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을 것은 없고 없을 것만 있는 개 같은 세상 [철학을다시 쓴다]-29-2
있을 것은 없고 없을 것만 있는 개 같은 세상 [철학을다시 쓴다]-29-2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이제부터 용렬한 후손의 조상 망신시키기가 어물전 망신을 꼴뚜기가 시키는 꼴보다 더 심하더라는 욕을 먹을 셈치고 어디 한번 제가 비몽사몽 중에 본 있음의 살붙이와 없음의 살붙이들을 그림으로 그려 볼까요?
이 그림을 보면 가운데 있는 점①을 중심으로 네 개의 동심원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맨 바깥에 있는 동심원 밖에는 텅 빈 바탕⑥이 있습니다. 자, 이제 번호 ①에서 ⑥까지 저마다 무엇을 가리키는지 한번 살펴볼까요?
①하나(있음, 있는 것, hen)
②생각(정신, nus)
③생명(영혼, psyche)
④자연(생성, physis)
⑤질료(없는 것=비존재, hyle)
⑥아예 없음(허무, ouk)
이 그림을 눈여겨보신 분은 아마 조금 의아할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묻겠지요.
“너 플라톤 손자 맞냐?” “예. 맞아요.” “신플라톤학파에 속한단 말이지?” “글쎄요. 다들 그렇게 부르고 있으니까 제가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말해도 무리는 없을 거예요.” “그렇다면, 지금 네가 그려 놓은 그림 그게 뭐냐?” “왜요? 뭐 잘못된 게 있나요?” “어허, 그 그림 네 할아버지가 그린 우주를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놓은 것 아니냐? 그러니까 네 할아버지 플라톤 옹이 〈티마이오스〉에서 설명하신 우주를 그림으로 그리면 아마 이런 모습일 게야.”
“자, 봐라. 네 할아버지는 우주 밖에 있는 것만 두고 ‘있는 것과 같은 것〔tauton〕’으로 우주의 바깥 테두리를 둘러 이 우주를 하나로 만들었다는 것을 너도 인정하겠지? 그러니까 ‘있는 것과 다른 것〔heteron〕’은 그것이 정신〔nus〕이 되었건, 생명〔psyche〕이 되었건, 물질〔soma〕이 되었건, 물질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hypodoke〕이 되었건, 시쳇말로 운동이 되었건, 공간이 되었건, 하나도 빠짐없이 이 우주 안으로 밀어넣지 않았더냐? 같은 것의 고리가 우주를 감싸서 이 우주가 영원불변한 하나의 닫힌 우주로 될 수 있었던 까닭은 이 우주가 하나인 있는 것과 맞닿아서 그 영향을 받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네 할아버지의 우주를 함께 꼼꼼히 들여다보자꾸나. 네 할아버지의 생각에 따르면 이 우주는 전체로 보아 빈틈없이 질서 지워진 완벽한 겉모습을 지니고 있어. 그러나 같은 것〔tauton〕으로 도배된 우주 표면 안쪽은 다른 것〔heteron〕으로 도배되어 있는데, 다른 것이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있는 것과 다른 것, 하나와 다른 것, 형상〔idea〕과 다른 것이 아니겠느냐? 있는 것과 다른 것은 무엇이겠느냐? 언뜻 상식으로 생각하면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네 할아버지는 네 고조할아버지를 닮아서 아예 없는 것〔虛無〕은 생각할 수도 없고, 말로 드러낼 수도 없는 것이라고 여겨 아예 없다고 여겼어. 그 점에서는 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나 네 할아버지나 모두 그리스 정신의 소유자라고 볼 수 있겠지. ‘있는 것만 있고 없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그 오랜 그리스 정신의 전통이 네 할아버지 플라톤 옹의 머릿속에도 꽉 박혀 있었던 거야. 없는 것을 있다고 인정하면 합리적 사고의 바탕이 아예 무너져 버린다고 여긴 거지. 그래서 네 할아버지가 고심 끝에 이끌어 낸 결론은 ‘있는 것과 다른 것은 없는 것이 아니요, 있는 것과도 다르고, 없는 것과도 다른 어떤 것, 다시 말해서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어서,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 방황하고 있는 것〔planomene aitia〕이다.’였지. 자, 그렇다면 이렇게 규정할 수 있겠구나. ‘있는 것과 다른 것〔heteron〕’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apeiron〕’이라고 말이야. 그렇다면 다음으로 하나와 다른 것은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두말 할 나위 없이 여럿이 아니겠느냐? 그런데 여럿이란 무엇이냐? 