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형이상학 산책60-실재하는 척도[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60-실재하는 척도

1)

잣대는 어떤 정량을 측정하는 단위다. 어떤 사물의 정량은 그 잣대로 측정된 특정화된 정량 즉 개수이다. 잣대나 사물은 양적 관계 외에 각기 고유한 질적인 측면을 가진다.

“정량은 그 이중적 존재 속에서 외적인 것이며, 동시에 특정적인 것으로서 존재하며, 구별된 양적인 것 각각은 이런 이중적 규정을 그 자신에서 갖고 동시에 단적으로 타자와 교차되어 있다. 질적인 것들은 오직 그 속에서만 규정된다. 이 질적인 것들은 서로에 대해 존재하는 현존 일반일 뿐만 아니라 분리될 수 없이 정립되어 있고 그런 질적인 것에 묶여 있는 크기 규정은 질적인 총수[Einheit]다. 즉 이런 질적인 것들이 개념상 본래 연관되어 있는 척도 규정이다. 따라서 척도는 두 질적인 것의 내재적 양적 상호 관계다.”

잣대와 사물의 정량 사이의 양적 관계에 관해서는 앞에서 설명했다. 이제 헤겔은 잣대나 사물이 양적 측면 외에 질적인 측면을 지닌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면서 이 양적인 관계의 측면과 질적인 측면의 관계에 주목하게 된다.

앞에서 두 잣대를 비교했다. 하나는 비중(무게/부피)과 같은 잣대이고 다른 하나는 온도(열에너지/물체의 부피)와 같은 잣대다. 둘 다 두 정량의 관계로 이루어진 잣대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

각 잣대는 두 정량의 비례이지만, 비중의 경우, 어느 사물에서나 두 정량은 동일한 비례 관계에 있다. 어느 사물에서나 부피가 늘면 일정하게 무게도 증가한다.

그러나 온도의 경우, 두 정량의 관계는 비례하지만, 그 비례지수는 사물마다 각기 다른데, 예를 들어 동일한 열에너지에 대해 철 온도가 돌 온도보다 몇 배 빨리 증감한다. 철은 빨리 뜨거워졌다가 빨리 식는다면, 돌은 천천히 뜨거워지며 천천히 식는다. 헤겔은 온도와 같은 잣대가 지닌 이런 특징을 일러서 “특정화하는 척도”라고 한다.

특정화하는 척도는 단순한 척도 즉 잣대와 달리 사물마다 다르게 작동한다. 단순한 잣대 예를 들어 비중은 물체에 대해 외적, 무차별이지만, 특정화하는 척도 즉 온도는 물체에 내적인 연관을 지니기 때문이다.

2)

내적인 연관은 발전한다. 온도만 해도 두 정량 사이의 관계는 여전히 직접 비례 또는 정비례하는 것에 그친다. 그러나 이런 직접 비례가 반비례를 거쳐 제곱에 이르게 되면, 그 관계는 더욱 밀접해진다.

기체의 압력과 부피는 서로 반비례한다. 그것은 압력과 부피가 동일한 분자 운동 에너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압력과 부피는 밀접한 연관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제 제곱 비례하는 경우를 들어보자. 예를 들어 운동에너지는 속도의 제곱에 비례한다. 인력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전기에너지는 전류의 제곱에 비례한다.

이렇게 제곱의 관계나 비례에 있을 때, 헤겔은 그 관계를 통약할 수 없는 비례라고 한다. 제곱 관계는 앞에서 개별 정량을 다룰 때 이미 등장했다. 그때 거리의 제곱은 곧 면적이라는 명제가 다루어졌는데, 여기서 보듯이 하나의 질은 자기를 양적으로 제곱함으로써 새로운 질이 출현한다.

그러나 거리로부터 면적으로 새로운 질이 생성한다 할 때, 거리나 면적은 모두 공간의 일부라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질적 생성은 아니었다. 그것은 같은 정량이 좌표상 확장한 것에 불과했다.

마찬가지로 척도에서도 양적인 제곱의 관계가 다시 출현한다. 그러나 지금 다루어지는 관계에서 예를 들어 속도가 제곱해서 운동에너지를 낳는다고 할 때 양적인 제곱 관계에서는 서로 다른 새로운 질이 생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속도와 운동에너지는 서로 무관한 독자적인 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새로운 질’의 생성이라는 측면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두 개의 질적 존재가 관계한다. 그 관계는 양적인 제곱 관계이다. 예를 들어 운동에너지는 속도의 제곱이다. 그중 하나[속도]는 그 자체로 규정된 양이며 단위다. 다른 것[운동에너지]은 그 단위에 의해 특정화된 것으로 나타나는 정량이며 그 개수이다.

이런 양적 관계를 맺고 있는 각각은 이런 양적 관계 바깥에 독자적인 질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운동에너지이며 다른 하나는 속도다. 여기서 운동에너지의 질적인 측면과 속도의 질적인 측면은 서로 무관하다. 어떤 현존(속도든, 운동에너지든) 양적 측면은 질적인 측면과 무차별하다. 양적 측면에서 서로 관계한다. 그런 점에서 양자에는 동일성이 존재한다. 반면 질적인 측면은 서로 무관계하다. 양자는 전적으로 다른 질적 성격을 지닌다. 서로 관계하는 양적인 측면은 무차별한 질적인 측면에 대해 외적이며 양자는 서로 분리되어 있다.

관계를 맺는 현존 즉 질과 그 현존의 상호 양적 관계가 서로 무관하니, 이 관계를 통해 새로운 질이 생성되었다고 말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제곱 관계가 새로운 질을 생성한다고 할 때 제한적인 의미만을 지닌다.

제곱 관계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만, 한계가 있다. 길이가 면적으로 확장된다는 것은 사실 같은 것이 차원을 확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속도가 운동에너지로 확장한다고 할 때 그 질적 생성은 사실, 그 질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마치 동일한 것이 모양만 바꾼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겠다.

속도는 운동에너지의 미분적인 힘이다. 어떤 한순간 지닌 운동에너지가 속도이며 이 운동에너지를 일정 시간에 걸쳐 적분하면 운동에너지가 나온다. 이런 점에서 운동에너지와 속도는 서로 동일한 것이다. 서로 동일한 것이 다만 한순간이냐 그것이 쌓여서 나타나느냐 하는 차이가 질적인 차이로 나타난 것이다.

3)

비중은 물체와 무관하다. 그리고 온도의 전달은 물체에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그 관계는 상당히 외면적이다. 나아가 운동에너지는 속도뿐만 아니라 물체의 무게와도 관계하므로 물체에 더욱 내면적이다. 양적 관계가 물체의 질적 현존에 대해 내면화되는 과정을 헤겔은 다음과 같은 예를 통해 설명한다.

헤겔은 두 질적 존재 사이의 양적 관계가 점차 고도화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속도는 시간에 직접 비례한다[V=aT). 여기서는 두 정량은 단순 비례의 관계를 이룬다. 그러나 낙하 법칙에서 거리는 시간에 대해 제곱 비례한다[S=1/2gT²]. 좀 더 발전하면 천체 운동에서 공전 속도의 제곱은 장 직경의 세제곱에 비례한다[T² ⍶ a³ ]

헤겔은 속도와 같은 등속도 운동을 부자유 운동, 낙하 법칙과 같은 가속도 운동을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운동이라 하며, 마지막으로 천체 운동과 같은 것을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운동이라 하는데, 그 까닭은 직접 비례에서 제곱 비례로, 나아가서 삼 제곱 비례로 발전하면서 운동이 물체 자체에 내재하는 운동으로 보기 때문이다.

마침내 천체 운동에 이르면 이는 이제 개념 운동에 개념이 자기 자신을 구별하여 다시 복귀하는 운동에 다가간다. 이제 천체 운동에서 운동을 이끌어가는 ‘개념’은 곧 양자의 관계를 이루는 비례지수다. 즉 a³/T²이다. 이 지수가 자기를 분화하며 다시 통일한다. 그런 가운데 천체 운동 궤적 위에 모든 점이 형성된다. 그 점들은 비례지수라는 ‘개념’의 특정한 ‘현존’에 지나지 않는다.

천체 운동을 위에서 개념의 현존으로 규정하기는 했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아직 천체 운동을 개념과 현존의 관계로 규정할 수 없다. 개념과 현존의 관계는 논리학 개념론에 이르러서야 등장한다. 그 이전에 본질론에서는 유사한 관계가 본질과 현상의 관계로 다루어진다. 그러나 지금 이 관계는 아직 본질과 현상의 관계라고도 할 수 없다. 이 관계는 다만 대자 존재와 일자의 관계다. 질적 범주에서 이미 대자 존재와 일자가 출현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대자 존재는 질적 대자 존재와는 구별된 양적 대자 존재라고 보아야 한다.

4)

이미 설명했듯이 헤겔은 이 관계에서 양적 관계는 처음에는 두 질적 존재에 대해 무차별했다. 구체적으로 비중은 물체의 질적 측면에 대해 무차별하다. 그러나 양적 측면과 질적 측면 사이에서 연관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구체적으로 열에너지는 사물마다 다르게 전달된다. 각 사물에는 열이 전달되는 고유한 척도가 있다. 이렇게 사물마다 달라지는 척도가 곧 특정화된 척도다.

직접적 척도는 다만 어떤 정량이며, 사실 질적인 것을 자기에 부착하고 있는 하나의 개별적 정량 일반이다. 선행하는 규정인 척도는 단순한 외면적인 정량을 질적인 것을 통해 변화하는 것이었는데 이런 특정화하는 척도 속에서는 두 가지 크기 규정성의 구별이 정립되며 이와 더불어 일반적으로 공통적인 외적 정량에서 다수의 척도가 정립된다.”(논리학 재판, GW21, 337)

마침내 두 질적 존재 사이의 양적 관계가 직접 비례, 반비례, 제곱 비례로 발전하면서, 두 질적 존재의 양적 관계의 측면은 각각의 질적 측면과 더 긴밀하게 통일을 이루게 된다. 마침내 두 질적 현존 사이에 천체 운동의 법칙과 같은 관계가 출현한다. 이 천체 운동이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운동이듯이 두 질적 현존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여기서 두 현존의 양적 관계는 두 질적 현존에 내재하게 되며, 이를 통해 자유로운 관계가 출현하게 된다.

이 자유로운 관계에서 두 현존의 양적 비례지수가 개념이 된다. 이 개념을 헤겔은 부정적 통일성이라 하며, 관계를 맺는 두 측면은 즉 질적 현존은 이 개념의 자기 구별에 해당한다. 이 개념은 이제 완전한 자립성을 획득하며, 자기를 이중화하면서 두 현존이 된다.

처음에 직접 비례적인 양적 관계는 질적 현존에 대해 무차별한 관계다. 이때 질적 현존은 그 양적 관계와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자유로운 운동에 이르면, 양적 관계는 질적 현존에 내재화하면서 이제 더는 양적으로 규정될 수 없는 관계가 된다. 그것은 이미 통약 불가능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제 질적 현존의 양적 관계를 넘어서 질적인 것 자체의 관계가 출현한다. 순전히 질적인 것들 사이에 어떤 상호 연관을 헤겔은 실재화된 척도라고 규정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친화성의 관계다.

“그러나 좀 더 발전된 규정을 이루는 것은 척도가 이제 이런 방식으로 실재화된다는 사실이며, 그 두 측면이 하나는 직접적이며 외면적인 척도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내에서 특정화된 척도라는 점에서 구별되는 척도라는 사실이다. 이런 통일로서 척도가 이루는 관계 속에서 크기는 질적인 것의 본성을 통해 규정되고 상이하게 정립되며, 따라서 그 관계 규정성은 전적으로 내재하며 자립적이고 동시에 직접적 양을 구성하는 대자 존재 속으로, 직접 비례를 구성하는 지수 속으로 몰락하고 만다.”(논리학 재판, GW21, 462)

“부정적 통일성이 곧 실재적인 대자 존재이며 어떤 것의 범주 즉 척도 관계 속에 존재하는 질의 통일로서 존재한다. 이는 완전한 자립성이다. 두 가지 상이한 비례로 발생한 이 두 가지 질은 직접적으로는 이중화된 현존을 제공한다. 더 상세하게 말하자면 그와 같은 자립적 전체는 대자 존재하는 것 일반으로서 구별된 자립적인 것으로 반발하는 것이며 그것의 질적 본성과 존립(물질성)은 척도의 규정성 속에 있다.”(논리학 재판, GW21, 344)

헤겔 형이상학 산책59-척도의 종류: 비중과 온도[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59-척도의 종류: 비중과 온도

1)

정량은 외연량, 내포량, 제곱 양을 거쳐 척도에 이른다. 이상에서는 하나의 정량이 다루어졌다. 제곱 양에서 두 정량이 관계하지만, 아직은 하나의 정량이 반복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서로 다른 두 정량이 서로 관계하면서 척도가 출현한다. 예를 들어 부피와 무게가 서로 관계하는 것으로서 비중과 같은 것이다.

하나의 정량은 개별적 사물에 속하지만, 척도는 여러 사물에 공통으로 속하며 그런 점에서 특수성[Besonderheit]을 지닌 정량이 된다. 이 척도는 어떤 사물의 고유성을 규정하는 것 즉 특정[sdpezifisch] 양이 된다. 그러나 아직 이 고유성은 주관적인 것에 지닐 뿐이니, 이제 논리학의 운동은 객관적으로 고유한 것 즉 본질 또는 이데아에 이르는 운동을 전개한다.

이런 운동에서 핵심은 앞으로 서술되겠지만, 이해의 단서를 위해 미리 제시하자면, 사물에 우연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척도가 그 사물에 필연적인 척도로 이행하는 과정이며, 이런 이행은 동시에 개별 사물의 부수적 속성에 그치는 척도가 독자적으로 실재하는 척도가 되는 과정이다.

헤겔은 이런 운동을 마치 논리적 범주 자체가 자기를 전개하는 것처럼 서술했지만, 이는 서술의 문제이며 사실 이 운동의 바닥에는 경험의 발전이 놓여 있다. 그런 경험의 발전은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의 경험이라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정신현상학에서 이 운동은 지각에서 지성으로 발전하는 운동이며, 역사적으로는 그리스 철학에서 소피스트를 넘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철학이 등장하는 시기다.

여기서는 그런 경험의 발전에 관한 정신현상학의 설명은 전제로 할 뿐,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다만 이를 전제로 하여 논리적 범주의 운동으로만 서술하자.

2)

앞의 글에서 사물의 척도를 논의했을 때는 척도의 개념은 추상적이었다. 이 척도는 각 사물의 특정량으로 다루어졌다. 이런 척도가 상호 비교될 때 비교의 기준이 되는 것이 표준이다.

예를 들어 물의 비중을 기준으로 하면, 철의 비중은 물보다 크고, 나무의 비중은 물보다 작다. 이런 비중은 물의 비중을 표준으로 하여 비교된 값이므로, 앞에서 다룬 내포량에 해당한다. 물론, 앞서 설명된 내포량은 개별 정량에 관한 설명에서 제시된 범주지만, 이제는 두 정량의 관계를 통해 출현하는 새로운 정량 즉 특수 양에 적용된 것이다.

