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회원들의 철학적 책읽기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㉔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2-2. 논제1 : 정의의 본질과 기원 사회계약설의 관점(358e-359b)

 

* 글라우콘이 소크라테스에게 던지는 세 가지 논변들은 트라쉬마코스의 논변이 그랬듯이 플라톤이 <국가>를 통해 자신의 정의론을 구축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될 도전들이자 안티테제들이다. 앞으로 살펴보게 되겠지만 글라우콘의 도전적 문제제기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계승하면서도 나름의 방식으로 더욱 강화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도 그 도전들의 내용을 잘 살펴보는 것은 플라톤이 직면한 당대의 부정의한 현실에 대한 이해는 물론 앞으로 전개될 플라톤 정의론의 기본 방향을 짐작하게 하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요컨대 글라우콘의 도전은 정의로운 개인과 나라를 보다 공고하게 건설하기 위해 플라톤 자신이 주도면밀하게 설계한 터파기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358e-359b]

*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의 요청에 기꺼이 응한다. 이에 글라우콘은 논제의 순서에 따라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에 서서 정의란 무엇이고 그 기원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말하기 시작한다.

* 그 요지는 아래와 같다. 사람들은 부정의를 저지르면 좋은 것ἀγαθόν이요 부정의를 당하는 것ἀδικεῖσθαι은 나쁜 것κακόν이지만 부정의를 당할 때의 나쁨이 부정의를 저지를 때의 좋음을 훨씬 압도한다. 그래서 서로 부정의를 저지르기도 하고 부정의를 당하기도 하며 양쪽을 다 맛보고 나면ἀμφοτέρων γεύωνται 후자를 피하고 전자를 선택할 힘이 없는 사람들로서는τοῖς μὴ δυναμένοις 부정의를 저지르거나 당하지 않도록 서로 계약을 하는 게συνθέσθαι 이익이라고 생각한다.

* 이러한 연유로 사람들은 법률νόμοι을 제정하고 계약συνθήκη을 체결하며 법에 따른 명령을 적법하고 정의롭다νόμιμόν τε καὶ δίκαιον고 말한다. 이것이 정의의 기원이며 본질γένεσίν τε καὶ οὐσίαν δικαιοσύνης이다.

* 정의롭다는 것은 부정을 저지르고 처벌을 받지 않는 가장 좋은ἀρίστου 경우와 부정을 당하고도 보복을 할 수 없는 가장 나쁜κακίστου 경우의 중간에 있는 것μεταξὺ οὖσαν이다.

* 이렇게 정의는 양쪽 사이에 있는 것임에도 좋아하는 까닭은 결코 정의가 좋은 것이어서가 아니라 다만 부정의를 저지를 힘이 없어서ὡς ἀρρωστίᾳ 그것을 존중할 뿐이다.

* 그러나 능히 부정의를 저지를 수 있는 강자 즉 진짜 사내ὡς ἀληθῶς ἄνδρα(이를테면 참주)의 경우는 부정의를 저지르지도 당하지도 않도록 하는 계약 따위는 누구와도 맺지 않는다. 그것은 미친 짓μαίνεσθαι이다. 이것이 정의의 본성φύσις δικαιοσύνης이자 기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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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라우콘이 말하는 정의의 기원은 법률의 기원이기도 하다. 이것은 글라우콘이 생각하는 정의와 부정의가 일단 법을 기준으로 한 것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글라우콘에 따르면 사람들이 계약을 통해 법률을 제정하기 이전에 이미 그들 자신 부정의를 저지르거나 당하는 일을 경험하고 있다. 이것은 글라우콘이 말하는 정의의 기초로서 법률이 제정되기 이전에 모종의 다른 법률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그런 점에서 보면 글라우콘이 말하는 정의의 기원 내지 발생γένεσίς은 말 그대로 자연 상태로 부터의 정의의 기원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정의의 기원 즉 그러한 정의의 기초가 되는 법률의 기원이라 할 것이다. 일부 연구자들은 글라우콘이 말하는 정의의 기원을 자연 상태로부터의 정의의 기원으로 보고 부정의를 저지르거나 당하는 것의 의미를 단순히 해를 입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글라우콘의 도전이 기본적으로 5세기 지식인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에서 출발하는 것이고 플라톤의 정의관이 그것에 대한 대응이라고 한다면 글라우콘이 말하는 정의의 기원은 플라톤 당대 아테네 현실에서 새롭게 발생하고 자리 잡은 신흥 정의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글라우콘의 주장에 대한 아래와 같은 분석도 그것을 뒷받침해준다.

* 글라우콘의 주장은 정의와 법률이 일정한 사회적 계층에 속하는 일군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처지와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 낸 인위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이것은 정의의 본성을 자연의 본성, 신들의 본성에서 구하고 그것을 관습의 형태로 확립하여 그것을 사회적 삶의 기초로 삼아온 전통적인 입장과 대립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글라우콘이 대변하는 입장은 자연(physis)과 관습(nomos)의 일치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온 전통적 입장과 달리 자연과 관습의 분리를 전면에 내세우는 입장인 것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글라우콘의 주장은 자연 상태라기보다는 그리스의 역사에서 자연과 관습의 분리가 진행된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현실에 기초한 것임을 보여준다. 글라우콘의 입장을 탄생시키는 배경으로서 글라우콘 스스로가 진단하고 있는 사회적 현실도 그 점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 글라우콘이 언급하고 있는 사회 현실은 부정의를 저질러도 처벌은커녕 좋은 것을 누리는 사람들(가장 강한 자)과 부정의를 당해도 보복은커녕 나쁨만 입는 사람들(가장 약한 자) 그리고 힘에 있어서 그 중간 정도에 위치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 중 중간에 속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강자들처럼 자기 멋대로 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다가 자기들끼리는 서로 공격하거나 방어하는데 비슷한 수준의 힘을 가진 이기적인 존재인 까닭에 늘 서로를 경계하고 서로를 믿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회로부터 유리되어 홀로 살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로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위해를 당하지 않도록 강제의 형식을 빌어 서로 약속하는 게 이익이라고 생각하고 상호 합의하에 법률과 계약을 제정하여 법이 정한 그 명령을 적법한 것이자 정의로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글라우콘이 여기서 말하는 사회 현실 속 사람들이란 계층적으로 아테네 당대의 귀족층과 시민계층 그리고 노예 등 최하계층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그런데 정의와 법률의 기원에 관한 이러한 글라우콘의 주장은 법률의 강제적 집행과 관리를 주도할 권력기구 내지 국가의 존재를 전제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의 주장은 종종 국가 형성과 관련한 이론들 가운데 사회계약설적 입장에 속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주지하다시피 사회계약설은 기본적으로 국가 권력의 합목적성과 통치자와 피통치자간의 권리와 의무를 설명해주는 핵심 이론으로서 17세기 근대 국가의 성립과정과 성격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크게 주목을 받았다. 그렇게 보면 글라우콘의 주장은 근세 개인주의 자유주의가 태동되기 2000 여년 전에 이미 사회 중간계층인 시민 계급에 의해 주도된 사회계약이념의 원형적 틀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매우 특별하고도 주목할 만한 위상을 가지고 있다. 특히 글라우콘의 사회계약설적 주장은 개인들의 배타적 이기심을 토대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근세 사회계약론 사상의 효시로 일컬어지고 있는 홉스(T. Hobbes, 1588~1679)의 사상과도 자주 비교된다. 홉스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본능적으로 이기적인 자기보존 욕구만 가지고 있어 그 상태를 방치할 경우 마치 원자들이 부딪치듯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 상태를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다행히 인간은 이성이라는 계산적 이기심 또한 갖고 있어 그 이성의 규제적 통찰이 그들 모두의 공멸을 피해 사회적 공존을 가능하게 한다. 즉, 그들은 도덕적 자발성은 갖추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의 계산적 이기심은 필연적으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강력하게 통제할 막강한 권력기구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상호 합의 하에 강권국가(Leviathan)를 세워 법률제정 권한 등 강력한 절대 권력을 부여하여 자신들을 통제하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안전과 최소한의 사회적 공존의 방책을 강구한다는 것이다.

* 그런데 홉스에게 사회 계약은 자연 상태에서 비슷비슷할 정도의 힘과 이기심을 가진 사람들 모두가 계약 당사자로 참여하여 합의를 통해 최고 주권자로서 절대군주를 내세워 자발적으로 그 주권자의 강권통치에 예속됨으로써 서로의 안전과 공존을 보장받는 것이 목표이지만, 글라우콘이 말하는 사회 계약은 앞서 살폈듯이 일단 자연 상태가 아닌 일정한 역사적 현실 상황에서 사회적 강자들과 노예계급을 제외한 보통의 시민들이 그들 상호 간의 계약을 통해 최소한의 자기 방어를 위한 법률의 제정과 그 법률에 의해 지배되는 국가의 수립이 그 목표이다. 다시 말해 최초 국가의 수립이 아니라 그들의 현실적인 바람을 충족시키는 정부의 수립이다. 이러한 차이는 앞에서도 간단히 언급하였듯이 그것을 태동시킨 정치 사회적, 시대적 배경이 서로 다른데서 연유한다. 홉스의 강권국가이론은 원래 17세기 중반에 이르러 개인주의가 팽배해지면서 영국의 절대왕정이 위협을 받게 되자 절대왕정의 정당성을 개인주의 차원에서도 온전하게 뒷받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연 상태라는 원초적 상황까지 끌어들여 제안된 것이다. 그러나 홉스의 이론은 절대왕정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양쪽으로부터 비난을 면치 못하였다. 절대왕정주의자들이 보기에 홉스의 사상은 왕권의 절대적 존엄성과 그에 대한 충성을 뒷받침하기보다는 오히려 개인들의 안전보장을 권력의 합목적성으로 내세우고 있었고, 다른 한편 자유주의자들이 보기에는, 비록 이기적 개인들의 자기 보존 욕구가 권력의 합목적성으로 자리 잡긴 했어도 그것이 기존의 절대군주를 통해 담보되는 것은 그 자체로 용인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홉스의 사상은 그 후 개인의 이기심에 기초한 근세 자유주의의 이념이 더 이상 반동에 직면하지 않을 정도로 시대의 대세로 자리 잡음과 동시에 정부의 역할에 대한 인식 또한 증대하자 그가 내세운 인간의 원초적 이기심과 국가권력의 결합이 자유방임의 한계에 대한 선구적 통찰로 재조명되면서 근세 자유주의 국가 이념의 기본틀을 제공한 위대한 사상가로 재평가되기에 이르렀다.

* 제1권에서 트라쉬마코스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주장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묻는 소크라테스에게 참주정, 귀족적, 민주정의 예를 들어가며 결국 참주건 귀족이건 시민이건 법률 제정권을 가진 강자가 진정한 강자이며 정의는 그들의 이익임을 주장하고 있다.(338d-339a) 그런데 글라우콘의 주장에서는 법률의 제정이 참주나 귀족 같은 사회적 강자들이 아닌 중간 계층 즉 시민 계층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이것은 글라우콘의 정의관이 배경으로 하고 있는 정치 현실에서 정치적 강자가 이제 더 이상 참주나 귀족이 아니라 민주정체 하에서의 시민임을 말해준다. 물론 귀족 계층도 여전히 사회적 강자로서 지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더 이상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멋대로 법을 제정할 힘도 없고 그렇다고 시민들 스스로 법률을 제정하려는 시도를 막을 정도의 힘 또한 가지고 있지는 않다. 만약 그들이 이전처럼 법률 제정권을 장악하고 있다면 그들은 결코 시민 계급의 법률 제정을 허락하기는커녕 자신들의 힘을 이용하여 언제든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법을 제정하고 그 과정에서 결코 약자들과 상호 협의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글라우콘의 말대로 그것은 미친 짓μαίνεσθαι이기 때문이다.(359b) 역사적으로 법률 제정의 결정권을 누가 갖느냐의 문제는 강제적이고 공적인 집행 기구로서 정부의 통치 권력의 장악을 위한 정치투쟁의 본질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시민들이 법률 제정권을 행사한다는 것은 사회적 강자들과의 정치투쟁에서 최소한 시민들이 나름의 주도권을 획득하여 법률 제정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도 글라우콘이 대변하는 사회계약설은 이미 사회적 약자들이 힘을 합해 사회적 강자를 제압하거나 일정부분 타협이 가능해진 상황, 즉 기원전 5세기를 살아가는 시민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있는 일정한 역사적, 시대적 현실에 조응하는 정의의 기원과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 법률 제정의 형식으로 표출되는 사회 계약의 합목적성과 관련해서도 글라우콘의 사회계약설은 홉스가 제기하는 사회계약설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홉스의 사회계약설에서는 개인의 자기 보전 욕구가 절대 권력에 대한 주권 권력의 위임을 통해 관철되고 있지만 글라우콘이 제시하는 사회계약설에서는 오히려 약자인 시민 계급이 강자로부터의 자기 방어를 위해 스스로 주권자로 나서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욕구를 관철하고 있다. 이미 그곳에는 이전 세기의 참주정은 물론 당대 귀족정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한 세기 이전에 성행하던 참주정 치하의 상황을 토대로 강자의 이익으로서 정의를 주장하며 소크라테스를 몰아세우던 트라쉬마코스의 도발은 이제 제2권에서 글라우콘을 통해 현존하는 당대 아테네 현실과 시민들의 고양된 정치참여의식을 토대로 훨씬 강력한 설득력을 갖는 도전으로 대체되면서 소크라테스를 보다 강화된 방식으로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글라우콘의 논변은 이기주의와 부정의 찬양론으로 일관된 트라쉬마코스 주장의 기본테제를 일관되게 유지하되 논거에 있어서는 모두가 목도하고 실감하고 있는 아테네의 역사적 현실을 끌어들임으로써 소크라테스의 입론을 보다 강력하게 이끌어내기 위한 터파기 심화 작업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이 또한 <국가>를 구상함에 있어 자신의 정의론을 보다 확고하게 구축하고자 하는 플라톤 자신의 주도면밀한 계획에 따른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 이처럼 글라우콘의 정의에 관한 사회계약설적 주장은 소크라테스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넘어서야할 정반대의 입론임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가 중추적인 정치 사회적 이념으로 자리 잡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어쨌거나 민주주의의 본질에 대한 매우 의미 있는 시사점을 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플라톤은 고대와 현대에 걸쳐 이중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글라우콘이 대변하는 정의의 사회계약설은 근대 민주주의의 이념이 그러하듯이 소수 사회적 강자들로부터 자신들의 권익을 수호하고자 하는 다수 약자들의 방어 내지 의심 프로그램으로서, 같은 약자이자 배타적인 이기심을 갖고 있는 타인들로부터 스스로의 생존과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사회적 공존을 지향하고 있다. 실로 민주주주의 본질은 강자에 대한 약자들의 방어적 의심과 투쟁에 기반 해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글라우콘의 주장은 비록 <국가> 전체를 통해 소크라테스에 의해 철저히 부정되는 운명에 처하게 되지만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러한 사회계약설적 입장을 탄생시키고 발전시켜온 당대 아테네의 민주정은 물론 그것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하는데 앞장 선 소피스트들의 입장은 오늘날 빛나는 정치이념으로서의 민주주의의 바탕을 마련해 준 선구적 사상으로서 소중한 철학사적 의의를 갖는 것으로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그러나 글라우콘의 주장의 배경이 된 아테네의 민주정은 주지하다시피 기원전 5세기말에 이르면 법률과 정의가 곧 시민 계급의 자기 이익을 위한 방어차원에서 성립되었다는 글라우콘의 주장이 무색할 정도로 그 폐해가 걷잡을 수 없이 심화되면서 전성기 아테네 제국의 몰락을 재촉하는 근본 동인이 되고 만다. <강해> 서두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아테네 민주정은 기원전 413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기원전 5세기 중반 전성기에 보여주었던 역동성을 상실한 채,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사회경제적 현실 앞에서 공동체의 보존보다는 시민 각자의 자기 도생을 위한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관철하는 정치 시스템으로 전락해버린다. 이른바 사회적 강자로부터 시민의 이익을 방어하기 위한 방책으로 추구되던 입법 정신은 점차 자취를 감추고 오히려 민중들이 선동정치가들을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정치적 강자로 군림하면서 시민들 서로에 대한 음해와 부의 강탈마저 정당화하고 용인되는 이른바 반공공적 자유방임의 극단적인 포퓰리즘이 아테네 사회를 뒤덮기에 이른다. 그렇게 보면 글라우콘의 주장에는 이미 역설적으로 당대 아테네 민주정체 하에서 소피스트들에 의해 제기되고 전파된 세계관과 삶의 방식, 즉 자연과 관습의 일치가 아닌 분리를 통해 개인의 이기심을 본성 수준으로까지 고양시킨 당대의 피폐된 이기주의와 상대주의, 개인주의에 대한 통렬한 고발과 비판을 함축하고 있다.

* 이로써 정의와 관련하여 사회계약설적 주장을 추축으로 하는 글라우콘의 첫 번 째 문제제기가 마무리된다. 첫 번째 문제제기가 소크라테스에 대한 정치철학적 도전을 담고 있다면 이제 두 번째 문제제기는 인간의 본성론에 기초한 도전의 성격을 갖는다.

 

1-2-3. 논제2: 귀게스의 반지와 인간의 본성 정의는 마지못해 하는 것(359b-360d)

 

[359b]

* 글라우콘은 이제 358c에서 예고한 대로 두 번째 논제 즉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은οἱ ἐπιτηδεύοντες 정의가 좋아서가 아니라 부정의를 저지를 수 없는 무능ἀδυναμίᾳ 때문에 마지못해 하는 것임을 언급한다. 먼저 글라우콘은 트라쉬마코스를 대변하여 인간의 이기심이 사회적 관습의 산물이 아니라 자연 상태에서의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본성임을 ‘멋대로의 자유’ἐξουσία가 주어진 가상 상황에서의 사고실험과 귀게스(Gyges)의 반지에 관한 전승을 토대로 적극적으로 논변하기에 이른다.

