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용노동 또는 구체적 노동[자본론 강독]-⑤

유용노동 또는 구체적 노동[자본론 강독]-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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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참석 : 이재유, 김선이, 김성심, 나태영, 박종호, 신재길, 신준하, 윤지미, 최혜진

정리 : 신재길(2012교육강좌 수료, 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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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도 교육강좌 후속 세미나로 [자본]을 읽고 있습니다. 세미나 팀에서 매번 정리하여 웹진에 연재하기로 하였습니다.

제2절 상품에 투하되어 있는 노동의 이중성

“처음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라는 이중성을 가진 물건으로 나타났다. 그 위 노동도 또한 이중성을 가지고 나타났다.”(자본론1상, 52p, 김수행)

노동의 이중성이란 상품의 사용가치에 만드는 유용노동 또는 구체적 노동과 가치를 창조하는 노동일반 내지 추상노동의 이중성이다. 맑스는 이러한 노동의 이중성이 “경제학의 이해에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상동)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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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노동(구체적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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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다른 유용노동은 서로 다른 사용가치를 만들어 내며, 노동일반의 표현 형태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노동 – 즉 그것의 유용성이 그 생사물의 사용가치로 표현되는 노동, 또는 그것의 생산물을 사용가치로 만들어 스스로를 표현하는 노동 – 을 간단히 ‘유용노동’이라고 부른다.”(자본론1상 52p, 김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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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는 이런 유용노동의 예로 재봉노동과 직포노동을 든다. 재봉노동은 외투라는 사용가치를 만들어 내고 직포노동은 아마포라는 사용가치를 만든다.

“ 재봉과 직포는 질적으로 다른 노동형태다. 그렇지만 동일한 인간이 번갈아 가면서 재봉도 하고 직포도 하는 사회상태도 있다. 이 경우 두 가지 서로 다른 노동방식은 동일한 개인의 노동의 변종에 지나지 않으며, 서로 다른 개인들의 고정된 기능이 아니다.”(자본론1상 55p, 김수행)

이렇듯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노동은 모두 유용노동의 형태로 나타난다. 추상노동이 유용노동 밖에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사용가치가 없는 노동생산물이 가치도 갖지 못하는 것 처럼 노동이 유용노동이 되지 못하면 추상노동도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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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용노동은 어떤 사회제도 하에서나 인간생존의 필수적 조건이다.

“사용가치의 창조자로서의 노동, 유용노동으로서의 노동은 사회 형태와 무관한 인간생존의 조건이며,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 따라서 인간생활 자체를 매개하는] 영원한 자연적 필연성이다.”(자본론1상 53p, 김수행)

맑스는 재봉노동은 재봉사라는 직업이 분업체계의 일원으로 나타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다고 하면서 유용노동은 노동대상을 사람들의 일정한 욕망에 적응시키는 합목적적 활동으로서 어떤 사회에서나 필수적인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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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유용노동이 부(사용가치)의 유일한 원천은 아니다.

“저고리. 아마포 등등의 사용가치. 한 마디로 말해 상품체는 자연소재와 노동이라는 두 요소의 결합이다”(자본론1상, 54p, 김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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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은 물적 부의 아버지고, 토지는 그 어머니다.”(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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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기서 자연소재와 인간노동이 부(사용가치)의 형성에 동일한 정도로 역할을 한다고 보면 안 된다. 자연소재는 말 그대로 소재일 뿐으로 사용가치 즉 상품의 질료이다. 이러한 질료에 형상을 부여하여 상품을 만드는 것은 인간의 구체적 노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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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예로 의자를 생각해보자. 의자는 그 소재 측면에서 나무에서 철로 다시 프라스틱으로 변하지만 그 의자로서의 사용가치는 동일하다. 지금은 희소한 소재로서 절대적 중요성을 갖는 것도 인간의 과학지식의 발달에 따라 대체물질을 만들거나 발견함으로서 그 소재로서의 역할이 소멸하게 된다. 따라서 사용가치의 형성에서도 인간노동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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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유용노동은 사회적 분업을 반영한다.

“다양한 사용가치들[또는 상품체들]의 총체는 다양한 유용노동들[유. 속. 종. 변종으로 분류된다]의 총체, 즉 사회적 분업을 반영한다. 이 사회적 분업은 상품생산의 필요조건이다.”(자본론1상 53p, 김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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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분업이 발전함에 따라 유용노동의 종류도 증대하게 되며, 유용노동의 효율성은 노동생산성의 발전에 따라 증가한다. 과거에는 천을 짜거나 옷을 만드는 일이나 모두 한사람이 다 하였으나 사회적 분업이 이루어지면 천을 짜는 직포노동과 옷을 만드는 재봉노동이 분화된다. 이렇듯 분업이 발달하면 할 수 록 유용노동의 종류도 늘어나게 된다.

이런 분업이 한 공동체에서처럼 서로 상호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행해지면, 그 생산물들은 상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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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자본주의하에서는 유용노동은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한에서만 사회적으로 인정받는다.

가사노동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따라서 사회적 보상도 받지 못하는 무상노동에 가깝다. 즉 인간생활에 필수적 노동이지만 사회적으론 무용한 노동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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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자”와 “소유” 개념을 통한 근대성 비판 – 4월 월례발표회[ⓔ시대와철학알림]

안녕하세요, 학술1부에서 4월 월례발표회를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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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월례발표회는 맑스 슈티르너로 박사학위논문을 준비하는 박종성 선생님의 발표입니다.

이번 발표는 <독일이데올로기>에서 맑스가 비판했던 슈티르너의 철학을 깊이 살펴보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서유석 선생님께서 후배 발표의 논평을 흔쾌히 맡아주셨습니다.

많이 참석하셔서 즐거운 토론이 됐으면 합니다.

(발표문을 미리 읽고 싶으신 분들은 ympiao89@hanmail.net으로 22일 이후 연락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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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유일자”와 “소유” 개념을 통한 근대성 비판

발표 : 박종성(건국대)

논평 : 서유석(호원대)

사회 : 조배준(건국대)

일시 : 4월 26일 (금) 오후 6시 30분 한철연 제1세미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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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티르너는 “하나의 이념으로서의 상상적 자아(eingebildetes Ich)”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전략으로 유일자(Der Eizige) 개념과 소유(Eigentum)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유일자” 개념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탐구를 하고자 하였다. 그가 말하는 유일자 개념은 “특이성 <소유>”(ownness, self-ownership)과 연결되는데, 소유 개념을 통하여 근대성에 대한 유일자의 상황과 그로부터 유일자의 지향성을 그려내고 있다. 다시 말해 근대는 체제 앞에 개인들을 무기력하게 만들었고 민중의 욕구 역시 타율적으로 생산되고 있으며 자유를 실현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소유’ 개념으로부터 두 가지 다른 개념을 이끌어낸다. 즉 근대성에 대한 저항의 대안적 형태로 자아의 재구성과 자아와 타자와의 관계를 재구성하고자 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자아의 재구성을 위한 개념으로 “유일자”를 말하고 있으며, 타자와의 관계를 재구성하고자 “에고이스트의 연합”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아도르노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슈티르너는 “개념을 통해 개념을 넘어서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즉 슈티르너는 국가, 사회, 인류라는 “고정관념”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에 담긴 허구적, 억압적, 부정적인 측면을 비판하기 위해서 여전히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슈티르너의 유일자, 소유 개념이 의미를 갖는 이유는 이 개념을 통해 “개념들에 의해 억눌리고 경멸받고 배척당하는 것들”인 타자, 혹은 비동일자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슈티르너는 근대를 지배체제로 파악하고 있으며 이것을 부정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부정성에 대한 대립물로 제시하고 있는 비동일자(das Nichtidentische)가 바로 “소유자”, “유일자”개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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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의 ‘사회적’ 의미[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②

상품의 ‘사회적’ 의미-2강?

 

김우철(호서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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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자본주의 사회’란 ‘자본(capital)’을 중심으로 모든 사회생활이 영위되는 사회형태를 일컫는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또는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이해하려면 ‘자본’이 무엇인지부터 정확히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자본’이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 매우 복잡한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자본 개념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을 분해하여 이해한 다음, 그 단순한 요소들의 체계적인 조립을 통해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자본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최초의 실마리 개념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자본의 기본적 의미는 누가 보더라도 ‘부(富)’의 개념과 연결되어 있다. 자본은 그 자체로 일정량의 부 또는 재산을 뜻할 뿐 아니라 더 많은 부를 창출하기 위한 유력한 수단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본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을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에 해당하는 ‘상품(commodity)’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상품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분배-유통-소비의 전 사회과정을 관통하는 기본 요소로서, 사회적 부를 구성하는 ‘세포’ 형태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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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품의 두 요인: 사용가치와 가치

 

상품은 인간의 다양한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유용한 물품(또는 용역)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유용성을 가리켜 상품의 사용가치(use value)라고 한다. 하지만 상품은 사용가치 말고도 또 하나의 성질을 갖고 있는데, 바로 다른 상품과 교환될 수 있는 성질, 곧 교환가치(exchange value)를 갖고 있다. 교환을 전제하지 않는 상품은 ‘생산물(또는 생산품)’일 수는 있어도 ‘상품’이라고 불릴 수 없다. 모든 상품은 사용가치와 아울러 교환가치라는 두 요인을 갖고 있어야 한다.

상품의 사용가치는 이해하기가 비교적 쉽다. 그것은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고 그래서 유용한 갖가지 감각적, 물질적 성질을 가리킨다. (쌀, 상의, 집 등의 사용가치) 그러나 상품의 교환가치는 눈에 보이거나 만질 수 있는 자연적 성질이 아니다. 교환가치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교환가치는 우선 어느 한 종류의 사용가치가 다른 종류의 사용가치와 교환되는 양적인 관계로 나타난다. 두 개의 상품, 예를 들어 쌀과 상의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쌀 20kg이 상의 1벌과 교환된다고 하면 ‘쌀 20kg = 상의 1벌’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데, 이 등식은 이들 상품의 교환가치가 같음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쌀 20kg = 상의 1벌’이라는 이 등식은 같은 크기의 공통된 무엇인가가 두 가지 다른 사물 안에 있음을 뜻한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사물들의 양적 비교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것들이 공통의 질(質)로 환원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과연 쌀 20kg과 상의 1벌 속에 들어있는 ‘질적으로 똑같은 것’이란 무엇일까?

쌀과 상의를 동일한 것으로 만드는 공통의 속성은 상품의 자연적 속성일 리는 없다. 다양한 상품들이 교환된다는 사실은 그 상품들의 사용가치, 곧 자연적 속성이 남김없이 제거(=抽象)되어 공통의 속성으로 환원되고 있음을 전제한다. 따라서 우리가 교환가치에만 주목하면 모든 상품들 사이에는 사용가치상의 어떤 차별이나 구별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모든 상품을 같게 만드는 공통된 성질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노동생산물’이라는 사실이다. 쌀과 상의는 둘 다 노동생산물이라는 점에서 아무 차이가 없고 똑같은 사물이다. 단, 여기서 노동이라고 할 때 이 노동은 경작노동이라든가 재봉노동과 같은 유용한 물품을 만들어내는 구체적 형태의 노동이 아니다.

구체적 유용 노동은 그 형태와 질이 서로 다르므로 상품들에 내재하는 문제의 그 공통의 속성을 설명해 줄 수 없다. 곧 구체적인 지출 형태와 무관하게 단순히 인간의 두뇌, 근육, 신경, 손의 지출이라는 의미의 ‘인간노동 일반’의 지출, 이것만이 모든 상품들의 공통의 속성을 설명해 줄 수 있다. 이와 같은 (구체노동을 추상한) ‘추상적 인간노동’이 대상화, 물질화되어 있는 것이 모든 상품에 내재하는 공통의 속성이다. 그리고 이 공통의 속성이 바로 가치(value)이다. ‘교환가치’는 한 상품에 내재하는 가치가 다른 상품들과의 교환관계를 통해 모습을 드러낸 ‘가치의 현상형태’를 말한다.
어떤 물적 존재는 가치가 아니면서도 사용가치일 수가 있다. 천연의 초원이나 야생의 수목과 같이 그 효용이 인간노동에 의해 매개되지 않은 경우도 있고, 자신이 사용하기 위해 특정한 물건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사용가치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사용가치 곧 ‘사회적’ 사용가치를 생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사회적 생산물은 반드시 교환이라는 절차를 통해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야 한다. 상품 가치는 이와 같이 상품과 상품을 만들어낸 노동의 ‘사회성’을 실증하는 징표라고 할 수 있다. 뒤집어 말하면, 가치가 없는 생산물 또는 교환에 실패한 생산물은 사회성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이고, 나아가 그 생산물을 생산한 노동 역시 사회적으로 쓸모없는 노동이라는 사실을 실증한다.

