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단상(斷想)-2 [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죽음에 대한 단상(斷想)-2 [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3.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리저리 떨어질 이파리처럼 같은 가지에 났어도 가는 곳을 모르겠구나”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고 나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통해 별로 다르지 않다. 모든 종교는 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고, 사후 세계에 대한 해답을 구하려는 데서 탄생한다. 모든 예술은 이 죽음과 관련된 여러 의식을 미학화하고 예술적으로 표현하려는 데서 탄생한다. 이런 문제의식에서는 철학도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철학은 종교나 예술과 다르게 합리적 언어로 서술하고 논증하려 할 뿐이다. 고대 문헌들 가운데 이 죽음과 관련해 빼어난 성찰을 보여주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플라톤의 『파이돈』이라는 작품이다. 초기 플라톤의 작품은 대부분이 스승 소크라테스의 행적과 관련되어 있다. 청년들의 정신을 타락시키고 신을 모독한다는 죄로 고발을 당한 소크라테스가 법정으로 가다가 제사장 에우튀프론을 만난다. 아버지를 살인범으로 고소하러 가는 그와 경건과 불경의 문제를 토론한 작품이 『에우튀프론』이다.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가 배심원인 아테네 시민들을 향해 자신의 행위를 변호하는 내용을 담은 작품이 『변명』이다. 빌어도 시원찮을 소크라테스는 도리어 아테네 시민들을 향해 당신들의 영혼을 살피라고 충고한다. 괘씸죄까지 더해져 사형선고를 받은 소크라테스가 감옥에 갇힌다. 당시 감옥의 소크라테스는 바로 사형을 당하지는 않는다. 외국으로 나간 아테네의 배가 들어올 때까지 사형선고를 유예 받는다. 이때 돈 많은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인 크리톤이 소크라테스를 감옥에서 탈출시켜 외국으로 망명시키려고 소크라테스와 논쟁을 벌인다. 여기서 잘못 알려진 ‘악법도 법이다’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작품이 『크리톤』이다. 그런데 사형을 받기 바로 전날 밤에 마지막으로 파이돈이 스승을 설득하러 들어갔다가 나눈 대화가 ‘죽음’에 관한 유명한 작품인 『파이돈』이다.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인간의 영혼이 무엇이고, 이 영혼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자못 날카로운 논증을 통해 설명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살 이유가 아니라 죽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 몇 가지를 적어보자.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다.”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다.”

 

영혼과 육체는 본래 다른 존재이다. 정신과 육체를 별개로 보는 이원론의 시작이다. 영혼은 비물질적이고 단일하고 죽지 않는 것이다. 복합물이 아니기 때문에 나누어지지 않으며, 파괴되지도 않기 때문에 영원히 죽지도 않는다. 육체는 그 정반대이다. 육체는 물질적이고 복합적이기 때문에 생멸을 반복한다. 플라톤의 『공화국』에 등장하는 ‘에르(Er)의 신화’를 보면 영혼은 본래 이데아의 세계에 거주한다. 이 영혼이 이승으로 넘어오면서 망각(레테Lethe))의 강물을 마시면서 이데아의 세계의 기억을 상실하고 육체의 감옥에 갇히는 것이다. 플라톤을 거부하는 현대의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은 그를 패러디해서 정 반대로 표현한다. “영혼이 육체의 감옥이라고”. 육체의 감옥에 갇힌 영혼은 빠삐용처럼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한다. 그 때 도와주는 것이 철학이다. 때문에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다.” 이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다. 육체가 죽을 때 비로소 영혼은 자유로워지고, 자신의 본래 고향인 이데아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플라톤의 생각은 얼마나 기독교적인가? 이 철학의 수업을 받은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 플라톤 철학이 기독교를 그리스에 전파하는데 어울린다고 본다. 아우구스투스는 플라톤의 이원론을 따라 ‘신의 나라’와 ‘인간의 나라’의 두 세계로 나누는 기독교의 역사철학을 정립한다. 기독교의 몸을 빌린 플라톤의 철학이 중세 천년을 지배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감옥으로부터 탈출시키려고 온 파이돈 앞에서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자신이 감옥을 나갈 수 없는 이유, 그리고 결연히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득한다. 그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난 해방이고, 이데아의 세계로 들어가는 영원한 자유의 시작이다. 이보다 더 큰 확신이 있을까? 이처럼 강한 신념을 가진 사람을 어떻게 탈옥을 시킨단 말인가? 몽매한 제자들은 그저 이 뛰어난 스승의 말에 설득당하고 감복할 뿐이다. 하지만 치밀하고도 논리적으로 설명하던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말을 놓치지 말 일이다. “나도 그 세계를 직접 가본 것이 아니라 전해들은 것이네, 그래서 꼭 내 말과 같지 않을 수도 있다네…이렇게 믿는 것은 하나의 모험이라 하겠으나, 그 모험은 아름다운 것일세”(플라톤, 『파이돈』) 그렇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직접 경험한 바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신화를 전달한 것이고, 다만 그 신화가 그럴 듯해서 그것이 옳다고 확신한 것이며, 이러한 확신이 강해질수록 더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 아닌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모든 이야기, 신화와 설화, 종교와 이성의 논증 등은 다만 이러한 완벽한 무지에 기초해 있을 뿐이다. 그 세계는 우리가 경험한 것도 아니고, 합리적으로 논증이 가능한 것도 아니다. 이렇게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것이 어디 죽음뿐이겠는가? 영혼은 어떻고, 세계의 유무한성은 또 어떤가?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창조주라고 하는 신의 존재는 또 어떤가? 많은 신학자와 철학자들이 신 존재 증명을 둘러싸고 무수한 논쟁을 벌였지만, 어떻게 보면 그런 논쟁은 사상누각에 불가할 뿐이다. 근대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데카르트 조차 이런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애쓴다. 사유하는 자아(코기토)를 새로운 세계의 원리로 정립했지만, 여전히 이 자아를 보증서줄 절대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의 유명한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이 나온다. 신은 개념상 완전한 존재이고, 완전하기 때문에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 의 ‘합리적 심리학’에서 제시한 신 존재 증명 비판은 그런 논증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함을 밝힌다. 관념 속의 백 탈러(당시 독일 화폐)와 실제 내 호주머니 속의 백 탈러는 다르다. 관념 속의 신은 현실 속의 신이 아니라고. 존재는 신이라는 완전성의 개념에 속하는 술어가 아니라고.

 

이런 오래된 형이상학적 문제들의 약점은 경험적으로 검증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학이 발달하고 실증주의적 세계관이 비등할 때, 형이상학의 존재는 끊임없이 위협을 당한다. 근대 경험론의 유명한 회의주의자는 신학과 형이상학에 관련된 모든 책들은 백해무익하므로 불쏘시개로나 쓰라고 독설을 퍼붓는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는 먼 옛날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랜 철학의 문제들을 해결했다고 자처한 20세기 비엔나 서클(Vienna Circle)의 논리실증주의자들에 따르면, 세상에는 두 가지의 명제만이 있다. 하나는 의미 있는(meaningful) 명제이고, 다른 하나는 의미 없는(meaningless) 명제이다. 무엇이 의미 있는 명제인가? 경험적으로 검증이 가능한 명제와 참과 거짓이 확실한 논리적인 명제가 그렇다.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이다.”는 명제가 전자에 해당되고, “3*5=12”라는 명제는 후자에 해당된다. 전자는 참인 명제이고, 후자는 거짓 명제이다. 이와 다르게 경험적으로 검증도 안 되고, 논리적이지도 않은 명제는 무의미한 명제이다. 가치와 관련된 도덕 명제나 검증이 불가능한 영혼의 불사나 신의 존재와 같은 형이상학적 명제와 신학적 명제는 무의미한 명제이다. 따라서 이러한 명제들은 그저 ‘개소리’나 다름없이 무의미한 명제이다. 그들은 이런 ‘검증이론’(Verification theory)을 가지고 철학의 오랜 아포리아들을 해결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철학은 이제 종언을 고해야 하는가? 철학은 그들의 도발적인 주장 이래로 더 이상 그런 형이상학적 문제들에 관심을 갖지 않는가? 과학이 발달하면 영혼에 관한 오랜 갈증이 해소되고, 신에 관한 물음을 더는 하지 않는가? 이런 말만 덧붙이겠다. 비엔나 서클의 수장인 모리츠 슐릭은 강의를 하다가 학생의 권총을 맞아 죽고, 그 서클 멤버들도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고. 개를 오래 키워 본 경험으로는 개소리에도 미세한 변별이 있고, 그 차이에 무수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

 

4. “아, 극락세계에서 만날 나는 도를 닦고 기다리겠노라.” 월명은 죽은 누이와 극락세계에서 만날 것을 기약한다. 착한 누이가 선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당연히 극락왕생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때문에 자신도 선한 삶을 살고자 도를 닦고, 다시 만날 그날을 기다리겠다고 한다. 죽음은 그냥 죽음에서 그치지 않는다. 사후의 세계에서의 보상과 징벌의 문제는 이승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죽음은 곧 삶의 문제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왜 우리는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는가? 이런 생각의 밑바탕에는 숨은 전제가 있다.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 이는 받아야 한다는 당위가 아니라 받는다는 사실의 문제이다.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이 불공평하고 부 정의한 세상에서 그나마 살아갈 수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과연 그것은 사실 명제인가? 그것은 소망에 불과하지 않은가? 착하게 사는 사람이 과연 상을 받고, 나쁘게 사는 사람이 과연 벌을 받고 있는가? 하지만 잠시 눈을 돌려 세상을 냉정하게 있는 그대로 보라. 과연 그런가고. 오히려 이기적이고 사람들을 이용하려 들고 나쁜 짓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더 잘 살고, 권력이나 사회적 지위도 누리고 그러지 않는가? 착한 사람들은 그저 멍청하게 당하기만 하고 어렵게 살고 있지 않는가? 이런 현실 속에서 착하게 살라고?

