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형이상학 산책19- 시원에 관한 기존 이론 비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19- 시원에 관한 기존 이론 비판

1)

이상과 같이 일단 헤겔은 왜 논리학의 시원이 순수 존재인지를 밝혔다. 이야기를 좀 정리해 보자.

①논리학의 운동은 순수지를 바탕으로 전개한다.

②순수지는 정신현상학 운동의 결과이다. 정신현상학의 운동은 개별로부터 일반으로 나가는 운동이다.(근거로의 복귀)

③순수지의 이면은 곧 순수 존재이다.

④논리학의 시원은 순수 존재이다. 왜냐하면, 논리학의 운동은 추상에서 구체로 나가는 운동이기 때문이다.(자기 정립)

이상 서술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③‘순수지의 이면이 순수 존재다’라는 것으로 보인다. 지식이라는 주관이 존재라는 객체로 전환하는 것이 무언가 신비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앞에서 심층적인 근거로의 복귀가 곧 내면적 본질이 외면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설명했다. 이는 순수지가 곧 순수 존재임을 보여주는 확고한 논증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헤겔은 다른 관점에서 이를 설명하는데, 이번에는 그의 설명을 들어 보자. 우선 예비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알다시피 순수지는 의식과 대상의 통일, 즉 대상을 자기로 인식하는 자기의식으로부터 출현한다. 이런 자기의식 가운데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포괄적인 자기의식 즉 절대정신이 곧 순수지다. 여기서 의식과 대상의 구별이 철저하게 사라졌으므로, 자기의식이라고 말하기도 곤란하다. 순수한 통일 자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식은 객체와 합일하는 최정점에서 전면적으로 몰락하면서 통일성으로 들어가며 이 통일성이 다름 아닌 순수 존재이므로, 지식은 이런 통일성 안에서는 사라지고 말며, 이 통일성으로부터 전혀 구별되지 않으며, 따라서 어떤 규정도 그런 통일성에 남아 있지 않다.”(논리학, S.59)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이다. 헤겔에서 순수 존재는 곧 판단 형식에서 주어와 술어의 통일로서 계사인 ‘이다’를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순수 존재는 그런 계사 가운데 가장 직접적인 계사, 즉 주어와 술어가 무구별적인 통일 상태에 있는 것이다. 순수 존재 역시 통일 자체다.

“그러나 지금까지 시원으로서 간주된 것 즉 존재라는 규정조차도 제거될 수 있으니, 다만 요구되어야 할 것은 시원이 순수해야 한다는 것이다.”(논리학, S. 59-60)

2)

순수지와 순수 존재의 의미를 이처럼 이해한다면, 순수지가 순수지인 이유가 금방 드러난다. 양자는 모두 ‘무구별적 통일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런 무구별적 통일은 인식의 운동에서 본다면 최후로 등장하지만, 논리학의 운동에서 본다면 처음에 전제된 것이다. 동일한 무구별적 통일이 정신현상학의 운동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순수지(의식과 대상의 통일로서)라고 표현한 것이며, 논리학의 운동에서 본다면 순수 존재(주어와 술어의 통일로서)로 표현된 것이다.

무구별적 통일 자체는 사실 무엇이라 형용할 수 없다. 그것은 지식도 아니며 존재도 아니다. 그러나 인식의 운동에서 본다면 그 무구별적 통일체는 순수지가 되며, 논리의 운동에서 본다면 그것은 순수 존재가 된다. 그래서 순수지가 나타나면 그 이면에 순수 존재가 나타나고, 순수 존재가 나타나면 그 이면에 순수지가 나타나게 된다. 헤겔은 이 무구별적 통일을 순수지로 본다면, 이에 대립해서 순수 존재가 나타나는데, 전자는 형식에 해당하고 후자는 내용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이 순수 존재는 순수지가 되돌아간 통일성이며, 달리 말하자면 순수지 자체가 여전히 형식에 불과한 것으로서 그 통일로부터 구별된 채 유지되어야 한다면, 순수 존재는 그런 순수지의 내용이기도 하다.”(논리학, S. 59)

3)

이어지는 부분에서 헤겔은 주로 다른 철학자들이 제시하는 논리학의 전개 과정을 비판적으로 설명한다. 헤겔은 우선 근대에 들어와서 철학 또는 학문(그 가운데 논리학도 포함한다)이 “가설적이고 개연적인 진리”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검토한다. 즉 어떤 학문의 대상에 관한 흔히 통용되는 진리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철학은 이런 진리를 비판하면서 진리에 다가간다는 것인데, 흔히 플라톤적 대화록이 취하고 있는 방법이 그러하다.

헤겔은 대표적으로 이렇게 주장하는 철학자를 라인홀트로 들고 있는데, 라인홀트가 당대의 여러 철학자를 일종의 범신론으로 비판하면서 기독교의 인격신 개념을 옹호한 것을 잘 알려진 얘기다.

겉으로 보기에 변증법적인 전개를 옹호하는 헤겔로서는 흔쾌히 받아들일 만한 주장이지만, 헤겔은 이런 주장이 갖는 맹점을 지적한다. 이런 주장은 학문이 일반적인 진리인 근거에 이르는 모색의 길이라는 점에서 주장된 것이다.

이런 주장은 진리에 이르는 인식의 과정에서는 출발점이 될 수 있지만, 철학이나 논리학의 길이 근거를 시원으로 삼고 그것을 구체화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이런 길에서 본다면, 개연적이고 가설적인 진리는 시원인 근거로부터 도출된 결과일 뿐이다.

“사실 시원으로 간주되었던 것은 그런 근원적인 것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런 것에 의해 사실상 산출된 것이다.”(논리학, S. 57)

4)

이어서 헤겔은 기하학적 작도와 같은 시원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기하학에서는 증명을 위해 먼저 작도가 필요하다. 작도가 제대로 놓인다면 증명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지만, 만일 작도가 잘못 놓인다면, 증명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헤겔은 작도가 올바로 놓인다는 것은 증명이 실제로 성공한 다음에서야 확인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작도가 증명하는 과정에 외면적이고 우연적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기하학적 증명은 선배가 해 놓은 작업을 기억할 필요가 있거나 아니면 그 스스로에게서는 독창적인 상상이 필요하다.

논리학은 외면적이고 우연적인 과정을 통해 나가지 않고 필연적이며 내적으로 전개되어야 하므로, 기하학에서 작도와 같은 것을 시원으로 삼을 수는 없다.

5)

학문에서 시원은 자주 ‘이미 널리 알려진 관념’을 말한다. 학문은 어떤 대상을 전제로 하여, 이 대상에 관해 누구나 동일한 관념을 가지며, 그런 관념은 이미 누구에게나 알려진 것이다. 학문은 그런 관념 속에서 “분석과 비교 또는 그 밖의 추론”을 통해 동일한 규정을 발견해 이것을 학문의 개념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 경우도 앞에서 말한 개연적인 진리를 시원으로 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미 알려진 것은 다양한 규정의 구체적 관계를 갖는데, 그런 관계는 그 자체로 직접적인 것이 아니며, 추상적인 어떤 것이 구체화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매개된 것이며, 진정한 시원이 될 수 없다.

여기서 비판의 핵심은 오히려 분석과 비교, 추론이라는 방법에 있다. 학문이 이런 알려진 관념에서 분석과 비교, 추론을 통해 일반적 개념을 얻으려 할 때, 그런 방법은 주관적인 자의에 따라서 이루어질 수 있으므로 그것을 통해 얻은 학문의 개념은 우연적일 수밖에 없다.

만일 그런 관계에 관한 필연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으려면, 그것은 가장 근원적인 것에서 필연적으로 생성된 것, 추상적인 것이 자기 자신을 통해서 정립된 것이 되어야 하니, 헤겔은 이것을 이렇게 말한다.

“구체적인 것 즉 종합적으로 통일된 것 속에 함축된 관계가 필연적이어야 한다면 이것은 이 관계가 미리 발견되는 관계가 아니라 그것을 이루는 계기가 자신의 통일로 되돌아가는 고유한 운동 가운데 산출된 관계인 경우에만 한정된다. 이런 운동은 분석적 경과 즉 사상 자체에 외적인 주관에 귀속되는 활동과 반대되는 운동이다.”(논리학, S. 61-62)

여기서 ‘자신의 통일로 되돌아간다’라는 말은 곧 구체적인 것이 지닌 모호한 통일이 다양한 규정이 명확한 관계를 맺는 통일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이런 명확한 관계는 필연적이고 내적인 생성을 통해 출현하는 것이다.

6)

시원에 관한 논의는 마침내 데카르트가 철학의 시원으로 삼은 에고 고키토의 문제로 나간다. 데카르트는 에고 고기토의 확실성이야 말로 철학의 시원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명하면서도 동시에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에고 고기토는 경험적 자아가 아니라 사유하는 자아이다. 그것은 순수한 자아인데, 이런 자아에 이르기 위해서는 경험적 자아를 벗어나는 운동이 전제되어야 한다. 경험적 자아로부터 순수한 자아에 이르는 운동은 곧 정신현상학의 운동이니 감각적 확신에서 순수지에 이르는 운동과 다르지 않다.

헤겔은 철학적 시원으로서 에고 고기토는 이중적인 혼란을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한편으로 그런 주장은 마치 경험적 자아가 그 자체로 자명하고 근원적인 것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다른 한편으로 만일 순수한 자아에 대해 말한다면, 그런 주장은 사실 순수지에 대해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것을 순수지라고 하지 않고 순수한 자아로 규정한다면, 헤겔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순수한 자아로 규정한다면, 여전히 자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순수 본질을 나로 규정하는 것은 애먹이는 모호성을 동반할 뿐만 아니라 또한 좀 더 상세하게 고찰해 볼 때 여전히 주관적 나로 머무른다.”(논리학, S. 64)

그러므로 헤겔은 데카르트의 시원은 차라리 순수지라고 말해야 옳다고 한다. 순수지는 이미 자아와 대상의 통일이니, 자아의 한계 자체를 벗어난 것이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시원이 될 수 있다.

7)

마지막으로 헤겔은 철학의 시원으로서 ‘영원한 것’, ‘신적인 것’, ‘절대자’를 거론하는 주장을 비판한다. 이런 것은 헤겔이 논리학의 시원으로 삼은 가장 추상적인 순수 존재보다 구체적 내용 즉 영원, 신, 절대라는 내용을 지닌 것이다. 그러므로 추상적 시원보다는 더 확실하게 시원으로 다가온다.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그런 것이 사유 속에 들어오고 또 언표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해 이들은 지적 직관을 들고 있다. 그러나 헤겔이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말했듯이 지적 직관을 통해 주어지는 것은 잠 속에서 주어지는 꿈처럼 몽롱한 것이며, 명확하고 체계화된 개념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영원한 것, 신적인 것, 절대자로 규정하더라도 그 의미는 알 수 없는 단순한 지칭에 불과한 것이다.

만일 이런 것들 속에 어떤 구체적 내용이 주어진다면, 이 구체적 내용은 그 자체가 시원적인 것이 될 수는 없으며, 그것은 앞에서 말한 개연적 지식과 마찬가지로 추상에서 구체로 나가는 운동 가운데서 출현한 매개된 것이니, 시원이 될 수 없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18-세계의 밤과 세계의 한낮[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18-세계의 밤과 세계의 한낮

1) 논리학의 시원 문제는 논리학이 전개되는 바탕과 논리학의 전개 과정을 이해한다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헤겔의 주장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 결정적 요인은 다음과 같은 헤겔의 말이다. 헤겔은 순수지에서 순수 존재로의 이행에 관해서 이렇게 말한다.

“순수지는 구별이 없는 것이며 구별이 없기에 지식이 되는 것조차 포기한다. 순수지는 단지 단순히 직접적인 것으로 눈앞에 등장한다.”

“단순히 직접적인 것 자체가 반성 관계를 포함하고 있는 표현이니, 그것은 매개된 것이라는 구별과 관계한다. 따라서 이 단순히 직접적인 것을 진정으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순수한 존재라고 하겠다.”

순수지에서 순수 존재로의 이행 과정은 여기서 ‘매개’에서 ‘직접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 이행의 이유는 두 가지로 설명된다. 하나는 순수지는 의식과 대상의 통일이니, 이미 지식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순수한 존재가 된다. 이런 설명에서 순수지는 곧 순수 존재와 표면적 모습만 다를 뿐이며, 내용상 차이는 없다.

다른 하나는 매개와 직접성은 서로 반성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즉 매개는 이미 직접성을 함축하며, 거꾸로 직접성은 매개를 함축한다. 양자는 상호 침투의 관계에 있다. 이런 상호 침투 때문에 순수지는 사실 순수 존재와 동일하다.

“순수 존재를 발생하게 하는 매개는 이미 자기를 지양한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는 유한한 지식과 의식의 결과로서 순수지를 전제로 한다.”

2)

그러나 이런 설명은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순수지와 순수 존재가 같다고 한다면 논리학에서 그 출발점을 순수지라고 하면 되지, 왜 순수 존재로 전환시킨 것일까? 매개가 직접성으로 전환된다는 표현(또는 매개가 자기를 지양한다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은 좀 신비한 느낌이 든다. 마치 의식에서 대상이 나오는 신의 창조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신의 창조라는 표현은 헤겔이 직접 사용하기도 한다.

