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의 눈을 벗어버린 진짜 ‘눈’ [청춘의 고전 시즌2]- ⑫

[청춘의 고전 시즌2 /그림으로 읽는 철학]- ⑫

일시: 2012. 9. 8.(홍대입구 상상마당 강의실)

인공의 눈을 벗어버린 진짜 ‘눈’

– 세잔의 <대수욕도>, 그 감각적 리듬의 철학적 정체 –

강연: 조광제 (사)철학아카데미 운영위원

▲ 로브에서 본 생 빅토와르 산, 1904~1906 ⓒ폴 세잔(Paul C?zanne)

이 그림은 프랑스의 화가 폴 세잔(Paul C?zanne, 1839~1906)이 찬미해 마지않았던 자기 고향의 ‘생 빅토와르 산’을 그린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보이는 산의 모습은 우리가 실제로 보는 자연 풍경과는 많이 달라 보인다.

▲ 사진으로 촬영한 실제 ‘생 빅토와르 산’의 모습

실제 사진과 비교해 봤을 때 색면들을 잘게 썰어서 표현한 것처럼 보이고 색이 서로 뒤섞여 있는 듯이 보인다. 세잔은 이 그림에서 빛에 의해 반짝이는 사물의 겉모습을 표현하지 않았다. 세잔은 사물들이 지니고 있는 색채들이 서로 연관하면서 뒤섞이고 있는 움직임을 극단화하여 표현한 것이다.

세잔이 만년에 그린 이 작품은 세잔이 어느 정도로 감각적인 리듬에 크게 심취하게 되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세잔의 감각적인 색채의 표현에 감동하여 자신의 철학을 전개한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 Ponty, 1908~1961)가 있다. 메를로 퐁티에 의하면 세잔이 어느 날 생 빅토와르 산의 풍경을 보고 있다가 빠져들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풍경이 내 속에서 자신을 생각한다. 나는 풍경의 의식이다”
(Le paysage se pense en moi, et je suis sa conscience.)

동양식으로 말하자면 물아일여(物我一如)의 경지랄까. 주체와 대상이 전혀 구분이 안 되는 상태이다. 이 경지는 ‘나’라는 존재가 풍경의 색을 보는 것이 아니라 ‘풍경’이 나를 통해서 자기의 색을 보는 것이다. 마치 지독한 섹스의 경지랄까. 지독한 감각의 세계에서 사유는 불필요하다. 메를로 퐁티는 자신의 철학을 전개하면서 사유와 대결을 벌인다. 사유중심의 철학에서 감각중심의 철학을 구축한 학자가 바로 메를로 퐁티이다.

메를로 퐁티의 철학

메를로 퐁티의 철학은 ‘몸철학’ 이라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몸현상학’이다. ‘현상학’은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로부터 시작되는데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의 ‘실존철학’과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의 ‘실존주의(현존주의)’는 모두 후설의 영향을 받아 성립되었다. 메를로 퐁티의 ‘몸철학’-‘몸현상학’도 후설의 현상학에서 출발한다. 현상학에서는 일단 눈에 보이는 것을 가장 근원적인 것으로 보자는 것이다. 이것을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만약 사유의 출발을 형이상학적인 ‘신(神)’으로부터 시작하려 한다면 그 태도는 비현상학적인 것이다. 현상학의 세계에서는 눈에 구체적으로 보이고 주어지는 것들을 바탕으로 삶이 이루어진다.

‘몸’을 바탕으로 해서 삶을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정신’, ‘의식’ 같은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추상적인 것을 가지고 바라볼 것인가? 메를로 퐁티는 정신을 ‘체화된 의식(conscience incarn?e)’이라고 했다. 몸을 현상학적으로 파악하면서 몸과 정신은 서로 얽혀있고 정신이라는 것은 몸의 일부가 된다. 또 메를로 퐁티가 맑스주의자라는 점에서도 그의 철학적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흔히 맑스(Marx)의 유물론을 유물론적 관점이라 한다. 맑스는 “개인적 의식은 사회적 존재의 산물이다. 사회적 존재는 물질관계와 육체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맑스는 유물론적 관점으로 세계를 보았고 메를로 퐁티는 몸이라는 것은 통해 맑스적 유물론을 입증해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메를로 퐁티의 철학은 직접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것에 관심이 크다.

몸의 핵심 : 감각과 운동

감각과 운동은 상호간에 반드시 서로 수반되는 관계에 있다. 예를 들어 어느 한 방향에서 소리가 울린다고 할 때 우리는 귀라는 감각기관으로 소리를 느끼는 동시에 소리 나는 방향으로 고개나 눈이 돌아가게 된다. 이렇게 감각과 운동은 같이 일어난다. 운동을 통해 새로운 감각이 주어지게 되고 다시 감각이 주어지니 신체의 운동이 발생한다.

감각과 운동은 우리의 삶과도 관계한다. 인간의 삶에 있어 평생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노동’과 ‘여가’이다. 노동은 ‘운동’이 중심이 되고 여가는 ‘감각’이 중심이 된다. 조광제 교수는 맑스의 말을 빌려 노동은 인간을 소외시키는 본질적인 것이라고 하면서 노동시간을 줄이고 여가시간을 최대한 늘려야 하며 감각적인 삶을 향유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의 기초적인 목표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삶을 향유한다는 것이 운동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춤을 추는 즐거움이 몸의 운동에 있지 않고 노래하는 것이 입의 운동에 있지 않다. 즐거움의 본질은 춤추고 노래하는 동안 운동을 통해 감각적인 것이 나에게 들어오면서 만들어지는 감각적 즐거움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운동을 통한 행위인 노동 자체는 우리 삶의 기초적 목표될 수 없다.

그래서 노동보다는 여가에 대해 생각하면서 우리는 최대한 감각적인 것을 추구해봐야 한다. 인간 삶의 기본적인 목표가 여가적인 삶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맑스는 “자본주의가 끝나고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세계는 공산주의 사회이다. 이 사회가 도래하면 그 사회는 ‘전면적이고 심오한 감각을 갖춘 인간들을 사회적 형식으로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맑스의 『경제학 철학 수고』를 참고하길 바란다. 맑스의 감각론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맑스가 말하는 공산주의는 이념을 중심으로 완성된 사회가 아니고 심오한 ‘감각적 인간’들이 많이 양산되는 사회를 추구하는 과정으로서의 사회를 말한다. 그런 사회를 구성하려면 이성적 사유와 분절적 사고의 틀을 벗어나 감각적 세계에 대해 눈을 떠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세잔은 분명 다른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감각의 영역을 개발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최대한 회화적으로 표현했다.

폴 세잔의 그림은 운동의 부분보다는 감각적인 부분이 훨씬 강하다. 영어로 ‘에스테틱(aesthetic)’이라는 말이 있다. ‘미학’이라는 뜻을 가진 이 말은 독일어로 ‘?sthetik’이고 이 말은 그리스어 ‘Aisthesis’에서 왔다. ‘Aisthesis’은 ‘감각’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미학이라는 말보다 ‘감각하기’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조광제 교수는 미술도 아름다울 미(美)자를 써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쉬운데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한다. 감각을 추구하는 것이다.(미술보다는 ‘감각술’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미술에서는 감각문제에 집중을 한다. 어떻게 감각을 재구성해서 표현하는가의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우리는 세잔의 그림에서 세잔이 감각을 어떻게 소화해서 처리하고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존재의 우연성과 현존주의

세잔은 색의 존재성에 대해 언급했고 메를로 퐁티는 세잔의 그림에 감동받아 여기서 모티브를 얻어 ‘살존재론’의 철학을 만들어 냈다. 참고로 메를로 퐁티 철학을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보면 전기는 ‘몸현상학’이고 후기는 ‘살존재론’이라고 할 수 있다. ‘살존재’란 무엇인가? 조광제 교수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일단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천체물리학에서 말하는 빅뱅 이후 최초 무한에너지에 대해 종교에서는 ‘신’이라고 말한다. 무한적인 존재를 신으로 설정하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신의 섭리에 의해 만들어진 ‘필연적인 존재’들이다. 그래서 ‘나’라는 존재가 없으면 이 우주는 중요한 존재 하나를 잃게 되는 것이고 말 그대로 야단나는 상황이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이른바 ‘필연성 중심의 사유’를 하게 된다. 그러나 철학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도대체 신이 어디 있나?’ 나는 우연히 태어났고 내 삶을 유지하는 것은 우연성이다. 만약 나라는 존재가 없다고 하더라도 이 우주에는 아무 상관도 없다. 바로 이것이 사르트르의 ‘존재의 우연성’이다.

필연성을 바탕으로 살게 되면 인간은 삶에 있어 본질적인 무엇인가를 상정하게 되고 우연성을 바탕으로 살아간다면 ‘현존’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우연성의 삶의 입장에서 보면 지금 이 순간 아무 이유 없이 움직이고 꿈틀거리며 폭발하는 그 상태가 존재하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엄밀히 말해 현존주의라 할 수 있고 본질주의와 대비된다. 이 현존주의는 절대적인 자유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색체주의자 세잔과 색의 존재성

본질주의는 인간의 감각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조광제 교수는 묻는다. 우리가 물리학 공부할 때 질량, 가속도, 운동량, 에너지에 대해서는 언급했지만 ‘색’에 대해 거론한 적이 있는가? 물리학에서 설명하는 색이란 빛이 있어 사물에 빛이 반응하면서 우리 인간과 관계를 맺으며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색은 원리가 아니다. 물리학에서 빛 자체가 색이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다시 말하면 색은 인간에 의존해서 성립한다는 말이 된다. 이것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것이 세잔이다.

“온 우주는 색으로 되어 있다. 심지어 나 자신도 색으로 되어 있다”, “마치 내가 끝없이 무한한 색채로 덮여 있는 것 같은 느낌이야. 바로 이 순간이네. 내가 그림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은. 무지개 색으로 빛나는 카오스 상태라고나 할까. 나는 내 그림의 배경 앞에 서서 몰아의 경지에 빠지고 마는 거야” – 세잔이 친구 조아생 가스케과 나눈 대화 中 –

세잔은 색이 인간과 무관하게 본래 우주에 있고 온 우주를 뒤덮고 있다고 했다. 하나하나 관통하고 속속들이 존재한다는 것. 예를 들어서 방 안에 사람이 있을 때는 사물들이 색을 가지고 있다가 사람이 방을 나가면 그 공간 안의 모든 물체의 색이 소멸하고 촉각적 질감마저 사라지는가? 그리고 사람이 문을 살짝 열고 방을 훔쳐보면 물질은 다시 색과 물체의 질감을 만들어내는가? 그렇지 않다. 물리학에 의하면 색은 주관적으로 존재하지만 세잔에 의하면 색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색이 원래 그 자체로 있다는 것을 주장한 세잔은 매우 강력한 색체주의자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대로 자신의 그림으로 표현되었다. 메를로 퐁티는 무엇인가에게 색이 주어져있고 사물이 우리에게 감각된다는 사실을 매우 신비하게 느꼈다. 그런데 조광제 교수는 사물이 감각된다는 사실을 무시했던 것이 서양철학의 역사라고 한다. 플라톤(Plato)의 이데아(Idea)는 감각되지 않고 사유되는 것이다. 생각되기만 할뿐 이데아는 손으로 만질 수 없고,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플라톤에게 감각되는 것은 모두 가짜이다. 플라톤은 사물을 비감각적으로 본다. 감각은 그저 생각을 돕기 위한 것이다. 이런 생각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이 현대 물리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어떤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물과 결합되어 있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눈으로 보이고 만져지는 것은 속성이다. 실체[장미꽃]+속성[붉다, 둥근 잎의 형태]의 경우에서 실체라는 것은 우연히 속성이 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실체는 결국 ‘감각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진짜 존재라는 것은 색으로 되어있지 않다는 것. 실체라고 하는 것은 속성이 뒷받침할 수 없고 속성 자체는 실체가 될 수 없기에 실체에 우연히 속성이 들러붙어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유가 데카르트(Descartes)에 오게 되면서 감각적인 것을 제거하지 않으면 진리에 들어갈 수 없다는 생각이 서양철학 전반을 관통하게 된다.

색의 존재성과 살존재론

감각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던 서양철학의 역사와 달리 동양에서는 ‘사물’=’색’으로 본다. 혹은 색을 성적인 것과 결부시켜 얘기하기도 한다. 색기(色氣)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색(色)’과 ‘성(性)’은 서로 떼려야 땔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이 둘은 서로 가장 감각적인 것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조광제 교수는 이 대목에서 ‘보는 자’와 ‘보이는 것’, 즉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 한다. “만약 내가 여러분을 지금 보고 있는데 내가 본다는 것이 여러분의 입장에서는 내가 여러분을 보는 것이 보이는 것이죠, 내가 여러분을 본다는 것이 보입니까? 그렇죠, 보입니다. 그렇다면 보는 내가 주체가 아니라 내가 봄이 여러분에게 보이는 대상이 됩니다. 주체와 대상이 전도되는 것이죠” 사람과 사람이 악수하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만짐’을 만진다는 말이 성립한다. 악수도 일종의 감각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좀 더 수위를 높여보자. 남녀의 키스와 섹스도 마찬가지다. 주체적인 활동에 대한 감각은 주체와 대상의 활동이 뚜렷이 구별될 수 없다. 생각해서 구분하기 전에는 하나로 ‘혼융’되어 있는 상태이다. 섹스가 그렇지 않은가? 내가 저이를 만지는지 저이가 나를 만지는지… 섹스에서 논리적인 사유는 필요하지 않다. 논리적 사유가 없어야 관계가 가능해진다.

이 혼융된 상태가 되었을 때를 사르트르는 ‘살’이 되었다고 한다. 사르트르는 “애무는 몸을 살로 바꾼다”고 하였다. 프랑스말로 ‘몸’은 ‘corps(남성명사)’이고 ‘살’은 ‘chair(여성명사)’이다. 몸은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고 살은 도구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도구를 쓰다듬으면서 사용할 수 있는가? 없다. 쓰다듬는 행위자체는 문명을 벗어난 행위이다. 도구는 과학기술이라고 할 수 있고 도구는 기능성, 이용성, 유용성을 가진다. 이 도구적 성격 안에 있을 때는 감각자체를 전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문명생활에 있어 감각은 부수적인 것이 된다. 현대 산업디자인만 보더라도 모든 디자인은 기능성을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디자인된다. 현대 자본주의적 시장가치가 지배하는 문명의 세계에서는 기능과 감각의 자리가 본말이 전도된다. 세잔의 그림은 본말이 전도된 사회에 사는 사람들에게 감각의 세계에 온전히 들어가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순수 감각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은 ‘몸’에서 ‘살’로 가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사유를 통해 주체와 객체의 주고받는 관계를 구분하거나 분리하지 않고 사물과 감각이 완전 혼연일체가 되는 세계를 구현하는 것이다. 이 경지는 마치 남녀가 서로를 쓰다듬으며 키스에 몰입해있는 순간이며, 이 순간은 이른바 ‘물아일여(物我一如)’의 경지와 같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 이렇다는 것이 세잔과 메를로 퐁티의 생각이다.

모든 존재는 감각덩어리

조광제 교수는 언어연구에서 인간이 내뱉는 최초의 말의 근본적 형태는 ‘외침(비명)’이라고 한다. 사람이 비명을 지르는 상태는 도저히 비명을 지르면 안 될 상태일 것이다. 이 상태는 가장 감정적이고 감각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다. 가장 감정적이고 감각적인 상태에서 인간은 말을 잘 잇지 못하고 더듬거리기도 한다. 세잔이 풍경을 보고 느끼는 방법은 아마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세잔은 인간의 이해관계와 도구적 시각 등을 모두 배제한 순전(純全)한 광경을 원했다. 그리고 “세계가 우리를 어떻게 만지는가(쓰다듬는지)를 볼 수 있도록 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서로 만지고 만져지는 것은 사람끼리는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인간과 사물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서로 만지고 쓰다듬을 수 있는가?

조광제 교수는 자신의 저서 『미술 속 발기하는 사물들』의 내용을 들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떤 인간이건 또는 어떤 사물이건 등속도로 살살 쓰다듬으면 발기한다. 사물이 나(사람)를 쓰다듬는 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온 우주는 아주 감각적인 것으로 뭉쳐져 있는 성기(性器)라고 할 수 있다. 메를로 퐁티는 온 우주가 ‘살’로 되어있다고 했는데 ‘살’이라는 것은 모든 사물이 온통 ‘감각덩어리’라는 것이다” 조광제 교수는 메를로 퐁티의 존재론을 ‘살일원론’이라고 이름 붙인다. “우주와 감각한다는 것은 온 도시를, 온 산 속을 걸어 다니면서, 그것이 곧 성기 속을 돌아다니는 것과 같다고 느끼는 것이고 그걸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세잔이 말한 경지”라고 한다.

조광제 교수는 이 경지를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방법을 넌지시 알려줬다. 그 방법은 간단하다.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자신 앞의 광경을 본다. 그렇게 자신을 감각에 맡기고 있다 보면 음악이 광경으로 나타나는 순간이 있다고 한다. 이런 순간이 이른바 공감각(Synesthesia, 共感覺)이다.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처럼 소리를 들을 때 색을 보고,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처럼 색을 볼 때 소리를 듣는 사람이 공감각을 가진 사람들이다. ‘기의(記意)’를 빼고 순수 ‘기표(記標)’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 이 상태는 비유하자면 마치 성기 속을 돌아다니는 것과 같다.

‘살’은 프랑스어로 ‘chair’이고 형용사는 ‘charenl’이다. ‘육체적인’, ‘관능적인’ 이란 뜻이다. 온 우주가 살로 되어있다는 말은 온 우주는 ‘관능적’이라는 것. 다시 말해 온 우주는 성기다. 그리고 발기하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우주의 모든 존재가 그렇다. 세잔은 “세상이 ‘색’으로 되어있다”고 했고 메를로 퐁티는 “세상은 ‘살’로 되어있다”고 했다. ‘색’을 느끼고 ‘살’ 자체를 느끼는 것이 이 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이다.

세잔의 그림들

▲ 농부, 1891 ⓒ폴 세잔(Paul C?zanne)

이 그림에서 눈은 덕지덕지 여러 색깔로 표현되어 있다. 인상주의적 기법인데 그림 속 대상이 다양한 관계 속에서 주변의 사물들과 동일한 근원을 지닌 하나의 사물임을 드러낸다. 세잔의 인물화는 대부분 눈에 초점이 없다. 세잔은 사람의 주체성과 인격을 그리려 한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존재하는 사물을 그리려했기 때문에 이런 표현방법을 썼다. 이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농부가 입고 있는 옷의 중량감이다. 이 부분에서 세잔이 인상주의를 극복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세잔은 인상주의에 대해 사물의 ‘옹골찬 사물성’을 다 사라지게 만든다고 평한다. 인상주의는 빛이 사물의 표면에 번뜩일 때 그 표면 자체를 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잔은 육중한 ‘사물성’을 그림 안에서 다시 회복시키려 한다.

