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것이 아니면 없는 것이라고?[철학을 다시 쓴다]-①

있는 것이 아니면 없는 것이라고?[철학을다시 쓴다]-①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천만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도 있어

 
이제 미루고 미루고 또 미루어 왔던 ‘운동’의 문제라는 ‘벼랑 끝에서 허공으로 한 번 내딛기’의 시간이 온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이 문제를 다룰 길을 찾아왔지만 여전히 저는 사막 한가운데서 제자리를 맴도는 여행자의 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먼저 제 변화된 환경에 대해서 몇 말씀 여쭈어야 하겠습니다. 저는 그 동안 몸담아 왔던 지방 대학을 떠나 한 해 말미로 이 땅에서는 가장 머리 좋은 학생들이 모여 있다는 중앙 도시의 국립 대학 대학원 철학과 석박사과정 학생들에게 ‘존재론’을 강의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제 계획은 거창했습니다. 이 기회에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존재론 전통의 맥을 짚어 가면서 ‘존재’와 ‘운동’의 문제를 중심에서부터 파고들자는 욕심을 부렸으니까요. 이 무리한 욕심이 저를 파멸로 몰아넣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저는 제가 빠져들 수밖에 없는 ‘운동’의 깊은 늪에 뛰어드는 시기는 되도록이면 뒤로 미루자고 마음먹었습니다. 한 학기 동안은 그 동안 제가 조금씩 쌓아올렸던 존재론의 비축 양식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것으로 버텼습니다. 잘 하면 이미 쌓아 놓은 양식으로 한 학기를 더 버틸 수도 있겠다는 약삭빠른 생각이 문득 머리에 떠올랐지만 저는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어차피 이번 한 학기가 제가 대학에 머무는 마지막 날들이었습니다. 다음 해부터는 시골에 들어가 농사를 지을 작정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저는 이 좋은 기회를 적당히 뭉개 버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 동안 망설이고 망설이면서 뜸만 들이고 있던 솥뚜껑을 열어 보자고 다짐했습니다. 더 이상 ‘모순’을 회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이제 모순 속에 빠져들어 모순을 극복할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저는 원탁 강의실에 둘러앉아 저를 지켜보고 있는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여기에 두 점이 있다고 칩시다. 점〔point〕은 물론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든 하나로 있는 것이 그렇듯이 크기가 없습니다.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것은 모든 끝(한계, peras)이 그렇듯이 크기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 두 점은 우리가 감각으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감각에 들어오지 않는 이 두 점이 서로 관계를 맺는다고 칩시다. 당구공 두 개가 서로 맞닿아 있는 당구대를 연상해도 됩니다. 이 때 서로 맞닿아 있는 이 두 점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아무 대답도 없었습니다. 제 물음이 무슨 뜻을 지녔는지 모르는 눈치가 역력했습니다. 저는 달리 물어야 하겠다고 느꼈습니다.

“두 개의 점이 나란히 맞닿아 있을 때 이 두 점 사이에 크기(또는 길이)로 드러나는 공간이 생긴다고 보아야 하겠습니까?”
제 질문에 어떤 학생이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선생님, 점은 본디 크기가 없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크기가 없는 두 점이 나란히 놓여 있다고 해서 그 사이에서 크기가 생긴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크기가 없는 두 점이 맞닿아 있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지요? 만일에 두 개의 점이 맞닿아 있는데 그 사이에 크기가 없다면, 다시 말해서 두 점이 서로 따로따로 차지하는 자리가 생겨나지 않는다면 그 두 점은 한 자리에 있다는 말이 되고, 두 점이 한 자리에 있다는 말은 두 점이 겹쳐서 하나가 된다, 곧 합동(合同)이 된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끝, 곧 한계〔peras〕가 하나인 것만이 크기를 갖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두 개의 점이 있다는 말은 끝이 두 개 있다는 말과 같은 말이지요? 끝이 둘인 것을 우리는 무엇이라고 부르지요?”

“선〔line〕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옛 피타고라스학파의 전통에 따르면 끝이 두 개인 것은 선분이라고 정의됩니다.”

“그렇지요? 그리고 선〔line〕에서 두 끝 사이에는 끝이 없는 것〔apeiron〕이 들어 있지요?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점이 두 개 있고, 그 두 개의 점이 관계를 맺으면 그 두 점 사이에는 끝이 아닌 것, 곧 끝이 없는 그 무엇, 다시 말해 크기가 생겨나고, 길이로 나타나는 끝이 아닌 그 무엇과 두 개의 끝을 서로 연관시켜 우리는 그것을 선분으로 정의한다고 말입니다.”

“글쎄요.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럴싸하기는 한데, 그래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데요. 어떻게 크기가 없는 점 두 개가 맞닿는다고 해서 그 사이에서 크기가 생겨난다, 공간적인 거리가 생겨난다고 할 수 있지요?”

“그것이 바로 둘이 가지고 있는 신비한 특성이자 하나와 다른 점이지요. 모든 하나는 어떤 하나이든 크기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공간의 규정을 벗어납니다.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형상〔idea〕의 세계에는 모든 형상이 하나하나 다 고립되어 관계를 맺지 않기 때문에 공간이 없습니다. 플라톤의 형상들은 하나, 둘…… 하고 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찌어찌해서 어떤 하나가 다른 하나와 관계를 맺어 둘을 이루면, 다시 말해 둘이 나타나면 이 둘 사이에는 이 하나도 아니고 저 하나도 아닌 것이 나타나는데, 점의 형상에서 우리가 유추할 수 있듯이 두 개의 하나가 저마다 크기가 없는 것, 끝, 한계이므로 이 하나도 저 하나도 아닌 것은 크기가 없는 것이 아닌 것, 끝이 아닌 것, 한계가 없는 것입니다. 둘이 없으면 크기도 없고 공간도 없습니다. 둘은 이 하나와 저 하나의 만남의 다른 이름이고, ‘실체’의 이름이 아니라 관계의 이름입니다. 여럿에는 실체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둘(여럿의 최소 단위)은 있는 것이 아니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있는 것은 하나이지 둘은 아니니까요.”

“아니, 선생님! 그런 터무니없는 말이 어디 있습니까? 선생님께서는 분명히 ‘이 하나, 저 하나’‘점 두 개’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또 ‘여러 하나’라든지 ‘모든 하나’라는 말씀도 하셨고요. 그런데 금방 말을 바꾸어 하나, 둘, 셋……으로 셀 수 있는 하나가 두 개가 모여서 둘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둘이나 여럿이 ‘만남의 이름’이고 ‘관계의 이름’이라니, 그런 엉터리없는 논리의 모순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인정하지요. 저는 지금 분명히 모순되게 여겨지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요. 왜냐하면 제가 하는 말은 모두 사유의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추론을 반영하는데, 알다시피 추론에는 공간, 다시 말해서 이 하나도 아니고 저 하나도 아닌 것, 규정할 수 없는 것이 끼어들어, 하나가 아닌 것을 하나로 보이게도 하고, 관계를 실체로 여기도록 만들기도 하니까요. 미리 앞당겨서 성급히 이야기하자면 없는 것도 있는 것으로 가정하고 들어가지 않으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도 없고, 추론을 이끌어 낼 수도 없는데, 없는 것을 생각하고 없는 것을 바탕으로 추론이 전개된다는 한계 때문에 내가 하는 말이 이렇게 왔다갔다한다고 보면 되겠지요. 아무튼 이제까지 내가 한 말 가운데서 이 말만 귀담아들어 두면 됩니다. ‘공간은 두 하나의 만남에서 생겨나는데, 하나는 하나이지 둘이 될 수 없으므로, 두 하나라는 말은 관계 맺음의 다른 이름이다.’”

학생들은 의아한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았지만 저는 짐짓 모르는 척했습니다. 제가 이제부터 씨름해야 할 문제는 공간의 생성 배경이 아니라 ‘운동’의 생성 배경이라고 보았고, 어차피 ‘운동’과 ‘공간’은 한배에서 태어난 쌍둥이이므로 ‘운동’의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공간 탄생의 내력도 저절로 드러나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두 점이 만날 때 드러나는 또 하나의 이상한 사건을 학생들에게 이야기해 줄 필요가 있음을 느꼈습니다.

“자, 다시 두 점이 맞닿아 있는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 봅시다. 크기가 없는 점이 맞닿아 있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기 힘들다면 당구공 두 개가 맞닿아 있는 모습을 머리에 떠올려도 좋겠지요. 당구공 두 개는 한 점에서 맞닿아 있겠지요? 우리는 이 점을 ‘접점’이라고 부릅니다. 이 접점은 당구공 두 개 가운데 어느 것에 속하겠습니까?”
 

윤구병, <철학을 다시 쓴다>, 보리출판사, 2013.


 
제가 이렇게 묻자 한 학생이 무뚝뚝하게 대답했습니다.

“그 접점이 어느 당구공 하나에 속한다고 말하기는 힘들겠는데요.”

“그러면 그 접점은 당구공 두 개에 모두 속한다, 그러니까 당구공 두 개가 접점을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나요?”

“그렇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렇다면 ‘어느 한 점을 공유하고 있는 두 개의 당구공은 붙어 있다.(이어져 있다.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둘이 아니다.’라는 반론이 나온다면 여기에 대해서는 무어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글쎄요. 참 대답하기 곤란한데요. 그러니까 그 접점은 어느 순간에는 이 공에, 또 다음 순간에는 저 공에 속한다고 보아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이 공, 저 공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두 공이 맞닿아 있게 하는 촉매 역할을 한다고 보아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두 개의 공이 맞닿아 있을 때 이 ‘두 개의 공은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 있는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지요?”

“소박하게 표현하면 붙었다 떨어졌다 한다고 할 수도 있고…… 다시 말해서 접점이 끊임없이 운동한다고 할 수도 있고…….”

“더 엄밀하게 정의한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나요?”

“입체인 구(球)를 단순화해서 두 개의 원(圓)이 맞닿아 있는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 보기로 합시다. 이 때 두 개의 원은 한 점에서 만난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접점이라는 말이 생겨났지요?”

“그렇지요.”

“그런데 위에서 우리는 ‘점은 끝(한계, peras)이 하나인 어떤 것을 말한다, 그리고 끝에는 크기가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 ‘하나는 어떤 하나이든 크기가 없고 따라서 운동하지 않는다(정지해 있다)’는 말도 했지요?”

“예, 파르메니데스가 증명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이 두 원 가운데 어느 하나를 다른 원 위로 굴려서 처음에 두 원이 맞닿아 있던 점까지 한 바퀴 돌린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때 한 원의 모든 끝은 다른 원의 모든 끝과 하나도 빠짐없이 다 맞닿는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렇게 볼 수 있겠네요.”

