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5회|5. 인문학 수업 (3)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15회

5. 인문학 수업 (3)

이제 나에게 남은 학기는 마지막 한 학기다. 하지만 졸업하기 위해서는 2학년 때 F를 받은 형법 총론 수업을 재수강해야 했다. 마음은 이미 콩밭에 가 있는 내가 그 수업을 듣는 것은 상당한 고역이었다. 당시 형법 강의는 독일에서 학위를 받고 K 대에 있다가 Y 대로 옮긴 L 교수였다. 그는 학생들에게 관심을 많이 갖고 강의도 열심히 한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방학 때는 독일어 특강을 하기도 했다. 아무튼 제대로 강의실에 들어가지도 않은 상태에서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보는 것은 남들이 이해하지 못할 만큼 나에게는 힘든 문제였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필이 꽂히면 만사를 제쳐 놓고 깊이 빠지지만, 관심이 떠나면 거의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도 중간고사는 우여곡절 끝에 보았다. 그런데 마지막 기말고사는 시험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광복관을 향해 올라가는 도중에 고시 공부하던 후배를 만났다. 그래서 그에게 대리 시험을 부탁했다. 나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그가 대신 시험장에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사고가 터졌다. 그날 밤 후배에게서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형, 큰일 났어요.” 전화기 너머로 들여오는 후배 목소리가 많이 떨리고 있었다. 

“왜 그러는데? 무슨 일이야?”

“오늘 형법 총론 시험을 대신 보다가 감독관한테 걸렸어요.”

“아니, 그게 어떻게 걸리냐?” 내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감독관으로 들어온 사람이 제가 기숙사에서 잘 아는 대학원 선배예요. 이 선배가 왜 공부 잘하는 내가 형법총론 수업을 듣느냐고 물었던 거예요. 내가 답변을 제대로 하지 못하자 이 선배가 중간고사 답안지와 필체 대조를 한 거예요. 꼼짝없이 걸린 거지요.”

다른 강의도 아니고 형법 수업을 들으면서 대리 시험을 보게 했으니 완전히 빼도 박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

“일단 L 교수님 연구실로 오라고 했어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모교 선배였던 또 다른 L 교수가 부정 사실을 알고서 당장 교수회의를 열자고 설쳤다. 하지만 과목 담당인 L 교수가 일단 당사자 이야기를 들어보자고 했다고 한다.

다음 날 부리나케 후배와 함께 L 교수 방으로 찾아갔다. 어떻게 변명을 할 수도 없는 상태다. 나도 나지만 고시 공부를 열심히 하던 후배는 무슨 잘못인가? 미안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이 교수가 말을 했다.

 

“거두절미하고 두 학생 모두 자신의 잘못된 행태에 대해 반성문을 제출하게.” 딱 그 한마디뿐이었다.

 

졸업 학기를 두고 반성문을 써야 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래도 창피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종의 확신 범의 신념인지 모른다. 나는 그때 나의 상황을 솔직하게 진술했다. 나의 관심은 이미 법학을 떠났다. 나는 앞으로 철학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도저히 어쩔 수 없어 후배를 끌어들여 대리 시험을 보게 했다.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 이런 식으로 장문의 반성문을 썼다. 이런 나의 솔직한 반성문이 주효했는지 L 교수는 더 이상 대리 시험을 문제 삼지 않았다. 만약 또 다른 L 교수처럼 교수 회의를 열었더라면 어쩔 수 없이 최소 정학을 맞았을 것이고, 졸업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일이 있고 나서 훨씬 나중에 L 교수를 교내 화장실에서 한 번 뵌 적이 있다. 그때 L 교수는 “철학 공부 재밌어?”라고 관심을 보였다. 두고 두고 고마운 분이다. 나는 이 일을 경험하면서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지혜로운가를 배운 셈이다. L 교수는 당신이 구제한 학생이 먼 미래에 한국의 철학계에서 빛을 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졸업을 앞두고 대리 시험까지 보게 했지만, 참으로 나의 대학 생활은 험난했다. 1학년 때 당구에 빠져서 성적 불량으로 한 학년 유급하고, 그 이후로도 쌍권총을 수도 없이 찼다. 내가 지금 생각해도 왜 그렇게 무모하게 행동했는지 전혀 이해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나의 행동은 너무나 상식을 벗어나 있었다. 그 당시 ‘경제원론’이 정법대 필수 과목이었는데, 내가 이 과목을 무려 3번이나 F를 받았다. 대학 1학년 1학기 때 정법대 학생 전체가 나중에 총장이 된 J 교수에게 ‘경제원론’ 수업을 들었다. 상대 대형 강의실에서 그 수업을 들었는데 처음에는 인상적인 J 교수의 수업을 열심히 듣긴 했다. 그런데 1교시 수업을 듣기도 힘들고, 그 수업이 끝나자마자 상경대 뒷편에 있는 종합관에서 법학통론 수업을 듣고, 그것이 끝나면 다시 언덕을 한 참 걸어 올라가 엘리베이터도 없는 종합관 5층에서 영어 수업을 들어야 했다. 몸이 불편한 내가 도저히 10분 안에 걸어서 이동하기 힘들어 수업을 자주 빼먹었다. 결국 J 교수에게 F를 받았고, 그다음 해에는 당시 유명한 경제 사학자인 C 교수의 수업을 들었다. 그때만 해도 이분이 그렇게 대단한 교수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 C 교수는 수업 시간에 자신이 쓴 문고판 『한국경제사』를 가지고 리포트를 내주었다. 하지만 나는 이 리포트를 제출하지 않아서 F를 맞았다. 세 번 째는 노동 경제학을 하던 K 교수의 수업을 들었다. 그런데 기말고사를 볼 때 내가 모르고 시험 시간이 끝날 때쯤 시험 장소로 들어간 것이다. 얼마나 시험 보기 싫었으면 시험 시간까지 잊었을까? 그것도 세 번 씩이나 재수강하는 수업을 말이다. 내가 원래 공간에 대한 지각 능력은 떨어져도 시간관념은 철저한 편이다. 그런데 한 시간 늦게 들어갔으니 변명하기도 힘들었다. 김 교수가 자기 연구실로 따라오라고 해서 그 연구실 안의 교수 옆에서 시험을 보았다. 당시 나는 시험공부보다는 컨닝 페이퍼만 잔뜩 준비해갔는데 도저히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교수에게 리포트로 대신하면 안 되겠냐고 물었지만 교수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어, 그래? 그럼 F지. 시험지 두고 그냥 나가게.”

 

변명할 것도 없이 또 F를 받은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한 과목을 세 번씩이나 F를 받을 수 있을까? 내가 경제학을 싫어한 사람도 아닌데 경제원론 한 과목에서 무려 세 번을 F 받았으니 내가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다. 내가 나 자신을 믿을 수가 없을 정도다. 아마도 이런 경우는 전무후무할 것이다. 어쨌든 나는 경제학과의 세 교수한테 한 마디로 돌림 빵을 당한 셈이라 할 수 있는데, 물론 모두가 나의 책임이었다. 운 좋게 졸업 학기 때 경제원론이 선택으로 바뀌는 바람에 간신히 졸업할 수가 있었다. 내가 대학 생활을 이런 상태로 보낸 것은 한편으로 최악의 경우라고 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당시 나에게는 길들여지지 않는 야성이 충만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그리고 어떤 규칙도 내가 원하지 않으면 따르지 않겠다는 고집 말이다. 하지만 이런 성적표를 가지고 내가 법대에서 생존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마냥 힘들었고, 나 자신을 부적응자로 낙인찍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철학과 대학원에 가보니까 나 못지않게 권총을 많이 찬 동기가 있었다. 그는 훨씬 뒤 독일에서 학위를 받은 다음 교수 임용 면접 시험에서 권총이 너무 많아 불가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가 칸트 철학자로 유명한 김봉한이다. 타과에서는 흠집이 되는 것이 철학과에서는 인정될 수 있는 낭만적 시대였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신간안내] 최종덕 저, 『한의학의 자연철학』(2025) 무료 자유배포 전자책(PDF) 안내 [한철연 소식]

최종덕 회원의 신간을 소개합니다.

2025년 1월 발간한 『한의학의 자연철학』입니다.

자유배포 가능한 전자책(PDF)입니다.

전자책을 첨부하오니 아래 링크를 눌러 다운로드 받아서 보시길 바랍니다.

최종덕2025한의학의 자연철학-자유배포판

아래 주소에서도 다운로드 받을 수 있습니다.
최종덕의 연구아카이브(홈페이지) https://philonatu.com

<목차>감사의 글 —– 2발문(추천서문) —– 10
발문1: 박석준(한의학), 나는 왜 과학과 철학을 공부하는가
발문2: 구태환(철학), 탈근대 시선으로 읽는 한의학
발문3: 이정수(철학), 몸(정기신)과 함께 펼치는 자연스러운 철학적 사유
발문4: 전방욱(생물학), 생태학적 의학을 바라며
발문5: 오재근(한의학), 철학자가 살펴본 한의학 그리고 제언
발문6: 김교빈(철학), 자연철학자의 눈으로 본 한국의 전통의학서문 —– 39

1장 기氣와 도道의 자연철학 —– 45
1. 기, 개념적 사고와 이미지 사고
2. 기의 원류와 자연 해석
3. 과학으로 접근하는 기
4. 존재-인식-행위의 삼각대, 경계없는 유한, 운동과 복잡계
5. 신비주의 위험에 빠진 기
6. 역사 존재로서 기
7. 물질론과 생기론의 얽힘으로 읽는 기
8. 화이트헤드와 신유물론으로 본 기
9. 노이마틱으로서 기
10. 정기신으로 본 기
11. 기에서 도로 포월하는 장자
12. 기에서 덕德을 거쳐 도로
13. 도의 자연지리학
14. 정지된 실체가 아니라 운동하는 동사형으로서 도

2장 관계망과 위상공간의 한의학 —– 90
1 서양의학의 철학적 기초- 실재와 실체
2. 서구과학의 기준과 동아시아 의학의 과학
3. 유기체 실재론으로서 동의학- 열린계의 관계장르
4. 한의학의 소산구조와 경험개념
5. 몸의 연결망과 옴살론 – 얽힘
6. 관계와 위상으로서 한의학 – 비국소적 위상공간
7. 治心의학으로서 한의학

3장 동형성의 자연관, 회절 자연주의 —– 129
1. 소유의 자연
2. 자기운동하는 자연
3. 인간과 자연의 일체 모델, 동형성과 합생
4. 수양론을 향한 합생concrescence
5. 기의 신실재론new realism
6. 자연-사회-인체-심리 동형성 구조
7. 동의보감에 영향을 준 조선의 탈인간 자연관
8. 동의학의 자연주의: 반영 자연주의에서 회절 자연주의로
9. 회절 자연주의 의학의 사례 : 면역학

4장 이제마의 인간의학 —– 168
1. 이제마의 등장과 사상 개념의 탄생
2. 기의 승강원리로 엮은 휴머니즘 의학
3. 수기치인의 생리학
4. 결정론이 아닌 현상학적 지향성으로서 사상의학
5. 존재결정론이 아닌 행위수행론
6. 서로에게 응답하는 사심신물事心身物의 열린 관계

5장 생로병사의 자연철학 —– 200
1. 생로병사의 진화론적 사유구조
2. 진화론적 사유구조로 본 몸 – 체질과 소질
3. 불교에서 말하는 생의 의미
4. 유교와 도가에서 본 몸과 ‘생’
5. 생명과 양생
6. 생물학적 양생과 문화적 양생
7. 제언 : 개인 양생에서 공동체 양생으로

부록 : 자연지리와 삶, 한국 고대 재앙사 분석 —– 225
가뭄, 홍수, 태풍, 특이기상, 황충,
기근, 역질, 지진, 괴현상

참고문헌 —– 252

색인(인명/주제) —– 263

 