▲ 과일접시가 있는 정물, 1879~1880 ⓒ폴 세잔(Paul C?zanne)

세잔을 대표하는 그림 중 하나이다. 이 그림은 행태를 왜곡한 것으로 유명하다. 자세히 보면 과일 그림의 받침대가 오른쪽으로 치우친 느낌이 든다. 뭔가 어색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오른쪽 반대편에 식탁보가 어지럽게 놓여 있다. 왜 이렇게 그렸을까? 이에 대한 메를로 퐁티의 해석은 ‘보이지 않는 시선의 운동을 보이는 모습으로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과일그릇의 어색한 묘사와 널브러진 식탁보는 그림의 균형을 잡아준다. 색채의 표현도 독특하다. 흰색에는 녹색의 느낌이 남아있고 벽을 보면 녹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이런 표현은 벽 속에 갇혀있는 녹색을 해방시켜서 주변의 색이 주변의 다른 여러 대상물의 색에 와서 붙게 만드는 효과를 준다. 색이 마치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색이 흘러넘친다고 할까. 이제 사과를 보자. 어둡게 채색된 부분이 있어서 무게와 깊이가 있어 보인다. 인상주의자들은 짙은 색을 쓰지 않았지만 세잔은 짙은 채색을 통해 사물의 무게와 깊이를 표현한다. 또 접시 위의 사과는 초록색과 붉은 빛이 혼재되어 나타난다. 사물이 색들을 서로 주고받음을 표현한 것이다. 색깔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우리 실생활에서도 빛의 대비와 같은 효과로 인해 색이 서로 주고받는 것을 경험한다. 색깔은 따로 놀지 않는다. 하나의 색깔은 주변의 여러 색깔이 연동해서 하나의 색깔을 드러낸다. 이것이 실제로는 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세잔의 그림은 실제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끔 그렸다. 실제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로 지각할 때 이런 내적인 구조가 없이는 볼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내적인 구조를 눈에 보이게끔 반영하는 방식으로 그림에서 드러낸 것이다. 대단히 깊이 있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겠다.

▲ 에네시 호수, 1896 ⓒ폴 세잔(Paul C?zanne)

세잔은 색이 서로 연동하는 것을 표현하면서 그림 속 대상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왼쪽에 보이는 나무 색깔은 매우 짙다. 나뭇잎의 무성함을 검게 처리해서 깊이를 나타낸다. 그리고 원래 잎의 초록색은 바위에 맺혀 있다. 바위의 초록색과 무성한 잎을 표현한 검정색을 동시에 보게 된다. 재밌는 것은 나뭇가지가 뻗쳐서 산의 능선을 구성하고 있는 모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나무와 아주 멀리 있는 산을 결합시켜서 아주 묘한 이중성을 나타낸다. 이 그림의 느낌은 아주 고요해 보이지만 산의 모습과 바위 위에 있는 집의 모습이 호수 면에 수직으로 비추어져 있고 그 사이로 여러 색채들이 흐르고 있다. 고요하고 정적인 호수의 풍경이지만 그 속에서 색 감각의 리듬에 의한 운동성을 표현해 내고 있다.

▲ 앉아있는 소케, 1877 ⓒ폴 세잔(Paul C?zanne)

이 그림은 세잔의 회화에서 보이는 작가의 의도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그림이다. 선명하게 보이는 붉은 색방울은 가구에 그려진 문양의 색과 같다. 이를 통해 색이라는 것의 속성은 한 사물의 색이 다른 사물에도 떨어진다는 색 감각의 반영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 대수욕도, 1900~1905 ⓒ폴 세잔(Paul C?zanne)

‘대수욕도’는 처음 볼 때 약간 황당할 수 있는 그림이다. 왼쪽의 여자는 얼굴도 없는 듯하고 대체적으로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다. 여자들의 얼굴색은 푸른빛이 감돌기도 하는데 이 푸른색은 위에 있는 나무에서 내려온 것이다. 그리고 나무는 다시 검게 표현했다. 여체들에는 곳곳에 초록색이 보이는데. 이것은 숲 전체가 초록색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여체만 보아도 숲 속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세잔은 이 그림을 그리면서 이 주변의 것들을 다 그려 넣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림의 바깥은 전문용어로 ‘외화면’이라고 하는데 회화는 외화면이 작고 사진은 외화면이 크다. 그렇기 때문에 회화는 사진에 비해 독자성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세잔은 외화면을 상당히 이상한 방식으로 그렸다. 여체의 붉은 색은 무엇일까? 황토가 앞에 펼쳐져 있다는 표현일 것이다.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나무도 그렇고 색이 서로 ‘왔다갔다’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세잔의 ‘감각의 리듬’이라고 한다. 다시 그림을 보자. 맨 왼쪽의 여자가 가지고 있는 것은 수건이다. 수건과 연결되는 뒤의 희푸른 배경은 뒤의 것이 앞으로까지 나오는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 보면 오른쪽의 비스듬한 나무와 대칭되는 왼쪽의 작은 나뭇가지는 그림의 균형을 이루어준다. 세잔의 그림은 구도는 정적으로 가지만 색의 리듬을 통해 동적인 내면을 표현하고 있다.

▲ 로브에서 본 생 빅토와르 산, 1904~1906 ⓒ폴 세잔(Paul C?zanne)

생 빅토와르 산을 그린 또 다른 그림을 보자. 이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면 풍경의 색이 여러 겹 붙어 있는 것이 보이는데 보다보면 자연스럽게 선의 구분이 보인다. 선을 일부러 그린 것이 아니라 배치하다보니까 선이 형성된 것처럼 보이게 그렸다. 마치 모자이크처럼 색깔들을 다 쪼갠다. 이것이 심해지면 피카소의 분석적 큐비즘(cubism)이 된다. 세잔은 세상에는 선이 없다고 했다. 입체물은 단면으로 보면 선이 분명 있다고 느껴지지만 몸을 틀어 보이면 시각적으로 선이라고 인지되던 것은 모두 면으로 흡수된다.

▲ 발리에르의 초상, 1906 ⓒ폴 세잔(Paul C?zanne)

이 그림에서는 남자가 입고 있는 옷의 선을 서로 겹치도록 겹겹이 그렸다. 세잔에게 있어 윤곽을 뚜렷하게 그린다는 것은 실제 윤곽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고 색을 선속에 잡아 가두는 것이다. 세잔 그림의 핵심은 사물이 서로 색깔을 주고받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고 어떤 형태 속에 있느냐에 따라 형태도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문명은 예술의 적

세잔은 이런 말을 했다. “문명은 예술의 적이다”

친구인 가스케가 세잔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묻는다. “당신은 모든 것을 잊어버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풍경 앞에서 그토록 오래 준비하고 명상하는 까닭은 뭔가요?” 세잔이 답한다. “오, 그건 내가 더 이상 순수하지 않기 때문이야. 우리는 문명화되어 있어. 원하든 원치 안든 우린 고전적인 고민들에 직면해 있는 거지. 나는 그림을 통해 명철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학교라는 제도보다 더 가증스런 일은 무식을 사칭하는 이른바 야만인들이야. 오늘날엔 더 이상 무지해질 수가 없어.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문명의 이기에 적응하게 되어 있네. 그것을 부수어야 하네. 문명의 이기는 곧 예술의 죽음을 뜻하기 때문이지. (…) 이럴 때 나는 이제 막 그림을 시작한 사람처럼 되는 거야.”

문명은 도구적인 것이다. 도구적인 것은 개념적인 것이고 개념적인 것은 또 유용한 것이 된다. 이런 것들을 다 제거하고 사물을 바라보게 되면 사물이 순수한 감각적인 상태로 다가오게 되는데 세잔 자신도 문명의 때를 벗겨내기 힘들기 때문에 한참 바라보면서 그런 것이 없어지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인간과 사물의 일체 구분이 사라지게 되면서 색이 주고받는 색 자체의 세계가 느껴지면 그 때 막 그림을 시작한 사람처럼 된다는 것이다.

세잔은 우리에게 문명에 찌들어 시선자체가 얼마나 곪아 있는가를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그래서 우리는 세잔을 통해 예술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문명화된 눈부터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인간관계나 성생활도 훨씬도 감각적으로 순수하게 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을 통해 우리 삶도 순화 또는 거룩하게 ‘성화(聖化)’ 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다.

조광제 교수는 이런 도식을 제시한다.감각적인 존재자체가 신성덩어리이라는 것이다. ‘신성(神聖)’은 도저히 출처를 알 수 없을 때 생긴다. 이유를 알 수 있으면 신성하지 않다. 메를로 퐁티가 세잔의 그림을 보면서 느낀 신비로움은 필연적 법칙성에 속박된 사물을 봤기 때문이 아니다. 거기에 현존하고 있는 사물의 참 존재를 본 것이다. 철저히 우연적인 존재는 그 자체로 신성한 것이고 그 때의 존재는 근본적으로 ‘살’, ‘감각자체’, 감각과 사물이 전혀 구분되지 않는 ‘감각덩어리 자체’로서의 삶의 세계이다. 이것이 넘쳐나는 것에는 신성이 깔려있다. 이것을 엄폐하고 함몰시켜 깔고 앉아 있는 것이 문명이며 도시인의 생활이다. 자본주의의 상품화, 상품화폐경제가 우리를 더욱 찌들게 한다. 조광제 교수는 강의를 마치면서 이런 것들을 세잔을 통해서 벗겨냈으면 좋겠고 감각적 향유가 넘쳐나는 삶을 누구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겼다. 아마도 세잔이 치열하게 그림을 그린 것과 메를로 퐁티가 ‘살존재론’의 철학을 전개한 이유도 조광제 교수가 남긴 말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후기: 진보성 (한철연 회원)

이것은 누구의 구두입니까? [청춘의 고전 시즌2]-⑪

[청춘의 고전 시즌2 /그림으로 읽는 철학] – ⑪

?? 일시: 2012. 8. 25.?(홍대입구 상상마당 강의실)

이것은 누구의 구두입니까?

– 반 고흐의 <구두>와 하이데거의 『예술작품의 근원』-
?
강연: 서영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철학’과 ‘예술’ 이 두 영역은 인간이 역사 행위를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가장 ‘문화화’된 창조성의 산물이다. 이 두 영역의 활동을 통해 세상은 드러나고 해석되며 지속된다. 그렇다면 철학과 예술은 서로 어떤 관계이고 철학은 예술을 어떻게 보는가? 보이고 감각하는 이 세계의 것들을 예술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예술적 감성과 세계를 자신의 눈으로 해석해내고 설명하려는 이성적 사유는 언뜻 보면 닮았지만 다시 생각하면 아주 달라 보인다. 이 차이가 이 둘 사이의 얘깃거리가 된다.

열한 번째 시간에는 ‘철학자가 이해하고 생각한 예술’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철학자들이 이해했던 예술에 대한 여러 개념을 기반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선대 철학에 대한 물음과 극복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서양 철학사에서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의 극복 양상과 하이데거의 예술론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이었다.

강의를 맡은 서영화 교수는 하이데거를 소개하면서 하이데거가 실존주의자, 나치 부역자, 신비주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는데, 전적으로 맞거나 부분적으로 맞는 말일 수 있음을 주지하게 하면서 하이데거의 철학은 서양철학사가 서구 형이상학과의 대결의 역사였다는 단서를 전제해야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특히 “하이데거는 철학사 전체의 핵심 근거에 대해 문제시하고, 그러한 근거 자체를 ‘근거 없는(grundlos) 것’으로 만드는 사상가”라고 하면서 이제까지 자명한 것을 수수께끼로 만들어 버리는 이러한 문제의식의 핵심에는 ‘철학의 종말’을 선언했고 대안으로서 예술의 역할에 대해 얘기한 하이데거의 사상이 자리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철학과 예술의 대결 : ’철학의 종말’과 대안으로서의 예술

하이데거가 말한 ‘철학의 종말’은 철학 일반의 종말이 아니다. ‘형이상학의 종말’을 말한다. 서영화 교수는 하이데거의 특징에 대해 “서구 형이상학의 사유 전통을 해체했다는 것이 다른 철학자와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이데거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니체와 헤겔까지의 철학을 한 주름으로 꿰어버리고 이것이 서양의 전통적 틀이라고 규정하면서 하이데거 자신은 새로운 이론을 제시했다고 한다.

고대부터 철학자들은 ‘철학’과 ‘예술’이라는 두 영역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제시했는데 서영화 교수는 기본적으로 플라톤-니체-헤겔-하이데거의 순으로 큰 축을 설정한다. 단적으로 설명하면 플라톤은으로 보았고, 니체는을 역설했다. 그러나 헤겔에 가서는 다시으로 규정된다. 이후 하이데거는 다시 철학의 종말을 주장하고 철학의 자리에 예술을 등장시킨다.

플라톤에게 있어 예술은 하나의 가상을 만드는 것이고, 철학은 이론적 지식을 통해 참된 것에 대한 앎에 도달하게 만들어 준다. 철학은 참된 ‘이데아(idea)’를 이끌어주는 것으로 수학-기하학은 이데아의 앎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으로 생각했다. 플라톤의 경우 이데아는 생성-소멸의 과정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고 감각적 경험세계의 생성-소멸에는 참된 것이 없다. 플라톤에게 예술이란 이데아에 대한 2차적인 모방이며 ‘오디세이아(odysseia)’와 ‘일리아드(Iliad)’처럼 광폭하고 음란한 신들에 대한 묘사와 현실 속의 인간을 운명에 대해 비탄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특히 플라톤은 교육에 있어 ‘철학과 예술 간의 대결’을 선언하면서 기존 공동체 내에서 교육을 담당했던 예술을 대신해 철학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 반해 니체는 플라톤적 진리관은 인간 생의 보전을 위한 가치로써 삶의 지지대나 의지처로 파악한다. 니체는 생동하는 현실세계를 중심으로 1차적 관계를 맺는 것이 진리이고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예술이라고 본다. 니체의 예술론은 세계를 지배해 오던 형이상학적 가치가 전적으로 무가치한 것으로 인식될 때(심연 속으로 몰락;니힐리즘의 도래) 비로소 인간에게 새로운 의지가 발현되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니체에게 있어 존재자를 존재자이도록 하는 것은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 will to power)’이고 예술은 이것을 가장 투명하게 드러내어 변화무쌍한 현실을 왜곡하지 않고 수용할 수 있는 최고의 인식형태이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니체 또한 형이상학자로 이해한다. 니체의 진리관은 분명 플라톤의 개념을 전도한 것이지만 니체에게는 ‘힘에의 의지’의 강화가 모든 생명체들의 본질이 된다. 이것을 하이데거가 볼 때는 플라톤의 이데아 성격과 같다는 것. 서영화 교수는 “니체의 ‘힘에의 의지’가 생성하고 소멸하는 것 바깥의 무시간적이고 불변적인 것을 이해해야만 인지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니체도 형이상학자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부연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예술작품도 ‘영원히 정지한 시간성’과 ‘불변성’의 방식을 가지고 만들어졌다면 이것은 형이상학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말했다.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의 종말을 선언하면서 전통적으로 존재자를 ‘형상+질료’의 조합으로 규정하는 것은 개별사물을 이분법으로 설명하는 태도라고 비판한다. 이 때 전통적 규정에서 중세까지 형상의 자리를 차지하던 것은 신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철학의 근본 물음인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라는 존재자의 원인과 본질의 탐구 끝에는 결국 신을 설정할 수밖에 없던 사실이 존재하고 이를 참으로써 보증하는 것이 논리학의 역할이었다. 이 역할을 논리학적 방식 보다 예술의 방식을 통해 더 잘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입장이다. 하이데거에게 예술의 필요성은 형이상학적 틀과 논리학의 만남으로서 서구 형이상학 전체를 지배해온 철학이 종말을 고해야할 필요충분조건이었다.

예술의 본질에 대한 물음

1) 사물과 도구, 그리고 예술작품

▲ 샘(Fountain), 1917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위 그림은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변기라고 불리는 마르셀 뒤샹의 샘(Fountain)이라는 작품이다. 1917년 뉴욕의 전시회에서 전시되었지만 전시회장 밖에서 전시되었다. 하지만 현재는 프랑스 퐁피두센터 현대미술관에 소장 전시되어 있으며, 37억 달러를 호가하는 예술작품이 되었다. 여기서 생기는 질문: 기성품을 예술가가 일상적 환경이나 장소에서 빼내와 예술작품이라 선언하면, 예술작품이 되는가? 무엇이 예술작품을 예술작품이라 규정할 수 있도록 하는가? 과연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는 어디인가? 이런 의문들을 정리해보면 아마 ‘예술작품을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근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의 본질은 예술가에게 있고 예술가의 본질은 작품에 있으며 작품의 본질은 다시 예술에 있다’라는 문구처럼 예술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 순환에 빠진다는 것을 하이데거는 문제 삼는다. 전통적 견해에 따르면 작품은 예술가 자신이 활동한 결과이다. 그러나 예술가가 예술가일 수 있는 것은 예술작품을 통해서다. 형이상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사물이 사물이도록 하는 본질에 대한 물음과 규정에 있다. 하이데거의 경우 ‘사물’을 다른 말로 하면 ‘존재자’라고 할 수 있는데 존재자의 본질을 형이상학적 사유 전통에서 찾기 거부하는 하이데거는 예술의 본질과 근원에 대한 물음을 실제 예술작품으로부터 묻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물인가? 단적으로 말하면 무(無)가 아닌 존재자 일반이 사물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의 사유 전통 내에서 사물에 대한 해석은 다르다. 서영화 교수는 하이데거가 이해한 사물에 대한 조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형이상학 전체를 지배하는 ‘형상+질료’의 결합 틀이 예술이론과 미학의 개념 도식이 되고 이 개념 도식이 근대 이후 형상의 자리에 인간이 들어오면서 형성된 형이상학적 ‘주체-개체’의 도식과 만나 서구 사회에서 사물을 설명하는 절대적인 ‘개념역학’이 된다”는 것. 이에 의해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존재하는 것을 도구로 생각하게 된다고 한다. ‘형상+질료’ 결합 틀의 근원은 사물의 본질이 ‘도구적 용도성’에 있다는 견해이다. 이 지배하에 있는, 예를 들면 항아리ㆍ망치ㆍ신발과 같은 존재자는 어떤 것을 위해 제작된 산물로서 사물과 작품 간의 고유한 중간 위치에 있다.

문제는 서구 사회가 이 도구 존재자에 대한 이해 틀을 모든 존재자를 이해하기 위한 근본 틀로 간주하고 있다는데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하는 것 자체(사물)를 도구로 이해하는 것을 ‘사물에 대한 습격’이라 명명했고 이 ‘도구적 용도성’을 벗겨낸 것을 ‘사물’이라고 한다. 도구는 유용한 것으로 친숙하고 사물은 낯선 것이 되면서 ‘폐쇄성’을 가지고 ‘은폐’된다.

2) 고흐의 신발 도구와 용도성의 본질

하이데거가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분석하는 “고흐의 신발(ein Paar Bauernschuhe von Gogh)”은 사물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도구에 대한 분석이다. 하이데거의 전략은 형이상학의 내부 깊숙한 곳에서 형이상학의 파괴를 도모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사물=도구’라는 인식 틀에 대해 사물이 진정 무엇인지 알려주겠다는 의도이다.

▲ 신발(A Pair of Shoes), 1886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 작품에서 도구 존재가 참으로 무엇인지가 드러난다고 한다. 작품 ‘신발’에 대한 하이데거의 감상은 축약하면 이렇다.

“신어서 틀어지고 헤어진 신발 안쪽의 어둡게 열려진 틈 속에서 노동의 고단함이 보이고 신발 도구 속에서 거친 바람이 부는 들녘의 밭고랑을 천천히 걷는 완고함이 보인다”ㆍ”신발을 통해 생계를 해결해야하는 농부의 근심과 들녘에 나가 편하게 일할 수 있다는 안도감, 혹은 출산과 죽음 앞에서 나타나는 초조와 전율이 보인다”

신발 도구 속에서 대지와 농부의 세계가 함께 보인다는 것인데, 하이데거는 이 때 재현의 대상인 신발은 어느 특정한 누구의 신발이 아니고 도구 연관 전체로서 ‘농부의 세계’를 드러내준다고 한다. 세계를 보는 농부의 시선과 삶의 지향성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이것은 농부가 신발을 신는 일상 행위에서도 나타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 때 도구가 갖는 용도성의 본질은 ‘신뢰성’에 있다. 누군가 신발을 신었는데 그야말로 아주 편해서 신발이 신발 역할을 잘 할 때가 가장 신발다운 때이고 이렇게 되면 신발에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다른 일에 전념할 수 있을 것이다. 신발을 신었다는 걸 의식하지 못하고 신발이 사라져버리는 그 지점에서 ‘신뢰성’을 발견할 수 있다.

