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의 윤리학에서 자유의 윤리학으로[대안도덕교과서]-1
최종덕(상지대학교)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1. 청소년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결핍의 존재가 아니다
청소년은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가는 발전적 과정이다. 청소년은 어른이 아니지만 한 개인의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자기 정체성이라는 말이 어렵지만 쉽게 말한다면 “나로서의 나다움을 갖고 나는 태어났다”는 뜻이다. 성숙함에서 볼 때 청소년은 어른만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다운 정체성이 결여된 것은 아니다. 청소년 윤리학도 여기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만약 어른이 청소년을 결핍된 존재로서만 일방적으로 다루려만 한다면, 그에 따르는 청소년 윤리학은 타이르고 훈계하고 지시하거나 못 하게하고 칭찬하거나 벌주는 등의 일방적인 규범윤리학이 될 것이다. 일방적 규범윤리학은 청소년을 위한 윤리학이기보다 어른을 위한 윤리학이 될 수 있다. 청소년을 위한 윤리학은 어른이 청소년을 주체적 정체성을 지닌 존재로 인정하는데서 시작된다. 청소년을 위한 윤리학은 청소년 스스로 미래를 찾아가도록 하는 범례를 제시하거나 청소년 스스로 자율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을 기르게 하는 동반적 생활윤리학이다. 청소년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결핍의 존재인지 아니면 자기정체성을 지닌 존재인지는 어른이 청소년을 보는 관점이며, 이런 관점은 청소년 윤리학의 방향을 잡는 핵심이기도 하다.
2. 좋음, 착함, 선함
윤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착한 행동으로 이끄는 삶의 준칙이다. 이것이 윤리를 설명하는 언어적 정의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착하다는 것이 무엇이고 행동을 이끈다는 것에 대해서도 더 설명이 필요하고 그리고 삶의 준칙이라는 용어도 혹시 지나친 강령이 아닌지를 생각해야 한다. 어떤 행동을 자아내기 위하여 그런 착한 행동은 반드시 좋은 행동이어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착하다는 것은 좋다는 것과 같은 뜻에서 나왔다. 영어로 말할 때는 다 같이 ‘굳’good이어서 별 문제없이 보인다. 그런데 우리말로 착한 것과 좋은 것을 말할 때 혹시 그 두 표현이 다른 것이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다. 선과 악이라는 대비된 말을 자주 들어보았을 것이다. 선이라는 표현은 추상적이어서 마치 저 높은 하늘에 존재하여 절대적인 도덕의 완성체인 듯 느껴지기도 한다. 어쨌든 여기서 말하는 선도 역시 ‘굳’의 명사goodness로 쓰인 것이다. 영어로 말하면 다 하나거늘 우리말로 하면 ‘좋은’ ‘착한’ 그리고 ‘선善한’ 것처럼 다른 뜻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그 답을 말하자면 영어에서 ‘굳’은 사물이나 사람에게 같이 적용하여 사용하지만, 우리 국어에서는 ‘착한’이라는 표현은 사람에게만 쓰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좋은’이라는 수식어는 사람에게나 사물에게나 다 쓰고 있다. 윤리학은 사람의 행동을 문제삼는 것이지 물건의 좋고 나쁨을 따지는 체계가 아니다. 윤리학에서 사용하는 좋음이란 결국 착함이 되어야 한다. 좋은 사람에는 여러 가지 기준이 있을 수 있다. 멋있는 사람, 돈 많은 사람, 공부 잘 하는 사람, 건강한 사람, 인간관계에 능한 사람, 스포츠를 잘 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일 수도 있지만 나쁜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착한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여기서 어떤 학생이 질문할 수 있다. 어떤 착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착취되고 나쁜 일에 늘 이용당한다면, 그 착한 사람을 과연 좋은 사람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이런 질문은 가능하다. 그러난 이런 질문은 사물에 적용되는 좋음의 기준을 사람에 적용했기 때문에 생긴 의문이다. 이렇게 좋음을 해석한다면 인간을 위한 윤리학이 아니라 사물을 위한 윤리학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인간을 위한 윤리학을 원하며, 여기서는 특히 청소년을 위한 윤리학을 모색한다. 사람을 위한 윤리학에는 좋음이 바람직함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바람직한 것이 무엇인지를 평소에 생각해 본 착한 사람은 나쁜 일에 자신을 이용당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사람이다. 정리하여 말하자면 윤리적으로 바람직한 행동으로 자신을 이끌어야한다는 점에서 착하거나 좋거나 선이라는 말은 다 같은 뜻이다.
