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리 네히어라 – 개념의 사중주

우리 사회는 좌파와 우파라는 이상한 놀이 규칙에 빠져 있다. 한 쪽은 법 없이도 착하게 살 수밖에 없고, 다른 쪽은 법대로 하자면서 ‘차카게 살자’라고 강제하고 명령한다. 어떤 이는 서로가 공감하며 정직하게 살 수밖에 없고, 어떤 이는 순위와 차별이 있는 세상을 인정하며 ‘정직하게 살자’고 주장한다. 정직하지 않은 어떤 재벌은 ‘정직했으면 좋겠다’고 하여 자신들은 정직하니 다른 이들도 정직하라는 유머(의미)를 전달하면서 은근슬쩍 그 자신들도 정직한 부류에 끼워 넣는다.

예전에는 ‘민주공화’라고 이름을 쓰는 이들이 군사독재를 하였고, ‘민주정의’라고 부르짖는 이들이 장충체육관 독재를 실행하였다. 왜 이런 현상들이 이어질까? 좌파와 우파, 생명질서와 기하질서, 빨갱이와 파랭이, 표면을 기준으로 심층(深層 profondeur)과 상층(上層 hauteur), 하부의 구체적 노동과 상부의 이데올로기 등으로 알려진 이런 개념들은 일상에서 많이 쓰이고 있음에도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이해와 적용, 그리고 사용과 의미 소통이 잘 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시절까지, 즉 성인의 문턱까지는 세상이 그들에게 가르쳐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또 그것을 반복하여 노력하며 공부한다. 이들은 순박하고 착하다. 이들은 마치 수학의 몇몇 개념이 ‘선천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믿고 있듯이 우리에게 태어나면서 지니는 개념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와 직선이 그러하다. 그러나 조금 더 반성을 해보면 개도 소도 하나라는 것을 알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개나 소도 주인에게 달려올 때 갔던 길을 거꾸로 이리저리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보는 대로 똑바로 직선으로 되돌아온다.

사람이 개를 대할 때 개는 그 사람의 얼굴빛이나 행동에서만 그 사람의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개는 그 사람의 몸 상태, 감정, 깊은 곳(심층)에서 우러나는 애정에 따른다. 동물에게도 현상의 형태에서 오는 일시적 판단과 심층에서 나오는 경향에는 차이가 있다. 미성년에서 성인이 되면, 표면의 일상 현상을 형상화한 상층의 논리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표면을 만들려고 욕망하는 심층의 경향으로 공감하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표면으로부터 제기되는 이중성은 철학에서 관점의 ‘차이’이지, 세상살이에서의 ‘차별’을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차이라는 이름의 이중성은 수리와 생명 사이에서의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상에서 말하는 추억이 아니라, “기억”이라는 내용에도 이중화 현상이 있다. 이 이중화는 모순 대립을 주장하는 이원화가 아니다. 인간은 현실에서 살며, 과거의 소중한 기억을 여전히 작동시키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기억 중의 일부는 현실적으로 사용되기 전에 스스로 억제된다. 즉 현실에 맞는 기억을 작동시키고 잘 맞지 않는 기억을 잠재워 둔다.

회사라는 곳의 대화에서 상사가 “하고 싶은 말 마음대로 하라”고 한다고 해서 마음대로 말한 직원은 아마도 의 김용철처럼 쫓겨날 것이다.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요령이 없는가, 그 자리에서 해서 될 말이 있고 해서 안 될 말이 있지”라고. 말해서 안 될 것이 있는 것처럼, 삶에서도 기억에서 나오지 않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 여기에 자기 검열이 있다.