어떤 것의 표준[Massstab]이 되는 것은 이제 사물의 잣대[Regel]이 된다. 표준은 다만 비교를 위한 기준점에 불과하다. 표준은 다만 크고 작은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철을 물속에 빠뜨리면 가라앉으니, 철의 비중은 물보다 크지만, 나무는 물 위에 뜨니까 물보다 그 비중이 작다.

이처럼 단순히 비교를 통해 아는 것과 달리 잣대가 되면 사물의 척도는 이 잣대의 크기를 통해 산술적으로 측정될 수 있다. 단순히 비교의 기준이 된다고 해서 다 잣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즉 철이나 나무도 표준으로 삼을 수는 있지만, 그런 것이 잣대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잣대가 되는 것은 단순히 크고 작다는 비교를 넘어서 다른 것을 규정하는 수적 단위가 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비중의 잣대가 어떻게 규정되는지는 모르지만, 비중을 재는 저울이 있다고 한다. 비중병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생긴 것인지는 모른다. 비중을 재는 비중계를 쓰면, 사물의 비중은 수적으로 증가하는 일정한 크기로 측정될 수 있다.

이 비중병으로 재면 철의 비중은 10이 되고 나무의 비중은 0.1이 된다(예이니까 구체적 수치의 오류에 괘념하지 말자). 0.1에서 10으로 전개되는 이 수적 크기는 하나의 정량을 규정되는 외연량이지만, 이제 여기서 이 잣대는 앞서 설명한 단순한 외연량에 그치지 않고 두 정량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 양에 적용된 범주다.

3)

이 잣대는 두 가지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의 관점은 잣대의 양적인 크기에 관한 관점이다. 이 점에서 잣대는 이중성을 지닌다. 이 저울에서 크기는 수적으로 변한다. 이 변화는 점진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양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저울은 단순히 무게를 재는 저울과는 다르다. 그것은 비중병을 이용한 저울이니 그 자체 무게와 부피의 관계로 이루어진 특별한 저울이다. 이런 관점에서 비중병은 질적인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 즉 비중병이라는 잣대로 다른 사물의 비중을 재는 관점에 보자면, 비중병은 다른 사물의 척도를 재는 단위[Einheit]가 되며, 다른 사물의 척도는 그런 단위를 통해 재어진 결과 얻어지는 양적 크기 즉 개수[Anzahl]가 된다. 전자의 관점에서 비중병은 그 자체로 규정된 크기이며, 후자의 관점에서 크기는 특정한 크기다.

“이민 언급된 것과 같이 잣대나 표준은 그 자체에서 규정된 크기로 존재한다. 그런 규정된 크기는 단위가 되면서 특수하게 현존하는 사물이 지닌 정량에 대립한다. 그 사물의 정량은 잣대가 되는 것이라고 할 다른 것 곁에[an] 현존하고 그 잣대에서[an] 측정되면서 그런 단위의 개수로서 규정되는 것이다.”(논리학 재판, GW21, 333)

“이런 비교는 외적인 활동이며 그 단위는 그 자체 임의적 크기이며 마찬가지로 다시 어떤 개수로서 정립될 수 있는 것이다.(보폭은 일정한 수의 뺨이다) 그러나 [비교의] 척도는 다만 외적인 잣대는 아니며 오히려 어떤 정량을 지닌 타자에 대해 그 자체에서 관계하는 특정한 것이다.”(논리학 재판, GW21, 333)

어떤 사물을 잣대로 측정하면 일정한 개수가 나온다. 앞의 예에서 물로 만든 비중계로 측정하면 철은 10이 나오고 나무는 0.1 나온다. 이 비례지수가 각 사물을 규정하는 사물의 척도가 된다.

여기서 어떤 사물이 잣대가 된다고 할 때 그것은 다른 것에 대해서는 단위가 되지만, 그 자신으로서는 고유한 양적 크기를 가진다. 물을 표준으로 삼지 않고 나무를 표준으로 삼는 비중 잣대(비중계)가 가능하다고 한다면, 이 나무 비중계는 물 비중계(현재 사용되는 비중병)과 비교해서 어느 것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거리를 측정할 때 자로 재든, 미터로 재든 마찬가지인 것과 같고, 은이 화폐로 사용되든, 금이 화폐로 사용되든 마찬가지였던 것과 같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총수를 지닌 것이 하나의 단위로 사용되는가는 자의적인 것(또는 관습적인 것)이다.

4)

이상에서 척도와 표준과 잣대의 관계가 설명되었다. 유사한 말이지만, 헤겔은 다른 맥락에서 사용한다는 것이 이해된다. 사물의 비례 양을 추상적으로 말하면 척도다. 그 척도가 다른 것과 비교될 때 기준이 되는 것이 표준이다. 이 표준이 되면서 외적인 양적 크기로 다른 사물의 척도를 기술해 주는 것이 잣대다. 앞에서 등 비중을 예로 든다면, 비중 자체는 척도이며, 비중을 재는 표준은 물이다. 그리고 이 표준을 이용하는 비중계(소위 비중병)가 잣대다.

이제 척도(동시에 표준과 잣대)가 어떻게 발전하는가를 보도록 하자. 이제 다시 관점을 바꾸어서 척도를 이루는 두 요소 즉 두 서로 다른 정량 사이의 관계를 보자. 두 요소 사이 관계는 척도에 따라서 다르다. 우선 예를 들어 비중의 경우를 보자.

비중의 경우 모든 사물의 비중의 기울기는 같다. 부피가 증가하면 무게도 같은 만큼 증가한다. 그러나 온도의 경우는 다르다. 열량과 물체의 온도 사이의 관계는 사물마다 다르다. 어떤 물체는 동일한 열량이 전달되고 다른 물체는 느리게 전달된다. 물체마다 고유한 매체적 성질이 열량을 전달하는 데 개입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열과 물체의 매체 사이에 어떤 내적 연관성이 존재한다는 의미가 된다.

“외적으로 표상된 온도가 특정한 사물의 온도와 맺는 관계는 고정된 비례지수를 갖지 않는다. 사물에서 현존하는 열의 증가와 감소는 외적인 온도의 증가와 감소와 동양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따라서 외적인 열기가 가로로서 다른 것이 세로로서 표상된다면, 전자가 동양으로 증가하는 가운데 후자의 상응하는 변화를 통해서 곡선이 기술될 수 있다.”(논리학 초판, GW11, 197)

“온도는 그 온도 속에 처해 있는 상이한 특수한 사물에 의해 상이하게 받아들여진다. 왜냐하면, 이 사물들은 그것에 내재하는 척도를 통해서 외면적으로 수용되는 온도를 규정하며 그런 사물의 온도 변화는 매체의 온도 변화에 상응하지 않으며 다시 말해 그 매체의 온도 변화에 서로 직접 비례 관계 속에서 상응하지 않는다. 여러 사물은 동일한 온도 속에서 비교되면 특정화된 열이나 열용량 비례 수를 준다. 그러나 이런 사물의 열용량은 상이한 온도 속에서 변화되니 특정한 형태의 변화가 등장하는 것은 이 상이한 온도와 결합돼 있다.”(논리학 초판, GW11, 197)

이렇게 비중과 온도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는 비중과 온도가 다 같이 척도이지만, 그 척도가 사물 자체와 맺고 있는 관계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비중은 사물에 대해 외면적이지만, 온도는 사물에 내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이렇게 척도가 사물에 대해 내면적인 관계를 맺고 있을 때 그런 척도가 이제 실재하는 척도 또는 특정화하는 척도[spezifische Mass]가 된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 58-척도의 개념과 양질 전환의 법칙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 58-척도의 개념과 양질 전환의 법칙

1) 특정 양

3편 척도는 1장에서 척도의 개념을 다루며 2장에서 자립적 척도 또는 실재하는 척도를 다룬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것은 소위 화학적 친화성의 개념이다. 3장에 이르러 무-척도가 등장하면서 본질로 이행한다.

우선 1장에 다루어지는 척도의 개념을 살펴보자. 우선 헤겔은 ‘특정 양[spezifische Quantum]’의 개념에서 시작한다. 특정 양은 앞에서 말했듯이 서로 다른 정량들이 내적으로 관계하여 이루어진 정량을 말한다. 대표적인 예가 곧 비중이다. 이 비중[Gewicht]을 가리키는 말은 ‘특정화하는 무게[spezifische Gewicht]’로 규정되니, 헤겔이 여기서 특정 양[spezifische Quantum]이라는 말을 끌어낸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특정[spezifisch]는 ‘특수한[bosondere]’의 번역과 혼용될 수 있으나, 차이가 있다. 특수하다는 것은 여러 사물에 공통된 것을 의미하며, 특정하다는 것은 어떤 것이 지닌 고유성을 의미한다. 여기서 특정한 양이란 어떤 사물의 척도가 되는 양을 의미한다.

고대 그리스 원자론자는 처음에 물질은 형태나 크기와 같은 공간성을 지닌다고 보았다. 그러나 곧이어 원자의 고유성을 규정하기 위해 무게가 도입되었다. 아르키메데스에 이르러 사물의 비중이 발견되면서 비중이 사물의 고유한 척도가 된다고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특정한 양 즉 비중이라 규정되었다. 오늘날 비중은 사물의 고유한 척도의 자리에서 밀려난 지 오래다. 그러나 비중이라는 말은 그대로 사용된다.

헤겔의 경우 비중은 더는 사물의 고유한 척도가 아니다. 다만 주관적 척도가 될 수는 있으니, 그런 의미에서 특정한 양을 다루며, 그런데 이 특정한 양은 주관적 척도라는 의미이니, 가장 적합한 예가 비중이 된 것이다.

특정 양의 예로서는 흔히 발견되는 비중 말고도 속도가 있다. 속도는 거리/시간의 관계다. 단, 여기서 시간을 거리의 또 하나의 차원으로 본다면, 이 속도는 제곱 양에 머물러 있다고 보겠다. 헤겔은 앞에서 속도가 미분될 수 있는 이유로 이것이 제곱 양의 범주에 속한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러므로 앞으로 특정 양의 주된 예로 비중을 들려 한다.

2) 특정 양의 개념

앞에서 외연량과 내포량에 이어서 제곱 양 또는 제곱 관계가 다루어졌다. 외연량은 예를 들어 사물의 ‘길이’를 ‘길이’를 지닌 자로 규정하는 것이니, 자기를 통해 자기가 규정되는 양이었다. 내포량은 타자와 관계하는 양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를 통해 규정된 양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경도나 강도와 같이 동일한 정량을 다만 타자와 비교하여 규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제곱 양은 이미 두 정량의 관계를 의미한다. 여기서 두 정량이 관계하여 새로운 정량이 출현한다. 다만, 여기서는 두 정량은 실질적으로 같은 것의 다른 차원으로서 정량이다. 예를 들어 면은 선의 제곱이다. 예를 들어 같은 것 즉 선이 제곱하여 즉 자기 관계하여 다른 것 즉 면에 이른다.

그러나 특정한 양에 이르면, 실질적으로 서로 다른 정량의 관계가 다루어진다. 여기서는 두 정량의 관계를 통해 새로운 정량이 출현한다. 비중에서 무게와 부피는 실질적으로 서로 다른 정량이다. 서로 다른 정량이 관계하여 새로운 정량이 출현하니 그것이 곧 비중이다.

부피와 무게는 서로 무관하다. 그런데도 사물에서 부피 없는 무게가 없으며 무게 없는 부피도 없다. 그 때문에 무게와 부피는 내적인 연관을 지닌 것으로 파악되고 양자의 내적 연관이 비중이라는 말로 규정된다.

3) 특정 양의 두 측면

어떤 사물이 비중을 가진다고 할 때, 그 비중은 이중적 측면을 지닌다. 한 측면은 자기 관계의 측면 즉 질적인 측면이며 다른 측면은 외면성의 측면 즉 양의 측면이다. 비중은 분수 즉 무게/부피인데, 그 분수 값이 일정한 정수 예를 들어 1.5라면 이 분수 값의 측면은 외면적 양적인 측면이다.

그러나 이 값은 단순히 직접 주어진 무게가 아니라 무게를 단위 부피에 따라 나눈 것이며, 이는 무게가 부피를 통해 규정된 것이다. 이 부피가 무게에 외면적이라면 이는 자기 관계가 아니겠지만, 이 부피가 무게에 내면적이라면 이는 자기 관계로 규정될 수 있다. 이 자기 관계는 감각적 질과 같은 직접적인 자기 관계가 아니라 타자를 통해 자기로 복귀한 것이므로 매개된 자기 관계다. 그러므로 비중은 자기 매개를 통해 출현한 질적인 측면이 된다.

여기서 비중의 양적인 측면은 증감 가능하며, 외적 규정에 열려 있고 이런 양적인 증감은 점진적 연속적이다. 그러나 어떤 비중의 질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물체마다 고유한 비중을 지니므로, 이런 양적 관계(무게/부피) 값의 변화에 따라서 하나의 물체는 다른 물체로 변화하게 된다. 예를 들어 온도가 내려가면 수증기는 물이 되고, 다시 더 내려가면 얼음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비중은 물체의 척도가 된다.

일반화하여 말하자면, 특정 양은 양적 측면에서 보면 다른 정량과 마찬가지지만, 질적인 측면에서 보면, 물체를 규정하는 고유한 척도가 된다. 고대인의 눈에는 비중이 물체마다 다르므로 물체의 본질을 규정하는 객관적 척도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런 척도는 물체의 본질이 아니라 어떤 상태를 규정하는 척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말하자면 주관적 척도다. 이런 주관적 척도이므로 이 비중은 ‘특정한 양’에 머무른다.

“현존에서 나타나는 양적 규정성은 이중적 규정성이어서 즉 한번은 질이 의존하는 규정성이며 다른 한 번은 이 질과 무관하게 이리저리 옮겨 다닐 수 있으니, 하나의 척도를 지닌 어떤 것의 몰락은 그것의 정량이 변화되는 것 속에서 일어난다. 이런 몰락은 한편으로는 기대되지 않은 것으로서 나타난다. 왜냐하면, 정량에서는 척도나 질을 변화함이 없이 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런 몰락은 개념적으로 파악되는 것으로 되니 즉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몰락이다.”(논리학 재판, GW 21, 331)

4) 표준의 개념

물체마다 고유한 비중을 지닌다. 물의 비중이 1이라면 철의 비중은 그보다 높을 것(예를 들어 10이라고 하자)이고 나무의 비중은 그보다 낮을 것이다(예를 들어 0.1이라 하자). 여기서 물체의 비중을 측정하는 표준은 물이다.

물은 고유한 척도 즉 1이라는 비중을 지니고 있다. 헤겔은 이것이 모든 물체의 비중을 재는 단위가 된다는 점에서 ‘본래적으로 규정된 존재[an sich Bestimmtsein]’이라 한다. 앞에서 정량을 규정할 때 그 단위가 되는 일자를 헤겔은 마찬가지로 ‘본래적으로 규정된 존재’로 언급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라.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이 표준적 단위는 자의적인 것일 뿐이다. 비중의 기준이 되는 것을 보통 물로 보고, 물의 비중을 1로 규정한다. 왜 물이 비중의 표준 또는 기준이 되어야 하는지는 관습적인 것일 뿐이다.