서영화 교수는 “망치도 더 이상 망치를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때가 망치가 가장 망치다울 때이다. 회화작품을 그리는 도구도 마찬가지인데 하이데거는 도구를 하나의 관찰대상으로 삼게 되면 도구답지 않게 된다고 한다. 그 때는 ①도구가 고장 났을 때, ②도구를 과학적 관찰대상으로 삼을 때”이다. 하이데거의 말로 이어나가보면 “도구가 갖는 용도성의 본질은 1차적으로 신뢰성에 있고 신뢰성의 특징은 평소에 우리에게 인식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 신뢰성이 드러나는 순간은 찰나의 순간이다. 플라톤적 진리처럼 신발의 본질은 신발의 이데아계에 있어서, 시공을 초월하여 절대 불변하는 객관적인 ‘참’인 진리가 아니다. 오히려 누구에게나 참이 아닐 수도 있다. 예술작품은 ‘존재자가 참으로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열어 보여준다. 고흐의 그림에서 신발은 일상적으로 보았던 곳과는 다른 곳에 위치한다. 즉 작품 안에서 작품 존재로 있게 되는데 이 때 우리가 평소에는 인식할 수 없던 용도성의 본질인 신뢰성을 부지불식(不知不識)간에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도구 존재가 참으로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예술작품이라고 한 것이다. 본질을 은폐하려는 사물의 성향을 풀어헤쳐서 보여주는 것이 예술의 기능이고 예술작품 속에서 진리가 생성된다고 본다.

작품과 진리

하이데거에 의하면 예술작품은 “세계와 대지의 투쟁을 일으키는 것(선동, 사주)”이고 예술가는 작품 안에서 세계와 대지가 투쟁하는 것을 격돌시키는 역할을 하며 그 자리에 촉매처럼 위치해 있다. ‘투쟁’이란 세계와 대지를 긴밀하게 공속(共屬)시키는 친밀한 통일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서영화 교수는 하이데거가 말한 ‘세계’와 ‘대지’의 개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세계’란 고흐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농부의 세계처럼 삶이 결정되는 순간 그 자리가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곳이 된다. ‘대지’는 말하자면 인간이 체류하는 고향과 같은 거처로서 하이데거는 대지를 질료와 같은 개념으로 쓴다. 이른바 ‘스스로 그러한(自然)’ 질료적 성격을 보유하고 있는 사물 고유의 성향이다. 이것은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태도에서는 사라진다. 그러나 예술작품은 대지의 성격, 질료를 사라지게 하지 않고 비로소 그것을 최초로 솟아나게 한다. 고흐의 회화작품에서 ‘농부의 세계’와 ‘대지’는 ‘개방’되면서 하나의 세계를 열어 보이고, 세계가 대지 위에 근거하는 것임을 드러내 보인다.

작품 안에서 농부의 세계와 농부가 딛고 살아가는 땅-대지가 신발 안에서 투쟁하게 만드는 것이 고흐가 만들어낸 결과이다. 진리는 무시간적이고 불변하는 것이 아니며 진리를 생겨나게 하는 것은 예술가의 몫이 아니다. 예술가는 작품 안에서 세계와 대지를 서로 격돌하게 만들뿐이고 그것의 결과가 진리의 생성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작품 안에서 세계와 대지의 내밀한 통일과 투쟁의 격돌 속에서 진리가 생겨난다”고 말할 수 있다.

서영화 교수는 세계와 대지의 투쟁의 격돌로서 이해할 수 있는 예술작품의 사례로 통일신라시대의 ‘석굴암’을 든다. “일제강점기 석굴암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 이후 지금까지 최초에 조성되었던 당시의 본 모습을 잃어버렸다. 현재 가장 심각한 문제는 결로(結露)현상인데 애초에는 본존불이 앉은 바위 밑으로 감로수라는 샘물이 흘러 자연적으로 결로현상을 막을 수가 있었다. 과거에는 석굴암이 감로수를 차단하지 않고, 화강암이라는 질료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예술작품이었던 것이다. 인간과 절대자가 만나는 장인 석굴암은 통일신라시대 당시 신(神)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드러나는 세계에 대한 이해와 석굴이라는 대지가 투쟁의 격돌로서 드러나는 예술작품이었다”

진리와 예술

하이데거는 보이는 대상 A자체가 참으로 드러나야지만 보는 주체 B도 A를 참으로 알 수 있다고 했다. 개념화해서 말하면, 참된 인식은 이성적인 표상 능력의 결과가 아니라 사물 자체가 스스로 발산하는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른바 사물의 ‘개방력’이다. 사물이 그 자체로 드러나 있어야 예술작품에서도 드러난다는 것. 사물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은 작품 안에서 ‘사물의 세계’와 ‘사물이 속하는 대지’가 충돌한 결과가 ‘참으로 그렇게 있다’는 사실로 귀결된다. 사물 자체가 ‘개방력’을 가지고 있고 이 개방성이 열릴 때 우리는 존재자를 그 존재자 자체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세계와 대지의 투쟁이 내적인 통일 속에서 석굴암의 본존불상처럼 형태로 확립되어 있을 때 감상자는 “그것이 없지 않고 있다”는 사실 앞에 선다. 즉 존재자의 개방성이라는 적막한 충격 앞에 세워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서 이제까지 습관적으로 익숙해 있던 것으로 부터 벗어나게 된다.

고흐의 신발 그림을 봤을 때 감상자는 여기에 ‘신발이 없지 않고 있다’라는 그 사실을 느끼게 되고 하이데거는 이것이 매우 적막한 충격으로 감상자에게 다가온다고 한다. 서영화 교수는 ‘없지 않고 있다’고 느끼는 태도는 하이데거적 언어로 말하면 존재자가 참으로 개방되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우리가 이제까지 습관적으로 익숙해 있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감상자가 예술작품을 볼 때 사물을 도구적인 것으로 보는 익숙함에서 벗어나 비은폐화되어 드러난 존재자의 본질을 자각하게 되면 작품 감상자는 작품의 보존자가 되어 작품을 비로소 현실적이고 예술작품답게 만드는 전환을 이루어낸다. 마르셀 뒤샹의 변기가 일상의 기성품에서 ‘샘(Fountain)’이라는 제목의 예술작품으로 변환된 사실이 이 사례이다. 그렇다면 작품 안의 작품존재 속에서 진리가 생성된다는 존재자의 ‘개시성(開示性)’이야 말로 예술작품을 예술작품이도록 하는 최종 근거가 된다.

서영화 교수는 마지막으로 앞의 얘기들을 정리하면서 하이데거의 예술론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한 얘기를 덧붙였다.

“현재 우리는 인간을 인적자원, 자연을 자연자원으로 이해한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유익하고 유용한 것은 ‘있는 것’으로 치부하고 자신에게 유용하지 않은 것은 ‘있지 않은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태도인 것 같다. 이런 태도는 평소에는 매우 친숙하다. 하지만 일상적인 대상 사물이 작품 안으로 옮겨가게 되면 친숙하지 않고 익숙하지 않게 된다. 하이데거의 경우 ‘없지 않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면 내 앞에 있는 그 무엇을 나에게 유용한 대상으로 보지 않게 된다. 대상에 대한 자각 이전과 이후의 태도가 전혀 다르게 된다. 확대해보면 내가 자연을 대하는 방식자체가 전혀 달라진다. 결로현상 때문에 석굴암에 에어컨디셔너를 달았다는 사실이 일상의 감상자에게는 처음에 매우 신선하게 느껴지지만 과거에는 이런 장치가 필요 없어도 석굴암이 유지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연물을 우리가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의 태도도 전혀 달라지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곧 통상적인 행위와 평가에 대해 조심스러워지고, 자신의 지식과 시야를 함부로 적용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형이상학의 철학과 대결한 이유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에 예술이 필요한 이유이다”

후기: 진보성 (한철연 회원)

들뢰즈, 베이컨의 외침을 감각하다 [청춘의 고전 시즌2]-⑩

[청춘의 고전 시즌2 /그림으로 읽는 철학] – ⑩

?? 일시: 2012. 8. 11.?(홍대입구 상상마당 강의실)

들뢰즈, 베이컨의 외침을 감각하다

?- 베이컨의 와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

?
강연: 김범수(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일그러진 얼굴의 초상화

▲ Three Studies of George Dyer, 1966 ⓒFrancis Bacon(프란시스 베이컨)

이 그림은 베이컨(Francis Bacon, 1909~ 1992)이 그린 인물의 초상화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초상화와 많이 다르다. 일그러지고 뒤틀려있어 원래 누구의 얼굴을 그린 것인지 짐작하기 힘들다. 흡사 피카소의 그림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다르다. 정지 상태와 운동 상태가 뒤섞인듯하고 대상을 왜곡시키며 순간을 포착한 듯 보이는 이런 화법은 베이컨 그림의 특징이다.

청춘의 고전 열 번째 강의에서 만나볼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은 초상화를 그리며 얼굴을 ‘해체’시켰듯이 항상 자신의 그림에서 ‘형상을 해체’시킨다. 이 해체를 두고 김범수 교수는 “이것은 가장 감각적인 상태를 구현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베이컨의 그림에서 “왜 얼굴이 일그러지는가?”라고 다시 묻는다. 여기에 답하려면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의 철학에서 힌트를 얻어야 한다.

이번 강의에서 들뢰즈의 철학을 안내해줄 김범수 교수는 들뢰즈가 “감각은 심층에서 방출 된다”고 말한 점을 강조하면서 베이컨은 “새로운 감각을 구현하는 것”으로서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자화상의 경우 그 밑바탕에서 올라오는 자신의 모습을 그렇게 찌그러진 모습으로 형상화 했다고 설명한다. 이 부분이 베이컨의 그림과 들뢰즈의 철학이 만나는 지점이다.

김범수 교수는 “사실 들뢰즈는 이미 『감각의 논리』란 책에서 베이컨의 그림에 대한 비평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전개한 바가 있다”고 한다. 들뢰즈는 당시 철학자로서는 파격적인 외도를 많이 했는데 문학, 미술, 영화에 대한 해석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전개했다. 들뢰즈는 이런 독특한 철학관을 통해 베이컨과 관계를 맺고 그의 그림에 대한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김범수 교수는 들뢰즈의 ‘독특한’ 철학체계는 펠릭스 가타리(Felix Guattari,1930~1992)와 함께 쓴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철학에 대한 정의를 ‘개념창조’라고 한데서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개념창조란 말은 들뢰즈가 자주 쓰는 내재성의 철학ㆍ유목의 철학이란 말과 일맥상통한다. 내재성이란 초월성(신, 이념, 자유의지)과는 반대의 개념이고 경험의 경계를 넘어가지 않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경험은 개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 자연 전체의 얘기이고 경험하는 세계는 『장자(莊子)』에서 말하는 혼돈상태와 같다. 이 때 혼돈은 규정되지 않은 상태를 지칭한다. 규정되지 않은 이 애매모호함을 해결하기 위해 철학은 신을 찾았고 자유의지를 찾았다. 또 정치에서 이념은 신을 대신하기도 했다”

들뢰즈는 이런 통념을 바꾸려고 한 철학자다. 그런데 철학을 하면서 ‘규정’이라는 것은 하고 넘어가야 한다. 그러나 고정되어 있는 상태에서 이미 주어진 것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들뢰즈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새롭게 개념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들뢰즈는 ‘개념을 창조’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것이 들뢰즈 철학의 핵심이다.

 

베이컨의 ‘외침’ : 재현체계의 거부

같은 맥락에서 들뢰즈는 “예술은 감각-정서의 구현”이라고 정의한다. 예술은 감각의 구현을 통해 인간의 정서를 표현하는 것이다. 김범수 교수는 “이것은 ‘내재성의 사유’와 다를 바 없고 들뢰즈는 결국 예술과 철학이 모두 ‘내재성의 사유’와 관련한다고 말한 것”이라고 하면서 베이컨의 <벨라스케스의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초상’을 따른 연구>에 주목한다. 이 그림은 원래 벨라스케스의 원본 그림을 자신의 방식으로 다시 리메이크한 그림이다.

▲ 좌측 :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초상, 1650 ⓒDiego Vel?zquez(디에고 벨라스케스) / 우측 : 벨라스케스의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초상을 따른 연구, 1953 ⓒFrancis Bacon(프란시스 베이컨)

입을 벌리고 무언가를 외치는 듯 보이는 얼굴의 묘사는 괴기스럽고 보는 이로 하여금 다분히 공포감을 준다. 얼굴은 마치 빛의 간섭현상처럼 바탕과 중첩되면서 해체되는데 이를 들뢰즈의 용어로 ‘아플라(aplat)’라고 한다. 아플라가 존재하고 형상은 지워지며 윤곽이 그려지면서 기존의 구상미술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그림이 되었다. 김범수 교수는 베이컨이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다시 그린 이유로 관람자들이 교황의 그림이라는 선입관으로 그림에서 기존의 서술적 이야기를 끌어내는 점을 문제 제기하면서 동시에 엄숙한 원본 그림과의 극명한 대비를 통해 인식이 선행되기 이전에 감각을 일깨우려는 시도가 있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김범수 교수는 이어서 베이컨과 들뢰즈의 공통점을 ‘재현에 대한 거부’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베이컨은 전통적인 구상미술의 재현을 거부했다.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은 전통적인 재현체계를 갖춘 구상미술의 전형이다. 그림 안의 수많은 철학자들은 이미 기존의 것과 같은 얘기를 반복하고 있고 화가는 이것을 풀어내는 이야기꾼에 불과하다. 기존 통념으로 주어진 것 위에서 다시 재현하는 이런 체계는 감각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아테네 학당, 1510~1511 ⓒRaffaello Sanzio(라파엘로 산치오)

들뢰즈의 철학 역시 표상ㆍ재현체계를 거부한다. 김범수 교수에 의하면 들뢰즈는 가타리와 함께 정신분석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는데 특히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허구성을 지적하면서 정신과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는 기준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이미 존재하는 틀거리(근거)에 특정 사안을 외삽(外揷)해 버리는 태도라고 비판한다. 기존의 주어진 것에 그냥 덧붙여서 추정되는 결론을 맞는 것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태도이다. 이런 태도는 습관에 의한 사유 때문이다. 들뢰즈는 이것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새로운 것이 없다는 것은 내재성이 될 수 없고 창조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김범수 교수는 “베이컨이 재현의 체계를 거부했다는 것이 들뢰즈에게는 큰 매력으로 느껴졌을 것이고 이것이 들뢰즈가 베이컨의 그림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전개한 이유였을 것”이라고 한다.

 

‘기관 없는 신체’와 ‘고기-되기’

들뢰즈는 당시 ‘잔혹(殘酷) 연극’이론으로 무대 위에서 대사뿐 아니라 조명?음향?배우의 몸짓 등을 통해 훗날 전위극(前衛劇)이라는 새로운 감각의 연극 장르를 개척한 극작가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 1896~1948)에게서 빌려온 개념 ‘기관 없는 신체’가 베이컨의 작품에서 그대로 실현되었다고 말했다.

베이컨은 항상 “나는 공포보다 오히려 외침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고 더 나아가 “나는 결코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언제나 미소를 그리려고 했다”고 말했다. 공포는 외침을 통해 완화되고 입은 벌려진 채로, 얼굴은 주변의 배경과 함께 사라지고 있다. 얼굴이 변형되면서 새로운 것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신체 기능이 사라지면서 그 ‘기능’은 새롭게 재편된다. 베이컨은에서 이른바 ‘고기-되기’ㆍ’동물-되기’ 라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 ‘되기’라는 개념은 감각과 힘을 다시 배치한다는 의미이다.

▲ Painting, 1946 ⓒFrancis Bacon(프란시스 베이컨)

김범수 교수는 ‘되기’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예를 들어 축구선수가 야구선수가 되었다고 가정한다면 축구선수의 근육과 운동 및 환경이 야구를 하기 위한 것으로 바뀌어야 하는데 바로 이 새로운 배치가 ‘생성’의 의미이고 ‘되기’의 의미라고 한다. 우리는 골키퍼가 절묘하게 공을 막아낼 때 ‘동물적 감각’으로 골을 막았다는 표현을 한다. 이 표현은 골키퍼가 순간적으로 자신의 감각과 힘을 동물과 같은 상태로 배치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가장 감각적인 순간이며 가장 감각이 집중되어 있는 상태인 동물적인 것은 고기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신체의 ‘기능’은 중요하지 않고 ‘감각의 다발’의 ‘배치’가 중요하다.

여기서 ‘기관’과 ‘신체’의 의미를 다시 살펴보면 ‘기관’이란 “기능에 국한된 하나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것으로 그 목적은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고 ‘신체’는 이와는 반대이다. 들뢰즈는 “신체는 물질덩어리로 ‘강도 0’의 상태, 즉 양 힘이 팽팽하게 맞붙어 움직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긴장하고 있는 상태”라고 했다. 김범수 교수는 “내 가슴 앞에서 양 주먹을 맞붙여 동시에 가운데로 힘을 가하는 상태가 바로 이것”이라고 설명하면서 “두 주먹의 배치가 달라지면 균형의 상태가 달라지듯이 ‘신체’는 힘들로 가득해서 역량들이 어떻게 배치되느냐에 따라 끊임없이 생성이 이루어지는 상태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한다. 강도로 가득하고 감각과 정서가 집약되어 있는 상태가 바로 ‘기관 없는 신체’에 해당한다.

‘Painting’에서 베이컨은 고기를 ‘감각의 구현’이라는 차원에서 사용했다. 그림 안에서 잔혹해보이지만 끊임없이 생성하는 원초적인 힘들을 구현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베이컨은 여전히 형상을 지운다. 그림 속의 우산은 얼굴 없는 자의 이야기를 어떻게 해서든 차단하려는 용도이며 바탕에서부터 대상의 이야기가 다시 배치되게끔 그림을 그려냈다. 이런 감각의 배치 때문에 베이컨이 그린 초상화 속의 얼굴은 항상 일그러져 있고 변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겉모습이라 함은 오직 한 순간에만 고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당신이 잠깐 눈을 깜박이거나 고개를 약간 돌렸다가 다시 보면 그 겉모습은 이미 달라져 있다. 내 말은, 겉모습이란 계속적으로 ‘떠다니는 것[부유(浮遊)]’과 같다는 의미이다” – 프란시스 베이컨 –

김범수 교수는 베이컨에게 있어 ‘얼굴의 왜곡’이란 “사물의 겉모습 너머에 있는 존재의 특별함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며 “가장 감각적인 상태를 구현”함으로써 “저 심층에서부터 감각을 방출시켜 안정 상태를 유지하려는 ‘인간의 충동’을 반영하고 있다”고 정리한다. 김범수 교수는 여기에 덧붙여 이 상태는 프로이트가 말한 ‘흥분을 적당히 방출하는 것이 평온의 상태며 쾌락의 상태’라는 프로이트의 쾌락원칙을 넘어서 있는 것으로 베이컨의 그림은 변화하고 생성하는 상태를 얘기하고 싶은 것이며 들뢰즈는 베이컨의 그림에서 그 의도를 찾아낸 것이라고 한다.