이제 분명해졌듯이, 어떤 상품이 가치를 가지는 것은 그 안에 추상적 인간노동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품의 가치 크기는 그 상품을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추상적 노동의 양에 의해서 결정된다. 물론 노동의 양은 노동 시간으로 측정된다. 따라서 상품의 가치크기는 결국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 단 이 경우 노동시간은 개별 생산자가 실제로 소비한 노동시간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이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이란 특정 시점에서 사회적으로 표준적인 노동조건과 노동숙련 및 노동강도의 사회적 평균도를 가지고 어느 한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을 말한다.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은 노동의 생산성이 변함에 따라 당연히 변동한다. 노동의 생산성 그 자체는 특히 노동자의 평균적인 숙련도, 과학과 그 응용의 발전단계, 생산수단의 이용범위 및 자연환경에 의해 좌우된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노동의 생산성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어떤 상품의 생산에 요구되는 노동시간은 그만큼 단축되고 그 가치도 그만큼 작아진다. 상품의 가치 크기는 그것에 포함되어 있는 노동의 양에 정비례하고 노동의 생산성에는 반비례하여 변동한다.

칼 마르크스(1818 ? 1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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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치형태의 발전

 

앞서 확인했듯이, 상품은 사용 대상인 동시에 가치의 담지자라는 이중적인 물건인 한에서 상품이다. 상품은 자연형태(natural form)와 가치형태(value form)라는 이중 형태를 갖는 한에서만 상품이다. 문제는 사용가치의 대상성과 달리 가치의 대상성(value-objectivity)이 그 자체로 파악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하나하나의 상품을 아무리 비틀고 세밀히 관찰해 보아도 우리는 그것을 가치물로서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상품의 가치가 순수하게 사회적 현실을 갖는다는 사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성의 획득은 상품들이 (추상적) 인간노동이라는 하나의 동일한 실체를 표현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이 가치라는 것이 상품과 상품의 사회적 관계로서만 나타난다는 사실 또한 자명해진다. 이제 우리가 확인해야 할 점은 화폐형태에 이르기까지 상품의 가치관계에 함축되어 있는 가치 표현의 발전과정을 추적하는 일이다. 이를 통해 화폐의 수수께끼도 마침내 풀리게 될 것이다.

먼저 다음과 같은 단순한 가치형태에 주목해 보자.

x량의 상품 A = y량의 상품 B
또는 x량의 상품 A는 y량의 상품 B의 가치가 있다

예) 쌀 20kg = 상의(上衣) 1벌
(쌀 20kg은 상의 1벌의 가치가 있다)

여기서 보듯이, 쌀이라는 한 단일 상품의 가치 표현은 상의라는 다른 상품과의 가치관계로 나타난다. 여기서 두 종류의 상품은 서로 다른 역할을 맡고 있는데, 쌀은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고, 상의는 그 표현의 재료가 된다. 전자는 능동적 역할을 하고 후자는 수동적 역할을 한다. 즉 쌀의 가치는 (상대를 통해 가치를 표현하는) 상대적 가치형태(relative value form)로 표시되고 있고, 상의는 (쌀의 가치를 직접 표현하는) 등가형태(equivalent form)로 존재한다. 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는 서로 속해 있고 서로 제약하는 불가분의 두 계기이지만, 동시에 동일한 가치 표현의 상호 배타적이고 대립적인 양극이다.

어떤 상품이든 그 가치는 오직 상대적으로만, 즉 다른 종류의 상품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 그러므로 쌀의 상대적 가치형태는 다른 어떤 상품이 그것에 대해 등가형태에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반면 등가형태로 등장하는 이 다른 상품은 동시적으로는 상대적 가치형태로 존재할 수 없다. 이 점에서 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는 극단적으로 서로를 배제한다.

가치형태의 양극인 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에 대해 좀더 살펴보자. 위의 예에서 가치가 표현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쌀이라는 상품이다. 쌀 20kg의 가치가 자신과 상의 1벌의 가치관계 속에서 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라는 양극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 가치 표현에서 쌀의 상대적 가치형태는 자신의 가치존재를 상의라는 다른 상품의 사용가치를 빌려 표현한다. 다시 말해, 쌀이라는 상품의 가치는 상의라는 상품의 자연형태를 빌어 그 자신의 사용가치와 구별되는 ‘자립적’ 존재형태를 획득하고 있다. 한 상품의 가치가 다른 상품의 사용가치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사용가치로서의 쌀은 상의와 물질적, 감각적으로 구별되지만, 가치로서의 쌀은 상의와 동등한 것이며 따라서 상의와 같은 것이다. 이리하여 쌀은 자신의 자연형태와 구별되는 가치형태를 획득하게 된다.

등가형태에서 보게 되는 첫번째 특성은 사용가치가 그 대립물인 가치의 표현형태로 된다는 점이다. 한 상품의 상대적 가치형태는 자신의 가치 존재를 그 물질적 속성과 완전히 구별되는 다른 상품과 등등한 것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이 표현 자체는 그것이 어떤 사회적 관계를 감추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등가형태의 경우에는 그와 반대이다. 등가형태는 어떤 상품, 곧 있는 그대로의 물적 존재가 가치를 표현하고 따라서 그 자연 형태의 모습 자체로 가치형태를 띤다는 사실에서 성립하므로, 마치 그 등가형태라는 속성을 본래부터 지닌 듯이 보인다. 이것이 바로 등가형태의 수수께끼이며, 이 등가형태가 완전히 발전되어 화폐의 형태로 전개될 때에 그 수수께끼는 비로소 모든 사람의 눈에 들어오게 된다. (참고: 구체적 노동이 그 대립물인 추상적 인간노동의 현상형태로 된다는 점 그리고 사적 노동이 그 대립물인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형태의 노동으로 나타난 점이 각각 등가형태의 두 번째, 세 번째 특징을 이룬다.)

상품 A의 가치는 상품 B가 자기 자신과 직접 교환될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표현된다. 상품 B에 대한 가치관계 속에 포함되어 있는 상품 A의 가치표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가치관계 속에서 상품 A의 자연형태는 사용가치의 모습으로서만 의미를 갖고, 상품 B의 자연형태는 가치형태나 가치 모습으로서만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리하여 한 상품 속에 갖추어져 있는 사용가치와 가치의 내적 대립이 하나의 외적 대립을 통해 표시된다. 즉 자신의 가치가 표현되어야 할 한 쪽의 상품은 직접적으로는 오직 사용가치로서만 인정되고, 그 가치가 표현되는 다른 쪽의 상품은 직접적으로는 오로지 교환가치로서만 의미를 갖는 두 상품의 관계를 통해 표시된다. 따라서 어느 한 상품의 단순한 가치형태는 그 상품에 포함되어 있는 사용가치와 가치 사이의 내적 대립이 겉으로 드러난 외적 대립의 형태다.

모든 노동생산물은 어떤 사회 상태에서나 사용 대상이다. 그러나 사용물의 생산에 지출된 노동을 그 물적 존재의 대상적 속성으로 표시하는 역사적으로 규정된 하나의 발전단계에서만 노동생산물은 상품으로 전화(轉化)된다. 그러므로 상품의 단순한 가치형태는 동시에 노동생산물의 단순한 상품형태이고, 그리하여 상품형태의 발전은 가치형태의 발전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이 가치형태의 발전은 화폐형태를 거쳐 자본형태에 도달할 때 최고 단계에 이르게 된다.

세계경제를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성찰하기[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①

세계경제를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성찰하기-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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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우(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 [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 강좌의 강의록을 연재합니다.

????| 운영기간 : 2013년 4월 4일(목) ~ 7월 18일(목) (총 15강)?????? 매주 목요일 19:30~21:30

?????| 장?? 소 : 광진정보도서관 도서관동 1층 이야기방
?????| 대?? 상 : 성인, 50명
?????| 주?? 최 : 광진정보도서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 건국대학교
?????| 주?? 관 : 문화체육관광부 도서관정보정책기획단
?????| 후?? 원 : 알렙출판사

 

 

“핵심의 자유노동과 주변의 강제노동 간의 조화는 자본주의의 본질이며, …… 노동이 모든 곳에서 자유로울 때, 사회주의가 될 것입니다.”

“영향을 준 인물들을 물으신다면 나는 다음과 같은 분들을 거론하고 싶습니다. 칼 맑스, 페르낭 브로델(아날 학파), 요셉 슘페터, 칼 폴라니, 일리야 프리고진(신과학 운동) 그리고 프란츠 파농.”

월러스틴은 세 영역에서 세계체제 분석에 관하여 글을 썼습니다. 근대 세계체제의 역사적 발달, 자본주의적 세계경제의 현대적인 위기. 지식의 구조가 그 세 영역입니다. 다음과 같은 책들이 이 각각의 세 영역에 대응합니다. <근대 세계체제 3부작>, <유토피스틱스, 21세기를 위한 역사적 선택들> 그리고 <사회과학으로부터의 탈피, 19세기 패러다임의 한계들>.

이매뉴얼 월러스틴 ?프레시안

·『세계체제 분석』(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_ 이광근 옮김_ 당대)


이 소책자는 20세기 마지막 사반세기부터 세계화와 이에 대한 반작용인 테러리즘이 지배하고 있는 시대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국가들의 외적인 관계인 국제적인 틀로 이해하지 않고 장기간과 대규모의 시각에서 세계 체제로서 이해하는 월러스틴의 연구를 전반적으로 이해하기 좋은 입문서이다. 세계체제 분석은 세계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을 정치학, 경제학, 사회 구조, 문화라는 상자들로 나누어 분석하는 것이 아니다. 이 상자들은 실재가 아니라 상상적인 산물에 불과하다. 이렇게 현상들을 전문화하여 분석하는 것은 철학과 단절하여 부상한 19세기 사회과학의 특징적인 한계이다. 사회 현실은 신과학 운동에서 말하는 복잡성의 시스템이다. 그래서 다학문적인 방식이 아니라 일학문적인(unidisciplinary) 접근이 필요하다. 이것이 역사적 사회과학으로서 세계체체 분석이다.

·『자유주의 이후』(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_ 강문구 옮김_ 당대)


1980년대 말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연이은 구소련의 해체는 자유주의의 궁극적인 승리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월러스틴은 이에 대해 현실을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이라 이야기한다. 오히려 이 사건들은 자유주의가 붕괴되고 ‘자유주의 이후’의 세계로 확실히 들어섰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자유주의는 그 자신의 논리 때문에 자승자박(自繩自縛)의 궁지에 몰렸다. 자유주의는 인권의 정당성과 민족의 권리를 주장하지만, 이 권리들의 완전한 실행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만약 인권과 민족의 권리가 모두에게 동등하다면, 항상 그래 왔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러할 이 불평등한 자본주의 세계 경제는 유지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이 공개되면 이익을 많이 얻지 못하거나 손해 보는 계급들에게 이 체제는 정당성을 갖지 못할 것이다. 체제의 정당성이 사라진다면 체제는 존속하지 못한다. 이러한 위기는 총체적인 것으로, 이를 극복하며 살아야 할 사람들이 만들 새로운 역사 체제는 아마도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둔 체제는 아닐 것이다.

