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꼼수’에 속지 말고 닥치고 페미니즘[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황 주 영(서울시립대학교)
논점 일탈한 나꼼수의 변명
나꼼수 ‘비키니 응원’과 ‘코피 발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현상을 주제로 글을 쓰려고 하는데,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일이 벌어지니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 시점은 ‘나꼼수 봉주 5회’가 업데이트 되었고, 거기에서 김어준씨는 저간의 상황을 요약하면서 김용민씨와 주진우씨 각각의 발언에 대해서 해명을 했다. 해명의 내용은 1) 원래 그런 사람들 아니다, 2) 김용민의 성욕감퇴제 관련 발언은 비키니 응원사진이 올라오기 전에 녹음한 방송분이므로 잘못 엮인 것이다, 3) 성희롱 의도는 전혀 없었으며, 우리의 발언은 모두 ‘가카’를 겨냥한 것이다, 4) 성희롱은 권력관계에서 나오는 것인데 비키니 응원 여성과 자신들 사이에는 아무 권력관계가 없으므로 사건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1)과 3)은 나꼼수 콘서트에서 김어준씨 스스로 말했듯이, 변명이 되지 않는다. 성폭력과 가정폭력 등 여성에 대한 폭력의 가해자들 중 많은 이들이 고학력에 가정이나 직장에서는 한없이 자상하고 점잖은 분들이다. 의도가 없었다? 그렇겠지. 지하철에서 의도치 않게 남의 발을 밟아도 우리는 자연스레 사과를 한다. 그게 뭐 어렵다고. 왜 남성들에게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성폭력에 대한 사과가 그렇게도 어려운 일일까? 어쩌다 한 한 번의 실수가 아니기 때문인가?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 뿌리깊이 박혀있고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언행과 관련되어 있어서, 그에 대해 사과를 하면 자기 존재와 일상 전체를 걸고 사과하는 셈이라서 그런 걸까? 게다가 자신들의 발언은 모두 가카를 향한 것이라는 변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대의를 위해서라면 여성비하적인 발언 정도는 괜찮다는 뜻일까? 2)는 사실 관계가 그러하다면 인정하겠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발언이 비키니 응원 여성과 관련되지 않았을 뿐, 방송을 청취하는 (김어준씨 말에 따르면 ‘동지’일 수도 있을) 여성들이 김용민씨의 발언 속에서 한낱 성적 대상으로 취급되었다는 점에서는 달라지는 게 없다. 게다가 많은 여성들이 문제를 제기한 것은 ‘비키니 응원 여성’에 대한 나꼼수 멤버들의 성희롱이 아니라, 여성 일반에 대한 나꼼수 멤버들의 남성중심적 관점이었다.
따라서 4)의 해명도 기각된다. 김어준씨가 말하는 권력관계에는 성폭력에서 가장 중요한 여성과 남성 사이의 성적 불평등은 빠져있다. 비키니 응원 여성과 나머지 다른 남성들 사이에는 불평등한 관계가 있다. 이 여성이 아무리 자발적으로 자신의 몸을 드러내도 그 자발성은 성적 불평등이라는 이 조건 속에서 완전한 자발성이 되기 어렵다. 마돈나가 여성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는 획기적이었어도, 그 몸을 훑는 카메라의 시점은 가부장적인 남성의 시선이라는 것은 이미 수없이 언급되지 않았던가. 남성은 그러지 않는데 여성이 비키니를 입고 김어준씨가 말하는 그 ‘생물학적 완성도’를 드러내는 것을 응원의 방식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여성과 남성이 권력에 있어서 서로 다른 위치에 배치되어 있다는 걸 말해준다. 나아가 재차 강조하면, 여러 여성들이 문제 삼는 것은 ‘비키니 응원 여성에 대한 성희롱’이 아니다. 여성을 “남성의 정치적 활동의 사기 진작을 위한 대상 정도로 전락시킨 것”을 문제삼는 것이다.(<삼국카페 공동 성명서> 중 인용.)
페미니즘 비판으로 물 타는 마초들의 꼼수
김어준씨는 ‘나꼼수 봉주 5회’에서 현재 이 사안에 대한 논의 수준이 낮다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발언을 거의 그대로 옮겼으며, 주술호응이 되도록 하는 정도만 수정함.)
