠져있을 때 책 속 문장들은 한결같이 “너만 그런 거 아니야. 나도 그래.”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책은 나에게 가장 많은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은호야. 한 권의 책이 세상을 바꾼다는 말 난 믿지 않는단다. 그럼에도 난 은호 너에게 한 권의 책 같은 사람이 되라고 그 말을 남기고 싶구나. 책이 세상을 바꿀 수 없어도 한 사람의 마음에 다정한 자국 정도는 남길 수 있지 않겠니. 네가 힘들 때 책의 문장과 문장 사이에 숨었듯이, 내가 은호 너라는 책을 만나 생의 막바지에 가장 따뜻한 위로를 받았듯이. 그러니 은호야. 앞으로도 누군가에게 한 권의 책이 되는 인생을 살아라. 네 안에 있는 한 줄의 진심으로 사람을 만나고 세상을 살아. 한 권의 책이 세상을 바꾸거나, 누군가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지는 못해도, 좋은 책은 언젠가는 꼭 누구에게나 읽히는 법이니까.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따뜻해지는 거 아니겠니.”

 

나 역시 누군가에게 다정한 자국 정도는 남길 수 있는, 그런 한 권의 책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바람은 그러한데 형편없는 사람이라 아직 갈 길이 멀다.

 

우리는 모두 다양한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고통의 종류와 형태는 매우 다양해서 전부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러나 “불행이란 설국열차 머리칸의 악당들이 아니라 열차 밖에 늘 내리고 있는 눈과 같아 치명적이지만 언제나 함께할 수밖에 없다.”는 허지웅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삶에서 고통을 뺄 수도,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다.

 

안 그래도 힘든 세상이다. 적어도 서로 괴롭히지는 말자.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지는 못할지라도, 타인에게 고통을 더해주지는 말자. 타인의 실수를 그냥 덮어줄 줄도 아는 인간이 되자. 누구나 실수하고 산다. 내가 그러하듯이.

나는 앞으로 더 다정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서툴지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친절할 것이다. 무엇을 기대하거나 바라는 것 없이 타인을 도와주고, 또 타인에게 도움을 청할 줄도 아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게 나와 너의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지기를 바란다.

나는 우리 사회가 서로 돕고, 의지하고, 서로에게 조금 더 다정한 사회가 되기를 염원한다.

 

출처 네이버 영화 https://movie.naver.com/movie/bi/mi/photoView.naver?code=82239

가장 보편적인 시 / 〈작가 노트〉 [유운의 전개도 접기]

가장 보편적인 시

 

이유운

 

아무것도 모독하지 않고 문장을 끝내는 법

짐승이 되어가는 사랑을 견디는 법

 

수많은 개론서들 앞에서 자주 마음이 나빠지기 위해

학교에 다녔다

성실하게

 

이마에 붉게 찍힌 낙인을 문지르며

나의 마음을 읽고 쓰는 방법에 대해 물었지만

아무래도 그런 것들은 가르치기 어려웠다

 

    이것은 시입니다. 저것은 예술이고요, 이 방 안에서 당신은 여자라고 규정됩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걸어보세요. 걸음걸이마다 이름을 붙여봅시다. 그런 것을 우리는 문학이라고 부릅니다. 실제로, 실재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생각 좀 해보세요, 누가 그런 걸 궁금해하겠습니까? 존재보다는 기분이 중요한 시대니까요. 자, 다같이 큰 소리로 읽어봅시다. 이것은 시, 저것은 예술, 당신은 여자.

 

잘 포장된 나

 

미래파적, 언어의 무용, 무해한 표현들, 상처받은 어린 화자, 탈피하고자 하는, 흰 공간……

대체로 시시했고 대부분 비슷했다

 

그러니까 진짜 웃기지 않니? 시라는 건

아무렇게나 말하고 이렇

행갈이만 하면 문학

지 않니

아주 문학 같다

퍽 예술 같기도 하지

 

뭉뚱그려 보편적인 시라고 거들먹거리며 걸어다닌다

 

 

작가 노트

 