자기 검열이 잘 된 이들은 기억들이 마치 서랍 속에 정돈된 물건들처럼 즉 기념물처럼 잘 정리되어 있다고 여긴다. 그 사람은 서랍 밖에 자기가 있듯이 기억도 자기 바깥에 있다고 여기는데, 그것은 자신이 세상 안에 있으면서 세상 밖에 있다고 착각하는 것과 같다. 그 착각은 자의적이다. 자신이 밖에서 세상을 조작할 수 있은 것처럼 여기는 착각은 자유가 아니다. 자유란 그 세상 속에서 살면서 행하는 것이지, 자신만이 바깥에 있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다. 함께 하는 세상(공동체) 속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은 지난하다. 서랍 속에 든 기록들을 잘 정리하면서 그 속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배제되고 은폐되었는지를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단지 사람들은 배제된 것을 지워버리고 싶어 한다.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배제되고 소외되고 있는지를 느끼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어떤 이들은 추억의 일부를 지워버리듯이 사람들을 없애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들은 빨갱이 또는 좌파의 딱지를 붙이면서 상대를 적대시하고 멸시하고 또한 지워버리듯이 없애고자 한다. 배제 없는 삶을 위해서 우리는 진정한 성찰, 반성, 비판을 필요로 한다. 배제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이미 잘 정돈되었다고 여기는 개념들과 새로운 관계들 속에서 사용하려는 개념들 사이에서 비판과 반성, 나아가 새로운 개념 이해를 필요로 한다.

어린 시절부터 배워온 개념들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것은 세계를 이해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수불가결하다. 누군가 세계라는 개념을 사용할 때, 그 세계가 그 사람이 살아온 지역인지, 우리들이 사는 지구라는 땅덩이인지, 사람이 살 수 없는 이상한 곳까지 포함하는 것인지, 달을 넘어서 어두운 공간까지 총칭하는 것인지를 알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개념의 범위와 사용의 영역을 세심하게 검토해야 한다.

좌파와 우파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다. 좌파는 어떻게 사용되며 언제부터 생긴 개념이며, 형이상학적으로, 인식론적으로, 정치경제학적으로 어떻게 쓰이는가? 또는 좌파라는 개념을 한나라당 원내 대표 안상수처럼 군대를 갖다 오지 않은 자가 군대를 갖다 온 봉은사 명진 스님에게 붙일 수 있는가? 그보다 속 깊은 다른 의미가 있는가? 이런 검토로부터 좌파라는 개념이 누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방식으로 보자. 여기서 한 가지 예를 제시해보자. 단순히 좌우라는 측면으로 나눌 수 있다는 입장에서 보면 왼손잡이는 좌파라고, 오른손잡이는 우파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이에 양자의 조화를 이야기하는 이들은 새의 날개는 둘이며, 좌우가 함께 움직여야 잘 난다고 한다.

또 다른 방식으로 설명해 보자. 물질이 입자로 되어 있다고 하는 경우, 긴 막대 자석을 N(파란색, 파랭이)과 S(빨간색, 빨갱이)로 표시하여 둘로 분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빨갛게 색칠한 부분을 잘라내 보라. 그러면 남은 부분들이 모두 파랭이로 될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 잘라낸 파랭이 속에서 절반은 남극으로 빨갱이다. 이런 현상에서 좌우는 무엇일까? 이러한 성찰에서 물리학적으로 입자론의 관점과 파장론의 관점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이런 반성을 정치경제학적으로 확장하여보면, 상층의 입장에서 표면의 현실을 상층 원리의 모방이라고 여기는 것과 심층의 입장에서 표면 현실을 심층 변화의 생성이라 하는 것에는 입자론과 파장론의 차이보다 더 큰 차이가 있다. 여기서 한쪽을 맞다고 여기면서 다른 쪽을 틀린 것으로 여기는 대립과 적대의 사유가 무엇을 만들었고, 그 결과가 어떠한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은 어렵지 한다. 그런데 심층으로부터의 생성이 구체적 현실이라는 좌파와 상층으로부터 본뜬 모방물들을 현실에서 무시하여도 괜찮다고 여기는 우파, 이 양자 사이에는 어떤 품행의 차이가 있는지는 그 사람의 인생관에 달려 있다.

자신의 삶의 태도에 대한 성찰뿐만 아니라 타인들의 삶의 태도에 대한 이해에는 철학적 개념의 함의, 내포, 강도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철학적 개념에 대한 성찰과 이해를 위해 50여 개의 개념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러한 제안은 프랑스에서 고교 마지막 학년(고등학교 4학년)에서 청소년의 나이에 철학을 필수적으로 배우고 있다는 점을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철학에 대한 관심은 세상을 다르게 보게 할 것이다.

