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8-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에서 실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8-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에서 실체

1)

앞에서 절대자의 펼침[Auslegubng]에 관해 말했다. 헤겔은 이 펼침은 하나의 가상으로서 절대자가 자기를 실현하는 운동에서 매개가 된다고 한다. 이 매개는 우선 절대자가 자기를 속성으로 드러내고 이 속성이 다시 자기를 부정하는 양상으로서 전환하는 것을 말한다.

사실 여기서 하나의 개체는 다른 개체와 대립하면서 상호 결합하여 실체를 이루고 있다. 이런 실체적 통일성을 통해 내적 본질이 출현한다. 그것이 곧 유적 본질이다. 이는 대립하는 속성의 통일성이다.

이 유적 본질을 헤겔은 절대자라 했는데, 절대자는 내적 속성을 펼쳐서 그중 한 속성을 현존으로 정립한다. 예를 들자면, 유적 본질은 자기를 분화하여 암컷이나 수컷을 산출한다.

여기서 개체를 그 형식[기능]에서 본다면, 곧 속성이다. 각자의 형식은 절대자를 토대로 하므로 이미 다른 형식과 통일 속에 있다. 왜냐하면, 이 형식은 통일적인 유적 본질에서 분화된 속성이기 때문이다. 이런 속성은 표면적으로 독립적인 형식이지만, 내적으로는 다른 속성과의 통일성 속에 있다.

그 때문에 하나의 속성은 이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속성은 한편으로 고유한 분화된 형식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결여를 지니고 자기를 해소하는 것이다. 속성은 절대자의 순전한 동일성에 비추어본다면 무실한 것으로 부정되니, 무실하며 유한한 것이다.

“총체성은 절대적인 동일성으로서 정립된다. 또는 속성은 절대자를 자신의 내용과 존립으로 삼는다. 속성의 형식 규정은 이 속성을 속성으로 만드는 것이지만 따라서 또한 정립[부정]되어 있으며, 직접적으로 단순한 가상으로 존재한다. 즉 부정적인 것으로서 부정적인 것이다. 펼침이 이런 속성을 통해 얻는 긍정적 가상은 이 펼침이 한계 속에 있는 유한한 것을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의 존립을 절대자 속에서 해소하고 이 절대자를 속성에 이르기까지 확산하는 가운데 다시 이것이 속성이라는 사실을 그 자체로 지양한다. 그러므로 이 펼침은 속성과 그것이 전개하는 구별 활동을 단순한 절대자 속에 침몰시킨다.”(논리학, GW11, 373-374)

2)

하나의 속성이 자립적인 개체로 분화한다. 이 과정은 앞에서 형식이 내용을 거쳐 실존으로 되는 과정에서 설명되었다. 이제 이 속성이 현존하는 개체를 보자면, 한편으로 이 개체는 실존이므로 자립적이고 타자에 무차별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개체는 “절대자의 탈자적 존재”이며 “절대자가 존재에 속하는 가변성과 우연성 속에서 상실되는 것”이다. (논리학, GW11, 374)

그러나 다른 한편, 속성의 통일성은 개체 속에 결여한 어떤 것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즉 자기와 대립하는 것을 결여를 통해 지시하며 그 자체는 자기를 보완하는 타자가 결여한 어떤 것을 지니고 있다.

속성이 개체화하면서, 속성의 통일성은 개체의 결여로 등장하는데, 바로 이 결여가 개체의 내적 목적으로서 제시된다. 이런 내적 목적이 처음에는 각자에게 자연적 욕망으로 출현한다. 이런 욕망은 아직은 자각되지 않은 본능적 욕망이다.

예를 들어, 암컷이나 수컷은 평생 타자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개체로서 암컷이나 수컷은 종의 재생산과 무관하며 결국 개체로서 곧바로 소멸하고 마는 것이다.

3)

개체의 내면에서 욕망이 있는 한 개체는 자신에 결여한 타자를 추구한다. 개체는 이제 다른 개체와 결합하면서 자기가 결여한 욕망을 충족하는데, 여기서 개체들의 상호 관계로서 실체가 출현한다. 헤겔은 이 실체를 “그 형식에서 자기 내로 복귀한 절대자” 또는 그 “형식이 내용과 동일하게 된 절대자”(논리학, GW11, 374)라고 한다.

결여한 타자와 성공적으로 관계하고 결합하게 된다면, 개체는 더는 개체가 아니라 개체는 자기 부정성을 통해 가상이 된다. 이런 가상이 곧 양상이다. 부정의 부정을 통해 가상은 절대자로 되돌아간다. 이를 통해 가상은 곧 “절대자가 스스로 빛나는 것”이다. 그것은 “절대자가 반성하면서 전개하는 고유한 운동”이다.(논리학, GW11, 375)

“그러나 양상 즉 절대자의 외면성은 이런 것[가변적이고 우연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외면적인 것으로서 정립된 외면성이니, 단순한 종류나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가상으로서 가상이거나 형식의 자기 내 반성이다. 따라서 양상은 자기 동일성으로 되고, 이는 곧 절대자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절대자는 양상 속에서 절대적 동일성으로 정립된다. 절대자가 절대자의 본래 모습으로 되는 것은 그 자기 동일성이 자기 관계하는 부정성으로서 또는 가상으로서 정립된 가상으로 될 때이다.”(논리학, GW11, 375)

헤겔은 이런 절대자의 실현을 ‘외화’[Aeusserung]와 구별한다. 외화는 자신의 타자 속에 자기를 실현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노동을 통한 형상화에서 보듯이 이런 외화는 타자의 한계에 부딪힌다.

그러나 여기서 절대자의 실현은 개체가 내적으로 결여한 것을 다른 개체를 통해 충족하는 것이다. 이 관계는 상호적인 것이며 따라서 이는 개체의 실현이 아니라, 절대자 자체가 감추어진 자기를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니, 즉 “자기를 자기 자신에 대해 절대적으로 계시[Menifestieren]하는 것이다.” 즉 최초의 추상적 동일성으로서 절대자가 구체적인 동일성으로서 절대자로 즉 ‘절대적인 절대자’로 드러나는 것이다. 헤겔은 이런 ‘절대적 계시’를 실제성이라 한다.

그러나 처음에 자립적인 개체는 내적으로 타자에 대한 욕망을 느끼지만, 현존에서 타자와의 만남은 우연적이다. 내적 총체성으로서 절대자가 실현된 총체성 즉 실제성으로 되는 절대자의 계시는 아직은 우연적인 것 또는 추상적인 필연성에 머무를 뿐이다.

4)

이상에서 헤겔에서 절대자, 속성, 양상 사이의 삼위 일체적 관계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절대자[실체], 속성, 양상은 근대 초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철학의 근본 틀이었다. 그러므로 헤겔은 주석에서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실체, 속성, 양상 개념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스피노자에서 실체는 ‘자기 원인’이라는 개념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본래 자기를 산출하는 것이며 그 본질 속에 실존을 포함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에서 실체가 지닌 생산적 성격을 능산적 자연이라는 개념으로 구정하거나 또한 무한성 개념을 통해 이해한다.

“스피노자가 실체에 관해 제공하는 개념은 자기 자신의 원인이라는 개념이다. 즉 실체는 그 본질 속에 실존이 포함된 것이다. 다시 말해 절대자의 개념은 그 개념을 발전시키는 출발점이어야 하는 타자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런 자기 원인 개념은 심원하고 올바르며 학문에 앞서서 직접 가정되는 정의이다.”(논리학, GW11, 376)

스피노자는 무한성은 무한히 크거나 작은 것과 같은 현재 속에 존재하지 않고 피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스피노자는 무한성이 현재에 존재할 수도 있다고 하면서 예를 들어 하나의 원이 다른 원 속에 있을 때 그 두 원의 차이는 무한한 소수 계열(ψ)로 이루어지는 수이지만, 구체적으로 두 원 사이라는 한정된 크기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런 무한성 또는 자기산출의 입장에 서면 실체는 두 대립한 것의 상호 작용으로 나타나며 이런 점에서 여기서 긍정적인 것은 항상 자기 부정적인 것으로 된다.

5)

헤겔은 스피노자가 나중에 실체에 관한 올바른 출발점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외적 반성에 머물러 있어서 실체에 관한 그의 생각은 모순적인 성격을 드러낸다고 한다. 그것은 그가 실체를 모든 규정성이 사라진 무규정인 것으로 파악하는 데 있다. 그는 이런 실체를 절대적인 것으로 삼아서 모든 규정된 존재는 겉으로 자립적인 것으로 보이더라도 실체 속에 몰락하고 마는 유한한 존재라고 보았다.

실체 자체는 아무런 규정이 없는 순수한 자기 동일성이지만, 외적 반성의 관점에 서면 무한히 많은 규정이 출현한다. 외적 반성은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지성이며 다른 하나는 표상이다. 전자는 인간의 지성이더라도 신적인 관점이며 후자는 유한한 인간의 관점이다.

이제 지성의 관점을 통해 실체를 보면, 실체의 속성이 나온다. 여기서 지성은 인간의 지성이지만, 신적인 지성이므로, 사실 속성은 실체를 신 자신의 관점에서 본 것이고 따라서 이 속성은 실체의 자신이 산출하는 규정성이고 본질적인 규정성이다.

그러나 인간의 실제로 존재하는 지성은 유한한 것일 수도 있으니, 이 경우 지석이 파악한 것은 속성이라기보다 양상에 속하게된다. 그러므로 인간 지성이 파악한 실체의 두 속성은 올바른 것이고 실체에 내적이라고 가정할 근거는 없다. 지성의 이런 이중성 때문에 스피노자는 오락가락하게 된다.

“그러나 이 전체[인식] 운동은 절대자 밖에서[즉 인간적 지성에서] 일어난다. 사실 절대자 자체는 사유[신적 지성]이기도 하며 그런 한 이 운동은 절대자 속에서만 일어난다.”(논리학, GW11, 377)

신적 지성에서 절대자의 속성은 무한하나, 인간 지성의 관점에서는 오직 두 가지만이 실체의 속성으로 규정된다. 그것이 곧 사유와 존재이다. (헤겔은 왜 하필이면 이 두 가지인가를 반문하면서 이는 스피노자가 아마도 경험으로부터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한다.) 이 사유와 존재는 동일한 실체를 지성의 관점에서 본 것이므로 내용은 동일하면서도 형식은 무관하니, 이 때문에 사유와 존재 사이에는 서로 평행하는 상응 관계가 존재한다.

양상은 이런 속성을 다시 지성이 아닌 표상의 관점에서 본 외적 반성이다. 이는 “실체가 타자에 의해 감염된[Affection] 상태이니 그 규정성은 타자 속에 있으며 타자를 통해 파악된 것이다.”(논리학, GW11, 377) 그 결과는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것이며 실체 앞에서 전적으로 무실한 것이다.

6)

그러나 본질적인 속성이든(지성이 인간적 지성인 한), 우연적인 양상이든 스피노자에서는 외적 반성에 속하므로 이는 실체 자체의 순수한 동일성에 비추어본다면 한계를 지닌 것이며 부정되는 것일 뿐이다.

헤겔은 스피노자가 모든 규정성을 부정성으로 파악한 것은 위와 같이 자기 부정적인 것으로 파악할 여지를 남겨놓았으나 그 자신은 이런 자기 부정성으로 나가지 못하고 다만 유한성으로서 부정성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러면 실체의 규정성은 실체의 자기산출이 아니라 외적 반성에서 나온 것이며 실체 앞에 부정되는 것으로 된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규정성이거나 질로서 부정성에 머무른다. 그는 이 부정성을 절대적인 즉 자기를 부정하는 부정성으로 인식하는 데까지 나가지 못한다. 따라서 그의 실체는 그 자체 절대적 형식을 포함하지 못하며 형식에 대한 인식은 내재적인 인식이 아니다.”(논리학, GW11, 376)

그러나 이런 순수한 동일성으로서 실체 자체도 사실은 외적 반성을 통해 나온 것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헤겔은 스피노자가 실체 자체를 파악하면서도 자기 원인이라는 올바른 관점에서 외적 반성에 다시 미끄러짐으로써 사유에서 혼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7)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가 단초적으로 제시한 자기 원인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자기산출과 자기 내 반성이라는 개념을 확립한다. 그는 자기산출의 능력을 지닌 실체를 모나드라고 규정한다. 라이프니츠는 이런 자기산출 능력을 표상 능력이라 규정한다.

모나드는 자기산출의 능력은 무한하니, 각각의 모나드는 그 자체가 총체성을 내적으로 지니고 있으나 개별 모나드는 특정하게 자기를 산출하니, 이 점에서 다른 모나드와 구별된다. 왜냐하면, 실체가 자기를 산출하면, 그 산출된 규정은 다른 것과 다르며, 각자 독립적이고 서로 무차별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산출 능력이 무한하므로 모나드는 수적으로 무한하다.

“이때 모나드는 또한 규정적이며, 다른 것으로부터 구별되고, 그 규정성은 특수한 내용이나 표명[Menifestation]의 종류나 방식에 속한다. 모나드는 본래 그 실체상 총체성이지만, 그 표명에서는 그렇지 않다.”(논리학, GW11, 373-374)

모나드는 총체적 산출 능력을 가지므로 하나의 규정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규정에서 다른 규정으로 끊임없는 이행 속에 있다. 모나드는 폐쇄적이므로 이런 이행은 외부의 힘에 의해 촉발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내에서 일어나는 자발적인 운동이다.

하나의 모나드와 다른 모나드가 자의적으로 특정한 규정을 산출한다면, 이런 모나드 사이에 대립된 규정이 나타나서 서로 충돌할 수 있다. 그러면 우주는 충돌 속에서 소멸하고 말 것이므로, 우주가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은 모나드와 모나드 사이에 조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수한 가능성 가운데 모나드 사이의 조화는 결코 모나드 자신에 의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라이프니츠는 모나드 밖에서 모나드를 조화하도록 조절하는 존재를 상정하는데 그것이 곧 신이다. 이 신이 본래 모나드를 조화하도록 만들어놓았으므로 이 조화는 이미 예정된 것이다.

