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완 산문집 『이제야 보이네』[청춘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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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서재’라는 말 앞에 멈춰 섰다. 청춘에게 권하는 책에 대해 글을 쓰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코너명일 테다. 그런데 이 말 앞에 한참을 멈춰 선 것은 이 말의 어색함 때문이었다. 청춘에게 ‘서재’라…

나의 청춘을 돌아 보았을 때 나의 청춘엔 ‘책꽂이’가 있었다. 편식과 잡식으로 엉성한 책꽂이였다. 도서 분류 기준표 상 고른 책, 혹은 인문, 자연, 사회 별 고른 책이 아니라 내가 당시 관심을 가진 책만 잔뜩 꽂혀 있는 책꽂이였다. 그러면서도 책 고르는 안목이 없어 어처구니없이 어렵거나 평생 가야 다시 볼 일 없는 허튼소리가 적힌 책까지 들쭉날쭉 꽂혀 있는 책꽂이였다. 정작 정말 재밌게 읽은 책은 후배의 생일에 아낌없이 선물한 결과 훗날 내가 그 책을 읽었는지 가물가물해져 추억할 건더기마저 남아 있지 않은 가난한 책꽂이였다.

그 때의 가난한 책꽂이는 결핍이라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다. 편식과 잡식을 단진동하고 책이 책꽂이에 붙박히는 날 없었던 그 가난한 책꽂이가 읽히지 않은 전집으로 채워진 서재보다 얼마나 생산력이 있었던지… 늘 비어 있다는 생각에 끝없이 새로운 주제를 찾아 나서곤 했다. 청춘에는 항상 ‘찾아 나섰다’면, 이제 달라진 것은 ‘찾아 들어온다’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것이 작고 부끄러워서 더 크고 위용 있는 것을 찾아 나섰던 나는 이제 내가 작고 부끄럽다고 여긴 것들에서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고, 그 평범, 그 통속성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지금 이 글을 통해 나는 내가 좋아했던 ‘산울림’과 대중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40살 무렵, 한 대학의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두 개의 노래를 들려준 적이 있다. 하나는 산울림의 ‘청춘’, 그리고 다른 하나는 노브레인의 ‘그것이 젊음’. 학생들은 후자의 노래는 잘 알고 있었지만, ‘청춘은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럴 줄 알고 ppt에 노래와 가사를 담아 게시했다.

‘청춘’은 내 젊음이 한창일 때 도취하여 청승스레 불렀던 노래이고, ‘그것이 젊음’은 젊음이 한풀 꺾인 40에 ‘미친 듯’고개를 흔들며 -소위 ‘헤드 뱅잉’, 혹자는 ‘헤드 뱅뱅’이라고 한다- 불러 제꼈다. ‘미친 듯’공감하며 말이다. 얼마나 공감하면 나는 정말 미친 듯 공감한다고 말하고 싶다.

지금 ‘청춘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그것이 젊음’에 그려진 청춘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젊음’속에서 젊은이들은 ‘고민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울고’, ‘아파하고’, ‘슬퍼하고’, ‘압박 받고’, ‘텅 비고’, ‘흐린 날 속에서’산다. 하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좌절을 변기에 버리고’, ‘슬픔도 코 한 번 풀고 나면 나아진다’. ‘부딪치고’, ‘타오르고’, ‘거침없고’, 맑은 날도 올 것이라 ‘희망한다’. 나도 그랬었다. 젊음 속에서 겪었던 모든 것이 이 속에 담겨 있다.

하지만 정작 나의 청춘 시절, 나는 청춘을 산울림처럼 생각했다. ‘청춘’이라는 노래의 핵심은 ‘언젠가 이 청춘이 갈 것’이라는 데 있다. 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내가 몸담고 있던 그 젊음을 ‘경과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내가 몸담고 있는 젊음 속에서 한 발 나와 ‘이 젊음도 흘러가리라’라고 헤라클레이토스적으로 생각했던 것, 그것이 내 청춘의 명상(speculation: 라틴어 ‘spect’, 즉 ‘보다’에 어원을 두어, 명상이란 곧 사태로부터 한 발 물러난 ‘관조’라는 뜻)이었다.

