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노동이야기]-②
이재원(한철연 회원)
터널 뚫은 것을 볼라 치면 항상 감탄스럽다. 곡선이든 직선이든 어쩌면 저리 앞 뒤 입구가 반듯하게 만날 수 있느냐는 말이다. 몇 십 년 전, 이름도 잊어버린 동료들(대학원 타 학과)과 서해안에 여행 간 적 있었다. 건축기사라서, 어느 회사에 적을 두고 기사 수당을 받아 공부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가 바닷가에서 구멍 뚫린 돌을 주웠다. (내가 보기에는 돌이 아니라 그물을 가라앉히기 위해 시멘트로 만든 어구의 일종이었다.) 그는 ‘구멍 뚫린 돌-시멘트 덩어리-을 얻은 일이 자기에게 행운을 줄 것’이라고 믿었다. 이유인 즉, 막힌 것이 뚫린다는 미래에 대한 암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터널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행운을 이고 있겠다.
외관상 멋들어진 토목공사 작품도 자세히 보면 손볼 곳이 많다. 철근 콘크리트 토목과 건축 구조물의 보수와 방수를 전문으로 하는 이 회사가 하는 작업을 통칭〈그라우팅〉이라 부른다. 이유는 이렇다. 철근 콘크리트를 타설할라치면 양생과정이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재료가 응고하면서 수축이 일어나면 작은 균열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리고 계절과 온도의 변화에 따라 팽창과 수축이 계속되면서 균열은 더욱 심해지거나 콘크리트 부분에 파열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래서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보수가 필수이다.
이곳 터널은 이미 완공 되었으나, 시공한 토목회사는 구조물의 거푸집을 해체하면서 일어난 이음매 파열 부분들을 보양했다. 준공 검사시 파열이 일어나면 공사 부적합 판정을 받는다. 이를 피하기 위해 시멘트 보양을 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안전하지 못하다. 강한 진동에 의해 보양부분이 떨어질 수 있다. 그리고 시멘트 보양물이 떨어지면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기차에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보양물을 제거하는 것이 오늘 작업의 내용이다.
철로 위에 대차바퀴를 앞뒤로 올린다. 총 네 바퀴가 된다. 전에는 대차 바퀴가 쇳덩이였다. 그래서 하나 올리기에도 힘에 버거웠다. 지금은 바퀴를 플라스틱으로 만들었다. 가벼웠다. 밀차 위에 안전발판을 놓는다. 이렇게 해서 대차가 완성된다. 대차 위에 작업 노구들을 싣는다. 작업장까지는 한참을 밀고 가야 한다.
팀장이 도면을 대조하여 작업 부분을 지적해 준다. 작업자들은 우선 1미터 20센티 높이의 비티 아시바(발판)를 설치한다. 낮은 곳은 세 단, 높은 곳은 네 단을 세워야 한다. 네 단을 세우면 까마득하다.
대차에 싣고 온 발전기를 내려 전기선을 연결한다. 그리고 발전기를 가동해 치핑기를 사용하여 보양 부분을 제거한다. 보양물을 떼어내는 치핑 작업시 작업자의 미는 각도가 잘못되면 큰일 난다. 그래서 팀장은 이 작업에 경험 많은 작업자를 시킨다. 작업자 여럿이 교대로 올라가 일을 했다. 까대기, 다른 말로는 치핑기계는 흔들림이 심하다. 독일산 힐티에 노미를 달아 보양 부분과 파열 부분을 제거한다.
비티 아시바는 흔들림이 심하다. 강관을 이용해 보강하면 흔들림이 덜하겠지만 한 군데 작업 시간이 짧아서 자주 옮겨야 한다. 따라서 일 많은 보강 대신 사람의 힘으로 흔들림이 덜 하도록 잡아준다.
이 회사의 노동 조건은 비교적 좋다. 휘몰아 일하도록 작업자를 독려하지 않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든다. 팀장은 원래 두목노동자(도급사장)이다. 그러나 이 현장은 상황이 다르다. 도급을 맡을 만큼 계산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업이 많고 복잡하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는 팀장을 포함한 모든 작업자들은 일당을 받고 일하는, 직영 일급 노동으로 전환한다. 직영 노동은 도급 노동에 비해 작업자들에게 부담이 덜하다. 두목 노동자가 손해를 본다면 회복하기 어렵다. 따라서 도급 노동은 조금이라도 더 작업 속도를 내야 한다. 그만큼 노동자는 힘이 든다. 직영 작업은 우선 이 부담이 줄어든다. 그러나 두목 노동자에서 관리자로 변신한 팀장도 작업자처럼 부담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모쪼록 직영작업이라 해도 회사에 이득이 있어야만 한다. 또한 고객인 원청회사의 요구사항도 들어줘야 한다. 그에게는 스트레스 받는, 고된 작업이다. 그러나 팀장은 이 회사에서 적어도 15년 이상 일했다. 신용이 있는 사람이라서 회사에서 거의 다 믿어주니 그는 비교적 일하기는 쉽다.
길을 떠난다는 것은 항상 즐겁다. 돈이 문제일 뿐이다. 어제 회사의 전화를 받고 길 떠날 때는 즐거웠다. 길 떠나는 것이 왜 즐거운지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떠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서 그렇지 않을까?
인간은 존재한다. 그냥 내던져 있다. 그러나 그는 그냥 내던져진 존재가 아니다. 그의 삶의 방식은 항상 떠나는 자(Ex-istence)이다. 한 군데 머물러 있다면, 정체되어 있다면 그는 안정감에 의해 썩어질 수도 있다. 구르는 돌은 이끼가 끼지 않으며, 호머의 〈배회하는 바위들〉은 고통스럽지만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인간은 지평선을 걸어가는 존재가 아니던가? 걸어갈수록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걷지 않는다면 주변 경관의 변화를 볼 수 없다.
