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회원들의 철학적 책읽기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2월 월례 발표회 영상 “동학 공동체의 두 지향과 공(公) 의식 – 최제우와 최시형의 보국과 안민을 중심으로”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2월 월례 발표회 “동학 공동체의 두 지향과 공(公) 의식 – 최제우와 최시형의 보국과 안민을 중심으로”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상반기 4차례의 월례발표회는 ‘한국근현대사상의 지평’이라는 대주제로 개최될 예정입니다. 동학과 대종교 등의 종교사상, 한국철학의 보편성과 특수성, 한국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의 자기화 과정 등이 발표될 예정입니다.

주 제 : “동학 공동체의 두 지향과 공(公) 의식 – 최제우와 최시형의 보국과 안민을 중심으로”

발표자 : 진보성(한국방송통신대학교)

토론자 : 송인재(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일 시 : 2022년 2월 24일(목) 오후 4~6시

장 소 : 온라인 줌 회의실

 

유튜브 링크 : https://youtu.be/1QCwlGMdknI

<‘메타버스’ 급부상하는 신개념 가두리> – 이광석의 『피지털 커먼즈』(갈무리, 2021) 서평 [철학자의 서재]

<‘메타버스급부상하는 신개념 가두리>

 

손보미(다중지성의 정원)

 

올해 국내 구글 사용자가 가장 많이 찾은 검색어는 ‘로블록스’였다고 한다. 로블록스는 주식회사 ‘로블록스 코퍼레이션’이 제작하고 배급하는 온라인 게임의 이름이다. 그런데 위키백과에 정리된 이 게임에 대한 설명이 흥미롭다. “로블록스는 사용자가 게임을 프로그래밍하고, 다른 사용자가 만든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온라인 게임 플랫폼 및 게임 제작 시스템이다.” 로블록스 코퍼레이션은 엄밀히 말해 온라인 게임을 만드는 회사라기보다는 온라인 게임을 만들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드는 회사이고 따라서 ‘로블록스’도 온라인 게임 플랫폼의 이름인 셈이다.

구글 코리아의 검색어 순위 발표에 이어, “어서 학원 가서 게임 배워야지”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기사도 떴다. 기사의 주요 내용은 ‘로블록스’에서 아이들이 게임을 제작하는 법을 가르치는 학원과 수강생이 늘었다는 것이다. 이 기사는 로블록스를 ‘게임계의 유튜브’라 칭하며 로블록스 코퍼레이션의 주식이 올해 ‘메타버스 대장주’로 불렸었다는 사실로 앞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로블록스를 검색하고 또 이 플랫폼에서 게임을 제작하는 기술을 배우려는 이유는 다양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각각의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먼저 이 책 『피지털 커먼즈』부터 펼쳐봐야 할 것 같다. 책에 따르면, 현재 특정 기업들의 이름으로 주목받고 있는 온라인 플랫폼은 자본의 가두리치기(인클로저)용 장치들이다.

 

“오늘 ‘메타버스’라 불리는 기술문화 차원의 신생 공간은 또 다른 기술 세례와 축복에도 불구하고 바로 피지털계의 본격적인 인클로저를 알리는 서곡으로 볼 수 있다.” (7)

 

<‘온라인 플랫폼달콤한 신개념 가두리>

 

저자는 신개념 인클로저 장치인 온라인 플랫폼을 양봉장에 비유한다.

 

“플랫폼은 입주자와 이용자에게 차별 없이 놀 자리를 깔아 주고 각종 서비스까지 무료로 제공하는 듯 보인다. 이들 입주자와 이용자 누리꾼은 마치 플랫폼에서 꽃밭 속 꿀벌처럼 자유롭게 데이터를 생성하고 주고받으면서 ‘화분’과 꿀 채집 활동을 한다. 누리꾼은 형식상 자유로워 보이지만, 내용상 플랫폼 임차인에 가깝다. 그날그날 본능에 이끌려 꿀을 채집해 플랫폼 벌통에 채우는 일벌과 같다.” (25)

 

공통의 에너지와 부를 기업의 이윤으로 둔갑시키기 위해 세계 곳곳에 가두리를 치는 일이 물론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과거와 지금의 다른 점은 그 포획 방식이다. 전통적인 형태의 작업장에서는 그야말로 고통스럽고 억압적인 생산공정을 통해 착취가 이루어지는 데 반해서 신개념 작업장은 마치 양봉자가 벌통으로 꿀벌을 유혹해 수확물을 거둬들이듯, 플랫폼 앱 장치를 통해 일꾼들을 유혹해 억압 없이 자발적 노동을 끌어낸다.

온라인 플랫폼에서의 노동은 어떤 경우에는 심지어 즐거운 놀이와도 같아서 『제국의 게임』의 저자 다이어-위데포드는 이를 ‘놀이노동’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꿀벌이 꿀을 모으는 일이 애초에 양봉장 주인에게 돈을 벌어다 주기 위한 노동이 아니듯이 현재 온라인 플랫폼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활동들, 심지어 놀이라고 불릴만한 즐거운 활동들도 애초에 기업 주주들에게 이윤을 안겨주기 위한 노동이 아니다. 여기에 달콤한 신개념 가두리의 핵심이 있다. 지금 활발히 작동 중인 신개념 인클로저 장치인 온라인 플랫폼 기업들은 수많은 유인책을 통해 놀이를 포함한 생명의 다양한 활동들, 심지어 생명 활동 그 자체를 자본주의적 노동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해졌을까?