 

『사기열전』을 쓴 중국의 유명한 사마천은 그 책을 이런 물음으로 시작한다. “과연 하늘에 道가 있는가?” 백이와 숙제는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수양산으로 들어간 충절의 정치인이다. 그들은 주나라의 무왕이 통치하는 곳에서 나는 어떤 것도 먹을 수 없다고 하면서 결국은 굶어 죽었다. 양심과 절개를 지킨 사람들의 말로는 비참하게도 굶어 죽은 것뿐이다. 반면 유명한 악인 도척은 온갖 악행을 일삼고도 부귀영화를 누리고 무병장수까지 한다. 그는 사람의 생간을 매일같이 먹었다고 한다. 얼마나 악인이면 공자까지 그를 교화하러 들어갔다가 손을 내두르고 물러날 정도이다. 『장자』의 잡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물론 사실은 아니고, 다만 유가를 패러디하기 위해 노장(老莊) 쪽에서 만든 이야기이리라. 사마천은 선인과 악인을 이렇게 극명하게 대비시키면서 과연 하늘에 도가 있는 가고 묻는다. 만일 도가 있다면 당연히 선인은 상을 받고 악인은 벌을 받아야 하는데 현실 세계에서는 정반대의 상황이 더 빈발하지 않는가? 그러니 다시 한 번 묻는다. 과연 하늘에 도가 있는가? 이런 물음을 던진 사마천의 내력이 있다. 그는 이릉(李陵) 장군이 흉노와의 전쟁에서 중과부적으로 패배한 사건에서 이릉을 변호하다 무제(武帝)의 노여움을 사서 남자로선 치명적인 거세의 궁형(宮刑)을 받게 된 것이다. 사실 다른 대신들처럼 비겁하게 이릉의 등에 비난의 화살을 쏘았다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너무나 솔직하게도 진실과 소신을 지킨 것이고, 그 대가는 너무도 비참했다. 그런 참담을 견디지 못해 자살까지 하려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그 억울함을 누대에 남은 명저 『사기』를 쓰는 일로 대신한 것이다. 때문에 그가 이 『사기열전』을 시작하면서 던진 물음은 너무나 절실한 윤리적 물음이다. “과연 하늘에 道가 있는가?” 과연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아야 하는가? 하지만 이것은 당위이고 요청이다. 적어도 선하게 살아야 한다면 그 의미는 무엇인가? 왜 우리는 도덕적으로 착하게 살아야 하는가?

 

이것은 오래 된 물음이다.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숱한 종교와 철학이 등장한다. 불교는 인과응보를 이야기한다. 선인선과고 악인악과라는 것이다. 선하게 살면 복을 받고, 악하게 살면 벌을 받는다고 한다. 금생의 복이 없다면, 그것은 전생에 나쁜 업을 지었기 때문이다. 내생의 복은 금생의 선업을 쌓을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해야 한다고 불교는 가르친다. 이 인과응보론이 교조화되면 현실 합리화의 논리로 변질될 수도 있다. 다 과거의 인연이고 업보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는 여자로 태어난 것,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것, 가난한 것 등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닐까? 극락과 연옥, 천국과 지옥은 악을 행하지 말고, 선을 행하도록 유도한다. 선한 자가 복을 받고, 악한 자가 벌을 받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사후 세계의 심판을 이용한 징벌과 보상이다. 하지만 사후 세계나 심판자의 존재를 입증할 수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더구나 그것은 공포와 두려움을 이용한 타율적 강제이다. 이런 공포와 강제가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충분한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도덕이란 무엇인가? 도덕적 행위란 단지 연민과 동정심으로 행하는 행동인가? 이런 감정을 갖고 선한 행동을 하는 경우도 많다. 루소나 흄과 같은 근대의 많은 계몽 사상가들은 이런 동정심을 통해 가난한 자와 병약한 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공리주의자들은 보다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증진시킨다면 그것이 도덕적이고 선하다고 말한다. 행위의 동기와 상관없이 좋은 결과만 있으면 도덕적이며 선하다고 보는 것이다. ‘돼지의 쾌락’이라 비난 받는 면이 없지 않지만, 공리주의자들의 견해는 사회 정책적 차원에서 사회를 개량하고 개선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다. 칸트는 이런 접근과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 무엇이 도덕적이고, 왜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하는가?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짐승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길이다. 개가 도덕적으로 행동하는가? 묵묵히 그리고 열심히 일한 소를 도덕적이라고 하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동물들의 행위를 도덕적 행위라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덕은 인간에게 고유한 행위가 아닐까? 인간의 행위 중에서 동물의 행위와 비슷한 행위를 제한다면 도덕적 행위가 남지 않을까? 무엇이 동물의 행위이고, 무엇이 인간의 행위인가? 애완동물을 키워 본 사람은 알겠지만 동물도 감정이 있다. 어떤 때는 인간보다 더 정서적으로 반응을 잘 한다. 이런 감정은 항상 그 감정을 유발한 원인이 있다. 기쁘게 하는 것, 슬프게 하는 것, 화가 나게 하는 것, 사랑하게 하는 것 등 모두가 어떤 원인이 있어 그것에 대한 반응이 나타나고, 그 각각에 대응하는 감정이 나타난다. 이런 감정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인간이나 동물이나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감정은 원인과 결과의 고리에 갇혀 있다. 편의상 우리는 이것을 ‘~때문’(because of)의 산물이라고 하자. 인간은 항상 ~ 때문에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을 가지며, 동물도 그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칸트는 숭고한 도덕을 이런 동물적 감정에 정초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감정은 비루하고 비천하기 때문이다. 도덕은 자유로운 존재의 자유로운 행위에 기초해 있다. 타율적 강제나 외부의 공포 때문에 선한 행동을 한다고 하면 그것은 노예의 도덕일 뿐이다. 나중에 니체는 원한(르쌍티망) 감정으로 타자를 부정하는 행위를 ‘노예의 도덕’으로 보고,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고귀한 도덕을 ‘주인의 도덕’으로 본다. 그리스의 자유인들에게는 자기를 긍정하고 자기 안에 목적을 갖는 행위가 정치적 실천(Praxis)이다. 정치는 자유인들만의 활동이다. 반면 타자를 위해 봉사하고 행위의 목적을 타자에게 두는 것은 비천한 여성이나 노예가 담당하는 노동(Arbeit)이다. 이점에서 칸트가 생각하는 도덕은 자유의지를 가진 자의 덕목이다. 자유인의 도덕적 행위는 외부의 원인에 종속되거나 타율적 강제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자신 안에 행위의 동기를 가지는 행위이다. 편의상 이런 행위를 ‘~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의 행위라고 하자.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손해가 남에도 불구하고, 힘듦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착한 마음으로 착한 행동을 하는 것, 그것만이 도덕적이라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보자. 밤에 산을 넘던 사마리아 장사꾼은 강도의 피해를 입고 신음하는 사람을 만난다. 생각해보라. 얼마나 무섭고 떨리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갖는 두려움과 떨림은 모든 생명체의 자연스런 보호 본능이자 감정이다. 당연히 도망가고 싶을 것이다. 합리적(이성적)으로 생각을 해도 마찬가지이다. 산속에서 이런 피해를 받았다고 한다면 그 또한 똑 같은 피해를 당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할 수 있다. 강도는 주변에서 똑같이 노릴 가능성이 클 것이다. 그래서 감정적인 반응이나 이성적인 계산은 똑 같이 이유(~ 때문에)를 들어 빨리 도망가라고 권유한다. 하지만 사마리아 인의 착한 마음(선의지)은 이런 이유를 넘어선다. 그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강도를 당할 수 있다는 합리적 판단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부상당한 사람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도덕의 뿌리는 감성이나 이성이 아닌, 전사들의 용기와 같은 의지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적 인간은 순응하는 인간이 아닌 용감한 인간이다. 그렇다. 도덕이란 이런 선의지에 기초해 있다. “이 세계에서 또는 도대체가 이 세계 밖에서까지라도 아무런 제한 없이 선하다고 생각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선의지뿐이다.”(칸트, 『윤리형이상학기초』) 그것은 감정도 아니고 결과에 대한 고려나 계산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자유로운 의지를 가진 인간의 착한 마음일 뿐이다.