언젠가 산울림의 김창완이 TV 인터뷰에서 한 말이 있다. 자신이 지금도 생각하면 낯간지러운 노래 몇 가지를 지었는데, 그 중 하나가 ‘청춘’이라고 했던 것 같다. 낯간지럽다는 이유는 ‘이런 가사를 듣고 사람들이 좋아할 것을 너무 잘 알았던 것 때문’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이 인터뷰를 듣고 나서 나 혼자 명상하는 줄 알았던 착각에서 비로소 깨어났다. 착각도 때론 필요한데… 이 착각에서 깨어나기 전에 나는 사태에서 항상 한 발 물러나 있는 태도가 나로 하여금 철학을 하게 한다고 생각했었다. 여하튼 돌이켜보니, 그러면서도 실상 나는 항상 청춘에 깊이 연루되어 있었고, 나의 청춘을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불의로 가득 찬, 부조리로 가득 찬 세상을 피부로 느끼면서, 젊기 때문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피를 가지고 있었지만 젊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나의 젊음을 쓸모없다고 느꼈다. ‘출정가’, ‘임을 위한 행진곡’과 ‘불행아’사이를 하루에도 수 십 번 오갈 때, 이 분열된 의식을 어루만져준 노래가 ‘청춘’이었다. ‘그래, 이 피 끓는 시간도 이 아픈 시대와 함께 기필코 스러지리라…’라고 나를 위로했다.

한 때 민중 가요와 대중 가요를 날카롭게 가르면서, 대중 가요는 자본의 논리에 종속되어 있는 비자율적인 영역인 반면, 민중 가요는 이에 저항하는 민중의 자생적 저항 의식이 투영된 것이기에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고 여겼다. 민중 가요를 불렀던 나를 돌이켜 보면 나는 이 사회의 비리에 대해 둔감한 대중과 다르다는 의식을 깔고 노래했던 것 같다. 나 또한 ‘구별짓기’속에 있었다. 깨어 있는 민중과 잠 자는 대중. 실상 내가 불렀던 민중 가요 중에는 저항적이고 현실 비판적인 것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일반적으로 동류 집단 간 집단 의식의 제의적 확인인 ‘하위 문화’의 일환이 바로 민중 가요를 부르는 의식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민중 가요든 대중 가요든 우리 삶과 얽혀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가요 속에서 자신을 보고 느낀다. 노래를 통해 얻은 동질성 속에서 다양한 ‘하위 문화’를 형성하는 것이다. 노래방에서 선택하여 부르는 노래들, 늘 듣는 MP3에 담겨있는 노래들은 과거 어느 순간의 자신, 현재의 자신, 혹은 ‘우리 인간들’이라는 느낌을 표현해 준다. 오늘 나는 김창완의 산문집 『이제야 보이네』를 통해 내가 좋아하는 노래와 그것을 부른 사람의 삶 속에서 ‘우리 인간들’이라는 느낌이 강화되는 것을 느낀다.

김창완의 산문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어느 날 우연히 일게 된 임철순의 ‘노래도 늙는구나’라는 제목의 일련의 칼럼 덕이었다. 그는 신문사 기자 출신인데 노래와 얽힌 추억담을 진솔하게 적은 그의 글이 와닿았다. 그는 ‘애창곡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한 번도 노래하는 걸 남에게 보여 준 적이 없는 아버지와 장인’을 추억하면서 ‘어떻게 노래도 하지 않고 이 풍진 한 세상을 건너 가셨는지, 노래하지 않고 살았던 그 분들 마음속의 숨김과 감춤, 슬픔에 대해서 생각했다’고 적었다.

김창완도 그의 산문집 『이제야 보이네』에서 ‘어머니의 노래’에 대해 말했다. 김창완의 어머니는 10대엔 ‘스께가게 사스 코로라도’, ‘가고노도리’를 불렀고, 20대엔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으려고 왔던가’, ‘찔레꽃 피는 언덕’을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남편을 전장에 보내고, 이름도 짓기 전에 젖이 말라 죽은 아들을 가슴에 묻고는 ‘님께서 가신 길은 영광에 길이었기에 이 몸은 돌아 서서 눈물을 감추었소’라는 가사의 ‘님께서 가신 길을’을 부른 데에서 노래의 힘, 모진 삶의 힘과 같은 불가항력적인 힘을 느꼈다고 말한다.

