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라의 몰락과 예술을 통한 정치 [청춘의 고전 시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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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고전 시즌2 /그림으로 읽는 철학] – ?

?? 일시: 2012. 5. 26.?(홍대입구 상상마당 강의실)

아우라의 몰락과 예술을 통한 정치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강연: ?현남숙 교수(가톨릭대 초빙교수)

?

역사의 비극과 정치적 금기

세상에는 나라별, 종교별, 풍속별, 대륙별로 수많은 금기가 존재한다. 말과 행동의 복잡성에 따라 그리고 제약 정도에 따라 그 종류도 다양하지만, 그중에서 정치적 금기는 좀 더 다양하고 민감하다. 역사와 얽혀있는 까닭이다. 예컨대 우리는 아직 ‘왜놈’이나 ‘조센징’이라는 단어를 알고 있으며, 정치적인 패러디와 풍자 코미디는 여전히 사정이 어렵다. ‘조선족’이란 말도 본래는 일제 강점기 때 중국으로 가야 했던 ‘한민족의 후손’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사회적 갈등을 함께 내포한 말이 되었다.

유사한 방식으로 독일에도 정치적으로 민감한 금기가 있다. 예컨대 ‘2차 세계대전’이라는 말을 공공장소에서 언급하는 일이다. 만약 외국인이 레스토랑이나 카페 같은 장소에서 이 단어를 무심코 꺼내게 된다면, 좋았던 분위기도 순식간 겸연쩍어질 수 있다. 그것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민족적 차원에서 빚어진 나치주의 극복 문제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나고 세상이 서둘러 바뀐 지 어느덧 67년째, 그사이 세대교체가 두 번 이루어졌지만, 전쟁의 여파는 아직 남아 있다. 도대체 핍박받던 이들의 고통이 얼마나 컸길래 치유되는데 수세대가 걸리는 것일까? 행여 인종주의적 만행에 반대한 독일인은 그 어디에도 정말 없었던 것일까?

세계대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그때, 독일에는 두 인물이 있었다. 나치들에게 추격당하다 끝내 자살로 삶을 마감한 유대인 철학자 발터 벤야민. 그리고 또 한 사람은 히틀러 정권에 저항해 시대적 양심과 용기를 지킨 독일 화가 존 하트필드이다. 이번 상상마당 청춘의 고전은 현남숙 교수(가톨릭대학교 초빙교수)가 찾아낸 이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 발터 벤야민

이날의 주제는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과 존 하트필드의 <괴링, 제3제국의 사형집행인>”. 현남숙 교수는 첫째, 벤야민의 생애와 복제 기술에 바탕을 둔 영화이야기를, 그리고 둘째로 하트필드가 사용한 몽타주 기법의 사진 예술에 관해서 이야기를 펼쳐나갔다.

벤야민은 1892년, 베를린의 부유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수준 높은 교육을 받는가 하면, 독일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마치고 박사학위도 취득한다. 그 후에 모스크바로 여행 떠나기도 하는데, 그때가 1926년이라고 한다. 1939년, 급기야 독일 전쟁이 발발되자 벤야민은 프랑스의 한 수용소에 감금되게 된다. 다행히도 여기에서 그는 석방의 기회를 잡아 1940년, 파리를 거쳐 스페인으로 길을 향한다. 나치의 감시를 피해서 백두산보다도 높다는 피레네, 1년 내내 눈이 남아있다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간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안타깝게도 스페인 국경까지였다. 그만 그의 입국이 거기에서 좌절되어버린다. 목숨을 걸고 이 고개, 저 고개 넘어 산맥도 헤쳐왔건만 법륜 스님의 말처럼, 사람이 죽어가는데 국경선이란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좌절의 순간, 벤야민은 다른 한쪽에서 나치가 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현남숙 교수에 의하면, 벤야민은 어려서 유복하게 태어났지만, 실제 그의 삶 대부분에 ‘가난’이라는 꼬리표가 따랐다고 한다. “그는 궁핍한 생활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소장하고 있던 클레의 작품, <새로운 천사>를 파는가 하면, 변변한 연구지원도 받지 못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자신만의 철학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높은 도시 물가마저도 부담되어 더 싼 곳으로 이사해야 했는데…….” 이즈음에 스쳐 지나간 현남숙 교수의 자문 같은 말이 인상적이다. 연구자는 “과연 제도권에 속해야 공부할 수 있는가? 아니다. 그의 삶을 짚어보면서 그런 생각이 바뀌었다.”