“잘 생각하고 대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유의 실험에서 우리는 아주 기묘한 결과를 얻게 되니까요.”

“무엇이 기묘하지요?”

“먼저 원 둘레의 모든 점은 한정된 것〔peperasmenon〕이므로 이 한정된 것의 집합도 역시 한정된 어떤 것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나 원주율을 측정하려는 현대 수학은 아직까지도 한정된 측정치를 내놓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반복되는 수의 계열조차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원주율에는 한정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되풀이되지 않는 수의 계열이 무한히 연속된다는 것은 원을 이루는 곡선 안에 무한〔apeiron〕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지요. 우리의 추론과 실제 측정치 사이의 이런 불일치가 기묘하게 여겨지지 않습니까?”

“그거 참! 그건 그렇다 치고 다음으로 기묘한 결과는 어떤 것을 가리키지요?”

“점은 끝이고 크기가 없는 것이라는 정의가 맞다면, 크기가 없는 점을 무한히 더해 보아야 크기가 있는 어떤 것이 나올 수 없는데, 알다시피 선분〔line〕의 한 끝을 한 자리에 고정시켜 놓고, 다른 끝을 고정된 한 끝과 같은 거리로 움직여서 드러나는 자취를 그린 원은 크기를 갖게 되거든요. 크기는 없지만 서로 맞닿아 있는 두 개의 점을 가지고 실험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크기가 없는 것에서 크기가 나온다는 것이 기묘하지 않습니까?”

“이거야 뭐. 야바위 노름 같은 느낌이 드는데, 선생님 말씀을 드러내 놓고 야바위 노름으로 몰아붙이기도 그렇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당장 뭐라고 하기 힘든데요.”

“그러면 다시 한 번 접점의 성격을 살펴봅시다. 접점은 서로 맞닿아 있는 두 개의 점이지요?”

“그렇습니다. 아 참! 그렇고 보니 끝이 두 개 있으면 그 사이에 끝이 없는 것, 크기로 드러나는 것이 끼어들어 선분〔line〕으로 규정된다는 이야기를 앞에서 하셨지요?”

“기억을 해냈군요. 그러나 그것만이 아닙니다. 접점의 성격 가운데는 더 까다로운 무엇인가가 숨어 있습니다.”

“그게 뭐지요?”

“앞에서도 잠깐 비쳤지만 그걸 이른바 둘이 가지는 모순, 둘에서 생기는 원시 우연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선 모순의 측면을 적극적인 것으로 원시 우연의 측면을 소극적인 것으로 나누어 놓고 생각해 봅시다. 먼저 두 점이 만나면 그 사이에서는 원초적인 공간 규정인 크기도 생겨나지만, 원초적인 시간 규정인 운동도 생겨난다고 귀띔했던 것을 기억해 주기 바랍니다. 접점에서 만나는 두 점은 이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는 조금 앞서 했습니다. 그런데 만남, 관계의 성격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만 있다면 만남도, 관계도 없지요. 만남은 늘 둘 이상의 무엇이 있음을 전제합니다. 그런데 있는 것은 하나로 있고, 바로 하나라는 특성 때문에 사유의 공간에서도 벗어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있는 것 바로 그것을 사유로는 파악할 수 없습니다. 없는 것 바로 그것도 사유의 대상이 아님은 거듭해서 밝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있다, 없다고 하는 것, 있는 것, 없는 것이라고 일컫는 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하나로 있는 것도 아니고, 아예 없는 것도 아닌 그 무엇들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음에 계속>

노동을 다시 생각한다[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④

노동을 다시 생각한다-4강, 5강?

 

박영균(건국대 HK교수)?

 


1. 자본주의의 성장과 노동가치론

 

1-1. 자본주의의 성장: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13세기 인클로저운동 시작, 15세기 말―16세기에 절정, 14세기 후반-15세기 중반 르네상스운동, 15-16세기 종교개혁운동): 17세기 “자신의 노동을 섞고 무언가 그 자신의 것을 보태면, 그럼으로써 그것은 그의 소유가 된다.” “인간의 삶에 유용한 토지 생산물 중에서 10분의 9가 노동의 결과라고 말해도 그것은 대단히 낮추어 잡은 계산일 것”(로크), ‘노동은 부의 아버지이고 토지는 부의 어머니’(1667년, 윌리엄페티→상품 교환의 공통 척도로서 노동량이라는 개념의 제시(애덤 스미스, 리카르도)

1-2. 정치경제학에서의 노동가치론: 정치경제학에서 노동 가치는 ‘노동이 유용한 어떤 것을 생산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 노동의 양적인 규정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즉, 어떤 상품의 가치 크기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노동 가치의 개념을 정치경제학적 의미에서 사용한 사람은 마르크스에 따르면 영국의 경제학자 윌리엄 페티이다. 그는 로크와 마찬가지로 ‘부의 어머니는 자연이고 부의 아버지는 노동’이라고 말했다. 나중에 마르크스는 이것을 ‘사용가치’라는 개념으로 정의하고 ‘가치’와 구별하지만 이 당시에는 이런 명확한 개념 구분이 없었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이 가진 쌀 한 가마와 B라는 사람이 가진 은 한 냥을 교환한다고 하자. 여기서 쌀과 은은 전혀 ‘쓰임’이 다른, 즉 질이 다른 물품이다. 그런데 어떻게 둘을 교환할 수 있는가? 어떤 공통점도 가지고 있지 않은 두 물품이 교환된다. 그렇다고 해도 그 둘을 교환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매개하는 공통적인 어떤 것이 있어야 하지 않은가? 바로 여기에서 가치의 다른 한 측면이 드러난다. 정치경제학적 의미에서 ‘가치’는 이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서로 다른 물건이 교환되기 위해서는 어떤 공통의 척도 또는 매개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

페티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은 페티가 처음이 아니다. 그보다도 약 2천 년 전,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졌다. 그는 《정치학》에서 “교환을 위해서 생산되어지는 모든 상품 속에는 공통적인 어떤 것이 들어 있고 그 공통적인 것 때문에 상품간의 비교가 가능하다” 그리스는 기본적으로 노예제 생산양식을 가진 사회였다. 그러나 그리스는 노예제를 기반으로 하여 해상무역을 전개하였으며 상업이 발전하였다. 탈레스를 비롯한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은 상인출신이 많다. 그들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무역을 전개하면서 상품교환을 했으며 여기서 개별자들의 평등에 대한 관념과 민주정에 대한 관념이 싹 튼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그리스에는 소수이지만 근대적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있었다. 상품교환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문은 이렇게 발전한 상업의 영향으로 제기되었던 것 같다.

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공통적인 것이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았고, 그것을 정확히 인식하는 데에는 약 2천 년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상품 생산이 일반화되고 이런 상품 생산의 발전과 더불어 상품 교환의 수수께끼를 해명하려는 노력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노동가치론을 가장 분명하게 밝힌 선구자는 1738년에 나온 소책자 《화폐 일반의 이자에 관한 몇 가지 성찰@Some Thoughts on the Interest of Money in General@》을 쓴 익명의 저자였다. 그 익명의 저자는 “모든 상품이 상호 교환될 때 여러 상품의 ‘가치’는 그것들을 생산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일반적으로 투하되는 ‘노동량’에 의해 규정된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여러 가지 상품들이 매매되거나 교환될 때, 그 상품이 지닌 가치 또는 가격은 ‘노동량’과 교환의 공통적인 ‘척도(화폐)’의 많고 적음에 의해 규정된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페티는 ‘노동 시간’의 많고 적음으로 규정한 것이다. 여기서 이윤의 원천은 노동이 될 수밖에 없으며 특정한 상품이 가진 가치는 그것을 생산하는 데 투여되는 시간일 수밖에 없다.

최초로 토지나 금과 같은 자연 상태 그대로가 아니라, 거기에 투하된 노동력이 가치의 원천이라는 노동가치론을 정식화한 사람은 애덤 스미스였다. 그는 제조업에 투자된 노동은 무익하며 비생산적이라는 중농주의자들의 주장뿐만 아니라, 금을 통해서 부의 축적을 정당화하고자 했던 중금주의적 환상에 대항하여 노동이 이윤과 축적의 원천이며 경제적 진보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주장하고자 했다. 그러나 리카도는 ‘지배노동가치설’을 비판하고 ‘투하노동가치설’을 주장했다.

1-3. 사회정치적 근대혁명(소유권과 근대민주주의): 캘빈의 구원예정설과 루터의 직업소명설(베버, 프로테스탄트윤리)→ “시민사회의 주요한 목적”은 “재산의 보존”(로크)


2. 자본주의생산양식과 근대적 패러다임: 노동가치론과 생산패러다임

2-1. 자본주의 생산양식: M-C(LP+MP)-M′
: 상품화(이중의 해방)-자연과 노동의 상품화
: 자본의 외부-노동력의 재생산과 자연의 수탈 메카니즘 → 자본주의적 지배메커니즘 확립

→ ① 자연의 수탈 메커니즘으로서 과학기술의 발전(생산력-MP, LP), ② 생산-소비 메커니즘의 확립(소비욕망의 창출), ③ 총자본의 대변자로서 국가의 조직화(교육, 의료, 주거 등)

2-2. 자본주의의 내부와 노동력 상품: 자본주의생산양식은 생산을 자본과 임노동이라는 두 관계로 추상화한, 생산의 특정한 사회적 양식이다. 이 생산양식의 핵심은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과 자신의 노동력을 파는 임노동이라는 두 존재의 상호관계이다. 여기서 ‘자본’은 단순히 축적된 화폐가 아니라 기계처럼 ‘생산수단’을 사는 데 소비된 화폐이며 ‘임노동’을 자신의 파트너로 고용하고 있는 ‘화폐’이다. 따라서 맑스는 자본주의 내부의 지양이 아니라 그 안에 존재하는 근본적 ‘균열’과 ‘공백’을 탐구하고자 했다. 그것이 바로 노동력의 상품화와 필요/잉여노동으로 구성되어 있는 자본주의생산과정 내부의 모순이다. 자본주의생산양식의 존재론적 특성은 그것이 ‘상품’의 세계라는 점에 있다. ‘노동력’이라는 상품, 즉 “그 사용가치 자체가 가치의 원천으로 되는 독특한 속성을 가진 한 상품”(Marx, 1989: 211-212)의 출현은 이 상품의 세계를 보편적인 존재양식으로 만들었다.