어제 홍성역에서 카드를 내미니 잔액 부족이라 했다. 지갑 깊숙이 넣어 둔 5만원 지폐를 내밀었다. 천안에서 기차를 바꿔 탄 후 열차 까페에서 조심스럽게 잔액 부족이었던 카드를 내밀었다. 한 캔 한 캔 한 것이 네 캔을 마시니 목적지에 도착했다. 경치도 좋고 가을빛도 좋았다. 강폭이 넓디넓은 낙동강도 지나쳐 갔다.
그러나 마냥 좋을 수는 없는 것이 인간사이던가. 총괄 관리팀장 A와 팀장 B는 전에 일하면서 부딪힌 적이 있다.
여관에 짐 풀고 김밥 집으로 저녁식사 하러갔다. B팀장이 들어왔다. 고개를 꾸뻑하는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는 뜨아하게 내 손을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손을 ‘쬐끔’만 내밀었다. 그리고는 저 쪽 자리로 갔다. A팀장이 들어왔다. 얼굴을 뚜렷이 기억 못했던 터라 그의 인사에 조금 시간이 지난 후 답했다. 그 역시 반기는 표정이 아니다. 분위기가 어색해서 밥이 제대로 넘어가지도 않았다. 그나마 전에 보았던(함께 일했던) 김씨(D반장)가 인사해 주었다.
식사 후 만화를 빌려왔다. 분위기가 도대체 식당이나 여관 어디에 머물 수 없어, 도피 겸 기분 전환이 필요했다.
A팀장이 여관 계단에 앉아 있었다. 그가 이야기를 꺼냈다.
“이 차장이 전화해서는 사람 보낼테니 일 시키래요. 그래 여기 현장, 재료도 없고, 11명 왔는데 있는 사람도 처치곤란이다. 바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더 필요하지는 않다는 거죠. 그러나 이 차장은 (보내는 사람) 무조건 일 시키래요. 그러니 분위기 감안해 줘요. 전에 알던(불편했던) 사람이고 아니고의 여부가 문제가 아니라, 현장에 사람이 별로 필요하지 않다는 거죠. 그런데 소장님인 줄은 몰랐죠. 더욱이 불편해요.”
내가 대답했다.
“그런 것 같았습니다. B 팀장 인사하는데, 영 좋은 표정이 아니더군요. 짐작은 했습니다.”
일하는 사람으로서 어디 간들 환영받으랴만, 그라우팅 팀에서 타 그룹에 대한 배척은 일리가 있다. 대개 젊은 축에 속하는 사람들이 그라우팅을 한다. 그리고 똘똘 팀웍을 이루고, 일을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에서 뭔가 끈끈한 관계가 형성된다. 나이 많은 노동자들이 이 팀에는 없다. 무엇보다도 말하기 쉬운 상대, 비슷한 연배이거나 팀장이나 반장보다 나이 어린 사람을 쓴다. 회사의 명령이 아니라면 나를 쓸 이유가 없다.
그러나 팀장이나 작업자, 그리고 내가 불편하다 해서 횡하니 떠날 수는 없다. ‘뭉개고 “개겨” 앉을’ 밖에 없다.
어젯밤 빈 집에서 잠을 잘 못 잔 탓에 몸은 고단했다. 일찍 쓰러져 잠들었다.
아침 역시 김밥집이었다. 나는 라면을 시켰다. 라면을 즐겨 먹을 수만 있다면 끼니 걱정이나 맛있는 음식 걱정 안 해도 될 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식사를 끝내고 작업차에 올라타자, A팀장이 말했다.
“왜 라면만 드세요, 다른 것도 좀 드시지.”
“촉망중이라서 무얼 먹을지 영…” 하고 얼버무렸다.
점심이 일품이었다. 팀장이 찾아내, 오늘 처음 식사하는 집이라 했다. 말로만 듣던 갈치 속젓을 쌈채에 싸 먹으니 깊은 맛이 있었다. 고향이 바닷가인 탓에 온갖 젓갈을 즐겨 먹었으며, 지금도 좋아하는 음식이다. 입이 짠 것이나 소금 섭취를 많이 하면 몸에 안 좋다는 것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포만감, 맛있는 음식은 행복하게 한다. 저절로 혼잣말을 했다. ‘신난다.’ 식당 주인이 들었나보다. ‘왜요?’라고 물었다. ‘배불러서요’라고 답했다. 주인이 웃었다.
오후 작업은 견출이었다. 내가 오기 전 작업자들은 4인치 그라인더를 사용하여 구조물 회사(토목회사)에서 보양한 터널 벽체를 3일에 걸쳐 면 정리를 했다. 그러나 면이 고르지 못할 수밖에 없다. 그라인더 면 처리 한 부분을 특수 재료를 사용하여 말끔히 표면처리하는 작업이 견출이다.
ⅰ) Y군이 견출 재료를 희석한다. 시멘트 성분이되, 강도가 강하도록 처리한 메탈에 접착제를 물과 희석하여 잘 섞는다.
ⅱ) 반장 C와 D가 작업자들에게 일을 분담시킨다. 나는 중요하지 않은 일을 맞았다.
ⅲ) 희석한 견출액을 벽체에 바른다. 바르기 위한 준비작업이 필요하다.
우선 높은 곳 벽체를 칠하기 위해 비티 아시바를 설치한다. 견출액을 칠하되, 반듯하게 칠하기 위해 칠 할 부분에만 사각이 되도록 테이프를 붙인다.
ⅳ) 칠하는 것이 간단치 않다. 고루 발라 펴야 하되, 칠한 자국이 남아서도 안 되고, 붙질 흔적이 남아서도 안 된다.
ⅴ) 일부 작업자는 비티 아시바 위에서, 다른 작업자들은 낮은 곳을 칠했다.