♦ 책 속으로~


<저자소개>
저자 최종덕은 물리학과 수학 그리고 철학과 생물학을 공부해오면서, 현대자연철학의 지식을 삶의 수행성으로 변화시키려는 작업을 시도 중인 독립학자이다. 『공백의 실재』, 『생물철학』, 『의학의 철학』, 『비판적 생명철학』, 『이분법을 넘어서』, 『부분의 합은 전체인가』 등 현대자연철학 관련 책을 다수 출간했다. 최종덕의 전문연구와 삶의 글쓰기 자료 모두를 저자의 홈페이지 philonatu.com에서 볼 수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9회|4. 선택과 탐색 (1)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아홉 번째 글

  1. 선택과 탐색 (1)

 

별다른 흔적을 남기지 않고 경험한 지난 한 달은 여러모로 나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유신이 무너진 후 고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결심은 그냥 물 건너 가버렸다. 5.17 이후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자마자 법대 고시원도 폐쇄되었다. 덕분에 법학이나 고시에 대한 미련을 깨끗이 벗어 버렸다. 고시를 하겠다고 하고서 기숙사에 입소했는데, 사회 분위기가 바뀐 탓에 내 마음도 완전히 바뀐 것이다. 2학기에 등록할 때는 법대 과목이 아니라 문과대의 사회학과나 영문과 그리고 사학과에서 과목을 선택했다. 보다 현실적이고 자유로운 학문을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실제로 이런 과목들이 훨씬 흥미로웠고, 시험을 봐도 성적이 훨씬 잘 나왔다. 사실 나의 경제 상황을 고려한다면 가능한 한 빨리 취직해야 하는 데 나는 그런 것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아나키스트의 방랑을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때 마음을 주었던 여성과의 만남도 예전 같지 않았다. 대신 유치장에서 사귄 몇몇 사람들과는 따로 세미나를 계속했다. 이 세미나는 단순히 공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모종의 데모를 시도하기 위한 학습으로 시작했다. 정치 상황은 여전히 살벌했다.

세미나를 하던 멤버 중의 한 명은 S 대 사회학과 4학년이었고, 다른 한 명은 같은 대학의 체육학과 4학년이었다. 졸업 학기를 앞두고 데모하겠다고 하는 것은 보통 결심이 서지 않으면 가능한 일이 아니다. 나는 이미 경험도 있고 해서 다시 시위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리고 여성 한 명도 참석했는데, 그녀는 세미나를 정기적으로 참석하기 보다는 가끔씩 참석해서 함께 술을 마시곤 했다. 세미나는 각자 집을 돌아가면서 했지만 주로 우리 집과 사회학과 신모 군의 집에서 했다. 그 당시 우리는 주로 정세 분석과 향후 정국의 방향에 관한 이론서들을 많이 다루었다. 『전환 시대의 논리』를 쓴 리영희 교수의 책들과 한국 경제를 다룬 최호진 교수의 책, 한국 근대사에 관한 김용섭 교수의 책을 주로 읽었다. 사회 이론에 관해서는 미국의 진보적인 사회학자인 C. Wright Mills의 『사회학적 상상력』과 『파워 엘리트』를 집중적으로 읽었다. 당시 우리들의 지적 관심은 상당해서 그 당시 막 소개가 되기 시작한 독일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Critical Theory)과 헤겔을 전반적으로 소개한 H. 마르쿠제의 『이성과 혁명』(Reason and Revolution) 원서를 열심히 탐독했다. 사회 이론서들은 비교적 이해하기 쉬웠지만 처음 접한 헤겔 철학을 소개한 『이성과 혁명』은 개론서 임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특히 법(Recht)을 Right로 번역해 놓았는데, 왜 이런 개념이 법철학을 다루면서 반복적으로 나오는지 알 수 없어서 애를 먹었다. 아마도 이때 부딪힌 어려움이 나중에 헤겔 철학을 전공하게 된 계기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런 책들이 법대생인 나에게는 생소한 편이었지만 사회학도인 신모 군이 과 내에서 도는 독서 목록과 동향들을 많이 소개해주었다. 체육학과 생인 복기호 군은 추상적인 이론보다는 현실 운동에 보다 관심을 많이 보였다. 그는 실제로 대림동 야학에서 노동자들을 가르치고 시위 현장은 거의 빠짐없이 참석하는 편이었다. 우리들은 서로 간에 관심사와 편차는 있어도 거의 1년 이상을 꾸준히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향후 진로에 대해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세미나가 끝나면 술을 많이 마신 편이었다. 그 당시는 정말로 술과 담배를 억수로 많이 마시면서 급박하게 돌아가는 사회와 대학가의 현실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형, 오늘 인문대 쪽에 삐라가 뿌려졌어요. 시위가 확대되지는 않았지만 요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요.” 복기호군의 말이다. S대생들하고 세미나를 하는 덕분에 S대 동향을 많이 듣는 편이다.

“Y대도 마찬가지야. 요즘은 검색도 더 심해진 것 같아.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요즘 학생들의 분위기는 과거보다 훨씬 격렬해진 것 같아. 아마도 광주의 경험이 영향을 많이 미치는 것 같아.”

“그렇지요. 광주사태는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될 겁니다. 이제는 광주 이전과 광주 이후로 운동사가 나뉘어 질 거에요.” 신모군이 예리하게 당시 정세를 분석한다.

“독재자들은 늘 국민과 국가를 이야기하지만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들의 권력 유지일 뿐이지요. 그들을 권좌에서 쫒아내지 않는 한 국민도 없고 국가도 없을 겁니다.” 라고 말을 하면서 복모군이 오른손을 살짝 들고 ‘투쟁, 투쟁!’을 외치는 흉내를 낸다.

“일단 혁명의 견인차는 젊은 엘리트 혁명가들이 되어야 할 겁니다. 과거의 모든 혁명 운동사를 통해서 볼 때 이것은 변함없는 진리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대학가의 운동을 좀 더 조직화하고 체계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우리가 이런 세미나를 하는 이유도 그 일을 선도적으로 하기 위해서이지요.” 신모 군이 세미나의 목적이 시위 주도에 있음을 다시 상기시킨다.

“하지만 그렇게 소수 엘리트 중심으로 나가다 보면 일반 대중으로부터 고립될 위험도 크다고 뵵니다. 엘리트주의는 철저히 경계할 필요가 있어요. 대중 속에서 대중과 함께 하지 않는 운동은 결코 결정적 시기를 앞 당길 수 없어요.” 늘 체험적으로 시위에 참여하고 있는 복모 군의 말이다.

 

엘리트와 대중의 관계는 우리들에게 늘 고민할 거리를 안겨주었다. 과연 우리는 어디에 몸담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 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7회|3. 광주항쟁 (4)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일곱 번째 글

3. 광주항쟁(4)

 

예나 지금이나 명동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사람들로 붐볐다. 마침 우리의 거사 날짜는 토요일 오후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특히 많았다. 수걸은 시위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토요일로 잡은 것이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왼쪽으로 지하도가 있었고, 바로 앞에는 유명한 빵집이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각자 맡은 분량의 전단지를 뿌렸다. 동시에 우리는 외쳤다.

 

“계엄을 철폐하라, 광주의 진실을 밝혀라. 학살 원흉 전두환은 물러나라!”

 

비상계엄이 여전했고, 곳곳에 무장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현실에서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이런 엄청난 구호를 외친 것이다. 도로 위에 있던 수많은 사람이 깍깍 소리를 지르면서 달아나는 모습이 보였다. 광주 사태 이후 더욱 강화된 계엄상황에서 이런 데모를 벌이는 것 자체를 두렵게 보았을 것이다. 전단을 여기저기 뿌렸다. 뿌렸다기보다는 처음 해보는 일에 당황해서 그냥 뭉터기로 내 던졌는지 모른다. 지하도 안으로도 던졌고, 거리에도 던졌다. 손에 더 이상 전단이 없자 수걸과 나는 주먹을 쥔 오른손을 번쩍 들고 명동 방향으로 구호를 외치면서 걸었다. 사람들이 바다가 갈라지듯 우리 앞길을 열어 주었다. 단 5분도 안 걸린 시간이었을 텐데 그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는 느낌이 들었다. 짧은 시간에 목이 쉬어 버렸다. 그 이후로 내가 여러 차례 경험해봤지만 아주 짧은 시간에 영원과 접속되는 경험을 한 것은 그때가 처음 같았다. 그 사이 누군가가 우리를 신고했다.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더니 경찰 몇 명이 나타났다. 계엄군이 출동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 만약 군인이 출동했다면 그 자리에서 그냥 반죽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바로 수갑찬 채 명동 파출소로 끌려갔다.

파출소에 도착하니 비로소 상황이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파출소의 한 젊은 순경은 우리가 다소 안쓰러운지 담배를 권했다. 담배 한 모금을 빨자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바깥은 우리의 시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토요일 오후 인파들로 덮여 있었다. 우리의 시위는 찻잔 속에 잠시 미풍이 분 것 정도도 안 되었다. 그런 일을 도대체 왜 했을까? 개인적으로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지만 타인이나 사회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동키호테식 행동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실제로 조사받는 과정에서 우리 뒷선을 아무리 캐도 나오지 않자 ‘이거 미친놈들 아냐. 완전 동키호테구먼.”이라는 말도 들었다. 그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우리의 시위는 일종의 자기 확신에 기초한 자기 고백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기 자신과의 약속이고, 자신이 스스로 설정한 채무 이행이었는지 모른다. 훗날 이 사건을 반추하면서 나는 다시 새로운 다짐을 했다. 다시는 이런 동키호테식 자기 고백은 하지 않겠다고.

명동 파출소에서는 별다른 조사 없이 바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중부서로 이첩됐다. 우리가 도착하니 큰 상황판에 방사선 형태의 그림이 그려졌다. 일단 형사 앞으로 가서 심문받고 조서를 써야 했다. 우리가 앉자마자 다짜고짜 한 형사가 뺨을 때린다.

 

“이런 미친놈들, 지금 시국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 이런 폭력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는 당황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이놈들, 무슨 생각을 하고 이런 짓을 벌인 거야? 배후가 누구야?” 다른 형사가 큰 목소리로 추궁했다.

“배후는 없습니다. 우리 둘이 다 결정한 것입니다.” 친구가 대답했다.

 

한참을 캐도 드러난 이상의 것이 나오지 않으니까 그냥 보호실 철창으로 집어넣으라는 말이 들렸다. 바지의 혁띠를 푸르고, 내가 차고 다니던 보조기도 풀어야 했다. 당장 걷는 데 지장이 있지만 할 수 없었다. 그날 밤 우리는 잡범들과 함께 보호실에서 보냈다. 낯선 철창, 평소 범죄자들로 백안시했던 사람들과 한방에서 그날 밤을 보냈다. 긴장이 풀어져서인지 잠은 잘 잤다. 이제 나에게 익숙한 세상은 사라지고, 낯설고 새로운 상황이 다가온 것이다.

거사 당일 밤 수걸과 나의 집으로 형사대들이 급파돼서 증거물이 될 법한 것들을 가지고 왔다. 그날 밤 가족들이 크게 놀랬다고 한다. 아닌 밤중에 형사들이 조사를 위해 왔다고 하니까 가뜩이나 걱정이 많은 어머니가 많이 놀랬다. 수걸의 집을 조사했던 한 형사는 수걸의 집 책장의 수많은 장서들을 보고 놀랬다는 이야기를 했다. 사실 그의 집에는 아버지와 형이 보던 책, 그리고 수걸이 보던 책들이 빼곡히 꼿혀 있었다. 조사하는 과정에서 주범은 지수걸이고, 종범은 나로 확정됐다. 때문에 수걸은 수시로 불려 나갔다. 전단지를 인쇄한 곳이 어디냐는 추궁을 받았지만 그는 잘 둘러쳤다. 적어도 그를 믿고 일을 해준 사람들이 곤욕 치르지 않도록 처리했다. 그의 일처리는 생각보다 꼼꼼했다. 그가 한참 후에 한국형 레스트랑을 창업해서 크게 성공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의 일솜씨가 바탕이 됐을 것이다.