“모나드의 이 제한성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을 정립하거나 표상하는 모나드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한계 즉 모나드의 본래 존재에 속하거나 모나드와 다른 본질을 통해 정립되는 예정 조화이다.”(논리학, GW11, 378)

8)

헤겔은 라이프니츠가 모나드의 표상 능력을 통해 자기를 산출하며 자기 내로 복귀하는 운동을 설정한 것은 탁월한 생각이라 한다.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가 단초적으로 제시한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는 개별 모나드에 머물러 모나드 사이의 조화를 설명할 수 없었으므로 다시 외부에 존재하는 신을 끌어들이게 되었다. 라이프니츠에게 신은 연극에서 나오는 기계 신과 같은 것이다.

헤겔에서 실체는 개체들의 집단이지만, 이는 단순히 개체들의 집합을 의미하지 않고, 서로 대립하는 개체의 상호 작용을 통해 성립하는 집단이다. 대표적 예가 암컷과 수컷으로 이루어진 집단이다.

이 실체적 관계를 통해 내적 통일성으로서 본질이 출현하니, 이것이 곧 절대자가 되며 여기서 절대자는 서로 대립하는 속성의 통일로서 무한한 절대자이다. 이 절대자가 자기 분화하여 하나의 속성이 등장한다. 이 속성은 라이프니의의 모나드처럼 하나의 속성이지만, 그 내용은 총체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형식은 절대자를 토대로 즉 자신의 내용으로 삼기 때문이다.

헤겔은 이 개별 속성이 하나의 실존인 개체로 출현하면, 이 개체 속에 속성의 총체인 절대자는 결여로서 남게 된다. 그러므로 개체에는 타자에 대한 욕망이 출현한다. 개체는 이런 욕망을 충족하면서 자기의 완전한 총체성을 회복한다. 이런 의미에서 개체는 부정성을 지닌 존재이며 이 개체의 자기 부정을 통해 절대자가 실현된다. 이렇게 절대자로 되돌아가는 개체가 곧 양상이다.

라이프니츠에서 모나드는 완전한 총체성이다. 그러나 헤겔에서 개체는 내적 통일을 결여한 욕망하는 존재이다. 전자에서는 개체와 개체가 관계할 이유가 없으나 후자에서는 개체는 타자와 관계해서만 절대자로 되돌아갈 수 있다.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7-절대자의 펼침과 계시[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7-절대자의 펼침과 계시

1)

본질론 3편 ‘실제성’ 편에서 1장은 ‘절대자’를 다룬다. 이 1장은 양상의 운동을 추상적 개념에 따라 다루는 장이다. 이 운동은 2장 실제성 장에 이르러야 구체적으로 또는 실재적으로 전개될 것이다. 1장에서 다루는 절대자의 운동은 개념적으로 세 가지 계기로 이루어진다. 즉 절대자, 속성[Attribut], 양상[Modus]이다.

종적 개체는 자기를 재생산하는 가운데 종적 본질을 지속하여 생산한다. 생물체가 좀더 발전하게 되면, 하나의 종적 개체가 자기를 재생산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종적 개체가 다른 종적 개체와 관계해야 한다. 즉 암, 수의 결합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암수의 개체가 종의 집단을 이룬다. 이런 종의 개체가 이루는 집단이 헤겔에서 ‘실체’라 불리는 것이다.

개체의 유기체적 통일을 통해 개체의 본질이 출현하듯, 실체 즉 개체의 집단이 지닌 유기적 통일을 통해 이 집단의 본질이 출현한다. 전자를 종적 본질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집단의 본질이라는 의미에서 유적 본질이라 할 것이다. 바로 이 유적 본질이 이것이 곧 절대자다.

이 절대자는 개념적으로 보면, 아직 개체로 분화되기 이전의 것이므로 추상적인 동일성에 해당한다. 생물체에서 종적 본질이 개체에 내재하듯, 실체 역시 처음에는 개체에 내재하고 있다. 절대자는 이런 개체에 내재하는 유적 본질이다. 이 유적 본질이 개체들의 집단으로 실현되면 그것이 곧 실체다.

2)

여기서 ‘종적 본질’ ‘유적 본질’이라는 개념과 ‘절대자’ 또는 ‘실체’ 개념이 혼란을 일으킨다. 단순한 유기체에서 개체가 자기를 재생산하는 가운데 재생산되는 것이 종적 본질이다. 복잡한 유기체에 이르면 ‘본질’을 재생산하는 것은 암수 개체의 관계이다. 복잡한 유기체에서 재생산되는 본질을 따로 구별하기 위해 ‘유적 본질’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인간에 이르면, 사회가 등장한다. 이 사회는 개인의 상호작용을 통해 지속적으로 재생산된다. 그러나 이 사회는 더는 종적 본질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경우 ‘유적 본질’이라는 말이 사용되는데, 종적 본질에서 개체의 상호 관계는 자연적이며 무의식적이다. 반면, 유적 본질 즉 실체에서 개체의 관계는 의식적이며 합목적적이다.

생물체에서 종적 본질과 유적 본질의 관계가 문제다. 그것은 마치 개체를 보존하는 기능인 광합성 기능과 종을 재생산하는 기능인 재생 기능의 관계와 같다. 광합성 기능은 독자적 기능이지만, 그 자체 재생산 기능의 한 계기이며 다른 계기와 통일되어 전체 기능을 형성한다. 거꾸로 전체 재생산 기능은 하나의 단일한 기능이지만, 이 기능은 두 가지 대립한 계기의 통일성이다. 헤겔은 이 관계를 하나가 곧 전체이고 동시에 전체의 계기라는 관계로 규정한다.

헤겔이 ‘실체’라 할 때는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개체들의 집단을 의미하고 ‘절대자’는 이런 집단을 형성하는 출발점이 되는 목적 즉 내적 본질을 의미한다.

3)

이런 내적 실체 즉 절대자는 순수한 자기 동일성이므로 아직 “아무런 술어도 지니지 않은” 공허한 것이며, 그러나 앞으로 “모든 술어를 지닐 수 있는” 잠재적으로 풍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이런 절대자의 모습을 ‘가장 명백한[formellste] 모순’이라 한다. 헤겔에서 모순은 곧 운동을 의미하므로 절대자는 자기에 고요하게 머무르지 못하고 운동으로 나가게 된다.(논리학, GW11, 370)

절대자 즉 내적 실체는 추상적인 동일성이다. 아직 무엇으로 규정되지 않았다. 이 실체는 자기를 분화하여 속성으로 출현한다. 헤겔은 내적 실체의 분화를 ‘펼침'[Auslegung]이라 한다. 보통 ‘해석’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 단어는 본래 내적인 것을 밖으로 펼쳐놓는다는 의미를 지닌다. 때로 이것은 ‘씨를 뿌리다’, 산종[散種]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영어로는 ‘explicate’라는 의미인데 ‘implicate’에 대립한다. 이런 말은 라틴어에서 ‘접다’라는 의미를 지닌 ‘plico’에서 유래한다. 그런 의미에서 ‘explicate’는 접은 것을 펼친다고 볼 수 있는데, 헤겔이 펼침[Auslegung]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 사용된다.

헤겔에서 절대자의 펼침[Auslegung]이란 곧 실체가 개체로 분화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달리 말해서 실체가 자기의 씨를 이리저리 뿌려놓는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헤겔은 절대자의 펼침을 단순한 외적인 반성을 통해 등장하는 규정성[Bestimmtheit]과 구별한다. 외적 반성은 절대자 밖에서 사유가 절대자에 관계하는 것이다. 절대자는 순수한 동일성이므로 사유는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으로 이를 규정할 수 있으나, 그런 규정은 모두 절대자에게 외적으로 머무르는 것이어서 부정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술어를 부정하거나 이와 같이 정립하는 것은 외적 반성에 속하는 한, 이런 부정이나 정립은 명백히 비체계적인[unsystematische] 궤변[Dialectik]이며 이 궤변은 약간의 노력으로도 많은 규정을 여기서나 저기서 파악하고 마찬가지로 아주 적은 노력으로도 한편으로는 그 규정의 유한성과 부정성을 지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절대자가 그 반성 앞에 총체성으로 아른거리고 있으니 이 절대자는 모든 규정을 내재하고 있다고 언표한다. 그런데도 이 반성은 지금 말한 긍정과 앞서 말한 부정을 진정한 통일로 고양할 수 없다.”(논리학, GW11, 370)

우리는 이 절대자 즉 내적 기능을 사유를 통해 다양하게 규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생물체는 이런저런 기능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분류된다. 예를 들어 동물은 방어나 공격의 기능을 통해 분류될 수도 있다. 어떤 동물은 발톱을, 어떤 동물은 이빨을, 어떤 동물은 독을, 어떤 동물은 지혜를 이용하여 자기를 방어하고 또는 적을 공격한다. 이런 분류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비체계적인 궤변’일 뿐이다. 이런 분류는 절대자 즉 내적 실체에 대한 외적 반성이지 진정한 펼침은 아니다.

3)

우리는 사유를 통해 즉 반성을 통해 절대자에 접근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반성이 절대자에 대해 단순히 외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절대자에 내적인 것으로 되면, 즉 주관적인 반성이 아니라 객관적인 반성이 되면, 비로소 이때 반성을 통해 규정된 것은 곧 절대자의 주름이 펼쳐진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이 외적 반성이 어떤 경우에 절대자의 펼침으로 발전하는가? 헤겔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절대자의 규정은 절대적 형식이지만, 그 동일성을 이루는 계기는 단순한 규정성인 것은 아니고 오히려 그 동일성은 그것의 계기 각각이 자기 자신에서 총체성이고 따라서 그 [절대자가 지닌 순수 동일성의] 형식에 무차별하면서 전체의 완전한 내용이다.”(논리학, GW11, 371)

“거꾸로 말하자면 절대자는 절대적 내용이니, 그 자체로 무차별한 다양성인 그 내용은 자신에서 부정적인 형식 관계를 지니면서 이를 통해 그 다양성은 다만 순수한 동일성이 된다.”(논리학, GW11, 371)

이런 구절을 통해 보자면, 절대자는 형식적으로 보면, 순수한 동일성이지만, 내용 속에서는 대립하는 속성의 무구별적인 통일이다. 그 속에 포함된 하나의 속성은 전체를 이루는 하나의 계기, 동시에 그 자체로 다른 계기를 이미 포함한 전체, 총체성이다.

이런 점에서 속성은 총체성으로서 전체 내용을 갖지만, 하나의 계기로서 개별적 형식이다. 이 형식은 서로 무차별한 것이다. 속성에서 총체적 내용은 감추어져 있으며, 표면에 등장하는 것은 개별적인 형식으로서 속성이다.

그러나 내용상 이미 전체이므로, 이 개별적 속성은 타자와 관계하는 가운데 자기 부정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이런 아직 이런 자기 부정성이 드러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내용을 통한 통일성은 아직 감추어져 있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설명은 기독교의 삼위일체라는 개념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기독교에서 삼위 즉 성부와 성자, 성령은 각기 전체 신의 한 계기로서 그것은 자립적 총체이지만, 동시에 자기 부정성을 통해 전체로 복귀한다. 또한, 하나의 속성이 배후에 총체성을 지닌다는 것은 라이프니츠가 말한 모나드 개념을 연상시킨다. 모나드는 내용상 총체적이지만, 개별적인 속성을 표상한다.

이와 같이 절대자에 대한 반성이 낳은 규정이 하나의 계기이면서 총체성으로 되는 경우 이제 그 규정은 바로 절대자에 관한 펼침이 된다. 이러한 점은 생물체의 기관이 고유한 기능을 지니면서도 유기체적 전체 속에 분리되지 않으므로 다른 기능을 담당할 능력을 지니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두뇌의 국소화를 생각해 보자. 두뇌의 한 부분은 전체적인 통일 속에 있으므로 고유한 기능을 지니면서도 다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4)

속성이 자체 내에 이미 내적인 통일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제 이 내적 통일성이 드러나게 되면, 속성은 겉보기에 자립적 독자성을 유지하지 못하며, 이런 내적 통일성 속으로 몰락하면서 자기 부정적인 것으로 된다.

만일 속성이 단지 “그 자체로서 타당성을 지닌[자립성을 지닌] 형식적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는 외적 반성에 속한다. 절대자에 대한 외적 반성에서는 그 내용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며 우연한 것으로서 잡아채진 것이다.

“이런 반성은 절대적 동일성 속에 지양되면서 절대적 동일성에 내적으로 머무르고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절대적 동일성에 외면적인 것으로 된다.”(논리학, GW11, 371)

반면, 이런 펼침에서 그 펼쳐진 속성은 ”절대자의 내적 필연성을 통해 규정된 것“(논리학, GW11, 372)이다. 헤겔은 이런 경우 개별 계기를 ‘투명한 가상’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가상은 곧 자기 부정적인 것으로서 동시에 자립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가상은 무가 아니라 “절대자가 그 속에서 빛이 나는 것”이며 투명하므로 “절대자를 자기 자신을 통해 꿰뚫어 볼 수 있게 한다.” 그런 가상에는 “절대자에 대립하는 구별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것을 통해 빛이 나는 것에 의해 흡수되는 매체”다.(논리학, GW11, 372)

그러므로 절대자의 펼침은 하나의 운동이다. 그 운동은 순수한 동일성으로서 절대자에서 출발해서 다시 절대자로 되돌아가는 것인데 처음의 동일성은 추상적인 절대자이며 이렇게 운동을 통해 도달한 절대자가 절대자로서 절대자[Absolue-Absolute]이다.