“절대정신은 모든 존재의 구체적이고 최종적인 최고의 진리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인데, 한 발자국 더 나가자면 발전의 끝에 이르러 자신을 자유롭게 외화하면서 직접적 존재의 형태로 자신을 내던져 놓은 것으로 인식된다.”(12)

이렇게 외화라는 말을 쓰는 것을 넘어서 곧이어 헤겔은 “절대정신은 세계의 창조를 향해 결단한다”라고도 말한다. 정신현상학의 끝에서 순수지가 존재를 창조한다니, 너무 신비한 표현이다.

헤겔은 왜 이런 신비한 표현을 쓰는 것일까? 여기에 합리적 핵심이 없을까? 생각해 보면 여기서 새로운 비밀이 하나 밝혀진다. 정신현상학은 개별적 지식(감각적 확신)에서 시작하여 가장 일반적인 지식 즉 순수지, 절대지에 도달한다. 순수지는 가장 일반적인 지식이기에 모든 지식의 근거가 되는 지식이다. 이 운동은 근거로 복귀하는 운동이다.

이 근거는 모든 존재자에 적용될 수 있으며, 바로 그렇기에 또한 모든 존재자의 가장 외면적인 관계에서만 적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외면적 관계를 의미하는 순수 존재라는 판단 형식 또는 범주로 파악된다.

일반적 근거가 가장 외면적 관계라는 사실은 정신현상학 자체를 통해 이미 증명된다. 앞에서 정신현상학의 표면 운동 밑에는 이면 운동이 있다고 했다. 즉 개별적 지식에서 일반적 지식으로 이행하는 표면 운동은 동시에 가장 내적인 본질이 자기를 타자로 정립하는 즉 가장 외적으로 실현되는 ‘외화의 운동’이다. 헤겔 말로 하면 세계의 ‘창조 과정’이다. 그러므로 순수지는 가장 외화된 지식이니, 가장 외면적인 지식이다.

순수지가 순수 존재가 되는 것은 갑작스럽게 신비하게 일어난 일이 아니다. 순수지로 가는 운동이 곧 순수 존재로 가는 운동이다. 순수지의 이면이 곧 순수 존재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순수지와 순수존재는 서로 반성 관계에 있으며, 곧바로 전환된다고 했던 것이다.

3)

순수지가 순수 존재라는 사실은 거꾸로도 설명될 수 있다. 이번에는 논리학의 운동을 보자. 논리학의 운동은 앞에서 말했듯이 추상에서 구체로 가는 길이므로, 논리학의 시원은 곧 가장 추상적인 범주 즉 순수 존재라는 범주일 수밖에 없다. 순수 존재란 즉 모든 존재자의 가장 외면적인 관계에 적용되는 판단 형식, 범주이다.

순수 존재가 그런 외면적인 범주가 되기 위해서는 순수 존재는 가장 일반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모든 개별자의 근거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즉 순수 존재는 곧 순수지다.

논리학의 표면 운동이 이렇듯 추상에서 구체로 가는 길이지만, 그 이면 운동은 곧 다시 근거에로 복귀하는 길이다. 논리학은 결국 외면적인 관계에서 다시 가장 내면적인 관계 즉 내적 본질로 복귀하는 과정이다. 이 내적 본질은 곧 순수지이니, 논리학의 운동은 결국 자기를 자기가 자각하는 과정이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하나의 도표를 그려놓기로 하자.

정신현상학

논리학

시원

감각적 확신(직접지)

순수 존재

표면 운동

개별지에서 일반적 근거로

추상에서 구체로

(감각에서 개념으로)

(단순한 규정의 복잡화)

이면 운동

추상에서 구체로

개별 범주에서 일반 범주로

(내적 본질의 외면적 정립, 타자화)

외적 관계(객체 논리)에서 내적 관계(주관 논리)로

단순한 규정의 복잡화=내적 본질의 외면적 정립(타자화)

감각에서 개념으로=객체 논리에서 주관 논리로

4)

여기서 우리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모든 것의 근거라면 우리는 자주 사물의 가장 내적인 심층에 감추어져 있을 것으로 본다. 거의 대부분의 철학에서 근거는 곧 심층적인 것이다. 그런데 헤겔에서 사물의 가장 근거가 되는 일반적 지식은 동시에 사물의 가장 외면적인 관계만을 보여주는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 근거가 곧 외면적인 것이라니, 헤겔의 말에서 우리가 받는 충격도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헤겔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반헤겔적인 철학자 들뢰즈의 실체 개념을 소환할 수 있을 것이다. 들뢰즈는 베이컨을 논하면서 그의 그림을 실체-속성-양상의 관계를 설명했다. 들뢰즈는 베이컨의 그림 가운데 가장 외면적인 표면을 즉 단순한 색깔로 칠해진 표면을 곧 실체라고 규정했다. 반면 그 한 가운데 사물의 구체적 모습을 사물의 양상이라고 규정했다. 들뢰즈는 실체는 모든 것의 근거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가장 표면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헤겔의 주장과 일치하는 주장이 또 어디 있겠는가?

우리 앞에 펼쳐진 가장 외면적인 공간, 흔히 철학에서 순수공간 즉 한낮의 외면적 공간이 사실은 그 속에서 모든 개별자들과 그 관계가 함축된 세계의 밤, 신비하고 응축된 만물의 고향이다. 거꾸로 밤의 피투성이의 불안은 곧 한낮의 평화로운 정적이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17-논리학의 시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17-논리학의 시원

1)

앞에서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이 나가는 길에 관해 설명했다. 양자는 판단형식의 이행을 밑에 깔고 있으나, 이 판단형식의 이행이 이중적인 길이므로, 정신현상학이나 논리학이 마찬가지로 이중적인 길을 통해 나가고 있다고 했다.

물론 그런 가운데서도 우선적인 길이 있다. 정신현상학은 우선적으로 본다면, 의식의 형태가 역사 속에서 개별적인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이행하는 상승하는 운동(연구 과정)이며, 논리학은 가장 추상적인 범주가 가장 구체적인 범주로 이행하는 하강하는 운동(서술 과정)이라고 했다.

이상과 같은 긴 논의로부터 이제 비로소 우리는 헤겔이 논리학의 시원으로 제기한 문제가 이해된다. 이제 본격적으로 헤겔이 설명한 논리학의 시원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2)

논리학의 시원이니, 서론이나 서론, 그리고 구분처럼 존재론이 시작하기 전에 들어가야 할 부분으로 보이는데, 이상하게도 헤겔은 존재론에 들어가면서 처음으로 이 시원 문제를 다룬다.

(이 시원론이 존재론이 시작한 다음에 위치시킨 이유를 알기는 어렵지만, 굳이 따지고 싶지는 않다. 아마도 그다음에 나오는 존재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시원의 문제를 다룰 필요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시원론에 관해 초판과 재판의 내용을 비교하면, 초판본 앞부분에 두 페이지 정도에 걸친 내용을 재판본에서 헤겔이 제외시켰다는 것만 다르고 뒷부분에서 내용은 별 차이가 없다. 물론 표현은 많이 손 본 것 같다.

시원론에 들어가서 헤겔은 여기서 자기가 다루는 시원의 문제가 형이상학의 시원이나, 인식의 시원 문제와는 다르다고 말한다. 전자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일철학인 형이상학의 핵심 문제인 ‘종적 본질’과 같은 것을 말할 것이고, 후자라면 데카르트가 말한 ‘에고 고기토’와 같은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헤겔은 자기가 지금부터 설명하고자 하는 시원은 그런 시원이 아니라, 논리학 강의를 이끌어가는 시원이라고 못 박는다. 이 말은 논리학의 독특한 지위에 대한 언급으로 볼 수 있는데, 논리학은 넓게 본다면 학문에 속하지만, 그 가운데 형식적 학문에 속한다. 즉 논리학은 아무런 내용도 갖지 않는다. 반면 형이상학이나 인식론은 학문 가운데 다른 학문보다는 일반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구체적 내용을 담고 있는 실재[real] 학문에 속한다. 형이상학은 신이나, 세계 등을 다루며, 인식론은 의식을 다루니, 구체적 내용을 갖는다.

3)

헤겔은 이런 논리학 강의의 시원에 대해 독단론자는 자기 멋대로 정했고, 다른 사람(경험론자)들은 논리학에 관해 상식적으로 통용되는 관념으로부터 시작했으며, 직관론자는 굳이 직관적으로 이미 모든 것을 얻으니, 그런 시원의 문제 같은 것을 아예 상정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헤겔은 이들과 달리 이 문제가 엄밀하게 대답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어떤 것이 시원이라면 그것이 시원인 근거가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논리학에서 무엇이 왜 시원이 되어야 하는가? 이런 문제를 제기하면서 헤겔은 일단 시원은 모름지기 직접적인 것이거나 아니면 매개된 것이어야 한다고 하면서 서두를 뗀다.

헤겔이 문제를 왜 이렇게 끌고 가는 것일까? 시원의 개념은 개념상 전개라는 개념과 연결되어 있다. 이런 전개 과정의 첫 번째가 시원이니, 어떤 것이 시원이라면, 그것이 전개되는 과정을 고려하여야 비로소 대답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곧이어 헤겔은 단적으로 직접적인 것도, 또한 단적으로 매개적인 것도 시원이 될 수 없다고 한다. 헤겔은 단정적으로 말하며 구체적 설명은 없지만, 헤겔이 제기한 문제 제기에 비추어 본다면, 헤겔이 이렇게 대답하는 이유는 충분히 짐작된다.

생각해 보자. 단적으로 직접적인 것이라면, 출발점 즉 시원의 개념에 적합하기는 하지만, 그게 왜 시원이 돼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에 대답할 수 없다. 어떤 것이 시원이라면 그것의 바탕 위에서 어떤 것은 앞으로 움직이게 된다. 그런 어떤 것의 바탕은 단순하게 출현한 것은 아닐 것이고, 어떤 과정을 통해 출현할 테니, 시원은 직접적인 것일 수 없고, 매개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단적으로 매개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결과이니 시원이라 하기 어렵다. 시원이라면 나머지 모든 것이 출발하는 바탕이니 적어도 그보다 나중에 나오는 여러 규정들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원은 아직 어떤 규정도 구체화되지 않은 것이니,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헤겔은 시원을 단적으로 직접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나, 아니면 단적으로 매개적으로 보는 것은 어느 편이든 자가당착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4)

이런 문제를 고민하면서 헤겔이 끌어낸 답변은 시원이라면 그것은 매개적인 것이면서도 동시에 직접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직접적인 것이란 논리학의 전개 과정에서 최초의 것이라는 의미이며, 이것이 매개적인 것이란 그런 논리학이 펼쳐지는 차원에 이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헤겔이 스스로 말하듯이 모든 학문에서 시원은 매개와 직접성은 동시에 갖는다. 그것은 그 개별 학문이 전개되는 바탕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것 앞에 있었던 것을 매개로 한다. 동시에 그것이 그 학문의 내에서는 최초로 전제된 것이며 앞으로 전개될 더 규정성을 아직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직접적인 것이다.

“매개된 것과 동시에 직접적인 것을 포함하지 않는 것은 없으며, 하늘에도 자연에도 정신에도 그리고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당연히 논리학의 학문에서 시원을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전제된다. 하나는 논리학이 전개되는 차원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이며, 또한 논리학이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두 가지 문제가 대답되어야만 논리학의 시원 즉 직접적인 것이고 동시에 매개된 것이 무엇인지 밝혀질 것이다.

5)

앞에서 우리는 논리학의 개념과 그 전개 과정을 설명했다. 우선 논리학의 개념을 보자. 논리학은 사유 속에서 하나의 판단형식이 다른 판단형식으로 즉 하나의 범주가 다른 범주로 이행하는 과정이다. 이런 이행은 외적인 경험의 도움을 받아서 나가는 과정은 아니다. 이런 이행은 순수한 사유 내에서 필연적으로 전개하는 과정이니, 즉 사유 내적으로 이행하는 과정이다.

스스로 자기를 전개하는 사유가 곧 순수지다. 헤겔은 이런 순수지라는 개념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순수지의 이념은 정신에 관한 학문의 결과에서 진리에 이른 확신으로 규정된다. 이제 확신은 한편으로 대상에 더 이상 대립하지 않으며, 오히려 대상을 내면화하면서 이 대상을 자기 자신으로 인식한다.”

순수지가 이처럼 대상과 합일되어 있는 지식이다. 여기서 “대상은 내면화하면서 대상을 자기 자신으로 인식한다.” 그러므로 순수지의 전개는 순수한 자기 내에서의 전개이며, 외부적 경험의 개입이 없는 필연적인 전개이다.

과연 이것이 가능한가? 이런 순수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이 필요한가? 헤겔은 이런 문제는 논리학이 다루는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이 문제는 바로 의식을 다루는 학문인 정신현상학의 과제이다. 정신현상학의 의식 운동 끝에 마침내 도달한 것이 순수지이다. 그러므로 논리학은 정신현상학의 운동을 매개로 한다.

논리학의 순수지라는 지반에서만 일어나는 것이니, 단순히 경험에 매달리는 의식으로서는 이런 순수지의 사유를 전개할 수 없으니, 논리학을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적어도 정신현상학을 통해 자신의 의식을 순수지라는 사유의 수준으로 고양해야 한다.

6)

논리학은 순수지를 바탕으로 전개된다. 순수지는 논리학이 전개되는 전체의 토대이다. 논리학 전체가 순수지의 영역 내에서 운동한다. 이점에 관해 헤겔의 다음과 같은 표현을 보라.