3. 바람직함
바람직한 행동은 또 무엇일까? 내가 바라는 것이 사람들 일반이 바라는 것과 같을 경우 나의 행동은 바람직한 행동이 된다. 여기서 사람들 일반이란 무엇일까? 내가 바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 혹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라는 것과 같은 경우 이를 바람직하다고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설명은 경험적 설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바람직함에는 대부분의 사람들 기준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예외 없이 바라는 그런 바람직함이 있다고 한다. 그런 바람직함은 구체적인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형이상학 세계에 존재한다고 한다. 이런 설명은 형이상학적 설명이라고 한다. 우리는 경험적 설명을 먼저 살펴보려 한다.
경험적 의미에서 바람직하다는 것은 행동을 한 나 자신 말고 행동을 받아들이는 다른 사람이 나의 행동을 인정해주고 칭찬해주기도 하고 혹은 나의 행동양식을 따라하기도 하는 그런 행동을 말한다. 그래서 바람직함이란 나의 특수한 관점이 아니라 남의 일반적 관점도 중요하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바람직한 행동을 하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엄마와 갈등이 생겨서 한 동안 대화가 뜸할 때 엄마와의 화해의 표시로 엄마가 좋아할 듯한 행동을 시도한다. 평소 하지 않았던 방청소를 한다든가 공부를 더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다. 내가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을 본 엄마가 나의 행동을 인정해주고 칭찬하다면 그런 나의 행동은 바람직한 것이다. 그래서 많은 경우 바람직한 행동, 바람직스러움이라는 것은 내가 속한 가족, 학교, 지역, 사회, 국가가 일반적으로 원하는 것에 맞춰져있어야 한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행동을 했지만 내 가족이나 학교 선생님은 의외로 나의 행동을 싫어할 수 있다. 이 경우 내가 좋아하는 행동유형과 집단이 원하는 바람직한 행동유형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는 당황스러울 것이다. 다행히 우리 사회적인 인간은 성장하면서 사회가 원하는 바람직함에 대하여 자기의 행동유형을 조절해가는 탁월한 본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 조절의 연습기간이 바로 청소년기이다.
4. 모방하는 사회적 자아
청소년기는 바람직한 행동유형을 찾아가는 시기이다. 결국 자기정체성을 찾아가는 시기라는 뜻이다. 자기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가장 바람직한 과정은 자기 스스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판단능력을 키우는 일이다. 어른이 젖먹이 아이를 키우듯 벌과 상이라는 제도를 통한 일방적인 훈육의 윤리학이라면, 청소년 스스로의 자율적 판단으로 세상을 헤아리는 능력은 만들어지기 쉽지 않다. 아이들은 거울을 통해 어른을 바라보고 따라하면서 성장한다. 이미 교육은 학교 입학 이전부터 거울에 반사된 어른의 행동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거울에 비춰진 모습은 고슴도치인데 토끼처럼 행동하라는 어른들의 강요된 윤리 책이라면 그런 윤리 책이 만 권이 된들, 우리들은 강요된 토끼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거울에 비춰진 고슴도치를 자동적으로 따라하게 되어 있다.