그것을 매개하는 것이 곧 속성이다. 처음 속성은 자립적인 형식이 되면서 오히려 절대자를 은폐하게 된다. 그러나 속성 속에 감추어진 통일된 내용이 드러나면서 속성은 자기를 부정하고 절대자를 비추어 주게 된다. 즉 속성은 가상으로 전락한다.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6-관계 범주에서 양상 범주로의 이행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6-관계 범주에서 양상 범주로의 이행

1)

논리학 본질론 2편 ‘현상’ 편의 핵심은 법칙 개념이다. 법칙 속에 관계 맺는 두 요소가 곧 현상이다. 이 ‘현상’ 편은 ‘실존’(1장)에서 ‘현상(2장)’ 그리고 ‘관계(3장)’로 나가는데 이는 범주 또는 판단 형식에서 본다면 관계 판단 형식에 속한다.

‘현상’ 편은 전체적으로 물체(실존)에서 성질의 관계(법칙)가 발견되고 나가서 유기체적 상호 관계(내외 관계)가 발견되는 경험적 인식 과정과 상응한다. 그래서 ‘실존’은 정언 판단 형식에 해당하고, ‘현상’은 가언 판단 형식에 해당하며 그리고 ‘관계’ 그 가운데 특히 내부와 외부의 관계가 곧 선언 판단 형식에 해당한다. 이런 경험적 인식 과정의 발전 때문에 현상 편은 존재론에서 질의 생성을 다루는 2편 ‘현존’ 편과 3편 ‘대자 존재’ 편과 상응한다.

‘현상’ 편 끝에 등장하는 내부와 외부의 관계는 곧 내부가 외부로 실현되는 과정이며, 이런 실현의 문제가 제기되면서 ‘현상’ 편은 끝나고 본질론의 마지막 편인 ‘실제성[Wirklichkeit]’ 편이 시작된다.

2)

이 실제성 편에서 다루는 핵심은 양상[Modus] 개념이다. 즉 가능성, 실제성, 우연성, 필연성의 개념인데 3편 2장에서 다루어지는 이런 양상 개념은 한편으로는(3편 1장에서는) 절대자 즉 실체 개념과 연관해서 다루어지며, 다른 한편으로는(3편 3장) 실체 관계, 인과 관계, 상호 작용 관계와 관련된다. 이 3편 실제성 편 전체가 전개되는 구조를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위의 구조를 보면, 마치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의 형태가 개념의 계기가 되는 과정과 같다. 논리학에서도 이런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다만, 정신현상학에서는 사선에 해당하는 것이 역사적 형태이었고 반면 수직선에 해당하는 것이 논리적 계기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선에 해당하는 것이 논리적 계기이고, 수직선에 해당하는 것이 역사적 형태이다. 즉 논리적 과정이 역사 속에 투영되어 있다.

이런 전개 방식은 논리학 존재론의 영역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것인데, 본질론에 이르면 앞에서 현상 편에서부터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논리의 전개는 표면적으로는 논리적으로 전개되지만, 배후에 경험을 매개로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이런 구조는 이런 경험이 매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존재론에서는 그런 경험이 배후에 감춰있었으나, 본질론은 본질과 개체라는 상호 반성 관계를 통해 전개되므로 비로소 여기서 그런 감춰진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성 편에서 논리적 범주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중심축은 우연성(추상적 필연성)에서 실재적 필연성(실재적 우연성)을 거쳐 절대적 필연성으로 나가는 길이다. 그 이유는 곧 내부가 외부로 실현되는 방식 때문이다. 이 과정은 내부가 외부로 우연하게 실현되는 생물체에서 주체가 매개하면서 내부를 필연적으로 실현하는 인간으로 이행하는데, 내부가 외부로 실현되는 과정은 자기를 실현하는 주체의 탄생을 예고한다.

여기서 핵심 개념이 되는 우연성, 필연성 등이 곧 양상 범주이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실제성 편은 양상 판단 형식에 따라서 발전한다. 헤겔은 이런 양상 개념을 존재론에서 나오는 양의 개념으로 재해석한다. 우연성은 양적으로는 단칭 판단이다. 실재적 필연성은 특칭 판단에 해당한다. 마지막 절대적 필연성은 전칭 판단에 해당한다. 본질론 2편 현상 편은 존재론에서 양 개념의 발전을 다루는 존재론 2부에서 나오는 논리적 범주(정량, 척도, 척도 관계)가 반복된다.

3)

여기서 까다로운 번역 문제가 있다. 일상적 용법과 헤겔의 용법이 구별되기 때문이다. 독일어 ‘Wirklichkeit’ 는 일상적으로는 현재 이루어져 있는 것[영어: actual]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니 흔히 ‘현실’로 번역한다.

그러나 헤겔에서 ‘Wirklichkeit’는 본질이 실현된 것이라는 의미에서 사용되니,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능태’와 구별되는 ‘실현태’라 할 때의 의미를 지닌다. 그 때문에 ‘Wirklichkeit’는 ‘참된 것’이라는 의미로도 새겨진다. 헤겔이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이라” 할 때 이 ‘현실적인 것’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참된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될 때 올바로 이해될 것이다.

필자는 독일어 ‘Wirklichkeit’는 우리 말로 ‘실제성’에 더 가깝다고 본다. 우리가 “실제로 그래”라고 말할 때 ‘실제성’에는 진실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앞으로 이를 ‘실제성’으로 번역하고자 한다. 실제에서 제[際]는 세계라는 의미이며, 따라서 환상이나 가능한 세계 구별된 세계, 진짜의 세계를 의미한다.

헤겔에서 ‘현존’[Dasein], ‘실존’[Exsitenz]과 ‘실제성’[Wirklichkeit]는 본질이 어느 만큼 실현된 것인가에 따라서 구별된다. 혼동되지 말아야 할 것은 헤겔이 사용하는 실재성[Realitaet] 개념이다. 이는 아마도 영어 ‘reality’에서 독일어로 받아들여진 말로 보이는데, 헤겔에서는 관념성[Idealitaet]에 상대적으로 규정된 말이다.

이 두 가지 개념 쌍 즉 현존과 실제성, 실재와 관념은 구별 기준이나 맥락이 다르다. 흔히 ‘실재성’과 ‘관념성’은 의식 밖의 것[대상]과 의식 내의 것[의식]으로 구별하지만, 헤겔은 이런 구별을 위해서는 ‘표상’[Vorstellung]과 ‘대상’[Gegestand]이라는 말을 따로 사용한다. 반면, ‘실재성’은 ‘타자에 관계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반면 ‘자기 관계하는 것’ 즉 대자 존재는 ‘관념성’으로 규정된다.

헤겔에서 단순한 ‘실재성’은 자주 ‘대상’과 뒤섞여 사용되지만, 모든 실재하는 것이 의식 밖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또한, 실제성은 본질이 실현된 것이고 타자 속에서 자기 관계하는 것이니, 실재성과 관념성의 통일로 규정된다.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하는 것은 영어 때문이다. 영어로 ‘reality’이라는 말은 의식 밖의 ‘실재’와 ‘진실’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포함한다. (실재성을 헤겔처럼 타자 관계로 규정하는 사람은 없다.)

헤겔의 영어본은 ‘Realitaet’과 ‘Wirklichkeit’를 전부 ‘reality’로 번역한다. 그 때문에 헤겔 영어본은 헤겔에 관해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영어에서 관념적인 것[idea]에 대응하는 것은 객관적인 것[object]이 있으니 구별해서 번역하면 좋았을 것이다.

유사한 언어로 영어 ‘actual’이란 말이 있다. 이는 아마 라틴어 ‘actu’에서 나온 말인데, 이는 ‘이미 생겨난 것’, ‘정해진 것’이라는 의미이며, ‘사실’이라는 말과 같다. 독일어에서는 ‘Tatsachlich’로 번역된다. 우리 말로는 ‘현실적’ ‘사실적인 것’으로 번역된다. 필자가 ‘Wirklichkeit’를 굳이 통요된 번역인 현실적이라고 번역하지 않는 것은 그렇게 번역하면 헤겔의 ‘Wirklichkeit’가 이런 ‘actuality’란 의미로 오해되기 때문이다.

우리 말로 ‘실재’, ‘실제’, ‘사실’은 좀 혼란스럽게 석여서 사용되지만, 헤겔의 번역을 위해서는 아래처럼 구별해서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실재’는 ‘Realitaet’에 대해 ‘실제’는 ‘Wirklichkeit’에 대해 ‘사실’은 ‘Tatsache’, ‘Fact’등에 대한 번역어로 사용하고자 한다. 그런데 헤겔이 자주 ‘Wirklichkeit’가 일상적인 의미로 사용하니, 그럴 때는 ‘현실’로 번역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4)

실제성 편의 출발점은 절대자라는 개념이다. 갑자기 절대자라는 개념이 튀어나와 당황스럽다. 절대자란 곧 일상적으로는 신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 읽어 보면 여기서 절대자는 실체라는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헤겔은 이 1장 절대자 장에서 절대자, 속성, 양상이라는 개념 쌍을 다룬다. 이런 개념들은 철학 전통에서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가 실체 개념을 다룰 때 등장했던 개념이고 이 장의 주석에서 헤겔도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의 실체 개념을 분석하니, 그가 이들의 실체 개념을 염두에 두고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내부와 외부의 관계가 실체, 속성, 양상 개념으로 이행하는 과정은 무엇인가?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내부와 외부 관계에서 유기체 조직을 매개로 종적 본질이 내부이었고 종적 개체들의 분화된 집단이 곧 외부이었다.

내부와 외부가 합일에 도달하는 경우란 곧 종적 본질이 개체가 배타적(부정적) 통일 관계로 분화될 경우이다. 구체적으로는 생물체의 종이 암, 수 집단으로 구별될 때를 말한다. 개체가 배타적 통일을 이루지 않는 집단에서는 그 분류 기준은 종적 본질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다. 예를 들어 영양 획득 기능에 따른 분류는 상이성의 집단을 이룰 뿐이니, 그 기능은 종적 본질에 해당하지 못한다.

이렇게 내부와 외부가 합일에 도달할 때 마침내 헤겔은 이제 실체 즉 절대자가 등장한다고 한다. 이 절대자는 곧 자기를 실현한 본질이다. 즉 내부의 본질은 자기를 배타적으로 분화하여 완전히 서로 통일된 외부 집단이 된 것이다.

“내부와 외부의 이런 통일이 절대적으로 실현된 실제성[Wirklichkeit]이다. 그러나 이 실제성은 처음에는 절대자 자체이다. 왜냐하면, 이 실제성은 그 속에서 형식[내부와 외부의 차이로서 형식]이 지양되고 외부와 내부라는 구별이 공허한 그러나 아직은 외적인 구별이 되는 통일로 정립되기 때문이다.”

5)

실제성 편 1장에서 거론되는 ‘절대자’는 실체 즉 즉 내부와 외부가 통일된 것이니, 1장에서는 이런 통일을 개념적으로 다루면서 이를 속성과 양상의 관계를 통해 설명한다.

2장에서는 실제성이 다루어지는 데, 이는 우연성(추상적 필연성)에서 개연성(실재적 필연성)을 거쳐 필연성(절대적 필연성)으로 나간다. 이는 내부와 외부의 통일 즉 실체를 매개하는 개체들의 관계 방식에 따라 발전한다. 자연적 물체에서 이 통일은 개별적으로 일어나며, 생물체에서는 개연적으로 그리고 인간 사회에서 이 통일은 절대적 필연성이다.

헤겔은 우연성에서 필연성으로의 이행 과정을 절대자의 ‘외적 반성’이 ‘자기 내로 복귀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이 자기 내 복귀는 절대자를 우연히 실현되는 것에서 필연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니, 전자는 실현 자체가 외적인 것이고 후자는 실현 자체가 절대자에 내적인 것이다.

“[외적] 반성은 이 절대자에 대해 외적인 것으로서 관계하는데도 절대자는 이 외적 반성을 마치 그것이 자기의 고유한 운동인 것처럼 고찰한다. 그러나 이 반성은 본질적으로 이런 것[고유한 운동]이므로, 이 반성은 부정적으로 자기 내로 복귀한다.”(논리학, GW11, 369)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5-내부와 외부의 관계[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5-내부와 외부의 관계

1)

본질적 관계는 세 단계로 전개된다. 전체와 부분, 힘과 드러냄, 내부와 외부의 관계다. 이 관계는 모두 개체 사이의 관계를 매개로 두 세계 즉 본질(요소의 관계)의 세계와 현상(관계를 이루는 요소)의 세계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 여기서 본질이 현상의 자립성을 어느 정도 파고드는가(현상의 반성 또는 본질의 정립)에 따라서 세 단계가 구분된다.

전체와 부분의 관계에서 전체는 부분에 대해 외면적이며 다만 형식적인 관계에 머무를 뿐이다. 힘과 드러냄의 관계에서 힘은 물체와 외면적으로 관계하지만, 독립적으로 실존한다. 힘이 상호작용하는 관계에 이르면, 상호작용의 양면으로서 내부와 외부가 출현한다.

전체와 부분의 관계나 힘과 외화의 관계는 역학적 자연에 존재하는 관계다. 내부와 외부의 관계가 유기체적 조직이 다시 출현한다. 실존에서 현상을 거쳐 관계에 이르기까지 존재론에서 이미 전개되었던 생성의 운동이 다시 반복되었다. 마침내 힘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본질론의 출발점이라고 할 유기체적 조직이 다시 출현한 것이다.

2)

현상 편은 실존 장, 현상 장, 관계 장으로 전개된다. 이는 판단 형식에 상응하는데, 실존이 정언판단 형식에 해당한다면, 현상에서 출현하는 법칙은 가언판단 형식에 해당한다. 그리고 관계 장에서 마침내 출현한 내부와 외부의 관계가 곧 선언판단 형식에 해당한다.