 

그러므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왜 우리는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하는가?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고 선의지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선의지는 의무감이다. 의무란 무엇인가? 의무란 법칙에 대한 존경으로 말미암은 행위의 필연성이며, 도덕은 이런 선의지에 기초해 있다. 마땅히 법칙에 따르는 행위, ‘마땅히 ~해야 한다’의 명령에 따르는 행위이다. 하지만 이 명령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타율적 명령이 아니다. 자유로운 인간 스스로 부여한 규범이자 명령, 곧 자기 입법이고 자율(autonorm)이다. 때문에 이런 도덕법칙을 따를 때 그는 비로소 자유롭다. 자유로운 인격의 왕국에 거주하는 인간이 따르는 보편적 도덕 법칙이 칸트가 말하는 ‘정언명령’이다. “마치 너의 행위의 (주관적) 준칙(maxim)이 너의 의지를 통해서 보편적인 자연법칙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행위 하라.” “너의 인격에 있어서나 어떤 다른 사람의 인격에 있어서나 인격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취급하고, 단지 수단으로서 만은 결코 사용하지 않도록 행위 하라.”(칸트, 『실천이성비판』)

 

이런 칸트의 생각이 너무 추상적이고 이상적으로 보이는가? 도덕적으로 행동하려 하다 보면 늘 손해를 볼 뿐이고, 결국 선인보다 악인이 득세하는 세상이 되지 않겠는가? 그렇다. 칸트는 결과의 유 불리를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까닭은 우리가 인간이므로, 우리가 자유로운 존재이므로, 우리가 선의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가 비도덕적으로 행동할 이유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땅히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그러므로 도덕적 행동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선의지의 선택은 비도덕적으로 행동할 무수히 많은 이유와 유혹에도 불구하고, 또 그 모든 것을 무릅쓰고 이루어지는 힘든 인간적 선택이라 할 수 있다. 도덕적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그런 힘든 선택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치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을 무리치는 예수처럼, 오직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왕궁의 호사로운 삶을 박차고 나간 석가처럼,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알아주지 않아도 화를 내지 않는 공자처럼 사는 것이다. 평범한 우리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리한 요구인가? 그렇지 않다. 마땅히 도덕 법칙에 따라 살아가려는 인간은 이미 성인의 반열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개가 아니다. 인간은 소가 아니다. 인간은 이미 성인(聖人)이다. 이런 성인을 어떻게 이기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겠는가? 인간은 그 자체가 목적이고, 우리는 이런 인간들의 ‘목적의 왕국’에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의 모든 위대한 종교는 이런 인간들 속에 감추어진 신성(神聖)을 끊임없이 일깨운다. 당신이 이미 부처라고, 인간이 곧 하늘이라고.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어떠한가? 그 세계 안에 거주하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어떠한가? 그 세계에서 목적으로 대접받는가, 혹은 수단과 소모품으로 취급되는가?

 

죽음은 모든 것을 무화하는 절대 부정이다. 그래서 죽음은 슬프고, 고통스럽고, 모든 것과 단절되는 두려움이다. 이 생사의 문제 앞에서는 다른 어떤 문제도 가볍다. 부귀와 권력도 이 앞에서는 한 없이 무력해진다. 성서의 온갖 이야기, 팔만 사천의 법문조차 이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한낱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다. 인간 문명이 쌓아 올린 온갖 지식과 기술, 그리고 과학조차 이 절대 부정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죽음의 슬픔과 고통, 그리고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지 못한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우리를 생각의 극단으로 끌고 간다. 죽음은 삶의 무게조차 사소하게 만든다. 죽음 앞에 서면 우리는 삶을 더 진지하게 성찰하게 된다. 과연 어떤 삶이 의미가 있는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장례식장을 다녀오면서 생각한 죽음에 대한 단상은 끝이 없는 것 같다. 다시 한 번 월명사의 제망매가를 읽어보자. 어떻게 다가오는가?

 

生死路隱 죽고 사는 길이

예 이샤매 저히고 이 세상에 있으므로 두려운데

나는 가나다 말도 나는 간다는 말도

못 다 니르고 가나닛고 못다 하고 가버렸느냐

어느 가을 이른 바라매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떨어질 닙다이 이리저리 떨어질 잎처럼

한 가재 나고 같은 가지에 났어도

가논 곧 모다온뎌 가는 곳을 모르겠구나

아으 彌陀刹애 맛보올 내 아아! 극락에서 만날 나는

道 닷가 기드리고다 도를 닦으며 기다리겠노라.

<끝>

 

죽음에 대한 단상(斷想)-1?[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죽음에 대한 단상(斷想)-1?[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나이를 먹을수록 자주 가는 곳이 있다. 하나는 결혼식장이고, 다른 하나는 장례식장이다. 젊은 시절에는 친구들 결혼식장을 다녔지만, 이제는 친구 자녀들의 결혼식장이다. 결혼식장은 선남 선녀가 사랑을 다짐하면서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함께 하는 자리이니까 보는 사람도 즐겁다. 젊었을 때는 나도 그런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즐거웠고, 나이를 먹어서는 나도 저런 사랑과 결혼을 한 시절이 있었구나 하는 추억을 되돌릴 수 있어 기쁘다. 하지만 장례 식장을 다녀올 때는 마음이 무겁다. 축하해주러 가는 길이 아니라 슬픔을 위로하고 함께 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아직은 그래도 부모님 연배의 죽음을 슬퍼해주는 경우가 많지만, 드물지만 주변 친구들이나 그 부인의 죽음을 함께 슬퍼해주고 위로해주는 경우도 있다. 더구나 자식 세대들의 죽음을 대할 때는 그 아픔이 더 크다. 부모가 죽으면 청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도 있듯, 그런 고통은 참으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몇 년 전 친동생의 딸이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을 때, 올 해 친구의 다 큰 아들의 죽음을 대했을 때는 그 고통을 그대로 느낄 수 없는 것이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참으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깝게 지내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내 곁을 떠났다는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중학교 시절부터 아주 최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얼굴들, 오래 전이어서 이제는 그 얼굴도 잘 떠오르지 않는 사람들…부모의 죽음, 세월호의 죽음들… 아, 생명은 이렇게 죽을 밖에 없는 것인가? 일전에 대학 동기의 모친상을 다녀오고서 잠시 잊고 있었던 죽음을 생각해본다.
 
오래 전 고등학교를 다닐 때 암송하던 시 <제망매가>이다.
 
죽고 사는 길이
이 세상에 있으므로 두려운데
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 하고 가버렸느냐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리저리 떨어질 이파리처럼
같은 가지에 났어도
가는 곳을 모르겠구나
아, 극락세계에서 만날 나는
도를 닦으며 기다리겠노라
(월명사, 제망매가)
 
그 당시는 별 생각 없이 외웠지만 지금 다시 보니 죽음에 관한 성찰이 다 담겨 있는 것 같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예고 없이 찾아오는 죽음의 우발성, 가을바람에 나부끼는 이파리 같은 생명의 유한성, 태어난 곳은 하나이고 분명해도, 죽고 난 후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사후의 세계는 과연 있는 것인가? 죽음 이후에 대한 인간 지식의 완벽한 무지, 죽음 이후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극락과 천국에서의 만남을 위해 도를 닦고 선을 행하겠다는 윤리적 결단,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 극락정토는 있는 것일까? 죽음은 삶에 대해 어떤 의미를 갖는가? 등…이 짧은 시 안에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죽음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닌가? 한 배에서 태어난 누이가 먼저 간 것을 슬퍼하며 쓴 시이지만 어찌 이것이 오누이만의 사별에 한정될 수 있겠는가?
 