▲ 자화상, 1971 ⓒFrancis Bacon(프란시스 베이컨)

 

들뢰즈의 존재론과 베이컨의 그림

베이컨이 많은 작품들에서 보여준 시도들은 들뢰즈의 철학에 그대로 적용된다. 특히 들뢰즈의 존재론과 관계하는데 김범수 교수는 “들뢰즈의 존재론은 전통적인 ‘be’ 동사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can’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들뢰즈의 존재론적 ‘can’의 의미는 단순히 무엇을 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역량으로, 생성으로, 창조로 자신의 존재론을 구축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있음’에 대한 이야기는 전통적 존재론이다. 김범수 교수에 의하면 고대 철학의 이데아론, 범주론 등은 모두 ‘be’ 동사의 얘기로 ‘be’는 ‘존재’를 의미하는데 이때 확실한 규정이 생긴다. 그러나 들뢰즈의 존재는 주체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 없이 ‘can’-‘pouvoir’-‘puissance(힘, 역량)’으로 얘기할 수 있다고 한다. 들뢰즈는 변화하는 존재의 양태를 ‘be’로 규정하는 것에 반대한다.

들뢰즈의 존재론에서 주체는 ‘애벌레 주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김범수 교수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Je pense, donc je suis : Cogito ergo sum)” 명제를 예로 들면서 완벽한 인간의 이성적 사유와 주체성의 존재를 증명하는 듯 보이는 이 명제도 결국 최종 확인을 위해서는 수많은 ‘나’가 있어야 하고 그 수많은 ‘나’ 중에 또 주체가 필요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들뢰즈의 경우에는 ‘나’라는 주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를 작동시켜주는 관계가 중요하다고 한다.

내 안에 여러 ‘나’가 꿈틀대고 있는데 이 여러 ‘나’들의 힘들이 작동되는 관계가 있고 사람과의 사이에서도 이 관계가 작동된다. 들뢰즈에게 ‘있다’라고 하는 것은 중요치 않다. 생성하는 ‘나’라는 것이 중요하다. 이 자리에 지금 존재하는 ‘내’가 있지만 내 안에 많은 ‘나’들이 분화하여 새로운 관계들을 이 안에서 맺고 있다는 것이다.

김범수 교수는 스피노자(Spinoza, 1632~1677)의 예를 들어 다시 들뢰즈의 존재론 설명을 이어간다. “스피노자의 경우 제일 중요한 개념은 ‘실체’이다. 스피노자의 실체는 ‘자연전체’이며 실체가 자족적으로 관계들에 의해 변화한다. 내부에서는 변화들이 우글거리는데 ‘기관 없는 신체’는 바로 그 상태를 말한다. 들뢰즈는 지구를 ‘기관 없는 신체’라고 하는데 이것이 스피노자가 말한 실체개념이고 역량으로서의 존재이다”

이 존재론이 베이컨에 와서 새로운 감각을 구현하는 것으로서 회화의 방식이 되었다. 그리고 밑바탕에서 올라오는 자신의 모습을 그렇게 일그러진 모습으로 형상화 했다. 들뢰즈는 베이컨의 그림 자체가 자신의 존재론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생각했다. 생성을 얘기하고 기존의 습관적이고 재현적인 체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이 저 밑바탕에서부터 배경과 함께 다시 배치되는 모습, 이것은 끊임없이 생성하는 원초적인 힘이며 이 자체가 ‘기관 없는 신체’이다. 같은 맥락에서 베이컨이 구상화의 틀을 버리고 서술에서 벗어났을 때, 저 밑바탕에서 찾은 새로운 것은 고기, 동물, 그리고 ‘기관 없는 신체’의 모습을 설명하는 것에 해당한다.

후기: 진보성 (한철연 회원)

들라크루아와 쿠르베, 혁명을 어떻게 바라보았나 [청춘의 고전 시즌2] – ⑨

[청춘의 고전 시즌2 /그림으로 읽는 철학] – ⑨

?? 일시: 2012. 7. 21.?(홍대입구 상상마당 강의실)

들라크루아와 쿠르베, 혁명을 어떻게 바라보았나

– ?낭만주의적 시선과 사실주의적 시선의 차이 –

 

강연 : 조은평(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혁명에 대한 이미지와 정서

‘프랑스 혁명’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혁명’이란 이름만으로 쉽게 떠올리고 공감할 수 있는 예술작품의 이미지가 있다. 자유ㆍ평등ㆍ박애의 정신을 상징하는 ‘삼색기’를 들고 수많은 군중의 선두에서 혁명의 깃발을 들어 올리는 여신의 이미지. 1830년 7월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을 외젠 들라크루아(Eug?ne Delacroix, 1798~1863)가 그린 <민중을 이끄는 자유>다.

‘1830년 7월 28일’이란 부제가 붙어있는 이 그림은 프랑스 혁명을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다. 한 때 프랑스 화폐의 배경 그림으로 쓰였고 최근까지 수많은 패러디의 대상이 되고 있는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이 이 그림의 표상을 인식하는 만큼 실제 혁명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어쩌면 이 그림을 “세상 모든 혁명의 면모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것”으로까지 여기는 듯하다. 아마도 이 숨길 수 없는 막연함으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본질을 제대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 민중을 이끄는 자유, 1830 ⓒEug?ne Delacroix(외젠 들라크루아)

청춘의 고전 아홉 번째 시간, 이번 강의를 맡은 조은평 교수는 이 강의를 구상한 의도가 바로 앞에서 언급한 아주 간단한 생각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민중을 이끄는 자유>는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두 가지 ‘혁명’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한다. 그것은 ‘상징화된 혁명’의 이미지와 표상의 의미로 ‘상식화된 혁명’의 모습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실제 ‘혁명’에 대한 기억은 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조은평 교수에 의하면 이 문제의식은 들라크루아가 그린 ‘7월 혁명’의 진짜 내용을 궁금하게 만들면서 1871년 ‘파리코뮌’의 혁명성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상징화된 그림 속의 혁명과 실제 혁명 사이의 간극은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로 이어지는 화풍의 차이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 ‘파리코뮌(Commune de Paris)’은 1871년 3월 18일부터 같은 해 5월 28일 사이에 파리 시민과 노동자들의 봉기에 의해 72일간 수립된 혁명적 자치정부를 말한다.

사실 들라크루아가 그린 7월 혁명의 내용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 대단하지만은 않다. “단 3일에 걸쳐 샤를 10세의 복고왕정을 몰아내고 ‘루이 필리프’라는 새로운 국왕을 내세워 입헌군주정이라는 또 다른 왕정을 이뤄낸 부르주아 혁명의 한 단계”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잊혀지고 <민중을 이끄는 자유>는 프랑스 왕정을 종식시킨 공화정의 상징이 되었다. 반대로 파리코뮌의 혁명은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 코뮌 당시의 조치와 내용들이 사람들에게 더 많이 기억돼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급진적이고 극단적인 민주주의는 왜 우리의 기억 속에서 상대적으로 사라지게 된 것일까? 그리고 이것은 누군가에 의해 ‘봉합’되어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의문으로부터 이 강좌는 시작되었다.

낭만주의 시선과 사실주의 시선의 차이

“진정한 예술가란 격정과 열정을 증폭시켜야 한다”, “모든 것이 주제다. 주제는 너 자신이다. 주제는 자연 앞에서 받는 녀의 인상, 너의 감정이다” – 파트리시아 프리드카라사 저, 『회화의 거장들』 중에서 들라크루아의 말 –

조은평 교수에 의하면 실제로 들라크루아는 “예술은 바로 ‘순수한 환상’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했었고 스스로도 인정하는 낭만주의 회화의 대가였다. 조은평 교수는 “사실 이러한 순간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낭만주의 회화의 전략인 것 같다”고 부연한다.

19세기 초에 발생하여 신고전주의에 대항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낭만주의는 작가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작가 자신의 느낌과 감성을 표현해낸다. 낭만주의 화가들은 현실에서 직접 겪은 사건을 그림에 나타내지 않고 자기의 주관적인 감정을 화폭에 담는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도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풍의 그림으로 실제로 들라크루아 자신이 직접 혁명에 참여하여 목도한 것을 그린 것이 아니라 친구에게 전해들은 혁명 얘기에 감동 받아 3~4일 만에 그림을 완성했다고 한다.

또 다른 들라크루아의 작품으로 고대 아시리아 왕 사르다나팔루스의 몰락을 주제로 자신의 상상력을 극대화하여 완성한 작품인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이나 제리코(G?ricault, 1791~1824)가 프랑스 군함 메두사호의 난파사건을 모티브 삼아 그린 <메두사호의 뗏목>은 낭만주의 그림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그림들은 작가의 개성과 감수성, 상상력을 잘 드러내고 인상적인 주제를 대담한 색채와 강렬한 붓 터치로 표현하여 화가의 열정을 유감없이 보여주지만 동시에 이들은 당시의 실제 현실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경우 “들라크루아는 정치적 의미에는 관심 없고 단지 정말 역동적으로 작품 속 대상을 표현했을 뿐”이라는 것.

▲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1827 ⓒEug?ne Delacroix(외젠 들라크루아)

▲메두사호의 뗏목, 1819 ⓒG?ricault(제리코)

이에 비해 낭만주의적 전통을 거부하면서 나온 사실주의 회화는 자기가 살았던 시대의 주변을 그대로 화폭에 담아낸다. “기억의 낭만은 기억 속에서는 아름답지만 반대로 사실은 잔인하고 불편할 수 있지 않은가?” 조은평 교수는 “나에게 천사를 보여준다면 천사를 그리겠다”고 한 구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의 발언을 두고 보면 이전 낭만주의 화풍과 비교하여 사실주의 화풍의 차별성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화풍의 차이뿐만 아니라 사회현실을 보는 시선 또한 매우 달랐다.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했던 쿠르베는 1848년 혁명에 가담했고 1871년 파리코뮌에도 적극 가담한다.

쿠르베는 살롱에 제출한 <오르낭의 매장>이 퇴출당하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개인전을 열게 되었고 최초로 ‘사실주의(realism)’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사실주의는 이상에 대한 부정이다”, “사실주의는 민주적인 예술이다” 쿠르베는 사실주의라는 용어로 “일상생활의 주제를 역사화의 반영으로까지 끌어올리는 회화 스타일”을 지칭한다. 조은평 교수는 “과거에는 역사가 이상화된 이미지였지만 쿠르베는 일상생활의 주변 얘기들을 역사화의 주변으로까지 끌어올리는 성과를 이루었다”고 평한다. <오르낭의 매장>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비슷한 시기 도미에(Daumier, 1808~1879)가 그린 <삼등 열차> 역시 같은 맥락의 그림이다.

▲ 오르낭의 매장, 1849~1850 ⓒCourbet(쿠르베)

▲ 삼등 열차, 1862년경 ⓒDaumier(도미에)

<화가의 작업실: 화가로서의 7년 생활이 요약된 참된 은유>에서 쿠르베는 화가인 자신이 중심에 있고 한쪽에는 괴로운 생활에 찌든 평민의 모습을 그려 넣고 반면에 다른 쪽에는 자신이 그리는 풍경화를 보고 여유롭게 감상하고 있는 귀족들을 그려 넣어 양쪽을 극명하게 대비시키는 구도를 구현했는데 그림에서 자신의 위치와 대상들의 강조를 통해 사실주의의 시선으로 현실에서 자기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임과 동시에 모순적인 현실을 고발하는 의도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 화가의 작업실: 화가로서의 7년 생활이 요약된 참된 은유, 1854~1855 ⓒCourbet(쿠르베)

낭만과 사실의 간극 : 1830년 혁명과 1871년 ‘파리코뮌’

조은평 교수는 “들라크루아와 쿠르베는 비슷한 시기를 살았지만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가 너무 컸었고 추구하는 화풍의 차이로 인해 두 그림 사이의 간극은 환상과 현실의 간극과 같다”고 하면서 문제는 “역설적으로 들라크루아의 현실에 대한 유일한 그림인 <민중을 이끄는 자유>가 대중적인 혁명의 이미지로 기억된다는 점”이라는 것이다. 들라크루아의 낭만적인 혁명의 이미지가 자꾸 대두되면서 혹시 이런 낭만주의적 혁명의 이미지를 통해 당시 혁명의 진실 뿐 아니라 혁명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그저 흘려버리게 되는 것은 아닌지, 마치 민주주의는 다 저런 피를 먹고 이룩되었다는 식의 생각으로 점철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자답했다. “혁명은 완성되지 않았고 민주는 실현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기만 속에서 낭만의 추억으로 혁명을 떠올리면서 지금을 잊고 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곧 모순으로 가득 찬 현실(대의제 민주주의, 세계화된 자본제 등)을 낭만주의적으로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프랑스 혁명의 이념 속에서 공화국이 완성된 것만 기억하고 이것이 공화정의 완성이라고 기억하게 하는 것이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이미지”라고 하면서 “더 극단적인 민주주의를 추구하려 했던 것들이 억압되고 참혹하게 진압된 역사적 사실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런 사이에 프랑스 혁명의 종착점인 ‘파리코뮌’이라는 역사적 사실은 감춰지고 만다.

혁명의 모습들은 결국에는 혁명 내부의 여러 갈등 요소와 존재들을 봉합하는 차원에서 ‘종결됐다’고 사람들에게 강요되었으며 이런 과정의 결과물이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삼색기’라는 것이다. 삼색기는 결국 균열을 봉합하는 용도로 쓰였다고 볼 수 있다. 더 급진적인 민주주의로 발전시키는 길이 있었음에도 봉합을 통해 그 길이 차단된 것이었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아벨 로르동의 <1830년 7월 혁명의 3일간의 이야기>와 앙리 펠릭스 엠마뉘엘 필리포토의 <1848년 2월 25일 시청에서 혁명의 붉은 깃발을 물리치는 라마르틴>에서 보이는 단색기와 삼색기의 대립은 이를 잘 설명해준다.

▲ 1830년 7월 혁명의 3일간의 이야기, 19세기경 ⓒ아벨 로르동

▲ 1848년 2월 25일 시청에서 혁명의 붉은 깃발을 물리치는 라마르틴, 19세기경 ⓒHenri-Felix-Emmanuel Philippoteaux(앙리 펠릭스 엠마뉘엘 필리포토)

모든 계급 여하를 막론하고 혁명에 참여했었지만 자본주의 세력의 안정화, 산업자본가ㆍ금융가 등 세력이 성장하면서 결국은 부르주아 혁명의 확립으로 귀결되어 그 이상의 급진적 혁명은 계속해서 봉쇄된 역사였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1848년 ‘2월 혁명’ 이후 ‘6월 봉기'(1848년 6월 23일~26일 파리에서 발생한 사회주의자ㆍ노동자의 반란)가 진압된 당시 현실이다. 이를 두고 맑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는『신(新)라인 신문 Neue Rheinische Zeitung』에서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판했다.

“박애는 부르주아지의 이해관계와 혁명가들의 이해관계가 상통할 때만 지속됐다. 1789년 이후 수많은 프랑스 부르주아 혁명들 중 질서에 대항하려는 시도는 한 번도 없었다. 지배와 예속의 정치적 형태가 숱하게 변화했음에도 모든 혁명은 계급지배와 노동자들의 예속, 부르주아 질서를 존속하게 내버려두었다. 6월은 이 질서를 건드렸다.”

조은평 교수는 “1830년 7월 혁명은 성공하여 입헌왕정을 확립하고 공화정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던 반면, 파리코뮌은 지나치게 혁명을 극단화한 결과, 공화정을 넘어 극단적인 민주주의 길로 나아가려 했기에 진압 당한 과격한 이상주의자들의 결과물로 치부되는지도 모른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파리코뮌’을 담은 그림은 별로 없다. 파리코뮌은 멋진 그림으로 등장할 수 없었던 것이다.

▲ 1871년 3월 19일 바리케이드, 1871 ⓒ장 밥티스트 프랑수아 아르노 뒤르벡

파리코뮌의 기억과 현대 민주주의

조은평 교수는 파리코뮌의 의미가 “실질적 민주주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라고 한다. 맑스는 『프랑스 내전』에서 파리코뮌의 의미를 평가했는데 내용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 상비군의 폐지와 무장 인민의 대체, ? 행정과 입법을 겸하는 행동기구, ? 경찰의 폐지와 코뮌의 관료에 대한 상시적 해임 가능(소환권), ? 공직은 노동자의 임금으로 수행, ? 교회의 해산과 교회 재산 몰수, ? 억압이 아닌 확장적인 정치형태를 구현 등을 들 수 있다. 인민들이 스스로 자신들 운명의 주인이 되었고 노동자 계급이 단순히 기성의 국가 기구를 접수하여 자기 자신들의 목적으로 그것을 행사할 수 없음을 확실히 했다.

이 당시 파리의 상황은 도둑이나 절도와 같은 범죄가 거의 없었고 1848년 2월 이래 파리는 안전을 되찾았는데 경찰과 같은 국가의 질서유지 방법이 동원되지 않은 상태에서였다. 쿠르베도 1871년 4월 15일 부모에게 보내는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고 한다.

“파리는 참으로 낙원입니다. 경찰도 없고, 비행도 없으며, 어떠한 방식의 부당한 행위도 없습니다. … 파리가 언제나 이처럼 있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프랑스 내전』中)

맑스는 파리코뮌을 두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현했다”고 평가했는데 사실상 “99% 민중의 독재”라는 말은 “인민의 통치”를 의미하고 “민주통치가 가장 극적으로 구현된 상태”라고 조은평 교수는 설명한다. 다시 말하면 민주주의 본뜻인 ‘인민(demos)의 통치(지배kratos)’로 이해할 수 있다. 파리코뮌은 역사상 가장 인민의 통치(민주주의)가 실질적으로 이루어진 시기일 것이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ofㆍbyㆍfor the people)’라는 구호는 시혜적 느낌이 강하다. 이것을 파리코뮌의 기억과 연결한다면 그 간극은 더 크다. 조은평 교수는 『민주주의는 죽었는가』의 한 문장을 인용하여 “민주주의라는 말은 누구나, 그리고 모두가 자신의 꿈과 희망을 싣는 기의가 불명확한 텅 빈 기표”일지도 모른다고 한다.

우리가 아는 지금의 민주적 제도는 오히려 “민주주의를 지금의 것과 다른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인민의 역량에 족쇄를 달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삶을 관여하는 정치와 경제시스템에 참여하는 시간은 아주 잠깐이다. 이런 무능력한 현실을 인식하며 사실주의적인 시선을 통해 얻는 비관적 전망은 정치에 대한 냉소를 초래한다고 본다. 마치 “세계에 대한 욕망을 견지하지 못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세계가 자신을 욕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리비돌로지』中)인 우울증자들과 같다는 것.

혁명에 대한 단상도 이와 같아서 “자본주의의 승리라는 환상”과 “사회주의 국가 몰락에 의한 사회주의에 대한 냉소”가 맞물려 우리 현실에서 구체적인 혁명의 전망은 상실한 듯하다.

“정권교체라는 낭만적 정치혁명”이 있을 뿐이고 <민중을 이끄는 자유>가 그랬던 것처럼 체 게바라(Che Guevara, 1928~1967) 같은 혁명의 이미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으로 전락한다. 조은평 교수는 오늘날의 이런 망각 상황에 대해 ‘파리코뮌’은 바로 “우리 시대의 실재가 유령처럼 튀어 오르게 해주는 망각된 혁명의 기억일 것”이라고 말한다.

이데올로기와 해방의 길

조은평 교수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들어 이데올로기 동굴 속에 있는 현대인을 가정한다. 그리고 파리코뮌의 노동자들은 “플라톤의 ‘동굴’에 묶여 있는 ‘죄수’이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힘으로 동굴을 빠져나가 햇빛은 본 해방된 노동자들”이라고 비유한다. 한편 지젝(Slavoj zizek, 1949~)의 지적처럼 ‘이데올로기의 수행성’에 주목해서 결국 기존의 시스템이 요구하는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삶의 형태, 삶의 관계를 형성하려는 노력 속에서도 탈출구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한다.