“논리학은 순수한 학문 즉 그것이 전개된 전체 영역에서 순수지다.”

그런데 이런 순수지 가운데 최초의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논리학의 전개 과정을 전제로 한다. 논리학의 전개 과정은 이미 앞에서 설명했듯이 이중적인 과정이지만, 그 중 우선적인 과정은 곧 개념의 자기 정립, 즉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자기를 규정해 나가는 운동이다.

그러므로 논리학의 전개 과정에서 가장 처음에 있는 것은 가장 추상적인 범주 즉 판단형식이다. 헤겔은 가장 추상적인 범주를 곧 순수 존재라고 말한다. 이것은 모든 것의 근거에 있는 것이고 그 자신은 더이상 어떤 근거를 가지지 않은 것이기에 스스로는 어떤 규정도 갖지 않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원은 어떤 것도 전제해서는 안 되며 어떤 것을 통해서도 매개되어서는 안 되며 또한 근거를 가져서도 안 된다. 시원은 오히려 전체 학문의 절대적 근거이어야 한다. 따라서 시원은 단적으로 직접적인 것이거나 또는 다만 직접적인 것이다. 시원은 다른 것에 대립하면서 어떤 규정을 가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규정도 자체 내에서 포함할 수 없고 어떤 내용도 포함할 수 없다….그러므로 시원은 순수한 존재이다.”

여기서 순수 존재라는 말이 나오는데, 우리는 지식(의식)에서 존재(대상)로 이행하면서 당혹하게 된다. 그러나 논리학의 전체 기반이 순수지라면, 이 순수 존재 역시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존재자와 같은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순수 존재란 순수지의 다양한 범주 또는 판단형식 가운데 하나로 파악하지 않을 수 없다.

판단형식은 곧 주어와 술어의 관계인데, 이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 계사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순수 존재는 마치 존재자 가운데 일반적인 것으로 봐서는 안 되며, 판단형식을 이루는 존재 가운데 가장 순수한 것을 말한다고 이해해야 마땅할 것이다.

여기서 헤겔은 논리학의 시원이 순수 존재인 이유를 그것이 절대적 근거이므로, 아무 규정도 갖지 않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런 주장은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나간다는 논리학의 전개 과정을 밑바닥에 깔고 있는 주장이라고 하겠다.

만일 논리학의 전개과정이 정신현상학처럼 개별적인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이행이라면 가장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가장 직접적인 현존이 그 출발점으로 제시되었을 것이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16- 논리학과 정신현상학의 이중적 길[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16- 논리학과 정신현상학의 이중적 길

1)

과연 정신현상학의 길과 논리학의 길이 이렇게 이중적인 것인지, 헤겔의 말을 실제로 들어보자. 우선 학문 또는 논리학의 길을 살펴보자.

헤겔은 정신현상학의 서문에서 학문의 길을 설명한다. 이 학문 가운데 형식적인 학문이 곧 논리학이니(실재적인 학문은 자연철학과 정신철학이다), 이는 곧 논리학의 길을 말할 것이다. 여기서 학문의 길은 개념이 ‘자기를 타자화’하고 다시 ‘자기 내로 복귀하는’ 두 가지 운동으로 서술된다.

“존재자의 운동이란 한편으로는 자신을 타자화하면서 그 자신 속에 내재하는 내용으로 되며 또 다른 편에서는 그와 같이 전개된 것, 또는 그의[그렇게 전개된] 현존을 자기 내로 복귀하게 하며”(정신현상학, 38쪽)

‘자신의 타자화’는 자기를 규정하여 구체적 술어가 출현하는 과정이며 ‘자기 내 복귀’는 개별 주어의 근거가 되는 일반적 술어가 출현하는 과정이다.

‘자기를 타자화’하는 운동과 ‘자기 내로 복귀’하는 운동은 교대로 일어나는 운동이라든가, 서로 독립하는 운동으로 파악하면 안 된다. 오히려 자기를 ‘타자화하는 운동’이 곧 ‘자기 내로 복귀하는 운동’이다.

논리학의 길이 이중적이라는 사실은 헤겔이 논리학의 시원을 다루는 데서도 동시에 등장한다. 앞에서 논리학의 길이 하강하는 길, 자기를 규정하며, 자기를 타자화하는 길이라는 것을 설명한 적이 있다.

“시원을 이루는 것에서부터 나가는 진행 과정은 시원을 이루는 것을 더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것으로서만 고찰될 수 있을 것이다.”(논리학2판, 48쪽)

그러나 동시에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철학(학문을 말한다, 그중 형식적 학문이 논리학이다)에서 앞으로 나간다는 것은 오히려 뒤로 되돌아간다는 것이고 근거를 찾는 것이다.”(논리학2판, 57쪽)

여기서 헤겔은 논리학이 타자화에 못지않게 일반적인 근거로 돌아가는 길이라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논리학의 길도 이중적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자기를 구체화, 타자화하며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자기를 일반화하며, 근거로 복귀한다.

2)

그렇다면 정신현상학의 길은 어떠한가? 이미 앞에서 언급했지만, 헤겔은 정신현상학의 길을 의식경험의 길이라고 하면서 이를 소개한 다음 마침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미 인용했지만 다시 한번 들여다보자.

“이상과 같이 의식은 자기의 진정한 실존을 향하여 끊임없이 육박하면서 최종적 지점에 도달한다. 또 다른 말로 하면 이 지점에서 마침내 의식의 현상은 그 본질과 동일하게 되며, 이로써 의식에 관한 서술은 또한 정신에 관한 고유한 학문이 성립하는 바로 그 지점과 합일된다.”(정신현상학, 61-.62쪽)

즉 의식은 점차 자신을 확장하여, 대상과 합일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정신현상학은 대상과 대립하는 직접지에서 나아가 마침내 의식과 대상의 통일인 순수지에 이른다. 이 과정은 곧 근거로 복귀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 정신현상학의 길은 자기를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타자화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 사실은 정신현상학의 출발점을 이루는 직접지와 그 최종적 도달점인 순수지를 서로 비교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직접지란 감각적 확신이며, 여기서 어떤 구별도 존재하지 않으며 심지어 의식과 대상의 구분조차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이니, 가장 추상적인 전체라고 할 수 있다. 정신의 운동이 출발하는 지점인 감각적 확신 장의 서두에서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감각적 확신은 가장 참다운 인식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것은 아직 대상으로부터 어떤 부분도 제거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대상의 전적으로 완전한 모습을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 감각적 확신은 가장 추상적이며 또한 가장 빈곤한 진리임을 자처한다. 감각적 확신은 자기가 아는 것에 대해서 다만 ‘그것은 있다’라고만 말하니 말이다.”(정신현상학, 63쪽)

반면 순수지는 그 속에 포함된 모든 계기들을 명확하게 구분하면서 상호 필연적 연관을 맺는다. 헤겔은 정신현상학 절대지를 그려내는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신의 운동이 전개하는 계기들은 이런 운동 속에서 더 이상 의식에 나타나는 어떤 특정한 형태로 나타나지 않으며 오히려 의식이 지녔던 [인식과 대상으로의] 구별은 자아의 내부로 복귀함으로써 이들 계기들은 특정한 개념으로서 나타나고 또한 이런 개념이 자기 자체 내에 근거를 둔 채로 전개하는 유기적 운동으로서 나타날 뿐이다.”(정신현상학, 432쪽)

그러므로 직접지에서 순수지로 나가는 과정은 추상적인 전체가 점차 구체적으로 규정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직접적인 것으로부터의 일어나는 그와 같은 최초의 반성이란 곧 주체가 그 자신의 실체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하는 것을 의미하며, 다시 말하면 개념이 스스로를 이원화하는 가운데 순수한 나가 자체 내로 복귀하고 생성하는 것을 의미한다.”(정신현상학, 431쪽)

3)

이상에서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이 판단형식이 이행하는 길을 바탕에 깔고 있으며, 이 길은 이중적이어서, 정신현상학이나 논리학도 이중적인 길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다만 정신현상학이라는 책과 논리학이란 책은 그 서술의 목표가 다른 것이므로 각자가 포함한 두 가지 길 가운데 어느 길이 우선적으로 표면에 드러나는가는 달라진다.

정신현상학은 의식이 대상을 매개로 발전하는 과정을 다루는 것을 목표로 하므로, 여기서는 개별성에서 일반적 근거에로 복귀하는 과정이 자기를 규정하는 타자화의 운동에 우선한다.

반면 형식적 학문에 속하는 논리학의 경우, 자기를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타자화의 길이, 근거로 복귀하는 운동에 우선하여 표면에 드러난다.

각자 이런 표면에 드러나는 것은 대립하지만, 그러나 그 이면에 각기 자신의 표면과 대립하는 운동을 포함하고 있으니, 여기서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은 대립과 평행이라는 복합적인 모습을 띠고 나타나게 된 것이다.

4)

이상에서 논리학과 정신현상학의 전개 과정에 관한 설명을 마쳤다. 양자는 이중적인 길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나, 그럼에도 각자 우선하는 길을 갖는다는 것이다. 논리학과 정신현상학의 진행 과정을 도표화하면, 지금까지 논의가 한 눈에 드러날 것이다.

정신현상학 논리학
인식의 시간적인 운동 범주의 자기 전개(순수지 내부에서 운동)
표면 운동 개별에서 일반으로(근거로의 복귀) 자기의 타자화(추상에서 구체)
이면 운동 의식과 대상의 대립에서 통일로, 확신에서 진리로(구체화) 존재에서 개념으로:근거로의 복귀

여기서 서로 교차하고 있는 두 항 즉 ‘추상에서 구체화’와 ‘확신에서 진리로’가 서로 일치하며, 또한 ‘개별에서 일반으로’가 ‘존재에서 개념으로’와 일치한다. 결국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은 마치 메비우스 띠처럼 서로 교차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도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은 같은 평면에 있는 것은 아니다. 정신현상학은 시간의 평면에 있으며, 논리학은 개념의 평면에 놓여 있고, 양자를 전체적으로 본다면, 서로 투영되고 있는 관계에 있다.

이제 논리학과 정신현상학의 시원 문제로 들어가 보자. 정신현상학은 인식의 역사적 발전을 다루므로, 그 출발점은 가장 단순한 인식인 감각적 확신이다. 이 감각적 확신은 가장 개별적이어서 인식이 사물이 마치 두 개의 구처럼 부딪히는 접점처럼 가장 개별적인 지점에서 일어난 인식이다. 그러나 동시에 감각적 확신은 가장 추상적인 인식이어서 사실 그것이 무엇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인식이다. 그 속에 이미 모든 것이 불명료한 상태로 포함된 인식이다.

직접지는 인식의 전개 과정에 비추어 본다면, 가장 먼저인 직접적인 인식이다. 그러나 그런 직접적인 인식이 출현하기까지 자연은 오랜 기간 발전해야 했다. 물체의 세계를 거쳐, 화학적인 세계, 그리고 생물의 세계가 전개된 끝에 마침내 출현한 인간 의식의 세계이니, 그런 점에서는 이미 매개된 것이다.

5)

이제 논리학의 시원을 보자. 논리학의 바탕은 곧 순수지다. 순수지에 도달하기 위해 정신이 현상학은 오랜 역사적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런 역사적 과정을 거쳐 나왔다는 점에서 그것은 매개된 것이다.

앞으로 논리학은 이 순수지의 바탕을 떠나지는 않을 것이다. 순수지의 바탕에서 움직이면서도 논리학의 출발점을 이루는 것은 모든 논리적 전개의 근거가 되는 가장 일반적인 순수지 즉 가장 추상적인 범주가 된다. 그보다 더 근거가 되는 것은 없는 최초의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직접적인 것이다. 이 가장 추상적인 범주가 곧 존재이다.

가장 추상적인 존재 범주는 모든 존재자에게 적용된다는 점에서 가장 일반적이지만. 그러나 모든 존재자의 가장 피상적인 측면에만 적용되는 범주이다. 그런 존재자들이 갖는 구체적 관계는 조금도 다룰 수 없으니, 단순히 ‘있음’에서 ‘없음’의 관계만 다룰 뿐이다.

앞에서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의 전개 과정에 관해 도표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제 다시 한번 시원의 문제에 관해서도 도표의 도움을 받아 보자.

정신현상학 논리학
시원 감각적 확신 존재
표면 가장 개별적 인식 가장 추상적 빈약한 인식
이면 가장 구체적인 인식 모든 존재자에 적용된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 15-판단형식이 이행하는 이중적인 길[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 15-판단형식이 이행하는 이중적인 길

1)

앞에서 우리는 논리학의 구분과 관련하여, 이를 자연의 일반 원리로 이해하려는 엥겔스의 시도가 부딪힌 한계를 소개했다. 이제 다시 우리에게 더 긴요한 문제인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의 관계에 대한 문제로 돌아가 보자.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의 전개 구조에는 칸트가 제시한 12개의 판단형식, 범주가 깔려 있으니, 어떻게 보면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은 서로 평행한다고 하겠다. 이런 평행 관계를 도표화 하자면 다음과 같다.