어떤 행위에는 모종의 도덕성이 부여된다. 도덕성을 보유한 자와 도덕적인 행위를 하는 자는 퍽 다르며 둘 다 이런 시대에는 비겁한 자가 된다. 성실하고 도덕적인 자 보다 비겁하고 저열한 자가 되는 것이 훨씬 더 쉬운 세상이므로 파편적이고 주변적인 시보다 보편적이고 규범적인 시를 쓰는 게 훨씬 더 쉽다고도 말할 수 있다. 보편적인 시와 보편적인 학습. 그것들은 대체로 비슷한 말들을 하고 있다. 무해하고 하얗고 깨끗하고 상처받은 자들을 치유하고…… 이런 말들도 행갈이를 하면 시 같을 것이다 보편적이므로.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유운(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온 이름.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

백과전서파의 사랑 / 유일한 자에게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는 건 일종의 종교적 습관이자 문학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유운의 전개도 접기]

백과전서파의 사랑

 

이유운

 

나는 사전이 많은 집에서 태어났다

 

창틀에 정의들을 끼우고 학습하기에

적절한 탄생이다

 

많은 것을 외우며 자랐지

 

죽은 비둘기의 표정, 싸구려 조명, 페인트칠이 벗겨진 대문, 무릎의 튼살, 양철통으로 만든 마음, 꿈의 안팎에서 소진되어 돌아온 패잔병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는

더 이상 외울 정의가 없었으므로

그 또한 적절한 단락이었다

 

너는 자주,

날씨의 정의 아래에 서 있었다

 

헝클어진 얼굴

부르면 돌아보는 이름을 가진

 

그건 너무 순진한 모양이어서

나는 네 살갗을 짚으려고 손을 만들었다

 

내 손금에 박힌 절반의 문장을 보여줄게

이것이 우리 집에 마지막으로 남은, 아무도 외우지 않은 말이다

 

사물들이 점친 내 운명의 점괘다

 

요약하자면

 

돌이킬 수 없고 자주 갈라진다는 것이고

밝은 밤에 죽을 거라는 결말이다

 

결말이 오기 전까지

나는 주로 지칭대명사처럼 기능할 것이고

대부분 너를 위해 주먹을 쥐었다 펼 지도 모르겠다

이 점괘가 입술의 단위로 부서질 만큼 자주

 

손으로 입을 가리고 너를 부르면

너는 너를 부른 목소리의 주인을 찾지 못했지

 

아쉽지 않다

 

주인이 된다는 건

언젠가 그걸 잃어버린다는 거니까

 

네가 목소리의 주인을 찾으며 집을 돌아다닌다

네가 지나치는 곳마다 정의들이 우수수 비처럼 떨어지고

 

비참하게 쌓인 종이들이 오래들 자고 있다

 

우리가 그 위에서 춤을 추면 어떨 것 같아?

 

나 아주 슬플 것 같아

 

 

 

유일한 자에게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는 건 일종의 종교적 습관이자 문학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은 내게 많은 풍광을 보여준다. 그는 내가 살지 않은 모든 곳으로 나를 데려갈 수 있다. 내가 아직도 공릉과 헷갈리는 정릉, 서울의 골목들, 내가 알지 못하는 그의 걸음들, 학교, 순간들, 사람들, 얼굴들, 사랑들, 시간들, 미움들. 그가 아니었다면 내가 절대 알지 못했을 것들. 그 풍광들을, 순간들을 자꾸 글로 쓰게 된다. 그게 나로부터 미끄러지지 않았으면 해서. 내 마음과 시간과 우리에게 무언가 자국을 남기고 내려갔으면 해서. 그 자국이 쌓여서 스키드 마크를 남겼으면 해서. 그 마크를 손으로 짚으면 맥박이 느껴졌으면 해서. 내 손바닥을 간질이는 맥박. 고동. 규칙적인 심장의 소리. 우리 이 도시에 잔뜩 스키드 마크를 남기자. 모든 자국은 언어로 정의할 수 없다. 언어 사이로 미끄러져 가는 사랑을 지켜보고 서 있다. 비가 내린다.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유운(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온 이름.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

여름성경캠프 / 나의 투명한 자매님들에게 [유운의 전개도 접기]

여름성경캠프

 

이유운

 

어느 날 해가 거꾸로 솟았다 어젯밤 우리 중 누군가 소원을 빌었기 때문에

 

깍지를 끼고 마주 잡은 손 위로

불투명한 천을 덮었다

 

천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어둠을 먹고

 

소원의 주동자를 색출할 때

한 명이 나서는 대신 모두가 뒤로 물러서는 것처럼

 

