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 탐험(18)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 탐험(18)
글: 이정호 (방송통신대학교 교수)
* 주제 3에서는 부르크하르트의 『그리스 문화사』제8장 “Zur Philosophie, Wissenschaft und Redekunst”(Gesammelte Werke, Band VII, s. 275-421)의 내용을 수회에 걸쳐 발췌 요약하는 방식으로 소개한다.
주제 3 : 부르크하르트의 『그리스 문화사』: 그리스 철학과 과학의 지성사적 기원과 의미
2. 신화와의 결별
가. 현인들의 등장
철학의 시초로 여겨지는 이오니아학파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잠언들이 지혜의 옷이었다. 이른바 7현인으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은 이 잠언들을 만들어 낸 사람들 중 가장 알려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아직 신화와 결별 하지는 않았지만 신화에 비의존적인 사유 세계를 들고 나왔다. 이들 일곱 명의 이름들은 늘 하나같지는 않았다. 언제나 거론되었던 사람은 탈레스(Thales), 핏타코스(Pittakos), 비아스(Bias) 그리고 솔론(Solon)이고, 나머지 3사람으로는 코린도스의 클레오불로스(Kleobulos), 스파르타 사람 케일론(Keilon), 페레퀴데스(Pherekydes), 아나카르시스(Anacharsis), 에피메니데스(Epimenides) 등이 각기 다른 조합으로 함께 거론되었다. 이 현인들에 참주가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는 후대의 견해 때문에 그리스의 솔로몬이라고 일컬어지는 코린토스의 페리안드로스(Periandros) 대신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라코니아(혹은 크레테) 출신 뮈손(Mys?n)이 거론되기도 하였다. 플루타르코스는 ‘현인(sophos)’이라는 호칭이 대부분 정치영역에서의 탁월한 능력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고 탈레스만이 그러한 실제적인 요구를 넘어선 인물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탈레스는 현인인 동시에 이오니아 철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왔고 헤로도토스의 책에서는(『역사』 제1권 74-75) 일식(日蝕)을 산정해내거나 할뤼스(Halys) 강의 흐름을 바꾸는 등 다방면으로 다재다능한 사람으로 나타나 있다. 하지만 그리스 사람들은 이러한 현인들 모두를 아직은 얼마간 신화적이고 일정한 유형적 특색을 가진 인물들로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연대 상 태어난 해가 백년 이상이나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모두 델포이 혹은 코린토스에서 열리는 페리안드로스의 향연 모임에 함께 자리하게 한 들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 이들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특별한 신화적 표현이 바다 속으로부터 주워 올려진 “황금 솥” 이야기에서 발견된다. 델포이의 신탁에 의하면, 이 솥은 가장 영리한 사람(신을 경애하는 마음이 가장 열렬한 사람이 아니라)에게 하사되었던 까닭에 소유권이 우선 탈레스(혹은 비아스)로부터 시작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차례차례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누구도 이것을 영구적으로 소유할 수 없었고 그래서 마침내 이 솥은 델포이 혹은 이스메네스강의 아폴론에게 헌납되었다.
델포이 신전의 벽에는 이들 일곱 명의 현인들의 잠언들이 황금 문자로 각각 적혀있었다. 이것이 언제, 어떻게 또 누구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들에게 이러한 잠언들 중 일부가 전해지고 있다. 그것들 중에는 잠언뿐만이 아니라 잠언풍의 경구( Apophthegmen) 및 일화도 들어 있다. 대부분은 윤리적 성격을 띠고 있지만 그 중 아주 짧으면서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들이 가장 비중 있게 여겨졌다. 또 담긴 내용들이 항상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그곳에는 “다수(die Mehrzahl)는 나쁘다”라는 말도 있다.
잠언투의 말이 어느 모로나 예전부터 있어왔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것은 이미 헤시오도스의 『일과 나날』에서도 많이 발견되고, 다른 한편 스파르타 사람들 역시 스파르타식 간결한 표현으로 잠언투로 말하는 형색을 계속 유지해오고 있었다. 이 점에서는 그리스인들과 오리엔트 사람들 모두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오리엔트 사람들의 경우는, 인도는 예외이긴 하지만, 격언적인 것(즉, 개인적이고 윤리적인 것) 이상으로, 그것도 비유적 이야기의 단계 이상으로 나가지는 못했고 어떤 윤리학도 전체적으로 이러한 것들과 관계를 끊는 일이 없었다.