여럿의 최소 단위는 둘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둘이 나타나면 그 둘이 따로 있을 자리가 필요하게 되어 당장에 공간이 나타나고, 그 둘이 따로 떨어져서 관계를 맺지 않으면 둘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둘은 서로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둘이 관계를 맺자마자 둘 사이에 서로 저됨〔identity〕이 사라지는 변화가 일어나 운동이 시작되는 것 아니겠느냐? 그러니 ‘하나와 다른 것〔heteron〕’은 여럿이요, 공간 규정이요, 시간 규정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그런데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다른 것〔heteron〕의 성격 하나는 ‘있는 것과 다른 것’으로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apeiron〕’이라고 볼 수 있겠지? 그렇게 따지면 둘은 다시 말해 ‘있는 것이 아닌 것임과 동시에 없는 것이 아닌 것’이겠구나. 적어도 네 할아버지의 논리에 따르면 그런 것이겠지? 마지막으로 형상〔idea〕과 다른 것은 무엇이겠느냐? 하나하나의 형상은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서 저마다 하나로 있는 것이고, 그런 뜻에서 다른 어떤 것과도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고, 관계를 맺지 않으므로 정지되어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런데 정지의 반대는 무엇이지? 운동이 아니겠느냐? 그렇다면 운동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기 전에 어떤 운동이 있는지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겠구나. 크게 보아 운동 가운데는 질서 있는 운동도 있고 무질서한 운동도 있지? 무엇을 질서 지워서 형성하는 운동도 있고, 질서를 흩뜨려서 허물어뜨리는 운동도 있지 않느냐? 네 할아버지가 〈티마이오스〉에서 말한 일정한 수치와 척도에 따라서 우주를 만들어 낸 데미우르고스(Demiourgos)의 운동은 바로 질서 있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고, 이 데미우르고스의 운동이 우주 안에 반영되면 정신〔nous〕의 운동이 되고, 생명〔psyche〕의 운동이 되겠구나. 너도 네 할아버지 플라톤 옹이 〈티마이오스〉(Timaios)에서 한 말을 기억하고 있겠지? 데미우르고스가 한편으로는 설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강제해서 생성〔gignomenon〕을 버물려 우주의 몸〔soma〕을 만들고, 그 몸 속에 생명〔psyche〕을 집어넣고, 그 다음에 정신〔nus〕을 집어넣어 이 우주를 살아 있는 것, 이성적인 것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 말이야. 그러니까 네 할아버지 말에 따르면 이 우주 속에 있는 생명과 정신 작용의 근원은 데미우르고스가 아니겠느냐? 그렇다면, 질서를 지향하는 운동이 있고, 그 근원이 어디라는 사실은 밝혀졌다고 치고, 거꾸로 무질서를 지향하는 운동은 어디에 원인이 있다고 보아야 하겠느냐? 우주 밖에는 있는 것만 있고, 없는 것이나 다른 것은 없다고 네 할아버지가 우기고 있으니까,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우주 밖에 있는 것은 형상과 데미우르고스뿐이겠구나. 그러면 무질서한 운동의 원인은 우주 안에 있어야 하는데 그 원인이 무엇이겠느냐? 형상과도 다르고, 데미우르고스의 운동과도 다른 것은 우주 안에 있는 어떤 것임이 분명한데, 있는 것과 다른 것, 하나가 아닌 것, 형상과 다른 것, 질서 있는 운동의 원인과 다른 것, 그래서 질서에 따르도록 타이르면 그 타이름을 따르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엇나가기도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겠느냐? 그래,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 여럿인 것, 움직이는 것, 움직이되 내버려 두면 번번이 무질서와 혼돈 쪽으로 몸을 맡기려고 하는 것, 네 할아버지가 흔적〔ikne〕이라고도 부르고, 방황하는 원인〔planomene aitia〕이라고도 부르고, 생성〔gignomenon〕이라고도 부른 바로 그것이 아니더냐? 이야기가 너무 장황하게 늘어져서 곁길로 새어 나간 느낌이 없지 않다마는, 네 할아버지가 그려 놓았을 것으로 보이는 우주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자꾸나. 너도 이 그림이 네 할아버지 머릿속에 들어 있는 우주의 모습이라는 걸 인정하느냐?” “그림이 삭막하기는 하지만 얼추 비슷하네요.” “삭막하기는 네 머릿속에 들어 있는 우주의 모습도 오십 보 백 보야. 어디 네 우주와 네 할아버지의 우주 그림을 나란히 그려 놓고 견주어 보랴?