사람이 사람을 용서한다는 일의 기괴함

 

사이좋게 멸망하길 바라는 마음이 왜 상냥하다고 할 수는 없는 걸까

 

거짓말을 한 죄로 성역에서 분리된 우리는 서양호랑가시나무를 주워다 오두막을 짓고 분필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이 곳으로 추방당해 오는 자 모두 구원받으리”

 

쉽게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게 되는 방법

이런 편리한 구원을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죄를 용서하는 신은 없어도 좋았겠다고 속삭였다

 

어둠을 잘라 만든 미사보

그 아래에 무릎을 대고 앉은 나와 너

 

고해하는 목소리 고백하는 얼굴

지옥을 가르치는 말투 사랑을 배우는 표정

 

유난히 날카롭게 발음되는 보호와 구원이라는 단어

 

너는 일어선다

그리고 난파된 유람선을 보듯 나의 무릎을 보고

 

『돌아가자』

 

너는 왜 그런 말을 선언처럼 하는지

너와 나를 우리라고 말하는 걸 왜 그렇게 괴로워하는지

 

『도망가자』

 

너를 흉내내 고백하는 나

나는 너를 보지 않고 신발끈을 묶는다

 

우리의 캠프는 익사하기 좋은 숲에서 끝난다

 

캠프가 매해 여름마다 열리는 건, 우리가 만든 성역의 오두막은 오트밀을 먹으러 오라는 종소리와 함께 무너지기 때문이지

 

네 귓바퀴 모양을 닮은 조개를 줍고

살갗같은 자작나무 껍질을 벗겨다 아마포처럼 두르고

 

오두막 바깥으로 너의 녹색 트렁크가 멀어져 가는 걸 본다

 

영원한 아침이 오고

천이 점점 투명해지고 있었다

 

 

 

나의 투명한 자매님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 줍니다.

― 베드로의 첫째 서간, 4장 8절.

 

사랑에 있어서, 나는 그간 제법 운이 좋은 편이었다. 우리는 배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어떤 사랑이 그것이 사랑인지 모르고 지나칠 때가 많다. 하지만 나는 사랑이 아닌 것도 사랑이라고 쉽게 착각했기 때문에, 아주 흐릿한 사랑의 징후들도 사랑이라고 잡아챌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여름성경캠프. 이 단어를 들었을 때 첫사랑의 자국을 떠올리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동그랗게 모여 앉아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부르거나 ‘38색 크레파스’가 적힌 종이 쪽지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기억 사이에서 사랑의 징후를 찾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체구가 작았고 혼자 이상한 상상에 빠져 있는 좀, 음침한 어린이였다. 그런 나에게도 언니들은 스스럼없이 다가오곤 했다. 성당에서는 미사보를 쓰고 있어 옆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던 그들이 머리카락을 높이 올려묶고 드러낸 건강한 빛깔의 귓바퀴를 보는 것이 좋았다. 그들은 나에게 운동화의 벨크로를 단단하게 누르며 낮은 나무를 오르거나 풀을 뜯어다 반지를 만드는 법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봉숭아 물을 들이는 법, 그리고 첫눈이 올 때까지 그것이 사라지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에 관한 마법 같은 이야기들도.

― 첫사랑이 이루어지는 거야.

― 그게 뭔데?

―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너를 좋아하는 거.

그러면 나는 이걸 할 필요가 없지 않나? 나는 내 손에 봉숭아 물을 들여주는 언니들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언니들을 좋아하고 언니들은 나를 귀여워했으므로. 지금 이미 이뤄진 일을 위해서 첫눈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건 이상하게 들렸다. 그해 겨울에 첫눈이 내릴 때까지 내 손톱에 봉숭아물이 남아 있었는지 아닌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미 발생한 사건의 진실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 일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나는 그저 그 캠프가 영영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둘러앉은 둥근 얼굴들이 나를 떠나지 않기를 바랐지만 그런 일은 너무나도 위대한 일이라서 고작 봉숭아물이 사라지지 않는 걸로는 이뤄지지 않았다.