 

<데이터 사회>

 

책의 표제어로 쓰인 ‘피지털’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를 표현하는 말이다. ‘피지컬’(물질)과 ‘디지털’(비물질)이 혼합된 지금의 현실을 ‘피지털’이라 부르고 이러한 특성이 도드라지게 나타나는 세계를 ‘피지털 계’라 부른다. 그런데 ‘피지털’ 그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문제는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가 이 피지털 계에 가두리를 치고 우리의 생명 활동을 자본주의적 노동으로 변질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 자본주의는 플랫폼이라는 장치를 통해 … 인간 산노동은 물론이고 인간 의식과 생체리듬의 데이터 활동을 사유화된 가치 체제로 흡수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6)

 

자본은 무엇 하나 평등하게 자율적으로 작동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피지컬과 디지털이 혼합된 피지털 계가 자본주의를 만나면 디지털 세계의 기술 논리로 피지컬 세계의 지형과 배치를 좌우하는 데이터 사회가 된다.

산업사회는 인간의 피지컬 에너지(물리적 힘)가 자본주의의 주요 동력원으로 포획되는 사회였다면, 데이터 사회는 인간의 피지털 에너지(물리적, 인지적 힘)가 주요 동력으로 포획되는 사회다. 즉 데이터 사회는 자본주의에 의해 왜곡된 피지털 계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러한 데이터 사회, 즉 디지털로 피지컬을 지배하는 왜곡된 피지털 질서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현 질서를 향한 강한 문제제기와 함께 새로운 피지털 질서를 만들기 위한 다양한 실험과 실천들이 필요하다. 이러한 대안 실천들을 통칭하는 이름이 바로 ‘피지털 커먼즈’다.

 

<피지털 커먼즈>

 

자본주의의 플랫폼 장치들을 통해 왜곡된 피지털 질서는 20세기말 한때 디지털 혁명으로 크게 번성했던 지식 공유의 디지털 전통을 빠르게 쇠퇴시키고 있다.

 

“동시대 플랫폼 질서는 무한 복제, 비경합성, 한계비용 제로, 익명성 등 아이디어와 지식 공유의 디지털 전통과 크게 배치된다. 영원히 ”자유롭고자 하는“ 디지털 정보의 본성은, 인류의 잠재적 창작의 원천이 되고 복제와 공유를 독려하면서 디지털 ‘자유문화’를 확장하지 않았던가” (95)

 

저자는 플랫폼 자본주의에 저항하고 대안을 고민할 필요를 역설하며 정부와 기업의 과도하고 무차별적인 데이터 수집과 활용을 제한할 수 있는 시민사회의 요구와 감독이 그 시작점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수집된 데이터에 대한 오, 남용을 막기 위해 다중 스스로 펼치는 문화정치 전술 또한 중요한데 대표적인 예로 핵티비즘(데이터 행동주의)이 있다.

데이터 행동주의는 기술시장 논리에 의해 몇몇 소수의 손아귀에서 자본의 구미에 맞춰 이용되고 있는 데이터를 원래 그 데이터의 주인들이 볼 수 있도록, 또 그 데이터들이 다른 질서 속에서 이용될 수 있도록 만천하에 공개하는 활동이다.

 

“‘스노우든 아카이브’는 캐나다 기자, 대학, 시민단체의 공동 연대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이는 글로벌 시민 다중이 언제든 권력의 기록에 접근해 검색하고 데이터를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든 공통의 지식 커먼즈가 되었다.” (98)

 

<피지털 커먼즈는 생태 커먼즈>

 

자본의 인클로저의 다른 이름은 생태계 파괴다. 물론 지금 피지털 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클로저도 마찬가지다.

플랫폼 기업들은 자유롭게 확산하고 다양하게 펼쳐져야 할 비물질적 에너지들을 데이터의 형태로 사로잡아 빅데이터라는 이름으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데이터 센터에 가둬두고 있는데 이 를 유지하는 데에도 엄청난 에너지가 든다. 얼마 전에 구글은 이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데이터 센터를 바다에 집어넣는 실험을 했다. 한 플랫폼 기업의 비용을 줄이기 위해 뭇 생명이 사는 터전인 바다에 뜨겁게 달아오른 거대한 쇳덩이인 자본의 수장고를 집어넣은 것이다.

지금의 플랫폼 기업들은 생태계의 파괴를 더 많은 이윤 추구의 기회로 삼고 있기도 하다. 공기와 땅과 물이 오염되어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없는 그래서 슬퍼야 마땅한 현실이 로블록스 코퍼레이션의 입장에서는 아이들을 더 오랫동안 게임 플랫폼의 세계에 붙잡아 둘 수 있는 기쁜 현실이 된다.

따라서 디지털 사회를 넘어설 대안적 실천을 조직하는 일은 곧 자본의 생태계 파괴에 저항하는 일이기도 하다. 오늘날, 기후 위기로 대표되는 생태계 문제에 관한 관심 없이는 피지털 커먼즈 운동도 성공할 수 없다. 따라서 피지털 커먼즈는 곧 생태 커먼즈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적 피지털 질서는 디지털 기술로 피지컬을 지배하는 질서다. 이를 넘어서려면 디지털 기술로 피지컬을 지배하는, 즉 착취하고 수탈하고 결국 죽이는 질서가 아닌 살리는 질서가 필요하다. 이에 저자는 ‘생태/공생 지향의 기술 체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생명 존중 없는 혁신 논리는 생태/공생 지향의 기술 체계와 어울리지 않는다. 위태로운 생태 약자들을 중심에 둔 공생기술 전망이 필요하다. 물론 그 시나리오에는 인간 중심의 지구 구출 시나리오를 넘어서 자본주의 현실에서 타자화된 인간 종을 비롯해 동물, 기계종, 돌연변이, 자연사물 모두를 살리는 공생공락의 차이 속 연대가 요구된다.” (377)