예를 들면 한 개인에게 초점이 맞추어져서 어떤 개인이 정권을 잡게 되면 세상이 확 바뀌게 될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도 파리코뮌의 생각과는 전혀 반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전문적 식견을 가진 사람이 관리가 되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아닌 누구나 정치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 파리코뮌의 의의이다.

“인민은 자기 의무를 다한 수임자(受任人)들에게 감사해선 안 된다. … 왜냐하면 인민의 대표자들은 의무를 다한 것이지 도움을 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파리코뮌 당시 클럽 기관지였던 『프롤레타리아』에 실린 말이다. 조은평 교수에 의하면 이것은 ‘평등의식’을 말하는 것이고 랑시에르(Jacques Ranciere, 1940~)가 『무지한 스승』에서 규명한 모든 사람은 ‘지적으로 평등’하다는 사실과 일맥상통한다. 파리코뮌에서 보여준 철저한 평등의 시각과 실천이 파리코뮌이라는 역사적 현장을 있게 만든 힘이었고 랑시에르가 규명한 지적평등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어서 이를 현실에서 입증해 나간다면 현실은 다시 파리코뮌과 같은 급진적인 사고로 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은평 교수는 “랑시에르의 말처럼 해방된 사회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우리 스스로가 먼저 해방된 인간이 되는 것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중요하다”고 말한다. “해방하는 인간”과 “해방되는 인간”을 만들어 내면 이들이 모여 “해방된 사회”를 만들어 낸다.

체 게바라는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고 말했다. 조은평 교수는 “낭만주의적 시선에 문제를 제기하고 사실주의로 가자”고 하면서 낭만주의로 혁명을 보지 않고 우리 사회의 현실을 들여다보는 리얼리스트가 되는 것이 파리코뮌과 혁명의 의미일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거꾸로 그런 리얼리스트의 시선 속에서 불가능한 꿈은 다시 낭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때는 망각하기 위한 낭만이 아니라 열정이나 열망으로 불릴 수 있다면 좋을 것”이라고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그람시가 얘기한 ‘지성의 비관주의’와 ‘의지의 낙관주의’를 겸비해야 한다. 그래야 사실주의적 시선으로 지성을 들이댈 때 사람들이 우울증이나 비관주의의 함정으로 빠지는 실수를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후기: 진보성 (한철연 회원)

기억의 재배치가 필요한 시간 [청춘의 고전 시즌2]-⑧

[청춘의 고전 시즌2 /그림으로 읽는 철학] – ⑧

?? 일시: 2012. 7. 14.?(홍대입구 상상마당 강의실)

기억의 재배치가 필요한 시간

– 코로의 <모르트퐁텐의 추억>과 베르그송의 예술 감정 –

강연:? 류종렬(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예술적 감정과 베르그송의 사상

베르그송(Bergson, 1859~1941)을 두고 흔히 ‘지속’의 철학자라고 한다. 베르그송의 사상에서 새로운 중요한 발견이 ‘지속’이라는 개념이다. 지속은 ‘변화’?’생성’?’흐름’을 뜻하고 이 지속은 ‘실재성’을 띈다. 그리고 이 실재성은 ‘기억’을 이루면서 지속과 기억은 “깊이에서 변화하고 운동을 겪는 ‘심층(深層)'”을 이룬다. 베르그송의 철학은 이른바 ‘심층의 철학’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청춘의 고전 8번째 강의에서 베르그송 철학에 대한 이해를 도와줄 류종렬 교수는 강의 첫머리에 “오늘 강의에서 19세기 말~20세기 초의 베르그송 사상과 더불어 그의 예술론 중에서 미적 감정과 회화에 관한 관점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면서 조금은 복잡할 수도 있는 베르그송의 “지속” 개념을 조금 확대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정리해서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지속(변화ㆍ생성ㆍ흐름) 속에서 살아가고 움직이며 존재한다. 이런 지속은 크게 보면 변화하고 운동하는 자연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자아, 세계, 세상은 지속하면서 변화하는 과정 중에 있다. 그래서 베르그송의 철학을 ‘생성의 철학’이라고도 한다. 생명에서의 진화처럼, 인격도 변화과정 중에 있고 또한 자연, 즉 본성도 변화하는 중에 있다. 이 변화 속에서 변화를 공감하며, 인식하는 ‘지각’이 있다. 이것은 감각기관의 오관(五官)만이 아닌 몸 자체로 내재적 인식능력이 작동하는 것이다. 예술가는 이런 내부의 인식을 잘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이다. 베르그송이 다른 화가보다 자연에 대한 변화(움직임)를 잘 포착하는 작가들을 높이 평가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 예술이라고 불렀던 것, 혹은 미술적 표현에 있어 19세기 말 베르그송이 구상하던 사상체계와는 다른 시기의 예술의 형태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리고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같이 변화해 간 미술을 우리는 또 어떤 시각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류종렬 교수는 오늘 강연의 주제를 언급하면서 18~19세기 프랑스 혁명을 통한 사회적 변화의 내용을 이해하고 지금까지 알고 있던 서양의 철학사를 다시 들추어 그 배치관계를 규명해 보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라고 한다.

철학사를 다시 보자

본격적으로 예술작품을 감상하기에 앞서 서양의 철학사를 다시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류종렬 교수는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까지 철학사를 다음의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상층(上層)의 철학’ ― ‘평면(平面)의 철학’ ― ‘심층(深層)의 철학’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세 단계의 철학의 특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 번째 단계 ‘상층의 철학’은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Plato)에서 르네상스에 이르는 시기의 철학이다. 우리가 흔히 이른바 형이상학이라고 이해하는 철학이다. 보이지 않는 천상의 변화하지 않는 궁극적인 진리가 있어 인간은 이 진리를 항상 모방하는 위치에 있었고 이런 의식을 중심으로 인간의 삶을 해석했다. 주인과 노예, 지배와 피지배의 이항논리를 구성하여 현실과 이상은 철저히 구분되었다. 이상은 ‘진리’이며 현실은 아류였다. 이 있지도 않은 천상의 철학을 하던 1500~2000여 년 동안 형이상학적 철학은 인간의 노동력과 피를 담보로 그 사유체계를 유지했다. 이와 같은 ‘진리'(‘진실’이 아니다)의 학문은 수학, 논리학과 관계한다.

두 번째 단계는 공중에 붕 떠 있던 ‘상층의 철학’을 땅으로 끌어내린 표면의 시기이다. 이때의 철학을 ‘평면의 철학’이라고 한다. 고대에는 천상의 변화하지 않는 것이 진리이고 지상에서 변화하고 움직이고 생성하는 것은 다 거짓이었다. 그러나 1632년 갈릴레오(Galileo)가 “하늘의 원리가 지상에도 동일하게 있다”고 언급하면서 관성의 법칙을 끄집어냈다. 이것을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가 철학적으로 정리한다.

데카르트는 물체에도 실체가 있다고 말한다. 즉 “물리학(physics)적 실체의 긍정”이다. 물리학적 실체를 얘기하니 실체의 주체와 객체가 구분된다. 그리하여 일원론적 사고에서 이원론적 사고로의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데카르트는 주체를 얘기했고 칸트는 객체를 얘기하면서 근대 서양철학은 주체와 객체의 관계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게 된다. 이런 ‘평면의 철학’은 물리학과 관계한다.

이제 세 번째 단계는 표면 아래 ‘심층의 철학’이다. 평면의 철학이 현상과 실재를 논쟁 삼았다면 심층 철학의 시대에는 자연내재를 탐구한다. 변화하고 움직이고 생동하는 자연의 참 의미를 찾기 위해 자연의 진짜 역사, 생명의 진짜 역사를 얘기한다. ‘심층의 철학’은 생물학(진화론, 분자생물학)과 가깝다. 생명은 신이 “있어라” 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래서 1807년 라마르크(Lamarck, 1744~1829)가 생명의 진짜 역사에 대해 얘기했고 이미 프랑스에서는 1789년 혁명을 통해 가톨릭 성경의 천지창조의 기만과 전제군주의 학정(虐政)을 인민(人民)의 힘으로 전복시켰다.

이 역동적인 힘은 사회의 분위기를 바꿨고 인간은 스스로를 자각하기 시작했다. 혁명 이후 인간은 능동적이 되었고 인간 ‘내부’의 ‘심층’에 있는 ‘파토스(pathos)’를 드러낼 준비를 했다. 루소(Rousseau, 1712~1778)가 말했던 ‘연민(la piti?)’이라는 ‘공감’의 자발적 감정은 신을 바라보지 않고 인간을 향한다. 낭만주의적 사랑은 하늘이 하는 사랑이 아닌 인간이 인간에 대해 하는 사랑이다. 여기서 예술이 나오고 미적 감정이 나온다. 예술이란 인간의 내재적인 내면의 것을 표면으로 끄집어내서(드러내어) ‘실재화’ 시키는 것이다.

조금 장황할 수도 있는 설명이지만 류종렬 교수는 철학사를 다시 봄으로써 미술사에 있어 일련의 변화 과정이 매우 복합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어째서 베르그송이 유일하게 코로와 터너의 미술 작품을 인정하고 자신의 철학을 대입하려 했는지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미술이 18세기 계몽주의 이후 프랑스 혁명이란 사회적 변화와 함께 철학적 관점의 변동을 거치며 자연주의 또는 사실주의의 표현에 더 많은 관심을 드러낸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추상적 관념의 미술에서 사실주의와 자연주의로의 변화 – ‘코로’와 ‘터너’

류종렬 교수는 코로와 터너 작품의 특징이 자연주의적 표현과 함께 실재성의 표현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전의 미술을 상층을 모방해서 그리는 복사의 ‘시뮬라크르(형상모방=부족한 형상)’라고 한다면 코로와 터너의 작품은 심층의 두께를 밖으로 표현하는 ‘시뮬라크르(자연모방=창조적 형상)’라고 할 수 있다. “원본을 똑같이 찍어내는 것은 복사본이다. 들뢰즈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심성의 두께로부터 자연을, 사물을, 인격을 모방해내는 ‘시뮬라크르’가 진짜 미술이라고 했다”

류종렬 교수는 코로와 터너의 작품을 보기 전에 몇 가지 그림 작품을 소개하면서 추상적인 관념의 미술과 그 단계를 벗어나고 있는 미술의 차이를 확인시켜 주었다. 다비드(Jacques Louis David)의는 추상적인 관념의 미술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다. “작위적으로 표현된 여인들의 슬픔과 아버지의 권위를 상징하는 저 그림의 대상들은 누군가에가 뭔가를 의도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그림이다. 전형적인 유럽의 그리스 베끼기라고 할 수 있다”

▲ 호라티우스 형제들의 맹세, 1784 ⓒJacques Louis David(자크 루이 다비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그린 들라크루아(Delacroix)는 그림은 눈으로 보기 즐거워야 한다고 말했다. 류종렬 교수는 “들라크루아의 그림은 눈으로 보는 감각을 중심으로 그렸고 아직까지 감성에 대한 것을 애기하지는 못했다.”고 하면서 앵그르(Ingres)의 <그랑드 오달리스크>를 거론한다. “이 그림은 살롱에서 퇴출된 그림이다. 이 그림은 전형적인 그림의 구도에서 벗어난다. 형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은 형식적인 틀이 있다는 것이고 시각적인 틀에 맞는다는 것이다. 이 그림은 형상적 그림의 형식을 벗어나면서 ‘파토스’를 유발한다”고 설명한다. 이어서 “예술가들의 대단한 점은 여러 관점(장면) 중에서 가장 분명하게 빛나고 밝게 솟아오르는 시점을 포착해서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점”이라고 한다.

▲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 ⓒDelacroix(들라크루아)

▲ 그랑드 오달리스크, 1819 ⓒIngres(앵그르)

이제 예술가들은 형상적인 그림을 요구하는 귀족들의 그림을 그리지 않고 자신들의 그림 속에서 서서히 ‘파토스’와 ‘실재’가 드러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예술가들은 현실의 변화를 직감적으로 느끼고 그것을 예술 작품으로 현실에 드러내는 사람들이다. 류종렬 교수에 의하면 화가들은 변화하는 현실을 알아챘고 1830년 프랑스 혁명(7월 혁명) 이후 토지귀족이 몰락하고 쁘띠 부르주아들과 어울리면서 진정 무엇을 그려야 하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영원히 불멸할 듯이 보이는 추상적 관념의 그림에서 변화하는 생명과 자연에 대한 그림을 그린 이가 코로와 터너이다. 먼저 터너의 그림을 보자. 사실 베르그송의 철학과 가장 잘 맞아 떨어지는 작가는 터너이다. 터너의 작품들은 별 다른 설명이 없어도 자신의 작품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려 했는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동적인 바다와 산악 등 자연의 변화하는 모습과 주변 풍경들을 생생하게 화폭에 그려내면서 자연의 ‘역동성’을 강조했다. 터너가 평생 여행을 좋아했다는 사실도 그의 그림 성향을 이루는데 한 몫 했을 것이다. 또 <국회의사당 화재>와 같은 작품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림으로 남길 수 있는 대상이 있다면 어떠한 곳이라도 주저하지 않고 달려가 화폭에 담았다. 이런 점은 그가 그림에 목숨을 걸었다는 말을 믿게 만든다.

▲ 바다어부, 1796 ⓒTurner(터너)

▲ 베수비오 화산폭발, 1817 ⓒTurner(터너)

▲ 국회의사당의 화재, 1835 ⓒTurner(터너)

터너는 물론 역사적인 그림도 그렸지만 서사적인 역사성을 통해 교훈적인 메시지를 인간에게 새기려하지 않았다. 자연과 풍경을 그린 그 자체만으로 인간에게 감동을 느끼게 하는 살아있는 그림을 그렸다. 이와 관련하여 류종렬 교수는 다음과 같이 부연설명 한다. “바스키아(Basquiat)는 자신이 화가가 된 동기가 어릴 적 게르니카(Guernica)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받은 인상 때문이라고 말했다. 전쟁의 고통, 슬픔을 보고 ‘공감’을 느끼게 하는 이런 그림이 진짜 그림이다”

코로의 그림은 터너의 그림에 비해 역동성이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자연풍경의 아름다움을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코로의 풍경화는 자연이 가장 빛나게 솟아나는 시점을 예술가의 관점으로 잡아낸다. <모르트퐁텐의 추억>을 그린 프랑스 ‘모르트퐁텐’ 지역의 자연환경은 예술가들의 감수성을 자극하였고 많은 화가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작품 활동을 하였다.

▲ 모르트퐁텐의 추억, 1864 ⓒCorot(코로)

사실 코로의 그림 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그림은 <퐁텐블로의 숲>이다. ‘퐁텐블로’는 당시 살롱에 가서 미술하기를 거부하던 자연주의 화가들이 1830년부터 작품 활동을 위해 모이는 장소였다. 류종렬 교수는 “화가들의 이런 경향은 맑스(Marx, 1818~1883)가 1846년 프랑스에 와서 인민이 성립했다고(프롤레타리아트가 성립했다는 것) 말한 후 1848년 「공산당 선언」을 쓰던 시기와 겹친다.”고 설명한다. 1840년대 이후 사회질서가 바뀌고 서민 계층이 사회의 주축으로 등장하면서 자연주적 태도의 예술가 중 밀레(Miele)처럼 인민의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도시에서 귀족이나 부자들의 입맛에 맞는 그림은 그리지 않았다.

▲ 퐁텐블로의 숲, 1820~1875 ⓒCorot(코로)

당시 이러한 변화는 밀레와 쿠르베(Courbet)의 그림에 잘 나타나 있다고 한다.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에서 농부의 손에 한 줌 움켜쥐어 있는 씨앗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씨앗이다. 바로 프롤레타리아들이 성립하는 시기에 이 그림이 나왔다”, “일반적으로 밀레의 <만종>과 <이삭줍기>를 두고 농촌의 목가적인 평화로움을 그렸다고 하는데 이런 해석은 다 사기다! 이 그림들에서 표현하는 것은 실제 인민들의 고통과 슬픔이다”

▲ 씨 뿌리는 사람, 1850 ⓒMiele(밀레)

류종렬 교수는 이어 “쿠르베의 그림은 ‘특정한 위대한 인간’이 아닌 자연 속에 있는 ‘인민’ 그 자체를 가감 없이 표현하고 있다”고 말한다. 쿠르베는 프루동(Proudhon, 1809~1865)과 친교가 있었고 무정부주의적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기도 한 인물이다. 특히 그의 작품 <오르낭의 매장>에서 이전까지 전형적인 매장을 그린 작품에 보이는 엄숙한 귀족?성직자들의 얼굴을 모두 자기 동네의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로 바꾸어 놓았다. 이것이 “인민 의식”이다. 바로 이런 그림이 시대정신을 기만하지 않고 “시대를 바꾼 그림들”이었다.

▲ 돌 깨는 사람들, 1849 ⓒCourbet(쿠르베)

▲ 오르낭의 매장, 1849~1850 ⓒCourbet(쿠르베)

자연 속에서 이루어지는 철학과 예술을 위해
류종렬 교수는 코로?터너와 같은 자연주의ㆍ사실주의 화가들의 미술 경향과 이와 연결되는 베르그송의 철학을 두고 “‘자연에 의한’, ‘자연을 위한’, ‘자연 속에서’의 철학”이라고 하면서 이름을 붙인다면 “범자연내재주의”라고 부를 있다고 한다. 이는 프로이트(Freud)의 정신분석이나 영미(英美)의 실험심리학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우리가 우리 내부의 인식을 잘 드러내고 이러한 내재적 ‘지각’의 방식이 사람들끼리 상호 소통되어 ‘공감’을 이루어 낼 때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던 ‘상층의 철학’, ‘천상의 철학’을 전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남아있는 ‘혁명’ 과제이기도 하다. 류종렬 교수는 이 강의에서 베르그송의 사상과 사실주의적 회화의 경향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에는 이것을 우리의 삶과 연계시켜 우리 사회의 모순을 깨뜨리고 개개 인간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토대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한국사회는 일제 강점기와 친미주의 시기를 겪으면서 일?미 ‘제국주의’의 영향 아래 ‘상층의 철학’만 가르쳤고 결국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능력을 발양시키지도 못하고 “신비주의와 동일성의 논리 아래 ‘착각’의 역사를 살아왔다”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철학사에서 처음으로 ‘상층의 철학’을 ‘착각’이라고 한 철학자이다. 베르그송?코로?터너와 같은 사람들은 자연과 더불어 자연 속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했던 자들이다. 류종렬 교수는 “링컨(Abraham Lincoln)이 단지 ‘ofㆍbyㆍfor the people’만 말하고 ‘민중(인민) 속으로’를 빠뜨린 것은 ‘리버럴리스트(liberalist)’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 것”이라고 하면서 “우리는 ‘위마니떼르(humanitaire)’를 중심으로 ‘위마니떼(humanit?)’라고 하는 인생의 자유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강의 말미에 류종렬 교수가 강조하던 ‘위마니떼’의 삶은 말하자면 현대 시장자유주의에 함몰되지 않은 ‘인도주의적 이성주의자’의 삶이라고 하겠다. 이런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자연 속에서 자기에 의한 자기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마치 자기 방식으로 자기를 내보여 자기가 드러나는 작품을 그리면서 살았던 코로와 터너의 삶처럼 말이다. 베르그송이 말한 ‘지속’과 ‘생성’의 철학을 우리 삶에 실현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류종렬 교수는 다음과 같은 말을 마지막으로 이번 강의를 끝맺었다.