종교는 나의 가장 오래된 습관이다. 집 한 켠에는 언제나 마리아 상과 ‘가정을 위한 기도’ 팻말이 놓여 있었고, 일요일 오전에는 어린이 미사를 갔고 나이에 맞추어 여러 가지 세례를 받았다. 나는 매주 신에게 고해할 나의 죄악을 마련해갔다. 나의 양육자는 내가 잘 되기를 신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지만 나는 그 기도가 내가 받은 사랑 중에 가장 모욕적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고등학교 입시 시험을 잘 치르기를. 수능을 잘 보기를. 내가 대학을 잘 가기를. 내 석사논문이 무사히 통과하기를. 지금은 그가 나를 위하여 무슨 기도를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정상적으로 사랑하기를’?

이 에세이를 발표한다는 건 사실 아주 모험적인 일이다. 이 에세이를 쓰고 삼켜두고 일기장으로 복사 붙여넣기를 한 다음 다시 이 페이지를 비우고, 텅 빈 화면을 바라보고, 다른 글을 쓰다가 그걸 다시 지우고, 제목을 바꿔보고, 다른 시를 뒤적여봤다.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몇 번이나 망설였다. 어떤 이야기를 할 때, 꼭 ‘나’가 앞으로 나올 필요는 없다. 이것은 비겁한 방법이 아니며 누군가를 설득하려고 할 때 당사자성은 필수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기분과 태도가 아주 달라진다.

(그러니까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철학은 남성적이고 폐쇄적인 언어로 말을 한다. 대부분 내가 철학의 테두리 안에서 만난 사람들은 아주 멋지고 유연한 사람들이었지만 철학의 이름을 달고 있는 매체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건 위험한 일일수도 있다. 나는 한 발 물러서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찬성한다. 모든 사람은 최소한의 삶을 존중받아야 한다. 누구라도 타인의 삶을 규정할 수 없다. 모든 형태의 사랑은 위대하고(Love wins!) 물론 사랑이 중요하지 않는 사람들도 존재하며, 누구의 젠더라도 존중해야 한다그리고 나는 이 말에 찬성한다. 주디스 버틀러에 따르면……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말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런 일은 조금, 아니 어쩌면 많이, 이상하다. 나는 그저 나일 뿐인데 어떤 말을 한다는 사실만으로 내가 선을 밟고 있는 사람이 된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다.

작년과 올해, 정말로 많은 친구들이 세상을 떠났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도, 아는 사람들도, 친한 사람들도, 멀어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SNS에 쓴 글들이 대부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게 슬퍼서 견딜 수가 없었다. 슬픔이 가시면 화가 났다. 치사하기 그지 없다. 선은 처음에 누가 그었나? 우리 모두 분필을 쥐고 원하는 선을 그어보는 경험이 있었나? 없었다. 선을 긋는 분필이 있는지도 몰랐다. 태어나니까 그런 선이 있었다. 그 선에 운동화 앞코로 모래를 뿌리고 뛰어놀다 보니 좀 흐릿해졌다. 네 앞에 선이 있는데, 넘어가도 돼? 누군가 묻는다. 나는 그 선을 그린 적도 없고, 나에게 의미도 없는 선이니까 괜찮다고 말한다. 함께 놀 때는 공간이 넓은 게 좋으니까. 그러니까 갑자기 나를 죄악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생겼다. 괴이하고 비논리적인 일이다. 이걸 누가 그었는데요? 아무도 모른다. 모르면서 우선 잘못이라고 한다. 우리는 걸을 수 있으니까 걸었고 뛰고 싶어서 뛰었을 뿐인데 그래서 우리의 존재가 잘못이 되었다.

나는 나를 부정하거나 규정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나에게 ‘나는 이해하고 존중해’ 라는 말도 할 필요조차 없다. 당신이 뭔데 나를 이해하지? 나는 타인이 내 존재를 이해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상하지 않은지? 길을 잘 가다가, 당신을 지나치는 고양이나 노신사를 갑자기 붙들고 ‘나는 네 존재를 이해한다’ 라고 말해보는 걸 상상해보라.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할 것이다. 그걸 왜 ‘특별하고 편견에 맞서는 분들’ 에게는 하지 못하는지, 정말 이상한 일이다. 나와 거리를 두고, 내가 그런 사람인 것을 지나치면 된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보통 이런 이야기에 대한 반응은, “다른 사람처럼 평범하게 살 수는 없니?”라는 괴상한 말이다. 평범이라는 게 뭔지부터 말해봐야겠다. 소위 말하는 ‘정상’? 그럼 세상의 어떤 사람도 태어나서 한 번도 평범한 적 없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야기하자면 나는 언제나 특별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을 힘껏 했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는 말보다는 백 번 나은 말 같긴 한데, 그래도 즐거운 말은 아니다.