김창완은 이 책의 ‘내 인생의 간판은?’이라는 글에서 자신을 스스로 ‘가수’라고 소개할 수 있게 된 것이 음반을 여남은 장쯤 발표하고 나서, 즉 데뷔 후 10년이 지나고 나서라고 고백한다. 벌써 수 십 장의 앨범을 발표한 그가 아직도 자신의 삶을 ‘제목 없는 노래’라고 칭하는 데에서 그의 자유 정신을 읽는다. 하지만 그는 ‘자유? 글쎄…’라는 글에서 자신이 자유라는 말에 대해 대단히 인색하다고 말한다. 이유인 즉슨 ‘자유의 급체’를 겪어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식을 하면 체하듯이 자유에 얹힌 경험이 있던’그는, 지금은 자유가 ‘조화로움’이라고 말한다. ‘초원을 달리는 말, 바다 위에서 바람에 몸을 맡기고 나는 갈매기’가 자유라는 것이다.

김창완의 노래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기타로 오도바일 타자, 오도바이로 기타를 타자, 타자’라는 가사가 반복되는 노래이다. 이 노래 속에는 내가 좋아하는 ‘부처’가 보이고 ‘노자’가 보이고 ‘데리다’가 보이고 ‘젊음’이 보이고 ‘자유’가 보이고 ‘놀이’가 보이고, ‘노래 그 자체’가 보인다. 그는 노래 속에서 놀고, 노래로 인해 놀고, 노래를 위해 놀고, 노래와 놀았다. ‘기타로 오도바이를 탄다’거나 ‘오도바이로 기타를 탄다’거나 모두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의미를 느낀다.

무의미의 의미를 직감하고, 서로 공감하고 있는 데에서 우리는 생각보다 넓은 의미의 세계 속에서 함께 거주한다는 것을 느낀다. 흥겨운 리듬을 타고 교환된 의미는 잘 뒤섞인다. 노래 가사의 의미가 명료하지 않더라도, 의미가 명료하지 않기 때문에 의식의 동질감을 강화시키는 것이 바로 이 노래이다. 가사가 있는데도 의미가 없을 수 있다는 아이러니를 즐기는 사람들의 의식을 대변하는 노래이다. 의미 없는 가사에서 역설적으로 의미가 발생된다는 것, 즉 고정적 의미에 반항하는 의식이 발생된다는 것을 흥겨운 리듬 속에서 느끼게 해주는 노래이다.

이 노래로 인해 또 하나의 논쟁을 떠올리게 된다. 음악이 시대와 사회를 초월해 보편적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철학, 문화를 읽다』라는 책에서 박영욱은 먼저 레너드 번스타인의 음악의 보편성에 대한 주장을 소개한 뒤, 그러나 사실은 음악이 서구를 중심으로 기보법이라든가 악기의 보편화가 이루어지면서 생겨난 서구 중심적 시선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음악 인류학적 관점의 저서인 『인간은 얼마나 음악적인가』라는 책에서 저자 존 블래킹은 서구의 음악으로부터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남아프리카 벤다 족의 음악을 연구하면서 인간은 생각보다 훨씬 음악적 존재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레너드 번스타인과 다른 논조이지만, 인간에게 있는 음악 능력으로서의 음악의 보편성에 대한 주장인 것이다. 산울림의 ‘기타로 오도바일 타자’라는 노래는 전자보다는 후자의 입장을 편드는 노래라는 생각이 든다.