 

목초지에 울타리를 세우고, 강에 댐을 만들고, 갯벌을 메워 공장을 짓고 또 자유로운 디지털 세계에 자본주의적 양봉장이 들어설 때, 자율적인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모든 활동이 자본을 위한 노동으로 전락해 생명을 강탈당하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디지털 꿀통 걷어차기>

 

피지털 계는 인간의 감각을 바꾸었다. 각종 디지털 기기와 결합한 인간은 감각과 인식의 확장 속에 있다. 관건은 이 확장이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이다. 인간 중심적 사고를 넘어 다양한 객체들과 민주적인 힘을 더욱 확장하는 길로 나아갈 것인가, 혹은 피지컬의 한계를 넘어 무한히 확장하는 ‘인간’ 의식 속에 모든 걸 가둬버릴 것인가.

로블록스 플랫폼에서 게임을 만드는 이들은 과연 어떤 확장 속에 있을까. 당연히 후자이지 않을까? 물론 우리의 삶 곳곳에는 늘 우연적인 만남이 존재하고, 그 어떤 척박한 곳에서도 예상치 못한 마주침으로 전혀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 하지만 그런 순간들을 칭송하며 기다리기만 하기에는 우리에게 그리 많은 여유가 주어져 있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심각한 생태 재앙 속에 있다. 지금 당장 이곳에서, 디지털 꿀통이 선사하는 일시적인 안락함과 즉각적인 쾌락들을 단호히 거부할 수 있는, 그 꿀통을 미련 없이 걷어차고 성공적으로 걷어치워 버릴 수 있는, “다른 삶과 범 생명 공존의 기획”을 만들어야 한다. 모든 방법으로 모두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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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응하는 사물’은 또 다른 세계를 태동시킬 수 있을까?- 스티븐 샤비로의 『사물들의 우주』(갈무리, 2021) 서평 [철학자의 서재]

‘감응하는 사물’은 또 다른 세계를 태동시킬 수 있을까?

– 스티븐 샤비로의 『사물들의 우주』(갈무리, 2021) 서평

 

주요섭(밝은마을_생명사상연구소)

 

아마도 ‘사물들의 우주’ 이전에는 ‘인간들의 우주’가 있었을 것이다. 아니다. ‘인간들의 우주’ 이전에도 ‘사물들의 우주’는 엄존했을 것이다. 그렇게 ‘사변’된다. 다시, 아니다. 인간들의 우주 역시 사실은 사물들의 우주였을 것이다. 사물들의 우주는 문득 ‘인간이라는 사물’을 출현시켰고, 인간들의 우주라는 착시가 있긴 하지만, 인간이라는 사물도 다른 사물들이 그렇듯이 문득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티븐 샤비로의 사고실험, 혹은 철학적 SF는 결이 조금 다르다.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샤비로는 사변적 실재론의 허무주의적 편향에 대응해 ‘또 다른’ 사변적 실재론을 탐색한다.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짧지 않지만, 결론은 명쾌하다. 그 이름은 ‘사변적 미학’이다(279). 세계는 인간의 인식과 관계없이 ‘비-상관적으로’ 실재하되, 그것은 단지 무정(無情)한 물리적 실체가 아니다. 유정(有情)한, 마음이 있는 사물들의 그물망이다.

 

감응하는 우주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40년 전 1982년, 장일순과 김지하를 비롯한 원주캠프는 ‘생명의 세계관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을 제안하는 이른바 ‘생명운동에 관한 원주보고서’를 세상에 내어놓았다. 그리고 인간 중심 세상에서 생명 중심 세상으로의 대전환과 생명운동으로의 사회운동의 대전환을 선언한다. 생명운동의 관점에서 이제 세계는 ‘생명들의 세계’다. 이를테면, ‘생명들의 우주’다. 물론 이때 생명이란 인간이나 고양이와 같은 유기체만이 아니다. 풀 한 포기와 돌멩이도 살아있는 존재들이다.

나에게 ‘사물들의 우주’라는 책은 무엇보다 ‘감응하는 우주’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물의 ‘내적 경험’이라는 표현에서 감이 왔고, 범심론(pan-psychism)에 대한 긴 소개에서 나름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때 감응(感應)은 흔히 정동(情動)으로 옮겨지는 affect의 번역어이기도 하지만,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 널리 사용된 ‘기(氣)의 감응’, 혹은 천인감응(天人感應)의 그 감응이다. 또한 19세기 말 동학에서의 ‘내 마음이 네 마음(吾心卽汝心)’이라는 한울님과의 감응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또한 생명운동의 관점에서는 생명세계의 소통형식으로서의 감응이기도 하다.

샤비로는 화이트헤드를 빌려 감응하는 사물의 사밀성, 즉 ‘사물의 숨겨진 내면적 삶’(77)을 강조한다. 사물들은 인간과 관계없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사물들은 서로 교감하며 스스로 진화한다. 넷플릭스 영화 ‘문어이야기’가 떠오른다. 문어이야기의 화자는 “문어와의 경계가 사라졌을 때 아름다움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렇다. 감응의 아름다움이다. 감응은 인간과 문어와의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문어를 둘러싼 바닷속 생태계가 곧 또 하나의 감응하는 우주다.