이 괴이한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봤다. 그리고 때마침 운좋게 나는 시인이다. 할 수 있는 건 계속해서 말하고 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예술이라는 건 이런 말을 하기에 퍽 편리한 도구다. 그래서 이 에세이를 발표하기로 했다. 별 얘기 없는 것 같지만 사실 많은 이야기를 했다.

‘평범’한 사람들은 선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계속해서 땅따먹기를 하고 있을 것이고 나와 내 친구들은 새로운 평범을 위하여 선이 없는 세상으로 갈 것이다. 계속해서 남아 있는 것은 당신의 자유지만…… 낙오자가 되는 건 아무래도 멋진 일은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다.

 

 

― 영원한 벗,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을 위해 용감했던 HY를 기억하며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유운(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온 이름.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

 

 

 

 

 

농담의 세계 / 곪아버린 것들의 신 [유운의 전개도 접기]

농담의 세계1

 

이유운

 

포자의 상태로 나누는 입맞춤

언니는 전보다 나를 사랑하는 얼굴을 하고 있지

 

나는 하얗게 빛나는 나의 연인 앞에서 꿈을 꾼다

 

꿈 속에서

우리는 우리이거나

아주 먼 곳에서 상상된 타자이거나

 

나는 발뒤꿈치로 걷고 있으며

언니는 턱을 괸 채로 나의 망가진 걸음걸이를 본다

 

이 세계에서는 영원히 사라지는 것들 뿐

 

우리가 똑같이 없어진 세계에서

우리, 건강하게 잘 지내자

 

언니가 나를 보지 않고 신발끈을 묶으며 말했으므로

나는 이 장면이 원망인지 희망인지 알지 못했다

 

미지근한 초콜릿을 입에 머금고

언니와 나 사이의 시차를 본다

 

이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드라마가 되겠네

혹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신화가 되거나

 

내가 닮은 건 언니의 뒷모습

나는 꿈에서 거슬러 받은 나를 추슬러서 돌아온다

 

이토록 지겨운 세계에서

이제 나는, 꿈을 꾼 나날들을 가늠하지 않고……

 

 

곪아버린 것들의 신2

 

련도, 난연[爛然] 곪아버린 것들의 신

 

    낮잠을 자다가 일어나면, 종종 이 세계가 내가 알던 세계가 맞는지 확신할 수 없다는 이상한 감각이 든다. 가위를 눌리면 손가락을 뒤로 꺾어보면 된다고 한다. 꿈 속에선 고통이 느껴지지 않으니까. 하지만 내가 잠든 사이에 세계가 온통 바뀌어 있다면, 그건 무슨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고통의 감각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나는 세계를 감각할 수 있을까? 꿈이 선명하게 기억날수록 이런 의심은 강해진다.

    꿈 속에서 주로 나는 신과 대면하곤 한다. 내가 믿는 신일 때도 있고, 내가 존재조차 몰랐던 신일 때도 있다. 주로 그 신들은 화가 나 있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만들어냈는데, 너는 왜 그렇게 나를 모욕했느냐고 화를 낸다. 그들에게 미안하기도 하지만 또 동시에, 그들이 나에게 화를 내는 것이 부당하다고도 생각한다. 내가 나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아무튼 그 신들의 얼굴은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의 얼굴이 뒤섞여 있다. 그리고 종종, 내가 실제로 알지 못하고 또 실제에는 없는 실재의 인물들의 얼굴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영화나 소설, 그리고 그림에서 내가 상상으로 얽어낸 얼굴들이다.

    인간은 너무나 나약하지만 그들 자신을 위해 종교와 신을 만들어낸 멋진 종족이다. 나는 그 종족의 일원으로써 이 멋진 발명품을 마음껏 즐기고 있다. 나는 신화와 종교가 좋다. 그들이 죽음과 고통을 대하는 엄청난 자세가 좋다. 취향에 따라 종교와 신을 선택하는 일은 어쩐지 불경하게 느껴지지만…… 특히 좋아하는 건 질투하는 신들이다. 그런 신들은 자신을 향한 무조건적인 경배와, 손으로 꼽을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을 선사한다. 가끔 성경을 읽다보면 신과 악마가 잘 구분되지 않을 때가 있다. 이런 신을 믿으면서 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 건가? 인간에게 바람을 불어 넣어 전쟁을 하게 만드는 신, 메뚜기와 전갈을 보내 사람을 갉아먹도록 하게 하는 신, 인간의 가죽을 벗겨내는 것으로 그의 믿음을 시험하는 신. 그런 신들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사람들은 무엇을 기대한 걸까? 그들의 공포를 기반으로 한 믿음은 어딘가 서슬이 퍼렇다.

