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의 헤겔; 이방인과 소통, 이해, 그리고 연대[한철연 교육강좌]-③

[한철연 교육강좌]-③

3강 안산의 헤겔; 이방인과 소통, 이해, 그리고 연대

강사: 이정은 (연세대 외래교수)
후기: 한길석(한철연 교육분과장)

 

한철연 교육부 강좌가 어느덧 세 번째에 접어들었다. 이번 강좌는 ‘안산의 헤겔; 이방인과 소통, 이해, 그리고 연대’이라는 주제로 이루어졌다. 강의에는 열 여섯 명 남짓의 수강생들이 참여하였다.

이정은 (연세대 외래교수)/ 사진: 조배준 한철연 회원

강좌를 맡은 이정은 교수는 한국 사회가 문화적 소수자와 다수자 간의 문화 충돌이 일어나는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다고 규정한다. 따라서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와 소통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남북 분단에서 비롯된 새터민 문제도 이러한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 대부분의 새터민은 이념에 대한 반발보다는 생계를 이유로 이주를 감행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지녀왔던 정체성(이념, 가치관, 생활양식 등)이 폄훼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서구에서 다문화주의는 근대 국민(민족)국가가 등장한 이후 발생한다. 새로 재편된 근대국가의 틀 속에서 새로운 사회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단일 언어에 의한 국민 교육이 요구됐다. 획일적 국민 교육은 사회통합에는 기여했지만, 소수 집단의 문화가 훼손되는 현상을 낳았다. 결국 다문화주의는 소수 문화의 존중이라는 문제 의식에서 형성된 것이다.

다문화주의에 대한 논의는 미국, 호주, 캐나다 등의 이민국가들에서 활발하다. 이들 국가에서는 다양한 문화 집단의 정체성을 권리 보호의 문제로 변환시켰다. 자유주의적 정치철학에 기초하고 있는 이러한 입장은 각 집단에 고유한 문화적 선택권을 보호해주는 제도적 여건을 제공한다는 이점을 지닌다. 하지만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는 문화적 지배권을 쥐고 있는 다수 집단이 소수자 문화를 관용적으로 포용함으로써 마침내 동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또한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는 의도하지 않게 소수자들의 처지를 불리하게 만들기도 한다. 소수 문화자가 자신의 고유한 문화를 자유롭게 선택하게 되면, 중심을 이루고 있는 다수자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적 때문에 최근 서유럽에서는 상호문화주의적 입장이 등장하고 있다.

상호문화주의는 1990년대 초 독일 및 오스트리아 등의 서유럽 선진국에서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견해이다. 이들 국가는 이민국가가 아니라 단일 민족국가적 특성을 강조하면서 이민자 정착에 대한 제도적 조치를 회피해왔던 다문화주의 정책의 후진국이었다. 그렇지만 이민자 2세, 3세 문제가 심각해지자 이들 국가에서도 다문화주의적 정책이 모색되고 있다. 그러나 독일 등의 연구자들은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보다는 상호문화주의적 접근을 강조하고 있다. 상호문화주의는 각 집단이 보유한 문화의 동등한 위치를 강조한다. 이 입장에는 주도 문화 및 중심 문화라는 관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주도 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동화를 고려하지 않는다. 물론 상호문화주의도 문화 집단 간의 통일을 지향한다. 하지만 이 통일은 각 문화 집단의 고유성을 인정하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문화적 통일은 문화 집단 간의 긴장과 갈등을 함축하는 상호작용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상호문화주의가 지향하는 문화적 통일은 헤겔의 변증법적 통일의 형식을 활용하고 있다. 물론 헤겔 철학 내부에는, 특히 그의 역사철학에는 오리엔탈리즘의 흔적이 강하다. 하지만 헤겔 철학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변증법적 사고 형식이 문화적 갈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강렬한 영감을 제공하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헤겔은 자기 이해는 타자 이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입장을 제시했다. 이러한 발상은 상호문화적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 각 문화 집단은 이방인을 통해 자신의 문화를 이해하게 되고, 이방의 문화와 자기 문화 간의 갈등적 상호작용 속에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할 수 있게 된다. 이상과 같은 면에서 볼 때 헤겔의 철학은 오늘날 제기되는 문화적 다원주의 문제의 해결에 일정한 의미를 부여해준다고 할 수 있다.

