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루엔[노동이야기]-③

톨루엔[노동이야기]-③

이재원(한철연 회원)

 

1. 겨울

 

숙소는 성남에 있었다. 어떤 사람이 숙소를 썼으나, 퇴사하는 바람에 내가 쓰게 되었다.

지하도 방수작업을 했다. 작업 순서는 크게, 다음과 같다.

ⅰ) 토목회사(이하 토목)에서 버림(버팀 콘크리트였는데, 어느새 버림으로 고정되었다) 콘크리트를 타설한다. 방석 콘크리트(이하 방석)라고도 한다.

ⅱ) 방석 위에 특수본드를 바르고, 합성수지 시트(이하 시트)를 붙인다.

ⅲ) 토목은 그 위에, 1미터 정도의 기초 철근 콘크리트(이하 기초)를 타설한다. 이 때, 양 측면은 30센티미터를 뗀다. 기초 위에 도로를 따라 약 4미터 높이의 벽체를 올린다.

ⅳ) 벽체를 따라 시트를 시공한다.

ⅴ) 시트 보호 모르터(몰탈)를 바른다.

ⅵ) 방수작업이 끝나면 토목회사는 흙, 중요 부위는 콘크리트로 백필(되메우기) 작업을 한다.

ⅴ) 마지막으로, 토목에서 슬라브를 타설하면 그 위에 시트 방수를 하고, 보호 모르터로 마감한다.

 

이렇게 적어보면 무척 쉽다. 그러나 실제는 냉엄하다. 날씨는 영하 15도를 오간다. 온 몸을 싸매었으나, 왼 손 엄지와 검지가 무척 시렸다. 동상인가, 하고 병원에 갔다. 의사는, “동상이라면 살이 썩죠. (당신의 경우)동상이 아니라, 손가락의 실핏줄이 막힌 것 같습니다”라고 진단했다.

휴대용 찜질팩을 반으로 자르고, 자른 부의 내용물이 새어나오지 않도록 테이프로 밀봉한 후, 면장갑 위에 붙였다. 면장갑 위에 커다란 공업용 고무장갑을 끼었다. 한결 따뜻하고 손도 시리지 않았다.

한겨울이지만 지하도 공사장 내부는 춥지 않다. 영상 1도 정도이다. 지금 우리 팀 9명이 작업하는 구간은 세 군데이다. 벽체 시트작업 두 석방(한 석방은 길이 20미터, 높이 5미터 정도), 바닥 두 석방(바닥 한 석방은 가로세로 약 20미터), 벽체 모르터 두 석방이다.

두목노동자 신반장이 총 반장이며, 유반장이 작업을 진행한다. 신 반장은 우선 벽체 모르 터를 끝낸 후, 벽체 시트방수 작업을 하라고 지시했다. 그 와중에 몇몇은 빠져서 벽제 면 정리, 바닥 청소를 해야 한다. 신 반장은 조 반장을 시켜, 권 씨 아줌마와 김 씨 아줌마를 데리고 바닥 정리하러 보냈다. 나머지는 벽체 몰탈을 해야 한다. 조 반장은 오 반장과 함께 아파트 현장에서 작업한다. 지금은 겨울이라서 아파트 방수 작업을 할 수 없어 이 현장으로 왔다.

벽체 모르터는 쉽지 않다. 작업 재료 준비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토목회사는 한꺼번에 작업하는 것이 아니다. 바닥에서 우선 3분의 2 쯤 벽체를 올린 후, 나머지는 슬래브와 함께 벽체를 마감하는 식이다. 따라서 후속 작업을 위해 철근을 1미터 쯤 위로 뽑아 놓는다. 방수보호 모르터는 이 와중에서 작업준비를 해야 한다.

방수 작업을 서두르는 이유가 있다. 백필(되메우기)의 긴급한 필요성 때문이다. 공사구간 양 옆으로 철골과 볼링 콘크리트(볼링 장비로 땅을 뚫어 흙을 끄집어 낸 후 그 안에 철근과 콘크리트로 채워 기둥을 세운 것)를 세워놓았다. 그러나 이는 공사를 하기 위한 임시방편일 뿐이다.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따라서 방수 공사를 한 후 되도록 빨리 되메우기 해야만 임시벽체가 무너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유반장이 작은 김 씨를 데리고 복강판 위에서 레미탈을 내리면 젊은 한 씨와 내가 아래에서 받았다. 복강 판이 벽체 외부로 열려 있다면 작업이 조금 수월하다. 직접 외부 벽체로 레미탈을 받아서 작업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장 사정으로, 이를테면 외부 복강 판이 차도로 이용되고 있다면 일이 좀 더 많아지고 어렵다. 레미탈을 벽체 안쪽으로 내린 후, 여기에서 믹서 하여 통으로 담아 철근 너머로 옮겨주어야 하는 번거로운 작업이다.

작은 김 씨는 성격이 온순하다. 일도 물론 잘 한다. 레미탈 믹서기는 위험한 기계이다. 잘못 작업하면 기계의 회전력에 의해 손목을 다치거나 또는 손가락이 부러지기도 한다. 작은 김 씨가 레미탈 섞는 작업을 도맡아 한다. 나와 한 씨는 한 명은 위에서 밧줄로 레미탈을 믹서한 몰탈을 매달아 끌어올려, 벽체 외부로 전달해 준다. 큰 김 씨는 우마에 올라서서 위쪽을 발라간다. 권 씨는 서서, 중간을 발라간다. 박 씨 형님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레미탈을 받아서 큰 김 씨와 권 씨에게 전달해 주는 한 편 쭈그려 앉아, 바닥을 마무리해 간다.

큰 김씨는 66세이다. 그가 하는 말은 뻥이 심해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며칠 전에는 아침 식사하다가, “며느리가 5억 해 먹고 (도망)갔어” 라고 말하는 거다. 작은 김 씨는 친절하다. 그냥 흘려버려도 좋을 이야기를 꼬치꼬치 물었다. “왜 며느리가 돈 먹고 도망가게 놔 두냐” 로부터 시작해서 “아저시가 그토록 돈이 많았더냐”는 식으로 이야기 해 가니, 옆에서 듣기 피곤하다. 차라리 노망난 노인네 말로 알아들었으면 좋겠다.

큰 김 씨는 기골이 장대하다. 그러나 그의 나이는 어쩔 수 없어서 빨리 지친다. 그러면 박 씨가 거들어준다. 미리 앞에 가서 까치발로 서서 벽체를 발라나간다. 그러면 큰 김 씨는 조금 쉬면서 진도를 맞춰 나갈 수 있다.

몰탈 작업에서 한 씨와 나는 별 도움이 안 된다. 둘 다 몰탈을 바르지 못한다. 미장은 기능이되 손목을 많이 사용한다. 전에는 미장의 일당이 가장 비쌌었다. 그만큼 육체적으로도 어렵고 기능을 익히기도 어렵다.

한 씨와 내가 자주 손을 맞추어 하는 일은 벽체 면정리 작업이다. 토목의 일은 항상 거칠어서, 폼과 폼 사이의 이음새가 매끄럽지 못하고, 단차도 많다. 토목 일은 대개, 콘크리트 면을 땅 속에 묻어버리는 탓에 외부에 드러나는 건물을 짓듯이, 벽체 면을 매끄럽도록 신경 쓰지 않는 탓이다.

우리의 사정은 다르다. 벽체 외벽에 방수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벽체 면정리 작업은,

ⅰ) 망치와 노미를 이용해서 반생이(콘크리트 중량과 폼 중량을 버티기 위해 철근과 폼을 연결시킨 부드러운 재질의 굵은 철사)를 끊어낸다.

ⅱ) 단차 부분을 몰탈로 메운다.

ⅲ) 4인치 그라인더로 폼과 폼 연결 부위의 매끄럽지 못 한 부분을 갈아낸다.

 

그라인더 작업 시, 콘크리트 찌꺼기나 튀거나 먼지가 많이 발생하므로, 보안경과 방진 마스크는 필수이다.

한 씨와 나는 비교적 죽이 잘 맞았다. 사다리를 타고 작업해야 할 경우에는 한 사람은 사다리를 잡아주어야 한다. 사다리는 항상 넘어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한 씨는 우리 작업하는 원청회사의 직원이었다. 입사하기 어렵다는 회사이다. 그는 5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다. 겉으로는 멀쩡해서, 의사는 장애 진단을 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한 씨는 업무를 볼 수 없었다. 한직에서 한직으로 밀려가도 업무를 감당할 수 없었다. 자진 퇴사했다. 퇴사 3년 만에 집은 큰 집에서 작은 집으로, 작은 집에서 전세로 옮겨않았다. 금전적으로 견딜 수가 없어서 이 회사 사장에게 연락했다. 단순 노동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장은 한 씨의 대학 동기라고 했다. 한 씨는 지금 이 회사에 2년째 다니고 있다. 때로는 도급 공사도 해 보았다. 그러나 도급은 돈이 남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은 일용직으로만 일한다. 그러나 매일 일 하기에는 힘에 부쳐서, 한 달 15일 정도만 일한다고 했다.

일 끝나면 작업자들은 거의 매일 한 잔씩 한다. 큰 김 씨와 작은 김 씨, 그리고 김 씨 아줌마의 집은 안산이라서, 술자리에 없다. 김 씨 아줌마는 자주 “야, 수원서 한 잔 하고 헤어지자. 니들만 입이냐” 라고 불평했다.

모란시장 뒷골목 대포 집에 자주 갔다. 술 한 접시 5천원, 어마어마한 냄비에 끓여 내오는 홍어찜(실은 가오리 찜) 1만원이다. 때로는 생선 매운탕이 나오는데, 역시 5-6명 술안주 될 만 한 양이 1만원이다.

장날이면 포장마차가 문을 연다. 포장마차는 막걸리 집보다 안주가 비싸다. 양미리 구이, 돼지 사태구이, 횟감도 판다. 1인당 1만 원 정도 꼴이 든다.

뷔페식 오리구이 파는 곳도 있다. 1인당 6천원을 내면 막걸리 한 병에 고기는 무제한이다.

