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샤를리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에 항거한다.”[베를린에서 온 편지 11]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에 항거한다.”

 

?한상원(한철연회원/베를린 통신원)

 

*베를린에서 유학 중인 한상원 회원이 인문학 동향이나 정치 소식을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나는 전에 쓴 글 <극단의 시대>(http://ephilosophy.kr/han/?p=46285)에서 유럽에 거주하는 무슬림 청년들의 극단주의화 경향과 유럽 내 반이슬람, 반외국인 정서가 양극을 이루어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고 진단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 우려는 끔찍한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유럽 역사상 가장 끔찍한 언론에 대한 테러가 일어났다. 전 세계가 이 테러에 분노하고 있고, 희생된 사람들에게 추모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양심의 선언은 처벌의 대상, 폭력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는 표현의 자유의 원칙은 흔들림 없이 지켜져야 한다. 우리는 모두 죽은 이들에게 추모의 뜻을 밝히고, 야만적인 폭력으로 본인들의 의사를 관철시키려고 하는 모든 형태의 종교 근본주의에 반대해야 한다. 이 큰 원칙에 우리 모두가 동의한다는 전제 하에, 나는 다만 몇 가지 세밀한 논점들에 대한 논평을 덧붙이고자 한다.

2012년 9월 독일에서 있었던 일이다.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에 주요 근거지를 가지고 있던 극우 민족주의 단체 프로 도이칠란트(Pro Deutschland)는 베를린 시내 한복판에서 당시에 전 세계 무슬림과 아랍인들의 분노를 자극했던 모하메드 풍자 비디오를 상영하려고 시도했다. 당시 프로 도이칠란트와 대립하며 이미 거리 시위에서 폭력을 동원해 대항했던 이슬람 근본주의적인 살라피스트 단체들은 이 상영회를 격렬히 비판하며, 상영회가 강행되면 테러공격을 자행하겠다고 밝힌 상황이었다. 양측의 폭력충돌이 우려되고 테러위협이 제기되던 상황에서 메르켈 정부는 안전을 구실로 모하메드 풍자 비디오 상영회를 불허하여 상황을 종료시킨다. 그러자 중도좌파진영인 사회민주당과 녹색당은 강력히 반발하며, 정부의 상영 불허조치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이라고 비판했다.

이 상황은 오늘날 표현의 자유가 직면한 역설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과거 표현의 자유는 언제나 온갖 형태의 권력에 의한 억압에 저항하던 피억압자들과 진보적, 계몽주의적 지식인들, 그리고 권력자들을 조롱하고 성적 금기에 도전했던 예술가들과 문학가들의 구호였다. 이제 제1세계와 중심부 국가들에서 정치적, 성적, 종교적 표현의 자유가 상당부분 허용되는 상황에서 간혹 등장하는 표현의 자유 논쟁은 더 이상 피억압자, 소수자, 약자의 권리에 관한 것이 아니다. 거꾸로 이제 논란은 이 소수자와 약자들에 대한 혐오선동을 일삼는 배타적 민족주의자들과 극우세력에 대한 태도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독일에서는 나치를 찬양하는 것이 불법이다. 그러나 일부 네오나치들은 여전히 그들의 표현의 자유를 앞세우며, 홀로코스트가 진실이 아니라고 주장할 권리, 그리고 유태인과 외국인들을 비난할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라고 요구한다. 원칙적으로 모든 표현의 자유는 보장받아야 한다. 그러나 무슬림들에 대한 노골적인 증오와 혐오를 드러내는 모하메드 풍자 비디오를 공공장소에서 상영하며 특정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모독할 ‘표현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하는가? (이를 한국의 경우에 대입해본다면, 일베와 같은 극우 인터넷 사이트 이용자들이 특정 지역인들과 여성, 장애인들 등을 모욕할 표현의 자유를 그대로 존중해주어야 하는가?) 질문을 이렇게 던진다면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유럽에서 계몽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들,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은 공통적으로 세속주의의 가치를 들고 구체제의 억압적 사회질서와 관습들을 옹호하던 종교권력에 대항해 싸웠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당시 자코뱅과 공화주의자들은 부르봉 왕가와 귀족들뿐 아니라 특권을 누리던 성직자와 교회와도 싸워야 했다. 오늘날에도 유럽의 공화주의적, 사회주의적 좌파 진영은 동성결혼, 안락사, 낙태 등의 이슈로 언제나 보수적인 교회에 대립해 왔다. 표현의 자유는 언제나 교권주의에 대항하는 세속주의자들의 무기였다. 그렇게 해서 “계몽(세속주의적 비판정신과 표현의 자유)”이 “신화(비합리적이고 억압적인 교권주의적 종교권력)”에 대항하여 오늘날 자유롭고 개방적인 유럽을 만들어냈다고 많은 세속주의자들은 생각하고 있으며, 68혁명 이후 등장한 <샤를리 에브도> 같은 세속주의적 좌파 언론 역시, 신성시되는 모든 가치들을 가차없이 조롱하는 것이 1968년의 급진적 문화대혁명을 완수하는 길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놀라운 속도로 진행된 세계화 속에 이제 유럽은 자신들이 겪은 이 수백 년간의 문화적 충돌들, 그리고 그 타협물인 세속적인 관용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에 관한 경험을 갖추지 못한 수많은 제3세계 출신 이주민들과 공존해야 할 상황에 놓여 있다. 특히 프랑스는 인구의 10% 가까이가 무슬림인 것으로 추정되며, 독일의 경우도 터키인 이주자들이 이미 하나의 주요 사회세력으로 인정될 만큼 커다란 비중을 형성하고 있다. 이들 전부는 아니더라도, 상당수의 무슬림들에게 여전히 세속적인 표현의 자유, 그리고 모독의 권리, 불경하고 불온한 것에 대한 사회적 관용은 그들이 경험, 학습하지 못한 낯선 문명이다.

유럽에 몰려오는 아랍, 터키, 아프리카계 무슬림들은 대부분 유럽 문화 속에 동화되지 못하고, 그들 스스로의 공동체들을 형성하며 제1세계 내 타자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신앙은 그들의 공동체적 동질감을 높여주는 수단이었고, 백인 현지인들에게 시달리는 차별과 소외의 감정을 보상해주는, (맑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억압받는 피조물의 한숨”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이 믿는 신앙이 유럽 현지인들에 의해 조롱을 받는다고 생각해보자. 그들이 느낄 박탈감은 어떤 것이겠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표현의 자유는 더 이상 “신화”에 맞선 “계몽”으로 군림하기보다는, 낯선 “타자”의 등장 앞에서 깊은 자기성찰에 직면해야 했던 것이 아닐까? 종교권력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이라는 세속주의자들의 구호가 만약 타자, 그것도 소외받는 소수자들의 종교에 대한 조롱으로 귀결된다면, 그것은 유럽의 세속주의가 실현하고자 하는 가치들(다양성, 개방성, 인권)에 스스로 반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현재 <샤를리 에브도>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외치는 구호 “나는 샤를리다(Je suis Charlie)”에 내가 동의하지 않는 이유다. 물론 나는 <샤를리 에브도>의 표현의 자유를 지지한다. 그리고 <샤를로 에브도>에 대한 야만적인 테러행위에 단 한 점이라도 정당화될 수 있는 근거가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표현의 자유를 지지하는 것이 그들의 만평에 내재된 타종교에 대한 적대감의 표출, 그리고 노골적으로 드러난 인종주의가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다.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Je ne suis pas Charlie). 그러나 그들의 죽음에 항거한다.” 이것이 이번 상황에서 내가 취하고자 하는 입장이다. 물론 내가 샤를리가 아닌 이유는 극우파 국민전선(FN)의 창설자 장 마리 르펜이 말하듯이 이 잡지가 아나키스트-트로츠키스트 성향의 좌파여서가 아니라(르펜의 호들갑과 달리, <샤를리 에브도>는 90년대 이후 정치적으로는 온건해졌으며, 상업주의화되어 정치적 메시지 전달의 선명성보다는 상업적 스캔들을 더 즐긴다는 비판을 이전부터 받아왔다), 소수자들이 믿는 타종교에 대한 조롱이 톨레랑스에 대한 위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톨레랑스야말로 세속주의자들이 보수적인 교권주의자들에 맞서 싸우면서 쟁취하려 해왔던 것이 아니었는가?

현재 유럽 각국의 극우세력들은 앞을 다투어 이번 테러를 비난하면서 “이번 일은 예상된 귀결이고, 바로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 내일 당장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라며 이슬람과 이주민들에 대한 인종주의적 적대감을 선동하고 있다. 독일에서 매주 월요일 드레스덴에서 벌어지는 페기다(PEGIDA, ‘서양의 이슬람화에 반대하는 애국적 유럽인’의 약자)의 반이슬람, 반외국인 시위대 규모는 3만에 육박하고 있으며 드레스덴을 넘어 전 독일로 확산되는 추세다. 마찬가지로 외국인들에게 적대적인 독일 국수주의 극우정당 AfD(독일을 위한 대안)의 지지율은 이미 테러사건 이전에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극우세력들의 인종주의적 증오선동과 일상에서 느끼는 억압과 차별이야말로 무슬림 청년들이 더욱 더 유럽의 세속주의적 문화가 아니라 이슬람 근본주의적인 주장들에 동조하게 되는 기반을 제공하는 것이다. 프랑스에선 3천 명 이상이, 독일에서만 600명의 이주민 자녀들이 이슬람국가(IS)의 지하드에 동조하고자 시리아로 떠났고, 이들 중 상당수는 유럽으로 돌아왔다. 독일에서 떠난 사람들 중 180명이 독일로 돌아온 것으로 추산된다. 돌아온 사람들이 어떤 종교적 성향을 지니고 있는지, 그들이 여전히 이슬람국가 측의 지령에 따르고 있는지 등은 미지수다. 독일인들은 겁에 질려 있으며, 이 기회를 틈타 극우세력이 지지를 끌어모으고 있다. 정부는 인터넷 감시를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끔찍한 악순환이다.

만약 유럽사회가 이슬람 인구를 자신들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공존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이슬람 근본주의의 확장을 경계하고 테러에 단호하게 반대하면서, 동시에 수많은 무슬림들의 신앙이 왜 극단적인 성향으로 전도되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에서는 2004년부터 학교에서 무슬림 여학생들의 히잡(머리에 두르는 수건) 착용이 금지되었다. 2011년부터는 길거리에서 부르카(온 몸을 가리는 두건)를 착용하고 얼굴을 가리는 행위가 금지되었다. 국가가 개인의 옷차림마저 규제하는 것은 극단적인 사생활 침해이자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이다. 더군다나 이러한 규제는 신앙의 자유에 대한 침해이기도 하다. 아쉽게도 프랑스의 세속주의 세력, 즉 공화주의적, 사회주의적 좌파는 항상 이 문제에 침묵하거나 아니면 그들의 세속주의 원칙에 따라 이 조치들에 찬성해왔다. 그러나 진정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사람이라면 타종교가 신성시하는 선지자를 알몸으로 그리고 모독할 권리 그 이상으로, 소수자들이 자신의 믿음을 지킬 수 있는 권리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믿음에 대한 비판의 권리만큼이나 믿을 수 있는 권리 역시 존중받아야 한다.

우리는 한 시사잡지의 만평을 보고 느낀 격분을 야만적인 학살이라는 방식으로 해결하려 했던 사람들에게 분노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러한 행동을 사주한 이슬람 근본주의 단체들에게도 분노한다. 그러나 유럽 사회는 수많은 이슬람권 이주민들과 그들의 자녀들이 근본주의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모든 형태의 인종주의적 차별 선동을 중단해야 한다. 그것만이 이 사회를 살아가는 다양한 집단의 사람들의 공존을 가능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표현의 자유는 지켜져야 한다. 그것이 사회의 다양성을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 표현의 자유는 다시금 혐오와 차별선동에 대해서는 그 스스로의 예외를 허용해야 한다. 이것만이 표현의 자유가 애초에 지키고자 했던 사회의 다양성과 관용적 질서를 가능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물론 이 예외는 결코 국가권력에 의한 강제에 의한 것이어서는 안 되며, 시민사회의 힘을 통해 설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 시민사회의 힘을 만들어내는 것은 다시금 소수자와 차별받는 사람들에 대한 보편적 연대의식이다. 이 연대의식의 성장은 억압받는 타자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나는 샤를리다”라는 구호는 <샤를리 에브도>가 표현해온 이슬람과 무슬림에 대한 차별적이고 인종주의적 시선에 비추어볼 때 적합한 구호가 아니다. 이것이 우리가 <샤를리 에브도>의 희생자들을 슬픔과 분노 속에 추모하면서도, “나는 샤를리다”라는 구호에 만족할 수 없는 이유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이유로 이를 대신해 “나는 아흐메드다(Je suis Ahmed)”라는 구호를 외친다. 아흐메드는 사건 당시 숨진 아랍계 경찰관의 이름이다. 그 역시 선지자 모하메드와 무슬림을 조롱하는 <샤를리 에브도>의 논평에 수치심을 느꼈을 무슬림이었다. 그러나 그는 <샤를리 에브도>의 표현의 자유를 위해 죽었고, 따라서의 그를 기리는 것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폭력적 침탈에 항의하면서, 소수자 무슬림의 권리 역시 방어하는 의미를 갖는다. 표현의 자유를 지키고 폭력에 항의하며, 동시에 타자화된 소수자들에 대한 연대의식을 표현하는 것.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요구되는 매우 어려운 과제다.