잠시 쉬는 시간에 재료를 희석하는 Y군과 이야기했다. 이 팀에서 일하기 3년차라 했다. 군대 가기 전 2년, 군 제대 후 1년 일했다.
그는 일해서 번 돈으로 전문대 건축계열 학과를 졸업했다고 했다. 그가 일 하는 것을 보면 조금도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무거운 것도 번쩍, 시멘트도 번적 든다. 그는 기운이 좋다.
십 년도 지난 일이다. 함께 공부하던 동료들과 방학 중에 이 회사에서 알바한 적 있다. 당시 팀장의 이야기가 기억난다. ‘시상에 교수님들이 워쩐 일이래유. 노가다하러 오구.’ 아마도 강사였던 모양이다. 관절로 고생하던 이 선생은 지금도 강사를 한다. 그때보다 형편이 나아졌다. 그는 이름도 생소한, 방학에도 일정액의 급여를 받는 강사 교수 노동자이다.
후배 서선생은 알바하러 왔다가 사기당할 뻔 했다. 함께 일하던 사람, 우씨와 친해졌다. 그는 살아온 이야기도 하고 회사 돌아가는 이야기도 했다. 서선생은 무엇보다도 우씨로부터 일을 배우는 조공 처지였다. 서선생이 간조(일당을 한거번에 받는 것)했다. 우씨가 돈을 빌려달라 했다. 방학도 끝이 나 서선생은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알바를 마쳐야 했다. 우씨에게 돈 돌려달라 했다. 곧 주마던 우씨는 다음날부터 보이지 않았다. 몇 달 후에 서선생이 어렵게 그 일을 나에게 이야기 했다. 나는 회사에 이야기했다. 다행히 우씨가 받을 돈이 있어, 회사는 직권으로 우씨의 돈을 서선생에게 돌려주었다. 아니라면 서선생은 힘들게 일 한 일당을 날렸을 것이다. 우씨는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후문을 들었다.
저녁식사 한 후 여관에 돌아왔다. 대개 지방에 가서 일 할라치면 여관방 하나에 빼곡하게, 그야말로 발 뻗기 힘들게 한 방에서 자는 것이 상례이다. 이 회사가 노동자의 복지에 신경 쓴다는 것은 여관에서도 드러난다. 작업자 두 세 명이 방 하나를 쓴다.
함께 방을 쓰는 이씨는 33살이다. 여러 직업을 전전했으되, 이 팀에 들어온 것은 한 달 남짓하다고 했다. 대개 건축 관련 노동자는 겨울에 일이 없다. 이씨는 그라우팅은 겨울에도 일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는 겨울에도 한 달, 20일 이상 일하기를 기대했다. 나는 마음 속으로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발문에서 이야기했듯이, 기공 목수 1년에 통상 200일밖에 일 못한다. 그라우팅이라 해서 예외는 아니다. 일거리는 불안정하기 짝이 없다.
무릎이 아프고 발목이 아파서 욕조에 물을 받아 온찜질을 했다.
이튿날도 견출작업이다. 우선 되나우시(부적합한 작업 재시공)를 했다. 어제 칠한 부분이 원래의 벽체보다 짙은 회색이 나왔다. 따라서 흰 색깔 나는 재료를 섞어 다시 칠한다.
나도 벽체 낮은 부분을 칠했다. 건축 견출 전에 해보았다. 그러나 접착제가 섞인 재료를 곱게 칠하기란 쉽지 않았다. 팀장이 와서 지도해 주고, 반장이 와서 지도해 줘도 곱게 붓질이 되지 않았다.
작업은 힘들다고는 할 수 없다. 반장들도, 작업자들도 서두르지 않았다. 우선 잘 칠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으라고 당부했다.
일 끝나고 터널을 나오며, 작업자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22살 작업자가 어제 친구가 와서 노래방을 갔더랬다. 자기 또래의 아가씨들이 도우미로 왔다. ‘야 너 뽕 넣었냐?’하고 젖가슴에 손을 넣었다. ‘왜 이래’ 하고 반응하며 거부하는 아가씨에게 서울로 춤추러 가지고 했다. 아가씨가 담에 전화하마고 했다. 그날 밤 친구에게 아가씨가 술 취한 채 전화가 왔다. 그 다음 이야기는 못 들었다. 아가씨도 외로웠나보다. 아니면 손님들에게 받는 스트레스가컸던지.
돌아오는 차에서 앞서의 노래방 이야기를 들었던 C반장이 한마디 했다.
“남자들이 그렇게 밝히는데, 여자들이 (혼자 남아) 있겠나.”
그는 7년 연애하던 여성과 헤어졌다. 일방적으로 끝났다. 노가다(육체노동자)와 결혼해 줄 여성은 없다. 그는 이제 결혼을 포기한 상태이다.
도우미, 감정 노동하는 이들을 만나보았다. 이혼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반드시 아이를 키운다. 한결같이 아이만은 잘 키우고 싶다는 바람이다. 아이 키우는 데 돈이 많이 들어간다. 그리고 커리어 우먼, 전문직을 제외하고 여성들에게 일자리는 한정되어있다. 이른 나이에 강제퇴직당하거나 배운 것 없는 남성들의 일자리가 한정되어 있듯이, 젊은 여성이건 중년여성이건 식당, 서빙, 드물게 공장노동이 있다. 도우미는 비교적 수입이 괜찮다고 들었다. 젊은 여성이라면 당연히 편하고 수입 좋은 곳으로 몰릴 수밖에 없다.
실험이라면 이상하고, 교육의 힘을 실감한 적이 있다.
억환이가 노래방 좋아하는 것 모르는 사람이 없다. 노래를 가수 이상으로 잘 부를 뿐만 아니라 감정적인 탓에 즐겨 노래방 간다. 축농증 수술 후에 약간 코먹은 소리를 내긴 하지만 여전이 고음 좋고, 감정 좋다. 노래 잘하는 나 역시 노래방을 즐긴다. 술 한 잔과 친한 친구에게 노래방은 좋다.