데카르트식으로 말하면,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감응’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나’도 ‘너’도 ‘그’도 감응함으로써 살아있다. 햇볕과 바람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 이전에 햇볕을 쬐고 공기를 마시는 덕분에 살아있다. 감응은 비-의식적이다. 여성들의 월경이 그렇듯이 달을 의식하지 않아도 신체는 달과 감응한다. “달에 대한 나의 파악은 표상이 아니라 원격접촉이다”(216). 서로의 내적 삶을 몰라도 서로 영향을 미친다. 인간은 자신의 내적 경험에 접근할 수 없다. ‘나’도 ‘나’를 알 수 없다. 인식 이전에, 신체와 신체 사이 신체와 사물들 사이에서 비-의식적인 감응이 계속되고 있지만, 나는 알아차릴 수 없다. “나는 내가 원리상 알 수 없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178) 저자가 화이트헤드를 빌려 말하고 있듯이, “의식이 경험을 전제하는 것이지, 경험이 의식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다.”(150).

 

범심론: 사물에도 내적 경험이 있다

 

그렇다. 샤비로의 ‘사물들의 우주’란, 다시 말하면 ‘감응하는’ 사물들의 우주다. 그리고, 그것은 사물들의 내적 경험과 내적 변화를 의미한다. 인간은 사물들의 내적 경험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실재는 경험적이다(155). 키워드는 ‘경험’이다. 감응하는 사물을 샤비로의 언어로 말하면, ‘경험’하는 사물인 셈이다. 저자는 화이트헤드를 빌려, 그리고 윌리엄 제임스를 인용해 단언한다. 프로토타입은 ‘경험’이다. “모든 존재는 내재적으로 무언가를 경험한다. 존재는 곧 경험이다.”(150)

그러나 이때 경험은 물질적이다. 에너지적이다. 저자는 스트로슨(2006)을 인용해 이렇게 말한다. “모든 물리적 소재는 그게 어떠한 형태라도 에너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에너지는 현상을-포함하는-경험이다.”(189) (그런데, 신학자 떼이야르 드 샤르뎅도 자신의 주저 『인간현상』에서 사물의 내부를 이야기한다. “사물은 내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범심론으로 이어진다. 샤비르에게 범심론은 “현상적인 경험을 실체화하거나 근절시키지 않고 그 자명함을 존중하는 데에 뒤따르는 필연적 귀결이다.”(189. 강조는 저자.) 범신론(Pan-psychism)의 ‘범’(Pan)이란 접두사가 그렇듯이 사밀성과 관계성을 인간에게만이 아니라, 온 우주의 사물에 적용하는 것이다.

생명의 감각으로도, 생명운동의 관점에서도 범심론은 자연스럽다. 생명사상을 정초한 시인 김지하는 생명의 핵심적 특징을 (다양성, 순환성, 관계성과 함께) 영성이라고 꼭 집어 말한다. 이때 영성은 인지적 마음, 감성적 마음과 구별되는 생명의 보편적 마음이다. 우주의 마음이다. 이때 마음은 생각하는 마음이 아니라, ‘느끼는 마음’이다(화이트헤드). 인간과 비인간, 생명과 비-생명을 아우르는 ‘감응하는 마음’이다.

2012년 어느 강연에서 시인 김지하가 생태학과 녹색당의 한계를 언급한 바 있다. 요점은 생태학과 녹색당에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객관적 관찰만 있을 뿐 존재의 내적 경험에 대한 사유가 없다는 것이다. ‘사물들의 우주’의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모든 존재가 외면과 내면을, 일인칭 경험과 관찰가능한 삼인칭 성질을 가지고 있다”(193)고 말할 수 있는데 말이다. 생태와 녹색의 사유는 오늘날 기후변화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보여지듯이, 내적 경험의 세계가 아니라 외적 관찰의 결과로만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기후위기 대응의 한계로 드러날 수도 있을 것이다.

존재론적 전환의 시대, 범심론적 사변은 역설적으로 대전환의 키워드가 될지도 모른다. 스티븐 샤비로는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는 두 개의 탈출구 중에서 허무주의를 야기하는 ‘가차 없는’ 객체적 실재론이 아닌, 사물들의 가치경험을 통해 존재의 평등성이 인정되는 범심론적 실재론을 제안한다. 샤비로의 표현을 빌자면, 카나리아, 미생물, 원자 등의 사태와 같은 지평 위에 인간의식을 위치시켜야 하는 것이다.

 

사변적 실재론은 또 다른 세계를 태동시킬 수 있을까?

 

오늘날 인류는 명실상부 문명사적 대전환기에 직면해있다. 팬데믹과 기후변화 때문만이 아니다. SF영화들은 포스트 휴먼와 트랜스 휴먼의 세계, 혹은 ‘인간-외계인들의 우주’를 도래할 현재로 보여준다.

최근 나의 키워드는 파국과 태동이다. 오늘날 팬데믹-기후위기의 경험에서 볼 때, 파국적 이행(Catastrophic transition)은 불가피하고, 그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또 다른 세계들이 태동하고 있다는 기대 혹은 예감이다. 그리고 그 태동을 촉진하는 것을 정동적 서사들이다. 새로운 세계관 설정이다. 나에겐 샤비로의 『사물들의 우주』도 또 하나의 서사 혹은 세계관이다. 그 스스로도 그의 사변이 과학소설에 가깝다고 인정한다. 그렇다면 그의 ‘사변’은 파국적 현실 속에서 새로운 세계들을 태동시키는 촉매가 될 수 있을까?