나는 이천년 역사상 세상에 가장 위대한 개인은 예수라고 생각한다. 그는 당시의 제국, 즉 로마제국에 저항했고 또한 백성을 얽매었던 그들의 종교에 대해 항거했다. 그는 실패했지만, 많은 사람들의 몸주로 남아서 사람들이 그를 따르고자 노력한다. 그를 초월적 신으로 만든 상층주의의 사유는 기만이며 착각이라 본다.

그리고 내가 주목하는 다른 하나의 사건이 있다. 프랑스 대혁명이다. 프랑스 대혁명 전야의 회의에서 왕을 중심으로 하여 귀족들이 오른쪽에 자리 잡고 제 3신분으로서 인민 편인 자들이 왼쪽에 자리 잡은 이후에 우파와 좌파라는 용어가 형성된다. 프랑스 대혁명은 제국의 권력과 닮은 구체제에 봉기하여 왕을 제거하고 승리했으며, 또한 그 시대의 종교에 저항하여 카톨릭 주교 등을 단두대의 이슬로 보내면서 인민의 자유, 평등, 인류애를 실현하려고 했다. 그 혁명은 햇수로 4년이나 지속했으나, 그 반동은 역으로 거세었다. 그 반동의 과정에서 급진 자꼬방을 이어가려는 평등당의 이념을 세운 것이 붉은 좌파의 기원이다. 그리고 200여년이 지난 프랑스는 아직도 좌파와 우파가 거의 반반으로 존속하는 사회를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 몸주는 더 이상 없으며, 정치적 권력과 종교적 권위를 빈 상층, 빈 권력, 빈 중심, 유머로서 상층, 빈 구조 등으로 표현한 것은 인류사의 기념비적 사건의 귀결이다.

우리가 보기에 이 이상한 나라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아직도 고교 4학년 전학생들에게 일 년간 철학을 가르친다. 이 철학 교육을 받고 난 인민들은 인권과 자유를 무시하는 어떤 권력이 들어와도 항거하고 저항할 수 있다고 한다. 한때 우리나라 대학에서 철학이 필수였지만 선택으로 바뀌고, 그리고 논술이라는 이름 아래 글쓰기와 자기 소개서 쓰기에 밀려 철학교육이 사라지려는 현실과 그 결과로 인민들의 저항력이 쇠퇴해 가는 교육 현실을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왜 철학 교육을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로마 제국도 카톨릭 절대왕정도 없는 이 시대에서 유일하게 분단의 아픔을 아직도 쓰라리게 느끼고 있는 지역에서 태어났다. 예수의 저항, 프랑스 인민의 봉기에 이어, 우리는 우리에게 맞는 새로운 세상의 공동체를 생성할 시점에 있다고 본다. 그 노력의 토대를 만들기 위해 서로가 이해 가능하게 개념들을 공부해보자. 그리고 시대의 벽을 부수거나 넘어서려 했던 철학자들을 다시 공부하자. 그 공부가 공동체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이 공동체는 땅의 노동에서, 기계의 노동에서, 기술과 과학의 노동에서, 예술의 노동에서, 제반 학문의 노동에서 공동의 작업을 통해서 이룰 수 있다.

이 공동체(꼬뮤노떼)의 공동이란 영역에서,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들이 꼬뮤니스트들이다. 꼬뮤니스트로서, 빨갱이로서 그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세상살이를 여기-지금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참조**
프랑스 문교부 시행안(1970)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편으로 철학개념(42항목)을 제시하고 다른 한편으로 철학자(34명)들을 제시한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교육부의 검정필 교재는 없으며, 교수는 성인이 될 이들에게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개념들을 좌우를 아우르며 다양하게 가르치고 있다.

철학의 개념

인간과 세계 : 의식, 무의식, 욕망, 정념, 환상, 타자, 공간, 지각, 기억, 시간, 죽음, 현존, 자연과 문화, 역사. (14)

의식과 이성 : 언어, 상상, 판단, 관념, 과학적 개념의 형성, 이론과 경험, 논리와 수학, 생명의 인식, 인간의식의 구성, 비합리적인 것, 의미, 진리. (12)

실천과 목적 : 노동, 교환, 기술, 예술, 종교, 사회, 국가, 권력, 폭력, 권리, 정의, 의무, 의지, 인격, 행복, 자유. (16)

인간학, 형이상학, 철학.