논리학

정신현상학

질적

긍정판단

현존

감각

부정판단

유한성

지각

무한판단

무한성

지성

양적

단칭판단

순수양

자기의식

특칭판단

양적 무한성

자기의식의 자유

전칭판단

척도

불행한 의식

관계

정언판단

본질

관찰하는 이성

가언판단

현상

자기 자신에 의한 이성적 자기의식의 실현

선언판단

현실

즉자 대자적으로 실재하는 개체성

양상

우연판단

절대자

인륜성

개연판단

현실

자기 소외된 정신

필연판단

절대적 관계

자기를 확신하는 정신

(이상의 도표가 엉성하다는 것은 쉽게 눈에 뜨인다. 논리학에서는 주관논리학이 빠져 있고 정신현상학에서는 절대정신 부분이 빠져 있다. 그 이유는 좀 더 복잡한 설명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생략하려 한다. 다만 전체적으로 보면, 12개 판단형식이 논리학이나 정신현상학의 기본 골조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는 사실만을 말하고자 한다.)

이런 평행을 설명하면서 필자는 투영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였다. 즉 역사의 시간적 평면에서 일어난 이행이 사유의 논리 평면에 투영되면, 그것이 곧 논리학이고 거꾸로 논리의 전개 과정을 역사의 평면에 다시 투영하면, 그것이 곧 정신현상학이라고 했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역사의 논리적 투영을 ‘내면화(Erinnerun: 기억)’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동시에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은 논리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를 정신의 역사 속에 투영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헤겔은 이를 ‘형태화’라고 규정했는데, 필자는 ‘추체험’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2)

그런데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의 평행은 단순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행하는 방식은 근본적으로 대립하기 때문이다. 정신현상학은 ‘의식 경험의 길’이라는 개념에서 보듯이 개별적인 지식[직접지]에서 일반적인 지식[매개된 지]으로, 우연적 진리에서 필연적 진리에로 이행하는 것이다.

일반적이고 필연적 지식은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지식의 근거이므로, 이는 곧 근거로 복귀하는 과정이다. 필자는 정신현상학의 길을 비유적으로 ‘상승하는 길’로 묘사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이상과 같이 의식은 자기의 진정한 실존을 향하여 끊임없이 육박하면서 최종적 지점에 도달한다. 또 다른 말로 하면 이 지점에서 마침내 의식의 현상은 그 본질과 동일하게 되며, 이로써 의식에 관한 서술은 또한 정신에 관한 고유한 학문이 성립하는 바로 그 지점과 합일된다.”(정신현상학, 61-.62쪽)

반면 논리학에서 진행은 그와 반대이다. 논리학에서 출발점이 되는 것은 곧 정신현상학에서 최종적으로 도달한 가장 일반적인 것, 가장 추상적인 것이다. 여기서부터 나가는 논리학의 진행 과정은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규정하여 마침내 가장 개별적인 것에 이르는 길이다.

이 개별성은 이제 정신현상학에서 출발점이었던 단순히 직접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복잡하게 규정된 개별자, 즉 모든 규정성이 상호 연관된 체계로서 개별자가 된다. 필자는 논리학의 진행과정을 정신현상학의 길과 대비하여 ‘하강의 길’로 규정할 수 있다고 본다.

“시원을 이루는 것에서부터 나가는 진행 과정은 시원을 이루는 것을 더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것으로서만 고찰될 수 있을 것이다.”(논리학2판, 48쪽)

이상과 같이 정신현상학이 나가는 길과 논리학이 나가는 길은 이처럼 ‘상승’과 ‘하강’이라는 서로 대립하는 길이니,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은 서로 전도된 꼴이라고 하겠다. 그것은 마치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에서, ‘연구의 길’과 ‘서술의 길’을 구분한 것과 같다. 연구의 길을 개별 대상들에서 가장 일반적인 원리에 이르는 분석의 길(경험과학에서 보듯이)이며, 반대로 서술의 길은 가장 일반적 원리를 구체화하여 개별자를 끌어내는 종합의 길이다.

“물론 서술의 방법은 형식상 연구의 방법과 구별될 수밖에 없다. 연구는 소재를 자세히 탐구하여 그 상이한 발전형태를 분석하고 그 발전형태의 내적 관련을 찾아내야만 한다. 이 일이 완성된 뒤에야 비로소 그에 상응하여 현실적 운동이 서술될 수 있다. 이것이 성공하여 이제 소재의 생명 활동이 관념적으로 반영되면 마치 선험적 구성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자본론, MEW Bd. 23, 27쪽)

여기서 마르크스는 연구는 (내적 관련의) 분석이며, 서술은 (선험적) 구성이라고 말한다. 유사한 표현은 아래서도 발견된다.

“만일 우리가 인구를 출발점으로 취한다면, 그것은 전체에 관한 하나의 혼란한 표상이 될 것이고, 따라서 좀더 명확한 규정을 통해 분석적으로 끊임없이 단순한 규정으로 도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가장 단순한 규정으로부터 다시 그 반대 방향으로 거슬로 올라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마침내 다시 인구라는 개념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때의 인구는 앞에서처럼 모호한 개념이 아니라 많은 규정과 관련을 포함한 하나의 풍부한 총체가 될 것이다. 첫 번째 방법은 경제학에 있어서 초기에 취급되었던 역사적인 방법이다. … 두번째 방법에서는 추상적인 제규정이 사고의 길을 통해 구체적인 것의 재생산으로 되어간다.(정치경제학 비판에 관한 서론, MEW Bd. 13, 631-632쪽)

3)

그런데 서로 평행한다면, 그 나가는 길도 동일하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까?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에 12개 판단형식이 전제되어 있다면, 양자는 12개 판단형식이 나가는 길과 동일할 것이니, 서로 대립할 수가 없지 않을까? 한편으로 평행하면서 다른 편으로 전도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이런 모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국 정신현상학의 길이나 논리학의 길이나 각기 이중적이지만, 다만 각자를 이루는 두 개의 길 가운데 각자의 처지에 따라서 우선적으로 드러나는 길이 다를 뿐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정신현상학과 논리학 모두에 전제된 판단형식이 나가는 길을 살펴보자. 헤겔에서 하나의 판단형식은 주어와 술어의 관계이며, 하나의 판단형식이 다른 판단형식으로 발전하는 것을 보자. 그것은 곧 이런 주어와 술어의 관계 방식의 변화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질적인 긍정판단인 “이것(사과)이 빨갛다”에서 양적인 개별 판단인 “사과는 빨갛다”라고 할 때, 여기서 ‘빨갛다’라는 술어는 전자에서는 이것에 대해 하나의 우연한 성질에 불과했다. 그것은 외부 주관에 의해 주어에 부가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후자에서는 모든 사과에 일반적으로 속하는 속성이면서 사과에 필연적으로 속하는 속성이 된다. 그러므로 이 이행은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일반화하면서 동시에 구체화하는 것이다. 일반화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근거로 복귀하는 것이며, 필연화 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구체화하는 것이다.

하나의 판단형식이 다른 판단형식으로 이행한다는 것은 이처럼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니,

이 판단형식의 이행을 전제로 하는 정신현상학의 길이나 논리학의 길도 이중적이지 않을 수 없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 14-엥겔스 자연변증법에 관해[흐린 창가에서- 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 14-엥겔스 자연변증법에 관해

1)

헤겔은 정신현상학 끝에 순수지에 이르러서, 마침내 학문 그 가운데서도 형식적 학문인 논리학이 시작된다고 한다.(실제적 학문은 자연철학과 정신철학-법, 예술 종교- 등이 속한다) 앞에서 정신현상학의 구별은 역사적으로 전개된 형태이고, 반면 논리학의 구분은 사유 순수지, 또는 논리의 영역 내에서의 구별이라고 했다.

이는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의 차이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다시 불러일으키는데, 이는 헤겔이 “무엇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에서 다루고 있으니 잠시 미루어 두기로 하고, 우선 논리학의 구분 문제로 다시 돌아가기로 하자.

헤겔은 논리학의 구분은 자의적, 역사적 구분이 아니며, 오히려 ‘개념’ 자체가 전개하는 고유한 구분이라고 한다. 즉 ‘개념’은 정신현상학의 최종 결과인 순수지를 말하니, 그것은 곧 사유와 존재의 통일을 말한다. 이런 통일이 다시 전개되면서 한편에는 존재로 다른 한편에는 사유로 구분된다는 것이다. 이런 구분에 따라 전자는 객체 논리학이 되고 후자는 주관 논리학이 된다.

물론 이 구분은 인식의 형태가 역사적으로 발전하는 정신현상학에서처럼 더이상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형태가 아니며, 다만 순수지를 논리적으로 구성하는 계기의 구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객체 논리학이라고 하더라도 존재자 자체를 직접 다루는 형이상학은 아니다. 그것은 순수지의 형식 내에서 존재자와 관련된 형식일 뿐이니, 객체 논리학은 존재자에 관련된 하나의 판단형식이나 범주를 다룰 뿐이다.

마찬가지로 주관 논리학은 사유를 다루는 순수지의 형태, 즉 판단형식인데, 이때 사유는 정신철학에서 사유를 하나의 대상으로 다룰 때처럼 대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오직 사유를 다루는 판단형식이나 범주를 다룬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 본다면, 논리학은 전체적으로 판단형식, 범주를 다룬다고 보겠으며, 그러므로 논리학의 지반은 다만 순수지, 또는 판단형식이다. 순수지의 형식이 전개되는 과정이 곧 논리학이다.

2)

헤겔은 객체 논리학에서 주관 논리학으로 발전하는 이 과정을 아래와 같이 서술한다.

“따라서 전체 개념은 한번은 존재하는 개념이며 다른 한번은 개념으로 고찰될 수 있다. 전자에서 개념은 다만 그 자체적인 것으로 개념일 뿐이며 그러므로 실재하고 존재하는 것으로서 개념이다. 반면 후자에서 개념은 개념 자체 또는 대자적으로 존재하는 개념이다.”

여기서 헤겔은 논리학의 지반인 순수지 즉 개념이 자기를 전개하면서 처음[객체 논리학]에는 순수지가 “그 자체적인 것으로” 또는 잠재적으로[an sich] 자기를 드러낼 뿐이라고 한다. 여기서 순수지는 존재자의 운동 속에 가려져서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 그것은 순수지의 운동이 아니라 마치 존재자가 운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논리학인데도 이것은 마치 형이상학처럼 보이다.

그러나 순수지 즉 개념이 마지막[주관 논리학]에 이르면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실현해서 실현된 자기로부터 자기를 자각하면서 “대자적[fuer sich]으로” 된다. 여기서는 대상이 아니라 순수지가 스스로 운동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순수지 자신의 운동이 존재자를 이끌어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기에 여기서는 논리학은 논리학답게 판단형식으로 출현한다.

3)

알다시피 1부 객체 논리학은 1권 존재론과 2권 본질론으로 나누어진다. 존재론은 직접 우리 눈 앞에 존재하는 존재자를 다룬다.

반면 본질론은 이중적이다. 헤겔에서 본질은 아직 “자기 내에 머무르고 있는 개념[In Sich Sein des Begriffs]”이다. 즉 자기를 구체적으로 전개하지는 못하면서 추상적으로 사물의 내부에 머무르고 있는 개념이라는 뜻이다. 이런 개념을 헤겔은 본질이라 한다.

본질론에서는 직접적 존재와 이런 내적인 본질 사이의 서로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침투하는 모습이 다루어진다. 이 경우 헤겔은 본질이 “외적 존재에 들러붙어 있다”라고 표현한다.

“이 개념은 이런 방식[본질론]에서는 아직 그 자체로서 독자적으로 정립되지 않고 그것에 외적인 존재인 직접적 존재가 동시에 들러붙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곧 본질론이며 이 본질론은 존재론과 개념론 사이에 있다.”(2판, 46쪽)

그러므로 전체적으로 보면, 논리학이 다루는 대상은 직접적인 존재에서 존재와 본질의 상호 관계로 마지막으로는 자기 전개하는 개념으로 나가니 점차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안으로 뚫고 들어가는 듯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물론 논리학은 대상 자체가 발전하는 운동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논리학은 대상의 발전을 매개로 하여 자기를 전개하는 순수지, 개념, 판단형식, 범주를 다룰 뿐이다.

4)

이것과 관련하여 엥겔스의 자연 변증법이라는 책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미완성된 이 책에서 엥겔스는 자연의 변증법적 전개 과정을 세 가지로 서술했다. 이미 다 알고 있겠지만 그 하나는 질, 양 전환의 법칙이다. 두 번째는 상호 침투의 관계이다. 세 번째는 부정의 부정이라는 법칙이다.

엥겔스는 자연의 세 가지 변증법적인 전개 과정을 어디서 발견했을까? 그의 저서 자연 변증법에서 보듯이 그가 물론 자연과학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는 이처럼 자연을 연구하여 이런 법칙을 일반화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게 보기에는 그의 자연 연구는 1870년대라는 시대적 제약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 법칙은 헤겔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짐작하듯이 바로 그의 논리학에서 흘러나오는 법칙이다.

질량 전환의 법칙을 헤겔은 존재론에서 제시한다. 본질론의 영역에서 존재와 본질의 반성 관계는 근본적으로 상호 침투의 관계이다. 마지막으로 개념론에서 개념의 발전을 서술하면서 헤겔은 이중 부정, 자기 부정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엥겔스의 이 세 가지 법칙은 잘못 알려진 대로 자연의 모든 영역에 동시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엄밀하게 말해 질량 전환의 법칙은 물리학의 영역에, 상호 침투의 법칙은 화학의 영역에 그리고 생물학, 역사학에는 이중 부정을 통한 발전의 법칙이 적용된다. 이런 차이를 간과하면 소박 유물론자처럼 역사 속에 질량 법칙을 적용하든가, 역사에는 변증법이 있지만, 자연에는 변증법이 없다는 루카치와 같은 오해가 등장한다.

