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금문제와 대학의 이념[청춘의 서재]

등록금문제와 대학의 이념[청춘의 서재]

칼 야스퍼스<대학의 이념>

 

이원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한 학생이 이야기한다. “학업을 계속하려면 학업을 포기해야 해요.” 거짓말인줄 알았다. A를 얻기 위해 A를 포기해야한다니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마치 선문답이나 동화에서 말하는 교훈 속에 있는 이야기같았다. 그런데 이런 금도끼 은도끼이야기 속에 나오는 나무꾼들이 광화문광장에 하나 둘 모여들고 있다. 등록금을 벌어 학업을 지속하기 위해 오늘도 공부대신 ‘알바’를 하는 대학생, 그들의 젊은 이성은 오늘도 열심히 돈 번다.

등록금문제가 한참 이슈다. 하루 이틀된 문제도 아니지만 이번엔 뭔가 조금 달라 보인다. 철되면 돌아오는 제철음식처럼 으레 봄이 되면 하는 개나리투쟁도, 광우병 이후 오랜만에 잡은 소위 ‘껀수’도 아니다. 이번에 대학생들에게 보이는 비장함은 대학생이라는 실존에 대한 위협에서 나왔다. 대학생이 더 이상 공부를 할 수 없고 대학은 더 이상 이성이 아니라 돈벌이를 가르치는 현실에서 학생들은 처음으로 모두의 문제나 타인의 문제가 아닌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거리에 섰다. 등록금문제는 단순히 돈의 문제를 넘어서 있다. 그 금액이 학생들의 학습권을 침해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대학생과 예비 대학생들의 진로도 좌우한다. 높은 등록금 덕택에 학생들은 자유로운 이성보다 시장논리에 더욱 익숙하게 대학생활을 보낸다. 높은 등록금 속에서 학생들은 대학에 학문이 아닌 미래의 돈을 기대한다. 이성과 학문의 자유로운 연애에는 이제 대학에서 익숙하지 않은 낯선 풍경이 되어가고 있다. 대학생이 학문을 할 수 없는 사회, 대학은 취업만 할 수 있다면 빨리 벗어나고 싶은 곳이 되어버린 사회는 이른 바 ‘대학이 위기’인 사회다. 대학이 위기라는 말이 함축하는 것은 무엇일까?

▲칼 야스퍼스, 이수동 옮김, 학지사

이러한 대학과 학문의 위기에 대해 이미 수십 년 앞서 고민한 철학자가 있다. 바로 칼 야스퍼스(1883~1969)이다. 칼 야스퍼스가 활동하던 시대도 대학이 위기인 시대였다. 그는 유대인 아내와의 이혼을 거절하여 나치로 인해 대학교수직을 박탈당했다. 나치는 대학에 직접 개입하여 수백 년간 이어져온 소위 ‘대학의 이념’들에 덧칠을 하기 시작했다. 야스퍼스는 대학과 학문이 가지는 가장 큰 미덕은 보편적 앎에 대한 자유로운 탐구로 보았다. 대학의 목적은 근원적인 지적 욕구를 실현하는데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지적 욕구의 궁극적 목적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며 그 앎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되는가를 발견하는데 있다. 그러나 야스퍼스 당시 대학은 나치는 물론이고 나치집권 전후에도 이미 자본에 의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고유성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야스퍼스는 1945년 나치 12년간 굴복당한 대학의 이념을 다시금 바로세우고자 소책자를 발간한다. 이 책은 야스퍼스가 겪은 고통스러운 나치의 지배와 대학의 정신에 대한 그의 믿음 속에서 집필된 것으로 그 동안의 강연과 수기를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정리하여 출간한 것이다. 이 책이 바로 오늘 함께 이야기 나누고자 하는 『대학의 이념』이다. 『대학의 이념』에서 야스퍼스는 학문과 대학의 목적, 그리고 그 존립 조건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야스퍼스는 대학의 위기를 학문의 위기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한다. 그리고 학문의 본질에 대해 논하면서 서서히 대학의 존립의 문제를 고민한다. 그는 이 책에서 요란스럽지 않다. 대학의 이념과 그것을 침해하는 외적요소들에 대한 ‘스펙터클’한 공격을 기대한다면 이 책에선 잠시 흥분을 가라 앉혀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차근차근 대학의 이념에 대해 설명하지만 우리의 흥분은 쉽게 가라앉지는 않을 듯하다. 이미 그가 60~70년 전에 말한 대학과 학문의 정신을 마주하면 그렇지 못한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 자꾸 오버랩 되기 때문이다.

취업 후 상환이라는 무책임한 대학등록금 대책을 무슨 은혜 베풀 듯 하는 나라님이 있는 나라에서는 대학생들은 어서 취업해야 한다. 취업이 잘되는 과로 전과도 빚쟁이에게 쫒기 듯 어서하지 않으면 돈 안 되는 학문을 4년이나 배워야한다. 대학의 역할 중 직업훈련도 분명히 한 축을 담당하지만 한 건물에서 한 기둥만을 위해 다른 기둥의 못을 뽑아버리면 건물 전체가 무너진다. 야스퍼스가 말하는 대학의 이념은 지적인 욕구에 부응하여 교수와 학생들의 공동체를 이루고 진리를 터득해 나가는 것을 바탕으로 총체적인 인격의 도야를 목적으로 한다. 그는 대학교육을 전인교육, 직업훈련, 연구 세 가지로 이루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세 가지는 대학의 교육을 이루는 요소지만 하나가 분리되어 그것만이 강조 될 경우 대학의 목적은 요원해진다. 야스퍼스는 대학이 학문의 미덕의 전체성이라 말한다. 대학의 이름이 university인 것처럼 대학은 하나의 우주이다. 그는 전체성과 결별한 학문과 학생의 생산에 대해 우려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학문의 생명력은 전체와의 관계에 근거한다. 대학은 학문적 견해가 일생을 통해서 발전할 수 있도록 그 기초를 갖추게 하고, 지식의 통합을 추구한다. 의사, 교사, 행정가, 판사, 목사, 건축가 등의 직업은 비록 전혀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삶의 전반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러한 직업을 위한 준비는 그 과정이 전인적이지 못하거나, 지각력을 계발시키지 못하거나, 안목의 지평을 넓혀주지 못하고 ‘철학적’사고를 형성해주지 못한다면, 우리의 정신을 일깨우지 못하고 비인간적으로 만들 것이다. 요즘 국가고시의 경우에 자주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전문지식의 부족은 직업적 실생활에서 얼마든지 극복될 수 있다. 그러나 정신적인 학문적 교양의 기초가 결여된 사람으로부터는 어떠한 희망도 기대할 수 없다”(72~73쪽) 오래 전 글이지만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 참 와닿는 말이다. 고대그리스에서도 통했던, “요즘 젊은이들은 버릇이 없다”라는 말처럼 그저 보편성을 가진 말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문화라는 폭력에 내몰리는 대학 학문의 위기라는 점에서 공감을 느낄 수 있다.

대학의 위기는 체계와 자본주의 본질의 문제이지 어느 한 현상적 문제로 귀결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재 한국사회에서 대학 등록금의 문제는 이러한 본질적 문제를 꿰뚫고 있다. 야스퍼스의 『대학의 이념』에서 대학이 갖추어야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전체성과 자율성이다. 앞서 말했듯이 대학의 목적은 인간의 지적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지적욕구는 항상 전문영역에서 실현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야스퍼스는 지적욕구의 본질은 지식의 통합과 전체성을 추구하는 것이고 대학은 바로 그 통합의 장으로서 역할을 한다고 한다. 대학은 개별지식의 다양성과 그 통합을 추구하면서 university가 된다. 야스퍼스가 말하는 대학의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학문에 대해 다시 정의하면서 학문을 수행하는 대학을 이야기하는데 그가 말한 학문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이며 그 내용은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하며 보편타당성을 갖추는 것이다. 대학의 목적은 이러한 학문을 수행하면서 이루어진다. 이것이 대학의 이념이 갖는 전체성인데 이러한 전체성은 대학이 국가와 사회로부터 자유로는 지위를 보장받을 때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에 그 자율성은 중요하다. 따라서 대학은 전체성과 자율성을 동시에 가져야한다.

그런데 요즘 일어나는 대학의 재정문제와 시장화는 이러한 대학의 전체성과 자율성을 심하게 침해하고 있는 듯하다. 자본에 의해 종속된 대학은 직접적으로 금화를 생산할 수 있는 학문만을 육성하고 그곳에 학생들이 모인다. 몇몇 학문에만 학생들이 모여들면서 대학학문이 가져야할 보편성과 전체성이 공격받는다. 이는 대학이 가진 ‘하나의 우주로서 학문의 장’이라는 자신의 역할은 물론 보편성을 추구하는 학문자체의 위기를 가져오기도 한다. 또 몇몇 집중된 인력은 항상 공급과잉을 초래하여 적정 수의 산업예비군을 항상 유지하게 한다. “자본의 학문지배 -> 학문의 전체성 상실 -> 대학 학문과 교육의 다양성 상실 -> 자본의 노동 및 대학구성원(교수, 연구자, 학생)에 대한 지배강화 -> 자본의 학문지배”라는 악순환이 바로 대학과 학문의 위기의 본질이다. 자본에 대한 노동의 지배를 학문의 전체성 상실을 통해 이루고 있으며 강력해진 자본은 더욱더 대학과 그 학문을 간섭하며 전체성과 자율성을 침해한다. 현재 한국의 대학 등록금문제는 이러한 대학의 위기 속에서 그 문제가 심화되어왔다. 야스퍼스는 대학은 국가와 사회로부터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에 국가와 사회로부터 오히려 보호받고 지원받아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국가와 사회가 이성적 결과물들을 통해 자신을 보호하는 방안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역할을 국가와 사회가 못해주고 있기 때문에 재정이 약한 대학은 무리해서 등록금을 인상하거나, 자기 자신이 바로 자본으로서 학문과 대학구성원의 적을 자임한다. 현재 한국대학의 취약한 재정구조, 특히 86%에 이르는 높은 등록금의존율은 대학에 대한 자본의 지배, 즉 대학자체의 총체적 위기를 이야기한다. 이것이 왜 지금껏 단순한 경제적 부담에서 불거졌던 대학생들의 등록금투쟁이 이제와 새삼스럽게 사회적 문제가 되고, 왜 또 ‘조국통일이나 노동해방’과 같은 거창한 거시적 담론만을 투쟁의 담론으로 삼았던 대학생운동이 선배들의 투쟁 주제에 비하면 소소하기 그지없는 ‘등록금’이라는 것을 자신들의 당면과제로 삼은 이유이기도 하다.

야스퍼스는 대학의 이념과 목적을 설명하기 위해 책의 목차를 유기적으로 구성했다. 그는 전체성과 보편성을 설명하는 학문의 본질을 앞서 이야기하고 이어 그 학문을 유지하는 지적 삶에 관한 문제, 그리고 대학의 조직, 마지막으로는 대학의 재정적 문제에 대해 논한다. 그는 마치 백의를 입은 선비처럼 대학의 목적을 순수한 앎의 추구라는 학문적 문제제기를 하며 글을 시작한다. 하지만 곧 현실 속의 사상가로 돌아와 국가와 사회의 역할 및 대학의 재정으로 『대학의 이념』을 마무리 짓는데 이는 대학의 위기를 단순히 ‘학문하기 어려움’으로 진단한 것이 아니라 이성과 학문의 자체의 위기에 대항해 자신이 생각한 ‘대학의 이념’을 다시금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대학은 지적양심과 욕구를 실현 할 수 있는 연구와 소크라테스식의 민주교육이 조화를 이룬 곳이다. 이는 이상적이고 선언적일지 모르고 그것이 진정으로 가능한 것이 도대체 언제일까라는 고민은 남는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정의는 오늘날 대학이 가진 문제가 무엇인지는 분명히 해준다. 대한민국 초중고 모든 교육이 대학을 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대학자체는 자신의 목적을 잃고 방황하며, 그 혼란을 높은 등록금이란 형태로 학생들과 공유하고 있는 ‘인심 좋은’ 대학이 문제가 되고 있는 요즘 야스퍼스의『대학의 이념』은 대학이 본래가진 초심은 물론,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가야 할 대학의 모습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리라 믿는다.

 

동물이 사라지고 동물원이 생기다[청춘의 서재]

동물이 사라지고 동물원이 생기다[청춘의 서재]

존버거의<본다는 것의 의미>

 

신정순(홍익대학교 입학사정관)

 

새로운 날개짓을 위해

 

청춘의 서재에 어떤 흔적을 남길까 고민하다 문득 “청춘은 봄이요, 봄은 꿈나라~”라는 옛노래가 떠올라 흥얼거려보았다. 청춘을 예찬하는 노래를 부르노라니 청춘은 정말로 꿈같은 봄날이기만 할까, 아니 오히려 이때가 풋사과마냥 풋풋하고 기운행동하는 시기라 역설적이게도 더 크게 흔들리고 방황하며 아파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아픈 만큼 성숙하는 것이고 그 결과로 이전에는 없었던 어떤 참신한 열매를 창조해낼 수 있기에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청춘을 예찬하며 부러워하는 게 아닐까, 이 노래의 지은이 역시 그래서 청춘을 뭐든지 실현가능한 꿈나라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어떨까! 그 어느 때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기를 살아가며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할 순 있지만, 대부분의 청춘들은 방황하고 아파할 그래서 이전과 다른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는 그들만의 특권을 뒤로한 채 무한경쟁 속에서 더 큰 자유와 물질들을 온전히 소유하기 위한 처절한 날개짓에 몰두하고 있다. 청춘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그

▲ 존 버거, 박범수 옮김, 동문선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특권을 지닌 시기인데도 말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언젠가 대학에서 <시각의 의미>라는 주제강의를 하며 교재로 활용했던 존버거의 <본다는 것의 의미>를 소개해야겠다고 맘이 들었다. 어쩌면 익숙한 시선(관점)을 전제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책이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고민할 수 있는, 그리하여 목적중심의 또는 자본 중심적 인간관계망에서 벗어나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는 하나의 계기를 마련해줄 수 있지 않을까 싶기에.

청춘의 의미가 그렇듯 세상만사는 어떤 눈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낳을 수 있다. 본다는 것은 결국 세계를 이해하고 관계 맺는 또 하나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미지를 주어진 대로 수동적으로 보지 말고 그것의 제작 의도 및 사회적 의미까지도 간파해내길 원했던 존버거의 <본다는 것의 의미>를 통해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그 결과로 새로운 사고방식(또는 행동방식)을 취할 수 있는 새로운 ‘나’로 거듭나 새로운 의미(문화)까지도 창조해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상호 관계회복을 위한 새로운 응시

 

미학에 입문한 뒤, 이성적 지혜를 발휘하여 거대문명을 발전시켜온 서구의 역사에 관해 다음과 같은 비판적 시선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한 시선은 서구 역사가 ‘나(인간, 이성)’ 이외의 다른 모든 것, 이른바 ‘타자(자연, 비이성적인 것 등)’를 아예 없는 것으로 간주하거나 대상(사물)화시켜 지배함으로써 가능했다고 비판한다.