사변적 실재론은 언어적 전회를 경과한 사유이다. 구성주의를 통해 인식론적 장애물을 넘었기에 존재론적 백가쟁명을 가능하다는 말이다. 앞으로도 수많은 존재론적 사변들과 사고실험들과 환상적 이야기들이 제출될 것이다. 아직은 알 수 없다. 저자가 제시하고자 하는 ‘사변적 미학’ 혹은 미학적 실재론이 또 다른 세계의 태동을 격발시킬 수 있을까? 토끼와 호랑이와 인간과 천지만물이 함께 춤추는 오랜 꿈을 실현시킬 수 있을까?

그런데 현실은 훨씬 치열하고 절박하다. 또 다른 세계의 태동은 매우 실존적인 과제이다. 그러므로 묻지 않을 수 없다. 범심론적 실재론이 생물 종들의 속절없는 소멸을 완화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을까? 불평등을 넘어서 극단적으로 이원화된 인간사회 내부의 소멸과 격리와 파괴를 전환시킬 수 있을까? 사물들의 민주주의를 발명해낼 수 있을까?

그렇다. 실재론적 사상기획의 사회적 효능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대선판의 한국사회, 사상기획들의 존재 여부를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 〈사물들의우주〉-보도자료 ‘클릭’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신년회 특강 영상: 최종덕 – “면역학의 철학과 코비드-19 이후” (2021년 1월 13일)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신년회 특강

 

주제: 면역학의 철학과 코비드-19 이후

발표: 최종덕(한철연 회원, 상지대 교양학부 명예교수, 독립학자)

일시: 2021년 1월 13일 오후 7시~

장소: ZOOM 온라인 회의

 

2021년도 발표입니다. 당시 사정으로 게재하지 못했다가, 뒤늦게 게재합니다.

여전히 지속되는 2022년 코로나 시국에 시의적절한 내용으로 구성된 강연입니다.

 

출처: 한철연 유튜브 채널 https://youtu.be/E0cmXdcS-H4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가을 제61회 정기학술대회 영상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가을 제61회 정기학술대회

– 주제: 《입장들: 정치경제론, 노동, 사유》
– 일시: 2021년 12월 4일 토요일 오후 1시
– 장소: 온라인(Zoom)방식으로 진행

《입장들 : 정치경제론, 노동, 사유》라는 흥미로운 주제 아래 3인의 발표와 3인의 논평이 준비돼 있습니다.
모든 발표 및 논평이 끝난 후에는 종합 토론 시간이 있습니다. 이후에는 제8회 소송학술상 시상식과 총회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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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대회 순서 –

개회사: 연효숙 회장(연세대)
개회사: 김교빈 이사장(성균관대)

1부 논문발표 – 사회: 서영화(서울대)
– 발표1 – 김광호(서울시립대): 루소의 정체경제론
– 논평1 – 조은평(상지대)
– 발표2 – 이관형(정치경제연구소 대안): 노동 없는 노동자의 사회
– 논평2 – 조배준(건국대)
– 발표3 – 한길석(중부대): 아렌트의 사유와 도덕
– 논평3 – 남기호(연세대)

2부 종합토론 – 사회: 강지은(서울시립대)

3부 소송학술상 시상식 및 총회 – 사회: 박지용 연구협력위원장(경희대)
– 수상작:
「슈티르너의 ‘변신'(Metamorphose) 비판의 의미」 – 박종성 회원 / ‘『시대와 철학』 제31권 3호’ 수록 논문
「Stirner’s The Meaning of Criticism of “Metamorphose”」 – Park Jongsung
– 시상식 및 총회
– 폐회사: 연효숙 회장

 

• 자료집 다운로드 : http://www.hanphil.or.kr/board04/view.asp?key=8

• 유튜브 링크 : https://youtu.be/yD34zqrykkI

 

한국철학사상연구회 11월 월례발표회 후기 “『정신현상학』의 도덕적 세계관”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11월 월례발표회 후기

 

주제 : 『정신현상학』의 도덕적 세계관

발표자 : 남기호(연세대학교)

토론자 : 이석배(세종대학교)

일시 : 2021년 11월 5일(금) 오후 3시~5시

장소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의실(서교동 태복빌딩 302호)

 

후기: 정선우 (한철연 회원)

 

 

헤겔의 칸트 비판은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마치 철학사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을, 또는 스피노자가 데카르트를 여러 방면에서 집요하게 비판하는 것과 유사하게, 헤겔은 끊임없이 칸트를 염두에 둔 채 자신의 논의를 이어가는 듯하다. 특히 칸트적 도덕에 대한 헤겔의 비판은 비록 명시적인 형태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것의 실현 불가능성과 실천 불가능성에 방점을 찍은 채 행해진다. 바로 이 점이 한철연 11월 월례회에서 “『정신현상학』의 도덕적 세계관”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남기호 선생님(이하 발표자) 논의의 핵심을 이룬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발표자가 누차 강조하듯이 헤겔의 이러한 비판이 직접적으로 칸트의 이론에 대한 반박을 함축하는 것이 아니라, 칸트적 도덕이 세계에 전면화되고 일반화됐을 때의 모순적인 지점들을 지적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즉 칸트 이론에 대한 체계적인 비판의 성격보다는 일종의 세계관으로서의 칸트적 도덕이 그러한 세계관에 따라 살아가는 행위자들에게 어떤 모순과 난점을 일으키는지를 문제 삼는 성격의 논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칸트의 텍스트에 입각해 헤겔의 비판에 대응하려는 시도는 칸트주의자 입장에서 정당하고 타당할 수 있지만, 헤겔의 논의 성격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우리가 묻고 따져야 할 것은 다음과 같다:

어째서 헤겔은 칸트적 도덕이 세계관으로 정립된다면 그 세계관이 행위자들에게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고 여겼는가? 이에 대한 발표자의 상세한 설명 가운데, 나는 자유와 자연의 조화, 또는 도덕법칙과 자연법칙의 조화의 문제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는 구체적으로 우리 자신의 도덕적 행위를 통해 자기의식의 주관적 목적(곧 의무로서의 도덕성)과 세계의 객관적 목적(곧 결과로서의 행복)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와 관련된다.