또 다른 포장마차는 좀 더 비싸다. 술값만 내면 안주는 공짜다. 대신 맥주 1병에 5천원이다. 안주는 내장구이가 주를 이룬다. 어느 날 이곳에서 비참한 사람을 보았다. 지능이 모자란 여성이 껌을 팔러 왔다. 술손님들이 장난 반, 욕망 반으로 그녀에게 자주 술을 권한다. 그녀는 이미 취했다. 그녀가 누구에게 라고 할 것 없이 소리쳤다.

“야 한번 빨러 가자. 만 원 만 줘.”

포장마차 주인이 말했다.

“야 야. 정신 차려라. 집에 가라.”

그녀가 포장마차를 나간 후 주인이 말했다.

“남자들이 재를 데리고 가려 해. 따라가는 걸 내가 여러 번 말렸지.”

내가 말했다.

“정신 치료를 받을 수준이네. 정신병원에 입원해서 지옥같이 사는 것보다 그냥 저렇게 사는 게 나으려나?”

작은 김 씨에 의하면 박 씨 형님의 사모님은 상당한 미인이시다. 술자리에서 박 씨 형님에게 사모님에 대해서 물었다.

“사모님이 미인이시라면서요? 노인인데도 그리 미인이세요?”

빙긋 웃으며 박 씨가 말했다.

“아직 노인은 아냐. 나하고 7살 차이거든.”

“결혼은 연애하셨어요? 중매? 사모님 고향은?”

“강 아래(금강 건너, 즉 호남). 그 때는 모두 중매지 뭐.”

“사모님을 사랑하세요?”

“안 그러면 어쩌겠어. 그나마 없으면 늙어 어찌할 거야?”

“평생 돈을 잘 벌어다 주셨어요?”

“평생 이렇게 일했지. 그런데 전에는 일 해서 먹고 살 만 했어. 미장 일이 많기도 하고 일당도 비쌌거든.”

“나는 이해가 안 가더라, 부인을 사랑한다는 사람이나 남편을 사랑한다는 사람. 산에 가면 부부가 함께 오는 것이 통 이해가 안 가. 집에서 내내 잔소리 듣거나 싸울 텐데 산에까지 와서 그러는 거.”

“뭐 사랑하는 척 하는 거겠지.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박 씨 형님은 여기에 기록할 수 없는, 부부간의 내밀한 이야기도 했다.

구정이 왔다. 노동자들은 무사히 겨울을 넘긴 셈이다. 구정을 끼고 한 일주일 일을 쉬는 것이 통례이다. 그러나 신 반장은 이번 구정은 딱 5일만 쉬자고 했다. 그만큼 일이 바쁘다는 뜻이다. 신 반장은 5만원이 든 봉투 하나씩 돌렸다. 유 반장이 신 반장에게 말했다.

“신사장님 정말 감사해요. 이번 겨울 일 못했으면 그냥 몇 백 만원 마이너스거든요. 그러면 내년 일 년 내내 허덕이는데, 이번 겨울에는 일해서 무사히 넘어갔네요.”

유 반장의 말에는 노동에 대한 고마움이 묻어있었다.

그러나 이 말에는 동시에, 노동에 대한 적대적 표현이 숨어있다. 유 반장의 책임은 아니되, 그에게 노동은 살아남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노동이 인간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하는 기본적 이데는 생략되어 있다.

유반장의 말에는 해결되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다. 유 반장은 내년 겨울에는 어쩔 것인가? 내년 겨울에도 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가? 이런 질문들과 노동하는 우리의 현실여건에서 노동에 대한 모든 이데와 앙가주망은 소멸한다. 현장에서는 이렇게 말 할 틈새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뎅커(Danker)로서 갈등이 있다. 그러나 결코 이론을 포기할 수 없다. 이론을 포기하면 패배주의이다. 새로운 세계를 모색하기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론을 모색하는 작업은 오직 하나, 씩씩한 마음을 갖는 수밖에 없다. 허공에 대고 헛소리하듯, 실패할 각오를 하고 이데를 이야기 할 용기가 필요하다.

“한 사회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서는 노동하는 사람이 노동을 통하여 더욱 자기를 발전시켜나갈 조건을 형성하는 노동정책이 필요하다. 그런 사회는 탐욕이나 경쟁이 아니라 상호 신뢰와 협동에 기초하여 노동을 조직하는 사회요, 경직되고 이기적인 개인주의가 아니라 이타심과 온화한 인격주의에 기초한 사회이다. 이런 경우, 경쟁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정책, 동료가 내 협조자라는 관점에서 서로 돕는 신뢰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도록 하는, 인간적 욕구에 응답할 수 있는 노동조건을 구상해야 한다.”

 

2. 여름

 

회사는 내 숙소를 성남에서 영통으로 옮겨주었다. 현장이 가까워서, 통근하는 시간이 짧아서 좋았다. 성남의 그것 보다 깨끗했다. 몇 년 전에 함께 일 한 적이 있는 조반장이, “이 씨, 그냥 성남에 있지 그래. 수원에 홀로 떨어지면 외톨이 아냐, 외톨이” 라고 말 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외톨이가 두렵지 않다.

여름이 되자, 햇빛에 달구어진 복강 판이 열을 전도해, 지하도 온도는 35도가 넘었다. 작업자들은 교대로 캔 맥주를 사 마셨다. 아침 참에 하나, 오후 참 시간에 하나, 그리고 퇴근하면서 한 캔 씩 마시는 식이다. 그러나 술자리가 길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성남 팀이 떠나면 작은 김 씨랑 맥주를 더 마시고 헤어지곤 했다.

작은 김 씨의 화제는 단연 고등학교 3학년인 딸 이야기이다. 실업학교를 다니는데, 은행에 인턴사원이라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하면 취직을 보장해 준다고 했다. 그에게, ‘왜 딸 하나냐, 대개 아들을 바라는 법 아니냐’라고 물었다. 내가 그렇게 믿어서가 아니라, 대화 거리를 만든 셈이다. 김 씨는, “돈이 있어야 키우제, 돈이. 내 처지에 딸 하나 키운 것도 감지덕지요,” 라고 했다.

중국 동포 큰 박 씨와 작은 박 씨가 합세했다. 조 반장은 권 씨와 오 반장, 아줌마 둘을 데리고 신반장의 아파트 현장에서 일한다.

큰 박 씨는 은밀히, 한약재로 만들었다는 중국산 ‘파란’ 약을 팔았다. 작업자들이 사갔다. 약을 써 본 이의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약 성분은 한약재가 아니라 도파민 같은, 일종의 화학 작용제인 듯 했다.

벽체 시트 작업 순서는 다음과 같다.

ⅰ) 콘크리트 이어 친 부분(조인트)과 조인트필터(석방 연결 부위에 콘크리트의 팽창과 수축을 고려해서 넣은 고무판) 부분에 40센티미터 넓이로 특수 본드를 칠한 다음,

ⅱ) 시트(합성수지 방수재, 길이 10미터, 넓이 1미터, 두께 3밀리미터)를 30센티미터 넓이로 잘라 붙인다.

ⅲ) 벽체에 본드를 칠한 다음,

ⅳ) 벽체 길이에 맞춰 시트를 잘라 붙인다.

본드가 문제이다. 겨울에는 휘발성이 약하므로 별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름이 되자, 냄새가 지독했다. 나는 시트작업 할 때는 항상 화학약품을 걸러주는 안면 마스크를 착용했다. 동포 큰 박 씨가 본드를 칠하면서 나가면 나와 박 씨 형님이 시트를 붙인다. 나는 우마 위에서 시트를 받아 펼쳐 벽체에 대면, 박 씨 형님은 바닥에서 랩(시트의 겹쳐 붙임 부위-대개 옆과 아래에 10센티미터를 겹친다)을 보아주는 식으로 붙여나간다.

안면식 마스크를 했으나 식사하러 갈 때 마스크를 벗으면 옷에 냄새가 배어 있었다. 모두들 그 냄새를 싫어했다.

작은 김 씨가 처음부터 이곳 현장에서 작업했다. 시범 시공할 때 원청 소장이 감리에게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원청 소장은 이 특별한 방수재료를 구하기 위해 자기가 무척 애썼다고 하더란다.

대개 발주처는 입찰시 작업 제품명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제품을 만드는 회사마다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재료가 있다. 본드를 쓰지 않는 제품도 있다. 합성수지가 아닌, 고무 시트의 경우에는 프라이머를 도포한 후, 가스 토치를 이용해 작업하기도 한다. 어쨌든 우리가 작업하는 재료는 위험천만한 것이다. 본드 통 표지, 품질 표시 항목을 읽어보았다. 용매제로 ‘톨루엔’을 썼다고 밝혔다. 톨루엔은 신장과 심장에 나쁜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진, 1급 발암물질이다. 작업자들은 한결같이, 하고 많은 제품 중에 하필 왜 이 재료냐는 불평을 했다.

유반 장은 시트작업 시 마스크를 안 썼다. 안면 마스크를 쓰고 작업하다가, 본드 냄새가 마스크 안에 들어오면 나가지 않아 더 위험하다고 했다. 일이 벌어졌다. 작업을 끝내고 나온 유반장이 구토했다. 다시 일어나 걸어가다가 또 구토했다. 사람들이 부축해서 병원으로 갔다. 후에 들으니, 병원에서는 링거 외에는 별 해독제가 없다고 하더란다.

유 반장 사건이 회사에 보고되자, 이 곳 현장 담당이라는 인간이 와서 작업장의 산소농도를 측정했다. 그 후 신 반장은 홴 두 개를 가져왔다. 작업장 양 옆에 설치하자, 냄새가 잘 빠져나갔다.