존버거 역시 <본다는 것의 의미>에서 이미지를 바라보는 시각의 재검토 과정을 통해 그러한 입장에 동의를 표한다. 그에게 대상(이미지 또는 사태)을 본다는 것의 의미는 단순히 빛이 망막을 통해 시신경으로 전달되는 물리?화학적 의미로서의 시각이 아니라, 본다는 행위에 깃들인 사회적 의미를 파헤치는 ‘시각의 재검토’로써 이성 중심의 근대적인 또는 자본주의적인 삶(역사, 문화, 사회)의 의미를 묻고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이다. 이 책은 I. 왜 동물을 구경하는가, II. 사진술의 이용, III. 체험된 순간들이라는 세 가지 큰 제목 아래, 다양한 매체를 이용하여 이미지를 제작?감상하는 사람의 시선 이면에 깊숙이 감추어진 사회적 의미를 파헤친 총 18편의 글을 담아 낸다. 이로써 <본다는 것의 의미>는 미학에 관한 훌륭한 교양서이자 미디어와 영상론을 다루는 기초 교재로써 꽤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평을 받게 된다.

그 중 I. 왜 동물을 구경하는가의 내용은 아무런 생각 없이 아니 오히려 자랑스럽게 어린 아들 둘의 손을 잡고 동물원을 찾아 부모 역할을 다했노라 자부했던 또 언젠가는 내 어머니가 내게 해주었듯 내 아이들에게도 애완동물을 사주어 생명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주겠노라 생각했던 내게 인간과 동물(자연) 간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존버거에 따르면, 동물원에서의 동물구경, 애완동물, 동물장난감 등은 우리가 생각하듯 동물을 반려자로 생각하는 인간의 친자연적인 태도 또는 동물에 대한 사랑의 의미라기보다 동물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음을, 구체적으로 인간의 언어능력(상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근거로 동물을 단지 객체(대상 또는 기계)로만 바라보게 되었음을 뜻한다.

“동물은 이제 애완동물이라는 이름으로 가족에 흡수되거나, 구경거리에 흡수되어 언제나 관찰되는 대상에 머물고 만다.”

그는 말한다. 동물원은 박물관처럼 지식을 넓히고 일반인들을 계도하기 위해 만든 전형적인 소비자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으로, 근대 이전까지 동물과 인간이 인근에서 서로 독립된 삶을 유지해오며 평행자적 관계를 이루어오던 상황(만남)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일반인들을 위한 동물원은 일상생활에서 동물들이 사라져버리는 시기가 시작되면서 존재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동물을 만나고, 관찰하고, 구경하기 위해 찾아가는 동물원은, 사실 그러한 만남의 불가능성에 대한 하나의 경계가 되는 표시이다. 오늘날의 동물원들은 인간이 존재해온 것만큼이나 오래된 하나의 관계에 대한 묘비명인 것이다.”

이런 설명에 동심을 위한 때로는 끈끈한 가족애를 확인하는 동물원으로의 즐거운 가족 나들이를 뭐 그렇게까지 삐딱하게 바라봐야 하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동물구경의 사회적 의미를 파헤치는 것이 단순히 인간과 동물(자연)의 관계 규명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간의 관계까지도 예시해주는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존버거는 동물에 대한 접근방식이 곧 인간에 대한 접근방식을 예시한다는 우려를 나타내며 따라서 특히 산업?정보사회에서 제작된(특히 폭력성을 배가시키는 전쟁 관련된) 사진을 볼 때는 더더욱 단순 관찰자적 시각에서 벗어나 그 이미지(사진)에 들어간 인간의 욕망까지도 읽어내 새로운 맥락(의미)을 재창조해낼 수 있어야한다고 II. 사진술의 이용 장에서 역설한다.

한편 근(현)대사회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근대사회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많은 현대적인 사상가들 역시 동의하는 바인데, 그런 점에서 존버거를 따라 수행한 시각의 재검토(새로운 응시)는 곧 인간(이성) 중심의 근(현)대적인 자본주의 사회의 특성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이자, 인간과 동물(자연) 그리고 인간과 인간 상호간의 관계회복을 위한 첫걸음이라 할 수 있다.

주체와 객체의 전복 체험 & 새로운 의미(문화) 창조

 

굳이 현학적인 고민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한두 번 쯤은 지나치게 이성 중심적인(목적지향적인) 삶을 살다 또는 과도한 자본시장의 논리에 치여 그로부터 벗어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많은 현대 사상가들 역시 그 점을 고민해왔고 그 결과로 일종의 ‘되기’를, 살아가는 주체로서의 몸을, ‘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를 바라보는 나’로 분열된 주체를, ‘음악하는 소크라테스’를 그리고 경악과 놀람을 주는 예술 체험 및 실존적 체험 등을 강조해왔으며, 존버거 역시 <세케르 아흐메드와 숲>라는 글에서 주체와 객체의 전복이 일어나는 실존적(미적) 체험의 순간을 통해 그 단초를 마련한다.

III. 체험된 순간들에 소개된 티벳 화가 세케르 아흐메드의 그림 <숲속의 나무꾼>에는 세 그루의 나무가 있다. 이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이상하게도 이 그림의 원경에 자리잡은 너도밤나무가 뒤로 멀어지면서 동시에 앞에 있는 나무들보다 훨씬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왜 그럴까? 화가가 너도밤나무의 잎들을 앞의 나뭇잎만큼이나 크게 그리고, 너도밤나무 줄기에 빛줄기를 쏟아 부어서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그가 숲 가장자리와 오른쪽 덤불숲의 기괴한 사선이 만나는 지점에 삼차원 공간을 만들어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공간이 여전히 2차원인 그림 표면에 머무름으로써 공간적인 모호성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덤불숲을 살짝 가리면(없애면) 너도밤나무가 원경으로 멀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그렇다면 이 그림은 원근법을 잘못 이해한 화가의, 이른바 일종의 학문적 실수 탓일까 아니면 설득력을 결여한 화가의 미숙함의 결과 탓일까?

존버거는 파리에서 작업하며 쿠르베와 바르비종파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그가 원근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리 없다고 말하며, 숲속을 걸어본 사람이면 누구나 경험해봤을 실제의 실존적 경험과 조화를 이루도록 그리고자 했던 화가의 남다른 세계관 덕이라고 설명한다. 이 그림은 우리에게 말한다. 숲은 우리에게 단지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실존의 삶에서 하나의 사건(만남)으로 체험하는 그리고 감상자에게까지 확장되어 주체와 객체의 전복을 체험하게 한다고.

“세케르 아흐메드는 숲을, 그 자체가 하나의 사건으로 발생하고 있는 사물로, 그리고 그가 파리에서 배웠던 것처럼 그것으로부터의 거리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절박한 하나의 존재로 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 움직이고 있는 것은 숲이다. 자신의 현재 존재를 가지고 있는 숲은 나무꾼과 반대 방향으로, 즉 우리쪽을 향해 앞으로, 그리고 왼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현재 존재하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에게 접근하고, 그에게 도달하며, 그에게까지 확장하는 지속적인 머물기이다.”

글을 마무리하려는 지금, 이젠 굳이 글쓴이가 왜 모호한(양가적인) 세케르 아흐메드의 그림을 원근법에 위배되는 비논리적(비문법적)인 것으로 바라보지 않고 실존주의적인 방식으로 읽어냈는지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다만 창작자의 세계관에 따라 회화의 표현이 달라지듯, 이제 회화를 감상할 때도 새로운 눈으로 바라봄으로써 새로운 의미(문화)를 창조해낼 수 있는 아주 작은 날개짓이라도 시도해보기를 권하며, 아울러 존버거의 말대로 프리미티브 화가들이 서툴지만 자신만의 방법으로 자기의 존재 체험을 드러냄으로써 우리에게 살아있는 감동을 주었듯이, 자신만의 눈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새로운 뭔가를 창조해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나에게도 청춘에게도.

 

 

조지 오웰의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삼우반, 2003[청춘의 서재]

윤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오웰이 이 책을 쓰기까지

영국인인 조지 오웰George Orwell (본명: 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ur Blair, 1903.6.25~1950.1.21)은 『위건 부두로 가는 길』(한겨레, 2010. 이하 『위건 부두』)에서 자신이 ‘상류 중산층 가운데 하급’, ‘특권 계급 출신이지만 돈은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말했다. 그의 설명을 요약하자면 이론상으로는 상류층의 에티켓과 관습, 문화를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런 삶을 영위할 경제적 능력이 없는 부류로서 ‘두 가지 차원을 동시에 살아야 하는’ ‘피곤한 신분’이었다. 또 자신을 ‘부르주아의 완충재 같은 계급’이라고도 표현했다. 영국의 명문 사립학교인 이튼스쿨도 장학금을 받을 수 있어서 입학했다.

에릭이 이튼스쿨을 다니던 때는 1917년부터 1921년까지이다. 1차 대전과 러시아 혁명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에릭에 따르면 영국에서도 유례없이 혁명적인 분위기가 만연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위험한 진보 작가의 책이라 분류되었던 것들을 모두 읽고 자신을 막연히 사회주의자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사회주의가 정말 어떤 것인지도 알지 못했고 노동계급이 인간이라는 개념도 없었으며 책을 통해서나 그들의 고통을 안타까워할 뿐이었지 실제로 그들 가까이 갈 때는 여전히 그들을 혐오하고 경멸했다고 고백한다. “돌이켜보건대 그 시절 나는 시간의 절반은 자본주의 체제를 비난하는 데 쓰고 그 나머지는 버스 차장의 무례함에 분을 터뜨리느라 허비한 것 같다”(『위건 부두』, 191쪽)

이튼을 졸업했지만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할 성적이 되지 않았던 그는 1922년 미얀마(구(舊) 버마)로 건너가 5년 동안 ‘인도 제국 경찰의 일원’으로 일했다. 스무 살이 채 안 된 나이였다. 이튼 시절, 젊은이들에게 1차 대전 참여를 부추기기만 한 기성세대의 비겁함과 또 전쟁을 무능하게 지휘했던 노년층에 코웃음을 치며 기성세대가 내세우는 정통성과 권위에 반항을 했다지만 이튼에서 전수받은 대영제국의 국민이라는 교육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진 못했나 보다. 게다가 그의 아버지도 식민지의 관료였다. 그러나 에릭은 – 수입이 많고 안정된 그리고 무엇보다도 특권층 노릇하기 쉬운 – 식민지의 경찰직을 선택하고 나서야 제국주의의 실상과 마주친다.

1927년, 휴가를 받고 영국에 도착한 에릭은 제국의 경찰 노릇을 그만하겠다고 결정한다.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경찰직을 떨쳐낸 에릭은 희망했던 작가가 되기 위해 1928년 친척이 살고 있는 파리로 옮겨와 습작 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는 미얀마에서 보냈던 시간들로 인해 괴로웠다.

“나는 5년 동안 압제의 일원으로 복무했고 그만큼 양심의 가책이 컸다. 잊히지 않는 숱한 얼굴들 때문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모른다. 법정에 선 피고들, 사형수 감방에서 최후를 기다리는 죄수들, 나에게 윽박질당하던 부하와 냉대당하던 늙은 농부들……내가 느낀 죄책감은 너무 엄청나서 속죄를 하지 않고는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과장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스로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일을 5년 동안이나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슷하게 느낄 것이다. 번민 끝에 결국 얻은 결론은 모든 피압제자는 언제나 옳으며 모든 압제자는 언제나 그르다는 단순한 이론이었다.”(『위건 부두』, 200쪽)

“나는 내 자신이 단순히 제국주의에서 벗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인간의 모든 형태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느꼈다. 나는 스스로 완전히 밑바닥까지 내려가 억압받는 사람들 사이에 있고 싶어졌다. 그들 중 하나가 되어 그들 편에서 압제에 맞서고 싶어졌다……당시에는 실패만이 유일한 미덕처럼 보였다.”(『위건 부두』, 201쪽)

“그렇지만 나는 노동 계급의 처지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다. 실업에 관한 통계를 본 적은 있었으나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부끄러울 것 없는’ 빈곤도 최악의 수모를 당한다는 너무나 중요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위건 부두』, 202쪽)

“그들은 ‘하류 중에서도 최하류’였으며 그런 그들이야말로 내가 접촉하고 싶었던 부류였다. 그때 내가 진심으로 원한 것은 번듯한 세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길을 찾는 것이었다…… 일단 그들 사이에 섞여서 그들에게 받아들여진다면 나는 밑바닥까지 내려간 것일 테고 그러면 죄책감을 얼마간 떨쳐버릴 수 있으리라.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것이 불합리한 생각인 줄은 당시에도 알았다.”(『위건 부두』, 203쪽)

파리의 접시닦이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이하 『밑바닥 생활』)은 바로 그 속죄의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는 파리와 런던에서 경험했던 밑바닥 생활을 가족과 친지들이 알고 당황할까봐 필명을 만들어 1933년 1월 9일 책으로 엮어낸다. 전체주의를 철저히 거부했던 ‘조지 오웰’이란 이름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옮긴이에 따르면 “유럽의 두 도시의 하층민 생활 체험을 바탕으로 구성된 르포르타주 작품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은……작품의 전반부는 1929년 늦가을의 파리 생활을 주로 반영했고 후반부 영국생활은 1928년 겨울에서 1931년 여름 사이에 그가 직접 체험하거나 간접적으로 취재한 내용을 재구성했다.”(『밑바닥 생활』, 286쪽)고 한다. 오웰도 이렇게 말한다. “거기 적은 일들은 재구성되긴 했어도 전부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위건 부두』, 205쪽)

1929년 10월 뉴욕 증권 시장의 폭락 여파가 유럽에도 번져나갔다. 1931년, 영국에서도 대공황이 시작되었고 4명 중 1명이 실직자로 전락한다. 약 300만 명 정도가 실직했으며 실업수당으로 겨우 기아와 노숙을 면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더불어 기아와 노숙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빈곤은 이웃의 일로 번져갔다. 암울하고 불안정한 시기였다.

오웰은 ‘하류 중에서도 최하류’의 생활을 파리에서부터 시작한다. 아침부터 욕설이 들리는 여관에 거처하면서 밑바닥 사람들의 언어와 일상들을 빠짐없이 체험한다. 겨우 연명할 일거리인 영어 교습이 끊기고 난 뒤부터는 그야말로 진짜 밑바닥이 되었다. 그러던 중 그곳에서 사귄 친구(보리스)의 도움으로 호텔의 접시닦이가 된다. ‘노예의 노예’라는 접시닦이 일은 부르주아의 완충재 역할을 하는 ‘하급 상류중산층’ 오웰의 계급적 이중성을 무너뜨렸다.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끊임없이 서두르고, 장시간 노동과 탁한 공기를 견디는 것이다. 그들은 이 생활을 탈출할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급료로는 한 푼도 모을 수 없고, 일주일에 60시간에서 100시간의 노동이 다른 일에 훈련할 시간을 남겨주지 않기 때문이다.”(『밑바닥 생활』, 102쪽) “그들의 생활이 그들을 노예로 만들어 놓는다.”(『밑바닥 생활』, 152쪽)

오웰은 밑바닥 현실과 밀착되어 있는 살아있는 글들로 20세기 초반의 빈민층을 생생하게 표현한다. 하급 상류층으로 살았던 그가 최하류층을 겪으며 쏟아내는 빈민층의 생활과 노동 강도에 대한 비유들도 당시 노동 현장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그런데 오웰의 글은 무겁게 흐르다가도 번뜩이는 재치를 보인다. 오웰의 묘사에 흠뻑 빠져들어 마치 내가 호텔 지하 일터에 있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껄껄 웃게 하는 풍자와 해학들을 만나게 된다. 더 놀라운 것은 그것들이 과장스럽거나 요란하지 않다는 것이다.