1. “죽고 사는 길이 이 세상에 있으므로 두려운데”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어두운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사람들의 통속적인 생각을 넘어선다. 만물이 유전한다는 그의 철학은 변증법의 시작을 알린다. 그의 잠언은 이렇다. “삶은 죽음이다.” “시작은 끝이다.” 만물의 시작에서 종말을 이야기하고, 생명의 탄생에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이 어두운 철학자의 말을 사람들이 깨닫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죽음은 삶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삶이 없다면 죽음도 없는 것이고, 시작이 없다면 끝도 있을 수 없다.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지만 우리는 오직 사물의 한 면만을 보려고 한다. 탄생과 소멸, 만물의 끊임없는 변화를 그는 타오르는 불의 이미지로 묘사한다. 불교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지혜를 더 깊게 해준다. 불교의 가장 기본 철학인 사성제(四聖諦)는 고(苦)에서 시작한다. 고는 어디서 오는가? 생명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모든 생명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데서 고통이 시작되는 것이다. 생명이 탄생하면서 이 생명을 지속하기 위해 먹어야 되고, 먹기 위해서 일해야 되고, 이 몸이 힘들다 보면 병도 생기는 것이 아닌가? 그러다 보면 결국 이 생명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본다면 모든 고통은 이 몸을 타고 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이런 자연법칙과 같은 필연성을 우리는 종종 잊고 사물의 한 면만 보는 것이 아닌가? 아름다운 꽃이 영원히 피워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불교는 이런 생명의 고통을 해결하려 한 것이다. 난세에 몸과 생명을 보존하려 했던 중국의 도가들은 산속으로 숨어 들어가 양생을 위한 수련에 힘쓴다. 하지만 열심히 수련해 동안을 유지하고 장생불사의 건강하던 도인의 몸도 한 순간에 호랑이의 먹이가 될 수 있지 않은가? 양생법이 해답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몸과 생명이 낳고 죽는 그 까닭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장자』 외편에는 부인상을 당한 장자가 죽은 부인의 시신을 앞에 두고 덩실 덩실 춤을 추는 이야기가 나온다. 친구 혜자가 문상을 왔다가 그 모습을 보고 어이없어 한다. 아무리 부인이 죽으면 사내들은 뒷간에 가서 웃는다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춤까지 추는 것은 심하지 않은가? 이 때 장자가 말을 한다. “그렇지 않네, 아내가 죽었을 때 나라고 어찌 슬퍼하는 마음이 없었겠나? 그러나 그 시작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 본래 삶이란 게 없었네.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래 형체도 없었던 것이지. 그저 흐릿하고 어두운 속에 섞여 있다가 그것이 변하여 기(氣)가 되고, 기가 변하여 형체가 되었고 형체가 변하여 삶이 되었지. 이제 다시 죽음이 된 것인데, 이것은 마치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철의 흐름과 맞먹는 일. 아내는 지금 ‘큰 방’에 편안히 누워 있지.”(『장자』) 삶과 죽음에 관한 우주의 영원한 이치와 작용을 깨달은 장자가 어찌 곡을 할 것이고, 어찌 춤을 추지 않을 수 있겠는가? 스토아의 현인들도 죽음에 대한 이런 깨달음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다. 하지만 기독교는 인간의 유한성이라는 엄연한 진실과 그로 인한 고통의 감정을 강조한다. 사도 바울은 어두운 사망의 골짜기를 헤맬 수밖에 없는 인간의 유한성을 통렬하게 일깨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모든 생명은 곧 죽을 수밖에 없다는 엄연한 사실, 이 고통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오직 우리를 창조한 신에 귀의할 때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모든 철학과 종교는 죽음이라는 엄연한 사실과 그로 인한 고통을 해결하려는 몸짓의 표현이리라. 아침 이슬과 같은 이 생명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법을 깨닫게 하거나, 이 유한한 생명을 창조한 무한한 신의 존재에 귀의하거나 이다. 혹은 우주의 영원한 이법 속에서 삶과 죽음의 물리적 법칙을 깨닫는 것이다. 가을 날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 당신은 눈물이 흐르는가? 돌이 위에서 아래로 낙하하는 모습을 보면 당신은 슬픈가?
 
2. 죽음은 어떻게 오는가? (죽음의 우발성과 우연성) “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 하고 가버렸느냐.” 천수를 누리다가 돌아가신 분을 문상 갈 때는 비교적 마음이 가볍다. 모든 죽음의 이별이 쉬운 것은 아니다. 그래도 천수를 누리고, 갈 때를 알면서 돌아가신 경우에 우리는 호상이라는 말을 한다. 이런 호상을 맞이할 때는 산 사람들의 마음도 무겁지는 않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죽음을 예측한단 말인가? 아침에 잘 다녀오겠다고 나간 사람이 사고로 갑자기 죽을 때처럼 죽음은 종종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갑자기 들이닥친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현대를 ‘위험 사회’로 규정한다. 이런 위험은 곳곳에 널려 있다. 거대 도시에서 교통사고, 건물 붕괴, 화재 등의 재난은 다반사다. 재난 사고에 취약한 우리의 경우는 이런 사고가 전혀 낯설지 않다. 그래서 더 위험한 것이다. 지진이나 해일 같은 자연 재해도 기후 변화와 환경 파괴로 더 빈발해진다. 미국 같은 경우는 종종 총기 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테러 행위로 멀쩡한 시민들이 다치거나 죽는 경우도 많다. 이런 사고는 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우리로부터 빼앗아 간다. 우발적인 죽음으로 인한 갑작스런 이별을 대할 때 우리는 어떤가? 벌써 두 달이 넘도록 전국을 난타하고 있는 세월 호 대 참사는 갑작스럽게 닥쳤기 때문에 더 고통스럽다. 죽음을 대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산자들은 더 고통스러운 것이다. 산자들은 자신들의 이 비통한 마음을 죽은 자들에게 투사를 한다. 그래서 억울하고 원통하게 죽은 영들은 필시 구천을 떠돌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영혼결혼식도 하고 천도 제를 지내기도 한다.
 

울리히 벡/ 출처: blog.joins.com

울리히 벡/ 출처: blog.joins.com

 
이런 우발적인 죽음과 달리 자발적인 죽음도 있다. 물론 우리나라가 세계 제 1위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는 자살을 자발적인 죽음이라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비록 자신이 선택한다 할지라도 엄밀한 의미에서의 자기 결정은 아니다. 자살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떠밀려 선택할 수밖에 없는 타살의 한 형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자유로운 선택에 관한 라캉의 유명한 예가 있다. 밤길 골목에서 강도를 마주친 어떤 사람이 “죽을래 돈을 내 놓을래”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외양은 선택의 형식을 취했지만 내용상으로 그가 선택할 다른 여지는 없다. 돈을 내놓기 싫다고 하면 죽을 수도 있고, 죽고 나면 돈도 뺏길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많은 사람들이 최후의 수단으로 자살을 선택할 때는 그것 외에는 달리 선택할 도리가 없기 때문에 자살하는 것으로 봐야 옳다. 때문에 높은 자살 율은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하겠다.
 
이처럼 자율의 형식을 가장한 타율이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 자발적인 죽음도 있다. 이른바 영웅적인 죽음이 그렇다. 설령 죽을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죽음을 무릅쓰고 감히 죽음과 대결하고 그 죽음을 넘어서는 죽음이다. 자기 생을 통해 타인들의 생명을 구하려는 영웅들의 죽음이 그렇다. 생명보존의 욕구는 모든 생명체의 자연적 본능이다. 그런데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타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위험한 상황으로 들어가는 것은 죽음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을 극복하면서 이루어지는 영웅적 선택이다. 하이데거는 이런 형태의 죽음은 죽음을 미리 앞서 예비하는, ‘죽음에 대한 선구적 결단’으로 묘사한다. 이런 결단은 오직 자유로운 존재인 인간에게만 가능하다. 인간만이 자신의 신체가 소멸되는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다. 아마도 인간 정신의 위대함은 이런 자발적이고 영웅적인 죽음에서 드러나지 않겠는가? 그의 신체는 소멸해도, 그의 정신은 산자들의 기억 속에서 생명을 유지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왜 월드컵에 열광하는가? [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사람들은 왜 월드컵에 열광하는가??[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요즈음은 월드컵 시즌이다.?월드컵은 전 세계인들이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경기다.?지난 두 달 동안 짓눌렀던 세월호의 슬픔도 이 열광을 감출 수는 없다.?사람이 어찌 슬퍼만 할 수 있겠는가??월드컵의 열기가 전 세계를 덮고 있고,?지구 반대편의 경기를 보기 위해 사람들은 밤과 낮을 거꾸로 살고 있다.?특정 사건을 가지고 이념이나 인종,?빈부의 격차를 넘어서 열광하는 경우는 드물다.?올림픽 경기를 제외한다면,?단일 구기 종목으로 전 세계의 국가가 고루 예선과 본선에 대표 팀을 파견하는 경우는 축구가 유일하다.?야구는 미국과 동아시아 국가,?그리고 유럽 일부 국가를 제외한다면 지구를 대표하는 종목은 아니다.?배구나 하키,?골프 등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축구에 열광을 할까??축구에는 인종적?·문화적 차이와 상관없이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그 무엇이 있을까??공을 차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 행위와도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우리나라의 경우도 격구(擊毬)라고 해서 사람들이 모여 공을 차는 경기가 있었다.?멕시코의 마야 인들도 공을 가지고 노는 오랜 경기 전통이 있다.?이런 전통은 다른 많은 민족이나 문화권에서도 찾아보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그렇다면 공을 발을 가지고 노는 이런 행동의 어떤 면이 인간의 보편적 본능에 충실한가??축구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오직 발로만 하는 운동이다.?골을 막는 골키퍼만이 손을 사용할 수 있으며,?공이 장외로 나가 경기장 안으로 공을 집어넣을 때만 예외적으로 손의 사용이 허락된다.?경기장에서 손을 사용하면 바로 프리킥 벌칙을 받고,?패널티 애리어 안에서 골 키퍼가 아닌 다른 선수들이 손을 사용하면 패널티 킥이라는 최고의 벌칙을 받는다.?혹시 손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오직 발과 머리만 사용하게 하는 것이 이런 본능적 행위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은 아닌가?