* 글라우콘은 위와 같은 주장이 사실임은 우리가 머릿속으로 아래의 경우를 상정하면’εἰ τοιόνδε ποιήσαιμεν τῇ διανοίᾳ 가장 잘 알아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359c]

* 즉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자유’ἐξουσία를 부여하면, 정의로운 사람이건 부정의한 사람이건 모두 탐욕πλεονεξία(pleonexia)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천성ὃ πᾶσα φύσις이 그러함에도 법률이 강제로βίᾳ 천성을 평등을 존중하는 쪽으로ἐπὶ τὴν τοῦ ἴσου τιμήν 유도한다는 것이다.

 

[359d-360a]

*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글라우콘은 옛날 뤼디아 사람 귀게스γύγης의 조상에게 τῷ Γύγου τοῦ Λυδοῦ προγόνῳ 생겼다는 어떤 힘에 관한 이야기 이른바 귀게스의 반지 이야기를 꺼내든다.

* 귀게스의 반지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러하다. 옛날 뤼디아의 통치자에게 고용된 목자는 심한 뇌우와 지진σεισμός이 있은 후 갈라진 땅 틈χάσμα으로 들어갔다가 속이 비고 문이 달린 청동 말ἵππον χαλκοῦν 속에 어떤 송장νεκρόν이 손가락에 금반지χρυσοῦν δακτύλιον를 끼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빼 가지고 나왔다가 반지의 보석받침σφενδόνη을 자신을 향해 손 안쪽으로 돌릴 경우 자신이 다른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게ἀδήλῳ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후 목자는 반지를 이용하여 왕궁으로 들어가 왕비에게 접근하여 왕비와 간통하고μοιχεύσαντα 왕비와 함께 왕을 살해ἀποκτεῖναι한 후 왕권을 장악한다.ἀρχὴν κατασχεῖν

* 이곳에서는 ‘귀게스의 조상’이 반지의 주인공으로 언급되고 있지만 제10권 612b에서는 그냥 ‘귀게스의 반지’τὸν Γύγου δακτύλιον라고만 언급되고 있어 일부 주석가는 ‘조상’πρόγονος이라는 표현이 잘못 전승된 표기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 나오는 귀게스라는 인물이 헤로도토스의 <역사> 제I권 8-13에 나오는 기원전 7세기 뤼디아 왕 귀게스인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왕의 하인 또는 목자가 나중에 왕이 된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점도 있지만 두 인물이 같은 인물인지는 분명치 않다.

 

[360b-d]

* 그러한 반지가 두 개가 있어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사람 각각에게 끼게 할 경우, 정의에 머물며 남의 것에 손대지 않을 정도로 강철같은 마음ἀδαμάντινος을 유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렇듯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다하며 신 같은 존재ἰσόθεον로 행세할 수 있게 된다면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사람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똑같은 방향ἐπὶ ταὔτ᾽ 즉 부정의 짓을 저지른다. 사람들은 모두 개인적으로 정의는 좋은 것이 못되는ὡς οὐκ ἀγαθοῦ ἰδίᾳ ὄντος 반면 부정의는 훨씬 이익이 된다고 믿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정의는 자발적이 아니라 부득이하게ἀναγκαζόμενος 마지못해 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τεκμήριον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ἐξουσία를 가지고 있음에도 부정의한 짓을 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그를 가장 딱하고ἀνοητότατος 어리석은 사람ἀνοητότατος으로 여길 것이다. 그럼에도 서로를 속이며 면전에서 그를 칭찬하는 것은 그들 모두 부정의한 일을 당하지 않을까에 대한 두려움 φόβον때문이다.

* ‘귀게스의 반지를 끼고 있을 경우 남의 것을 손대지 않을 정도로 강철같은 마음을 유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비록 가정이기는 하지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부정의한 짓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상정하는 것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글라우콘은 귀게스의 반지 이야기를 들어 순수하게 정의로운 자의 존재를 부정하지만 그의 주장 자체가 그 자신의 속생각과는 다른 방편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그 역시 순수하게 정의로운 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있는 것이다. 이미 앞에 있는 소크라테스의 존재 자체가 그 증거인 것이다.

* 360d에서 ‘부정의한 일을 당하지 않을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면전에서 순수하게 정의로운 사람을 칭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면전에서 솔직하게 그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거나 비난할 경우 어떤 부정의한 일을 당한다는 것인지 금방 이해가 가지 않는다. 면전에서 그의 어리석음을 지적할 경우 자신이 부정의한 자임을 고백하는 형국이 되어 주위 사람들이나 통치자들로부터 지탄을 받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부정의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경우에서처럼 모나게 처신할 경우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막연한 염려를 나타낸 것일까 아니면 참주정 치하에서 부정의를 독점하는 참주에 의해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되거나 주변 사람들에 의해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는데도 지레 부정의한 자로 백안시되거나 낙인찍히는 것을 두려워해서 일까? 글라우콘의 주장을 자연 상태로 부터의 법과 정의의 기원에 관한 주장으로 해석하고 있는 일부 주석가들은 글라우콘이 법과 정의가 생기기 이전에도 ‘부정의를 당한다’(358e)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그 말의 의미를 그냥 ‘불이익을 당한다’, ‘해를 입는다’의 의미로 이해하기도 한다.

* 글라우콘은 정의란 사회적 약자들이 자기들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서로가 약정한 방어적 성격의 것으로서 따라야할 최선의 것이지만 만약 그들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될 경우 그것을 따르기는커녕 오히려 탐욕적이 된다는 점에서 정의는 다만 약자가 그 자신의 처지에서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요컨대 정의는 그 자체로서는 전혀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그 자체로 좋은 것이라면 강자건 약자건 그 누구라도 그것을 자진해서 추구하겠지만 실제로는 그와 정반대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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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우콘이 제기한 두 번째 논변 특히 귀게스의 반지 이야기는 인간 본성론 내지 도덕 심리학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주제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그에 관한 많은 논쟁이 제기되어 왔다. (관련 국내 논문들 : 김영균, ‘플라톤의 <국가>편에서 기게스의 반지와 두 가지 삶의 방식’ <인문과학논총> 30, 청주대 학술연구소 2005. 임성진, ‘글라우콘의 도전’ <철학사상> 제46호,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12, 양선숙, ‘만약 당신이 기게스의 반지를 얻게 된다면’, <Knu law review> 제3권,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2012. 이민규, ‘기게스 반지의 선택’, <언론정보학연구> 3권 대구경북언론학회 2001.4)

* 글라우콘이 전하는 귀게스의 반지 이야기는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의 형식으로 인간의 본성과 관련한 중대한 물음들을 담고 있다. 물론 내용 자체는 허구라는 점에서 글라우콘의 주장과는 달리 어떤 객관적 증거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게스의 반지 이야기는 일시적이든 아니든 크든 작든 욕망을 가진 인간 누구도 완전하게 빠져나오기 힘든 치명적인 유혹을 담고 있다. 특히나 글라우콘이나 우리가 서 있는 이기적이고 경쟁적이며 배타적인 사회현실에서 타인의 비밀을 타인 몰래 자신만이 알고 있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무소불위의 지배 욕구 내지 절대 우위의 권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귀게스의 반지가 상징하는 ‘투명인간’에 대한 욕망은 인간 욕망의 극치를 표현하는 소재로 끊임없이 회자되어 왔고 도덕의 근원에 관한 철학적 논쟁에서 빠질 수 없는 단골 주제가 되어 왔다.(물론 투명인간이란 말은 오늘날 타인의 관심에서 배제되거나 무시당하는 인간의 의미로도 쓰인다). 과연 인간에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과 자유’가 주어지고 게다가 그 자신 투명인간이 될 수 있다면 그는 글라우콘이 말한 대로 누구도 예외 없이 오직 하나의 방향 즉 부정의하고도 부도덕한 행위를 선택하게 될까? 그리고 만약 그와 달리 누군가 그와 동일한 상황과 조건하에서도 그와는 전혀 다른 방향 즉 도덕적 행위를 선택하는 경우가 있다면 도대체 그 이유는 어디에서 구해질 수 있는 것일까? 그의 타고난 선의지 내지 선한 본성에서일까 아니면 타인들의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겪어온 시행착오와 쾌락의 역설과 같은 수많은 인생 경험들 때문에서일까? 그리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이라면 그러한 수치감 내지 도덕의식은 본성에서 나온 것일까 아니면 이 또한 자발적이건 강제적이건 정의와 질서가 가져다 준 모종의 긍정적인 결과에 대한 경험에서 나온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동서양 철학과 종교의 역사를 통해 고대 성선설과 성악설에서부터 근대의 공리주의, 행동주의, 인본주의 심리학, 사회생물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도 수많은 답변이 제기되어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특정 종교나 철학적 신념에 몰입해 있는 사람이 아닌 한, 누구도 그 어떤 대답이 맞거나 그 대답이 다른 대답을 압도한다고 여기지 않는다. 어쩌면 이러한 양태 자체가 인간 본성의 중층성과 복합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그러나 어쨌든 크든 작든 일시적이든 아니든 그러한 욕망이 뿌리칠 수 없는 유혹으로 현존한다는 것은 그것이 빚어내는 수많은 문제들이 사적 영역에서건 공적 영역에서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점에서 실로 글라우콘의 문제 제기는 그러한 문제들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풀어야 할 실로 심각하고도 중차대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투명인간에 대한 욕망이 그 자체로 불가능하다는 것만으로는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다. 그것을 향한 유혹은 늘 치명적일 정도로 뿌리가 깊어서 그것을 욕망하는 그 자체로 인간의 삶의 현실의 거의 모든 영역이 크게 뒤흔들릴 정도로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이를테면 우선 공적인 영역에서 모든 국가가 갖추고 있는 첩보기관은 다른 나라 또는 자국 신민들에 대한 일방적이고도 비밀스런 탐지와 음모를 권력과 나라의 안전을 보전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치로 정당화하고 있고, 늘 무한경쟁 속에 살아가는 기업과 개인 또한 자기들의 부와 권력, 배타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늘 타인들에 관한 정보를 그들 모르게 비밀스레 탐지하고 독점하고 활용하려 든다. 고객 서비스를 내세워 이루어지는 기업들의 개인정보의 수집활동이 개인의 취향과 인간관계 등을 포함한 비밀스런 사적 영역에 관한 정보까지 그들의 이익을 위해 활용되고 있다는 것은 이제 공공연한 비밀이다. 지금도 대규모 포털과 국가기관의 정보망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마치 벤담(J. Bentham)이 말한 판옵티콘(panopticon)이나 오웰(G. Orwell)의 빅브라더처럼 거의 실시간으로 우리들의 삶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다. 투명인간에 대한 욕망은 이렇듯 공적 영역에서 부와 권력에 대한 다함없는 의지로만 표출되는 것도 아니다. 오늘날 사적 영역에서 만연해 있는 몰래 카메라를 통한 도촬과 도청 행위 등도 자본과 권력에 침식된 개인의 결핍 욕구를 채우려는 차원에서건 성적 욕구를 적극적으로 충족시키려는 차원에서건 그 모두 귀게스의 반지를 만지작거리는 일탈 행위 즉 타인에 대한 변태적인 지배 욕구 내지 병적인 인정 욕구의 소산들이다.

* 이런 측면에서도 이곳에서 글라우콘에 의해 제기되는 두 번째 도전은 당대 아테네의 부정의한 현실은 물론 오늘날 현대인이 직면한 피폐한 삶에 대한 문제제기이자 도전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한 점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의 정의롭고 행복한 삶을 위해서도 앞으로 펼쳐질 그 물음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답변은 그 문제의 심각성의 크기에 비례하여, 아니 그 이상으로 실로 엄청난 의미와 무게를 갖고 우리들 모두에게 소망이자 믿음으로, 빛으로 다가오고 또 반드시 그렇게 다가와야 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 글라우콘의 귀게스 반지 이야기를 프로이트(G. Freud)의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서 음미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지진과 뇌우는 인간이 겪는 심리적 충격과 상처들이고 땅의 갈라짐은 정신의 분열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지하로 들어가는 행위 청동말 속을 들여다보는 행위는 마치 무의식에 대한 응시를 말하는 것인 양 느껴지고 청동말 속에 반지를 낀 채 누워있는 송장은 우리 안에 잠복하고 있는 본능적인 충동이자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서 프로이트의 id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 송장 역시 똑같은 반지를 끼고 살다가 죽은 권력자의 송장이라는 점에서 꿈을 통해 나타난 무의식 속 귀게스 자신의 모습일 거라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귀게스가 반지의 능력을 알고 취한 첫 행동이 최고의 금기인 최고 권력자의 여인을 간통하고 그러한 성적 지배를 통해 최고의 정치권력을 장악한다는 것도 프로이트의 리비도(Libido)를 연상시킨다. 사실 프로이트의 역동적 성격론이 플라톤의 영혼 3분설에서 착안되었다는 것은 관련 연구자들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리고 보석받침을 안쪽으로 돌리면(반지 자체를 손바닥 쪽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반지위에서 돌아가도록 만들어진 보석받침을 자기 쪽으로 돌려 놓는 것을 말할 것이다) 목동의 모습이 다른 목동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은 웰스(H.G. Wells)의 소설에서 나오는 투명인간이 알몸상태로 있어야 하는 것과는 다른 설정이지만, 귀게스의 반지를 낀 자가 권력을 상징하는 청동말 속에서 알몸으로 누워있는 것도 뭔가 그의 욕망이 맞이하는 결말에 대한 플라톤적 시사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송장이 사람 크기보다도 크다는 내용도 일정하게는 나름의 고인류학적인 사실을 반영한 것인지는 몰라도 어쩌면 그가 사람이 아닌 동물이거나 초인적 존재임을 함축하는 것일 수도 있다.

* 글라우콘은 귀게스의 반지 이야기에 이어 그가 앞서 밝힌 논제 제기의 기본 순서와 목적에 따라 이제 세 번째로 글라우콘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온당하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한다. 실로 이렇듯 소크라테스의 입론을 위한 아주 깊고도 깊은 터파기 작업이 글라우콘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환대에 대하여』를 환대하는 한 가지 방식 [철학자의 서재]

환대에 대하여를 환대하는 한 가지 방식

자크 데리다, 『환대에 대하여』(남수인 옮김)

 

환대에 대하여, 책의 제목부터 문제적이다. 왜냐면. 우리는 사실 누군가를 환대하는 데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IMF 이후라고 할까, 신자유주의 이후라고 해야 할까. 무한 경쟁, 성과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후유증인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서로에게 잠재적 ‘적’이다. 나는 저 친구보다 우월한 스펙을 쌓아야 하며, 회사에서는 동료보다 높은 실적을 올려야 한다. 이러한 사회는 동료도 난민도 받아들일 수 없다. 이주노동자도 내 일자리를 ‘빼앗는’ 사람들일 뿐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내가 주인이고 그들은 이방인이고 타자일까. 데리다는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질문한다. 어쩌면 태초에 어머니의 품에서 떠나온 우리는 모두가 이 지구의 이방인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데리다에 따르면 이방인은 질문하는 자이고 부성(父性) 로고스를 뒤흔드는 자(p. 58)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방인에게 적대적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사실 언제나 친구를 기다리고 손님을 기다린다. 휴대폰에 문자나 전화 한통 와 있지 않은 어느 날의 음울함에 대해 생각해보라. 나는 왜 나를 침입할지도 모르는 이방인, 타자 혹은 친구를 기다리는 걸까. 내가 사회적으로 소용되지 않고 다른 누군가에게 필요 없는 존재라는 느낌이 들 때 자기 존재 의의를 가질 수 있을까.

 

내 집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나는 주인일 수 있다. 하지만 손님에게 문을 여는 순간 나의 ‘주인성’은 침해당한다. 라캉식으로 말하면 빗금쳐진 주인, 정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일까. 데리다는 이를 ‘주인(손님)’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 표현은 정말 이상한 개념이다(p. 83). 아마 우리가 데리다를 접할 때 느끼는 어려움의 하나일 텐데 데리다는 항상 이런 개념을 우리에게 던진다. 파르마콘도 그 중 하나다. 약이자 독이라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채 경계에 서있기, 이건 쉬운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흑백 논리, 이분법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여자 아니면 남자 하는 식 말이다. 하지만 지구상에 인간의 성이 n개일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하지만 이 심각성을 회피하는 것만이 능사일지는 두고 볼 일이다. 데리다는 항상 이 지점을 문제 삼고 있는 것 같다.

 

타자를 환대한다는 것, 나를 모두 버리고 환대할 것인가, 나를 유지하면서 환대할 것인가, 가 항상 문제다. 무조건적으로 타자를 환대하면서 나를 지킬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환대인가, 환대가 아닌가.

 

요즘엔 인터넷, 이메일, SNS 등으로 내가 구성되는데 이때 나는 온전히 나의 주인으로서의 나인가 아니면 외부에, 타자, 이방인에게 내 의도와 무관하게 환대하면서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나는 나이면서 ‘나 아닌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국가는 이런 식으로 나를 침해하고 그 국가 권력과 정치화의 권력은 확장된다(p. 90). 여기에 나의 사적 공간은 보장되는가. 국가 폭력은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을까(p. 95).