해학에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오다가도 어느새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되는, 이것이 오웰 글의 묘미인 것 같다. 노동자들의 고단한 생활과 환경이 곧 나를 차분히 가라앉히고 그 진실들을 외면하지 못하게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소‘썰’>이 아니라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때와 같은 수준에서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직도 내 이웃에 있기 때문이다. 생계를 꾸려가야 할 노동자이든, 등록금을 마련해야 하는 대학생이든 아직도 궂은일을 하러 가는 사람들이 ‘건너기 힘든 계급의 강’을 넘어서기 위해 첫차를 타고 막차를 기다린다. ‘언젠가는 나도 돈을 모으면……’

런던의 부랑인

파리에서 생활하면서 런던에 있는 친구에게 직장을 부탁했던 오웰은 선천성 정신박약자를 돌보는 일이 생겼다는 친구의 편지를 받고 프랑스를 떠나지만 런던에 도착해서야 그 일이 어그러진 것을 알게 된다. 만일 지금처럼 그때도 휴대폰이 있었다면 부랑인 생활을 하지 않게 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위건 부두』에 따르면 오웰은 이미 부랑인 생활에 뛰어들기 위한 준비 기간을 거쳤다.

오웰은 부랑인들과 일상을 함께했다. 그리고 그들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방치되어 있는지를 보여주기에 앞서 부랑인들과 섞이기가 얼마나 쉬운지를 묘사한다. 오웰은 자신의 상류층 언어 습관에 신경을 쓰면서 첫눈에 신분이 들통이 나 염탐자로 오해 받고 부랑인들에게 거부당할까봐 긴장했지만 그저 그들과 같은 차림새 하나만으로도 부랑인의 무리에 낄 수 있었다고 한다. “옷은 즉시 나를 새로운 세상에 들여놓았다.”(『밑바닥 생활』, 168쪽)

그렇게 즉시 부랑인이 된 오웰은 그들을 따라 구세군 구호소를 돌아다닌다. 그리고 최악의 구호소는 있지만 완전한 구호소는 어느 곳에도 없을 뿐더러 최소한을 갖춘 구호소도 없다는 사실을 영국민에게 알린다. 외부와 단절된 구호소 안의 참담한 환경들이, 일다운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된 부랑인들의 허기진 현실이, 그에 따른 무기력함이 오웰의 ‘기록’을 통해 밝혀진다.

부랑인들은 부랑하도록 법률로 강제되어 있다. 구호소에는 하루밖에 머물 수 없기 때문이다. 부랑인은 당시의 법률 상황에서는 부랑하든지 굶어죽든지 해야 하므로 부랑인이 된다. 오웰은 시급하게 개선해야 할 악폐들뿐만 아니라 해결책도 제시한다. 런던에서 사용하는 속어와 욕설들을 따로 정리한 장도 있다. 또한 당시 파리와 런던의 물가까지도 잘 기록해 놓았다.

영국 사회의 한 면을 기록한 오웰의 이 책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구호소의 환경을 개선하는 데에도 일조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오웰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오웰의 선택

지금 우리 사회는 창의성을 강조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창의성을 발휘해야만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물과 현실의 상황을 직시하지 않은 채 떠올린 상상력과 창의력은 허술할 뿐이다. 편견과 획일성이라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다.

만일 오웰이 밑바닥 생활에 관해 글을 쓸 때 귀동냥에만 의지했다면 그렇게 생동감 있는 표현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의 현장 체험은 상상력과 글재주를 더욱 빛나게 했다. 호텔 작업장과 구호소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 이유도 오웰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리스’를 친구로 사귀지 못했다면 속죄 행위의 하나로 여긴 접시닦이 일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 오웰이 속죄만 하고 그 상황을 기록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허울뿐인 공리주의(최대다수의 최대행복)를 낳은 나라의 극빈자 상황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기록 혹은 보고 문학이라고 하는 ‘르포르타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사실과 진실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은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통로이다. 오웰은 ‘하류 중에서도 최하류’란 주제를 선택하였고 노동환경과 노동자 의식의 관계, 상류층과 하류층의 의식 등을 관찰하고 비교하면서 당시의 사건과 사실들을 충실히 묘사한다. 오웰의 밑바닥 생활이 빛을 발하게 된 것은 자신의 빈곤한 상황에만 집중하지 않고 최하류층의 열악한 상황과 그들의 환경에서 비롯되는 비열함까지도 빠뜨리지 않고 기록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를 견디게 하는 최소한의 경비들도 꼼꼼히 적고 있다.

르포계에서는 ‘취재력이 곧 표현력’이란 말을 한다. 이것은 현실의 모습을 다각도로 살펴보고 심층적으로 포착해야 한다는 것으로, 상상력만으로는 창의성을 키울 수 없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다. 열정이다. 언제나 그릇된 압제자에 저항하고, 언제나 옳은 피압제자와 연대하려는 열정. 그 열정은 르포를 완성하려는 의지를 잃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작가 스스로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마치 그것은 열정이 준비한 선물과도 같다.

오웰은‘실패만이 미덕’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한 의지를 실천하기 위해 성공과는 거리가 먼 밑바닥으로 간다. 그러나 끼니를 며칠씩 거르고, 접시를 닦고, 부랑인과 함께 떠돌면서도 상류층의 징표인 ‘h’발음을 없애지는 못한다. 하지만 노동계급과 최하층민에 대한 편견은 오웰에게서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하류층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열심히 일하지만 늘 가난할 수밖에 없는 삶의 질곡을 이해하게 된다.

진정한 르포는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모두를 변화하게 하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두 번 다시 모든 부랑인이 불량배 주정꾼이라고 생각하지 않겠고, 내가 1페니를 주면 걸인이 고마워하리라 기대하지 않겠으며, 실직한 사람들이 기력이 없다고 해도 놀라지 않겠고, 구세군에는 기부하지 않을 것이며, 옷가지를 전당 잡히지도 않겠으며, 광고 전단지를 거절하지도 않겠고, 고급 음식점의 식사를 즐기지도 않으련다. 이것이 시작이다.”(『밑바닥 생활』, 284쪽)

나는 오웰이 이후의 다른 작품 속에서도 파리와 런던에서 있었던 최하류의 생활에 관해 언급하는 것을 읽게 되면 속죄로 시작했던 그 초심을 잃지 않으려는 의지를 보는 것만 같다. 그런데 혹시 “왜 최하류층인가?”라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한 사회, 한 국가에서 가장 가난한 계층의 의식주 상태를 보면 그 사회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고.

알랭 드 보통『행복의 건축』 [청춘의 서재]

공간이 움직이고, 삶이 꿈틀거린다.

마침내 집에 돌아와 혼자 있게 되어 복도 창 밖 정원 위로 어둠이 깔리는 것을 보면, 서서히 더 진정한 나, 낮 동안 옆으로 늘어진 막 뒤에서 공연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나와 다시 접촉을 하게 된다. 낮 동안 가라앉아 있던 장난스러운 면이 문 양옆에 그려진 꽃에서 힘을 얻기도 한다. 커튼의 섬세한 주름에서 온유의 가치를 확인하기도 한다. 허세를 부리지 않는 바닥의 거친 나무 판자를 보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수수한 행복에 부쩍 관심이 생긴다. 우리 주위의 재료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품고 있는 최고의 희망을 이야기한다. -『행복의 건축』중에서-

알랭 드 보통에 의하면 집은 일상에 매몰된 내가 진정한 나의 모습을 되찾는 공간이다. 나는 내 집 문고리, 커튼의 모양 속에서 그동안 잊고 있었던 가치들과 추억들을 발견한다. 그리고 거기서 또 나는 희망을 발견한다. 집은 우리의 추억과 동시에 희망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내일 또 지칠 줄 알면서도 집을 나설 것이다.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을 향해서 말이다. 우리는 수많은 공간 속에 존재하고, 그 공간이 움직임에 따라 삶 전체가 요동친다. 어릴 적 꿈이 어린 내 방, 맛있는 추억을 간직한 주방, 아빠와 뛰놀던 정원, 애인과 웃고 떠들던 교외 벤치… 공간은 사라지기도 하고 또 새롭게 탄생되기도 하면서 내 삶을 둘러싼다.

내가 알랭 드 보통의 『행복의 건축』을 마주한 건 하필이면 우리 동네에 재건축의 바람이 불어 닥칠 때였다. 온 동네가 술렁거렸고, 사람들은 걱정 반 기대 반의 심정으로 각자의 집을 머릿 속에 그려봤다. 그 때, 나는 내 추억어린 공간이 사라지는 걸 원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이 나에게 행복을 말해준다고? 이러한 석연치 않은 의구심으로 나는 이 책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나는 정말 내 눈에 띄는 저 촘촘한 공간이 숨쉬고, 나에게 말을 걸고, 심지어 울렁이게 하고 벅차게 하는 마법을 느꼈다. 알랭 드 보통은 『행복의 건축』을 통해서 바로 이런 공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건축은 우리에게 여러 가치들을 기억해내고 생산해내는 작업이며, 무엇보다도 그 속에서 인간은 행복하기를 원한다.

건축 속으로…

어떤 사람에게 건축은 단순히 추위와 더위를 피하기 위한 공간에 불과할 수도 있다. 반면, 어떤 사람에게 건축은 아름다움의 현현일 수 있고, 신성한 존재의 거주공간일 수도 있다. 가까운 교회나 성당에 들어가면, 그 공간 자체가 주는 신성함이 나를 숙연하게 만든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에게 건축은 문화와 역사를 바꾸고 이끌어가는 공간일 수도 있다.

건축이 추위나 더위를 막아주는 집을 짓는 작업이라는 생각은 이미 넘어선지 오래이다. 서양적 전통에서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건축은 아름다움을 창조해내는 작업이었다. 그래서 니콜라우스 펩스너의 말처럼, 링컨 성당은 건축이지만, 자전거 보관소는 건축일 수 없다. 그러면 건축의 본질은 아름다움인가?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건축의 미적 추구가 실용성의 문제에 부딪친 것은 이른바 건축 기술자들이 생겨나면서 부터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건축은 제작비용과 그것의 효용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 그래서 그들은 가장 싼 비용으로 가장 긴 거리를 연결하는 다리를 설계하는데 노력을 기울였지, 그 다리가 어떤 스타일로 지어져야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 지나치게 미적 감각을 추구한 나머지, 아름다운 집이지만 정작 집의 본질적 기능을 상실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높은 천장과 사방이 유리로 된 집의 경우, 미관상 아름다울 수는 있으나, 거주하기에는 적절치 않다.

건축은 기술과 예술 사이 어딘가에 있다. 스위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는 건축에서 아름다움을 제거하고, 건축의 과학과 기술을 도입하여 실용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새로운 건축을 원했고, 기술자이기를 자처했다. 그의 건축에 대한 생각은 ‘건축은 거주하는 기계’ 라는 간단명료한 정의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알랭 드 보통은 실용정신을 강조한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물 역시도 예술적 동기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한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르 코르뷔지에가 그토록 실용주의를 강조했으면서도, 결국 ‘빌라 사부아(르 코르뷔지의 건축물)’를 “아름답지만 방수는 되지 않는 집”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바로 그의 예술적 충동이 꿈틀거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건물이 말을 한다?!

건축물은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건물이 말을 한다고?? 이 발칙한 알랭 드 보통의 주장에 당황해하지 말고, 그의 재미있고 발랄한 생각에 귀를 기울여보자. 내가 어떤 건물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단순히 외관상 예컨대, 아름다운 장식이나 구조를 보고 그렇게 말하는 것만은 아니다. 외관상 건물이 아름다운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건물이 보여주는 모습 (지붕, 구조물, 손잡이, 창틀, 내부의 인테리어) 이 좋은 생활이라는 관념에 부합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건축은 좋은 생활과 느낌의 관념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듣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건축은 마치 거대한 상형문자와도 같다.

건물이 말하는 바는 곧 그것의 존재이유이기도 하다. 예컨대,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은 신의 성스러움과 숭배에 대해 말한다. 바꿔 말하면,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은 신의 성스러움과 찬미를 위해 지어졌다. 철학자 하이데거에 따르면, 그리스 신전의 건립은 단순히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성스러운 것을 성스러운 것으로 표현하면서 거기에 신을 깃들게 하는데 있다. 우리는 그리스 신전 또는 성당이 말하는 신의 존엄과 영광 속에서 고개를 숙인다. 인간은 성스러운 존재 앞에서 한없이 작고 불안에 떠는 불쌍한 존재 아니던가. 뿐만 아니라, 건축은 불행한 역사를 말하기도 한다. 나의 집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서대문 형무소는 단순히 낡고 흉물스러운 건물이 아니다. 그것은 일제 치하의 치욕스러운 역사를 적나라하게 이야기한다.

건물은 우리에게 늘 말을 건넨다. 그리고 언제나 묵묵히 기다린다. 우리가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들어줄 때까지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건물이 은근하게 건네는 조언”에 언제나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 때 비로소 건물의 돌, 흙, 지붕, 계단은 생생한 관념으로, 재미난 이야기꾼으로 거듭날 수 있다.

건축은 기억과 희망을 연결하는 행복의 ‘곳’이다.

건축은 삶을 위한 공간이자 거처하고 있는 사람의 의식의 내부이기도 하다. 예컨대, 집은 물리적 공간이자 내 기억과 애정이 담긴 심리적 공간이기도 하다. 알랭 드 보통에 의하면, 세계 곳곳에 있는 무덤들은 그 외관과 양식, 그 의미들이 모두 다르더라도 공통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기억하라’이다. 나의 집은 나의 역사를 담고 있다. 또 한 어떤 건물은 추억이 아닌 희망과 열망을 담기도 한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총독궁 천장에 그려진 네 명의 여인은 정의, 평화, 온유, 절제를 표현하는데, 이는 곧 베네치아 공화국이 지향하는 바이기도 하다.

건축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함께 있다. 거기에는 추억이 있고, 이상과 희망을 담고 있으며, 이 모든 것의 현존을 증명하는 ‘그 곳’이 있다. 하나의 건물에는 그것을 이야기하는 수많은 목소리가 있으며, 그 목소리가 내는 화음이 바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사실 공간을 만들고, 거기에 빛을 가득 담고, 곳곳에 추억과 희망을 불어넣는 작업만큼 행복에 기여하는 일이 또 있겠는가? 건축은 자기만의 스타일로 행복을 만들고, 그것을 우리에게 말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건축이 항상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가장 고귀한 건축이 때로는 낮잠이나 아스피린이 주는 작은 위안에도 못 미칠 수 있다.” 아름다운 건축물 속에서 나는 애인과 다툴 수도 있고, 반면 지하 월세방에서도 행복한 가족의 웃음이 쏟아져 나올 수도 있다. 진정한 건축은 외관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보다 더 큰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나름의 방식으로 말하고, 담아낼 줄 아는 탁월한 재주꾼의 창조이다. 그리고 바로 알랭 드 보통이 말하고자 하는 행복의 건축의 의미도 그런 것이다.