중요한 것은 엥겔스는 이런 법칙을 자연의 일반 원리로 보았으니, 말하자면 엥겔스의 자연 변증법은 형이상학적이라고 하겠다. 그런 가정 아래 그는 자연과학의 연구를 통해서 그런 법칙을 실증적으로 제시하고자 했다.

(엥겔스는 자연과학을 연구하여, 헤겔이 판단형식의 발전으로 규정한 논리학의 법칙을 존재자의 일반적 운동 원리로 제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후일 아인슈타인이 제시한 에너지와 물질의 전환법칙이 발전되기 이전 1870년대라는 시대적 제약을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변증법을 자연의 원리로 확립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변증법이 자연의 원리로 확립되기 위해서는 서로 독립적인 질량과 에너지라는 뉴톤적 원리가 극복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엥겔스는 자신의 연구 성과를 모두 포기하고, 그의 연구를 비발표 논고로 남기고 말았다.)

5)

여기서 마침내 헤겔이 형이상학이라는 표현을 제쳐두고 논리학이라는 표현을 이용한 이유가 드러난다. 헤겔의 논리학은 순수지를 지반으로 전개된다. 사유의 판단형식 즉 범주가 자기를 전개하는 과정이 곧 논리학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 형식이 존재자에 대한 경험을 매개로 전개되기에, 존재론, 본질론, 개념론이라는 이름이 붙더라도, 그것은 형이상학은 아니며, 어디까지나 사유, 판단형식, 범주를 다루는 것이니, 헤겔의 말대로 논리학이라고 하겠다.

(필자는 다만, 논리학이 형식적 학문이 아니라, 존재자에 대한 경험을 매개로 하여 발전한다는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로 형이상학이라는 이름을 붙여 헤겔 논리학을 서술하지만, 서두에 밝힌 대로 헤겔의 이 책은 형이상학이 아니라 논리학이라고 하는 것이 올바른 말이 될 것이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13-논리학의 구분에 관해[흐린 창가에서- 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13-논리학의 구분에 관해

1)

앞에서 논리학이 기본적으로 칸트의 12개 판단형식 즉 범주를 밑바닥에 깔고 있다는 사실을 말했다. 논리학의 1부 객체 논리학의 목차를 보면, 거기서 질-량-관계-양상으로 전개되는 12개 범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필자가 굳이 흔적이라고 말한 것은 각 판단형식의 이행 중간에 또 다른 세부 범주들이 끼어들어 있어서 언뜻 보면 그게 눈에 뜨이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논리학 그 가운데서도 객체 논리학이 이처럼 12개 판단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헤겔이 논리학을 3권으로 즉 1부 객체 논리학의 1권 존재론과 2권 본질로, 2부 주관논리학으로 구분한 것에 관하여, 여러 가지 의문이 떠오르게 된다.

도대체 논리학 자체가 일반적으로는 사유의 형식을 다루는 데 객체 논리학이란 것이 말이 되는지가 문제다. 사실 3부 주관논리학을 보면, 그중 1편이 개념-판단-추론을 다루니, 전통적 논리학과 다루는 것이 일치한다. (여기서 3부 주관논리학의 2편 객관성(기계론-화학론-목적론)을 다루고 3편이 이념(삶-인식의 이념-절대이념)을 다루는 데, 이처럼 객관성이나 이념이 주관 논리학에 함께 다루어지는 이유는 나중에 고찰하기로 하자)

그런데 객체 논리학이라면 그건 그 자신의 말대로 형이상학 또는 존재론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왜 그가 이를 논리학이라는 이름을 붙였는가가 문제가 된다. 이 문제는 단순히 논리학을 구분하는 문제에 그치지 않고, 존재론 맨 앞부분에 부록처럼 끼어들어 있는 부분 즉 “무엇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나”라는 절의 문제의식과 연관되어 있으니, 두 부분을 이제 함께 살펴보기로 한다. 이 부분에서 헤겔이 다루는 것은 정신현상학과 논리학 사이의 관계이다.

결국, 논리학의 구분 문제는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의 관계 문제와도 연관된 문제이니, 우리는 불가피하게 그런 참으로 논의하기 힘든 문제를 여기서 건드리지 않을 수 없다.

2)

1판에서 논리학의 구분과 관련된 절은 ‘Allgemeine Einteilung Derselben’이라는 이름으로 서술되어 있지만, 전체는 3쪽에 그치며 비교적 간단하다. 2판에서 헤겔은 이 부분을 대폭 확대(6쪽)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제목은 ‘Allgemeine Einteilung der logik’으로 되어 있다.

이 절에서 헤겔이 논의하는 핵심 문제는 곧 논리학의 구분이 주관의 자의적인 산물이 아니라, 논리학의 토대인 개념 자체가 그 스스로 전개하는 구분이라는 것이다. 이 개념 자체 즉 논리학의 지반은 “존재가 순수 개념 자체이며 단지 순수 개념만이 진정한 존재라는”(1판, 30쪽) 것을 전제로 한다.

존재와 사유(또는 개념)의 통일은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이 기나긴 역사적 발전의 길 끝에 마침내 도달한 최종적 결과이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이것에 ‘순수지’ 또는 ‘절대지’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점은 2판 ‘논리학의 일반적 구분’ 앞부분에 헤겔이 말하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논리학의 구분에서 전제되어 있는 개념은 자신의 맞은편에 놓여 있는 학문[정신현상학]의 결과로 주어진다. 그러므로 그것은 여기에서는 전제가 된다. 논리학은 순수 사유의 학문으로서 규정되며, 이 순수 사유의 학문은 순수지를 자신의 원리로 삼는다.”(2판, 44-45쪽)

순수지는 존재와 의식의 대립이 극복되면서 “존재가 순수한 개념 자체이며, 순수한 개념이 진정한 존재로서 의식된다”(2판, 45, 문장은 1판과 동일)고 한다.

물론 순수지의 이런 토대, 존재와 의식의 통일이라는 개념적 토대는 칸트의 선험철학을 통해 마련되었다는 사실은 앞에서도 여러번 얘기했으니, 다시 또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런 구절들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논리학은 순수지의 전개라면, 이것은 존재와 의식의 대립이 지양된 것이니, 더이상 구별을 전개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우리에게 문제되는 것은 바로 이런 문제다. 여기가 바로 로도스이니, 이제 모든 것은 멈추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도 헤겔은 논리학에서 이 순수지에서 다시 구별을 전개하니, 이게 대체 무슨 까닭인가? 헤겔 자신도 자기의 말이 듣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함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그는 곧이어서 정신현상학에서 전개된 과정과 논리학에서 전개된 과정이 다르다고 말한다.

2)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통일이 지반이 되어 논리학의 원리를 이루니, 그 구별은 그 원리에 내재하는 것이지만, 그런 구별의 발전은 다만 이런 지반 내부에서만 출현한다. 왜냐하면 논리학의 구분은 이미 말했듯이 개념의 판단이며, 자신에 이미 내재하고 있는 규정에 따라 그 자신의 구별이 정립된 것이므로, 이러한 구별을 정립하는 것은 구체적 통일이 다시 그 규정성 속으로 해소되는 것으로 그리하여 마치 각자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없다.”(2판, 45쪽)

헤겔은 논리학에서 구별이 전개되더라도 그 구별은 순수지 또는 개념의 지반 내부에 머물러 있으며, 따라서 과거 즉 정신현상학에서처럼 그 구별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규정성” 속으로 해소되는 것은 아니라 한다.

즉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의 형태는 역사적으로 출현한 개별적인 형태이었고 이 의식은 구체적인 자립적인 형태이었다. 그러나 논리학에서 이제 전개되는 사유 즉 순수지의 구별된 형식은 그런 구체적 형태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순수지 내부에서 전개된 구별이며, 이런 점에서 우리는 순수지의 전개된 형식을 개념의 논리적 계기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논리학에서 헤겔은 논리학의 구별에 형식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따라서 이전에(진리에 이르는 도정에서)[정신현상학에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규정 즉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또는 사유와 존재 또는 개념과 실재라든가 다시 말하자면 어떤 고려하는 관점에서 특정한 것으로 될 수도 있는 것들은 이제 그 진리인 통일 속에서는[논리학에서] 형식으로 격하된다. 따라서 그 형식은 서로 구별되는 가운데서도 본래 전체적인 개념이며, 이 전체적 개념은 그 구분 속에서 다만 자신의 고유한 규정[사유, 순수지] 아래서 정립된다.”(2판, 45쪽)

사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도 그 서문에서 이와 유사한 그러나 반대의 관점에서 전개된 이야기를 서술한 적이 있다. 헤겔은 그 서문에서 학문에 이르기 위해서는 정신현상학의 도정을 거쳐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때 역사적으로 출현한 의식의 구체적 형태는 이제 내면화되어서[erinnerung: 기억] 논리적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지금의 관점에서 의식의 역사적 발전 과정을 다시 한 번 되살리는 것은 이미 논리적 계기가 되었던 것을 그 역사적 형태로 되돌려서 이해할(추체험)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 학문은[정신현상학] 의식이 형성하는 운동을 상세하고 필연적으로 서술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 결과는 이미 계기로 전락하여 정신의 소유로 된 것을 그 형태 속에서 서술하는 것이다.”(정신현상학, S. 25)

3)

개별적 형태와 논리적 계기에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개별적 형태는 그 속에 여러 논리적 계기를 포함하지만, 그 가운데 하나의 계기가 지배적으로 되면서 나타나는 전체적 모습이다. 여기서 계기들은 지배적 요소의 지배를 받아서 왜곡되니 후일 발전된 명확한 관계를 이루지 못한다. 반면 계기란 전체 형태에 포함된 여러 계기가 서로 명확한 관계를 이루는 가운데, 그 관계 중의 한 계기를 말한다. 이 계기는 전체의 한 계기이므로 전체의 지배적 계기에 따라서 규정된다.

법철학에 나오는 예를 들자면, 가족은 선사 시대에는 역사적 형태이었다. 그 시대는 작은 가정만이 아니라 사회와 국가 전체가 가족적인 것이었다. 반면 오늘날 가족은 자본주의 사회의 전체를 이루는 한 계기에 불과하다. 가족은 이제 구시대의 의미를 상실하고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규정되니, 가족도 이제 계약관계가 되었다.

역사적 형태가 자기를 지양하기 위해서는 구체적 역사 속에서 모순된 경험, 대립과 투쟁 등을 거쳐야 한다. 이는 역사적 투쟁을 매개로 한다. 그것은 헤겔 말대로 “세계 정신의 인내”와 “세계사의 엄청난 노동”을 거쳐야만 한다.

반면 이미 논리적 계기가 되었을 때는 전체의 관계 속에 있는 것이므로 “이미 본래적으로는 an sich 이런 지양이 이루어졌으므로, 더 작은 노력만이 필요하다”(정신현상학, 26쪽)라고 말한다. 여기서 작은 노력이란 곧 사유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말일 것이다.

4)

필자는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의 이런 관계를 일종의 투영 관계로 해석한 바가 있다. 즉 역사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정신현상학의 운동을 논리학 즉 순수지의 평면에 투영한다면 이것이 바로 논리학이며 거꾸로 논리학의 전개 과정을 역사의 시간 평면에 투영한다면 그것이 곧 정신현상학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은 서로 동일한 것이 다시 시간적 형태에서 다루어졌는가 아니면 논리적 계기로서 다루어졌는가 하는 차이에 불과할 것이다. 정신현상학은 논리적 전개를 이면에 깔고 있으며 거꾸로 논리학은 의식의 역사적 운동을 이면에 깔고 있는 사실은 서로 동일한 내용을 지닌 것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논리학에서 칸트의 12개 판단범주를 발견했듯이 정신현상학의 서술에서도 12개 판단형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구체적으로 질적 범주가 의식 장에서 다루어진다면, 양적 범주는 자기의식 장에서 다루어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성 장은 관계 범주가 마지막 정신 장은 양상 범주가 다루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막다른 골목에 부딪힌 느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이 기본적으로 서로 평형 상태에 있다면, 이미 정신현상학을 서술한 다음에 굳이 다시 논리학을 서술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가 논리학을 서술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역시 그야말로 골을 부수는 두 권의 책 중의 한 권이라도 읽는 것을 생략할 수 있었을 것이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었겠는가? 그러면 우리를 헤겔이 후대인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 다시 어마어마한 분량의 논리학을 서술했다는 말인 되는가? 이런 고민은 역시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의 차이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한강의 채식주의자-폭력과 나무 불꽃[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한강의 채식주의자-폭력과 나무 불꽃

(예전 2017년에 썼던 글이다. 한강의 소설이 노벨상을 받은 것을 축하하며 다시 올린다)

 

1) 폭력의 세계

제목이 <채식주의자>라서, 채식의 미덕에 관한 이야기인가 하면서 책을 들었다. 몇 페이지 읽지 않아서 작가는 채식의 미덕을 말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당장 눈에 뜨이는 것은 폭력성이다. 육식을 거부하는 아내인 영혜, 그것보다 섹스를 거부하는 아내를 지배하기 위해 남편은 온 가족을 동원한다. 아내의 부모는 딸에 대한 걱정보다는 사위에 대한 걱정 때문에(차라리 두려움 때문이겠지!) 강제로 고기를 입속으로 틀어넣는다. 이런 코믹한(‘섬뜩한’이라는 뜻도 있다) 폭력이 아직도 딸 가진 게 죄인인 우리 사회에 밑바닥에 깔린 것이 아니겠는가? 폭력에 희생되어 미치게 되는 주인공! 작가는 이 비극을 말하는 것 같다.