손은 인간 문명의 발전과 깊은 연관이 있다.?인류가 직립 원인으로 서면서 비로소 손이 해방된다.?손이 대지로부터 해방된 사건은 문명사의 발전에서 획기적 사건일 수도 있다.?이 손은 나무의 과일을 따고,?도구를 제작할 때 사용된다.?도구의 사용은 인간이 직접 몸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대상을 조작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도구를 사용하면서 인간은 다른 동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사회 진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또 손은 손가락을 활용하여 셈을 세는 데도 사용된다.?하나 둘로 시작하는 셈은 추상 활동의 시작이다.?이 셈으로부터 숫자의 발견이 이루어진다.?숫자는 자연 대상을 단순하게 계산하는 추상 도구이다.?이 수자로부터 수들의 관계와 비율이 발견되고,?이를 통해 음들의 관계,?물리적 사건들의 관계,?천체의 운동의 법칙 등이 숫자를 통해 확인되는 것이다.?도구를 제작하고 추상 활동이 발전하는데 있어 그 출발은 손이 대지로부터 해방되는 사건이다.

그런데 축구에서는 이 손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핵심적인 규칙이다.?오직 발과 머리만을 사용하고,?그 발의 재간과 헤딩 기술만을 이용해서 공을 골대로 집어넣는 것이다.?이 발은 대지와 연결되어 있다.?가장 원초적인 대지를 딛고서 이 대지로부터 에너지를 받는 수단이다.?때문에 발은 이런 원초적인 본능과 에너지에 가장 깊게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축구가 동서고금의 인종과 문화,?노소와 경제적 빈부 차와 상관없이 고루 환영을 받는 것은 아마도 이런 원시적 본능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야구의 경우 홈런을 치면 관중들의 환호를 받고 누상을 한 바퀴 돈 홈런 타자는 다른 선수들과 손을 마주치는 세리모니를 한다.?그 장면은 상당히 절제된 문화 의식과 같다.?하지만 축구에서 골을 넣는 순간 그 선수의 포효를 보라.그는 막장으로부터 올라오는 괴성을 지르면서 온갖 몸동작이 복합된 세리모니를 하면서 동료들의 축하를 받는다.?다른 어떤 경기보다도 축구의 경우 이런 괴성과 몸동작이 심한 편이다.그것은 원시적 에너지의 발산과 연관이 있지 않은가?

수 만 명의 사라들이 운집해 있는 거대한 경기장을 보라.?과거 로마의 콜로세움을 연상시키지 않는가??아니 그 이상이다.?로마인들은 콜로세움에서 검투사들끼리 피를 흘리는 대결을 보면서 환호했다.?어떤 경우는 사자와 같은 야수와 싸우는 것을 보고 열광하고,?네로 황제 시절에는 기독교인들이 야수들의 밥이 되는 모습에 광분하기도 했다.?그들은 콜로세움에서 이런 원시적이고 야수적인 결투 장면의 피를 보면서 야수적 본능을 대리 충족한다.?아마도 현대의 축구경기는 그런 원시적 본능과 욕구를 대리 경험할 수 있는 데 가장 가깝지 않을까??그런데 이런 원시적 본능과 욕구를 발산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어떨까??사회학적으로는 이런 에너지나 정념의 발산 장치를?‘안전도관’이라고 말한다.?이런 도관은 내부의 에너지를 외부로 배출하는 도관의 역할을 한다.

고대 그리스 사회는 이런 안전도관으로 디오니소스 축제를 활용했다.?니체는?『비극의 탄생』이란 작품에서 그리스 사회를 본적으로 두 가지 판이한 정신이 지배하고 있다고 본다.?이 작품은 니체가?28살에 써서 그의 천재성을 인정받기도 했지만,동시에 문헌학의 일반적 전통을 벗어나 비판을 받기도 했다.유명한 미학자 빈켈만은 그리스 정신을?‘아름다움의 정신’으로 간주한다.?아름다움은 무엇보다 수적 황금 비례에 기초한 통일성과 단순성의 미이다.?그에 따르면 그리스 사회는 이 아름답고 밝은?“아폴론적 정신”으로 대변된다.?그런데 니체는 빈켈만의 이런 일반화된 분류를 거부한 것이다.?그리스 사회는 밝은“아폴론적 정신”뿐만 아니라 어두운?“디오니소스적 정신”도 있다는 것이다.?빈켈만이 밝은 아름다움의 정신을 조형예술의 아름다움 속에서 보았다면,?니체는 어두운?“디오니소스적 정신”을 주로 비극의 축제에서 확인한다.?비극은 그리스 사회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거치면서 민주주의가 정착하고 경제가 발전하는 등 최전성기에 유행한 드라마이다.?그리스의 시민들은 이 비극 공연에 열광하면서 공동체의 유대를 확인하고 정서적인 카타르시스를 체험하기도 한다.?이런 비극축제는 중세의 카니발로 이어진다.?니체에 따르면 밝은?“아폴론적 정신”은“개체화의 원리”이고,?어두운?“디오니소스적 정신”은?“전체와 집단의 원리”이다.?전자는 조형예술의 아름다움 속에 구현되고,?후자는 비극이 공연되는 집단 축제(디오니소스 축제/중세의 카니발)에서 드러난다.?축구와 같은 운동경기나 혹은 대규모 집단 응원 행위도 이런 축제와 연관이 깊다.?니체는 디오니소스적 정신이 세 가지 장벽을 무너뜨린다고 한다.?즉 인간과 자연의 벽,?개체와 공동체의 벽,?의식과 무의식의 벽이 그것이다.?말하자면 디오니소스적 정신은 인간을 자연(무기물)으로 되돌리고,?개체를 공동체와 연결하고,?의식을 무의식의 세계로 환원하는 것이다.?그렇다면 원시적 본능의 발산과 집단 에너지를 하나로 묶는 월드컵 축구를 현대판 디오니소스적 축제라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2002년 월드컵 당시 수만의 인파가 거리에서?‘대~한민국,?따단 따 딴단’을 외칠 때 보여주었던 집단 에너지의 일체감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축제나 로마의 콜로세움 경기를 능가할 정도이다.?이런 원시적 에너지의 발산은 신화의 세계와 연결될 터인데,?그 당시 동아시아의 오랜 전쟁의 신?‘치우 황제’가 마스코트로 등장한 것도 우연은 아닐 터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축구를 원시적이고 본능적인 운동으로 보거나 축구를 몸만으로 하는 경기라고 단순화하기에는 힘들다.?외형적으로 보기에는 발과 머리를 사용하고 있어 머리와는 상관이 없는 몸의 운동으로 보인다.?하지만 개인들의 기량을 쌓는 과정에서 발재간과 헤딩 기술은 몸에 기억된다.?몸은 의식이나 정신활동과는 차이가 있겠지만 그것 역시 두뇌의 활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현대 뇌 과학에 따르면 몸이 두뇌의 활동이고,?두뇌는 몸을 기억한다.?뇌의 발달은 다른 육체기관과 별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손이 기억을 하고 몸이 기억을 하는 것이다.?예를 들어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들은 복잡하고 현란한 기교를 요하기 때문에 전문 피아니스트라도 연주가 쉽지가 않다.?그는 훌륭한 연주를 위해 반복적인 훈련을 하지만,?그렇다고 악보 전체가 그대로 머릿속에 암기되는 것은 아니다.?설령 암기가 이루어진다 하더라도,?지휘자의 손동작과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맞춰 정확히 어떤 순간에 어떤 건반을 터치하는 것은 암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거의 무의식적인 동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터치는 기억하는 뇌의 독립적인 명령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말하자면 뛰어난 피아니스트는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의식적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기억하며,?정교한 손동작이 이루어지는 만큼 뇌의 발달도 이루어지는 것이다.?기억은 손과 뇌,?그리고 환경이라는 특수한 맥락의 합작품인 것이다.?이런 사정은 축구에서 주로 사용하는 발재간과 헤딩 기술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축구 선수는 오랜 반복 훈련에 따라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상황에서 대처하는 능력을 몸과 뇌에 각인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축구를 본능적 활동과 에너지의 발산으로만 보는 것은 지나친 왜곡이 될 수 있을 것이다.?축구에서는 다른 모든 경기와 마찬가지로 전술을 이해하고 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이 과정은 두뇌 플레이가 많이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반복적으로 훈련하면서 몸으로 익히는 것이기 때문이다.?토탈 사커를 지향하는 현대 축구에서는 고정된 포지션 속에서 주어진 역할만 수행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다른 어떤 경기보다 상황에 따른 임기웅변의 역할이 필요한 복잡한 경기라고 할 수 있다.?게다가 축구는 심판의 엄격한 규칙과 지도하에 진행되는 경기이다.?전술을 훈련하는 과정에서는 무엇보다 다른 동료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이런 커뮤니케이션은 단순한 인지과정만이 아니고,?규칙을 내면화하고 적응하고,?더 나아가서 그것을 응용하는 과정이다.?그것은 끊임없이 어떤 상황과 조건 속에서 타자와 소통하면서 몸으로 체득하는 고도의 훈련이라 할 수 있다.?더욱이 상업화된 프로 축구에서는 선수들은 다른 문화권과 언어권 출신의 다른 선수들과 소통하는 어려움도 필수적으로 겪게 된다.?이런 복잡한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은 몸으로 익힌 고도의 두뇌 활동을 요구한다.?때문에 이런 경험을 거친 뛰어난 선수들이 은퇴 후 해설 경기를 별다른 어려움 없이 맡는 것을 보면 그들의 지능이 일반인들을 상회한다고 말해도 틀린 것은 아니다.?이렇게 본다면 축구가 단순히 발재간과 헤딩기술을 활용한 원시적 운동이라는 말은 전혀 맞지 않는다고 하겠다.