우리의 행복, 우리의 미래의 곳은 어디인가?

알랭 드 보통은 우리에게 건축은 행복을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그럼 우리네 삶의 공간은 어떠할까? 대한민국 현실에서도 여전히 건축은 행복을 만들고 있는가? 언젠가 건축가 교수가 대한민국의 건축 현실 안에서는 르 코르뷔지에와 같은 건축가는 전혀 꿈꿀 수 없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왜냐하면 물질숭배가 극에 달한 한국 사회 속에 부동산 투기가 있고, 그 투기 한 가운데에 바로 건축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동안 건축의 의미나 역할, 알랭 드 보통의 말을 빌자면, 건축이 말하는 바에 전혀 귀를 기울일 수 없었다. 우리에게 건축은 단순히 내 한 몸, 우리 가족이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내는 일만으로도 벅찼다. 그나마 그것은 나은 편이다. 언젠가부터 이제 건물은 부의 척도가 되어버렸다. 똑같은 건물이라도, 지역에 따라 그 값이 천차만별이고, 아름다운 건물은 단순히 값을 부풀리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 한국 현실에서 건축은 좁은 공간에 보다 많은 사람을 밀어넣는 효용성의 산물이거나 아니면, ‘돈 버는 기계’일 뿐이다.

남산타워 전망대에 가면, 서울 도심이 한 눈에 보인다. 개성을 상실한 채, 높다랗게만 솟은 건물들이 반짝 반짝 빛나는 불빛으로 겨우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나는 그 건물들이 나에게 뭐라고 속삭이는지 보다 내가 그 건물 속 어디에 살 것인지가 더 궁금하다. 저기 어디쯤에 내 집이 있을까? 어쩌면 알랭 드 보통이 말하는 행복의 건축은 대한민국 현실과는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에겐 건물이 무엇을 말하든, 그것이 아름답건 실용적이건 간에, ‘내 공간’ 하나 얻는 것 자체가 행복이다. 그 공간이 어떠하다는 의미부여는 그 다음에 생각해 볼 문제다. 치솟은 전세 값에 집에 대한 희망은 그만큼 멀어지고, 도심 곳곳의 재개발은 돈 있는 자만 살아남는 서바이벌의 장이 되어버렸다. 이 냉혹한 현실이 바로 대한민국의 ‘곳’의 현재이다. 그러면 우리는 도대체 언제쯤 건축의 행복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그래도 나는 그가 전하는 메시지가 언젠가는 우리 미래의 ‘곳’을 만들어 줄 거라고 믿는다. 희망을 담는 것 또한 건축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알랭 드 보통의 책을 덮으면서, 나는 문득 아주 익숙한 유행가 가사가 떠올랐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년 살고 싶어. […] 멋쟁이 높은 빌딩 으스대지만, 유행 따라 사는 것도 제멋이지만 반딧불 초가집도 님과 함께면 나는 좋아 나는 좋아 님과 함께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값비싼 빌딩보다 초가집이 더 좋다는 이 소박한 희망이 자꾸만 서글프게 들리는 건 왜 일까?….

최진아(건국대 강사) /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의 역사』[청춘의 서재]

“일상적인 삶의 경험은 우리가 원하는 삶에 의해 부정되고, 그것은 다시 우리가 실제로 희망하는 삶에 의해 부정된다.” 도서관 서가에서 우연히 뽑아 든 책에서 저 글귀를 만난 이후로, 알베르토 망구엘의 책은 관심의 대상이었다. 저 문장을 읽은 건 일종의 만남이었고, 내면에서 일어나던 일련의 심리적 사건들의 성격이 해명되는 순간이자 누군가의 진심 어린 위로를 받는 경험이었다. 청춘이라는 말에 어울릴 만한 기간은 아마, 일상이 결코 무덤덤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그런 자아가, 맨 발로, 일상이라는 얼음판을 걸어야 하는 기간인지도 모르겠다. 물리적인 나이와는 또 다르게, 일상의 현실이 유일하고 압도적인 현실이 되는 순간마다 우리는 청춘에서 물러나게 되는 듯하다.

그런데 일상적 삶을 부정하든 긍정하든 간에, 현실의 삶과는 완전히 부합하지 않는 그 내면세계를 어디서 어떻게 갖추게 되는 걸까? 망구엘은 ‘책을 읽는다는 행위가 어떤 역사를 지니는지’를 조사하고 적어 내려가면서 이런 의문을 푸는데 도전한다. 책에서 우리는 대체 무엇을 찾아 헤매는가? 책을 읽는다는 게 무엇이길래 그게 우리를 매혹시키는지도 알고 싶어한다. 그는 『독서의 역사』에서 비록 시대는 달랐지만 ‘(책) 읽기’라는 경험을 공유하는 ‘독서가’들로부터 그것을 찾아내려 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이 어떤 존재이고 또 어디쯤 서 있는지를 살피려고 우리 자신뿐 아니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읽는다. 이해하기 위해, 아니면 이해의 단서를 얻기 위해 읽는다. 뭔가를 읽지 않고는 배겨 내지 못한다. 읽기는 숨 쉬는 행위만큼이나 필수적인 기능이다.” 읽기라는 행위 전체에서 보면 “책장의 문자를 읽는 행위는 그런 기능의 다양한 모습 중 하나일 뿐”이지만, “문자 기록이 없는 사회에서는 시간 감각이 ‘일직선적’인 데 반해, (문자 기록을) ‘읽고 쓸 줄 아는’ 사회에서는 시간 감각이 ‘점증적’이다.” 그리고 시간적 제약을 뛰어넘은 그 점증적인 시간 감각이 일상의 현상적이고 휘발적인 성격을 드러낼 수 있는 요인 중 하나로 보인다.

사실, 저자는 스스로도 밝혔듯 서술방식으로서 “연대기적 순서나 논리적인 순서를 따르지 않았는데,” 그것은 체계에 기대지 않고 한 명 한 명의 독서가가 누린 삶과 책 읽기를 들여다보고 싶어 했기 때문인 듯하다. 이런 서술 방식은 책 읽기와 관련해서 그가 가진 의문이 무엇이었으며, 그것을 어떻게 풀어가는지를 쉽게 알아보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가 인용했던 독서가들의 ‘고백’을 빌린다면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음직하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내면세계의 전부가 책 읽기를 통해 형성된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일부는 그렇다. 특히나 일상적 삶 내지는 ‘현실’과 내면세계와의 관계는 자의적으로나 타의적으로나 미세하게라도 거듭 수정을 반복하고 있을 텐데, 그것을 효과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 대표적인 통로가 책 읽기이다. 게다가 잘하면 양자의 관계를 조정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다.

기대가 번번이 좌절되기 일쑤인 일상 속에서 버티고 다시 일어서서 걸어 나갈 수 있는 힘을 주는 원천은 다양하겠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책장을 넘기면서 그 힘을 길러왔던 것 또한 사실이다. 망구엘 또한 그랬듯 “책에 빠져들면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 싶은 욕망과 가능한 한 결말 부분을 늦추려는 욕망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겪어본 적 있는 이라면 누구든 책 읽는 것 자체가 너무도 재미있어서 단지 그 이유로 책을 읽어봤음직하다. 그러나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부 작품들을 제하면 우리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무언가를 기대하고 찾는 심정으로 책장을 펼쳐 들게 된다. 그리고 어쩌면 오직 몇몇 축복받은 그런 독서 경험에서조차도 무언가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요는 검은 잉크로 뒤덮인 종이 뭉치를 살아 있는 것으로 바꾸어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애타게 찾고 있는 게 무엇인지를 돌아보는 일이다. “우리를 마구 물어뜯고 찔러대는 책만을 읽어야” 하고, “책이 머리통을 내리치는 주먹처럼 우리를 흔들어 깨우는” 그런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던 카프카의 이야기를 망구엘의 책에서 다시 그리고 마저 들어보자.

“요컨대 나는 우리를 마구 물어뜯고 쿡쿡 찔러대는 책만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 만약 읽고 있는 책이 머리통을 내리치는 주먹처럼 우리를 흔들어 깨우지 않는다면 왜 책 읽는 수고를 하느냐 말야? 자네가 말한 것처럼 책이 우리를 즐겁게 하기 때문일까? 천만에. 우리에게 책이 전혀 없다 해도 아마 그만큼은 행복할 수 있을지도 몰라.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책들은 우리가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도 쓸 수 있단 말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마치 우리 자신보다도 더 사랑했던 이의 죽음처럼, 아니면 자살처럼, 혹은 인간 존재와는 아득히 먼 숲속에 버림받았다는 기분마냥 더없이 고통스런 불운으로 와 닿는 책들이라구. 책은 우리 내부에 있는 얼어붙은 바다를 깰 수 있는 도끼여야 해. 나는 그렇게 믿고 있어.”

아마 이 문절과 만난 것만으로도 망구엘의 책을 들춰본 보람이 있다고 느끼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 듯싶다. 평범한 우리들과 달리 탁월한 독서가들이나 위인들은 공통적으로 자기환상을 껴안기보다는 무언가에 마비되어 있는 자신을 깨우려고 한 것 같다. 책 읽기는 즐거움도 아픔도 주지만, 책 읽기에서 더 고유한 건 삶에 편재된 고통을 간신히 견디게 하는 그 마취를 풀어버리는 것이라니.

그렇다면 책을 읽는다는 게 무엇이길래 우리의 내면을 뒤엎을 수 있단 말인가. 감지하다시피, 이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는 간단히 대답할 수도, 회피할 수도 없는 물음인데 이에 대해 망구엘은 이 물음 앞에서 정직하게 대답하는 용기와 세련된 교양을 보여준다.

“독서가들이 멸종의 위기에 처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심심찮게 들리는 가운데 오늘날의 우리 독서가들은 독서란 어떤 것인지를 배워야만 한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 독서 역사의 미래는― 마음 속으로만 읽어야 할 텍스트와 큰 소리로 읽어 내려가야 할 텍스트를 구별하려고 노력했던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독서가의 해석 권한을 제한하는 데 의문을 품었던 단테에 의해 …… 두루마리식의 책 읽기가 지나치게 제한적이고 성가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에게 그런 방법 대신 책장을 넘겨 읽으면서 여백에 끄적거릴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 초기의 책 제조업자에 의해 이미 탐험되었다.”

우리 독자들이 해야 하는 일이 ‘책 읽기가 무엇인지’를 배우는 일이라고 지목한 망구엘은 사실상 ‘책을 읽는다는 경험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고백한 셈이다. 그리고서, 그는 역사상 실재했던 독서가들의 경험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시대를 거슬러 혹은 시대를 앞, 뒤로 오가면서 알렉산더 왕을 비롯하여 아우구스티누스, 중세의 필사자들, 와일드, 그리고 카프카나 릴케는 물론 무명의 여인들에 이르기까지 책을 읽는다는 행위와 그 힘에 대하여 탐색해나간다.

“기원전 3천년대 말 즈음,” “십중팔구, 적는 기술은 어느 가족에 가축 몇 마리가 있는지, 아니면 어느 지점으로 가축 몇 마리를 옮겼는지 따위를 기억하기 위한 상업적 목적에서 발명되었을 것이다. 쓰여진 기호는 기억력을 높이는 장치의 역할을 했다. 그림 속의 소 한 마리는 소 한 마리를 의미했기 때문에 그것을 읽는 자에게는 거래가 소로 이뤄졌다는 사실과 몇 마리의 소가 거래되었는지, 아마 소를 산 사람과 판 사람의 이름까지도 알려줄 수 있었을 것이다.” 인류가 뭔가를 적기 시작했을 때, 읽는다는 행위는 거래 내용을 파악하고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읽어줄 사람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뭔가를 쓴다는 행위의 목적은 그 텍스트를 보존하려는 것―다시 말해 읽혀져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새김은 동시에 한 사람의 독자를 창조해 낸 셈이다.”

더 나아가, 망구엘은 저자와 독자의 관계에 주목하면서 “독서가의 역할을 창조해 냄으로써 저자는 동시에 저자의 죽음을 선포하는데, 그 이유는 텍스트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저자가 존재를 멈춰야만 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현존하는 한 그 텍스트는 언제나 미완으로 남는다. 작가가 텍스트에서 손을 뗄 때에만 그 텍스트는 텍스트로서 존재의 영역에 들어오게 된다. 이 시점에서 텍스트는 한 사람의 독자가 읽어 줄 때까지 조용한 존재로 남는다. 기호를 읽을 줄 아는 눈이 서판에 새겨진 형상 앞에 서는 순간, 그 텍스트는 왕성한 생명력을 얻게 된다. 이렇듯 모든 기록은 독서가의 호의(generosity)에 의존한다.”

쓰여진 기호가 생명력을 지니게 되는 순간은 그것이 읽힐 때이며, 독서가로서 임무는 그것을 읽는 것이다. 이제 추적해야 할 것은, 그 읽기가 어떻게 이루어지며 또 그게 읽는 자에게 어떤 경험인지를 알아내는 일이겠지만 그것은 애초 완벽하게 대답될 수가 없다. 다만 “우리 존재는 읽은 만큼 성장”하고 “그 순환이 완성되는 과정은 단순히 지적인 과정만은 아니라는 휘트먼”의 믿음으로부터, 책을 통해 우리의 내면세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이렇게 정리해 볼 수는 있겠다.

“표면적으로는 지적으로 읽어 어떤 의미를 파악하고 어떤 사실들을 자각하지만, 그와 동시에 무의식적으로도 텍스트와 독서가는 서로 한데 얽히면서 새로운 차원의 의미를 창조해 낸다. 그래서 우리가 텍스트를 섭취하여 텍스트가 가두고 있던 무언가를 풀어 낼 때마다 그 텍스트의 깊은 곳에서는 우리가 아직 파악해 내지 못한 다른 무언가가 새롭게 태어난다.”

그리고 책 읽기라는 행위를 알아내려는 우리의 시도가 애초 불가능한 것도 바로 그 이유에서이다. 텍스트를 읽을 때마다 우리가 아직 잡아내지 못했던 다른 무언가와 마주치므로 “어떠한 책 읽기도 결코 완성”될 수는 없다. 다른 한편 같은 책이더라도 매번 새로운 책 읽기가 될 수 있는 이유에 대해, 망구엘은 저 유명한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을 손질하여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결코 똑 같은 책으로, 아니면 똑 같은 페이지로 되돌아갈 수 없는데, 그 이유는 … 우리도 변하고 책도 변하고, 그리고 우리의 기억도 밝았다가 쇠해졌다가 또다시 밝아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배우고 까먹고 또 기억하는 것이 어떤 것들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기도 한다.”