인간은 거울을 보면서 거울에 비춰진 모습이 바로 나라는 것을 안다. 동물원에서 어느 정도 훈련된 침팬지 정도라면 모를까, 동물은 거울에 비춰진 모습을 보고 자기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거울을 향해 흥분하기도 하고 피하기도 한다. 거울에 나타난 모습이 나임을 안다는 것은 인간다움의 기본이다. 그래서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할 수 있게 된다. 타인에 대한 의식은 윤리학의 출발이다. 왜냐하면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내가 다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려운 말이다. 쉽게 말하자면 첫째 나는 남과 다르다는 것을 의식한다. 둘째 나는 남을 따라하면서 내가 성장한다. 즉 나는 남을 모방하면서 나의 자기정체성을 실현할 수 있다. 그만큼 남을 모방하는 행위는 아주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아이는 어른을 모방한다. 우리 모두는 타인을 모방하면서 타인과 함께 하려는 의식을 자연스럽게 갖게 된다. 특히 우리 청소년은 어린이와 달리 또래와 어울리기를 시작한다. 또래 어울림은 이제 부모의 그늘아래서 벗어나서 스스로 정체성을 시험하는 중요한 성장단계이다. 또래집단의 특징은 내가 또래들의 친구들을 모방하면서 동시에 남의 모방을 서로 받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또래 모임의 출발은 나도 어엿하게 남의 거울이 되고 있다는 점을 의식하는 데 있다. 나는 이제 남의 거울이 되어 타인에게 내가 어떻게 비춰지는 지를 자각하고 그에 따라 나를 잘 가꾸어간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남들이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것을 나도 따라하게 되는 자기정체성을 확보하게 된다. 이는 나의 사회화 과정이며 나의 나다운 정체성을 찾아가는 소중한 시간이다.
그러나 또래와 어울리는 시간은 시행착오를 포함한다. 사회적 거울을 통해 타인에게 비춰지는 자아을 잘 닦는 시절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거울 자체를 부정하고 거울보기를 거부한다. 거울보기를 거부하는 시기에, 부모가 자기를 남과 비교하면 가장 싫고 가장 힘들어진다. 어찌보면 거울 자체가 싫은 것이 아니다. 거울을 통해 자기가 남에게 비교당하는 그런 모습이 싫기 때문에 거울도 싫어진 것이다. 또래와의 시간은 이렇게 거울과 함께 하지만 어떤 때는 거울이 싫어지기도 하는 그런 기간이다. 즉 사회적 자아를 만들어가면서 동시에 혼자서 만들어가는 나만의 자아를 추구한다. 모방을 통한 사회적 화해를 배우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자기만의 성곽을 쌓는 개성을 만들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조절과 타협을 배우며 나아가 주체와 개성을 키워가는 소중한 시간이라는 뜻이다. 개성을 만들어가는 시간은 창의성을 위하여 매우 중요하다. 화해를 만들어가는 시간은 도덕을 위하여 정말 중요하다. 사회적 자아와 창의적 자아를 결합시키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의 미래이기도 하다. 모방하기와 개성쌓기의 행동양식을 배워가는 통로가 바로 청소년 윤리학이다.
5. 규범은 절대적인가
그런데 윤리가 딱딱하면 윤리는 사람 행동을 바꿀 수 없다. 윤리적 규범, 윤리 행동강령이 윤리적 강요로 된다면 너무 무서워 겉으로는 응하겠지만 속으로는 상황을 피할 궁리만 할 것이다. 이런 상황응대는 인간의 본성이다. 그래서 윤리는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이어야 한다. 서양의 아리스토텔레스나 칸트 같은 유명한 철학자는 윤리적인 마음이 원래부터 사람 마음속에 구비되어 있어서 자발적으로 올바른 행동을 이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동양의 맹자 역시 불쌍한 사람을 보면 누구나 다 자동적으로 측은한 마음이 생긴다고 말했다. 강요된 윤리가 아니라 상황을 잘 맞추어준다면 자동적으로 윤리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 인간은 그런 마음이 속에 깊이 감춰져있기 때문에 드러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평소부터 생활 속에서 윤리적 행동규범의 연습이 필요하다. 윤리적인 마음 혹은 측은한 마음이 곧 올바른 행동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나의 측은함을 느끼는 마음이 나의 행동으로 옮기도록 하는 생활의 연습이다.