그의 고분 없는 이야기는 가만히 새겨 볼 만하다. 왜냐하면, 벤야민은 한 인간이 더는 제도권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한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는 사회라는 제도권에서 배척당했고 동시에 독일이라는 국가적 제도권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당하였다. 어디 그뿐인가? 나치를 피하기 위한 목숨을 건 탈출도 좌절되었다. 이는 당시 모든 세계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라가 없으면 민족도 없고 세계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치의 예술화’에 맞선 ‘예술의 정치화’

1940년을 전후로 독일인은 유대인의 대학살과 핍박에 침묵으로 동조하였다. 유대인들은 모든 것을 다 뺏기고도 도망 다니는 도둑인 양 취급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벤야민은 민족을 넘어 ‘인간’을 바라봄으로써 자신만의 철학을 개척한다. 그가 마지막까지 홀로 고투한 철학은 무엇이었을까?

현남숙 교수는 벤야민의 철학을 세 가지 구도로 규정한다. 즉 ‘정치-예술-기술’이 그것이다. 벤야민에게 정치는 나치주의라는 현실적 한계를 넘어서야 하는 것이었다. 또한, 철학 속에서 그가 본 예술은 해방으로 가는 자유의 문이었다. 기술은 예술의 기술이다. 그 예로 현남숙 교수는 당시 ‘획기적으로 부상한’ 영화와 사진 예술을 든다.

그는 영화와 사진 매체를 가리켜 “기술복제라는 특징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투쟁적인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감독은 영화적 장치효과와 카메라 및 편집기술을 통해서 자신의 사상과 이념을 표현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기술복제 덕분에 똑같은 영화를 여러 곳에서 그것도 원하는 때에 감상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예술은 무엇인가를 재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모방능력에서 비롯되었다. 대표적인 예는 바로 주술적 측면이 강한 종교적 예술작품들이다. 동물모양의 석상, 삼족오 벽화, 무당의 머리장식, 목각인형 등이 이에 속한다. 예술의 전환점은 종교로부터의 독립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모방적 기술의 발전은 그리스의 청동기술로, 판화, 인쇄기술을 거쳐 사진, 영화와 같은 복제기술로 변모해간다. 벤야민은 이 변화 과정이 결국 예술로 하여금 태곳적 아우라(분위기, 느낌)를 잃게 하고, 감상할 때의 직관 방식에도 변화를 준다고 보았다.

그러면 복제된 기술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되는 예술은 그 이전의 것과 무엇이 다를까? 벤야민은 이전의 예술이 ‘유일무이한 현존성’을 강조하는 ‘제의가치’를 갖는데 반해, 현대 예술은 ‘전시가치’를 추구한다고 말한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원하기만 한다면 박물관에 가서 전시된 수많은 진품을 만날 수 있다. 설사 전시장에 가지 않았다 할지라도 사진이나 비디오를 통해서 얼마든지 다양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작품에 전시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고구려 시대 사냥도와 같은 벽화는 과거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평면적인 그림이었다. 하지만 1900년대 초 나오기 시작한 영화와 인쇄물들은 시공간을 뛰어넘으면서 보는 것 이상의 어떤 촉각적인 감각을 일깨운다.

비교적 관점에서 현남숙 교수는 기존의 예술과 영화예술을 이렇게 정리한다. “기존 예술은 감상자의 반응을 예측하면서 작품으로 관객을 끌어당기거나 관조 또는 침잠을 유도하였다. 반면 영화는 정신분산(Zerstreuung, distraction)을 유도하여 거꾸로 예술작품이 관객들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한다.” ‘함께 보는’ 영화는 정말 누가 웃으면 같이 웃게 되고 누가 울기라도 할라치면 뭔가 모르게 나도 같이 슬퍼진다. 그것은 곧 “집단적 자기조직화가 영화라는 매체 안에서 조건화되는 집단관람의 상호작용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영화에는 관객들이 함께 느끼는 분위기가 있고 ‘일치하는 비평과 감상’이 존재한다.