 

칸트는 우리에게 거짓말 하지 말라는 절대적 명령을 했다. 이렇게 그는 우리의 사적인 권리, 비밀의 권리, 국가 권력에 저항할 권리를 파괴하고 박탈해버린다(p. 97). 칸트는 순수 도덕성의 이름으로 경찰을 아무 곳에나 들여놓았다(p. 98).

 

정의의 환대와 권리의 환대, 무조건적 환대와 조건적 환대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아포리아일까. 우리는 이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할까.

 

환대의 무조건적 법은 추상적이고 유토피아적이다. 그것은 하나의 이념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법이기 위해 법의 조건 안에 있다. 이 둘은 분리되지 않는다. 이 두 체제는 서로를 함유하며 동시에 서로를 배제한다(p. 106). 내가 주인이면서 손님이라는 논리처럼 나는 이 둘 모두를 향해 동시에 열려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건 쉬운 일은 아닐 것 같다. 나는 교사이지, 교사이자 학생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랑시에르가 ‘무지한 스승’(양창렬 역, 궁리, 2016) 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무지한 스승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관점을 달리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레비나스는 무조건적인 환대란 ‘언어를 정지’시키는 것이라 했다(p. 141). 일상어의 정지, 는 새로운 언어를 불러들일지 모른다. 그것은 시적 언어이고, 철학적 언어이고 신조어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새로운 언어는 기존의 관습적, 일상적 언어의 감옥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 ‘얼핏’이라도 ‘다른 세계’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언어 안에서(상징계) 그러니까 조건적으로, 조건 안에서 끊임없이 ‘무조건적’ 어떤 것을 항상 상상해야 하고 염두에 두고 ‘배려’해야 할지 모른다. 이런 입장이 데리다의 입장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읽기 쉬운 책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이방인과 타자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해 볼 꺼리를 던져 주기 때문에 한번쯤 읽어봐야 할 책이다.

 

by 엄진희(시인, 문학평론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㉓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2 ]

 

플라톤은 제1권에서 <국가>를 통해 자신이 앞으로 다루고 해결해야할 과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중대하고 심각한 문제인지를 그 동안 전기 대화편을 통해 특징적으로 구사했던 논박술과 아이러니의 방법을 총 동원하여 아주 드라마틱하고도 역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특히 플라톤은 제1권에 등장하는 인물들 각자의 생각과 성격은 물론 그 생각에 수반되는 심리적 정황까지 세밀하게 그려냄으로써 논의 내용에 대한 이해를 더욱 풍성하게 해주는 문학적 효과까지 더해주고 있다. 게다가 제1권 끝부분에서 플라톤이 그리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모습, 즉 트라쉬마코스를 성공적으로 논파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그의 모습은 미완결 상태로 끝난다는 점에서는 전기 대화편과 비슷하지만 이미 제1권 자체가 대화의 종결이 아니라 새로운 대화를 위한 마중물임을 고려하면 이미 그 자체로 전기대화편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그야말로 무지의 지를 넘어서 아포리아에 답하고자 하는 플라톤 자신의 결의를 보여주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제 제2권 이후에서 플라톤이 선택한 논의 방식은 더 이상 상대 주장에 대한 논파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을 뛰어 넘어 플라톤의 새로운 목표는 이제 왜곡된 현실 경험을 토대로 무장한 트라쉬마코스 부류의 견고한 반도덕주의자들의 입장을 완전히 무력화할 정도의 압도적인 대안 즉 정의롭고 동시에 행복한 사람, 정의롭고 동시에 행복한 나라의 구체적인 모습을 구축해내는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그러한 나라를 적극적으로 그려낼 수 있도록 제1권과 다른 논의 방식을 선택한다. 실제로 제2권 이후의 대화는 문답의 방식을 취하기는 하지만, 이전처럼 상대 주장을 철저히 검증하고 논박하는 방식이 아니라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소신껏 자신의 생각을 펼 수 있도록 대화상대가 곁에서 도와주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를 위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새로운 대화상대로서 그의 생각을 잘 이해하고 적극 지지해줄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이들이 곧 플라톤의 친형들인 아데이만토스와 글라우콘이다. 이 두 인물은 실제 소크라테스에게 아주 우호적이었으며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 두 형들의 영향이 컸다고 전해진다. 어쩌면 플라톤은 <국가>를 구상하면서 자신이 어떤 이야기를 펼치든 자기 생각을 가장 잘 지지해주고 이해해줄 인물로서 처음부터 그의 친형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글라우콘과 아테이만토스 형제는 플라톤의 의도대로 <국가> 마지막 까지, 마치 오랜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노래하는 판소리꾼 곁에 기꺼이 북장단을 쳐주는 고수(鼓手)처럼, 소크라테스의 성실한 대화 파트너로서 최선을 다해 자신들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국가>의 논의 방식은 비록 대화의 형식을 갖추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문답법적 대화(dialogia) 방식이라기보다는 소피스트들이 즐겨 쓰던 장광설(makrologia)에 가깝다는 점에서 우리를 다소 당황스럽게 한다. 그러나 소피스트들의 주장이 논리적이고도 객관적 검증과 거리가 먼 수사술적 과장 내지 풍자가 동원된 일방적 연설의 형식으로 펼쳐지는 것이라면, 이곳에서의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비록 일방적인 논변이긴 하지만 형식과 내용에서 하나하나 대화 상대의 동의를 받아가면서 최대한 내적 정합성과 체계를 보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다. 아무려나 <국가>의 논의 방식이 갖는 장광설적 면모는 무엇보다도 논의의 초점이 논파나 검증보다는 적극적인 대안 수립에 맞추어진 데 따른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마치 거울상이 실재와 겉모습은 같지만 모든 것이 정반대로 뒤집혀 있는 상(像)이듯이 소피스트 같은 부류들의 장광설적 주장이 갖는 전적인 허구성을 – 그럼에도 현실에서 실제인 양 비쳐지는 그 심각성을 – 빈 구석 하나 없이 전적으로 철저하게 제압해내기 위한 방책으로 제시된 것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거짓에 대한 전적인 전복으로서 어떤 의미에서는 혁명의 방책인 것이다.

이러한 혁명적 대안의 수립을 위한 플라톤의 일차 과제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터파기 작업이다. 위로 건물을 높이 올리기 전에 건물이 높으면 높을수록 더욱 완벽하게 더욱 아래 쪽 방향으로 최대한 더 깊이 파들어 가야하는 이치와 같다. 그래서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에게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도리어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을 더욱 체계화하고 논지도 더욱 보완하고 강화하여, 장차 소크라테스가 내세우는 정의로운 나라, 정의로운 사람이 그 도전을 이겨내고 흔들림 없이 확고하게 바로설 수 있도록, 마치 트라쉬마코스가 냉철한 모습으로 거듭나 다시 대들기라고 하듯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단호하게 두드려 대기 시작한다. 제2권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무려나 제2권 이후 새롭게 채택된 논의 방식은 위와 같은 플라톤 나름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대부분 논변 위주로 전개되고 있어, 제1권이 보여주었던 등장인물들 간의 심리적 묘사를 포함한 드라마틱한 요소들은 크게 반감되어 있다. 이에 따라 앞으로 강해형식 또한 앞에서와 같이 최대한 스테파누스 쪽수 행수를 따라가며 분석하는 방식을 취하되, 필요에 따라 때로는 여러 쪽수, 행수에 걸쳐 제시된 논변을 묶어서 정리하고 분석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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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해 서두에서 소개하였듯이 제2권은 <국가> 전체를 이루는 다섯 꼭지 중 두 번째 꼭지 즉 정의로운 국가와 개인을 다루는 제2권부터 제4권까지의 내용의 첫 부분이다. 그런데 서두에서도 설명하였듯이 제2권과 제3권의 끝은 내용상 단절 없이 그 다음 권으로 이어지고 제4권 끝에 가서야 내용상 단절이 나타나면서 <국가> 세 번째 꼭지(제5권에서 제7권)로 넘어간다. 그러니까 제2권에서 제3권, 제3권에서 제4권의 구분은 내용상의 구분이라기 보다는 순전히 파피루스의 길이에 따른 편집상의 한계에 따른 구분일 뿐이다. 그래서 제2권은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의 문제제기에 이어 본격적으로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을 다루기 위한 서론적 논의와 수호자의 교육이 다루어지다가 내용상 단절 없이 같은 주제로 제3권으로 이어진다. 그 흐름의 세부 내용을 개관하면 아래와 같다.

  1.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의 문제제기(357a-367e)

1-1. 글라우콘의 재반론(357a-362c)

1-1-1 좋은 것의 세 가지 종류와 정의(357a-358a)

1-1-2 트라쉬마코스 주장을 되살려 논제를 제시하다(358b-358d)

1-1-2-1. 논제1: 정의의 기원과 본질 – 사회계약설의 관점(358e-359b)

1-1-2-2. 논제2: 귀게스의 반지와 인간의 본성 – 정의는 마지못해 하는 것(359b-360d)

1-1-2-3. 논제3: 부정의한 자가 정의로운 사람보다 행복하다(360e-362c)

1-2. 아데이만토스의 보완과 요구(362d-367e)

1-2-1. 정의와 평판(362e-366e)

1-2-2. 아데이만토스의 요구(367a-e)

 

  1. 나라의 기원과 발달(368c-374d)

2-1. 정의를 잘 찾기 위한 방편 : 소문자와 대문자 비유(368c-369a)

2-2. 나라의 기원: 자족하지 못함, 서로의 필요에서 생긴다(369a-369c)

2-3. 최소한도의 나라와 분업의 발생, 인구의 증가(369e-371a)

2-4. 무역상, 소매상, 임금노동자 등 서비스업과 화폐의 발생(371b-371e)

2-5. 돼지들의 나라(372a-372d)

2-6. 호사스러운 나라, 염증상태의 나라(372e-373d)

2-7. 전쟁의 기원과 수호자 계층의 발생(373d-374d)

  1. 수호자의 성향과 교육 (376d- 제3권 412b)

3-1. 수호자의 성향(374e-376c)

3-2. 시가교육(376d-

3-2-1. 시가 교육의 목표(376d-380c)

3-2-2. 허용되지 않는 시가의 내용(380d-383c 제2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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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의 문제제기(357a-367e)

 

[357a]

* 소크라테스는 말을 마친 후 논의λόγος에서 풀려났다고 생각하나 이내 이제까지의 논의는 서곡προοίμιον에 불과한 것임을 직감한다. 글라우콘이 트라쉬마코스의 포기ἀπόρρησις 선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소크라테스에게 정의가 부정의보다 모든 면에서 좋다는 점을 ὅτι παντὶ τρόπῳ ἄμεινόν ἐστιν δίκαιον εἶναι ἢ ἄδικον; 그저 설득한 것처럼 ‘보이기’δοκεῖν를 원하는지 아니면 제대로 ‘진정으로 설득해주기’를ἀληθῶς πεῖσαι 원하는지를 묻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게 자기에게 달린 문제라면εἰ ἐπ᾽ ἐμοὶ εἴη 자기는 진짜 설득하는 쪽을 택할 것ὡς ἀληθῶς ἔγωγ᾽ ἂν ἑλοίμην이라고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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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풀려났다고 생각하는ἀπηλλάχθαι ‘논의’는 정의에 관한 논의 자체라기보다는 앞서 진행된 트라쉬마코스와의 논쟁을 가리킨다. 제1권 말미에서 소크라테스는 정의에 관한 논의에서 풀려나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차원에서 다시 시작하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이제 그 새로운 논의의 서곡을 글라우콘과 아테이만토스로 하여금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을 되살려 다시 문제제기하는 방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 이런 점에서 글라우콘이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에 서서 그의 포기 선언(승복이 아니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소크라테스에게 정의가 부정의보다 낫다는 것을 제대로 설득해줄 것을 요구하고 소크라테스가 그에 부응하는 제2권의 첫 장면은 제1권 논의의 계승과 평가 그리고 제2권 이후의 새로운 논의 전개를 동시에 함축하는 일종의 훌륭한 문학적 전환 장치이다. 플라톤이 글라우콘으로 하여금 소크라테스와 더불어 트라쉬마코스에 대한 설득이 실상은 실패로 끝났음을 공유하게 하고 나아가 소크라테스에게 제대로 된 설득을 요구하도록 그리고 있는 것 자체는 이미 제2권 이후의 <국가>의 전개가 아포리아를 노정시키는 차원이 아니라 소크라테스를 통해 정의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대안 제시 차원에서 이루어질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요구에 자발적이고도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 역시 이제 더 이상 아포리아 수준에서 무지의 지를 고백하는 수준의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그것을 뛰어 넘어 트라쉬마코스의 정의관을 압도하고도 남을 만한 정의관을 스스로 구축해내는 수준의 소크라테스로 탈바꿈시키려는 플라톤 자신의 결연한 의지와 열망을 나타내고 있다. 사실 글라우콘의 요구에 대해 ‘그것이 내게 달린 문제라면 진짜 제대로 설득하기를 원한다.’고 대답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무지의 지를 고백하며 적극적인 대답을 제시하기를 저어하는 전기대화편에서의 그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 사실 플라톤은 전기 대화편에서 논의를 완결짓기 보다는 이러저러한 상황을 만들어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무지의 지를 고백하게 하거나 논의 자체를 아포리아 상태로 두고 끝을 맺고 있다. 이를테면 제1권 강해에서도 살폈듯이 <에우튀프론>이나 <뤼시스>에서는 논의 상대가 가버리는 것으로 논의가 끝나고 <라케스>에서는 자신도 난관에 빠졌으니 훌륭한 선생을 구해야한다는 것으로 마무리되거나 <프로타고라스>에서는 대화자들 모두 모든 논의가 뒤죽박죽이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중기 대화편 <메논>에 와서는 무슨 급한 일이 있다는 이유로 아예 소크라테스 자신이 먼저 자리를 뜨는 방식으로 논의가 미해결 상태로 끝나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이런 소크라테스의 모습과 다르다. 이곳에서의 소크라테스는 이제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고자 하는 열의에 가득 차 있다.

* 플라톤은 자신의 형 글라우콘을 ‘만사에 대해 언제나 제일 담대한 사람’ὁ γὰρ Γλαύκων ἀεί τε δὴ ἀνδρειότατος ὢν τυγχάνει πρὸς ἅπαντα으로 묘사하고 있다. 실제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글라우콘은 물론 아데이만토스 두 친형들을 메가라 전투에서 공을 세운 용기 있는 사람이자 철학적 자질도 뛰어난 비범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367e-368a) 플라톤의 의도를 고려하면 제2권 이후에서 소크라테스의 대화상대로 적합한 인물상은 소크라테스에게 우호적이면서도 동시에 그를 비판할 수도 있는 용기와 명민함을 함께 갖춘 사람이어야 했을 것이다. 아마도 플라톤은 당대의 역사적 인물로서 자신의 친형들만큼 그에 적합한 사람이 없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작품의 하나인 <국가>에 자기 친형들을 등장시켜 사람들 기억에 남게 해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혹시 플라톤도 자기 속내를 털어 놓기에 가장 만만한 사람으로 가족을 먼저 떠올렸던 것일까? 메가라 전투가 플라톤의 나이 3살 때인 기원전 424년에 일어났고 그곳에 친형들이 참전했다면 최소한 형들과 플라톤의 나이 차이는 적어도 15-20년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이 점을 고려하면 일찍이 아버지를 여윈 플라톤으로서는 친형들을 아버지처럼 의지하였을 것이고 친형들 또한 플라톤을 자식처럼 보살폈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대화 설정 연대를 410년경 전후로 잡고 있는 일부 학자들은 플라톤의 친형들이 참전했던 메가라 전투를 409년에 벌어졌던 두 번째 메가라 전투로 상정하기도 한다. 그럴 경우 플라톤과 친형들과의 나이 차이는 훨씬 줄어든다. 그러나 대화설정 연대를 410년 전후로 잡을 경우 소크라테스도 거의 노년의 문턱에 이른 나이(59세)가 된다는 점에서 그 자신 노년의 나이에 이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328e의 내용과 맞지 않는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대화 설정 연대와 관련한 논의를 참고)

 

1-1. 좋은 것의 세 가지 종류와 정의의 푯대(357b-358a)

 

[357b-d]

* 소크라테스가 글라우콘의 요구를 받아들이자 글라우콘은 좋은 것τὸ ἀγαθόν을 세 가지 종류로 분류한 후 소크라테스에게 정의는 어느 것에 속하는지를 묻는다.

 

먼저 글라우콘이 분류한 그 세 가지는 아래와 같다,

 

1) 결과로 생기는 것을 갈망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 때문에αὐτὸ αὑτοῦ ἕνεκα 반기며 우리가 갖고자 하는 그런 것, 예를 들어 기쁨τὸ χαίρειν 또는 해롭지 않은ἀβλαβής 즐거움들αἱ ἡδοναὶ, 즉 나중에 그 때문에 가져서 기쁜 것 말고 다른 어떤 것도 전혀 생기지 않는 것μηδὲν γίγνεται ἄλλο ἢ χαίρειν ἔχοντα;.

2) 우리가 그 자체 때문에도 좋아하고 거기서 생기는 것들τῶν ἀπ᾽ αὐτοῦ γιγνομένων 때문에도 좋아하는 것들. 예를 들어 현명함τὸ φρονεῖν이나 봄τὸ ὁρᾶν 또는 건강함τὸ ὑγιαίνειν.

3) 그것들 자체 때문이 아니라 보수μισθός라든가 그것들로부터 생기는 다른 것들 때문에 갖고자 선택할 만한 것. 고생스럽기는 하지만ἐπίπονος 우리를 이롭게 하는 것ὠφελεῖν ἡμᾶς. 예를 들어 신체단련τὸ γυμνάζεσθαι, 아파서 치료 받는 것τὸ κάμνοντα ἰατρεύεσθαι, 치료 행위나 기타 돈벌이ἰάτρευσίς τε καὶ ὁ ἄλλος χρηματισμός.