유 반장은 몇 개월 후 심장 혈관에 관을 삽입하는 시술을 했다. 400만 원 수술비는 신 반장 보증 하에 회사에서 빌려줬다고 한다. 심장 수술과 톨루엔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터널[노동이야기]-②

터널[노동이야기]-②

이재원(한철연 회원)

 

터널 뚫은 것을 볼라 치면 항상 감탄스럽다. 곡선이든 직선이든 어쩌면 저리 앞 뒤 입구가 반듯하게 만날 수 있느냐는 말이다. 몇 십 년 전, 이름도 잊어버린 동료들(대학원 타 학과)과 서해안에 여행 간 적 있었다. 건축기사라서, 어느 회사에 적을 두고 기사 수당을 받아 공부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가 바닷가에서 구멍 뚫린 돌을 주웠다. (내가 보기에는 돌이 아니라 그물을 가라앉히기 위해 시멘트로 만든 어구의 일종이었다.) 그는 ‘구멍 뚫린 돌-시멘트 덩어리-을 얻은 일이 자기에게 행운을 줄 것’이라고 믿었다. 이유인 즉, 막힌 것이 뚫린다는 미래에 대한 암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터널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행운을 이고 있겠다.

외관상 멋들어진 토목공사 작품도 자세히 보면 손볼 곳이 많다. 철근 콘크리트 토목과 건축 구조물의 보수와 방수를 전문으로 하는 이 회사가 하는 작업을 통칭〈그라우팅〉이라 부른다. 이유는 이렇다. 철근 콘크리트를 타설할라치면 양생과정이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재료가 응고하면서 수축이 일어나면 작은 균열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리고 계절과 온도의 변화에 따라 팽창과 수축이 계속되면서 균열은 더욱 심해지거나 콘크리트 부분에 파열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래서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보수가 필수이다.

이곳 터널은 이미 완공 되었으나, 시공한 토목회사는 구조물의 거푸집을 해체하면서 일어난 이음매 파열 부분들을 보양했다. 준공 검사시 파열이 일어나면 공사 부적합 판정을 받는다. 이를 피하기 위해 시멘트 보양을 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안전하지 못하다. 강한 진동에 의해 보양부분이 떨어질 수 있다. 그리고 시멘트 보양물이 떨어지면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기차에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보양물을 제거하는 것이 오늘 작업의 내용이다.

철로 위에 대차바퀴를 앞뒤로 올린다. 총 네 바퀴가 된다. 전에는 대차 바퀴가 쇳덩이였다. 그래서 하나 올리기에도 힘에 버거웠다. 지금은 바퀴를 플라스틱으로 만들었다. 가벼웠다. 밀차 위에 안전발판을 놓는다. 이렇게 해서 대차가 완성된다. 대차 위에 작업 노구들을 싣는다. 작업장까지는 한참을 밀고 가야 한다.

팀장이 도면을 대조하여 작업 부분을 지적해 준다. 작업자들은 우선 1미터 20센티 높이의 비티 아시바(발판)를 설치한다. 낮은 곳은 세 단, 높은 곳은 네 단을 세워야 한다. 네 단을 세우면 까마득하다.

대차에 싣고 온 발전기를 내려 전기선을 연결한다. 그리고 발전기를 가동해 치핑기를 사용하여 보양 부분을 제거한다. 보양물을 떼어내는 치핑 작업시 작업자의 미는 각도가 잘못되면 큰일 난다. 그래서 팀장은 이 작업에 경험 많은 작업자를 시킨다. 작업자 여럿이 교대로 올라가 일을 했다. 까대기, 다른 말로는 치핑기계는 흔들림이 심하다. 독일산 힐티에 노미를 달아 보양 부분과 파열 부분을 제거한다.

비티 아시바는 흔들림이 심하다. 강관을 이용해 보강하면 흔들림이 덜하겠지만 한 군데 작업 시간이 짧아서 자주 옮겨야 한다. 따라서 일 많은 보강 대신 사람의 힘으로 흔들림이 덜 하도록 잡아준다.

이 회사의 노동 조건은 비교적 좋다. 휘몰아 일하도록 작업자를 독려하지 않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든다. 팀장은 원래 두목노동자(도급사장)이다. 그러나 이 현장은 상황이 다르다. 도급을 맡을 만큼 계산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업이 많고 복잡하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는 팀장을 포함한 모든 작업자들은 일당을 받고 일하는, 직영 일급 노동으로 전환한다. 직영 노동은 도급 노동에 비해 작업자들에게 부담이 덜하다. 두목 노동자가 손해를 본다면 회복하기 어렵다. 따라서 도급 노동은 조금이라도 더 작업 속도를 내야 한다. 그만큼 노동자는 힘이 든다. 직영 작업은 우선 이 부담이 줄어든다. 그러나 두목 노동자에서 관리자로 변신한 팀장도 작업자처럼 부담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모쪼록 직영작업이라 해도 회사에 이득이 있어야만 한다. 또한 고객인 원청회사의 요구사항도 들어줘야 한다. 그에게는 스트레스 받는, 고된 작업이다. 그러나 팀장은 이 회사에서 적어도 15년 이상 일했다. 신용이 있는 사람이라서 회사에서 거의 다 믿어주니 그는 비교적 일하기는 쉽다.

길을 떠난다는 것은 항상 즐겁다. 돈이 문제일 뿐이다. 어제 회사의 전화를 받고 길 떠날 때는 즐거웠다. 길 떠나는 것이 왜 즐거운지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떠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서 그렇지 않을까?

인간은 존재한다. 그냥 내던져 있다. 그러나 그는 그냥 내던져진 존재가 아니다. 그의 삶의 방식은 항상 떠나는 자(Ex-istence)이다. 한 군데 머물러 있다면, 정체되어 있다면 그는 안정감에 의해 썩어질 수도 있다. 구르는 돌은 이끼가 끼지 않으며, 호머의 〈배회하는 바위들〉은 고통스럽지만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인간은 지평선을 걸어가는 존재가 아니던가? 걸어갈수록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걷지 않는다면 주변 경관의 변화를 볼 수 없다.

어제 홍성역에서 카드를 내미니 잔액 부족이라 했다. 지갑 깊숙이 넣어 둔 5만원 지폐를 내밀었다. 천안에서 기차를 바꿔 탄 후 열차 까페에서 조심스럽게 잔액 부족이었던 카드를 내밀었다. 한 캔 한 캔 한 것이 네 캔을 마시니 목적지에 도착했다. 경치도 좋고 가을빛도 좋았다. 강폭이 넓디넓은 낙동강도 지나쳐 갔다.

그러나 마냥 좋을 수는 없는 것이 인간사이던가. 총괄 관리팀장 A와 팀장 B는 전에 일하면서 부딪힌 적이 있다.

여관에 짐 풀고 김밥 집으로 저녁식사 하러갔다. B팀장이 들어왔다. 고개를 꾸뻑하는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는 뜨아하게 내 손을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손을 ‘쬐끔’만 내밀었다. 그리고는 저 쪽 자리로 갔다. A팀장이 들어왔다. 얼굴을 뚜렷이 기억 못했던 터라 그의 인사에 조금 시간이 지난 후 답했다. 그 역시 반기는 표정이 아니다. 분위기가 어색해서 밥이 제대로 넘어가지도 않았다. 그나마 전에 보았던(함께 일했던) 김씨(D반장)가 인사해 주었다.

식사 후 만화를 빌려왔다. 분위기가 도대체 식당이나 여관 어디에 머물 수 없어, 도피 겸 기분 전환이 필요했다.

A팀장이 여관 계단에 앉아 있었다. 그가 이야기를 꺼냈다.

“이 차장이 전화해서는 사람 보낼테니 일 시키래요. 그래 여기 현장, 재료도 없고, 11명 왔는데 있는 사람도 처치곤란이다. 바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더 필요하지는 않다는 거죠. 그러나 이 차장은 (보내는 사람) 무조건 일 시키래요. 그러니 분위기 감안해 줘요. 전에 알던(불편했던) 사람이고 아니고의 여부가 문제가 아니라, 현장에 사람이 별로 필요하지 않다는 거죠. 그런데 소장님인 줄은 몰랐죠. 더욱이 불편해요.”

내가 대답했다.

“그런 것 같았습니다. B 팀장 인사하는데, 영 좋은 표정이 아니더군요. 짐작은 했습니다.”

일하는 사람으로서 어디 간들 환영받으랴만, 그라우팅 팀에서 타 그룹에 대한 배척은 일리가 있다. 대개 젊은 축에 속하는 사람들이 그라우팅을 한다. 그리고 똘똘 팀웍을 이루고, 일을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에서 뭔가 끈끈한 관계가 형성된다. 나이 많은 노동자들이 이 팀에는 없다. 무엇보다도 말하기 쉬운 상대, 비슷한 연배이거나 팀장이나 반장보다 나이 어린 사람을 쓴다. 회사의 명령이 아니라면 나를 쓸 이유가 없다.

그러나 팀장이나 작업자, 그리고 내가 불편하다 해서 횡하니 떠날 수는 없다. ‘뭉개고 “개겨” 앉을’ 밖에 없다.

 

어젯밤 빈 집에서 잠을 잘 못 잔 탓에 몸은 고단했다. 일찍 쓰러져 잠들었다.

아침 역시 김밥집이었다. 나는 라면을 시켰다. 라면을 즐겨 먹을 수만 있다면 끼니 걱정이나 맛있는 음식 걱정 안 해도 될 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식사를 끝내고 작업차에 올라타자, A팀장이 말했다.

“왜 라면만 드세요, 다른 것도 좀 드시지.”

“촉망중이라서 무얼 먹을지 영…” 하고 얼버무렸다.

점심이 일품이었다. 팀장이 찾아내, 오늘 처음 식사하는 집이라 했다. 말로만 듣던 갈치 속젓을 쌈채에 싸 먹으니 깊은 맛이 있었다. 고향이 바닷가인 탓에 온갖 젓갈을 즐겨 먹었으며, 지금도 좋아하는 음식이다. 입이 짠 것이나 소금 섭취를 많이 하면 몸에 안 좋다는 것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포만감, 맛있는 음식은 행복하게 한다. 저절로 혼잣말을 했다. ‘신난다.’ 식당 주인이 들었나보다. ‘왜요?’라고 물었다. ‘배불러서요’라고 답했다. 주인이 웃었다.

오후 작업은 견출이었다. 내가 오기 전 작업자들은 4인치 그라인더를 사용하여 구조물 회사(토목회사)에서 보양한 터널 벽체를 3일에 걸쳐 면 정리를 했다. 그러나 면이 고르지 못할 수밖에 없다. 그라인더 면 처리 한 부분을 특수 재료를 사용하여 말끔히 표면처리하는 작업이 견출이다.