헤겔이 문제 삼는 칸트적 세계관에 따르면, 이러한 조화는 현실에서가 아니라 현실의 피안에서만 실현되고 달성될 수 있다. 이러한 조화는 무한히 지연되기 때문에 어떠한 현실성도 획득하지 못한 채 오히려 역설적으로 부조화로 귀결될 뿐이다. 게다가 이러한 모순을 은폐하고 위장하기 위한 (발표자가 Verstellung의 역어로 선택한) ‘시치미떼기’가 등장한다.

먼저 도덕법칙과 자연법칙의 요청된 조화가 도덕적 행위 안에서 언제나 비현실적이라는 점을 시치미 뗀다. 나아가 요청된 조화를 도덕적 행위를 통해 달성하기 위해서는 결국 도덕적 행위 자체가 지양돼야 한다는 점을 시치미 뗀다. 어째서일까? 여기서 헤겔 특유의 재치 있는 설명이 빛을 발한다. 도덕법칙과 자연법칙이 조화를 이루려면, 도덕법칙이 그 자체로 자연법칙이 돼야 한다. 즉 자연이 늘 도덕법칙에 부합해야 한다. 이로써 도덕적 행위 자체가 불필요한 상황에 이른다. 도덕성에 반하는 그 어떤 것도 없는데, 도덕적 행위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자연필연성에 따른 모든 행위가 전적으로 도덕적 행위와 일치하는데, 도덕성의 추구가 어떤 의미를 지니겠는가? 이처럼 도덕은 도덕의 폐지를 궁극 목적 내지 최고선으로 삼는 바, 칸트적 세계관은 그 자체로 모순을 함축한다.

위에서 살펴봤듯이 이 궁극의 목적, 내지 최고선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아득히 먼 곳에 위치한 것이므로 행위자들의 현실적인 행복은 충족되지 못한 채로 남아 있다. 결국 칸트적 세계관에 입각해 살아가는 행위자들은 도덕적 행위를 위해 행복을 결코 고려해서는 안 되지만 동시에 도덕적 행위와 그 행위의 결과로서의 행복의 조화를 영원히 추구해야만 하는 처지, 곧 상반된 요구들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에 이른다. 따라서 발표자는 강조한다: “도덕과 자연, 이성과 감성 등은 ‘지금 여기의 이’ 현실 속에서 통일적으로 사유되지 못한다. 이 의식[칸트적 세계관을 지닌 의식 – 작성자 추가]은 그저 아득한 피안의 통일을 표상하며 정작 자신의 현실 속에서는 행위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할 뿐이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10월 월례발표회 영상 “‘K-철학’은 가능한가?”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10월 월례발표회

이번 월례발표는 상지대학교 교양대학 김시천 선생님이 『東洋哲學』 제55집(2021. 7.)에 게재한 논문 「’K-철학’은 가능한가?」의 내용을 중심으로 진행합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10월 월례발표회

주제 : ‘K-철학’은 가능한가?
발표 : 김시천(상지대학교)
토론 : 진보성(한국방송통신대학교)
일시 : 2021년 10월 20일(수) 오후 4시 ~ 6시
장소 : 온라인 줌 회의실

 

♦ 발표 논문 다운로드 : 2021.10.20 김시천[동양철학]_제55집_2021_K-철학은가능한가

 

유튜브 링크 : https://youtu.be/znByiBE7O8k

한국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9월 월례발표회 영상 “아렌트, 뢰비트, 요나스, 마르쿠제가 바라본 하이데거”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9월 월례 발표회

최근 출간(2021년 3월 5일)된 서영화 선생님의 번역서 『하이데거, 제자들 그리고 나치』를 중심으로 서영화 선생님의 발표를 진행하고 박지용 선생님의 토론이 이어집니다.

주제 : “아렌트, 뢰비트, 요나스, 마르쿠제가 바라본 하이데거”
발표자 : 서영화(『하이데거, 제자들 그리고 나치』의 번역자, 서울대학교)
토론자 : 박지용(경희대학교)
일시 : 2021년 10월 1일(금) 오후 4시~6시(2시간 25분 분량)
장소 : 온라인 줌 회의실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xYtx7qN_R84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8월 월례발표회 영상 “『논어(論語)』에서 드러나는 ‘즐거움’의 생명적 구조와 성격 해석” [월례발표회·세미나]

안녕하십니까? 한철연 학술1부입니다.

2021년 하반기 8-11월까지 한철연 월례발표회를 진행합니다. 하반기 월례발표회의 시작은 이찬희 선생님과 윤태양 선생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8월 월례발표회

주제 : 『논어(論語)』에서 드러나는 ‘즐거움’의 생명적 구조와 성격 해석
–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존재론의 방법론적 적용과 비교
발표자 : 이찬희(성균관대학교)
토론자 : 윤태양(성균관대학교)
일시 : 2021년 8월 30일(월) 오후 4시 ? 6시
장소: 온라인 줌 회의실

동영상 링크: https://youtu.be/dAQLAmA9ukM

연효숙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장의 ‘철학과 비판(이종철 저서)’ 서평에 답함 “새로운 철학을 하는 계기가 되고 동력이 될 수 있기를…” [철학자의 서재]

연효숙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장의 ‘철학과 비판(이종철 저서)’ 서평에 답함
“새로운 철학을 하는 계기가 되고 동력이 될 수 있기를…”