법칙이 가언판단 형식이란 것은 쉽게 이해된다. 그런데 내부와 외부의 관계가 선언판단 형식이라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여기서 헤겔이 선언판단 형식이라 한 것은 배타적인 선언판단 형식을 말한다. 즉 두 선택지 p와 q가 서로 모순 관계에 있을 때 판단이 A= p or q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면 (배타적) 선언판단이 된다.

이런 배타적 선언판단에서 p, q는 종적 본질이 실현되어 나타나는 개체의 집합을 이룬다. 이 배타적 선언판단에서 주어인 A는 p, q라는 개체를 통해 자기를 실현하는 종적 본질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배타적 선언판단은 내부와 외부의 관계를 말한다.

개체의 집합은 이런 배타적 관계에 있을 때 전체 집합이 된다. 만일 개체를 다른 방식으로 나누면 전체 집합이 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생물체를 암수로 구분하면, 배타적 관계가 되고 여기서 암수의 개체는 종의 완결된 전체 집합을 이룬다. 그러나 생물체를 영양 기능에 따라서 분류하게 되면, 영양을 얻는 방식에 식물과 동물로 대체로 구분되더라도 그 사이에 다양한 중간 집단이 있고 그 중간 집단은 무한히 세분되므로 완결된 전체 집합을 이루지 못한다.

그런데 헤겔은 배타적 전체 집합을 이루는 것과 종적 본질과 필연적으로 상관한다고 본다. 즉 배타적인 전체 집합이 그 집합을 구성하는 원리가 종적 본질인가를 결정해 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꾸로 종적 본질은 자기를 배타적인 집합으로 출현하게 한다.

그러므로 생물체를 암수로 나누면 배타적 집합이 되는데, 그러니 암수로 나누는 기준 즉 재생산 기능이 생물체의 종적 본질이 된다. 반면 그것은 영양 기능을 기준으로 나누었을 때 배타적 집합이 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종적 본질에 해당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하게 된다. 배타적 집합과 본질 사이의 이런 연관을 표현하는 원리가 곧 내부와 외부의 합일이라는 원리이다.

3)

힘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자립적인 실존이 동시에 가상이 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지양하면서 자기에 대립하는 타자로 되며, 타자로 반성하는 것을 통해 자기 내로 복귀하며, 타자를 정립하는 것을 통해 자기가 존립한다.

여기서 자기 관계한다는 점에서 자립적인 실존이지만, 이것이 자기 부정을 통해 또는 대립하는 타자를 매개로 해서 나온다는 점에서는 가상이다.

“이제[힘의 상호작용 속에서] 공허하고 투명한 구별만이 즉 가상만이 현전한다. 그러나 이 가상은 매개이어서 이것은 자립적인 존립 자체이다. 대립된 규정은 자기 자신에서 자기를 지양하며 그들의 운동은 이행일 뿐만은 아니다. 부분적으로 그 출발점이 되어 타자로 이행되었던 직접적인 것은 다만 정립된 것으로서만 존재하며 부분적으로 이를 통해 규정의 각각은 그 직접성 속에서 이미 자기의 타자와 통일을 이루며 이를 통해 이행은 전적으로 그에 못지 않게 자기를 정립하면서 자기 내로 복귀하는 것이다.”(논리학, GW11, 364-365)

이런 힘의 상호작용은 이미 이 힘들의 내적인 통일을 전제로 한다. 상호작용은 이런 내적인 통일이 자기를 드러낸 것이다. 이 내적 통일을 헤겔은 내부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생물체의 종적 본질인 재생산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힘이 상호작용하므로 여기서 자립적인 개체는 대립하면서도 상호작용하는 개체적 실존으로 분화된다. 이런 개체가 이루는 집합이 곧 외부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결합을 통해서 재생산하는 암수 두 개체의 집합이다. 이 집합은 종적 본질이 실현된 실존의 집합이다.

여기서 내부 즉 내적 본질과 외부 즉 개체의 집합은 상호작용하는 유기체적 조직을 토대로 한다. 그것의 양면이 곧 내부와 외부이다. 그러므로 내용으로 보면, 내부와 외부는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다만 형식상으로 보면, 양자는 내부와 외부로 구분된다.

4)

여기서 내부와 외부는 동일한 상호작용하는 유기체적 조직을 토대로 한다. 헤겔은 이 유기체적 조직을 ‘절대적 사태’[실체]라고 하는데, 내부와 외부는 이 유기체적 조직의 동전의 양면이며 다만 형식적인 구별이므로 내부와 외부는 상호 직접 이행한다.

“내부는 반성된 직접성 또는 본질의 형식이니 외부 즉 존재의 형식에 대립하여 규정된다. 그러나 양자는 다만 동일한 것이다. 이 동일성은 우선 양자가 충만한 내용을 지닌 토대로서 또는 절대적 사태로서 갖는 순전한 통일이며 그런 통일에서 두 가지 규정은 서로 무차별하고 외적인 계기이다.”(논리학, GW11, 365)

내부와 외부는 이처럼 동일한 사태가 지닌 양 측면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양자는 직접 자기의 타자로 이행한다. 즉 그것이 외부이므로 바로 그 때문에 그것은 내부이며 거꾸로 그것이 내부이므로 바로 그 때문에 그것은 외부이다. 예를 들어, 유기체 재생산의 기능은 오직 암수 개체로 분화되는 것을 통해서만 수행되며, 암수 개체의 분화는 곧 유기체의 본질이 재생산 기능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왜 유기체의 재생산 기능은 암수라는 서로 배타적인 관계에 있는 개체로 분화되는가? 이는 암수 중간적인 또는 암수 양면적인 개체의 출현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거꾸로 예를 들어 영양을 획득하는 기능으로 분류하면 식물과 동물로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그 중간에 다양한 집단이 있는데, 기생 식물이라든가 이동하는 식물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개체가 배타적 관계를 맺지 않는다면, 그 기능은 생물체의 본질적 기능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헤겔은 이에 대해 대답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부가 본질로, 외부가 존재로 규정된다면, 하나의 사태는 다만 그 본질 속에 있는 한에서 바로 그 때문에 다만 직접적 존재이며 하나의 사태는 다만 존재하므로 다만 비로소 여전히 그 본질 속에 있다.”(논리학, GW11, 366)

즉 내부와 외부는 개념적으로 “각각이 다른 규정을 전제로 하며, 그 자신의 진리인 이 다른 규정으로 이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내부는 “그의 타자 즉 외부에 관계하는 것으로서만 존재하며”, 외부는 “본질 즉 내부에 관계하는 것으로서만 존재한다.”(논리학, GW11, 366)

일반적으로는 유기체가 대립된 개체로 분화되는 경우, 유전자의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어서 그 종적인 재생산을 더 강화할 수 있게 한다고 설명된다. 헤겔은 이런 설명보다도 개념적으로 내부와 외부는 유기체적 조직의 동전의 양면이라는 설명으로 대체한다.

이를 고려해 볼 때, 헤겔은 유기체적 조직은 그 본래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대립하는 개체로 분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일반적인 개념적 진리로 삼는 것으로 보인다.

5)

헤겔은 예를 들어 생물체의 종이 암수로 구분되는 것과 같은 것을 내부와 외부가 직접적으로 통일되는 것으로 규정한다. 양자는 상호작용하는 유기체적 조직이라는 절대적 사태를 토대로 한 것이다. 이 사태가 내용이 되고, 내부와 외부란 다만 사태가 지닌 동전의 양면이며 형식적 차이에 불과하다.

여기서 외부와 내부의 통일은 유기체적 상호작용을 매개로 한다. 그러나 이 유기체적 상호작용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일 뿐이므로, 이를 매개로 한 외부와 내부의 통일 역시 우연하다. 예를 들어 종의 재생산은 암수의 결합을 통해 일어나는데, 암수의 만남 자체가 우연적이므로 이런 재생산은 우연적인 것으로 머무른다. 그 때문에 종의 재생산은 지속성을 지니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제 외부와 내부의 필연적인 통일이 요구된다. 이런 필연적 통일은 상호작용하는 개체의 필연적인 만남을 전제로 한다. 이를 통해 내부는 외부를 통해 자기를 지속적으로 재생산하게 된다.

예를 들자면, 인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회를 보자. 인간은 자연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연적으로 타자와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다. 자연에 대해 노동하기 위해서는 상호 협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사회는 개체의 작용을 통해 자기를 지속하게 한다. 헤겔은 내부와 외부의 이런 필연적 관계를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내부는 단순한 자기 내로 반성된 동일성인 한 직접적인 것이며 따라서 본질인 동시에 존재이며 외부적인 것이다. 외부는 다양한 규정된 존재인 한에서 다만 외부이니 즉 비본질적인 것으로서 정립되면서 근거로 복귀하니 곧 내부로 존재한다.”(논리학, GW11, 365)

내부와 외부의 직접적인 통일에서 내부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상호작용하는 개체 내에 머무른다. 반면, 내부와 외부의 필연적인 통일에서 내부는 이제 외부와 구분되는 독립적인 실존을 가지게 된다. 거꾸로 외부는 자체 내에서 내부를 지니게 된다. 그 결과 외부와 내부 사이에 상호작용이 일어나게 된다. 예를 들어 인간의 유적 본질은 사회로서 개체들의 집합과 구별되는 독립적인 실존을 가지게 된다. 또한, 상호작용하는 개체는 각자의 자기의식이라는 고유한 내면을 지닌다.

그 결과 인간은 본질에 대한 자각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사회를 구성한다. 여기서 유적 본질을 사회로 실존하게 하는 것은 개인이 내적 의식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매개한다. 내부와 외부는 매개적으로 통일하게 된다.

“즉 각자는 바로 그것이 본래 그러한 것인 자신의 타자를 통해 관계의 총체성이 된다. 또는 거꾸로 말하자면 각각의 측면이 지닌 규정성은 이 규정성이 그 자체에서 총체성이라는 사실을 통해 다른 규정성과 매개된다. 그러므로 총체성은 형식이나 규정성을 통해 자기 자신과 매개하고 규정성은 단순한 자기 동일성을 통해 매개된다.”(논리학, GW11, 365)

내부와 외부의 직접적인 통일은 이제 막 완성되었다. 앞으로 3편 실제성에 들어가면 직접적이고 우연적인 통일이 필연적이고 매개되는 통일로 발전하게 된다.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4-힘과 드러냄의 관계[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4-힘과 드러냄의 관계

1)

전체와 부분의 관계는 각자 자립적이면서도 관계의 한 계기로서 부정적인 것이다. 처음에는 그 자립성 때문에 전체와 부분은 대립했다. 그러나 각자 타자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자기를 부정하여 타자로 이행하면서 다시 자기 내로 복귀하는 가운데 모순에 부딪히고 이를 통해 힘과 드러냄[외화: Aeusserung]의 관계로 이행한다.

힘과 그 드러냄의 관계는 전체와 부분의 관계보다 발전된 것이다. 여기서 전체와 부분이 갖던 자립성이 양자의 관계에 의해 침투되었기 때문이다. 헤겔은 전체와 부분의 내적인 모순이 극복되면서 이런 발전이 일어나는 것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이런 이행은 단순히 개념적인 이행만은 아니다.

논리적 범주의 이행은 이처럼 내재적으로 이행하지만, 항상 그 밑에 경험의 발전이 매개하고 있듯이 여기서도 경험의 발전이 매개한다. 처음 자연은 전체와 부분의 관계를 통해 파악되었다. 그런 가운데 자연 속에 힘의 관계가 발견되면서 자연을 이해하는 논리적 범주의 발전이 일어난 것이다.

2)

그런데 처음에 힘은 물체에 외면적이다. 그것은 마치 뉴톤의 힘의 법칙이 물질에 외면적인 것과 같다. 그 힘은 “외적 강제에 의해 사물에 밀어 넣어진 것이다.”(논리학, GW11, 360) 힘은 독자적으로 출현할 수 없으니, 이런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물체를 토대로 한다. 그러면서도 물체는 힘의 운동을 방해할 수 없다. 힘은 독립적으로 실존하는 것이며 물체에 다만 부착되어 있을 뿐이다.

물체와 무관하게 힘은 실존하기에 힘은 하나의 물질[Materie]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자기력이나 전기력 등 대신 자기 물질 또는 전기 물질 등의 말이 사용된다. 그러나 이 힘은 특정한 물질은 아니다. 힘은 자기를 드러내서 타자와 관계를 맺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존재하는 직접성’으로서 실존이 아니라 ‘반성된 직접성’에 속하는 실존이다.

‘반성된 직접성’에 속하는 ‘전체’와 ‘힘’은 구별된다. ‘전체’는 자립적이더라도 부분을 밖에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부분을 통해 실존한다. 그러나 ‘힘’은 독자적인 자립성을 물체의 외면에 갖는다.

하나의 물체에서 힘은 그대로 머무르지 않는다. 힘은 반드시 전달되는 것이니, 힘을 통해 하나의 물체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를 반발하게 하는 모순적인 것이 된다. 힘은 이렇게 전달되면서 직접 존재하는 물체를 힘으로 전환하게 하니, 직접적 물체는 부정되면서 이 힘의 관계 속의 한 계기가 된다.

3)

힘과 그 드러냄의 관계는 어떤 물체에서 힘이 다른 물체에 자기를 전달하는 관계다. 이는 하나의 성질이 다른 성질로 이행하는 관계가 아니며 타자를 무엇으로 규정하고 정립하는 근거도 아니다. 힘이 드러난다는 것은 물체가 지닌 하나의 힘이 다른 물체에 이동하는 것이다.

그 힘은 처음 그대로 유지되므로 헤겔은 드러냄의 관계를 “옮김[Uebersetzen]”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힘과 드러낸 힘 사이의 관계는 다만 동일성이 유지되는 통일이다. 동시에 이 힘은 움직이지 않던 타자를 움직이게 하면서 부정하는 것이니 곧 부정하는 통일이다.