일상적 삶에서 긴요한 것이 항해이니 물에 뜨는가 아닌가이니, 아마 물의 비중을 1로 규정해서 기준으로 삼았을 것이다. 항해를 위해서는 물 대신에 바닷물을 표준으로 삼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척도는 일상적 의미에서 표준이니, 그것은 외면적 개수[Anzhal]에 대립하여 그 자체에서 규정된 총수[Einheit]로서 자의적으로 받아들여진 정량이다. 그와 같은 단위는 사실상 그 자체에서 규정된 총수일 수 있다. 예를 들어 피트나 그와 같은 근원적 척도다. 그러나 그런 총수가 표준[Massstab]으로서 다른 사물에 적용되는 한에서 그 사물에 다만 외면적이며 그것에 내재하는 척도는 아니다.”(논리학 재판, GW 21, 330)

이제 어떤 물체의 비중을 물이라는 표준을 통해서 보자. 물체의 비중 자체는 추상적인 양이다. 비중이 무게/부피라고 해서 무게를 재고, 부피를 측정하면 비중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물체의 비중을 재기 위해서는 먼저 단위가 되는 물의 부피를 정해야 한다. 물 1L의 부피에 해당하는 무게가 1kg이면, 철이나 나무 1L의 부피를 잰 다음 그것의 무게를 알아보아야 그 비중을 알 수 있다.

철이나 나무는 일정한 무게와 부피를 지닌다. 이런 무게나 부피의 관계는 직접적 정량이다. 그러나 이 비중을 물이라는 표준을 통해서 본다면 일정하게 규정된 비중을 지닌다. 이 비중은 타자를 통해 자기 관계하는 것 즉 특정화된 양이다.

물체의 특정화된 양은 곧 비례 지수가 된다. 예를 들어 이 물체의 비중은 물체의 무게와 부피 사이의 비례를 규정하는 비례 지수가 된다. 물체의 무게는 물체의 비중* 물체의 부피가 될 것이다. 물체의 부피를 알면 우리는 그 무게를 알 수 있다.

5) 자연 변증법

비중이 두 측면 질적 측면과 양적 측면을 지니므로 여기서 그 유명한 법칙 양질 전환의 법칙이 나온다. 양이 변화하면 질이 변한다는 법칙이다. 이 법칙은 엥겔스가 자연 변증법에서 이를 자연의 한 법칙으로 삼았고 구체적 예로서는 수증기가 물로 되고 물이 얼음으로 되는 것을 들고 있다. 이어서 엥겔스는 사회적 생산에서 생산력의 양적 변화가 생산 관계라는 질을 변화한다는 예를 통해 이를 설명했다. 그 이후로 이 법칙은 널리 알려진 법칙이다.

엥겔스가 자연 변증법의 법칙을 세 가지로 들었는데 그 각각이 헤겔 논리학에서 나왔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 가운데 양질 전환의 법칙은 바로 지금 우리가 다루는 존재론의 영역에서 나온다. 상호 침투의 법칙은 본질론에서 끌어낸 것이다. 이중 부정의 법칙은 개념론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엥겔스는 이런 법칙을 자연의 일반적 법칙이라고 규정했고 그것이 적용되는 구체적 영역 즉 헤겔 같으면 존재론, 본질론, 개념론이라는 영역을 표현해 주지 않았다. 그 결과 이런 법칙들이 무차별하게 아무 데나 적용되곤 했다. 헤겔의 존재론은 역학의 영역이다. 본질론은 굳이 찾자면 생물학의 영역이다. 개념론은 인간 사회의 영역이다. 그렇다면, 각 영역에 다른 법칙을 적용해야 마땅하다.

특히 양질 전환의 법칙은 앞서 말한 대로 헤겔이 특정 양의 영역에 적용한 것이다. 그것은 물체의 어떤 상태를 양적으로 표현할 때 나온다. 구체적 예는 비중과 같은 것이다. 이런 영역을 넘어서 다른 영역에 이런 법칙을 적용하는 것은 헤겔의 관점에서 본다면 범주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중이 바뀌어 수증기가 물이 되고 물이 얼음이 되는 것은 마땅히 양질 전환의 법칙이 적용될 만하다. 그러나 생산력과 생산 관계가 논의되는 사회적 영역에서 단순히 양질 전환의 법칙을 적용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 57-척도와 양상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 57-척도와 양상

1)

헤겔 논리학 1부 존재론 1편이 질[그 제목은 ‘존재’지만 실질적으로 질을 다룬다], 2편이 양, 그리고 3편은 척도를 다룬다. 감각적 성질은 각기 독립적이며 서로 무차별하다. 양은 동일한 일자들의 서로 무차별한 관계다.

양을 다루면서 양들의 연속성과 불연속성(분산성)이라는 이중적 관계를 살펴보고, 이어서 이런 양들의 관계가 외연량의 관계와 내포량의 관계로 나누어질 수 있음을 보았다. 외연량은 예를 들어 어떤 것의 길이를 다른 것의 길이를 통해 측정한 것이다. 이는 수학적으로 기수를 통해 표현된다. 내포량은 어떤 사물의 경도를 잴 때, 단순히 다른 사물과 비교하여 측정한 것이다. 이는 수학적으로 서수를 통해 표현된다.

“존재 그 자체는 규정성이 직접 자기와 동일하게 된 것[질적인 것]을 말한다. 이 직접적 규정성은 지양된다. 양은 존재가 자기 내로 복귀한 것이어서 규정성에 무차별한 것으로서 단순한 자기 동일성[대자 존재적 일자]이다. 그러나 이 무차별성은 외면성일 뿐이며, 자기 자신에서가 아니라 타자에서 규정성을 갖는 것이다.”(논리학 재판, GW 21, S. 323)

외연량과 내포량은 한 사물이 지닌 하나의 정량이 다른 사물이 지닌 동일한 정량을 통해 규정된다는 점에서 아직 하나의 정량과 다른 정량의 관계가 출현한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두 정량의 관계는 수학적으로는 비례를 통해 또는 분수를 통해(왜냐하면, 비례는 다시 분수화 될 수 있으므로) 표현된다.

처음 직접 비례는 두 정량의 서로 무차별한 관계다. 이는 정수비의 관계다. 역 비례에 이르면 두 정량의 관계는 어떤 한계 내에 묶이지만(서로 곱하면 동일한 수이므로), 여전히 서로 외면적인 관계 아래 있다. 마침내 정량이 제곱 비례의 관계, 통약 불가능한 무리수적인 분수의 관계에 있게 되면 서로 다른 두 정량 사이에 내적인 관계가 출현한다. 예를 들어 거리는 시간의 제곱이다.

이런 제곱 관계조차 사실 여전히 외면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거리는 시간의 제곱이라 할 때, 사실 시간은 거리의 일종으로 다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마침내 서로 다른 두 정량이 내적인 관계를 지니는 단계에 이르면, 그것이 곧 특수 량이다. 예를 들면, 비중은 무게와 부피의 내적 관계다. 이때 무게 없는 부피가 없으며, 부피 없는 무게는 없지만, 무게와 부피는 서로 다른 것이다.

2)

이 특수 량이 곧 사물의 척도다. 여기서 척도라면 어떤 사물의 고유한 크기를 말한다. 예를 들어 사물의 무게나 부피 각자로는 사물의 고유성을 표현할 수 없다. 어떤 사물의 고유성은 그 사물의 비중을 통해 규정될 수 있다.

“제삼의 것[척도]은 이제 외면성이 자기 관계하게 된 것이다. 자기 관계하면서 동시에 외면성이 지양되니 자기 관계 자체에서 자기와의 구별[두 정량의 내적 관계]을 갖는다. 그래서 이 구별은 외면성으로서는 양적인 계기이며 자기 내로 복귀한 것으로서는 질적인 계기다.”(논리학 재판, GW 21, S. 323)

물론, 이 비중은 아직 진정한 사물의 본질을 규정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사물의 본성을 다만 주관적으로만 규정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특수한 일반성이다. 이것은 마치 질을 다룰 때 감각적 질이 일반적인 질 즉 성질[Eigenschaft]로 발전한 것과 같다. 일반적 성질은 아직 객관적으로 일반적인 것 즉 이데아적인 성질(이것이 헤겔에서는 곧 대자 존재다)이 되지 못하며 다만 주관적으로 일반적인 것 즉 특수성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주관적 일반성이 사물의 양적인 관계에서 출현할 때 척도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앞에서 질 범주의 논리적 발전 과정을 생각해 보면 이 척도가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 것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척도는 주관적 척도에서 객관적 척도로 이행할 것이다. 그것이 본질인데, 마치 주관적 일반성 즉 성질 가운데 진정으로 일반적인 성질 즉 이데아를 찾는 것이 지난 한 작업이듯이, 주관적 척도에서 마침내 본질에 이르는 길은 지난한 길이다.

앞의 길에서 우리는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 개념을 참조로 했는데, 주관적 척도에서 객관적 척도 즉 본질로의 이행에도 유사한 철학적 논의가 전개될 것임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3)

척도의 문제를 끄집어내는 서두에서 곧바로 헤겔은 양상 범주에 대한 논의를 던진다. 헤겔은 이 특수 량 즉 척도가 질 범주와 양 범주에 이어지는 양상 범주에 해당한다고 본다. 사실 양상 범주는 우연성, 현실성, 필연성 범주를 말하는데 논리학에서 1권 2부 본질로 마지막에 다루어진다. 그것은 본질론에 들어가 관계의 범주를 다룬 끝에 등장한다.

논리학이 1권에서 1부 존재론에서 질 범주와 양 범주를 다루고 2부 본질론에서 관계 범주와 양상 범주를 다룬 것은 칸트의 판단론의 12 범주의 체계에 따른 것이다. (다만, 칸트의 경우 양 범주가 먼저 나오고 질 범주가 나오는데, 헤겔은 질 범주를 먼저 다룬다) 칸트는 이런 범주들 사이에 어떤 발전이 존재한다고 보지는 않았으며, 각 범주는 마치 좌표 체계처럼 경험과 관계했다. 그러나 헤겔은 이런 범주들 사이에도 논리적 발전이 존재한다고 보면서, 그런 논리적 발전에 따라 논리학을 구성했다.

이런 논리적 발전의 배후에는 다시 정신현상학에서 보는 것과 같은 시간적 발전이 깔려있다는 사실은 앞에서 논리학 서문을 다룰 때 이미 언급했으니, 그 부분을 다시 참조하기 바란다. 그런데 여기서 헤겔은 1부 존재론에서 1편 질 범주와 2편 양 범주에 이어서 등장하는 3편 척도 범주 사이에도 어떤 범주적 연관이 존재한다고 본다. 그러면서 그 범주들의 범주적 관계를 실체와 속성 그리고 양상이라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범주 체계(스피노자의 형이상학적 체계 구성을 생각해 보라)를 통해 이해하려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척도는 양상 범주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질 범주는 실체 범주에, 양 범주는 속성 범주에 해당하는 것이냐고 반문할 수밖에 없는데, 헤겔은 그 점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우리의 추측에 맡길 뿐이다. 우리도 굳이 여기서 그 점을 고민하려 하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헤겔이 여기서 양상 범주를 끌어들인 것은 이 3편 척도가 다루는 내용의 독특성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양상 범주는 문법적으로는 부사에 해당한다. 전통적 형이상학에서는 주어인 실체에 비해보면 중요하지 않은 우연적이고 개별적이고 유한한 것이다. 양상은[Modus] 사물의 양식[Art]과 방식[Weise]이다. 그러므로 양상에 해당하는 것은 제거되고 부정되고 만다. 헤겔은 이런 점을 지적하기 위해 범신론(구체적으로는 스피노자의 범신론과 인도의 범신론)에 양상이 다루어지는 방식을 소개한다.

“스피노자주의에서 바로 양상 자체가 비 진리이며 다만 실체가 진정한 것이듯이 모든 것은 이 실체로 환원되어야 하며 그래서 이 모든 것은 모든 내용을 다시 공허에 빠뜨려야 하며 다시 말해 다만 형식적이고 내용이 없는 통일성 속으로 빠뜨려야 하니, 시바[인도 형이상학 체계-브라만, 크리슈나, 시바-에서 시바] 역시 위대한 전체이며 브라만으로부터 구별되지 않은 것 즉 브라만 자체다. … 생성과 소멸 즉 양상 일반의 영역에 처해 있는 인간에게서 최고의 목표는 의식이 없는 것 속에 침잠하는 것이며 브라만과 통일하고 무화되는 것이다.”(논리학 재판, GW 21, S. 325)

4)

헤겔은 이런 전통 형이상학 체계에서 양상 범주는 그 본래 진정한 의미에서 다루어지지 못했다고 본다. 헤겔은 양상은 개별적이고 우연적이며 유한한 것이지만, 그 자신을 스스로 부정하면서 즉 자기 내로 복귀하면서 오히려 진리인 실체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기독교 신학에서 양상 범주의 중요성을 주목하는데 그리스도는 개별적이고 유한한 존재로 출현했다. 그런 점에서 양상 범주에 해당한다. 하지만, 자기를 부정하면서 마침내 신이 되니, 양상 범주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헤겔은 질과 양에 이어서 등장하는 척도는 이런 자기 부정적인 양상 범주에 해당한다고 말하면서, 이 척도에서 본질로의 이행이 이런 자기 부정성의 운동과 관련된다는 사실을 말하려 한다. 척도에서 본질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척도가 없는 것 즉 무-척도[Masslose]에서 본질이 나온다는 것이다.

물리학적 자연은 척도를 지닌다. 자연을 수학화 하는 것은 이런 척도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척도는 어디까지나 양적 관계다. 이 양적 관계는 아무리 수학적으로 복잡한 체계를 통해서도 그것은 척도에 머무르며 진정한 본질에는 이를 수 없다. 물리학적 자연 속에서는 본질은 찾을 수 없다. 본질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제2 실체가 그렇듯이 물리학적 자연을 넘어선 생물의 영역에서 찾아진다.

그 과정에서 헤겔은 우선 화학의 영역에서 등장하는 친화성 개념을 검토한 후 마침내 생물의 영역에 이른다. 이 생물의 영역에서는 모든 것은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척도를 상실해 버린다. 생물은 척도나 수를 통해서 규정될 수 없다. 이 영역에서 마침내 본질이 출현한다.

척도가 본질로 이행하는 과정이 이제 앞으로 다루어질 것이다. 그 관계에 대해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척도 속에는 이미 본질의 이념이 들어 있으니 즉 규정되어 있음의 직접성 속에서 자기 동일적이라는 이념이 들어 있다. 그와 같은 직접적 본질[즉 척도]은 자기 동일성을 통해 매개된 것으로 격하되고 마찬가지로 이런 매개된 것은 다만 외면성을 통해서 매개된 것이지만, 자기 매개이다. 그것은 반성이로되 그 규정성들이 존재하며 그러나 반성은 이런 존재 속에서 단적으로 그 부정적 통일의 한 계기가 되는 것일 뿐이다.”(논리학 재판, GW 21, S. 326)

이 구절에서 척도의 이중성을 설명한다. 척도는 자기 매개, 자기 동일성과 타자 즉 외면성을 통해 매개된 것이 합일하면서 생겨난 것의 통일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의 정량이 다른 정량과 내적으로 관계 맺고 있다는 의미다. 내적인 관계이므로 자기 관계이며, 타자와 관계하므로 외면성을 통해 매개된 것이다. 이런 척도는 앞으로 본질로 발전하니, 척도 개념 내에 이미 본질이 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질은 자기 내 반성과 직접성의 합일이니, 생물의 종이 개체 속에서[직접성] 자기를 재생산하는[본질] 관계를 통해 본질 개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56-비례 형태의 발전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56-비례 형태의 발전

1)

앞에서 헤겔은 정량이 비례로 발전하는 과정에 관해 설명했다. 그 과정은 하나의 추상적 정량이 다른 정량과 관계를 맺어 구체적인 복합적 정량으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외연량, 내포량, 그리고 양적 비례[비례량]의 개념이다.