1. 월러스틴에 따르면 긴 16세기(1450-1640년)에 자본주의적 세계 경제의 탄생 이후 세 번의 역사적 전환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1) 16세기 자본주의적 세계 경제의 탄생, 2) 1789년 프랑스 대혁명, 3) 1968년 세계 혁명(근대적 세계체제의 헤게모니, 즉 중도 자유주의의 몰락의 결정적 계기). 여기에 오늘날 우리에게 의미 있는 콩종크뒤르(국면)적인 역사적 전환점으로 1) 1989년 동구권의 현실 사회주의 몰락(실은 자유주의의 몰락의 반증), 2) 2008년 美國發 세계 금융 위기가 있습니다. 더불어 우리나라의 역사적 특수성을 고려하려면 1876년 강화도조약에 의거한 개항, 1945년 광복과 1950년 6?25전쟁, 1960년 4?19민주화운동과 1961년 5?16군사정변, 1987년 민주화운동, 1997년 IMF외환위기 등도 우리에게는 중요한 역사적 시점들입니다.

2. 초역사적인 불변의 구조와 법칙을 탐구하는 법칙정립적인 형식주의적 사회과학과 사건 중심의 에피소드를 기술하는 개성서술적인 실증주의적 역사의 이분법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구조와 역사의 변증법의 결과로 나타난 주기(cycle) 개념으로 19세기 사회과학의 기본 전제인 일직선적인 발전 또는 진보 개념을 비판하며, 구조를 역사로부터 파악하고 특히 근대 세계체제(자본주의적 세계경제)의 역사적인 생성과 팽창 그리고 위기와 소멸을 추적합니다. 그것이 역사적 사회과학으로서의 세계체제론입니다.

3. 역사와 관련된 네 가지 시간 개념이 있습니다. 부수적이고 진정한 현실을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되는 실증주의적 사건적인 또는 에피소드적인 역사와 신화에 불과한 영원불변의 구조 대신에 역사적으로 장기 지속하는 구조적 시간과 그 구조 안에서의 중기적 주기적 과정으로서의 시간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조적 시간으로는 자본주의적 세계경제로 대변되는 근대 세계체제의 탄생과 소멸의 기간이 대표적이고, 주기적 과정으로서의 시간에는 콘트라티에프 주기(50-60년 동안의 상승과 하강의 두 국면으로 이루어진 장기 파동 주기)가 대표적입니다.

4. 그는 자본주의에 대한 재규정(맑스로 다시 돌아가기)을 시도하여 임금노동 중심의 생산 일변도와 교환관계라는 유통 중심의 일면적 분석을 넘어서 제3세계 종속이론의 영향을 받아 핵심적인 생산과정과 주변적인 생산과정으로의 분업으로 세계체제를 분석함으로써 국민국가중심의 분석틀에서 벗어납니다. 상품이 독점적일수록 핵심에 속하고 경쟁적일수록 주변에 속하게 됩니다. 독점적일수록 자본가에게 돌아갈 잉여가치의 몫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본주의를 시장과 동일시하고 않고 독점과 동일시합니다. 자본주의는 반시장입니다. 이윤 창출에 장애가 되는 자유 경쟁 시장이란 ‘인민의 아편’에 불과하고 현실의 시장은 그런 모습을 띠지 않습니다.

5. 근대 세계체제의 구조적 위기는 기존 체제에서 지구적인 잉여가치를 공유하는 인구의 수가 팽창되어 자본가들이 더 이상 이윤을 창출하기 어려울 때 나타납니다. 신자유주의는 헤게모니를 잃어가고 있는 미국의 자본가들이 현실 사회주의 몰락과 정보기술혁명을 빌미로 경제발전의 속도가 빠르고 기존의 헤게모니에 도전적인 국민국가들의 보호주의를 타파하여 인건비와 관세를 낮추려는 보수주의자의 일시적인 몸부림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반동적인 세계화 전략으로는 이 구조적 위기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없기에 이제 근대 세계체제는 조만간 분기점에 도달할 것입니다. 다가오는 분기점에 대비하기 위해 모든 모순을 해결한 몰역사적인 유토피아 대신에 현실적인 역사적인 대안체제를 성찰함으로써 (물적인 불평등의 해소라는) 역사적으로 가능한 유토피아를 모색하는 유토피아학이 있어야 합니다.

 

김성우(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알렙

 

아프리카 연구에서 세계체제 분석으로

 

1930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M. Wallerstein)은 1951년에 컬럼비아 대학에서 아프리카 연구로 학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유명해진 것은 전공과는 무관한 ‘역사적 자본주의’라는 발상과 ‘근대 세계체제’라는 개념 덕분이었어요. 이 개념들은 1968년에 일어난 세계 혁명*에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그는 1958년부터 대학 강단에 섰고, 1968년 세계 혁명이 일어날 당시에는 컬럼비아 대학 사회학과에 재직하면서 아프리카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었어요. 그런데 식민지에서 막 독립한 아프리카 신생국들에 대한 연구인지라, 항상 신문 표제(신문이나 잡지 기사의 제목)를 뒤쫓아 다니는 기분이었다고 해요. 그래서 시사적인 성격이 강한 것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이를 더욱 깊이 있는 역사적 시야에서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그때 그에게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아프리카와 마찬가지로 서유럽의 국가들도 신생국 시절이 있었을 거예요. 그래서 신생국이던 시대의 서유럽 국가들을 연구해야겠다는 발상을 하게 된 거죠. 대략 16~17세기, 곧 근대적 국가 구조가 형성되던 시대 말이에요. 이런 생각으로부터 출발하여 역사적인 관점에서 근대 세계를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본주의의 역사적 역동성을 밝혀 낼 수 있었던 겁니다.

한편 그가 연구에 몰두한 때는 정치적 격동의 시기이기도 했어요. 게다가 1968년 일련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 서방 세계에서 대규모 사건이 최초로 터진 곳이 바로 컬럼비아 대학이었습니다. 파리의 학생 봉기보다 한 달 앞서 일어났지요. 학생들이 내세운 주된 쟁점은 두 가지였어요. 첫째는 베트남 전쟁 문제였는데, 대학이 국방부와 다른 정부 기관을 위한 베트남 전쟁 관련 연구를 수행하는 등 전쟁에 연루되어 있다는 거였어요. 둘째는 인종 차별과 관련된 내용으로, 컬럼비아 대학이 흑인 지역 사회가 사용하는 공원 땅을 사들여 체육관을 지었다는 점 등이 문제가 되었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교수들이 재빨리 모임을 만들어 중재 노력을 했지만 결국 실패했어요. 이때 월러스틴은 이 모임의 공동 의장이었습니다. 일주일 뒤 학교 당국은 경찰 개입을 요청했고, 경찰이 학생들을 대학 건물에서 내쫓으면서 그들의 더 큰 분노를 불러왔죠.

학생 운동 사태에 개입했다는 이유로 결국 월러스틴은 컬럼비아 대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은 예일대 석좌 교수이자 뉴욕 주립대 산하의 ‘경제, 역사 체제 및 문명들의 연구를 위한 페르낭 브로델 센터’(뉴욕 주립대 빙엄턴 캠퍼스에 위치)의 소장으로 재직하고 있죠.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 1902~1985)은 현대 역사학계에 큰 영향을 끼친 프랑스 아날학파(Annales School)**의 대표적인 역사가로, ‘프랑스 아날학파 세계 사회 학회(ISA)’의 회장을 역임한 인물입니다.

* ?1968년 세계 혁명- 1968년에 미국·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를 비롯해 전 세계 곳곳에서 학생을 중심으로 일어난 대규모 시위를 말한다. 이들은 권위주의를 비판하고 베트남전 같은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는데, 특히 프랑스에서는 드골 정부에 항의해 400여만 명이 파업에 돌입했다. 68 혁명의 영향으로 체제가 흔들린 드골 정부는 이듬해 실시된 국민 투표에서 패배했다.
** 아날학파- 1929년 뤼시앵 페브르와 마르크 블로크가 처음 만든 역사 잡지 〈경제 사회사 연보〉(Annales d’histoire ?conomique et sociale, ‘아날’은 연보라는 뜻임)를 중심으로 모인 역사학자 집단을 가리킨다. 이들은 근대 전통 역사학에 반기를 들고, 인간의 삶에 관한 모든 학문 분야를 통합해 생활사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하여, 1970년대 이후 세계 역사학계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사회 과학의 기존 틀에서 벗어나기

 

월러스틴이 1968년에 일어난 대규모 사태를 ‘세계 혁명’이라 부른 가장 큰 이유는 전 세계 여러 곳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이에요. 미국을 비롯해 서유럽과 아시아, 동유럽,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벌어졌죠. 형태는 제각각이었지만 그 바탕에는 되풀이되는 두 가지 공통된 내용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미국’과 공산주의를 대표하는 ‘구(舊)소련’이, 외견상으로는 대단한 적대자로 보였지만 실제로는 공모 관계라는 사실이었어요. 그리고 둘째는 반항하는 모든 사람의 주된 과녁이 자유주의적 보수(우파)가 아니라 ‘공산주의적 진보(좌파)’라는 점이었죠. 곧 1968년의 혁명 세력은 구(舊)진보 세력이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도리어 문제의 일부가 되었다고 보았어요. 구진보는 모두 실패했다고 선언한 거죠.

이러한 생각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공통 주제는 그의 표현대로 하면 ‘세계체제를 지배하고 있는 자유주의적 지구 문화(geoculture, 전 지구적으로 대부분 받아들여지는 이념이나 가치)에 대한 도전’입니다. 이러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로는 보편주의와 특수주의(인종주의, 성차별)를 들 수 있어요. 이는 과거의 인종 혐오주의나 가부장제와는 달리 자본주의 제체의 구조적 모순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자본주의적 축적을 뒷받침하는 요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유주의적 지구 문화에 대한 도전은 어느 나라에서든 옳은 사람들이 권력을 잡기만 하면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 그들이 체제를 의미심장할 정도로 개혁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 대한 도전이나 마찬가지였어요. 실제로 1945년에서 1968년 사이의 세계 지도를 보면, 아주 많은 나라에서 진보를 대표하는 공산당 아니면 사회 민주당, 민족 해방 운동 세력이 권력을 잡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1968년의 사태는 진보 세력이 권력을 잡아도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 거나 다름없었죠. 이로써 자유주의적 합의를 자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에 금이 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현실에서는 사라진 구(舊)자유주의가 다시 신(新)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출현합니다. 신자유주의의 대부(代父)로 불리는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1912~2006, 자유방임주의와 시장 제도를 통한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주장한 미국의 경제학자)은 1968년 이전만 해도 미국 학계의 우스갯거리였어요. 그런데 1970년대 들어 갑자기 사람들이 그를 진지하게 대하더니 1976년에는 노벨 경제학상까지 주었죠. 그 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사람들 대부분이 프리드먼과 관점을 같이하는 경제학자들이었어요.

결국 1980년대 말 공산주의가 몰락한 뒤에 부활한 자유주의적 보수 세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힘을 갖게 됩니다. 그렇지만 월러스틴은 역설적으로 이 때문에 진보 세력이 새로 대두할 공간도 열렸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제기한 ‘세계체제 분석(world-systems analysis)’ 작업이 호응을 얻게 된 것도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였죠.

월러스틴은 『세계체제 분석』에서 30년 동안 계속해 온 자신의 작업을 총괄적으로 요약하면서, 자신에게 제기된 비판들에 대해 간략하지만 종합적으로 반대 입장을 제기합니다. 여기서 그는 자유주의적 합의의 바탕을 이루는 일련의 지적 개념들이 기존의 사회 과학 전반을 지배하는 것이 큰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회 과학을 ‘탈사고(unthink)’ 해야 한다고 말하죠. 탈사고란 기존의 지배 관념들로부터 사회 과학을 해방시키자는 의미로, 진보적 사회 과학의 출발점을 만들어 보자는 것입니다.

이 ‘세계체제 분석’ 작업에서 월러스틴은 무엇보다도 분석의 단위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어요. 종전에는 하나하나의 민족 국가를 분석의 단위이자 별개의 실체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각각의 나라가 일종의 에스컬레이터에 올라 있다고 주장하는 서구 중심적인 발전 단계론에 알맞은 전제였죠. 낮은 계단에 있는 비유럽 국가들이 위에 있는 서유럽의 선진국을 학습하면서 위쪽으로 올라가게 된다는 거였어요. 이러한 생각은 근대화 또는 선진화 논리의 핵심이 됩니다.