요컨대 글라우콘은 좋은 것을 1) 그 자체 때문에 좋은 것 2) 그 자체 때문만 아니라 그것에서 생기는 결과 때문에도 좋은 것 3) 고생스럽기는 하지만 그것으로부터 생기는 결과 때문에 좋은 것 등 세 가지로 나누어 정의는 이 가운데 어느 것에 포함되는지를 묻는다.

 

[358a]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행복하게 될 사람이라면 정의는 그 자체 때문에도 그로부터 생겨나는 것들 때문에도 좋아해야할ἀγαπητέον 부류 즉 두 번째 좋은 것에 속한다고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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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것에 대한 글라우콘의 분류는 소크라테스에게 정의가 부정의보다 좋은지를 제대로 설득해달라는 요구와 함께 제시된 것인데 좋은 것들의 분류와 글라우콘의 요구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다소 뜬금없이 보인다. 그러나 글라우콘의 분류 중 소크라테스가 선택하는 ‘좋은 것’은 장차 플라톤이 드러내고자 하는 정의의 특성을 아주 잘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장면 역시 정의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부터 드러내 놓고 시작할 수 있도록 글라우콘이 소크라테스를 위해 멍석을 깔아주는 형색임이 역력하다. 그만큼 이곳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좋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 통상 우리는 이 부분에서 플라톤이 글라우콘의 입을 통해 제시한 세 가지 좋은 것들의 분류를 접하는 순간, 그 세 가지 좋은 것들을 우리가 행해야할 도덕적 행위 기준에 관한 것들로 이해하곤 한다. 실제로 해당 부분에 관한 연구자들의 논의들 가운데 상당부분이 그러한 관점에서 이루어졌고 그에 따른 많은 논란거리가 생기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은 ‘그 자체로 좋은 것’, ‘그 자체로 선한 것’은 칸트(I. Kant)의 동기주의 내지 의무론(deontology)적 윤리학이 주장하고 있듯 ‘정직함’ 등의 행위 덕목과 연관 지어 생각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결과 때문에 좋은 것’은 결과주의 내지 공리주의(utilitarianism) 윤리학이 주장하고 있듯 의도와 상관없이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는 행위 덕목과 연관 지어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좋은 것들에 대한 이러한 접근 방식 내지 이해 방식은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금방 문제에 부딪친다. 우선 여기서 ‘그 자체로 좋은 것’이란 의무론자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도덕적 행위로서 좋은 것이 아니다. 여기서 글라우콘이 그 자체로 좋은 것으로 예시한 것들 즉 ‘기쁨’ 내지 ‘쾌락’은 다만 내적인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지 ‘거짓말 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등의 도덕적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그것은 당위나 명령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시된 기쁨이나 즐거움이 보여주듯 그 자체로 갖기를 바라고 반기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이 말하는 ’그 자체로 좋은 것‘은 칸트적 의무론적 윤리학에서 말하는 ’그 자체로 선한 어떤 ‘행위‘도 아니고, 자신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무조건 의무로 부과되는 정언명령도 아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그것이 갖고 있는 좋은 상태 그 자체 때문에 우리가 반기고 갖고 싶어 하는 좋은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로 언급된 좋은 것 역시 행위라기보다는 슬기로운 능력, 볼 수 있는 능력, 건강을 보전하는 능력인 동시에 그러한 능력이 구현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물론 세 번 째 좋은 것은 예시한 것들 모두가 보여주듯 행위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그 행위들 또한 도덕적 행위로 분류되기는 힘든 것들이다.

* 혹자는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좋은 것 즉 두 번째 좋은 것이 첫 번째 좋은 것으로서 그 자체 때문에 좋은 것을 포함하고 있고 그것에 기쁨이나 쾌락이 예시되어 있다는 점에서 정의가 곧 행복이라고 추론하고 그러한 플라톤의 주장을 공리주의에 부합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정의가 이미 그 자체로 좋은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행위 결과로서의 행복 여부에만 주목하는 공리주의 입장과 거리가 있다. 게다가 그 자체 때문에 좋은 것으로서 기쁨이나 즐거움이 예시되고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부터 곧바로 정의가 곧 기쁨이나 즐거움이라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기쁨이나 즐거움은 그 자체 때문에 좋은 것들의 예시로서 모종의 상태에 국한되어 있지만, 그 자체 때문에도 좋은 것이자 동시에 그것에서 생기는 것들 때문에 좋은 것으로서의 플라톤의 정의는 단순히 좋은 상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건강함이나 현명함들이 보여주듯 그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보전하면서 그로부터 또 다른 좋은 것을 생기게 하거나 구현하는 능력도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자체 때문에 좋지만 기쁜 것 말고 전혀 어떤 것도 생기지 않는 기쁨이나 즐거움이 곧바로 두 번째 좋은 것이 될 수는 없다.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두 번째 좋은 것이 결과 때문에 좋은 것을 포함하고 있고 결과 때문에 좋은 것들로서 보수나 평판이 예시되고 있다고 해서 보수나 평판이 곧바로 두 번째 좋은 것이 될 수도 없다. 두 번째 좋은 것이 첫 번째 좋은 것의 속성과 세 번째 좋은 것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두 번째 것이 그 둘의 단순 조합일수는 없는 것이다. 글라우콘이 분류한 세 가지 좋은 것들은 각각 고유한 속성을 드러내는 서로 다른 것들로서 서로 섞여질 수 없는 것들이다. 요컨대 첫 번째 것은 좋은 상태에만 국한된다는 점에서 두 번째와 같은 것일 수 없고 세 번째 것은 결과만 좋은 것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두 번째와 같은 것일 수 없다.

* 첫 번째 좋은 것이 갖고 있는 좋은 상태 그것만으로는 정의의 필요조건은 되어도 충분조건은 될 수 없다. 정의는 그 자체로 좋은 상태이자 그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보전하며 구현하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정의는 단순히 그 자체로 좋은 상태만이 아니라 늘 그 상태로 있게 만들어주는 기술적 실행 능력을 함께 갖추고 있는 것이며, 그에 따라 시종일관 하나같이 좋은 상태로 있는 것이어서 그것의 담지자에게 결과로서 좋은 것까지 안겨주는 그 자체로 완벽하게 좋은 것이다. 정의는 첫 번 째와 세 번째 조건들의 단순 조합으로서 좋은 것이 아니라 상태와 능력과 결과들이 유기적이고도 통일적으로 결합된 그것 자체로 하나의 좋은 것, 그야말로 통째로 좋은 것이다. 정의와 같은 부류의 좋은 것으로서 플라톤이 예시한 것들, 이를테면 건강함이 그 자체로 몸의 좋은 상태인 동시에 유기체로서 병적 요소를 물리쳐가며 몸의 좋음을 통일적으로 보존하고 유지하는 능력이듯이 정의 또한 그러한 것이다. 이처럼 정의는 시종일관 그 자체로 완벽한 상태이자 제1권에서 수차 언급하고 있듯 탁월한 실행력으로서 덕이자 훌륭함(ἀρετή)이어서 언제나 그리고 반드시 그것을 가진 나라나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굳이 보상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정의는 그 자체 때문에 행복하다는 점에서 이미 그것으로 내적인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고 동시에 정의는 결과 또한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점에서 외적인 사회적 보상도 함께 가져다주는 것이다. 이것이 곧 플라톤이 세우고자 하는 정의의 푯대이다. 나라와 개인들에게 좋은 것들로서 플라톤이 제시하는 정의의 구체적 내용들은 시대와 관점에 따라 논쟁의 대상이 될 수는 있어도 정의에 관한 철학적 입장으로서 이보다 더 완벽한 속성과 목표를 제시하고 있는 정의관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플라톤은 이제 이러한 이상적 푯대를 세워 더 하늘을 찌를 정도의 낙관적 기세를 가지고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의 수립과 구축에 나선다. 플라톤이 내세우는 정의는 정의의 푯대로서 가히 신적인 표상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정의에 관한 적극적인 답변을 내놓고자 하는 제2권의 첫 장면에서 정의가 어떤 부류의 좋은 것인지에 대한 글라우콘의 물음과 그것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대답은 앞으로 ‘정의가 부정의보다 좋다’ 결론을 향해 소크라테스가 펼칠 주장에 대한 검증의 근본 지표가 된다. 플라톤은 <국가>의 논의를 본격적으로 펼치기 전에 그와 같은 정의의 근본 특성부터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정립하려고 했던 것이다.

* 플라톤이 글라우콘의 입을 통해 두 번째 좋은 것에 속하는 예로서 현명함과 봄을 들고 있는 것은 플라톤 자신 인간의 능력으로서 인지기능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특히 그가 예시한 건강함은 정의를 나타내는 가장 적확한 비유개념으로서 곳곳에서 인용된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인지 기능 중 유독 ‘봄’τὸ ὁρᾶν을 예시한 것은 일상적인 봄과 더불어 철학적 관조(idein)를 염두에 둔 것일 수도 있다.

* 첫 번째 좋은 것의 예로서 ‘해롭지 않은 즐거움’αἱ ἡδοναὶ ὅσαι ἀβλαβεῖς과 관련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예로 아래와 같이 음악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음악이 노래를 동반하든 아무런 장식이 없든 간에 가장 즐거운 것들 중 하나라고 말한다. 적어도 무사이오스는 노래하는 것이 인간에게 가장 즐거운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까닭에 기쁨을 주는 그 힘 때문에 그것을 친교적 회합과 여가활동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또한 바로 이점에서 사람들은 젊은이들이 음악 속에서 교육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해가 없는 즐거움은 그 궁극목적에도 어울릴 뿐만 아니라 휴식과도 어울리는 것이기 때문이다.’(<정치학> 8권 1339b 20-27, 김재홍 역)

* 좋은 것과 관련하여 비슷한 분류가 스토아학파의 창시자인 키티온의 제논(Zenon)의 언급에서도 발견된다. ‘좋은 것들 중에 어떤 것들은 최종적인 것이 되고telikos 어떤 것들은 매개가 되고poiētikos 어떤 것들은 최종적인 것이 되면서 매개가 된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친구와 그로부터 비롯되는 이로움은 수단이 되는 좋은 것들이다. 반면에 용감함tharsos, 자부심phronēma, 자유, 희열terpsis, 유쾌, 안락alypia과 덕에 따른 모든 행위는 목적이 되는 것이다.’(<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제7권 96.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김주일 외 역주, 근간)

 

1-2. 글라우콘의 이의 제기(358a-362c)

 

[358a]

* 글라우콘의 물음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정의는 두 번째 좋은 것에 포함되는 것이라고 답을 하자 글라우콘은 먼저 다중들ὅι πολλοῖ의 견해를 소개하며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한다. 다중들은 소크라테스의 생각과 달리 정의는 고생스런 부류에 속하는 것τοῦ ἐπιπόνου εἴδους이며 다만 보수μισθός와 평판δόξα을 통한 명성εὐδοκίμησις 때문에 수행해야한다고 여길 뿐 그 자체 때문이라면 까다로운 것으로서 피해야 하는 부류의 것φευκτέον ὡς ὂν χαλεπόν으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다중들의 견해와 정의에 대한 트라쉬마코스의 비난을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나는 배우는 데 굼뜬 사람τις δυσμαθής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 철학자는 다중들의 생각을 모른 채 허황된 이상만을 논하는 사람이 아니다. 철학자는 다중들의 생각도 꿰뚫어 보고 있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가 배우는 데 굼뜨다고 말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무게를 갖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철학은 지성에 대한 예민함이며 그 예민함은 거꾸로 거짓과 불의로부터 전해지는 유혹에 둔감함을 길러주는 것이다. 불의에 약삭빠르게 반응하는 것은 그 자체로 반지성적인 것이자 반철학적인 것이다.

 

1-2-1 트라쉬마코스 주장을 되살려 논제를 제시하다(358b-358d)

 

[358b]

* 그러자 글라우콘은 트라쉬마코스가 물러선 것은 뱀 다루는 사람에게 뱀이 홀리듯ὥσπερ ὄφις κηληθῆναι 소크라테스에게 너무 일찌감치 홀린 결과로 밖에 생각이 안 되고, 그의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각각에 대한 논증ἡ ἀπόδειξις περὶ ἑκατέρου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을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기가 그들의 주장이나 다중(多衆)ὃῖ πολλοῖ의 주장에 동의한다는 것이 결코 아니며 다만 ‘그 각각이 과연 무엇인지τί τ᾽ ἔστιν ἑκάτερον 그리고 그 각각이 영혼 안에ἐν τῇ ψυχῇ 있을 때 그 자체로αὐτὸ καθ᾽ αὑτὸ 어떤 힘을 갖는지’를τίνα ἔχει δύναμιν듣고 싶을 뿐이라고 토로한다. 이에 따라 글라우콘은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을 되살려서ἐπανανεώσομαι 그 요체를 아래 세 가지 논점으로 나누어 주장할 터이니 소크라테스에게 그에 대한 답을 해달라고 요청한다.

* ‘뱀 다루는 사람에게 뱀이 홀리듯ὥσπερ ὄφις κηληθῆναι’을 박종현 역본은 ‘뱀한테 올리듯’으로 잘못 옮기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뱀에 비유되는 것도 이상하지만 어쨌거나 원문에는 뱀이 홀림을 당하는 것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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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그 각각이 무엇인지’, ‘그 각각이 영혼 안에 있을 때’라는 글라우콘의 말에서 각각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명시적으로 나와 있지는 않지만 내용적으로 그것은 정의와 부정의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그 각각이 가리키는 것을 그렇게 이해할 경우 글라우콘의 말은 자칫 정의와 부정의 각각을 실체인 양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다. 특히 그 자체αὐτὸ καθ᾽ αὑτὸ라는 표현은 형상을 나타날 때 쓰는 표현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곳에서 그가 일컫고 있는 각각 즉 정의와 부정의는 모두 현실의 영역 속에서 현실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일종의 무규정적 정도(degree)를 가지고 있는 것들이라는 점에서 이미 독자적인 실체일 수는 없다. 소크라테스는 이미 제1권에서도 어중간한 상태의 부정의를 언급한 바가 있다.(352c) 아무튼 글라우콘의 말이 어떻든 플라톤에게 부정의는 분명 정의의 결핍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둔다면 글라우콘이 말한 ‘그 자체’라는 말에 큰 무게를 둘 필요는 없을 것이다. 굳이 ‘그 자체’라는 표현을 부정의와 관련시켜 이해한다면 뒤에서도 언급되고 있듯이 정의를 가장 최대로 결핍한 상태 즉 최대의 부정의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 글라우콘의 요청은 이제 본격적으로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을 재현하여 따지는 방식으로 새로운 정의론을 구축하기 위한 터파기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소크라테스에게 대놓고 그가 행한 각각의 논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글라우콘의 태도가 자못 공세적이다. 무엇보다 글라우콘의 요구에는 플라톤이 <국가>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간명하지만 매우 의미심장하게 함축되어 있다. 우선 제1권 말미에서 소크라테스가 후회하고 있듯이 무엇보다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소크라테스 자신의 답변이 제시되어야한다. 더 이상 상대방 주장에 대한 논파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定義)가 주어진다고 해서 목표가 완결되는 것이 아니다. 이제 말을 통한 정의 즉 내용 규정 차원을 넘어서서 정의가 실제로 영혼 안에 있을 때 그 자체로 과연 어떤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증명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글라우콘의 이 두 번째 요구는 제1권 말미에서의 소크라테스의 불만이 전기 대화편에서의 그의 불만 즉 단지 규정 차원의 미흡함에 대한 불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실제로 정의가 갖는 구체적 힘에 대한 논증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에 대한 불만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요컨대 플라톤이 글라우콘의 요구를 통해 제시하는 <국가>의 핵심 목표는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의 적극적인 구축이자 건설인 것이다.

* 그런데 글라우콘이 소크라테스에게 정의와 부정의 각각이 갖는 힘을 말해줄 것을 요청할 때 정의와 부정의 각각이 그 자체로 어떤 힘을 갖는 경우를 ‘그 각각이 영혼 안에 있을 때’로 특정하고 있는 것도 우리의 주목을 끈다. 왜냐하면 <국가>에서 다루어지는 정의와 부정의가 기본적으로 나라와 개인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이라면 그 각각이 ‘개인의 영혼’ 안에 있을 때 어떤 힘을 갖는지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나라’ 안에 있을 때 어떤 힘을 갖는지에 대해서도 함께 알려달라고 해야 당연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플라톤의 정의가 궁극적으로는 나라와 개인 두 영역에서 유기적이고도 통일적으로 관철되어 있는 것이고 그에 따라 그것들을 서로 구분해서 볼 필요는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하더라도 일단 <국가>에서 정의를 논하는 기본 출발점에는 개인의 영혼 즉 개인의 정의로운 영혼에 대한 관심사가 자리를 잡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환기시켜 준다. 그러나 그것이 플라톤의 개인에 대한 관심의 우위성이라고까지 너무 과도하게 해석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바로 앞 제1권에서도 부정의가 한 사람 안에서 생기게 될 경우 갖게 되는 힘을 언급하면서 그것이 깃드는 곳으로서 나라와 씨족, 군대 등 집단들도 같은 경우로서 함께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351e-352a) 아무려나 개인과 나라 어디에 방점을 두든 글라우콘의 요구에 담겨 있는 내용만 보더라도 일단 정의에 관한 플라톤의 관심사가 개인과는 전혀 무관하고 오직 나라와 집단과 연관해서만 집중되어 있다는 세간의 이해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358c]

* 그리하여 글라우콘은 새로운 차원의 논의를 시작하기에 위한 터파기 작업의 일환으로 소크라테스에게 트라쉬마코스의 논변을 되살려ἐπανανεώσομαι τὸν Θρασυμάχου λόγον 아래와 같이 세 가지 논변으로 제시하겠다고 말한다.