2-3. 자본주의 내부와 생산적 노동: 자본주의생산양식에서의 생산적 노동은 자본에게 생산적인 노동이다. 맑스는 아담 스미스의 ‘생산적 노동’이라는 개념을 다루면서 “이런 규정들은 노동의 소재적 특징에서, 즉 그 노동의 생산물의 본성에서도, 구체적 노동으로서의 노동에 고유한 일정한 속성들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노동이 실현되는 일정한 사회 형태, 여러 사회적 생산관계에서 가져온 것”(Marx, 1965: 127)이라고 말하면서 “여기서 그것은 언제나 화폐 소유자인 자본가의 입장에 의해 이해되며 노동자의 입장에서 이해되지 않는다.”(Marx, 1965: 128)고 논평한 바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생산양식에서 노동을 상품화하는 방식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생산적/비생산적 노동’이라는 대립적 체계를 통해서이다.

자본주의생산양식에서 생산적 노동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이며 이런 사용가치를 가지는 노동이 ‘노동력’이라는 상품이다. 그런데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으로서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노동을 투여할 수 있는 대상과 노동수단으로부터 그 자신을 분리시켜야 한다. 그것은 경제학적으로 자연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관점에서 노동이 가치를 생산하는 관점으로, 인간은 자연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으로부터 벗어난 존재라는 상징체계의 전환 뿐만 아니라 자연에 속박되어 있는 인신을 인격적으로 독립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인간을 주체로 전화시켜 상품 계열화하는 근대자본주의생산양식의 작동방식은 무엇보다도 인간과 자연의 분리 및 지상의 주인으로 인간을 주체화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2-4. 자본주의적 가치계열화와 자본의 외부: 자본주의생산양식에서 자연/인간의 분리와 ‘생산/비생산적 계열화’의 작동은 자본주의생산양식의 내부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제이다. 그리고 그렇게 내부로 계열화된 자연/인간의 분리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노동에 대한 착취의 가치계열화라는 점에서 근대자본주의는 ‘생산적/비생산적 노동’이라는 분리에 근거하여 이성애적 가부장제를 정당화하고 ‘성-사랑’이라는 환상체계를 만들어 ‘근대적 가족제도’를 생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생식’이라는 생산의 패러다임과 ‘인구학’이라는 국민경제학적 통제의 문제로 바꾸어 놓는다. 자본주의생산양식은 노동력의 가치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동을 재생산하거나 ‘생식’을 통해 후속 인구를 재생산하는 문제를 ‘가족’이라는 사적 공간으로 이전시키고 그것을 ‘비생산적 노동’으로 만들어 그에 대한 가치 지불의 책임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 근대적 삶의 방식인 ‘공적/사적 영역’, ‘소비와 생산의 영역’의 이원화는 바로 이런 ‘생산/비생산’의 이원화에 상응한다.

– 자연과 인간의 분리: 자본주의생산양식이 이전의 생산양식과 다른 첫 번째 특징은 인간과 비인간을 구별하고 자연의 힘으로부터 인간의 인공적인 힘을 분리함으로써 그 스스로 인간적인 세계, 인공적인 세계, 기술적인 세계를 만드는 데 있다. 애초 인간은 자연에 일부였으며 그 세계에 의존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생산양식은 그런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직접적인 관계,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의존을 끊어냄으로써 그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인공적으로 구축한다. 그것은 자연-인간이라는 관계를 자연/기계(기술)-인간이라는 관계로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직접적인 세계로서의 기계”(Ihde, 1979: 63)를 생산한다. 여기서 기술은 인공적 시스템, 기계적 시스템, 기술적 시스템이다.

그러나 이렇게 ‘거대한 자동기계’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맑스는 기계와 도구를 구분하고 “완전히 발전한 기계는”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세 부분, 즉 동력기, 전동장치, 끝으로 도구 또는 작업기”(Marx, 1989: 477)로 이루어진, 여러 도구들을 통합하는 “자동장치”(Marx, 1989: 487)라고 말한다. 이것은 “생산수단인 기계를 기계로서 생산”함으로써 “자신에게 적합한 기술적 토대를 창조”하며 “자기 자신의 두 발로 서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기계에 의한 기계의 생산에 가장 필수적인 생산조건은 어떠한 출력도 낼 수 있으며 또 그와 동시에 인간이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원동기”(Marx, 1989: 491)를 필수적으로 동반한다. 따라서 문제는 에너지원이다.

자연의 생명 에너지와 생태적 순환은 에너지를 소비할 때 발생하는 엔트로피를 그 스스로 ‘자정-정화’하면서 ‘생태적 균형’을 회복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나 생산력의 발전은 이런 자연의 ‘자정능력’과 ‘생태적 균형’을 파괴한다. 자연의 생태적 순환은 에너지의 균형과 생성소멸이라는 생명의 흐름에 의해 규정되며 자연적 물질들은 생명적 에너지들의 분배와 흐름에 의해 이루어진다. 반면 과학-기술은 ‘효율성’과 ‘인간중심’이라는 가치체계 하에서 작동하며 자연적 시간과 공간을 파괴하는 기계적 시공간, 또는 탈물질화된 시공간을 창출하며 자연에 없는 신물질들을 생산한다. 따라서 이 두 개의 메커니즘은 충돌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충돌은 자본주의생산양식이라는 체계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도시들의 성장과 파괴가 그 도시들을 발전시킨 에너지시스템의 성장과 파괴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문제는 자본주의생산양식이 인간과 자연을 ‘인간의 주체화-향락적 소비욕망’, 그리고 ‘생산/비생산의 가치계열’로 자연을 계열화함으로써 그전에 존재했던 그 어떤 생산양식보다도 더 총체적이고 전면적으로 지구의 에너지순환시스템과 생태계적 자정 및 균형능력을 파괴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현대자본주의는 BT산업과 같이 그전에는 상품의 대상이 아니었던 ‘생명체’들을 자본축적의 대상으로 전화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환경오염과 위기’를 ‘물의 사유화’ 및 각종 환경친화적 상품들로 바꿈으로써 ‘그린의 상품화’라는 새로운 가치축적의 대상으로 전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생산양식에서 환경위기는 근본적이고 총체적이라고 할 수 있다.

– 성/생식의 자본주의적 포획: 근대자본주의에서 여성의 성은 비록 그것이 가부장제적 남성의 환타지와 결합된 ‘성의 상품화’와 함께 진행되었다고 하지만 ‘혈연의 재생산’이라는 성의 자연성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의 성적 욕망에 대한 긍정을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 ‘성-사랑’은 근본적으로 자연적 성을 초과하는 어떤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족에 대한 대가 없는 지불이라는 ‘사랑의 공동체’라는 환상체계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생산양식에서의 노동의 상품화가 함축하는 인간과 자연의 분리, 그리고 인간의 인격적 독립성이라는 환상과 함께 진행되었다. 따라서 그것은 단순한 종족 번식으로서의 ‘성=생식’이라는 자연성을 넘어서며 신에 의해 억압되어 왔던 인간의 욕망과 감정, 성적 욕망을 포함하는 인간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는 인문주의적 운동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렇게 초과하는 ‘성-사랑’은 자본주의생산양식 내부로 온전하게 포섭될 수 없다. 왜냐 하면 노동력이 노동과의 분리를 통해서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상품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처럼 성-사랑도 자본주의생산양식의 가치 메커니즘 안으로 포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의 과학기술이 테크노피아적 미래라는 환상에 기초하여 대중을 포획해 왔듯이 근대가족제도도 이성애적 성인 남성노동자들과의 공모를 통해서 가부장제의 자본주의적 재편이 이루어진다. 이성애적 성인 남성노동자는 자본주의생산양식의 ‘생산적/비생산적 노동’이라는 가치의 틀을 수용함으로써 가족제도 내에서의 권력을 획득한다. 따라서 이 구조 하에서 자본과 임노동은 상호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수탈하는 전체메커니즘을 이끌어가는 파트너일 뿐이다. 여기서 자본/임노동의 상호 투쟁적 메커니즘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 이성애적 권력이라는 또 다른 권력메커니즘에 의해 보완되며 전치된 환상체계를 만든다.

남성은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그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그 책임에 대한 대가로 ‘가부장제적 권력’을 보존한다. 그는 힘들지만 그의 권력이 그의 책임에 대가로 주어진다. 하지만 그렇게 임노동자로서 노동자가 가부장제와의 공모를 통해서 자본주의생산양식 내부로 포획되면 될수록, 그리하여 임노동만을 생산적인 것으로 보는 자본주의의 생산적 노동 개념을 고수하면 할수록 그의 얄팍한 지배 욕망 때문에 그의 노동력 가치는 더욱더 떨어질 수밖에 없다. 바로 여기에 임노동자로서 남성노동자들, 자본에 포획된 노동운동의 딜레마가 있다. 즉, 이성애적 가부장제는 단순한 성모순의 문제가 아니라 역으로 자본주의생산양식 내부로의 노동을 포획하면서 발생하는 노동/노동력의 간극을 감추는 기제가 되며 노동자의 노동력 가치를 하락시킴으로써 임노동자의 노동을 착취하는 기제로 전화된다는 것이다.

임노동자는 그의 노동력을 팔아서 ‘사랑’이라는 의무와 책무 속에서 가족 전체를 재생산하고자 하지만 자본주의생산양식은 그의 ‘성-사랑’에 가치를 고려하지 않는다. 자본의 본성은 ‘가치증식’에 있기 때문에 오직 노동력의 가치(임금)를 노동자의 육체적 최소치-생존적 필요(need)로 줄이려고 한다. 반면 노동자들은 ‘사랑’이라는 환상 속에서 항상 그 반대편, 즉 전체 가족의 생계에 대한 책임과 그들의 삶에 대한 향유라는 욕망을 향해 움직인다. 따라서 그의 노동력 가치 하락은 가족 전체의 생명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재화의 부족, 생존의 위기로 비화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자본은 자본을 목적으로 하는 임노동자가 아닌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하는 임노동자와 대면”(Lebowitz, 1999: 109)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것이 근본적으로 향하는 방향은 ‘생산적 노동’이라는 자본의 가치양식으로부터의 이탈, 즉 ‘생식’ 밖의 ‘성-사랑’이다.