돈 잘 벌던 약간 젊은 목수에게 도우미 부르는 것은 (금전적으로) 문제가 없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도우미 Y 부인이 우리와 자주 어울렸다. 그녀는 직업을 바꿀 기회와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의기투합한 우리는 그녀의 직업을 바꾸는 것을 도와주기로 했다. 목표는 당시 수요가 폭발하던 ‘논술교사’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홍선생의 답변을 기금도 기억한다.
“논술교사가 그리 쉽게 되겠나.”
그녀는 주경야독했다. 주간에는 공부하고, 야간에는 노래방에서 일했다. 한가했던 나는 그녀의 수업을 도와주었다. 물론 그녀는 끈질기게 논술 교육기관을 다니는 한 편, 나와 계획한 커리큘럼을 2년 넘게 소화했다.
전직한 그녀는 성공했다. 학원 취업에는 타고 난 용모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력이 있어야 논술선생을 할 수 있다. 전직한 그녀는 1년만에 3-4개 학원을 뛰고 있으며,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한다고 알려왔다. 때로는 나에게, 나이를 상관하지 않는 논술 교육기관의 일거리를 소개해 주기도 했다.
적절한 교육만 받는다면 여성들에게 일거리는 충분히 있다. 문제는 누가 교육비를 대느냐 하는 것이다. 답은 하나다. 모든 이에게 동등한 출발기회를 만들어줄 책임이 있는 ‘국가’가 그 일을 해야 한다.
저녁 식사 후, 씻고는 죽은 듯이 잠들었다.
새벽녘이면 기막히게 잠이 깬다. 핸드폰 시계를 켜면 칼같이 5시 55분이다. 바삐 서둘러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식사시간에 맞출 수 있다.
오늘은 어느 정도 작업한 후(점심 식사 후), 세 팀으로 나눠질 것이다. 한 팀은 D반장 인솔 하에 서울로, 또 한 팀은 B팀장 인솔 하에 울산으로 갈 것이다. 따라서 오늘 저녁 남는 이는 네 명일 것이다.
견출작업을 위해 아시바에 올랐다. 함께 아시바에 탄 이로부터 붙질 잘 못한다고 크게 핀잔을 먹었다. 반장 C가 작업하는 아시바에 올랐다. 그가 작업요령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내 작업이 만족스럽지 않은 듯, 그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잠시 뜸을 들인 후 다시 작업방식을 설명했다.
ⅰ) 붓을 견출액에 적시되, 3분의 1가량만 묻힌다.
ⅱ) 넓게 칠하려 하지 말고 한 뼘 정도만 칠한다. 견출액을 묻힌 붓을 칠할 부분에 살짝 묻혀, 아래로 내린 다음 위로 올려 칠하고 다시 내려 칠한다.
ⅲ) 다음번에는 앞에서 칠한 부분과 따로 놀지 않도록, 즉 한꺼번에 칠한 것처럼 마지막 붓질에서 위로 올려준다.
점심 식사 후 휴식 시간에 현장 주변 감나무 밭을 구경했다. 노인 한 분이 감나무 일을 하는지, 그늘에 앉아 쉬고 있다. 보통 3-4년 생이라는 내 키보다 작은 나무들이 한 20개 씩 감을 안고 있다. 물감이라고 부르는 대봉이다. 감을 많이 매단 채, 나무 두 그루가 말라죽어 있다. 노인은, 느티나무가 감나무를 죽였다고 했다. 말인즉슨, 느티나무가 감나무 먹을 양분과 수분을 빨아들여 감나무가 진 탓에 죽었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햇빛이 부족해서 죽은 듯 했다. 식물은 보통 일조량의 70퍼센트가 필요하다고 한다.
네 사람이 남으니 현장이 조용해졌다. 견출 일이 끝난 후, 내일 A팀장이 지수작업(지하 구조물에 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는 작업)할 현장으로 와, 잠시 구경했다. 팀장은 사진과 현장 위치를 대조했다. 화이바(플라스틱 헬멧)가 머리를 조여, 아팠다. 화이바를 머리 뒤로 걸쳐 쓴 순간, 원청 회사 관리 직원에게 ‘딱’ 걸렸다. 그가 나를 보며 말했다.
“안전교육 받았어요?”
나는 순간 당황하여, “네”라고 말했다. 그가 반말 수준으로 재차 말했다.
“헬멧을 그렇게 쓰라 해?”
순간,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고 사람들 뒤로 숨듯, ‘꼬리’를 내렸다. 그의 말투는 난폭한 수준이었으며, 눈빛은 사나웠다. 나는 뒤돌아서서 ‘오직 지도의 대상으로만 사람을 대하는 인간’라고 생각했다.
시간 참 잘 간다. 일 끝나면 식사하고 자고, 일하고 자고, 순식간에 나흘째다.
오늘은 인젝션 작업이다. 작은 균열에 콘크리트 접착제, ‘에폭시’를 주입한다.
이 작업을 20년 전에 해 보았다. 만조가 되면 비오듯 물이 쏟아지는 해수면 이하의 터널 공사장이었다. 30여 명이 달려들어 밤 낮 없이 지수작업과 균열작업을 했다. 나는 두어 달 동안 그곳에서 일했다.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그 엄청난 물을 다 막았다는 것, 그리고 시골스런 생맥주집에 노래방 기계가 있어, 해변을 바라보며 노래 부르던 것, 그리고 가수 이상으로 고음이 올라가던, 목청 좋은 서빙 아가씨의 노래, 그리고 지금은 이 회사에서 일하지 않는,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다.