7현인들에 병행해서 그들과는 다른 계열의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그들과 동시대에 살면서 그들과 접촉했던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기인(奇人)들(die wunderlichen Heiligen)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으나 그들을 하나의 명칭으로 거론하기는 쉽지 않다. 그리스인들은 아주 특별할 정도의 뛰어난 사유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특히 다음과 같은 제약 또한 가지고 있었다. 즉 그리스의 민족종교가 형이상학적으로 견실하지 못하고 게다가 부정합적인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 민족 종교는 우주 만물에 대한 설명으로서도 불충분한데다가 사람들에게 어떤 것을 분명하게 설명하는데도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아무런 윤리적 규정에도 이르지 못했다. 그리고 이 종교에서는 일부 오리엔트 민족 종교에서 압도적으로 나타난 것과 같은 신관에 의한 조직적인 변혁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브라만교의 조직, 조로아스터, 모세 등등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종교들이 거쳐 온 변혁의 과정이 이 종교에서도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고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았다. 그러한 까닭에 천성적으로 사유능력을 타고 난 이 기인 내지 괴짜들이 자기들의 민족 종교에 대해서 일시적으로 제기 했었던 특별한 이념조차도 여전히 종교적인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표현에 있어서도 비유적이고 신화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조차 모든 사태를 나타냄에 있어 (더 이상 비할 데가 없었던) 신화적인 표현법을 포기한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쨌거나 이와 같이 자력으로 자기들의 생각을 신화화해가면서, 다른 한편에서 이미 활동을 시작한 철학과 더불어 그 경쟁자로서 이윽고 아폴론적인 사람들이 등장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 사람들은 금욕에 의해, 마음의 망아적 상태에 의해, 격정으로 들끓고 있는 그리스 전 국토에 속죄의 위로를 주는 정화 의식에 의해, 기적에 의해, 그리고 영혼 윤회라는 교설을 내세워 이상한 빛을 주위사람들에게 비추어가면서 교세를 넓히고 있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그 후 전승에 의해서 다채로운 모습으로 만들어 졌고 공상의 인물이 되어, 그들 자신이 다시 신화적이 되었다. 특히 주목할 것은 그들이 스스로 자신의 육체를 떠날 수 있는 사람들로 알려졌다는 점이다.
이런 사람들의 한 명으로서 누구보다도 먼저 크레테 출신 에피메니데스(Epimenides)를 들 수 있다. 그의 생존연대는 참주 퀼론(kylon)의 피살로 인해 쇠퇴한 아테나이를 그가 정화시켰다(기원전 612년 또는 596년)는 전승에 의해서 확실하게 알려져 있다. 어쨌든 그는 속죄의 신관이고 예언자로서 우주생성론을 썼고 또 그 자신의 주장에 의하면 수차례 윤회전생 했다고 한다. 모든 사태를 유형적으로 파악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의 특징을 한 명의 인물 위에 겹쳐 쌓으려고 하는 그리스인들의 강한 의지는 벌써 이 에피메니데스를 마침내 그리스적 감각이나 사고로부터 생긴 자신들의 공상과 대체로 일치하는 인물 중 한 사람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다음으로 아바리스(Abaris)를 들 수 있는데, 이 사람은 휘페르보로스(Hyperboros) 즉 아폴론신을 숭배하는 민족이 사는 전설상의 나라에 사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기원전 600년 이후) 실제로 생존하고 있었던 사람으로서 정화(淨化) 신탁이나 예언을 행하면서 그리스 본토 전역을 돌아다녔던 사람이다. 후대의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아폴론신에게서 받은 한 개의 화살에 몸을 싣고 공중으로까지 날아다녔다고 한다. 아바리스와는 반대로, 프로콘네소스 출신 아리스테아스(Aristeas)는 북쪽지방으로 가서 그곳에서 휘페르보로스를 찾아다녔다고 알려진 사람인데,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그는 아리마스포이(Arimaspoi) 사람 이야기를 쓴 서사시의 작자이고 포이보스(Phoibos : ‘빛나는’의 의미로 주로 아폴론을 가리키는 수식어)에 의해 접신 상태가 되어 아리마스포이 사람의 이웃인 잇세도네스(Issedones) 사람들의 나라로 갔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원하면 언제라도 자신의 육체를 분리시켰다. 메타폰티온(Metapontion: 타렌툼 해안에 위치한 도시)에서 그가 아폴론신의 수행자로서 까마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 역시 영혼 윤회의 일단이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 이 영혼 윤회 사상을 그리스 본토에서 처음 가르친 사람은 페레퀴데스였다. 그는 퓌타고라스의 스승으로 페니키아의 신비의 책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 역시 특히 지금 전해지고 있는 그의 책(『신들의 탄생』)이 실증하고 있듯이, 사물의 본성에 대한 그의 관념과 예측(Ahnung)을 여전히 신화적 형식으로 포장하고 있다. 그는 점술가이자 천문학자로서 생활하고 있었다.
앞서 우리가 살핀 사람들 각각은 분명 극히 다양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들에 더해서 그야말로 아폴론적이지 않고 오히려 디오뉘소스적인 종파 혹은 당파가 처음으로 출현하기에 이르는데 그들이 곧 오르페우스(Orpheus) 교도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이 오르페우스 교도는 아마도 이미, 앞서 이야기한 사람들로부터 당연히 예상될 수 있는 어떤 상념들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 잘 이용했다고 생각된다. 또 그들은 처음부터 오르페우스와 결부되었다고 거짓으로 꾸민 문헌을 내세워 정화를 통한 행복을 보증하고, 자신들만의 고유한 우주생성론을 주장하였으며 금욕과 채식주의를 실천하였고 행복에 이르는 저 세상에서의 생활을 언급하면서 영혼 윤회의 가르침을 설파하였다. 육식을 금해야 한다는 그들의 생각도 아마 이 영혼 윤회 사상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오르페우스 교도들이 그리스적 삶에 속죄(Buβe)라는 개념을 끌어 들여, 현세의 생활이란 무덤에서의 생활과 서로 닮았다(to s?ma s?ma. 육체는 묘지이다)고 여기면서 이 땅에서 반복되는 탄생의 연쇄(kyklos genese?s)로부터 벗어나는 삶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진정한 삶은 그들에게 있어서 육체성(Leiblichkeit)을 넘어서 있는 저 피안에서 드디어 시작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오르페우스 교도의 조직은 새롭고도 특별한 종교로서 나타나 그 교세를 넓히려고 노력했지만 그러나 그 특수한 내용이 실제로 어느 정도까지 전파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2. 신화와의 결별.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