오늘 날 현대 축구는 다른 어떤 경기들보다 대표적으로 상업화된 경기이다.?선수들의 몸값으로 천문학적인 돈이 오가고,?축구팀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웬만큼 재정이 뒷받침되기 전까지는 엄두도 내기 힘들다.?스타 선수의 몸값은 웬만한 중견기업의 수익을 넘어설 정도이다.?지역 간 격차도 심해 리그별 수준 차는 무엇보다 경제력을 반영하고 있다.?세계축구협회(FIFA)가 유엔 못지않게 권력기관이 된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고, FIFA의 수장은 세계 정치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월드컵을 유치하는 과정은 올림픽 유치 못지않게 국가 간에 사활을 건 경쟁을 통해 이루어진다.?이렇게 보면 축구는 가장 자본의 영향을 받는 현대적인 운동 산업의 하나라 할 ??? 있다.?동시에 축구는 가장 원시적인 본능에 기초한 경기,?몸과 뇌 그리고 상황이 집적된 고도의 기억 메카니즘에 기초해 있고,?적과 아군으로 나누어진 변화무쌍한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는 고도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게임이다.?그렇다면 축구는 원시와 현대,?본능과 이성,?몸과 정신,?자기와 타자,?선수와 관중 등이 종합적으로 집적된 경기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가장 상업화되고 현대화된 경기 속에 여전히 감추어져 있는 가장 원시적 본능과 에너지로 인해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축구를 보기 위해 일상의 스캐쥴을 무시하고,?축구를 보면서 열광을 하고,?이 축구의 승패에 실의와 환희를 표현하는 것은 아닌가?

 

이반의 사랑 [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이반의 사랑 [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살다 보면 바뀌는 것도 있고,?안 바뀌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한국사회가 지난 한 세대 동안 너무 숨 가쁘게 달려 왔기 때문에 당연히 외형적인 변화는 말할 필요도 없다.?너무 다이나믹하다 보니 한?2-3년만 지나도 도시의 외관이 달라지고 도로가 달라지고 건물이 달라지는 경우가 숱하다.그러다 보니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마음도 당연히 크게 바뀐 것 같다.?크게 달라진 것 중 하나가 동성애에 대한 태도이다.?종종 토론 주제로 동성애를 다루는 경우가 있는데,?의외로 학생들이 남녀 불문하고 동성애에 대해서는 대단히 관대하다는 것이다.?우리가 대학 다닐 때는 게이나 레즈비언이란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돋고 외계인 취급을 했던 것과는 천양지차다.내가 대학 시험에 합격을 하고 겨울에 고대 타임 반 동계 특강을 다닌 적이 있다.?이 타임 반은 상당히 유명해서 동계 강좌인데도 불구하고 참가자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했다. <타임>지를 선배들이 읽고 설명해주는 형태로 진행된다.?그런데 그 때 타임지 표지 모델로 여자?2명이 팔짱을 끼고 걷는 모습이 나온 적이 있다.?그 중의 한 여자는 가방을 들고 바지를 입고,?다른 여자는 선글라스를 끼고 스커트를 입은 것으로 기억된다.?타임즈 표지 모델이 레즈비언을 처음 화두로 올렸던 것이다. 1976년이니까 미국 사회에서도 동성애자들이 사회의 주목을 받던 초기였으리라.?그 때 강독을 이끌던 고 학번 선배가 이 중에 누가 여자 역할을 하고 누가 남자 역할을 하는가를 맞추어 보라고 주문하는 것이다.?그 당시 나는 그런 장면이 너무나 희한하고,?또 그런 것들이 논쟁거리가 된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럼에도 거진?4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기억을 하는 것을 보면 그만큼 그 장면이 인상적이었음을 반증한다.?그 뒤로 별로 그 문제를 생각하지 않았다.?그러다 박통이?10.26?사태로 죽고 나서 교회를 내 발로 찾아간 적이 있다.?지금도 인상적인데 그 교회의 남성 반주자가 피아노도 잘치고 얼굴도 이쁘장한 사람이었다.?신앙생활도 아주 잘해서 교회에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기가 많았던 사람이다.?그 사람이 당시 중 고등학교 남학생들을 여러 명 건드렸다는 소문이 돈 적이 있다.?혈기방장하던 시절이라 그 문제를 덮지 못하고 교회와 각을 세우다가 혼자 나온 경험이 있다.

그런데?90년대 중반 이른바?PC?통신이 한창 유행할 때였다.?알 만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 당시 하이텔이나 나우누리 같은 통신망들의 대화 방은 밤만 되면 북적거리던 시절이다.?대화 방에 가면 숱하게 많은 남자와 여자들이 밤을 새워 밀담을 즐긴다.?입담 좋으면 여자 만나기도 쉬워 이른바 번개도 유행했던 것으로 안다.?그런데 어느 날?’이반’이라 이름붙인 대화 방에 들어가려니까 일반인지 이반인지 묻는 것이다.?그래서 나는 모 몇 학년 몇 반 정도로 생각해서 그냥 일반이라고 하니까 일반은 안 된다고 하면서 입장 불허하는 것이다.?하도 이상해서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곳은 동성애자들의 방이라고 한다.?일반은 일반인을 말하고,?이반은 그냥?2반이 아니라 일반을 일탈한?’이반’이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그 사정을 알고는 그 방 근처만 가도 머리가 쭈뼛 서는 느낌을 받았다.?그만큼 당시의 우리 세대에게는 동성애는 여전히 낯선 코드이고,?그만큼 편견도 적지 않다.?이런 편견을 극복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지나서이다.?이 당시?e-Mail을 통한 소통과 연애는 톰 행크스와 맥 라이언의?’You’ve got a mail’에 잘 나타나 있고,?대화 방은 전도연이 주연한?’접속’처럼 아름다운 추억의 장소로 기억되고 있다.