이와 달리 월러스틴은 어떤 국가들이 아래 있는 건 다른 국가들이 다른 곳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아래로 밀려 내려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곧 위아래가 모두 하나의 체제를 이루는 일부일 뿐이므로, 국가 단위의 분석에서 벗어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월러스틴은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더욱 발전시켜, 자본주의 체제의 경제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연구했어요. 더 나아가 세계체제에는 경제 외에 그 나름의 정치적인 구조, 곧 국가 간 체제(interstate system)가 있고 주도권(hegemony)의 발흥과 쇠퇴가 있다는 주장을 내놓게 되죠. 이와 더불어 그는 이러한 체제에 저항하는 반체제 운동들도 연구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21세기의 역사적 선택

 

학문적 연구와 더불어, 월러스틴은 우리에게 정치적 실천에 나설 것을 강력히 요구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지죠. 이와 관련해 일리야 프리고진(Ilya Prigogine, 1917~2003, 러시아 태생의 벨기에 과학자로, 1977년에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음)의 ‘복잡성 연구(complexity studies)’ 분야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 연구를 자연 과학, 곧 물리학·화학·수학·생물학 등의 내부에서 진행되는 지식 운동이라 불렀어요. 그리고 이 아이디어들을 자신의 작업에 어떻게 하면 활용할 수 있을지를 연구했습니다.

프리고진에 따르면, 한 체제 또는 체계가 균형 상태로부터 멀리 움직여 갔을 경우 체계는 더 이상 제대로 작동하지 못합니다. 아니, 못한다기보다 진동이 너무 커져서 분기(分岐, bifurcation)가 일어납니다. ‘분기’란 과학자들의 전문 용어인데, 갈라지면서 이쪽으로 갈 수도 저쪽으로 갈 수도 있어서 어느 쪽으로 갈지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신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미리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이쪽이나 저쪽으로 약간의 힘이 더해지기만 해도 아주 그리로 가게 되는 거죠.

월러스틴은 현재 세계체제가 위기와 혼란의 상황을 맞았다고 진단하고 있어요. 이와 관련해 우리는 이미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고 있는 여러 사건들을 목격했습니다. 2001년 9월 11일 쌍둥이 빌딩에 대한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 1957~ )의 영화 같은 공습은 물론,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투기 세력 등 곳곳에서 높은 수준의 폭력이 자행되고 있죠. 따라서 우리는 이런 체제의 위기 속에서 분기의 두 방향 가운데 어느 곳으로 진행할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과연 무엇이 문제이며, 인간이 할 수 있는 선택은 어떤 것인가.’ 이것이 바로 월러스틴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인 동시에, ‘21세기의 역사적 선택들’이 뜻하는 바입니다.

 

가치의 크기,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자본론 강독]-④

가치의 크기,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자본론 강독]-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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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참석 : 이재유, 김선이, 김성심, 나태영, 박종호, 신재길, 신준하, 윤지미, 최혜진

정리 : 신재길(2012교육강좌 수료, 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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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도 교육강좌 후속 세미나로 [자본]을 읽고 있습니다. 세미나 팀에서 매번 정리하여 웹진에 연재하기로 하였습니다.

맑스는 인간노동으로서의 가치실체와 인간노동의 응결체로서의 가치를 설명하고 이제 가치의 크기로 이야기를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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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가치의 크기는 노동시간에 의해 측정된다.

“사용가치 또는 유용한 물건이 가치를 가지는 것은 다만 거기에 추상적인 인간노동이 체현되어 있거나 대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가치의 크기는 어떻게 측정하는가? 그 물건에 들어 있는 가치를 형성하는 실체인 노동의 양에 의해 측정한다. 노동의 양은 노동의 계속시간으로 측정하고, 노동시간은 시간. 일 . 주 등을 기준으로 측정한다.” (자본론1상 48p 김수행 역)

▲ 마르크스와 [자본]

그런데 이렇게 가치의 크기를 생산에 지출된 노동시간에 의해 측정한다면 한 가지 불합리한 요소가 발생한다. 즉 나태하거나 미숙련한 노동으로 생산에 시간이 많이 지출되면 될수록 가치가 크게 된다는 점이다. 이는 노동시간을 개인들의 사적노동시간을 기준으로 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이다. 그러나 맑스가 말한 가치크기의 기준으로서의 노동시간은 개인적인 사적노동시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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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가치크기의 기준은 사적노동시간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이다.

개인적인 노동은 무수한 질적 양적 차이로 인해 동일한 크기 즉 동일한 시간으로 측정할 수 없다. 따라서 가치의 실체인 인간노동의 크기를 측정하기 위해서는 인간노동이 동질적 노동일 것을 요구한다.

“가치의 실체를 이루는 노동은 동등한 인간노동이며, 동일한 인간노동력의 지출이다. 상품세계의 가치로 자기를 표현하는 사회의 총노동력은, 비록 무수한 개인 단위의 노동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여기에서는 거대한 하나의 동질의 인간노동력으로 간주된다.”(자본론1상 48p 김수행)

이러한 개인적 차이를 무시한 동질적 노동력의 지출을 시간으로 나타낸 것이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며 이를 기준으로 가치의 크기를 측정한다.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란 주어진 사회의 정상적인 생산조건과 그 사회에서 지배적인 평균적 노동숙련도와 노동강도 하에서 어떤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데 걸리는 노동시간이다.”(자본론1상48p 김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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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은 개별적 상품생산자들의 생산조건에서의 차이로 하여 서로 다른 무수한 개인적 노동시간 지출의 사회적 평균으로 나타난다.

즉 개별적 생산자 각자가 1미터의 아마포를 생산하는데 드는 개인적 노동의 양이 아무리 다르다 하더라도, 시장에서는 1미터의 아마포는 하나의 가치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 가치가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에 기초한 가치이다. 따라서 상품의 교환가치는 그것의 사회적 가치에 의해서 결정되고, 사회적 가치는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에 의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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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같은 외투를 생산하는 세 그룹의 생산자들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기술적으로 가장 우수한 A그룹은 외투 한 벌 만드는데 16시간이 든다고 가정하고 B그룹은 18시간을 C그룹은 20시간을 소비한다고 하자. 그리고 A그룹은 100벌, B그룹은 1000벌 C그룹은 100벌의 외투를 생산해 시장에 내놓는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 대부분의 외투를 생산하는 B그룹의 18시간이라는 개별적 노동시간이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이 된다. 따라서 16시간의 개별적 노동시간도 18시간으로 20시간의 개별적 노동시간도 18시간으로 그 가치의 크기가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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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은 노동생산성에 따라 변한다.

“노동시간은 노동생산성이 변할 때마다 변한다. 노동생산성은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 결정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노동자들이 평균적 숙련도, 과학과 그 기술적 응용의 발전 정도, 생산과정의 사회적 조직, 생산수단의 규모와 능률, 그리고 자연적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자본론1상 50p 김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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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든 예에서 A그룹의 우수한 기술이 보편화되어 이제 A그룹이 1000벌을 생산하여 시장에 공급하게 되면 사회적 필요노동시간도 18시간에서 16시간으로 변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노동생산성이 높으면 높을수록 한 물품의 생산에 걸리는 노동시간은 그만큼 작아지며, 그 물품에 응고되는 노동양도 그만큼 적어지고, 따라서 그 물품의 가치도 그만큼 작아진다. 반대로 노동생산성이 낮으면 낮을수록 물품의 생산에 걸리는 노동시간은 그만큼 커지며, 그 물품의 가치도 그만큼 커진다. 이와 같이,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에 체현되어 있는 노동량에 정비례하고 노동생산성에 반비례한다.”(자본론1상50p 김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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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선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상품의 생산량과 상품의 가치는 무관하다는 점이다. 상품의 생산량이 증가하면 그만큼 비례하여 사용가치는 증가하지만 가치는 증가할 수 도 있고 감소할 수 도 있다. 일반적으로 노동생산성이 증가함에 따라 사용가치는 증가하고 가치는 감소한다. 즉 어느 한 상품을 생산하는데 노동시간의 투입은 줄어들고 사용가치의 생산 즉 상품의 생산은 양적 질적으로 증가하는 경향을 갖는다. 우리는 이러한 실례를 아이패드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아이패드1에서 아이패드4까지 출시되는 동안 그 성능은 계속 좋아졌지만 즉 사용가치는 증가하였지만 그 가격은 동일하게 출시되었다. 이는 가치는 같으나 사용가치는 증가한 샘이다. 또 대량생산체계를 갖추면 보통 가격이 저렴해 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도 같은 이치이다. 즉 상품의 가치는 상품에 체현되어 있는 노동량에 정비례하고 노동생산성에 반비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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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가치의 크기는 생산조건이라기 보다 재생산조건에 의해 결정된다.

이제 개별적 생산자의 다른 생산조건의 차이가 아니라 같은 생산자의 시간에 따른 다른 생산조건의 차이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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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생산자가 외투 한 벌 생산하는데 어제는 18시간을 지출하였는데 오늘은 생산조건의 변화에 따라 16시간만 지출해도 된다면 어제 생산된 외투의 가치는 어떻게 될까? 우리는 쉽게 16시간이 기준이 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어떤 상품생산의 사회적 필요시간은 그 상품이 생산된 때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재생산을 기준으로 한다. 상품이 시장에서 거래되는 시점은 현재이다. 따라서 시장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가치는 과거의 가치가 아니라 현재의 재생산 가치로 평가된다. 같은 상품이라면 과거의 생산에 투입된 노동시간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이 기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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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현재 시점에서 재생산이 불가능한 유일한 생산물은 가치를 가늠할 수 없다. 그런 생산물로는 위대한 예술가들의 작품이 대표적일 수 있을 것이다. 베토벤의 음악이나 피카소의 그림 등은 유일무이한 것이기에 가치를 가늠할 수 없다. 이런 음악이나 그림을 복제한다면 복제품은 복제에 들어가는 노동시간만큼의 가치를 가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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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상품의 이중성

이제 맑스는 가치와 사용가치의 관계를 간략히 정리하면서 제1장 상품 제1절 상품의 두 요소; 사용가치와 가치(가치의 실체, 가치의 크기)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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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어떤 물건은 가치가 아니면서도 사용가치일 수 있다.”(자본론1상, 51p, 김수행)

이런 경우는 “그 물건의 유용성이 노동에 의해서 중개되지 않는 경우”(상동)라고 설명하고 그 예로 “공기, 처녀지, 자연의 초원이나 야생의 수목 등”(상동)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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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어떤 물건은 상품이 아니면서 유용하고 또 인간노동의 생산물일 수 있다.”(상동)

이런 예로 “자기 노동의 생산물로써 자기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상동)경우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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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어떤 물건도 그것이 사용대상이 아니고서는 가치일 수 없다. 만약 그것이 소용없는 것이라면 거기에 들어있는 노동은 노동으로서 계산되지 않으며, 따라서 가치도 형성하지 못한다.”(상동)

이제 제2절에서 상품의 이중성의 근거이자 기반으로서의 노동의 이중성으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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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철연과 함께하는 철학 세미나 2기[ⓔ시대와철학알림]

한철연과 함께하는 철학 세미나 2

현대 정치철학과 영화철학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이하 한철연)는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 진보적 철학자들이 자유롭게 공존하는 모임입니다. 철학을 기반으로 연구자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을 위한 철학 세미나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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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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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 원전 강독 연습

강사: 서유석 (호원대 교수)

강독 교재: Axel Honneth, “Umverteilung als Anerkennung(인정으로서의 재분배)” (2003)

기간: 420~ 817(16) 토요일 오전 10- 오후1

*독어 철학텍스트 강독(독일어 초보자도 환영, 문법 강의 함께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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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철학(영화철학)

들뢰즈 <시네마2>읽기

강사: 이병창(동아대 명예교수)

기간: 417~ 109(24) 수요일오후 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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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철학(정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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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페미니즘 정치학

1강 버틀러 <젠더 트러블>읽기 (1): 섹스, 젠더, 욕망, 권력

2강 버틀러 <젠더 트러블>읽기 (2): 수행성의 정치학

(강사: 연효숙, 연세대 외래교수, 여성과 철학 분과 회원)

3강 깁슨그래함 <자본주의의 종말>서문

4강 깁슨그래함 <자본주의의 종말>4

(강사: 이현재, 서울시립대 HK 교수, 여성과 철학분과 회원)

기간: 419~ 517(4) 요일 오후 7-10

지젝의 철학적 구도: 하이데거 비판과 헤겔의 계승

1-2왜 지젝은 하이데거를 비판하는가?