이로부터 영화는 나치주의자들에 의해 파괴된 인간 본연의 정서를 회복할 희망의 씨앗이 되어준다. 폭력으로, 그것도 집단으로 마비된 인간의 무관심을 부술 수 있는 예술, 인간에게 감동을 선사하며 반성할 줄 아는 인간의 능력에 충격 줄 수 있는 희망이라면, 영화는 자유의 문을 향해 열려있다. 현남숙 교수의 말대로 벤야민은 나치의 ‘정치의 예술화’에 맞설 수 있는 ‘예술의 정치화’를 모색했고 영화가 그러한 희망을 실천할 수 있는 매체로 본 것이다.

나는 왜 예술 생산자가 되어야 했는가? ? 존 하트필드

벤야민이 사진이나 영화와 같은 매체에서 나치의 ‘정치의 예술화’에 반대하는 길을 찾았다면, 미술의 영역에서 그러한 실천을 한 사람은 존 하트필드이다. 사실 존 하트필드라는 이름은 미국식 이름이다. 원래 헬무트 메르츠벨트라는 독일이름이 있었지만, 그는 히틀러 정권에 환멸을 느끼고 이름도 바꿔가며 ‘행동하는 베를린 다다’로 활동한다. ‘다다’란 무엇인가? 현남숙 교수에 의하면 하트필드의 ‘다다’는 ‘독일의 반파시즘, 반전, 반예술, 반자본주의 체제’에 바탕을 둔 사진몽타주(photomontage)를 가리킨다. 아래 그림은 그 한 예로서 몇 장으로 오려낸 사진과 글자(텍스트), 드로잉 기법으로 섞어 만든 사진몽타주이다. 여기에는 하트필드의 거침없는 저항정신이 잘 드러나 있다.

 

▲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쥬

<괴링: 제3제국의 사형집행인>, 1933

<괴링: 제3제국의 사형집행인>은 하트필드가 원래 신문, 잡지에 “기존 관념을 전도시키기” 위해 표지로 집어넣은 것이라고 한다. 이 그림에는 그런데 하나의 아픈 사연이 담겨있다. 도끼를 들고 있는 괴링은 독일 나치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1933년, 나치가 독일에서 독재 권력을 확립해 가던 즈음 독일 국회의사당 건물이 불타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나치는 이 화재를 공산당원의 소행으로 간주하고, 이 화재사건을 빌미로 자신에게 걸림돌이 되었던 독일공산당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하트필드는 이 작품에서 사건의 진범을 정작 괴링으로 묘사한다. 하트필드는 이 사건을 나치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것으로 본 것이다.

하트필드가 시도한 일련의 사진몽타주들은 나치를 비판하는 선전활동의 대담함을 보여준다. 심지어 그는 ‘베를린 다다’라는 전시회를 열어 카탈로그와 출판물까지 제작하는가 하면, 상황이 여의치 않자 장소를 프라하로 옮기고 결국에는 영국으로 망명하면서 활동을 전개해나간다.

 

▲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쥬

그렇다면 벤야민은 하트필드의 사진몽타주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현남숙 교수에 의하면, “벤야민은 사진몽타주야말로 예술과 기술의 영역에서 새로운 예술적 기술이라고 보았다”고 한다. 그는 사진몽타주의 방법이 “하나의 이미지와 다른 이미지의 병치를 통해서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벤야민의 다다에 대한 평가’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다다이즘의 혁명적 관점은 예술을 그 진실성의 관점에서 점검해 보았다는 데에 있다. 다다이즘은 입장권, 실패꾸러미, 담배꽁초 등을 합쳐 정물화를 만들어낸다. 일상생활의 사소하기 짝이 없는 진실한 파편들이 회화보다도 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마치 책갈피에 찍혀있는 살인자의 피묻은 지문이 텍스트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 책의 표지를 정치적 수단으로 삼은 존 하트필드의 작품만 봐도 그렇다.” ?벤야민, 『생산자로서의 작가

현남숙 교수에 따르면, 하트필드는 자신을 ‘예술 생산자’라고 불렀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건대 예술은 생산적 도구가 아니다. 그런데 그는 사진의 조각들을 조립하면서까지 생산자의 길을 자처하였다. 또 전통적으로 유럽 철학은 인간의 본성을 ‘이성’으로 규정짓는 학문으로 통한다. 그런데 벤야민은 사진이나 영화를 미학의 새로운 연구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감성적 학’이라는 미학의 본연에 충실한 연구 분야를 개척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유를 부르짖었던 것이다. 벤야민과 하트필드의 금기적 행보는 멈춰진 역사를 움직이게 하고 지금도 우리의 역사와 함께 흘러가고 있다.

후기: 김은하 (건국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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