외연량은 추상적 고립적 양이다. 내포량 즉 정도[Grad]는 개별 양이지만, 이미 타자와 비교해서 규정되는 양이다. 마침내 양적 비례에 이르러, 두 정량이 관계하면서 새로운 구체적 복합적 양이 나온다. 외연량의 대표적 예가 길이, 무게다. 내포량의 대표적 예는 경도나 강도가 될 것이다. 양적 비례 또는 비례량의 대표적 예는 비중이다. 알다시피 비중은 무게와 부피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헤겔은 외연량에서 비례량에 이르는 과정은 양적 부정성 개념이 매개된다고 한다. 하나의 외연량은 자기를 부정하면서 타자 즉 다른 정량이 되는 데(일차적 부정) 이 타자로부터 다시 자기 내로 복귀하면서(이차적 부정) 비례량이 된다. 이 이중 부정의 과정은 개념의 자기 전개 과정이지만, 이 과정을 매개하는 것은 경험의 발전이다. 우리는 경험 속에서 처음에는 추상적 양을 발견하지만, 좀 더 경험이 발전하면 다른 양의 비례 관계를 통해 이루어져 있는 구체적 복합적 정량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헤겔은 이 과정에서 수 개념이 전개되는 것으로 본다. 수는 정량을 대표[또는 대리]하는 것 즉 상징, 그 기호다. 이런 수는 더하기에서 나누기로 발전하는 데, 이런 수의 발전은 수 자체가 발전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량의 발전과정을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더하기가 외연량을 표현한다면, 분수는 내포량을 표현한다.

2)

이제 헤겔은 비례 자체의 발전을 다룬다. 이미 앞에서 우리는 비례를 다루면서, 양의 관계로서 비례가 발전한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비례가 분수로 표현된다고 할 때, 이 분수는 통약 가능한 정수비에서 통약 불가능한 무리수 비로 발전한다고 했다.

헤겔은 무리수 비를 다루면서 주석에서 미분 개념의 정당화라는 거의 100쪽에 달하는 논의를 전개했다. 이 무리수 비가 미분 개념의 핵심이며(그 반대인 제곱비가 적분을 이룬다), 이 무리수 비를 통해 헤겔은 하나의 정량이 다른 정량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주려 했다. 길이는 면으로 발전한다.

이런 발전은 한편으로 본다면, 동일한 정량의 한계에 머무른다. 예를 들어 선이 면이 되고, 속도가 가속도가 된다 할 때, 면은 길이의 제곱이다. 제곱이란 곧 같은 것의 반복이니, 같은 것의 한계 내에 머무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자기 반복을 통해 이미 다른 정량이 된다. 즉 길이와 면은 다른 정량이다.

이처럼 어떤 정량이 자기를 반복하는 것을 통해 다른 정량으로 발전하는 것이 곧 통약 불가능한 무리수 비례[앞으로 무리수 비라 하자]가 보여주는 모습이다. 이런 무리수 비는 같은 것의 한계 내에 다른 것이 출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 그다음 단계에서 출현하는 비례 즉 다른 정량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비례를 논리적으로 예고하며 그것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새로운 비례가 곧 두 다른 정량의 관계로 이루어진 비례 즉 비중과 같은 것이다.

새로운 비례는 역시 고유한 하나의 정량이다. 예를 들어 비중은 길이나 무게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정량이다. 그러나 비중은 두 정량의 관계로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서 두 정량은 완전히 다른 서로 무차별한 정량이다. 그러므로 비중은 길이가 면으로 발전하는 것처럼, 같은 것의 한계 내에 머무르는 것과는 구분된다. 그런 점에서 수 즉 무리수 비로 표현되는 것과 그 관계를 이제는 수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비중은 구분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이런 상상을 해보게 된다. 즉 어떤 정량이 무리수 비를 이루면서도 비중에서처럼 자기와 완전히 다른 정량으로 이행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가속 운동의 경우는 특이하다. 가속 운동은 시간의 차원에 한정해서 본다면 거듭제곱의 관계다. 속도가 가속도로 발전한다는 점은 마치 선이 면으로 되는 것과 같다. 그런데 가속도는 곧 힘이 된다. 시간이 힘으로 발전한다고 보면 여기서는 전혀 다른 것으로 되는 것으로 보인다.

헤겔에서 정량은 척도를 거쳐 마침내 본질에 이르게 되는데, 이런 발전은 우리가 여기서 상상한 목표를 향해 나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논의는 차후에 맡겨놓기로 하고, 우선 정량에서 비례를 거쳐 척도에 이르는 헤겔 자신의 설명으로 돌아가 보자.

3)

이상에서 헤겔은 양적 비례의 개념을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정수 비와 무리수 비가 매개됐는데, 필자가 헤겔의 설명을 미리 앞당겨서 끌어들인 것이다. 나중에 나올 것을 미리 끌어들이는 것은 필자의 고육지책이었다.

필자는 이 비례의 발전과정을 수학적인 분수 형태의 발전을 통해 설명했다. 정수 비와 무리수 비다. 헤겔은 이 발전과정을 비례 형태의 발전과정을 통해 설명했다. 정수 비는 헤겔에서 정비례에 해당하며 무리수 비는 헤겔에서 제곱비례에 해당한다. 필자는 단순히 둘로 나누어 설명을 단순화했으나, 헤겔은 가운데 역 비례를 집어넣어 설명이 좀 더 복잡하고, 매개 과정이 더 잘 설명된다. 이제 헤겔 자신의 설명으로 돌아가 보자.

외연량이 비례가 되면서, 두 정량의 관계가 나온다면, 이 정량의 관계는 그 비례의 형식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이 과정을 헤겔은 미분 개념을 길게 다룬 다음에 양적 비례라는 장(1부 존재론 2편 양적인 것, 2장 정량 3절 무한성에 이어서 3장에 해당한다)에서 다룬다. 여기서 헤겔은 비례의 다양한 형태를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즉 정비례와 역 비례 그리고 제곱비례다. 3절 제목인 제곱비례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사실은 이 부분이 미분 개념을 다루는 곳이다.

비례에서 두 정량이 관계한다. 두 정량은 이제 서로 무차별한 정량이 아니라 비례라는 관계 속에 묶여 있으니, 여기서 두 정량은 비례의 계기가 되며, 각 정량은 타자를 통해서 규정되니, 타자를 매개해서 자기 내로 복귀한다고 할 수 있다.

“두 정량은 본질상 외적인 양들로서 서로 관계하지 않는다. 각자는 그 규정성을 다른 것과 관계 속에서 갖는다. 따라서 각자는 그 타자 존재 속에서 자기 내로 복귀한다. 각자가 무엇인가는 타자 속에 들어 있다. 타자는 각자의 규정성을 이룬다.”(논리학 재판, GW21, S. 310)

4)

헤겔이 비례 형태의 발전을 다룰 때 주요 개념 장치는 곧 수 개념의 두 계기인 총수와 개수의 관계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개수는 단위가 몇 번이나 반복되는가를 말한다. 이는 집합 개념에 속한다. 반면 총수는 이 반복된 단위가 전체적으로 일정하게 규정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7이란 수는 개수로 보면 1이라는 단위가 7번 반복한 것이다. 그러나 이를 지칭하는 말 ‘일곱’은 7개의 개수 전체를 지칭하는 고유한 말이다. 이 ‘일곱’이 총수다.

이제 x와 y가 정비례 관계[y=ax]에 있다고 할 때, 이런 비례 관계 속에서 x, y 두 계기 중 y는 독립적인 정량이 아니라 이 비례 관계에 묶여 있는 계기로 규정된다. 즉 y(종속 변수)는 타자에 의해 규정된다. x 즉 독립 변수는 무차별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 비례 지수 a는 x를 a 번 반복하라는 의미이므로, 개수다. 이때 반복되는 단위는 곧 총수 x이다. 즉 x가 a 번 반복된다. 이때 a는 x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규정된 정량이다. 총수 x가 무차별한 정량이듯이 개수 역시 무차별한 정량이다.

y는 x를 a 번 반복해서 나오는 수이므로, a와 마찬가지로 개수에 해당한다. 그러나 지수는 단순히 개수일 뿐만 아니라 이제는 전체를 지칭하는 총수가 된다. 지수는 총수이자 개수로서 두 계기를 동시에 지니지만, 지수의 두 계기 x, a는 각기 하나의 계기만을 지닌다. x는 총수로서만 의미를 지니고, a는 개수로만 여겨진다.

5)

직접 비례에서 개수 a와 총수 x가 나뉘어 있고 서로 무차별한 데, 양자 사이에 일정한 관계가 성립하면서 지수와 총수가 통일을 향해 다가가면서 새로운 비례가 출현한다. 직접 비례에 이어서 출현한 비례는 역 비례다. 역 비례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즉 a= x*y이다.

여기서 x와 y는 서로 무차별한 독립적 정량이면서도 대립적 관계에 묶여 있다. 하나가 줄어들면 그만큼 다른 하나가 늘어나며 하나가 늘어나면 다른 하나는 감소한다. 그런 점에서 하나는 타자 속에 자기의 규정을 가지며 타자의 규정을 자기 속에 품는다. 타자를 자기의 비-존재라 할 때, 자기는 자기의 비-존재 속에 속하며, 타자의 비-존재 때문에 자기가 존재하면서 타자의 비-존재를 자기 안에 포함한다.

“그러므로 이 비례 속에 서 있는 크기들 가운데 하나는 자기를 연속해서 다른 하나로 넘어가서 이 하나의 크기는 그것과 다른 측면 즉 개수의 총수로 머무르지 않는다. 이제 이 하나의 측면은 다른 측면으로 부정적 측면으로 부정적 방식으로 연속된다. 하나는 자기만큼 티자 속에서 지양된다. 각자는 개수로서 타자를 부정하는 것이다. 각자는 다른 것이 줄어드는 만큼 존재한다. 각자는 이런 방식으로 다른 것을 포함한다.”(논리학 초판, GW11, S. 182)

지수는 그 자체로서는 직접적 정량이지만, 이미 그 내부에서 x, y의 구별이 출현한다. 각 구별된 계기는 전체의 계기이며, 잠재적으로 전체다. 비례 지수 a는 양자가 변화할 수 있는 한계가 된다. 각자는 자기의 한계에 다가가지만 아무리 가더라도 다가가지 못하니, 각자는 잠재적으로 한계이지만, 이는 무한진행이며 그 도달은 다만 피안이나 당위에 머무른다.

“지수는 이런 직접적 규정 속에서는 비례의 두 측면이 지닌 한계이며 이 한계 내에서 두 측면은 상호 대립적으로 증가하고 감수하지만,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지수는 그 한계, 두 측면의 비-존재를 이룬다. 왜냐하면, 지수는 존재하는 전체이지만, 두 측면은 다만 전체인데 한 면에서는 존재하는 것이며 다른 면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지수는 두 측면이 무한히 다가가는 두 측면의 피안이며, 무한진행의 악무한이다.”(논리학 재판, GW21, S. 316)

지수는 두 구별된 계기에 대해서는 접근할 수 없는 피안이지만, 그 자체로서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정량이다. 그러므로 지수는 피안이 현존하는 것이다.

“이런 양자가 다만 점차적으로 다가갈 수 있을 뿐인 무한자는 곧바로 긍정적 차안으로서 출현하며 현현한다. 그것이 곧 지수의 단순한 정량이다. 이 속에서 비례의 두 측면이 부착되어 있는 피안이 도달된다.”(논리학 재판, GW21, S. 316)

직접 비례에서 의존 관계는 일방적이다. 그러나 역 비례에서 두 정량의 의존성은 상호적이다. 그러므로 각각은 한편으로 독립적 정량이며 다른 한편으로 자기를 벗어난 정량이다. 이 가운데 독립적인 것은 총수가 되고 의존적인 것은 개수가 된다(x가 총수이면 y는 a/y의 개수를 지닌다). 어느 것이 총수가 되든 무방하지만, 자기를 총수라 하고 타자를 개수라 한다면 그 자신 속에 총수의 측면과 아울러 개수의 측면을 지니게 된다.

정비례에서 총수와 개수는 각기 독자적이고 서로 무차별한 정량이었다. 역 비례에서 총수와 개수의 통일이 출현하지만, 이런 통일은 다만 직접적이어서 교대적으로 한번은 총수가 되고 다른 한 번은 개수가 될 뿐이다. 총수와 개수가 완전한 통일을 이루는 가운데 제곱비례가 등장한다.

6)

헤겔은 역 비례를 거쳐 제곱비례를 설명하는데 이 제곱비례가 앞에서 미분 개념을 다룰 때 출현했던 것이다. 그 기본 형식은 x*x=x²의 형식인데, 여기서 x²이 곧 비례의 지수가 된다. 이 형태는 한편으로는 정비례와 닮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 비례와 닮았다.

즉 지수 x²이 총수 x에 따라 변화하고, x는 독립 변수이고 x²은 종속 변수라는 점에서 정 비례를 닮았다. 그런데 이 제곱비례에서는 총수와 개수가 서로 같다. 그에 따라 어느 것이 총수이고 개수이든 무방하며, 자기 안에 자기의 비-존재인 타자를 포함한다는 점에서는 역 비례와 닮았다.

“이제[제곱비례] 개수는 다만 총수에 의해 규정된 것으로서 정립된다. 이것이 제곱비례에서 나타나는 경우다. 제곱비례에서는 그 자체에서 개수인 총수가 동시에 총수로서 자신에 대립하는 개수가 된다.”(논리학 재판, GW21, S. 318)

이런 제곱비례에서 지수는 총수의 제곱인데, 총수가 의미하는 정량과 지수가 의미하는 정량은 서로 다른 것이 된다. 예를 들어 총수가 선이라면 지수는 그 제곱 즉 면을 의미하게 된다. 면과 선을 서로 다른 것으로 본다면, 여기서 어떤 것이 다른 것으로 이행한다는 생성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정량은 제곱 속에서 자신을 지양한다. 왜냐하면, 정량은 그 자신에게 타자로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자신의 타자는 동시에 순수하게 자기 자신을 통해 제한된 것이다.”(논리학 초판, GW11, S. 185)

그러나 선은 면의 한계, 그 끝이라고 본다면, 이 제곱비례는 곧 면이 자기를 통해 자기를 생성한 것이 되며, 자기의 끝, 타자로부터 자기 내로 복귀한 것이 된다. 비례는 이미 질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외연량처럼 추상적인 자기 관계가 아니라 타자에 대립해서 자기가 규정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타자를 통해 자기가 규정되는 제곱비례에 이르면 질적인 것이 비로소 완전하게 출현한다. 제곱비례의 운동은 자기가 자신을 부정하고 다시 자기로 복귀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7)

제곱비례를 넘어서면 비례는 마침내 완전히 다른 정량의 관계가 된다. 이때 비례는 새로운 정량이 되며, 두 정량의 관계는 더는 수적으로 표현될 수 없는 관계가 된다. 이것이 척도다.