Slavoj ?i?ek. “Why Heidegger Made the Right Step in 1933”, International Journal of Zizek Studies. Vol. 1, No. 4., 2007.

(강사: 서영화, 한신대 외래교수, 변증법과 해체론 분과 회원)

3오늘날 헤겔주의자가 되는 게 가능한가?

Slavoj ?i?ek, Less than Nothing, 24Is It Still Possible to Be a Hegelian Today?

4132Hegel versus Heidegger

4강 헤겔 변증법이 정신분석학을 만났을 때

Slavoj ?i?ek, Less than Nothing,38Lacan as a Reader of Hegel

(강사: 김성우, 兀人 고전학당 연구소장, 변증법과 해체론 분과 회원)

기간: 531~ 621(4) 요일 오후 7-10

아렌트의 정치철학

1~4강 한나 아렌트 <칸트 정치철학 강의>읽기

(강사: 이정은, 연세대 외래교수, 헤겔분과 회원)

기간: 628~ 726(4) 요일 오후 7-10

맑스주의 이데올로기론

맑스주의 이데올로기론

1~2강 맑스·엥겔스의 [독일 이데올로기], 맑스의 [자본론] ‘상품’장 읽기

3강 알튀세르의 [레닌과 철학]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 읽기

4강 지젝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읽기

(강사: 박영균, 건국대HK 교수, 맑스분과 회원)

기간: 8월 2일 ~ 8월 30일 (4주) 금요일 오후 7-10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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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6일, 5월 24일, 그리고 8월 23일은 금요일 월례발표회, 7월 둘째 주 금요일은 한철연 전체 모꼬지 행사 관계로 휴강

* 현대철학 Ⅱ 16강 수강신청 시 전체 수강 필수

대 상: 대학원 재학생 및 수료생, 학부 3-4학년

(철학을 토대로 연구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

*들뢰즈 <시네마2>강독의 경우, 철학·영화·예술학 전공 대학원생

*독일어 강독의 경우, 철학과 대학원생

수업 방식: 세미나(필요한 경우 강의 방식 병행)

신청 방식: 메일 (yhseo2001@naver.com)로 자기소개서를 보내주세요.

(자기소개서 다운로드: 한철연 홈페이지(hanphil.or.kr) 공지사항)

수 강 료 : 없음 (과목당 최대 수강 인원 10, 최소 수강인원 3, 3명 미만 시 폐강)

문 의: 02-332-4301, yhseo2001@naver.com

시 간:20124월 중순-8월 중순(10월 초순),

토요일 오전 10오후 5, ·금요일 저녁 7-10

장 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세미나 1, 2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6)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6)

글: 이정호 (방송통신대학교 교수)
주제 2 : 아테네 민주정과 그 형성

 

5. 아테네 민주정 약사(略史) – 최초의 민주주의 그 의의와 한계(2)

 

 

두 차례에 걸친 그리스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자 격노한 다레이오스 1세는 다시 원정을 준비했으나 끝내 숨을 거두고 이후 기원전 480년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가 아버지의 뜻을 이어 30만의 병력과 1000척에 가까운 군함을 이끌고 다시 그리스를 쳐들어 왔다. 이것이 3차 페르시아 전쟁이다. 그리스 북방의 마케도니아로부터 남하해 온 페르시아군을 맞아 그리스 연합군은 테르모필라이(Thermopylai)에서 첫 방위전을 펼쳤다. 그러나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연합군 7000명 모두가 마지막 한명까지 목숨을 바쳐 용감하게 싸웠음에도 페르시아 대군의 위세를 꺾을 수는 없었다. 테르모필라이의 방위전을 돌파한 페르시아군은 이후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마침내 아테네까지 함락되면서 아테네는 물론 그리스 전체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지고 만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한 아테네를 구한 사람이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kl?s)이다. 페르시아군은 남쪽 해안 루트를 통해 해군력을 총동원해 아테네를 굴복시키기 위한 마지막 총공세를 펼쳤는데 데미스토클레스가 지휘한 아테네 해군이 페르시아의 대함대를 살라미스만으로 유인해 페르시아 해군력이 거의 재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대파해버린 것이다. 이것이 기원전 480년에 있었던 유명한 살라미스(Salamis) 해전이다. 그런데 살라미스에서 아테네 해군의 대승은 단지 아테네 해군의 전술능력과 용맹성으로만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치밀한 사전 준비와 행운이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의 1차 침공이후 해군력의 증강이 요구되었을 때 다행스럽게도 라우리온(Laurion) 광산에서 엄청난 양의 은광이 발견되었고 그곳에서 얻어진 재화 모두를 군함건조에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쉽지 않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아테네에서는 고대 이래 나라건 개인이건 큰 부가 생길 경우 최대한 시민들에게 분배하는 게 오래된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부유한 자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과도하게 요구되어 사회 문제가 된 공적 기부제(leitourgia) 또한 원래는 그러한 전통적 관습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습적 분배 대신 군함 건조에 자금을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테미스토클레스의 탁월한 설득과 그에 대한 시민들의 지혜로운 동의가 함께 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테미스토클레스는 군함의 건조를 계획하면서 특별히 해상에서 기동력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아테네 해군 고유의 삼단노 군선(tri?r?s)의 기능을 더욱 강화시켰다. 당시 해전에서는 상대 함정을 수직으로 부딪쳐 파괴하는 것이 최상의 전술이었는데 이를 위해서는 크기가 크면서도 기동력이 빠른 배가 필요했다. 적은 수의 군함으로 많은 적함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도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새로 건조되는 삼단노 군선은 당시로선 아주 큰 규모인 길이 40미터, 폭 4~5미터의 거대군함으로 만들되 속도를 높이기 위해 최대한 노(櫓)의 숫자를 늘리고, 노수(櫓手)들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배의 하부를 3단으로 설계하였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페르시아의 해군이 주로 전투원으로 구성된 750척의 배를 구비하고 있었던 것에 비해, 아테네 해군은 380척에 불과했지만 승조원의 절반이 노수들이었다고 하니 가히 군선의 기동력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알 수 있다. 결국 페르시아 해군은 살라미스에서 200여척의 배를 잃고 크게 패전한 후 크세르크세스 1세의 뒤를 쫓아 퇴각했고 그리스 본토에 아직 머물러 있던 나머지 병력도 아테네·스파르타 연합군에 의해 기원전 479년 프라타이아에서 최종 격퇴되면서 페르시아 전쟁은 그리스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데미스토클레스(기원전 525-459)

고대 아테네의 주력 군함 삼단노 군선(tri?r?s)

 

그런데 페르시안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계기가 된 살라미스 해전에서의 대승은 흥미롭게도 차츰 아테네 정치지형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으로 작용하였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아테네에서 정치적 발언권과 시민으로서의 긍지는 전쟁 기여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그런데 살라미스 해전에 참전한 시민의 수만 해도 4만명에 이를 정도였다고 하니 전쟁이 끝난 후 얼마나 많은 시민들이 스스로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으로 고양되어 있었을까 짐작이 가고 남는다. 게다가 승조원 중 상당수를 차지하는 노수들은 무구를 갖출 재력도 없어 그 동안 전쟁에 참전할 능력도 없었고 그에 따라 어떠한 시민적 명예도 누릴 수 없었던 무산 시민들이었으니 그들의 자부심은 가히 상상을 넘어설 정도로 감격적이었을 것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이러한 고양된 시민의식은 그대로 아테네의 정치 및 권력지형에 반영되어 마침내 아테네 시민이면 귀족이건 무산 시민이건 간에 어떠한 차별이나 제한 없이 모두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발언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민의 힘은 날로 커져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최고의 영웅으로 최고의 권력에 오른 테미스토클레스마저도 도편추방투표를 통해 국외로 추방할 정도로 그 위세를 발휘하였다. 물론 테미스토클레스의 탄핵이 정치적 음해가 개입되어 이루어진 누명이었음이 나중에 밝혀졌지만 어쨌거나 정치적 사안과 관련한 결정과정에서 정치적 주체로 떠오른 시민의 힘은 이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아테네 정치의 핵심 세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원전 461년 급진적인 민주정을 펴다 암살당한 에피알테스(Ephialt?s)에 이어 아테네 민주정의 지도자가 된 사람이 페리클레스(Perikl?s)이다. 페리클레스는 이후 30년 가까이 오랫동안 아테네의 지도자로서 군림하면서 아테네의 민주정이 확고하게 제도적으로 자리 잡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가 오랫동안 도편추방 당하지 않고 권력을 유지하며 그런 일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훌륭한 인격과 탁월한 정치적 역량을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장군직에 선출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플라톤은 페리클레스 치하의 아테네의 정체를, 사람들은 민주정이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민중의 찬성이 수반된 귀족정이라고 평하고 있다.([메넥세노스] 238c,d) 그러나 페리클레스의 치세는 아테네로서는 최고의 번성기였을지는 몰라도 그리스 전체역사의 측면에서 보면 그리스의 몰락을 앞당긴 시대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페리클레스는 페르시아 전쟁 종전 이 후 페르시아의 침공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인접 폴리스들을 끌어들여 델로스 동맹을 결성하여 맹주로 자처하고 군자금을 거둬 비축해왔으나, 그 비용을 아테네의 신전 건축과 정치수당을 지급하는데 유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에 반발하는 폴리스들을 군사력으로 제압하여 그리스 사회를 아테네 중심으로 제국화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문명의 상징으로 꼽히는 파르테논 신전 등 화려한 건축물도, 인류의 빛나는 유산으로 평가되는 여러 문학적·철학적 성취도 그리고 아테네 민주정을 실질적으로 유지시키고 있었던 시민들의 여유와 경제적 번영도 실제로는 모두 다른 폴리스의 희생은 물론 시민들을 대신하여 아테네 경제를 떠받들고 있던 노예들의 희생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민중최고재판소 재판관을 추첨하는데 쓰였던 도구들

 