1) 사람들이 말하는 정의의 본질과 기원δικαιοσύνην οἷον εἶναί φασιν καὶ ὅθεν γεγονέναι, 2) 정의는 그것이 ‘좋은 것이어서가 아니라 마지못해 할 수 없이 하는 것’ἐπιτηδεύουσιν ὡς ἀναγκαῖον ἀλλ᾽ οὐχ ὡς ἀγαθόν이다. 3) ‘부정의로운 사람의 삶이 정의로운 사람의 삶보다 낫다’ἀμείνων ἄρα ὁ τοῦ ἀδίκου ἢ ὁ τοῦ δικαίου βίος.

 

[358d]

* 글라우콘의 제시가 앞으로의 논의를 위한 터파기라는 점은 논의 제시에 앞서 그가 피력하고 있는 심정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즉, 자신은 위와 같은 논변들에 조금도 동의하지 않지만 트라쉬마코스를 비롯해 무수한 다른 사람들로부터 귀가 닳도록 그런 이야기를 듣다보니διατεθρυλημένος τὰ ὦτα ἀκούων 자신도 혼란스러워졌고ἀπορῶ 게다가 누구로부터도 자기가 바라는 만큼 ὡς βούλομαι 만족스럽게 정의를 옹호하는 주장을 들은 적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는 소크라테스로부터 정의가 그 자체로서 찬양받는ἐγκωμιαζόμενον 것을 듣고 싶고, 그것을 위해 자기는 반대로 어떻게든 전력을 다해μάλιστα 부정의한 삶을 칭찬ἐπαινῶν 하겠다는 것이다.

* 글라우콘의 이러한 태도는 심정적으로는 정의가 옳다고 생각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여기지 않고 있는데다가 그에 대해 특별히 대응할 능력도 없어 당혹스러워하는 당시의 양심적인 지식인들 내지 젊은이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황은 오늘날에도 더 심화되었으면 심화되었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358e]

*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의 의도와 요구를 들은 후 지각νόος 있는 사람으로서 그러한 주제를 말하거나 들을 때보다 더 자주 기뻐할 것은 없다고 크게 환영의 뜻을 표한다. 이제 정의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새로운 차원의 대화가 시작될 준비가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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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 정암학당에서 열리는 <국가> 강해가 제2권부터는 강사 사정상 격주로 진행되므로 이곳 웹진 강의록도 강해가 이루어진 다음 주 수요일 경에 게재됩니다.

 

자본주의는 리얼인가, 허상인가 -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읽고 [철학자의 서재]

자본주의는 리얼인가, 허상인가.

-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읽고.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할 수 있을까. 우리는 더 이상 상상도 못하게 되었다.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상상을 허락하는가. 80년에 태어나서 지금껏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고 있는 나 같은 사람은 자본주의의 ‘외부’를 알지 못한다. 그 외부는 어디에 있을까.

 

집 앞에 가게들은 수시로 새로 생기고 없어지고를 반복한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마르크스는 지상에 단단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은 대기 속으로 사라진다고 했던가. 프레드릭 제임슨 말대로 우리에겐 ‘현재’만 있는 것 같다. 역사도 없고 미래도 없으며 가치도, 믿고 따를 진리도 없다. 돈, 이라는 진리 말고는.

 

이제 아이들의 꿈은 대통령이 아니라 고작 건물주나 기업가, 아니면 잘나가는 연예인이다. 이 책의 저자 마크피셔는 이런 우리의 현실을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 부른다. 여기서 현실은 실재와 다른 것인데, ‘실재’는 이런 현실을 균열내는 무엇이다. 자본이 다가 아냐, 라고 조용히 외치는 무엇. 하지만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막강함은 이런 실재를 다시 현실로 대체하고 번역한다는 데 있다.

 

샤갈 전시에 가서 하늘을 나는 샤갈의 인물들을 보고 우린 잠시 ‘상상’이란 걸 하게 된다. 하지만 그게 다다. 미술관을 나오면 다시 우리의 현실은 상상하게 내버려 두지 않으며 상품 사회, 자본주의의 쳇바퀴에 물려 돌아가게 한다. 거대한 수용소다. 미술관 투어는 잠시의 일탈일 뿐이다. 그리고 그마저도 상품이 된다. 미술관 입구에는 샤갈의 굿즈들이 손짓할 뿐이다.

 

자, 이제 우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소비자나 구경꾼으로만 남아 있을 뿐인가(p. 16). 지젝이 말한 것처럼 반자본주의는 자본주의에 널리 유포되어 있다(p. 28). 저자는 라이브8 콘서트는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항의라는 점에서 기이한 항의였다고 말한다(p. 33). 부인되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이 세계의 억압적 네트워크와 공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p. 34).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월 3만원을 보내고 ‘안심’하면서 살아갈 수 있으면 된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정말 안심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 모두는 이걸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면서 모른 척 하는 것일까. 구조적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재생지를 쓰고 분리수거를 잘 하는 것으로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대안이 있는가.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냐는 것이다. 우리는 지폐가 종이쪼가리라는 것을 알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불쏘시개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내가 그것을 종이라 여겨도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종이가 아니라 대단한 가치를 지닌 것이라 믿고 숭배한다면 별 수 있는가, 나도 그렇게 하는 수밖에. 이런 식이다. 우리는 이런 ‘상호수동성’의 태도로 일상을 살아간다.

 

변혁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김수영의 시에서처럼, 우리 소시민들은 ‘혁명은 못하고 방만 바꿀’ 뿐이다. 이런 근본적 기분, 무기력과 우울은 일상이 되었다. 우울증은 개인의 병일 뿐 인가. 사회적, 경제적 효과인가. 정신적 문제들을 개인화하면 사회체계의 인과관계에 대한 어떤 물음도 차단된다(p. 45). 우리는 그 거대한 뿌리를 탐색해야 한다. 하지만 우린 현상 에만 매달려 있다.

 

티비는 연일 리얼리티, 먹방, 예능 프로들로 우리의 정신을 마비시킨다. 우리는 밤샘 티비 시청이나 마리화나에 취하는 쾌락적 나른함에 빠져들고, 학생들은 햄버거를 원하는 방식으로 니체를 원한다(p. 49). 순전한 소비자의 경험, 사회적인 것을 피해 집 안에 틀어박히는 경험 말이다(p. 49). 지구상에 더 이상 진지한 것은 없다. 저자는 성공한 수많은 사업가들이 난독증인 것도 이유가 있다(p. 52)고 말한다.

 

후기 자본주의, 포드주의에서 포스트포드주의로,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주의로의 변화는 영구적인 불안정성을 가져왔다. 끊임없는 유동성, 사람들은 이제 이 역할 저 역할을 하며 주기적으로 새로운 기술을 배워야 하며 노동인구의 비정규화, 취업 상태와 실업 상태가 번갈아 이어진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미래를 계획할 수 없게 되었다(p. 65). 자본주의는 호황과 불황 사이를 오가며 사람들은 조증과 울증 사이를 오간다. 사람들은 계급 갈등에 관심이 있지만 연기금에 가입한 자로서 자신의 투자 수익을 최대화하는 일에도 관심이 있다(p. 66).

 

이제, 사회 곳곳에 위계는 사라지고 수평화 되었지만 일터의 곳곳에 CCTV는 노동자들을 감시한다. 그 결과는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를 늘상 감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되게가 아니라 스마트하게 일하기, 는 내가 스마트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노동자들을 항상적인 자기 폄하에 시달리게 만든다(p. 91). 젊은이들은 스펙쌓기에 바쁘고 낙오자가 되지 않을까 스스로를 감시한다. 이 피곤함에 따른 보상이란 기껏해야 오디션 프로그램 시청 중 전화를 걸고 마우스를 누르면서. 잠시 우리 자신이 권력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p. 85)는 것 정도다.

 

이러한 거대한 무능력 상태에 대한 책임자는 어디에도 없다. 카프카는 K의 공식적 지위를 최종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궁극적 책임 기관에 도달하려는 노력이 실패(p. 87)하는 지점을 놀랍게 보여준다. 사람들의 분노는 애매하게 콜센타 직원들에게 도달한다. 이들의 정신 건강은 또 누가 책임질 수 있을 것인가.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예를 들자면 끝도 없을 것 같다.

 

웰빙, 건강에 대한 강조는 어떤가. 이러한 강조는 정신 건강이나 지적인 성숙의 문제에 거의 관심 갖지 못하게 만들며(p. 124) 사람들은 인터넷이라는 자아의 제국에 빠져든다. 페이스북은 나르시시즘에(p. 127). 거대서사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의심에 맞서 우리는 이러한 징후들이 모두 고립된 우연적 문제가 아니라 체계적 원인, 자본의 효과라고 단언해야 한다(p. 130).

강력하게,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은 상황에서 말해야 한다(p. 135). 대안이 있느냐는 반문에 우리 각자가 이렇게 한마디씩만 하면 된다. 자본주의는 최악의 시스템이라고. 누군가는 이런 주장이 터무니없다고, 철없는 소리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보다 더 터무니없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 아닐까. 이 책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작은 책이니 이동 시간에 오며가며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작지만 강하다. 일독을 권한다.

 

– 글, 엄진희(시인, 문학평론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㉒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4-13(352d~354a) : ‘정의로운 사람이 부정의한 사람보다 잘 살고 행복한가?’에 대한 검토

 

[352d]

* 이제 검토하기로 했던 마지막 문제가 남아있다. ‘정의로운 사람이 부정의한 사람보다 훌륭하게 살고 행복한가?ἄμεινον ζῶσιν οἱ δίκαιοι τῶν ἀδίκων καὶ εὐδαιμονέστεροί εἰσιν;’ 이 논의는 예사로운 것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어떤 생활방식으로 살아가야만 하는가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οὐ γὰρ περὶ τοῦ ἐπιτυχόντος ὁ λόγος, ἀλλὰ περὶ τοῦ ὅντινα τρόπον χρὴ ζῆν.

* ‘나중에 검토해보도록 제의했던 문제이오만 이제 이를 검토 해보야만 되겠소.’ὅπερ τὸ ὕστερον προυθέμεθα σκέψασθαι, σκεπτέον. 역문에서 ‘나중에 검토해보도록 제의했던’ 부분이 앞에서 어디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혹시 347e에서 언급된 ‘나중에 다시 또 검토하기로 했던 문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그것은 정치적 차원에서 정의가 강자의 이익인가라는 문제라는 점에서 내용 상 맞지를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그 언급에 바로 이어서 제기된 문제 즉 그 ‘정의는 강자의 이익인가’라는 문제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었던 문제 즉 ‘부정의는 정의보다 나은 것인가?’라는 삶의 방식과 관련한 문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곳에서 소크라테스는 지금 검토해야할 문제가 곧 ‘삶의 방식’에 관한 문제라고 직접 언급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원문 ὕστερον을 ‘나중’으로 번역하기 보다는 ‘그 다음에 이어서’의 뜻으로 옮기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즉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논쟁 ‘다음으로 그것에 이어서 우리가 검토하기로 제기했었던’ 문제 즉 ‘부정의가 정의보다 나은지, 부정의가 정의보다 나은지’를 이제 검토보아야 되겠다는 것을 말한다. 이 문제는 344e에서도 논의의 핵심과제로서 강조되었고 347e에서도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논제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과제로 거론되었고 또 여기에서도 소크라테스에 의해 다시 한 번 확인되고 있다. 물론 이 문제는 앞에서 덕과 지혜 차원에서 힘과 능력 차원에서 검토된 바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제껏 우리가 말한 것을 근거로’도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 분명하다’φαίνονται μὲν οὖν καὶ νῦν, ὥς γέ μοι δοκεῖ고 말을 한다. 그러나 이것에 관한 논의는 앞에서도 수차 강조되었듯 ‘예사로운 문제가 아니므로’ ‘한층 더 잘 검토해 보아야할’ἔτι βέλτιον σκεπτέον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앞서 정의가 덕과 지혜 그리고 힘에 있어서 낫다는 것을 토대로 ‘왜 정의로운 삶이 부정의한 삶보다 훌륭하고 이득이 되며 행복한가’를 두 번째 논쟁의 세 번째 논제이자 마무리 논제로 검토하려는 것이다.

* 이 문제에 대한 검토를 위해 우선 소크라테스는 말(馬)ἵππος의 기능을 예로 들어 기능ἔργον이란 무엇인지를 묻는다.

 

[352e]

* 우선 소크라테스는 기능이란 즉 ‘어떤 것이 그것으로써만 할 수 있는 또 가장 잘 할 수 있는 그런 것’ὃ ἂν ἢ μόνῳ ἐκείνῳ ποιῇ τις ἢ ἄριστα이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눈의 기능은 보는 것, 귀의 기능은 듣는 것이다.

 

[353a]

* 단검이나 칼 등 베는 여러 가지로도 물론 포도나무 가지를 자를 수 있지만 전정용 낫δρέπανον 만큼 훌륭하게 자르지 못하는 한, 전정용 낫의 기능이 곧 포도나무 가지를 자르는 것이다. 이렇듯 ‘그것만이 뭔가를 해낼 수 있거나 또는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그것이 가장 훌륭하게 해낼 수 있는 그런 것이 각각의 기능이다.’τοῦτο ἑκάστου εἴη ἔργον ὃ ἂν ἢ μόνον τι ἢ κάλλιστα τῶν ἄλλων ἀπεργάζηται

 

[353b]

* 기능이 부여되어 있는 각각의 것에는 훌륭함(덕)ἀρετὴ도 있다. 눈, 귀 등 각각이 다 제 고유의 훌륭한 상태(훌륭함, 덕)를 가지고 있다.

 

[353c]

* 각각은 그 ‘특유의 훌륭한 상태’(οἰκεία ἀρετή)에 의해 그 기능을 훌륭하게καλῶς 수행하지만, 나쁜 상태(나쁨κακία)에 의해서는 그 기능을 나쁘게κακῶς. 수행한다.

* 요컨대 어떤 것의 기능ἔργον은 ‘어떤 것이 그것으로써만 할 수 있는 또 가장 잘 할 수 있는 그런 것’이고 훌륭함(덕)ἀρετὴ은 그 기능이 탁월하게 구현된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훌륭함(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자신의 고유한 기능을 ‘스스로 탁월하게 구현할 줄 알고’ 그래서 ‘그 특유의 탁월한 상태τῇ οἰκείᾳ ἀρετῇ로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그 상태는 그 기능의 대상에 대해 탁월하게 작용한다는 측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눈의 덕’은 언제나 가장 잘 볼 수 있는 시력을 스스로 유지하게 하는 힘이자 그에 따라 대상을 가장 탁월하게 볼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비되는 악덕 (나쁨κακία)은 그와 같은 덕을 앗기거나στερόμενα 결여하고 있는 나쁜 상태이자 기능의 저하에 따라 나쁜 작용을 하여 대상과 관련하여 나쁜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이를테면 ‘눈의 악덕’은 시력을 결여한 상태로서 나쁜 시력 때문에 대상을 잘못 보거나 틀리게 보는 것 즉 사물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능력의 결핍 내재 부재를 말한다. 참주는 덕을 가장 결핍한 가장 나쁜(악덕을 가진) 자로 그에 따른 부작용 즉 부정의를 최대로 야기하는 자이다.

[353d]

* 그 밖의 모든 것에 대해서도 같은 이치가 적용된다면 영혼ἢ ψυχῇ에도 기능이 있다. 즉 보살피거나 다스리는 것(통솔하는 것), 심사숙고 하는 것τὸ ἐπιμελεῖσθαι καὶ ἄρχειν καὶ βουλεύεσθαι 그리고 사는 것τὸ ζῆν 등이 혼의 특유한 기능이다.

 

[353e]

* 그렇다면 위와 마찬가지로 나쁜 상태의 혼으로서는 잘못 다스리고 보살피겠지만 훌륭한 상태의 혼으로서는 이 모든 일을 ‘잘 해내게’εὖ πράττειν 될 게 필연적이다.

* ‘그런데 앞서 정의는 혼의 훌륭한 상태(ἀρετή훌륭함, 덕)이지만 부정의는 나쁜 상태(나쁨, 악덕κακία)라는 점이 동의되었다.

* 그렇다면 결국 정의는 혼의 기능을 훌륭한 상태가 되게 함으로써 정의로운 혼과 정의로운 사람은 잘 살게εὖ βιώσεται 되겠지만, 부정의한 사람은 잘못κακῶς 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잘 사는 사람ὅ εὖ ζῶν이 복 받고 행복하며μακάριός τε καὶ εὐδαίμων’ 잘못 사는 사람은 그 반대이다.

 

[354a]

*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사람이 행복하고 부정의한 자는 불행하다ὁ μὲν δίκαιος ἄρα εὐδαίμων, ὁ δ᾽ ἄδικος ἄθλιος고 말하고 트라쉬마코스는 마지못해 그것에 동의한다.