“힘의 운동은 이행이 아니다. 차라리 힘은 자기 자신을 옮겨놓는 것이며 힘 자신에 의해 정립된 변화 속에서 힘의 있는 그대로가 유지된다.”(논리학, GW11, 360)

힘의 전달을 통해 힘과 물체 사이에 즉 반성된 직접성과 존재하는 직접성 사이에 통일이 이루어진다. 이 통일은 힘이 다른 물체로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므로 ‘전체’에서처럼 형식적인 통일에 머무르지 않고 실재적으로 통일하게 한다.

그런데 이런 전달은 하나의 힘이 어떤 물체에 있다가 다른 물체로 이동한 것이므로 하나에서 존재할 때는 타자에서는 아직 존재하지 않으며, 하나에서 존재하지 않으므로 비로소 타자에서 존재하게 된다는 관계를 맺는다. 헤겔은 이런 관계를 두 물체 사이의 힘이 동일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긍정적인 반성’인 동시에 전자에서 사라지고 후자에 나타난다는 점에서 ‘부정적 반성’이라고 한다.

“힘은 반성된 존립과 직접적 존립의 통일이거나 형식적 통일성과 외적 자립성의 통일이다. 힘은 양자를 하나로 결합하는 것이다. 힘은 양자의 접촉인데 그 중 하나는 다른 것이 존재하지 않는 한에서 존재하는 것이니, 이런 힘은 자기와 동일한 긍정적 반성이며 동시에 부정적인 반성이다.”(논리학, GW11, 361)

4)

힘이 이렇게 외면적이므로 물체에서 이 힘은 물체가 자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힘이 외면적이므로 필연적으로 이 힘은 자발성을 지니지 못하고 그 힘을 촉발하도록 하는 것이 외부에서 주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일정한 계열이 수립된다. A는 B에 힘을 전달하고 B가 힘을 드러내도록 촉발하며, B는 C에 힘을 전달하고 다시 촉발한다. 이런 관계가 발전하게 되면, 마침내 순환이 등장한다. 즉 A가 힘을 B에 전달했을 때, 이 A가 힘을 드러내게 촉발하는 것은 바로 B인 경우이다. 이렇게 되면 두 가지 물체 사이에는 서로 힘을 전달하는 관계 즉 힘의 상호작용이 발생한다.

처음에 물체와 힘은 외면적 관계에 있었다. 이 경우 물체와 힘은 외면적이며 긍정적인 통일 속에 있었다. 그러나 상호작용의 관계에 이르게 되면, 힘과 물체는 단순히 외면성에 머무르지 않는다. 힘을 전달받은 물체가 동시에 거꾸로 힘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이 관계 속에 힘에 대립하는 물체는 부정되고, 다만 두 가지 서로 대립적으로 작용하는 힘만이 남게 된다. 이제 물체란 두 대립하는 힘을 부정적으로 통일하는 것일 뿐이다.

5)

이 두 물체는 자신의 직접적 존재를 지양하고 상호 작용하는 힘으로 규정되면서 서로 촉발하고 타자에 의해 제약되는 관계를 이룬다. 이 관계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힘을 개념적으로 보면, 힘은 자기를 드러내서 타자를 정립한다. 그러나 이런 힘은 타자를 전제로 하니, 이 타자로부터 힘을 전달받아 자기를 드러낸다. 그러나 이 타자가 힘을 전달하는 이유는 곧 힘 자신이 이 타자에 자기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타자를 정립하는 활동은 곧 타자를 전제로 하는 활동이다.

개념상 힘은 정립하는 활동이지만, 실재적으로는 다른 힘이 그 힘을 활동하도록 촉발한다. 여기서 어느 것이 먼저인가는 문제 되지 않는다. 두 가지는 모두 타자를 촉발하며 타자로부터 촉발되니, 양자는 동일한 것이다. 즉 촉발하는 것은 동시에 촉발되는 것이다.

“힘은 개념상 처음에는 자기를 지양하는 동일성으로서 규정되며, 그 실재상으로는 두 힘 가운데 하나는 촉발하는 힘으로서 다른 하나는 촉발되는 힘으로서 규정된다. 그러나 힘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정립하는 반성과 전제하는 반성의 동일성이며, 또는 반성된 통일과 직접적인 통일의 동일성이다. 이런 규정 각각은 다만 계기이고 통일 속에 있으며 따라서 타자를 통해 매개된 것으로서 존재한다.”(논리학, GW11, 362)

이렇게 보면 힘은 외부에서 촉발되어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외부에서 촉발하는 힘은 사실 자기가 그렇게 하도록 촉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힘은 외적인 작용이 아니라 내적인 자발적인 작용이다.

이런 두 대립하는 힘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볼 때, 힘은 본래 통일된 것이다. 이 통일된 힘이 실재적으로는 두 대립하는 힘으로 나타나며, 이 대립하는 힘은 상호작용을 통해 다시 통일된다.

“이 힘이 촉발된다는 것은 그 자신의 고유한 활동이다. 또는 다른 힘이라고 즉 일반적으로 말해 다른 힘이며 촉발하는 힘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촉발하는 힘은 자기의 타자에 부정적으로 관계함으로써 이 힘은 타자의 외면성을 지양한다. 그런 한 촉발하는 힘은 정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촉발하는 힘이 자신을 다른 것에 대립하게 하는 것은 다만 전제를 통해서이다. 즉 그것은 자기에서 외면성을 얻어서 이를 통해 촉발되는 한에서만 촉발하는 것 자체가 된다.”(논리학, GW11, 363)

6)

최초에 힘은 유한한 힘이었다. 그것은 물체에 의해 제약된 힘이었다. 그러나 힘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물체는 지양되며, 힘은 자기 매개하는 것이며 무한하다. 이런 힘은 더는 외적인 충격에 의해 자기의 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서 힘의 상호작용을 매개로 하여 본래적 통일과 반성된 통일이 구별된다. 전자는 내면적인 통일이며 후자는 외면적인 통일이다. 여기서 내면과 외면의 관계가 출현한다.

“힘을 활동하게 촉발하는 충격은 그 자신이 고유하게 촉발하는 것이다. 그런 힘에 다가온 외면적인 것은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그 힘에 의해 매개된 것이다. 그것은 마치 그 자신의 본질적인 자기 동일성이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정을 통해 매개된 것과 같다. 달리 말하자면 힘은 그 외면성이 자신의 내면성과 동일하게 만든다는 것을 표현한다.”(논리학, GW11, 364)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3-전체와 부분의 관계[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3-전체와 부분의 관계

1)

먼저 간단하게 전체의 흐름을 잡아보자. 본질론 2편 현상편은 실존-현상-관계로 나간다. 실존이 긍정적인 것이라면, 현상은 부정적인 실존이며, 관계는 상호 부정적인 것 또는 자기 부정적인 것이다. 이런 이행에서 실존이 종적 개체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현상은 법칙을 통해 종적 본질이 처음 등장한 것이며, 관계는 종적 본질이 외면적으로 실현된 것이니, 종의 집단 즉 무리로서 유를 의미한다. 헤겔은 이런 종의 무리를 실체라고 이름 붙인다.

관계 장은 이런 유적 실체가 처음 감추어져 있다가 마침내 자기를 외면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현상 장에서 종적 본질이 개체 속에서 출현할 때, 개체들은 아직 단순한 집합으로서 무리를 이루고 있을 뿐이다.

이런 종적 본질이 실현되면, 무리는 단순한 집합에 머무르지 않고 그 속에 상호작용적인 관계가 성립한다. 이런 관계는 처음에는 동물 종에서는 단순한 암, 수의 관계이다. 이런 상호작용적 관계는 최종적으로 인간이란 종에 이르면 사회로 발전하게 된다. 이런 사회 즉 유적 실체는 오직 인간의 경우에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인간을 유적 본질이라 하면서 생물체의 종적 본질과 구분한다.

2)

이런 전체 맥락에 따라서 이제 관계 장으로 이행해 보자. 현상이 법칙 관계로 이행하면서 구체적 법칙 즉 현상 세계와 일반적 법칙 즉 법칙 세계가 대립했고, 이는 일반적 법칙은 추상적인 것으로서 피안에 성립한다. 피안에 성립한 추상적 법칙이 현상 속에서 실현되면서, 법칙 세계와 현상 세계가 통일을 이루니, 여기서 관계가 출현했다.

이제 ‘관계’ 장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개별자와 개별자의 관계를 매개로 일반적인 본질과 개별적인 현상 사이의 관계가 전개된다. 개별자의 관계가 발전하면서 본질이 현상 속에 더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본질이 더 구체적으로 실현되면 그럴수록 개별자의 관계도 더 필연적인 동일성을 지니게 된다.

이 관계는 우선 이중성을 지닌 관계이다. 여기서 본질도 현상을 지니며 현상도 본질적이다. 이런 이중성 때문에 각자는 자립적이면서도 타자를 자기 속에 포함하고 자기는 타자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자기가 존립하기 위해서는 타자가 전제되어야 하며, 타자를 부정(정립)하는 것은 곧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며 타자로 이행하는 것은 곧 자기 내로 복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타자로의 반성은 자기 자신으로의 반성이다. 이 관계는 두 측면을 갖는데 왜냐하면, 이 관계는 타자로의 반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계는 자신에서 자기 자신의 구별을 갖는다. 관계의 측면들은 자립적으로 존립한다. 왜냐하면, 이 측면들은 서로에 대해 무차별적인 상이성을 갖는 가운데 자기 자신 내에서 부서져 있으므로 각자의 존립은 그에 못지않게 다만 타자에 관계하고 서로 부정적으로 통일되는 가운데서만 의미를 지닌다.”(논리학, GW11, 353)

이런 관계는 반성운동에서 개념적으로는 이미 제시되었던 것인데, 이제 물체들의 관계를 통해 마침내 다시 되돌아온 것이다. 즉 반성운동은 종적 개체가 자기를 재생산하는 가운데, 본질을 지속하게 한다. 여기서 본질은 개체를 통해 자기로 되돌아오며, 개체는 본질을 통해 자기를 재생산한다.

헤겔은 이런 관계를 타자로 반성하는 것이 곧 자기 내로 반성하는 것이며, 양자의 부정적인 통일이라 했다. 그런데 이런 반성운동은 생물체가 전개하는 일반적인 운동을 추상적으로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이제 등장한 본질적 관계에서도 동일한 반성운동이 일어나지만, 이 운동은 자립적인 것들이 전개하니 실재하는 구체적인 운동이다. 여기서 개체는 자립적인 것이어서 서로 무차별하면서도 동시에 타자를 매개로 하여 반성되고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통일은 무차별성과 대립한다.

본질적 관계에서 각 요소는 자립성과 반성운동이 동시에 성립하므로 이런 관계는 근본적으로 모순적인 것이다. 이런 모순의 극복되어 자립적인 요소들이 동시에 완전한 반성을 통해 통일을 이루게 되면, ‘실제성’이라는 범주로 이행하게 된다.

“본질적 관계를 이루는 측면들은 총체성이지만, 이 총체성은 자기의 피안을 본질적으로 대립된 것으로서 갖는다. 이 피안은 현상이다. 그 실존은 오히려 자신의 실존이 아니라 자신의 타자가 지닌 실존이다. 따라서 본질적 관계는 자기 내에서 부서진 것이지만, 이렇게 그 자신이 지양된다는 사실이 성립하는 근거는 그것이 자기 자신과 자신의 타자를 통일한 것 그러므로 전체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므로 이 관계는 자립적 실존을 가지며 동시에 본질적으로 자기 내로 반성한다.”(논리학, GW11, 353)

3)

관계 장은 이런 법칙 세계와 현상 세계의 통일이 발전해 나가는데 추상적 법칙이 그 자체로 구체적 현상을 지니게 되지만, 아직은 법칙을 내재하고 있는 자립적인 현상과 상호 공존하는 관계에 머무를 때, 전체와 부분의 관계가 성립하게 된다.

“전체와 부분의 관계에서 양 측면은 자립적인 것이지만, 그 결과 각자는 다른 것을 자기 속에 비치게 하며[scheinen] 동시에 다만 이 양자의 통일성으로서만 존재한다. 이제 본질적 관계는 다만 최초의 직접적인 관계이므로 부정적인 통일과 긍정적인 자립성은 공존을 통해 결합한다.”(논리학, GW11, 355)

전체와 부분은 각자 이중적이다. 부분은 직접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립적인 것이지만, 전체 속에서 한 부분을 이룬다. 전체는 부분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으나, 이 관계는 자립적인 부분에 외면적이다.

반대로 전체는 한편으로는 부분의 전체이다. 즉 전체는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다른 한편 관계로서 전체는 부분으로부터 반성되어 나온 것이지만, 동시에 독자적으로 자립하는 것이다.

전체와 부분은 이중적이고 각기 타자를 포함하는 것이지만, 여기서 각 측면이 지닌 지위는 구별된다. 전체에서 전체가 토대이며, 그것을 이루는 부분은 전체 속게 할당되면서 정립된 것이다. 반면 부분에서는 각 요소의 실존이 토대이며, 전체는 다만 외적인 관계일 뿐이다.

각자는 자립성 속에서 타자에 관계하며 직접 모순적인 것이어서 자기를 지양하게 된다. 자립적 전체에서 부분은 전체가 자기를 분할하여, 즉 자기에 부정적으로 관계하여 정립한 것이다. 그러나 전체는 부분의 통일이므로 부분에 의존하고 있어서 전체는 부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전체는 부분을 전제로 한다.