3. 생산의 사회화와 근대정치의 불가능성

 

3-1. 총체적 빈곤화와 노동가치론적 세계의 와해: 오늘날 현대자본주의는 두 개의 세계로 점점 더 분열되어 가고 있다. 한편에는 극단적인 충동과 향유, 풍요의 세계가 존재한다. 1980년대 신자유주의가 본격화한 이후 부자는 백만장자가 아니라 억만장자이며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0.5%가 1년 동안 쓴 돈은 6천 500억 달러로 이탈리아 전체 가구의 지출 규모에 맞먹는다(Frank, 2008: 175). 그러나 다른 한편에는 극단적인 결핍과 빈곤의 세계가 존재한다. 오늘날 세계는 전 세계 인구의 두 배인 120억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인구의 절반은 하루 2달러 이하로 살고 있으며 그 중 12억 인구는 하루 1달러 이하로 살고 있다. 따라서 ‘풍요 속의 결핍’은 자본주의가 세상을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그것은 극단적으로 생존권의 위기에 처해 있는 경제적으로 빈곤한 계층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오늘날의 빈곤은 단순히 경제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 빈곤은 문화적이고 환경적인 빈곤을 포함한 총체적인 빈곤이다. 따라서 그것은 단순히 경제적 자원 및 부에 대한 분배의 문제이거나 자본/임노동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는 자연/인간, 성-사랑/생식이라는 자본주의 내/외부의 변증법이 중첩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예를 들어 오늘날 환경-생태계의 파괴는 이중도시(duel city)와 같은 공간의 분절 속에서 ‘그린의 상품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제1세계와 부자들이 사는 공간에서 쾌적한 환경은 그 자체로 상품이다. 제1세계의 환경유해산업은 제3세계로 이전될 뿐만 아니라 ‘타워팰리스’나 ‘청담동’과 같은 그들만의 공간이 구획된다.

반면 제3세계의 특정 지역은 환경유해산업폐기물의 ‘쓰레기처리장’이 되며 생명공학은 이 이원화 속에서 GMO와 LMO를 생산하며 제3세계와 빈자들의 생존을 상품화하고 그들의 몸을 실험 대상으로 만들고 있다. 또한, 이런 빈곤화는 여성문제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최근 여성노동의 상품화는 제3세계와 빈자들의 총체적인 빈곤화를 가족에 떠넘기면서 경제력의 격차를 여성의 노동이나 성애 등을 상품화하고 있다. 제3세계 여성은 제1세계 중산층 자녀에게 돌봄노동을 하면서 정작 자신의 자녀들은 할머니에게 맡겨놓는다. 따라서 여성의 돌봄노동은 제1세계의 여성을 자본주의적 생산 메커니즘으로 포획하면서 빈부격차에 따른 제3세계 여성의 노동을 착취한다.

따라서 빈곤화는 ‘경제’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살아가는 ‘삶의 환경’(환경적 빈곤)과 자신의 몸과 상징 등 문화적 자산의 결핍(문화적 빈곤)이라는 차원에서 삼중적으로 중첩(경제-환경-문화적 빈곤)되면서 진행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부장제적인 수탈 메커니즘을 강화하면서 그것을 자본화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기존의 자본주의생산양식에서 ‘가치증식’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생산에 투자된 자본이 그 속에서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의 대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것이 자본의 ‘가치증식메커니즘’으로 통합되고 있다는 것은 현대자본주의가 ‘노동/임노동’의 가치계열화를 ‘생산’ 영역에서 ‘소비’ 영역으로 확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수탈메커니즘을 만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오늘날 생산적/비생산적이라는 ‘노동패러다임’을 부정하고 그것을 파괴하고 있는 것은 ‘자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은 그들의 소유권과 지배-통제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점점 확대되는 자기모순을 국가의 법-제도적 강제장치를 이용한 ‘경제외적 강제’로 대체하고 있다. 하비는 ‘노동의 재생산을 통한 축적’과 구분하여 ‘수탈에 의한 축적’을 구분하고 있다. 전자는 맑스의 자본주의생산양식의 특징으로 규정한 ‘경제적 강제’인 반면 후자는 ‘경제외적 강제’이다. 그렇다면 왜 오늘날 점점 더 자본주의생산양식 내부의 착취메커니즘인 ‘경제적 강제’가 아니라 ‘경제외적 강제’를 필요로 하는가? 그것은 바로 오늘날의 자본주의생산양식이 더 이상 임노동만으로 자신의 이윤증식메커니즘을 가동시키지 않으며 자연/인간, 가부장제적 약탈메커니즘을 내부화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현대자본주의는 EC혁명, BT혁명 등을 통해서 기존에는 가치증식 메커니즘으로 포획하지 않았던 영역들, 예를 들어 자연적 생명체들이나 정보-정서노동 등을 자신의 축적 메커니즘으로 급속히 빨아들이고 있다. LMO, RMO뿐만 아니라 전자네트워크를 통해서 구축된 삶 자체가 가치축적의 대상이다. 여기서 자본주의 축적 메커니즘으로 포획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협력, 사회적 협력 네트워크 그 자체이다. 따라서 오늘날 자본주의생산양식에서 노동이 수행하는 ‘가치 생산’의 역할은 더욱더 떨어지고 있으며 직접적인 생산적 노동은 점점 배제되고 있다. 노동의 배제, 그것은 맑스가 이미 예견했던 바이기도 하다. “직접적인 형태의 노동이 부의 위대한 원천이기를 중지하자마자 노동시간이 부의 척도이고 따라서 교환가치가 사용가치의 [척도]이기를 중지해야 한다. 대중의 잉여 노동이 일반적 부의 발전을 위한 조건이기를 중지했듯이, 소수의 비노동도 인간 두뇌의 일반적 힘들의 발전을 위한 조건이기를 중지했다.”(Marx, 2000b: 381)

3-2. 소결: 어디에서 출발할 것인가?

① 노동운동의 체제내화와 생산패러다임 벗어나기: 맑스 사후, 『자본』의 논리-역사적 추론은 그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부르주아 또는 프롤레타리아라는 주체의 개입은 자본의 운동양식에 대한 일정한 수정을 가져왔으며 1950년대 자본주의의 황금기와 더불어 서구의 노동자계급은 정치-당, 경제-노조의 양날개론에 근거한 지배체제 내부의 동맹을 형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 역사에서 노동자계급은 더 이상 맑스가 말하는 ‘계급해방의 주체로서 프롤레타리아’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지탱하는 핵심계급이 되었다. 그들은 정치적 측면에서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사회민주주의로 흡수되었으며 자신의 계급적 이해를 위해서 자본가계급과의 ‘사회적 타협’을 만들어왔다. 따라서 노/자의 적대적 분열, 노/자의 화해불가능한 적대성에 기초한 자본주의 내부 또는 중심에서 그 밖으로의 도약이라는 ‘혁명의 정치학’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 그렇다면 더 이상 자본주의체제 내부에서 새로운 사회에 대한 변혁을 모색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것일까? 애초 맑스주의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화해는 불가능한, 적대적인 모순이라는 전제 하에서 출발했다. 노동자계급은 자본의 극복 없이 자기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다. 그러나 1950년대 서구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자본을 극복하기보다는 자본가와의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서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는 길을 선택했다. 전국적으로 조직된 노동조합과 정치적으로 성장한 노동자당은 오히려 그들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고 그들의 상대적 지위를 확고히 하는데 몰두하였다. 여기서 배제된 것은 자본/임노동의 생산체제 내부로 들어가지 못한 자들, 주변부에 밀려난 자들이었다. 따라서 이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변혁의 주체가 자본주의 내부가 아니라 외부 또는 그 내부로 완전히 포획될 수 없는 지점, 주변, 경계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토니오 네그리 ?한겨례

② 사회경제적 구성의 변화: 노동의 신화 대 노동의 종말→산업사회 대 탈산업사회(엘빈 토플러, 다니엘 벨), 물질노동 대 비물질노동(네그리), 착취 대 약탈(하비)→근대적 패러다임/탈근대적 패러다임

: “20세기의 마지막 수십 년 동안에 산업노동은 자신의 헤게모니를 상실했으며, 그 대신 비물질적 노동 즉 지식, 정보, 소통, 관계 또는 정동적 반응 등과 같은 비물질적 생산물들을 창출하는 노동이 출현했다.” (≪다중≫, p. 145.)→“우리의 주장은 비물질노동이 질적인 면에서 헤게모니적이 되었고, … 오늘날 노동과 사회는 정보화될 수밖에 없으며, 지적으로 되고, 소통적으로 되며, 정동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다중≫, p. 146.)

⇒ 사적 소유의 불가능성→개인주의-자유주의적인 근대 부르주아사회의 한계, 부르주아 정치의 불가능성

cf. “삶정치적 생산이 한편으로는 (시간의 고정된 단위로 양화될 수 없기 때문에) 측정 불가능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이 결코 삶 전체를 포획할 수 없기 때문에) 자본이 그로부터 추출할 수 있는 가치를 언제나 초과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노동과 가치 사이의 관계에 대한 맑스의 견해를 수정해야 된다.”(≪다중≫, p. 187) → “사실은 우리가 소통과 사회적 네트워크들, 상호작용적 서비스들, 그리고 공통 언어들로 구성된 생산세계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 상품을 사용하고 상품의 점유에서 유래하는 모든 부를 처분할 수 있는 배타적 권리로 이해되는 사적 소유 개념 자체는 이 새로운 상황에서 점점 더 무의미해진다. 이러한 틀에서 배타적으로 소유하고 사용할 수 있는 상품들은 더욱 적어진다. 즉 공동체가 바로 생산하는 것이며, 생산하는 동안 바로 그 공동체는 재생산되고 재규정된다. 그러므로 고전적이고 근대적인 사적 소유개념의 근거는 탈근대적 생산양식 속에서 어느 정도 해체된다.”(≪제국≫, p. 395-96.)→“공통된 것의 강탈”: “오늘날 비물질적 생산의 패러다임에서 가치이론은 측정된 시간의 양이라는 관점에서는 이해될 수 없으며, 그래서 착취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가치의 생산을 공통된 것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또한 착취를 공통된 것의 강탈로 간주하려고 해야 한다. 달리 말해 공통된 것이 잉여가치의 장소가 된 것이다. … 예를 들어 정동적 노동에서 뽑아내는 이윤에 대해 생각해보라. 언어, 아이디어, 지식을 생산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공통적으로 생산된 것이 사적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민공동체에서 생산된 전통적인 지식이 혹은 과학공동체에서 협동적으로 생산된 지식이 사유재산이 된 경우가 그러하다. 어떤 점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전통적인 특징이 사라져가는 상황에서도 자본이 여전히 통제력을 행사하여 부를 뽑아내는 모호한 논리를 화폐가 그리고 경제의 금융화가 요약해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금융자본의 이윤들은 공통된 것의 강탈하는 가장 순수한 형태일 것이다.”(≪다중≫, p. 191.)