 

 

오 탄넨바움! [베를린에서 온 편지 10]

오 탄넨바움!

?한상원(한철연회원/베를린 통신원)

 

*베를린에서 유학 중인 한상원 회원이 인문학 동향이나 정치 소식을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12월 25일 새벽, 성탄절을 맞아 쓰는 편지.

독일에서 가장 널리 사랑받는 성탄절 노래는 독어로 탄넨바움이라고 불리는 전나무를 예찬한 곡 <오 탄넨바움(O Tannenbaum)>이다. 16세기부터 내려오던 전래동요로서, 1824년 라이프치히의 에른스트 안쉬츠(Ernst Ansch?tz)에 의해 크리스마스와 연관된 곡으로 가사가 수정되면서 대표적인 독일의 캐롤이 되었다. 전나무는 독일에서 흔하게 자라는 나무이면서 동시에 크리스마스 트리로 사용되는 나무이기 때문에 독일의 크리스마스와 겨울을 상징한다. 어느 곳에서 나무가 많은 독일에서는 한 겨울, 흰 눈에 뒤덮인 전나무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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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곡은 영국으로 옮겨가 아일랜드 출신의 혁명가 Jim Connell에 의해 가사가 붙여져 1889년 <적기가(The Red Flag)>라는 민중가요로 재탄생했는데, 이 곡은 영국 노동당을 비롯한 노동운동진영뿐 아니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응원팬들에 의해 널리 불리며 여전히 전승되고 있다. 이 곡이 과거 북한에서 번안되어 <적기가>라는 군가로 사용되었는데, 우리에겐 영화 <실미도>에서 북파 암살요원들이 결의에 찬 채 이 곡을 부르는 장면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이 영화는 당시 심기가 불편했던 몇몇 우익들로부터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국가보안법과 ‘종북’ 논란까지 불러일으킨 이 곡이 실은 독일에서 어린이들이 즐겨 부르는 평온한 느낌의 성탄 캐롤이라는 점은 우리가 사는 “실재의 사막”이 얼마나 아이러니한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총 3절로 이뤄진 노래 <오 탄넨바움>의 가사는 지역별로, 시대별로 조금씩 다르지만, 가장 고전적인 버젼은 다음과 같다. 독어로 먼저 쓰고 한글로 번역해보자.

1.

O Tannenbaum, o Tannenbaum,

wie treu sind deine Bl?tter!

Du gr?nst nicht nur zur Sommerszeit,

nein, auch im Winter, wenn es schneit.

O Tannenbaum, o Tannenbaum,

wie treu sind deine Bl?tter!

오 전나무야, 오 전나무야

너의 잎은 얼마나 충직한가!

너는 여름에만 초록빛인 것이 아니다.

아니다. 겨울에도, 눈이 올 때도 초록빛인 것이다.

오 전나무야, 오 전나무야

너희 잎은 얼마나 충직한가!

2.

O Tannenbaum, o Tannenbaum,

du kannst mir sehr gefallen.

Wie oft hat nicht zur Weihnachtszeit

ein Baum von dir mich hoch erfreut!

O Tannenbaum, o Tannenbaum,

du kannst mir sehr gefallen!

오 전나무야, 오 전나무야

너는 내 마음에 쏙 드는구나.

몇 번이고 성탄 기간에는

너라는 한 그루 나무가 이토록 나를 즐겁게 하는구나!

오 전나무야, 오 전나무야

너는 내 마음에 쏙 드는구나.

3.

O Tannenbaum, o Tannenbaum,

dein Kleid will mich was lehren:

Die Hoffnung und Best?ndigkeit

gibt Trost und Kraft zu jeder Zeit.

O Tannenbaum, o Tannenbaum,

dein Kleid will mich was lehren.

오 전나무야, 오 전나무야,

너의 옷은 내게 무언가를 가르쳐 준단다.

희망과 강인함은

매 시간 위안과 힘을 주는구나.

오 전나무야, 오 전나무야,

너의 옷은 내게 무언가를 가르쳐 준단다.

노래 가사가 말해주는 것처럼, 전나무의 잎은 비단 여름에만 푸르게 만개하는 것이 아니다. 춥고 눈과 바람이 몰아치는 매서운 겨울에도 전나무의 잎은 초록빛과 그 풍성함을 유지하며 다가오는 따스한 봄을 기다린다. 그래서 전나무는 변하지 않고 늘 푸르른, 충직한, 믿음직스러운 나무이며, 또한 온갖 시련과 역경을 이겨내는 강인함을 지니고 있다. 이 때문에 전나무는 우리에게 깨달음을 준다. 전나무의 강인한 생명력처럼 우리도 이 힘겨운 시련을 버티고 이겨낼 때, 다시 도래할 따스한 봄날의 햇살을 마주할 수 있으리라는 진리가 바로 그것이다.

한 겨울의 살얼음처럼 차가운 추위 속에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칼처럼 매섭게 불어오는 바람은 살갗을 할퀴고 상처를 내며 지나간다. 한 겨울 한국은 민주주의의 죽음이라는 재앙을 선고받았다. 유권자에 의한 직접 투표로 5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한 당이, 국민에 의해 선출되지 않고 정권과 권력자들에 의해 임명된 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산명령을 받았다. 북한과의 실질적 연관성이 증명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당의 강령이 북한의 주장과 유사하다는 것만으로 정당을 해산시킨 유례가 없는 판결이다. 선출된 국회의원들은 제명되었고, 일반 당원들에 대해서까지 공안수사의 보복이 몰아칠 예정이다.

이 판결이 매서울 칼바람인 이유는 해산판결을 받은 당의 구성원들뿐 아니라, 정권과 권력자들, 그리고 그들이 지배하는 거대한 사회적 억압체계에 대항하는 주장을 펴거나 행동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이 잠재적으로 ‘종북’이라는 낙인이 찍힐 위협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낙인찍기와 마녀사냥이 터져나올 것이다. 극단적인 불평등과 경제난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때마다 ‘종북’이라는 꼬리표가 붙어다닐 것이다. 생존의 권리, 평등, 자주적 주권 등 실제로는 ‘부르주아적’ 근대 사회의 산물인 개념이 ‘종북’이라는 낙인과 함께 법의 외부로 추방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 사회가 전근대화될 위기, 민주주의 이전의 단계로 퇴행할 위기에 처해 있다. 모든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주장들이 ‘자기검열’에 시달릴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면 ‘종북’으로 몰리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마법처럼 모든 사람들의 생각을 사로잡을 것이다.

10년 전, <오 탄넨바움>을 원곡으로 한 북한가요 <적기가>로 인해 영화 <실미도>가 국가보안법 논란에 휘말렸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와 같은 상황이 하나의 희극이며 구시대적 냉전적 사고의 유물이라고 웃어넘겼다. 그 때 사람들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한 우스꽝스러운 희극적 사건이 드러내는 비극성이 커지고 커져, 결국 한 사회 전체를 잠식하게 될 줄은.

 

실미도 항공사진

실미도 항공사진

 

거센 칼바람이 휘몰아치는 냉혹한 겨울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사회적 시련이다. 이 현실의 역경 속에서, 다시 전나무가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을 새겨야 하는 것이 아닐까. 현실이 어렵다 하여 색을 변화시키지도 말 것이며, 고난과 역경이 닥치더라도 잎을 떨어뜨리지 말고 언제나 한결같이, 늘 그래왔던 것처럼 푸르름을 유지하라. 그러면 지금 너를 떨게 만드는 추위도, 너의 얼굴에 생채기를 내는 매서운 찬 바람도 그칠 것이다. 해가 나고, 따스한 봄이 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푸르름도 더욱 빛을 발하리라. 전나무는 이렇게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성탄의 밤에, 충직하고 또 강인한 전나무를 생각한다.

 

 

박원순과 보베라이트: 서울 시민인권헌장의 폐기를 지켜보며 [베를린에서 온 편지 9]

박원순과 보베라이트: 서울 시민인권헌장의 폐기를 지켜보며

?한상원(한철연회원/베를린 통신원)

 

*베를린에서 유학 중인 한상원 회원이 인문학 동향이나 정치 소식을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성적 지향을 근거로 성적 소수자를 차별해선 안 된다는 내용이 담긴 서울 시민인권헌장이 폐기되는 과정은 많은 물음을 낳는다. 무엇보다도 이 문제는 그동안 시민운동가 출신으로 젊은 층의 진보적인 시민들에게 광범한 사랑을 받아온 박원순 시장이 보수적 종교인들의 압력에 굴복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과 실망을 안겨주고 있다.

필자는 지난 8월 베를린을 방문한 박원순 시장을 가까이서 본 적이 있다. 세월호 유가족에 호의적이지 않았던 <조선일보>가 마련한 독일-한국 교류 행사에 참석한 것이라 눈치가 꽤 보였을텐데도, 박원순 시장은 당시에 세월호 특별법을 위한 서명운동을 진행중이던 교민들을 방문해 악수를 나누며 격려를 해주었고, 이런 모습은 베를린 교민들에게 상당히 긍정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베를린 세월호 특별법 서명운동을 격려하는 박원순 시장

베를린 세월호 특별법 서명운동을 격려하는 박원순 시장

 

시장으로서 동성애를 지지할 수 없다?

 

베를린을 방문한 박원순 시장은 베를린 시장인 클라우스 보베라이트를 만나 두 시의 우호관계 증진을 논의하며 “문화관광 분야 교류를 위한 업무협약(MOU)”를 체결했다. 이날 박원순 시장을 만나 함께 악수를 나누고 베를린과 서울의 공동의 미래에 대해 논의한 클라우스 보베라이트 베를린 시장은 2002년부터 올해까지 무려 13년째 베를린 시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오늘날 젊은 보헤미안 예술가들과 학생들에게 전 유럽에서 가장 사랑받는 문화도시 베를린을 만들어낸 주역이다. 또한 그는 동성애자이기도 하다. 이미 정식 시장이 되기 전에 이미 그는 커밍아웃을 통해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밝혔으며, 그가 했다고 알려지는 “나는 동성애자입니다. 그건 그런대로 괜찮아요 (Ich bin schwul ? und das ist auch gut so!)”라는 말은 그 이후 수 많은 사람들에게 젊고 개혁적이며, 소수자와 약자를 대변하는 베를린 시장으로서 그의 이미지를 어필해왔다.

 

사진 2) 박원순 서울시장과 보베라이트 베를린 시장 (사진제공: 서울시 홈페이지)

사진 2) 박원순 서울시장과 보베라이트 베를린 시장 (사진제공: 서울시 홈페이지)

 

무려 13년째 자기 자신을 동성애자로 밝힌 시장이 통치하는 도시에 사는 사람의 관점에서는 “시장으로서 동성애를 지지할 수 없다”고 말하는 박원순 서울시장의 발언이 이해가 되질 않는다.

 

첫째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시장은 어째서 소수자의 인권을 대변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인지에 대해서다. 과거 시민운동가로 활동한 박원순 시장은 여러 차례 동성애자를 비롯한 소수자의 인권에 대해서 옹호한 바가 있다. 그런데 시장은 중립을 지켜야 하므로 갈등을 부추길 수 있는 인권헌장 제정에 대해서 찬성할 수 없다고 말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시장이라는 자리가 모든 시민의 자유로운 삶과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점을 감안해보면, 오히려 ‘시장이기 때문에’ 동성애자들의 권리를 옹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 물음은 다시 두 번째 질문으로 이어진다. 만약 언론에 알려진대로 박원순 시장이 “시장으로서 동성애를 지지할 수 없다”고 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말 자체가 논리적으로 성립이 되지 않는 것이다. 동성애는 지지 또는 반대와 무관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들 사이의 감정과 사랑에 관한 것으로, 어떤 사람이 다른 누군가와 맺는 관계의 형태 중 하나이며, 따라서 타인의 지지와 동의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누군가 동성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차별과 소외, 억압에 시달려야 한다는 것이고, 이것은 그 누구도 인종과 종교, 성적 지향에 따라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현대 사회의 원칙에 비추어볼 때 정당하지 못한 일인 것이다.

따라서 시장이라는 공적인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은 서울시 안에서 보편적인 가치인 인권이 지켜지고 있는지를 감시하고, 불평등과 차별을 해소해야 할 의무를 갖는다. 이를 소홀히 하는 것이야말로 태만이다.

 

억압의 상처?

 

베를린 놀렌도르프광장(Nollendorfplatz)은 동성애자들이 많이 거주하기로 유명한 지역이다. 이곳에 가면 나치의 지배 하에서 억압 속에 목숨을 잃어야 했던 동성애자들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있다.