마찬가지로 자립적인 부분은 직접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분은 스스로 부서지니 전체에 의존한다. 왜냐하면, 부분은 그 자신이 부분으로 이루어진 전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체와 부분은 각자 자립적이지만, 상호 제약하고 있어서 조건과 제약된 것이라는 관계를 맺는다. 이런 상호 제약 속에서 각자는 타자를 통해 자기 내로 복귀하니, 각자는 무제약적인 자립적인 것이다.

“이런 관계의 두 측면은 각기 자기 자신에서 자신의 자립성을 가지지 않고 자신의 타자 속에서 자립성을 가지므로 다만 양자의 동일성만이 현존한다. 양자는 그런 동일성 속에서 다만 계기일 뿐이다. 그러나 각자가 자기 자신에서 자립적이므로 양자는 두 가지 자립적인 실존이면서 서로 무차별하다.”(논리학, GW11, 356)

4)

전체와 부분은 각기 자립적이면서도 상호 부정적이니 서로 순환하게 된다. 이런 순환의 관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네 가지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다. 여기서 동일성과 구별이 교체된다.

우선 첫째 단계에서 전체는 부분과 동일하다. 자립적인 전체는 부분으로 해체된다. 전체는 이런 해체된 다양한 부분의 통일이다. 전체는 이런 부분의 반성된 통일이다. 그러나 두 번째 단계에서 전체는 부분과 같지 않다. 전체는 해체된 부분과 같은 것이 아니라, 이런 다양한 부분들의 집합과 같은 것이니, 이 집합이 곧 전체라면 전체는 다만 전체와 같은 것이다.

세 번째 단계에서 전체를 이루는 부분은 그 자체가 하나의 전체이다. 그러므로 부분과 전체는 동일하다. 하지만 다른 한편 네 번째 단계에서 부분은 전체와 같지 않다. 부분은 다만 전체가 분할된 다양한 부분과 같을 뿐이기 때문이다.

전체와 부분은 상호 무차별하며 서로 분리되어 있으면서 자기 내에서 스스로 부서지면서 타자로 이행한다. 전체는 추상적 동일성이니, “이런 동일성인 전체는 동시에 자기 내에서 구별된 것으로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전체는 “자신의 타자로 반성한다.” 부분은 관계없는 다양한 상이한 것이지만, 그 자체가 부분으로 이루어진 전체이니 “그 자체로서 자기 자신의 타자이며 자신을 다만 지양하는 것이라고 할 자기 내에서 타자이다.”(논리학, GW11, 357)

이런 순환 속에서 본질적인 관계의 진리는 매개이다. 즉 양자는 각기 모순적이며 서로 모순적이다. 자기 부정은 자기 긍정이며 타자로 이행하는 것은 자기로 돌아오는 것이다. 직접성은 정립된 것이며 자립성은 매개된 것이다.

“그러므로 관계의 진리는 매개되어 있다는 데 있다. 이 관계의 본질은 반성된 직접성과 존재하는 직접성이 모두 지양되는 부정적인 통일이다. 이런 관계가 모순적인 것이니, 자신의 근거로 돌아간다.”(논리학, GW11, 357)

이런 순환 속에서 처음 서로 독자적인 것으로 세워지고 외적으로만 관계하던 전체와 부분은 상호 이행하면서 순환하는 것으로서 밝혀지니, 이것이 곧 힘과 외화의 관계이다.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2-현상에서 관계로의 이행[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2-현상에서 관계로의 이행

1)

개별적 현상에 내재하는 동일성이 곧 법칙이다. 이 법칙은 상대적이므로, 여기서 현상의 세계와 법칙의 세계가 구별된다. 전자는 상대적으로 구체적인 법칙의 세계이며 후자는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법칙의 세계이다.

이런 추상을 통해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법칙을 넘어 가장 완전한 추상적인 일반 법칙이 출현한다. 가장 추상적인 일반 법칙에서 법칙의 두 요소는 완전한 동일성을 이루며, 지금까지 그 요소를 지배했던 개별적 내용은 제거되고 오직 관계 속에서만 규정되는 형식적 요소가 된다. 그러나 이런 추상적 법칙은 주관적으로 추상된 것이니, 현상에 대해 외면적으로만 관계한다.

이런 추상적인 일반적 법칙과 구체적인 개별적 현상이 통일을 이루면서 처음 출현하는 것이 곧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법칙’이다. 이는 현상의 측면과 법칙의 측면을 동시에 가지는 총체성이다.

그런데 상대적인 현상의 법칙은 자기 내에 법칙의 동일성과 상호 무차별적 개별적 현상이 공존한다. 헤겔은 현상의 법칙 내에 들어있는 현상의 내용을 비본질적 현상이라 한다. 반면, 이제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법칙에서는 나타나는 현상은 ‘본질적 현상’이다.

법칙 세계의 본질적 현상은 현상 세계의 비본질적 현상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여기서 법칙을 이루는 두 요소는 서로 대립하고 각자 자립적이면서도 동시에 서로 완전하게 통일을 이룬다.

그러므로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법칙’에서 법칙을 이루는 양자의 관계는 타자와의 관계이면서 자기 관계이다. 즉 자기를 타자로 삼아 자기에 관계하는 것이다. 즉 “각자는 자신의 타자를 자기 자신에서 포함하는 동시에 자립적인 것이 되어 이 타자를 자신으로부터 밀어내는 것으로”(논리학, GW11, 348) 규정된다.

이전의 현상적 법칙은 내용이 무차별적이므로 그 내용은 법칙 관계 속에서 다만 형식적 자기 내 반성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법칙’에서 정립된 존재는 자기 자신에서 내적으로 반성하면서 서로 관계를 맺는다. 헤겔은 이런 경우 동일성은 형식적 동일성이 아니라 실질적 또는 ‘실재하는 동일성’이라 한다.

“그러므로 이 타자는 동일한 것이며 현상하는 것은 그런 가운데 사실상 타자 속으로 반성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으로 반성된다. 정립된 존재가 자기로 이처럼 반성하는 것이 바로 법칙이다. 그러나 정립된 존재는 현상하는 것으로서는 본질적으로 자신의 비존재로 반성되거나 그 자신의 동일성은 그 자체 본질적으로 마찬가지로 자신의 부정성이며 자신의 타자이다. 그러므로 현상의 자기 내 반성인 법칙은 현상의 동일적인 토대일 뿐만 아니라 현상은 그 법칙에서 자신의 대립물을 가지며 그 법칙은 현상의 부정적 통일이다.”(논리학, GW11, 347)

2)

이제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법칙은 가장 추상적인 일반성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구체적인 개별성을 동시에 갖는다.

여기서 근거 관계가 다시 회복된다. 이전에 추상적인 법칙은 개별적인 현상의 토대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양자는 외적인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이제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법칙은 자기를 구체적으로 정립하며 개별적 현상이 되고 현상은 자기를 지양하여 법칙이 되니, 양자는 본질과 가상 사이의 매개 관계가 되며 이런 점에서 앞에서 설명한 근거 관계가 회복된다.

본질과 종적 개체 사이의 반성 관계가 여기서 다시 출현한 것이다. 여기서 법칙이 형식으로서 근거가 되고 현상이 토대가 되면서 현상은 자기 부정을 통해 근거로 복귀하고 근거는 자기를 정립하면서 현상이 된다.

“그러나 이제 법칙은 현상 세계의 총체적 반성이므로 또한 현상 세계의 본질을 결여한 다양성도 포함한다. 가변적이고 변화하는 계기가 자기 내로 반성하면서 본질적인 계기로 되면서 그것은 절대적 부정성이거나 일반적으로 말해 형식 자체가 되지만, 그 계기는 그 자체적인 동시에 대자적인 세계 속에서 자립적이지만 반성된 실존이라는 실재성을 갖는다. 거꾸로 이 반성될 자립성은 이제부터 자기 자신에서 형식을 갖고 이를 통해 내용은 단순히 다양한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자기와 합일하는 내용인 것과 같다.”(논리학, GW11, 348)

“나아가서 또한 본질 세계는 현상 세계를 정립하는 근거이다. 왜냐하면, 절대적 형식을 자신의 본질 규정 속에 포함하는 가운데 이 세계의 자기 동일성이 지양되며, 자신을 정립된 것으로 만들어 정립된 직접성으로서 현상 세계로 되기 때문이다.”(논리학, GW11, 349)

3)

그러나 이런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법칙은 아직은 피안에 머무른다. 그것이 지닌 본질적 현상은 구체적인 자립성을 가지지만, 아직은 현실이 아니라 피안의 세계에서 가진다. 그러므로 현상의 세계를 감각적 세계라고 한다면, 이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세계의 초감각적 세계이다.

이 초감각적 세계는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처럼 감각을 넘어서서 순수하게 동일한 법칙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법칙이 구체적인 모습을 가지고 실현된 것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기독교에서 말하는 피안의 세계와 같다.

이와 같은 피안의 법칙은 현상에 내재하는 법칙과 마찬가지 내용을 지니지만, 그 내용은 전도되어서 표현된다. 그것은 마치 거울에 비추어진 상처럼 현상 세계와 반대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이런 피안의 법칙에 관해서는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지성 장에서 자기의식 장으로 넘어가는 가운데서도 제시한 바 있다. 정신현상학에서 설명된 전도의 내용은 여기 논리학에서도 그대로 인용되어 있는데, 즉 현상에서 남극은 피안에서는 북극이 되고 현상에서 -전기는 피안에서는 +전기가 되며, 현상에서 범죄는 피안에서는 타자에게 베푸는 은총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세계는 서로 관계하면서 현상 세계에서 긍정적인 것은 그 자체적이며 대자적인 세계에서는 부정적이고 거꾸로 전자에서 부정적인 것은 후자에서 긍정적이다. 현상 세계에서 북극은 그 자체적이며 대자적으로는 남극이고 거꾸로도 마찬가지다. 양전기는 그 자체로는 음전기이다. 현상 세계에서 악이고 불행 등은 그 자체적이며 동시에 대자적으로는 선이고 행복이다.”(논리학, GW11, 351)

헤겔이 이런 설명을 어디서 끌어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기독교에서 피안에 관한 서술에서 끌어낸 것이 아닐까 한다. 다른 한편, 우리는 유사한 설명을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전개했다는 것을 기억한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상품에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는 그것의 피안이라고 할 화폐에서는 전도된다고 한다. 상품에서 사용가치가 지배적이라면, 화폐는 교환가치가 지배한다. 이런 전도는 상품이 화폐로, 화폐가 다시 자본으로 발전하면서 계속해서 전도된 물신의 세계로 등장하는 데 헤겔의 피안 법칙,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법칙’이라는 개념이 지닌 전도와 유사하다.

또는, 현대 물리학에서 쌍생성의 개념과도 유사하다. 하나의 에너지(감마선)는 서로 대립하는 두 물질로 분열된다. 전자와 양전자가 나오니, 만일 현실에서 전자가 나온다면, 그 이면의 세계에서는 양전자가 나올 것이다. 이것은 헤겔이 말하는 현상의 법칙과 피안의 법칙 사이의 관계와 서로 닮았다.

 

4)

현상의 세계와 피안의 세계는 둘 다 현상과 법칙으로 이루어진 총체성이지만, 여기서 법칙의 측면은 서로 동일하고 현상의 측면은 서로 전도되어 있다. 그러므로 양자는 모순적인 관계에 있으니, 이 모순을 통해 현상의 세계와 피안 세계의 대립은 해소된다.

“이제부터 법칙은 실재화하며, 법칙의 내적 동일성은 동시에 현존하는 동일성으로 되고, 거꾸로 법칙의 내용은 관념성[자기 동일성] 속으로 고양된다. 왜냐하면, 각 측면은 자기에서 다른 측면을 가지고 따라서 진정으로 다른 측면과 동일하며 그 결과 자기와도 동일하기에 이 내용은 자기 자신에서 지양된 내용이며, 자기 내로 반성된 내용이기 때문이다.”(논리학, GW11, 352)

양자의 대립이 해소되면서 법칙의 동일성이 이제 피안이 아니라 현상 속에서 출현하게 된다. 즉 피안의 세계가 현실에 실현되는 것이다. 이제 법칙은 반성된 총체성이고 현상은 직접적인 총체성으로 규정된다. 여기서 법칙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는 각자 타자를 자기 속에 포함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서로 대립하니, 여기서 자기를 넘어서서 자신의 타자로 끊임없이 이행하는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제 출현하는 것은 자기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반발하여 두 가지 총체성으로 되는 총체성이다. 하나는 반성된 총체성이고 다른 하나는 직접적인 총체성이다. 양자는 처음에는 자립적인 것이지만, 다만 총체성으로서만 그런 것이다. 양자는 그런 한 각자 본질적으로 자기에서 타자의 계기를 갖는 것이다. 각자는 직접적인 것으로 규정되고 동시에 반성된 것으로 규정되므로, 각자의 자립성은 이제부터 다만 타자에 본질적으로 관계하면서 자신의 자립성을 이런 양자의 통일 속에서 갖는 것으로서만 정립된다.”(논리학, GW11, 352)

법칙과 현상의 이런 관계가 앞으로 2편 3장 관계 장에서 전개될 전체와 부분, 힘과 외화, 내면과 외면의 관계에 해당한다. 이 과정에서 처음 양자의 통일성은 내재하다가 마침내 마지막에 이르러 완전한 통일이 이루어진다.

“세계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다양성의 형식 없는 총체이다. 이 세계는 본질적인 세계든, 현상하는 세계든 몰락한다. 왜냐하면, 다양성이 단순하게 상이한 것이기를 중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계는 총체성도 아니고 우주도 아니며 본질적으로 관계로서 존재한다.”(논리학, GW11, 352)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1-법칙 세계와 피안[흐린 창가에서 -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1-법칙 세계와 피안

1)

앞에서 실존에서 현상 즉 정립된 것으로 이행하면서 여기서 법칙 관계가 등장하는 것을 살펴보았다. 현상 세계는 실존이 자립적이면서 동시에 서로 내적으로 관계를 맺는 세계다. 이 세계에 내재하는 관계가 곧 법칙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법칙의 독일어 표현인 ‘Gesetz’가 ’정립된 것[Gesetztsein]‘에서 나왔다고 본다. 법칙은 곧 정립된 것이므로 이미 타자를 전제로 한다. 이런 전제가 상호적이므로 여기서 하나의 정립된 것은 다른 정립된 것과 관계하게 된다고 본다. 그것이 곧 법칙이다.