질적인 것은 자기를 지양해서 양적인 것으로 된다. 질적인 것은 타자에 대립해서 타자에 의해 규정된다. 예를 들어 빨간색은 빨간색이 아닌 것에 대립해서 빨간색이 된다. 질적인 것은 일반적 성질로 발전하고, 두 가지 성질의 관계를 통해 대자 존재가 출현하면서 양적인 것의 영역으로 이행한다.

양적인 것은 정량으로 발전한다. 이 정량은 다시 두 개 정량의 관계를 통해 비례로 발전한다. 이렇게 해서 양적인 것은 질적인 것으로 복귀한다.

두 개의 서로 대립하는 운동, 질적인 것에서 양적인 것으로, 그리고 양적인 것에서 다시 질적인 것으로 이행하는 운동을 통해 마침내 척도가 출현한다. 이 척도는 서로 다른 두 량의 관계다. 예를 들자면 무게와 부피의 관계인 비중과 같은 것이다. 이 서로 다른 두 량은 제곱비례를 넘어서 두 정량의 비례로 출현한 것이다.

두 정량의 비례를 통해 이제 등장한 새로운 정량은 앞에서 다룬 정량과 구분된다. 앞에서 질적인 것이 일반적 성질을 거쳐 대자 존재로 발전했듯이, 여기서도 그런 발전이 일어난다. 외연량은 추상적인 개별적인 정량이었다면, 이제 등장하는 새로운 정량 즉 척도는 특수한 정량이다. 전자가 어떤 개별자에 한정되는 것이었다면, 이제 척도는 일반성을 지닌 정량이다. 그러나 마치 성질의 일반성이 특수한 주관적 일반성이듯이, 이 척도 역시 특수한 주관적 일반성에 지나지 않는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55-미적분은 정당한가(4)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55-미적분은 정당한가(4)

1)

이상에서 헤겔은 뉴턴의 미분 증명이 이론적으로는 다른 미분 증명보다 탁월한 점을 제시했다. 그것은 페르마, 라이프니츠, 칸트 등이 여전히 무한소나, 사라지는 크기 개념에 매달렸을 때, 뉴턴은 최종 비례라는 개념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미분은 곧 최종 비례이다.

그런데 헤겔은 뉴턴이 이론적으로 확립한 이런 최종 비 개념이 실제 계산 과정에서는 무시되고 말았다고 말한다. 헤겔은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제시한다.

①계산을 편리하게 한다는 욕구가 미분 계산이 지닌 문제점을 간과하게 했다.

헤겔은 뉴턴이 범한 오류를 곱하기 즉 x*y의 미분을 끌어낸 증명에서 발견했다. 이 곱하기의 미분은 (x+1/2dx)(y+1/2dy)-(x+1/2dx)(y-1/2dy)이다. 뉴턴은 그 답이 xdy+ydx라고 했는데 사실은 dxdy가 추가돼야 한다.

그런데도 계산상의 욕구가 뉴턴이 자기 답이 오류라는 것을 무시하게 했다는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뉴턴은 마찬가지로 미분 계산에서 첫 번째 항을 제외한 나머지 항은 그 값이 사소하기에 계산의 편의를 위해 버려도 무방하다고 보았다고 한다.

② 운동의 함수를 보면, 등속 운동은 v=ct 로 표현되고, 등가속 운동은 s=1/2at²이며 저항은 3차 함수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뉴턴은(이는 사실 라그랑쥬에서부터 유래하는데) 미분을 위한 전개식에서 첫 번째 항은 등속 운동을 의미하고, 두 번째 항은 등가속 운동, 세 번째 항은 저항을 의미한다고 본다. 이것은 전개식의 각 항에 질적 의미가 있다고 보는데, 예를 들어 낙하운동의 속도를 구하는 미분에서는 첫 번째 항 속도와 무관한 두 번째 이하의 항은 관계없으니 무의미한 것이라 보면서 제거했다는 것이다.

③세 번째는 카르노처럼 미분 계산에서 나오는 이항 정리에서 각 항은 동일한 비례가 반복되는 것에 불과하니, 버려도 된다는 주장이다.

2)

이어서 헤겔은 라그랑쥬의 입장도 소개하는데, 그는 뉴턴에 귀속되는 이유 중 ②을 포함하여 새로운 이유를 갖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미분 계산 가운데 이항 전개에서 나오는 각 항은 그다음 모든 항의 합보다 크기 때문에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항은 점차 미분의 거듭제곱이 더 커지는 것인데(예를 들어 dx, dx², dx³ …) dx가 아주 작은 수이니 그 제곱은 제곱으로 작아지기 때문이다. 라그랑주가 들고 있는 이 이유는 사실 첫 번째 항을 제외한 나머지 항은 그 값이 사소하다는 주장과 같은 주장이니 주장①에 통합해도 될 것이다.

라그랑쥬의 주장을 제쳐 놓으면, 남은 것은 뉴턴이 말한 세 가지 이유다. 이 가운데 ②, ③ 주장은 그 주장 자체가 합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그럴 것 같지 않은 주장이기 때문이다. 뉴턴이 정말 그랬을까 싶은데, 일단 헤겔은 그렇게 파악한다는 사실만 말하고자 한다. 헤겔 자신도 그런 주장을 소개만 할 뿐, 정당한지는 따로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핵심은 역시 첫 번째 주장에 있다. 뉴턴은 이론적으로는 최종 비례라는 개념을 끌어냈으나, 실제 계산에서는 다시 최종적 크기, 또는 사라지는 크기라는 개념으로 되돌아가면서, 라이프니츠와 마찬가지로 나머지 항은 크기가 작으므로 버려도 된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헤겔은 뉴턴이 이런 식으로 사라지는 크기로 되돌아간 것은 수학적 증명 과정에서 dx와 dy가 비례 관계로 묶이지 않고 각자 독립적으로 출현하므로, 이를 최종 비례의 계기로 보지 않고, 사라지는 크기로 파악하게 되었다고 한다.

헤겔은 미분 계산에서 dx, dy는 단적으로 dy/dx의 계기로서만 여겨져야 하는데도 “특히 그런 기호를 적용하는 데서 기계적으로 계산하는 가운데 미분 계수의 양 측면[dx, dy]이 서로 떼어 내진다는 것으로부터 그런 계산이 끌어내는 장점이 사라진다”(논리학 재판, GW21, S. 265)고 한다. 여기서 그 계산이 지닌 장점이란 곧 미분을 비례로 이해함으로써, 미분 계산이 부딪힌 모순이 해결되는 장점을 말할 것이다.

3)

이상과 같이 헤겔은 뉴턴의 미분을 이론에서는 최종 비로 파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적용에서는 이를 다시 사라지는 크기로 이해하는 잘못을 서술한 다음, 최종 비의 개념이 비례의 한계라는 개념으로 전개될 수 있다고 말한다.

비례의 한계란 곧 dy/dx가 질적인 크기로서, 일정한 한계를 지닌다는 것을 말한다. 물론, 이 한계는 곧 가변적 크기의 함수 즉 원래 함수 관계에 있는 x, y 즉 F(x)가 지닌 한계다. 질적 한계(dy/dx)를 이루는 두 요소 dx, dy는 오직 이런 관계 속에서 계기로서만 존재하며 더는 독자적인 정량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말했듯이 정량에서는 한계가 자기에 외면적이다. 그러므로 항상 자기 스스로 증가하거나 감소할 수 있다. 이런 정량은 그 한계 즉 규정이 자기에 외면적이니, 서로 동일하면서도 서로 무차별하다. 여기서 독특한 양적 관계 즉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이중성이 출현한다.

그러나 비례에 이르면, 한계는 다시 내면화하면서 고정된다. 하나의 질적인 한계 즉 어떤 규정은 내면화되는 동시에 다른 질적 한계나 규정과 대립 관계 속에 놓여 있다. 이제 하나의 비례 규정은 타자와 대립해서 자기를 규정한다.

이런 비례의 한계 개념에서는 앞에서 말했듯이 dx가 0으로 수렴하더라도, 비례의 한계 즉 dy/dx는 0/0이 아니라 일정한 값을 지니게 된다. dx 즉 증분은 끊임없이 0에 다가가는 점근적인 것이더라도, 비례의 한계는 일정하다. 그러므로 이런 비례의 한계 개념은 사라지는 크기로서 증분 또는 미분이라는 개념에서 해방된다.

“미분 계산에서 dx, dy로 출현하는 무한소는 어떤 유한적이지 않은, 주어지지 않는 크기가 지닌 부정적 공허한 의미를 더는 갖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양적인 것의 질적 규정 즉 비례의 계기 그 자체라는 특정한 의미를 지닌다.” ”(논리학 재판, GW21, S. 265)

사라지는 크기라는 개념은 여전히 정량의 개념에 머무른다. 그러나 최종 비, 또는 비례의 한계라는 개념을 통해 진정한 무한의 개념이 출현하며, 정량은 그 자체로서 지양되면서 질적인 크기 즉 비례의 계기가 된다. 헤겔은 이를 “유한한 크기가 무한한 크기로 전환한다”라고 말한다.

“지적된 바와 같이 소위 미분은 비례의 양 측면 즉 정량이 사라짐을 표현하며[사라지는 크기] 남아 있는 것은 양적 비례이어서 그런 한 순수하게 질적인 방식으로 규정된다. 질적 관계는 여기서 사라지지 않으니, 오히려 바로 유한한 크기가 무한한 크기로 전환하는 결과로 나오는 것이다.” ”(논리학 재판, GW21, S. 268)

유한한 크기 즉 정량과 무한한 크기 즉 비례는 서로 다르다. 구체적 예를 들어 원호는 정량으로 본다면, 할선보다 클 수밖에 없다. 할선은 직선이며 두 점 사이에 최단 거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호를 무한한 할선으로 구분하면, 무한한 원호는 무한한 할선과 같게 된다.

또 운동을 예로 들어 볼 때, 곡선 운동과 직선 운동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양적으로 양자는 다르지만, 무한한 크기로서는 양자는 같다. 즉 가속 운동[ungleichfoermige Bewegung]에서 무한히 작은 시간에 지나가는 거리는 등속 운동[gleichfoermige Bewefung]에서 무한히 작은 시간에 지나가는 거리와 같다.

4)

주석1을 마치면서 헤겔은 마지막으로 수학적 방법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는 옛날의 해석학자는 해석학을 어디까지나 구체적 대상과 관계하여 전개했다. 이때 구체적 대상이란 바로 공간적 관계나 역학적 운동을 말한다. 사실 뉴턴은 경험적으로 증명된 것 즉 갈릴레오에 의해 발견된 낙하 법칙이나 케플러에 의해 발견된 천체 운동 법칙을 그의 미적분론을 통해 정당화했을 뿐이다.

그러나 헤겔 당시 해석학자는 구체적 대상과 관계 속에서 지닌 실질적 의미를 무시하고 전적으로 추상적인 수학적 방식으로 발전시키는 동시에 이를 모든 대상에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려 했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수학의 지위를 경험을 넘어 고양하면서 수학적 사유에서 자연법칙을 끌어내려 했다.

“그런 명제는 역학의 근대 해석학적 형태에서는 전적으로 계산의 성과로서 소개되며 그런 명제가 실질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즉 어떤 실존이 그런 명제 자체에서 독자적으로 어떤 상응하는 의미를 지니는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으며 또한 그런 것의 증명도 고려하지 않는다.””(논리학 재판, GW21, S. 271)

“단순한 계산을 통해 경험을 넘어서 제시되는 법칙, 어떤 실존도 갖지 않은 실존 명제를 발견하려는 시도가 학문의 승리로 과장되고 있다.””(논리학 재판, GW21, S. 271)

“그와 같은 가상을 사람들은 단순한 믿음이나 경험적 지식보다 항상 더 우선시했다. 그러나 나는 이런 방식이 단순한 주머니 돌리기 요술이나 증명하는 체하는 것 이상의 것이 아니라고 여기며 그 아래에 뉴턴의 증명조차 집어넣는데 굳이 숙고해볼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논리학 재판, GW21, S. 272)

그러나 헤겔은 이런 수학의 월권을 비판한다. 수학은 경험을 통해 이미 발견된 법칙을 정당화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미적분론은 자기 제곱이 가능한 대상 즉 공간이나 역학적 운동에서나 타당할 뿐이라고 한다.

5) 이상 헤겔이 수학적 무한성이라는 이름으로 주석 1에서 전개한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았다. 주석 2와 주석 3은 재판에서 추가한 것이다. 주석 2는 방정식의 본질에 대한 설명을 제외하고는 주석 1의 내용과 거의 합치한다. 주석 3은 적분 개념을 통해 다시 수학적 무산성을 소개하는데, 주요 내용은 미적분은 수적으로는 거듭제곱의 함수에서 적용되며 구체적으로는 공간 운동이나 역학적 운동에 적용될 수 있을 뿐, 모든 운동에 적용할 수는 없다고 한다. 이미 주석 1에서 충분히 설명한 부분이라 더 구체적인 소개는 생략하려 한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54-미적분은 정당한가(3)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54-미적분은 정당한가(3)

1)

앞에서 헤겔은 자신의 진정한 무한성 개념을 소개했다. 이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것은 곧 두 정량 사이의 관계 또는 비례다. 여기서 각 계기는 다른 계기에 관계하여 규정되는 것이므로, 이런 관계는 질적인 것으로 된다.

이 질적 크기는 수적으로는 분수로 표현된다. 이런 무한량 가운데 거듭 제곱의 관계에 있는 것이 곧 분수 가운데 정수비로 환원되지 않는 루트나 파이로 표현되는 분수다. 수적인 제곱 관계는 구체적으로는 길이나 면적, 부피의 관계나 물체의 공간적 운동을 표현한다. 바로 이런 거듭제곱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것이 미적분이다.