“헉명의 시대를 구현하는 자질은 우리 안에 가려져 있다. 이 자질과 능력은 자연주의적 태도, 사실주의적 태도에 대한 긍정이 있어야 튀어나오고 바로 그래야만 사회의 이상성이 무너진다. 이제는 우리의 삶에 있어 좀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며 실제적이고 자연적인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후기: 진보성 (한철연 회원)

르네상스 화가들은 왜 원근법을 발명했을까? [청춘의 고전 시즌2]-⑦

[청춘의 고전 시즌2 /그림으로 읽는 철학] – ⑦

? 일시: 2012. 6. 23.?(홍대입구 상상마당 강의실)

르네상스 화가들은 왜 원근법을 발명했을까?

-?푸코가 바라본 ‘수태고지’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

?
강연: 이지영(홍익대 강사)

 

르네상스는 재탄생이라는 의미이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인문주의의 부활을 말한다. 인간의 가치가 새롭게 부활하면서 중세의 신적 가치질서가 지배하던 세상의 중심으로 인간이 들어가 중심 가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은 수백 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15세기 까지 여전히 신의 힘은 강했고 세상은 그대로인 듯 했지만 예술가들은 새로운 변화의 에너지를 감지하고 그것을 그림에서 드러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고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방식은 무엇이었을까?

이번 강의를 맡은 이지영 교수는 강좌 주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테마를 제시한다. ‘왜 르네상스 화가들은 그 당시 그렇게 많이 수태고지를 그려야 했는가?’, ‘근대철학의 이성적이고 통일적인 주체가 아니었던 인간의 모습과 위치가 르네상스 그림에서 어떻게 자리매김 되었나?’, ’15~17세기 그림에서 운동과 시간의 문제가 어떻게 변화하는가?’ 그리고 이것들과 연결하여 결국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의문이 이 강좌를 관통하는 하나의 중심문제이다.

앞서 얘기를 이어가 보자. 15세기 르네상스 시기는 철학자들처럼 말과 이론을 통해 이성적 가치와 신적 가치의 변화를 판별하고 규정할 수 있던 시대가 아니었다. 이 때 예술가들이 등장한다. 벤야민이 말했듯이 예술가들은 변화하게 될 것들을 미리 자신 앞으로 끌어당겨서 자기의 작품 속에서 그 역동적 에너지를 표현하려한 사람들이다. 세상의 변화를 좀 더 빠르게 느껴 그것을 철학이나 과학에서 이루어내기 이전에 예술의 영역에서 먼저 성취한 사람들이다. 르네상스 시기 예술가들은 그것을 원근법으로 표현한다. 당시 원근법은 단순히 이미지를 구성하는 방식이 아니다.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 원근법이라는 구성방식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르네상스 시기의 화가들도 그랬다. 지금 여기서 우리는 원근법을 데카르트적 합리주의와 연결시키고 근대 과학의 공간관과 시간관에 연결시키려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 과정이 생각보다 체계적이지는 않았고 역사적으로 수백 년간 서서히 이루어졌다. 중요한 것은 그런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것들이 그림 속에 서서히 점층적으로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성적 활동으로서의 원근법 : 공간의 통일성

르네상스 이후 인간이 신 대신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면서 데카르트의 세계관이나 17세기 이후의 근대 과학에서 말하는 공간과 시간의 물질적 개념이 등장하였다. 즉 무한히 펼쳐진 동질적이고 측정가능하며 어디서도 지적 차이가 없는 공간, 인간이 계산하여 정복할 수 있는 무한한 물질세계가 존재하며 이러한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원근법적 질서이다.

15세기의 원근법은 ‘코멘수라티오’라고 불리웠다. 코멘수라티오는 ‘측정할 수 있는’ 또는 ‘같은 단위로 잴 수 있는’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측정할 수 있는 세계를 보는 세계관’을 의미한다. 이제 세계는 인간에 의해 측정되는 것으로 다가왔고 신이 창조한 세계 안에서 유한했던 인간존재는 이제 무한한 물질세계 위에서 도구로 세계를 측정할 수 있는 지위에 오른 것이다. 혁명적 변화다. 『서양 미술사의 재발견』에서 저자 다니엘 아라스는 원근법이 우리에게 가장 감동적이고 가슴 뭉클한 발견을 해낸 부분은 공간과 시간을 기하학화 해낸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이 세상과 독대해서 자신의 잣대로 재고 바라보는 독자적인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림을 볼 때에도 거리감이라는 기능을 통해 재현된 대상의 조화로운 비례구조를 관람자가 어떤 위치와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림의 의미가 달라지듯이 말이다.

15세기 화가들은를 주제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려냈다. ‘수태고지(受胎告知, Annunciation)’는 아기예수가 인간의 몸이 되는 순간이다.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을 의미한다. 수태고지의 많은 그림에서 성육신은 원기둥으로 현현되고 그것은 수태고지의 핵심 그 자체이지만 감히 쉽게 재현될 대상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 당시 화가들은 수태고지 그림 안에 구체적인 물질 공간을 담기 시작했다.

▲ 수태고지 ⓒFra Angelico(프라 안젤리코)

만약 캔버스가 없다면 그림의 소실점은 캔버스를 뚫고 나가 무한한 공간을 지향한다. 원근법은 바로 무한함을 담고 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로서 15세기 사람들이 무한(신의 영역)을 그림 안에 표현한다는 것은 두렵고 쉽지 않은 방법이었다. 당시 무한은 상식이 아니었다. 척도로 잴 수 없는 신의 영역인 ‘무한’과 척도로 잴 수 있는 인간의 영역인 ‘유한’의 관계가 결국 수태고지에서 성육신의 회화적 수수께끼와 관련하는 지점이다. 능력자인 신이 구체적인 존재로 현현하는 그 포인트가 성육신이며 수태고지의 핵심이다. 이 순간 원근법이 그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

따라서 이 수태고지 그림들은 그림 하나하나의 대상과 요소들이 수많은 상징과 함축적 의미를 담고 있다. 당시에는 그림이 단순한 이미지가 아닌 하나의 텍스트로서 기능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모난 창을 통해 그 프레임으로부터 그림의 구도를 관조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단순한 그림의 틀이 아니라 지성 활동으로서의 프레임(생각의 틀)이 되는 것이다.

이지영 교수는 수태고지의 그림에서 보이는 특징 중 하나는 ‘정지해 있는 영원한 시간성’이라고 말했다. 천사와 마리아의 이야기가 오고가면서 찰나에 성육신이 일어나는 신비의 순간을 담고 있지만 이것은 다 구약의 얘기이다. 이 모든 것은 성서적 사건의 해석이자 그 의미를 영원불멸하게 고정시키려 하는 것으로 보이며 스쳐지나가는 순간의 포착이 아닌 영원한 신적 질서가 느껴지는 그림인 것이다.

?17세기 바로크 시대 : 공간의 통일성에서 시간의 통일성으로

바로크 시대에는 종교개혁과 신대륙 발견, 과학의 발달, 기아와 전염병으로 인해 혼란이 연속되던 시기였다. 사람들은 점점 우주만물의 변화무쌍함과 덧없음을 깨닫기 시작했고 인간의 관습과 이성, 감각, 종교-신 그 무엇도 신뢰할 수 없다는 생각이 짙어졌다. 특히 이 시기 바니타스(Vanitas)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의 그림은 해골이나 먹다 남은 음식, 찰나의 빛을 이용해 죽음과 소멸이라는, 결국은 허무할 수밖에 없는 대상의 한계를 표현하고 있다.

카라바조(Caravaggio)의 그림들은 15세기 수태고지의 그림과 비교할 때 인간세상의 느낌과 죽음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세의 허무함을 운동성을 통해 드러낸다. 그런데 운동은 시간의 문제이다. 찰나적 운동의 순간을 보여줌으로써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을 순간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시간은 텅 비어있는 곳으로, 죽음으로, 無로 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하인리히 뵐플린은 『미술사의 기초개념』에서 16세기는 평평하고, 정적이고, 부동하며, 선(線)을 강조하지만 17세기는 운동을 강조한다고 했다. 그러니 17세기의 그림은 구도자체가 이전과는 달라진다. 수태고지의 그림들은 일렬로 배치되어 평평하고 운동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카라바조의 그림은 인물들의 위치가 매우 다양하게 배치된다. 17세기 그림들을 관통하는 운동성은 운동의 한 지점으로서 찰나의 순간을 통해 ‘시간’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1599 ⓒCaravaggio(카라바조)

17세기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의 <시녀들>은 그림 속 대상들의 위치와 시선, 전체적인 구도, 빛의 효과적 사용을 통해 캔버스 앞 실제 공간의 관람자를 그림 쪽으로 끌어들이고 그림의 대상을 실제공간으로 끌어낸다. 그리고 이 그림의 미묘한 시선처리와 오묘한 대상의 배치는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상호교환을 끊임없이 일어나게 한다. 그래서 항상 보이는 자와 보는 자가 누구인지 헛갈리게 만든다. 푸코의 말에 따르면 <시녀들> 화면 밖의 실제 자리는 관람자와 모델과 화가의 역할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자리라고 말한다. 벨라스케스의 그림은 2차원의 평면공간과 3차원의 실제공간이 시점 문제로 끊임없이 연루되고 서로 공모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벨라스케스의 이 그림에는 고전주의 시대의 표현법에 대한 ‘재현’과 그 재현이 우리에게 열어놓은 공간의 정의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시녀들>에서의 재현은 재현의 모든 요소들, 즉 재현의 이미지들, 재현이 향하는 시선들, 재현을 통해 보이는 얼굴들, 재현을 낳게 한 몸짓들과 더불어 스스로를 재현하려 한다.” – 강의록 중에서 –
<시녀들>은 벨라스케스가 다시 재현한 것이지만 그 재현을 가능하게 한 주체의 출발점은 근대인들이 얘기하는 주체와는 달리 끊임없이 헛갈리는 자리여서 하나의 확고하고 통일된 인식주체로서의 인간이 들어갈 자리는 아직 아니라는 것이다. 재현을 이루어 낸 것의 시작점은 르네상스의 인간과는 다르지만 근대적인 주체와도 다르다. 이 그림은 당시 명확하게 확립되지 않았던 이른바 인간의 주체성과 같은 것을 고전주의적인 재현으로 보여준 것이라 말할 수 있다.

▲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1599 ⓒCaravaggio(카라바조)

푸코는 <시녀들>의 분석을 통해, 그림 안에서는 무관심적으로 드러나지만 실제 그림 속에는 생략되어 있는 국왕부부의 대상적 소멸을 통해 고전적 재현 방식(수태고지의 방식처럼)의 재현이라는 가능성을 강조함으로써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Epist?m?, 특정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지는 특정한 방식으로 규정된 인식의 테두리) 안에서는 아직 주체가 탄생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또한, 인간이란 그저 재현을 이루는 한 요소에 불과할 뿐 재현을 가능하게 하는 통일적 근거도, 주체도 아니라는 것을 가시적으로 드러낸다. ‘선험적 주체’라는 것은 고전주의 시대 이후, 근대라는 특정 에피스테메의 틀 안에서 탄생된 역사적 구성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지영 교수는 이 강의를 준비하며 발견한 것 중 하나가 바니타스화(Vanitas와 Memento mori의 그림처럼 인생의 덧없음과 무상함을 미술에 표현한 것)와 벨라스케스의 그림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던 ‘빛의 허무함’이라고 말했다. 끊임없이 나누어지고 확정되지 않아서 뺏길 수 있고 교환될 수밖에 없는 자리가 결국 ‘인간의 자리’라는 것을 그 당시 사람들은 알았다는 것이다. 재현에 속해 있고 재현을 가능하게 하지만 모든 재현의 중심점이라고 할 수 없는 주체이다. 이 그림들은 여전히 신적 질서 안에서 평화로이 살 수 있는 인간도 아니고, 중세적 관념을 모두 버리고 과학을 믿으며 이성을 통해 강력한 이성적 주체인 인간 자신을 믿으면서 살 수 있는 인간도 아닌, 그 중간에서 한계를 목도하고 끊임없이 고뇌하며 한계에 시달리는 인간의 위치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정리하자면, 르네상스에서 16세기까지는 운동이 잘 표현되지 않고 17세기에 운동이 드러나는 여러 구조상의 차이들이 등장한다. 결국 이 변화의 차이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태도의 차이이며 한계를 직시하는 인간존재의 모습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후기: 진보성(한철연 회원)

삶을 완성하려는 자, 여백을 즐겨라 [청춘의 고전 시즌2]-⑥

[청춘의 고전 시즌2 /그림으로 읽는 철학] – ⑥

??? 일시: 2012. 6. 9.?(홍대입구 상상마당 강의실)

삶을 완성하려는 자, 여백을 즐겨라

– 팔대산인의 묘석도(猫石圖)와 선불교 –

 

강연: 황희경(영산대 교수)

 

‘돌다움’이란 없다

간혹 돌 모으기를 즐겨 하는 사람이 있다. 수석이 취미인 사람들이다. 돌을 모은다니 의아스러운 취미다. 돌의 무엇이 사람을 매료시키는 것일까? 그들은 ‘돌’의 무엇을 보는 것일까? 그런데 의아스런 일이 하나 더 있다. 돌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돌을 그림으로 그리는 일이다. 돌을 두고 보는 일도 낯설지만, ‘돌을 그린다’ 함도 익숙한 광경은 아니다. 과연 무슨 뜻이 ‘돌’에 담긴 것일까?

한국 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 KT&G 상상마당 공동 주최로 이루어지는 <청춘의 고전> 여섯 번째 시간, 황희경 교수(영산대 교수)는 뜻밖에도 ‘돌’에 관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삶을 완성하려는 자, 여백을 즐겨라’라는 주제로 돌 하나에도 뜻을 담아 그린 한 예술가의 삶을 재조명하며, 청중을 정감 넘치는 그의 작품세계로 이끌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돌의 멋을’ 전달함에 운치 있는 시 한 편을 직접 낭송함으로써 직관적인 이해와 감동을 선사하였다. 소개된 시(작자 미상)는 다음과 같다.

“물에 돌이 없으면 맑지 않고
산에 돌이 없으면 웅장하지 않고
성에 돌이 없으면 예스럽지 않고
궁전에 돌이 없으면 화려하지 않고
정원에 돌이 없으면 빼어나지 않고
사원에 돌이 없으면 신령스럽지 않고
집에 돌이 없으면 아취가 없고
인간은 돌이 없으면 편하지가 않다.”

이 시를 통해서 황희경 교수가 강조한 것은 ‘돌의 멋과 정신’이다. 돌은 어느 곳에서나 쉽게 접할 수 있는, 그래서 당연시 여겨지는 사물이지만, 어느 순간 강하게 자신의 멋을 표출한다. 차가운가 하면, 성곽에 이끼 낀 돌은 시간을 적시고 사람의 마음을 울어낸다. 까슬한가 하면, 계곡물에 쓸려간 돌 표면이 부드럽기만 하다. 절 마당에 놓인 석탑은 세속을 건너고, 산꼭대기 바위는 흘러가는 능선도 멈춰 세우는 기상이 있다. 자연으로부터 흘러나와 자신에게 주어진 위치에서 고귀한 정취를 드러내는 돌이다. 제각각인 모양에서, 서로 다른 역할과 쓰임새로부터 다채로운 멋이 나지만 언제까지나 자연 일부로 남아 있기에 돌은 질박하다. 그렇다면 왜 서로 다른 형태의 멋인가?

돌의 본질을 꿰뚫어 황희경 교수는 그 진정한 미(美)를 이렇게 표현한다.

“돌에는 진짜 돌이라는 것이 없다. 무엇이나 그 나름대로 묘미가 있다.”
“돌이라는 것에는 어떤 전형적인 모습도 없다. 인생이 꼭 어떠해야 하는 것도 없다.”

그는 “멋진 돌이 따로 없다”고 한다. 원래 “‘돌다움’이라고 하는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황희경 교수는 “인생도 그러하다”고 말한다. 주위를 돌아보면, 같은 모양의 돌이 없고 우리네 인생도 저마다 다르다. 돌 모양이 분방하듯 인생에도 정답이 없다. 모두 서로 다른 위치에서 서로 다른 묘미가 있다. 자유 미(美)의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과 자연의 간격이 결코 멀지 않다.

고양이와 고양이의 그림자

황희경 교수는 돌에 자유미와 친숙미가 있다고 본다. 그런데 동물의 경우, 그 중에서도 고양이가 더욱 그러한데, 특히나 “불교에서 고양이는 승려들에게 인간의 자유로운 경지를 의미한다”고 한다. 즉, “고양이의 이미지는 자는 것 같지만 깨어있는 상태,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언제라도 쥐를 잡을 수 있는” 예리함과 여유의 상징이다. 덧붙여 그는 인간이 지향해야 할 삶의 자세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고양이의 상징은 또한 희로(喜怒)의 감정을 극복한 고요의 힘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자세’로써 승려들만이 아니라 우리 역시도 도달해야 할 이상적인 상태가 아닌가 한다.”

한편, 황희경 교수는 인간이 무엇인가를 추구함에 있어 경계해야 할 것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에는 남천 선사와 조주 선사의 선문답을 예로 든다. 그 일화를 요약하자면, 어느 날 절에 아름다운 고양이 한 마리가 들어왔다. 절의 승려들은 그 고양이가 자신의 것이라고 직접 데려가 키우겠다고 야단을 피운다. 그런데 이 모습을 남천 선사가 보고 승려들에게 말한다. “너희 중에 누가 도를 말하면 이 고양이를 살릴 것이고, 말하지 못하면 고양이를 참할 것이다.” 아무도 답하지 못하자 선사는 고양이를 베어버린다. 남천 선사는 뒤늦게 찾아온 제자, 조주에게 낮에 있었던 일을 설명하며 묻는다. “만약 그 자리에 네가 있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조주의 답은 이러했다. 신던 짚신을 머리에 거꾸로 쓴 채 뒤돌아 걸어나가는 것이었다. 남천 선사는 그 모습을 보고 “조주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고양이를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고 했다.

미물의 생명도 중시하는 불교에서 선사가 목숨을 벤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 논란이 있다. 이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남천 선사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황희경 교수는 “속세를 떠났음에도 본말이 전도된 승려들”의 자세를 남천 선사가 바로잡아주려 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조주의 행동을 두고 그는, 남천 선사가 바로 잡고자 했던 ‘뒤바뀐 뜻’을 조주가 알아차리고서 풍자적으로 신을 ‘거꾸로’ 신은 것이며, 그때가 마침 늦은 저녁이기도 하여 유머 있는 인사로 방을 나간 것이라고 해석한다.

때로는 어떤 신념, 어떤 좋은 취지에서 출발한 취미생활이더라도 본질을 잊거나 치우치게 되면 집착이 될 수 있다. 예컨대 돌이 형태 없는 자유로움이라면, 그것은 그냥 돌이 아니다. 돌이 따르는 길이 자유라면, 사람이 따르는 길과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가짐조차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버린다면 본래의 의미는 흐려지게 된다. 또는 돌의 참다운 의미를 모르고 고가의 수석수집에 급급해할 수도 있다. 애초에 매달리는 마음, 진실의 그림자 같은 그 마음마저도 끊어낼 수 있다면 그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길일까?

‘바위 위에 앉은 고양이’ ? 팔대산인(八大山人)

황희경 교수에 의하면, 앞서 말한 불교적 화두를 염두에 두면서 고양이와 돌 바위를 한 폭의 그림으로 그린 화가가 있다. 이 두 대상의 자유미를 살려 따뜻한 그림으로 승화시킨 중국화가, 팔대산인(八大山人 본명은 주탑)이다. 그러면 팔대산인(八大山人, 1626~1705년)은 어떤 인물인가? 황희경 교수가 소개한 바로 그는 명나라 말기에 황족으로 태어났다. 19세 때,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자 그는 거짓으로 벙어리 행세를 하다가 23세의 많지 않은 나이에 출가한다. 무려 30년간 승려생활을 하고 세상으로 환속한 때가 그의 나이 쉰다섯.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청나라 관청의 경계는 계속되고, 그 때문에 한동안 미치광이 행세를 다시 하고 살았다고 전해진다. 정말로 정신발작을 일으킨 적도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의문이라고 한다.

