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형이상학 산책 3-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1)
전환점은 칸트였다. 사람들은 칸트의 선험철학만 안다. 하지만 정작 칸트가 했던 중요 작업은 망각한다. 그 작업은 바로 범주를 판단 형식으로 전환한 것이다. 칸트의 위대한 작업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범주를 처음으로 주목한 아리스토텔레스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범주는 사물이 아니라 언어를 분류하는 최고의 유다. 그는 언어를 주어에 해당하는 것과 술어에 해당하는 것들을 구분한 최초의 언어학자다. 그런데 일파만파라 하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 개념을 언급하다 보니,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으로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어에 해당하는 것으로 규정한 개념이다. 그 개념의 핵심은 “주어 속에 있지도 않고 동시에 주어의 술어가 되지도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주어에 해당할 수 있는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라고 하였다. 여기서 실체[Substance]는 주어[Subject]와 같은 의미가 된다. 그런데 제1 실체인 개체는 이 규정에 적합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또 하나의 주어에 해당하는 또 하나의 것으로 규정한 종적 본성, 즉 제2 실체는 그 자신이 술어가 될 수 있으므로, 이 규정을 위배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잘 알지 못하니 범주론 다음에 형이상학을 쓴 것인지 아닌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문제의식에서 따져 본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의 주요 문제 중의 하나는 이 범주론에서 실체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
형이상학에서 주요 문제의식은 왜 술어가 될 수 있는 종적 본성(예를 들어 사람이나 개 등)이 실체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라는 개념을 주어에 해당하는 것이라는 개념과 달리 규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2)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대부분 논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종적 본성과 단순한 보편자(또는 이데아)를 구분해서 전자는 실체로 반면 후자는 실체가 아니라고 했다는 점에, 그런 점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필자가 알고 싶은 것은 형이상학에서 실체를 어떻게 규정했는가인데, 유감스럽게도 필자는 알고 싶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다행히도 김덕천의 논문에서 필자가 기대하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논문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에 나타난 실체 개념의 개별성 문제― 형이상학Ζ를 중심으로 ―>(카톨릭 철학, 7호)이다. 여기서 김덕천은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에서는 종적 본성이 오히려 더 근원적인 실체라고 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범주론의 제1 실체와 대비를 이루는 형이상학의 제1 실체로서, 존재의 구조학‧원인론‧발생학에 있어서의, 보편학과 지식에 있어서의 근본개념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보다 구체적으로는 플라톤의 이데아들과는 달리 개별 실체 속에 내재한, 개별 실체와 다름이 없는, 개별 실체의 자체적(kath’hauto) 원인이 되는 주체의 구성원리를 가리키는 것이었다.”(가톨릭 철학, 7호, 428쪽)
즉 개별 실체의 통일성을 유지해 주는 내적인 구성원리가 곧 종적 본성이라는 것이다. 조대호 교수가 번역한 『형이상학』(나남, 2012)에 관련 구절은 다음과 같다.
“어떤 것으로 이루어진 합성체는 그 전부가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어서 더미와 같은 상태가 아니라 음절과 같은 상태로 있다. … 결과적으로 합성체에 대해서 살이나 음절에 대해 말한 것과 동일한 논변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곧 본성을 말한다] 요소가 아닌 어떤 것이며 바로 그것이 이것을 살이게 하고 이것을 음절이게 하는 원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 다른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각자의 실체이다.”(345쪽, 1041b 11-29)
조대호 교수는 주에서 이 구절에서 말한 그것을 “하나의 통일된 전체를 만들어주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라고 주장한다.(『형이상학』, 346쪽 주 250) 이어서 주 251에서 그는 “있음의 첫째 원인은 특정한 질료가 종적인 규정성을 가진 어떤 개별자로 있게 만들어주는 원인을 가리킨다”(『형이상학』, 346쪽)라고 말한다. 여기서 종적 규정성을 가진 개별자라만 아리스토텔레스를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원인을 말할 것이다.
이런 문제와 관련해서 또 하나의 관련 구절을 찾아볼 수 있다.
“본성도 있는 어떤 것과 마찬가지로 즉시 하나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 가운데 어떤 것을 하나이게 만드는 원인이나 있는 것의 한 부류를 하나이게 만드는 원인이 달리 어디에도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 각각은 직접적으로 있는 것이자 하나인 것일 뿐, 있는 것이나 하나를 유로 삼아 그것 안에 있지도 않고 개별적인 것들과 떨어져서 분리 가능한 것으로서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형이상학』, 367쪽, 1045b5-9)
이 두 구절에서 김덕천이 지적한 것처럼 소위 종적 본성은 개체를 하나로, 통일하는 원리로 규정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종적 본성이 실체로 규정된다는 것이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274쪽 1029a5-10에서 실체가 기체[基體]에 대해 술어가 되지 않지만 다른 것들은 그것에 대해 술어가 되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점을 언급한다. 그 핵심 이유는 그렇게 보면 “질료가 실체가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신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형이상학에서 제시한다. 276쪽, 1029a30을 보면, 이제 “‘분리 가능성’과 ‘이것’은 주로 실체에 속한다”고 말한다. 즉 개체를 다른 개체로부터 분리하여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 곧 실체라는 것이다.