처음 시작한 경찰서 보호실 생활을 하면서 여러 사람을 만났다. 때가 때인 지라 정치범들이 여럿 잡혀 있었다. 이곳에는 이미 김대중 산하 청년 조직인 연청 관련 인사가 들어와 있었고, 근처 동국대의 핵심 간부들과 선후배들도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김대중 씨 연설한 것들을 녹음해서 배포한 음반 업자도 있었고, 사회주의에 발을 들여놓은 지사형 정치인도 있었다. 그리고 이 보호실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들어온 사람들 외에도 일반 잡범들도 많았다. 계엄 상황에서 나중에 삼청교육대로 보내진 수많은 잡범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정치범에 대한 예우 때문인지 우리는 비교적 좋은 자리에 있었지만, 더운 여름날 에어컨이나 선풍기가 없는 상태로 칼 잠을 자는건 참으로 고역이었다. 나중에 본격적으로 철학을 공부할 때 알게 된 “타인은 지옥이다.”는 사르트르의 말을 몸으로 체감했다.

내가 광주 학살에 관해 이야기를 들은 곳은 바로 경찰서 보호실 안에 들어와 있던 한 잡범을 통해서였다. 보호실 안은 끊임없이 소란스럽고, 온갖 소리들이 난무했다. 특히 밤에는 입담 좋은 친구들 주변으로 삼삼오오 몰려서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담당 경찰관도 특별한 경우 아니면 그냥 묵인했다. 하루는 20대 중반의 한 청년이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그는 광주에서 아주 끔찍한 경험을 했다고 했고, 자신은 사선을 넘다시피 해서 그곳을 탈출했다고 했다. 그가 그날 밤 구구절절이 광주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을 때 다들 할 말을 잊은 듯 침묵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너무나 충격적이고 리얼했기 때문이다. 그가 남도 사투리로 떨리는 듯 말했다.

 

“정말 이제 못 보겠습디다. 공수 부대 안 있소? 완전히 무장해 갔고 대학생으로 보이면 무조건 곤봉으로 머리빡부터 뚜드려 패버리는 거예요. 그러먼 그 자리에서 자빠져불죠. 그렁께 여기저기 사람들이 막 쓰러져 있는 거예요. 일어설 수 있는 사람들은 무조건 옷부터 배께 갖고 팬티만 남기고 도로에 무릎 꿀레서 일렬로 안치고,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개머리판으로 사정 없이 패 부었어요. 길 가던 시민들은 놀래갖고 ‘오매 저러다 사람 죽이겄다’고 하면서도 군인들이 워낙 살기가 등등하니까 어쩌지도 못하고라. 최루탄을 쏴나서 눈도 못 뜨고 숨도 못 쉬고요. 멀리서 보고 오다가 도망가는 젊은이가 있으면 끝까지 쫒차가서 같은 방식으로 패버리는 거예요. 나는 너무 무서워서 밖에 나갈 엄두를 못 냈어요.”

 

그날 밤 이런 끔찍한 이야기가 그의 입에서 나올 때 일반 잡범들도 조용히 침묵했다. 어떤 이들은 눈물마저 글썽거렸다. 도저히 국민의 군대라고 할 수 없다고 분노하는 이도 있었다.

 

조용히 듣기만 하던 동국대 운동권 출신의 한 사람이 질문했다.

“직접 당신이 확인한 건가요?”

“그러문 요오. 신문에 안 나니까 모르시는 거예요. 그러다가 3일째 되는 날 집으로 들이닥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께 무서워서 못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화순 쪽으로 빠져서 어떻게 기차를 겨우 타고 서울로 도망을 온 거예요. 물론 오면서 양심의 가책도 들었어요. 내가 아는 친구들도 저렇게 무자비허게 당하고 있을 텐디 나만 도망을 가는구나 하고요.”

 

그가 광주의 현장에서 도망간 것에 대해 누구도 비난할 수 없었다. 목숨을 보전한다는 것은 모든 생명체의 1차적인 보호 본능이기 때문이다. 이날 이후로 한반도의 남녁은 깊은 침묵의 세월로 접어들었다. 과연 하늘에 신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주여! 당신은 어디로 가시나이까?(쿠오바디스 도미네)

그날 그에게 끔찍한 광주의 학살 현장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솔직히 분노 이상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도대체 이놈들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벌렸는가, 그리고 다음 희생자가 누가 될 것인가, 감방에 있는 우리들에게도 그 여파가 밀려오지 말라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등등으로 밤에 잠을 이루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우려했던 것과 달리 경찰서 유치장에서의 삶은 큰 변화는 없었다. 다만 민생 사범들을 대거 잡아들이면서 보호실의 인구 밀도가 극도로 높아져서 지내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 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회|1. 다시 찾은 길 (1)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그대에게 가는 먼 길> 연재의 변

 

앞으로 10여 차례에 걸쳐 필자가 쓴 <그대에게 가는 먼 길>을 연재하려고 한다. 이 책은 격동의 한국사회를 배경으로 쓴 자전적 소설이다. 이 소설은 2부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부는 197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이고, 2부는 1990년대 후반부부터 2020년대 전반부에 걸쳐 있다. 현재 1부는 완성되어 있고, 2부는 쓰고 있는 중이다.

필자가 이 소설을 쓰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 개인의 사적인 삶을 정리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민주화와 산업화를 겪은 한국사회의 현실을 철학적으로 반성해보려는 것이다. 다들 알고 있듯, 한국의 1970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한국인들은 유신 독재와 광주 항쟁, 민주화 투쟁과 1987년의 민주주의의 쟁취 등으로 점철된 의미 있는 역사적 경험을 겪었다. 동시에 이 시기는 사회과학의 전성시대이자 온갖 이론과 사상이 난무하던 지적 르네상스이기도 했다. 필자는 이 시기를 프랑스의 6.8 혁명 못지 않은 시대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은 6.8 혁명을 겪으면서 자신들의 이론과 사상을 정립해서 세계인들에게 내 보였던 반면, 한국인들은 그런 귀중한 역사적 체험을 그저 그런 과거의 기억으로만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우리가 겪은 이 시대의 체험을 철학적으로 반성하고 의미화하고 싶은 욕구를 소설의 형식을 빌려 구성해본 것이다.

한국철학의 고질적인 문제는 자신들의 체험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철학을 구성하기 보다는 여전히 바깥의 수입 철학에 의존하고 2천년도 넘은 공맹과 노장 사상을 주석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데 있다. 이런 지적 식민성과 사대주의가 한국의 지성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겪은 위대한 경험을 과거로 묻어 버린 채 그저 바깥에서 들어온 새로운 이론과 사상 혹은 오래된 사상에 목을 매달고 있을 뿐이다. <조선사상사>를 쓴 교토대 철학과 교수 오구라 기조의 말에 의하면 한국인들은 외래 사상을 자기 것으로 소화해서 재구성하기 보다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으로 바꿔치기 하는 전면적 개변(改變)에만 의존하는 성향이 강하다. 한 사상이 물밀듯 들어와서 한 시대를 지배하다가 시효가 되어 사라지고 다른 사상이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이 개변의 일반적 형태이다. 과거 불교와 유교가 그랬고, 근대에 들어서는 유교와 맑스주의와 포스트 모더니즘 등이 그랬다. 손바닥 뒤집듯 일어나는 개변의 가장 큰 단점은 사상의 축적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데 있다. 외래 사상만을 끊임없이 찾다 보니까 그런 사상의 축적이 이루어지기 힘들고, 더욱이 자신의 사상을 정립하는 데도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이는 오늘날 한국철학계가 부닥친 커다란 딜레마의 진실이라 할 수 있다. 이제는 이런 생각과 틀을 바꿔야 되지 않을까라는 것이 필자가 이 소설을 쓰게 된 동기다. 무엇보다 자신들의 시대 체험과 생각, 자신들의 언어를 살려서 자신들의 철학을 정립해보자는 것이다.

이 소설은 격동의 한국 사회를 한 개인의 지적 모험을 통해 재구성해보자는 데 있지만, 사실 이런 시도는 잘못하면 죽도 밥도 되지 못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필자의 시도는 철학적 소설을 겨냥했지만 철학도 되지 못하고 소설이라는 면에서도 실패할 수 있다. 최대한 이러한 실패를 피하려고 했지만, 그 판단은 필자의 손을 떠나 읽는 독자들이 내릴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문제 의식에 대한 공유를 통해 우리 철학을 정립하는데 하나의 초석이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작업이라 생각한다.

 

필자 이종철


첫 번째 글.

  1. 다시 찾은 길

 

사위는 아직 컴컴했다. 대학 앞 버스 정류장에서 내린 시각은 5시 45분이다. 개강을 막 시작한 3월 초니까 겨울의 추위가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다. 나는 외투 깃을 약간 올리고 천천히 정문 쪽으로 걸었다. 정류장에서 대학 정문은 엎어지면 코가 닿을 거리다. 희뿌연 등이 정문에 밝혀져 있고, 그 옆 수위실도 불이 밝혀 있다. 내가 타려는 학교 버스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사람들도 별로 눈에 보이지 않았다. 지방의 소도시의 분교로 출퇴근하는 교원들을 실어 나르는 버스는 정확히 6시 5분 전에 도착한다.

  나는 늘 그렇듯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일회용 라이터로 불을 붙인 다음 한 모금 들이켰다. 차가운 새벽 공기를 타고 담배 연기가 목젖을 파고들어 왔다. 순간 아직 잠에서 덜깬 몸처럼 목젖이 따갑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이런 짜릿하면서도 약간은 고통스러운 쾌감 때문에 담배를 끊지 못하나 보다. 버스를 탈 시간이 되어 가자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얼굴이 익숙한 후배 하나가 인사를 건냈지만 다들 낯이 익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 가운데는 원주에 전임으로 자리를 잡고 있으면서 출퇴근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시간강사들이다. 나도 그런 자격으로 오늘 이 버스를 타는 것이다.

  6시 정각이 되자 버스가 출발한다. 버스는 정문에서 신촌 로타리 쪽으로 난 도로를 타고 나가다가 로타리를 돌아 서강대 쪽으로 향한다. 서강대를 지나서 마포대교를 향해 꺽자 마자 우체국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을 태운 다음 바로 강변도로로 진입한다. 이 때 쯤이면 먼동이 트기 시작한다. 어둠이 걷히면서 한강 변 양쪽으로 빌딩들이 뿌연 형체를 드러내고, 강변을 따라 차들이 바쁘게 달리고 있다. 내가 탄 버스도 그 무리에 휩쓸려 들어가고 있다. 거대한 자동차 물결에 휩쓸려 내 몸도 함께 달리고 있다. 버스가 한강 다리를 달릴 즈음에는 이미 해가 떠올라서 강변의 빌딩들이 더욱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아침 햇살은 참으로 신기한 느낌을 줄 때가 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 햇살을 받아서 위용을 드러낼 때는 마치 새로운 존재들이 탄생하는 느낌마저 주었다. 그런 생각들이 일어나자 순간 지금의 내 삶도 어둠을 뚫고서 새로운 공간 속으로 태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어둠 속의 저편과 밝은 햇볕 속에 드러난 이편의 차이는 빛과 어둠의 차이만큼이나 컸다. 지난 10년 동안 나는 어디에 있었나? 지금 나는 다시 어디로 가고 있는가? 왜 나는 남들처럼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만 열심히 파지 않았는가? 왜 나는 끊임없이 방황을 하는가? 방랑은 나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방랑자가 나의 참모습인가?