교각(다리 기둥)은 어쩌면 구조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앞에서 말했듯, 콘크리트 양생 과정에서 교각에 잔 균열이 생긴다. 그라우팅은 미국에서 발전시킨 콘크리트 보수 방법이다. 들은 이야기로는 미국 건축 교범에는 엄격한 보수 규정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균열을 보수할 수는 없다. 보수 비용도 문제이려니와 그 효과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교각 보수 시범 시공하는 작업이다.
작업순서는,
ⅰ) 씰링 작업과 좌대 붙이는 작업이 첫 날 일이다. 주사기를 걸어둘 좌대를 균열 부위에 붙인다. 교각 균열 부분을 따라 씰링을 한다. 이 작업은 실링제 주제와 경화제를 2대 1로 덜어내 잘 섞은 다음, 균열부위를 따라 발라주되, 좌대를 붙일 부분, 약 2-3 센티미터 떼어 놓는다.
ⅱ) 씰란트 주제와 경화제를 1대 1 비율로 판대기에 덜어내 잘 섞은 다음, 헤라를 사용하여 좌대 가장자리에 발라준다. 이 때, 씰란트제를 많이 바르면 좌대 구멍이 막힐 수 있다. 적당량을 발라 주는 것이 중요하다.
ⅲ) 씰란트를 바른 좌대를 균열부위, 씰링 안 한 부위에 붙여준다.
하루가 지나면 씰링제와 씰란트제가 굳어진다. 그 위에 균열 보수제를 넣은 주사기를 매단다. 그러면 균열을 따라 보수제가 교각 콘크리트 안으로 스며든다. 보수제는 콘크리트와 콘크리드를 강하게 결착시켜준다.
또 주사기의 균열 보수제는 다시 하루가 지나면 굳는다. 좌대를 분인 후 사흘만에 마무리 작업을 한다. 우선 좌대와 주사기를 떼어내고, 4인치 그라인더로 씰링제와 씰란트를 제거한다.
주입작업은 물량이 많든 적든, 반드시 3일이 필요한 작업이다.
오전에 좌대와 씰링작업을 끝냈다. 오후에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보수를 요구하는 사진과 현장을 대조했다. 작업 현장을 찾아내는 것도 일이다. 팀장의 일이긴 하지만, 작업자들도 알아야만 작업 준비를 쉽게 할 수 있다.
현장을 돌아다니는 자동차 길은 예뻤고, 가을 햇볕은 맑고 청명했다. 논둑, 밭둑마다 감나무가 심겨져 있었는데, 주먹보다도 큰 감이 주렁주렁, 황금빛을 띤 채 매달려 있었다.
일찍 일이 끝나, 도서관으로 갔다. 디지털 미디어실 사용 예약에 딱 한 대 남은 컴퓨터는 한글 프로그램이 작동되지 않았다. 이층 컴퓨터는 2007 한글이되, 원인 모를 이유로 작동되지 않았다. 직원에게 물으니, “프로그램을 사지 못해서요”, 라고 답했다. “아 씨”라고 혼잣말 하고 내려와 다시 디지털 방에 들르니, 10분 후 컴퓨터 한 대가 빈다고 했다. 담배 한 대 피우고 들어가 컴퓨터 작업을 했다.
직원인지, 자원봉사자인지 알 수 없는 이가 데스크에 앉아있다. 전화를 하는데 상식이하로 떠든다. 사적 이야기도 많다. 뒤에 앉은 아저씨가 한마디 했다.
“시작됐다. 몇일 안 보인다 했더만.”
프린터를 하려 했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한숨을 쉬고 도서관을 나왔다. 모든 이에게 그렇겠지만, 나에게는 귀중한 시간이다. 도서관에서 노동하는 이들이 좀 더 성실히 일 해 준다면 이처럼 헛걸음을 하지 않아도 될 텐데…
여관으로 걸어갔다. 시장을 지나는데, ‘전어회’라는 간판이 보였다. 살이 통통하게 찌는 가을 전어는 맛있다. 1킬로를 회 떠서 여관으로 갔다. 이씨가 술을 사왔다. 잘 먹었다.
술자리 끝난 후, 방으로 돌아왔다. 뒤따라 A팀장이 내 방에 들어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빠듯한 식사 비용 문제, 팀장으로서 겪는 스트레스이야기 끝에 예전에 내가 B와 부딪혔던 이야기가 나왔다.
몇 년 전, 나는 이 회사의 관리자(현장소장)를 했다. 당시에는 작업자였던 B팀장이 균열보수를 하러 내려와 있었다. 직영 노동자 5-6명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현장이었다. 보수 팀 중에 L씨 형제가 있었다. 균열 보수 일거리가 마땅치 않은 이들은 손이 비는 날에는 우리 일을 지원해 주었다. 형제 중 형이 내 눈에 들었다. 요즘 말로 천연기념물, 자기 이득을 챙기겠지만, 어쨌든 성실하게 개인 이익 생각 안하고 일하는 사람이었다. 형제와 나는 약속을 했다. 형제의 동생이 팀장이었다. 수입이 될 일거리 보장해 준다면 우리 일을 전적으로 도와주겠다고 했다. 나는 일거리를 보장했다. 그러나 지금의 B팀장, 당시에는 A팀장의 구성원이었던 이가 말했다. “L씨 형제를 보내야 하겠다. (균열 보수) 일거리는 없고, 두 팀이 나눠 먹기는 어렵다.”
나는 L씨 형제와 한 약속을 지켜야 했다. 일거리를 두 팀이 나눠먹도록 조정하려 했으나, 본사의 관리자가 직접 조정을 자처하고 나서는 통에 그것도 쉽지 않았다. 결국 지금의 B팀장이 물러나야 했다.
A팀장 이야기로는 그(B)가 지금도 그 일을 잊지 못한다는 것이다. A팀장이 말했다.