 

사진 3) 놀렌도르프 광장의 희생된 동성애자들 추모비

사진 3) 놀렌도르프 광장의 희생된 동성애자들 추모비

 

나치가 집단적으로 학살한 것은 유태인들만이 아니었다. 그 외에도 떠돌이생활을 하는 (흔히 집시라는 차별적 이름으로 알려진) 로마족, 그리고 동성애자들 역시 탄압을 받았고 수용소에서 죽어갔다. 게르만 민족의 우월함을 유지한다는 나치의 광신적 우생학의 관점에서는 동성애자 역시 게르만족의 자손 번식을 가로막는데다, 게르만족의 성적 미풍양속을 해치는 제거돼야 할 사회의 악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동성애자들을 향해 온갖 폭력적인 발언들을 쏟아부으며 그들에 대한 인권을 인정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는 보수 종교인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나치의 그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리고 나치의 기억 때문에 독일에서 소수자에 대해 노골적으로 차별을 선동하는 사람에게는 지금 한국에서 보수 차별주의자들이 소수자들에 대한 증오를 선동할 수 있는 표현의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을까? 소수자 차별은 범죄다. 그리고 모든 시민의 인격적 평등을 주창하는 헌법의 가치가 존중받는 나라에서라면 당연히 범죄가 되어야 한다. 동성애라는 사랑의 형태가 아니라,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증오야 말로 사회적으로 추방해야 할 범죄인 것이다.

 

보론: 인간의 권리와 신의 권리?

 

보수 종교인들은 신이 동성애를 금지했으므로, 소수자의 인권 역시 존중받을 수 없다는 태도를 취한다. 그런데 ‘인간의 권리’는 ‘신의 권리’와 양립될 수 없는 것일까? 철학자 칸트는 양자가 양립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의 도덕법칙을 신의 계명으로 여기고 살아갈 때 나는 자유로워지며, 내가 자유롭게 행위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유를 보장해주는 자연에 있어 인간인 나의 존재가 목적이기 때문이며, 이러한 목적의 관계는 다시 신의 존재를 전제해야 하므로, 결국 ‘나의 자유’와 도덕법칙은 ‘전능한 신의 존재’를 증명할 유일한 길이다. 이것이 칸트가 인간의 자유와 이성, 도덕의 관점에서 신의 존재를 논하는 방식이다.

자유로운 인간은 신을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신을 공포의 대상, 복종해야 할 존재로 여기는 것은 미신과 우상숭배의 흔적이다. 진정한 신학과 종교는 신을 나의 자유(그리고 자유로운 의지에서 나오는 도덕법칙)를 보장해주는 세계의 근원적 존재자로 표상하는 데에서 출발하지, 엎드려 절하며 두려워 몸서리치는 데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신이 동성애를 금지했을까. 물론 몇 구절들을 인용해 기독교는 동성애와 양립불가능하다고 주장할 수는 있다. 그러나 성경을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하지 않고 글자 그대로 이해하는 것은 위험하다. 예컨대 성경에는 근친상간도 등장한다. 창세기를 보면 소돔에서 도망쳐나온 롯의 두 딸이 번갈아가면서 아버지를 잠들게 만든 후 겁탈하는 장면도 등장한다(창세기 19:30~38).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율법들 중 상당수는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전혀 적용될 수 없을 뿐더러, 기독교인들도 전혀 지키지 않고 있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예수가 등장해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동성애자들은 사랑을 원한다. 그것은 동성애자들에 대한 보수 기독교인들의 증오의 감정보다 훨씬 더 숭고한 감정이다. 인간의 권리는 신의 권리와 모순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은 인간이 서로 증오하는 것보다는 사랑하는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은, 인간에게는 다른 인간을 차별할 권리가 없다는 것. 그래서 인종, 종교, 성적 지향에 상관없이 만인이 동등한 법적 인격으로 대우받아야 한다는 것. 그게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의 원칙이다. 지금은 마녀를 이단심문해서 불에 태워버리던 중세, 혹은 천주교도들이 조상에게 제사지내지 않는다고 참수해버리던 조선시대가 아니다. 만인의 인격이 동등하다는 것이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현대 사회다.

동성애에 대한 증오를 선동하는 사람은 결국 현대의 성과를 되돌리고 사회를 전근대로 되돌리려는 시도를 하는 셈이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지, 뒤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극단의 시대 [베를린에서 온 편지 8]

극단의 시대 [베를린에서 온 편지 8]

 

 

한상원(한철연회원/베를린 통신원)

 

*베를린에서 유학 중인 한상원 회원이 인문학 동향이나 정치 소식을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1960년대 서구의 청년들은 체 게바라에 열광했다. 쿠바혁명을 성공시킨 뒤 권력을 거부하고 다시 볼리비아의 정글로 돌아가 싸우다 전사한 게릴라의 영웅. 1968년의 학생운동 분출 이후 급진화된 일부 청년들은 70년대에 도시게릴라 운동을 벌인다. 독일과 일본 적군파, 이탈리아 붉은여단은 테러라는 수단에 의존해 세계를 변혁하려 했다. 그들의 방법은 틀렸지만, 적어도 그들의 이상은 원대했다. 평등한 세계.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슈피겔지 기자 출신으로 알렉산더 바더와 함께 적군파를 이끈 울리케 마인호프는 독일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를 잇는 좌파진영의 성녀와 같은 존경을 받는다.

오늘날 서구사회로 진출한 무슬림들의 자녀들은 높은 차별의 벽과 깊은 절망 앞에서 지하드 전사를 꿈꾼다. 턱수염을 기른 살라피스트와 근본주의 종교지도자들이 거리집회에서 마이크를 잡고 이슬람 국가건설의 당위, 그리고 지하드 성전의 참전을 호소하면 차별 속에 절망하던 무슬림 청년들의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트위터, 유튜브 등에는 검은 두건을 걸치고 바주카포를 쏘는 지하드 전사의 영상이 뮤직비디오처럼 화려하게 편집되어 돌아다닌다. 영상 매체에 익숙한 젊은 세대들은 더욱 큰 자극을 받는다. 그들은 터키 국경을 넘어 이라크와 시리아의 교전 지역에 진입해 지하드 전사가 된다. 지금 중동에서 활약하고 있는 이슬람국가(IS) 전사들 중 상당수는 유럽, 미국, 호주 등에서 온, 아랍어를 하지 못하는 서구출신 이민자들의 자녀다. 그래서 영국의 잘나가는 힙합DJ가 어느날 유튜브 동영상에 출연해 미국인 기자의 목을 베는, 영화에서조차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이 현실이 되고 있다.

60년대에 청년들이 붉은 별이 그려진 베레모를 쓰고 파이프담배를 문 에르네스토 게바라에게 열광했다면 21세기에 유럽 한복판에 사는 무슬림 청년들은 검은 두건을 두르고 검은 깃발을 펄럭이며 코란과 기관총을 양손에 든 지하드 전사에 열광한다. 70년대에 체 게바라의 후예들에게 적어도 평등한 세계에 대한 이상이 존재했다면, 오늘날 무슬림 청년들은 수니파 이슬람 신정국가를 만들어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광신적 근본주의를 꿈꾸고 있다. 시아파 무슬림, 소수파 기독교도, 쿠르드족 등에 대한 인종청소와 모든 종류의 광적 폭력은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헤겔이 말한 것처럼, 객관적 인정을 결여한 주관적 확신이 그 자체로 초월적, 절대적 정당성을 얻었다고 자처하는 순간, 그것은 종교적 광신주의가 된다. 이념이 아니라 종교적 광신을 위한 살상이 청년들을 마법처럼 휘감는다. 세계가 얼마나 퇴보했는가를 이처럼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또 있을까.

지난 9월, 독일정부는 독일 내 IS의 불법화를 선언했다. 내무부장관이 기자회견을 열고 이제 거리집회에서 IS의 상징이나 깃발을 드는 것, 신문 등에 IS 지지광고를 내는 것, 거리 연설 모두 범죄로 형사처벌될 거라고 강하게 경고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효력이 없어 보인다. IS가 시리아 북부의 쿠르드족 대규모 거주지역인 코바니를 맹공격하며 쿠르드족에 대한 대량학살을 자행하고 있는 가운데, 독일 전역에서는 10월 7일, 쿠르드족 이민자들이 거리시위를 통해 IS의 학살을 규탄했다. 그런데 함부르크에서는 IS의 지지자들이 쿠르드족 시위대를 습격해 양쪽 진영 사이에 칼과 쇠파이프가 동원된 격렬한 거리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불법화라는 방식으로는 IS 지지자들이 생겨나고 공공연한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저지하는 데 한계가 있음이 드러난 것이다. 유럽의 이슬람권 이민자 청년들이 종교적 근본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은 그들에게 누적되어 온 차별과 박탈, 배제의 원한감정(Ressentiment)이 그들로 하여금 반사회적 폭력으로 나아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세속국가의 법보다 신의 법(물론 정작 코란은 폭력을 옹호하지 않는다고 여러 종교학자들이 말하고 있지만)을 우선시하는 사람들에게 ‘불법’이라는 표식이 얼마만큼 효력이 있겠는가?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독일 정부에게 다음과 같이 묻지 않을 수 없다. 테러단체 IS를 불법화한 독일정부는 그렇다면 노골적인 인종주의 네오나치 정당 NPD(독일국민당)를 그동안 어째서 불법화하지 않았는가. 동독 지역의 반실업 상태 독일 청년들이 극우 이데올로기에 감염돼 이주자들을 공격하고 NPD와 같은 극우정당들(최근에는 NPD보다는 온건하지만, 마찬가지로 외국인 혐오와 유럽연합 탈퇴 등 독일민족주의에 기댄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구동독 지역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에 투표하는 것을 왜 방치해왔는가? 무슬림 청년들이 차별의 벽에 막혀 극단적인 대안을 찾고 있는 현상에는 이주민 정책을 실패로 이끈,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독일 청년들 사이에 인종주의가 뿌리내리는 것을 방조한 정부 자신의 책임은 없는가?

극단적인 불평등과 갇혀 있는 현실, 불투명한 미래에 좌절한 유럽의 청년들은 극우 인종주의에, 이주민들의 자녀들은 종교적 광신주의에 물들고 있다. 옆 나라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유럽의회 선거에서 극우정당(프랑스 국민전선(FN)과 영국의 영국독립당(UKIP))이 1위를 차지했다. 한 편에서는 극우 인종주의적 선동에 현혹되어 외국인들에 대한 증오범죄를 저지르는 빈민층 독일 청년들이, 다른 한 편에선 이슬람 신정국가 수립을 위해 지하드 성전에 동참하려는 무슬림 청년들이 거리에서 유혈낭자한 전투를 벌이기도 한다. 이제 이러한 폭력은 쿠르드족과 IS 지지세력의 충돌에서 보듯, 같은 무슬림 청년들 사이의 대립으로도 번지고 있다. 극단의 시대다. 극단적인 불평등은 극단적인 분열과 폭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에서도 여러 극우 청년 단체들이 이제 온라인을 벗어나 조직력과 자신감을 과시하며 활동을 시작했다는 소식들이 들린다. 우경화와 약자에 대한 조롱, 국가에 대한 신화 속에 뭉친 이들의 활동은 IMF 이후 미래가 막혀버린 절망적인 세대의 극단적인 탈출구인 셈이다. 그들 역시 결국 이 극단의 시대가 만들어낸 피조물인 것이다. 극단의 시대, 이 극단의 쳇바퀴를 과연 멈출 수 있을까?

 

 

발터 벤야민과 함께 티어가르텐을 산책하다 [베를린에서 온 편지 7]

발터 벤야민과 함께 티어가르텐을 산책하다 [베를린에서 온 편지 7]

 

 

한상원(한철연회원/베를린 통신원)

 

*베를린에서 유학 중인 한상원 회원이 인문학 동향이나 정치 소식을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내가 사는 곳은 베를린 모아빗(Moabit)이다.?종교박해를 받던 위그노 교도들이 이주해 와서 성경에 등장하는?‘모압’이라는 지명을 따다가 이름 붙인 것이 그 이름의 기원이라고 알려져 있다.?전통적으로 모아빗 바로 위에 있는 베딩(Wedding)과 함께 베를린 노동계급의 거주지였고?20세기 초에는 이 지역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공산주의 운동이 활발하게 성장,?히틀러 치하에서도 반나치 운동이 왕성하게 펼쳐진 곳이다.?지금은 슈프레강 인근의 부유한 주택에 사는 독일인 중산층을 제외하고는 전 세계에서 온 가난한 이주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며,?특히 베딩,?크로이츠베르크(Kreuzberg)에 이어 터키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라 거리에 나가보면 여기가 독일인지 아니면 터키나 중동의 어느 도시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때도 있다.