 내가 한곳에 머물지 못하리라는 운명을 나는 일찍부터 가졌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당시였을 것이다. 그때 사주 관상을 본다고 하던 엄마의 친구가 우리 집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그 아주머니가 내 사주를 보면서 하던 말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큰 별이 두 개가 있어. 그런데 이 아이는 어느 별에도 속하지 않아. 아마도 이 아이 사주는 떠도는 사주일 듯해.”

 

나는 그 당시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그 말은 나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 그 아주머니의 말과 달리 중고등학교 시절 나는 쑥맥에다가 범생이나 다름없었다. 집과 학교, 그리고 기껏해야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나의 삶이었다. 나는 불편한 몸 탓에 친구들과 함께 가는 소풍을 거의 가본 적이 없고, 중학교를 들어갈 때까지 버스를 타본 적도 거의 없었다. 그런 내가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떠도는 방랑자라니, 남들은 물론 나 자신도 그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차 안의 사람들은 대부분 전날 자지 못한 잠을 보충하고 있는 듯 조용했다. 간혹 오전 강의를 준비하는 듯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부스럭거렸다. 차는 이미 중부고속도로를 빠져나와서 영동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해는 벌써 중천에 떠 있고, 창밖의 고속도로 풍경이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가 사라진다. 무료하게 그런 모습을 보다가 이내 나도 첫 교시 수업에 생각이 미쳤다.

첫 교시는 내 전공과 관련된 독일관념론의 칸트 철학이다. 서울에서 강의를 할 때는 대부분 교양강의에 머무는 경우가 많지만 지방 소도시에서 강의하는 이 수업은 전공 강의이다. 교양강의는 강의 준비는 쉬워도 막상 강의를 할 때는 그렇지가 않다. 학생들 전공 분포도 다양하고, 이해 수준도 편차가 크기 때문에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지가 늘 신경이 쓰인다. 반면 전공 강의는 강의를 준비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려도 수업 자체의 집중도가 높고 학생들의 수업 열의도 크기 때문에 강의 자체가 즐거운 경우가 많다. 그만큼 학생들과의 유대도 많다. 강의는 각기 장단점이 있다. 교양 인문 강의를 하다 보면 단순히 글쓰기 강좌에서부터 ‘논증과 비판’ 같은 토론 수업, 문화 현상들에 관한 수업, 환경과 4차 산업 혁명 등 다양한 주제들을 섭렵해서 그야말로 백과사전적 지식을 준비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지식들이 전혀 필요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부분 소모품 형태로 강의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한 학기가 끝나면 그대로 잊히는 경우도 많다.

반면 전공 강의는 심화 학습을 할 수 있고, 논문과 연계시켜 원전 강독을 병행할 수도 있다. 소수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생산적인 토론을 할 수도 있고, 수업의 영향과 효과를 확인할 수가 있어서 좋다. 지난 첫 시간은 오리엔테이션을 겸해서 독일관념론의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 강의했다. 학기 초라 그런지 다들 또랑또랑한 눈망울을 굴리면서 집중력을 높이고 있다.

독일관념론의 전체적인 흐름을 잡기 위해 내가 질문을 먼저 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출간된 해가 언제이지요?” 학생들은 약간 당혹스러운듯 눈동자만 굴린다. 그런데 뒷자리에 앉은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들고 답한다.

“1781년이요.” 바로 맞혔다.

 약간 나이가 들어 보이는 이 학생은 이미 칸트 책을 읽어보고 들어온 것 같았다.

내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헤겔의 『법철학』이 나온 해는요?”

그랬더니 이번에는 다른 학생이 구글을 검색했는지. “1821년이요.”라고 답한다.

“예, 맞습니다. 우리가 보통 ‘독일관념론’이라고 한다면 칸트의 주저인 『순수이성비판』이 출간된 1781년으로부터 헤겔의 『법철학』이 출간된 1821년까지 40년간을 지칭합니다. 한 세대하고 1/3을 약간 넘는 이 짧은 기간 동안 칸트-피히테-셸링-헤겔로 이어지는 독일 관념 철학의 전성기가 전개되었지요. 역사적으로 이렇게 짧은 시간에 기라성 같은 천재 사상가들이 등장한 것은 서양철학의 경우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에 이어지는 시기나 근대에 들어 데카르트 이후의 합리론자들과 경험론자들의 철학이 박진감 있게 전개된 것에 버금할 것이지요.”

“여러분들, 혹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해가 언제인지는 아나요?” 학생들이 철학 수업 시간에 생뚱맞게 연도 알아맞히기 게임하는 것 아닌가라는 표정을 짓고 있다.

이 문제는 비교적 잘 알려진 사건이라 바로 답변이 나온다. “1789년이요.”

“그러면 영국의 산업 혁명이 일어난 해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요?”

이 문제는 다소 애매한지 학생들은 서로 얼굴만 바라본다.

 

이러한 숫자는 강렬한 의미를 줄 수 있고, 상징적 효과도 크다. 기억하기도 좋다.

일반적으로 영국의 산업 혁명은 제임스 와트가 증기 기관을 발명한 1760년을 꼽는 경우가 많다. 이때부터 영국은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해 서구의 다른 어떤 국가들보다 빠르게 자본주의에 진입한다.

대충 여기 나온 숫자들 만으로 17-8세기 당대 유럽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1760년의 영국은 경제 혁명이 시작되는 해이고, 1789년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의 정치 혁명이 시작된 해이다. 1781년과 1821년은 칸트와 헤겔의 대표적인 저작인 『순수이성비판』과 『법철학 강의』가 출간된 해이다. 독일은 이웃 국가들의 정치와 경제와 같은 현실적 혁명을 구경하고 열광했을 뿐 자신들이 이런 혁명을 이룩하지는 못했다. 대신 이 시대 독일에서는 칸트에서 헤겔에 이르는 독일관념론이 완성되고, 괴테와 쉴러와 같은 대문호들이 활약하고, 모짜르트와 베토벤같이 기라성 같은 음악가들이 등장했다. 한 세기에 한 명 나오기도 힘든 데 40년 정도 안 되는 짧은 시기에 이런 천재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이다. 때문에 후대의 사가들은 이를 독일인이 이룩한 ‘정신혁명’이라고 기술한다.

2회에 계속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 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시국선언〉 영상|2024년 12월 14일 [윤석열 탄핵과 우리의 민주주의 – 시대와 철학]

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이하 한철연)는 12월 3일 윤석열의 불법 비상계엄을 독재자의 야만적 폭거이자 반란으로 규정하는 대다수 시민들과 뜻을 함께하여 2024년 12월 12일 시국선언문을 작성하였습니다.

시국선언문은 회원들의 동의를 얻어 웹진〈ⓔ시대와 철학〉에 게시(http://ephilosophy.kr/han/57059) 하였으며 이어 12월 14일(토) 숭실대학교에서 거행된 제66회 정기학술대회에 연효숙 회원(전 한철연 회장)의 주도로 참석한 회원들이 함께 시국선언문을 낭독하고 탄핵구호를 외쳤습니다.

같은날 오후 4~5시 경 국회에서는 찬성 204명, 반대 85명, 기권 3명, 무효 8명으로 윤석열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습니다.

한철연은 헌정을 유린하고 민주주의를 훼손한 윤석열을 즉각 체포하여 구속할 것을 요구합니다. 또 잘못된 권력의 범죄에 복무한 김건희 및 그 부역자들을 철저하게 처벌할 것을 검찰을 제외한 수사기관에 강력히 요구합니다.

유튜브 출처 https://youtu.be/ITJ3EVBCcSw?si=E3IVogLdVwNfJJyI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시국선언 전문

 

사유(思惟)의 두 갈래 [천 하룻밤 이야기]

사유(思惟)의 두 갈래

– 삶의 사유에서 삼태극을 생각하며

— 상강(霜降) – 가을이 매우 짧은 시대를 맞이 할 것인가?

  이스라엘이 가자에서든 시리아에서든, 전쟁을 수행하는 것에 막을 내릴 수 있는 나라는 미국 밖에 없다고들 한다. 이 말은 이 전쟁의 배후에는 미국의 지지와 지원이 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미국이 세상의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다.

전쟁과 평화,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해 대항전쟁을 해야 하는 것이 아이러니이다. 전쟁을 거는 쪽이 자유와 안정을 위한 전쟁이라고 하지만, 그 전쟁이 누구의 자유와 누구의 안정인지를 묻는다면, 당연히 전쟁국의 상층들의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이들에게 백성은 안중에도 없으며,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다. 두 번의 세계 대전은, 소비에트와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으로, 다른 삶의 양식들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다른 삶의 양식을 악마화 하는 쪽은 누구인가? 물론 제국주의라고 말할 것이다. 이에 더하여, 기나긴 철학사 속에서 영원을 하늘(상층)에 두는 주지주의들이 있었고, 이를 백성들에게 심어서 순종하며 신앙으로 심은 것이 유일신앙자들이 있다.

유일신앙자들이 전쟁에서 어느 쪽을 돕는 적대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마도 니체가 설명했던 바로, 한번은 백성에게 적개심을 심었던 랍비들이고, 다른 한번은 백성에게 죄의식을 심은 성직자들일 것이다. 니체의 말대로 적대의식과 전쟁은 백성의 것이 아니라 성직자의 것이라. 왜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과 지위를 보존하기 위해 백성을 인질로 삼았을까? 동양에서는 인질로 삼기보다 백성이 편안해야 천하가 편하다(평천하)는 군자들의 이야기와 지위를 보존하려는 위정자들 사이의 타협이 있었을 것인데 비해, 서양에서는 유일신앙의 중세를 거쳐서 오랫동안 권력과 지식이 신앙에 포획되어 있었다. 그 이유에 하늘의 영원성과 지상의 부질없는 가상성을 심었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이라는, 한글의 천지인(l, ㅡ, ㆍ)의 삼원성은 인류의 사유의 과제였던 것 같다. 아테네 이전에는 두 갈래로 갈라지는 듯하다. 이오니아와 엘레아. 그런데 아테네에 와서, 소크라테스가 이런 세 가지를 하나로(?) 통합시키려는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뭣”이 세 가지로 갈라지게 되는지에 고민했을 것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파르메니데스를 넘지 못했다고 서술했다. 그 소크라테스가 이오니아의 사유를, 고르기아스와 아낙시만드로스의 사유를 통해서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추측해보면, 흥미 있는 점을 발견한다. 하늘의 영원과 지상의 변화에 대해, 내가 소크라테스의 좌파(빨강이)라고 부르고 있는, 퀴니코스학파의 생각은 달랐다. 시간 속에서 찰나(le moment)는 변하지 않는 영원이고, 살아가는 인간의 과정인 순간(l’instant)은 변화하는 현상으로 보았다. 이런 퀴니코스학파의 영원과 변화의 항목을 정하는 것은 자연에서보다 언어의 개념화에 대한 저항이었을 것이다.

영원이 삶에서 이미 이루어진 것(fait, 만들어진 사실)은 인간이 고칠 수도 변경할 수 없이 지나가면서, 그대로 과거가 된다. 그럼에도 그 사실이란 항목이, 일반화되어 용어로 쓰이고, 그리고 규정하는 방식에 따라 정의되어가는 개념작업을 거칠 것인데, 이 항목, 용어, 개념은 고착성(고정성)을 갖는다. 사실은 덧붙여서 고칠 수 있거나 변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 찰나라는 개념은 영원하다. 그러나 삶아가는 인간들의 과정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순간들의 지속을 이어간다. 삶의 한 시점이 순간이라 하더다로 그 순간은 지속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라는 개념은 변하지 않을지라도, 살아가는 소크라테스는 변하고 있었고 또는 “뭣”을 추구하고 살아갔다. 그가 어떤 정체성을 갖었는지를 퀴니코스학자들은 잘 모른다. 순간의 이어짐의 연속성에서, 소크라테스라는 항목이, 경계를 그으면서, 정해질 뿐이다. 이에 비해 플라톤주의자들은 소크라테스의 영원성이 ‘천상의 영혼’처럼 영원히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였다. 그 영원한 영혼이 소크라테스 신체에 들어왔다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모습과 과정은 변화의 현상들이라 한다. 소크라테스의 영혼은 불변하고 영원한데, 신체와 더불어 살면서 변하는 모습을 보였을 뿐이라 한다.