3-3.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의 단축과 향유의 삶: 현재 진행되는 자본-기술-권력의 일체성이 지닌 양가성(ambivalence)을 볼 필요가 있다. STR은 필요노동시간을 단축시킨다. 그것은 자본의 증식이 아닌 다른 사회화의 길이다. 필요노동시간의 단축은 노동시간의 단축 없이 극복될 수 없다. 그것은 자본의 증식 욕구에 대당적이다. 맑스는 기계에 의한 생산력의 발전이 사회의 필요노동시간을 최소한으로 단축시킴으로써 개인의 발전을 위한 예술적이고 과학적인 교양의 조건을 형성한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자본에 의해 전유될 때, 과잉인구와 과잉생산으로 전화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전자의 길과 후자의 길은 전혀 상이한 가치와 결과를 함축하는 두 가지의 길이며 선택지이다.(두 가지 길)

맑스는 “오감의 형성은 지금까지의 세계사 전체의 노동”(Marx, 1991: 162)이며 “산업의 역사와 산업의 이미 생성된 대상적 현존재는 인간 본질적 힘들의 펼쳐진 책이며 감각적으로 눈앞에 있는 인간 심리학”(Marx, 1991: 163)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자본주의는 이런 “모든 육체적 및 정신적 감각들 대신에 이러한 모든 감각들의 완전한 소외, 즉 가짐이라는 감각”(Marx, 1991: 160)으로 환원한다. 맑스의 국민경제학 비판의 초점은 여기에 있다.

“국민경제학, 이 부의 과학은 … 동시에 단념, 내핍, 절약의 과학이다. … 자기 체념, 생활의 체념, 모든 인간적 욕구의 체념이 국민경제학이 주로 가르치는 명제”(Marx, 1991: 173)이다. 따라서 그는 “풍부한 인간과 인간적 욕구”로 “국민경제학적인 부와 빈곤을 대체”하고자 했다. 그것은 “다른 인간들의 감각들과 정신”이 나 자신의 전유”가 되는, “인간적인 생활의 자기화 방식”으로서 대안적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Marx, 1991: 159). 생산력의 발전은 자연이라는 제약이 제공하는 “곤궁성과 대립성의 형태를 벗어나” “개성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물질적 토대로, “사회적 결합 및 사회적 교류뿐만 아니라 과학과 자연의 모든 힘”들을 발전시킴으로써 “향유 수단의 발전” 및 “자유시간의 증대”시키는 사회적 생산력을 만들어놓는다(Marx, 2000b: 381). 따라서 맑스는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생산적 노동’의 가치를 고수하거나 노동가치론을 고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극복하고자 했다.

현재의 총체적인 위기는 생산의 사회화에 있다. STR은 필요노동시간을 단축시키며 생산의 사회화한다. 그러나 자본은 생산의 사회화를 사적으로 전유하기 때문에 생산이 사회화될수록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며 필요노동시간의 단축을 자본의 증식 욕구로 바꾸고자 한다. 따라서 정보화-자동화는 인간 노동의 배제와 노동력 상품의 가치 저하를 생산한다. 반면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의 단축은 다른 사회적 기반을 창출한다. 그것은 자본의 증식이 아닌 다른 사회화의 길이다. 필요노동시간의 단축은 노동시간의 단축 없이 극복될 수 없다. 그것은 자본의 증식 욕구에 대당적이다. 따라서 필요노동시간의 단축은 문화사회로의 길을 위한 물질적 조건을 창출한다. 따라서 두 개의 길에서 전선을 나누는 선은 생산의 사회화에 있다.

5월 월례발표회가 열립니다[ⓔ시대와철학알림]

안녕하세요, 학술1부에서 5월 월례발표회를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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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월례발표회는 유현상 선생님의 박사학위논문 발표입니다.

발표 주제는 찰스 테일러의 ‘자기 결정의 자유’입니다.

지난 달 월례발표회는 주제의 신선함(?)과 서유석 선생님의 논평에 힘입어 많은 회원들께서 참여하셨습니다.

이번 발표 역시 4월 월례발표회와 같은 많은 참여와 열띤 토론을 기대하겠습니다.

발표 논문은 파일로 첨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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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찰스 테일러의 ‘자기 결정의 자유’>

발표 : 유현상(숭실대)

논평 : 김상현(성균관대)

일시 : 5월 24일 금요일 오후 6시 30분 한철연 제1세미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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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러의 ‘자기 결정의 자유(self-determining freedom)’는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테일러의 ‘자기 결정의 자유’의 적극적 자유로서의 성격을 규명하고, 그것이 소유권 보호 중심의 ‘소극적 자유’와 달리 진정한 의미의 정치적 자유에 닿아 있다. 테일러의 ‘자기 결정의 자유’는 그가 생각하는 도덕적 이상인 진정성의 기초 위에 성립하는 것이며, 그의 정치 철학적 입장인 ‘인정의 정치’를 통해 실현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 실천과 행위의 핵심 개념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청춘의 고전3> 음악회를 성황리에 마쳤습니다[ⓔ시대와철학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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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출연진이 무대에 올라 황병기의 [비단길]을 연주하고 있다. ⓒ프레시안(민정훈)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정독도서관, 알렙출판사가 공동 주최한 행사인 ‘철학자와 함께하는 작은 음악회’가 대중음악평론가 임진모 씨의 사회로 5월 11일 토요일 오후 4시부터 두 시간여 동안 진행됐다.?

이번 음악회는 교양강의 [교양 대한민국, 청춘의 고전3] 강좌의 강사진이 간단하게 철학이야기를 진행하고 이와 관련된 음악을 연주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강지은 건국대 외래교수와 이순웅 숭실대 외래교수, 김성우 올인고전학당 연구소장의 순서로 진행된 이날 음악회에는 100여명의 관객이 정독도서관의 잔디밭과 주변을 가득 채운 채 진행되었다.?

연주자로는 클래식 연주악단인 E&I 앙상블과 퓨전 국악트리오인 강은일해금플러스, 그리고 신진 레게밴드 레드로우가 참여했다

강지은 교수는 [니벨룽의 반지]로 잘 알려진 바그너의 음악과 철학자 니체의 사상을 짚어보는 강연을 맡았다. 강 교수는 바그너와 니체의 개인적 인연에서 시작하여 서로의 사상에 끼친 영향 등을 중심으로 설명하였다. 강 교수는 “획일화된 대중문화로 병들어가는 현대 사회를 향한 힐링의 메시지를 니체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고 하며 니체의 사상과 음악, 바그너, 비제 등을 읽고 사색하도록 청중에게 안내했다.?

E&I 앙상블은 바그너의 대표작인 [니벨룽의 반지] 1편에 해당하는 [라인의 황금] 서주를 실연해 보였으며 원래 니체가 작곡한 성악곡 ‘영원’을 편곡하여 연주했다. 이어 연주된 아바네라는 니체가 바그너를 부정하고 대신 비제를 극찬하며 인용했던 오페라 [카르멘]의 삽입곡이다.?

두 번째 강연은 이순웅 교수가 맡았다. 이 교수는 “우물 안에서 벗어나 박스를 박차고 철학과 음악의 퓨전 요리를 만들어보자”며 “재즈는 자유로움의 대명사고, 삶처럼 유동적이며, 삶처럼 즉흥적”이라고 설명했다. 강은일해금플러스의 연주는 이 교수의 이야기와 하나가 되었다. 이미 여러 장의 앨범을 발표한 국내의 대표적 젊은 해금 연주자인 강은일의 연주에 맞춰 콘트라베이스와 키보드가 재즈 연주자 커티스 풀러의 대표곡 [러브 유어 스펠 이즈 에브리웨어]를 색다르게 각색해 연주했으며 화려한 연주에 관객의 박수가 쏟아졌다.?

약간 뜨겁게 느껴질 정도의 햇살이 내림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잡은 관객들은 마지막까지 함께하였으며 그 자리는 대중음악과 철학의 만남이었다. 김성우 소장은 비틀스와 아바의 음악으로 지젝의 융합 철학을 설명했다. 당대의 다양한 흐름을 받아들여 향후 대중음악을 정의한 두 그룹의 존재 의의가 변방의 고유성과 세계적 보편성을 융합해 젊은 철학의 거두로 성장한 지젝의 그것과 닮았다는 설명이었다. 연주를 맡은 레드로우도 비틀스의 [컴 투게더]를 2인 레게 연주로 편곡해 큰 박수를 받았다.

?공연 마지막은 전 출연진이 무대에 올라와 비틀스의 [렛 잇 비]와 아바의 [댄싱 퀸], 그리고 황병기의 [비단길]을 연주하는 순으로 마무리했다.?

지난 1월부터 진행된 [교양 대한민국, 청춘의 고전3] 강좌는 매달 두 차례씩 12회 예정으로 정독도서관에서 진행되고 있다. 2011년부터 프레시안이 공동 주최한 [청춘의 고전] 강좌 시리즈는 영화와 미술, 음악 등 우리 일상의 예술을 통해 철학의 세계를 음미하자는 취지로 마련됐다. 다음달까지 둘째, 넷째 수요일 저녁 7시에 진행된다.?

이 강좌 내용은 각각 [청춘의 고전], [철학자가 사랑한 그림]이란 제목의 책으로 출간됐다. 이 중 [청춘의 고전]은 지난해 말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에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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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 및 자본의 ‘물신적’ 성격[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③

상품의 ‘사회적’ 의미-3강?