여기서 우리는 올바름과 선함이 같은 것인지를 질문해야 한다. 올바름 역시 바람직함처럼 나 자신만의 문제이기보다는 상황과 환경에 따라 다를 수 있다고 많은 여러 윤리학자들은 말한다. 철학적으로 반성한다면, 한 특정한 사회에 속한 사람들에게 정치지도자들이 올바른 행동의 규범을 지나치게 많이 가르치려 든다면 그 올바름이란 반드시 좋은 윤리가 아닐 수도 있다. 정말 올바른 행동 혹은 올바름이란 좋음이나 선한 행동에서 자동적으로 유발되기 때문에 억지로 가르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문명인으로서 올바른 행동양식은 상호간 다양한 약속들의 체계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 약속을 존중한다는 행동규범을 보여주어야 한다. 길거리 신호등 지키기, 껌밷지 말기에서부터 인터넷 에티켓이나 공공장소에서의 금연, 전철안의 사회적 예절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런 행동규범은 상대적이다. 예를 들어 십년 전에는 식당에서 흡연이 부정한 것이 아니었지만, 지금 이 시대에 공공장소 흡연은 옳지 않은 행동의 표본이다. 시대와 문화의 차이에 따라 올바름의 기준이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착함이나 좋음의 기준도 문화적 차이에 따라 바뀌는 것인가? 이에 대한 생각은 윤리학자마다 다를 수 있다. 우리 책 본문에서 이 문제를 다루게 될 것이다.
6. 즐거운 윤리 : 자유 윤리학
결국 외부에서 강요된 딱딱한 윤리보다 내 마음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윤리를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외부로부터 강요된 윤리를 종속윤리학이라면 내부로부터 우러나오는 윤리를 자유윤리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우리는 자유윤리학을 내 삶의 토대로 만들어야 한다. 자유윤리학을 위하여 윤리규범에 따르는 나의 행동은 즐거워야 한다. 규범에 따라서 행동하기는 하지만 나의 행동이 억지스러워 짜증나기만 한다면 그런 윤리는 진정한 윤리행동이 아닐 것이다. 싫은 일을 억지로 한다면 고통일 뿐이며, 이런 종류의 고통을 피하려는 것은 인간의 성향이다. 짜증나지 않는 윤리는 결국 내가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여 결정한 행동을 하는데서 만들어질 것이다. 짜증나는 윤리보다 즐거운 윤리를 추구하는 것도 역시 사람의 상식적인 성향이다. 즐거운 윤리를 인생에서 구현하는 것이 곧 행복의 열쇠이다.
즐거운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면 우리는 행복하다고 말한다. 즐거운 상태란 고통이 적거나 거의 없는 상태이다. 그러나 아픔과 즐거움 사이에는 칼로 베듯 선명한 구획이 없다. 즐거움을 갖기 위하여 그 전에 아픔이 동반되는 경우도 있다. 청소년에서 청년에 이르는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갈등과 고민을 한다. 방황과 좌절을 맛보기도 한다. 그러면서 자기정체성을 조금씩 확보해간다. 그런 아픔을 뚫고 새로운 즐거움이 잉태될 수 있다. 현재의 아픔이 아프더라도 미래의 즐거움이 예상되고 이 아픔을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면 이 아픔은 아픔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변신한다. 반면에 혀에 달콤한 즐거움을 가져다주기는 하지만 보이지 않는 충치와 당뇨 그리고 비만의 원인이 된다면 그 달콤함의 즐거움은 고통의 씨앗이 될 것이다. 즉 즐거움과 아픔의 차이는 내가 스스로 선택한 나의 자율적 행동에 달려있다. 다시 말한다면 나의 짜증은 내가 하기 싫은 것은 억지로 하기 때문에 생긴 고통의 감정이지, 그 행동을 유발한 대상에 짜증이 담겨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종속 윤리학에 따르는 나의 행동은 아무리 선하고 바람직하고 올바르게 보여도 즐겁지 않으며, 결국 나의 미래를 행복하게 설계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 상황이 약간은 힘들고 어렵고 아파도 내가 선택하고 내가 결정한대로 행동하는 그런 자유윤리학에 수반하는 행동은 결국 즐거움을 자아내게 한다.