 

이종철(연세대)

 

♦ 2021년 6월 12일 브레이크 뉴스(Break News)에 실린 이종철 박사의 기고 글(https://www.breaknews.com/813273)을 필자의 허락을 얻어 웹진 〈ⓔ 시대와 철학〉에 게재함을 알립니다. 게재를 허락한 이종철 선생님과 브레이크 뉴스에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연효숙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장(이하 필자)이 쓴 서평 “이종철 저서 ‘철학과 비판’-새로운 철학적 글쓰기를 향한 거침없는 도전?”은 저자가 주창한 에세이 철학을 반기는 목소리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과연 이런 글쓰기가 오늘 날 전문화된 학계에서 생존이 가능할까라는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나는 전문적인 연구자의 입장에서 보이는 이런 반응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본다. 취지는 동의하지만 과연 그런 글쓰기가 현실적으로 -이른바 학계에서- 생존 가능할 수 있을까? 전문 연구자들이 이런 형태의 철학적 글쓰기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을까? 이런 글쓰기의 의미가 무엇이고, 그것의 현실적 위상을 어떻게 자리 매김할 수 있을까? 이런 반응은 충분히 가능할 뿐더러 당연하기도 하다.

필자는 내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철학과 현실의 관계, 현실로부터 유리된 철학의 위상, 오늘 날 학자들이 행하는 일상적인 철학 활동이 오퍼상이나 고물상과 다르지 않느냐는 나의 비판에 대해 일정 부분 동의하고 있다. 이런 나의 문제 제기는 기존 철학자들에 대해 일종의 정체성을 요구하는 작업이고, 이런 물음을 통해 자신들의 철학 활동에 대해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정체성의 위기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제기될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 서양 철학을 연구한다는 것의 의미, 현대의 한국에서 고대 중국과 한국의 철학을 연구하는 의미, 현실을 포괄하면서도 현실과 유리된 철학의 의미, 나아가서는 지금 이 땅에서 철학한다는 것의 의미 등등 오늘 날 우리에게 도대체 철학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 반성을 유도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종합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을 전문화된 논문 속에서 제기한다는 것 자체가 힘들다. 그런 맥락에서 에세이 철학의 형식을 통한 문제 제기는 충분히 의미가 있다. 지금까지 철학은 늘 회의와 반성 그리고 비판을 통해 이루어지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나의 문제 제기는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에세이 철학은 기존의 철학적 글쓰기에 대한 대안적 작업은 아니다. 다만 철학적 글쓰기가 한 방향으로 치우치다 보니 놓치고 있는 자유로운 철학의 정신을 되살리고자 하는 것이다. 내용이 그것을 드러내가 위해 적합한 형식을 요구하듯, 형식은 내용은 일정하게 규정하고 제한할 수 있다. 전문적인 논문은 논문대로 그 나름의 역할과 의미를 갖고 있다. 마찬가지로 에세이 철학의 형식은 아카데믹한 글쓰기를 넘어서 다양한 주제들을 상대로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일단 에세이 철학은 전문적인 철학의 테두리를 넘어 일상 속에서 얼마든지 철학의 문제들을 끄집어 낼 수 있으며, 주석에 대한 부담을 덜고서 얼마든지 자유롭고 현실 비판적으로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된다. 그 점에서 에세이 철학은 형식의 개방성을 열어 줄 수 있다. 이런 형식의 개방은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진행되어 왔던 철학적 글쓰기에 대한 보완적 형태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전문적인 철학 논문들과 달리 이런 글들이 실릴 수 있는 지면을 확보하기가 아직은 요원하다는 점에도 있다.

필자는 에세이 철학을 ‘도전과 모험’으로 규정한다. 이런 철학은 분명히 전문가 집단의 관행을 넘어서 있다. 이런 예외적 활동에 대해 기존의 전문가 집단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침묵과 무시, 혹은 무관심으로 일관할 것인가, 아니면 미미하지만 새로운 불씨가 되고 바람을 일으킬 수 있을까? 필자는 에세이 철학을 ‘대중적인 글과 전문적인 글쓰기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로도 생각하고, ‘업계와 비업계 사이의 경계인의 위치’에서 쓰는 글쓰기로도 생각한다. 저자의 이런 시도에 대해 ‘무모한 시도로 그칠지 아니면 새로운 글쓰기의 한 문화로 자리 잡을지’에 대해 불안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다. 전문가 집단에서 볼 때 한편으로는 우려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대하는 양면적 감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나의 시도가 ‘철학의 현실에 커다란 파문을 던진 것’을 인정하고, 이것이 ‘철학의 비판적 기능을 회복하고, 새로운 철학적 글쓰기를 위한 논쟁’의 불쏘시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한 것 자체에 위안을 삼고 싶다. 필자가 그 파문이 찻잔 속의 미동에 그칠지, 거대한 파도가 될지는 그 누구도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고 한 점에 대해서는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모든 새로운 시도가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철학과 비판-에세이 철학의 부활을 향해>에 대해 산발적이지만 적지 않은 서평을 여러 동료 철학자들이 해주었다. 좋은 책이 나와도 1년 내내 서평 하나 없는 학계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관심만으로도 그 반향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서평이 앞으로도 얼마만큼 이어질지, 그리고 그것들을 매개로 새로운 논쟁이 발생할 수 있을지는 지금 예단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동료 학자의 연구 결과에 대해 이렇게 반응을 하면서 철학의 문제들을 우리 내부로 끌어안으려는 것 자체가 새로운 철학을 하는 계기가 되고 동력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나는 일전에 아직은 밝힐 수 없지만 모 신문에서 9개의 질문을 받고 A4 용지 7장 분량의 답변서를 제출한 적이 있다. 내 책의 내용을 가지고 꼼꼼하게 분석하고 질문지를 작성한 것 자체가 나의 생각을 다듬는데 한 결 도움이 될 수 있다. 나의 답변서가 조만간에 그 신문에 실리게 되면 내 책을 이해하는데 한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장문의 서평을 통해 <철학과 비판>이 갖고 있는 여러 문제점들을 잘 드러내준 연효숙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장께 감사를 드린다. jogel4u@outlook.com

 

*필자/이종철

철학박사. 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근간 “철학과 비판”의 저자. 칼럼니스트.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으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이다. * Below is the [full text] of an English article translated from the above article as’Google Translate’.