“인생 여정의 단계에 따라서도 달라지는” 책 읽기라는 행위에서 책을 어떻게 읽어내느냐가 읽는 자로서 갖는 힘이다. 아카데미 내에서야 어떻게든 자의적인 읽기를 배제하고 형식화된 결과물들을 축적하려 함에도, 망구엘의 탐색에 따른다면 책 읽기는 어쨌든 독자와 텍스트의 결합 과정으로서 또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얼마간 ‘자의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서기 330년, 훗날 콘스탄티누스 대제로 기억될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누스”에게는 “오로지 한 가지 독서법만이 진실”이었는데, “종교 텍스트에 대해 한 가지 독서법을 요구하는 일은 만장일치 제국이라는 콘스탄티누스의 개념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원본에 보다 가깝게, 포용성은 보다 덜하게’, 이거야말로 당시에 베르길리우스의 시 같은 세속적인 텍스트를 읽는 데 유일하게 허용됐던 정통적인 독서 개념이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어째서 콘스탄티누스가 표준적인 독서법을 고집했는지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책 읽기가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똑똑히 자각하고 있었다. “아득한 옛날 성 금요일에 콘스탄티누스가 발견한 것은 한 텍스트가 갖는 의미는 독서가의 능력과 욕망에 따라 확대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텍스트를 대할 때 독자는 그 텍스트의 단어를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역사적으로 그 텍스트나 저자와는 전혀 관계 없는 의문을 풀어 주는 메시지로 바꿔 버릴 수 있다. 이런 식의 의미 변질은 텍스트 자체를 확장시키거나 퇴보시킬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텍스트에 독서가 자신의 환경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무지, 맹신, 지성, 기만, 교활함, 그리고 계몽을 통해 책 읽는 사람은 원전과 똑 같은 단어로 그 텍스트를 다시 쓰면서도 원본과는 다른 이름으로, 다시 말해 그것을 재창조한다.”

콘스탄티누스는 독서가가 갖는 힘의 위력을 의식하고 있었고, 그래서 더욱 그것을 조정하려고 했음이 드러난다. 망구엘은 이를 통해 독서란 독자의 능력과 욕망에 따라 원본을 재창조하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그렇게 읽어야 좋다거나 바람직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책 읽기 과정이란 사실 텍스트의 재창조 과정임을 분명히 직시하면서 그로 인한 위험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데로 나아간다.

“독서가의 힘이라고 해서 모두가 계몽적인 것은 아니다. 하나의 텍스트를 창조할 수 있고, 그 텍스트의 의미를 다양화하고 그 텍스트로 과거와 현재를 비추고 미래의 가능성을 탐색해 낼 수 있는 똑 같은 행위가 살아 숨 쉬는 페이지를 파괴할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독서가는 나름대로 책 읽기의 방법을 창조해 내는데,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과는 다르다. 하지만 독서가는 그 텍스트를 어떤 교의나 전횡적인 법, 사사로운 이익, 노예 소유자의 권리나 전제군주의 권위 등에 교묘하게 종속시킴으로써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

책 읽기 과정이 독자의 역량에 따른 재창조 과정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읽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독자의 역량에 달렸기에 읽는 이의 그것이 반영될 수밖에 없으므로 순수한 객관적인 읽기라는 건 환상이지만, 그럼에도 텍스트에서 보이지도 않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독서라는 재창조 과정의 한계를 벗어난다. 망구엘은 비록 “의도적인 거짓말”만을 지적했지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책에서 그것을 보았노라고. 나 역시 망구엘의 이 책을 다 읽지도 잘 읽지도 못했다. 휘트먼이 분명히 드러냈듯 책 읽기는 완성될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저 거듭 읽기를 통해서 고쳐나갈 수밖에 없으며 그 과정에서 책과 내면세계 모두 변화를 겪는다. 망구엘은 무엇을 읽는다는 것 역시 힘을 행사하고 있는 과정이라는 것을, 독자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책 읽기라는 행위를 통해 보여주었다.

우리는 일상의 삶 속에서 무수한 좌절에도 다시 일어서고, 책에서 기대하는 그것을 번번이 찾지 못하더라도 다시 책을 쥔다. 책의 무엇이 다시금 책장을 넘기도록 하는지에 대해서는, 망구엘이 ‘마지막 페이지’라고 제목 붙인 첫 번째 챕터에서 맺음말로 인용했던 오르한 파묵의 어느 문절로부터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을 듯 하다.

“편도 마차 승차권으로는 한번 여행이 끝나고 나면 다시는 삶이라는 마차에 오를 수 없다. 그렇지만 만약 당신이 책을 한 권 들고 있다면, 그 책이 아무리 이해하기 어렵고 복잡하더라도, 당신은 그 책을 다 읽은 뒤에 언제든지 처음으로 되돌아가 다시 읽음으로써 어려운 부분을 이해하고 그것을 무기로 인생을 이해하게 된다.”

김정신(한국철학사상연구회) /

김창완 산문집 『이제야 보이네』[청춘의 서재]

‘청춘의 서재’라는 말 앞에 멈춰 섰다. 청춘에게 권하는 책에 대해 글을 쓰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코너명일 테다. 그런데 이 말 앞에 한참을 멈춰 선 것은 이 말의 어색함 때문이었다. 청춘에게 ‘서재’라…

나의 청춘을 돌아 보았을 때 나의 청춘엔 ‘책꽂이’가 있었다. 편식과 잡식으로 엉성한 책꽂이였다. 도서 분류 기준표 상 고른 책, 혹은 인문, 자연, 사회 별 고른 책이 아니라 내가 당시 관심을 가진 책만 잔뜩 꽂혀 있는 책꽂이였다. 그러면서도 책 고르는 안목이 없어 어처구니없이 어렵거나 평생 가야 다시 볼 일 없는 허튼소리가 적힌 책까지 들쭉날쭉 꽂혀 있는 책꽂이였다. 정작 정말 재밌게 읽은 책은 후배의 생일에 아낌없이 선물한 결과 훗날 내가 그 책을 읽었는지 가물가물해져 추억할 건더기마저 남아 있지 않은 가난한 책꽂이였다.

그 때의 가난한 책꽂이는 결핍이라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다. 편식과 잡식을 단진동하고 책이 책꽂이에 붙박히는 날 없었던 그 가난한 책꽂이가 읽히지 않은 전집으로 채워진 서재보다 얼마나 생산력이 있었던지… 늘 비어 있다는 생각에 끝없이 새로운 주제를 찾아 나서곤 했다. 청춘에는 항상 ‘찾아 나섰다’면, 이제 달라진 것은 ‘찾아 들어온다’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것이 작고 부끄러워서 더 크고 위용 있는 것을 찾아 나섰던 나는 이제 내가 작고 부끄럽다고 여긴 것들에서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고, 그 평범, 그 통속성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지금 이 글을 통해 나는 내가 좋아했던 ‘산울림’과 대중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40살 무렵, 한 대학의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두 개의 노래를 들려준 적이 있다. 하나는 산울림의 ‘청춘’, 그리고 다른 하나는 노브레인의 ‘그것이 젊음’. 학생들은 후자의 노래는 잘 알고 있었지만, ‘청춘은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럴 줄 알고 ppt에 노래와 가사를 담아 게시했다.

‘청춘’은 내 젊음이 한창일 때 도취하여 청승스레 불렀던 노래이고, ‘그것이 젊음’은 젊음이 한풀 꺾인 40에 ‘미친 듯’고개를 흔들며 -소위 ‘헤드 뱅잉’, 혹자는 ‘헤드 뱅뱅’이라고 한다- 불러 제꼈다. ‘미친 듯’공감하며 말이다. 얼마나 공감하면 나는 정말 미친 듯 공감한다고 말하고 싶다.

지금 ‘청춘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그것이 젊음’에 그려진 청춘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젊음’속에서 젊은이들은 ‘고민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울고’, ‘아파하고’, ‘슬퍼하고’, ‘압박 받고’, ‘텅 비고’, ‘흐린 날 속에서’산다. 하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좌절을 변기에 버리고’, ‘슬픔도 코 한 번 풀고 나면 나아진다’. ‘부딪치고’, ‘타오르고’, ‘거침없고’, 맑은 날도 올 것이라 ‘희망한다’. 나도 그랬었다. 젊음 속에서 겪었던 모든 것이 이 속에 담겨 있다.

하지만 정작 나의 청춘 시절, 나는 청춘을 산울림처럼 생각했다. ‘청춘’이라는 노래의 핵심은 ‘언젠가 이 청춘이 갈 것’이라는 데 있다. 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내가 몸담고 있던 그 젊음을 ‘경과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내가 몸담고 있는 젊음 속에서 한 발 나와 ‘이 젊음도 흘러가리라’라고 헤라클레이토스적으로 생각했던 것, 그것이 내 청춘의 명상(speculation: 라틴어 ‘spect’, 즉 ‘보다’에 어원을 두어, 명상이란 곧 사태로부터 한 발 물러난 ‘관조’라는 뜻)이었다.

언젠가 산울림의 김창완이 TV 인터뷰에서 한 말이 있다. 자신이 지금도 생각하면 낯간지러운 노래 몇 가지를 지었는데, 그 중 하나가 ‘청춘’이라고 했던 것 같다. 낯간지럽다는 이유는 ‘이런 가사를 듣고 사람들이 좋아할 것을 너무 잘 알았던 것 때문’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이 인터뷰를 듣고 나서 나 혼자 명상하는 줄 알았던 착각에서 비로소 깨어났다. 착각도 때론 필요한데… 이 착각에서 깨어나기 전에 나는 사태에서 항상 한 발 물러나 있는 태도가 나로 하여금 철학을 하게 한다고 생각했었다. 여하튼 돌이켜보니, 그러면서도 실상 나는 항상 청춘에 깊이 연루되어 있었고, 나의 청춘을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불의로 가득 찬, 부조리로 가득 찬 세상을 피부로 느끼면서, 젊기 때문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피를 가지고 있었지만 젊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나의 젊음을 쓸모없다고 느꼈다. ‘출정가’, ‘임을 위한 행진곡’과 ‘불행아’사이를 하루에도 수 십 번 오갈 때, 이 분열된 의식을 어루만져준 노래가 ‘청춘’이었다. ‘그래, 이 피 끓는 시간도 이 아픈 시대와 함께 기필코 스러지리라…’라고 나를 위로했다.

한 때 민중 가요와 대중 가요를 날카롭게 가르면서, 대중 가요는 자본의 논리에 종속되어 있는 비자율적인 영역인 반면, 민중 가요는 이에 저항하는 민중의 자생적 저항 의식이 투영된 것이기에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고 여겼다. 민중 가요를 불렀던 나를 돌이켜 보면 나는 이 사회의 비리에 대해 둔감한 대중과 다르다는 의식을 깔고 노래했던 것 같다. 나 또한 ‘구별짓기’속에 있었다. 깨어 있는 민중과 잠 자는 대중. 실상 내가 불렀던 민중 가요 중에는 저항적이고 현실 비판적인 것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일반적으로 동류 집단 간 집단 의식의 제의적 확인인 ‘하위 문화’의 일환이 바로 민중 가요를 부르는 의식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민중 가요든 대중 가요든 우리 삶과 얽혀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가요 속에서 자신을 보고 느낀다. 노래를 통해 얻은 동질성 속에서 다양한 ‘하위 문화’를 형성하는 것이다. 노래방에서 선택하여 부르는 노래들, 늘 듣는 MP3에 담겨있는 노래들은 과거 어느 순간의 자신, 현재의 자신, 혹은 ‘우리 인간들’이라는 느낌을 표현해 준다. 오늘 나는 김창완의 산문집 『이제야 보이네』를 통해 내가 좋아하는 노래와 그것을 부른 사람의 삶 속에서 ‘우리 인간들’이라는 느낌이 강화되는 것을 느낀다.

김창완의 산문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어느 날 우연히 일게 된 임철순의 ‘노래도 늙는구나’라는 제목의 일련의 칼럼 덕이었다. 그는 신문사 기자 출신인데 노래와 얽힌 추억담을 진솔하게 적은 그의 글이 와닿았다. 그는 ‘애창곡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한 번도 노래하는 걸 남에게 보여 준 적이 없는 아버지와 장인’을 추억하면서 ‘어떻게 노래도 하지 않고 이 풍진 한 세상을 건너 가셨는지, 노래하지 않고 살았던 그 분들 마음속의 숨김과 감춤, 슬픔에 대해서 생각했다’고 적었다.

김창완도 그의 산문집 『이제야 보이네』에서 ‘어머니의 노래’에 대해 말했다. 김창완의 어머니는 10대엔 ‘스께가게 사스 코로라도’, ‘가고노도리’를 불렀고, 20대엔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으려고 왔던가’, ‘찔레꽃 피는 언덕’을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남편을 전장에 보내고, 이름도 짓기 전에 젖이 말라 죽은 아들을 가슴에 묻고는 ‘님께서 가신 길은 영광에 길이었기에 이 몸은 돌아 서서 눈물을 감추었소’라는 가사의 ‘님께서 가신 길을’을 부른 데에서 노래의 힘, 모진 삶의 힘과 같은 불가항력적인 힘을 느꼈다고 말한다.

김창완은 이 책의 ‘내 인생의 간판은?’이라는 글에서 자신을 스스로 ‘가수’라고 소개할 수 있게 된 것이 음반을 여남은 장쯤 발표하고 나서, 즉 데뷔 후 10년이 지나고 나서라고 고백한다. 벌써 수 십 장의 앨범을 발표한 그가 아직도 자신의 삶을 ‘제목 없는 노래’라고 칭하는 데에서 그의 자유 정신을 읽는다. 하지만 그는 ‘자유? 글쎄…’라는 글에서 자신이 자유라는 말에 대해 대단히 인색하다고 말한다. 이유인 즉슨 ‘자유의 급체’를 겪어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식을 하면 체하듯이 자유에 얹힌 경험이 있던’그는, 지금은 자유가 ‘조화로움’이라고 말한다. ‘초원을 달리는 말, 바다 위에서 바람에 몸을 맡기고 나는 갈매기’가 자유라는 것이다.

김창완의 노래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기타로 오도바일 타자, 오도바이로 기타를 타자, 타자’라는 가사가 반복되는 노래이다. 이 노래 속에는 내가 좋아하는 ‘부처’가 보이고 ‘노자’가 보이고 ‘데리다’가 보이고 ‘젊음’이 보이고 ‘자유’가 보이고 ‘놀이’가 보이고, ‘노래 그 자체’가 보인다. 그는 노래 속에서 놀고, 노래로 인해 놀고, 노래를 위해 놀고, 노래와 놀았다. ‘기타로 오도바이를 탄다’거나 ‘오도바이로 기타를 탄다’거나 모두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의미를 느낀다.

무의미의 의미를 직감하고, 서로 공감하고 있는 데에서 우리는 생각보다 넓은 의미의 세계 속에서 함께 거주한다는 것을 느낀다. 흥겨운 리듬을 타고 교환된 의미는 잘 뒤섞인다. 노래 가사의 의미가 명료하지 않더라도, 의미가 명료하지 않기 때문에 의식의 동질감을 강화시키는 것이 바로 이 노래이다. 가사가 있는데도 의미가 없을 수 있다는 아이러니를 즐기는 사람들의 의식을 대변하는 노래이다. 의미 없는 가사에서 역설적으로 의미가 발생된다는 것, 즉 고정적 의미에 반항하는 의식이 발생된다는 것을 흥겨운 리듬 속에서 느끼게 해주는 노래이다.