철학자들

플라톤* – 아리스토텔레스* – 에피쿠로스 – 루크레티우스 – 에픽테투스* – 아우렐리우스 – 아우구스티누스 – 토마스 아퀴나스- 마키아벨리 – 몽테뉴 – 홉스 – 데카르트* – 파스칼 – 스피노자* – 말브랑쉬 – 라이프니쯔 – 몽테스키외 – 흄 – 룻소* – 칸트* – 헤겔* – 꽁트* – 꾸르노 – 키에르케고르 – 맑스 – 니이체 – 프로이트 – 훗설* – 베르그송* – 알랑 – 바슐라르 – 메를로퐁티 – 하이덱거 – 사르트르 – [들뢰즈, 푸꼬, 하버마스: 필자의 첨가이다.]

이 표시(*)가 된 것은 모든 학생들이 필수적으로 다루어야 할 철학자들이다. 내가 프랑스 있을 당시 고교에서 인문학을 지망하는 학생들에게 철학수업 시간은 연간 일주일에 10-12시간이며, 순수과학을 지망하는 학생들에게는 8-10시간이다. 예능과 체육을 하더라고 위의 표시(*)를 꼭 다루어야 하며, 기술적인 예능의 경우 2-4시간 정도 철학수업을 한다. 한마디 보태면 프랑스에서 1년간 10시간은 우리나라에서 대학으로 환산하면 전후 학기 20학점에 해당한다. 그리고 대학입학자격고사(바깔로레아)에서 4시간 시험을 치고, 그리고 질의응답시험(오랄테스트)도 치른다.

이 나라가 권력과 권위에 대한 저항과 봉기를 인민의 미덕으로 여기는 것은 철학이 그들의 삶에 깊숙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어느 나라가 지배하러 와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 속에 동화될 뿐이라고. 그것은 문화의 힘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철학이 그 심층에서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심층, 생명질서, 좌파, 빨갱이가 잘 작동하고 있는 것은 고교철학 덕분임을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류종렬(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 admin@admin.com

‘(e)시대와 철학’ 창간 발기인 선언문 [시대와 철학]

‘(e)시대와 철학’ 창간 발기인 선언문

일시: 2010년 6월 10일

오늘날 한국의 현실은 철학으로 하여금 모든 사회의 지배적 권세와의 관계방식을 반성하고 자신의 위치를 다시 설정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것은 철학이 고전적으로 조용한 사유의 정원을 소요하거나 현대적으로 각종 하청업을 수행하는 데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없는 처지에 서있기 때문이다. 철학은 자신의 여유를 시대의 문제를 비켜가는 피신처로 삼을 수 없게 되었으며, 자기 생존의 절박함에 추동되어 외래사조의 청부업에도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철학은 자기상실과 세계상실의 불행 속에 있다. 그러나 생의 위기를 사유하지 않는 곳에, 극복 의지가 없는 곳에 철학의 위기가 있다.

1980년대 신자유주의의 유입과 군부독재의 등장에 저항한 광주항쟁은 진정한 자유와 연대의 삶에 대한 동경이 삶과 죽음의 문제임을 증명하였다. 고통이 피워낸 이 문제의식은 수많은 청년들을 도래하는 해방에 자신과 인류의 삶의 의미를 걸고 민중 속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철학계의 일부 소장학자들은 철학을 ‘시대의 진정한 혼을 인식하고 실현하는 활동’으로 규정하고「한국철학사상연구회」(1989)를 창립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해방 전후의 우리의 스승들이 지난한 위기에 선 한국 현실을 극복하고자 했던 생의 열정과 사색을 80년대의 정치 경제적 현실의 문맥에서 계승하고자 한 것이었다. 우리의 사상의 교사들은 3.1운동의 자유와 연대의 정신을 계승하여, 신성한 가치의 조명 아래 여러 가지 방식으로 현실을 문제 삼았다. 그들은 비록 자신들의 이론적 작업이 추상적 인식으로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현실로 돌아오고자 하는 실천적 지성을 철학의 포부이자 양심으로 간주했다.