여기서 법칙 관계를 이루는 요소 즉 현상은 두 측면을 지닌다. 한 측면은 직접적이고 무차별적인 것이며 다른 측면은 부정되고 정립된 측면이다. 현상 세계에서 자립적인 것들은 서로 무차별하며 반면 법칙의 세계에서 부정적인 것의 상호 관계를 통해 자기 동일적인 관계가 출현한다.

법칙은 현상의 반성을 통해 출현한 것이다. 현상의 무차별적 관계는 무실한 관계이고 이 반성을 통해 자기 동일성의 관계로 된다. 이런 반성은 아직 외적 반성이며 경험적인 추상화이며 일반화에 속한다. 이런 법칙은 아직 독립된 세계를 이루지 못하고 현상에 내재할 뿐이다.

2)

현상과 내재하는 법칙 사이의 관계를 좀 더 세부적으로 들여다보자. 우선 자립적인 현상의 자기 매개를 통해 대립이 해소되며 긍정적인 동일성이 출현한다. 이 동일성은 정립된 것이 정립된 것과 맺는 관계이다.

여기서 현상은 법칙을 내용으로 갖는다. 이 내용은 상호 관계를 통해 출현하는 본질적 내용이다. 동시에 현상은 그것 외에 직접적인 내용을 지닌다. 그러므로 법칙은 일반적이지만, 그것이 출현하는 현상 세계는 다양한 개별성을 지닌다. 예를 들어 낙하 법칙은 지구에서와 달에서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여기서 일반적인 법칙은 개별적인 현상의 토대[Grundlage]가 된다. 왜냐하면, 일반적 법칙은 개별적 현상에 다만 외면적으로 관계하기 때문이다. 현상이 지닌 개별적 내용은 그 법칙이 지닌 본질적 내용에 내적인 관련을 지니지 않는다. 이 일반적인 법칙은 개별적 현상에 적용되는 추상적인 공통성일 뿐이다.

“법칙은 토대 자체이며 현상은 동일한 내용을 지니지만, 그에 더해서 그 직접적인 존재가 지닌 비본질적 내용도 포함한다. 현상 자체가 법칙으로부터 구별되게 하는 현상이라는 형식 규정조차도 하나의 내용이며 더욱이 법칙의 내용으로부터 구별되는 내용이다.”(논리학, GW111, 345)

이런 법칙은 현상의 피안에 독립된 세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현상에 내재하며 “현상에 직접적으로 현현한다.” 그것은 “실존하는 또는 현상하는 세계의 고요한 모사”(논리학, GW111, 345)이다.

3)

그러나 여기서 좀 더 생각해 보면, 법칙의 일반성은 사실 상대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런 상대성 때문에 좀 더 일반적인 법칙과 좀 더 현상적인 법칙의 차별이 발생한다.

이제 현상적 법칙 세계를 헤겔은 간단히 현상 세계라 하고 일반적 법칙 세계를 간단히 법칙 세계라고 한다. 그러면 현상 세계에 이미 일반성으로서 법칙이 내재하며 거꾸로 법칙 세계도 완전한 동일성이 아니라 우연성과 개별성이라는 현상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현상 세계 속에도 이미 법칙이 들어있다. 여기서 법칙의 관계는 개별적 요소에 대해 더욱 외면적이며 이 법칙은 제한적으로 적용되며 동일한 법칙을 내용으로 하는 개별적이며 서로 무차별한 법칙들이 출현한다. 법칙의 개별적 내용이 곧 현상 세계를 현상 세계로 만드는 형식 규정이 된다.

일반적 법칙의 세계는 현상 세계에 대해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법칙이 출현하지만, 완전히 개별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법칙의 세계 자체가 나름대로 개별적인 현상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현상과 법칙은 각기 이중적으로 된다. 현상 내에서 일반법칙이 들어있으며 법칙도 개별적 현상을 지닌다. 그런 점에서 현상과 법칙은 모두 총체적이다.

“양자는 오히려 하나의 총체성을 이룬다. 실존하는 세계는 그 자체가 법칙의 왕국이며 이 법칙의 왕국은 단순한 동일한 것이지만, 이 동일성은 정립된 것 속에서나 실존의 자기 자립성을 스스로 지양하는 가운데서 자기 동일적인 것이다.”(논리학, GW111, 345)

4)

이런 법칙의 일반화의 과정에서 순수한 추상적인 법칙이 출현하게 된다. 순수한 법칙에 이르면, 법칙을 이루는 두 요소는 더는 자립적 무차별한 내용을 상실하고 법칙 관계를 이루는 한 요소로만 규정된다.

그럴 때 헤겔은 법칙은 긍정적 통일이 아니라 ‘부정적 통일’을 이루며, 즉 두 요소는 더는 구별되지 않고 개별 자립적 요소의 ‘내용’이 관계를 이루는 요소 즉 ‘형식’으로 되었다고 한다.

“[상대적] 법칙은 현상의 긍정적인 본질 규정일 뿐이며 그것의 부정적인 본질 규정은 아니다. 그렇게 될 경우 내용 규정이 형식의 계기가 되어서 그 자체로 자기의 타자로 이행하며 자기 자신에서 자신이 아니라 타자가 될 것이다.”(논리학, GW111, 346-7)

예를 들어 전기에 관한 과학의 발전에서 처음에 전기는 유리 전기와 섬유 전기로 출현했다. 과학이 발전하여 추상화가 일반적으로 되면서 이런 물질 전기는 사라지고 + 전기와 – 전기로 규정되는데, 유리나 섬유는 구체적 내용을 지니고 전기는 그것에 외면적으로 관계할 뿐이지만, + 전기나 – 전기는 더는 구체적 내용이 없고, 여기서 +. -는 서로 상대적인 규정 즉 형식적 규정만을 지닐 뿐이다.

이런 순수한 추상적 법칙의 세계는 사유를 통해 가정되지만, 과연 이런 법칙이 현실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사유가 추상한 것은 주관이 개입하여 외면적인 것일 뿐이고, 현상의 객관적 본질이라고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추상적인 법칙은 현상의 토대가 되기는 하더라도 현상의 근거라고 볼 수는 없게 된다.

“법칙은 현상의 자기와의 단순한 동일성이다. 따라서 현상의 근거가 아니라 그 토대이다. 왜냐하면, 법칙은 현상의 부정적 통일이 아니라 현상의 단순한 동일성으로서 직접적인 통일 즉 추상적 통일이다. 따라서 이 추상적 통일 옆에는 현상의 다른 내용이 발견된다.”(논리학, GW111, 347)

결과적으로 이런 추상적인 법칙을 현상 속에 집어넣는 또 제삼자 예를 들자면 플라톤적인 데미우르고스와 같은 존재가 있어야 한다.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0-현상의 개념과 법칙의 개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0-현상의 개념과 법칙의 개념

1)

본질론 2편 1장이 실존 장이고 이것에 이어서 2장에서 헤겔은 현상을 다룬다. 2편에서는 전체적으로 종적 개체들 사이의 실재하는 관계를 다루고 있다. 이 관계는 점차 가능성이 자기를 실현해 나가는 방식으로 다루어지는데, 최종적으로 내면과 외면의 관계에서 그런 실재하는 관계가 완성된다.

그 가운데 처음 나타난 실존 장에서 실존들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실존은 오직 심연 위에 떠돌고 있다. 그것이 가지고 있는 관계는 아직 내면에 즉 가능성[an sich]에 머무르고 있다.

이런 실존은 서로 상이한 것일 뿐이다. 판단 형식으로 본다면 이는 정언 판단 형식에 속한다. 여기서 실존은 주어에 해당하고 술어는 아무것도 서술하지 않는 단순한 이름이다. 예를 들어 “이것은 진달래다”라는 판단이다. 여기서 술어 ‘진달래’는 단순히 어떤 실존하는 것을 지칭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현상 장에 이르면 종적 개체는 서로 상이한 것을 넘어서서 서로 대립하는 관계에 이르게 되고, 판단 형식으로 보자면 그 관계는 곧 가언 판단의 형식으로 된다. 가언 판단은 법칙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p이면 q이다’라는 형식이다. 여기서 p, q에 해당하는 것이 현상이고, 양자의 관계를 이루는 전체가 법칙이다.

실존 장에서 나왔던 ‘성질’과 ‘질료’ 개념이 존재론에서 ‘질’과 ‘실재성, 규정성’(긍정 판단 형식)에 상응하는 것이었다면, 현상 장에서 전개되는 ‘현상’ 개념은 존재론에서 전개된 ‘부정성’라는 개념(부정 판단 형식)에 상응한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현상을 ‘반성된[즉 부정된] 실존’이라고 한다.

2)

우선 실존이라는 범주에서 어떻게 현상이라는 범주가 출현하는가를 보자. 현상은 실존이 물질로 해체되고 이 물질이 서로 관계하는 것을 통해서 나온다.

즉 현상 장에 끝에 여러 가지 물질이 하나의 개체 속에 들어있다. 이 물질은 규정적[bestimmt]이면서도, 독립적이기에 서로 대립적이다. 이런 대립적인 물질이 하나의 개체 속에 들어있으니, 이 물질은 서로 침투한다고 생각된다.

즉 어떤 물질은 다른 물질이 비어 있는 곳[poros]에 들어가 있고 거꾸로 다른 물질은 이 물질이 비어 있는 곳에 들어있다. 이런 물질은 자기가 존립하는 가운데 이미 자기의 비 존립 즉 구멍이 존재한다.

“사물 속에 포함된 구별된 것이 자립적인 물질이다. 이 물질은 모순적인 것이니, 왜냐하면 이 물질은 직접적으로 존립하면서 동시에 다만 낯선 것이 자립성 속에 그러므로 그 자신의 존립이 부정당하는 것 속에 자신의 존립을 가지며 다시 말하자면 바로 그러하므로 또한, 다만 자기에게 낯선 것을 부정하는 가운데 또는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가운데서만 존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논리학, GW11, 342)

이런 상호 침투를 통해 물질과 물질 사이의 관계가 출현한다. 이 관계가 곧 법칙이다. 실존은 자립적인 것인데, 이것이 이런 관계 속에 하나의 계기가 되면 자신의 자립성을 부정당하게 된다. 여기서 법칙 속의 계기는 한편으로는 전체 속에 존재하므로 타자에 의해 정립된 즉 부정된 계기(-p)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직접 존재하는 것[존립하는 것:ㅔ]이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이중성을 지닌 것 즉 존립하는 것이 동시에 부정적일 경우 헤겔은 이를 ‘현상’이라고 한다.

서로 무차별하게 존재했던 실존에서 이런 관계가 출현한다는 것이 실존이 감추고 있는 근거인 본질이 드러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이 과정은 근거로 복귀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아직 현상에서 본질로의 복귀는 중간에 머무른다. 왜냐하면, 여전히 실존이 가지고 있는 무차별성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상은 우선 본질이 그 실존 속에 나타나는 것이다. 본질은 직접 실존에 현현한다. 실존이 직접적인 실존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반성된 실존으로서 존재하게 되면서 이 사실이 실존에 나타나는 본질의 계기를 이룬다. 달리 말하자면 실존이 본질적 실존일 때 현상이다.”(논리학, GW11, 341)

3)

헤겔에서 현상은 자립적인 존재[긍정성]과 정립된 존재[부정성]이라는 이중적 계기를 동시에 가진 것이다. 반면 가상은 부정적인 현상이 다시 자기를 부정하면서[이중 부정성, 정립된 존재로서 정립된 존재] 본질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본질론의 순서로는 가상이 먼저 나온다. 1편 본질의 반성 운동을 설명할 때 헤겔은 개념적으로 가상을 제시했다. 즉 종적 개체를 매개하는 것이 본질인 종인데, 본질은 종적 개체를 정립하고 이 개체의 부정을 통해 다시 본질로 되돌아간다. 그러므로 이 종적 본질에 비추어 볼 때 종적 개체는 자기 부정적인 것, 정립된 것이 다시 정립되는 것 즉 가상으로 규정되었다. 그것이 앞에서 설명한 본질과 가상[Schein]의 관계였다.

1편에서 다루어진 본질과 가상은 본질론 전체의 운동을 일반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본질론에서 생성하는 운동 과정의 진정한 출발점은 ‘실존’인데, 이 직접적이고 자립적이며 서로 무차별한 것이다. 이런 실존이 해체되어 물질의 법칙 관계로 되면서 이 법칙 관계를 이루는 요소는 현상으로서 규정된다. 그러므로 현상은 직접적인 실존에서 본질이 처음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현상에서 법칙은 자립적이고 서로 무차별한 물질들의 관계이므로, 외적인 관계이다. 여기서 반성은 아직 “낯선 외적인 반성”에 머무른다. 이 관계가 관계하는 요소들에 내재하게 될 때 이 현상은 마침내 자립성과 무차별성을 잃어버리고, 가상으로 되면서 본질이 본래대로 자기의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헤겔은 이런 본질의 본래적 모습을 즉 가상을 3장인 관계 장에서 다룰 것이다.

“이런 의미[부정성]가 현상의 본질적 측면을 이룬다. 그것은 곧 현상이 실존 자체에서 반성의 부정성 즉 본질의 본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런 본질의 본성은 본질이 속했으며, 본질과 실존을 비교하는 것을 통해 이 실존을 현상으로 선언했던 낯선 외적 반성은 아니다.”(논리학, GW11, 342)

가상이 발전하여 드러내는 진정한 내적 관계를 통해 개체들을 전체로 묶는 일반적 본질이 출현한다. 이런 일반적 본질을 개체에 내재하는 종적인 본질과 구분된다. 이 일반적 본질은 개체들의 상호 관계를 통해 종적 본질이 자기를 드러낸 것이다.