나도 연작 소설의 형식을 띤 이 소설의 첫째 편(<채식주의자>)을 읽는 내내 그렇게 생각했다. 그 정도는 나도 안다! 그래서 첫째 편만 읽고 일어서야지 하면서 그 마지막 구절을 읽는 순간 갑자기 눈이 번쩍 띄는 구절이 있었다. 아침, 가슴을 드러낸 채 병원 벤치에 앉은 영혜를 병원 직원들이 끌고 가려는 순간이다. 그녀의 입술에는 루즈가 함부로 번진 듯 피에 젖어 있었다. 작가는 화자인 남편의 눈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내의 움켜쥔 오른손을 펼쳤다. 아내의 손아귀에 목이 눌려 있던 새 한 마리가 벤치로 떨어졌다. 깃털이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작은 동박새였다. 포식자에게 뜯긴 듯한 거친 이빨자국 아래로, 붉은 혈흔이 선명하게 번져 있었다.”

아니, 그렇다면 작가가 이 사회의 코믹한 폭력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대체 이 반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폭력을 가하는 사회에 대한 영혜의 증오감이 동박새를 뜯어 먹는 힘으로 표현된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그 답이 궁금했기에 책을 놓을 수 없었다.

2) 실체변환

이어지는 두 번째 편 <몽고반점>에서 화자가 갑자기 바뀌었다는 것을 나는 오랫동안 깨닫지 못했다. 두 번째 편의 화자는 영혜의 언니의 남편이며 화가이다. 그는 2년 동안 아무것도 새 작품을 내지 못한 불임의 상태이다. 이 기간은 그가 처제인 영혜에 매혹되기 시작된 때와 일치한다. 그 매혹을 격발시킨 것은 영혜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남아 있다는 아내의 말이다.

상상 속에 그려진 몽고반점 때문에 한 남자가 매혹된다니? 몽고반점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할까? 여기서부터는 나는 작가의 말을 믿지 못하는 의심스러워하는 독자가 되어, 책을 읽었다. 솔직히 말해서 여기서부터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영혜에 대한 의문보다는 약간 포르노적 관심(불륜은 포르노의 주요 주제이다)이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몽고반점이라는 이미지로부터 남녀가 몸에 꽃을 그린 채 서로 교합하는 장면이 마음속에 떠올라, 화가는 이를 미리 스케치북에 그려놓는다. 단 두 남녀가 그와 영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무의식 속에 감추어 두기 위해 얼굴은 그리지 않았다. 일단 마음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화가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기를 실현한다. 그는 그저 이미지의 노예일 뿐이다. 그는 멧돼지처럼 돌진하면서 그 이미지를 실현하기 위해 돌진한다. 이 과정 끝에서 영혜는 맨몸으로 다가온 그를 거부하지만, 그가 몸에 꽃을 그리고 다가가자 마침내 받아들인다.

‘몽고반점’이라든가, ‘꽃의 문신을 한 채 이루어지는 교합’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먼저 두 이미지 속에 죽음의 이미지가 어려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몽고반점의 푸른빛은 죽음의 빛일 것이다. 또 꽃의 교합도 식물성의 이미지이고, 니르바나라는 관념과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이미지를 고려할 때 화가와 영혜의 성적 교섭은 일단 죽음으로 넘어가는 길목 또는 과정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죽음의 충동을 그려내려 했던가? 성적 교합에 대한 작가의 서술에는 그렇게 이해할만한 단서가 보이기도 한다.

“그녀는 이미 흠뻑 젖은 몸, 무서울 만큼 수축력 있게 조여드는 몸 안에서 그는 혼절하듯 정액을 뿜어냈다.”

정신분석학자 바타이유의 경우 성적 교합이 죽음의 충동이며 이 가운데 쥐상스(열락)가 얻어진다고 말했다. 영혜와 화가가 윤리적 차원을 위반하고 있다는 점도 이런 이해를 지지한다. 그런데 이렇게만 이해하기에는 곤란하다는 것은 아래와 같은 표현을 보면 이해된다. 작가는 두 사람의 성적 교합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그가 그녀 안으로 들어갔을 짓무른 잎사귀에서 흐르는 것 같은 초록빛 즙이 그녀의 음부에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향긋하면서도 씁쓸한 풀냄새가 점점 아릿해져 그는 숨을 쉬기 어려웠다.”

여기에 교합을 한 이후 더이상 꿈을 꾸지 않게 되었다는 영혜의 반응을 덧붙여 보자.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꿈을 꾸지 않게 될까?”

그 꿈은 피에 젖은 얼굴에 관한 꿈이다. 게다가 몽고반점이 단순히 푸른빛이 아니고 연두색이 배어있다는 서술도 연관된다. 이런 표현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체변환’이라는 개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실체변환이란 기독교에서 포도주와 빵이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 되는 것을 말한다. 영혜와 화가는 서로의 교합을 통해서 죽음에 이른다. 이런 죽음으로 넘어가면서 그들은 실체변환을 하게 된다. 그들은 이제 꽃과 같은 식물적 존재로 변환된다.

이런 실체변환이라는 과정을 매개하는 것이 예술이 아닐까? 작가는 예술이란 문신과 마찬가지로 주술적인 차원이라고 보는 것 같다. 화가와 영혜는 실질적인 죽음 대신, 예술적 차원에서 죽음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이들은 주술적인 차원에서 식물적 존재로 변환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 만연하고 편재하는 폭력은 여기서도 멈추지 않는다. 사회는 예술에게 금기를 정한다. 이 금기는 주술적 차원의 실체변환을 파멸시킨다.

이런 실체변환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본다면 드디어 영혜의 ‘채식주의’를 이해하는 단서를 얻게 된다. 이 단서는 세째 편 <나무 불꽃>에서 확실하게 드러날 것 같다.

3) 내재하는 폭력성

이 소설의 특징은 연작 소설이라는 점이다. 그 가운데 화자가 변화된다. 첫 번째 편 채식주의자의 화자는 영혜의 남편이다. 그는 두 번째 몽고반점의 화자는 화가가 된다. 세 번째 편 나무 불꽃의 화자는 영혜의 언니 인혜이다.

세째 편은 인혜가 갇힌 정신병원으로 찾아가는 과정에서 회상의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런 회상은 시간적으로 지그재그식으로 이동하기에 복잡한 순서를 맞추어 보기 위해 나는 도표를 그렸을 정도이다. 그런데 작가의 서술을 따라가다 나는 혼란에 빠졌다. 영혜와 언니가 서로 묘하게도 겹치는 것 때문이다.

인혜의 자살 시도를 보자. 영혜가 남편과 비디오를 찍은 직후로 보인다. 작가는 인혜가 그전 하혈을 하였다고 하면서 죽음의 그림자가 이미 오래전부터 그녀를 덮쳤다고 암시한다. 그리고 비디오를 찍은 직후 “며칠 만에 새벽에 들어온 그가 도둑처럼 그녀를 안았을 때” 그녀는 새벽에 일어나 자살을 하러 산으로 올라간다.

인혜의 자살 이야기를 다시 읽으면 영혜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므로 인혜의 말은 곧 영혜의 말로 보인다. 앞의 두 편에서 영혜는 말이 없었다. 아니 말을 할 자격을 박탈당했다. 대신 영혜의 꿈만이 시적인 언어로(일상적 언어가 아니라, 시적인 언어로 서술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개입되어 있다. 그런 영혜를 대신해서 셋째 편에서는 언니가 말한다. 이 언니의 말을 통해 영혜를 이해할 수 있다.

왜 그들은 죽으려 했을까? 인혜와 영혜가 사는 세계는 복종을 요구하고 폭력이 행사되는 세계, 동물적 세계라 하겠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세계에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서로 뒤섞여 있다는 것이다. 평생 성실하고 남을 위해 희생해온 인혜는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가해자이다. 그녀는 남편과 영혜의 비디오를 보고서 두 사람을 강제로 병원에 입원시킨다. 그건 영혜도 마찬가지이다. 영혜 역시 피해자이지만, 가해자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 점을 어릴 때 자기를 물은 개가 아버지의 오토바이에 끌려다니다가 거품을 물고 죽어가는 것을 영혜가 지켜보았다는 서술을 통해 암시하고 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섞여 있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 속에 이미 폭력이 내재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나는 작가가 첫째 편 마지막에서 제시한 동박새를 뜯어먹는 영혜의 모습도 그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것은 인간의 내면에서 억압된 폭력적 본성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억압된 폭력의 본성은 영혜에게 수면을 뚫고 의식으로 점차 다가온다. 처음 그것은 꿈으로 나타난다. 이 꿈에서 영혜는 자기가 바로 맹수가 된 것이 아닌지 두려워한다.

“번들거리는 짐승의 눈, 피의 형상, 파헤쳐진 두개골, 그리고 다시 맹수의 눈, 내 뱃속에서 올라온 것과 같은 눈, 떨면서 눈을 뜨면 내 손을 확인해, 내 손톱이 아직 부드러운지, 내 이빨이 아직 온순한지.”

현실 세계는 폭력의 세계이다. 그런데 이 폭력성은 어떤 외적인 것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내면적인 본성에 내재하고 있는 것이 흘러나온 것에 불과하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나누어져 있다면 혁명을 통해 사회는 바뀔 수 있다. 그러나 가해자가 곧 피해자이고, 피해자가 곧 가해자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아니 인간의 내적 본성 속에 이런 폭력성이 내재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혁명은 다만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만들어내는 것에 불과하다. 영혜의 절망은 아니 작가 자신의 절망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4) 영적인 타자

절망만으로 문학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절망을 넘어서는 힘을 문학이 보여주어야 한다. 작가 역시 소설 <채식주의자>에서 그 힘을 보여주려 한다. 그 힘을 발견하는 단서는 인혜의 깨달음 속에 존재할 것이다.

자살 시도를 통해 상징적으로 죽음을 겪은 인혜는 점차 죽어가는 영혜에게 다가간다. 영혜는 점차 자신이 나무가 되어 간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나무처럼 물구나무서며, 마침내 먹지 않아도 되고 햇빛만 받으면 되고, 심지어 말과 생각도 곧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마침내 말문을 닫는다.

“비에 녹아서 … 전부 다 녹아서 … 땅속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어. 다시 거꾸로 돋아나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거든.”

“영혜는 눈을 빛냈다. 불가사의한 미소가 영혜의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언니 말이 맞아…이제 곧 말도 생각도 모두 사라질 거야, 금방이야”

인혜는 영혜의 말을 처음에는 의사가 분석하는 것처럼 정신분열증적인 환상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상징적 죽음을 겪은 이후 인혜는 점차 영혜의 말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이런 이해의 첫 단계에서 인혜는 영혜가 자기처럼 자살하려는 시도로만 이해한다.

“지금 그녀가 남모르게 겪고 있는 고통과 불면을 영혜는 오래전에, 보통의 사람들보다 빠른 속력으로 통과해, 거기서 더 앞으로 나간 걸까, 그러던 어느 찰나 일상으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끈을 놓아버린 걸까?”

그러나 의사가 최후로 영혜에게 강제로 호스를 통해 음식을 집어넣으려 시도할 때 인혜는 처음 병실 밖에 있다가 영혜가 몸부림치자 뛰어들어가 의사를 제지한다. 그러면서 인혜는 달려가 영혜의 몸을 껴안는다. 이때 작가는 “영혜 피를 토한 피가 이때 그녀의 블라우스를 적신다”라고 말한다. 곧이어 의사가 치료를 포기하고 큰 병원으로 데려가라 하자, 인혜는 수속을 마치고 나오면서 화장실에서 “뿌연 차와 함께 노란 위액”을 토한다. 영혜의 피와 인혜의 노란 위액이 서로 감응한다. 작가의 이런 서술은 마치 이제 인혜와 영혜가 하나의 몸이 된 것처럼 보인다. 물론 아직 인혜는 영혜를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몸으로는 이미 하나가 된다.

작가는 우리에게 그 비밀을 말로 전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작가는 영혜의 말 가운데서 그 비밀의 단서를 노출하고 있다. 영혜의 말은 결코 무의식의 말은 아니다. 영혜의 말은 너무나도 또렷한 언어로 말해진다. 그렇다고 영혜가 우리가 가진 의식의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영혜를 통해 말하는 것은 누구인가? 작가는 영혜가 말하는 가운데 불가사의한 “미소를 짓고” 얼굴이 “환하게 밝았다고” 했다. 영혜는 음식을 거부하면서 의사조차도 신비하게 생각하듯이 온 몸이 긴장되어 있다. 바로 그 미소와 빛, 온몸을 사로잡는 힘이 영혜를 통해 말하는 주체가 아닐까? 이 주체는 바로 영적인 타자가 아닐까?