페리클레스에 의해 주도된 이러한 패권적 제국주의의 경향은 결국 페리클레스 사후 스파르타의 반발을 야기하여 장기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휩쓸리게 함으로써 아테네는 물론 그리스 사회 전체의 몰락을 재촉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게다가 아테네의 민주정 또한 내전을 겪으면서 선동정치가의 득세 등 퇴행을 거듭하여 일시적으로 과거 정체로의 복귀를 꿈꾸는 과두주의자들의 반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고 내전이 끝난 직후에는 30인 참주들에 의한 비극적인 폭압정치가 자행되기도 하였다. 물론 이 참주정은 민주정으로 곧바로 복귀되었지만 아테네 시민들의 민주정에 대한 신념과 자부심은 이미 전성기를 이루었던 페리클레스 치세에 비해 현격하게 저하되어 있었다. 역사를 통해 부르크하르트 등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아테네 민주정의 치명적 과오로서 지적되고 있는 뮈틸레네인들에 대한 처벌을 둘러싼 민회의 결정, 아루기누사이 해전 장군들에 대한 처형사례, 니키아스의 주저가 빚어낸 시켈리아 해전의 참극, 그리고 결정적으로 소크라테스의 처형 사례는 모두 아테네 민주정의 전성기 이후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간 또는 그 직후에 일어난 일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기에서 조차 아테네 민중들이 선동정치가(D?mag?gos)들에 의해 휘둘려 비합리적이고도 어리석은 판단과 광분으로만 일관했다고 여기는 것은 그릇된 판단이다. 앞에서의 사례들에 대한 일부 학자들의 평가 또한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 이른바 선동정치가라고 불리던 사람들도 기본적으로 수공업자·상인 등 평민 출신으로 처음 등장하여서는 원래 이름 그대로 민중(d?mos)의 의견을 대신 앞서서 표현하고 선도하는(ag?gos) 긍정적인 역할도 하였고, 민회의 결정과 관련해서도 민회가 일년에 40차례이상 수십 년에 걸쳐 수천 건 이상을 다루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위에서 알려진 몇 가지 사례들은 오히려 예외적인 소수의 오류들이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간 동안 아테네 민중들이 보여주었던 민회에서의 열정과 전장에서의 헌신적인 용감성은 모두 맥동치는 국가성원으로서의 움직임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 그 기간 동안 시민대중들 또한 의연하게 절제와 지혜를 발휘했던 적도 적지 않았다. 특히 30인 참주들을 축출 직후 극심한 갈등국면에서 아테네 시민 전체의 평화를 위해 아테네 민중들의 화해 조치와 처신은 오랜 기간 동안 형성되고 발전되어온 아테네 시민의 성숙된 민주시민으로서의 역량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처형과 관련해서도 당시의 아테네 민중의 정서와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면 정황상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여지도 없지 않다. 펠로폰네소스전쟁이라는 장기간의 비극적인 내전을 치르면서 아테네 인구는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종전 직후 들어선 30인 참주정은 아테네 민중의 비극적이고도 음울한 정서를 치유하기는커녕 폭정과 정적에 대한 대학살을 통해 민중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감과 상처를 안겨 주었다. 복구된 민주정의 지도자들에게는 이러한 정황을 전환시켜줄만한 어떤 정치적 희생양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희생양으로 소크라테스만큼 호재가 될 만한 인물도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30인 참주들의 측근이었고 민주정의 이데올로그들인 소피스트들에게는 눈의 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게다가 그가 말하는 다이몬(Daimon)이라는 신령은 아테네인들의 일상적 종교생활에서 이교(異敎)신이라 여겨질 만큼 아주 낯선 것이기도 했다. 결국 민주정의 지도자들의 기대와 의도대로 민중들은 이미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자신들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 취할 수 있는 희생 제물로서 암묵적인 교감을 통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정황이 시대의 현인 소크라테스까지 처형한 아테네 민중과 민주정의 처사를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하는 것일 수는 없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재판 등 일부 부정적인 사례들을 빌미로 아테네 민중들이 오랜 기간 이룩해온 정치적 이념 즉 ‘정치적 결정 및 재판에 대한 민중의, 민중에 의한 지배’까지 일거에 매도해버리는 처사 또한 부당하다. 플라톤의 [변명]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소크라테스에 대한 재판은 일단 절차상으로 보면 이른바 민주정이 이룩해온 전통적인 법적 절차에 의거해 진행되었고 그에 따라 피고인 소크라테스에게도 변명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기회가 허용되었다. 아마도 [변명]이 소크라테스의 변명에 대한 기록뿐만 아니라 재판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의 발언을 기록하였다고 하면 우리는 인류역사를 통해 고·중세 시기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고대 아테네 민주정 고유의 공개적이고도 민주적인 재판과정의 전모를 알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비록 아테네 말기의 정치적 정황이 아테네 민주정과 재판에 대한 신뢰를 크게 무너뜨리기 했지만 사실 아테네 민주정이 오랫동안 지향하고 견지해온 재판의 이념 자체는 고대 세계의 재판 그 어떤 사례에서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의 공정성을 수반하고 있었다. 민중 최고 재판소(heliaia)의 경우 기본적으로 재판관을 당일 추첨 임명했을 뿐만 아니라 재판의 전 과정에서 원고의 논고는 물론 피고가 의견과 이의를 제의할 수 있는 기회가 최대한 허용되었고 재판관들 또한 재판과정 내내 이의의 추가적인 존재 여부를 끊임없이 재확인하면서 재판을 진행하였기 때문이다.

특히나 우리는 소크라테스 재판에 대한 평가와는 별도로 아테네 민주정이 발전시켜온 또 하나의 민주적 이념과 정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통상 우리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유래된 민주주의의 이념적 지표로서 다수 대중들에 의한 다수결의 원리를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 꼽는다. 그러나 아테네 민주정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아테네 민주주의의 기초에는 다수결의 원리에 앞서 본질적으로 다수 의결과 관련한 일체의 사안들에 대한 정보의 공유 그리고 그에 대한 치열한 논쟁과 토론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고대 아테네 민주정의 뿌리에는 다수결과 더불어 합리적이고도 공개적인 토론의 정신이 핵심적인 지배원리이자 이념으로서 함께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민주정하에서 죽임을 당했고 플라톤은 그 민주정을 비난하였지만 그들 사상의 밑바탕을 형성하고 있는 치열한 토론 정신은 다름 아닌 백가쟁명의 민주정 아테네의 토양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현대 민주주의의 이념의 측면에서도 그와 같은 정보의 공유와 토론의 정신은 다수결의 원리의 정당성을 담보해주는 필수적이고도 핵심적인 조건이다. 이런 점에서 아테네 민주정의 이념은 거대 이익집단의 정보조작에 의해 민중의 진정한 뜻이 왜곡되기 일쑤인 현대 민주주의에도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준다. 진실은 다수결의 지지를 받지 않아도 궁극적으로는 인류에게 선과 덕을 가져다주지만 왜곡된 정보와 거짓에 기초한 다수결은 그 자체로건 결과적으로건 그 결의에 지배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재앙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테네의 민주정이 고대 세계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기 힘든 그와 같은 빛나는 이념과 지향을 가지고 있었을 지라도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비교해 보면 근본적으로 아주 많은 상이점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간과할 수 없을 정도의 심각한 한계 또한 내포하고 있다. 우선 가장 큰 차이는 현대의 민주정이 대의제에 기초한 간접 민주정을 취하고 있는데 비해서(물론 일부 국가에서 직접 민주정의 요소를 이용하고 있고 또 오늘날 인터넷을 통한 새로운 직접민주정의 시도 또한 논의되고 있지만) 아테네의 민주정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직접 민주정 체제였다는 점이다. 이를 테면 아테네의 최고 결정 기관인 민회의 경우 18세 이상의 성년 남자 시민이면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었으며 누구든 제한 없이 평등하고도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었다. 표결은 오늘날과 달리 비밀 투표가 아닌 거수로 정해졌지만 도편추방여부 등 일부의 경우는 비밀투표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민회는 1년에 40회 정도 열렸고 국가 중요사안 일체가 심의되었다. 아무리 직접민주정이라고는 해도 열흘에 한번 정도 열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아테네 민주정이 정치 기능에 있어 정책의 적극적 수립보다는 사법적(司法的) 성격에 크게 치중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민회는 워낙 많은 사람들의 참석을 요하고 도심에서만 열려 처음에는 정족수를 채우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페리클레스가 민회 참석자들에게 일상인들의 하루 수입에 준하는 정치수당을 지급하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 이후 도심에 살든 시골에 살든 생업까지 접고 회의에 참석하는 등 참석률이 크게 높아지기 시작했고 시민의식은 물론 정치에 대한 아테네인들의 관심 또한 그 만큼 높아졌다.

그러나 여성이나 거류외인 그리고 노예에게는 여전히 참정권이 허락되지 않았다. 당시 인구분포로 보면 인구의 40%정도에 달하는 노예를 포함하여 이들의 수가 전체인구의 70-80 %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엄격한 의미에서 민주정이라고 보기도 힘들 것이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무엇보다도 아테네의 민주정은 사회경제적으로 인구의 절반에 육박하는 노예들의 희생위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시민들이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정치 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인 아테네 경제활동의 대부분을 노예들이 떠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치수당 또한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상당부분 델로스 동맹 기금에서 유용한 것이라는 점에서 애초부터 정당성을 결여하는 것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아테네 민주정은 인접 폴리스의 희생은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다수의 기층 민중에 대한 착취를 기초로 성립한 특권화된 과두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노예제가 아테네뿐만 아니라 고대세계 전반에 유포된 제도였다는 점에서 그것이 곧 아테네 민주정의 본질적 한계로 보기는 힘들 것이다. 그리고 아테네 민주정에서는 대부분의 관직이 추첨으로 이루어져 정치참여 또는 권력행사에 철저히 특권화가 배제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주요 행정직의 경우는 미리 기본적인 자질을 심사(dokimasia)했으며 특히 가장 중요한 군사직책 즉 장군(strat?gos)이나 재정업무에는 고도의 전문성을 인정하여 선거를 통해 선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연임도 가능하였다. 페리클레스가 장기간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장군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테네의 최고 사법 기관으로서 민중 최고 재판소에서 판결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배심원(전문적인 재판관이 따로 없었으므로 이들이 곧 재판관(dikast?s))은 일관되게 그 재판 당일 즉석에서 추첨에 의해 선발하여 누구도 사전에 뇌물수수나 모의가 불가능하게 하였다.

이소크라테스(기원전 436-338)

그러나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정치 수당의 지급도 중지되고 아테네의 경제상황 또한 날로 악화되어갔다. 앞장의 논의들에서 살펴보았듯이, 특히 가장 큰 타격을 받은 테테스 층의 귀족들에 대한 공공연한 기부요구, 상습적인 무고(誣告)를 통한 이권수수가 횡행하면서 점차 아테네의 공동체 정신도 사라져갔고 인접 폴리스와의 잦은 전쟁과 정책에 대한 대립과 분열로 민주정의 기본골조도 붕괴되어 버리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북쪽 변방국가에 불과했던 마케도니아가 그리스의 새로운 강자로 부각되면서부터 아테네는 친(親)마케도니아파와 반(反)마케도니아파로 분열되어 끊임없이 정쟁만을 일삼다 기원전 350년쯤에는 제국회복을 기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국력이 쇠진해졌다. 그 싸움의 중심에는 마케도니아와 평화를 유지하면서 아테네의 재건을 도모하려는 이소크라테스(Isokrat?s)와, 마케도니아를 그리스의 자유를 위협하는 정복자로 간주하고 그와 싸울 것을 주장하는 데모스테네스(D?mosthen?s)가 있었다. 끝내는 데모스테네스의 주장에 따라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이아에서 필리포스(Philippos)왕과 전쟁을 벌이지만 처절한 패배를 맞이함으로써 해상왕국에로의 복귀를 꿈꾸던 아테네는 짧은 전성기를 뒤로 한 채 마침내 종말을 맞이하고 만다.

데모스테네스(기원전 384-322)

고전기 그리스는 아테네의 패권적 제국주의가 빚어낸 내분으로 결국 몰락했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그것은 적대국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군사적 팽창주의로 이어졌다. 도시국가의 철학 또한 오랜 전란기를 통해 안심입명의 개인주의로 해체된 이래 헬레니즘과 코스모폴리타니즘으로 표징되는 또 다른 세계주의로 재편되었다. 때마침 근동 지방에서도 유대교의 민족주의적 폐쇄성을 넘어 보편주의를 기치로 종교적 세계주의가 등장하였다. 우연찮게도 기원전후에 등장한 이러한 세계주의적 경향들은 마침내 하나의 세계사적인 흐름으로 통합되면서 제국주의 거대 로마로 흘러 들어갔다.

(주제 2 : 아테네 민주정과 그 형성 -끝-)

 

2013년 1학기 광진정보도서관 [도서관 시민대학] 참가자 모집

2013년 1학기 광진정보도서관? [도서관 시민대학] 참가자 모집

 

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 : 새로운 세계를 디자인하기 위해 당신이 알아야 할 키워드 100가지

?우리 시대가 겪고 있는 이 거대한 시련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 시련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에 대해 함께 고민해 봅니다.

 

?현대 사회주의의 몰락 ? 미국식 금융 자본의 붕괴 ? 9?11 사태 이후 체제에 대한 관심을 이제 우리 주변으로 돌려, 우리 공동체의 나아갈 비전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궁극적으로?? 새로운 세상을 디자인해 보기 위해 우리 시대의 가치 ? 자본 ? 노동의 의미를? 다시 세워보고 우리 일상과 주거, 우리 마을과 공동체, 우리 지역 사회와 도시에서 ‘같이’하는 것의 ‘가치’를 키워드 100가지로 새롭게 인식해 보고자 합니다.? 새로운 세계를 함께 디자인할 시민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 운영기간 : 2013년 4월 4일(목) ~ 7월 18일(목) (총 15강)?????? 매주 목요일 19:30~21:30
?????| 장?? 소 : 광진정보도서관 도서관동 1층 이야기방
?????| 대?? 상 : 성인, 50명
?????| 주?? 최 : 광진정보도서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 건국대학교
?????| 주?? 관 : 문화체육관광부 도서관정보정책기획단
?????| 후?? 원 : 알렙출판사
?????| 신청방법
???????- 신청기간 : 213년 3월 23일(토) ~ 마감 시
???????- 신청방법 : 선착순 방문 접수 및 전화접수
???????- 신청장소 : 광진정보도서관 도서관동 2층 종합안내
??????? 수강자에게 수료증 발급
??????? 보증금 : 30,000원(주관부서 지침 사항, 개강일 납부, 종강 시 환불)
?