모아빗 인근에는 커다란 도심 속의 숲 티어가르텐(Tiergarten)이 위치해 있다.?티어가르텐은 과거 프로이센 왕의 사냥터였다가 이후에 공원으로 지정되어 시민들에게 개방된 곳이며,?대규모의 도심 속 숲이다.?날씨가 좋은 날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갈 때는 모아빗에서 출발해 전승기념탑을 지나 티어가르텐을 가로질러 브란덴부르크 문을 통과한 뒤 운터덴린덴(Unter den Linden)?거리를 따라 달린다.?한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내리쬘 때에도 티어가르텐의 숲 속으로 들어가면 나무들 사이로 부는 시원한 바람에 더위를 잊게 된다.?도심 한 복판에 삭막한 고층건물이 아니라 커다란 숲과 공원이 위치해 있다는 것은 베를린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축복일 것이다.?이 때문에 티어가르텐은 오늘날 사람들이 베를린을?‘생태도시’로 규정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베를린의 상징물이기도 하다.?빽빽이 들어선 빌딩숲이 아니라 말 그대로 수풀로 우거진 자연공원 속에서 길을 잃을 수 있는 경험은 베를린이 아닌 다른 대도시에서는 하기 어려운 일이다.?바로 이 때문에 발터 벤야민 역시 그가 베를린을 회상할 때 가장 먼저 이곳 티어가르텐을 언급한다.

사진1

 

길을 잃은 벤야민

“어떤 도시에서 길을 잘 모른다는 것은 별일이 아니다.?그러나 그 곳에서 마치 숲 속에서 길을 잃듯이 헤매는 것은 훈련을 필요로 한다.”?벤야민의『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에 등장하는 첫 문장이다.?티어가르텐에서는 길을 잃기 쉽다.?넓은 숲속에 나있는 복잡한 산책로들이 미로처럼 얽혀있기 때문이다.?이곳에서 길을 잃는 것은 그러나 나쁜 경험으로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여기서 길을 잃은 산책자는 시간에 쫓기거나 뚜렷한 목적지에 도달해야 한다는 다급함 없이 꿈을 꾸듯 부유하며 자신의 사색을 전개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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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의 어린시절도 그러했다.?벤틀러 다리(Bendlerbr?cke)에서 시작되는 벤야민의 티어가르텐에 대한 회상은 티어가르텐의 미로처럼 복잡한 산책로들 위에서 아리아드네의 실을 따라 이어진다.?이 다리는 어린 나이에 죽은 그의 동급생 루이제 폰 란다우가 살던 뤼초우 물가와 교차하여 란트베어운하(Landwehrkanal,?조금 뒤에 보겠지만 로자 룩셈부르크가 죽은 곳이기도 하다)를 가로지르는 곳이다.?벤틀러 다리를 지나 조금 더 걸으면 티어가르텐의 남쪽 입구가 나온다.?아마 어린 벤야민은 이곳을 거쳐 자신의 목적지로 향했던 것 같다.

 “벤틀러 다리의 완만한 아치형 곡선은 내가 처음으로 접한 언덕의 측면이었다.”

“벤틀러 다리의 완만한 아치형 곡선은 내가 처음으로 접한 언덕의 측면이었다.”

그의 발걸음이 가장 먼저 닿는 곳은 티어가르텐 안에 위치한 루이제섬(Luiseninsel)이다.?이곳에는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3세와 그의 부인이자 독일인들에게 지금까지도 널리 사랑받는 인물인 루이제 왕비의 동상이 약간의 간격을 두고 서 있다.?벤야민은 이곳을 아주 좋아했고 특히 동상을 받쳐주는 아래 기둥 부분의 조각장식들을 마음에 들어 했던 것 같다.?특히 루이제 왕비의 동상 아래 부분에는 남녀간의 격정적인 사랑을 표현해놓은 장식이 있는데,?벤야민이 그의 글에서 바로 이곳에서 그가?‘사랑’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해했다고 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일 것이다.?특히 벤야민은 젊은 나이에 요절한 루이제 왕비로부터 자신의 동급생이었던 루이제 폰 란다우의 사연을 연상시킨다.?이 둘은 모두 루이제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며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이로부터 벤야민은 아름다움에는 언제나 차가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서,?그것을 손에 넣으려 제 아무리 시도한다 한들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지배를 받는다는 비극적인 진실을 깨닫는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루이제 왕비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루이제 왕비

 

전승기념탑

영화?<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인간들의 삶을 엿보고 그들의 생각을 엿듣는 천사 다미엘(브루노 간츠)은 티어가르텐의 정중앙에 위치한 전승기념탑의 여신상 어깨에 올라 앉아 인간 세계를 내려다본다.?사랑의 기쁨,?헤어짐의 고통,?삶의 무게,?시간의 무상함 등 인간들이 느끼는 감정과 그들의 일상적 삶에 무한한 호기심과 동경을 갖고 지내던 다미엘은 써커스단에서 곡예를 하는 어느 여인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 뒤 인간이 되기로 결심한다.?천사가 인간이 되려면 자살을 해야 하는데,?이 때 그가 선택한 장소 역시 전승기념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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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기념탑은 프로이센이 프랑스와의 보불전쟁에서 승리,?나폴레옹?3세의 항복을 받아낸 스당전투를 기념하기 위해?1873년 설립되었다.?보불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은 이듬해 독일 전체를 통합하고 스스로 황제국으로의 승격을 선포한다.?따라서 전승기념탑은 뿔뿔이 흩어져 통일된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근대화를 이룩하지 못한 채 낙후되어 있었던 독일이 프랑스를 제압하고 통일을 이룩한 뒤 유럽최강국으로 변모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기념물이라 할 수 있다.?그러나 전 세계인들이 알고 있듯이,?독일의 역사는 이후 평탄하지 못했다.?가빠른 군국주의화 물결 속에 두 차례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모두 패한 뒤 독일은 동서독으로 분단되었고 수도 베를린 역시 두 개로 쪼개져야 했다.?그 이후 냉전기간동안 전승기념탑은 독일의 비극적인 현대사,?그리고 동서로 분단된 채 장벽으로 가로막힌 베를린의 현주소를 상징하는 기념물이 되었다.?독일의 승리와 번영의 상징에서 전쟁과 분단의 아픔의 상징으로.?전승기념탑은 독일 현대사의 주요 장면들과 늘 함께 해왔다.?이 점에서 탑의 꼭대기에서 인간들을 내려다보는 승리의 여신상은 인간들의 삶의 기쁨과 고통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천사 다니엘을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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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역사의 진보는 동시에 계속해서 반복되는 파국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것이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적 성찰이다.?마찬가지로 그는 스당전투의 승리와 전승기념탑 건립이 보여주는 독일의 성공과 번영,?그리고 그 정점에 서 있는 나치의 세계대전 수행의 와중에 세계사의 죽음을 보았다.?『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에서 그는 이렇게 쓴다. “프랑스인들이 패배한 이후 세계서는 영광스러운 무덤 속으로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으며 이 전승기념탑은 그 무덤 위에 세워진 돌로 된 묘비였다.”

아름다움은 차가운 그림자를 안고 우리 앞에 나타난다는,?루이제 왕비의 동상으로부터 얻은 벤야민의 깨달음은 역사의 흐름에도 적용된다.?군국주의 독일과 나치즘의 승리와 번영은 이미 그 자체로 세계 역사에 짙게 드리운 총체적 파국과 일치한다.?역사의 진보는 그것이 그 정점에 서 있을 때 동시에 참담한 파국의 역사로 나타난다.?승리를 기념하는 탑이 세월이 흘러 전쟁의 비극과 분단의 아픔을 상징하는 기념물이 되었듯이,?역사는 희극과 비극이 무한히 교차하는 가운데 운명처럼 그 힘을 드러낸다.?벤야민 역시 그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도주하던 중 스페인 국경도시인 포르부에서 자살을 택함으로써 그 스스로 이?“세계사의 죽음”의 희생자가 되지 않았던가?

 

란트베어카날

베를린의 란트베어운하는 많은 것들을 가로지른다.?벤야민은?『베를린 연대기』에서 란트베어운하를 빈민구역과 부유층 거주지를 가르는 경계로 소개한다. “프롤레타리아 주거 지역과의 차단벽 역할을 하는 란트베어 운하의 느릿느릿 흐르는 물”은 계급 분단을 나타내는 지표다.?운하의 남쪽에는 동물원 역과 쿠담 거리가 있고,?고가 명품 의류를 판매하는 상점들이 즐비한 이곳은 베를린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손꼽힌다.?반면 운하와 티어가르텐 북쪽에 위치한 모아빗과 베딩은 노동계급의 집단 거주지였다.?그곳에는 벤야민이 크리스마스 장터를 구경하러 집밖으로 나왔을 때 화려한 트리장식과 달콤한 먹거리들 사이로 자신의 존재를 불쑥 내밀어 그를 당혹케 만든?“가난한 자들”,?그리고 벤야민의 꿈 속에 나타나 그를 괴롭히는“꼽추 난쟁이”들이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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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벤야민은 이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알지 못했다.크리스마스가 되면 그는 부모와 함께 화려한 가판대에서 물건들을 구경하지만,?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은 스스로 만든 인형을 가지고 놀다가 부유한 집안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장터를 구경나오면 그들에게 구걸을 해야 했다.란트베어 운하가 빈민층 거주지와 부유층 거주지를 구획했듯이,?크리스마스 역시 아이들을 두 개의 집단으로 나눈다. “크리스마스는 부르주아 집안의 아이들 앞에 다가오면서 그들의 눈앞에서 단번에 도시를 두 개의 진영으로 나눈다.”

란트베어운하는 슬픔을 간직한 곳이다.?이곳은 그가?『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에서 소개한,?귀족 가문의 동급생 루이제 폰 란다우가 살았고 그녀의 시신이 안치된 곳이기도 하다.?그런데 이곳과 연관된 또 하나의 죽음이 있다.?벤야민이 언급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그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결정적인 죽음이다. 1919년?1월?15일 독일 혁명의 와중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반혁명 의용대의 손에 살해당한 뒤 그 시신이 이곳에 버려졌다.?며칠 뒤 그의 시신이 떠오른 곳에는 수십년이 지난 뒤 그녀의 죽음을 추모하는 기념물이 세워졌다.

사진8

로자 룩셈부르크는 란트베어운하가 가르는 가난한 자들과 부유한 자들의 삶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싸우다가 죽었고,?의용군 병사의 개머리판에 의해 두개골이 부서진 그의 시체는 다시금 란트베어운하에 던져졌다.?벤야민의 꿈에서?“꼽추 난쟁이”의 형태를 하고 나타나 그를 괴롭히는 알 수 없는 형체는,?란트베어 운하가 가르는 계급의 분단에 의해,?전승기념탑이 상징하는 독일의 군국주의화와 되풀이되는 전쟁에 의해 희생되어야 했던,?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의 알레고리인지도 모른다.

티어가르텐에서 길을 잃는 것은 좋은 경험이다.?아드리아네의 실에 의지해 미로를 따라 걷고 또 걷다보면,?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순간들은 결국 지나간 순간들이 우리 앞에 되살아나 오늘날의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벤야민의 무의식 속에서 그를 한없이 괴롭히던 꼽추 난쟁이는 결국 그에게 다가와 속삭인다.

“사랑하는 아이야,?아,?부탁이다,

꼽추 난쟁이를 위해서도 기도해주렴.”

우리는 지금,?누구를 위하여 기도를 해야 할까.

 

한국의 평화는 아직 오지 않았다. [베를린에서 온 편지 6]

한국의 평화는 아직 오지 않았다-
베를린 평화 페스티벌의 한국 포럼. [베를린에서 온 편지 6]

 

 

한상원(한철연회원/베를린 통신원)

 

*베를린에서 유학 중인 한상원 회원이 인문학 동향이나 정치 소식을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이 글은 독일 한글문화신문 <풍경>(http://www.punggyeong.de/ko)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8월 14일부터 17일까지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서는 베를린 평화 페스티벌(Friedensfestival Berlin)이 열렸다. 행사 마지막 날이자 일요일인 17일, 참석자들은 세 개의 서로 다르지만 연결되어 있는 한반도와 관련된 이슈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날 오후 무대에서는 한반도 관련 쟁점들이 연속적으로 다뤄지면서, 참석자들에게 한국에서 여전히 진행중인 전쟁과 폭력의 문제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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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페어반트(Korea Verband)에서 주최하는 오후 행사는 행사장 중앙 무대에서 15시에 시작되었다. 오프닝을 알리는 “두들소리”의 사물놀이 공연이 끝난 뒤,이어“북한-남한. 마침내 분단 61년만에 평화협정 체결인가? 분단 독일의 심장부에서 열리는 좌담회 (Nordkorea-S?dkorea. EndlichFriedensvertragnach 61 Jahre der Teilung Koreas?!:Podiumsgespr?chimHerz des ehemalsgeteiltenDeutchlands)“라는제목의토론회가열렸다. 기조발제를맡은한반도와 아시아 전문가 라이너베르닝(Rainer Werning) 박사는 한반도의 불안정이 오늘날에도 가속화되고 있으며, 이것은 동아시아 전체에 걸친 위기의 일환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나아가 한국 정부는 이 위기를 관리할 능력이 없으며 오히려 강경대북정책으로 인해 이 위기를 낳는 주범이 될 뿐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또 한국 내에서 국가보안법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정치적 반대자들을 탄압하는 데 이용되고 있을 뿐이라는 점도 독일인 청중들에게 소개했다. 이는 정전협정 체제인 한반도에서 아직 끝나지 않은 냉전이 어떻게 정치적 억압으로 활용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로 제시된 것이다. 이어 발제를 맡은 임민석 교수는 한반도 위기의 주범은 미군의 주둔과 미국의 패권전략이라고 비난하면서 정전협정을 끝내고 평화협정으로 이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미일 군사동맹이 동북아시아에서 위기를 조장하고 있다며 이에 적극 협조하는 한국 정부를 비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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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회가 끝난 뒤 프리랜서 기자 정옥희씨가 연단에 올라 독어와 영어로 한국의 세월호 유가족들의 단식투쟁 소식을 전했다. 연설에서 그녀는 세월호 사고의 발생 원인을 밝히고 정부의 책임을 묻는 특별법이 제정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독립적인 조사위원회를 구성해야만 진실을 밝히고 희생자 가족들의 억울함이 풀릴 뿐 아니라, 이와 같은 사고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점도 덧붙였다. 그녀뿐 아니라 몇몇 한국인 참석자들이 노란 종이 배를 접어 전시하고 행사장 곳곳에서 이곳을 찾은 독일인들과 외국인 관광객들을 상대로 서명을 받았다. 세월호 사건이 발생한 지 여러 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많은 독일인들은 세월호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고, 유가족들이 단식투쟁을 벌인다는 소식에 놀라워했다. 한국인 참석자들이 나눠준 유인물을 읽고 서명에 동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 중국인 관광객은 세월호 사건은 알았지만 자세한 내용은 언론에서 듣지 못해 모르고 있었다면서, 건네받은 영어 유인물을 꼼꼼히 읽고 서명을 했다. 어느 독일인 목사는 서명을 한 뒤 세월호 희생자들의 명복을 비는 기도를 해주기도 했다.