ⅰ) Y군이 견출 재료를 희석한다. 시멘트 성분이되, 강도가 강하도록 처리한 메탈에 접착제를 물과 희석하여 잘 섞는다.

ⅱ) 반장 C와 D가 작업자들에게 일을 분담시킨다. 나는 중요하지 않은 일을 맞았다.

ⅲ) 희석한 견출액을 벽체에 바른다. 바르기 위한 준비작업이 필요하다.

우선 높은 곳 벽체를 칠하기 위해 비티 아시바를 설치한다. 견출액을 칠하되, 반듯하게 칠하기 위해 칠 할 부분에만 사각이 되도록 테이프를 붙인다.

ⅳ) 칠하는 것이 간단치 않다. 고루 발라 펴야 하되, 칠한 자국이 남아서도 안 되고, 붙질 흔적이 남아서도 안 된다.

ⅴ) 일부 작업자는 비티 아시바 위에서, 다른 작업자들은 낮은 곳을 칠했다.

잠시 쉬는 시간에 재료를 희석하는 Y군과 이야기했다. 이 팀에서 일하기 3년차라 했다. 군대 가기 전 2년, 군 제대 후 1년 일했다.

그는 일해서 번 돈으로 전문대 건축계열 학과를 졸업했다고 했다. 그가 일 하는 것을 보면 조금도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무거운 것도 번쩍, 시멘트도 번적 든다. 그는 기운이 좋다.

십 년도 지난 일이다. 함께 공부하던 동료들과 방학 중에 이 회사에서 알바한 적 있다. 당시 팀장의 이야기가 기억난다. ‘시상에 교수님들이 워쩐 일이래유. 노가다하러 오구.’ 아마도 강사였던 모양이다. 관절로 고생하던 이 선생은 지금도 강사를 한다. 그때보다 형편이 나아졌다. 그는 이름도 생소한, 방학에도 일정액의 급여를 받는 강사 교수 노동자이다.

후배 서선생은 알바하러 왔다가 사기당할 뻔 했다. 함께 일하던 사람, 우씨와 친해졌다. 그는 살아온 이야기도 하고 회사 돌아가는 이야기도 했다. 서선생은 무엇보다도 우씨로부터 일을 배우는 조공 처지였다. 서선생이 간조(일당을 한거번에 받는 것)했다. 우씨가 돈을 빌려달라 했다. 방학도 끝이 나 서선생은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알바를 마쳐야 했다. 우씨에게 돈 돌려달라 했다. 곧 주마던 우씨는 다음날부터 보이지 않았다. 몇 달 후에 서선생이 어렵게 그 일을 나에게 이야기 했다. 나는 회사에 이야기했다. 다행히 우씨가 받을 돈이 있어, 회사는 직권으로 우씨의 돈을 서선생에게 돌려주었다. 아니라면 서선생은 힘들게 일 한 일당을 날렸을 것이다. 우씨는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후문을 들었다.

 

저녁식사 한 후 여관에 돌아왔다. 대개 지방에 가서 일 할라치면 여관방 하나에 빼곡하게, 그야말로 발 뻗기 힘들게 한 방에서 자는 것이 상례이다. 이 회사가 노동자의 복지에 신경 쓴다는 것은 여관에서도 드러난다. 작업자 두 세 명이 방 하나를 쓴다.

함께 방을 쓰는 이씨는 33살이다. 여러 직업을 전전했으되, 이 팀에 들어온 것은 한 달 남짓하다고 했다. 대개 건축 관련 노동자는 겨울에 일이 없다. 이씨는 그라우팅은 겨울에도 일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는 겨울에도 한 달, 20일 이상 일하기를 기대했다. 나는 마음 속으로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발문에서 이야기했듯이, 기공 목수 1년에 통상 200일밖에 일 못한다. 그라우팅이라 해서 예외는 아니다. 일거리는 불안정하기 짝이 없다.

무릎이 아프고 발목이 아파서 욕조에 물을 받아 온찜질을 했다.

 

이튿날도 견출작업이다. 우선 되나우시(부적합한 작업 재시공)를 했다. 어제 칠한 부분이 원래의 벽체보다 짙은 회색이 나왔다. 따라서 흰 색깔 나는 재료를 섞어 다시 칠한다.

나도 벽체 낮은 부분을 칠했다. 건축 견출 전에 해보았다. 그러나 접착제가 섞인 재료를 곱게 칠하기란 쉽지 않았다. 팀장이 와서 지도해 주고, 반장이 와서 지도해 줘도 곱게 붓질이 되지 않았다.

작업은 힘들다고는 할 수 없다. 반장들도, 작업자들도 서두르지 않았다. 우선 잘 칠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으라고 당부했다.

일 끝나고 터널을 나오며, 작업자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22살 작업자가 어제 친구가 와서 노래방을 갔더랬다. 자기 또래의 아가씨들이 도우미로 왔다. ‘야 너 뽕 넣었냐?’하고 젖가슴에 손을 넣었다. ‘왜 이래’ 하고 반응하며 거부하는 아가씨에게 서울로 춤추러 가지고 했다. 아가씨가 담에 전화하마고 했다. 그날 밤 친구에게 아가씨가 술 취한 채 전화가 왔다. 그 다음 이야기는 못 들었다. 아가씨도 외로웠나보다. 아니면 손님들에게 받는 스트레스가컸던지.

돌아오는 차에서 앞서의 노래방 이야기를 들었던 C반장이 한마디 했다.

“남자들이 그렇게 밝히는데, 여자들이 (혼자 남아) 있겠나.”

그는 7년 연애하던 여성과 헤어졌다. 일방적으로 끝났다. 노가다(육체노동자)와 결혼해 줄 여성은 없다. 그는 이제 결혼을 포기한 상태이다.

도우미, 감정 노동하는 이들을 만나보았다. 이혼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반드시 아이를 키운다. 한결같이 아이만은 잘 키우고 싶다는 바람이다. 아이 키우는 데 돈이 많이 들어간다. 그리고 커리어 우먼, 전문직을 제외하고 여성들에게 일자리는 한정되어있다. 이른 나이에 강제퇴직당하거나 배운 것 없는 남성들의 일자리가 한정되어 있듯이, 젊은 여성이건 중년여성이건 식당, 서빙, 드물게 공장노동이 있다. 도우미는 비교적 수입이 괜찮다고 들었다. 젊은 여성이라면 당연히 편하고 수입 좋은 곳으로 몰릴 수밖에 없다.

실험이라면 이상하고, 교육의 힘을 실감한 적이 있다.

억환이가 노래방 좋아하는 것 모르는 사람이 없다. 노래를 가수 이상으로 잘 부를 뿐만 아니라 감정적인 탓에 즐겨 노래방 간다. 축농증 수술 후에 약간 코먹은 소리를 내긴 하지만 여전이 고음 좋고, 감정 좋다. 노래 잘하는 나 역시 노래방을 즐긴다. 술 한 잔과 친한 친구에게 노래방은 좋다.

돈 잘 벌던 약간 젊은 목수에게 도우미 부르는 것은 (금전적으로) 문제가 없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도우미 Y 부인이 우리와 자주 어울렸다. 그녀는 직업을 바꿀 기회와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의기투합한 우리는 그녀의 직업을 바꾸는 것을 도와주기로 했다. 목표는 당시 수요가 폭발하던 ‘논술교사’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홍선생의 답변을 기금도 기억한다.

“논술교사가 그리 쉽게 되겠나.”

그녀는 주경야독했다. 주간에는 공부하고, 야간에는 노래방에서 일했다. 한가했던 나는 그녀의 수업을 도와주었다. 물론 그녀는 끈질기게 논술 교육기관을 다니는 한 편, 나와 계획한 커리큘럼을 2년 넘게 소화했다.

전직한 그녀는 성공했다. 학원 취업에는 타고 난 용모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력이 있어야 논술선생을 할 수 있다. 전직한 그녀는 1년만에 3-4개 학원을 뛰고 있으며,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한다고 알려왔다. 때로는 나에게, 나이를 상관하지 않는 논술 교육기관의 일거리를 소개해 주기도 했다.

적절한 교육만 받는다면 여성들에게 일거리는 충분히 있다. 문제는 누가 교육비를 대느냐 하는 것이다. 답은 하나다. 모든 이에게 동등한 출발기회를 만들어줄 책임이 있는 ‘국가’가 그 일을 해야 한다.

저녁 식사 후, 씻고는 죽은 듯이 잠들었다.

 

새벽녘이면 기막히게 잠이 깬다. 핸드폰 시계를 켜면 칼같이 5시 55분이다. 바삐 서둘러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식사시간에 맞출 수 있다.

오늘은 어느 정도 작업한 후(점심 식사 후), 세 팀으로 나눠질 것이다. 한 팀은 D반장 인솔 하에 서울로, 또 한 팀은 B팀장 인솔 하에 울산으로 갈 것이다. 따라서 오늘 저녁 남는 이는 네 명일 것이다.

견출작업을 위해 아시바에 올랐다. 함께 아시바에 탄 이로부터 붙질 잘 못한다고 크게 핀잔을 먹었다. 반장 C가 작업하는 아시바에 올랐다. 그가 작업요령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내 작업이 만족스럽지 않은 듯, 그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잠시 뜸을 들인 후 다시 작업방식을 설명했다.

ⅰ) 붓을 견출액에 적시되, 3분의 1가량만 묻힌다.

ⅱ) 넓게 칠하려 하지 말고 한 뼘 정도만 칠한다. 견출액을 묻힌 붓을 칠할 부분에 살짝 묻혀, 아래로 내린 다음 위로 올려 칠하고 다시 내려 칠한다.

ⅲ) 다음번에는 앞에서 칠한 부분과 따로 놀지 않도록, 즉 한꺼번에 칠한 것처럼 마지막 붓질에서 위로 올려준다.