그런데 동성애에 대한 호불호는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다.?서구에서 유대 기독교의 영향을 받던 시기는 동성애에 대한 거부감이 크다.?가부장적이고 남성적인 중심적인 사회에서 동성애는 악마적이고 자연에 거슬리는 것으로 취급된다.?서구에서도 지금까지 가장 동성애에 대해 반대가 심한 곳은 기독교적 전통이 큰 곳에서이다.?기독교가 서구의 중심에 자리 잡기 전만 해도 동성애에 대해 대단히 관대한 문화가 유지되고 있었다.?특히 그리스 문화에서는 성인 남자가 어린 미소년과 사귀는 일종의 원조교제가 유행처럼 번지고 사회적으로도 인정을 받았다.?이런 문화는 철학적 정당성도 얻고 있었다.?남녀 간의 사랑은 육체를 매개로 하는 저급한 욕망에 기초해 있지만,?성인 남자와 미소년의 관계는 순수한 영혼의 교류라는 것이다.?그 만큼 더 사랑의 이데아에 가깝다는 이야기일 터인데,?일찍부터 이성이 가방 들고 감성의 욕망을 쫓아다녔다는 증좌일터이리라.?소크라테스의 주변에 늘 젊은이들이 함께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그 중에 한 사람이 나중에 그리스의 유명한 정치인이 되었던 알키비아데스이다.?그는 명문가 출신이고 용모도 수월하고 명민한 두뇌의 소유자이다.?그런 그가 소크라테스를 대단히 연모한 것이다.?한 번은 둘이서 해변 가에서 밤을 지새운 적이 있었다.?하지만 이 사랑은 짝사랑이다.?파도소리가 들리고,?별이 보석처럼 밤하늘을 장식한 해변 가에서 사랑하는 연인이 밤을 새운다고 상상해보라.?얼마나 가슴이 설레 이겠는가??알키비아데스도 그런 대단한 썸씽을 기대했을 것이다.?그런데 돌부처 같은 우리의 소크라테스는 동이 틀 때까지 우뚝 서서 꿈쩍도 안하고 동쪽 하늘만 바라다보았다고 한다.?그러니 이제 막 사랑에 눈뜬 젊은 알키비아데스의 실망이 말할 수 없이 컸다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플라톤의?『향연』에 보면 그가 여러 사람들이 토론하는 곳에서 노골적으로 소크라테스에 대한 연정을 토로하는 장면들이 나온다.?그만큼 동성애가 일반화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철학자의 한 사람인 비트겐슈타인이 동성애자라는 이야기도 낯선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이 집안사람들은 대단한 천재들이고 예술적 재능도 타고 났다.?오스트리아 철강 재벌인 탓에 그의 집에는 늘 당대의 뛰어난 재사와 예술가들이 북적거렸다.?하지만 그의 형제들 대부분은 비극적 운명으로 일찍 죽거나 자살을 하고 또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클림트의 에로틱한 그림에는 그의 누이동생이 모델로도 나온다.?유명한?’볼레로,?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은 전쟁에서 오른 팔을 잃고 돌아온 그의 형인 피아니스트를 위해 작곡가 라벨이 헌정한 곡이다.?약관?21살에?1차 세계대전 당시 포로수용소에서 틈틈이 메모로 썼던?『논리-철학 논고』라는 책은?20세기 영미 분석철학의 성전 역할을 하기도 했다.?철학 도들의 입에서 끊임없이 회자되는 이 책의 명제 몇 가지. “언어는 세계의 그림이다.”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거의 잠언 수준이다.?집안 내력 때문인지 비트겐슈타인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우울한 감정을 떨치지 못했다.?하지만 그가 캠브리지 대학의 강의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도중에 사창가가 있었는데 종종 그곳을 들렀다는 보고도 있는 것을 보면 동성애자라는 것은 확증된 사실만은 아닌 것 같다.?이 문제는 지금도 논란이 많다.?한 때 포스트모던 철학의 기수로 한국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미셸 푸코도 동성애자이다.?그는 친 동성애자 운동,?소수자 차별 반대 운동을 주도하던 행동하는 철학자이기도 했다.?그는 예일 대 교환교수로 있을 때 종종 게이 바를 들렀는데 결국?1984년에?AIDS에 걸려 죽기도 했다.?그는 근대의 정신과 몸을 지배하는 지식과 권력 체계를 비판하는 일에 주력했다.?근대의 합리적 이성이 이성과 반이성을 나누고,?광기를 추방하고,?의학적 지식이 이런 지배의 도구 역할을 한다는 것을 고발했다.?감옥과 병원의 탄생,?그리고 학교의 탄생이 근대적 지식의 담론 속에서 동일한 출생지를 갖고 있다는 것을 밝히기도 했다.?미시 권력의 네트워크와 생산적 권력의 개념은 한국 사회를 분석하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광기의 역사』,?『감옥의 탄생』,?『감옥의 탄생』등은 많이 읽히는 그의 주저들이다.

80년대 후반에 나온 영화?<필라델피아>는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고발한 빼어난 법정 영화이다.?로펌의 잘나가는 변호사인 주인공 톰 행크스가 동성애자라는 것이 밝혀지자 업무 미숙을 이유로 부당 해고 당한다.?그 당시만 해도?AIDS?환자에 대한 무지와 불신이 커서 동료 변호사들도 그의 소송을 대리하려고 하지 않는다.?편견으로 주저하던 흑인 변호사 댄젤 워싱턴이 사건을 맡으면서 톰 행크스와 함께 로펌을 상대로 진행하는 법정 공방은 법과 정의가 무엇인가를 강렬하게 일깨워준다.?배심원 측이 회사 측의 부당 해고를 인정하면서 원고의 손을 들어주자 법원은 원고에 대한 피해배상 외에 우월적 지위를 남용하던 피고에 천문학적인 징벌적 손해 배상을 선고한다.?왜 한국의 법정에서는 이 징벌적 손해 배상 제도가 도입되지 않는가??이 영화를 보다 보면 동성애자를 감싸주는 가족들의 태도가 인상적이다.?한국의 가족에서 동성애자임을 커밍 아웃하면 여전히 맞아 죽을 일이고 쫓겨날 일이다.?사실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고,?다만 성적 기호만이 다를 뿐이다.?이러한 차이가 차별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데 종종 우리들의 편견은 그것을 잊고 있다.?이 영화의 빼어난 장면 중의 하나가 최종 판결 전에 죽음을 예감한 톰 행크스가 변호사 워싱턴 앞에서 마리아 칼라스의?”La mamma morta”(어머니는 돌아가시고)를 들으면서 몸으로 연기하는 장면이다.?안 본 사람은 꼭 한 번은 볼 일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3b0p9mTJOJI?변호사가 동성애자 의뢰인에 진정 마음을 열고 공감하는 계기가 되는 아리아다.?동성애자들의 빼어난 예술적 취향을 보여주려는 뜻도 없지 않은 것 같다.

사랑의 종착역은 결혼이다.?사랑이 사랑으로만 끝나면 너무 무책임하지 않은가??모든 인륜지 대사의 기초는 사랑하는 사람끼리 가정을 이루는 일이다.?나는 굳이 남자와 여자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다.?동성 결혼이 우리나라에서는 인정이 되지 않고 있고,?세계적으로도 네덜란드와 벨기에,?그리고 미국의 매서츄세츠 주 등 아직은 소수이다.?문화적으로 진보적이라고 생각되는 파리에서도 동성결혼을 반대하는 시위가 몇 달 전에 격렬하게 일어난 적이 있을 만큼 아직은 거부감도 크다.?하지만 동성결혼의 합법화를 인정하는 것은 세계적 추세이다.?멀지 않은 미래에는 우리 역시 이 추세를 거부하기 힘들지 모르겠다.?이미 영화감독 김조광수는 공개적으로 동성결혼을 선언한 적이 있다.?그렇다면 결혼을 남녀로 국한시키는 혼인법이나 가족법,?기타 이와 관련된 친족 상속법,?민법 등 많은 법 개정도 불가피할지 모르겠다.?미래의 가족은 우리가 그간 알아 왔던 형태와는 상당히 달라질 것이란 생각이 크다.?일단 결혼이란 이성간의 일이라는 것만이 아님을 받아들여야 될 때가 올 것이다.?이 부분은 문화적인 인정과 사회적인 합의가 있기 까지 진통도 클 것이다.?특히 기독교는 신의 섭리,?창조 질서 등을 앞세우면서 반대가 심할 것이다.?동성 간의 결혼을 인정할 때2세 생산도 과거와는 크게 다르게 이루어질 수 있다.?입양과 시험관 아기,정자와 난자의 기증 및 매매, 2중 대리모와 대리부 등 이성 간의 결혼에서 생각하기 힘든 방식이 일상화될 것이다.?무엇보다 자식에 대한 부모들의 과도한 집착과 교육에 대한 태도도 많이 달라질 것이다.?미래에는 교육과 관련한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병폐가 동성결혼으로 인해 충격을 받을 수도 있다고 본다.?이러한 변화가 긍정적이 될지 아니면 부정적이 될지는 지금 예단하기는 힘들겠다.?덕분에 우리 시대는 죽을 때까지 새로운 변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고민해야 할지 모르겠다.?무조건 귀를 닫으면 꼴통 보수요,?꼰대 소리를 듣지 않겠는가?