▲ 팔대산인의 ‘바위 위에 앉은 고양이'(猫石圖)

팔대산인은 “중국 문인화의 최고봉”이라 불리지만, 특이하게도 여기 <묘석도>에는 “글자 하나가 없다”. 다만 그림에서처럼 두 마리의 고양이가 바위에 상하로 자리한다. 그런데 고양이의 등선이 놀랍게도 바위의 곡선과도 어긋나지 않고 있다. 즉, 서로 다른 존재의 경계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를 가리켜 황희경 교수는 “동물과 자연이 교류하는 하나의 세계”라고 말한다.

그림 안에는 이러한 조화로움뿐 아니라 화가의 초월적인 자유미도 엿보인다. 두 마리의 고양이 중에 아래 위치한 고양이는 바위 사이에 잠자듯 저자세로 앉아있고 다른 한 마리는 바위 위에 두드러진 자세로 앉아있다. 어찌 보면 위에 있는 고양이가 아래 있는 고양이를 예의 주시하는 모양새이지만, 아래에 있는 고양이는 눈을 감은 채이다. 황희경 교수는 “아래의 고양이가 괴로운 세상을 잊고자 하는 팔대산인의 심정”을 대변한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묘석도>의 고양이는 화가의 ‘사의’(寫意, 대상을 그대로 그리지 않고 화가의 생각이나 심정을 표출하는 것)를 나타내지만, 또한 감상자의 관점에 따라 “언제, 어떤 일이나 상황에도 투영될 수 있다”고 한다. 그의 말처럼 그림의 “해석은 열려 있다”.

무관심한 정감으로 온기 있는 세상을 그리다

‘순수한 광기’와 천재성을 지닌 화가, 팔대산인. 그는 평생 자연을 벗 삼아 살면서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산수, 소나무, 포도, 과일, 난 꽃, 연꽃 등을 비롯하여 물고기와 새우, 고양이, 병아리, 오리(가족), 공작, 학, 독수리 등 그가 그린 작품 수는 언급할 수 없을 정도다. 그림의 수만큼이나 표현된 느낌도 다양한데, 어떤 그림에서는 연꽃 아래 헤엄치는 “물고기의 즐거움”이 느껴지고, 또 다른 그림에서는 연꽃을 “먹으로 그린 것인데도 마치 춤추는 색을 보는 듯하다”. 물론, 홀로 있는 까마귀에게서 인간적인 쓸쓸함과 고독감도 전해진다. 또 이름 모를 새 한 마리의 설움이나 비통함도 느껴진다. 어떤 그림에서는 메추라기가 화내는 분노의 상황도 볼 수 있고, “관직의 권세를 빗대어 거절의 의미로 그린 공작 그림”도 있다. 그런가 하면 생동감 있고 자유롭게 노니는 물고기에 대조적으로 날카로운 눈매를 한 물고기 그림도 있다.

특히 몸의 형태가 마름모꼴로 표현된 물고기 그림이 주목할만한데, 이 그림을 가리켜 황희경 교수는 “선이 간략하고 힘차며 여백까지 잘 활용한 그림”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그림은 자신감 있고 대담하지 않으면 그리지 못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팔대산인이 71세 때 그린, 연못 위에 흐드러지게 핀 연꽃 그림은 “그가 희로애락을 초탈한,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보는 평정심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황희경 교수는 팔대산인의 예술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세간에 살아간다는 것, 한 살, 한 살 살아간다는 것이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떠나기도 하지만 그러면서도 살아야 하는 것이 인생이다. 그런 고독함과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마음을 팔대산인도 자연을 통해 그림으로 드러냈다. 그의 그림은 간략하면서도 여백이 많고 생략적이며, 조용한 듯하면서도 팽팽한 긴장과 움직임이 있다. 이런 종합적인 아우라가 있어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세월과 나라를 넘어서 비슷한 감동을 준다.”

팔대산인은 친숙한 동물과 자연을 접하면서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지 않고 개성 넘치는 방식으로 자신의 정감을 표현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중국의 반고흐라 불린다”고 한다. 광기에 시달려 자신의 귀를 자르기도 했던 인상파 화가, 반고흐. 그러나 그의 예술적 광기는 어둡게 색칠된 밤이 아니라 오히려 환하고 분명한 밤을 그리고 희미한 별빛이 아니라 오히려 밝게 생동하는 별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더욱이 그의 <해바라기>는 단순히 피고 지는 여러 송이의 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삶의 모습으로 여정을 따라 사는 인간적인 해바라기다. 또한 꽃병과 책상의 가는 경계선과 작품 전체에 흐르는 노란색 톤은 서로 다르지 않은 생명성을 포용한다. 고흐의 강렬한 색감이나 그가 깨달은 고요한 심정이 팔대산인이 작품 속에 녹아있는 “풍부한 정감”과 “깊이 있는 평화로움”에 닿아있는 것이다.

마라톤 같은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세상을 온기 있게 바라본 그들, 황희경 교수의 관찰처럼 그들은 보이지 않는 ‘여백의 미’를 즐길 줄 알았다. 이는 비단 그들뿐만 아니라 바쁘게 무언가를 쫓아가듯 살아가는 현대인 모두가 한 번쯤은 되새겨 보아야 할 ‘자유미’다.

?후기: 김은하(건국대 외래교수)

아우라의 몰락과 예술을 통한 정치 [청춘의 고전 시즌2]-?

[청춘의 고전 시즌2 /그림으로 읽는 철학] – ?

?? 일시: 2012. 5. 26.?(홍대입구 상상마당 강의실)

아우라의 몰락과 예술을 통한 정치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강연: ?현남숙 교수(가톨릭대 초빙교수)

?

역사의 비극과 정치적 금기

세상에는 나라별, 종교별, 풍속별, 대륙별로 수많은 금기가 존재한다. 말과 행동의 복잡성에 따라 그리고 제약 정도에 따라 그 종류도 다양하지만, 그중에서 정치적 금기는 좀 더 다양하고 민감하다. 역사와 얽혀있는 까닭이다. 예컨대 우리는 아직 ‘왜놈’이나 ‘조센징’이라는 단어를 알고 있으며, 정치적인 패러디와 풍자 코미디는 여전히 사정이 어렵다. ‘조선족’이란 말도 본래는 일제 강점기 때 중국으로 가야 했던 ‘한민족의 후손’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사회적 갈등을 함께 내포한 말이 되었다.

유사한 방식으로 독일에도 정치적으로 민감한 금기가 있다. 예컨대 ‘2차 세계대전’이라는 말을 공공장소에서 언급하는 일이다. 만약 외국인이 레스토랑이나 카페 같은 장소에서 이 단어를 무심코 꺼내게 된다면, 좋았던 분위기도 순식간 겸연쩍어질 수 있다. 그것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민족적 차원에서 빚어진 나치주의 극복 문제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나고 세상이 서둘러 바뀐 지 어느덧 67년째, 그사이 세대교체가 두 번 이루어졌지만, 전쟁의 여파는 아직 남아 있다. 도대체 핍박받던 이들의 고통이 얼마나 컸길래 치유되는데 수세대가 걸리는 것일까? 행여 인종주의적 만행에 반대한 독일인은 그 어디에도 정말 없었던 것일까?

세계대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그때, 독일에는 두 인물이 있었다. 나치들에게 추격당하다 끝내 자살로 삶을 마감한 유대인 철학자 발터 벤야민. 그리고 또 한 사람은 히틀러 정권에 저항해 시대적 양심과 용기를 지킨 독일 화가 존 하트필드이다. 이번 상상마당 청춘의 고전은 현남숙 교수(가톨릭대학교 초빙교수)가 찾아낸 이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 발터 벤야민

이날의 주제는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과 존 하트필드의 <괴링, 제3제국의 사형집행인>”. 현남숙 교수는 첫째, 벤야민의 생애와 복제 기술에 바탕을 둔 영화이야기를, 그리고 둘째로 하트필드가 사용한 몽타주 기법의 사진 예술에 관해서 이야기를 펼쳐나갔다.

벤야민은 1892년, 베를린의 부유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수준 높은 교육을 받는가 하면, 독일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마치고 박사학위도 취득한다. 그 후에 모스크바로 여행 떠나기도 하는데, 그때가 1926년이라고 한다. 1939년, 급기야 독일 전쟁이 발발되자 벤야민은 프랑스의 한 수용소에 감금되게 된다. 다행히도 여기에서 그는 석방의 기회를 잡아 1940년, 파리를 거쳐 스페인으로 길을 향한다. 나치의 감시를 피해서 백두산보다도 높다는 피레네, 1년 내내 눈이 남아있다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간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안타깝게도 스페인 국경까지였다. 그만 그의 입국이 거기에서 좌절되어버린다. 목숨을 걸고 이 고개, 저 고개 넘어 산맥도 헤쳐왔건만 법륜 스님의 말처럼, 사람이 죽어가는데 국경선이란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좌절의 순간, 벤야민은 다른 한쪽에서 나치가 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현남숙 교수에 의하면, 벤야민은 어려서 유복하게 태어났지만, 실제 그의 삶 대부분에 ‘가난’이라는 꼬리표가 따랐다고 한다. “그는 궁핍한 생활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소장하고 있던 클레의 작품, <새로운 천사>를 파는가 하면, 변변한 연구지원도 받지 못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자신만의 철학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높은 도시 물가마저도 부담되어 더 싼 곳으로 이사해야 했는데…….” 이즈음에 스쳐 지나간 현남숙 교수의 자문 같은 말이 인상적이다. 연구자는 “과연 제도권에 속해야 공부할 수 있는가? 아니다. 그의 삶을 짚어보면서 그런 생각이 바뀌었다.”

그의 고분 없는 이야기는 가만히 새겨 볼 만하다. 왜냐하면, 벤야민은 한 인간이 더는 제도권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한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는 사회라는 제도권에서 배척당했고 동시에 독일이라는 국가적 제도권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당하였다. 어디 그뿐인가? 나치를 피하기 위한 목숨을 건 탈출도 좌절되었다. 이는 당시 모든 세계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라가 없으면 민족도 없고 세계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치의 예술화’에 맞선 ‘예술의 정치화’

1940년을 전후로 독일인은 유대인의 대학살과 핍박에 침묵으로 동조하였다. 유대인들은 모든 것을 다 뺏기고도 도망 다니는 도둑인 양 취급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벤야민은 민족을 넘어 ‘인간’을 바라봄으로써 자신만의 철학을 개척한다. 그가 마지막까지 홀로 고투한 철학은 무엇이었을까?

현남숙 교수는 벤야민의 철학을 세 가지 구도로 규정한다. 즉 ‘정치-예술-기술’이 그것이다. 벤야민에게 정치는 나치주의라는 현실적 한계를 넘어서야 하는 것이었다. 또한, 철학 속에서 그가 본 예술은 해방으로 가는 자유의 문이었다. 기술은 예술의 기술이다. 그 예로 현남숙 교수는 당시 ‘획기적으로 부상한’ 영화와 사진 예술을 든다.

그는 영화와 사진 매체를 가리켜 “기술복제라는 특징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투쟁적인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감독은 영화적 장치효과와 카메라 및 편집기술을 통해서 자신의 사상과 이념을 표현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기술복제 덕분에 똑같은 영화를 여러 곳에서 그것도 원하는 때에 감상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예술은 무엇인가를 재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모방능력에서 비롯되었다. 대표적인 예는 바로 주술적 측면이 강한 종교적 예술작품들이다. 동물모양의 석상, 삼족오 벽화, 무당의 머리장식, 목각인형 등이 이에 속한다. 예술의 전환점은 종교로부터의 독립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모방적 기술의 발전은 그리스의 청동기술로, 판화, 인쇄기술을 거쳐 사진, 영화와 같은 복제기술로 변모해간다. 벤야민은 이 변화 과정이 결국 예술로 하여금 태곳적 아우라(분위기, 느낌)를 잃게 하고, 감상할 때의 직관 방식에도 변화를 준다고 보았다.

그러면 복제된 기술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되는 예술은 그 이전의 것과 무엇이 다를까? 벤야민은 이전의 예술이 ‘유일무이한 현존성’을 강조하는 ‘제의가치’를 갖는데 반해, 현대 예술은 ‘전시가치’를 추구한다고 말한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원하기만 한다면 박물관에 가서 전시된 수많은 진품을 만날 수 있다. 설사 전시장에 가지 않았다 할지라도 사진이나 비디오를 통해서 얼마든지 다양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작품에 전시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고구려 시대 사냥도와 같은 벽화는 과거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평면적인 그림이었다. 하지만 1900년대 초 나오기 시작한 영화와 인쇄물들은 시공간을 뛰어넘으면서 보는 것 이상의 어떤 촉각적인 감각을 일깨운다.

비교적 관점에서 현남숙 교수는 기존의 예술과 영화예술을 이렇게 정리한다. “기존 예술은 감상자의 반응을 예측하면서 작품으로 관객을 끌어당기거나 관조 또는 침잠을 유도하였다. 반면 영화는 정신분산(Zerstreuung, distraction)을 유도하여 거꾸로 예술작품이 관객들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한다.” ‘함께 보는’ 영화는 정말 누가 웃으면 같이 웃게 되고 누가 울기라도 할라치면 뭔가 모르게 나도 같이 슬퍼진다. 그것은 곧 “집단적 자기조직화가 영화라는 매체 안에서 조건화되는 집단관람의 상호작용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영화에는 관객들이 함께 느끼는 분위기가 있고 ‘일치하는 비평과 감상’이 존재한다.

이로부터 영화는 나치주의자들에 의해 파괴된 인간 본연의 정서를 회복할 희망의 씨앗이 되어준다. 폭력으로, 그것도 집단으로 마비된 인간의 무관심을 부술 수 있는 예술, 인간에게 감동을 선사하며 반성할 줄 아는 인간의 능력에 충격 줄 수 있는 희망이라면, 영화는 자유의 문을 향해 열려있다. 현남숙 교수의 말대로 벤야민은 나치의 ‘정치의 예술화’에 맞설 수 있는 ‘예술의 정치화’를 모색했고 영화가 그러한 희망을 실천할 수 있는 매체로 본 것이다.

나는 왜 예술 생산자가 되어야 했는가? ? 존 하트필드

벤야민이 사진이나 영화와 같은 매체에서 나치의 ‘정치의 예술화’에 반대하는 길을 찾았다면, 미술의 영역에서 그러한 실천을 한 사람은 존 하트필드이다. 사실 존 하트필드라는 이름은 미국식 이름이다. 원래 헬무트 메르츠벨트라는 독일이름이 있었지만, 그는 히틀러 정권에 환멸을 느끼고 이름도 바꿔가며 ‘행동하는 베를린 다다’로 활동한다. ‘다다’란 무엇인가? 현남숙 교수에 의하면 하트필드의 ‘다다’는 ‘독일의 반파시즘, 반전, 반예술, 반자본주의 체제’에 바탕을 둔 사진몽타주(photomontage)를 가리킨다. 아래 그림은 그 한 예로서 몇 장으로 오려낸 사진과 글자(텍스트), 드로잉 기법으로 섞어 만든 사진몽타주이다. 여기에는 하트필드의 거침없는 저항정신이 잘 드러나 있다.

 

▲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쥬

<괴링: 제3제국의 사형집행인>, 1933

<괴링: 제3제국의 사형집행인>은 하트필드가 원래 신문, 잡지에 “기존 관념을 전도시키기” 위해 표지로 집어넣은 것이라고 한다. 이 그림에는 그런데 하나의 아픈 사연이 담겨있다. 도끼를 들고 있는 괴링은 독일 나치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1933년, 나치가 독일에서 독재 권력을 확립해 가던 즈음 독일 국회의사당 건물이 불타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나치는 이 화재를 공산당원의 소행으로 간주하고, 이 화재사건을 빌미로 자신에게 걸림돌이 되었던 독일공산당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하트필드는 이 작품에서 사건의 진범을 정작 괴링으로 묘사한다. 하트필드는 이 사건을 나치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것으로 본 것이다.

하트필드가 시도한 일련의 사진몽타주들은 나치를 비판하는 선전활동의 대담함을 보여준다. 심지어 그는 ‘베를린 다다’라는 전시회를 열어 카탈로그와 출판물까지 제작하는가 하면, 상황이 여의치 않자 장소를 프라하로 옮기고 결국에는 영국으로 망명하면서 활동을 전개해나간다.

 

▲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쥬

그렇다면 벤야민은 하트필드의 사진몽타주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현남숙 교수에 의하면, “벤야민은 사진몽타주야말로 예술과 기술의 영역에서 새로운 예술적 기술이라고 보았다”고 한다. 그는 사진몽타주의 방법이 “하나의 이미지와 다른 이미지의 병치를 통해서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벤야민의 다다에 대한 평가’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다다이즘의 혁명적 관점은 예술을 그 진실성의 관점에서 점검해 보았다는 데에 있다. 다다이즘은 입장권, 실패꾸러미, 담배꽁초 등을 합쳐 정물화를 만들어낸다. 일상생활의 사소하기 짝이 없는 진실한 파편들이 회화보다도 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마치 책갈피에 찍혀있는 살인자의 피묻은 지문이 텍스트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 책의 표지를 정치적 수단으로 삼은 존 하트필드의 작품만 봐도 그렇다.” ?벤야민, 『생산자로서의 작가

현남숙 교수에 따르면, 하트필드는 자신을 ‘예술 생산자’라고 불렀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건대 예술은 생산적 도구가 아니다. 그런데 그는 사진의 조각들을 조립하면서까지 생산자의 길을 자처하였다. 또 전통적으로 유럽 철학은 인간의 본성을 ‘이성’으로 규정짓는 학문으로 통한다. 그런데 벤야민은 사진이나 영화를 미학의 새로운 연구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감성적 학’이라는 미학의 본연에 충실한 연구 분야를 개척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유를 부르짖었던 것이다. 벤야민과 하트필드의 금기적 행보는 멈춰진 역사를 움직이게 하고 지금도 우리의 역사와 함께 흘러가고 있다.

후기: 김은하 (건국대 외래교수)

꺾인 줄기, 패인 나무에서 생명을 말하다 [청춘의 고전 시즌2]-④

?[청춘의 고전 시즌2 /그림으로 읽는 철학] – ④

??? 일시: 2012. 5. 12. (홍대입구 상상마당 강의실)

꺾인 줄기, 패인 나무에서 생명을 말하다

– <세한도>에 피어나는 생명의 기운?/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와 『주역』-

강연:? 조민환 교수 (춘천교대)

 

 

꺾인 줄기, 패인 나무에서 생명을 말하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나무는 강원도 정선 두위봉에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양평 용문사에 1,100년 된 은행나무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최근 두위봉 주목나무가 1400년 된 것으로 밝혀졌다. 천 년 이상 살아온 나무도 놀랍지만, 아프리카 바오밥 나무의 수령은 최고 5,000년가량 된다. 인류사로 어림잡아도 5,000년이라는 시간은 고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수메르 문명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런데 만년을 넘게 산 나무가 있다면 과연 믿어지는가? 실제로 미국 캘리포니아에 그런 나무가 있다. 무려 12,000년 이상을 산 이 소나무의 이름은 ‘므두셀라’. 그는 우리가 가늠할 수 있는 모습으로 5,000년, 고목의 모습으로 아직도 7,000년째 살고 있다. 줄기가 죽은 듯 보이지만, 여전히 잎이 나고 해마다 1cm씩 성장한다.