점심 식사 후 휴식 시간에 현장 주변 감나무 밭을 구경했다. 노인 한 분이 감나무 일을 하는지, 그늘에 앉아 쉬고 있다. 보통 3-4년 생이라는 내 키보다 작은 나무들이 한 20개 씩 감을 안고 있다. 물감이라고 부르는 대봉이다. 감을 많이 매단 채, 나무 두 그루가 말라죽어 있다. 노인은, 느티나무가 감나무를 죽였다고 했다. 말인즉슨, 느티나무가 감나무 먹을 양분과 수분을 빨아들여 감나무가 진 탓에 죽었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햇빛이 부족해서 죽은 듯 했다. 식물은 보통 일조량의 70퍼센트가 필요하다고 한다.

네 사람이 남으니 현장이 조용해졌다. 견출 일이 끝난 후, 내일 A팀장이 지수작업(지하 구조물에 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는 작업)할 현장으로 와, 잠시 구경했다. 팀장은 사진과 현장 위치를 대조했다. 화이바(플라스틱 헬멧)가 머리를 조여, 아팠다. 화이바를 머리 뒤로 걸쳐 쓴 순간, 원청 회사 관리 직원에게 ‘딱’ 걸렸다. 그가 나를 보며 말했다.

“안전교육 받았어요?”

나는 순간 당황하여, “네”라고 말했다. 그가 반말 수준으로 재차 말했다.

“헬멧을 그렇게 쓰라 해?”

순간,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고 사람들 뒤로 숨듯, ‘꼬리’를 내렸다. 그의 말투는 난폭한 수준이었으며, 눈빛은 사나웠다. 나는 뒤돌아서서 ‘오직 지도의 대상으로만 사람을 대하는 인간’라고 생각했다.

 

시간 참 잘 간다. 일 끝나면 식사하고 자고, 일하고 자고, 순식간에 나흘째다.

오늘은 인젝션 작업이다. 작은 균열에 콘크리트 접착제, ‘에폭시’를 주입한다.

이 작업을 20년 전에 해 보았다. 만조가 되면 비오듯 물이 쏟아지는 해수면 이하의 터널 공사장이었다. 30여 명이 달려들어 밤 낮 없이 지수작업과 균열작업을 했다. 나는 두어 달 동안 그곳에서 일했다.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그 엄청난 물을 다 막았다는 것, 그리고 시골스런 생맥주집에 노래방 기계가 있어, 해변을 바라보며 노래 부르던 것, 그리고 가수 이상으로 고음이 올라가던, 목청 좋은 서빙 아가씨의 노래, 그리고 지금은 이 회사에서 일하지 않는,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다.

교각(다리 기둥)은 어쩌면 구조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앞에서 말했듯, 콘크리트 양생 과정에서 교각에 잔 균열이 생긴다. 그라우팅은 미국에서 발전시킨 콘크리트 보수 방법이다. 들은 이야기로는 미국 건축 교범에는 엄격한 보수 규정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균열을 보수할 수는 없다. 보수 비용도 문제이려니와 그 효과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교각 보수 시범 시공하는 작업이다.

작업순서는,

ⅰ) 씰링 작업과 좌대 붙이는 작업이 첫 날 일이다. 주사기를 걸어둘 좌대를 균열 부위에 붙인다. 교각 균열 부분을 따라 씰링을 한다. 이 작업은 실링제 주제와 경화제를 2대 1로 덜어내 잘 섞은 다음, 균열부위를 따라 발라주되, 좌대를 붙일 부분, 약 2-3 센티미터 떼어 놓는다.

ⅱ) 씰란트 주제와 경화제를 1대 1 비율로 판대기에 덜어내 잘 섞은 다음, 헤라를 사용하여 좌대 가장자리에 발라준다. 이 때, 씰란트제를 많이 바르면 좌대 구멍이 막힐 수 있다. 적당량을 발라 주는 것이 중요하다.

ⅲ) 씰란트를 바른 좌대를 균열부위, 씰링 안 한 부위에 붙여준다.

하루가 지나면 씰링제와 씰란트제가 굳어진다. 그 위에 균열 보수제를 넣은 주사기를 매단다. 그러면 균열을 따라 보수제가 교각 콘크리트 안으로 스며든다. 보수제는 콘크리트와 콘크리드를 강하게 결착시켜준다.

또 주사기의 균열 보수제는 다시 하루가 지나면 굳는다. 좌대를 분인 후 사흘만에 마무리 작업을 한다. 우선 좌대와 주사기를 떼어내고, 4인치 그라인더로 씰링제와 씰란트를 제거한다.

주입작업은 물량이 많든 적든, 반드시 3일이 필요한 작업이다.

오전에 좌대와 씰링작업을 끝냈다. 오후에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보수를 요구하는 사진과 현장을 대조했다. 작업 현장을 찾아내는 것도 일이다. 팀장의 일이긴 하지만, 작업자들도 알아야만 작업 준비를 쉽게 할 수 있다.

현장을 돌아다니는 자동차 길은 예뻤고, 가을 햇볕은 맑고 청명했다. 논둑, 밭둑마다 감나무가 심겨져 있었는데, 주먹보다도 큰 감이 주렁주렁, 황금빛을 띤 채 매달려 있었다.

일찍 일이 끝나, 도서관으로 갔다. 디지털 미디어실 사용 예약에 딱 한 대 남은 컴퓨터는 한글 프로그램이 작동되지 않았다. 이층 컴퓨터는 2007 한글이되, 원인 모를 이유로 작동되지 않았다. 직원에게 물으니, “프로그램을 사지 못해서요”, 라고 답했다. “아 씨”라고 혼잣말 하고 내려와 다시 디지털 방에 들르니, 10분 후 컴퓨터 한 대가 빈다고 했다. 담배 한 대 피우고 들어가 컴퓨터 작업을 했다.

직원인지, 자원봉사자인지 알 수 없는 이가 데스크에 앉아있다. 전화를 하는데 상식이하로 떠든다. 사적 이야기도 많다. 뒤에 앉은 아저씨가 한마디 했다.

“시작됐다. 몇일 안 보인다 했더만.”

프린터를 하려 했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한숨을 쉬고 도서관을 나왔다. 모든 이에게 그렇겠지만, 나에게는 귀중한 시간이다. 도서관에서 노동하는 이들이 좀 더 성실히 일 해 준다면 이처럼 헛걸음을 하지 않아도 될 텐데…

여관으로 걸어갔다. 시장을 지나는데, ‘전어회’라는 간판이 보였다. 살이 통통하게 찌는 가을 전어는 맛있다. 1킬로를 회 떠서 여관으로 갔다. 이씨가 술을 사왔다. 잘 먹었다.

술자리 끝난 후, 방으로 돌아왔다. 뒤따라 A팀장이 내 방에 들어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빠듯한 식사 비용 문제, 팀장으로서 겪는 스트레스이야기 끝에 예전에 내가 B와 부딪혔던 이야기가 나왔다.

몇 년 전, 나는 이 회사의 관리자(현장소장)를 했다. 당시에는 작업자였던 B팀장이 균열보수를 하러 내려와 있었다. 직영 노동자 5-6명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현장이었다. 보수 팀 중에 L씨 형제가 있었다. 균열 보수 일거리가 마땅치 않은 이들은 손이 비는 날에는 우리 일을 지원해 주었다. 형제 중 형이 내 눈에 들었다. 요즘 말로 천연기념물, 자기 이득을 챙기겠지만, 어쨌든 성실하게 개인 이익 생각 안하고 일하는 사람이었다. 형제와 나는 약속을 했다. 형제의 동생이 팀장이었다. 수입이 될 일거리 보장해 준다면 우리 일을 전적으로 도와주겠다고 했다. 나는 일거리를 보장했다. 그러나 지금의 B팀장, 당시에는 A팀장의 구성원이었던 이가 말했다. “L씨 형제를 보내야 하겠다. (균열 보수) 일거리는 없고, 두 팀이 나눠 먹기는 어렵다.”

나는 L씨 형제와 한 약속을 지켜야 했다. 일거리를 두 팀이 나눠먹도록 조정하려 했으나, 본사의 관리자가 직접 조정을 자처하고 나서는 통에 그것도 쉽지 않았다. 결국 지금의 B팀장이 물러나야 했다.

A팀장 이야기로는 그(B)가 지금도 그 일을 잊지 못한다는 것이다. A팀장이 말했다.

“물론 소장님이야 (L 형제와) 약속을 지키려 했다지만, B에게는 밥그릇 문제가 달린 것이었죠. 아직도 그 응어리는 남아 있을 겁니다. B가 껄끄러워 할지라도 (당신이) 이해야 됩니다.”

지나보면, 현장을 꾸려나가기 위해서는 남에게 못할 일도 했다. 도대체 현장 분위기, 태업을 일삼는 이들과 함께 일하기는 쉽지 않다. 당시에 네 명인가를 해고했다. 비록 그들이 해고 고용보험을 타먹었을지라도, 지금 만난다 해도 그들은 나를 원망할 것임에 틀림없다.

 

오늘은 주입 작업이다. 좌대와 씰링제는 잘 굳었다. 에폭시 주제와 경화제를 희석하여 주사기에 넣는다. 병원에서 하듯이, 주둥이를 에폭시에 넣고 손잡이를 잡아다녀, 주사기 안에 에폭시가 들어가도록 한다. 다음 고무줄을 이용하여 주사기를 좌대에 고정시킨다. 그러면 에폭시는 균열을 따라 콘트리트 속으로 들어간다.

약하게 씰링한 부분에서 에폭시가 새어 나왔다. A팀장이 어제 씰링작업을 한 반장에게 이 부분에 대해 ‘쫑코’ 주었다. 간단히, “왜 이렇게 새냐?”라고만 말했다. 반장은, “두껍게 (씰링)했는데” 라고 혼잣말인 듯 말했다.

나는 주사기를 좌대에 고정시켰다. 어느 부분은 주사액이 금방 없어진다. 외부에서 보이지 않는 동공이 균열 안에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빈 주사기를 빼 내고 충진제가 들어찬 주사기로 대체한다. 무심코 빈 주사기를 에폭시가 들어차있는 주사기로 바꾸는데, 반장이 와서 난리를 쳤다. ‘옆 주사기 자리에서 충진액이 새는데 왜 주사기를 바꾸느냐. 시키는 일만 해라’는 요지였다. 그리고 말 끝에 노가다가 자주 쓰는 육두문자를 덧붙였다.