“물론 소장님이야 (L 형제와) 약속을 지키려 했다지만, B에게는 밥그릇 문제가 달린 것이었죠. 아직도 그 응어리는 남아 있을 겁니다. B가 껄끄러워 할지라도 (당신이) 이해야 됩니다.”
지나보면, 현장을 꾸려나가기 위해서는 남에게 못할 일도 했다. 도대체 현장 분위기, 태업을 일삼는 이들과 함께 일하기는 쉽지 않다. 당시에 네 명인가를 해고했다. 비록 그들이 해고 고용보험을 타먹었을지라도, 지금 만난다 해도 그들은 나를 원망할 것임에 틀림없다.
오늘은 주입 작업이다. 좌대와 씰링제는 잘 굳었다. 에폭시 주제와 경화제를 희석하여 주사기에 넣는다. 병원에서 하듯이, 주둥이를 에폭시에 넣고 손잡이를 잡아다녀, 주사기 안에 에폭시가 들어가도록 한다. 다음 고무줄을 이용하여 주사기를 좌대에 고정시킨다. 그러면 에폭시는 균열을 따라 콘트리트 속으로 들어간다.
약하게 씰링한 부분에서 에폭시가 새어 나왔다. A팀장이 어제 씰링작업을 한 반장에게 이 부분에 대해 ‘쫑코’ 주었다. 간단히, “왜 이렇게 새냐?”라고만 말했다. 반장은, “두껍게 (씰링)했는데” 라고 혼잣말인 듯 말했다.
나는 주사기를 좌대에 고정시켰다. 어느 부분은 주사액이 금방 없어진다. 외부에서 보이지 않는 동공이 균열 안에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빈 주사기를 빼 내고 충진제가 들어찬 주사기로 대체한다. 무심코 빈 주사기를 에폭시가 들어차있는 주사기로 바꾸는데, 반장이 와서 난리를 쳤다. ‘옆 주사기 자리에서 충진액이 새는데 왜 주사기를 바꾸느냐. 시키는 일만 해라’는 요지였다. 그리고 말 끝에 노가다가 자주 쓰는 육두문자를 덧붙였다.
반장이 잘못 보았다. 세 개의 주사기가 비었으되. 에폭시가 계속 균열 틈에서 새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한 20 센티미터 쯤 흘러내렸을 뿐이다. 더 이상 에폭시가 새어나오지는 않는다는 듯이다.
나는 변명하지 않았다. 반장의 심정이 이해가 가는 것이다. 또, 변명이란 어느 경우이든 자기를 방어하려는, 정신이 약한 사람들의 짓거리가 아닌가.
그러나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나 원 참”하고 혼잣말을 했다.
오늘 작업은 인젝션 부분 면 처리(그라인더) 작업이다. 오전 작업하면 끝이다. 즐겁기 짝이 없다.
점심 국이 맛있었다. 겉보기에는 배추 김치와 콩나물 국이다. 그러나 국물을 한 번 뜨니 보통 음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국 말아서 밥 한그릇 뚝딱 해치웠다.
식사를 끝내고 나오며 주방을 향해 “예술 많이 하세요”라고 말했다. 서빙하는 여성이, ‘그렇게 맛있던가요, 콩나물국이?’라고 답했다. 억양이 강한 경상도 사투리이다.
오후에 일하는데, 덕수에게 전화가 왔다. 인터넷 신문 들어가서 (내가 기고한 것) 읽어 보았는데, 뭔가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왜 문단을 이렇게 썼는지, 앞 뒤 문장이 연결 안 되어, 내가 썼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다.
편집자가 기고한 글을 다듬는 것은 뭐라 말 할 수 없는 부분이다. 따라서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낼 수도 있고, 책임질 수 없거나 검증할 수 없는 단락을 잘라낼 수도 있다. 결국 필자의 몫도 있으되, 편집자의 권리도 있는 것이다. 나는 그 글을 조금 서둘러 쓰기는 했다. 그러나 상징적으로 말 한 부분이나 요설(?)이라 할 부분들이 뭉텅이로 잘려나가 있었다. 지면을 조정하려 했거니, 하고 넘어갔으나, 덕수의 말을 들으니, 조금 기분이 언짢았다.
덕수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사흘 만에 쓰셨다니 이해가 가요. 다음에는 시간을 충분히 잡아서 잘 쓰세요.”
나는 웃으며 그러마고 했다.
저녁 식사 후 컴퓨터방에서 타이핑하는데, 덕수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웹진에 노동일기 쓰기로 해서 작업한다고 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덕수가 중고 노트북 컴퓨터 사 보내겠다고 제안을 했다. 여관에서 컴퓨터 작업하면 더 좋을 듯 했다. 나는 다음달 10일, 간조하면 컴퓨터 값을 보내기로 하고는, 컴퓨터를 사기로 했다.
한 시간도 안 되어 인터넷으로 노트북을 사서, 택배로 보낸 후 덕수는 다음과 같이 메세지를 보냈다.
“글도 한번 멋지게 써 보세요. ㅎㅎ 틈틈이 써 두셔서 나중에 책으로 엮을 만하게요.”
발주처 사정으로 몇 일간 터널 견출 작업을 못했다. 오늘부터 다시 견출 작업이다. 서울로 갔던 팀들도 합류해, 9명이 작업을 했다. 항상 일을 준비하는 시간이 길다. 전에 다녔던 길에 울타리를 치거나 길을 없애고 자연스럽게 언덕을 만들고 있다. 작업 도구와 재료들을 차에 싣고, 비교적 가까운 터널 쪽으로 갔다. 그리고 일일이 사람 손으로 대차가 다닐 수 있는 곳까지 날랐다. 백시멘트 30포, 메탈 20포, 물통 6개, 아시바 2조, 시멘트와 메탈을 믹서할 커다란 플라스틱 통 2개 등, 옮기는 데만 40여 분이 걸렸다. 목수 노동에 비해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서울 갔다 온 팀원, 대전 산다는 젊은이에게 물었다. “집이 대전이라든데, 서울로 일하러 가면 어디서 자는가.” 그는 “숙소(에서 잔다)”라고 말했다. 다시 물었다. “몇 명이 숙소를 쓰는가.” “여덟 명”이라고 답했다. 재차 물었다. “재미있겠네, 여럿이 함께 지내니.” 그는 “재미없어요”라고 답했다.