헤겔은 이처럼 미적분이 적용되는 무한량, 그 가운데서도 거듭제곱의 관계를 소개한 다음, 드디어 미적분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한다. 그는 이때 특히 뉴턴의 방식에 주목했는데, 그 이유는 뉴턴에 이미 진정한 무한성 개념이 비록 뉴턴 자신은 알지 못했더라도 출현했다는 것이다. 헤겔은 “그 규정의 발견자(즉 뉴턴이다)는 그 사상을 개념으로 아직 정초하지 않았기에 그것을 적용할 때에는 그와 같은 더 나은 상태에 모순되는 방편이 필요했다”(논리학 재판, GW 21, S. 253)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뉴턴이 발견하지만, 자각하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

2)

뉴턴은 미적분을 유출법이라고 했다. 이 유출법의 방식은 그 이전(페르마와 데카르트 그리고 뉴턴의 스승 배로우에 이르기까지)의 무한소 개념에서 기초하는 것이다. 다만 그들이 무한소 또는 “불가분적인 것이라고 이해한” 무한 개념을 뉴턴은 다르게 이해한 것이다. 즉 “사라지는 가분적인 것”(논리학 재판, GW 21, S. 253)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뉴턴은 이 사라지는 것이 단순히 정량이 아니라 정량의 관계 즉 비례라는 점을 강조하는데, 그 점은 나중에 보도록 하자)

우선 미분법을 이해하기 쉽게 다음과 같은 도해를 보기로 하자. 아래의 도해에서 보듯이 곡선 F(x) 상에서 점 p1, p2가 있다고 할 때 두 점을 이으면서 곡선을 자르는 할선의 기울기는 이를 통해 이루어지는 작은 삼각형의 세로/가로 곧 F(x+h)-F(x)/ h이다. 이 식을 풀어서 두 번째 항 이하를 버리면, 미분식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F(x)가 이차함수 x²이라면, 이 할선의 기울기는 (x+h)²-x²/h이며 이 식을 이항 정리를 통해 풀어보면 2x*h/h+h/h*h가 된다. 이 식 가운데 h/h는 1이니 남는 것은 2x+h이다. 미분의 계산법에서는 이 h는 0으로 간주하고 버리며, 그 결과 미분은 곧 2x로 규정된다.

문제는 h/h가 1이라는 것과 남는 h가 0이라면서 버리는 이유 또는 정당성에 관한 것이다 페르마에서 데카르트에 이르기까지 h는 무한소이며 크기가 없는 것 즉 0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h를 버리는 것은 문제가 없는데, 문제는 h/h다. 이것은 0/0이 되면서 악마의 소굴에 빠져 버리고 만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무한소 개념이 가지는 모순이라고 했다.

이 모순을 벗어나기 위해 라이프니츠는 이 무한소를 최소값으로서 0이 아니라, 무한히 작아질 수 있는 크기로 보았다. 그것은 0은 아니고 0에 다가가는 수로 규정되는데, 이것이 바로 앞에서 칸트가 설명한 무한진행이라는 개념이다.

라이프니츠의 무한진행으로서 무한소를 헤겔은 ‘사라지는 크기’ 즉 ‘무한히 가분적인 것’로 규정한다. 이 말 자체는 뉴턴이 쓴 말과 같지만, 라이프니츠에서 사라지는 것은 곧 정량, 크기다. 그러면 h/h가 1이라는 것은 이해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머지 h를 버리는 것이 문제다. 라이프니츠는 이 사라지는 크기를 아주 사소한 크기니, 버려도 무방하다고 보았다.

울프는 라이프니츠를 옹호하면서 실제 측정술에서 산의 높이를 잴 때 순간적으로 부는 바람 때문에 모래가 날아가 사라진 것은 계산에 빼도 무방한 것처럼 또는 일식이나 월식을 잴 때 집이나 탑의 높이를 무시하는 것처럼 미분 계산법에서도 아주 작은 크기는 버릴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 h는 무한히 사라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일정한 크기를 가진 것이니, 수학적 엄밀성을 위해서는 버릴 수 없다.

3)

이런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뉴턴은 ‘최종 비’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뉴턴은 이를 사라지는 크기라고도 했는데 여기서 크기는 곧 비례를 의미한다.) 즉 h가 아무리 작아지더라도 h/h는 일정한 크기의 한계를 지닌다는 것이다. 아래 도해를 보면, 할선의 기울기가 점차 접선에 다가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최종적으로 h=o가 되더라도 h/h는 일정한 비율(즉 접선의 기울기)로 남는다. 이것이 바로 최종 비이다.

헤겔은 이처럼 일정한 크기가 유지될 때 그 비례를 뉴턴이 최종 비라고 할 때 마음에 품었던 것이라고 본다. 이런 최종 비에서는 분자와 분모를 이루는 두 정량은 독자적인 정량이 아니다. 두 정량은 하나의 관계 속에서 통일되어 있으니, 여기서 두 정량은 비례의 계기에 불과하며, 서로가 아무리 줄어들더라도 일정한 비례를 유지하면서 줄어드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의 계기는 다른 계기를 통해서만 규정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뉴턴이 자기가 말하는 진정한 무한성으로서 비례 개념에 도달했다고 본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h/h는 1로 받아들이고 반면 h는 버리는 이유가 정당화된다. 전자는 최종 비이며 h가 아무리 줄어들더라도 비례를 유지하지만, 후자 h는 줄어들면 마침내 0이 되면서 사라지는 것이다.

h가 사라지면서 오히려 미분 계산의 정확성이 상실되는 것이 아니라 그 정확성이 오히려 회복된다는 사실은 기하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다. 아래와 같은 도해를 보자.

이 도해에서 보듯이 h가 줄어 들면(h->h’->h’->0′) 할선이 점차 점p에서의 접선에 가까워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접선이 바로 구하려던 곡선의 기울기 즉 미분이다. 이처럼 기하학적으로 보면, 미분은 기울기가 지니는 한계 즉 극한을 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비례 아래서 사라지는 크기는 사라지기 전에서도 아니고 사라진 이후에서도 아니며 오히려 그와 더불어 사라지는 가운데 있는 비례로 이해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생성하는 크기의 최초 비례는 그것이 생성하는 비례다.”(논리학 재판, GW 21, S. 253)

“이런 오해를 피하기 위해 그는 최종 비는 최후의 크기가 지닌 비례가 아니라 한계 없이 줄어드는 크기의 비례가 주어진 모든 유한한 차이보다 더 가까이 다가가는 한계다. 그런 한계를 최종 비는 무가 될 만큼 넘어서지는 못한다.”(논리학 재판, GW 21, S. 254)

현대에서 수리철학자 코헨과 바이어스트라세는 미분을 정의하면서 이런 극한 개념을 사용한다. 이 극한 개념은 헤겔이 뉴턴으로부터 발굴한 최종적 비례, 또는 비례의 한계를 의미하며 그런 한 코헨과 바이어스트라세는 헤겔의 개념 분석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겠다.

“한계라는 표상에는 사실 가변적 크기의 질적 비례 규정이라는, 앞에서 제시된 진정한 범주가 들어 있다. 왜냐하면, 그런 가변적 크기로부터 등장하는 형식 즉 dx, dy는 단적으로 dy/dx의 계기로서만 여겨져야 하며, dy/dx 라는 기호 자체는 불가분적인 유일한 기호로 여겨져야 하기 때문이다.”(논리학 재판, GW 21, S. 265)

3)

뉴턴은 이 최종비라는 개념을 이제 ‘생성하는 크기[genita]’, ‘생성의 원리’로 이해한다. 그것은 순간적인 증분이나 감분인데 곧 이 생성하는 크기는 무한소나 무한진행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여기서 증분이나 감분은 어디까지나 비례 관계 속에 있는 하나의 계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순간적 증분이나 감분에 의해 이루어진 결과 변화된 운동은 하나의 독자적 정량이며, 뉴턴은 이를 생성의 원리로부터 생성된 크기로 간주한다. 양자는 생성에서 저차적인 질서와 고차적 질서로 구분된다.

이런 설명은 뉴턴이 미분을 이처럼 운동, 생성의 개념으로 이해한 것을 잘 보여준다. 미분은 어떤 것이 운동할 때 어떤 순간에 운동을 변화시키는 힘을 말한다. 생성된 크기가 어떤 정량이라면, 생성하는 크기는 질적인 것이다. 전자는 현존의 무차별성, 외면성 속으로 이행한 것이며 후자는 타자와 관계 속에 규정되는 계기다. 그러므로 헤겔은 전자와 후자가 수적으로 표현되는 방식이 다르다 한다. 전자가 x, y로 규정된다면 후자는 dx, dy로 규정된다.

‘사라지는 크기[Letzte Groesse]’ 즉 정량의 무한진행이나 ‘최종 비[Letzte Verhaltnisse]’ 즉 비례의 무한진행은 유사한 듯 보이는데도 마땅히 구별돼야 한다. 정량은 무한히 사라지더라도 일정한 크기를 유지한다. 그것은 결코 0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비례의 무한진행은 비례 자체에서 분자와 분모를 이루는 크기는 비례 관계에 묶여 있어 아무리 줄어들더라도 일정한 비례 관계를 유지하지만, 비례를 벗어나게 되면 각 정량은 독자적으로 줄어들면서 마침내 0에 이르게 된다. 아래 두 인용문을 비교해 보라.

-사라지는 크기

“이런 표상이 사태의 진정한 본성을 표현하는 조건은 정량이 무한진행 속에서 갖는 정량의 항상성이 정량이 사라지는 가운데 자기를 연속하면서, 자신의 피안에 다시 다만 어떤 유한한 정량을 즉 급수[계열]의 새로운 항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논리학 재판, GW 21, S. 254)

-사라지는 비례

“그러나 진정한 무한 속에서 만들어지는 이행에서는 항상적인 것은 비례다. 그 비례는 아주 항상적이고 자기를 보존하기에 그런 이행은 오히려 다만 그 비례를 순수하게 드러내는 데 성립하며 또한 비례의 두 측면을 이루는 정량이 이 비례 밖에 놓이면서도 여전히 정량이 되게 한다는 사실 즉 관계없이 존재한다는 규정이 사라지게 한다는 것이다.”(논리학 재판, GW 21, S. 254-255)

헤겔은 이와 연관하여 오일러의 주장을 소개한다. 오일러는 뉴턴의 최종비 개념을 근거로 하여 h/h는 1이지만, h=0이라는 주장을 이렇게 설명한다.

“무한한 차이[미분]은 다만 정량의 0이지, 질적인 0은 아니며, 정량의 0이더라도 단지 비례의 순수 계기이다.”(논리학 재판, GW 21, S. 257)

오일러는 0/0의 모순을 피하기 위해 산술적 비례와 기하학적 비례를 구분했다. 수학적 비례에서 0/0은 악마의 소굴이 되더라도 기하학적 비례에서는 0/0은 일정한 값을 지닐 수 있다고 한다. 헤겔은 오일러가 기하학적 비례라고 한 것은 다름 아닌 뉴턴이 최종비라고 말한 것에 해당한다고 본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53-미적분은 정당한가(2)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53-미적분은 정당한가(2)

1)

앞의 글에서 헤겔은 미적분을 정당화하는 개념으로 무한소나 무한진행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무한 개념 즉 진정한 무한을 설명했다. 진정한 무한은 두 정량 사이의 비례 관계이며, 타자를 통해 자기를 규정하는 것이며 질적인 크기라고 했다.

이런 무한량의 개념은 이미 양적 무한성을 다룰 때 헤겔이 설명한 것인데, 아직 이 무한량이 미적분을 어떻게 정당화하는지는 설명되지 않았다. 그런 설명은 주석 1의 후반부에 들어가서 구체적으로 소개되는데, 이에 앞서서 헤겔은 이런 진정한 무한성의 개념을 수적으로 표현하는 문제에 다시 골몰한다.

무한량은 수적으로는 분수로 표현된다. 헤겔에서 셈은 곧 새로운 수를 낳는데, 더하기 빼기는 정수에 머무른다. 곱하기에 이르면 이미 두 개 정량의 관계가 출현한다. 곱하기는 더하기로 환원될 수 있다. 3*4는 세 번씩 더하기를 네 차례 걸쳐 계속하면 얻어진다. 그러나 곱하기의 진정한 의미는 두 정량의 관계에서 드러난다. 3미터 길이를 폭으로 4미터 이동한 것일 수 있으며, 시간 당 3키로 속도로 네 시간째 달린 거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곱하기는 흔히 더하기로 환원되면서 두 정량의 관계는 감추어지고 마는데, 이 두 정량의 관계는 곱하기를 뒤집은 셈인 나누기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나누기는 두 개의 정량이 서로 관계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표현한다. 예를 들어 2/7이 그렇다. 두 개 정량의 차이와 동시에 관계가 빗금[/]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2)

나누기를 표현하는 분수는 두 개 정량의 관계라는 점에서 이미 무한량을 표현한다. 그러나 정수비로 환원될 수 있는 분수는 무한량을 은폐한다. 그것은 독자적인 하나의 정량을 표현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정수비로 환원될 수 없는 분수가 있다. 그것은 예를 들어 무리수나 통약불가능한 수(예를 들어 원주율)를 표현하기도 한다. 이런 표현에 이르면 이런 분수가 무한량을 표현한다는 것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헤겔은 무한량을 표현하는 두 개의 표현 형식을 비교한다. 이 두 표현 형식은 정수비가 되는 분수에서도 성립하지만, 여기서는 그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다. 반면 정수비가 아닌 분수에서 그 차이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후자의 측면에서 두 표현 형식의 차이를 살펴보자. 하나는 무한 계열[Reihe: 급수]의 형식이고 다른 하나는 분수 표현이다.

①: 2/7, 루트 2, 파이

②: 0.285714.., 1.141…, 3.14…

②의 표현 형식을 보면, 무한 계열의 형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런 표현은 ①을 개수[Anzahl]로 표현한 것인데, 이 경우는 정수비와 달리 결코 최종 결과에 도달하지 못한다. 여기서 표현된 것은 진정한 전체에 비해 모자라며 항을 추가해서 필요한 만큼 더 정확하게 규정할 수는 있지만, 아무리 항을 추가하더라도 모자라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이 규정은 당위에 불과하며 악-무한 또는 무한 진행을 표현한다.

헤겔은 이런 표현은 “질적인 규정성에 기초하는 것을 개수로 표현하려는 것”(논리학 재판, GW21, S. 244)이기 때문에 그런 모순은 해소되지 않는 모순이라고 한다. 또는 표현하는 것은 정량이고 표현되는 것은 무한이니, 양사의 상이성 때문에 도달할 수 없는 피안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도달해야 하는 한계는 자기의 항 밖에 있다.

반면 ①의 표현 형식을 보면 이런 무한 계열로 표현되는 것이 일정한 합에 이미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합이 곧 분수며 루트며 파이다. 이런 표현 형식에서는 ②의 표현에서 드러났던 무한성이 다시 감추어진다. 그러나 ①의 표현 형식은 이 무한성이 사실은 두 개의 정량의 관계라는 점이 그것도 일정한 비례 지수 즉 질적인 크기를 가지고 있음을 표현한다. 이런 표현은 무한량의 한계를 직접 표현한다.

“급수는 정립된 항 때문에 무한한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기 때문에 즉 그 항에 본질적으로 속하는 타자가 그 급수의 피안에 있기 때문에 무한하다.”(논리학 재판, GW21, S. 245)

“그러나 그 급수에 반해서 유한한 표현 또는 그런 급수의 합이라고 말해지는 것은 결함이 없다. 그런 표현은 급수가 다만 추구하는 값을 완전하게 포함한다. 피안은 도주하는 것으로부터 소환되어서 그런 표현의 본질과 본질이어야 하는 것은 서로 분리되지 않으며 동이한 것이다.”(논리학 재판, GW21, S. 245)

3)

헤겔은 여기서 스피노자의 무한 개념을 소환한다. 흔히 유한은 긍정이고 그 부정인 무한은 부정으로 규정되지만, 스피노자는 유한을 오히려 타자의 부정으로, 무한을 자기 긍정으로 규정한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스피노자의 무한 개념이 진정한 무한성 개념을 함축하고 있다고 본다.