대중 음악과 관련해 또 다른 오래된 논쟁 하나는 대중음악을 고급 예술과 구분되는 저급한 행태로 보는 시선 대 대중 음악을 고급 예술과 이분법적으로 구분된다는 견해를 거부하는 시선이다. 나는 산울림의 ‘사변적인’대중음악을 들으며 이러한 이분법적 구분의 무의미성을 느낀다. 최유준은 『예술 음악과 대중음악, 그 허구적 이분법을 넘어서』라는 책에서 예술 음악과 대중음악을 가르는 시선 이면에 전자는 순수한 음악이고 후자는 실용적 음악이라는 판단이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순수한 음악이란 어떤 제의적 용도, 실생활에서의 쓰임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음악의 형식적 완성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예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최유준은 순수 음악의 대명사로 기려지는 서양의 고전 음악이 사실상은 당대 귀족이나 부르주아의 계급성을 확인하고 드러내는 제의의 성격을 가진 음악이었기 때문에 결코 순수한 음악이 아니었다고 규정한다.

따라서 기존 음악을 예술 음악과 대중음악으로 나눌 것이 아니라, 자율 음악 대 실용 음악으로 나눌 것을 제안한다. 어떤 실용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음악의 형식적 완결성, 새로운 창작의 시도를 지향해 나가는 음악이라면 그것이 클래식 음악이든, 재즈이든, 힙합이든, 장르나 음악의 복잡성과 상관없이 모두가 자율 음악이며, 반면 제의적인 성격을 띠거나 특정한 실용적 목적(가령 휴대폰 벨소리 음악)에 기여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음악이라면 그 음악 형식이 아무리 복잡하고 어렵더라도 이것은 실용 음악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음악의 세계에 어떤 위계 질서나 편견을 부여하지 않으면서 음악 현상을 의미부여할 수 있는 새로운 틀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로운 논변이다.

많은 음악 평론가들이나 음악을 즐기는 청중들이 오늘날 우리의 대중음악에서 단순한 후렴
구가 반복되는 ‘훅 송(hook song)’이 만연한 현상을 개탄한다. 음악적 완성도보다는 노래하는 사람의 비주얼이 강조되는 현상 또한 개탄한다. 또한 샘플러를 통해 음악적 차용이 도를 넘어서 표절 시비가 끊이지 않는 현상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리메이크가 반복되면서 음악적 창조보다는 지속적 소비를 향한 상술이 판치는 현상을 우려한다. 그리고 이 모든 현상을 ‘대중음악’을 만들고 소비하는 ‘대중’의 저급함의 탓이라고 말하려는 유혹적 시선으로 내몬다. 그러나 나는 바로 그 ‘대중’이다. 훅 송과 단순하고 따라하기 좋은 안무를 모방하면서 노래방에서, 축제에서 흥에 겨워하는 우리는 대중이다. 우리는 저급한가?

크리스토퍼 스몰은 『뮤지킹 음악하기』라는 저서에서 음악은 정체된 명사가 아니라 동사의 성격을 가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음악은 완성된 작품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만들고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능력은 천재적인 몇몇이 독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구비되어 있는 능력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산업화된 음악 문화의 요구에 묵묵히 순응해 ‘소수의 유능한 사람이 다수의 무능한 사람을 위해 음악을 생산할 자격을 부여받는다’는 논리를 받아들이면 일반인들의 음악 향유 양상은 대단히 수동적인 것으로만 해석된다는 비판이다.

음악을 향유하는 대중은 수동적이지도 않고 저급하지도 않다. 대중에게는 다양한 것을 즐기고 싶은 욕구가 있다. 우리들의 음악 창고에는 바흐의 음악도, 에디트 피아프의 음악도, 액맥이 타령도, 산울림, 노브레인, 김윤아, 드렁큰 타이거나 화나의 음악도, 원더 걸스의 음악도 담겨 있다. ‘또는’으로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로 담겨 있는 것이다. ‘텔미’를 따라 춤추며 동시에 언더 힙합 음악을 따라 하고, 동시에 바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듣고, 그러는 중 내 속에 새로운 노래를 만드는 영혼이 잉태된다.

우리의 청춘은 이렇게 뒤섞이고 어우러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기이다. 내가 들었던 산울림의 노래를 그의 책과 더불어 오늘의 청춘에 유전시키고자 한다. 음악의 DNA를 타고 삶의 진정성까지 유전되길 희망하며 말이다. 당신의 청춘도 언젠가는 간다. 당신의 질풍노도와 함께.

박민미(동국대학교 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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