“<저 세 놈의 남자새끼들이 마초라서 그랬다>에서 한 발짝도 더 안 나갔다. 마초라는 혹은 쇼비니스트에, 성적 감수성이 졸라 둔한 새끼들, 남자새끼들이라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한계 내에 있는 거다. 그 틀에 맞춰서 욕을 한다. 실제로는 우리를 쇼비니스트로 만드는 것 외에는 우리가 하고 있는 짓을 해석할 틀, 언어가 없다.”
안타깝게도 나꼼수 멤버들은 성적 감수성과 성인지적 사고가 부족한 마초 맞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마초 아닌 인간이 몇이나 된다고, 마초라고 지적받았다고 해서 너무 그렇게 기겁할 거 없다. 쫄지 마~) 뭘 좀 안다고 마초가 아닌 게 되는 건 아니다. 페미니스트도 제대로 페미니스트가 되려면 마초가 아니기 위해서 매순간 노력해야 한다.
김용민씨가 방송에서 ‘정봉주의 좆이 되겠다’는 발언을 했을 때는 아슬아슬했다. 더군다나 ‘생물학적 완성도’라니. ‘생물학적’이라는 표현이 여성의 몸에서 동물성을 강조하고, ‘완성도’라는 말이 남성중심적인 판단 기준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필자의 뇌구조가 이상한 건가? 이런 표현을 떠올릴 수 있는 김어준씨가 마초적이지 않다면 대체 누가 마초적인지 되묻고 싶다. 만약 비키니 응원 사진을 올린 것이 나이든 여성이거나 장애 여성이거나 비만인 여성이었다면, 다시 말해 ‘생물학적 완성도’가 떨어지는 소위 ‘정상성’에서 벗어난 여성이었다면 나꼼수 멤버들은 무슨 농지거리를 했을까? 이런 질문을 해보면, 이들의 농담이 모두가 웃을 수 있는 농담이 아님을 금새 알 수 있다. 김어준씨는 이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했다. ‘대상화’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에 대해 김어준씨와 페미니스트들 간에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김어준씨는 남녀 쌍방 간에 대칭적인 대상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반면,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중심적 시각에 따라 여성이 주체가 아닌 한갓 대상으로 취급되는 것을 대상화라 일컫는다. 후자는 남성과 여성이 가부장제적 상징질서 내에서 이미 비대칭적 권력관계에 놓여있음을 전제한다. 성적 대상화는 결코 중성적이거나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누가 누구를 어떤 성별 권력관계 하에서 어떻게 대상화하느냐 하는 것을 자문해보지 않는 김어준씨의 수준 또한 그리 대단하지가 않다.
결국 ‘나꼼수’는 언급과 변명만 했을 뿐 사과는 하지 않았다. 혹자들은 페미니스트들이 열폭(열등감 폭발의 준말로 인터넷 신조어)해서 싫고 나꼼수는 쿨해서 좋다는데, 필자 눈에는 나꼼수는 쿨한 척 하면서 열폭 중이다. 어느 블로거 말대로 ‘미안하다, 씨바, 다신 안 그럴게!’라고 나꼼수답게 사과하면 그만인 것을, 이미 닳고 닳은 논리를 끌어다 대면서 제3자를 자처하고 있다. 김어준씨는 ‘전지적 가카시점’에서 사태를 관망하면서, 모든 것이 다 논의되어야 사회적 비용을 치른 만큼 사회적 이득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이 문제와 관련해 우리 사회의 수준이 완전히 드러날 때까지 기다리는 게 맞다고 ‘유체이탈화법’을 구사한다. 자신은 당사자가 아니라는 듯 태도를 취할 뿐 아니라,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나 아직은 때가 무르익지 않아 날개를 접고 있는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김어준 씨에게 빙의했다.
나꼼수 멤버들은 비키니 응원 여성을 ‘골빈 년’으로 만드는 폭력적인 상황을 비판하면서 그 여성 뒤로 몸을 숨기고, 당사자가 아닌 체 한다. 한 개인 여성을 보호하는 제스쳐를 취함으로써 집단으로서의 여성과 여성운동을 물 먹인다. 기가 막힌 전략이다. 거기에 더하여 몇몇 미묘한 발언들은 이번 건이 나꼼수 멤버들을 겨냥한 보수언론과 정치인들의 꼼수임을 암시한다. 그러니까 그들이 하고 있는 짓을 해석할 언어와 틀은 기껏해야 ‘음모론’이 전부다. 가카와 이하 보수세력을 겨냥한 언행이란 거다. 김어준씨는 자신이 더 큰 적, 더 큰 권력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항하는 그놈의 ‘대의’ 뒤로 또 슬며시 숨어들어간다. 이렇게 해서 비키니 입은 여성은 쿨하고 발랄하고 섹시한, ‘남성들의’ 정치적 동지가 됐고, 광우병 촛불집회 때부터 지금껏 정치활동을 하며 그 의식을 노동, 환경, 여성문제에까지 확장해온 삼국카페 회원들은 보수언론에 속아 넘어간 물정모르는 여자들이 됐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일관된 음모론이 향한 칼끝이 여기라니!