반장이 잘못 보았다. 세 개의 주사기가 비었으되. 에폭시가 계속 균열 틈에서 새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한 20 센티미터 쯤 흘러내렸을 뿐이다. 더 이상 에폭시가 새어나오지는 않는다는 듯이다.

나는 변명하지 않았다. 반장의 심정이 이해가 가는 것이다. 또, 변명이란 어느 경우이든 자기를 방어하려는, 정신이 약한 사람들의 짓거리가 아닌가.

그러나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나 원 참”하고 혼잣말을 했다.

 

오늘 작업은 인젝션 부분 면 처리(그라인더) 작업이다. 오전 작업하면 끝이다. 즐겁기 짝이 없다.

점심 국이 맛있었다. 겉보기에는 배추 김치와 콩나물 국이다. 그러나 국물을 한 번 뜨니 보통 음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국 말아서 밥 한그릇 뚝딱 해치웠다.

식사를 끝내고 나오며 주방을 향해 “예술 많이 하세요”라고 말했다. 서빙하는 여성이, ‘그렇게 맛있던가요, 콩나물국이?’라고 답했다. 억양이 강한 경상도 사투리이다.

오후에 일하는데, 덕수에게 전화가 왔다. 인터넷 신문 들어가서 (내가 기고한 것) 읽어 보았는데, 뭔가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왜 문단을 이렇게 썼는지, 앞 뒤 문장이 연결 안 되어, 내가 썼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다.

편집자가 기고한 글을 다듬는 것은 뭐라 말 할 수 없는 부분이다. 따라서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낼 수도 있고, 책임질 수 없거나 검증할 수 없는 단락을 잘라낼 수도 있다. 결국 필자의 몫도 있으되, 편집자의 권리도 있는 것이다. 나는 그 글을 조금 서둘러 쓰기는 했다. 그러나 상징적으로 말 한 부분이나 요설(?)이라 할 부분들이 뭉텅이로 잘려나가 있었다. 지면을 조정하려 했거니, 하고 넘어갔으나, 덕수의 말을 들으니, 조금 기분이 언짢았다.

덕수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사흘 만에 쓰셨다니 이해가 가요. 다음에는 시간을 충분히 잡아서 잘 쓰세요.”

나는 웃으며 그러마고 했다.

저녁 식사 후 컴퓨터방에서 타이핑하는데, 덕수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웹진에 노동일기 쓰기로 해서 작업한다고 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덕수가 중고 노트북 컴퓨터 사 보내겠다고 제안을 했다. 여관에서 컴퓨터 작업하면 더 좋을 듯 했다. 나는 다음달 10일, 간조하면 컴퓨터 값을 보내기로 하고는, 컴퓨터를 사기로 했다.

한 시간도 안 되어 인터넷으로 노트북을 사서, 택배로 보낸 후 덕수는 다음과 같이 메세지를 보냈다.

“글도 한번 멋지게 써 보세요. ㅎㅎ 틈틈이 써 두셔서 나중에 책으로 엮을 만하게요.”

 

발주처 사정으로 몇 일간 터널 견출 작업을 못했다. 오늘부터 다시 견출 작업이다. 서울로 갔던 팀들도 합류해, 9명이 작업을 했다. 항상 일을 준비하는 시간이 길다. 전에 다녔던 길에 울타리를 치거나 길을 없애고 자연스럽게 언덕을 만들고 있다. 작업 도구와 재료들을 차에 싣고, 비교적 가까운 터널 쪽으로 갔다. 그리고 일일이 사람 손으로 대차가 다닐 수 있는 곳까지 날랐다. 백시멘트 30포, 메탈 20포, 물통 6개, 아시바 2조, 시멘트와 메탈을 믹서할 커다란 플라스틱 통 2개 등, 옮기는 데만 40여 분이 걸렸다. 목수 노동에 비해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서울 갔다 온 팀원, 대전 산다는 젊은이에게 물었다. “집이 대전이라든데, 서울로 일하러 가면 어디서 자는가.” 그는 “숙소(에서 잔다)”라고 말했다. 다시 물었다. “몇 명이 숙소를 쓰는가.” “여덟 명”이라고 답했다. 재차 물었다. “재미있겠네, 여럿이 함께 지내니.” 그는 “재미없어요”라고 답했다.

숙소 생활 한 적이 있다. 여럿이 함께 쓰면 도대체 개인 생활이란 없다. 항상 다른 이를 배려해야 한다. 그 중에 못된 인간, 폭력적 인간이라도 하나 낀다면 지옥이다.

작업 끝내고 대차에 작업도구와 재료들을 싣고 나오면서, 짐을 싣고 오는 포크레인과 교차했다. 잠시 후 짐을 부렸는지, 포크레인이 되돌아 나왔다. 기사는 약간 서두르는 기색이 있었다. 크랙션을 누르길래 우리가 잠시 대차를 멈추자 포크레인은 우리를 추월해 갔다. 도로가 아닌 길을 저렇게 서둘러도 되는가, 하는 순간, 포크레인이 균형을 잃고 옆으로 넘어졌다. 바삐 그 쪽으로 걸어갔다. 포크레인 기사가 깨진 유리창을 밀고 기어나왔다. 기사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다행히 다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운전석에서 기사의 신발을 꺼내 주었다. 옆으로 누운 기름통에서 경유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퇴근 시간이 바빠서였을까, 서두르던 그는 한 순간에 크게 손해를 보았다. 운전석 유리창을 갈아 끼워야 하고, 차를 일으켜 세우려면 다른 포크레인을 불러야 한다.

저녁식사 하러 식당에 들렀다. 식당주인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식당을 운영하는 것이 고된 일인 줄 알지만,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일하는 줄 알지만. 식당주인이 장비 기사나 건축노동자에 비해 비교적 안전한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식사하며 팀장이 말했다. “앞으로 5일간 누구 한 사람도 일을 빠져서는 안 된다. 술 먹는 거 말 안하겠지만, 어떤 이유로든 작업에 빠지지는 마라. 5일 내에 반드시 작업을 끝내줘야 한다. 거듭 부탁한다. 건강 챙겨 일해 주기 바란다.”

노트북이 도착했다. 외관은 깔끔했다. 유에스비 장치가 잘 작동되지 않아 애먹었다. 어찌어찌 해서 사용할 수 있었다. 좋다.

 

아침부터 두 팀으로 나눠 작업을 시작했다. 지수, 균열보수팀 4인은 A 팀장이 인솔해 가고, 나머지 6명은 견출작업장으로 갔다. 재료를 어제 올려놓았으므로 빈 손으로 터널로 가는데, 무척 편했다. 그러나 작업이 지루해졌다. 그만 좀 했으면 싶다. 천안으로 돌아가 책을 읽거나 놀고 싶다.

또는 목수일 다니고 싶기도 하다. 목수일은 비록 힘들지라도 지루하지는 않다. 항상 새로운 일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계속 일이 바뀐다. 그러나 견출은 항상 같은 작업이다. 그러나 시간은 잘 갔다. 잘 칠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리라.

민씨와 아시바에 올라 작업했다. 오른 손을 써서 칠하는데 어깨부터 팔꿈치, 손목이 아팠다. 민씨 작업하는 것을 보노라니, 오른손과 왼 손을 번갈아 사용했다. 나도 왼 손으로 칠해 보았다. 어색하긴 하지만 제법 칠할 수 있었다. 교대로 칠하면서 오른 손을 조금 쉴 수 있었다. 그러나 속도가 문제였다. 다른 사람들은 오늘 안으로 세 번째 터널을 끝내려고 열심이다. 그러니 마냥 왼손으로 칠할 수만은 없었다.

점심 먹으러 나오며 들국화를 한 아름 꺾었다. 말려서 베갯닛에 넣어야겠다.

몇 년 전에는 가을마다 들국화를 꺾어 말렸다. 애 엄마에게도 보내 주고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모두 좋아했다. 애엄마가 덕수에게 들국화 베갯닛을 해 주었는데, 매번 그 베개를 쓰더라는 기억이 떠올랐다.

감기 기운을 느낀 것은 점심 먹는 중이었다. 콧물이 나오고, 코가 맹맹했다. 감기기운을 이기려고 미역국을 두 그릇 먹었다.

잠깐의 휴식시간이 있었다. 들국화를 한 아름 더 꺾었다.

오후 작업하는 터널은 바람이 세게 불었다. 길이가 짧고 양 끝은 골짜기를 이루어서 저절로 바람이 만들어지는 지형이었다. 가슴이 서늘했으나 일을 시작하자 곧 추위를 잊을 수 있었다.

B팀장이 견출액을 섞어주었다. 반장 둘, 나를 포함한 작업원 셋, 여섯이서 일하는데 작업 속도가 무척 빨랐다.

원청회사 안전원이 왔다. 시험 운행이 있을 예정이란다. 100킬로미터로 달릴 것이므로, 운행 차선에서 작업하지 말기를 당부했다.

열차는 계속 달리는 것이 아니라, 약 천여 미터씩 왕복했다. 백 킬로미터로 달리는 소음이 엄청났다. 양 손으로 귀를 얼른 막았다.

일 끝나고 현장을 나오며 작업자 한 사람이 길 옆 감나무에서 여러 개를 따, 가방에 담았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지방 오면 이런 맛이라도 있어야지.”

저녁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A 팀장이 말했다.

“소장님 일정이 어떻게 되시는지, 여기 끝나고 전라도 쪽으로 보내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가지요”라고 했다. 옆에 앉아있던 이씨가, “지리산 가신다면서요.”라고 했다. 나는 엉겁결에, “하루쯤 지리산 구경하고 가지요 뭐. 여기까지 와서 지리산 구경 안 하다니…” 했더니 단번에 A팀장의 응답이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지리산 구경 못하는 우리들….” 나는 열없어서, “지리산 간다고 하면 ‘그래 너 잘났다’라고 할 테니, 다리 아파 하루 지체해서 간다든가”라고 얼버무렸다.

여기 현장 끝나면 A팀은 바로 서울로 옮겨 일해야 한다. A팀장이 덧붙였다. “전라도 현장도 무척 바쁜가봐요, 남은 시간이 열흘이라나” 라고 했다. 나는 속으로, 지리산은 다음으로 미뤄야겠다고 생각했다.