스피노자는 이런 절대적 긍정성으로서 무한 개념을 예를 들어 두 개의 원을 통해 설명했다. 즉 서로 부등한 원이며 하나의 원이 다른 원 안에 있으면서도 서로 중심이 다르면서 서로 접촉하지 않을 때 두 개 원 사이의 공간은 일정한 크기를 지닌 것이지만, 그것을 수를 통해 표현하려 하자면 무한한 계열이 필요하니, 바로 이것이 현존하는 무한성을 잘 보여준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무한에 관한 무한을 급수나 집합으로 표상하는 것을 내버리고 무한히 현재적이고[gegenwaertig] 완전하다는[in sich vollendet] 사실을 위의 예를 들어 설명했다. 스피노자는 전자를 상상의 무한으로 후자를 사유의 무한으로 부른다. 이 후자가 진정한 무한성[wirkliche Unendlichkeit]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에서 자기 긍정으로서 무한성은 절대적 통일, 부동의 통일이며, 그런 점에서 타자를 매개로 해서 자기 내로 복귀한 자기 긍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다고 한다.

4)

이상 헤겔은 진정한 무한성의 개념을 소개했다. 그 무한량은 두 개 정량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이는 수적으로는 분수로 표현된다. 이 분수적 표현을 곱하기의 표현 즉 함수를 통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수적으로 같은 분수로 표현되더라도, 정수비로서 분수와 무리수와 같은 분수는 구분된다. 정수비는 곱하기로는 y=ax와 같은 함수로 표현된다. 여기서 정수비 a는 고정된 정량 즉 개수를 의미한다. 여기서 서로 함수 관계에 있는 두 정량은 “각자 고립적으로 독자적인 정량이며, 그 함수 관계는 그 수[정량]에 본질적이 아니다.” 즉 그 함수 관계는 두 정량에 대해 무차별하다.

물론 이 사이에도 관계가 있으며 그 관계는 곧 무한량이다. 그러나 그런 무한량은 무한성의 의미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처럼 관계 즉 비례가 그 정량에 외면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정수비에서 무한량은 운동에서는 등속운동과 같은 것이거나 비중(=무게/ 부피)인데, 여기서 미분은 제로라는 점을 생각하면 헤겔이 왜 무한량이 충분히 자기를 드러내지 못한다고 말하는가가 이해된다.

반면, 등가속 운동 즉 Y=1/2at² 이나 포물선 운동 y²=x 는 이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함수의 양 측면은 특정한 정량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 함수 자체가 고정된 정량이 아니라 가변적 크기다. 양자는 제곱 비례하며, 이런 제곱 비례는 비례를 이루는 두 정량과 외면적인 관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관계를 지닌다.

그러므로 여기서 관계하는 정량은 더는 독자적 정량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다른 정량과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지니고 따라서 타자에 대한 관계를 자기에 내재하는 것으로 함축하고 있다.

헤겔이 미적분을 정당화할 때 결정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 바로 정수비와 달리 제곱 비례는 관계하는 정량에 대해 내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함수 관계에 있는 x와 y는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된다. 즉 dy와 dx인데 이 표현은 사실 라이프니츠가 무한소, 미분을 표현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지만, 헤겔은 이를 y/x에서처럼 외면적 관계가 아니라 내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즉 “dy, dx는 더는 정량이 아니며 단지 비례 속에서만 의미를 지닌다”(논리학 재판, GW21, S. 251)는 것이다.

5)

무한량은 두 정량의 관계라 했다. 이 두 정량은 동일한 정량에서 서로 다른 정량일 수도 있고, 종류가 다른 정량일 수도 있다.

처음은 곱해진 것[또는 비례 관계에 있는 것]이 동일한 정량일 때다. 이때 두 정량의 사이는 무차별하며, 외면적이니, 이런 동일한 정량의 관계는 정수비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이런 정수비에서도 미적분이 성립하지만, 실상 여기서는 그 의미는 없다. 왜냐하면, 이 경우 미분은 0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또한, 두 정량이 다른 종류일 때 그 관계는 물질적 결합을 의미할 것이다. 예를 들어 원소의 상호침투적인 화학적인 결합이 이에 속한다. 이런 화학적 결합에서는 하나의 정량이 자기를 지양해서 완전히 다른 정량으로 이행하니, 이는 구조적으로는 미분적 관계이지만(상호 침투가 그런 미적분의 관계를 보여준다), 더 이상 수적인 방식으로 표현될 수는 없다. 이것은 수학적 운동을 넘어선 물질의 구체적 운동에 속한다.

수학적인 미적분이 다루어지는 영역은 이 가운데 특히 동일 정량이 거듭제곱의 관계에 있는 경우다.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곧 거듭제곱 도는 자기 제곱이다. 이제 곱하기가 자기 제곱으로 발전하게 되면, 그 결과 새로운 정량이 출현할 때 이런 곱하기는 자기 자신을 제곱하는 것이니, 자기에 내면적인 것이며 이때 곱해진 것들 사이의 관계는 단순한 비례가 아닌 제곱근의 관계에 있다. 이때 비례는 정수화할 수 없는 무한급수의 형태로 출현한다.

자기를 제곱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는 길이를 길이로 곱해 면적으로 구하거나 면적을 면적에 곱해 부피를 구하는 것과 같은 운동이다. 물질의 운동 가운데 속도와 가속도, 운동 에너지 사이의 관계도 이런 거듭제곱에 속한다.(여기서 시간은 공간적 길이의 하나로 여겨진다)

“무한은 이런저런 정량으로서 지양될 뿐만 아니라 양 일반으로서 지양된다. 그러나 양적 규정성은 남는다. 그것은 정량의 지반, 원리다. 또는 이렇게도 말할 수 있는데 최초의 개념에 도달한 양적 규정성이다.”(논리학 재판, GW21, S. 251)

미분이 이처럼 공간운동이나 역학적 운동에 한정된다는 사실은 헤겔이 철학의 방법론으로 수학적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기피하는 까닭이 된다. 하지만, 헤겔이 수학적 방법이 양을 다루는 역학의 영역에서 의미가 없다고 보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양적인 것의 영역에서 가장 적절한 방법은 곧 이런 수학적 방법 즉 미적분이라 본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52-미적분은 정당한가(1)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52- 미적분은 정당한가?(1)

1)

헤겔은 양적 무한성을 다룬 끝에 주석을 세 개 붙였는데 그 가운데 주석 1은 초판에서 이미 나오지만(내용을 약간 수정했으나 그 수정은 언어적 표현에 그친다), 주석 2와 3은 재판에서 추가한 부분이다. 이 세 주석에서 헤겔이 다룬 것은 소위 미적분의 정당화 문제다.

먼저 주석 1 앞부분에서 헤겔은 자신이 왜 미적분의 정당화에 뛰어들었는가를 설명하는데, 이 부분을 읽어보면, 그의 의도와 그의 목표가 잘 드러나리라 생각한다. 이 부분은 수학을 전공하지 않은 필자로서는 지극히 난해하다. 더구나 헤겔이 수학의 공식을 철학적 개념으로 서술하기에 그의 말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알기도 힘들다. 그 때문인지, 이 부분에 대한 학계의 논의는 거의 없다. 그런 까닭에 필자는 부득이 헤겔이 주석에서 자기의 논지를 전개한 대로 따라가면서 그의 주장을 요약하려 한다.

주석 1을 시작하면서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미적분의 정당성은 주로 ‘성과’의 ‘올바름’에 기인하지만, 그 증명은 정당화되지 못했으며, 심지어는 “그 자체로 잘못으로 인정된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미적분이 자신이 사용하는 도구의 본성을 알지 못하고 비판 없이 사용된다면 “그 적용의 범위를 결정하지 못하거나 그 오용을 막을 수 없는”(논리학 재판, GW21, S. 236-237) 것이 아닐까?

헤겔은 이런 미적분의 정당화를 수학자의 손에 맡겨두지 않고 자기가 직접 다루게 된 이유로 이 미적분의 토대가 되는 개념이 철학에서 다루는 무한 개념과 관련된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그는 심지어 “수학적 무한[미적분]에 근저에는 진정한 무한 개념이 놓여 있으며” 이것은 기존의 철학에서 논의된 형이상학적 무한 개념(즉 헤겔의 말로 악무한이나 무한 진행)보다 더 차원 높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도 수학은 자신의 근저에 있는 무한성 개념을 드러내지 못하고, 자신을 정당화하지도 못한 채, 그런 철학적 정당화는 자기들이 할 바는 아니며, 자기들은 그저 자기가 처한 고유한 지반 위에서 일관적으로 앞으로 나가기만 하면 된다고 믿으니, 그 때문에 자기가 개입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2)

헤겔은 미적분이 증명 과정에서 오류를 범한다고 했을 때, 그 오류는 간단히 말해 다음과 같다. 즉 미적분은 “유한한 크기를 한번은 무한소만큼 증가시키고 이 무한히 작은 크기를 부분적으로는 그다음 계산에 보존하지만, 일부분은 무시함으로써” 일어난다고 한다. 이처럼 일부를 무시하는 이유는 “그 일부가 영은 아니지만, 너무나도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의 정량이어서 무시될 만한 것이기”(논리학 재판, GW21, S. 237)때문이라 한다.

예를 들어 y=x² 의 미분 계산에서 도중에 전개한 항 가운데 미분을 포함하는 첫 번째 항 2x*dx/dx는 남기고 두 번째 항 dx²/dx는 제거하는 것을 말할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일상적 삶에서와 달리 수학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수학은 엄밀하고 정확한 학문이며 더구나 “수학적 인식에서는 증명이 본질적이기에” 조금이라도 잘못된 증명은 수학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헤겔의 이 주장은 나중에 상세하게 설명하겠지만, 미적분에 관한 기초만 이해하더라도 충분히 인정할 만한 주장이다.

3)

헤겔은 미적분의 문제점을 이해하기 위해 일단 이렇게 문제점만 던져놓고는 무한량에 대한 앞에서 설명한 개념으로 다시 돌아간다. 왜냐하면, 미적분에서 주로 사용하는 무한 개념이 무한소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 무한소 개념은 역사적으로 고대에서(알키메데스나 카발리에, 페르마 등) 등장해 라이프니츠 직전까지 계속됐기 때문인데 이 개념은 미적분을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고 본다. 헤겔은 이 논의에서 미적분을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은 이런 무한소 개념이 아니라 자신의 진정한 무한성 개념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우선 그는 무한히 작은 양은 정량이 아니라고 한다. 이 무한소는 최소치라는 의미인데 즉 “그것을 넘어서 더 적은 것이 없는 크기”(논리학 재판, GW21, S. 239)다. 그러나 어떤 것이 정량인 한에서는 항상 증감할 수 있다. 증감할 수 있다는 것은 정량의 본성에 속한다. 따라서 최소치란 즉 더 적어질 수 없는 것은 더는 정량이 아니게 된다. 그런데도 무한소는 하나의 크기로 받아들여지니, 무한소란 개념 자체에 자기모순을 지닌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정량은 무한한 한에서 지양된 것으로 사용되기를 요구하며 즉 정량은 아니면서도 그것의 양적인 규정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으로서 사유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논리학 재판, GW21, S. 239)

헤겔은 이때 즉 무한자가 일정한 크기를 가지게 된다면, “그런 무한에 대해 더 큰 것과 더 적은 것의 구별이 성립한다”(논리학 재판, GW21, S. 240)라고 하니, 나중에 칸토르가 무한 집합론의 모순으로 설명했던 것을 헤겔은 이미 선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칸토르의 모순은 예를 들어 흔히 자연수의 집합은 정수의 집합보다 작은 것으로 여겨지지만, 자연수와 정수는 둘 다 무한한 원소를 지니고 각 원소는 서로 대응하니, 양자는 일대일 대응 관계에 있고 따라서 크기가 같다고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자연수의 무한은 정수의 무한보다 크다고 생각하는 상식은 무한을 일정한 값을 지닌 것으로 생각하는 데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4)

최소치라는 개념을 비판하면서 칸트는 무한량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라는 일정한 값이 있어서는 안 되며 이 무한량-칸트는 무한한 전체라는 말로 대체한다.-은 끊임없이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운동 중인 것 즉 무한 진행으로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여기서는 앞에서 주어진 것을 넘어가는 관계만이 들어 있고 주어진 것에 따라서 그것을 넘어선 무한한 전체는 다른 무한한 전체보다 더 클 수도 있고 더 적을 수도 있게 된다. 무한한 전체의 절대적 크기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칸트에서 무한량에서 이처럼 주어진 양을 넘어가는 운동은 주관의 작용에 속한다. 주관은 끝없이 주어진 양을 넘어가는 가운데 전체를 동시에 파악하는 “종합은 결코 완성될 수 없게”(논리학 재판, GW21, S. 240, 이 구절은 칸트 재인용) 된다.

이를 거꾸로 보면 주관이 넘어가는 작용을 하지 않는다면 대상인 수 자체는 마침내 완성된 최대치라는 일정한 값을 지니게 되니, 여전히 앞에서 모순으로 여겨진 최대치, 최소치라는 개념이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여기서는 넘어가는 운동은 주관에 속하고 정량이라는 크기는 대상에 속하면서 “모순이 객체와 주관에 나누어 배당될 뿐”(논리학 재판, GW21, S. 240)이다.

헤겔은 이런 무한 진행 역시 모순을 피할 수 없는데, 이 모순은 미적분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앞에서 든 이차함수의 예에서 항을 전개하면 첫 번째 항은 2x*dx/dx이다. 이때 뒷부분 dx/dx는 결국 1이니, 여기서는 2x만이 남는다. 그러나 만일 dx가 무한소로서 어떤 값을 지니지 않는다면 즉 마침내 0에 도달하고 마는 무한히 작은 양이라면, dx/dx는 곧 0/0이 되면서 판단 불능에 빠지게 된다.

0/0은 1도 되고 100도 되는 무의미한 수다. 이런 판단 불능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dx는 최소의 값을 지녀야 하며 그때 비로소 미분 계산에서 첫째 항에서 2x만을 남기는 이유가 이해된다.

5)

헤겔은 마침내 자신의 무한성 개념을 제시한다. 그의 무한성 개념은 이미 앞에서 제시한 대로 비례(또는 관계 Verhaltnisse]의 개념과 연관된다. 그는 앞에서 외연량과 내포량을 설명한 다음, 무한량을 제시했다.

외연량은 단순한 자기 관계다. 이는 추상적이며 개별적인 정량이다. 이 정량이 자기의 임의적인 한 부분을 단위(예를 들어 보폭이나 팔길이)로 측정되면, 일정한 정량이 된다. 예를 들어 길이나, 무게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 외연량은 ‘배중성[Vielfachheit]’으로 규정된다.

내포량은 여전히 개별적이며 추상적 정량이지만, 타자와 비교된 정량이다. 더 크거나 더 적은 것을 순서대로 하면,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등이다. 예를 들어 경도나 강도가 여기에 속한다. 헤겔은 이런 외연량을 ‘다중성[Mehrheit]’이라고 한다.