 

사진: 조배준 한철연 회원

 

3강 후기

안산에 헤겔이 없었습니다. 헤겔에 대한 좀 더 깊은 철학적 강의였으면 좋았겠다 싶습니다. 헤겔 이론과 외국인 노동자 간의 관계가 조금 끼워맞춘 듯해서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짧은 시간에 많은 내용을 설명해 주시려다 보니 몇 부분 빠진 내용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지만 열정적인 강의 무척 흥미롭게 들었습니다. 상호문화 교육이라는 언뜻 보면 이상적이어 보이는 이론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독일의 선례를 통해 이 이론을 실제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문화적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 고민들로 연결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느덧 우리 곁에 다가온 다른 피부색, 다른 언어의 이방인들이 단순한 ‘타인’이 아닌, 우리 외부의 또 다른 ‘우리’일 수 있다는 생각의 단초를 얻었습니다.

다문화국가(이민국가)의 현 사회상을 잘 짚어줘서 좋았으나 문제 의식을 가질 수 있는 현실 측면이 이야기가 안 돼서 조금 아쉬웠습니다.

헤겔의 ‘변증법’이 이렇게까지 현실 문제의 해결 방안의 이론적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특히, 다문화주의의 한계를 지적한 점이 큰 수확이다. 상호문화주의라는 개념이 반갑다.

매 강의가 1시간 30분으로 소화되기에는 다소 부족한 듯 합니다. 2시간 강의에 중간 10분 휴식하는 걸로 하는 것이 좋을 듯.

한국의 다문화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강의였음.

내실있는 강연 잘 들었습니다. 이주민 노동자 자녀가 빈곤의 악순환 당하는 일이 가슴 아픕니다.

1, 2강에 비해 이론적인 측면의 접근을 하셨던 것 같은데,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도 이러한 방향의 강의가 도움되는 것 같습니다.

착취의 공범: 돈벌이가 시원치 않은 마르크스 [한철연 교육강좌]-②

[한철연 교육강좌]-②

착취의 공범: 돈벌이가 시원치 않은 마르크스

강사: 이재유(건국대 외래교수)
후기: 한길석(한철연 교육부장)

 

 

지난 4월 1일 한철연 교육부의 두 번째 강좌가 열렸다. 참석자들은 첫 번째 강좌보다 적었지만 첫 날보다는 열띤 분위기로 강의 및 토론이 진행되었다. 두 번째 강좌는 이재유 회원(건국대 외래교수)의 “착취의 공범: 돈벌이가 시원치 않은 마르크스”였다. 강의 초반에는 비교적 가라앉은 분위기로 시작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강의의 열의가 살아나고 있었다.

이재유 교수 /사진 조배준 한철연 회원

 

그의 강의는 ‘communism’의 해석 문제에서 시작했다. 흔히 이 용어를 ‘공산주의’로 번역하는데, 이 번역 용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 본다면 공공을 위해 공동으로 생산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에도 공산주의적 방식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동기는 다르지만 겉으로만 본다면- 모두를 위해 공동으로 생산하는 과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communism’을 번역하지 않고 ‘코뮤니즘’으로 표기하자는 제안도 있다.