페미니즘으로 쟁점화 되기를 바라며
다행히도(?!) 나꼼수 멤버들은 (이번에 배운 건지 정말 이미 알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지만) 어지간한 진보적 남성 지식인에 비해서는 약간 더 알고 있는 것 같다. 이들은 방송에서 성폭력 사건에 있어서 피해자의 판단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 가해자의 의도의 유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 여성이 이런 이슈에 민감할 권리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고, 자기들은 배운 남자라고 항변했다. (이 정도 기본 지식을 가지고 칭찬받고 싶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미안하지만 배운 여자들은 배운 남자들만큼 못 믿을 사람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특히 ‘진보적인’ 혹은 ‘비판적인’ 배운 남자들은 더 그렇다. 대학에서, 진보적 운동 단체들에서, 운동권 학생회에서 중심적인 활동을 했던 수많은 남성들과 교수들이 자신의 여성 ‘동지들’을 성폭력 피해자로 만들었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는 걸 김어준씨가 모르진 않겠지.
삼국카페는 공동성명서에서 여성을 치어리더로 삼는 남성중심의 ‘반쪽 진보’인 ‘나꼼수’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믿음, 동지의식을 내려놓는다’고 말했다.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이런 심정으로 오래 몸담았던 진보적 집단에 등을 돌렸고, 페미니즘을 공부하거나 여성운동을 시작했던가! 나꼼수 멤버들이 다른 남성들에 비해 1그램 정도 낫다거나,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남자들은 변한 게 없다거나 하는 생각으로 시간을 허비하지 말자. 사실 이번 일에 대한 (나꼼수 멤버를 포함한) 남성들의 반응은 너무 빤하기 때문에 새삼 놀랄 것도 없다. 페미니스트들이 봐야 할 것은 저 삼국카페 회원들이 낸 공동성명서이며, 그들과 페미니스트 이론 사이의 격차, 그들과 비키니 응원 여성 및 그녀를 모방하며 나꼼수를 지지하는 여성들 사이의 격차, 그리고 이 후자의 여성들과 페미니스트 사이의 격차다.
김어준씨의 말대로 피해자 프레임의 페미니즘은 문제가 있다. 이에 대한 문제제기와 반성은 페미니즘 이론과 운동 내부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으며, 여러 방식으로 수정보완하려는 노력들도 있어왔다. (이런 걸 언급하지 않은 걸 보니, 아마 김어준씨는 최근 몇 년간 페미니즘에 관심을 끊었나보다.) 문제는 그 파급력이다. 현재 페미니즘이 20대 여성들에게 매력이 없는 건 이전 세대들과 지금 20대의 삶이 크게 다른 데 비해 페미니즘에는 큰 변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페미니즘은 더 이상 20대 여성들의 삶을 충분히 설명해주지 못한다. 하지만 페미니즘에 큰 변화나 도약이 없는 것은 사회 전체로 보았을 때 여성들의 삶이 크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자아를 실현하는 데 있어 그 누구보다 많은 독려를 받으며 자란 젊은 여성들은 소위 알파걸이라고 불리고 엄친딸을 지향하며 산다. 이들은 제2의 수퍼우먼이지만 선배들이나 엄마처럼 지독하게 혹은 청승맞게 애쓰지 않는다. 여성성을 한껏 뽐내면서도 학업이나 일에서 좋은 성과를 내 인정받을 수 있기를 바라고 실제로 그런 경우도 많다. 싸워야 할 상대는 남성이 아니다. 이들은 싸우지 않는다. 애교로 의존하는 척 하면서 구워삶는다(고 믿는다). 하지만 다른 세대에 속하는 여성들은 물론이고 현재 20대의 많은 여성들도 여전히 고군분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저런 특별법이 마련되었어도 여성들은 여전히 성폭력과 가정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또한 여성들이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고, 아직도 임노동과 가사노동을 수행해야 하는 이중부담을 지고 있다. 이런 문제들과 관련된 현장에서 활동하는 페미니스트들이라면 피해자 프레임의 페미니즘이 아직도 절실할 것이다. 이건 김어준씨가 스포츠 중계하듯이 ‘피해자 프레임에 대한 문제제기가 나와 줘야 되는데 안 나오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김어준씨는 “스스로 자신의 몸을 정치적 표현의 수단으로 도구화하기로 결정한 그 여성을 골빈 년으로 만드는 폭력”을 경계한다. 