이어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인 이옥선 할머니가 행사장에 도착했다. 먼저 무대 위에서는 이옥선 할머니의 발언을 듣기 전, 일본인 무용수 카즈마모토무라(KazumaMotomura)씨의 퍼포먼스가펄쳐졌다. 참석자들은 슬픈 선율 속에서 폭력의 고통을 형상화한 그의 퍼포먼스를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이어 무대에 오른 이옥선 할머니는 “여성의 미래를 위한 치욕의 극복(?berwindung der Schamf?r die Zukunft der Frauen)”이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일본이 저지르는 참담한 만행들을 고발하고 여전히 위안부 징발을 인정하지 않고 책임을 회피하는 일본 정부를 성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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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 위에 앉은 할머니는 작고 여윈 몸이었지만 불편한 몸을 감수하며 진실을 알리고자 자신의 마지막 힘을 불사르는 모습이었다. 이제 마이크로 큰 목소리를 내는 것도 쉽지 않을만큼 몸이 쇠약해진 할머니가 거동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와 진실을 알리려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가슴 뭉클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한국인들도, 독일인들도 그리고 우연히 이곳을 찾은 다양한 국적의 방문객들도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할머니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경청했다. 특히 발언의 말미에 할머니는 본인이 위안부로서 매우 수치스러우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본인이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말하는 게 얼마나 수치스러운지 모른다고 말을 꺼냈다. 할머니는 그러나 일본이 진실을 인정하지 않고 책임을 회피하는 한 이러한 발언을 계속 할 것이며, 그래야만 두 번 다시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이와 같은 발언은 참석자들에게 이옥선 할머니의 용기와 강인함에 대해 각인시켰고, 참석자들은 모두 뜨거운 박수로 이러한 용기에 응답해주었다.

이날 이옥선 할머니의 행사에 참석하러 온 일본인 프리랜서 기자 타이치로카지무라(TaichiroKajimura)씨는 오늘 행사에서 큰 감동을 느꼈다며, 이옥선 할머니의 발언이 매우 인상적이었고 나아가 이러한 활동들이 아시아에서 인권 향상을 위한 운동들에 큰 보탬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 온 파티야 자사리(FatijaJasari)씨는 행사가 끝난 뒤 이옥선 할머니를 찾아와 긴 대화를 나누며 할머니를 위한 기도를 해주기도 했다. 그녀는 이옥선 할머니처럼 강인한 여성은 처음 본다며, 이러한 강인함에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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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행사에서 다뤄진 한국과 관련된 세 주제들, 즉 한반도의 상시적인 전쟁위기, 세월호 참사와 유가족들의 투쟁, 일본군 성노예 문제는 한국 사회의 과거, 그리고 오늘날 한국 사회가 처한 현주소를 이곳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서 그대로 표현해주고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 남북한의 군사적 긴장은 언제나 정치적 권력에 의해 권력의 유지수단으로 악용되어 왔다. 한국 사회에서 국가는 언제나 북의 위협으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민주주의를 제약하고 사회 전체를 군사적 기지로 만들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정작 300명의 학생들과 승객들이 차디찬 바다에 빠져 있을 때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정부는 골든 타임 동안 손을 놓아버렸고, 그 뒤엔 아예 구조작업 자체를 민간업체에 위임했다. 그 피해 유가족들이 특별법을 제정해 진상을 규명해달라고 애원할 때조차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돌아오는 것은 경찰의 폭력뿐이었다. 위안부로 징발된 성노예 피해자들이 과거사를 부정하는 일본에 항의하며 목놓아 외칠 때에도 국가는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3억 달러 무상차관이라는 싼 값에 일본에 대해 더 이상 어떤 배상도 묻지 않겠다고 서약했다. 지금 아베 정권이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은커녕 과거사를 부정하고, 나아가 평화헌법을 개정함으로써 군국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동안, 한국 정부는 일본의 식민지배를 미화하는 국사 교과서의 검정을 통과시키고, 이 교과서를 옹호한 사람들이 주요 장관 후보자들로 지명됐다. 국민을 억압하는 국가는 존재하지만 공적 권위를 갖는 정치체로서 국가는 한국에 존재하지 않았다. 강한 국가권력 속에서 정작 다수 대중들은 국가 없는 국민으로 살고 있는 한국의 이 역설적 상황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고민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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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평화 페스티벌은 한국에 과연 진정한 평화가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했다. 그리고 많은 참석자들은 긍정적인 대답을 내리지 못한 것 같다.

베를린 평화 페스티벌이란?

평화를 촉진하며, 국제 연합(UN)의 목적 그리고 각국의 평화 의무를 알리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하는 베를린 평화 페스티벌은 올해 6회째를 맞이했다. 이번 행사는 알렉산더 광장에서 열렸으며, 나흘간 수많은 예술가들의 전시와 공연, 각국 민속축제와 전통음식 축제, 학술적 좌담회 등 많은 행사들을 통해 평화의 중요성이 전달되었다. 독일의 무기수출 반대, 그리고 1989년 동독 정권을 붕괴시킨 시민혁명,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 시리아 위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등이 토론회의 주제들이었다. 내년에는 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아 여러가지 행사들이 열릴 에정이다. 1월 15일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아우슈비츠 해방을 기념하는 행사가 개최되고, 5월 8일에는 종전 70주년 기념 행사가 열릴 전망이다. 내년 7월 15일부터 9월 21일까지는 베를린부터 예루살렘에 이르는 평화자전거 행진이 있을 예정이다.

베를린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는가 [베를린에서 온 편지 5]

베를린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는가 [베를린에서 온 편지 5]

 

 

한상원(한철연회원/베를린 통신원)

 

*베를린에서 유학 중인 한상원 회원이 인문학 동향이나 정치 소식을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훔볼트 대학교의 나치 희생자 추모비

<사진1> 훔볼트 대학교의 나치 희생자 추모비

재작년 겨울이었다. 학교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뒤 따스한 커피 한 잔을 손에 쥐고 학교 본관건물 뒷마당을 걷고 있었다. 눈이 내려 교정 전체가 새하얗게 뒤덮여 있었다. 본관 뒷마당 한쪽 구석에는 히틀러 파시즘에 맞서 저항하다 죽음에 이른 훔볼트 대학교 학생들을 추모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 비석 역시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런데 이날 비석 바로 앞에는 누군가가 가져다 놓은 꽃다발이 높여 있었다. 새하얀 눈에 덮인 비석과 꽃다발의 풍경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애잔하게 추위에 떨고 있었지만, 색색의 꽃송이들은 지금도 누군가 희생된 자들, 쓰러져간 자들을 추모하고 있음을 꿋꿋하게 증언하고 있었다.

파시즘과 세계대전, 유태인 학살 그리고 분단과 냉전이라는 독일 현대사의 흔적들을 잊지 않고 간직하려는 독일인들의 노력은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어느 곳을 가더라도 벽에서는 파시즘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벽화를, 거리에서는 조각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바로 이렇게 과거의 비극적인 사건들의 흔적들을 보존하려는 베를린의 노력은 이 도시가 현재 전 세계인들로부터 각광을 받는 새로운 현대예술의 메카이자 관광도시로 급부상하게 된 원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예컨대 베를린에서 가장 대표적인 관광지라고 할 수 있는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Kaiser Wilhelm Ged?chtniskirche)는 이 도시를 새로 찾은 사람들에게 어떤 느낌으로 전달될까?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

<사진2>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

거대한 교회와 호화로운 궁전이 주요 관광지로 손꼽히는 여느 유럽 도시들과는 달리, 베를린의 전통적인 관광지인 이 교회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을 맞아 파괴된 상태 그대로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1895년 완성된 이곳은 프로이센 황제 빌헬름 2세가 독일 통일이라는 위업을 달성한 그의 할아버지 빌헬름 1세를 기리기 위해 만든 교회다. 독일 통일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계기로 독일은 소연방들로 분열되어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봉건적인 잔재 속에서 낙후된 상태를 타파하고 급속한 근대화와 공업화를 이룩하여 유럽 최강대국으로 급부상하였다. 이 카이저 빌헬름 교회는 이러한 독일 통일과 그 이후 독일의 번영을 상징하는 건축물이었으며, 그에 걸맞게 113m의 높이와, 2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큰 교회당을 가진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대국 독일의 위용을 자랑하던 이 교회는 2차 대전 당시의 폭격으로 크게 훼손되었고, 처참하게 무너져버린 예배당과 잘려나간 첨탑의 꼭대기는 급격한 근대화 이후 군국주의와 제국주의, 나아가 파시즘과 전체주의를 향해 치달아 결국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폐허와 분단이라는 처참한 상태로 전락해버린 현대 독일의 역사에 대한 독일인들의 트라우마를 반영하는 이미지로 남게 되었다. 이 트라우마를 가리기 위함이었는지, 전쟁 이후 서베를린 당국은 도시 전체의 재건에 맞추어 교회 역시 재건축을 시도했다. 그러나 서베를린 시민들은 2차 대전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교회를 훼손된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해 시당국의 재건축 계획을 좌절시켰다. 결국 이 교회는 오늘날까지도 폐허가 된 자신의 모습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전쟁의 참상을 널리 알리기 위한 기념 교회로 관리되고 있다. 그것은 독일이, 그리고 베를린이라는 도시가 과거를, 그리고 자신들이 겪어야 했던 역사적 비극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홀로코스트 기념비

<사진 3> 홀로코스트 기념비

시내 중심에 위치한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er Tor)은 베를린을 상징하는 건물이다. 독일의 분단과 통일을 상징하는 이 건축물 바로 옆에는 지난 2005년 세워진, “살해된 유럽의 유태인들을 위한 기념비”, 일명 “홀로코스트 기념비”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는 축구장 두 개 크기인 13,100 m² 면적의 부지 위에 총 2711개의, 서로 다른 크기로 죽은 자의 관을 형상화한 모양의 조각들이 세워져 있고 관광객들은 각 조각상들 사이로 이동하면서 이곳을 관람할 수 있다. 이곳이 지어질 때 ‘과연 시내 한 복판에, 그것도 그렇게 넓은 땅 위에 꼭 유태인 기념비를 지어야 하는가?’ 하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바로 이렇게 시내 중심이자 베를린을 상징하는 브란덴부르크 문과 독일 연방의회 건물 바로 인근에, 그것도 드넓은 부지 위에 조성된 이 기념비들은 독일이 21세기에도 여전히 과거의 비극을 잊지 않고 여전히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

 노이에 바헤

<사진 4> 노이에 바헤

이 홀로코스트 추모비에서 멀지 않은 곳이자 (서울의 종로처럼) 베를린에서 가장 중심가라고 할 수 있는 운터 덴 린덴(Unter den Linden) 거리에는 훔볼트 대학교, 국립 오페라 극장, 베를린 돔과 같은 주요 역사적인 건물들이 몰려 있다. 그런데 관광객들로 늘 붐비는 이러한 역사적 유적들 한 가운데,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조각상이 건물 안쪽에 전시되어 있다. 보통 노이에 바헤(Neue Wache)라고 불리는 이 건물의 내부에는 독일의 저명한 사회주의자이자 여성 반전 예술가인 케테 콜비츠(K?the Kollwitz)가 조각한, 쓰러진 병사 아들을 안고 있는 피에타상이 놓여 있다. 일체의 조명이 없는 커다란 건물 내부에는 어둠이 깔려 있고 오로지 입구와 천장의 틈새를 뚫고 온 햇빛만이 이 피에타상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다.