이 노래로 인해 또 하나의 논쟁을 떠올리게 된다. 음악이 시대와 사회를 초월해 보편적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철학, 문화를 읽다』라는 책에서 박영욱은 먼저 레너드 번스타인의 음악의 보편성에 대한 주장을 소개한 뒤, 그러나 사실은 음악이 서구를 중심으로 기보법이라든가 악기의 보편화가 이루어지면서 생겨난 서구 중심적 시선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음악 인류학적 관점의 저서인 『인간은 얼마나 음악적인가』라는 책에서 저자 존 블래킹은 서구의 음악으로부터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남아프리카 벤다 족의 음악을 연구하면서 인간은 생각보다 훨씬 음악적 존재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레너드 번스타인과 다른 논조이지만, 인간에게 있는 음악 능력으로서의 음악의 보편성에 대한 주장인 것이다. 산울림의 ‘기타로 오도바일 타자’라는 노래는 전자보다는 후자의 입장을 편드는 노래라는 생각이 든다.

대중 음악과 관련해 또 다른 오래된 논쟁 하나는 대중음악을 고급 예술과 구분되는 저급한 행태로 보는 시선 대 대중 음악을 고급 예술과 이분법적으로 구분된다는 견해를 거부하는 시선이다. 나는 산울림의 ‘사변적인’대중음악을 들으며 이러한 이분법적 구분의 무의미성을 느낀다. 최유준은 『예술 음악과 대중음악, 그 허구적 이분법을 넘어서』라는 책에서 예술 음악과 대중음악을 가르는 시선 이면에 전자는 순수한 음악이고 후자는 실용적 음악이라는 판단이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순수한 음악이란 어떤 제의적 용도, 실생활에서의 쓰임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음악의 형식적 완성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예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최유준은 순수 음악의 대명사로 기려지는 서양의 고전 음악이 사실상은 당대 귀족이나 부르주아의 계급성을 확인하고 드러내는 제의의 성격을 가진 음악이었기 때문에 결코 순수한 음악이 아니었다고 규정한다.

따라서 기존 음악을 예술 음악과 대중음악으로 나눌 것이 아니라, 자율 음악 대 실용 음악으로 나눌 것을 제안한다. 어떤 실용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음악의 형식적 완결성, 새로운 창작의 시도를 지향해 나가는 음악이라면 그것이 클래식 음악이든, 재즈이든, 힙합이든, 장르나 음악의 복잡성과 상관없이 모두가 자율 음악이며, 반면 제의적인 성격을 띠거나 특정한 실용적 목적(가령 휴대폰 벨소리 음악)에 기여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음악이라면 그 음악 형식이 아무리 복잡하고 어렵더라도 이것은 실용 음악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음악의 세계에 어떤 위계 질서나 편견을 부여하지 않으면서 음악 현상을 의미부여할 수 있는 새로운 틀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로운 논변이다.

많은 음악 평론가들이나 음악을 즐기는 청중들이 오늘날 우리의 대중음악에서 단순한 후렴
구가 반복되는 ‘훅 송(hook song)’이 만연한 현상을 개탄한다. 음악적 완성도보다는 노래하는 사람의 비주얼이 강조되는 현상 또한 개탄한다. 또한 샘플러를 통해 음악적 차용이 도를 넘어서 표절 시비가 끊이지 않는 현상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리메이크가 반복되면서 음악적 창조보다는 지속적 소비를 향한 상술이 판치는 현상을 우려한다. 그리고 이 모든 현상을 ‘대중음악’을 만들고 소비하는 ‘대중’의 저급함의 탓이라고 말하려는 유혹적 시선으로 내몬다. 그러나 나는 바로 그 ‘대중’이다. 훅 송과 단순하고 따라하기 좋은 안무를 모방하면서 노래방에서, 축제에서 흥에 겨워하는 우리는 대중이다. 우리는 저급한가?

크리스토퍼 스몰은 『뮤지킹 음악하기』라는 저서에서 음악은 정체된 명사가 아니라 동사의 성격을 가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음악은 완성된 작품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만들고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능력은 천재적인 몇몇이 독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구비되어 있는 능력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산업화된 음악 문화의 요구에 묵묵히 순응해 ‘소수의 유능한 사람이 다수의 무능한 사람을 위해 음악을 생산할 자격을 부여받는다’는 논리를 받아들이면 일반인들의 음악 향유 양상은 대단히 수동적인 것으로만 해석된다는 비판이다.

음악을 향유하는 대중은 수동적이지도 않고 저급하지도 않다. 대중에게는 다양한 것을 즐기고 싶은 욕구가 있다. 우리들의 음악 창고에는 바흐의 음악도, 에디트 피아프의 음악도, 액맥이 타령도, 산울림, 노브레인, 김윤아, 드렁큰 타이거나 화나의 음악도, 원더 걸스의 음악도 담겨 있다. ‘또는’으로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로 담겨 있는 것이다. ‘텔미’를 따라 춤추며 동시에 언더 힙합 음악을 따라 하고, 동시에 바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듣고, 그러는 중 내 속에 새로운 노래를 만드는 영혼이 잉태된다.

우리의 청춘은 이렇게 뒤섞이고 어우러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기이다. 내가 들었던 산울림의 노래를 그의 책과 더불어 오늘의 청춘에 유전시키고자 한다. 음악의 DNA를 타고 삶의 진정성까지 유전되길 희망하며 말이다. 당신의 청춘도 언젠가는 간다. 당신의 질풍노도와 함께.

박민미(동국대학교 강사) /

그들이 쌓은 욕망의 성(城)[청춘의 서재]

그들이 쌓은 욕망의 ‘성(城)’[청춘의 서재]

카프카 <성>

 

길혜연(건국대학교 강사)

 

누구나 자신의 욕망을 밀고 간다

 

아이와 어른, 아직 어느 쪽에 자신을 두어야 할지 망설이는 젊은이들이 지나간다. 삶에 대한 애정과 불신이 뒤섞이고, 희망과 절망이 수없이 교차하는 표정이다. 나 같은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오늘 밤도 여전히 바쁘고 화려한 도시 속으로 사라진다. 무거운 짐을 인 택배 배달 청년이, 칼바람을 맞으며 자장면을 배달하는 젊은이가 지나간다. 내 눈엔 애처로워 보이는데 그들은 당당하기만 하다. 인생의 실낱같은 희망을 찾아 오늘도 그들은 무한히 성을 향하고, 무한히 성을 쌓아올리고 있다.

그들이 지향하는 곳, 멀리 마천루의 불빛이 찬란하게 켜진다. 일군의 불빛이 모여 하나의 발광체가 되는 순간이다. 사람들의 욕망이 얽힌 그 빛의 성전은 흡사 카프카의 ‘성’을 닮았다. 오래 바라보기에 부담스러워 고개를 돌린다. 내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카프카의『성』이라는 책 때문이 아니라, 그 책과 연관된 이십 대의 내 복잡한 심경 때문이다. 이제 젊은 날의 서재에서 이 책을 꺼내보고자 한다. 거기에 K처럼 길을 잃고 서있는 내 모습이 보인다.

힘을 가진 자는 충돌하면서 솟아오른다

 

…그는 또 앞으로 걸어나갔다. 길은 길다랗게 뻗어있었다. 마을의 큰 길은 성이 있는 산으로 통해 있지 않았다. 성이 있는 산에 가까이 접근하는 듯하면서 짓궂게 구부러지곤 했다. 어쨌든 성에서 멀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도무지 가까워지지도 않았다. 결국에는 이 길이 성으로 구부러져 들어갈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K는 줄기차게 걸어갔다. 이런 희망이나마 품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21p)

나는 스물네 살 무렵에 카프카를 읽었다. 카프카를 읽는 일은 매우 힘들고 지루한 작업이었다. 아마도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취직한 회사에서 그 즈음 실직하지 않았다면, 작가라는 직업을 동경하지 않았다면, 세계명작전집에 카프카가 섞여 있지 않았다면 그 어려운 카프카 읽기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80년대의 격렬했던 정치 상황이 지나갔지만 90년대 초반은 사회적으로 매우 불안한 시기였다. 그러나 내 또래 대학생들이 반미와 독재 타도를 외칠 때 그것에 귀 기울이기엔 내 처지가 매우 불안정했다. 실직으로 생계가 막연했고, 고졸이라는 학벌은 어디를 가나 목을 조여 왔다. 한편으로는 기술을 배워 말단 경리직원에서 번듯한(?) 의상디자이너가 되겠다는 나름으로는 현실적 꿈이 있었다. 퇴직금의 절반을 털어 복장학원에 1년 장기등록을 하고 열심히 다녔다. 나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사치였다. 유예기간인 1년 동안 꿈에도 그리던 ‘시간’이라는 것이 생겨 세계문학전집 리스트에 줄을 그으며 한 권씩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변신』과 다르게 카프카의 『성』을 읽고 있으면 길고 긴 백일몽에 동참한 듯했다. 깊은 밤, 토지 측량기사인 K는 눈에 묻힌 어느 마을에 도착한다. 그는 성으로부터의 의뢰를 받고 이 마을에 찾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성으로 들어가 성의 주인이든 하인이든 만나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일거리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간단한 일이 계속해서 꼬이고 얽히면서 K의 입성은 지체된다.

당시 세계명작전집 100권을 독파하고자 한 이유가 있었다. 기술을 배워 1년 안에 기능인이 되고 밥벌이를 해야 한다는 마음 한 켠에 대학에 가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국어국문학과에 들어가 문학 비평을 하고 싶었고, 가능하다면 작가들처럼 글을 쓰고 싶었다. 세계명작전집 읽기는 대학에 들어가 할 일을 미리 해두고자 했던 준비 과정인 셈이었다. 그리고 곧 거의 전부를 읽을 수 있었다. 『마의 산』이나 『전쟁과 평화』와 같은 장편이 힘들기는 했어도, 인내한 만큼의 정신적 보상을 받곤 하였다. 그러나 카프카의 『성』에 이르자 내 발걸음도 지체되기 시작했다.

K는 성 아랫마을에 머물면서 성에 이르는 길을 모색한다. 마을의 중심을 차지한 성은 가까이 있으면서도 마을 사람들의 두려움만큼이나 격리되고 먼 곳이다. 성의 주인인 백작을 실제로 본 사람도 없고, 책에 그가 등장하지도 않는다. K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대화와 관점 속에서 백작의 실체를 짐작할 뿐이다. 더욱 이상한 것은 마을 사람들의 이중적인 태도다. 외지에서 온 건축기사에게 호의와 호기심을 가지면서도, 경계하고 인색하게 군다. 그들의 지지부진한 대화가 끝없이 이어지면서 도저히 이성적이라고 볼 수 없는 마을 사람들과 K와의 관계가 수평으로 얽히기 시작한다.

이십대 중반의 나이는 자신이 되고 싶은 자화상과 될 수 있는 자화상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때일 것이다. 턱없는 의지와 용기가 그 사실을 무마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희망적인 자화상을 완성하기에 1년은 너무 짧은 기간이었다. 나 하나만은 성공하리라고 생각하는 수많은 경쟁자들 속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학원을 다니면서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쟁에서 살아남을 무기와 능력이 내게 없다는 사실도 씁쓸하지만 이내 깨닫기 시작했다. 책읽기에 내적, 외적 압력을 느끼기 시작한 것도 그때 즈음이다.

마블게임의 징검다리처럼 K와 성 사이에 관리들, 여관집 주인, 그의 조수로 배당된 두 명의 쌍둥이, 교사와 면장, 아말리아와 프리다 등 수많은 사람들이 점점이 자리하고 있다. 문제는 이 소설이 우리에게 익숙한 기승전결의 잘 다듬어진 스토리 구조를 취하지 않으므로 이들의 관계와 사건을 연결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진실을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사건의 중심으로 가지 않는 등장인물들의 태도와 성격, 그들의 대사 또한 집중을 방해한다. 그래서 K가 성에 들어가기 힘들듯이, 책읽기는 가다 서다 돌다를 수없이 반복하게 된다. 읽었어도 읽지 않은 기분, 처음 읽음에도 어디선가 본 듯한 내용, 독백과 서사가 교차하고, 허구와 사실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책읽기의 인내심이 한계에 이른다.

고통스럽고 좌절할 때보다, 미약하나마 어떠한 선택의 여지도 없을 때 사람들은 희망을 잃고 만다. 의상디자인 학원은 십 개월여를 견디다가 그만두고 말았다. 쉽게 포기하지 않는 성격이고, 포기해서도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나의 무능함도 무능함이었지만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았고, 결혼한 언니와 군에 간 동생에게 생계를 책임지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 대학에 입성하고자 했던 나의 욕망도, 작가가 되겠다는 나의 의지도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만다.

서로가 서로를 보호하면서 지배하는 연관 관계가 생을 주도한다. K의 의지를 꺾는 것은 관리들의 비협조와 마을 사람들의 악의, 조수들의 무능함만이 아니다. 편하고 익숙해진 마을 분위기, 주점 아가씨인 프리다와의 사랑도 그의 발목을 잡는다. 안락함을, 질서를, 권력을, 사랑을 추구하는 모든 이들의 무의식적 욕망에 의해 우리의 발걸음은 K의 여정처럼 무한히 느려질 수밖에 없다. 성으로 향하는 그 길 위에서 K가 우왕좌왕할 때, 나는 답답함과 허탈함, 심지어는 분통을 느끼며 책읽기를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그 ‘지체’의 의미, 그 거대한 ‘성’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은 훨씬 후였다.

우리는 자신의 성을 쌓을 의무가 있다

 

실존적, 종교적, 정치적 등 여러 관점과 차원에서 카프카의 『성』을 읽는 것이 가능하다는 주장은 타당하다. 그러나 이 소설이 몽환적이거나 비현실적이라는 논의만은 사실이 아니다. 이 소설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질서와 사랑 그리고 행복을 바라는 이념 너머 인간 사이에 뿌리 깊게 얽힌 현실적 삶의 부조리와 불합리성을 작가가 통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자리와 생계라는 욕망을 위해 성에 들어가고자 했던 K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지 못한 이유는 결국 성이라는 장소를 지키고자 했던 많은 이들의 욕망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즉 자신들에 대한 보호와 질서의 간절함이 ‘성’이라는 절대적 권력이 되면서 일개 건축기사의 방문을 방해하고, 그의 여정을 지체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현실적이라 함은 이 성을 향한 욕망이 어디서 어떻게 실현되느냐에 따라 곧 수직적 가족 질서가 될 수도 있고, 맹목적 사랑이 될 수도 있고, 무소불위의 국가의 힘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당장 눈앞에 먹을 것이나, 살 곳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될까하는 불안감이 우리를 바쁘게 한다. 열정이나 희열을 느낄 때보다 오히려 기쁨과 열정을 바라는 의지가 우리를 움직이게 한다. 그리고 바로 그 절박함과 간절함이 욕망을 낳는다. 각자의, 그리고 각각의 욕망은 다양하고 힘이 세다. 욕망은 사랑으로, 돈으로, 때론 지식과 명예로 둔갑하기도 한다. 욕망의 실타래는 서로 엉키면서 견고해지고, 풀리지 않을 때 더욱 단단해진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풍요와 궁핍, 불안과 희망이 계속되는 한 욕망의 성은 어딘가에서 계속 축조될 것이며, 그 욕구가 강하면 강할수록 더 크고 막강해질 것이다.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에 대해 성급히 답을 구할 필요는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 답은 K의 여정처럼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이 포기하거나 절망해선 안 되는 이유는 분명히 있다. 자신이 추구하지 않으면, 누군가의 욕망이 더 깊고, 크게 성을 구축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개인적이든 정치적이든 종교적이든 우리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그러한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이끌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카프카의 소설은 우리의 개인적인 삶이 곧 정치적인 활동이며, 사회적 행위이며, 선과 열반을 추구하는 종교적인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십 년이 지난 지금, 나는 대학을 졸업하였고, 문학이 아닌 철학을 전공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대학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성 안에 들어갔느냐고. 그러나 그 질문은 더 이상 나에게 의미가 없다. 나의 욕망은 이제 다른 쪽의 희망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하든 원치 않든 내가 추구하는 그 삶에 카프카의 유령이 질기게 나를 따라붙을 거라는 사실을 안다.