무어(G. E. Moore 1873-1958)
올바름과 바람직함이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행동규범이라면 좋음과 착함 그리고 즐거움 등은 나의 주체적 자유를 유발하는 심적 동기와 맞닿아있다. 무어(G. E. Moore 1873-1958)라는 20세기 초 유명한 윤리학자가 있었다. 그는 윤리학의 많은 기준들이 자연주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좋은 사과라고 말할 때 ‘좋음’이라는 것이 마치 사과 안에 들어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좋음, 착함, 선함은 곧 자연적인 대상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감정 안에 있는 심리적 판단의 문제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미적인 감정들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움이란 어디에 존재하는가의 문제이다. 아름다움과 추함은 실제로 나의 감정이 어떻게 발현되는가의 문제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과학자들이 많다. 이런 입장은 상대주의 윤리학의 극단적 경우이다. 이런 상대적 입장도 있지만, 최근에는 아름다움이나 추함에 대한 대체로 일반적인 기준이 우리 마음속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과학적 주장들도 많다. 문화양식이나 역사적 변화에 따라 아름다움이나 추함에 대한 기준이 다르다는 입장을 상대주의 미학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우리 문화나 관습에 관계없이 보편적인 기준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입장을 절대주의 미학이라고 말한다. 이런 기준은 윤리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좋음의 기준은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 다른 상대적이라고 주장하는 윤리학 이론이 있으며, 인간사회와 무관하게 좋음의 절대적인 윤리법칙이 존재한다는 절대주의 윤리이론도 있다. 좋음이라는 것이 나만의 느낌 혹은 공유된 느낌이라면 그런 좋음의 기준은 주관적이거나 상대적인 나의 마음에 소속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나아가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비슷하게 느끼는 느낌에 의존한 것이라면 그런 윤리는 간주관적 혹은 공리주의 윤리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쨌든 절대주의 윤리학은 느낌이나 정서 등의 인간의 경험에 의존하지 않는 절대적 존재로서의 윤리법칙이 존재한다는 입장이며, 형이상학적 윤리학이 여기에 속한다.
윤리학의 이론들은 이렇게 복잡하지만, 우리들에게는 나 자신의 행동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꿀 수 있도록 해주는 실질적인 윤리가 필요하다. 나 자신으로부터 형성된 동기에 의한 행동 준칙이어야 한다. 나로부터의 동기만이 지속적인 자발적 행동을 이끌 수 있다. 그런 행동을 자발적 행동이라고 부른다. 자발성에 의한 행동준칙들이 바로 자유윤리학의 기초이다. 이런 자유윤리학에 기초한 청소년 윤리학은 크게 두 가지 삶의 안내서를 제공한다. 하나는 욕망에 대한 안내서이며 다른 하나는 행동에 대한 안내서이다. 먼저 욕망에 대한 삶의 안내서를 살펴보자.
금지의 윤리학에서는 모든 욕망적 행동을 금지해야 한다는 규범만이 있다. “신발을 질질 끌어서는 안 된다”, “껌을 씹어서는 안 된다”, “떠들어서는 안 된다”, “10등 안에 들도록 공부를 해야 한다”, 등의 행동제약 규범은 많은데 내가 자율적으로 하는 행동안내는 없다. 욕망을 다스리는 것은 윤리학 전체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그렇지만 욕망을 스스로 다스리는 일과 욕망을 누구에 의해서 금지되는 일은 다르다. 욕망이 누구에 의해서 금지되는 그런 금지의 윤리학은 권력의 종속된 윤리학일 수 있다. “너는 오늘부터 날마다 매점에서 우유를 사다가 책상위에 놓아야 해” 라는 명령의 윤리학은 명령자의 욕망의 권력을 채우기 위하여 나의 욕망을 금지하는 일과 같다. 욕망은 나쁜 것이어서 제거되어야 할 무엇이라는 식으로 윤리학이 구성되었지만 그런 윤리학은 진정으로 삶의 행복이 높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욕망은 한편으로 문화적 창의성을 생산하는 끊임없는 생명의 힘이기 때문이다. 금지의 윤리학으로 욕망을 금지시킬 수 있다고 치더라도 그 금지된 욕망 속에 창의성을 낳는 욕망도 같이 사라진다. 그래서 우리에게 금지의 윤리학이 아닌 자유의 윤리학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