* 결국 이 모든 논의를 토대로 소크라테스는 행복εὐδαιμονία이 이득이고 불행ἄθλιόν은 이득λυσιτελής이 아니므로 결국 ‘부정의는 정의보다 결코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 이로써 검토와 논박이 모두 마무리된다. 트라쉬마코스는 자기가 말한 대로 검토과정에 순순히 수긍하고 결국 자기주장의 반대로 귀결되자 ‘벤디스 여신 축제일Βενδίδεια을 당신의 축하 잔치로εἱστιάσθω 삼으라’고 비아냥대며 말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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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라쉬마코스 주장에 대한 이상의 마지막 검토 부분에서도 의미 있게 음미할 부분이 적지 않다.

1) 353e에서 소크라테스는 ‘정의는 혼의 덕이고 부정의는 혼의 악덕’임이 앞에서 동의되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앞 어디에도 그런 부분은 없다. 다만 350d에서 ‘정의는 훌륭함(덕)과 지혜ἀρετῆ καὶ σοφία이고, 부정의는 악덕κακία과 무지ἀνεπιστημοσύνη’라는 점은 마지못해서 이기는 하지만 서로 동의한 것으로 언급된다. 그러나 ‘정의는 덕이다’라는 말과 ‘정의는 혼의 덕이다’라는 말은 다른 말이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능가와 관련한 두 번째 검토에서 동의된 결론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정의는 혼의 덕이다’라는 말도 당연히 동의된 것으로 여겼을 수 있다. 왜냐하면 앞서 능가 관련 검토에서 ‘정의가 덕이다’라는 결론은 아래의 의미를 이미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i) 정의는 능가가 필요 없는 그 자체로 훌륭한 상태, 적도의 상태인 동시에 그것을 관철시키는 기능이다. ii) 정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 즉 정의로운 사람은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상태와 기능들을 최선의 상태로 구현하게 만든다. iii) 그러므로 정의로운 사람은 자신 내부의 혼의 상태와 기능도 당연히 최상의 훌륭한 상태로 만든다. 물론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은 능가와 관련한 두 번째 검토의 결과로 주어진 결론으로서 그 검토 과정 그 자체가 모종의 한도와 경계의 존재를 전제하고 성립된 것이라는 점에서 그 논증 자체가 완전한 것인지 아닌지는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2) * 설사 정의가 혼의 덕이라고 합의되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앞에서 각 기능들은 눈과 귀, 포도나무 전정용 낫이 그렇듯이 그것들의 훌륭한 상태로서 덕을 가지고 있다. 즉 기능과 덕은 일대일로 대응한다. 그런데 앞서 언급되었듯이 혼은 여러 가지 기능들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정의는 그러한 혼들 가운데 어떤 기능에 대응하는 것인가? 덕이 기능과 일대일로 대응하는 것이라면 정의가 혼의 덕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고 그렇다고 정의만이 유일하게 여러 가지 덕을 갖는 것이라고 말을 해도 뭔가 앞뒤가 맞지 않거나 지금까지의 논변만으로는 일단 증명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언급 상의 내적 불일치 내지 논거의 부족함이 가져다주는 의문은 이곳에서 명시적으로 해명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정의는 혼의 덕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과연 아무런 근거 없이 그냥 이곳에서 불쑥 내던져진 말일까? 우리는 이와 관련한 의문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비록 명시적으로 답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앞에서 언급된 내용들을 잘 헤아려 보면 ‘정의가 혼의 덕이다’라는 말이 어떤 맥락과 근거에서 나오게 된 것인지를 일정 부분 이해할 수 있다고 판단된다.

* 우선 소크라테스는 정의의 힘을 거론하면서 그 힘을 어떤 집단이 공동으로 일을 도모하고자 할 때 그들에게 합심과 우애를 가져다주는 힘으로 언급하고 있고 흥미롭게도 개인도 그 여럿으로 구성된 집단의 연장선상에서 설명하고 있다.(351e-352a) 이것은 앞서도 설명하였듯이 소크라테스 자신 개인의 영혼 자체가 여럿으로 구성되었음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소크라테스의 생각은 앞으로 영혼 3분설의 형태로 제시된다. 즉 혼은 개인에게 하나의 혼이되 그것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하부의 혼들이 또 있는 것이고 정의는 그 여러 가지 혼들에게 합심과 우애를 가져다주어 그것의 총화로서 개인의 혼이 일을 잘 도모할 수 있게 해주는 덕인 것이다. 즉 정의는 덕이자 지혜이면서 공동의 일을 도모하는 여럿에게 합심과 우애를 갖게 하는 능력으로서 개인 내부의 여러 혼들에게 합심과 우애를 갖게 하여 그것들로 구성된 혼이 훌륭한 일을 도모할 수 있는 상태 즉 혼의 덕을 가질 수 있게끔 하는 덕인 것이다. 요컨대 정의는 개인의 여러 혼들이 각기 가지고 있는 덕들을 합심과 우애로써 조화를 이루게 하여 그것들로 구성된 혼으로 하여금 온전한 덕을 가지게 하는 덕인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정의는 나라나 집단 차원에서는 구성인 또는 계층들의 기능과 덕을, 그리고 개인차원에서는 개인 내부의 혼의 기능과 덕들을, 합심과 우애로써 한 나라, 한 마음으로ὁμονοοῦντα αὐτὸν ἑαυτῷ(352a) 조화 통합시키는 덕인 것이다. 굳이 영혼 3분설을 내세우지 않고 두 번째 논쟁과 관련하여 소크라테스가 수행한 앞부분 검토 내용만 가지고도 위와 같은 내용은 충분히 추론 가능하다고 판단된다. 그렇다면 위와 같은 내용들에 비추어 볼 때 비록 그곳에서 혼이라는 표현은 직접적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았지만, 소크라테스가 ‘정의가 혼의 덕’이라고 말하는 내용이 결코 비약이라거나 아무런 근거 없이 내던져진 말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라 할 것이다.

3) 위의 내용의 연장선상에서 소크라테스가 혼의 특유한 기능들로 언급하고 있는 것들 즉 ‘보살피거나 다스리는 것(통솔하는 것), 심사숙고 하는 것τὸ ἐπιμελεῖσθαι καὶ ἄρχειν καὶ βουλεύεσθαι 그리고 사는 것τὸ ζῆν’ 등(353d)과 관련해서도 의미 있게 음미해볼 만한 내용들이 들어 있다. 이 부분 역시 영혼의 여러 부분들과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기능들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한다면, 이곳에서 언급된 혼의 기능들 또한 앞으로 <국가> 전체를 통해 거론될 정의로운 나라와 정의로운 개인을 구성하는 계층들과 혼들의 역할 내지 기능들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자 나아가 그것들과 일정부분 대응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보살피거나 다스리는 것’(ἄρχειν은 군사적으로 군대를 지휘, 통솔하는 것command, 행정적인 관리govern의 뜻도 있다)은 철학자 왕을 보조하고 시민들을 보살피는 수호자 계층의 기능을 함축하고 있고, ‘심사숙고’βουλεύεσθαι는 수호자들 가운데에서 선발된 철학자왕의 역할을 함축하며, ‘사는 것’τὸ ζῆν(to zēn)의 연관 동사 ζάω(zaō)가 기본적으로 생명 활동 및 생활을 유지 보존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생산자 계층의 기능을 함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고 또 그것은 개인 영혼에서 이성과 기개와 욕구의 기능과도 일정 부분 대응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혼ψυχῇ은 이미 호메로스 시절 이래 ‘목숨’의 뜻도 가지고 있다.

4) * 이러한 논의들을 토대로 소크라테스는 결국 두 번째 논쟁의 마지막 논제 즉 정의로운 사람이 부정의한 사람보다 행복하다는 주장을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논증한다. i) 혼에는 여러 기능들이 있다’(353d) ii) 혼의 덕은 그 기능을 잘 해낼 게εὖ πράττειν 필연적이다(353e) iii) 그러므로 혼의 덕은 앞서 언급한 모든 일들 즉 보살피거나 다스리는 것, 심사숙고하는 것, 사는 것들 그 모든 일들을 훌륭하게 해내게 될 게 필연적이다.(353e) iv)앞서(353b) ‘정의는 혼의 덕’(350d)임이 동의되었다.(353e) v) 그러므로 정의로운 혼과 정의로운 사람은 잘 살게εὖ βιώσεται 되며 그처럼 잘 사는 사람ὅ εὖ ζῶν은 복 받고 행복하게 된다.(354a) vi)그리고 부정의한 사람은 위와 동일한 방식의 논증을 통해 불행하다는 것이 밝혀진다.(354a)

* 우선 이 논증은 트라쉬마코스의 동의를 얻은 것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추론 상의 어색함이나 비약이 있다고 판단되지 않는다. 내용적으로도 자신을 잘 보살피고 다스리며 잘 심사숙고하고 잘 사는 사람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보다 훌륭하고 행복하게 산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v)에서 마지막 결론을 내리면서 ‘훌륭하게 잘 사는 것’에서 곧바로 ‘복 받고 행복한 삶’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 수 있다. 물론 그 말만 떼어서 보면 ‘훌륭하게 잘 사는 것’이 곧 ‘복 받고 행복한 삶’이라 것에 크게 어색함은 없다. 그러나 의문이 드는 이유는 앞에서 ‘사는 것’τὸ ζῆν이 혼의 기능들 전체가 아니라 그것들 가운데 하나로 언급되고 있는데다가 그것의 의미가 일종의 ‘생명 활동이자 생활’이라고 한다면 그 기능을 ‘훌륭하게 잘 한다’는 것에서 ‘복되고 행복한 삶’이 곧바로 추론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 말은 ‘생물학적으로 신체적으로 건강하게 잘 사는 것’에서 곧바로 사람의 ‘복되고 행복한 삶’을 추론하는 오류를 범한 것으로 비쳐질 수 있다. 사실 ‘사는 것’이 혼의 기능의 전체가 아니라 하나라는 이유에서도 그렇지만 우리말에서 ‘잘 사는 것’이라는 말의 의미가 갖는 애매함 때문에도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v)에서 언급되고 있는 ‘정의로운 혼과 정의로운 사람이 잘 산다’는 말의 의미는 내용적으로 혼의 기능들 가운데 하나로서 ‘사는 것’만을 ‘잘 한다’의 의미가 아니라, 혼의 기능들 모두를 잘 해냄으로써 심신 모두에 걸쳐 ‘훌륭한 삶, 훌륭한 생애를 보낸다’εὖ βιώσεται는 것을 의미하는 것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리스어 원문 상으로도 앞서 ‘사는 것τὸ ζῆν’(353d)이 다소 넓은 의미에서의 ‘산다’live를 나타내는 ζάω(zaō, live, be alive) 동사 연관어로 쓰인 것에 비해 이곳에서는 ‘생애를 보내다’pass one’s life의 의미가 좀 더 두드러지는 βιόω(bioō)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물론 곧 이어서 ‘잘 사는 사람’ὅ εὖ ζῶν(ho eu zōn)을 나타낼 때는 ζάω(zaō) 동사 연관어를 다시 쓰고 있어 일관성은 결여하고 있지만 ζάω(zaō) 동사의 의미가 포괄적이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무엇보다 이미 ‘잘 사는 것’의 구체적인 내용이 혼의 기능들 모두를 잘 해내는 것이라는 것이 iii)과 iv)에서 충분히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서 내용적으로 크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여지는 없어 보인다. 요컨대 ‘잘 사는 것’의 의미를 혼의 기능의 하나인 ‘사는 것’을 잘 하는 것만으로 국한해서 이해할 필요는 없다.

* 아무려나 여기서 소개되고 있는 덕ἀρετή과 기능ἔργον에 기초한 논증방식들은 앞으로 소크라테스가 전개하는 논증들의 핵심적인 특징들을 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논증들을 통해 정의는 나라건 개인이건 그것이 가지고 있는 상호 의존적인 다양한 기능들을 최선의 상태로 조직해내는 합목적인 조직 원리이자 힘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4-14(354b-354c) : 마무리와 탄식

 

[354b]

* 이상으로 소크라테스와 트라쉬마코스와의 논쟁은 모두 마무리된다.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이 모두 논파된 것이다. 그러나 트라쉬마코스는 이러한 문답의 귀결을 벤디스 여신의 축제일에 선생을 위한 축하 잔치로 삼으라고 마지막까지 빈정거린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가 자기에게 상냥하게πρᾶος 대해 준데다 사납게 대하길 그만둔 덕분이라고 점잖게 응수한다.

*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이제까지의 대화가 실은 흡족하지 못했고οὐ μέντοι καλῶς 그 탓이 자기에게 있다δι᾽ ἐμαυτὸν고 말한다. 마치 식탐하는 사람들이 앞에 나온 음식을 적절히 즐기기도 전에, 뒤에 나오는 음식을 낚아채듯 받아먹었다고 자신의 태도를 후회한다. 즉 소크라테스는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아내기도 전에 그것이 나쁨(악덕κακία)이며 무지ἀμαθία인가 아니면 지혜σοφία이며 훌륭함(덕ἀρετή)인가를 검토하기 시작했고 또 ’부정의가 정의보다 이익이다‘라는 주장이 제기되자 참지 못하고 또 그 문제에 대한 검토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354c]

*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는 ‘결국 지금의 나로서는 그동안의 대화를 통해 아무것도 알게 된 것이 없는 꼴이 되었다’ὥστε μοι νυνὶ γέγονεν ἐκ τοῦ διαλόγου μηδὲν εἰδέναι고 탄식하고 정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서는 그것이 일종의 덕인지 아닌지, 그리고 ‘그것을 지닌 이가 불행한지 아니면 행복한지’ὁ ἔχων αὐτὸ οὐκ εὐδαίμων ἐστὶν ἢ εὐδαίμων도 알 가망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로써 <국가> 1권이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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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 제1권의 마무리를 장식하는 이 부분에도 짧지만 의미심장한 시사가 포함되어 있다.

1)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대부분의 전기 대화편 대부분은 ‘그것은 무엇인가ti esti’를 문제 삼으면서도 답은 제시되지 않은 채 그것의 일부 속성이나 사례들로 답하고 있는 것들이 갖는 한계 내지 그것의 무지함을 드러내는 수준에서 마무리되고 있다. 이를테면 <에우튀프론>은 경건이 무엇인가에 대해 답을 얻을 때까지 문답을 이어가기를 간청하는 소크라테스를 뿌리치고 에우튀프론이 급히 갈 데가 있다고 자리를 뜨는 형식으로 그냥 아포리아 상태로 끝나고 있고, <라케스>도 용기가 무엇인가에 관한 문답이 난관에 봉착하자 뤼시마코스가 소크라테스에게 답을 간청하지만 자신도 똑같이 난관에 빠졌으니 최고로 훌륭한 선생을 만나 답을 구해야한다고 조언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그리고 <프로타고라스>도 고르기아스와 소크라테스 모두 논의가 뒤죽박죽이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고 있으며, <뤼시스> 역시 아동 뤼시스와 메넥세노스와의 문답이 난관에 봉착하자 거기에서 좀 더 나이든 사람을 끌어들여 문답을 이어가려 하나 아동의 보호자와 형제들이 그들을 데려가려고 하는 바람에 아포리아 상태에서 문답이 마무리되고 있다. 게다가 중기 대화편으로 알려진 <메논>에서는 문답이 아포리아 상태에 있음에도 <에우튀프론>과 달리 아예 소크라테스가 급한 일이 있다고 먼저 자리를 뜨는 형식으로 논의가 끝나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국가> 제1권 또한 ‘정의가 무엇인가’를 알아내기 전에 부차적인 논의로 옮겨간 것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그 자신을 탓하는 형식으로 논의가 마무리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일부 플라톤 학자들은 <국가> 제1권을 아예 전기 대화편의 전형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 <트라쉬마코스>라는 독립된 작품으로 간주하고 있고, 또 어떤 학자들은 전기에 저술된 대화편이되 다만 플라톤이 <국가>를 구상하면서 내용 구성의 필요에 따라 그 내용을 약간 고쳐 <국가>의 서론으로 갖다 붙인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국가> 제1권은 전기 대화편들과 같이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적극적인 규정을 내놓지 않은 채 끝나고 있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 점에서 전기 대화편과 다른 특징들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국가> 전체적인 계획과 연결시켜 생각하지 않으면 해명하기 어려운 점들이 상당 수 포함되어 있다. 그러한 점에서 <국가> 제1권은 전기에 저술된 독립된 대화편이 아니라 플라톤의 주도면밀한 구상 아래 <국가>의 서론으로서 가장 적합한 내용과 형식으로 쓰여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할 것이다.