플라톤은 이중적이다. 개인 영혼의 변전과정도 고민했다고 여기고, 또는 변하지 않은 세계영혼도 있다고 믿었다고들 해석한다. 그 플라톤은 전체의 영혼과 개인의 영혼을 구별하려고 노력했다고 하는 해석가들도 있다. 그런데 플라톤주의자들은 영혼이 영원의 세계에서 내려온 것으로 해석하고, 현상인 지상은 가상의 세계라는 쪽으로 굳혔다. 즉 경계를 긋고(페라스를 중시하고) 고정시켰다. 이 고착적 사고가 정태적 사유의 길이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다른 제자 그룹들은 전혀 달리 생각했다. 삶은 노력(포노스, πόνος)이고, 그 노력의 강도(토노스 τόνος)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드러낸다고 보았다. 아마도 불교에서 수련과 보시에 의해 자아의 성립을 보살이라고 하듯이, 퀴니코스-스토아의 전통에서 지나가는 찰나(영원)들과 달리, 살아가는 순간이 삶에서 소중하고 또한 다루어야 할 철학적 과제라고, 즉 “뭣”이라고 하는 것이 실재성이라 보았다. 이들에 의하면 플라톤주의의 영원은 우화 또는 이야기(mythe)에 지나지 않고, 인간은 지상에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아가는 과정(se faisant, 만들어짐)이 중요하다고 한다. 주지주의자들이 아폴론 또는 아테네 여신을 이상으로 삼았다면, 퀴니코스학자들은 그들의 학교(퀴나고르게스)에서 헤라클레스를 모범으로 삼았다고 한다.

찰나와 순간, 영원과 시간에 대한 사유의 차이는 사유의 역사에서 고비마다 문제제기를 하였다. 그러나 유일신앙과 주지주의의 결탁으로 영원은 하늘나라에 있다고 여겼다. 그럼에도 영원이 지상에서도 돌고 있다고 공공연하게 제기된 것은 갈릴레이에서였다. 그 이후로 몇 세기를 지나지 않아서 주지주의 학문의 체계가 영원성도 없고, 그리고 체계의 완벽성도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게 된다. 왜냐하면 주지주의에 따른 모든 개별 학문들은 그 학문의 재료들을 다루는 방식에서, 그 학문들 각각의 한계(페라스) 속에서, 고착저이고 정태적으로, 규정 지었기 때문이다. 한 학문이 그것의 한계를 넘어서 다른 학문에 적용하는 것은 오류이기도 하지만, 사유방식의 착오이다. 쉽게 말하면, 피겨의 김연아의 운동과정을 축구의 손홍민에게 적용해서 설명할 수 없다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운동의 기본은 달리기가 기본이라는 을 부정하지 않는다.

적용의 오류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생성과 전개의 과정에서 달리 이루어진 경계(페라스)를 아페이론에게 적용하려는 오류가 플라톤주의에 이미 있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에는 아페이론과 같은 영혼의 대상화에 대해 항목, 용어, 개념화의 과정을 찾으려하는 것이라면, 퀴니코스는 삶의 터전에서 영혼의 삶에 대해 장하다, 훌륭타, 경건타를 실행하는 방식을 찾으려 했던 소크라테스를 주목했을 것이다. 주지주의자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문헌에 없는, 또는 증거가 없는 이야기로 넘긴다. 그런데 그들이 소크라테스의 영혼의 이야기를 증명하는 듯이 이야기하는 것이, 상상의 이야기 또는 칼데아신화의 이야기라고 한다. 이런 완전성의 이야기를 진리라고 받아들인 이들이 유일신앙자들이다.

사유에는 두 가지 방식이 또는 여러 방식이 있다고 할 때, 천지인을 기본으로 하는 사유에서는 최소한 세 가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적어도 두 가지 방식과도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플라톤주의자들의 주지주의는 하늘의 영원성에 항목과 용어를 만들어 이야기해야만 한다는 쪽이고, 다른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주의자들은 항목과 용어가 인간들이 쓰는 단어와 문장에서 개념작업을 거쳐서 개념들을 다루어서 체계화해야만 한다는 쪽이다. 달리 사유하는 퀴니코스와 스토아는 삶이 먼저이고, 그리고 사유는 다음이라 할 것이다.

하늘에 영원성을 묶어두고, 제도를 만들고, 학문적으로 체계를 규정하는 이들이 자기들의 이야기가 진리이며, 공정한 체제이고 나아가 평등한 신앙으로 여긴다. 이들은 항목을 고정화하고, 용어들과 개념들을 규정화하여, 전체를 구성하고 구축하였다고 착각하고 있다. 이들의 단초에서 고착(고정)이 정태적 사유의 근본이며, 이를 신앙을 받아들인 유일 신앙이 정태적일 수 밖에 없고, 그 정태성을 절대적 진리로 믿고서, 얼마나 많이 달리 생각하는 자를에게 피를 뿌렸는지는 세계사가 말한다. 중세의 마남사냥으로부터 미국의 맥카시 조작에 의한 빨갱이 사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인간의 정태적 사유와 동태적 사유의 이중성이 있다는 것이 제기되기는, 소크라테스 이전에도, 싯달다에도(9/9는 0.9999일까, 1일까), 중국의 주나라 이전에 하도(10, 5)와 낙서(9)에서도 있어왔다. 사악한 자들은 개념, 수, 점에서 승리를 구가하면서, 항목, 지수, 부피 등을 악으로 몰아내려고 하였다. 이런 그들의 생각들에서 전쟁은 자유의 전쟁, 안정의 전쟁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전쟁은 악마의 전쟁이며, 공공재(하늘, 땅, 물)인 것을 사적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탐욕의 전쟁이며, 이들이 권력, 권세, 권위를 합쳐서 패거리를 만드는 치졸함에서 오는 것이다. 이 치졸함의 정태적 사고임에도, 요상하게도 동태적이고 운동적이라고 가르친다. 교육을 장악하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악마같은 자들이 철학사와 역사교육을 왜곡한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이들 세 가지의 고정된 사고에 저항하는 이들이 셋이 있었다.

권력에 저항하고 항쟁하는 사유를 창안한 이는 정치 경제학에서 루소가 제기하고, 아나키스트들이 불을 지피고, 맑스가 과학적 체계를 통해, 생산도구를 사적 소유를 철폐하고 프롤레타리의 공화국을 주장했다. 세 패거리들이 기계 산업일 때는 맑스를 두려워했는데, 규소라는 디지털시대에 제국이 변신하면서도 동적 사유를 빌어온다. 그러나 여전히 맑스의 혁명의식은 중요하다.

유일신앙이 자본주의 국가들 안에서 세상에서 권세를 누리고 산다. 종교는 인민과 더불어 사는 것이고, 헤라클레스를 따르는 퀴니코스의 견해로는 세상사의 어려운 난제를 해결하는데 노력(포노스, πόνος)과 내공(토노스 τόνος)을 써야 한다. 아직도 세계가 가난과 질병으로 시달리며, 이제는 이런 문제보다 더 심각하게 다가온 것이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 놓은 지구의 생태계의 문제도 있다. 자연자체, 지구 자체가 자기 정체성을 지니고 있어야 그 속에서 사는 생명체든 인간이든 안정을 이루어갈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은 유일신상의 신에 종속되고, 포로 되어, 그 신의 명령으로 피조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자연은 자연대로 살아가는 과정으로 자발성과 자율성이 있다고 브루노가 주장했었다. 그를 그들은 산채로 태워죽이고 아직도 사과하지 않는다. 이제는 사람들은 자연이 동적이고, 유일신앙의 사고가 정태적이고 고착적이라 한다. 유일신앙의 사고를 벗어나는 사유의 방식을 학습하고 노력하고 내공을 쌓아야 한다.

지식의 권위는 권력과 권세의 아부하려고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자연을 지배하고 제도를 만들고, 인간을 행복하게 살게 하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의심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그러한 지식이 어째서 외골수 방향으로 나아가, 인간만이 잘 사는 휴머니스트(hunaniste)로, 지식을 갖는 인간만이 타인의 자유를 무시하고도 자유를 누리는 상품자유주의자(liberaliste)로 가고 있는지를, 그들은 깊이 성찰해야 한다. 이들 현상 인식론자들인 지식론자들이 누구의 침을 발라서 문장을 쓰고 판단을 하는 지를 반성해야 한다. 지식론자들은 수학에서 비유클리트기하학, 생물학에서 고생물학과 유전학, 심리학에서 기억이론 등에서 체계의 완전성이 사라졌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제도 속에서 안전과 편안을 누리고, 반대파들을 마남사양과 빨갱이 사냥에 동조하면서, 자신들의 지위를 누리고 살기를 바란다. 세 패거리들이 시킨 교육에 안주하면서 안락과 편리를 누리는 바탕에는, 정태적 사유와 더불어, 그 사회에 적응하는 동안에 내재하는 탐만치가 가득하다. 탐욕과 오만과 치졸함이다. 누구를 꼬집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태가 그러하다. – 뒷전으로 밀려난 용어들, 인도주의자(humanitaire)와 세계시민사상가(le cosmopolite), 그리고 인성자유주의(libertaire)를 생각해 보시라, 현재 교육이 “뭣”을 감추고 가르치고 있는지…

이들의 탐만치와 정태적 사고는 제국주의와 제국의 사유에 대한 동경과 향수이며, 이는 유일신앙의 하늘나라에 대한 착각에서 온다. 이에 저항하는 백성들과 인민들이 무수히 사라졌지만, 여전히 지속하고 있다. 이런 저항이 20세기 후반에서 21세기에 표면 위로 올라왔다. 이 인민들의 여러 차례 저항들에 극우들의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다. 남녘에서 세 패거리들에 포획된 자들은 미국이라는 제국의 허락을 구걸하면서, 일본의 포로가 되기를 자청하고 있다. 세계사에서 인민의 저항에 대해서도 반동의 극우들이 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친일파가 아니라 부일파, 숭미파들이 겁도 없이, 공공재에 대해 사적 소유의 승리를 주장하고 있다.

기나긴 역사에서 혁명이 성공한 것은 얼마 되지 않지만, 인민의 승리를 부정하는 이들이 없다. 단지 그 과정의 강도와 속도가 조금씩 달리 할 뿐이다.(4:01, 57UMB) (4:19, 57UMC)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혁명’ 대 ‘쿠데타’ – ‘인민의 생동감’ 대 ‘탐만치의 독극물을 마신 자들의 망상’ [천 하룻밤 이야기]

  혁명 대 쿠데타

– 인민의 생동감 대 탐만치의 독극물을 마신 자들의 망상

— 2024년 9월 22일. 추분(秋分): 그저께 밤새 비가 내리더니, 더위가 꺾였다.

ㆍ학문에는 경계가 없다. 현자도,

ㆍ학자는 경계 안에 있다. 지자는 패거리에 갇혀 있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면서 비, 구름, 바람 거느리고, 하늘에서 아름다운 금수강산에 온 것은 착한 이야기로 남아있는 것만이 아니다. 이런 신선놀이 하는 천국 같은 이야기를 하던 시대는 어디에나 있었을 것이고, 표현하는 방법이 시대마다 또는 삶의 터전마다 다를 것이다. 어느 나라의 구전 전승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인간이 자연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당연히 여겼다는 것이다. 자연에서 삶이 먼저이기에, 이 산, 이 강물, 이 땅, 이것들이 누구의 것이고 저것들이 누구의 것이라는 사적 소유 관념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을 대상으로 하면 공산사회가 먼저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 시절에도 인간은 자연의 변화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끈질긴 노력을 했을 것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문명의 발달이전에, 정보의 전달이 문자화되기 이전에, 자연재해에 대해, 즉 자연에서 규칙성을 찾지 못해 기후변화나 태풍, 지구변화에서 언제 닥칠지 모르는 지진과 화산 등은 인간에게 두려움을 심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이 시절 인간이 소유를 말했기나 했을까?