5) 나무 불꽃

이제 첫째 편으로 돌아가자. 영혜를 불안으로 몰아넣은 것은 그 꿈이다. 그 꿈은 그녀의 내부에 존재하는 폭력성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이다. 그녀에게 내재하는 폭력을 끌어내는 것은 바로 사회적인 폭력이다. 사회적 폭력에 감응하여 인간 내면의 폭력성이 깨어난다. 영혜는 떠오르는 폭력성에 대해 저항한다. 영혜에게 그 저항의 힘을 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영적 타자의 말이 아닐까? 그 말이 채식으로, 그리고 주술적인 차원으로 최종적으로 죽음으로 그녀를 불러낸다. 그 앞에서 영혜는 단호하고 담담하다. 그녀는 어떤 굴복도 없이 어떤 주저도 없이 영적 타자의 부름에 충실하다.

그런데 인혜는 자살 직전에 멈춘다. 그녀를 멈추게 한 힘은 무엇일까? 아마 이 소설의 백미라면 바로 여기서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빈 욕조에 웅크려 누워 눈을 감으면 캄캄한 숲이 덮쳐온다. 검은 빗발이 영혜의 몸에 창처럼 꽂히고 깡마른 맨발이 진흙에 덮인다. 그 모습을 지우려고 고개를 흔들면, 어째서인지 한낮의 여름 나무들이 마치 초록빛의 커다란 불꽃처럼 그녀의 눈앞에 어른거린다.”

………….

“그 새벽 좁다란 산길의 끝에서 그녀가 보았던, 박명 속에서 일제히 푸른 불길처럼 일어서던 나무들은 또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그것은 결코 따뜻한 말이 아니었다. 위안을 주며 그녀를 일으키는 말도 아니었다. 오히려 무자비한, 무서울 만큼 서늘한 생명의 말이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받아줄 나무를 찾아낼 수 없었다. 어떤 나무도 그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마치 살아있는 거대한 짐승들처럼, 완강하고 삼엄하게 온 몸을 버티고 서 있을 뿐이었다.”

인혜가 들은 말은 생명의 말이다. 생명이 곧 영혜를 불렀던 그 영적 타자가 아닐까? 그 생명은 인혜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작가는 그것이 무자비한 말이라 했다. 왜 무자비한 것일까? 그 설명은 바로 다음에 나온다. 나무는 “초록빛의 커다란 불꽃”이라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 인혜에게 자신의 말을 눈에 보여준다. 그 말은 “완강하고 삼엄하게 온 몸을 버티고 서 있으라!”는 무자비한 말이다.

죽음을 통해 나무가 되려는 영혜, 그에 반해서 나무처럼 살아가려는 인혜, 이렇게 해서 죽음의 길과 삶의 길은 나누어졌다. 하지만 두 길은 서로 통한다. 이 길 가운데서 영혜가 죽음으로 들어가면서 인혜가 삶 속으로 걸어 나온다.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영혜에게는 책임질 아이가 없지만, 인혜에게는 책임질 아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 순간 그녀는 숨죽여 의문 했다. 꿈일 뿐, 우연의 일치뿐일까. 박명 속에서 일어서는 뒷산의 나무들에서, 바랜 보라색 티셔츠 차림이 그녀가 뒷걸음질 쳐 내려왔던 그 아침이었다.”

인혜는 아이의 꿈속에서 하얀 새가 날아가던 때 바로 그때 자신이 죽음 향해 걸어갔던 것을 기억한다. 아마 아이의 눈물이 그녀를 되돌아서게 했을 것이다.

“그녀는 입술을 악문다. 불현듯 그날 새벽 걸어 내려오던 산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샌들을 적신 이슬이 맨발에 차갑게 스몄었다.”

맨발을 적신 이슬, 그게 아이의 눈물일 것이다. 아이와 엄마 사이의 이 신비한 교감은 인혜를 삶으로 불러들인 바로 그 힘, 생명의 힘이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12-논리학 서론의 이해(후반부)[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12-논리학 서론의 이해(2: 논리학의 개혁)

1)

앞에서 소개했듯이 논리학 서론의 앞부분은 형식논리학을 비판하고, 형이상학에서 칸트가 이룬 혁명을 소개한다. 헤겔이 칸트에서 주목했던 것은 판단형식 즉 범주가 그 자체에서 고유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칸트는 선험철학의 혁명으로 나갔으나, 헤겔은 칸트의 선험철학이 판단형식을 좌표축으로 보는 주관적 태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앞에서 이 지점이 헤겔이 칸트와 갈라지는 지점이라고 설명했다. 헤겔은 이런 비판으로부터 판단형식이 지닌 고유한 의미 즉 내용이 자기 운동한다는 주장으로 나갔다.

이제 서론의 뒷부분을 살펴볼 차례다. 헤겔은 처음 논리학의 문제로 되돌아와서 아직 논리학의 영역에서는 여전히 구태의연한 형식논리학의 입장이 지배하고 있으니, 지금 논리학은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형식논리학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차라리 전혀 없을 수는 없다”(S. 36)라는 감정이나 “논리학이 중요하다고 보는 여전히 지속된 관습”(S. 36) 때문일 뿐이다.

그 때문에 그이 시대 다양한 논리학 개혁 작업이 출현했는데, 헤겔은 그런 개혁 작업으로 두 가지를 거론한다. 한편에서 논리학에 대한 심리적 교육학적 생리학적 연구 즉 “극히 천박하고 사소한”(S. 36) 연구가 있다. 그것은 먹고살기 위해 “아주 간단하고 무미건조했을 내용을 어떻게 해서든 확장하려는 문필가나 교사가”(S. 36) 빠진 길이다.

다른 한편에는 형식논리학에서의 수학적 연구이다. 이는 논리적 조작을 좀 더 정교하고 다양하게 발전시키는 것이 있었다. 헤겔은 이를 ‘길이가 다른 막대를 추려내는’ 작업이나 ‘그림 조각을 서로 맞추는’ 유희와 다른 바 없다고 한다(S. 36). 이는 “몰개념적 양의 외면적 진행에 불과한 것을 개념이 전개되는 과정으로 삼는” 것일 뿐이다.(S. 37)

전자나 후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쉽게 짐작된다. 전자는 훗셀이 논리연구에서 비판했던 19세기 말 심리주의를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후자는 20세기 초반 프레게, 러셀 등을 통해 발전된 함수 논리학과 논리학의 수학화를 생각해 보면 되지 않을까 한다.

이런 입장은 어느 것이든 논리학은 단순한 형식적 학문이며 그 내용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전제 위에서 전개되는 것이다. 어느 입장에서나 논리적 형식은 “고정된 규정을 이루면서 서로 분리되어 존재하며 유기적인 통일체로 통합되지 못한다고 본다”(S. 32)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헤겔로 볼 때 이런 입장은 논리적 형식을 “죽어 있는 형식”(S. 32)다루는 것에 불과하다.

2)

헤겔은 이상과 같은 논리학의 개혁을 비판한 끝에 이제 논리학의 근본적 개혁이라는 과제에 직면했다고 한다. 그것은 논리학이 지닌 “형이상학적 의미를 고려하는”(S. 31). 즉 논리적 전개란 단순히 심리적 작용도 아니고, 수학적 원리로 환원되는 것도 아니며, 존재자가 일반적으로 지닌 운동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헤겔은 ‘논리학의 형이상학화’(또는 ‘형이상학의 논리학화’)를 칸트가 시작했다고 한다.(S. 35)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언어의 범주는 존재자에 대한 경험을 일반화한 것이라고 보았다. 반면, 칸트는 판단형식이라는 범주로부터 존재자를 선험적으로 구성하려 했다. 여기서도 범주는 결국 존재자의 일반적 규정으로 된다. 그러므로 칸트는 판단형식을 다루는 논리학이 존재론적 의미를 지닌다고 본 것이다.

①이런 형이상학적 논리학의 출발점은 바로 ‘의식과 대상’, ‘사상과 사태’, ‘형식과 질료’의 합일이라는 학문의 개념 즉 절대지이다. 우리는 이런 개념이 칸트의 생각을 헤겔이 발전시킨 것임을 앞에서 언급했다.

그런데 헤겔은 이런 입장은 칸트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의식의 기나긴 역사적 발전 끝에 마침내 도달한 결과라고 말한다. 헤겔은 의식의 이런 발전 과정을 정신현상학에서 서술했으므로 정신현상학을 통해 학문 그 가운데서도 형식적인 학문인 논리학의 출발점이 마련되었다고 말한다.

“정신현상학은 순수한 학문의 개념을 연역하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이 아닌 한, 지금 이 논의는 순수한 학문의 개념과 그것을 연역하는 과정을 전제로 한다.”(S. 33) “따라서 순수학문은 의식의 대립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S. 33)

② 이 절대지, 순수학문이라는 개념으로부터 헤겔 논리학의 기본적 특징이 드러나게 된다. 절대지는 단순한 합일에 머무르지 않고, 자기를 정립하고 다시 이로부터 자기 내로 반성하는 개념적 운동을 전개한다. 이 절대지의 운동은 곧 판단형식의 자기 운동을 의미한다. 판단형식이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는 주장은 이미 칸트가 제시한 것이지만, 이 판단형식이 자기 운동한다는 것은 헤겔의 고유한 입장이 된다.

③ 헤겔은 이런 판단의 자기 운동을 정초하기 위해 반성 개념을 끌어들였다. 이 반성 개념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곧 ‘특정한 부정성’ 개념이라는 사실은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가 있다.

“결과를 끌어내는 것 즉 부정은 특정한 부정이니, 이 부정으로부터 나온 결과는 어떤 내용을 획득한다.”(S. 38)

④ 이런 특정한 부정성 개념을 통해 판단형식의 운동은 하나의 체계를 형성한다. 이 체계는 누적적으로 전개되니, 헤겔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정으로 나온 결과는 이전의 개념을 내포하면서도 또한 그보다도 더 많은 것을 내포하며, 그 이전의 개념과 그것에 대립하는 것의 통일이 된다.”(S. 38)

4)

헤겔은 이런 판단형식의 자기 운동으로서 논리학에 대해 변증법이라는 이름을 붙이고자 한다.

“대상을 계속 앞으로 움직여 가는 것은 대상이 그 자체에서 가지고 있는 변증법 즉 자기 내적 내용이기 때문이다.”(S. 38)

헤겔은 변증법이 지금까지 논리학에서 고립적인 부분으로 간주되면서, 그 목적이나 입장에 있어서 전적으로 오해되어 왔다고 한다. 헤겔은 구체적으로 플라톤과 칸트의 변증법 개념을 비판한다. 플라톤에서 변증법은 모순을 통해 가설을 해소하며 “무를 결과로 갖는 것”이다. 여기서 변증법은 “외면적이고 부정적인 활동”으로 간주되었으며(S. 40) 따라서 그것은 “사태 자체에 속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다만 주관성의 광기에서 나온 공허한 오만에 이끌린 것”(S. 40)이라고 비판한다.

이어서 헤겔은 칸트의 변증법을 비판한다. 칸트는 변증법을 플라톤과 같이 주관의 자의적인 부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규정을 물 자체에 적용하면서 생기는 것 즉 “이성의 필연적 활동으로” 규정했다는 점에서 변증법을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헤겔이 보기에 칸트는 이런 변증법을 통해 물 자체의 인식을 포기한다는 점에서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무를 결과로 했을 뿐이다. 칸트는 이런 변증법이 오히려 긍정적인 결과를 자아내면서 “사유 규정의 자기 운동을 일으키는 혼이라는 것”을 그리고 “모든 자연적 내지 정신적 생명의 일반 원리”(S. 40)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5)

헤겔은 변증법을 사유의 자기 운동으로 파악하면서 여기에는 ‘사변적인 것’이 들어있다고 한다. 그런데 헤겔이 사변적인 것을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지가 문제다. 보통 사변적인 것이라면 가설추리 또는 유추를 말한다. 이 가설추리는 잘못된 가정에 기초하거나, 추리가 비형식적이어서 자주 혼란에 빠지기에 요즈음 거의 궤변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헤겔 당시에서 사변적인 것은 그런 뉘앙스를 지니는데, 그래도 헤겔은 자기의 논리학, 변증법을 사변적인 것이라 규정한 것이라면, 사변적인 것의 의미가 상당히 다르지 않을까 생각된다. 실제 헤겔은 사변적인 것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여기서 받아들여지는 변증법적인 것 속에 다시 말하면 대립물의 통일 속에 혹은 긍정적인 것을 부정적인 것 속에서 파악한다는 것 속에 사변적인 것이 깃들여 있다.”(S. 40-41)

‘대립물의 통일’ 즉 모순은 기본적으로 변증법적인 개념이라 말해진다. 반면 ‘긍정적인 것을 부정적인 것 속에서 파악한다는 것’은 앞에서 “부정적인 것에서 나온 결과 긍정적인 것이 된다”는 말과 유사하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이것은 반성 개념과 그것의 토대인 ‘특정한 부정’ 개념을 설명할 때 제시된 것이다. 이 후자는 플라톤이나 칸트의 변증법 개념 자체에는 원래 없었던 것이다. 헤겔은 모순을 이처럼 반성 개념을 통해 파악하면서 이를 사변적인 것으로 규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앞에서 특정한 부정 개념 때문에 즉 사변적인 사유 때문에 논리학의 체계가 형성되며, 이 체계는 단순한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발전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사변적인 사유는 개별자로부터 추상하여 일반자에 이르는 추상적 사유와 대립하는 것이다. 이 사변적인 사유는 이 운동을 전도하여 일반자가 개별자를 통해 자기를 실현하는 것 즉 “개념에 준해서 인식하는 길”(S. 41)로 파악한다.