???????※ 기타문의 : 02-3437-5092(내선 4107번) / http://www.gwangjinlib.seoul.kr

 

 

○ 커리큘럼 안내

강의일자 주제 주요내용 강사
4월? 4일 세계경제를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성찰하기

?- 세계경제의 역사적인 특징과 근대적인

???세계체계론

김성우 교수
4월 11일 노동을 다시 생각한다 1 ?- 근대, 노동의 의미란?

?- 소비와 생산이란 무엇인가?

박영균 교수

(건국대 HK교수)

4월 18일 노동을 다시 생각한다 2 ?- 물질노동과 비물질 노동이란?

?- 현재, 우리의 노동은 어떻게 열정이

???될 수 있는가?

4월 25일 가치를 다시 생각한다 1 ?- 가치 vs 교환가치 vs 잉여가치 김우철 교수

(호서대 외래교수)

5월? 2일 가치를 다시 생각한다 2 ?- 상품-화폐의 등장과 근대적 ‘개인’

?- 현대에서 가치 개념의 변화

5월? 9일 노동 가치를 재구성해보자 1 ?- 노동의 가치와 소외, 가치와 가격 이재유 교수

(건국대 외래교수)

5월 16일 노동 가치를 재구성해보자 2 ?- 노동의 종말인가 소유의 야만인가

?- 현대적 노동가치의 재구성

5월 23일 자본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1 ?- 화폐, 자본, 이윤을 발견하자

?- 권력이 자본주의를 만났을 때

이순웅 교수

(한철연 연구협력위원장)

5월 30일 자본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2 ?- 생산-화폐-권력의 결합체, 자본주의

?- 현대에서 자본주의 아닌 것(대안)은?

6월 13일 당신의 돈, 당신의 비즈

니스를 생각한다 1

?- 당신에게 지속가능성이란 무엇인가?

?- 당신에게 돈이란 무엇인가?

박민미 교수

(동국대 외래교수)

6월 20일 당신의 돈, 당신의 비즈

니스를 생각한다 2

?- 주식회사 vs 조합회사(노동조합)

?- 공동체 자본, 지역화폐 등등

6월 27일 경제의 위기와 민주주의의 재구성 ?- 세계경제의 위기와 민주주의의 위기

?- 삶-정치의 대안들 : 네트워크 정치, 이웃

???과의 연계, 인권주장하기 등

이정은 교수

(연세대

외래교수)

7월? 4일 여성 주의적 관점에서 차이의 경제와 대안 도시를 생각 한다 ?- 비자본주의적 경제들의 유령 불러오기

?- 여성의 관점에서 본 대안도시는?

이현재 교수(서울시립대

HK 교수)

7월 11일 지역사회를 다시 생각한다 1 ?- 생활 속에서 ‘협동’이란 무엇인가

?- 한국형 협동조합의 본산지인 원주 사례

???분석

최종덕 교수

(상지대 교수)

7월 18일 지역사회를 다시 생각한다 12 ?- 육아와 여성

?- 협동성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 그렇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2013년 1학기 광진정보도서관 [도서관 시민대학] 참가자 모집

2013년 1학기 광진정보도서관? [도서관 시민대학] 참가자 모집

 

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 : 새로운 세계를 디자인하기 위해 당신이 알아야 할 키워드 100가지

 

우리 시대가 겪고 있는 이 거대한 시련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 시련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에 대해 함께 고민해 봅니다.

현대 사회주의의 몰락 ? 미국식 금융 자본의 붕괴 ? 9?11 사태 이후 체제에 대한 관심을 이제 우리 주변으로 돌려, 우리 공동체의 나아갈 비전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궁극적으로?? 새로운 세상을 디자인해 보기 위해 우리 시대의 가치 ? 자본 ? 노동의 의미를? 다시 세워보고 우리 일상과 주거, 우리 마을과 공동체, 우리 지역 사회와 도시에서 ‘같이’하는 것의 ‘가치’를 키워드 100가지로 새롭게 인식해 보고자 합니다.? 새로운 세계를 함께 디자인할 시민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 운영기간 : 2013년 4월 4일(목) ~ 7월 18일(목) (총 15강)?????? 매주 목요일 19:30~21:30

| 장?? 소 : 광진정보도서관 도서관동 1층 이야기방

| 대?? 상 : 성인, 50명

| 주?? 최 : 광진정보도서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 건국대학교

| 주?? 관 : 문화체육관광부 도서관정보정책기획단

| 후?? 원 : 알렙출판사

 

?????| 신청방법
???????- 신청기간 : 213년 3월 23일(토) ~ 마감 시
???????- 신청방법 : 선착순 방문 접수 및 전화접수
???????- 신청장소 : 광진정보도서관 도서관동 2층 종합안내
??????? 수강자에게 수료증 발급
??????? 보증금 : 30,000원(주관부서 지침 사항, 개강일 납부, 종강 시 환불)

 

※ 기타문의 : 02-3437-5092(내선 4107번) / http://www.gwangjinlib.seoul.kr

 

 

○ 커리큘럼 안내

강의일자 주제 주요내용 강사
4월? 4일 세계경제를 거시적이고장기적인 관점에서 성찰하기 ?- 세계경제의 역사적인 특징과 근대적인???세계체계론 김성우 교수
4월 11일 노동을 다시 생각한다 1 ?- 근대, 노동의 의미란??- 소비와 생산이란 무엇인가? 박영균 교수(건국대 HK교수)
4월 18일 노동을 다시 생각한다 2 ?- 물질노동과 비물질 노동이란??- 현재, 우리의 노동은 어떻게 열정이???될 수 있는가?
4월 25일 가치를 다시 생각한다 1 ?- 가치 vs 교환가치 vs 잉여가치 김우철 교수(호서대 외래교수)
5월? 2일 가치를 다시 생각한다 2 ?- 상품-화폐의 등장과 근대적 ‘개인’?- 현대에서 가치 개념의 변화
5월? 9일 노동 가치를 재구성해보자 1 ?- 노동의 가치와 소외, 가치와 가격 이재유 교수(건국대 외래교수)
5월 16일 노동 가치를 재구성해보자 2 ?- 노동의 종말인가 소유의 야만인가?- 현대적 노동가치의 재구성
5월 23일 자본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1 ?- 화폐, 자본, 이윤을 발견하자?- 권력이 자본주의를 만났을 때 이순웅 교수(한철연 연구협력위원장)
5월 30일 자본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2 ?- 생산-화폐-권력의 결합체, 자본주의?- 현대에서 자본주의 아닌 것(대안)은?
6월 13일 당신의 돈, 당신의 비즈니스를 생각한다 1 ?- 당신에게 지속가능성이란 무엇인가??- 당신에게 돈이란 무엇인가? 박민미 교수(동국대 외래교수)
6월 20일 당신의 돈, 당신의 비즈니스를 생각한다 2 ?- 주식회사 vs 조합회사(노동조합)?- 공동체 자본, 지역화폐 등등
6월 27일 경제의 위기와 민주주의의 재구성 ?- 세계경제의 위기와 민주주의의 위기?- 삶-정치의 대안들 : 네트워크 정치, 이웃???과의 연계, 인권주장하기 등 이정은 교수(연세대외래교수)
7월? 4일 여성 주의적 관점에서 차이의 경제와 대안 도시를 생각 한다 ?- 비자본주의적 경제들의 유령 불러오기?- 여성의 관점에서 본 대안도시는? 이현재 교수(서울시립대HK 교수)
7월 11일 지역사회를 다시 생각한다 1 ?- 생활 속에서 ‘협동’이란 무엇인가?- 한국형 협동조합의 본산지인 원주 사례???분석 최종덕 교수(상지대 교수)
7월 18일 지역사회를 다시 생각한다 12 ?- 육아와 여성?- 협동성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 그렇다면???어떻게 살 것인가?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5)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5)

글: 이정호 (방송통신대학교 교수)
주제 2 : 아테네 민주정과 그 형성

 

5. 아테네 민주정 약사(略史) – 최초의 민주주의 그 의의와 한계(1)

 

 