마르크스의 의도에서 보자면 공산주의 사회는 ‘자유로운 개인들이 연합하는 사회’를 의미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의 생계가 자본의 논리에 구속돼 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구속에서 해방된 사회를 공산주의 사회라고 규정했다. 그에게 공산주의 사회란 모든 개인들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여건을 공동으로 생산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자유가 핵심 문제로 부각된다. 마르크스에게 자유란 누구도 착취당하지 않으며 착취하지도 않는 사회를 의미한다. 이런 자유 상태에서 맺어지는 인간 관계는 수평적인 평등 관계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마르크스에게 자유와 평등은 대립적 관계로 제시되는 게 아니라 동근원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그는 노동을 통해 자유와 평등을 구현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노동이란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누리기 위해 하는 모든 활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 공산주의는 억압된 노동의 해방을 지향하면서 여러 활동과 제도를 제안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착취와 억압의 요소가 뿌리 박혀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공산주의적 체제와 제도가 완비된다 하더라도, 착취와 억압의 생활 양식을 바꾸지 않는 한 공산주의적 이상은 실현되지 않는다.

이재유 회원은 이러한 현실의 예로 가정 내에 뿌리 박혀있는 여성 착취의 문제를 제시했다. 가정 내에 남성이 여성의 노동을 착취하는 형태가 지속되는 한 우리의 내면에 뿌리박힌 착취 의식은 사라지기 어렵다는 것이다. 착취와 억압의 삶은 가정 영역 뿐만 아니라 우리의 공동체 곳곳에 박혀 있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우리는 일상 생활 영역에서의 착취를 제거하는 활동에 나서야 한다. 가정 내의 여성 착취 문제를 해결하고, 누군가의 희생을 간접적으로 강요하게 되는 생활 구조를 제거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단순히 노동자의 임금을 높이고 기본 소득을 지급한다고 해서 착취의 생활 문화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높은 임금과 기본 소득의 취득은 이웃에 대한 연대감 대신 사적 삶의 풍요를 지향하는 욕망을 키운다. 이런 사회 운동은 공적 연대감 대신 오히려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의식을 조장한다.

강의 이후 30분 간 토론을 한 후 질의 응답 시간이 이어졌다. 수강생들은 다양한 질문을 제기하면서 고민의 수준을 높이고 있었다.

 

 

 

사진 조배준 한철연 회원

수강생 후기

자본주의 모순에만 집중하지 말고 현실적인 공산주의 이행 방안, 공산주의의 문제점 등에 대한 언급이 이루어졌으면 좋았을 것 같다.

특정 철학자의 사상과 이념을 소개하는 강의를 기대했는데 그것보다는 강연자의 해석에 충실한 강의였던 것 같다. 이론서를 읽고 싶은 충동을 만들어 준다.

쉽게 풀어 설명해준 강의였다.

늦어서 제대로 못들었지만 집중도는 최고였던 것 같습니다.

자유로운 각 개인들이 연합하는 사회를 만들려면 민주노총이 큰 역할을 해야 한다는 말이 인상 깊었다.

마르크스에 대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생계를 위한 노동에서 이루어지는 착취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착취를 같이 생각해봐야 한다는 교훈적인 강의였다.

일요일 마다 대형 교회에서 하듯이 오늘과 같은 강의로 전국에서 철학 강의가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램!

일반론 위주의 강의로 진행되어 치열한 고민과 토론 거리를 주는데에는 미흡했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대에 관한 자각은 어려운 문제라 여긴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듯 하여 희망을 갖는다.

계급 모순이 풀리면, 성적 모순도 풀릴 것이라고 하는 주장들을 이제까지 들어왔는데 이번 강의는 그것을 뒤집은 내용이어서 매우 흥미로웠고 공감도 많이 했다.

가사노동의 생산 노동 비용이 임금에서 제외되었다는 사실이 페미니즘 운동의 단초가 된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자유로운 개인들이 생활 속에서 코뮌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개인들의 노력과 시민의식이 필요하다.

맑스에 대한 또다른 관점을 보여준 강의였다. 강의와 토론, 질의 응답 모두 즐거웠다.