 

In response to the review of ‘Philosophy and Criticism (Book of Lee Jong-cheol)’ by Yeon Hyo-sook, president of the Korean Philosophical and Thought Research Association

“I hope that it will become an opportunity and a driving force for a new philosophy…”

-Dr. Jongcheol Lee

 

The book review “Lee Jong-cheol’s book ‘Philosophy and Criticism’ – a relentless challenge for a new philosophical writing?” written by Yeon Hyo-suk, president of the Korean Philosophical and Thought Research Association (hereafter, the author) It raises the question of whether such writing can survive in today’s specialized academia. I think this kind of reaction from a professional researcher’s point of view is very natural. I agree with the purpose, but can such writing realistically – in the so-called academia – survive? Can professional researchers pay attention to this form of philosophical writing? What is the meaning of such writing, and how can we establish its realistic status? Such a reaction is not only possible, but also natural.

I agree to some extent with my criticisms of whether the relationship between philosophy and reality, which I consistently insist on, the status of philosophy separated from reality, and whether the daily philosophical activities of today’s scholars are different from those of Opus and antique dealers. My questioning like this is a task that demands a kind of identity from the existing philosophers, and it can be an opportunity to look back on their philosophical activities through these questions. An identity crisis can be posed from several perspectives. The meaning of studying Western philosophy in East Asia, the meaning of studying ancient Chinese and Korean philosophies in modern Korea, the meaning of a philosophy that encompasses reality and separates it from reality, and furthermore, the meaning of philosophizing in this land. It can induce a fundamental reflection on what it means to do philosophy for us. However, it is difficult to raise such a comprehensive and fundamental question in a specialized paper. In that context, raising a problem through the form of an essay philosophy is meaningful enough. Since philosophy has always been a work of skepticism, reflection, and criticism, my questioning can be meaningful in itself.

Essay philosophy is not an alternative work to the existing philosophical writing. However, it is intended to revive the spirit of free philosophy that has been lost because philosophical writing is biased in one direction. Just as content requires an appropriate form to reveal it, form can define and limit content in a certain way. A professional thesis has its own role and meaning, just like the thesis. Similarly, the format of the essay philosophy can go beyond academic writing to help you write freely and creatively on a variety of topics. First of all, essay philosophy can bring out philosophical problems in daily life beyond the boundaries of professional philosophy, and it helps to relieve the burden of commentary and write freely and critically in reality. In that respect, the essay philosophy can open up the openness of the form. This type of openness can be a complementary form to the philosophical writing that has been unilaterally carried out so far. The problem is that, unlike professional philosophical papers, it is still far from secure a space for these articles to be published.

I define my essay philosophy as’challenge and adventure’. This philosophy clearly goes beyond the practice of the professional community. How can the existing expert group accept this exceptional activity? Will it be consistent with silence, ignorance, or indifference, or will it be a small but new spark and spark? I think of the essay philosophy as ‘a tight line between popular writing and professional writing’, and I think of it as writing written in ‘the position of the borderline between industry and non-industry’. Regarding the author’s attempts, he does not withdraw his uneasy gaze about whether it will be a reckless attempt or whether it will be established as a new writing culture. From the perspective of the expert group, the two-sided feeling of concern on the one hand and expectation on the other is understandable. However, acknowledging that my attempt ‘had a great ripple on the reality of philosophy’, and hoping that this could ‘restore the critical function of philosophy and ignite a debate for a new philosophical writing’, is comforting in itself. want to take It remains to be seen whether the ripple will be just a small movement in a teacup or a huge wave, as no one knows at this time. Not all new attempts will be satisfied with the first drink.

So far, several fellow philosophers have written sporadic, but not a few, book reviews on <Philosophy and Criticism – Essay Towards the Resurrection of Philosophy>. Considering the reality of academia where there are no book reviews throughout the year even if a good book is published, this interest alone can have a huge impact. It is difficult to predict how long these book reviews will continue in the future, and whether new debates may arise through them. However, I believe that trying to embrace the problems of philosophy within us while reacting to the research results of fellow scholars in this way can itself be an opportunity and a driving force for a new philosophy. I can’t reveal it yet the other day, but I was asked 9 questions from a certain newspaper and submitted 7 A4 paper-sized answers. The meticulous analysis of the contents of my book and the preparation of the questionnaire itself can be very helpful in refining my thoughts. If my answer will be published in the newspaper sooner or later, it will be of much help in understanding my book. Finally, I would like to thank Yeon Hyo-sook, president of the Korean Philosophy and Thought Research Association, for revealing the various problems of <Philosophy and Criticism> through a long review. jogel4u@outlook.com

 

*Writer/Lee Jong-cheol

Doctor of Philosophy. Yonsei University Humanities Research Institute. Author of the foundational “Philosophy and Criticism”. column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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