서양학술의 유입에 따라 자연사에 대한 우주적 이해와 현대 엄밀 과학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하더라도, 역사적 인생이 겪는 억압적 고통의 해결은 회피할 수 없는 과제였다. 이 참여적 지성의 전통은 현실의 주요문제를 간과하는 지성은 자기를 확인할 수 있는 세상을 창조하려는 자존심과 자기의식을 저버린 비루한 정신이라는 것을 자각시켜 왔다.

유성의 머리 위에 태양이 빛난 이래, 머뭇거리던 생명체가 최초의 결단으로 눈을 뜬 이후, 인류 혁명사는 자유의 사상만이 인간을 세계와 화해하게 하는 것임을 감격적으로 바라보게 하였다. 그 자유야말로 정신으로 하여금 자신과 세계의 총괄적 변화를 위해 전진하는 고단한 시간의 삶을 기쁨으로 인수하게 하는 것이었다.

지난 날 수많은 청년들은 자신의 계급을 넘어서서 만인의 자유를 위해 민중 운동에 헌신함으로써 소수자들의 정치 경제적 과두제를 전복시키려 했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 중국의 실용주의 노선의 등장, 문민정권 이후의 신자유주의 공세, 의회 민주제의 형식적 정상화 및 정보 문화산업의 일상화, 생존 경쟁 이데올로기의 선전 등은 민주의 이름으로 부르주아 독재를 공고하게 했다. 이에 따라 기존의 과학적 유물론 철학의 교조주의적이고 사회 공학적인 성격이 자본주의의 통속적 유물론과 친화성이 있으며, 기계적 경직성을 갖고 있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러한 측면에 대한 반성은 기존의 변증법이 갖고 있는 전체성의 원리가 개체성을 말살하는 억압의 원리라는 통념을 보급시키고, 무명의 평등한 개체들이 주권자라는 관념을 확산시켰다. 영상과 정보 상품의 폭발적 소비 흐름을 타고 개체들의 권력은 사회의 어느 곳에서나, 심지어 광고판이나 말끔해진 공중 화장실에서도 떠다닐 수 있었다.

전체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에 기반한 주체성도 죽었다는 표어로 유행하게 된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은 문화생활 양식으로 실증되는 것 같았다. 소외된 소수자를 포함한 개체들의 권리는 유연하게 된 사법부의 법제화에 의해 객관적으로 보장되는 듯했다. 이러한 상황은 참여정부 시절의 신자유주의 완성 단계에 이르기까지 만물의 상품 정보화 조류와 명운을 함께했다. 이처럼 개체들의 권력은 형식적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 자본에 의해 왜곡된 형태로 완성되었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갔다’. 그리고 그동안 무엇이 왔는가? 서양에서는 가장 흔한, 그래서 닳아빠진 자유 민주적 유물론이 ‘왔다’. 세계는 물건들과 그 관계들의 총체이다. 사회적 개체들은 그것에 의존해서만 자유롭게 존재한다. 이 얼마나 편리하고 내재적이며 유물론적인 세계상인가? 그것은 초월적 종교와 예술과 진보주의도 그 앞에서는 독립성을 상실하고 매혹되는 미끈한 속류 유물론이다. 그리고 그에 기초한 신나는 가상세계가 덤으로 주어졌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생활양식과 이것에 홀린 세계상을 세속적 유물론이라고 판단한 맑스의 견해는 여전히 유효하다. 총체적 물질화와 정신의 전면적 자기소외는 현상적 실재가 가상이라는 고전적 관념을 가상도 실재라고 뒤집는 데에서 경쾌하게 완성된다.

그동안의 한국사회가 누린 민주적 세계상은 정보 상품의 홍수와 개체의 권리, 금융 증권의 생활화와 사적 공간의 법제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것은 경제 권력에 매료되고 국가권력에 호소하는 반(反)주체적 방향성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철학은 변증법의 전체성의 원리와 주체성을 두려워하여, 자유 민주적 과두제가 갖는 전체성의 원리와 폭력성에 대한 관심과 탐구를 포기했다.

이러한 무관심은 기존의 자유 민주적 사고가 전체적 일원성과 개체적 다원성이라는 두 개념 사이에서 움직여 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서양 전통철학이 논변의 편리를 위해 동일성과 다양성이라는 두 범주에 갇혀 버리기로 작정해온 것과 맥을 같이할 것이다.