숙소 생활 한 적이 있다. 여럿이 함께 쓰면 도대체 개인 생활이란 없다. 항상 다른 이를 배려해야 한다. 그 중에 못된 인간, 폭력적 인간이라도 하나 낀다면 지옥이다.
작업 끝내고 대차에 작업도구와 재료들을 싣고 나오면서, 짐을 싣고 오는 포크레인과 교차했다. 잠시 후 짐을 부렸는지, 포크레인이 되돌아 나왔다. 기사는 약간 서두르는 기색이 있었다. 크랙션을 누르길래 우리가 잠시 대차를 멈추자 포크레인은 우리를 추월해 갔다. 도로가 아닌 길을 저렇게 서둘러도 되는가, 하는 순간, 포크레인이 균형을 잃고 옆으로 넘어졌다. 바삐 그 쪽으로 걸어갔다. 포크레인 기사가 깨진 유리창을 밀고 기어나왔다. 기사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다행히 다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운전석에서 기사의 신발을 꺼내 주었다. 옆으로 누운 기름통에서 경유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퇴근 시간이 바빠서였을까, 서두르던 그는 한 순간에 크게 손해를 보았다. 운전석 유리창을 갈아 끼워야 하고, 차를 일으켜 세우려면 다른 포크레인을 불러야 한다.
저녁식사 하러 식당에 들렀다. 식당주인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식당을 운영하는 것이 고된 일인 줄 알지만,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일하는 줄 알지만. 식당주인이 장비 기사나 건축노동자에 비해 비교적 안전한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식사하며 팀장이 말했다. “앞으로 5일간 누구 한 사람도 일을 빠져서는 안 된다. 술 먹는 거 말 안하겠지만, 어떤 이유로든 작업에 빠지지는 마라. 5일 내에 반드시 작업을 끝내줘야 한다. 거듭 부탁한다. 건강 챙겨 일해 주기 바란다.”
노트북이 도착했다. 외관은 깔끔했다. 유에스비 장치가 잘 작동되지 않아 애먹었다. 어찌어찌 해서 사용할 수 있었다. 좋다.
아침부터 두 팀으로 나눠 작업을 시작했다. 지수, 균열보수팀 4인은 A 팀장이 인솔해 가고, 나머지 6명은 견출작업장으로 갔다. 재료를 어제 올려놓았으므로 빈 손으로 터널로 가는데, 무척 편했다. 그러나 작업이 지루해졌다. 그만 좀 했으면 싶다. 천안으로 돌아가 책을 읽거나 놀고 싶다.
또는 목수일 다니고 싶기도 하다. 목수일은 비록 힘들지라도 지루하지는 않다. 항상 새로운 일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계속 일이 바뀐다. 그러나 견출은 항상 같은 작업이다. 그러나 시간은 잘 갔다. 잘 칠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리라.
민씨와 아시바에 올라 작업했다. 오른 손을 써서 칠하는데 어깨부터 팔꿈치, 손목이 아팠다. 민씨 작업하는 것을 보노라니, 오른손과 왼 손을 번갈아 사용했다. 나도 왼 손으로 칠해 보았다. 어색하긴 하지만 제법 칠할 수 있었다. 교대로 칠하면서 오른 손을 조금 쉴 수 있었다. 그러나 속도가 문제였다. 다른 사람들은 오늘 안으로 세 번째 터널을 끝내려고 열심이다. 그러니 마냥 왼손으로 칠할 수만은 없었다.
점심 먹으러 나오며 들국화를 한 아름 꺾었다. 말려서 베갯닛에 넣어야겠다.
몇 년 전에는 가을마다 들국화를 꺾어 말렸다. 애 엄마에게도 보내 주고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모두 좋아했다. 애엄마가 덕수에게 들국화 베갯닛을 해 주었는데, 매번 그 베개를 쓰더라는 기억이 떠올랐다.
감기 기운을 느낀 것은 점심 먹는 중이었다. 콧물이 나오고, 코가 맹맹했다. 감기기운을 이기려고 미역국을 두 그릇 먹었다.
잠깐의 휴식시간이 있었다. 들국화를 한 아름 더 꺾었다.
오후 작업하는 터널은 바람이 세게 불었다. 길이가 짧고 양 끝은 골짜기를 이루어서 저절로 바람이 만들어지는 지형이었다. 가슴이 서늘했으나 일을 시작하자 곧 추위를 잊을 수 있었다.
B팀장이 견출액을 섞어주었다. 반장 둘, 나를 포함한 작업원 셋, 여섯이서 일하는데 작업 속도가 무척 빨랐다.
원청회사 안전원이 왔다. 시험 운행이 있을 예정이란다. 100킬로미터로 달릴 것이므로, 운행 차선에서 작업하지 말기를 당부했다.
열차는 계속 달리는 것이 아니라, 약 천여 미터씩 왕복했다. 백 킬로미터로 달리는 소음이 엄청났다. 양 손으로 귀를 얼른 막았다.
일 끝나고 현장을 나오며 작업자 한 사람이 길 옆 감나무에서 여러 개를 따, 가방에 담았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지방 오면 이런 맛이라도 있어야지.”
저녁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A 팀장이 말했다.