헤겔은 이런 일반적 본질을 개체에 내재하는 본질 개념과 구별하여 개체들 전체를 의미하는 ‘사태’[Sache]라고 규정한다. 현상 장의 흐름은 이런 외적 관계가 내적 관계로 발전하면서 내적 본질이 외적인 관계, 즉 사태로 출현하는 과정이다.

4)

헤겔은 일단 위와 같이 실존과 현상을 개념적으로 구분한 다음 다시 현상과 법칙을 구별한다. 현상은 한편으로 실존이며 여기에 속하는 내용은 자립적이며 서로 무차별하다. 다른 한편 현상 속에는 이미 본질이 출현하니, 이때 현상은 본질적 내용을 지닌다.

이 본질적 내용은 실존의 부정성이며, 이는 다른 실존과의 관계 속에 하나의 계기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이 실존의 부정성, 즉 관계 속의 계기가 곧 현상의 본질적 측면인 법칙을 이룬다.

이 현상의 본질적 내용은 이중성을 지닌다. 한편으로 이 본질적 내용은 비본질적 측면이 지닌 다양한 개별성,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연성에 비교해 보면, 그것은 자기와 동일하게 고요하게 불변적으로 머무르는 것이다.

현상의 비본질적 측면을 헤겔은 현상 세계라고 규정한다. 반면 현상의 본질적 측면을 법칙의 세계로 규정한다. 처음에 이런 법칙의 세계는 아직 현상 세계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지 않으며, 현상 세계에 내재하고 있다.

이 법칙의 측면에서 나타나는 본질적 내용은 현상의 비본질적 측면이 지닌 상호 무차별성과 달리 다른 본질적 내용과 맺는 관계 속에서 하나의 계기가 되니, 그것은 이 다른 내용에 대립하는 특정한 것이며 오직 이런 다른 내용과의 관계 즉 법칙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법칙 관계에서 한편으로 하나의 자립적인 것(존립하는 것)은 타자에 의해 정립되면서(부정되면서) 관계 속에 계기로(즉 정립된 것)으로 된다. 이런 관계는 상호적이므로 여기서 한편으로는 자립적인 것과 자립적인 것이 서로 우연한 관계를 맺는 것이며 여기서 하나의 존립은 타자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다른 한편으로 서로가 타자에 의해 정립되면서, 그 관계는 정립된 것이 정립된 것과 맺는 관계이다. 이제 이 관계는 필연적으로 된다. 여기서는 하나가 존립하는 것이 타자를 존립하게 만든다. 거꾸로 하나가 정립된다는 것은 동시에 타자가 정립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정립된 것이 정립된 것에 관계하는 것이며, 가상이 다만 가상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5)

이 가운데 다만 관계 맺는 측면만 보면, 하나는 타자를 통해 자기와 매개하며 자기는 타자가 존립하는 매개가 될 뿐이다. 이 두 측면이 법칙적 관계에서는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여기서 현상하는 하나는 타자로 반성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자기 내로 반성하는 것이다. 이런 매개를 통해 각자는 자기 관계하는 자립적인 것으로 된다.

“실존하는 것은 현상하는 것으로서는 타자로 반성되는 것이며 이 타자를 자기의 근거로 삼지만, 이 타자는 그 자체 다만 [다시] 타자로 반성되는 것일 뿐이다. 현상하는 것으로서 실존하는 것에 본질적인 자립성은 자기 내로 복귀하는 것이므로 그 계기가 지닌 부정성 때문에 무가 무를 통해 자기 자신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실존하는 것의 자립성은 다만 본질이 빛 나는 것[Schein: 가상]이다.”(논리학, GW11, 343)

그러나 현상의 법칙 관계는 이렇게 순수하게 관계 맺는 측면만 가진 것은 아니다. 이 관계는 현상의 무차별한 관계 속에 들어있는 것일 뿐이다. 헤겔이 생각하는 이런 법칙의 가장 전형적인 예가 낙하 법칙과 같은 것일 것이다.

낙하 법칙은 흘러간 시간과 경과한 거리가 관계 맺는 것이다. 여기서 시간과 거리는 서로 무차별한 것이므로 이 낙하 법칙은 외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는 경험을 통해 파악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낙하 법칙은 더 근본적인 본질적 관계 즉 힘의 관계가 지구라는 구체적 공간에서 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본질적 관계는 아직 감추어져 있고 낙하 법칙에 내재할 뿐이다.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29-물질 개념의 자기모순[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29-물질 개념의 자기모순

1)

앞에서 물 자체의 외면적 규정이 일반적 규정 즉 성질로 발전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 성질은 이중적이다. 한편으로는 물 자체의 내재적인 것의 표현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타자[주관]에 반사하여 자기를 표현한 것이다.

즉 그것은 “외면성 속으로 이행해 들어가서 이를 통해 진정으로 자기 내로 반성된 근거”이며, “근거가 자신의 반발과 규정 속에서, 그 자신의 외적인 직접성 속에서 자기 관계하는 것”이며 “외적인 직접성인 동시에 본래적인 존재”이다. 이런 이중성 때문에 성질은 주관적인지 객관적인지 모호하다.

이제 경험의 발전은 이런 성질을 하나의 독립적인 물질로 규정하게 한다. 그 과정은 주어 술어 관계의 전도를 통해 일어난다.

한편으로 사물은 이제 여러 성질을 지니면서 다른 여러 성질을 지닌 사물과 구별된다. (헤겔은 물 자체가 성질을 지니면서 표현을 바꾸어 ‘사물’로 표현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성질은 규정성을 지니고 서로 대립하지만, 타자를 통해 반사된 것이므로 서로 무차별하게 존재한다.

다른 한편으로 성질은 이런 여러 사물에 공통된 것이다. 그 때문에 이제 성질은 그 자체가 자립적인 존재로 된다. 그 자체로 독립적인 것이면서 여러 사물을 자신에 귀속하는 성질을 헤겔은 물질이라 한다.

이제 성질은 사물에 속해 있는 속성이나 술어가 아니라 사물이 성질의 외연에 속하는 것이 된다. 여러 사물은 주어인 일반적 성질의 한 예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 성질은 이제부터 사물의 일자를 이루는 무규정적이고 힘이 없는 결합에서 해방된다. 성질은 사물을 존립하게 하는 것인 자립적 물질이다. 성질은 단순하게 자기와 연속하는 것이므로 우선 그 자신에서 상이성이라는 형식을 갖는다. 따라서 그와 같은 자립적인 물질이 다양하게 성립하며, 사물은 이런 물질로 이루어진다.”(논리학, GW11, 334)

2)

헤겔은 성질로부터 물질로 이행하는 이 과정에 관한 예로 화학의 발전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화학은 색깔이나 냄새, 맛 등의 성질을 물질적 원소로 규정해 색깔은 색소로, 냄새는 후각소로, 맛은 미소로 규정한다. 그 외 이런 물질로 열소나 전자기 물질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온도나 전자기적으로 운동을 하는 성질을 자립적 물질로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성질이 물질로 되면서 자립적인 것으로 된다.

물질은 한편으로 성질처럼 다른 것과 구별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물질은 사물처럼 자립적으로 존재하니, 때로 물질을 사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이 물질은 양극을 이루는 성질과 사물을 결합하며 양자를 자기 속에 포함하는 것이다.

“성질이 물질로 이행하는 필연성 또는 성질이 진정으로 물질이라는 사실을 밝혀주는 것은 곧 이 성질이 본질적인 것이고 따라서 진정으로 자립적인 사물이라는 사실이다.”(논리학, GW11, 334)

성질이 물질로 되면서 이제 물 자체의 규정도 변화한다. 성질은 서로 대립하지만, 사실 이는 타자를 통해 반사된 것이라는 점에서 모순을 회피하게 된다. 그것들은 서로 무차별하게 존재하면서 그 밑바닥에 사물은 자기 관계하는 통일성으로서 개별자로 다만 그 자체로는 아무 규정이 없는 것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성질이 물질로 되면 물질이 자립적인 것으로 되면서, 하나의 사물을 벗어나 다른 사물 속에 연속되는 것이니, 이제 사물이 여러 성질을 동시에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그러므로 하나의 사물은 하나의 물질이 존립하는 텅 빈 그릇과 같은 우연적인 존재이고, 그것의 물질로서의 규정 외 다른 규정들은 그 물질에 외면적이며 그것과는 무관한 개별적인 우연성으로 된다.

이 사물은 그 속에서 일반적 물질이 실현된 하나의 예로서 개별적인 사물로 된다. 예를 들어 열소라는 물질은 이런저런 사물 속에 있는 온도로 실현한다. 이때 온도를 지닌 개별적 사물이 지닌 다른 성질들은 모두 무의미한 우연적인 성질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런 단일한 물질로 이루어진 사물은 있을 수 없다. 물질이 자립적이면서 동시에 규정성을 지니는 한, 혼자서 고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규정성을 지닌 것은 다른 규정성과 관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물질은 항상 다른 물질에 대립하게 된다. 이런 대립은 부정성을 낳으니 서로 배척하면서도 동시에 서로 관계 속에 있게 된다. 이런 물질의 대립적 관계가 모순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성질은 한편으로 동일적으로 자기에 관계하는 단순한 자립성으로서 규정이니, 그 속에서 부정적 통일, 사물의 일자는 지양된다. 또한, 이런 성질은 다른 한편으로 타자에 대립하는 규정이지만, 마찬가지로 자기 내로 반성된, 본래 규정된 일자인 한에서 그러하다.”(논리학, GW11, 335)

3)

물질은 자립적이면서 다른 물질에 대립하는 규정적인 것이다. 물질들은 서로 밀쳐 내면서 자립적이니, 하나의 사물 속에는 여러 물질이 서로 물질들이 있다고 할 때, 그것들은 서로 무차별하게 공존한다고 설명된다. 이 경우 사물은 하나의 텅 빈 그릇에 불과하게 된다. 사물은 이런 물질들을 외적으로 결합하는 것이어서, 하나의 사물이 다른 사물과 구별되는 것은 그 속에 담겨 있는 물질들이 어떤 것이고 어느 만큼 들어있는지에 의해 구별될 뿐이다.

하지만 사물은 지속하는 개별자이므로 이 속에서 물질들은 단순하게 공존해서는 안된다. 그것들은 부정적으로 통일되어 하나의 개별자를 이루어야 한다. 어떻게 여러 물질이 하나의 통일체를 형성할 수 있을까?

이런 통일 가능성을 위해 우선[주로 고대철학에서] 제시되는 이론이 곧 구멍 나 있음[poros]이라는 개념이다. 하나의 물질은 자기 속에 구멍을 지니고 있어서 그 속에 다른 물질이 끼어들어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물질은 다른 물질의 구멍 속에 들어있다. 이와 같은 것을 상호 침투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들은 서로 자립적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로 통일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구멍 나 있음의 개념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왜냐하면, 어떤 물질이 구멍 나 있다는 것은 자기 속에 자기의 비존재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 물질은 자신의 절대적 타자 속에 자기의 존립을 가지며 자신의 비존재를 자신의 토대로 삼는다는 것이다.

“사물은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자신의 반대를 통해 즉 자신의 부정을 통해 자신과 자기 모순적으로 매개하는 것이 되며 또는 자립적인 물질이 다른 물질의 존립과 비존립을 통해 자기 모순적으로 자기와 매개하는 것이다.”(논리학, GW11, 337)

이런 자기 모순적인 물질은 자기를 유지할 수 없으니 물질은 이제 자립성을 상실하게 된다. 이렇게 물질이 자립성을 상실하면서 현상으로 된다.

“실존은 이제 사물 속에서 자신의 완전성에 도달한다. 즉 본래 존재하는 존재 또는 자립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비본질 실존이 하나의 존재 속에 있다. 따라서 실존의 진리는 그 비본질성 속에 그 본래적 존재를 가지거나 타자의 존립 그것도 절대적인 타자의 존립 속에 자신의 존립을 가지거나 자신의 무실함을 자신의 토대로 삼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존은 현상이다.”(논리학, GW11, 337)

4)

헤겔은 주에서 표상이 이런 모순을 피하는 방법을 소개한다. 그 방법은 무한소라는 개념이다. 존재와 비존재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모순은 여기서 존재를 무한소로 나누면서 이 무한소에서 존재와 비존재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무한소는 존재하는 것이며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무한소가 있다면, 모순은 회피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나아가 표상 작용은 이 안개 같은 대상 즉 구멍이나 작은 부분을 더 구체적으로 고찰할 때 그런 것들 속에 어떤 물질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물질의 부정을 인식하니, 여기 물질이 있고 그 옆에 그 부정 즉 구멍이 존재하며 그 옆에 다시 물질이 발견될 것이라는 말이다.”(논리학, GW11, 339)

“뿐만 아니라 그런 표상 작용은 이런 사물 속에 첫째 자립적인 물질과 둘째 그 부정 즉 구멍 나 있음을 지니면서 동일한 지점에서 다른 물질을 지니니, 이 구멍 나 있음과 물질의 자립적 존립은 서로 넘어 들어가 있어서 서로 부정하면서 침투를 침투한다.”(논리학, GW11, 339)

이런 주장은 수증기가 일정한 가스 속에 확산하더라도, 그 부피가 변함이 없다는 과학적 실험을 통해 입증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헤겔은 이런 임시방편은 모순을 모순으로 보지 않는 방식인데, 이는 모순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모순을 뒤로 미루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헤겔은 오히려 모순을 모순으로 인정하고 여기서 운동을 찾아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