    하지만 새롭게 만들어낸 신화는 조금 색깔이 다르다. 련도 작가의 그림을 처음 봤을 때, 나는 이 새롭고도 아주 멋진 새로운 신화에 매혹되었다. 영원의 신, 우리가 닿을 수 없는 영원불변의 곧은 신은 언제나 성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예수의 손은 언제나 신성한 손으로 쥐고 있는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한다. 하지만 련도 작가의 신화에서 새로이 태어난 신들은 그간 신의 것이 아니었던 특성들을 전유한다. 곪거나 썩은 것들. 무한보다는 영원에 가까운 순간의 신들. 이 신들은 슬프거나 질투하거나 무서워 보이지 않다. 그는 내 꿈에 나온다고 하더라도 왜 나를 모욕했느냐고 화를 낼 것 같지 않은,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 살이 썩어 있으니 그것을 만지면 저항없이 내 손가락 사이로 허물어질 지도 모른다. 신화와 꿈 사이의 금을 밟고 서 있는 그들은 가끔 나에게 그런 살갗과 얼굴을 보여준다. 정말로 연약하고 매혹적인 신들이다.

    그 중에서도 《곪아버린 것들의 신》을 봤을 때, 그가 그려낸 신의 팔과 얼굴에 돋은 이끼와 버섯을 보며 이유리 소설가의 「버섯의 나라에서」를 떠올렸다. 우리는 사랑과 신을 쉽게 등치시킨다. 그 둘은 모두 완전무결하고 성스럽고 깨끗하며 그 흔적들은 여기저기 낭자하지만 그것의 실제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는 전설 같은 것들이다. 그래서 신과 사랑을 모욕하는 건 비슷하게 힘이 들고 또, 꼭 그만큼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다. 「버섯의 나라에서」에서 ‘강희’는 “레즈비언 윤강희가 될 수 없다면 차라리 버섯 윤강희가 되겠다” 하고 유서 아닌 유서를 남긴다. 그런 그가 마지막 편지에 연인에게 건강하길 바라는 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같다.

    강희가 버섯이 된 방 안에서, ‘언니는 여전히 잘 있다’ 라고 말을 시작하는 ‘수민’처럼, 나도 먼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서 지금 내게 벌어지고 있는 신화 없는 전쟁의 삶을 받아들인다. 나는 나를 미워하지 않는 연약한 신과, 내가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작고 하얀 연인이 있는 삶을 받아들인다. 그런 삶에서는 나도 무언가를 태어나게 하고 있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나는 진정으로 걷는 시간을 소망한다. 아마도 그 시간이 흐르는 세계는 푹신푹신한 땅이 없어서 나는 발뒤꿈치로 걷고 있으며 자주 넘어져서 무릎과 발뒤꿈치가 죄다 까져있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가짜로 만들어진 쿠션을 걸어 무릎의 연골과 근육이 퇴화되는 것보다는 자주 다치고 구르며 아주 멀리서 태어나는 내가 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슬픈 이야기와 연약한 신을 태어나게 하는 작가들의 상상력에 포자처럼 달라붙어서, 나는 딱딱한 길 저 멀리까지 가고 싶다.

 

 

 

이유리 소설가는 2020년 경향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빨간 열매」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onyuthegreatestcat@gmail.com

련도 작가는 신화와 종교를 기반으로 주로 평면 작업을 하고 있다. ryundoyoon@gmail.com

 

 

  • 이번 편을 마지막으로 동 시대 작가들과 동료들을 소개하는 연재를 마치고 2주 후에 유운 작가의 또 다른 작품으로 찾아오겠습니다.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유운(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온 이름.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


  1. 본 시는 이유리 소설가의 「버섯의 나라에서」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이유리, 「버섯의 나라에서」, 『레인보우 다이빙』, 아미가 출판사, 2020.

  2. 련도 작가의 동일 제목의 작품에서 따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