“우리가 전쟁에 내보내려고 아이를 낳은 건 아니다!” 라는 말을 남긴 콜비츠는 그 자신이 당시 열여덟이던 둘째 아들을 전쟁터에서 잃어버린 어머니였으며, 이 피에타상은 따라서 콜비츠 자신의 내면을 형상화한 것이기도 하다. 작품에서 느껴지는 강한 호소력과 무게감은 이러한 그녀 자신의 슬픔과 상처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쾰른의 콜비츠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그녀가 만든 반전 판화에는 “전쟁은 결코 다시는!(Nie wieder Krieg!)”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는데, 그 스스로 자식을 잃어버린 어머니로서 전쟁의 폭력과 광기를 비판하고 반전을 호소하는 그녀의 메시지는 시대를 초월해 그 호소력을 조금도 상실하지 않고 있다. 이스라엘이 발사한, 시신의 뼈까지 태워버리는 악마의 무기 백린탄을 실은 미사일이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난민촌 아이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우크라이나 반군이 군항기로 오인해 저격한 민간 비행기에 탄 2백여 명의 승객과 승무원들이 전원 사망했다는 기사가 나오는 이 순간에도 케테 콜비츠가 조각한 피에타 상의 어머니는 아들의 주검을 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반제 회의가 열린 저택

<사진 5> 반제 회의가 열린 저택

6백만 명의 유태인과 소수자들을 학살한 홀로코스트라는 참담한 비극이 탄생한 곳은 베를린 남동쪽에 위치한 커다란 호수 반제(Wannsee) 인근의 별장이다. 1942년 1월 20일, 나치 친위대(SS)의 제국보안국 국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는 나치 당, 친위대, 경찰의 고위 간부들을 이곳으로 소환한다. “유태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을 논의하는, 이른바 “반제 회의(Wannsee Konferenz)”의 시작이었다. 이 별장은 지금은 유태인 기념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나치의 거물급 고위직 간부들이 아우슈비츠, 다카우 등 죽음의 수용소에서 행해진 가스실 대량학살이라는 끔찍한 “최종해결책”이 논의된 곳이라서 그런지, 이곳의 정문을 들어서면 음산하고 오싹한 느낌을 피할 수가 없다. 내부에서는 나치 시기 선전부 장관 괴벨스(Goebbels) 등에 의해 이뤄진 유태인 혐오 연설을 소개한 당시의 신문 기사, 유럽 전역에서 희생된 유태인들의 현황 등이 전시되어 있고 관람 코스의 맨 끝에는 이곳에서 유태인 대학살을 결정한 나치 친위대와 게슈타포의 최고 사령관 하인리히 히믈러(Heinrich Himmler)를 비롯한 나치 전범의 후손들이 자신의 할아버지, 선조들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것들이 글과 영상의 형태로 전시되어 있다.

반제 회의에서 회의록을 작성한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점령지역 유태인들뿐 아니라 동맹국, 중립국, 적국 등지의 유태인을 모두 합쳐 총 1천 1백만 명의 유태인들을 제거할 계획을 수립했다. 하인리히 히믈러를 비롯한 대부분의 회의 참석자들은 전쟁 이후 열린 뉘른베르크 법정에서 전범재판을 받지만, 회의록 작성자이자 유태인 수송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도주하여 아르헨티나에서 생활하다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 요원들의 집요한 추적 끝에 체포되어 이스라엘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다.

이 재판을 기록한 한나 아렌트는 오로지 자신의 직무에 최선을 다하고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며 무죄를 주장하는 아이히만에게서 “악의 평범성”을 발견하고, 전체주의적 지배란 이처럼 무반성적이고 모든 도덕적 책임으로부터 벗어난, 자율적 판단 능력을 상실한 주체들이 등장하는 “익명의 지배”라는 사실을 밝혀낸다. 우리가 익명의 지배라는 현대 사회의 메커니즘이 강요하는 악의 평범성에서 벗어나 반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역사에 대한 분명한 평가와 관점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한 한 사회의 노력은 끔찍한 과거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다.

반제 저택의 유태인 기념관에서 본, 하인리히 히믈러의 손녀가 진술한 내용은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준다. 학교에서 자신의 친할아버지를 나치 범죄자로 배울 때 친구들이 자신의 얼굴을 쳐다본 순간을 기억하는 하인리히 히믈러의 손녀는, 그러나 자신은 나치 정권을 수립하고 유태인 대학살에 기여한 자신의 할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으며, 독일이 두 번 다시 이러한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행한 잘못들이 낱낱이 알려져야 하고 자신도 이 일에 동참할 것이라 말한다. 과연 한국에서 친일파 조상을 두고 그들의 권력과 재산을 물려받아 지금도 기득권 지배세력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할 용기를 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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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내가 사는 동네의 이웃집 대문 앞에서 찍은 것이다. 독일의 가정집이나 공공건물 앞에서는 이러한 작은 장식들이 바닥에 새겨져 있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그 건물에 살다가 나치에 의해 수용소로 끌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희생자들을 기념하는 기념물이다. 사진에 나온 집의 경우엔 1891년생인 아르투어 단넨바움이 1920년생인 딸 일제, 1925년생인 게르다와 함께 살다가 셋 모두 테레지엔슈타트에 있는 수용소로 끌려가 결국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나치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을 하나하나 기억하며 그들의 죽음을 추모하는 독일의 자세는 오늘날 과거사를 정당화하고, 이를 군국주의적 헌법 재해석과 재무장으로 연결시키고 있는 일본의 아베 정권과 대조를 이룬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만이 아니다. 일본의 식민지배를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주장한 사람이 국무총리 후보가 되고, 일본 식민지배를 미화한 극우 성향의 교학사 역사교과서를 옹호한 사람이 교육부 장관 후보가 되는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 과거사에 대한 반성은 사회 전체의 노력이 아니라 이해관계를 둘러싼 갈등과 투쟁의 쟁점이 된다. 지나간 일 무엇 하나도 이 땅에서는 쉽게 기억되지 않는다. 현재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끊임없이 과거를 미화하거나 망각하려고 시도한다. 이에 맞서 ‘잊혀져선 안 될 것 들’을 ‘잊지 않기 위해’ 싸워야 하는 현실은 그 자체로 비극이다. 그러나 역사를 망각하는 한, 비극적인 역사는 끝없이 되풀이될 것이다. 비극의 재발을 막기 위해, 우리는 역사를, 과거를 기억하기 위해 싸워야 하는지도 모른다. ‘기억하기 위해 싸우기.’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과거를 대하는 자세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다원적 맑시즘과 그 미래 – 에티엔 발리바르의 대담에 다녀와서 [베를린에서 온 편지 4]

다원적 맑시즘과 그 미래 – 에티엔 발리바르의 대담에 다녀와서 [베를린에서 온 편지 4]

 

 

한상원(한철연회원/베를린 통신원)

 

*베를린에서 유학 중인 한상원 회원이 인문학 동향이나 정치 소식을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프랑스 정치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tienne Balibar)가 베를린을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설렜다. 나는 이미 2011년 5월 베를린 훔볼트 대학에서 열린 국제 심포지움에서 그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자신의 강연만 마치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며칠간 이어진 다른 강연을 거의 대부분 참석해 청중석에서 모든 연사들에게 진지하게 질문하고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던 진지한 노학자의 모습을 나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베를린 일정 중 가장 이목을 끌었던 것은 6월 13일 열린, 그와 그의 오랜 지적 동료이며 베를린 자유대학교(FU Berlin) 철학과 명예교수인 (그리고 나의 부지도교수이기도 한) 프리더 오토 볼프(Frieder Otto Wolf) 사이의 대담이었다. 두 노(老) 거장들의 우정어린 대화 속에 진행된 이번 행사는 발리바르가 1993년 집필한 책 『맑스의 철학(La philosophie de Marx)』이 오토 볼프의 변역으로 최근 독일에서 새로 출판된 것을 기념해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Kreuzberg) 지역에 위치한 인문학 서점 b_books에서 열린 것이었다.

 발리바르와 오토 볼프의 대담이 열린 b_books

<사진1> 발리바르와 오토 볼프의 대담이 열린 b_books

발리바르에 대해서야 국내에 이미 잘 알려진 터라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만, 프리더 오토 볼프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독일에 얼마 되지 않는 알튀세르 학파의 일원으로 1970년대 이래로 알튀세르, 발리바르와 지속적인 교류 속에서 자신의 사상을 전개해 나갔으며, 최근에는 알튀세르의 『자본을 읽는다(Lire le Capital』를 최초로 독어로 완역(기존의 번역은 영어판, 한국어판과 마찬가지로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글만을 번역했을 뿐 랑시에르, 마슈레 등 다른 저자들의 글은 번역되지 않았으며 숱한 오역으로 많은 지적을 받아왔다)했을 뿐 아니라, 알튀세르 전집을 편집, 발간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그는 정치적 실천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어서 1984년부터 89년까지, 그리고 1994년부터 99년까지 두 차례 녹색당 유럽의회 의원을 지낸 적이 있으며, 현재 독일 휴머니즘 연합(Humanistischer Verband Deutschlands) 의장을 역임하고 있다.

 에티엔 발리바르(좌)와 프리더 오토 볼프(우)

<사진 2> 에티엔 발리바르(좌)와 프리더 오토 볼프(우)

발리바르는 최근 부흥하고 있는 새로운 조류의 맑스주의 정치철학들(지젝. 바디우, 랑시에르 등)에 대해 언급하며 자신의 강연을 시작했다. 오늘날 이 철학자들의 부흥과 대조적으로 자신이 『맑스의 철학』을 집필한 1993년은 동구권의 붕괴 이후 ‘맑스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급속도로 지적, 실천적 영역에 확산되고 그 자리에 푸코, 페미니즘, 후기식민주의 등 새로운 이론 조류들이 부상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 ‘21세기에 맑스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자신의 저작 의도였다고 말했다.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동시에 20세기에 지배적이었던 공식적 맑스주의 조류들에 대한 비판을 전제하는 일이다. 그는 기존의 전통적 맑스주의 철학 조류의 결정적 문제는 맑스의 ‘철학’을 다른 저작들로부터 고립시켜 이해하려 했다는 데에 있다고 말했다. 특히 ‘정치경제학 비판’의 경우 물신주의를 비롯한 일부만이 논의 주제로 부각되었을 뿐이며, 이러한 몇몇 철학적 관점들이 맑스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으로부터 분리되어 고찰되었다. 이러한 공식적 맑스주의의 극단적으로 위험한 사고는 특히나 구 소련을 중심으로 맑스주의를 ‘체계화’하는 것으로 귀결되었으며, 발리바르 자신은 이에 대항하기 위한 ‘반체계적 서술’에 몰두했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공식 맑스주의의 체계화 경향이 그 물질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맑스주의라는 유기적인 이념과 담론이 당형태의 운동으로 고착화되는 데에서 발견된다고 지적했다. 자신의 ‘반체계적 서술’ 의도를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그는 원래 이 책의 제목을 “맑스의 철학들”이라는 복수형 표현으로 정하려고 했다고 한다. 이는 맑스의 사상이 하나의 동일한 체계로 고정될 수 없으며, 따라서 맑스의 사상을 체계화하려는 모든 시도에 저항해야 한다는 그의 사고가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철학’이라는 단어를 복수로 사용하는 것이 워낙 일상적 언어용법에 어긋나기 때문에 편집자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현재와 같은 단수 표현으로 제목이 정해졌다고 한다.

이처럼 발리바르는 ‘맑스주의’라는 굳어진 사상체계도, 또 맑스의 사상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시도도 모두 거부한다. 그의 관점에서 맑스 이론의 대안은 오히려 맑스의 사상 자체를 ‘변형’하는 데에 있다. 발리바르는 미셸 푸코가 『사물의 질서』에서 맑스의 경제학 비판을 (근대)철학적인 역사 개념이자 19세기적인 진화론 패러다임으로 규정하며 비판한 이래로 맑스의 현재성에 대한 물음이 오늘날까지도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고 말한 뒤, 오늘날 자본주의가 전 지구적으로 승리를 거둔 상황에서 자본주의 비판으로서 맑스의 사상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 맑스의 이론을 계승하려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맑스가 말한 것으로 돌아가자’가 아니라 ‘맑스가 제공한 도구들을 통해 다시 한 번 시작하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맑스가 자본주의 비판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관념 역시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발리바르에게 있어 ‘맑스의 현재성’에 대한 물음은 ‘다원적 맑시즘’의 재구성이라는 과제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어진 대담에서 프리더 오토 볼프 역시 이 책이 갖는 가장 큰 매력은 ‘단수로서의 철학’이라는 관념에 종말을 고했다는 데에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철학은 특성 상황에 대한 반성적인 이해로서 다수여야 하며, 이는 정치적 행동과 관련을 맺으며 실천적 결론으로 이어져야 한다. 철학은 마지막 단어를, 궁극적인 답을 갖지 않는다. 언제나 철학에 의해 사유되지 않는 것, 담론화되지 않는 것이 존재하기 마련이며, 반성활동을 통해 이를 도그마로 만들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또 그는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에 의해 1960년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이어진 ‘자본을 읽자’ 운동의 성과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이 지적 운동은 맑스 이론을 단지 재발굴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맑스 사상의 재구성에 기여했고 이는 특히 (헤겔을 차용한) 기존 맑스주의의 논리적 형태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져, ‘상이한 사회에 대한 상이한 지배분석의 필요성’이라는 결론으로 나아갔다.