부르크하르트가 전하는 아테네 민주정의 말로는 자못 우울하고 냉소적이다. 아테네 민주정의 몰락과 그리스의 몰락이 함께 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아테네 민주정에 대한 그의 시선을 더욱 그럴듯하게 해준다. 사실 부르크하르트는 그리스 문화 전반에 대한 독보적인 수준의 풍성하고도 세세한 데이터와 통찰력 깊은 해석을 후세에 전하고 있지만, 유독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는 보수적이다. 그렇다고 그가 정치 지배자 또는 기득권자들의 입장에 서있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역사과정에서 정치적 강자, 사회 기득권자들에 의해 자행된 폭력적 억압과 그 피폐상에 누구보다도 비판적인 역사학자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역사 과정에서 가끔 눈에 띄는 민중권력에 의한 집단적 폭력과 그에 따른 혼란상에도 지극히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요컨대 그는 어떤 집단이나 개인에 의해서든 반지성적 행태와 그로 인해 빚어지는 집단적·정치적 폭력 일체를 혐오했다. 그래서 그는 역사학에서 인류의 역사적 가치의 형성 토대를 정치사와 경제사가 아닌 지성사와 예술사를 통해 다시 구축하고자 하는 역사학의 새로운 지평 이른바 문화사(Kulturgeschichte)의 영역을 최초로 확립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렇게 보면 그의 정치적 입장은 보수주의라기보다는 지성주의라는 말이 어울리지만 고중세사에서는 지성이 오직 귀족들의 역량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에서 큰 틀에서는 여전히 보수적 엘리트주의에 머물러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지성주의의 관점에서도 아테네의 민중이, 보통 생각하듯 그저 어리석은 민중에 불과했다는 생각은 매우 섣부른 판단이다. 아마도 그러한 평가는 주로 아테네 민주정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이 끼친 지대한 영향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일단 다수 민중이 정치적 주류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적이 2000년 이상의 고·중세를 통해 아테네 민주정을 제외하면 언제 있었던가를 생각하면 이미 고대 아테네의 민주정은 비록 제한적이긴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높이 평가받을 만한 인류 정치사의 위대한 성취이자 기층 민중들의 정치적 역량을 보여준 매우 소중한 역사적 유산이라 아니할 수 없다. 실제로 아테네의 민주정의 초기 성립과정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비록 겉으로는 왕과 귀족 등 엘리트들에 의해 지배되는 기나긴 정치체제의 역사를 가지고 있긴 했지만 그 이면에는 그 틈바구니에서 민중 스스로 자신들의 욕구와 권리를 사회적으로 관철해내고자 하는 끊임없는 몸부림이 있어왔고 아테네 민주정은 그 결과로서 등장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앞에서도 그 일단을 살펴왔지만 ‘아테네 민주정과 그 형성’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 하면서 특히 그 점에 주목해서 아테네 민주정의 역사를 다시 한 번 간략하게 갈무리 해보기로 하자. 우선 아테네는 고대 폴리스 성립 이래 다른 폴리스와 마찬가지로 한 명의 왕이 지배하는 왕정(basileia)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근동 지방의 왕들처럼 절대적인 권력은 가지지 않았고 같은 힘을 가지고 있는 귀족들 중 한 사람이 대표로서 왕의 지위를 가진 것에 지나지 않았다. 호메로스의 작품에는 직접 물레를 돌리거나 농사를 거드는 왕의 모습도 보인다. 그 때문에 기원전 8세기 무렵에 이르면 왕정은 귀족들의 집단 정치체제 이른바 귀족정(aristokratia)으로 대체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전시공동체로서 고대국가의 성격상, 정치적 발언권은 나라를 방어하는 전투 능력 및 기여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이 시기는 전투행태 상 중갑 기병(騎兵, hippikos)이 전투력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전투를 하기 위한 기마 및 개인 무장 또한 자비부담에 의존하고 있었던 터라 자연적으로 전장에서도 귀족들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고 정치적 발언권 또한 그들에게 독점되어 있었다. 귀족들만이 비싼 가격의 말(馬)을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츰 식민도시가 증가하고 그에 따른 교역량도 늘어나 상공업이 발전하면서 부유한 평민이 나타났고 생산량의 증가에 따라 무기의 가격도 싸져서 평민 중에서도 무기를 스스로 조달하여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에 따라 군의 핵심 전투력 또한 점차 평민을 중심으로 하는 중갑 보병(hoplit?s), 사각밀집대형(phalanx) 전술로 재편되었다. 이후 그들은 당연한 권리로서 귀족에게 참정권을 요구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참정권을 둘러싸고 귀족과 평민이 충돌하는 일도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평민계층의 약화는 그대로 나라의 방어력 약화를 의미했고 나라의 위기는 귀족들의 위기와도 직결되었다. 그래서 귀족들은 평민의 불만을 늘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기원전 621년에 제정된 ‘드라콘(Drakon)의 입법’은 귀족들의 자발적인 정치개혁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지만 그간의 평민의 정치적 성장이 가져다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이 법률의 핵심은 관습법을 성문화 했다는 데에 있다. 즉 나랏일과 관련한 중요사와 그 결정 과정을 공개하기로 한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대한 진전이었다. 그 때까지 귀족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결정 일체를 기록에 남기지 않았다. 기록으로 남길 경우 그들이 행한 행태가 폭로되고 실정에 대한 변명도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귀족이 결정한 정치적 사안과 법률의 내용이 기록으로 알려짐으로써 평민들도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고 귀족들도 더 이상 제멋대로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한 정치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평민에게까지 아직 참정권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귀족과 평민의 대립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거기서 양자의 조정자로서 등장한 인물이 솔론(Solon)이다. 시민들의 합의로 솔론은 계층 간 이해 조정을 위한 전권을 부여받았다. 그리하여 기원전 594년에 실시된 것이 솔론의 개혁이다. 솔론 개혁안의 핵심은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귀족·평민을 포함한 시민 전체를 재산과 토지의 소유수준에 따라 4등급으로 나누어 각각의 의무와 권리를 명확하게 규정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중갑 기병으로 전투에 임할 수 있는 귀족을 최상급의 시민으로 규정하고 그들에게 아르콘 등의 최고 관직의 임용을 보장해주었다. 그리고 중갑 보병으로 전투에 임할 수 있는 부유한 평민을 두 번째 등급의 시민으로 규정하여 그 다음 등급의 관직에 오를 수 있을 권리를 부여했다. 그리고 최소 수준의 무장인 경보병으로 전투에 임할 수 있는 세 번째 등급의 시민은 민회나 재판에 위원으로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아예 어떠한 무장도 갖출 수 없었던 네 번째 등급의 시민들은 아무런 권리도 인정받지 못했다. 무기의 가격이 싸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조차 마련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무산 시민(th?tes)으로 불리어 졌다. 이와 같이 솔론의 개혁은 토지·재산에 의해서 관직을 정했기 때문에 종국에는 평민들도 부를 쌓을 경우 최고 관직에 등용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것이 곧 금권정(timokratia)의 등장이다. 금권정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재산이 좌지우지하는 정치라는 매우 부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아테네 정치발전사의 측면에서 보면 마치 근세 시민사회의 성립이 그렇듯이 귀족들에 의해 독점된 정치 영역에 제한적이나마 평민계층의 참여가 제도적으로 확립된 개혁적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솔론 개혁안의 두 번째 핵심은 채무의 소멸과 채무 노예의 방지를 실시한 점에 있다. 솔론은 가난한 평민들의 빚을 탕감해줌으로써 평민이 빚 때문에 노예 신분으로 전락하는 것을 방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 또한 평민이 주력이 된 전투력을 보전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처럼 화폐 경제의 발전에 의해서 평민의 사회 경제적 지위는 향상되었다. 그러나 그 만큼 몰락하는 평민 또한 늘어나 종국에는 토지를 상실하고 노예로 팔리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졌다. 일단 빚을 지게 되는 지경에 이르면 토지가 채권자에게 압류되어 수확물의 6분의 1을 채권자에게 바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그조차 체납되어 종국에 빚을 갚을 수 없게 되면 노예로 팔리는 것이 당시의 관습법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노예는 인간이 아니라 말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채무 노예가 나중 빚을 갚게 되면 인간으로 돌아올 수는 있었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빚을 탕감해주는 정책이 평민의 채무노예로의 전락을 막아 국방력을 보전하는 좋은 방책일 수는 있었어도 그 자체로 부유한 귀족들에게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에 귀족들의 불만은 날로 켜져 갔고, 다른 한편에선 채무의 소멸 후에 토지를 재분배 받기를 원했던 평민들까지 나름 자신들의 기대에 못 미쳐 불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게다가 가난한 평민의 입장에서 보면 같은 평민임에도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참정권에 차별을 두는 것 또한 불만이었고, 급기야는 신체를 저당으로 돈을 빌리는 법마저 금지하는 바람에 당장의 생활이 어려운 무산자들에게도 원성을 사게 되었다. 이처럼 솔론의 개혁안은 점차 귀족과 평민 양쪽으로부터 모두 원성과 비난을 받게 되었고 그 후 30년간 아테네는 귀족과 평민 간에, 부자와 가난한 자들 간의 갈등이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그리하여 이 혼란한 정세를 이용하여 귀족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stos)라는 인물이 나타나 대다수의 가난한 평민들을 등에 업고 기원전 560년 쿠데타를 일으켜 정치권력을 차지하기에 이르는데 이것이 곧 금권정에 종말을 가하고 나타난 참주정(tyrannik?)이다.

참주(tyrannos)란 귀족과 평민의 대립을 이용하여 비합법적 수단으로 정치권력을 차지하고 독재를 일삼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참주이긴 해도 온화한 인품과 노련한 정치술로 솔론의 개혁안을 유연하게 실행으로 옮겨 시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예를 들어 귀족들의 재산을 몰수하되 구테타를 피해 망명한 귀족이나 부패한 귀족들의 토지만을 몰수 하였고 그것을 평민들에게 분배하여 수공업의 발전을 꾀했고 해상 무역을 진흥시켰다. 그러나 그의 사후 참주가 된 장남 히피아스는 사리사욕에 빠진데다가 폭정까지 일삼아 아테네를 큰 혼란에 빠트렸고 결국 클레이스테네스(Kleisthen?s)에 의해 국외로 추방됨으로써 반세기만에 아테네 참주정은 종말을 고하고 만다. 당시 참주 히피아스의 동생 히파르코스를 살해하고 순교한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은 이후 아테네인들에게 참주정의 폭압성과 자유의 이념을 일깨어주는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클레이스테네스(기원전 570-507)

 

클레이스테네스는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해외로 도피했다가 히피아스를 타도하는데 앞장선 망명귀족으로서 기원전 508년 이른바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을 통해 아테네 민주정의 발전에 획기적 발판을 마련한 사람이다. 그런데 클레이스테네스는 원래 처음부터 민주정을 지지하거나 민중의 이익을 앞세웠던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반대파 귀족을 누르고 히피아스를 타도한 후 귀족정체로의 복귀를 꿈꾸었고 다만 그 과정에서 민중의 힘을 이용했을 뿐이다. 그러나 혁명과정에서 증폭된 민중의 욕구는 이미 그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고 그는 영악하게도 그 욕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새로운 정권의 수립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으로 표징 되는 아테네 민주정의 빛나는 성취 그 이면에는 이렇듯 아테네 민중들의 정치적 자각과 그에 기초한 압력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훗날 아테네의 급진적 민주정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한 결정적인 토대가 되었는데 그 개혁의 급진성은 무엇보다도 도편추방제(ostrakismos)의 도입과 부족제의 혁명적 재편에서 잘 드러나 있다. 도편 추방제는 참주의 출현을 미리 막기 위해서 그럴만한 우려가 있는 인물을 미리 뽑아 국외로 추방하는 제도였다. 당시에는 아직 종이가 없었던 터라 기와 등 도기 조각에 이름을 써서 투표했는데 6000개 이상의 도편 가운데 가장 많은 표가 나온 인물의 경우 10년 간 추방명령이 내려졌다. 실제로 이 도편추방제에 의해 기원전 462년에는 키몬이, 444년에는 투퀴디데스가, 418년에는 클레온의 후계자이자 민중파 선동정치가였던 휘페르볼로스(Hyperbolos)가 추방당했고 제도수립이래 아테네에서는 한 사람의 참주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제도는 정적을 합법적으로 제거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어 유능한 정치가가 추방되는 부작용도 야기 시켜 휘페르볼로스 추방 이후 폐지되고 만다.

클레이스테네스의 또 하나의 급진적이고도 혁명적인 개혁은 종래의 귀족의 권력 기반이 되고 있던 낡은 혈연적인 4부족제를 혁파하고 순전히 기계적으로 지역을 열 군데로 갈라 10 부족제로 재편한 것이다. 그리고 기존의 귀족 원로중심의 아레오파고스회의 권한을 축소하는 대신 무산시민을 제외하고 전투에 임할 수 있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다 참여할 수 있는 최고 의결기관으로서 민회(ekkl?sia)를 구성하고, 민회에 올리는 의안을 미리 토의하기 위해 지역 마다 50명씩, 재임할 수 없는 임기 1년의 위원을 추첨으로 뽑아 500인 평의회(boul?)를 구성하였다. 특히 민회와 평의회 위원은 물론 장군직과 일부 재정관 이외의 아르콘을 포함한 고위 관직까지 추첨으로 선발하였다는 것은 정치가 더 이상 엘리트 귀족들만의 독점영역이 아님을 상징하는 일종의 혁명 선언이었다. 이와 같은 추첨제가 가능했던 것은 아테네의 시민이 비교적 적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아테네인들 스스로가 정치적인 문제를 어떻게 그리고 왜 처리하는지를 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시민의 지혜와 이성에 대한 절대적 믿음은 아테네가 시민을 정치 활동에 참여시킬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에 임할 능력을 갖추지 않은 무산 시민은 여전히 정치적 발언권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무산 시민까지도 정치에 관여할 수 있는 기회가 도래하였다. 그것이 곧 기원전 492년에 시작된 페르시아 전쟁이다.

페르시아는 아케메네스 왕조 때 크게 발흥하여 소아시아 서해안까지 진출하여 그리스 식민도시를 지배하에 두었는데 페르시아 전쟁은 아테네가, 페르시아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식민도시들을 군사적으로 지원한데서 비롯되었다. 발칸반도까지 진출을 꿈꾸고 있었던 페르시아의 다레이오스 1세는 그것을 빌미로 아테네에 진군을 명령했던 것이다. 그러나 페르시아 함대는 그리스로 향하는 도중 급작스럽게 밀어닥친 폭풍우 때문에 300척의 군함만 잃고 제 발로 물러났다가 그로부터 2년 후인 기원전 490년, 국외로 추방된 히피아스의 안내로 군사를 이끌고 바닷길로 다시 아테네를 쳐들어왔다. 이것이 2차 페르시아전쟁이다. 이 때 벌어진 전투가 유명한 마라톤 평야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아테네는 1만명의 중갑 보병의 활약으로 3만명의 페르시아 대군을 대파함으로써 페르시아의 침략은 또다시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전투가 끝난 후 한 명의 전령이 아테네까지 쉬지 않고 달려와 승전보를 전하고 바로 숨을 거두었는데 올림픽의 마라톤 경기가 거기서 유래되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침략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0년 후 세 번째 침략이 이루어졌고 그 전쟁에서 그리스 연합군이 승리한 것을 계기로 그리스 역사는 물론 아테네 정치사의 새롭고도 중차대한 전기가 찾아왔다.

(5. 아테네 민주정 약사(略史) – 그 의의와 한계(2)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