무한량은 타자를 통해서 측정된 정량이다. 예를 들자면 속도(=거리/시간)나 비중(=무게/부피)다. 이는 두 개의 정량 사이의 관계가 바탕이 된다. 즉 그 관계를 통해서 어떤 것이 자기를 규정할 때, 그것이 무한량이다. 타자를 통해 자기를 규정한다는 점에서 이 무한량은 부정성을 지니고 따라서 질적인 규정성을 지닌다. 그러나 무한량은 독자적으로 하나의 정량이므로 이는 “질적 형식을 취하고 있는 크기 규정”(논리학 재판, GW21, S. 241)이다.

“무한 정량은 계기로서 그 타자와 본질적으로 통일 속에 있으며 다만 그의 타자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으로서만 존재한다. 즉 무한 정량은 그의 타자 존재와 관계 속에 있는 것과 연관해서만 의미 있는 것일 뿐이다.”(논리학 재판, GW21, S. 241)

6)

질적인 것은 일반적인 것이다. 빨간색은 꽃의 빨간색일 수도 있고 석양의 빨간색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무한량이 질적 성격을 지닌다는 것은 그 성격이 일반적이라는 말이 된다. 여기서 일반성은 비례의 일반성이다. 헤겔은 이 무한량을 ‘비례의 지수[Exponent]’라고 말한다.

즉 어떤 정량의 크기가 다른 정량의 일정한 크기를 단위로 해서 측정된 것이므로, 이 관계 즉 비례 관계는 일정하다. 다른 정량의 단위가 증가하면 그것에 비례해서 어떤 정량의 크기도 변화한다. 예를 들어 속도나 시간당 4키로라면 두 시간에는 8키로 거리를 지나가며 세 시간에는 12키로 거리를 지나간다.

무한량에서 서로 관계하는 두 정량은 독자적으로 보면 하나의 정량이지만, 이 관계에 들어가면 더는 정량이 아니라 전체 정량의 한 계기로서만 존재한다. 하나의 정량은 양적인 것으로서 다른 정량에 대해 무차별하겠지만, 전체의 계기로서의 정량은 자신과 관계하는 타자(다른 정량)에 대해 일정한 관계를 유지한다.

이 무한량은 자기 관계하는 것이다. 즉 자기가 자기를 단위로 측정된다. 그러나 이는 외연량처럼 추상적인 자기 관계가 아니라 타자를 매개로 해서 측정된 자기 관계다. 예를 들어 속도는 거리의 크기를 말한다. 크기는 자의적인 척도를 통해 측정된다면, 단순한 자기 관계다. 그러나 이 크기가 다른 정량인 시간에 관계하여 측정된다면 그것이 속도다.

헤겔은 미적분에서 핵심 개념인 무한은 알키메데스의 무한소도 아니며, 칸트의 무한 진행도 아니고 바로 이런 관계로서의 무한량을 의미한다고 본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 51-시공간은 무한한 것인가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 51-시공간은 무한한 것인가?

1)

시간, 공간은 무한한가? 앞에서도 밤하늘 무한한 천공 앞에서 숭고함을 느끼거나 시냇가 조약돌에서 아득한 시대 화석으로 남은 생물을 발견하면, 그 아득히 먼 시대를 상상하며 즐거움을 느낀다.

시간과 공간의 아득함에 관해 시인들은 많은 시를 지었는데, 헤겔은 양적 무한성을 다루면서 주석에서 할러의 시를 하나 인용한다.

숱한 산들처럼
엄청난 수를 쌓아 올리고
시간의 더미에 시간을, 세계의 더미에 세계를 쌓아 올리고
그리고 소스라칠 정도로 높은 곳에 올라가
아득하게 다시 너를 내려다보면,
수의 위력이 천 배가 증가하더라도,
아직도 너는 단 한 귀퉁이조차 드러나지 않는다.
차라리 내가 수의 위력을 떨쳐버릴 때
너의 모습은 생생하게 내 앞에 떠오를 것이다.

헤겔은 이 시의 앞부분은 무한한 시공간 앞에 느끼는 숭고함을 표현했으나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이 오히려 의미심장하다 한다. 즉 차라리 무한한 수의 위력을 떨쳐 버릴 때 오히려 무한의 진정한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는 것이다.

헤겔이 말하는 수의 위력이란 곧 무한 진행으로서 악 무한을 의미할 것이다. 반면 진정한 무한의 모습은 곧 내재하는 무한성 즉 자기 부정성으로서 무한성일 것이다.

2)

우리 앞에 있는 세계의 무한성에 관한 논의는 곧바로 세계의 유한성이라는 주장으로부터 반박당한다. 세계에 시초가 있어야 하고 우주는 그 한계가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 이 세계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런 주장을 통해서도 무한성에 관한 주장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으니, 형이상학의 세계는 곧 세계의 무한성과 유한성이라는 주장의 전장터가 되었다.

이런 전장을 최종적으로 흽쓸어 버리려 했던 철학자가 곧 칸트였으니,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에서 무한성이라는 주장이든 유한성이라는 주장은 이율 배반에 빠지고 만다는 것을 논증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칸트는 알다시피 순수이성 비판 변증론 2편 2장에서 순수이성의 이율 배반을 다루면서 네 가지 이율 배반을 제시했다. 이 네 가지 이율 배반은 네 가지 판단형식의 범주 즉 질적 범주, 양적 범주, 관계적 범주, 양상적 범주에 각기 해당한다.

그 가운데 질적 범주에서 나타나는 이율 배반은 사물이 합성체인지 단순 실체인지 하는 이율 배반인데, 칸트는 이를 두 번째 이율 배반으로 다루었지만, 양적 범주보다 질적 범주를 우선하는 헤겔은 오히려 앞에서 질적 판단형식을 다룰 때 이미 다루었다.

헤겔은 양의 무한성을 논하는 가운데 칸트가 말한 첫 번째 이율 배반을 다룬다. 헤겔은 이 이율 배반이 양적인 것과 관계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헤겔에서는 이 이율 배반이 두 번째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곧 시간과 공간이 시초나 한계를 지니는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 이는 다시 말하면 세계가 양적으로 유한한가 아니면 무한한가 하는 문제라고 볼 수 있다.

3)

헤겔은 이 문제를 다루면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해가 자신과 칸트가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칸트는 시간과 공간을 직관의 형식으로 보았다. 반면 헤겔은 시간과 공간은 사물의 상호 관계하는 방식이라고 규정한다.

이때 관계 방식은 바로 양적인 것의 방식인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방식은 서로 동일한 일자와 일자의 외면적인 관계다. 나뭇잎과 나뭇잎, 물방울과 물방울의 관계에서 나뭇잎이나 물방울과 같은 구체적 대상을 제거한다면 바로 시간 공간적 관계가 된다. 이런 시간, 공간적 관계는 사물이 가진 모든 관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물이 지닌 모든 구체적 관계를 추상한 가장 외면적인 관계일 뿐이다.

칸트와 같이 추상적인 직관의 형식으로 보든, 헤겔과 같이 사물의 가장 외면적인 관계로 보든 일단 양적인 관계 즉 일자와 일자의 관계라는 점에서는 동일한데, 헤겔은 이런 양적인 관계에서 시간과 공간의 유한성과 무한성의 문제를 여기서(정량, c 절 양적 무한성, b 항 무한 진행, 주석 2) 다룬다.

4)

우선 정립은 세계가 유한하다는 주장이다. 구체적으로 시간에는 시초가 있으며 공간에는 한계가 있다는 주장이다. 헤겔은 우선 이 정립에 관한 칸트의 증명을 인용하면서 소개하는데, 다음과 같다.

“세계가 시간상 시초를 갖지 않는다면 주어진 시점에 이르기까지 영원이 흘러가야 하며 세계 속에 상호 뒤따르는 사물 상태의 무한한 계열이 지나가야 한다. 그러나 이제 이런 계열이 무한하다는 것은 곧 이 계열이 계기적 종합을 통해서는 결코 완전해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무한히 흐르는 세계 계열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세계의 시초는 세계가 현존하기 위한 필연적 조건이고 이것은 처음 증명되어야 했던 것이다.”(칸트 재인용, 논리학 재판, GW21, S.229)

칸트의 증명은 간단하다. 시초가 없다면 어떤 현존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현존에 이르기 위해서는 무한한 계열이 지나가야 하는데 이 무한한 계열을 다 지나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계에 어떤 현존이 있는 것을 분명하므로, 시초가 없을 수 없다는 것이다.

헤겔은 이어서 공간의 한계에 관한 칸트의 증명을 소개한다. 이 부분은 칸트의 증명을 헤겔이 요약하는 방식으로 소개된다.

“공간상 무한한 세계 부분들의 총괄을 위해서는 무한한 시간이 요구될 것이다. 세계가 공간 속에서 형성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완전히 주어진 것으로서 여겨지는 한, 무한한 시간은 이미 흘러간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그러나 시간에 관한 증명의 앞부분에서 제시됐듯이 무한한 시간이 흘러간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논리학 재판, GW21, S.229)

이 증명의 핵심은 곧 공간이 한계가 없다면, 이 공간을 총괄하기 위해 무한한 시간이 걸리는데, 무한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은 불가능하니, 공간은 한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공간을 우리가 총괄할 수 있다는 것이 전제된다.

5)

위와 같이 칸트의 정립을 소개한 다음 헤겔은 이를 비판하는데, 그의 비판은 칸트의 소위 귀류법적인 증명은 증명 속에 증명돼야 하는 것이 이미 전제되고 있다는 비판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이미 칸트는 시간에는 시초가 있고, 공간은 한계가 있어서 총괄 가능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것은 세계에서 현존이 있으려면 요청되는 것인데, 증명을 통해 증명돼야 하는 사실이다. 칸트의 정립 증명은 시간의 시초가 있고 공간의 한계가 있어야 하므로, 무한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은 없어야 한다는 주장이니, 사실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현존이 있기 위해서 반드시 시간의 시초와 공간의 한계가 있어야 하는가? 어떤 것은 그 시초를 모르는 것이거나 공간상 한계 없이 펼쳐지는 것이더라도 현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아무도 내 앞의 우주가 언제 생겼는지, 어디까지 펼쳐지는지 모르더라도, 내 앞에 우주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증명되어야 하는 주장이 증명의 근저에 직접 놓여 있으므로 증명을 우회적으로 만들거나 증명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필요한 것을 알 수 있다. 즉 영원(영원은 여기서 다만 악 무한적인 시간이라는 형편없는 의미를 지닌다)이 흘러가야 도달할 수 있는 어떤 시점 또는 각 주어진 시점이 전제된다. 주어진 시점이란 곧 시간 속에 일정한 한계를 의미할 뿐이다. 그러므로 증명에는 시간의 한계가 실제로 있는 것으로 전제된다. 그러나 그런 한계는 증명돼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정립이 주장하는 것은 곧 세계가 시간상 시초를 갖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논리학 재판, GW21, S.229)

6)

이어서 헤겔은 반정립을 살펴본다. 칸트가 말한 반정립은 세계는 시초를 갖지 않으며 공간상 한계도 갖지 않고 오히려 시간상이나 공간상으로 무한하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한 칸트의 증명은 다음과 같다.

“세계가 시초를 갖는다 하자. 현존하는 이 시초에 앞서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 선행한다. 그러므로 세계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 즉 공허한 시간이 선행해야 한다. 그러나 이제 공허한 시간 속에 어떤 사물의 발생도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 같은 시간의 어떤 부분도 다른 부분 앞에서 비 현존의 조건에 앞서 구별된 현존의 조건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계 속에서 사물의 많은 계열이 시작할 수 있지만, 세계 자체는 시초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세계는 지나간 시간과 관계하여 무한하다.”(칸트 재인용, 논리학 재판, GW21, S.231)

이 증명은 사물의 발생이 시간 속에 현존하는 조건을 갖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만일 아무것도 없는 공허의 시간에는 사물의 발생할 조건이 존재하지 않으니 사물이 발생하려면 시초 앞에 시간에도 사물이 있어야 한다. 결국, 세계의 시초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물이 반드시 그 앞에 발생 조건을 가질 필요가 있는가? 아무 조건 없이 출현하는 사물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시초 앞에 공허한 시간이 있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헤겔은 이런 생각 끝에, 칸트의 증명이 정립에 대한 증명과 마찬가지로 증명돼야 할 것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여기서는 발생 조건이 전제되는데, 이 발생 조건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시초가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 된다. 시초가 없다는 것이 증명돼야 하는 과제인데 이미 발생 조건이라는 말 속에 함축적으로 전제되고 있다.

이어서 칸트는 공간에 한계가 없다는 주장을 증명하는데, 이 증명은 시간의 무한성 증명과 같은 논리를 반복한다. 즉 사물의 공간이 한계가 있다면, 그 밖은 공허한 공간이어야 한다. 그러면 공허한 공간 속에 사물의 공간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시간의 무한성 증명에서는 조건이라는 개념이 이용됐다면 공간의 무한성 증명에는 관계 개념이 이용된다. 어떤 것이 공허와 관계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 무와 관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계가 있으려면 공허가 아니어야 하고 사물의 공간은 다시 더 큰 사물 공간 안에 들어 있어야 한다. 결국, 사물의 공간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이다.

앞에서 발생 조건을 전제하는 것이 시간 앞의 시간을 전제하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공간의 관계를 전제로 하면, 이미 공간 너머 공간을 전제하는 것과 같으니,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증명돼야 할 것이 미리 전제된다고 하겠다.

7)

시공간이 유한하다거나 무한하다는 중장은 동시에 성립하지 않으니, 칸트는 이를 이율 배반이라고 주장한다. 칸트는 이런 이율 배반이 나오는 이유는 사유의 범주, 판단의 형식을 경험적 개념에 적용하지 않고 물 자체의 개념 즉 시간, 공간, 우주, 세계와 같은 물 자체의 개념에 적용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칸트는 이런 물 자체에는 유한성이나 무한성과 같은 사유의 범주를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헤겔은 칸트의 이율 배반을 비판하면서 거꾸로 말하자면 유한성과 무한성이라는 주장이 시간과 공간에 동시에 적용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것은 곧 양적인 관계 즉 일자와 일자의 관계가 연속적인 동시에 불연속적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지닌 한 불가피하게 나오는 것이다. 연속적인 동시에 불연속적이라는 것은 곧 한계가 자기를 자기가 넘어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곧 어떤 정량은 자기 내에 무한성을 내포한다는 것을 말하는데, 헤겔은 칸트의 이율 배반을 비판함으로써 양적 무한성을 설명하려 했다.

헤겔은 칸트의 주장에 대해 이렇게 비판한다.

“세계에서 모순을 제거하고 반대로 모순을 정신 속으로 또는 이성 속으로 옮기고 그 속에서 해결되지 않은 채로 존립시키는 것은 세계에 대해 너무나 나약한 태도다. 사실상 정신은 모순을 견딜 수 있을 만큼 강력하며 그러나 또한 모순을 해소할 줄도 알고 있다. 그러나 소위 세계는 어디에서도 모순이 없지 않으며 모순을 견딜 수 없고 그러므로 생성과 소멸에 희생된다.”(논리학 재판, GW21, S.232)

세계의 모순을 인정하고 그것을 넘어서려는 분투의 정신이 여기에 표현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