 발리바르의 강연을 듣기 위해 온 청중들

<사진3> 발리바르의 강연을 듣기 위해 온 청중들

청중토론 시간에 나는 지젝, 바디우, 네그리, 아감벤 등 현재 유행하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맑스주의 내지 비판적 철학이론들에 대한 바디우의 견해를 물었다. 나는 (발리바르의 제자이기도 한) 진태원 선생이 한국에서 이 철학 이론들을 “좌파 메시아주의”라고 비판한 뒤 촉발된 논쟁을 발리바르에게 소개하고 이에 대한 그의 의견을 듣고싶다고 말했다. 발리바르는 나의 질문이 매우 중요하다며 친절하게도 무려 20분가량을 할애해 아주 상세히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혀주어 나를 감동시켰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새로운 조류의 비판적 이론들을, ‘맑스주의의 죽음’이 선언된 상황에서 철학적 담론의 에너지를 결정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훌륭한 시도들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이 저자들 중 누가 옳은 사람이고 누가 거부해야 할 사람인지를 따지는 것은 어리석인 일이다. 발리바르는 이 저자들이 모두 훌륭하고 발리바르 자신보다 뛰어나다며 (매우 겸손하게) 그들의 이론들을 옹호했다. 그러나 이들이 훌륭한 이론가들이라고 해서 그들의 사상 전체에 동의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덧붙였다.

그렇다면 이들 사상가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점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하게는 맑스의 이론을 계승하려는 시도들에 있어서 그 사상적 자원이 다양할 수 있다는 점이 언급됐다. 이는 맑스만이 비판의 유일한 원천이 아니라는 그의 모두발언 결론과 연결되는 주장이다. 즉, 맑스의 이론을 계승하려는 시도들은 푸코, 한나 아렌트, 들뢰즈 등 다양한 형태의 담론들로부터 얼마든지 비판적인 에너지를 수용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정치적 상상력’을 확장할 수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단순화된 기존 1세대 맑스주의의 변형과 재창조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오늘날 맑스의 사상을 계승하려는 사람들은 전통적 맑스주의와 달리 “정치적인 것의 이질성”을 사고해야 한다. 이 “정치적인 것의 이질성”은 우리가 맑스 자신으로부터 수용해야 할 어떤 것이다.

‘메시아주의’에 대해서 발리바르는 맑스 자신의 사상에도 ‘메시아적인 것’의 요소, 즉 에른스트 블로흐가 “희망의 원리”라고 부른 것이 깃들어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메시아주의적 흐름은 궁극적으로 인간 자신이 새로운, 다른 형태의 인간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종말론적 열정의 표현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메시아주의적인 열정으로 정치적인 것에 대한 분석을 대체하고 현재의 상황을 보상받고자 하는 시도 자체에 대해서 자신은 매우 비판적이라고 고백했다.

이어 내 질문에 대해 프리더 오토 볼프 역시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그는 1960년대 학생운동의 경험을 소개하며, 다양한 형태의 메시아주의적인 정치 조류들은 실천적으로 반드시 분파주의에 빠지게 된다고 말하면서 여기에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또 최근 유행하고 있는 철학 이론가들의 사상은 각자가 가진 장점들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각 이론가들의 장점들을 중첩해서 이해할 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나는 맑스 이론의 현재화와 재구성은 무엇보다도 도그마적 체계화에 대한 거부와 다원성에 대한 인정, 그리고 자본주의 비판의 사상적 원천을 넓게 개방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발리바르의 설명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맑스주의의 다원성’에 대한 강조는 맑스의 사상을 하나의 체계로 고정시키고자 했던 20세기의 공식적 맑스주의와 결별할 수 있는 결정적인 출발점일 것이다. 다만 나는 메시아주의에 대한 판단에 대해서는 몇 가지 점을 덧붙이고 싶다. 맑스주의와 메시아적 사상의 결합은 맑스주의를 기독교 신학과 조화시키려고 했던 블로흐뿐 아니라 벤야민과 아도르노 같은 유대인 지식인들에 의해 유대교적 메시아주의의 이념을 변혁적 정치와 결합하려는 시도들에 의해서도 이미 선취된 것이었다. 벤야민은 그의 “역사철학 테제”에서 사적 유물론과 신학이 결합을 새로운 역사 인식의 필수적 과제로 제시한 바 있다. 이는 물질적 이해관계에 의해 조직된 사회와 이 이해관계를 둘러싼 투쟁들 그리고 이 투쟁들로 구성되는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이 현존의 ‘초월’이라는 신학적인 이념과 결합되지 않으면 손쉽게 현재 상황에 대한 타협과 옹호로 이어질 수 있다는 역사적 경험(특히 제2인터내셔널의 교조화와 소련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의 체계화)으로부터 비롯한 성찰이다. 아도르노 역시 유물론과 신학은 그 목적에서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헤겔의 ‘규정적 부정(bestimmte Negation)’ 개념을 구약성경에서 강조되는 ‘우상숭배 금지원칙(Bilderverbot)’과 결합시켜서 현실의 모순적인 논리를 비판하고 극복할 수 있는 비판이론의 방법론으로 새롭게 제시한다. 즉 비판이론은 긍정적인 규범적 당위(예컨대 칸트)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기존 사회에 존재하는 규범들이 현재의 사회에서 실현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실현이 사회의 구조적 결함으로 인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즉 내재적 비판으로써만 진정한 비판을 수행할 수 있다. 이 내재적 비판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러나 현존하는 사회의 변화, 즉 ‘초월’에 있는 것이다. 나는 유물론적 이론이 이렇게 초월에 대한 이념을 수용함으로써만 일관된 비판적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쉽게 물리쳐선 안 된다고 본다. 이 때문에 나는 정치를 메시아주의로 환원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발리바르와 오토 볼프의 생각에 동의하지만, 메시아주의적 요소와 유물론적 정치 이론이 결합되는 것(이는 다른 말로 “‘구원’과 ‘해방’의 결합”이라고 부를 수 있다)을 그 자체 부정적으로 판단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청중의 질문에 대한 발리바르의 답변 중에서 흥미로운 것을 하나 더 소개해보자. 발리바르가 “최종심급에서의 경제결정”이라는 알튀세르의 개념을 비판하며 ‘최종심급’에 대한 사유를 거부해야 한다고 말한 것에 대해 어떤 청중은 “최종심급에 대한 관념 없이 어떻게 비판과 정치가 가능한가?” 하고 물었는데, 발리바르는 이에 대해서도 매우 자세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해주었다. 그는 “최종심급에서의 경제결정”이라는 알튀세르의 관념이 그 당시 맑스주의 전통 내에서 포기할 수 없는 유물론의 시금석이었으며, 이를 폐기할 경우 마치 관념론에 굴복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맑스주의 내에 만연해 있었다고 지적한다. 당연하게도 맑스주의자들이 ‘최종심급’이라는 관념을 거부하지 못한 것은 계급투쟁을 정치적 변화의 핵심으로 배치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알튀세르가 이 유물론의 시금석을 지키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비판한) 그람시가 도달한 문제의식(최종심급이라는 관념의 거부)보다도 훨씬 후퇴한 영역에 머물고 말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물론 알튀세르는 (엥겔스에게서 차용한) 수려한 문장을 덧붙임으로써 이 관념의 문제를 상쇄하고자 했는데, 그것은 “최종심의 고독한 순간은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발리바르는 알튀세르가 봉착한 이 두 문제를 모두 봐야 한다고 말했다. 즉 이 상반된 정식화는 계급투쟁과 그 중요성을 정치의 영역에서 포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것이 유일한 결정심급이라는 생각을 포기해야 한다는 두 가지 과제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발리바르가 보기에 그러나 ‘최종’ 심급이라는 표현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으며 이는 무엇보다도 그 표현이 마치 하나의 사회가 수직적인 축과 결정구조를 통해 구조화되어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는 데에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그는 이 표현을 포기해야 하며, 지배구조의 다원성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회 영역이 동일하게 결정력을 갖는다’는 식의 다원주의적인 표상을 수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중층결정 과정에서 각 사회적 영역들이 교차하면서 만들어가는 지배적 구조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이다.

발리바르와 오토 볼프, 그리고 청중들이 함께 대화와 토론으로 만들어간 이 대담회는 오늘날 급진 정치철학의 재구성에 대해 고민하는 신구세대의 의견 교환의 장이었다. 젊은 세대는 ‘오늘날 과연 당이 필요한가? 페미니즘과 맑스주의는 어떻게 긴장 없이 공존 가능한가?’ 같은 새로운 질문과 의견들을 전달했고, 두 노 학자들은 새로운 세대의 문제의식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관점에서) 몇몇 과도한 편향들에 대해서 자신들의 비판적 의견을 전달하기도 했다. 세계적인 철학의 거장들과 젊은 세대의 지식인 및 활동가들이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격식 없이 자신들의 의견을 전달할 수 있는 이 ‘키치’적인 철학 행사는 그 자체로 나에게 몹시 새로운 경험이었다. 나아가 두 노 학자들이 자신들의 변함없는 오랜 우정을 과시하며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는 모습은 흐뭇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철학을 자신의 삶으로 선택한 사람에게 그것은 동시에 존경과 경탄의 감성이 드는 광경이기도 했다. 베를린의 어느 여름날에 펼쳐진, 인문학적이며 또한 급진적인 풍경이었다.

맑스와 엥겔스의 베를린 생활 [베를린에서 온 편지 3]

맑스와 엥겔스의 베를린 생활 [베를린에서 온 편지 3]

 

 

한상원(한철연회원/베를린 통신원)

 

*베를린에서 유학 중인 한상원 회원이 인문학 동향이나 정치 소식을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맑스 엥겔스 포럼. 냉전 시절 동독 정부가 동베를린 지역에 만든 건축물로 오늘날 베를린의 관광명소로 분류되고 있다.

맑스 엥겔스 포럼. 냉전 시절 동독 정부가 동베를린 지역에 만든 건축물로 오늘날 베를린의 관광명소로 분류되고 있다.

맑스는 그의 생애에 걸쳐 총 4차례 베를린을 방문한다. 첫 방문은 그가 베를린 대학교, 즉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Friedrich-Wilhelm-Universit?t, 오늘날의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기 위함이었다. 처음 본에서 학업을 시작한 그는 1년 뒤인 1836년에 베를린을 방문해 1841년까지 머문다. (맑스는 베를린 대학에서 학업을 마치지 못했고, 그의 박사학위 논문을 예나 대학에 제출했다.) 그 후 1848년에 잠시 기차 환승을 위해 베를린에 들른 기록이 있다. 1861년에는 당시 프로이센의 국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사망과 빌헬름 1세로의 왕위계승을 계기로 기존의 정치범들에 대한 대대적인 사면이 이뤄졌는데, 맑스는 이 당시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프로이센 시민권을 얻고자 했다. 때마침 페르디난트 라쌀레의 제안으로 베를린에서 공동의 신문을 창설할 계획으로 일주일간 라쌀레의 집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복잡한 법적 문제로 맑스의 프로이센 시민권 취득은 실패했고 그는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야 했다.) 1874년 말에는 막내 딸 엘리노어와 함께 베를린을 여행했다. 그의 마지막 방문이었다.

맑스는 베를린 대학교 법학과 학생이었지만 그의 주된 관심은 철학, 특히 베를린 대학교 총장을 역임하다 1831년 사망한 헤겔 철학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당시 베를린 대학교 법학과 교수이며 헤겔 법철학을 편집, 출간한 에두아르트 간스(Eduard Gans) 교수 밑에서 헤겔 철학을 공부한다. 또 1838년에는 브루노 바우어의 소개로 ‘박사 클럽(Doktorklub)’에 가입해 청년헤겔학파의 일원이 되기도 한다.

맑스가 살던 당시 왕립 도서관이 있던 자리에 현재 베를린 훔볼트 대학 법학과 건물이 있으며, 앞에는 베벨 광장(Bebel Platz)이 있는데, 이곳은 1933년 권력을 장악한 나치 세력이 유태인들과 사회주의자들의 책을 쌓아놓고 불태워버린 곳으로 유명하다. <공산당 선언>을 비롯한 맑스의 서적들 역시 당시 대거 불태워졌다. 현재 이곳에는 텅 빈 서고만 남아 있는 지하 도서관을 땅 위에서 볼 수 있도록 해놓았는데, 이는 나치에 의한 분서갱유 사건으로 학문이 탄압받았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한 전시물이다.