사회 개혁에 대한 필요성은 절감하지만 그것이 공산주의를 통해 이루어질 것인가에 대해 의문이긴 하다. 실패한 공산주의 국가들의 사례들이 있는 만큼 더 현실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철학의 현실적 접근이었던 것 같습니다.

 

들뢰즈의 행복론: 행복한 인생의 조건[한철연 교육강좌]-①

[한철연 교육강좌]-①

들뢰즈의 행복론: 행복한 인생의 조건

강사: 이성백(서울시립대학 교수)
후기: 한 길 석(한철연 교육분과장)

 

 

새 봄과 더불어 한철연 교육부 강좌가 시작되었다. 2012년 3월 25일 “들뢰즈의 행복론: 행복한 인생의 조건”이라는 주제로 시작된 한철연 교육부 강좌는 총 25명의 수강생과 더불어 힘차게 출발했다. 강의 전 김성민 회장의 인사말과 이순웅 연구협력위원장의 소개말 등으로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이 진행되었다. 25명의 수강생들은 제비뽑기를 통해 6개의 조로 나뉘었다.

수강생들의 구성은 다양했다. 연령은 20대에서 60대까지, 직업은 무직자, 대학생, 대학원생, 사서, 시민 활동가, 직장인, 프로그래머 등의 분포를 보였다. 이전 교육부 강좌를 이수한 이들도 몇몇 있었다.

강의는 예정 시간보다 30분 늦은 2시 30분에 시작되었다. 첫 번째 강의는 이성백 서울 시립대 교수의 행복론이었다. 이성백 교수는 서양 철학 전통에서 전개한 행복 개념에 대한 비판으로 논의를 시작했다. 그에 따르면, 서양 철학의 전통에서 행복은 이성적 삶을 추구하면서 성취되는 것으로 가르쳐 왔다고 한다. 이는 행복의 성취 과정에서 감성적 욕망을 배제하는 경향을 초래했다. 스토아 학파의 ‘아파테이아’나 에피쿠로스 학파의 ‘아타락시아’ 개념도 따지고 보면 모두 욕망을 절제하고 이성적 삶을 추구함으로써 행복에 이를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결국 이러한 경향은 철학적 행복론에서 합리주의적 행복론이 지배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성백 서울시립대 교수 ⓒ조배준 한철연 회원

그러나 들뢰즈의 행복론은 감성과 욕망의 경험에 주목한다. 행복은 감성과 욕망을 경험하는 강도에 달려있으며, 행복은 소망하던 욕망이 충족되는 강렬한 순간의 체험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체험을 풍부히 하기 위해서는 문화적 능력과 기술의 함양이 필요하다고 한다. 푸코식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다양한 욕구들이 아름답게 피어오를 수 있게 하는 미학적 존재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의 욕구를 삶 속에서 아름답게 조형하는 미학적 존재의 기술이 아무리 탁월하게 갖춰진다고 해서 우리 모두의 삶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불안정은 개인의 행복한 삶을 붕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개인의 행복은 사회적 행복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사회적 행복을 구현시키는 방법 중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혁명이라는 사건은 가장 극적이다. 혁명은 개인의 감성적 요구를 가장 강렬하게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혁명은 기존의 답답하고 억압적인 틀을 깨고 새로운 사회적 활력이 용솟음치도록 만든다. 이 순간 각 개인은 자신의 욕망이 충족되고 있음을 강렬하게 경험한다는 것이다.

강의가 1시간 30분 동안 진행된 후, 각 조는 강의에 관련한 조별 토론을 30여 분 간 진행했다. 염려와는 달리 수강생들은 열심히 토론했으며, 토론 이후 이어진 질의 및 응답 시간에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갔다. 6시 무렵, 예정된 프로그램을 마치고 첫 날을 기념한 뒷풀이 자리로 이동했으며, 몇몇은 두 번째 뒷풀이까지 자리를 함께 했다.

 

ⓒ조배준 한철연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