 

청춘의 부활을 꿈꾸며, 레닌 재장전![청춘의 서재]

*『레닌 재장전 : 진리의 정치를 향하여』(슬라보예 지젝, 알랭 바디우 외 지음, 이현우, 이재원 외 옮김, 마티, 2010.)를 청년들에게 소개합니다.(편집자)

청춘의 서재, 그 무기력한 나날들

내 청춘의 날들과 그 서재에는 언제나 두려움이 그늘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어리고 여린 마음에 처음 접하게 된 세상의 현실은 낯설고 두려워서 무언가를 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항상 주변을 배회하며 주저하기만 했다. 현실에 저항하는 투쟁의 현장과 현실에 안주해 승리를 쟁취하려는 성공의 길 사이에서, 그 어디에도 발붙이지 못했다.

그때 내가 선택한 방식은 그 갈림길을 끊임없이 지연시키는 일이었다. 데카르트와 후설, 하이데거로 이어지는 철학자들과의 만남은 그러한 선택의 과정을 유예하고 지연시켜주는 편리한 나름의 방식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지연된 과정은 결국 상처가 되어 항상 나를 괴롭혔다. 철학에 대한 회의, 삶에 대한 불만이 조금씩 나를 갉아먹고 있었고, 지금도 역시 ‘왜 철학을 하는가?’라는 물음으로 되돌아와 계속해서 어떤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 과연 철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전망의 상실, 진리 해체의 시대

뒤로 물러나 있던 나의 모습과 현실의 모습은 어느덧 점차 비슷해져 갔다.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열기는 자본주의를 뒤엎는 운동으로까지 연결되지는 못했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과 더불어 자본주의의 승리와 역사의 종말을 외치는 논의들이 이어졌다.

신자유주의로 무장한 자본주의의 힘 앞에서 다른 세계에 대한 전망은 상실되고, 포스트모더니즘의 물결은 모든 진리에 대한 추구를 ‘전체주의’라는 유령을 앞세워 폐기처분해 버렸다. 진리를 앞세워 세계에 대한 정치적 기획을 구성하려는 시도는 결국 현실 사회주의처럼 전체주의로 귀결되고 말 것이라는 인식이 이 시대의 일반적인 상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지금도 공산주의를 언급하면 반드시 전체주의, 독재라는 수식어를 덧붙이며 여전히 두려움과 공포심을 드러낸다. 공산주의라는 유토피아는 아름답고 그럴듯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공상일 뿐이며, 더구나 독재를 옹호하고 실현시킨 전체주의일 뿐이라는 반응이 되풀이 된다.

맑스를 접하게 되면서 철학과 실천에 대해 고민하게 됐지만, 나도 여전히 공산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언급할 때면 민감해져서 두려움과 주저함이 되살아나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아마도 맑스를 공부한다고 하면서, 정작 20세기 초반에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레닌을 참조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레닌에 대한 외면이 나만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우리는 ‘레닌’을 기억 속에서 지우고, ‘혁명’과 ‘공산주의’라는 말들을 애써 감추며, 현실에 정말 문제가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제 급진적인 전망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인정한다. 그리고는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역할에 충실한 채, 미래를 위한 준비라는 명목으로 급진성은 잠시 접어둔다. 다시 ‘그럼에도’ 분명 모두 알고 있다.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라는 선택을 통해 어느새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게 된다는 것을.

왜 다시 레닌인가?

『레닌 재장전 : 진리의 정치를 향하여』(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마티, 2010)
『레닌 재장전』을 읽으면서 내가 지닌 두려움과 불만족의 실체를 조금은 알게 된 것 같다. 우선 현실의 장벽을 돌파하는 데 뒤따를 엄청난 책임을 스스로 감당해 낼 수 없을 것이라는 무력감이 두려움으로 표출된 것이다. 또한 철학을 정치와 결합할 수 없었던 나의 무능력이 불만족의 또 다른 원인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레닌으로의 복귀’를 논하는 이 책 속에서 철학과 정치가 접합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공동 편저자인 지젝이 말하는 “레닌주의적 제스처”는 나에게 철학과 정치가 연결되는 새로운 길로 읽혀진다.

“상황에 개입하겠다는 레닌의 결단”, 즉 “필요한 타협을 하고 현실적인 요구에 이론을 맞추려는 실용주의적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모든 기회주의적 타협을 물리치고, 오직 일이관지하는 급진적 입장(이를 통해서만 우리의 개입이 상황의 배치를 바꿀 수 있는 방식으로 개입할 수 있다)을 채택한다는 의미에서”(22-23쪽) 개입한다는 레닌의 결정. 더구나 이러한 정치적 개입은 단지 현실 정치라는 흙탕물 속에 뛰어들겠다는 식의 결정은 아니다. 오히려 ‘진리의 정치’(바디우), 혹은 ‘당파성’(레닌)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전략적 개입이다.

특히 ‘철학에서의 레닌’을 논하는 이 책의 2부는 레닌이 어떻게 철학을 통해 정치에 개입해 들어갔는지를 시사해 준다는 점에서 더 관심이 간다. 헤겔 『논리학』에 대한 연구를 통해 변증법을 유물론적으로 전화하는 레닌의 접근방식은 정치에 개입하려는 철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준다. “대상의 본질 속에 자리한 모순에 대한 연구”(187쪽)인 변증법을 통해 위기의 시대를 통찰하고 구체적 상황에 개입해 들어가는 레닌의 자세는 여전히 우리가 뒤따라야 하는 길이지 않을까?

물론 우리는 레닌의 ‘전위당’ 개념이 지닌 엘리트적 모습에서 전체주의로 이어질 수 있는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권위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는 레닌의 당파성이란 결국에는 이론적 독단을 옹호하려는 장치에 불과하다고 폄하할지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나치게 순수한 입장을 정치라는 구체적 정세 속에 유지하려는 것은 아닐까? 이글턴의 말대로, “순수한 혁명에 대한 희망 속에서만 사는 사람은 결코 그러한 순수한 혁명을 보지 못할 것”(96쪽)이다.

전위와 엘리트는 다른 개념이다. “엘리트는 자기 영속적인데 반해 전위는 자기 파괴적이다. 전위는 변동이 심한 문화적, 정치적 발전 조건에서 출현한다. 전위는 이질성이 낳은 존재이다. 꼭 우월한 재능 때문만이 아니라 물질적 환경 때문에 일군의 사람들이 아직 일반적으로 명백하지 않은 특정한 현실을 ‘미리’ 포착할 수 있는 상황 또한 전위를 낳는다. 이들은 자신이 지닌 보다 특권적인 문화적 위치 때문에 전위가 될 수도 있지만, 정확히 그 반대의 이유, 곧 억압의 대상이자 그 억압에 맞서는 투사라고 하는 그들만의 경험 때문에 전위가 되기도 한다.”(85쪽)

결국 레닌이 말하는 정치는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존재하게 되는 침입”(240쪽)의 과정이며, 그의 “전략적 사유는 어떠한 사건이 일어나든 그러한 사건과의 관련 속에서 행동할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250쪽) 따라서 전위란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에 대해, 예상치 못한 일에 대해, 일어날 사건에 대해 준비하는”(241쪽) 일을 의미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아니 우리는 과연 이러한 정치를 준비하고 있는가? 다니엘 벤사이드의 다음과 같은 훈계는 지금의 우리 상황을 잘 보여준다. “레닌주의를 피상적으로 비방하는 이들은 그들 스스로는 당의 억압적 규율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주장하지만, 그럼으로써 그들은 사실 그 모든 타당성들에 대한 논의를 공허하게 만들며 의견토론의 장을 축소시켜 결국 그 어느 누구도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상황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 어떤 공동의 결정도 없이 이루어지는 자유로운 의사표현이 있은 후에 모든 사람들은 그저 원래대로 남게 될 뿐이며 어떠한 실천도 공유할 수 없기에 생성 중에 있는 반대 입장의 유효성을 검증하는 것 자체가 아예 불가능해지는 것이다.”(253쪽)

벤사이드의 말대로, “당(운동, 조직, 연맹, 당 등 주어진 이름이 무엇이건 간에)이 없는 정치란 대부분의 경우 정치 없는 정치로 귀결”될지도 모른다. 더구나 이럴 경우 철학은 “미학적이거나 윤리적인 것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결국 정치적인 것을 억압”(253쪽)하는 길로 가게 될 것이다.

레닌을 재장전하는 청춘의 부활을 꿈꾸며

아마 나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저 갈림길에서 주저하고 흔들릴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제 내 주저함의 원인을 알게 된 이상, 준비해 나갈 것이다. 이미 청춘은 무기력하게 흘러갔지만, 선택의 기회는 아직 남아있다. 그 선택을 오랫동안 지연시켜왔던 만큼 어떤 의미에서 난 제대로 청춘을 살아온 것이 아니기에, 이제야 비로소 새 청춘을 맞이할 수도 있지 않을까?

마침 내가 몸담고 있는 우리 한국철학사상연구회도 21살의 청춘이다. 물론 그 청춘의 선택이 어느 방향으로 갈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청춘이 다 지나가버리기 전에 ‘급진성’의 부활을 꿈꿔보는 것은 어떨까? 레닌 재장전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철학이 정치의 길을 열어주는 방식을 모색해 보는 것은 너무 지나친 이야기일까? 아무튼 난 레닌처럼 ‘꿈을 꾸련다. 그리고는 역시 흠칫 놀란다.’

조은평(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갈림길-노신의 글에서 나의 길을 묻다[청춘의 서재]

첫 번째 인연.

내가 처음 노신을 만난 것은 어린이 세계 문학 전집류에서였다. 세계 명작을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게 실어 놓은 것이었는데, 거기에서 만난 노신의 《아Q정전》은 12세 무렵의 나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당시 나는 이 책을 위인 이야긴 줄 알고 빼들었다가 바보짓만 일삼는 인물의 이야기임을 깨닫고 이내 내팽개쳤다. 고전을 알아보기에는 아직 어렸나 보다. 노신의 의도를 짐작하게 된 이후에도 ‘아Q’와는 여전히 서먹서먹하다.

‘강철의 노신’

틀어진 사이가 회복되기란 쉬운 일은 아니지만 리영희 교수의 중재로 노신과의 인연은 다시 이어졌다. 리영희 교수는 당시 내게 큰 감동을 주고 있었기에 그가 훌륭하다고 추천하는 노신의 책도 당연히 좋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펼쳐든 책이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였다. 노신의 잡감문(雜感文)을 엮은 이 책에서 나는 노신을 ‘멍청이의 전기 작가’가 아닌 ‘강철의 작가’로 만나게 되었다. 반어적 독설을 무기로 사회 모순에 꿋꿋한 붓끝을 펼치는 노신의 글에 나는 매료되었다. ‘강철의 정의’를 우선했던 당시의 나에게 노신은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다.

그는 수세에 몰린 수구 세력들을 ‘물에 빠진 개’에 비유하면서 그런 개는 동정할 것이 아니라 다시는 물지 못하도록 ‘두들겨 패야 한다’고 했다(‘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 ‘강철의 노신’이 던진 이 말은 나에게 반민주세력을 뿌리 뽑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고 있었던 민주화 이후의 우리 사회의 앞길을 잡아줄 나침반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나는 ‘보다 깊은 노신’을 만나지는 못했다. 노신은 기득권층에 대한 비판 못지않게 민중에 대한 회의와 비판의 소회도 밝히고 있었지만, 나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자 했을 뿐이었다.

‘희망’의 정체

‘강철의 정의’만으로는 세상이 아름다워지지 않았다. ‘굳건한 도덕’이 미래의 희망을 구현해준다고 주장할수록 사람들은 떠나갔다. 우리는 외로워졌고 절망에 휩싸였다. 사람들은 우리가 옳다고는 했지만, 함께 길을 걷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차츰 그들은 우리를 달래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어느새 ‘용서와 화합’을 이야기하는 이들로 가득했다. 나는 그들이 ‘물에 빠진 개’로 보였다. 민중은 언제나 올바른 판단을 하고, 사람들은 언제나 올바른 길을 간다는 것이 과거의 굳건한 믿음이었다.

그런데 그런 ‘민중’과 ‘사람들’은 사라지고, 어느새 내 앞에는 ‘개’들만 한 무더기였다. 독재자들만이 ‘암흑’인줄 알았더니 그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암흑’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핍박받던 어린 양들’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폭군에게 당하는 선량한 이들이기도 하지만, ‘남의 고통을 자신의 오락으로 삼으면서(‘폭군의 신민’)’ 타인을 잡아먹는 이들이기도 했다. 사람들의 꿈은 이제 ‘대한민국 1%’였고, 그들의 덕담은 ‘여러분 모두 부자되세요’였다. 그들은 독재자를 버리고 CEO를 섬기기 시작했다.

‘사람만이 희망’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는데, 그 희망은 나를 배반했다. 희망은 절망이었다는 사실에 나는 몸서리쳤다. 세상이 미웠고, 나는 온종일 화가 나 있었다. 알 수 없는 절망감에 휩싸였다. 앞길은 ‘암흑’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희망’의 허망함

사람과 삶이 온통 ‘암흑’이었던 것은 노신도 마찬가지였다. “낯선 사람들 속에서 홀로 외쳤는데 아무 반응이 없으면, 즉 찬성도 반대도 없다면 마치 끝없는 벌판에 홀로 버려진 듯 자신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른다. … 그 당시 내가 느꼈던 것은 적막이었다. 그 적막감은 하루하루 자라났고, 독사처럼 내 영혼을 감아왔다.”(《외침》중 머리말)

이 ‘적막감’이 당시 내 분노의 정체였다. 그때 문득 펼쳐 본 책이 노신의 ?고향?이었다. 거기서 노신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 내가 말하는 소위 희망이란 것도 또한 내 손으로 친히 만든 우상이 아닌가. …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대지에 난 길과 같은 것이다. 애당초 땅 위에는 길이란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나의 마음은 가라앉기 시작했다. 섣부른 희망을 지표로 하여 우상으로 삼은 것이 잘못이었다. 애당초 삶은 불인(不仁)하지도 선량하지도 않은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은 광막한 대지와 같아서 ‘불인’과 ‘선량’이라는 협소한 말로는 도저히 규정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때로는 정의롭지만 때로는 추악하다. 그래서 희망이 되기도 하지만 오히려 절망스럽기도 한 것이다.