현 훔볼트 대학교 법학과 건물과 베벨 광장

현 훔볼트 대학교 법학과 건물과 베벨 광장

참고로 이 법학과 건물의 도서관에는 동독 정부 시절 제작된 6미터 높이의 거대하고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가 아직 남아 있는데, 그 중심에는 레닌이 서 있고 그 옆에 맑스와 엥겔스의 얼굴이 보인다. 이곳은 레닌이 1894년 이 건물(당시에는 왕립 도서관)에서 공부했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현 훔볼트 대학교 법학과 도서관의 레닌 창문

현 훔볼트 대학교 법학과 도서관의 레닌 창문

그가 공부했던 베를린 대학교의 명칭은 이후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로 바뀌는데, 훔볼트 대학교는 냉전 시절 동베를린 지역으로 편입되어 동독 정부의 지배를 받았다. 동독 정부는 맑스주의를 홍보할 목적으로 훔볼트 대학 본관에 맑스의 <포이어바흐 테제>의 마지막 문구인 “이제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변혁해 왔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혁하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금속으로 제작해 벽에 전시하였다. 통일 직후 이 글귀를 벽에서 철거할지 말지에 대해 격렬한 논쟁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대학 측은 이 글귀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며 그대로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훔볼트 대학교 본관에 전시된 맑스의 포이어바흐 테제.

훔볼트 대학교 본관에 전시된 맑스의 포이어바흐 테제.

그는 베를린에 공부하며 거주지를 총 6차례 옮겼는데, 그중 그가 그의 약혼자 예니 폰 베스트팔렌의 오빠이자 맑스의 정치적 동료인 에드가 폰 베스트팔렌과 함께 거주했던 3번째 집이 가장 유명하다. 루이제 거리 60번지(Luisenstraße. 60)에 위치한 이 집에 동독 정부는 맑스가 살았던 곳임을 표시하는 현판을 걸어두었는데, 지금은 이 건물이 예술 아카데미 기록관(Das Archiv der Akademie der K?nste)으로 편입되면서 현판이 철거되었다. 현재 베를린의 맑스 엥겔스 전집 편찬위원회는 맑스라는 인물의 역사적 의미를 감안해 이 현판을 다시 제작해 전시하자고 당국에 건의하고 있다.

맑스가 살던 집 건물에 붙어 있던 현판

맑스가 살던 집 건물에 붙어 있던 현판

엥겔스는 언제 베를린에 머물렀을까? 맑스가 베를린을 떠난 지 수개월 뒤인 1841년 9월 엥겔스가 베를린에 온다. 군대에 자원한 엥겔스는 포병으로서 베를린 대학 근처에 있는 Am Kupfergraben에 주둔한 병영에 거주하며 종종 베를린 대학의 철학 수업을 청강했으며, 브루노 바우어가 이끄는 청년 헤겔학파와도 교류했다. 동독 정부 시절엔 시내 중심에 위치한 그가 살던 집에 커다란 현판이 붙어있었지만, 지금은 재개발이 진행되어 건물이 소실되어버렸다. 1년 뒤 엥겔스는 쾰른을 거쳐 맨체스터로 이주해 아버지가 운영하는 사업을 물려받기 위한 교육을 받으며 그곳의 노동자들의 생활을 관찰한 뒤 정치적으로 급진화하기 시작한다.

베를린에 남아 있던 맑스의 흔적들은 대부분 동독 정권 시절 정권 홍보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 사실이다. 이 때문에 그러한 흔적들 중 상당수는 오늘날 소실되어 더 이상 기념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비록 동독이 무너졌지만 맑스에 대한 독일인들의 자부심은 여전히 대단해서, 베를린에만 칼 맑스 거리(Karl Marx Straße), 칼 맑스 대로(Karl Marx Allee) 등 맑스의 이름을 딴 지명들이 여전히 남아 있고 곳곳에 맑스의 흉상과 얼굴 조각상들이 남아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러한 맑스를 기념하는 장소들과 지명들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자는 주장들도 우파들로부터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이들은 맑스와 독재를 동일시하며, 동독이 사라진 현재 맑스를 기념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고 묻는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과 달리 맑스의 사상은 동독 정권의 독재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동독 정권의 국가 이데올로기가 아닌 맑스 사상의 비판적이고 변혁적인 핵심을 연구하고 실천적으로 계승하려는 노력들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현재 독일의 연구자들은 맑스 엥겔스 전집(MEGA)을 발간하며 동독 국가 이데올로기와 다른 맑스 사상의 새로운 내용들을 세상에 공개하고 있다.

맑스가 죽은지 130여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불평등과 착취, 억압이 지배하며, 새로운 형태의 위기가 재생산되는 이 시대에는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맑스의 사상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여전히 베를린에 “더 많은” 맑스 기념시설들이 필요한 이유다.

Memento mori. 베를린에서 바쳐진 애도의 물결. [베를린에서 온 편지]-2

Memento mori. 베를린에서 바쳐진 애도의 물결. [베를린에서 온 편지]-2

 

 

한상원(한철연회원/베를린 통신원)

 

*베를린에서 유학 중인 한상원 회원이 인문학 동향이나 정치 소식을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활짝 핀 나무조차 사람들이 그 만개 밑에 가려진 공포의 그늘을 인지하지 않는 순간 거짓말을 한다.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순진무구한 표현도 아름답지 못한 존재자를 치욕스럽게 하는 구실이 된다. 아름다움이나 위로란 더 이상 없으며, 있다면 그것은 오직 다음의 시선, 즉 공포를 직시하고 감내하며 ‘부정성’에 대한 단호한 의식 속에서도 더 나은 상태에 대한 가능성은 놓치지 않으려는 시선이다.” (아도르노, <미니마 모랄리아>)

5월 3일. 화창한 날씨였다. 전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관광객들이 베를린 최대 관광지인 브란덴부르크문(Brandenburger Tor)에서 따스한 햇살을 쐬며 맥주에 쿠리부어스트(베를린의 명물 간식)을 즐기던,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온하고 행복한 토요일 오후였다. 이곳 한복판에 느닷없이 검은 상복을 입은 한국인 약 2백여 명이 나타났다. 슬픔을 머금은 표정을 하고, 다시는 이 푸르른 하늘을 두 눈으로 볼 수 없을 가여운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그리고 수백 명의 생명, 그것도 대다수가 고등학생들인 이들이 차디찬 바닷물 속에서 숨을 거두도록 방치한 이 무능하고 부패한 사회에 침묵으로 항거하기 위해.

이날 거행된 베를린 시민분향소에 참여한 참석자들의 표정은 침통했다. 이 맑은 날씨를 원망이라도 하듯.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2백여 명의 조문객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어린 생명의 죽음에 부채감을 느끼는 어른들은 이제 자신들의 삶마저 원망스러워할 지경이다. 누가 이런 끔찍한 비극을 초래했는가? 부패한 정부, 조작과 기만이 일상이 된 사회는 인명구조에 무능하다. 지독히도 슬프고 비극적인 결론이다. 참석자들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우선적으로 정치적 발언을 최소화하고, 희생된 이들의 영혼에 깊은 위로를 전달하고자 했다.

SAM_0366사전행사로 기획된 단체 묵념, 바이올린 협주와 성악 공연, 독어로 번역된 유가족 어머니의 편지 낭독을 마친 뒤, 2백여 명의 조문객들이 각자 마련해온 흰 꽃을 헌화하면서 분향예절을 거행했다. 모두의 가슴엔 노란 리본이 달려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독일인들을 비롯한 외국인들 상당수도 함께 헌화를 하고 망자의 영혼을 위로했다. 이들 역시 언론을 통해 한국 정부의 무능함이 수백 명의 희생자를 낳았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한국의 현실에 대해 언론이 사실을 보도하지 않는 나라는 어찌 보면 한국이 유일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국의 공영방송과 대형일간지들이 정부의 공식발표만을 옮겨적는 동안,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주요 일간지들은 이번 사건에서 드러난 한국정부의 무능함에 대해 신랄하게 꾸짖고 있었다. 비록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고 피부색이 다를지언정, 우리를 지켜보던 수많은 외국인들의 연대의 정서는 우리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스코틀랜드에서 온 루크라는 젊은이가 전통 파이프연주를 통해 “Amazing grace”를 연주했을 때, 우리는 국경을 초월해 이 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희생자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헌화를 하고 분향을 한 뒤, 망자에 대한 예의로 절을 하고 나서 한참을 몸을 일으키지 못한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고개를 바닥으로 숙이고 절을 하던 사람들은 어째서 몸을 일으킬 힘을 잃어버린 것인가. 어째서 우리는 어린 생명들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의식에 통탄할 만큼 비참함을 느껴야 하는가.

침몰하는 배는 벤야민이 말한 바 있는 “변증법적 이미지”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즉 그것은 단지 하나의 우발적인 사건으로서 우리에게 지각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처한 절망과 위기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와 분노가 “집단 무의식”의 형태로 투영된 하나의 이미지였다. 사건 초기, 180도 뒤집혀 파란 선수만을 수위에 남겨놓은 채 침몰해버린 배의 이미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서 있는 공간이 땅 속으로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은 현기증을 일으켰다. 그것은 세월호뿐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가 침몰해간다는 위기의식이었다. 조타수를 쥔 사람들은 승객들에게 “제자리에 가만히 있으라”고 지시한 뒤 그들 자신이 가장 먼저 구조되었다. 선장에게 버림받은 채 차디찬 바다 속에 가라앉아 희생되어야 했던 생명들은, 마치 경제위기 시 사측의 이윤을 보장하기 위해 가장 먼저 잘려나가야 하는 노동자들, 특히 비정규직에 대한 알레고리였다. 버림받은 어린 생명들이 희생되어야 했듯이, 이 사회는 언제나 강자의 생명을 보장해주기 위해 약자가 희생되어야 하는 구조와 논리를 지니고 있었다. 미래에 대한 일체의 희망도 없는 지금의 ‘버림받은 세대’는, 죽어야 했던 어린 생명들과 자신들을 일체화했다. 그들은 슬퍼했고, 절망했으며, 이 절망이 분노로 바뀌는 순간에, 그들은 ‘침묵행진’이라는 방식으로 이 모든 것을 낳은 한국 사회에 항거했다. 아무런 말 없이, 그러나 깊은 울림을 안고.

?정부에 항의하는, 안산 단원고 학부모들인 유가족들을 보수층이 증오하는 것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사회 질서를 그 자체로 절대적인 것으로 떠받드는 자신들의 논리상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식을 잃고 절규하며 “내 아이를 살려내라”고 외치는 부모들이 “종북”이라며, 그들에게 “시체장사”라는 표현을 붙인다. 그들이 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이 한국의 사회 시스템에 자신들의 불만을 제기하는 모든 세력은 ‘종북’이다. 심지어 그것이 살 수 있었던 생명이 이 정권의 무능함으로 인해 싸늘한 시체가 되어 돌아왔을 때, 차디찬 주검을 마지막으로 안아본 뒤 장례를 치러야 하는 부모들이라 할지라도. 한국 보수세력과 현정권은 인간의 존엄을 짓밟아버렸다. 가족을 잃고 울부짖는 자들의 처절한 외침마저 그들에겐 “종북”의 논리가 된다. 그런데 그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가만히 있으라”는 메세지에 더 이상 순응하지 않는, 그들의 말대로 가만히 있으면 우리 모두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친, 각성한 새로운 세대의 “버림받은” 청년들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침묵행진을 벌이려던 청년들과 시민들을 경찰병력을 동원해 감금해버렸다. 마치 “청와대로 가자”고 외치던 실종자 가족들을 경찰력으로 저지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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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칼 슈미트적 의미에서의, 주권자에 의해 선포된 예외상태가 아니라 아감벤적인, “벌거벗은 생명(호모사케르)”에 의해 개시된 예외상태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지금일 것이다. 죽어간 생명의 넋은 지금, 연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누가, 이 억울한 죽음에 항거할 것인가? 바다 속에 수장된 ‘벌거벗은 생명’을 위해 눈물짓는 자들은,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고문받는 자가 비명지를 권리를 갖듯이, 영원한 고통은 표현될 권리를 갖는다.” (아도르노, <부정변증법>)

고통의 표현욕구가 실천적 충동을 낳고, 이는 총체적 지배 하에서도 윤리와 정치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는 것이 아도르노 철학의 한 축이다. 고통(Leiden)은 실천적 열정(Leidenschaft)의 근거가 된다. 세월호 이후 윤리와 정치, 즉 ‘실천’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우리의 미메시스적 충동이 분노의 파토스로 이어질 때일 것이다. 이 분노의 파토스(부정성)를 변화의 긍정적 힘으로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정치’의 과제다.

 

침몰한 세월호와 마찬가지로 한국사회가 침몰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조타수를 잡은 세력에게 우리의 운명을 맡겨도 좋은 것인가? 우리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지시한 뒤에, 그들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먼저 배를 빠져나갈 사람들에게 우리의 생명을 맡겨도 좋은 것인가? 푸른 하늘과 만개한 푸르른 나뭇잎의 싱그러움마저도 삶의 약동이 아니라 집단적인 죽음에 대한 죄의식으로서 우리를 짓누르는 이 순간에, 베를린의 야속한 푸른 하늘은 우리에게 준엄하게 묻고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무덤이 우리에게 말하듯, “죽은 자는 우리를 깨우친다.” 이 벌거벗은 생명이 불러일으킨 “예외상태” 속에서, 우리는 한국 사회 주권권력의 공백상태를 무엇으로 채워야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