밤늦게 통닭이 들어왔다. 어젯밤, 멤버들 모여 포커했다. 15만원 잃은 사람 덜 억울하도록 딴 사람이 통닭을 샀단다. 도박과 저축은 배우지 않아도 재미있으니, 배우지 말라는 옛 사람의 말이 있다고 한다.

통닭에 막걸리를 데워서 마셨다. 이씨는 드라마를 꼭 챙겨본다. 드라마가 끝나자, 〈세상에 이런 일이〉를 본다. 장애인 부인을 돌보는 남자 이야기가 방송되었다. 그가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질문을 내게 돌렸다. “아저씨 좋은 세상 만들려고 (글을) 쓰신다면서요?” 내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중얼거렸다. “옆 사람을 배려해야지. 말로만 하는 사람은 안 돼. 저런 사람들이 있어야 세상이 좋아져.”

몇 일전, 컴퓨터가 도착한 이후로 매일 밤마다 타이핑하는 나를 보고, 이씨가 물었다.

“무얼 쓰세요? 왜 쓰세요?”

그 때 나는 얼버무린 듯하다.

“뭐,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어서)…”

방금 이 씨의 말을 듣는 순간 뜨끔했다. 좀 전에 막걸리를 데우며 가스 냄새를 풍겨서인가? 등산 배낭에서 가스버너를 꺼내 조립하여 가스를 켜니, 잘못 조립되었는지, 가스냄새가 났다. 이씨가 말했다.

“가스 냄새 나요. 다음에 해요.”

나는 말없이 버너를 들고 나가 복도에서 막걸리를 데워왔던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른다. 나는 적어도 방을 쓰는 모든 면에서 그를 배려한다. 그러나 무심한 것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A팀장은 가끔 이씨를, ‘4차우너 인간’이라고 부르곤 했다.

 

오늘도 두 팀으로 나눠 일을 시작했다.

나는 낮은 곳을 칠했다. 쪼그려 않아 일하기 불편해서 두 무릎을 땅에 대고, 않아 칠했다. 오른 손이 아프면 왼손으로 칠했다. 비교적 잘 칠해졌다. 무엇보다도 희석액이 부드럽게 섞여, 일 하기가 편했다. 모두들 열심히 칠했다.

견출 팀은 오전 작업이 일찍 끝났다. 터널 하나를 다 끝냈다. 옮겨놓은 재료가 많이 남았다. 이제 다른 터널로 옮겨야 한다. 대차를 설치하고 시멘트와 메탈, 아시바 대, 물통, 자잘한 물건들을 차 댈 수 있는 곳까지 옮겨놓았다. 차에 실어 옮기는 것은 점심 식사 한 후에 하기로 했다. 문제는 차가 짐 옮겨놓은 곳까지 올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울타리를 치기 위해 말목을 밖아 놓아서 차가 들어오기에 방해가 된다.

D반장과 작업자 E 간에 내기가 벌어졌다. D반장은 차가 들어올 수 있는 쪽에, 작업자 E는 못들어오는 쪽에 5만원을 걸었다. 궁금해 견딜 수 없다며, D반장이 차를 운전해 오기 위해 갔다. 한 참 후 차가 들어왔다. 누군가가, “D에게 아이스크림 사라고 하자”라고 말했다. E는 “만원만 깎아 달래야지”라고 말했다.

농협 마트에 들러 각자 하나씩 자기 먹을 것을 골랐다.

D반장에게 B팀 숙소에 대해 물어보았다. “B팀장 혼자 숙소를 꾸려나가는가, 아니면 회사에서 도와주는가.” 대답은 이랬다. “회사에서 도와주지 않는다. 숙소를 쓰는 사람들이 얼마씩 나눠 부담한다.” 회사에서 비용 부담 안 해주는 것이 이해가 갔다. 회사 숙소 개념이라기보다는 함께 방을 쓰는 셈이다.

점심 식사 후 잠시 쉬었다가 차에 짐을 실었다. 한 차에 못 실을 듯했던 짐, 엄청나게 많아보이던 짐을 다 실었다. 옮겨간 곳은 작업 구간도 작고, 일거리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 시험운행 중이라서, 한 쪽 차선은 작업할 수 없었다. 일찍 끝내고 들어왔다.

이씨에게, 먼저 씻겠느냐고 묻자, 자기는 오래 씻으니 나에게 먼저 씻으라 했다. 욕조에 물을 틀어놓고, 잠시 타이핑 하는데, 이씨가, “언제 씻을거냐”고 물었다. 짜증이 섞여있었다. 타이핑을 중단하고, 목욕탕으로 갔다.

A팀장이 내 방으로 왔다. 그는 어렵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곳 작업은 예상대로 마칠 수 있을 것 같아요. 전라도 현장이 바쁘다 하니, (나는) 거기 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회사에서는 최차장과 내가 조율해서, 적절한 시기에 소장님을 전라도로 보내라 했거든요.”

그리고는 최차장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저녁식사하러 순대국 집으로 갔다. 나는 막걸리 세 병을 사서 테이블마다 한 병씩 돌렸다. 내 나름의 소박한 작별인사였다.

 

 