 

김우철(호서대 외래교수)

 

 

4. 가치의 화폐형태

 

단순한 가치형태에서 이제 (전개된 가치형태를 건너뛰어) 일반적 가치형태로 시선을 옮겨보자. 일반적 가치형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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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벌의 상의 =
10 kg의 차 =
1 쿼터의 밀 = 20kg의 쌀
2 온스의 금 =
x량의 상품 A =
등등의 상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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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 가치형태에서는 모든 상품의 가치가 상품 세계로부터 분리된 한 종류의 상품, 곧 쌀로 표현되어 있다. 각 상품의 가치는 이제 쌀(의 사용가치)과 동등한 것으로서 모든 다른 사용가치로부터도 구별되며, 이를 통해 그 상품과 상품들의 공통적인 것으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이 형태가 비로소 현실적으로 모든 상품들을 가치로서 서로 관계 맺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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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두 형태와 달리 일반적 가치형태에서는 모든 상품이 동일한 등가물로 자신들의 가치를 표현하기 때문에 일반적이고 통일적인 가치 표현을 획득하게 된다. 그리하여 모든 상품의 가치 대상성은 그것이 이들 물적 존재의 순전히 ‘사회적 현존재’인 까닭에 모든 상품의 전면적인 사회적 관계를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는 사실이, 따라서 모든 상품의 가치형태는 사회적으로 타당한 형태여야 한다는 사실이 명백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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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쌀의 자연형태는 상품 세계의 공통된 가치자체이며, 그래서 쌀은 다른 모든 상품과 직접적으로 교환될 수 있다. 물체형태로서의 쌀은 일체의 추상적 인간노동의 눈에 보이는 화신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곧 쌀을 생산하는 경작노동은 일간노동 일반의 ‘일반적’ 현상형태로 간주된다. 이리하여 상품에 대상화된 현실적 노동은 노동의 모든 구체적 형태 및 유용한 속성이 사상된 노동으로서 소극적으로만 표시되지 않고, 적극적으로 모든 현실적 노동을 그것들에 공통된 인간노동이라는 성격, 곧 인간노동력의 지출로 환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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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 등가형태는 가치 일반의 한 형태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어떠한 상품에도 귀속될 수 있다. 다른 한편 한 상품이 일반적 등가형태에 있는 것은 오직 그 상품이 다른 모든 상품에 의하여 등가물로서 배제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배제가 궁극적으로 한 특수한 상품에 한정되는 순간 비로소 상품 세계의 통일적 상대적 가치형태는 객관적인 고정성과 사회적인 타당성을 획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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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연형태에 등가형태가 사회적으로 결합되는 특수한 상품은 이제 화폐상품(money commodity) 곧 화폐가 된다. 이 일반적인 가치형태에서 쌀이라는 상품을 금이라는 상품으로 대체시키면 바로 가치의 화폐형태(네 번째 가치형태)에 도달하게 된다. 금은 보편적 등가물이다. 화폐형태는 직접적인 일반적 교환가능성의 형태 또는 보편적 등가형태가 이제 사회적 관습에 의하여 금이라는 상품의 특수한 자연형태와 궁극적으로 결합되었음을 보여준다. 상품 세계의 가치 표현에서 금이 보편적 등가의 지위를 독점하자 금은 곧 화폐상품이 되고, 일반적 가치형태는 화폐형태로 전화(轉化)된다. 이미 화폐상품의 기능을 담당하는 상품, 곧 금에 의한 한 상품의 단순한 상대적 가치표현이 가격형태이다. 따라서 쌀의 ‘가격형태’는 ‘쌀 20kg = 금 2 온스’ 또는 ‘20kg의 쌀 = 2 파운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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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s Kapital]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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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상품의 물신적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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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은 “형이상적인 좀스러움과 신학적 변덕으로 가득찬 매우 기묘한 물건”이다. 상품이 사용가치인 한에서는 아무 신비한 것이 없다. 그러나 예를 들어 탁자가 상품으로 나타나면 그것은 곧 “감성적인 동시에 초감성적인” 하나의 물품으로 전화한다. 상품의 이러한 신비적 성격은 그 사용가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거니와 가치 규정의 내용으로부터 나오는 것도 아니다. 즉 추상적 인간노동이 가치의 실체를 이룬다는 점, 그리고 가치의 크기가 노동 지출의 지속 시간 또는 그 양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 그리고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를 위하여 노동하는 한 노동이 사회적인 형태를 갖는다는 점 등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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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상품형태의 수수께끼 같은 성격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바로 이 ‘상품형태’ 자체로부터 나온다. 모든 인간노동의 동등성은 노동생산물의 가치에 의해 사물적으로 표현되며, 생산자들의 사회성을 실증해 주는 생산자들의 상호관계는 노동생산물들의 사회적 관계라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 따라서 상품형태의 비밀은 단순히 다음과 같은 점에 있다. 상품형태는 인간에 대하여 인간 자신의 노동이 갖는 사회적 성격들을 노동생산물 자체의 대상적 성격들로 보이게 만들거나 이 물적 존재들의 사회적인 자연속성으로 비쳐보이게끔 만들며, 따라서 총노동에 대한 생산자들의 사회적 관계도 생산자들 외부에 존재하는 갖가지 대상들의 사회적 관계로 비쳐보이게끔 한다. 이러한 교체를 통하여 노동생산물은 상품이 되고 사회적인 물적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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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 형태나 이 형태가 나타나는 바의 노동생산물들의 가치관계는 노동생산물의 물리적인 성질이나 그로부터 생겨나는 물적 관계와는 절대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은 인간 자신들의 일정한 사회적 관계일 뿐이며 여기에서 그 관계가 사람들의 눈에는 물체와 물체의 관계라는 환상적 형태를 취하게 된다. 마치 종교적 세계의 신비경에서 인간 두뇌의 산물들이 그 자신의 생명을 부여받아 독립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상품 세계에서는 인간의 손의 생산물이 그렇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는 일종의 물신숭배(Fetischismus)와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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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사용 대상이 상품으로 되는 것은 그것들이 서로 독립적으로 영위되는 사적 노동(private labor)의 생산물이기 때문이다. 이 사적 노동의 복합체는 사회적 총노동을 이룬다. 생산자들은 자신들의 노동생산물을 교환함으로써 비로소 사회적으로 접촉하게 되기 때문에 그들의 사적 노동이 지닌 사회적 성격도 이 사물들의 교환 속에서 비로소 나타나게 된다. 달리 말하면, 사적 노동은 교환을 통해 노동생산물과 그것에 의해 매개되는 생산자들의 관계를 통해 비로소 사회적 총노동의 한 부분임을 실증받는다. 그러므로 생산자들에게는 그들의 사적 노동의 사회적 관계가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관계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람과 사람의 물적 관계 또는 물적 존재와 물적 존재의 사회적 관계라는 ‘사물화된 형태’로 나타난다. 상품생산이라는 특수한 생산형태가 지니고 있는 핵심 원리는 서로 독립된 여러 사적 노동들의 특수한 사회적 성격이 그 노동이 지니는 인간노동으로서의 동등성에 있으며, 이렇게 ‘동등한 노동’에 의해 매개되는 ‘노동의 사회성’이 노동생산물의 ‘가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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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노동생산물이 같은 종류의 인간노동의 단순한 물적 외피로서 인정되기 때문에 그들의 노동생산물을 가치로 관계 맺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종류가 다른 자신들의 생산물들을 서로 교환할 때 그것들을 먼저 가치로 등치시킴으로써 그들의 서로 다른 노동들을 인간노동으로서 서로 등치시키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지만, 그것을 행한다. 가치의 이마에는 가치가 무엇인가가 써 있지 않다. 오히려 가치는 각 노동생산물을 하나의 사회적 상형문자로 전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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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내가 상의나 구두 따위가 추상적 인간노동의 일반적 사물화로서의 쌀과 관계한다고 말할 경우, 이 말의 괴상망칙한 성격이 곧바로 느껴진다. 그러나 상의나 구두 등의 생산자들이 이 상품들을 보편적 등가물로서의 쌀(또는 금이나 은)과 관계를 맺어줄 경우에는 사회적 총노동에 대한 그들의 사적 노동의 관계가 바로 그 괴상망칙한 형태로 그들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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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생활과정, 즉 물질적 생산과정의 모습은 그것이 자유롭게 사회화된 인간의 산물로서 인간의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통제 아래 놓여질 때 비로소 그 신비의 베일을 벗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사회의 물질적 기초, 곧 그 자체 또한 장구하고 고통에 찬 발전사의 한 산물인 일련의 물질적 존재조건이 필요하다. 이제 정치경제학은 불완전하게나마 차이와 가치크기를 분석하고 이 형태들 속에 숨겨져 있는 내용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왜 이 내용이 저 형태를 취하는가, 요컨대 왜 노동이 가치로 표시되고 그 지속시간에 의한 노동의 계측이 노동생산물의 가치크기로 표시되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 제기조차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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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화폐의 물신적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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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의 출현은 서로 다른 노동생산물들이 실제로 등치되고 따라서 상품들로 전화되는 교환과정의 필연적 산물이다. 교환의 역사적인 확대와 심화는 상품의 본성 속에 잠자고 있는 사용가치와 가치의 대립을 발전시킨다. 그리하여 상품과 화폐로의 상품의 이중화를 통하여 상품 가치의 자립적 형태가 얻어질 때까지 그 과정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노동생산물의 상품으로의 전화가 성취되는 것과 같은 정도로 상품의 화폐로의 전화가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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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확인했듯이 화폐형태란 다른 모든 상품의 관계가 반사되어 하나의 상품에 고착된 것이다. 어려운 것은 화폐가 상품임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무엇 때문에 상품이 화폐가 되는가를 파악하는 일이다. 우리는 이미 x량의 상품 A = y량의 상품 B라는 가장 단순한 가치 표현에서 다른 어떤 물품의 가치크기를 표시해 주는 물품이 마치 이러한 관계로부터 독립된 ‘사회적인’ 자연속성으로서 등가형태를 취한다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이 잘못된 외관의 고정화 과정을 추적했다. 보편적 등가형태가 어떤 특수한 상품의 현물형태에 달라붙게 되거나 화폐형태로 결정화되자마자 이 외관은 완성된다. 다른 상품들이 각자의 가치를 전면적으로 어느 한 상품으로 표시하기 때문에 그 상품이 비로소 화폐가 되는 것으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거꾸로 그 한 상품이 화폐이기 때문에 다른 상품들이 그 한 상품으로 각자의 가치를 일반적으로 표시하는 듯이 보인다. 그것을 매개하는 운동은 그 자신의 결과 속에서 소멸하여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상품들과 독립적으로 그것들 자체의 완성된 가치자태가 상품들 밖에 그리고 상품들과 나란히 존재하는 하나의 상품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금과 은이라는 화폐상품들은 대지의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이미 모든 인간노동의 직접적 화신인 것처럼 보인다. 이리하여 화폐의 마술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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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자본의 일반적 정식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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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유통은 자본(capital)의 출발점이다. 상품생산 및 상품유통, 즉 상업은 자본이 성립하기 위한 역사적 전제이다. 16세기 근대 세계무역과 세계시장의 형성으로부터 자본의 근대적 생활사가 시작되었다. 역사적으로 자본은 어느 곳에서나 처음에는 우선 화폐 형태로서 (즉 상인자본 및 고리대 자본이라는 화폐재산으로서) 토지소유에 대립하지만, 그러나 화폐를 자본의 최초의 현상형태로 인식하기 위해서 우리가 자본의 발생사를 일일이 살펴볼 필요는 없다. 동일한 역사가 날마다 우리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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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로서의 화폐와 자본으로서의 화폐는 우선 양자의 유통형태의 차이에 의해 구별될 뿐이다. 상품유통의 직접적 형태는 C-M-C로서, 상품의 화폐로의 전화 및 화폐의 상품으로의 재전화, 곧 구매를 위한 판매로 나타난다. 반면에 M-C-M이라는 화폐유통은 화폐의 상품으로의 전화 및 상품의 화폐로의 재전화, 곧 판매하기 위한 구매로 나타난다. 이 운동을 통해 후자의 유통을 담당하는 화폐는 자본으로 전화되며, 그 사명으로 볼 때 그것은 이미 자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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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 M-C-M은 (C-M-C의 유통과 달리) 최종 목적이 판매자로서 화폐를 취득하는 데 있다. 그가 처음에 화폐를 내놓기는 하지만 이는 다만 그것을 다시 손에 넣기 위함이다. C-M-C의 유통의 목적이 사용가치라면, M-C-M의 목적은 교환가치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이 M-C-M은 양극의 질적 차이에 의해 내용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양극의 양적인 차이에 의해 그 내용을 갖는다. 결과적으로 최초의 유통에 투입된 것보다 더 많은 화폐가 유통에서 끌려나온다. 예를 들어 100파운드의 화폐로 구매한 면화가 100+10파운드로 다시 판매된다. 그러므로 이 과정의 완전한 형태는 M-C-M’이고, 여기서 M’=M+ΔM이다. 즉 M’는 최초에 투하된 화폐액+어떤 증가분과 동등하다. 이 증가분 또는 최초의 가치 이상의 초과분이 잉여가치(surplus value)이다. 최초에 투하된 가치는 유통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보존할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자신의 가치크기를 변화시키고 잉여가치를 덧붙인다. 다시 말해 스스로를 가치증식시킨다. 그리하여 이 운동은 가치를 자본으로 전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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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M’에서 화폐는 가치의 일반적인 존재양식으로서, 상품은 그 특수한 존재양식으로서 기능한다. 이 운동 속에서 가치는 소멸하지 않고 끊임없이 한 쪽 형태로부터 다른 쪽 형태로 이행하여 ‘하나의 자동적인 주체’로 전화한다. 가치가 잉여가치를 부가시키는 운동은 가치 자신의 운동이며 가치의 증식이고 따라서 자기증식이다. 그 운동은 자기목적적이며 그래서 무제한적이다. 가치는 그것이 가치이기 때문에 가치를 낳는다는 신비한 성질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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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가치는 자기 스스로 운동하는 실체로서 나타난다. 이 실체에 대하여 상품이나 화폐는 어느 쪽이나 단순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제 가치는 갖가지 상품의 관계를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자기 자신에 대한 사적 관계에 들어간다. 그것은 본원적 가치로서의 자기를 잉여가치로서의 자기로부터 구별짓는다. 곧 아버지 신으로서의 자기를 아들 신으로서의 자기로부터 구별하는데, 아버지나 아들은 모두 같은 나이이고 게다가 둘은 한 몸인 것이다. M-C-M’, 이것이 자본의 일반적 정식이다.