2) 그러면 <국가> 제1권이 전기 대화편과 다른 특징들은 무엇이며 그것은 플라톤의 <국가> 전체 내용 또는 플라톤의 <국가> 전체 구상과 관련하여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전기 대화편들은 대부분의 경우, 문답이 난관에 봉착한 이후 상대방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 갖는 의미 즉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지는 의미 있게 부각되는 반면 소크라테스 스스로 자신이 적극적으로 답을 내놓을 태세는 내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아내기도 전에 그건 내버려 둔 채로 부차적인 문제에 대한 검토에 착수한 것에 불만족을 표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불만족을 표명하는 것 자체는 전기 대화편에서의 그의 모습과 특별히 다를 것이 없다. 문제는 불만족을 표명하되 그 앎을 위한 검토를 내버려 둔 탓을 자신에게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라케스>에서도 소크라테스는 자신도 똑같이 난관에 빠졌다고 자기를 탓하고 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자신 또한 답을 내놓을 수 없다는 ‘무지의 지’를 고백하는 수준이다. 사실 플라톤은 전기 대화편에서 문답이 난관에 봉착했을 때 그렇게 된 탓을 자신에게 돌리며 후회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 보다는 오히려 무지의 지를 고백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그려내며 그것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곤 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무지의 지를 고백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이곳에는 답을 알아내기 전에 부차적인 것에 대한 검토로 휩쓸려 들어간 소크라테스 자신의 뼈아픈 자책과 후회 나아가 탄식이 담겨 있다. 정의에 대한 앎이 트라쉬마코스로부터 주어질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면 이곳에서의 그의 탄식은 문답을 통해 그 자신 정의를 드러내거나 납득시킬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아닐 수 없다. 소크라테스가 음식을 즐기는 순서에 비유하여 다루어야할 문제를 내버려둔 채 자제를 못하고οὐκ ἀπεσχόμην 부차적인 문제에 휩쓸려 들어갔다고 후회하는 것 역시 그 자체로 트라쉬마코스의 공격적이고도 파괴적인 주장이 갖는 문제의 심각성과 더불어 그 대안의 부재가 가져다주는 플라톤 자신의 근심과 위기의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야말로 이제 상대방 주장에 대한 논파나 무지의 지의 고백이 능사가 아니라 상대방의 주장을 압도하고 남을 만한 적극적인 정의에 대한 앎의 생산 내지 구축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게 보면 ‘지금의 나로서는 그동안의 대화를 통해 아무것도 알게 된 것이 없는 것이 되었소”(354b)라는 소크라테스의 고백은 제1권의 논의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수행해왔던 전기 대화편의 논의 방식 전체에 대한 통렬하고도 전면적인 자기비판과 더불어 이제 부정의에 대한 논파를 넘어 정의에 대한 적극적인 대안 구축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의지와 열망을 담고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3)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의지를 보여주는 장면은 제1권 곳곳에 드러나 있다. 앞에서도 살폈듯이 소크라테스의 문답이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 대한 논파만이 목적이었다면 문답은 첫 번째 논쟁 즉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주장에 대한 강력한 반박만으로도 충분히 달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정의와 이익과 관련한 권력지상주의의 입장은 물론 부정의 찬양론 일반에 대한 반박이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정의와 그것이 가져다주는 이득과 행복을 논제로 두 번째 문답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두 번째 논쟁에서 트라쉬마코스는 더 이상 논쟁의 상대가 아니다. 오히려 트라쉬마코스의 고분고분한 모습은 이제 문답의 목적이 논파가 아닌 다른 것에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두 번째 문답에서 소크라테스는 더 이상 논파를 목적으로 하기 보다는 자신이 앞으로 대안으로 내놓을 정의론의 핵심 키워드를 짧게나마 명시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제2권 이후의 논의를 예고하는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태도 전환은 첫 번째 논쟁과정에서 트라쉬마코스의 적나라한 속내를 확인한 이후부터(347e) 감지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충분히 논파되었음에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트라쉬마코스를 보며 이제 더 이상 그와 정의에 관해 논파를 목적으로 문답을 나누는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통감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를 배제한 채 글라우콘과 그러한 부류들을 납득시키기 위한 보다 강화된 검토 방식을 상의한 후 그 방침에 따라 트라쉬마코스를 다시 불러 자신의 주도하에 자신이 내건 논제를 화두로 문답을 이끌어 가고 있다. 그리고 논제 또한 트라쉬마코스 주장에 대한 반박의 형식을 띠고는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덕과 지혜, 정의의 성질로서 합심과 우애, 어중간한 상태의 정의, 혼의 덕에 대한 주장 등을 적극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정의에 관해 앞으로 자기가 내세울 내용을 예고하고 준비하는 단계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플라톤은 자신 그러한 구도에 맞추어 두 번째 논쟁에 들어와서 부터는 트라쉬마코스를 더 이상 소크라테스의 문답에 대해 적극적인 반박하거나 대응하는 문답의 상대가 아니라 소크라테스가 벌이는 판에서 단순히 수긍과 부정만을 표명하는 소극적인 참여자로 묘사하고 있다. 글라우콘을 끌어들여 검토 방식을 다시 논의하고 앞으로 함께 논의의 판관이자 변론인들이 되자고 언급할 때부터(348b) 이미 정의에 관한 적극적인 앎의 구축이 선언되고 있으며 두 번째 논쟁은 그것을 위한 준비와 포석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국가> 제1권을 통해 플라톤이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단서는 제1권이 이름 그대로 제1권이라는 사실 자체로부터 주어진다. 제1권은 모든 전기 대화편들처럼 난관에 직면한 상태에서 마무리되기는 하지만 전기 대화편들 모두는 그냥 그것으로 종결되고 마는데 반해, <국가> 제1권은 이미 제1권이라는 이름 그것으로 종결이 아닌 그것의 극복과 적극적인 정의를 건설하기 위한 시작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국가> 제1권은 논의의 끝이 아니라 시작인 것이다.

* 플라톤은 전기 대화편을 통해 ti esti(What is it?)라는 탐문방식이 갖는 가치와 의미를 충분하게 보여주면서 그 자신도 스스로에게 그러한 물음을 던지며 나름의 답을 구축해 왔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중기 대화편 이후 플라톤은 ti esti라는 탐문방식을 상대방의 무지의 지를 깨닫게 하는 방편 수준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이제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내놓는 보다 적극적인 방식으로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하물며 정의와 행복의 문제는 그 자신 평생의 철학의 과제로 매달려 왔던 문제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정의와 행복의 문제라는 필생의 과제와 관련해서 더 이상 상대방 주장의 한계만을 폭로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에 대한 분명한 답을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국가>를 설계하고 집필하였음에 틀림없다. 그의 제1권 마지막 말대로 그에 대한 분명한 답이 나오지 않는 한, 정의로운 사람이 과연 행복한지 아니면 불행한지 알 도리도 없고 그에 따라 그것을 구현할 가망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 플라톤의 <국가> 제1권은 기본적으로 정의에 대한 앎을 적극적으로 펼쳐 보이려는 그의 계획과 그것을 위한 준비 작업을 담아내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플라톤은 제1권을 통해 앞으로 맞닥트리게 될 심각한 현실 국면 즉 그가 대적하려는 부정의한 세력들이 얼마나 강력하고도 뿌리 깊은 현실적 완고성을 가지고 있는지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 사실 트라쉬마코스가 제1권 내내 보여주고 있는 부정의하고도 탐욕적인 입장은 논파는 차치하고 웬만한 대안으로는 결코 파괴되거니 대체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현실을 압도하고 있다. 그야말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직면하고 있는 중차대한 심각성은 트라쉬마코스 같은 부류들의 뿌리 깊은 탐욕은 비록 논파는 될지언정 결코 파괴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플라톤이 당대 소피스트를 대표하는 최고의 수사학자인 트라쉬마코스와 당대 기득권자를 대표하는 시인들과 신흥 부유층인 케팔로스를 소환하여 그들의 탐욕과 무지를 차분하고도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는 것도 <국가> 제1권이 담고 있는 또 하나의 중차대한 함축이 아닐 수 없다. ‘정의는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가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와 탄식의 배경에는 그의 이와 같은 문제의식이 깔려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제 ‘정의는 무엇인가?’라는 탐문은 단순히 논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트라쉬마코스와 같은 불의한 기득권 세력들을 완벽하게 제압하고 그들이 지배하는 구체적인 현실을 변혁해내는 힘이자 대안으로 제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야말로 쇠망기에 접어든 아테네의 현실 한 가운데에서 <국가>를 구상하고 써내려간 플라톤의 기본 의도이자 목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1권은 그러한 전체적인 구도 아래에서 왜 그것이 기본목적이 되어야 하는가를 그리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넘어서야할 과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중차대한 의미를 갖는 토대이자 서론이라 할 것이다. 요컨대 제1권 마지막에서 다시 환기되고 있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이제 ‘정의로운 나라와 정의로운 혼의 구축’이야 말로 더 이상 미룰 수도 없고 미루어서도 안 되는 절대 절명의 과제임을 알리는 플라톤 자신의 선언이자 다짐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제2권 이하에 대해 제1권이 갖는 함의이다. 이렇게 제2권 이하를 기약하며 제1권은 여기서 끝난다.

 

– 플라톤의 <국가> 제1권 강해 끝 –


* 2018년 8월 1일부터 2019년 1월 23일까지 총22회에 걸쳐 정암학당에서 진행된 <국가> 제1권 강해가 마무리됨에 따라 잠시 방학을 한 후, 2019년 3월 6일부터 제2권 강해를 다시 시작합니다. 이곳 웹진 강의론 역시 2019년 3월 중순부터 다시 재개됩니다.

인간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 백종현,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철학자의 서재]

인간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백종현,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칸트를 읽기 위해선 다른 건 필요 없고 엉덩이 근육과 인내가 필요하다. 둘 다 갖지 못한 나 같은 자는 그냥 포기하는 게 맞을 거다. 하지만 좋은 책이 나와서 그러지도 못하겠다. 백종현 선생님의 칸트 3대 비판서 특강이 책 한권으로 나온 것. 요즘은 공부를 하지 않기도 어려운 세상이다. 3대 비판서라 함은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을 말한다. 주옥같이 어려운 책들, 우리가 인생 살면서 고민도 안하고 포기하는 책들 되겠다.

 

그런데 이 책을 일단 읽게 되면 없던 욕망이 생긴다. 칸트를 읽어봐야겠다는 무모한 욕망 말이다. 2백페이지 조금 넘는 작은 책이라 정신 바짝 챙기면 누구나 읽을 수 있다. 저 세 비판서는 각각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순수이성비판>, 나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실천이성비판>,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판단력비판>를 다룬다.

 

칸트의 문제의식으로부터 시작해보자. 인간은 ‘이성적 동물’로 정의되는데 문제는 이성과 함께 ‘동물성’이 있다는 것이다. 동물은 어쩌면 그저 동물성만 있으니 문제될 게 없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이성’을 놓을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인간 이성의 한계다.

 

인간 이성은 신에 대해 논할 수 있는가. 신은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인데 말이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신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있는 것은 공간과 시간 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p. 94). 칸트는 신과 영혼 같은 것은 인간 이성으로 알 수 없는 것이라 보았다. 인간 이성, 인간의 주관이 알 수 있는 것만을 취급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한다. 칸트 이전에는 인간 이성 밖에 대상이 그 자체로 있다고 봤지만 이제 그런 것은 인간이 알 수 없고 우리 감각 지각에 들어오는 것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내가 보는 세계와 잠자리나 개구리가 보는 세상은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보는 세계가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단순히 인간중심적 사고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거칠게 말해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이러한 인간 이성의 한계를 다룬다.

 

<실천이성비판>에서는 무엇을 다룰까. 인간 이성이 이렇게 한계가 있다면 이제 인간 이성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있는’ 것만을 보고 느끼고 알 수 있다면 세상은 참 심심하지 않겠는가. 아직 있지 않은 것을 있게 하는 것, 그것이 ‘실천’이다. 지금이야 장난감이 많지만 나 어릴적만 해도 장난감이 없으면 나뭇가지를 꺾어서 총도 만들고 지팡이도 만들며 놀았다. 하나의 ‘실천’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실천에는 ‘의지’(p. 140)가 들어간다. 그런데 칸트는 실천 중에는 인간이 마땅히 그렇게 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선’이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악’이다. 당연한 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당연한 걸 우리가 모두 실천한다면 세상에는 사기도 악도 범죄도 없을 것이다.

 

칸트는 이렇게 ‘선’을 실천할 인간의 능력을 ‘자유’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결국 ‘악’을 행하는 자는 ‘자유’가 없는 자라는 뜻이 된다. 어릴 때 엄마 주머니에서 잔돈 훔쳐본 자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들키면 혼날 텐데 하면서 하루 종일 자유롭지 못하고 안절부절 했음을. 기껏해야 떡볶이를 사먹기 위해서였을 텐데 나는 그 대가로 내 자유를 빼앗긴 셈이다. 칸트는 이런 자연적 요인, 감각적 요인(경향성Neigung : inclination)에 지배받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요즘 먹방 프로그램이 많은데 인간의 감각(미각)에만 너무 치중하는 것 같다. 생각해볼 문제다. 칸트가 보기에 인간은 먹방에만 종속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런 경향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유로운 존재다. 당연히 이게 중요하다. 그러면 이 자유를 가지고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또 무엇을 해야만 할까.

 

인간은 자기 경향성, 동물성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고 이때 인간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살 수 있게 된다. 이때의 의지가 ‘선의지’이다. 칸트에게 선의지는 어떤 행위를 오로지 의무이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다(p. 161). 그래서 칸트의 도덕법칙은 명령형이다. 살인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와 같은 정언명령들이 그렇다. 이러한 도덕적 행위들의 원리를 ‘인간 존엄성의 원칙’이라 한다(p. 173).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만 대우해야 하며 존엄한 존재는 교환도 안 되고 바꿀 수도 없다(p. 175). 그런데 우리 현대 사회는 인간조차 노동력 상품으로, 자신을 팔아야 하는 존재로 자꾸만 전락시키고 있다. 문제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사회에서 인간에게 자유가 있을 수 없고 자발성이 있을 수 없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유를 희망한다. 이제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라는 문제를 다룬 것이 <판단력비판>이다. 칸트는 판단력이 이론이성(<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실천이성비판>)을 잇는 다리라고 생각했다(p. 234). 인간은 이성과 의지 둘 다를 지니고 있는 존재이지 이 둘을 칼로 자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칸트는 이 둘을 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이 둘이 판단력에 의해 통일이 되는 것인데 그것은 ‘최고선’이라는 이념에 의해서다. 칸트에게는 자연성, 경향성의 자연 세계가 도덕의 세계처럼 움직여야 한다고 보았고 그 상태가 최고선의 상태라고 보았다. 기독교 성서 중에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대목이 있다. 저자는 ‘지상에 세워진 천국’이 칸트가 희망했던 ‘최고선의 상태’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세계적으로는 난민 문제를 비롯해서, 용산참사도 그렇고 일터에서 안전의 문제로 죽어나가는 젊은 노동자들의 문제도 그렇고 우리가 사는 지상에는 희망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지상에 천국은 어떻게 세울 수 있을까. 특별히 악하게 살지 않고 그저 하루하루를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우리 사회는 희망을 주고 있는가, 아니면 절망만을 주고 있는가. 생각해봐야 한다. 가난하고 약한 자들도 대등한 인격(p. 158)으로 정당하게 대우받으며 인간 존엄성을 누릴 권리가 있다. 모든 인간은 목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갑이고 너는 을이 아니다. 각자의 우리는 대체불가능하고 자유로운, ‘대등한’ 인격체이다. 그 옛날, 칸트도 알고 있었던 것을 왜 우리는 아직도 모르는 것일까. 알고 있지만 모른 척 하는 것일까.

 

얼마 전 모 신문사 사장의 손녀가 운전기사에게 폭언을 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칸트가 인간이 대등하다고 말한 지가 1780년대라고 치면 기함(氣陷)할 노릇이다. 칸트가 꿈꾸었던 세계는 아직 오지 않은 셈이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꿈꾸어야 한다. 더 좋은 세상에 대해 꿈꾸지 않는다면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이라도 칸트를 꺼내 읽어야 하는 이유인지 모른다.

 

칸트를 읽는다는 것, 거의 고문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지금과 ‘다른 사유’를 하려면 어려울 수밖에 없다. 새로 배워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쉬운 것만 하고 사는 것도 재미없지 않은가. 어려운 것에 도전하고 깨지고 박살나는 살아있는 경험이 고프기도 하다. 새해 <순수이성비판>부터 도전해보려 한다. 무모하고 무한한 도전일지라도.

 

-글, 엄진희(시인, 문학평론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㉑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4-12(350d~352c): ‘부정의는 강하다라는 주장에 대한 검토

 

[350d]

* 소크라테스의 논박으로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결국 자기모순에 빠지고 만다. 그런데 플라톤이 묘사하고 있는 이곳에서의 그의 모습은 문답의 귀결에 트라쉬마코스가 얼마나 당황하고 있는지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마지못해 동의하는 장면은 앞에서도 수차례 나오지만 이곳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그는 ‘질질 끌려가다가 가까스로 그것도 엄청나게 땀까지 뻘뻘 흘리다가ἑλκόμενος καὶ μόγις, μετὰ ἱδρῶτος θαυμαστοῦ ὅσου’ 동의하고 있다.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오른ἐρυθριῶντα 모습은 소크라테스도 전에 볼 수 없었던 모습이라고 말할 정도이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모멸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교만하고 뻔뻔한 자일수록 그가 느끼는 수치의 강도 또한 그만큼 큰 것이다.

*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전혀 봐 줄 기세 없이 트라쉬마코스를 몰아세운다. 그는 첫 번째 논제에 대한 논박은 그렇게 해결 본 것으로 치고οὕτω κείσθω 곧바로 두 번째 논제 즉 ‘부정의가 더 강하다ἰσχυρὸν εἶναι τὴν ἀδικίαν’라는 주장을 검토하려 한다.

 

[350e]

*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에게 불만을 터트리지만 기세는 꺾여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말을 하려 하면 어차피 ‘대중 연설’δημηγορεῖν을 할 거라고 여길 터이니 내가 내 식으로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게 해 주던가 아니면 당신 좋을 대로 질문이나 하라‘고 말한다.

* 앞서 살폈듯이 검토 방식에 관한 논의에서 연설에 의한 방식은 아예 배제된 데다가 그 논의에 개입조차 못할 정도로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의 강한 반박에 크게 위축되어 있다. 여기서도 입으로는 자신도 할 말이 있고 또 말을 하게 허락해 달라고 요구는 하고 있지만 이미 트라쉬마코스는 주눅이 든 상태이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수사학자이자 연설가임을 자부하는 그가 그것을 드러낼 리가 없다. 그런데 반박할 능력은 없고 그렇다고 수긍하기도 싫은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통상의 경우가 그러하듯 비아냥거리는 일이다.