소유와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추상 관념이 설정되는 시기에 대상이 현상적 표현 또는 재현 가능한 개념으로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이에 비해 세상에서 살면서 공유와 터전을 말한다면 이것은 서양철학사에서 퀴니코스-스토아의 전통일 것이다. 하늘의 영원과 땅의 시간으로 대비시켜 설명한 것이 플라톤이었는데, 퀴니코스-스토아는 현재가 있는데, 미래는 오지 않았고 과거는 지나갔지만 그 현재의 항상된 이중적 방향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이 파들의 현자들은 그 현재라는 시점에서 점이라고 여기는 찰나는 영원하며, 즉 한번 이루어진 것, 만들어진 것은 사진의 장면처럼 영원하다고 보았다. 그런데 점이 아니라 열린 덩어리로 보았을 경우에, 그 덩어리는 그 변화하는 중에 있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찰나와 달리 순간은 과거(어제) 온갖 찌꺼기들을 포함하고 또한 미래(아제)로 나아가는 과정 중에 있는 지속의 순간이라는 것이다. 찰나와 순간의 구별은 삶의 과정의 태도와 의식을 보여줄 뿐만아니라, 세상에서 “뭣”을 대하는 인식에서 관점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하늘이 땅의 대조에서 시간의 기준의 기준을 정하는 것이 상식적이라 하지만, 양자의 구별에는 그 만큼의 뜻이 있다. 현실의 삶에서 어떤 측면은 변할 수 없는 것이 있기도 하고, 삶의 과정은 끊임없는 변화의 측면이라고 한다. 이중성은 하늘과 땅의 대조에서만일까? 그런데 사실상 현재가 이중적이지 않는가? 이 이중적인 것을 한번은 하늘에 기준을, 다음번에는 땅에 옮겨서 그림자를 재는 편리를 생각하는 자들이 누구일까? 삶의 터전에 따라 인간들 각각의 심성이 그림자를 재는 것만큼이나 달리 표출되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영원에게 삶의 태도를 묻고자하는 사고방식은 언제 어디서 왔을까? 영원을 하늘에 묶어 두는 한, 인민의 저항과 봉기도 반란과 역적으로 몰리는 것이 아닌가. 인류의 역사에서 어느 시대에선가부터 현실의 변화를 인도하는 인민의 항쟁과 혁명이 있었다. 어쩌면 플라톤주의자들을 전복하는 사유가 혁명을 수행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인지 모른다. 이런 인민의 혁명의식을 하늘에 맡기라고 누가 말하는가? 18세기 말 대혁명과 20세기 초 공공재의 공산화하는 두 나라의 성립 이후, 거꾸로 하늘에서 천사와 성자들끼리 개혁이니 변혁이니 말씀하는 자들의 사고방식은 인민에게 반역과 모반을 꾀하는 쿠데타 사고방식이 아닌가.

*

서양 철학사를 상층의 이데아(관념) 중심으로 읽으면 쿠데타 세력을 플라톤이 주장한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박홍규와 들뢰즈는 플라톤 사유에는 이중성이 있었다고 한다. 플라톤에서 아페이론이란 용어를 사회(토지)에서 인민으로 읽으면, 인민의 활동에 능동성이 있음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이상한 종족이나 신앙자들은 플라톤의 아페이론을 이데아(관념)의 설득의 대상처럼, 피조물로서 다루어야 할 자연, 지배해야할 인민 등으로 여겼을 뿐이라 한다. 서양철학사에서 이런 상반된 관점을 갖게 하는 것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서양철학사의 기원을 기원전 7세기 이오니아의 탈레스로 잡는데, 그 탈레스가 자연을 대상으로 착각했다고 여긴 것이 아리스토텔레스라고 한다. 그런 사고방식을 크리스토스 신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법을 받아들여 자연을 대상으로, 그리고 신의 피조물처럼 여기듯이 인민을 다루어야할 지배 대상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에 젖었다.

서양철학사가 왜곡되는 것은 한 찰나이다. 찰나의 고정은 불변이며, 천국도 불변이다. 그런데 지속하는(살아있는) 순간은 변화하며 지속한다. 그것을 영원이 마음대로 다스릴 수 없어서, 순간조차 쪼개어서 마치 원자가 불변인 것처럼, 순간을 찰나로 고정하여 불변으로 만들었다. 그 속임수에 속아서는 안 된다고 서양 철학사는 누누이 말하였지만, 이법과 신앙을 별개 사항으로 따로 놓음으로서 신앙은 찰나이면서 순간이라고 망상 또는 착란에 빠진다. 이를 프로이트 후학들은 파라노이아(편집증)라고 한다.

신앙자들은 왜 이 둘이 따로, 별개라고 하고 신앙이 우선이라고 하는가? 억지, 편집증의 초기와 닮은 자폐증의 치졸함이, 산타클로스 할배가 실재한다고 믿는 여섯 살 꼬마처럼 유치함이 상식의 이름으로, 그리고 탐만치에 빠지게 하기 때문이다. 극우는 강박관념과 파라노이아를 사회 속에서 펼친다는 점에서 윤석열 집단처럼 일곱 살쯤 돼 보인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이들이 훨씬 더 많았다. 이들을 침묵하게 하는 것은 중세 말기에 성행했던 마남사냥처럼, 현실에서 제대로 살아남지도 못할 지경으로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별개의 이야기를 하는 자들이 얼마나 사악한지를 길고도 흥미롭게 시로 쓴 철학자가 니체이다. 신앙자들은 니체가 사유의 전복을 말한 것이 아니라, 삶의 허무라고 해석하지만, 니체는 신앙자들의 질병(강박과 편집)과 탐만치에 빠진 아집을 벗어나라고 하면서, 불교의 도피안과 같은 저 너머 보살행을 행하자고 한 것이라 한다. 니체는 신앙자가 아니다. 그는 이슬람의 신의 놀이와 같은 아자르(주사위 놀이)로 설명하려 했겠는가? 자연의 다양한 발현이 아자르이다. 자연, 즉 이법은 신앙과 아무 연관도 없이, 45억 년의 오래 세월 동안 거기서 여전히 변화하고 있었고, 이제도 변하고 있고 아제도 변할 것이다.

서양에서 뿐만 아니라 사상의 발전은 그리스 이전에도 있었다. 들뢰즈가 흥미있게 전개한 것은 도구/무기의 방식이 인류사상사의 변역(變易)의 과정이었다고 한 것이다. 그리스 최초 철학자라는 탈레스 이전에도 인간이 살았다. 1859년 인류학회 이래로 인류의 과거를 연결하는 6백만 년 전의 유인원까지 갈 필요 없이, 3만 년 전 구석기. 만 년 전 신석기, 7천 년 전 현 터키지방의 아나톨리아의 자연동광의 발견으로 구리시대, 청동기시대, 기원전 천 년 전쯤에 철기시대로 이르기까지 도구의 발달로 여기지만, 도구를 무기를 사용하여 자연의 위험에 대처하고 동물이든 타종족이든 위협에 저항하기를 넘어서, 타를 정복하여 잉여이익의 착취의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정복이 농경과 목축보다 많은 잉여생산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집단을 형성하고 분업을 하는 과정에서 깨달았을 것이다. 효율적인 정복에서 정복자는 집단을 다스릴 체제로서 참주제를 이용하였고, 제도 속에 정보와 배치는 소수의 소유로 이루어 졌다. 이 제도에서는 의식의 변화과정보다, 인식의 활용과 전승에 중요성을 알아서, 소위 말하는 지성의 체계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도구/무기를 기호와 문자로 전승하는 철기시대의 발달 시기쯤에서 권력의 유지와 체제의 확립이 이루어졌으리라 이 즈음에 플라톤의 “폴리테이아(국가)”편과 “법률”은 방어와 번영을 염두에 두었다고하는데, 이런 체제가 현실상에 있을 수 없다고 상상적 나라 또는 이상국가라 하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고려해 보건데, 원시 공산사회가 있을 수 있는가하는 문제는 상부상조의 나라가 있을 수 있는가를 의미할 것이다. 자연 속에서 소규모의 집단들은 자체의 존립을 위해 상부상조했을 것이나, 무기/도구를 먼저 생각하는 참주제와 같은 우두머리 체제가 지배적이었을 것이다. 정복의 잉여이익의 착취가 집단의 표본처럼 되어가는 것이 고대 문명사회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상부상조의 삶의 터전에 대한 향수는 남아있었을 것이다. 정복의 문화 대 상부상조의 문화라고 맞대응 시킬 수 없겠지만, 기록과 유물의 역사는 정복의 체제에 치중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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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사상이 철학적 사유의 근본 또는 기원이 아니라는 것은 19세기 후반에 제기되었고, 20세기에는 당연하게 여긴다. 그럼에도 19세기 전반까지도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신앙자들의 사고가 인민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시절에 인민이 주인이라고 하면, 반역이니 반국가세력이니 하여 마남사냥처럼 이런 생각을 하는 이들조차 사형 또는 참수하였다. 프랑스가 세 번의 혁명을 거치면서, 인민 주권을 확실하게 만들고 나서, 그리고 20세기의 두 번의 전쟁에서 인민이 주축이 된 나라, 소비에트 공화국, 중화인민 공화국이 들어서고 난 뒤에야, 세계사에서 인민의 저항과 항쟁이 자기 방어로서 정당화되고, 상부의 정권을 쟁취하는 세력이 쿠데타 즉 반역의 세력으로 인식하게 된다. 현재 윤석열 정부도 인민의 의사를 거슬러 권력을 사유화하려 한다면, 반국가세력의 반역이 될 것이다.

그리스 사상이 의식적 사유의 원천이 아니라는 것은 당연하며, 그리스 사유의 심정적 공감의 사유는 그리스 이전에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의 문명의 사유가 전개되었다는 것도 당연히 받아들인다. 이들에게 이상하게도 인더스 문명을 말하지만 인더스 문명은 거의 지워져 있기 때문이리라. 이런 선 문명에서 산술과 기하, 천문과 지리가 다양한 방식으로 전승되었음이 틀림없다. 우리나라처럼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자(홍익인가) 한다고 표명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원시사회라고 말한다면, 아름다운 동산에 사는 것처럼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물과 유적을 통해 보건데 청동기 시대 이래로 거의 정복의 역사이고, 전쟁의 승리자가 신격화되는 시대이다. 몇몇 상부의 사유와 지식의 전유(생산도구의 전유보다 더 전횡을 할 수 있다)라는 시대를 거쳐서, 인간이 각자 자기 스스로 자기 생각을 할 수 있는 시대는 철기시대에 진입하여 생산력이 발달해야 가능했을 것이다. 게다가 생산물의 잉여가 있어야 동냥하며 수도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시대 쯤에서 자기의식의 발동이 걸렸을 것이라고 여긴다. 그 초기를 인도의 갠지스강에서 싯달다, 지중해 바닷가에서 소크라테스이다. 소크라테스 이후의 여러 사유의 갈래들은 통일성을 갖기에는 인간의 도구(언어, 문자, 학설)가 (실증적이라는 의미에서) 정확하지도 않았고, 획일적이지도 않았다. 4세기가 지나 신앙이라는 이상야릇한 사고방식이 침입하였고, 크리스토스라는 이름으로 (로마의 황제와 보편을 본따서) 신앙을 획일적으로 보편화하는 사고방식으로 고정시키려 했다. 언어/무기를 사용하여 3세기 간의 피튀기는 투쟁으로 단일화하였고, 서양은 그런 방식에 묶여서 중세 천 년을 그렇게 보냈다. 그리고 다시 개인의 자의식의 발현이 있었다. 그리고 400여 년을 신앙자들과 달리 생각하는 도구/언어를 사용하고자 노력했다. 자의식이 무엇인가를 도구로 만들면 무기로 바꾸어 사용하는 쪽이 참주제의 사고방식으로 있어왓다. 이에 비해 마남사냥 속에서도 소수의 자의식은 인민으로 퍼져나갔고, 세기를 지나 인민의 혁명들을 거치면서, 제도에서도 인민이 기본임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그 의식의 확장과 더불어, 인식의 발전과 진보를 믿는 이들은 다른 지역을 정복하고 쟁취하는 식민지 제국주의 시대를 열었다.