광막한 대지에 ‘희망’이라는 길은 아무데도 없다. 가고 오는 가운데 길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가운데 수많은 길이 갈라져 나가니, 어느 길이 ‘희망’이고 어느 길이 ‘절망’이 될지는 걸어봐야 안다. 길은 길일 뿐 더 이상 ‘희망’도 ‘지표’도 될 수 없다. 오히려 걸어가면서 ‘희망’으로 삼아보기도 하는 것이다. 걷는 ‘현재’에서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할 뿐, 신기루 같은 미래의 ‘희망’이 내 걷는 행위의 지주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나는 곧게 뻗은 저 외길을 ‘희망’이라 부르며 걸어오다가, 길 없는 대지와 수많은 갈림길에 절망하고 어쩔 줄 몰라 했던 것이다. 오직 ‘강철의 길’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오직 ‘희망’일 뿐이라거나, ‘절망’의 얼굴만을 지닌 것도 아니었다.

‘암흑’의 복잡성

사람들은 단지 두려웠을 뿐이다. 경쟁에서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와중에 ‘부자’의 주문도 외우고, ‘1%’의 주문도 외우면서 ‘CEO’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 했을 뿐이다. 그것을 나는 ‘절망’이라 하고 ‘배반’이라 몰아세우며 그들의 참모습으로 고정시켰다.

나는 어떠한가? 나도 그들 사이에 ‘살아가고 있었고 살고 있다’. ‘강철의 정의’를 주장했던 나도 그 바닥에서는 ‘성공’하고 싶어 했고, ‘그곳의 1%’가 되고 싶어 했으며, 상징자본을 탐내고 있었다. 사회 비판을 통해 ‘명망의 재력’을 갖추는 것. 이러한 ‘암흑’의 욕구가 나에게도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도 그러한 ‘암흑’에서 자유롭지 않다. 나 또한 별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암흑’은 밖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 내 안에도 있었다. 돌아보니 ‘신념의 곧은 외길’은 굽이굽이 갈라진 길들이었고, 앞도 마찬가지였다. 내 갈 길은 더 이상 없어 보였다. 나는 맥이 다 빠져 주저앉았다.

노신은 이렇게 속삭였다. “묵적 선생은 갈림길 앞에서 슬피 울며 돌아섰다고 하지만 나라면 결코 울며 되돌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선 갈림길 초입에 앉아 잠시 쉬거나 한숨 자고 나서 걸어갈 만한 길을 골라 발걸음을 내딛겠습니다.”

지금은 한숨 자는 중인지도 모른다. 나아가 ‘참호를 파고 들어가 담배도 피우고, 노래도 부르고, 카드놀이와 미술전도 하면서’(《루쉰의 편지》) 내 안팎에 자리 잡은 ‘암흑’을 곰곰이 숙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전진하다가 또 한 숨 자기도 할 것이다. 여전히 두렵기는 하다. 저 아득한 어둠이, 내 안의 이 무한한 암흑이 나를 삼켜버릴 수도 있으니. 하지만 이 어둠을 응시하고, ‘암흑’을 ‘애독해 가면서’ 굳건히 살아가고자 한다. 그게 노신이 내게 준 가르침이다.

노파심에서의 사족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홀연히 나타나 사람들을 구하는 이를 구인(救人)이라고 한다. 노신은 내게 구인이다. 그러나 그가 책 속에만 있었다면 구인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삶과 나의 삶이 공명하는 연이 닿았기에 그가 구인일 수 있었다. 모든 이에게 그럴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궁하면 통하는지, 자기 삶에 위기가 왔을 때 간혹 영감을 주는 글이나 사람들이 인연을 맺는 경우들이 있다.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자기 삶을 되돌아보고 질문하는 진지한 노력 속에서 만남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참된 만남을 위해서는 나름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새로 노신의 글을 읽고자 하는 사람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반어와 냉소적인 문체, 당대의 사회적 현실에 대한 과문함이 그와의 만남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나의 마음에서 그의 심정을 짐작해 보는 과정을 조금씩 진행하다 보면, 그의 삶이 나와 공명하면서 많은 영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시간과 정성을 들였는데도 마음에 다가오지 않는 글들도 있다. 허나 인연이 닿으면 글이 절실해진다. 아직 닿지 않았을 뿐이니, 조금 더 기다려주기를. 곁을 주고 기다린다면, 언젠가는 만나기 마련이다.

단순히 ‘사회적 교제를 위한 교양’을 위해서라거나, 진보적 감흥을 잠시 보조해 주는 ‘진보에세이’로서라면, 차라리 읽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좋은 벗이 소모되는 모습을 보는 건 가슴 아픈 일이기 때문이다.

한길석(한국철학사상연구회, 충북대 강사) /

태권V,2천년 역사의 한(漢)을 풀다[청춘의 서재]

『김태권의 한(漢)나라 이야기』(비아북)를 청년들에게 소개합니다.(편집자)/

?씬 레드라인? vs. ?라이언 일병 구하기?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의 한 장면

1 vs. 100,000 즉 10만 대 1이다. 이건 도대체 무슨 숫자일까? 정확한 사실인지 아닌지 잘은 모르겠지만, 옛날 어느 선생님께 들었던 이야기다. 옛날 한국내전 즉 6.25 전쟁 때 총구에서 발사된 총알 가운데 실제로 인명을 살상하거나 상해를 입힌 총탄의 숫자가 10만발 당 ‘하나’ 라고 한다. 처음엔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숫자였다. 아마 허공에 대고 기관총을 난사했을 때 지나가던 참새 한 마리가 적중하여 떨어질 확률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도대체 전쟁 중에 어떻게 사격을 하였기에 이런 숫자가 가능할까? 하지만 전쟁의 실상을 알고 난 지금 오히려 나는 이 숫자도 과장이 아닐까 싶다. 과연 누가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정확한 조준을 하고 사격을 할 수 있을까? 조금만 생각해도 뻔히 상상할 수 있는 것인데, 왜 10만대 1이라는 숫자가 그렇게도 이해할 수 없는 비율의 숫자였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것을 실감나게 보여준 영화가 있다. 바로 ?씬 레드라인?이란 영화다.

 

우리가 흔히 보는 ‘전쟁’이란, 빗발치는 포탄과 귓가를 스치듯이 지나가는 총탄에 굴하지 않고 용감하게 돌격하는 영웅들로 가득하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주인공들이 그렇다. 병사들은 먼지 속을 군화발로 누비며 용감하게 진격해 들어간다.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적진 속에 남겨진 라이언 일병을 구하기 위해 병사들은 용감하게 돌진한다.

영화 [씬 레드라인](1999)의 한 장면

그런데 미국의 영화철학자라 불리는 테렌스 맬릭 감독의 ?씬 레드라인?의 병사들은 이와 전혀 다르다. 일본군이 점령한 고지를 계속 탈환하라는 대령의 명령에 불복하는 대위, 게다가 지휘관의 돌격 명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병사들은 엄폐물 뒤에 찰싹 누워서 고개조차 들지 않는다. 과연 어느 누가 감히 고개를 들고 죽음이 보이는 고지로 용감하게 진격해 나갈 수 있을까?

영화와 텔레비전에서 그렇게도 흔히 보았던 장면들이 실제로 얼마나 현실과 거리가 먼 것인가를 아는 것이 이렇게도 힘들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어쩌면 ‘현실’이란 아직도 보여주어서는 안 되는 그 무엇이어서 그런 것일까? ‘현실’을 보기 위해 다시 영화를 보아야만 하는 우리들의 ‘감각’이란 것이 참으로 우습기만 하다. 그런데 이런 일은 전쟁 영화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공자님은 볼 일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나는 동양 고전, 그것도 2,000년이 넘는 아주 먼 옛날의 책을 읽으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데 내가 읽는 책들은 대개가 다 고매하다. ?논어?도 그렇고, ?맹자?도 그렇고 하나같이 어쩌면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고상하게 행동하고 고상하게 말한다. 그래서 난 가끔 이런 상상을 하며 공자(孔子)나 맹자(孟子), 노자(老子)나 장자(莊子)를 속으로 조롱하곤 했다.

제후를 만나러 가서 연회 중에 화장실에 갔다가 휴지가 없어서 황당한 경우에 처한 공자, 기다랗게 늘어진 하이얀 수염이 국그릇에 빠져 꺼내어 말리느라 고생하는 노자. 이런 상상을 하다보면 결국 그들도 나와 같은 살과 뼈로 이루어진 사람이고, 우리가 늘 하는 고민을 똑같이 하며 살다간 사람이 아닐까 상상한다. 결혼한 후엔 소크라테스처럼 공자님도 부인에게 바가지 꽤나 긁히며 살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상상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이런 순진한 상상도 사실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자 당시에는 우리가 흔히 먹는 품종을 개량한 쌀이 없었다. 게다가 당시의 ‘쌀’(米)이 오늘날의 기장에 속한다는 것을 알고나서는 ‘상상’을 위해서도 상당한 정도의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도대체 그네들은 뭘 입고, 뭘 먹고, 어떻게 살았을까? 위대한 성인으로 추앙받는 공자님은 ‘볼 일’을 어떻게 해결하며 살았을까?

사실 알고 보면 우리가 고전이라 부르는 모든 것들이 다, 이런 자질구레한 것처럼 보이는 그네들의 현실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공자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모른 채 ?논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 아닐까? 거꾸로 과거 선인(先人)들의 실제 삶의 모습을 이해할 때 ?논어?든, ?노자?든 더욱 살갑고 친근하게 이해되는 것들이 아닐까 싶다.

?날아라 태권 V?에서 ?한(漢)나라 이야기?까지

어릴 적부터 만화를 즐겨 읽어 온 내게 우스꽝스런 일이 있었다. 어느 때엔 오전에, 또 어느 때엔 저녁 무렵에, 또 어느 때엔 밤늦은 시각에, 그것도 어떤 때는 체육복 차림으로, 또 어떤 때는 양복 차림으로 만화방에 들어서는 내게 어느 날 만화방 주인 아주머니가 물었다. “도대체 뭐 하는 분이세요?” 순간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이렇게 되물었다. “뭐 하는 사람 같아요? 저, 대학에서 강의합니다!”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비아북

고교 시절에는 만화방에서 생물선생님과 만난 적도 있었다. 우리는 서로 모른 척하며 페이지를 넘기는 일에 몰두했다. 이현세와 황미나는 가장 즐겨보던 만화가였다. 그렇게 만화는 살아가는 재미였고, 일상이었다. 만화를 좋아하게 된 건 어릴 적에 본 최초의 한국애니메이션 영화 ?날아라 태권 V?를 본 이후였다. 난 아직도 가끔씩 ?전자인간 337?의 삽입곡 “아람의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한다.

그러던 차에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만화를 다시 새롭게 보게 만들었다. ?조선왕조실록?은 단순한 만화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과거를 새롭게 들여다보게 만드는 하나의 창처럼 느껴졌다. 그렇다면 옛날 중국의 삶의 모습, 2천 년 전의 모습도 이렇게 눈으로 볼 수는 없을까? 대만 출신의 만화가 채지충의 만화는 왠지 억지로 꾸민 듯한 외모 때문에 상당한 이질감을 느꼈다. 비록 수준 있는 작품들이었지만 내게는 2% 부족한 그 무엇이었다.

그러나 김태권의 ?한(漢)나라 이야기?를 펴든 순간 그간의 기다림은 단순에 풀리고 말았다. 책을 첫 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마지막 장을 덮기까지, 책을 읽는 내내 눈과 손과 입술이 함께 움직였다. 넘기는 페이지마다 어느 그림 하나, 어느 대사 하나도 놓칠 수 없는 흥분과 쾌감을 주었다. 처음엔 감탄으로 읽다가 나중엔 화가 나기까지 했다. 한 젊은 만화가의 손끝에서 ‘살아 움직이는 한(漢) 나라의 역사’가 되살아나는 것을 보며, 부러움과 질투가 났기 때문이다.

김태권, 2천 년 ‘한’(漢)의 역사를 풀다

?한나라 이야기?는 기원전 238년 진시황(秦始皇)이 스무 살이 되던 해로부터 시작한다. 고대 중국의 역사서 ?사기(史記)?와 ?한서(漢書)?는 물론 제자백가(諸子百家)와 현대 역사학의 성과까지 동원하면서 김태권은 ‘권력 앞에서 개인의 고독’이라는 주제를 추적해 간다. ?진시황과 이사?를 다룬 1권에서부터 ?항우와 유방?을 다룬 2권, 그리고 ?조조와 유비?(10권)까지 다룰 예정이라 한다.

그런데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의 매력은 이런 역사를 재미있는 만화로 소개한 데에 있지 않다. “독자 여러분은 한니발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만일 영화나 그림에서 튜더 시대의 판금 갑옷을 입은 한니발이 포병부대를 지휘한다면, 여러분은 짜증을 낼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 때의 복장을 한 항우나 유방을 보아도 우리는 놀라지 않는다. 오히려 전국시대 말의 유물을 토대로 복식을 고증하면, 그게 더 낯설어 보일 것이다.” 고 하며 그 낯설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김태권은 진시황을 비롯하여 이사, 한비자, 항우, 유방 등등 출연하는 모든 인물들의 복식과 장식, 전쟁의 상황 묘사나 무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비아북

기 등 우리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을 한 나라 때의 화상석에서부터 후대의 자료까지 최대한 실증과 고증된 자료를 통해 현실감있게 보여준다. 단지 보여주는 것뿐만이 아니다. 각종 역사서와 역사 연구서를 통해 중요한 사건, 대화의 의미와 해석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이렇게 볼 때 ?한나라 이야기?는 재미로 보는 만화를 넘어서 새로운 ‘사기’, 새로운 ‘한서’, 더 나아가 새로운 ‘삼국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만화라는 장르는 이제 어린이들이나 보는 장남감이 아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같이 애니메이션 영화를 통해 새로운 작품 세계를 구축하는 예술인이 있는 것처럼, 김태권은 만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통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우리와 무관하지 않은 고대의 역사, 살과 피로 이루어져 부대끼고 싸우며 우정을 나누던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도 건조한 문자로 이루어진 역사가 아니라, 살아 숨쉬듯이 꿈틀거리는 형상들을 통해서.

?제자백가?와 갖가지 중국 고전을 만화화한 채지충의 고전만화가 있듯이, 우리에게는 조선의 역사를 비주얼로 창조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이 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제 일본인이면서 로마를 노래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가 있듯이, 한국인이지만 ?사기?, ?한서?, ?삼국지?의 세계를 새롭게 역사화하는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를 덧붙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재미는 기본이다. 아마도 소장하여 물려줄 만한 책은 이런 것이 아닐까? 특히 학업에 지친 젊은 친구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김시천(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