이는 단순히 목적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표면적으로는 개별자의 대립과 모순이 있으며 이런 대립과 모순을 통해 내면적인 일반적인 것이 자기를 실현하니, 헤겔이 자주 이성의 간지라고 규정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6)

이상에서 헤겔은 그의 논리학이 지향하는 일반적 특성을 소개한 뒤 마지막으로 논리학을 연구하는 의미를 덧붙인다. 헤겔은 일르 언어를 배우는 과정에 비유한다. 언어를 처음으로 배우는 사람은 서로 고립된 다수의 규정과 그 각각이 지닌 직접적인 의미만을 발견한다. 그러나 언어에 능통하게 되면 다른 언어를 이 언어와 비교하면서, “자기의 언어가 갖는 문법 속에서 민족의 정신가 문화를 느낄 수 있다.”(S. 41)

이와 마찬가지로 헤겔은 논리학을 처음 배우는 사람은 현실과 유리된 논리적 법칙만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이를 다른 지식이나 학문으로까지 적용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논리학은 풍요로운 내용을 결여한 “아무 색깔도 없고 차가운 단순성을 지닐 뿐인 순수한 규정”(S. 42)으로만 나타난다.

하지만 여러 학문에 대한 좀 더 깊은 지식을 획득한 다음에 보면, 논리학은 “한낱 추상적 일반성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특수적인 것을 풍요하게 포함하는 일반성”(S. 42)이 된다. 마치 청년이 격언을 문자대로 아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인생 경험이 풍부한 노인은 격언 속에 담긴 함축적 의미를 이해하고 “그 속에 담겨 있는 내용이 발휘하는 전체적 힘을 표현하는”(S. 42) 것과 같다고 하겠다.

헤겔에 따르면 “개념을 통해 전진해나가는 것에 친숙하게 되면서”(S. 43) 이제는 의식하지 않더라도, “그런 지식이나 학문을 본질적 측면에서 포착하고 고수하면서 [불필요한] 외면적인 것을 벗겨내고 이런 방식으로 다양한 지식과 학문으로부터 논리적인 것을 끌어내는 힘”(S. 43)을 얻는다.

이렇게 헤겔은 서론을 끝맺으며, 다음으로 논리학의 구분이라는 중차대한 문제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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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형이상학 산책11-논리학 서론의 이해(전반부)[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11-논리학 서론의 이해(1)

1)

앞에서 설명한 것을 통해 헤겔 논리학 이해를 위한 기본 발판이 마련되었다고 본다. 이런 발판에 기초하여 지금부터 논리학의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오늘부터 우리가 읽을 부분은 2판의 서론[Einleitung]에 해당하는 부분 즉 ‘논리학의 일반 개념’이다. 1판 서론은 그냥 ‘서론’으로 되어 있지만, 약간의 언어 표현상 차이나 부분적 첨삭을 제외하고는 내용은 같다.

헤겔은 서론에 들어가자마자 우선 학문의 방법이나 개념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다른 학문과 달리 논리학은 자기의 개념이나 방법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끌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보통 서론에서 말하는 개념이나 방법은 논리학의 경우에는 논리학이 실제로 전개된 다음에야 얻는 것이니, 지금 서론에서 해명하는 것은 “설왕설래하는 역사적인 의미”(S. 27) 정도에 그친다고 하면서 양해를 구한다.

(앞으로 인용문은 헤겔, 논리학, 재판본, GW 21, 펠릭스 마이너, 1985에 의거하겠다)

2)

그러면서 헤겔은 형식논리학의 문제점부터 제기한다. 형식논리학에서 판단의 형식과 내용은 서로 무관하며, 그 내용은 대상으로부터 주어지며, 논리학은 다만 “독자적으로 보면 공허한”(S. 28) 사유의 형식을 다룰 뿐이라 한다.

그러므로 양자의 관계는 “역학적이거나 기껏해야 화학적인 방식으로 결합되어”(S. 28) 있어서는 “사유는 소재를 수용하고 이를 형상화한다 할지라도 결코 자기를 넘어서지 않으며” 사유는 “자기를 저버리고 대상에게로 다가서는 일은 없다.” 그러니 “대상은 오직 물 자체로서 단적으로 말해 사유의 피안에 놓인 것으로 머무른다.”(S. 29)

논리학의 형식은 각기 고립되어 있어서 “고정된 규정을 이루면서, 서로 분리되어 존재하며 유기적 통일체를 이루지 못한다”라고 한다. 헤겔은 이런 형식을 “죽은 형식”이라 하니, “그 속에는 생동적인 구체적 통일성을 의미하는 정신이 거주하지 못한다고”(S. 32) 비판한다.

즉 형식논리학은 죽은 자연이나 파악할 때 사용되지만, 자연조차 죽은 것은 아니니 그조차 파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생동적 통일성을 전개하는 정신에 관해서야 전혀 무의미한 형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식논리학은 진리의 인식과 무관하니 논리학은 “실재하는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고 하거나, 심지어 “사유의 규칙을 가르친다”(S. 28)라고 말하는 것조차 어불성설이라고 한다. 공허한 형식적 규칙을 배워 무엇하겠느냐는 말투다.

형식논리학의 토대는 의식과 대상을 분리면서 대상을 진리의 소재로 파악하는 흔히 일상적 의식 또는 현상적 의식에 있다. 헤겔은 이런 일상적 의식은 항상 진리를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S. 34)으로 보는데, 이런 입장은 심지어 플라톤의 이데아에도 남아 있어 플라톤은 이데아를 직관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고 한다. 다만 그것은 감각 세계의 피안에 있는 것이기에 이데아는 ‘감성적 탈자존재’일 뿐이다.

3)

헤겔은 의식과 대상을 구분하는 이런 입장보다는 차라리 지난날의 형이상학이 더 탁월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지난날의 형이상학은 적어도 “사물을 결코 그 직접태 속에서가 아니라 사유의 형식으로 고양되었을 때만 비로소 진리일 수 있다고”(S. 29) 믿기 때문이다. 이는 아마도 언어의 범주가 사물의 본질이 된다고 믿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언어의 범주를 마치 대상으로부터 주어져서 추상된 일반적 개념으로 파악한다. 즉 언어의 범주가 “대상의 가장 본질적이며 가장 고유한 본성을 구성하는 것”(S. 34)이라 한다.

‘근대의 반성적 사유’(여기서는 헤겔 이전의 의미에서)는 “추상하고 분리하며 그런 분리에 체류하는 지성”(S. 29)을 말하는데, 이런 추상적 사유는 지난날의 형이상학을 비판하면서 출현했다. 여기서 사유의 범주는 이제 주관적인 것으로 되고, 이는 사물과는 무관한 외면적인 것, 낯선 것으로 되고 말았다. 헤겔은 근대의 반성적 사유가 이성에 반함에도 불구하고 건전한 상식으로 행동하면서 결과적으로는 형식논리학의 기본입장이 되었다고 말한다.

헤겔은 의식과 대상을 분리하고 대상을 진리로 보는 “오류를 정신적 우주나 자연적 우주를 망라한 전 영역에 걸쳐서 철저하게 반박하는 것”(S. 29)이야 말로 철학이 할 일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런 오류를 제거하는 것은 철학(논리학을 포함한 전체 철학)으로 들어가기 전에 미리 이루어야 한다고 하면서 논리학에 앞선 정신현상학의 역할을 제시한다.

4)

그런데도 헤겔은 지난날의 형이상학에서 추상적 사유로의 이행은 불가결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런 추상적 사유야말로 새로운 단계로의 이행을 위한 통과 과정이기 때문이다. 즉 “진정한 이성 개념에 다다르기 위한 위대한 부정의 발걸음”(S. 30)이라는 것이다.

추상적 사유는 분리하는 가운데 서로 모순된 주장(경험론과 관념론의 대립)에 이르게 되며, “이 모순이야말로 이성을 지성의 제한 너머로 고양하며, 그 제한을 해소하게 하는 것”(S. 30)이라는 사실이 마침내 통찰되었으니, 그것이 칸트 철학이 이룬 업적이다.

칸트가 놓았던 그 단초란 무엇인가? 앞에서 우리가 이미 말했지만, 그것은 곧 판단형식 즉 범주에 고유한 자체적 의미가 있다고 보았던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판단형식의 자체적 의미를 칸트는 범주의 도식을 통해 제시했다. 칸트는 이런 판단형식 즉 범주를 통해 대상을 구성한다는 선험적 인식론에 도달했다.

그런데 칸트는 여기서 멈추었기에, 헤겔은 칸트 철학의 공로를 인정하면서도 그 한계를 지적한다.

“비판철학은 이성이 자기자신으로부터 자신의 규정을 서술하게 하는 단초를 마련하게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결국은 이러한 시도에 깃든 주관적 태도가 그런 단초를 완성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S. 31)

이 구절에서 헤겔이 주관적 태도라고 비판한 측면이 칸트의 어떤 측면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그가 범주를 하나의 좌표축으로 이용한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범주를 좌표축으로 보면, 주관적인 좌표축은 불가피하게 물 자체에 부딪히게 된다.

5)

헤겔은 칸트가 비록 물 자체의 문제를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현상에 관한 보편적 지식에 도달했다는 주장을 비판한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않는 인식이 진정하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S. 30)는 것이다. 우리는 더 나아가서 칸트에서 좌표축을 이용한 인식은 심지어 현상계에 대한 인식조차도 불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앞에서 지적했다. 경험을 판단형식으로 구성하기 위해서는 경험을 직관적으로 통찰하던가 아니면, 영원히 미루어질 수밖에 없다.

이 말과 연관하여 헤겔이 다음과 같이 말한 점은 의미심장하다. “유한과 무한의 규정이 세계 표상에 동시에 적용될 경우 우리의 세계 표상이 해소되어 버린다면, 정신 자체도 두 규정을 자체 내에 포함하는 경우 자기 모순적인 것이며 또 자기 해소되는 것으로 된다.”(S. 31)

그의 말은 비단 물 자체에 대해서만 모순이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일상적 경험에서도 모순이 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6)

이상과 같이 헤겔은 칸트의 업적과 그 한계를 지적한 다음, 마침내 칸트가 제시한 단초를 발전시킴으로써 마침내 물 자체의 유령을 극복하려 한다. 우선 S. 31에서 S. 35에 걸쳐 전개된 그의 주장을 들어 보자.

“이성이 자신으로부터 자기의 규정을 서술한다.”(S. 31) 그것은 사유의 형식을 “그 자체에서 연역하는 것”이며, “변증법적으로 고찰하는 것”(S. 31)이다.

사유의 형식은 질료라고 불리는 것을 “어디 먼 곳에서 찾을 필요가 없이” 자기 자신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이런 형식은 “실질적이고도 절대적 구체적 통일을 이루고 있다.” (S. 32)

“순수학문은 오직 사상이 못지않게 그 자체에서 사태인 한에서만 사상을 포함하거나 사태가 못지않게 순수 사상인 한에 있어서만 그 자체에서 사태를 내포한다. 학문에서 본다면 진리는 순수하게 자기를 전개하는 자기의식이다”(S. 33)

“사유의 필연적 형식과 고유한 규정이 내용이면서 최고의 진리 자체이다”(S. 34)

“이들이 자기의식적 사유의 단순한 형식일 뿐만 아니라 대상의 지성에 속하는 형식이기도 하다.”(S. 35)

위에서 제시된 헤겔의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①사유의 형식은 그 자체에서 구체적 내용을 지니고 있으며, ②이 사유 형식은 자기 운동을 전개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③사상과 사태가 일치하게 된다.

①과 관련해, 우리는 칸트가 판단형식 즉 범주의 의미를 도식을 통해 규정했다는 것을 말했다. 이 도식은 판단형식이 그 자체로 지니는 의미이며, 판단형식을 통해 규정되는 경험의 내용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②과 관련해 우리는 헤겔에서 하나의 판단형식이 모순의 경험과 반성 개념을 통해 새로운 판단형식으로 이행한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③은 앞의 ①과 ②에서 자동적으로 도출되는 결론이다.

헤겔은, 사유의 자기 운동 개념을 통해 헤겔은 칸트가 부딪혔던 “물 자체의 유령” 또는 “그 어떤 내용으로부터도 절연된 추상적 환영의 허망함”(S. 31)을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헤겔은 자신이 칸트의 철학을 계승해서 그 단초를 발전시키려 한다는 의미에서 자신의 철학을 ‘선험적 관념론’이라고 규정한다.

7)

논리학의 이상 기본 개념은 그저 전제된 것이 아니라, 논리학에 앞서서 인식론을 전개한 정신현상학을 통해서 입증된 결과이다. 정신현상학은 대상과 대립하는 의식에서 출발하여 마침내 절대지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의식과 대상, 확신과 진리 사이의 분리가 제거됨으로써 의식과 대상이 합치하며, 확신은 진리가 된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사유 형식 자체가 곧 구체적 내용과 일치한다는 의미이다.

이 절대지가 학문 즉 그 가운데서도 형식적 학문인 논리학의 출발점인데, 우리는 칸트의 판단형식이 지닌 고유한 의미 즉 도식을 통해 주어지는 의미를 통하여 이미 설명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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