<다시 쓰는 맑스주의 사상사> 단기 집중 강좌[ⓔ시대와철학알림]

[주말 특강] 5월 18일부터 4주간…마르크스에서 지젝까지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는 5월 18일(토)부터 4주간에 걸쳐 마르크스주의 사상사에 관한 단기 집중 강좌를 실시합니다. 이번 강좌는 <다시 쓰는 맑스주의 사상사>(오월의 봄) 출간을 계기로 이뤄지는 것으로, 이 책은 지난 해 3월부터 6월까지 절찬리에 진행된 마르크스주의 사상사 강좌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번 단기 집중 강좌는 <다시 쓰는 맑스주의 사상사>에 소개된 마르크스주의 사상가 16명 중 마르크스, 레닌, 로자, 그람시, 벤야민, 알튀세르, 네그리, 지젝 등 8명에 대해 이 책의 저자들이 직접 강의합니다. 저자들의 직접 강의인 만큼 보다 충실한 수업이 될 것입니다.

 

20여 년 전 소련의 붕괴와 함께 ‘죽은 개’ 취급을 받았던 마르크스 사상은 지난 2008년 세계금융위기의 도래와 함께 새롭게 주목받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해 ‘월가 점령 운동‘(Occupy Wall Street)이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자본주의 극복을 위한 대안으로서 점점더 그 위상을 높여가고 있습니다. 극심한 양극화와 부의 편중으로 대다수 민중들의 삶이 피폐해지고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도 대안으로서의 마르크스 사상은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수업은 하루에 2강씩 진행이 되며 5월 18일부터 6월 15일까지 매주 토요일 오후1시 30분부터 6시까지 진행됩니다.(6월 1일은 강의가 없습니다.) 총 4주 8회에 걸쳐 진행될 이번 강좌에서는 마르크스, 엥겔스에서부터 그람시, 알튀세, 네그리. 지젝까지 주요한 마르크스주의사상가들의 고민을 통해 오늘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성찰해 봅니다.



◆신청 안내

전체강의신청 : 개인 22만원/ 커플신청(2명이 함께 신청할시) 34만원
**전체강의 신청시 교재인 <다시 쓰는 맑스주의 사상사>를 현장에서 드립니다.

개별강의신청 : 1강에 3만원(1주에 2강 수업이 진행됩니다.)

무통장 입금 후 메일(admin@pressian.com)로 성함과 연락처를 보내주시면 됩니다.
[국민은행, 292501-01-121940 예금주:(주)프레시안]
문의: 02-722-8546(담당자 민정훈)

◆강의 시간

5월 18일부터 6월 15일까지 매주 토요일 1시 반-6시 까지(30분 휴식) 2강을 연속해서 4회 집중 강의(하루에 2강씩 진행됩니다, 6월 1일은 강의가 없습니다.)

◆강의 장소

지하철 2.6호선 합정역 3번 출구 프레시안 1층 강의실
(3번 출구로 나와 자이갤러리(메세나폴리스 모델하우스)에서 우회전, 300미터 정도 직진, 왼쪽에 BK빌딩. 양화로 10길 49)

◆강의 일정

5월 18일(토)강사 : 박영균 건국대 HK교수
1강 : 마르크스, 엥겔스 – 우리가 다시 마르크스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
2강 : 레닌 – 고독한 사유가 빚어내는 혁명의 정치학

5월 25일(토) – 강사 : 이순웅 숭실대 외래교수
3강 : 로자 – 로자는 역사를 어떻게 보았는가
4강 : 그람시 – 헤게모니와 주체 형성의 문제

6월 8일(토) – 강사 : 연효숙 연세대 외래교수
5강 : 벤야민 – 고통의 기억과 유물론적 구원유토피아
6강 : 알튀세르 – 과학적 맑스주의를 위하여

6월 15일(토) – 강사 : 김성우 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7강 : 네그리 – 낡은 봉합선을 뜯고 새 실을 잦는 철학자
8강 : 지젝진리의 정치로서 레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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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고전> 시즌3 강좌 기념 특별 야외음악회[ⓔ시대와철학알림]

?’철학자와 함께 하는 작은 음악회’ 5월 11일 정독도서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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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은 <교양 대한민국, 청춘의 고전3> 강좌를 기념하는 특별 야외음악회를 오는 5월 11일(토요일) 오후 4시 정독도서관(서울 종로구 화동) 야외마당에서 엽니다. 이번 공연은 대중음악평론가 임진모 씨의 사회로 클래식과 대중음악, 그리고 철학이 어우러지는 한바탕 인문학의 향연이 될 것입니다.?

이번 공연에는 한국의 독보적 해금연주자인 강은일 교수를 비롯해 여성 콰르텟 E&I, 그리고 신예 레게그룹 레드로우 등이 참여해 클래식, 국악, 팝 등 다양한 음악을 선보입니다. 또 공연 중간에는 강지은, 이순웅, 김성우 교수 등 그동안 청춘의 고전 강연을 맡았던 세 분의 철학자들이 음악과 철학과 인생에 관해 짧지만 깊이 있는 이야기도 들려드립니다.?

이번 야외음악회에는 누구나 참석 가능합니다. 프레시안 독자 여러분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비가 오는 등 공연 당일 날씨가 안 좋을 경우에는 정독도서관 실내 대형강의실에서 공연을 하게 됩니다. 이번 공연은 프레시안,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정독도서관, 도서출판 알렙 공동 주최입니다.?

<교양 대한민국, 청춘의 고전3>강좌는 지난 1월부터 매월 2차례씩 12회 예정으로 정독도서관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청춘의 고전> 강좌는 지난 2011년 영화, 미술 등 예술을 매개로 일반인들이 보다 쉽게 철학을 공부하자는 취지로 시작됐으며, <시즌 1>은 영화와 함께, 2012년의 <시즌 2>는 미술을 통해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이 강좌 내용은 각각 <청춘의 고전> <철학자가 사랑한 그림>이란 제목의 책으로 출간됐으며 이중 <청춘의 고전>은 지난해 말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에 선정됐습니다. 그리고 올해 <시즌 3>는 음악으로 철학을 공부하는 강좌입니다. 오는 6월까지 매월 둘째, 넷째 수요일 오후 7시에 정독도서관에서 무료로 진행됩니다.(청춘의 고전 강의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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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함께하는 작은 음악회

-청춘의 고전 시즌 3 강좌 기념 특별공연?

-참석안내 : 야외무대이며 선착순 500명 입장입니다.