빈 집[노동이야기]-①

빈 집[노동이야기]-①

이재원(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예전에 살던 집, 팔려고 내어 놓았으나 팔리지 않는 집이다. 엘리베이터 없는 구식 6층 아파트이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어쩐지 편안하다. 씽크대와 가스렌지, 그리고 컴퓨터 책상을 빼고는 휑하게 비어있다. 배낭을 내려 집을 꺼내고, 거실에 텐트를 쳤다. 가을이 깊었다. 실내에는 냉기가 감돌았다. 침구가 없다. 배낭에서 옷을 있는대로 꺼내 입었다.
들어오면서 사온 맥주를 마셨다. 제과점에서 산 호떡을 안주 삼았다.
추석 전에도 여기 와서 머무르면서 목수 일을 했다. 신도시가 들어서고, 대공장이 들어서는 이곳은 일감이 많다. 빈 집에 온 이유도 일 다니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자고 일어나 봐야만 이 집에서 머무르며 계속 일할 수 있을지 알 것 같다.
해미와 고북 일대에는 공장이 없었다. 몇 년 전 홍성군에서는 경사라도 난 듯이 대기업인 Y전기 공장을 이곳에 유치하기로 했다는 계획을 홍보했다. 지역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실리고 군수와 회사 간부가 계약서에 서명하는 사진이 실렸다.
Y전기에 일하러 다닐 때 어떤 목수가 말했다.
“공장이 들어오면 그 동네는 끝난거야.”
그는 환경오염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Y전기에 일하러 갔던 날들을 잊을 수 없다. 아파트형 기숙사를 짓는 공사는 지하층을 마무리한 다음, 1층을 건설하고 있었다.
첫날은 하스라 통(기둥 거푸집)을 짰다. 오랫만에 하는 목수 일이었다.
기둥 폭은 80×80cm이었다. 비교적 간단한 작업이다.
ⅰ) 기둥 위치를 표시해 놓은 먹 선에 미리 반장이 맞추어 놓은 수평 표시까지 네모도(수평표시 높이까지 바닥에 나무 각재를 높여주는 작업)를 깔아준 다음,
ⅱ) 측면 표시 먹선에 맞춰, 120×60cm 크기의 폼(철재 테두리에 합판을 댄 형틀재)을 을 세워 준다.
ⅲ) 세운 폼 양 옆에 아웃 코너(120×꺾어진 20cm의 철판 형틀)를 핀으로 고정시킨다.
ⅳ) 폼을 네 면에 세우면 우선 기초 형틀이 완성된다. 기둥 높이가 400cm이므로 높이에 맞춰 폼을 세워 올라간다.
이 때
ⅴ) 기둥 중간에 타이(중력에 의해 거푸집 변형이 일어나지 않도록 고정해주는 철로 된 띠)로 폼과 폼을 연결시켜준다.
부분적인 작업이긴 하지만, 유능한 목수의 머릿속에는 부분과 부분을 합쳐, 건물이 완성되는, 이른바 구상력이 있다. 구상력이야말로 정교하게 집을 짓는 꿀벌보다 목수가 우월하다는 증거이다.
남쪽에서는 폭풍이 올라온다는 기상청의 보도가 있었다. 바람이 몹시 강했다. 나와 두 사람은 하스라통(기둥 거푸집)을 짜고, 몇몇은 야기리(벽체를 세우기 위한 형틀의 한쪽 면)를 크레인으로 떠서 세우는데 소란하기 짝이 없었다. 바람이 이토록 강한데 크레인을 쓰다니, 일하는 사람이나 시키는 사람이나 조심성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한 켠 무섭기도 했다. 하나 짜 놓은 하스라통도 바람에 날려 넘어갈까 무서웠다. 나는 하스라 통 네 귀퉁이에 2미터 강관파이프로 지주대를 세웠다. 내가 짠 것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이전에 짜 놓은 것도 모두 지주대를 세우는데, 반장이, “그거 하지 말고 하스라통 짜” 라고 이르고는 부리나케 걸어갔다.
기둥 하나를 완성하고 두 번째 하스라통 짜기는 쉽지 않았다. 철근을 근 8미터 높이로 세워 놓았다. 이것이 기울어져, 수직이 안 맞으니 하스라 통 안에 넣을 타이(콘크리트 타설시 중력에 의해 형틀에 변형을 방지하기 위해 양 옆 기둥 형틀을 고정시키는 쇠로 된 띠장)를 밀어내는 바람에 도통 핀을 끼울 수 없었다. 철근을 바로잡고 간신히 끼우려는데 이번에는 외부 폼 코너가 맞지 않았다. 다른켠에서 하스라 통을 짜는 최씨에게, 이런 경우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현장에서 선임자의 경험은 중요하다. 잘 모르는 것은 무조건 물어봐야 한다. 최씨는 내가 짜던 하스라통에 올라갔다. 그가 잘 맞지 않는 타이와 씨름하는 사이, 나는 다른 기둥을 짜는 작업 준비를 했다. 빨리 일하는 요령은 미리 준비해 놓고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한참 후 최씨가 하스라 통에서 내려왔다. 내가 그에게 다가가니, “외부 코너가 잘 안 맞는다. 긴 코너를 잘라서 다시 짜야한다”고 했다. 재료 새 것을 잘라 쓴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하청회사 사장이 볼라치면 크게 봉변당할 수도 있다. 형틀 재료값이 무척 비싸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점심 먹으러 식당 쪽으로 갔다. 못주머니를 벗어놓고 그들 뒤를 따라 갔다.
일 할 걱정에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했다. 이빨까지 아팠다. 남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하거나 드러누웠다. 나는 하스라 통 앞에 앉아, 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 걱정했다.
한 시가 되면 일 시작한다. 나는 아웃코너 온 장(2미터 40센티)을 전동 커터를 사용하여 반으로 잘랐다. 하단 네 개는 잘 맞는 것으로 짜 올렸고, 2단 두 개는 잘 맞지만 다른 두 개가 맞지 않았다. 다른 것에 비해 조금(약 1cm) 컸다. 따라서 잘 맞는 사이즈의 코너를 두 개 준비하면 된다.
일하기 전, 기둥을 완성할 재료들을 모두 준비해 놓았다. 아웃코너와 폼, 타이, 핀 등속을 준비했다. 그러나 누군가가 내가 작업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집어갔다. 그 누군가는 작업 재료는 풍족하지 않고, 빨리 일은 맞춰야 하는 강박증에 시달리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은 가지만, 뭐라고 말 할 수는 없다. 그는 늙었고, 일을 잘 못하는 조공이다. 함께 일하는 목수가 빨리 재료를 구해 오지 못하면 그에게 핀잔 할 것이다.
자른 재료는 잘 맞았다. 참 다행이었다. 짜고 있는데, 반장이 지나가며 한마디 했다.
“빨리빨리 좀 짜. 이거 짜고, 저기 저것도 마무리 해. 목수 맞어?”
괜히 주눅 들었다. 오랜만에 하는 통에 일하는 것을 잊어버린 것도 많다. 처음 보는 재료도 있었다. 바싹 꼬리를 내리고 다른 사람들이 짜다 만 하스라 통을 노바시(하스라 통 도면 높이까지 올리는 일)했다.
목수 일은 시간이 잘 간다. 일이 잘되면 잘 되는대로, 일이 잘 안되면 문제를 해결하려고 고민하는 통에 하루가 금새 지나간다. 일이 끝날 때면 나도 모르게 들국화의 〈사랑한 후에〉를 흥얼거린다. “긴 하루 지나고 언덕 저편에…”, 하루가 갔다는 뜻이다. 시몬느 베이유, 젊은 나이에 요절한, 김나지움 교수를 하다가 르노 자동차에서 일한 그이는 작업대에서의 시간은 일상의 시간과 다르다고 말했다. 일하는 하루 지나간 것이 그토록 고맙고 즐겁다. 사실 따지자면 귀중한 하루인데, 그 날이 지나간 것을 이토록 반가워하다니 역설이다.
용역회사로 가는 승합차를 타고 돌아오는데, 우리를 태워준 목수가 시속 150킬로미터로 달렸다. 무심코 앞에 올라탔던 나는 혼비백산했다.
이씨가 돌아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내 고향 근처 창리에서 왔다. 인사를 나누면서 함께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이씨는 용역회사에 왔을 때 반짝반짝 빛나는 군화(워커)를 신고 있었다. 나중에, 자기의 전직이 밤무대 연예인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승용차 기름값이나 운행 거리를 비교해 보고는 아예 창리 집으로 가지 않고 찜질방에서 머물고 있었다.
이씨가 찾아낸 식당이 〈밴댕이집〉이었다. 여주인은 경상도 사투리를 썼다. 그러나 손님들 이야기를 종합해 보자면 그녀는 고향이 이곳이었다. 여성의 나이를 짐작할 수 없으되 50대 초반으로 보였다. 고향의 언어를 잊어버리고 타향의 사투리를 쓴다는 것은 그녀의 인생 역정을 알 수 있게 한다.
우리가 노동자라는 것을 짐작한 듯, 일당을 물어보던 그녀는 무척 놀래는 듯한 표정을 했다. 식당이 일당만큼 벌리지 않는다는 뜻이리라. 그러나 그녀는 한 가지 오해를 했을 것이다. 우리의 일당을 한 달 30일 곱하기 했을 것이다. 그러나 잘 나가는 목수도 일 년에 200일밖에 일할 수 없다. 하물며 늙은 노동자인 내가 일하는 날이라야 1년 60일이 고작일 것이다.
이씨는 여주인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는 소주를, 나는 막걸리와 맥주를 먹었는데, 여주인에게 와서 맥주 마시기를 청했다.
몇 일간 Y전기에서 일했다. 일을 다니는 와중에 반장이 노인 김씨와 손을 맞춰 일하라고 지시했다. 그 날은 속고(철근 콘크리트 보를 올릴 밑받침틀) 세 개를 자고, 벽체 눈썹(벽체와 천정 사이를 콘크리트로 보강하기 위한 작업)을 빼라고 했다.
김노인은 성미가 급했다. 하리 길이를 재는데, 마구 설쳐 댔다. 내가 하는 일이 어설퍼 보였는지, 데모도(조공) 대하듯이 이것저것 시켰다. 군말없이 그가 요구하는대로 기계톱 다이로 가서 합판을 45 센티로 잘라오고, 하리 받침목을 준비했다. 김노인은 걷는 것을 불편해 했다. 멀리 있는 기계톱 다이까지 갔다 오는 것은 그에게 힘든 일이다.
속고 세 개를 짠 후에는 눈썹을 뽑기 위해 벽체의 미진한 곳을 마무리했다. 마구리통(벽체 형틀 양 측면을 고정해주기 위한 판넬)을 붙이고는 형틀이 벌어지지 않도록 타이로 이어, 핀으로 고정시켰다. 그 때 뚱뚱한 목수(울산이 집이라 했다)가 와서 잠시 자기를 도와달라 했다. 무심코 따라가, 그와 함께 야기리에 타이와 핀을 설치하는데, 김씨가 나에게 와서 아주 강력한 어조로 말했다.
“이씨, 이리로 와요. 우리 둘이 반장이 시킨 것을 해야 한단 말이오.”
나는 울산 목수를 바라보았다. 그가 생글생글 웃으며 김씨에게 사정한다.
“조금만 도와주면 돼요. 좀 봐주세요.”
김씨는 굽히지 않았다.
“안돼요. 반장이 우리 두 사람에게 이것을 하라 했단 말이요. 이씨, 이리 오소. 일 못했다고 쫓겨갈 참이요?” 라고 했다. 뚱뚱한 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는 원래 자리로 돌아와 일했다. 잠시 후 뚱뚱한 이가 다시 왔다. ‘반장에게 나를 데려다 쓰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를 도와 벽체 타이 핀을 꽂았다. 뚱뚱한 이도 두 명이 한 조가 되어 일하고 있었다. 근데도 기어코 나를 데려왔는가, 궁금해서 물으니 “저 사람은 빨리 벽체 폼 짜야 돼요”라고 했다.
김씨의 말이 사실인가 보다. ‘일 못해서 쫓겨간다’는 말이 능률을 못 올리면 쫒겨간다는 뜻인가 보다.
몇 일 후 김씨는 용역 소장으로부터 14만원에서 12만원으로 일당 조정한다는 통보를 들었다. Y전기 건설 현장 소장이 목수 몇 명을 찍어 일당을 조정하겠다고 알려왔다.
김씨는 속상해 했다. 나는 위로 같지도 않은 위로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아저씨. 그냥 다니세요. 12만원 받으면 적어도 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잖아요. 편히 일할 수 있잖아요. 걍 다니세요.”
나는 김씨가 왜 일당을 깎였는지 생각해 보았다. 몇 일 전 여러 명이 크레인으로 속고를 들어 올린 후, 도면 먹선에 맞춰 올리는 일을 했다. 김씨와 내가 한 조가 되어 김씨는 나에게 아시바 대(철재 지지대)를 주면, 나는 그것을 받아 우마(1mm 높이의 발판) 위에서 속고 아래에 밭치는 일을 했다. 김씨는 힘들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속고를 올린 후, 김씨와 나는 속고 위에 폼을 받는 작업을 했다. 대개는 지상에서 속고를 콘크리트 보 원형대로 짜서 크레인으로 올린다. 그러나 이번의 작업은 지상에서 완성하기 곤란할 정도로 높이를 맞추기 여려운 면이 있었다. 폼을 눕히면 높이가 부족하고, 폼을 세우면 속고 바닥까지 약 30cm가 뜨게 된다. 이래저래 난감한 반장은 속고만 올린 후 그 위에 사람이 올라가서 보의 양 측면에 폼을 대고 못을 박아 완성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폼을 사람 손으로 들어올리기 어려우니, 한 열 장씩 포개 싼 후 크레인으로 들어 올려 속고 위에 올려놓는 작업이 폼 받기이다.
4m 높이의 40cm 넓이의 공중에서 크레인으로 집어올린 폼을 받아 내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남, 나 할 것 없이 자세가 어정쩡할 수밖에 없다.
그 다음에는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속고 양 옆에 도면 높이대로 폼을 못으로 밖아 고정시키는 작업을 했다. 이 역시 무거운 폼을 가누어 못 박기 쉽지 않다.
현장소장이 어디선가 작업을 지켜보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몇 명을 찍어내, 일당을 깎았다.

빈 집에서 자는 것이 쉽지 않았다. 온통 옷을 끼워 입고 가디건을 덮고 잠을 청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찌뿌둥했다. 일하러 가기 싫었다. 그러나 빈 집은 마음이 편안했다. 배낭에는 등산장비와 반찬이 들어있었다. 꺼내어 찌개랑 밥을 해 먹었다. 주인 몰래 다락방에서 살던 〈나가사끼〉 등장인물의 이야기가 기억났다.
“누구든 자기가 살던 집에 들어가 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텐트를 접고 짐을 꾸리는데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오늘 경상도로 내려가세요. 팀장의 전화번호를 메세지로 보내겠습니다. 내려가서 (팀장에게) 전화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