그리고 이 폭력이 피해자 프레임 페미니즘의 콜래트롤 데미지(부수적 피해)라고 말한다. 하지만 김어준씨가 간과한 또 하나의 부수적 결과가 있다. 그게 바로 비키니 응원 여성이나 코미디언 곽현화, MBC 이보경 기자와 같은 여성들이다. 이들은 피해자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걸 원하는 여성이야 없겠지만, 이들이 원하는 것은 피해의식도 없는 아주 당당한 여성이 되는 것이다. 이들은 거칠고 민감한 페미니스트와도 거리를 두고 싶고, 고통스러워하고 청승맞은 피해자와도 거리를 두고 싶어 한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자신의 몸을 ‘도구화’하고 어떤 여성들의 ‘피해의식’을 비꼬는 패러디물을 만들고, 나꼼수의 ‘의미’를 되살리고자 비키니 응원에 참여한다. 이들은 개인이다. 이들은 여성 집단에 대해서 아무 고려도 하지 않는다. 이 여성들은 한편으로는 이른바 ‘대의’를 먼저 생각하는 사회적 존재로 자신을 등장시키지만, 한편으로는 여성이라는 집단에 대해서는 대의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 한편으로는 자신을 성적 존재로 노출시키지만 한편으로는 여성으로서 자기가 처해있는 성적 입장에 대해서는 의식하지 않는다. 이는 기존의 페미니즘이 피해자 프레임과 더불어 속박에서 벗어나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자아를 실현하면서 살라는 일종의 강령이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에 포섭되고, 남성중심적 권력과 협상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결과이다. 게다가 이는 부수적인 게 아니라 결정적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어떤 여성들은 자신의 몸이 ‘도구화’ 되는 것도 스스로 ‘도구화’ 하는 것도 모두 거부하고,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는 ‘피해의식’에서 출발해 그것을 정치적 활동의 역량으로 확대하면서, 하이힐 신고 아스팔트를 걸으며 가카 퇴진을 외치고, 시위대에 먹거리를 제공하거나 플래시 몹을 선보이는 등 ‘발랄한’ 시위 방식을 보여주었다. ‘대의’를 위해서 어떤 취약 계층을 배제시키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타협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여성들이 있다. 페미니스트들이 사유해야 하는 것은 피해자 프레임을 넘어선 이야기들을 제시하는 페미니즘 이론과 여전히 피해자 프레임을 필요로 하는 여성운동 및 여성의 현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어느 쪽과도 관계되고 싶어 하지 않는 여성들과 그와 동시대를 살면서도 페미니스트 의식을 지니고 있는 여성들 사이에 어떤 공통성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어차피 나꼼수를 이길 순 없다. 우리에겐 그만한 명성도 권력도 미디어도 없다. 게다가 그런 ‘팬덤’도 없다. 나꼼수의 지지자들은 이미 동지도 지지자도 아니다. 그들은 마치 아이돌의 팬들이 ‘무슨 일이 있어도 오빠들 믿고 배신하지 말자’며 팬심을 다지듯이, 다 필요 없고 김총수가 알아서 잘 판단할 것이고 그 판단에 맡기고 우리는 한 길만 가자고 서로를 도닥이는 분위기다. 이렇든 천군만마를 가진 나꼼수는 꼴페라고 만날 욕만 들어먹는 여성들에게 절대 사과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사과한다면 잘해야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 정도겠지만, 이런 소릴 할 캐릭터들이 아니다. 앞으로도 이런 문제에 대해 여성들이 민감할 권리는 있어도 자신들의 입을 틀어막을 권리는 없다며, 조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논점을 ‘표현의 자유’ 문제로 돌리면서 회피해 가는 이런 담론에 또 휘둘릴 필요 없다. 그러는 대신 담론의 판을 새로 짜야 한다. 사과를 받아내는 일이나 대의가 뭐냐, 여성문제는 사소한 일이냐 하는 케케묵은 논쟁은 그만두자. 이런 쟁점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 어떤 쟁점을 다루든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기 위해서는 여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선에서, 여성들이 서로를 마주보게 하고 대화하게 하고 협상하게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