-일시 2013년 5월 11일(토요일) 오후 4시부터 약 2시간

-장소 정독도서관 야외마당 (비가 올 경우 실내에서 진행됩니다)

-주최 프레시안, 한철연, 정독도서관, 알렙

-사회 임진모(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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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및 강연 주제

강지은 : 건국대학교 외래교수 – 오늘 왜 우리는 바그너를 듣고 니체를 읽는가

이순웅 : 숭실대학교 외래교수 – 재즈, 국악, 자유로운 경계 넘나들기

김성우 : 兀人고전학당연구소장 – 비틀즈,아바의 팝음악과 지젝의 팝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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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진 소개

임진모 : 한국의 대표적인 대중음악평론가. 다양한 방송활동 및 저서를 통해 한국 대중음악의 깊이 있는 재조명은 물론 다양한 이야기의 재미를 더하며 대중적 확산에 기여하고 있다. 저서로 <가수를 말하다>, <우리 대중음악의 큰 별들>, <팝 리얼리즘 팝 아티스트>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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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 앙상블 : Ebony & Ivory의 줄임말로 세상과의 조화로움을 중요시하는 연주자들이 모여 2012년 창단된 연주팀. 이번 공연에서는 콰르텟으로 참여하며 산뜻한 봄날 오후, 클래식 선율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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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일 : 한국 음악계에서 가장 개성적인 연주가로 꼽히는 강은일은 전통음악 위에서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의 접목을 끊임없이 시도하며 해금을 통한 크로스오버 음악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바비 맥퍼린, 팻 메시니, 요시다형제, NHK쳄버오케스트라, 등 국내외 유명 아티스트 및 오케스트라와의 협연하였고, 루치아노 파바로티, 퀸시 존스, 뉴욕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살타첼로, 영화감독 김기덕 등과의 작업을 통하여 해금의 대중화와 세계화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에 일조하고 있다.'동서의 화합과 세계의 조화' 라는 메시지를 음악을 통해 전달하고 있으며, 뛰어난 창작욕과 실험정신으로 국악, 클래식, 재즈, 프리뮤직 등 여러 장르의 음악과 인접예술과의 접목을 통해 해금이라는 악기의 연주 가능영역과 해금음악의 지평을 확대해 왔다. 현재 서울예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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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로우 : 빨간색(RED)과 노란색(YELLOW)의 합성어 레드로우. 자메이카의 레게음악과 록음악이 뼈대를 이루고 있는 팀으로 어쿠스틱 사운드를 기반으로 다양한 악기와 따뜻하고 토속적인 음악색깔을 선보이며 즐겁고 밝은 노래로 음악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레드로우를 통해 빨간색과 노란색의 순수하고 소박하며 행복한 풍경들을 관객 모두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최근 2집 앨범 <노란 오도바이>발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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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자와 협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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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 순서

1. Opening 연주 [E & I 앙상블] : Eine Kleine Nachtmusic K525- Minuett (W. A. Mozart) or Violinconcert E BWV 1042 Allegro Assai (J. S. Bach)?

2. [강지은 교수] : 오늘 왜 우리는 바그너를 듣고 니체를 읽는가?

3. [E & I 앙상블] : Das Rheingold-Vorspiel 1 (R. Wagner) +Unendlich (F. W. Nietzsche)의 변주곡 (Opera ‘Carmen’ 中 Habanera (G. Bizet))?

4. [이순웅 교수] : 재즈, 국악, 자유로운 경계 넘나들기?

5. [강은일해금플러스(해금:강은일, 건반:채지혜, 콘트라베이스:고검재] : Love Your Spell Is Everywhere (Curtis Fuller 曲) ,오래된 미래, 해이야?

6. [김성우 교수] : 비틀즈/아바의 팝음악과 지젝의 팝철학?

7. [REDLOW] : 잘 가라 나의 20대여 (REDLOW), Come Together (The Beatles)?

8. 전출연진 협연 [REDLOW + E & I Ensemble + 강은일] : Let It Be (The Beatles), Dancin’ Queen(ABBA), 비단길(황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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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본기사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9813042421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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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노동 또는 구체적 노동[자본론 강독]-⑤

유용노동 또는 구체적 노동[자본론 강독]-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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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참석 : 이재유, 김선이, 김성심, 나태영, 박종호, 신재길, 신준하, 윤지미, 최혜진

정리 : 신재길(2012교육강좌 수료, 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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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도 교육강좌 후속 세미나로 [자본]을 읽고 있습니다. 세미나 팀에서 매번 정리하여 웹진에 연재하기로 하였습니다.

제2절 상품에 투하되어 있는 노동의 이중성

“처음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라는 이중성을 가진 물건으로 나타났다. 그 위 노동도 또한 이중성을 가지고 나타났다.”(자본론1상, 52p, 김수행)

노동의 이중성이란 상품의 사용가치에 만드는 유용노동 또는 구체적 노동과 가치를 창조하는 노동일반 내지 추상노동의 이중성이다. 맑스는 이러한 노동의 이중성이 “경제학의 이해에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상동)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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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노동(구체적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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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다른 유용노동은 서로 다른 사용가치를 만들어 내며, 노동일반의 표현 형태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노동 – 즉 그것의 유용성이 그 생사물의 사용가치로 표현되는 노동, 또는 그것의 생산물을 사용가치로 만들어 스스로를 표현하는 노동 – 을 간단히 ‘유용노동’이라고 부른다.”(자본론1상 52p, 김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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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는 이런 유용노동의 예로 재봉노동과 직포노동을 든다. 재봉노동은 외투라는 사용가치를 만들어 내고 직포노동은 아마포라는 사용가치를 만든다.

“ 재봉과 직포는 질적으로 다른 노동형태다. 그렇지만 동일한 인간이 번갈아 가면서 재봉도 하고 직포도 하는 사회상태도 있다. 이 경우 두 가지 서로 다른 노동방식은 동일한 개인의 노동의 변종에 지나지 않으며, 서로 다른 개인들의 고정된 기능이 아니다.”(자본론1상 55p, 김수행)

이렇듯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노동은 모두 유용노동의 형태로 나타난다. 추상노동이 유용노동 밖에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사용가치가 없는 노동생산물이 가치도 갖지 못하는 것 처럼 노동이 유용노동이 되지 못하면 추상노동도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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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용노동은 어떤 사회제도 하에서나 인간생존의 필수적 조건이다.

“사용가치의 창조자로서의 노동, 유용노동으로서의 노동은 사회 형태와 무관한 인간생존의 조건이며,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 따라서 인간생활 자체를 매개하는] 영원한 자연적 필연성이다.”(자본론1상 53p, 김수행)

맑스는 재봉노동은 재봉사라는 직업이 분업체계의 일원으로 나타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다고 하면서 유용노동은 노동대상을 사람들의 일정한 욕망에 적응시키는 합목적적 활동으로서 어떤 사회에서나 필수적인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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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유용노동이 부(사용가치)의 유일한 원천은 아니다.

“저고리. 아마포 등등의 사용가치. 한 마디로 말해 상품체는 자연소재와 노동이라는 두 요소의 결합이다”(자본론1상, 54p, 김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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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은 물적 부의 아버지고, 토지는 그 어머니다.”(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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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기서 자연소재와 인간노동이 부(사용가치)의 형성에 동일한 정도로 역할을 한다고 보면 안 된다. 자연소재는 말 그대로 소재일 뿐으로 사용가치 즉 상품의 질료이다. 이러한 질료에 형상을 부여하여 상품을 만드는 것은 인간의 구체적 노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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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예로 의자를 생각해보자. 의자는 그 소재 측면에서 나무에서 철로 다시 프라스틱으로 변하지만 그 의자로서의 사용가치는 동일하다. 지금은 희소한 소재로서 절대적 중요성을 갖는 것도 인간의 과학지식의 발달에 따라 대체물질을 만들거나 발견함으로서 그 소재로서의 역할이 소멸하게 된다. 따라서 사용가치의 형성에서도 인간노동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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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유용노동은 사회적 분업을 반영한다.

“다양한 사용가치들[또는 상품체들]의 총체는 다양한 유용노동들[유. 속. 종. 변종으로 분류된다]의 총체, 즉 사회적 분업을 반영한다. 이 사회적 분업은 상품생산의 필요조건이다.”(자본론1상 53p, 김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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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분업이 발전함에 따라 유용노동의 종류도 증대하게 되며, 유용노동의 효율성은 노동생산성의 발전에 따라 증가한다. 과거에는 천을 짜거나 옷을 만드는 일이나 모두 한사람이 다 하였으나 사회적 분업이 이루어지면 천을 짜는 직포노동과 옷을 만드는 재봉노동이 분화된다. 이렇듯 분업이 발달하면 할 수 록 유용노동의 종류도 늘어나게 된다.

이런 분업이 한 공동체에서처럼 서로 상호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행해지면, 그 생산물들은 상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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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자본주의하에서는 유용노동은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한에서만 사회적으로 인정받는다.

가사노동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따라서 사회적 보상도 받지 못하는 무상노동에 가깝다. 즉 인간생활에 필수적 노동이지만 사회적으론 무용한 노동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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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자”와 “소유” 개념을 통한 근대성 비판 – 4월 월례발표회[ⓔ시대와철학알림]

안녕하세요, 학술1부에서 4월 월례발표회를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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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월례발표회는 맑스 슈티르너로 박사학위논문을 준비하는 박종성 선생님의 발표입니다.

이번 발표는 <독일이데올로기>에서 맑스가 비판했던 슈티르너의 철학을 깊이 살펴보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서유석 선생님께서 후배 발표의 논평을 흔쾌히 맡아주셨습니다.

많이 참석하셔서 즐거운 토론이 됐으면 합니다.

(발표문을 미리 읽고 싶으신 분들은 ympiao89@hanmail.net으로 22일 이후 연락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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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유일자”와 “소유” 개념을 통한 근대성 비판

발표 : 박종성(건국대)

논평 : 서유석(호원대)

사회 : 조배준(건국대)

일시 : 4월 26일 (금) 오후 6시 30분 한철연 제1세미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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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티르너는 “하나의 이념으로서의 상상적 자아(eingebildetes Ich)”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전략으로 유일자(Der Eizige) 개념과 소유(Eigentum)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유일자” 개념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탐구를 하고자 하였다. 그가 말하는 유일자 개념은 “특이성 <소유>”(ownness, self-ownership)과 연결되는데, 소유 개념을 통하여 근대성에 대한 유일자의 상황과 그로부터 유일자의 지향성을 그려내고 있다. 다시 말해 근대는 체제 앞에 개인들을 무기력하게 만들었고 민중의 욕구 역시 타율적으로 생산되고 있으며 자유를 실현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소유’ 개념으로부터 두 가지 다른 개념을 이끌어낸다. 즉 근대성에 대한 저항의 대안적 형태로 자아의 재구성과 자아와 타자와의 관계를 재구성하고자 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자아의 재구성을 위한 개념으로 “유일자”를 말하고 있으며, 타자와의 관계를 재구성하고자 “에고이스트의 연합”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아도르노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슈티르너는 “개념을 통해 개념을 넘어서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즉 슈티르너는 국가, 사회, 인류라는 “고정관념”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에 담긴 허구적, 억압적, 부정적인 측면을 비판하기 위해서 여전히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슈티르너의 유일자, 소유 개념이 의미를 갖는 이유는 이 개념을 통해 “개념들에 의해 억눌리고 경멸받고 배척당하는 것들”인 타자, 혹은 비동일자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슈티르너는 근대를 지배체제로 파악하고 있으며 이것을 부정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부정성에 대한 대립물로 제시하고 있는 비동일자(das Nichtidentische)가 바로 “소유자”, “유일자”개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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