우주에 호응하는 법을 깨친 것일까? 오래 산 나무들이 견뎌온 시간은 기적을 넘어선다. 우리가 모르는 자연의 지혜가 있는 것만 같다. 세월을 간직한 나무 대부분은 잎이 풍성하지도 않고 줄기가 곧지도 않다. 심지어 고목의 색은 검고 가지들은 꺾여 흉해 보이기까지 한다. 나무의 중심 줄기마저도 거센 비바람에 둥글게 패이고 버티다가 결국 꺾이기도 한다. 그도 아니면 바위틈에 자라거나 땅 위에 누워 자라기도 한다. 심하게 아플 때면, 알 수 없는 혹주머니 하나 다는 일도 감수해야 한다. 벌레의 등살에 차가운 시멘트로 덧칠되기 수차례, 세월이 길수록 나무색은 짙어지고 나이테는 조금씩 늘어난다. 이것이 긴 세월을 이겨낸 나무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 노송 ⓒ조민환

5월 12일, 상상마당을 찾은 조민환 교수는 나무의 이 당연한 자연스러움에 주목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생명의 원리를 찾아 옛 그림들을 주역으로 풀어낸다. 흥미롭게도 그가 강연에서 우리에게 보여준 그림과 사진은 그래서 푸르고, 바른, 평이한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줄기가 부러지거나 움푹 패여 보기만 해도 힘겨운 모습이었다.
김정희, 두루마리 종이에 수묵, 23.7*108.2cm, 조선시대(19세기), 한국 개인 소장조민환 교수는 이러한 노송의 모습이 특히 추사의에 자세히 묘사되었다고 본다. 원래 사제간의 아름다운 사랑으로 유명하지만,에서의 노송은 자연의 강인한 정신도 담고 있다. 얼핏 보기에 힘없고 초라해 보이는 노송이 꺾이고 휘어져도 생명을 멈추지 않는다.

▲ 김정희 <세한도>, 두루마리 종이에 수묵, 23.7*108.2cm

“가지가 잘리고 옆으로 휜 나무는 고난을 극복하며 위로 자라려 한다. 하지만 위로부터 몰려온 풍파로 말미암아 다시 엄청난 고통의 시기를 보낸다. 나무는 닥친 시련을 또 다시 극복해야만 하는 생명의 연속성을 보여준다”고 조민환 교수는 말한다.

처음에 노송 줄기는 옆에 있는 소나무와 마찬가지로 위로 곧게 뻗어 있었다. 그러나 너무 바른 탓인지 거센 풍파를 이겨낼 힘이 없어 꺾이고 만다. 이제 노송의 다른 줄기 하나가 굵게 자라지만, 다시 몰려온 풍파에 휘어지고 이도 힘에 부쳐 점점 가늘어진다. 시련이 계속될 때마다 아래로 향하는 줄기, 그럴 때마다 다시 솟구치는 새로운 줄기. 이렇게 굽이치길 몇 차례, 마침내 노송에게도 희망의 봄은 싹튼다. 그런데 이 봄은 사그라질 줄 모르는 봄이다. 가지 끝에 난 희미한 솔잎들은 겨울이 되어도 생명으로 거듭난다. 마치 추사의 인생길처럼 말이다.

고단함 속에 숨어있는 강인함, 이름없는 수많은 고목과의 가지가 간직한 기적의 힘이다. “가지는 미약하지만, 나무는 그 미약함을 새로운 생명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조민환 교수의 말대로 바로 여기에서 그 기적의 힘이 발현되고 있다.

끝자락에서 솟아나는 생명의 힘

자연이 보여주는 강인함은 생명력의 회복 또는 극복에 있다. 꺾일듯 꺾일듯하지만 시련을 이겨내는 힘이 있어 고목 줄기는 생명 줄기로 재탄생한다. 조민환 교수는 이러한 만물의 이치가 주역의 ‘지뢰복괘’(地雷復卦) 사상과 일맥상통한다고 여긴다.

‘지뢰복괘’는 땅에 우레 같은 힘이 솟구치는 형상이다. 맨 위에 음 세 개가 땅을 상징한다면, 맨 아래에 양 하나가 봄을 채비한다. 홀로 애쓰는 양의 움직임은 우레의 놀라운 힘을 상징한다. 양의 기운으로 비로소 음의 기운이 다하니 절기로 따지면, 동지(음력 11월, 양력 12월 22일)다. 고난과 어둠이 다해야 양이 회복(復)하므로 이 괘는 머지않아 언 땅에 봄이 올 형세다. 추위의 절정이 지난 후 봄의 기운이 싹트는 것처럼, 우레의 힘은 땅의 가장 아랫부분에서 뚫고 올라온다. 봄이 오기까지 하나의 ‘양’(_)이 고된 시련을 희망으로 바꾸기 시작한다. ‘지뢰복괘’는 미미한 작은 기적으로부터 큰 기적으로 변해가는 생명의 ‘길’(吉)한 이치다.

불사조 같은 자연의 강인함 ? 사군자

자연의 강인함은 주역 사상뿐 아니라 인간의 예술혼에도 담겨있다. 조민환 교수는 사군자를 고난과 역경을 품어낸 자연정신이 예술로 승화된 것으로 본다. 가장 쉬운 사군자의 예가 5만 원권 지폐 뒷면에 담긴 매화와 대나무이다. 마치 한 그루의 나무 같지만, 사실 이 그림은 이정의와 어몽룡의가 겹쳐졌다.
월매도(왼쪽)와 풍죽도(오른쪽)대나무의 상징은 푸른 잎과 곧은줄기다. 여름날 대나무가 가장 시원하고 싱그럽게 느껴진다. 한편 이른 봄부터 피어나는 매화는 봄의 전령사다. 설사 눈이 내리더라도 꽃을 피운다. 그래서 풍기는 향기가 더욱 그윽하고 청아하다.

대나무는 땡볕 더위에도 마르지 않고, 매화는 강추위에도 여지없이 자신의 생명력을 뿜어낸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 그들은 어두운 시간을 인동초처럼 감내해야 했다.와는 바로 그런 시절의 그림이다. 바위 위에 단단히 서 있는 대나무, 그는 매서운 북서풍을 맞이함에 의연함을 잃지 않는다. 매화나무는 상한 밑동 아래로부터 가지 세우는 일을 밤에도 그치지 않는다. 둥근 달이 그의 고독한 일을 알고 찾아와 가지 끝을 향해 길을 내준다. 그들은 고난을 의미 있게 그리고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다.

사군자의 굳건한 정신은 여러 그림 중에서도 특히 추사의에 절묘하게 녹아있다.

▲ 추사 김정희ⓒ간송미술관

난초는 환경에 좌우됨 없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은은한 향기와 청초한 자태를 간직한다. 선비들은 그런 난초의 고고하고 순수한 정신을 화폭에 담아내고자 했다. 그런데 추사의은 다르다. 난초의 줄기들은 섬세하고 세련되게 그려지지 않았다. 필선이 너무 단순한 나머지 무성하게 자란 잡초 같다.

또한, 이 그림에서 점들은 여기저기 들쑥날쑥 찍혀있다. 겨울에 얼어붙은 줄기일까? 이 난도 향기를 풍길 수 있을까? 그림에서 꽃 모양 같은 부분을 제외하고는 줄기 대부분이 진한 먹색으로 강하게 그려졌다. 묵색의 명암대비가 뚜렷하다. 흐릿한 색의 문양들은 마치 잡초 같은 난 줄기를 둥그렇게 감싸는듯하다. 난 줄기는 일반적으로 얇고 긴 선모양으로 아름답게 그려지지만, 추사의 것은 바늘처럼 삐쭉삐쭉, 억세고 거칠다. 그런가 하면 난 아래 글자들은 난초가 뿌리 내린 땅을 연상시킨다. 윗줄에 있는 글들을 하나의 선으로 연결해보면, 조민환 교수의 말대로 흙표면이 고르지 않은 언덕모양이다.

그는 이런 추사의 미학을 ‘문자 예술’이 보여주는 ‘화제의 조형성’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그 조형미가 추사의 필법에 어우러져 있다고 말한다. “온산 눈 덮혀 가득하고 강물은 얼어서 난간 되었네. 손 잡힐 듯 부는 봄바람에 어찌 하늘 뜻 모르리오.” 조민환 교수가 말한 바로 이 화제에 ‘간’(干)자는 원래 아래 획이 짧은 것이지만, 위에 획보다 길게 표현되었다. 다시 말해 위, 아래가 뒤바뀐 것이다. 한겨울 돌덩이처럼 단단히 얼은 얼음이 온 세상을 길쭉하게 누은 듯 뒤덮은 형태라고 그는 해석한다. 추위가 극에 달해 쇠하려는 순간, 사람의 손끝(人)에서는 봄의 기운이 느껴지고 싹이 솟아날 태세다(春). 즉, 양기가 위로 치켜 올라가는 모양새다. 바람(風) 속에서도 벌레들은 벌써 봄을 감지하고 땅 위로 나가야 할지를 고민한다. 봄소식에 이내 어깨춤이 절로 나 (乃), 마음이 미소 짓는다 (心).

추사의 문체 하나하나에는 그림의 까닭이 담겨있다. 그에게서는 글과 그림의 경계가 무너져 화제의 형상미가 생동한다. 보이지 않는 힘은 난의 굵은 힘이다. 어두운 땅속에 묻혀있는 ‘양’(_)의 기운이 아지랑이 되어 피어난 천심(天心)이다. 그래서 ‘천심난도’다. 난이 꽃 필 때까지, 고목에서 새싹이 날 때까지 어려운 시간 동안 자연에는 고난을 ‘아는’ 지혜가 있다. 이것이 곧 조민환 교수가 이번 강연을 통해서 전하고자 한 ‘지뢰복괘’의 숨은 뜻은 아닐까.

후기: 김은하 (건국대 외래교수)

이성의 한계를 넘어라! 모순과 부정의 창조자, 달리와 아도르노 [청춘의 고전 시즌2]-③

?[청춘의 고전 시즌2 /그림으로 읽는 철학] – ③

??? 일시: 2012. 4. 28.?(홍대입구 상상마당 강의실)

이성의 한계를 넘어라!

?모순과 부정(Negation, 否定)의 창조자, 달리와 아도르노

– 달리의 <기억의 지속>과 아도르노의 『미학 이론』-

??

강연:? 김성우 교수 (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시계’와 ‘치즈’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이 물음을 듣고 혹시 누군가 바로 ‘흐르는 시간’과 ‘녹아내리는 치즈’를 연상해냈다면, 그는 어쩌면 초현실주의로 유명한 화가, 달리만큼 창조적인 상상력을 지녔을 수도 있다. 치즈 한 조각, 입안 가득 부드럽게 퍼지는 치즈의 하얀 맛과 녹아 흐늘거리는 촉감, 시기와 때마다 돌고 도는 하루해와 수적으로 반복되는 1년, 2년… 이렇게 물리적으로 흘러가는 시간 세계, 그리고 입과 손으로 당연하게 느껴지는 감각 세계를 함께 담아 살바도르 달리는 <기억의 지속>이라고 이름 붙였다. 시간의 ‘정지’ 속에서 흘러가는 ‘시간’ (시계), 즉 기억된 시간의 모습을 보여주려 한 것일까? 그림에서 흐느적흐느적 흘러내리듯 늘어진 시계는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인 시간 모습을 넘어선다. 생각의 단편인지, 삶과 죽음에 관한 것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가 마치 그림 속에서 느릿하게 움직인다. 과거에 있었던 이야기는 어느 정도 기억되겠지만, 그때의 기억된 시간은 잎 하나 없는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머지않아 내용을 잃고 말 것이다. 언젠가는 개미들의 습격을 받아 사막의 먼지가 되어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지난 4월 28일, 김성우 올인고전학당 소장은 이렇게 기억과 시간의 초현실적인 모습을 담은 달리의 그림을 갖고 상상마당 문을 활짝 열었다. 그는 달리의 그림을 이성의 한계를 넘은 “능동적 상상력으로 포착한 예술”이라고 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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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상상력이 달리에게 능동적 예술의 힘이 됐을까?

<기억의 지속>에 등장하는 대상들은 무질서한 조합을 보여준다. 김성우 교수가 꼬집어내었듯 이 그림은 이성의 통제 없이 창작자 위주로 그린 것이지 사실 세계를 재현한 작품이 아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 시대 밀로의 <비너스> 여신상처럼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운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비너스 여신상은 사실미에 바탕을 두면서 아름다운 인간을 8이라는 미적 비율로 표현해낸 것이었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역시 별의 사실적인 틀 안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 작품 속에 빛나는 별의 색감은 그러면서 가슴에 박히도록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마찬가지로 르누아르의 <피아노 치는 소녀들>은 인물묘사에 바탕을 둔 것이면서 빛의 효과를 이용해 우리에게 따뜻하고 편안한 정감을 전달한다.

반면 달리의 그림은 수학적이거나 고전적이지도, 낭만적이지도 않은 전혀 다른 미의 맛을 보여준다. 눈감은 사람, 움직이지 않는 나무와 바다와 땅, 사막, 고정된 사각형 모양의 대지, 그 위를 역설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오로지 시계의 시간밖에 없다. 친숙한 사물들이 묘사되지만 서로 다른 맥락들이 만나 ‘시간의 운동’이라는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김성우 교수는 이러한 초현실주의적 기법을 “시각적인 충격을 통해서 세계의 본질적인 신비스러움을 자극하는 도구”라고 설명한다.

화가의 주관적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달리의 그림을 두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은 감상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작가의 무의식 세계를 담은 것이라고도 한다. 그의 그림이 1931년도 작품임을 고려하면, 이때는 무의식이론의 거장 프로이트가 이미 일흔의 나이를 훌쩍 넘은 때이고, 그의 정신분석학연구가 세계?역사적으로 인정받았던 시기이다. 그러나 1933년, 히틀러 정권의 수립으로 정신분석 서적출판 금지처분이 아직 내리기 전이기도 하다. 즉 달리의 <기억의 지속>은 생과 사가 무수히 교차하는 전쟁의 폭풍이 지나기 전이었다.

자신을 스스로 천재라고 부른 달리(1904-1989), 그의 광기에 가까운 예술적 창작력은 그럼에도 그가 지켜보았던 전쟁의 아픔과 인간사의 비극 내지는 정치적 허무와 직접적 연관이 없어 보인다. 달리는 오히려 정치적 현실과 무관한 상상의 세계를 지향하였다. 이런 점에서 김성우 교수는 “예술은 사실주의의 거울이 아니다. 그래서 창 없이도 사회를 표상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바꿔 말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가의 생계 요구는 물론 필연이지만, 진정한 예술은 이데올로기나 상황에 좌우되는 사회적 창을 통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속한 사회 그 자체, 거시적으로 삶 근저에 놓인 인간사를 표상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 그 이상의 존재론적, 역사적 존재이다. 단순한 사회적 존재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점에서 주관적으로 난해한 예술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아니, 예술 그 자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예술을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뿐만 아니라 예술의 존재 그 자체로 바라보고자 한다면, 김성우 교수는 아도르노의 예술철학이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시사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예술이란 그의 말처럼 “자율성과 사회적 사실 사이”에서 생겨나는 창작활동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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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 ? “예술은 기만 없는 가상이다”

1903년에 태어난 아도르노는 시대적으로 2차 세계대전의 한 복판에 있었다. 아버지가 유대인이어서 미국으로 이주를 가야만 했고 전쟁이 끝나고서는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 사회조사연구소를 재건하였다. 전쟁을 몸소 겪으면서 시대와 철학과 예술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담아 『부정의 변증법』(Negative Dialektik, 1966)과 『미학이론』(?sthetische Theorie 1970, 미완성)을 저술하였다.

아도르노에게 있어 미학이란 칸트나 헤겔이 보여준 것보다 좀 더 예술적인 것이었다. 칸트는 물리적 자연의 아름다움을 승화시켜 창조적으로 규칙성을 부여하는 능력을 가리켜 예술적 재능이라고 하였다. 독일에 쾰른 성당이나 이탈리아에 두오모 성당은 제한된 양의 길이와 넓이를 초월한 수학적 건축미로 탄생한 것이다. 또 바티칸에 피에타상(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은 힘의 숭고미를 역학적으로 보여준다. 산과 바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지만, 건축이나 조형의 예술미는 본래의 형식을 무제약적으로 넘어서는 숭고미에 속한다. 칸트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미적 판단력이 자연미를 시공간적 형식을 통해 인식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이념적으로 느끼고 주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새롭게 구상할 줄 아는 능력이라고 보았다. 칸트의 이러한 관점은 이후 아도르노의 예술철학 형식미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예술성은 무엇보다도 상상력의 이미지화이다. 아도르노의 견해로 이 미적인 능력은 조건과 한계를 넘고 넘어 또 새롭게 넘어설 수 있게 하는 ‘부정'(Negation, 否定)의 원리에 기인한다. 대상이나 객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새로운 관계를 지향하는 예술적 창조력은 바로 이 부정의 과정, 비동일성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다. 아도르노의 미학은 이런 점에서 김성우 교수가 얘기했듯 명확하게 헤겔 변증법을 내용으로 삼고 있다. 변증법이란 예컨대 씨앗이 새싹을 내고, 자라서 꽃이 피고 때가 되면 자신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열매를 맺고 다시 씨앗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정-반-합의 방식으로 정신도 처음에 단순한 존재의 상태에서 점차 생성변화의 상태로 그리고 완성된 상태로 나아간다. 그리고 이윽고 다시 자신을 부정함으로써 정신은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이것이 말하자면 헤겔 변증법이다.

아도르노 변증법은 나와 타자, 현실적인 것과 비현실적인 것, 개인과 사회, 과거와 미래 등등을 대립으로 보지 않고 ‘차이’로 인정하는 데에 그 독창성이 있다. 각각의 이질성을 이해하고 기존의 것에 대한 관계를 통찰함으로써 변화가 생겨날 수 있는 틈을 본 것이다. 변화 자체의 조건을 수용하는 아도르노는 그래서인지 인간과 자연을 도구화, 사물화의 대상, 즉 변화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합리적인 이성에 치중되거나 광적인 파시즘(나치주의)은 인간의 왜곡된 자연미라고 할 수 있다. 김성우 교수가 말한 바로는 “사물을 정복하거나 노예화하는 것 또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음악, 춤에 지나치게 동화, 동일화”되는 것은 아폴론적 이성과 디오니소스적 충동에 매몰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달리의 경우 그의 특이한 콧수염, 그가 보여주었던 기괴하다 싶을 정도의 퍼포먼스, 때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그의 전위예술 등은 미메시스 충동에 사로잡힌 결과로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초현실주의가 보여줄 수 있는 순수한 자연미는 달리의 추상화 중에서도 특히 <기억의 지속>에서 생생히 구현되었다. 그림 속에 시계를 비롯한 여러 요소의 조합은 아도르노의 “흩어져 있는 것들의 비폭력적인 종합(Konstellation)”을 가리킨다. 달리의 모방적 자율성은 분명 예술의 무사회성이다. 또한, 그림 속 시계의 존재와 움직임은 마치 화해를 위해서 화해에 대한 모든 기억의 흔적마저 지우는듯하다. 규정된 사회, 규정된 삶과 현실에 대한 규정적인 부정, 이러한 아도르노의 예술관이 달리의 초현실주의 작품을 통해서 잘 드러나고 있음을 김성우 교수는 이번 강연을 통해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초현실주의와 아도르노의 미학의 연결점에서 그가 강조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러므로 “예술은 기만 없는 가상이다”.

후기?/ 김은하 (건국대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