간단히 말하면, 여러 문화(문명)들 간에 충돌에서, 다양한 문화들 사이에 우월성을 주장하는 논리의 성립이 정복의 피비린내 속에서 피지배지의 확장을 통한 권력을 쟁취와 확장이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로마의 황제가 그러했고, 크리스토스의 주장자들이 따라 배웠으며, 십자군전쟁까지도 치르면서, 천년의 신앙의 황제(교황)를 만들었다. 시대의 변화에서 유럽의 민족들은 자기의식에 따라 각 지방의 언어가 성립하고 개별 국가가 성립한다. 이 공동체에서는 과학의 일반화로 상식을 넘어 양식에 따른 사유체계를 정립하여, 인간들의 자유와 사유의 발전을 기여한다고 생각하였으나,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한 사고의 정립은 다른 사고방식의 지배에 있었으며, 식민지 확장으로 이어갔다. 그러나 타 지역의 다른 문명이 도구 사용방식은 다르더라도 문화가 낮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제국주의 내부에서 두 번의 대전쟁을 치루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 도구/무기의 문명이란 도구를 무기로 사용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양의 사상은 정복에서 탈취와 착취를 쉽게 손 놓지 못하였다. 제국주의에 이어서 정복의 사고는 미국이라는 제국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제국은 신앙자들의 형이상학적(주지주의) 논리, 국가주의자들의 법률,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에 진리를 주장하는 분석과학철학 등과 패거리(카르텔)를 형성하여 지식/무기를 사용하기로 하였다. 21세기 SNS라는 도구/무기를 지배하려들면서, 또한 핵 발전도구와 핵무기의 이중성 함께, 전지구적으로 위협과 공포를 통해 지배하려 한다.

그러나 공공재 공유를 우선으로 하는 사회주의와 이익창출을 위한 사유를 우선시 하는 자본주의 사이의 균열은 한 세기를 지나 분명한 간극을 형성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나라는 공공재는 사유화하는 방식과 공공화 하려는 방식의 사이에서 심한 갈등에 있다. 이 갈등이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이 사유화의 세력은 신앙, 법률, 지식의 카르텔 형성하면서 돈을 신으로 모시며 지배하려고 한다. 그런데 인민의 자의식은 고대나 르네상스 시대와 달리, 확장과 강도의 수준이 전파와 속도 덕분으로 엄청나게 퍼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민이 주인이고 인민이 토대인데, 패거리의 장난과 놀음이 강압적 법률로도 이룰 수 없을 것이고, 신앙은 공공재화의 사적소유가 폐기되면 무너질 것이고, 지식을 달리하는 사유하는 자의식의 확산으로 새로운 분출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혁명은 번개처럼 갑자기 도래한다. 기나긴 의식의 역사 속에 간헐적으로 분출되었지만 폭발적이었다. 세계사는 공공재의 사적 소유를 인정하지 않는 쪽으로 흘러간다. 공공재의 공유화가 자연환경과 생태계를 살리는 길이고, 그 속에서 인간이 살아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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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 역사상 자의식의 발동은 여러 번 있었다고 하더라도, 인민들 개인에게 자의식의 분출은 그들에게도 사회주의 국가 성립이후 20세기 후반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우리 입말과 문자로 통용한지 79년째이다. 그럼에도 외교에서는 미국과 관계에서 영어를 우선으로 하지만 말이다. 서양도 경험시대, 종교시대, 지성주의 시대, 현대이듯이 우리나라도 전승의 시대, 불교 천년, 유교 오백년이다. 상동구조가 아니라 상사구조로 변역을 겪어왔다.

환시대, 단군시대, 부여와 고구려 등으로 내려오는 신선사상의 시대가 있었고, 불교가 들어오면서 천년의 불교 영향, 그리고 유학이 들어와 군왕제를 확립한 유학 영향 500년이다. 이 조선 말기에 권력으로부터 밀려난 상부의 몰락 양반들 중에 백성의 삶에 대해 생각했던 실학자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백성의 입말과 자신들의 문자와 서로 사맛디 아니하다는 것을 깊이 깨닫지 못했었다. 이런 과정에서 19세기의 학문적 관심은 분명히 새로운 질서와 삶의 터전에 대해서, 그리고 서양 문물의 유입을 통한 새로운 세상에 대한 소수의 열망이 있었음에도 우리 입말과 우리 글로 표기할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백성 또는 중생이 자각하여 자기의식을 발동하는데 힘을 보태지 못했다. 이런 과정에서 사적 소유의 상부는 외세와 결탁하고, 백성의 저항과 봉기는 문자를 쓰는 선비들에 의해 지도되어 널리 퍼뜨리지 못하고 1894년 일본군대에 의해 민중의식은 수면 밑으로 흐르게 되었다. 노론을 중심으로 하는 상층은 서양을 직접 찾아가기보다 손쉽게 일본의 지식과 제도를 통하여 받아들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나라를 일본에 넘겨주고, 일본의 주구(走狗)가 되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래도 저항하는 몰락한 소수의 상부는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고자 하였다. 이들에게는, 이제 만주에서 세계사의 접속과 일본을 통한 세계사의 편입이라는 이항 대립적 구도가 있음을 깨닫는다. 1919년 두 개의 독립선언문이 이를 증빙한다고 할 수 있다. 묘하게도 만주로 간 독립운동은 지식인이면서 중국과 연계 속에서 한문에 능한 반면, 일본과 연계 속에서 새로운 식자층은 한자를 알고 있다는 지식으로 일본에 급속히 빨려들어가서 서양의 과학과 기술을 익힌 일본에 복속되어 갔다. 말하자면 후자들은 들뢰즈 용어로 일본에 “포획”된 형국이었고 곧 이어 일본의 “포로”가 되었다. 이를 식민지 시대에 지식인이라고 한다. 나라를 빼앗긴 아픔을 함께 하는 이들은 상부가 아니라 몰락한 양반층들과 백성들이었다.

이들의 이야기가 금지되고 수면아래 흐르면서, 또한 마남 사냥과 같은 빨갱이 사냥이 몰아치는 동안에, 남한에서는 윤똑똑이 지식인들이나 문학인이들 겉멋이 들어 19세기 초 독일 낭만주의와 같은 아이러니가 뭔지도 모르고, 산업화에 편승하여 원숭이 놀이를 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수면 밑에서는 사라져가는 이야기를 분출 시켜려는 이들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한글을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 입말과 문자의 공유가 세계사적으로 보면 늦었지만, 결코 뒤늦은 것은 아니다. 21세기에서 자의식의 발동은 싯달다시대, 소크라테스시대, 데카르트시대, 로베스삐에르 시대, 레닌과 마오 시대와 달리 사유하기가 전개되고 있다. 깨닫든 느끼지 못하던 이 달리 말하기 글쓰기는 젊은이들에게, 프로이트의 구강단계가 아니라 들뢰즈가 말하는 구강성의 활성화에 의해 확장되고 있다. 이 확장의 속도가 너무나 빨라서 3세대가 거의 다른 입말을 쓸 정도 이지만, 어제-이제-아제의 지속성은 강도(내공)를 더해가고 있다.

실로 우리나라에서 자의식의 첫 발동인 훈민정음 창제에서 거의 600여 년을 침잠하여 흐르고 있었다가 솟아나고 있다. 어느 국가 제국에게도 시달리지 않을 자유의 쟁취로서 혁명도 분출할 것이다. 인민의 혁명 대 사적 소유자의 쿠데타, 당신은 위상은 어디에 있는가? 이들에 속하지 않고 별종으로 세계를 누비려고 한다고? 이 이항대립을 타파해야 걸어서 개마고원과 만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남쪽의 섬 같은 삶은 쿠데타 세력에 동조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일본 제국의 개가 되고 미국 제국의 피를 빨리는 짐승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4:11, 57TMA) (5:36, 57TMB)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비트겐슈타인의 딱정벌레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비트겐슈타인의 딱정벌레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네이버 프리미엄콘텐츠 [이 종철의 에세이 철학]에 실린 글을 저자의 동의를 얻어 소개합니다.

나는 이른바 선사들이 토굴 속에서 수년 동안 참선을 하면서 마침내 무언가 깨달았다고 할 때 그것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그런 오랜 수행 끝에 그들이 우주 만물의 통일적 원리인지 혹은 삶의 궁극의 원리인지를 발견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물론 그들이 치열한 수행 끝에 강렬한 확신이나 체험을 얻을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의 생각일 뿐 그것 자체가 보편화되고 객관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쉽게 말하면 사적 체험일 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런 깨달음을 판정해 주는 구루(Guru)가 있다고 해도, 그 구루가 깨달은 자(Buddha)라는 것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구루가 깨달은 자라는 것을 다른 구루가 판정해 준다고 하자. 하지만 이런 물음을 제기하다 보면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나타나는 ‘제3자 논변의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근거 지우는 것을 새롭게 근거 짓는 것의 무한 퇴행 문제이다. 결국 유한자들에서 무한자이자 궁극적 해결사인 신에 이를 때는 일종의 근거 지움이 아니라 점핑(jumping)이 일어난다.

비트겐슈타인의 ‘딱정벌레’도 비슷한 딜레마를 보여준다. 자기 만이 상자 속의 딱정벌레를 보았다고 하지만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도 딱정벌레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 각각이 보았다는 말을 최종적으로 근거지울 수 있는 근거가 없다. 사실 학자들이나 과학자들은 빼어난 저서들이나 과학적 발견들을 통해 자신들의 궁극의 연구 결과를 보여줄 수 있고, 예술가들도 그들의 작품을 통해서 그리고 기술자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이 생산한 기술을 통해서 보여줄 수 있다. 하지만 깨침을 상징하는 상자 속의 딱정벌레는 누구도 확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백분 양보를 해서 그런 깨달음의 존재에 대해 인정도 하지 않고 부정도 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그런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치열한 수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 만은 엄연한 ‘팩트’로 인정을 한다. 그런데 이런 팩트는 다른 분야의 사람들도 똑같이 한다. 이를테면 최고의 경지에 이르고자 노력하는 운동선수들도 일반인들이 상상하기 힘든 노력을 하는 것이다.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예술가도 그렇고, 문자를 통해 최고의 작품을 쓰고자 하는 학자의 경우들도 마찬가지다.