보다시피 네 우주의 모습과 플라톤 옹이 생각한 우주의 모습은 정반대가 아니냐? 먼저 플라톤은 우주의 밖에 있는 것(①)을 두고, 있는 것의 세계와 맞닿아 있는 같은 것의 고리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우주의 중심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을 두었는데, 너는 거꾸로 우주의 중심에 하나(있는 것)를 두고 우주의 맨 바깥쪽에 없는 것을 두고 있지?” “네, 그렇습니다.” “다음으로 너는 마치 해에서 햇살이 흘러나와 사방으로 흩어질 적에 빛의 중심인 해에 가까이 있을수록 빛다발이 더 많이 뭉쳐 있고, 해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빛다발이 성글어지면서 햇살이 힘을 잃는 것처럼 하나에 가장 가까운 누스(nous)에서 프시케(psyche)를 거쳐 힐레(hyle)에 이르는 동안 있는 것이 조금씩 잇달아 빠져나가 마침내 있는 것이 없는 완전한 결핍 단계에 이르는 것으로 보아, 우주의 중심에 있는 하나(있는 것)에서 멀어질수록 없는 것이 지배하는 어둠의 영역으로 확산하는 우주를 그리고 있는데, 플라톤은 반대로 중심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을 소마(soma)가 감싸 안고, 소마를 프시케(psyche)가 또 감싸 안아 흩어지지 못하게 하고, 개별화하는 경향을 지닌 프쉬케를 그보다 더 강한 끈을 지닌 누스(nous)가 감싸서 우주가 전체로서 질서 있는 하나의 틀을 유지하도록 하고, 마지막으로는 맨 바깥에 있는 있는 것과 같은 것인 같음(또는 같은 것=tauton)의 끈이 우주를 칭칭 동여서 하나로 수렴하는 우주를 그리고 있지 않느냐?” “그것도 맞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로 뭉치는 네 할아버지의 우주와 여럿으로 흩어지는 너의 우주는 전혀 거꾸로가 아니냐?” “바로 보셨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무엇인가 빠져 있는 것, 비어 있는 것은 빠진 무엇이 채워지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이 아쉬움이 그리움을 낳고, 이 그리움이 절실하면 할수록 빠져 있는 그 무엇, 다시 말해서 하나를 찾으려는 열망이 그만큼 강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 할아버지의 우주는 이미 하나로 완성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충만한 우주에는 크게 보아 빠진 것, 아쉬운 것이 없습니다. 이 우주 밖에는 텅 빈 것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할아버지의 우주에서 완전한 결핍과 비슷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주의 중심에 점의 형태로나 있겠지요. 그리고 할아버지의 우주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우리가 사는 지구일 터이므로 현상만 살피면 이 지구에는 온갖 혼란이 일상화되어 있고 우리의 의식도 그 영향을 받아 혼란 투성이가 됩니다. 그러나 이 우주 내부의 모순은 비록 근본적으로는 해결될 길이 없다 할지라도 사람의 경우에는 영혼의 정화를 통해서 ‘하나와 같은 것〔tauton〕’의 경지에 이를 수 있으므로 사람에게는 구원의 길이 열려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보시다시피 제가 그리는 우주는 허무에 둘러싸여서 어찌 보면 훨씬 더 상황이 비극적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우주에는 ‘아예 없는 것(허무)’을 빼면 아무리 희미하게나마 하나인 있는 것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닿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어둠을 헤치고 이 빛살을 따라가면 우주의 모든 것이 다 하나와 하나가 되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떻든 네 우주 모형에 따르면 여러 우주, 무한한 우주가 있다고 할 수밖에 없는데, 네 할아버지의 우주 모형에 따르면 하나의 우주밖에 있을 수 없거든.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찌하여 너를 신플라톤주의자라고 부르고, 심지어는 신플라톤주의의 창시자라는 딱지까지 붙이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구나.” “그거야 제 잘못이 아니지요. 제가 그리는 우주가 플라톤 할아버지의 우주와는 달리 닫힌 우주가 아니고 열린 우주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제가 이런 우주를 생각하게 되기까지는 고조할아버지인 파르메니데스 옹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버지인 아리스토텔레스 옹에 이르기까지 이루어 놓으신 형이상학의 유산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힘을 입었습니다. 특히 할아버지 플라톤 옹의 영향은 더없이 컸지요. 저는 파르메니데스 옹이 하나로 있는 것만 인정한 결과로 후손들을 어떤 궁지에 빠뜨렸는지 잘 알고 있었고, 이 궁지에서 벗어나려고 할아버지 플라톤 옹이 여러 하나인 형상의 세계를 가정한 결과로 어떤 문제는 해결했지만, 그에 못지 않은 골치 아픈 문제를 새로 불러일으켰다는 것도 분명히 이해했습니다. 또 아버지인 아리스토텔레스 옹이 형상의 세계를 거부하고 형상의 세계와 경험 세계라는 두 세계 사이에 있는 틈을 메워 보려고 애를 썼지만 어느 점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눈치챘지요. 따라서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은 이 모든 작업의 성과를 한데 모아서 모순 없는 체계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가 비록 제 조상들의 뜻에 어긋나는 쪽으로 드러났더라도 너그러이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