어떤 개체가 다른 것과 분리하여 개체로 존재하려면, 개체 자신은 내적인 통일성을 지녀야 한다. 그러므로 분리 가능성이라는 규정은 곧 통일성, 하나라는 규정과 상통하니, 이것을 통해 『형이상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체라는 규정 자체를 바꾸었음을 충분히 짐작하게 된다.
3)
종적 본성을 이처럼 개체를 통일시키는 구성원리로 이해하게 된다면, 개체가 ‘분리 가능하며’ ‘이것’이 된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통일적 구성원리는 개체를 하나로 즉 단일한 개체로 만들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체의 규정은 오래전부터 타자에 의존하지 않고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란 규정이 들어 있다. 그것은 개체이면서 동시에 자립적으로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기에 범주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를 주어가 되는 것으로 규정한 것이 아닐까? 자립적으로 있는 것이기에 그것은 술어가 아니라 주어가 될 수 있다. 종적 본성은 개체를 하나로 만드는 것이면서 동시에 있는 것, 자립적으로 있는 것의 원인이 될 수 있을까?
위에서 인용된 형이상학의 구절 가운데 두 번째 구절 즉 1045b5-9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나임과 있음을 등치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밑줄 그은 부분) 하나란 곧 내적인 통일을 의미하는데 그것이 어떻게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될까?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해 보자. 어떤 것이 내적으로 분열된다면, 그것은 소멸할 수밖에 없다. 분열은 다시 분열을 낳고 그 끝에 가서는 무규정적인 어떤 것 즉 무로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어떤 것을 내적으로 통일한다면, 그것은 소멸에 대립하면서 자기를 지속하는 것이 될 수 있고 이런 지속성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 될 것이다. 거꾸로 말해 어떤 것이 존재하려면 내적으로 통일하는 원리가 계속 힘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나임, 내적 통일성과 존재 또는 지속성(자기 동일성)은 서로 공속하는 개념이니, 종적 본성이 개체를 내적으로 통일하는 구성원리가 된다면, 그 종적 본성은 개체를 지속적으로 또는 자기 동일적으로 존재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종적 본성은 개체를 실체로 만들어주는 원리가 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종적 본성이 개체를 실체로 만드는 원리라는 점은 충분히 이해하더라도, 그것은 종적 본성 자체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라는 말은 아니지 않는가? 이것은 범주론에서 종적 본성이 독자적 실체 즉 제2 실체라는 주장과 어긋나지 않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론에서와 달리 형이상학에서 제2 실체라는 개념을 포기하고 만 것이 아닐까? 사실 개체로서 아리스토텔레스나 이 소나 이 말이 실체라는 점은 상식적으로 쉽게 이해되지만 사람 자체, 소 일반, 말의 본성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은가? 아무도 그런 존재를 본 적은 없다.
조대호 교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보편자 이론>이라는 논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자가 실체가 되지 못한다고 단정했다고 한다. 물론 조대호 교수는 보편자와 종적 본성을 구별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부정한 것은 단지 보편자가 실체가 아니라는 주장일 뿐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보편자가 실체가 되지 못하는 이유로 거론한 것 모두가 종적 본성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밖에 없다. 종적 본성 역시 보편자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형이상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종적 본성이 개체를 실체로 만드는 원리라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종적 본성 자체가 독자적인 실체라고 주장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아리스토텔레스가 보편자가 실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첫 번째 이유를 들어보자.
“왜냐하면, 보편적으로 일컬어지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도 실체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첫째로 각자의 실체는 각 대상에 고유하고 다른 것에 속하지 않지만, 보편자는 공통적이기 때문인데, 그 본성상 여럿에 속하는 것을 일컬어 보편자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것의 실체이겠는가? 모든 것의 실체이거나 아무것의 실체도 아닐 터인데 모든 것의 실체일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이 어느 것 하나의 실체라면 다른 것들도 그것과 똑같을 것인데 그 까닭은 그것들의 실체가 하나이고 본성도 하나인 것들이 있다면, 그것들 역시 하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기체에 대해 술어가 되지 않은 것이 실체라고 불리지만, 보편자는 항상 어떤 기체에 대한 술어가 된다.”(『형이상학』, 328쪽, 1038b8-11)
조대호 교수의 주장과 달리 형이상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종적 본성에 실체로서의 자격을 부여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마땅하지 않을까? 그러나 지금까지 이야기에서 이 지점에 이르러 대반전이 일어난다.