 

거짓 원인의 오류 [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거짓 원인의 오류 [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학생들에게?Argumentation Theory를 가르치다 보면 논리학의?’오류론’을 한 번은 꼭 다룬다.?그런데 이 오류 론에는?’형식적 오류’와?’비형식적 오류’가 다 포함된다.?형식적 오류는 형식적 규칙을 위배했는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니까 그 규칙만 알면 비교적 판별하기가 쉽다.?마치 도로 교통에서 신호 위반이나 과속의 경우 규칙 위반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과 같다.?그런데 일상 언어에서는 형식이 아닌 내용과 관련해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다반사다.?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한데 곰곰이 따져보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때로는 이 오류를 일정한 효과를 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재판정에서 피의자가 눈물 흘리면서 동정심에 호소하는 경우가 전형적이다.?그가 한 행위와 그의 처지는 별개지만 눈물은 이 둘을 연결시켜줘서 정상참작에 도움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을 것이다.?소크라테스도?『변명』에 보면 이런?’연민에의 호소’를 한다. “친구여,?저도 사람입니다.?다른 사람과 똑같습니다.?저도 호머의 말처럼 목석으로 된 인간이 아니라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고,?식구도 있고,?아들도 셋 이예요.”?찔러도 피한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소크라테스 조차 마누라와 자식새끼를 앞세우며 선처를 구하는 것이다.?김 시습의?’자지는 만지고,?보지는 조지라'(自知晩知 補知早知)는 표의문자와 표음문자로 혼용되는 우리 일상어의 애매성을 노린 위트 효과다.?서당에서 열심히 글을 읽는 아이들 모습이 기특해 큰 소리로 한 수 읊었더니 서당의 훈장 이하 아이들이 욕하는 줄 알고 달려들었다는 것이다.?사실은 김 시습 자신이 왔는데도 내다보지도 않는 모습에 부아가 나서 야유를 한 것이리라.?스스로 알려고 하면 늦게 알고,?도움을 받아 알려고 하면 일찍 안다는 말이다.?선거철만 되면 흑색선전이 난무하고,?온갖 비리들이 폭로되는 경우가 있다.?전형적인 물 타기 방식이요,?피장파장의 오류이다.?종종?’예수 믿으시오’?하면서 확성기로 떠들고 앞뒤로는?’불신지옥’?간판을 달고 다니는데 이는 흑백논리의 오류이다.?신이 이 아름다운 세계를 창조했는데 그들은 흑과 백이라는 두 가지 색깔로만 보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신의 창조물을 왜곡하는 저들이 오히려 불신하는 것은 아닐까??이런 단순화가 합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그 효과가 강력하기 때문에 종종 정치인들이나 대중을 선동하는 사람들이 쉽게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때문에 이런 형태의 오류는 무조건 틀렸으니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만 말하기 어렵다.?그 중에 하나가?’거짓 원인의 오류’이다.

이 오류는 원인과 결과 사이의 관계가 필연성이 없음에도 마치 있는 것처럼 상정하는 오류다.?예전에 마당이 있던 시절 여름날 열심히 빨래를 해서 마당에 널었는데 소나기가 내린다고 생각해 보라.?또 그런 불편한 경험을 두 어 차례 반복해보라.?그러니까 나오는 엄마들의 소리가?’빨래만 하면 비가 온다’는 것이다.?여러분들은 세차를 할 때 그런 기분을 느끼지 않는가??세차만 하면 비가 온다고…사실 빨래를 널거나 세차를 하는 사건과 비가 온다는 사건 사이에 인과 관계가 없음에도 우리의 연상 속에서는 자연스럽게 연결된다.?개들만 조건 반사하는 것이 아니다.?전라도 사람이 어떻고,?경상도 사람이 어떻고 하는 것도 사실 그 사람 자체와 그의 출신 지역 사이에 필연적 인과관계가 없음에도 자연스럽게 편견으로 자리 잡고 있다.?중세의 마녀사냥이나 나치가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한국 정치에서 늘 반복이 되는 종북 놀이도 그 한 예이다.?과거 왕조시대에 여름 날 가뭄이 심하면 왕이 나서서 기우제를 지냈다.?자연재해와 인간의 도덕적 책임 간에 어떤 연관이 있다고 믿는가??동양의 전통적인 천인합일의 사상에서는 양자는 연결되어 있고 상호 조응한다고 본다.?이 형이상학적 가설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은근슬쩍 학생들한테 이런 질문을 던진다. “기우제를 지내면 실제로 비가 올까요 안 올까요?”?학생들은 당연히 연관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질문을 받으면 당황 하면서 여러 가지 답변을 내놓는다. ‘안 옵니다.’?사실 이런 답변이 합리적이다.?그런데 배운 것이 죄라고,?어떤 학생은 기우제를 지내면 연기가 하늘로 많이 올라가 비가 내린다고 나름 과학적으로 답변하는 경우도 있다.?마른하늘에 그 한 조각구름이 무슨 큰 역할을 하겠는가??하지만 정답은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반드시 온다는 것이다.?왜 그럴까??비가 내릴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니까…

일전에 송 강호,?김 혜수가 주연한?<관상>이라는 영화가 히트를 친 적이 있다.?병약한 문종이 관상쟁이를 통해 역모의 상을 미리 알아 단종의 보위를 지키려다 실패하는 이야기다.?수양의 상은 전형적으로 역모의 상이라고 한다.?역모는 당시 정치 상황을 꿰뚫고 있다면 충분히 예측 가능할 것이다.?관상쟁이의 판단은 다만 사람들에게 합리적 예측에 대해 신념과 확신을 불어넣어 주는 데 적격이다.?꿈보다 해몽이고 후행적 정당화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관상은 얼굴에 드러난 상을 통해 그 사람의 과거/현재/미래를 본다는 것인데 사실 가당찮은 이야기일까??드러난 상은 과거를 일정하게 반영할 수 있고,?그 과거를 통해 미래를 미루어 짐작은 할 수 있다.?그리고 이런 판단은 상당히 경험적이고 통계적이다.?게다가 오랜 숙련을 통해 통계예측의 정확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과학적인 통계가 부족하던 시절의 경험적 통계학이다.?사람들을 많이 대하는 직업에서는 외양을 통해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어느 정도는 신뢰도가 있다.?나도 그렇게 판단하는 방법이 있다.?동양의?12지 이론을 가지고 사람들을 일정하게 그 유형에 포함시켜 판단하는 것이다.?예전에 노무현과 이회창이 대통령 선거로 대립할 때 다들 이 회창을 독수리 상이라고 했는데,?나는 쥐 상이다고 하고 노 무현 상이 호랑이 상이다고 어거지 부린 적이 있다.?사실 이런 포괄적 분류가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아무튼 이걸 가지고 학생들이 많이 떠들면?”?너희들 다 보인다.?미래가”?라고 엄포주면 서로 봐달라고 하면서 조용해진다.?학생들은 나의 합리적 이론보다는 그런 불합리하고 비합리적인 속설에 더 반응한다.?학자가 하는 애기보다 사주 봐주는 점쟁이 이야기를 더 귀담아 듣지 않는가??일종의 심리적 효과이고 플라세보 효과?(placebo effect)이다.?서양에서도?19세기 초에 이런 형태의 관상학과 골상학이 유행한 적이 있다.?용모와 안색,?얼굴에 드러난 특성 등을 통해 그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는 것이다.?외면이 내면을 반영한다는 생각이다.?특히 범죄인의 성향과 유형을 판단하는 데 골상학이 상당히 이용되기도 했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이비 과학으로 더는 과학의 반열을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외면으로 드러난 특질,?뼈의 구조와 배치 등이 내면의 정신과 필연적 연관이 없다는 것이다.동양에서는 관상보다는 골상이요,?골상 보다는 심상이라고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안에 감추어진 마음을 더 높이 사고 있다.?나는 아직도?”정신은 뼈다”라는 말의 의미를 묻고 있다.

현 정부 들어 크고 작은 사건이 빈발하고 있다.?그 중에서도 세월 호 사건은 너무도 큰 참사인데다 현재까지도 진행형의 사건이다.?얼마 전에는 내가 사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양 터미널에서 화재가 나?7명이 죽고 수 십 명이 큰 부상을 당했다.?시민들이 일상으로 이용하는 시설에서 이런 사고가 벌어졌다는 것은 큰 충격이 될 수 있다.?전남 장성의 한 요양원에서는 화재가 놔 요양 노인들?21명이 불에 타고 연기에 질식돼서 죽는 사고도 났다.?그런데 이처럼 빈발하는 사고의 형태가 과거 김 영삼 대통령 시절을 연상케 하고 있다.?당시의 대형사고 몇 가지만 손꼽아도 서해 페리호 침몰사고(사망292명),?대구 지하철 가스 사고(98명 사명),?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사망500여명), KAL기 괌 추락사고(228명 사망),?성수대교 붕괴사고(32명 사망)이다.?하나 만으로도 엄청난 데 이런 대형 사고가 부지기수로 터지니까 국민들이 받는 체감 충격이 얼마나 컸겠는가??그러니까 영부인의 상이 곡상(哭象)이라 국민들의 눈물을 많이 뺀다는 말이 돌았다.?영부인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들어가고 나온 굴곡(屈谷)이 없지는 않다.?뒤의 곡(谷)을 앞의 곡(哭)으로 치환한 것이다.?어느 유명한 관상가의 말이라고 했다.?물리적인 사고와 대통령 영부인의 상간에 인과관계를 어떻게 찾을 수 있겠는가마는 관상가들의 그런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가 대중들의 마음속에는 아무런 저항 없이 자리 잡기도 한다.?김 영삼 정부 말에 초유의?IMF?위기를 맞았으니 더 그 말의 울림이 더 크다.?전형적인?‘거짓 원인의 오류’이지만 국민들의 집단 연상의 메카니즘 속에서는 필연성이 있다는 믿음이다.?혹세무민은 바로 이런 틈을 파고든다. “어,?그러고 보니 박 근혜 상도 만만찮아.?눈물 꽤 짜내게 생겼네.?편안한 상이 아니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