깨친 자의 깨달음에 심오한 형이상학적 원리에 담겨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지한 자들이 갖는 신비감이고 그릇된 신앙일 뿐이다. 때문에 깨달음을 가장한 자들이 몽매한 대중들을 데리고 사기 치는 경우는 역사에서 수도 없이 많이 있었다. 이런 오류나 그릇된 믿음에 빠지지 않기 위해 혹은 궁극의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깨달음이 진정 무엇인가?”라는 절박한 물음을 던질 수 있다. 이를테면 “도道가 무엇인가?” “부처가 무엇인가?” “달마는 왜 동쪽으로 왔는가?” 등 특정한 문제를 가지고 싸울 수도 있고, 만공 스님의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처럼 오직 하나(一)를 잡을 수도 있고, 아예 그도 저도 아닌 ‘이 모꼬?’와 같이 무자화두(無字話頭)를 가지고도 수행 정진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물음들이 도달하는 것이 무엇일까? 무나 도가 실체가 없듯, 깨달음의 실체도 없고 내용도 따로 없다. 칸트가 현상을 초월한 물자체(Ding an sich)의 세계를 말했지만, 도대체 현상으로 드러나지 않는 본질이 어디에 있고, 본질을 담지 않은 현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장막 뒤에 무언가 있을 것이라고 들추어 보지만 그저 어둠뿐이 없는 것이다. 현상과 본질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깨달음과 일상도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불교의 언어로 말하면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라는 것이다.

석굴암 본존불 /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11,00240000,37&pageNo=1_1_1_0

부처가 오랜 수행 끝에 깨달은 것이 무얼까? 나는 아주 단순하다고 본다. 부처는 생(生) 속에 담긴 고(苦)를 본 것이고, 그것을 벗어나는 방법(해탈)을 보여준 것이다. 이런 통찰과 깨달음은 너무나 단순한 것이다. 이 단순한 통찰과 단순한 해법을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때문에 부처는 입적을 할 때 자신이 평생 설법한 8만 법문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예수도 마찬가지이다. 예수가 산상수훈에서 던졌던 메시지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무엇일까? 다른 이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는 너무나 단순하다. 예수의 메시지는 너무나 분명하다. 그저 ‘사랑’이란 말이다. 구약이 ‘정의’를 세우고자 했다면 예수로부터 시작하는 신약은 ‘사랑’이 알파요 오메가이다. 사랑만이 우리가 삶을 지속할 이유이고,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이 사랑을 위해 스스로 십자가의 고통을 짊어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양의 공자의 정신도 그리 복잡할 것 없다. 공자가 말한 인(仁)은 부처가 말한 자비와 예수의 사랑과 표현 언어는 달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이 모두가 베풂과 보살핌의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고, 우주 만물에까지 확장을 한다고 하면 생육의 도와 다르지가 않다. 남송의 주자는 리(理) 가 우주 만물의 원리라고 하는 태극도설(太極圖說)을 끌고 들어와 공자의 말씀을 형이상학의 차원으로 체계화해서 성리학을 세웠다. 조선의 선비들은 오로지 그것만이 공자의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공부를 했지만 그들은 공자의 말을 너무 번쇄하게 만들고 너무 추상화시켰을 뿐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공자의 사상은 너무나 단순 명확한 인(仁)에 다 들어 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삶 속에서 남을 내 몸처럼 생각하고, 나를 남들 속에서 보려고 하는 태도이다. 이것은 교양인이라면 누구든지 알 수 있고, 선한 마음을 갖는 자라면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는, 지극히 단순한 말이라 할 수 있다. 내가 대접 받고자 하는 바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과 같다. 세분 성인의 말씀이 이처럼 단순 명확한 것은 그들 모두가 삶에서 진실을 끌어 올렸었고, 삶에 깊숙이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석가나 예수, 그리고 공자와 같은 성인들이 말씀한 이 단순한 원리가 후대로 갈수록 복잡한 교리로 체계화되고 형이상학적 원리로 추상화되고, 신비한 언설로 간주돼 삶과 유리되고 만 것이다. 그런 필연적 이유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참으로 본질을 볼 수 있어야지 똥폼이나 잡고 허접데기 껍데기만 붙잡고 있으면 되겠는가?

출처: https://contents.premium.naver.com/leejongcheol/knowledge/contents/230121203900063sv

눈치(Noonchi)의 해석학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눈치(Noonchi)의 해석학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네이버 프리미엄콘텐츠 [이 종철의 에세이 철학]에 실린 글을 저자의 동의를 얻어 소개합니다.

눈치(Noonchi)는 사태를 이해하는 한국인들의 전형적인 방식으로, ‘눈치가 없다’ 거나 ‘눈치가 빠르다’라는 말들은 거의 일상적으로 한국인들의 이해 방식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이런 눈치가 과거에는 자기 검열의 방식이거나 처세술의 의미로서 부정적으로만 이해되었지만, 오늘날에는 상황 전체에 대한 빠른 인식으로 타인을 배려하는 적극적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이 ‘눈치’의 개념을 생각하다 보면 다양한 해석의 소지가 있다. 이 눈치를 한국적 해석학의 차원에서 해석해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눈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좋고 나쁨이 아니라 ‘속도’이다. ‘눈치가 빠르다’라는 말이 그렇다. ‘눈치가 빠르면 절간에서도 고기 맛을 본다’라는 말이 있다. 절(寺)은 채식을 하기 때문에 고기와는 거리가 먼 곳인데, 그런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는 것이 이 눈치다. 그런데 여기서 ‘빠르다’라고 할 때의 ‘속도’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눈치가 빠르면 그만큼 상황을 빨리 인식하고 그에 따른 후속적 대처도 빨라질 수밖에 없다. 한국인들이 말하는 ‘빨리빨리’는 이제 다른 문화권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말이 되었지만, 한국인들은 이 특유의 ‘빨리빨리’의 정신에 의해 식민지와 전쟁 폐허의 상황을 겪고서도 이렇게 빨리 나라를 일으켜 세웠다. 한국인들에게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울지 몰라도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확실히 차이가 크다. ‘빨리빨리’의 문화를 반성하자는 말도 많지만, 이것은 디지털 시대에 더 잘 어울리는 정신이다.

뉴턴의 제2 운동 법칙인 f=ma에서 보듯, 가속도가 힘을 결정하는 주요 원인이다. 속도가 빠르면 일 처리도 빠르고 영향력도 클 수밖에 없다. 외국에서 생활을 해 본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그곳에서 인터넷 라인이 문제가 생겼거나 잘 달리던 차가 고장이 나서 A/S를 한 번 받으려면 얼마나 긴 시간과 인내심이 필요한지 말이다. 한국의 배달 서비스는 분초를 다툰다. 물론 이것이 좋다는 의미가 아니라 현실이 그렇다는 의미다. 과거 칭기즈칸의 군대가 빠른 시간에 전 세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빠른 기동력에 있다.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에서 서쪽 끝을 오가는 그의 파발마는 하루 352km라는 상상 불가의 속도로 전달했고, 그의 군대의 이동 속도는 하루에 130km를 이동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현대의 군대들도 따라 잡지 못할 속도이다. 몽골의 기마병의 이동 속도는 너무나 빨라서 유럽의 기사들이 미처 대비책도 세우기 전에 순식간에 몰아쳐 헝가리 평원에서 유럽의 연합 기사단들을 전멸시켰다. 이로 인해 몽골 군대에 대해 유럽인들이 가졌던 공포나 트라우마는 대단했다. 그런데 내가 몽골에서 지내보며 알게 되었지만 이런 빠른 유전자들은 더는 몽골인들에게서가 아니라 한국인들에게 남아 있는 것 같다. ‘빨리빨리’의 정신은 무엇보다 빠른 상황 판단, 즉 눈치가 빠를 때 가능하다. 그 점에서 눈치에서 속도가 갖는 긍정성의 의미가 더 크다.

이런 빠른 눈치가 때로는 자기검열과 차별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눈치가 보인다’거나 ‘눈치를 준다’라는 의미는 사람들 간의 관계에서 일종의 단절감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상대의 행동을 제어하는 차별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어떤 이는 이런 눈치를 남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조심을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눈치는 간주관적(intersubjective) 인식 방식의 하나인데, 눈치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눈치에서 ‘속도’가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상호 간 혹은 다자 간의 관계에서 아주 미묘한 차이와 기미, 이를테면 눈빛 혹은 얼굴 표정, 미세한 손동작이나 발동작 혹은 헛기침같이 모든 행동거지들이 하나의 해석을 위한 메시지로 작동할 때 나타난다. 그러므로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남들이 알아채기 힘든 것들 속에서 의미 있는 해석의 메시지를 파악할 수 있는 해석학자이고 기호학자이다. 반대로 그런 메시지를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사람들 역시 상당한 고수라고 할 수 있다. SNS의 단추를 보면 그냥 ‘좋아요’라는 버튼 말고도 ‘웃겨요’ ‘멋져요’ 슬퍼요’ ‘화나요’ 같은 감정 신호를 보여주는 버튼이 있고, 최근에는 ‘힘내요’라는 버튼까지 추가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감정 신호를 담은 버튼을 많이 누르는데 어떤 이들은 절대 그것을 보여주지 않고 무조건 ‘좋아요’만 누르는 경우가 있다. 이들은 싫어도 싫다고 하지 않는다. 일종의 포커페이스 같은 이들의 행동을 보면서 상당한 고수라는 생각도 든다. 아예 잠행조차 하는 그런 보이지 않는 고수들이 SNS에는 의외로 많다.

그런데 마음을 감추고 눈치를 주지 않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 모든 이를 무심코 평정하게 대하려면 무엇보다 내 마음이 평정해야 할 것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초연'(Gelassenheit)이란 개념이 이런 경지를 말할 수도 있다. 사물이나 인간들 간의 관계에서 특별히 어떤 마음을 내지 않고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 개념은 ‘들어가기(Sicheinlassen)’와 ‘나가기(Sichlosslassen)’의 양면성을 띠고 있다. 전자를 ‘몰입’이라 하고, 후자를 ‘거리 두기’라고도 한다. 이 두 개념을 염두에 두면서 생각을 더 해 보자. 사물이건 인간이건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해와 관심이 요구된다. 이러한 이해와 관심은 사랑과 증오, 거래와 배려 등 모든 관계에서 필수적이다. 그런데 이런 관심이 지나치다 보면 중독처럼 빠질 수도 있고, 집착처럼 상대에 부담을 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과도하게 들어가는 것 혹은 몰입은 양자의 정상적 관계를 해칠 수도 있다. 스토커는 이런 거리 두기를 조절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타나는 심리적 장애라 할 수 있다.

나가기나 거리 두기는 이로부터 역방향으로 이루어진다. 거리를 두다 보면 상대를 더 정확하게 볼 수도 있고 더 잘 이해를 할 수도 있다. 바둑에서도 훈수 두는 사람이 더 잘 보는 경우가 그렇다. 예를 들어 자식의 미래를 걱정한 엄마가 아이의 삶에 과도하게 개입할 경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종종 부모 자식 간의 관계 혹은 무촌이라고 할 부부간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지나치게 상대에 몰입할 때 나타난다. 이럴 때 상대와 반성적 거리를 유지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런 거리는 심리적 거리뿐만 아니라 공간적 거리도 포함될 수 있다. 아무래도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다 보면 덜 집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는 SNS가 발달해서 이런 공간적 거리 유지가 잘 안되는 데서 더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들어가기와 나가기는 인간관계의 밸런스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개념이고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얼마나 잘할 수 있느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언급한 ’실천적 지혜‘(phronesis)에 해당한다. 

금강경에 내가 좋아하는 구절이 있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는 곳 없는 곳에서 마음을 내다. 내 마음이 어떤 것에 머물다 보면 온갖 희로애락의 감정이 솟구친다. 그런 마음이 가라앉는 곳, 무심의 경지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런 마음이 전혀 생소한 것이 아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일을 하거나 놀이에 빠지거나 음악을 듣거나 할 때 내가 빠져 있는 그런 상태가 내 마음이 머물지 않은 곳이고 무심의 경지이다. 이런 마음에 희로애락이나 재물욕이나 권세욕이 개입되니까 집착도 생기고 고통도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마음을 키울 수 있을까? 한국인들의 눈치가 결코 간단한 개념이 아니다. 눈치가 빨라야 알 수 있다.

출처: https://contents.premium.naver.com/leejongcheol/knowledge/contents/220602123804205z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