4)
실체는 통일성의 원리이고 개체를 존재하게 한다고 했을 때, 이때 존재는 단순한 현존은 아니다. 그것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것이다. 이런 시간적 변화는 존재를 무로 전락시킨다. 실체는 통일성의 원리로 분열을 막고 개체를 지속하게 만든다. 여기서 지속성은 곧 시간적인 자기 동일성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렇게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일까? 엄밀하게 개체 자체가 지속하지는 못한다. 개체는 종적 본성과 더불어 많은 우연적 성질을 담지하고 있다. 이 우연성은 시시각각 변화하다. 개체가 지속적으로 존재한다고 할 때 여기서 지속하는 것은 다름 아닌 종적 본성이다. 실체는 우연적 개체가 아니라 개체의 종적 본성 자체이다.
물체를 예로 들어보자. 물체는 고정불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소멸 중에 있다. 그러나 일정한 시간 속에서 물체의 고유한 구조는 계속 유지되니, 시간적 지속하는 것은 그 물체의 본성이다.
사람을 예로 들어보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속적으로 존재할 때 사실 우연적 속성을 담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개체성이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종적 본성이 단순히 개체로서 아리스토텔레스 당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대를 뛰어넘어서 지속적으로 존재한다. 여기서 지속하는 것이 바로 종적 본성이 된다.
본성 또는 종적 본성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주장을 의미하게 하는 이유는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 존재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종적 본성은 개체를 통해서 존재할 뿐이다. 개체란 본성 또는 종적 본성이 존재하는 시간적 현존일 뿐이다. 개체를 징검다리로 해서 종적 본성은 실제로 존재한다. 눈에 보이는 것은 우연적 성질을 담은 개체이지만, 지속하는 것은 개체의 종적 본성이고, 그것이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본성과 보편자를 구분하는 길도 여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단순한 보편자는 사물의 필연적 속성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 사물을 지속하게 하는 힘은 없다. 그러나 본성이나 종적 본성은(양자의 차이는 시간성의 차이일 뿐인데) 통일의 원리가 되면서 자기를 지속하게 하는 힘을 지닌다. 거꾸로 수많은 보편자 가운데 이처럼 어떤 것을 지속하게 하는 힘을 지닌 것만이 비로소 본성 또는 종적 본성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런 지속적 존재, 자기 동일성으로서 실체라는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속에서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필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전에서 이런 실체 개념의 전거를 발견할 능력이 없다. 그러나 위의 인용 구절에서 간접적으로 그런 실체 개념을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다시 위의 인용 구절에서 밑줄 그은 부분을 보자.
“그것이 어느 것 하나의 실체라면 다른 것들도 그것과 똑같을 것인데 그 까닭은 그것들의 실체가 하나이고 본성도 하나인 것들이 있다면, 그것들 역시 하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로서는 해석하기 난감한 부분인데, 그 의미를 이렇게 새겨볼 수 있지 않을까? 보편자는 a, b, c.. 등의 개체에 공통적으로 속한다. 이 보편자가 실체라면, a, b, c 등을 통해 지속한다. a, b, c 등은 우연적 차이만 지닐 뿐 서로 동일한 것이 된다. 그런데 단순히 보편자인 경우, 그것은 a, b, c 에 공통적으로 속하지만, 이것들은 서로 다른 물체이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물체에 속하는 보편자가 실체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흰색은 백합꽃이나 설탕, 그리고 눈에 공통적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서로 다른 물체이니, 흰색은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론에서 제2 실체였던 종적 본성을 형이상학에서 진정한 실체로 격상한 것이 아니었을까? 조대호 교수 자신도 비록 그 자신은 긍정하지 않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자 가운데 “범주론에서 둘째 실체로 일컬어졌던 종은 오히려 형이상학에 이르러 첫째 실체의 지위를 얻는다고 주장”(조대호, <아리스토텔레스의 보편자 이론>, 443쪽)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5)
이제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 개념을 정리해 보자. 실체는 곧 통일성의 원리를 가지고 있어서 그 자신을 존재하게 한다. 이때 존재는 단순한 현존을 넘어서 지속적으로 자기 동일성을 유지한다는 의미가 된다. 어떤 것은 지속성을 지니므로 실체가 된다. 지속성을 지니지 못하는 것은 실체가 되지 못한다.
물체의 수준에서 그 본성은 오래가지 못한다. 여기서 실체는 약화된 실체이다. 그러나 생물체에 이르면 세대를 넘어 자기를 지속하니, 더 완전한 실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