이러한 이원적 사고는 변증법적인 전체성을 버리는 것으로부터 현실에서 작동하는 독재적 전체성에 대한 탐구까지도 버리는 것으로 나아갔다. 이 때문에 우리 스스로, 그간의 민주화 운동에 의해 부분적으로 되찾은 개체성의 권위를 국가와 자본이라는 유서 깊은 전체성에 기대어 회복하고자 함으로써 급진적 주체성을 기각했다.

개체성과 전체성은 사이좋게 공존한다. 지상의 대부분의 나라는 전체성의 위력 하에 개체가 보호받고 배려되는 것을 민주주의라 칭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제는 사회공학자들이 되어 버린 정객들과 기업가들이 뚜렷한 계급의식을 가지고 성장하게 되었다. 사랑받기도 하고 미움받기도 하는 이 시대의 여러 군주들이 의회 민주제에 의해 등장하고 그것 위에 군림하는 것은 철학적으로는 자유 민주주의적 유물론을 배경으로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진보적 학술을 포함한 대부분의 학문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국가의 상업적 관리 속으로 편입되고, 대학은 하청업체가 되었다. 학문 영역은 신자유주의적 정치화와 이데올로기화라는 심각한 재난을 만나게 되었다. 생존의 위협 속에서 국가가 규정한 규격과 형식에 맞추어 주문 제작해야 하는 학자들은 생산량을 문서로 보고해야 하는 스탈린적 노동 생산성의 법칙을 관철시키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거대한 메뚜기 떼가 전진하는 원리가 서로 지체하면 뒤에 오는 자에 의해 먹이가 되는 위험성에 따른 흥분이라면, 우리의 이성은 분명 곤충의 변태적 욕망을 동력으로 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점은 오랫동안 지적되어 왔으나 자율성과 창의성이 경영논리 속으로 변질된 지금, 이미 관행이 되고 법제화되어 어느 누구도 고치기 어려운 숙환이 되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도 이러한 습관에 한 발을 디디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비판에 의한 철학의 회복이라는 사명에 직면하여, 그리고 새로운 사유의 창조를 미리 봉쇄하는 한국 학술체계의 문제에 직면하여, 시대의 사유로서의 잡지 『ⓔ 시대와 철학』을 사상의 자유 공간으로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우리의 시대는 밖으로는 정치·경제·과학·문화의 영역이 제기하는 여러 철학적 문제에 대한 탐구와 해결을 요구하고 있으며, 안으로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출하고 실현하는 주체성에 대한 모색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러한 필요성은, 세상의 바닥과 구석에서 권력이 가한 모든 참사가 전해주는 말없는 자유의 충동을 삶의 진실로 수용할 때, 물질과 생명이 갈등하는 가운데 펼쳐져 있는 세계의 심연의 소리에 귀 기울일 때, 더욱 우리 내면의 양심으로 다가올 것이다.

세계에의 즐거운 몰입 대신 세계에 대한 탐구와 사색으로, 세계를 벗어나는 영혼 대신 현실을 새로운 미래로 생성시키는 주체성을 찾는 데에서 사유는 그 깊이와 폭을 갖게 될 것이다. 시대와 사유가 넘어지느냐, 아니면 일어서느냐는 바로 이 깊이와 폭의 창조에 달려 있을 것이다.

 

‘ⓔ 시대와 철학’ 창간 발기인 일동

강지은 곽노완 구태환 권정임 김광호 김교빈 김문용 김세서리아 김성민 김성우

김수중 김시천 김우철 김원열 김인곤 김재현 김종곤 김호경 김홍경 문성원 박강수

박기순 박민미 박영균 박영미 박영욱 박은미 박정하 박종성 백충용 서도식 서영화

서유석 송석현 송종서 신우현 심의용 심혜련 연효숙 우기동 유현상 이관형 이규성

이병수 이병창 이병태 이상훈 이성백 이순웅 이재원 이정은 이정호 이지영 이철승

이현구 임재진 전호근 정준영 조광제 조민환 조은평 최유진 최종덕 최한빈 한길석

현남숙 홍영두 홍원식 황성혜

(이상 가나다 순 69명)

글: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