“소장님 일정이 어떻게 되시는지, 여기 끝나고 전라도 쪽으로 보내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가지요”라고 했다. 옆에 앉아있던 이씨가, “지리산 가신다면서요.”라고 했다. 나는 엉겁결에, “하루쯤 지리산 구경하고 가지요 뭐. 여기까지 와서 지리산 구경 안 하다니…” 했더니 단번에 A팀장의 응답이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지리산 구경 못하는 우리들….” 나는 열없어서, “지리산 간다고 하면 ‘그래 너 잘났다’라고 할 테니, 다리 아파 하루 지체해서 간다든가”라고 얼버무렸다.
여기 현장 끝나면 A팀은 바로 서울로 옮겨 일해야 한다. A팀장이 덧붙였다. “전라도 현장도 무척 바쁜가봐요, 남은 시간이 열흘이라나” 라고 했다. 나는 속으로, 지리산은 다음으로 미뤄야겠다고 생각했다.
밤늦게 통닭이 들어왔다. 어젯밤, 멤버들 모여 포커했다. 15만원 잃은 사람 덜 억울하도록 딴 사람이 통닭을 샀단다. 도박과 저축은 배우지 않아도 재미있으니, 배우지 말라는 옛 사람의 말이 있다고 한다.
통닭에 막걸리를 데워서 마셨다. 이씨는 드라마를 꼭 챙겨본다. 드라마가 끝나자, 〈세상에 이런 일이〉를 본다. 장애인 부인을 돌보는 남자 이야기가 방송되었다. 그가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질문을 내게 돌렸다. “아저씨 좋은 세상 만들려고 (글을) 쓰신다면서요?” 내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중얼거렸다. “옆 사람을 배려해야지. 말로만 하는 사람은 안 돼. 저런 사람들이 있어야 세상이 좋아져.”
몇 일전, 컴퓨터가 도착한 이후로 매일 밤마다 타이핑하는 나를 보고, 이씨가 물었다.
“무얼 쓰세요? 왜 쓰세요?”
그 때 나는 얼버무린 듯하다.
“뭐,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어서)…”
방금 이 씨의 말을 듣는 순간 뜨끔했다. 좀 전에 막걸리를 데우며 가스 냄새를 풍겨서인가? 등산 배낭에서 가스버너를 꺼내 조립하여 가스를 켜니, 잘못 조립되었는지, 가스냄새가 났다. 이씨가 말했다.
“가스 냄새 나요. 다음에 해요.”
나는 말없이 버너를 들고 나가 복도에서 막걸리를 데워왔던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른다. 나는 적어도 방을 쓰는 모든 면에서 그를 배려한다. 그러나 무심한 것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A팀장은 가끔 이씨를, ‘4차우너 인간’이라고 부르곤 했다.
오늘도 두 팀으로 나눠 일을 시작했다.
나는 낮은 곳을 칠했다. 쪼그려 않아 일하기 불편해서 두 무릎을 땅에 대고, 않아 칠했다. 오른 손이 아프면 왼손으로 칠했다. 비교적 잘 칠해졌다. 무엇보다도 희석액이 부드럽게 섞여, 일 하기가 편했다. 모두들 열심히 칠했다.
견출 팀은 오전 작업이 일찍 끝났다. 터널 하나를 다 끝냈다. 옮겨놓은 재료가 많이 남았다. 이제 다른 터널로 옮겨야 한다. 대차를 설치하고 시멘트와 메탈, 아시바 대, 물통, 자잘한 물건들을 차 댈 수 있는 곳까지 옮겨놓았다. 차에 실어 옮기는 것은 점심 식사 한 후에 하기로 했다. 문제는 차가 짐 옮겨놓은 곳까지 올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울타리를 치기 위해 말목을 밖아 놓아서 차가 들어오기에 방해가 된다.
D반장과 작업자 E 간에 내기가 벌어졌다. D반장은 차가 들어올 수 있는 쪽에, 작업자 E는 못들어오는 쪽에 5만원을 걸었다. 궁금해 견딜 수 없다며, D반장이 차를 운전해 오기 위해 갔다. 한 참 후 차가 들어왔다. 누군가가, “D에게 아이스크림 사라고 하자”라고 말했다. E는 “만원만 깎아 달래야지”라고 말했다.
농협 마트에 들러 각자 하나씩 자기 먹을 것을 골랐다.
D반장에게 B팀 숙소에 대해 물어보았다. “B팀장 혼자 숙소를 꾸려나가는가, 아니면 회사에서 도와주는가.” 대답은 이랬다. “회사에서 도와주지 않는다. 숙소를 쓰는 사람들이 얼마씩 나눠 부담한다.” 회사에서 비용 부담 안 해주는 것이 이해가 갔다. 회사 숙소 개념이라기보다는 함께 방을 쓰는 셈이다.
점심 식사 후 잠시 쉬었다가 차에 짐을 실었다. 한 차에 못 실을 듯했던 짐, 엄청나게 많아보이던 짐을 다 실었다. 옮겨간 곳은 작업 구간도 작고, 일거리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 시험운행 중이라서, 한 쪽 차선은 작업할 수 없었다. 일찍 끝내고 들어왔다.
이씨에게, 먼저 씻겠느냐고 묻자, 자기는 오래 씻으니 나에게 먼저 씻으라 했다. 욕조에 물을 틀어놓고, 잠시 타이핑 하는데, 이씨가, “언제 씻을거냐”고 물었다. 짜증이 섞여있었다. 타이핑을 중단하고, 목욕탕으로 갔다.
A팀장이 내 방으로 왔다. 그는 어렵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곳 작업은 예상대로 마칠 수 있을 것 같아요. 전라도 현장이 바쁘다 하니, (나는) 거기 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회사에서는 최차장과 내가 조율해서, 적절한 시기에 소장님을 전라도로 보내라 했거든요.”
그리고는 최차장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저녁식사하러 순대국 집으로 갔다. 나는 막걸리 세 병을 사서 테이블마다 한 병씩 돌렸다. 내 나름의 소박한 작별인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