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와 사건(1)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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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와 사건(1)

-두 작품 <단순한 열정>과 <사건>을 통해서

 

1)두 가지 세계

세계를 보는 두 가지 시선이 가능할 것이다. 하나는 일반적인 시선인데 주어 중심의 세계를 낳는다. 여기서 세계는 모두 어떤 주어가 지시하는 대상으로 이루어진다. 이 주어는 술어를 통해 다른 사물과 관계하며, 다른 사물로 변화해 나간다.

반면 술어 중심의 시선이 있을 수 있다. 이 시선에서는 세계는 술어로 이루어지며 이 술어가 다른 술어와 교차하면서 이런저런 사건이 생겨난다. 예를 들어 사랑은 죽음과 만나면서 사랑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생겨난다. 사랑은 질투와 만나면서 질투에 사로잡힌 사랑이 생겨난다.

사랑으로 죽어갔던 베르테르와 사랑으로 죽은 윤심덕은 동일한 사건의 반복일 뿐이다. 여러 술어가 상호 교차하면서 사건의 네트워크 공간이 이루어진다. 사랑과 환희, 죽음은 서로 교차하면서 사랑의 공간을 이룬다. 사건이 시간적으로 계열화하면서 어떤 대상이 출현한다. 나라는 존재는 일련의 사건이 연속적으로 일어난 지점에 불과하다.

이미 어떤 사건의 공간 속에 있는 나에게 새로운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일어나는 어떤 것이다. 그 사건은 기존의 나에게서 어떤 조짐을 보이다가 마침내 현실화한다. 사건은 더욱 두터워지고 무게를 더하면서 기존의 나를 파괴한다. 나는 갑자기 기존의 사회에서 용납되지 않는 존재, 짐승이나 벌레와 같은 존재가 된다. 그리고 이 사건은 나를 사로잡고 마침내 나를 넘어서면서 나는 새로운 나가 된다. 이걸 사건의 전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2)

카프카는 이런 사건의 전개과정을 <변신>이라는 소설로 그려냈다. 이상의 작품 <날개>도 이런 사건의 전개과정을 그린 소설로 볼 수 있겠다. 프랑스의 작가 아니 에르노 역시 이런 사건의 전개과정을 주제로 두 편의 소설을 썼다. 하나는 1991년 쓴 소설 <단순한 열정>이며 다른 하나는 1999년 쓴 소설 <사건>이다.

<사건>은 작가가 대학생 시절 1964년 2월 20일에 밤에 부딪혔던 사건을 다룬다. 작가는 1991년 자신이 겪은 단순한 열정을 글로 쓰면서 마지막에 1964년의 이 사건을 다시 기억한다. 작가는 이 작품 속에서 사건이 일어난 그 장소를 다시 찾아본다. 이 사건은 끊임없이 작가의 마음을 강박하면서 마침내 8년이 지난 다음 <사건>이라는 소설이 나타나게 되었다.

작가가 겪은 단순한 열정과, 그 원형으로서 그 사건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둘 다 끔찍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이 아름다움 때문에 작가는 이를 글로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는 그것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서다. 작가는 이를 신성한 것으로, 자긍심을 주는 것으로 기억한다.

“신성한 무엇처럼 [1964년] 1월 20일과 21일 밤의 비밀을 내 몸속에 간직한 채 거리를 걸었다. 내가 공포의 끝에 있었는지, 아름다움의 끝에 있었는지 모르겠다. 자긍심을 느꼈다. … 혹은 다른 이들은 결코 가려고 하지 않는 곳까지 경험해 본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자긍심처럼 생각되었다. 이 감정의 무언가가 나로 하여금 이 이야기를 쓰게끔 이끌었다.”(사건, 75쪽)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끝내고 싶지 않았던 삶이 가장 아름다웠던 그 시절의 영원한 반복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단순한 혈정, 59쪽)

“지금은 그 모든 일들이 다른 여자가 겪은 일인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사람 덕분에 나는 남들과 나를 구분시켜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단순한 열정, 66쪽)

3)

작품 <사건>에서 다루어지는 사건은 작가가 대학생 시절 겪은 임신중절이라는 사건이다. 당시 프랑스에서 임신중절을 불법이었다. 작가는 “알코홀 중독과 같은 취급을 받는 임신한 여자아이가 상징하는 가난이 물려주는 운명을” “사회적 실패라는 낙인”을 피해 임신중절을 결심한다.

그런 결정이 내려지자 임신은 이제 이해할 수 없이 다가온,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 된다. 이 사건은 이제 이름도 없어진다. 주인공은 이 사건을 그저 ‘그것’이라는 말로 부를 뿐이다.

처음에 이 사건은 아직 피할 수도 있을 것으로 나타나지만 점차 그 두터움과 무게를 더하면서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닥쳐온다. 이 사건으로 주인공은 사회로부터 배제되며, 논문 작성이라는 자신의 과제에도 충실할 수 없다. 주인공의 삶은 혼돈에 빠져든다. 주인공은 이 혼돈으로부터 빠져나갈 길을 알지 못한다.

“시간은 내 안에서 앞으로 나아가지만, 모든 수를 써서라도 파괴해야만 했던, 형태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 버렸다.”(사건, 21쪽)

“따라가야 할 길도, 따라야 할 표지도 아무것도 없었다.”(사건, 27쪽)

“이제 이념의 천국[여대생으로서 삶]에는 다가갈 수 없어 보였고 그 아래로 구토하며 진창에 빠진 내 육신을 질질 끌고 다녔다.”(사건, 33쪽)

주인공은 불법 시술을 받으며 마침내 자기 뱃속의 생명을 살해하여 변기에 버리는 어마어마한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이 사건이 1964년 1월 20일 밤에 일어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주인공은 죽음과 심판을 경험한다.

“그리고 내 허벅지 사이에 그것을 꼭 끼고 복도로 걸어나갔다. 나는 짐승이었다.”(사건, 64쪽)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장면이었다.”(사건 65쪽) “그 밤은 삶과 죽음의 순수한 경험에서 폭로와 심판의 자리로 바뀌었다.”(사건 66쪽)

작가는 이런 사건을 서술하기 위해 일체의 인과적 관계를 거부한다. 작품 속에는 인물이나 환경의 구체적 모습이 전혀 그려지지 않는다. 오직 사건이 출현하여 주인공의 마음과 삶을 엄습하는 모습만이 서술되어 있다. 사건은 마치 우주인의 침공처럼 한바탕 전쟁을 일으켰다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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