* 그래서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가 자신에게 질문을 하면 자기는 노파γραῦς의 이야기를 들어주듯 좋다εἶεν거나 아니라고만 대답하겠노라고 빈정거리듯 말한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강자에 빌붙어 그들에게 굽실거리는 지식인들이 남들 앞에서 자기를 변명할 때 늘어놓는 부정직하고 비겁한 태도를 그 역시 잘 보여주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그가 문답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의지가 없음을 이미 알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트라쉬마코스에게 그래도 대답만은 솔직히 하라고 당부하는 것은 두 번째 논제 역시 자신의 검토 방식에 따라 논의를 이끌고 가겠다는 그의 의지를 보여준다. 문답에 주도권을 잃은 트라쉬마코스는 그저 소크라테스 마음에 드는 말이나 해주겠다고 다시 빈정거리고 소크라테스는 바로 두 번째 논박을 시작한다.

 

[351a]

* 소크라테스는 먼저 ‘부정의가 보다 강하다’는 주장을 논박하려는 것은 부정의와 비교하여 정의가 어떤 성질의 것인지를ὁποῖόν τι τυγχάνει ὂν 충분하게 논의해 보기 위한 것임을 밝힌다. 즉 정의가 지혜와 훌륭함(덕)σοφία τε καὶ ἀρετή이라면 지혜와 덕이 가지고 있는 성질을 밝히는 것만으로도 정의가 부정의보다 강하다는 것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351b]

* 이를 위해 소크라테스는 먼저 트라쉬마코스가 가장 강한 힘을 갖고 있는 최선의 나라로 여기고 있는, 즉 가장 부정의한 나라가 과연 강한지를 묻는다. 이 물음에는 정의를 갖추고 있지 않은 부정의한 나라가 강한 힘을 가질 수 없다는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담고 있다. 역시나 트라쉬마코스는 이내 그것을 부정하고 그 나라가 그럴 수 있는 것은 부정의를 갖추고 있어 그런 것임을 재차 주장한다.

* 여기서 플라톤이 묘사하고 있는 가장 부정의한 나라 즉 ‘다른 나라들을 부당하게 굴복하게 하여 예속화를 시도하고, 실제로 그렇게 해서 많은 나라를 휘하에 속국화해서 갖고 있는 나라’πόλιν ἄδικον εἶναι καὶ ἄλλας πόλεις ἐπιχειρεῖν δουλοῦσθαι ἀδίκως καὶ καταδεδουλῶσθαι, πολλὰς δὲ καὶ ὑφ᾽ ἑαυτῇ ἔχειν δουλωσαμένην는 분명 페리클레스 이후 부당하게 다른 폴리스들을 예속화하고 스스로를 제국화한 아테네를 가리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국가>를 집필하던 기원전 375년경은 물론 <국가>의 대화시기로 상정되고 있는 기원전 410년 전후는 아테네 제국이 쇠망기에 접어든 시기이다. 플라톤은 이미 아테네가 결코 강한 힘을 유지할 수 없고 쇠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로서 같은 민족 형제 나라들을 부당하게 침탈하고 학살까지 서슴지 않는 아테네 제국주의를 염두에 두고 있다.

 

[351c]

* 소크라테스는 앞서 그가 당부한(350e) 대로 트라쉬마코스가 속내 그대로 말하는 것에 대해 칭찬을 한 후, 흥미롭게도 나라와 군대στρατόπεδον는 물론 하물며 강도단λῃστὰς이나 도둑κλέπτας의 무리까지 예로 들어, 어떤 집단이 ‘부정의하게 공동으로κοινῇ 뭔가를 도모할 경우에 만약 그들 내부에서 자기들끼리 ‘서로에 대해 부정의한 짓을 저지른다면’εἰ ἀδικοῖεν ἀλλήλους 과연 도모하는 일을 제대로 수행πρᾶξαι할 수 있을지를 묻는다. 그러자 트라쉬마코스는 수행해낼 수 없을 거라 대답한다.

 

[351d]

* 이어 소크라테스는 ‘자기들끼리 부정의한 짓을 하지 않는다면 한결 더 잘 해낼 수 있는지를 묻고 그에 대해서도 그렇다는 동의를 얻는다.

* 이로써 어떤 집단이 부정의한 짓을 도모하면서 서로에게 부정의한 짓을 저지를 경우 서로 간에 ‘대립과 증오, 다툼’ ἢ στρατόπεδον ἢ λῃστὰς ἢ κλέπτας을 초래하여 결국 그들이 도모하는 일을 그르치며, 반대로 합심과 우애를ὁμόνοιαν καὶ φιλίαν 다하면 그들이 도모하는 일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음이 서로에게서 확인된다. 이로써 351a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하고자 하는 지혜와 훌륭함(덕)σοφία τε καὶ ἀρετή으로서 정의가 가지고 있는 성질이란 ‘합심과 우애’를 담보하는 것임이 드러난다. 요컨대 정의로운 사람은 합심과 우애를 이루는 능력이 있으므로 그가 속한 단체나 자기 자신이 추구하는 일을 해냄으로써 그 단체나 자신을 강하게 만들지만 부정의한 사람은 그런 능력이 없고 증오와 불화만 일으켜 그가 속한 단체나 자기가 추구하는 일을 그르쳐 그 단체나 개인을 약화시키고 만다는 것이다.

* ‘그러니까 부정의의 기능ἔργον이 그런 것이라면 자유민들 사이에서건 노예들 사이에서건ἐν ἐλευθέροις τε καὶ δούλοις 서로를 증오하고 대립하게 만들고μισεῖν καὶ στασιάζειν 그들로 하여금 함께 어우러져 일을 해낼 수 없게 만든다.’ 이러한 언급 또한 5세기말의 극심한 혼란과 분열에 빠진 아테네를 묘사한 것이다. 여기서 ‘부정의의 기능’이라는 말을 두고 부정의가 마치 고유한 기능이라도 있는 것처럼 오해할 필요는 없다. 고유한 기능은 덕을 갖고 있지만 부정의는 그것을 결여하고 있다. 그러므로 부정의의 기능이라는 말은 그냥 부정의가 일으키는 어떤 나쁜 작용을 말한다.

 

[351e]

*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부정의가 두 사람 사이에서도 생겨 그들끼리는 물론 정의로운 사람과도 적이 되고 만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그런 여러 사람들의 경우 말고 개인 한 사람 안에서 부정의가 생길 경우ἑνὶ ἐγγένηται ἀδικία에도 부정의가 조금도 힘δύναμιν을 잃지 않고 그대로 유지된다고 말하고 트라쉬마코스도 그에 동의를 표한다.

 

[352a]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앞의 논의를 토대로 집단ἔθνος과 개인εἷς의 경우로 나누어, 부정의가 그곳 각각에 깃들 경우 어떤 힘을 갖는지를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우선 나라, 씨족, 군대 같은 단체의 경우 부정의가 갖는 힘δύναμις이란 1) 대립과 불화τὸ στασιάζειν καὶ διαφέρεσθαι를 통해 뭔가를 해낼 수 없게ἀδύνατον 만든다. 2) 각기 스스로에 대해서, 대립되는 모든 것에 대해서 ἑαυτῷ τε καὶ τῷ ἐναντίῳ παντὶ καὶ τῷ δικαίῳ 그리고 정의로운 것에 대해서 적ἐχθρὸν이 되게 만든다. 그리고 개인의 경우 부정의가 갖는 힘이란 본성상 1) 자기 자신에 갈등과 불화στασιάζοντα καὶ οὐχ ὁμονοοῦντα를 일으켜 아무것도 해낼 수 없게ἀδύνατον 만든다. 2) 자기 자신에 대해서, 올바른 사람들에 대해서 적이 되게 만든다.

* 소크라테스는 부정의가 갖는 힘을 설명하면서 위와 같이 집단의 내부와 개인의 내면을 각각 동일한 차원에서 대응시키고 있다. 이것이 갖는 의미는 이글 말미에서 따로 살피기로 한다.

 

[352b]

* 소크라테스는 정의가 합심과 우애를 가져다준다는 주장을 편 후 ‘한데 보시오. 신들θεόι도 어쨌든 정의롭다’고 말하고 그에 따라 정의로운 자는 신들에 대해 친구φίλος가 된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그리스 신들의 모습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냥 ‘정의롭다’라고 말한 것이라면 몰라도 정의를 합심과 우애의 성질을 갖는 것으로 묘사한 직후에 언급한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신들은 결코 합심과 우애의 신들이라 단정하기 힘들다. 이 점을 고려하면 여기서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소크라테스 나름의 새로운 신관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에게 신들 모두는 <티마이오스>에서 강조하고 있듯 우주와 인간을 조화롭고 아름답게 창조한 선하고 정의로운 존재이며 마땅히 그래야 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국가> 본론에 들어가 수호자들에 대한 시가 교육을 통해 신들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꾀한다. 이런 점에서도 짧은 언급이지만 이 또한 앞으로 펼쳐질 주장에 대한 시사를 담고 있다.

* 트라쉬마코스는 논의가 이렇게 마무리되어가자 아예 자기는 반론을 펴지 않을 테니 ‘안심하고 논의를 마음대로 즐기라’εὐωχοῦ τοῦ λόγου θαρρῶν고 말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지금처럼 남은 문제에 대해서도 지금처럼 대답하여 ‘이 향응을 흡족하게’τῆς ἑστιάσεως ἀποπλήρωσον 해달라고 말한 후 아래와 같이 결론을 내린다.(352b-c)

1) 정의로운 사람들이란 지혜롭고 훌륭한 사람으로서σοφώτεροι καὶ ἀμείνους더 유능하게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들δυνατώτεροι πράττειν이다.

2) 부정의한 사람들이란 서로 어우러져 일을 해낼 수 없는 사람들οὐδὲ πράττειν μετ᾽ ἀλλήλων οἷοί 이다.

3) 이들이 부정의한 사람들인 채로 함께 어우러져 무슨 일을 ‘박력 있게’(효과적으로, 열심을 다해ἐρρωμένως, ῥώννυμι의 분사형) 해내는 것으로 우리가 말할 경우에, 그것은 전혀 진실ἀληθὲς 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이 전적으로 부정의한 자들이었다면, 이들은 서로 삼가는ἀπέχω 일도 없었을 것인즉 이들 사이에는 그마나 어떤 형태의 정의가 깃들어 있었던 게 분명하다.

 

[352c]

* 그런데 위 3)의 언급과 그 이후 이어지는 소크라테의 말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3)의 내용은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이들’은 부정의한 사람들로서 앞에서 언급한 대로 함께 어우러져 무슨 일을 박력 있게 해내지 못하는 사람들임에도, 이어지는 후반부 언급에서는 뭔가 서로 삼가기도 하고 그나마 어떤 형태의 정의도 깃들어 있어 뭔가를 해내기도 하는 사람들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일치와 문장전후의 문맥을 고려하면 ‘그것은 전혀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οὐ παντάπασιν ἀληθὲς λέγομεν라는 역문은 재검토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역문의 경우 παντάπασιν(altogether, wholly)을 ‘전혀’로 옮겨 앞의 내용을 전면부정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내용상 ‘전면적으로’ 옮겨 앞의 내용을 부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 판단된다. 상당수의 영역본(G.M.A. Grube, P. Shorey)도 그 부분을 부분 부정으로 번역하고 있다.(what we say(our statement) is not altogether true) 여기서 말한 부정의한 자들의 경우 철두철미하게 부정의한 자들이 아니라 어중간한 상태의 부정의한 자ἀδικίᾳ ἡμιμόχθηροι ὄντες,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석하여 그 부분을 다시 풀어서 옮겨보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때 부정의한 사람들도 함께 협력하여 일을 해내는 경우가 있다고 말을 하는데 그건 전적으로 다 맞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정말 전면적으로 부정의한 사람들이었다면 서로에게 삼가기는커녕 공격적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들이 서로 협력하여 일을 해냈다고 한다면 그나마 그들에게는 어떤 형태의 정의가 깃들어 있었던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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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트라쉬마코스와의 두 번째 논쟁의 두 번째 논제 즉 트라쉬마코스의 ‘부정의한 사람이 정의보다 강한 사람이다’라는 주장에 대한 검토가 마무리된다. 그런데 이 두 번째 논제와 관련해서도 음미해보아야 할 부분이 적지 않다.

1) 우선 트라쉬마코스의 태도에 관해서이다. 앞서 살폈듯이 트라쉬마코스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주장과 관련한 논쟁에서는 물론, ‘부정의는 정의보다 낫다’와 관련한 두 번째 논쟁에서도 예외 없이 소크라테스에 의해 논파 당한다. 그것도 문답 하나하나 서로 합의하에 이루어진 논쟁이라는 점에서 거의 완벽한 수준의 논박이다. 보통의 경우 논쟁의 귀결이 이 정도라면 한 쪽은 자신의 견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트라쉬마코스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는 여전히 부정의가 이익을 가져다주고 지혜와 덕은 물론 힘까지 갖춘 것임을 흔들림 없이 고수하고 있다. 그런데 왜 소크라테스는 논파를 해도 태도를 바꾸지 않는 그와 문답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 것일까? 혹시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와 관련한 첫 번째 논쟁에서 트라쉬마코스가 엄밀론에서 현실론으로 태도를 바꾸는 등 태도를 일관성 없이 이랬다저랬다 하다가 결국 논리에서 밀리자 목욕탕에서 물을 붓듯 자기 속내를 쏟아냈을 때부터 소크라테스는 이미 그가 문답의 방식으로 논파는 되어도 설득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다. 실제로 텍스트를 잘 들여다보면 우리는 첫 번째 논쟁과 관련하여 트라쉬마코스가 쏟아낸 마지막 항변을 분수령으로 문답에 임하는 소크라테스의 태도가 달라지고 있음을 발견한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속내를 확인한 후 크게 분노하여 그를 강력하게 반박한 후, 두 번째 논쟁에서는 아예 그를 제쳐두고 글라우콘을 끌어들여 트라쉬마코스 같은 부류를 어떻게든 납득시킬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채택한다. 그런 후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서 자신이 훨씬 중요하다 생각하는 논제를 자신의 주도하에 두 번째 논쟁의 화두로 내세운 후, 곁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트라쉬마코스를 다시 끌어들여 문답을 진행하고 있다. 물론 두 번째 논쟁 역시 문답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이 그리고 있는 두 번째 논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트라쉬마코스는 형식적으로 문답에 참여할 뿐 이미 문답을 나눌 의지도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플라톤은 왜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트라쉬마코스를 다시 불러 들여 문답을 이어가게 하고 있을까? 혹시 플라톤이 의도하는 트라쉬마코스와의 두 번째 논쟁 국면은 트라쉬마코스에 대한 논파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논박의 결과조차 인정하지 않는 트라쉬마코스 같은 부류들의 실체를 드러냄과 동시에 그들에 대한 논파를 넘어서 그들을 원천적으로 압도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앞으로 플라톤이 내세우고자 하는 정의의 속성을 일부나마 미리 보여주려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두 번째 논쟁에서 정의가 부정의보다 낫다는 근거로 내세우고 있는 덕과 지혜, 합심과 우애의 힘 그리고 더 잘 살게 해주는 것 즉 행복은 앞으로 <국가> 2권 이후에서 플라톤이 펼치게 될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이 갖추고 있는 핵심적인 덕목들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것 역시 <국가> 본론에 대한 준비로서 플라톤이 부여한 제1권이 갖는 함축이라 판단된다. 제1권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함축과 관련해서는 트라쉬마코스와의 모든 논쟁이 마무리된 후 소크라테스가 제1권에서의 논의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부분에서 다시 한 번 다루게 될 것이다.

2) * 게다가 이곳에서 플라톤이 정의가 갖는 힘을 논하면서 집단과 개인으로 나누어 고찰하고 있는 것도 위에서 언급한 앞으로 <국가> 본론에서 펼칠 플라톤의 계획의 일단을 미리 드러내는 것으로서 나름의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덕과 지혜로서 정의가 갖는 성질로서 합심과 우애를 거론하며 집단은 물론 개인의 경우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사실 합심과 우애를 이야기하면서 집단의 경우를 예시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집단이나 단체는 서로 다른 여러 사람들이 공동의 목적을 도모하기 위해 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흥미롭게도 합심과 우애가 중요하게 문제되는 영역으로 개인의 내적 영역도 끌어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 내부에 공동의 목적을 도모하는 서로 다른 여러 부분들이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 가능한 주장이다. 플라톤은 여기서 그러한 전제를 아무런 설명 없이 당연한 것으로 두고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생활 속에서 심적 갈등을 경험하고 그에 따라 우리 안에 소박한 수준에서 이를테면 하얀 마음, 검은 마음 즉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있다는 등 서로 다른 욕망의 요소들을 이야기하곤 한다. 기독교 역시 우리 안에 신의 형상(Imago Dei)은 물론 영성 상실에 따른 원죄의 존재와 그것에 대한 죄의식이 자리 잡고 있고 그것은 신의 은총에 의해 극복되어야할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선과 악, 죄와 은총은 서로 대립적인 것들로서 우리 안에서 서로 합심과 우애를 나눌 대상들은 아니다. 이에 비해 플라톤이 말하는, 개인의 내적 영역에서 서로 다른 것들은 대립적이고 배타적인 것들이 아니라 서로 공존하며 조화를 이루어야 할 것들이다. 실제로 플라톤은 <국가>를 통해 나라와 우리 안에 서로 다른 계층과 욕망들을 거론하면서 그것들이 서로 합심하고 우애가 있어야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이 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여기서 개인을 끌어들이고 아무런 전제도 없이 개인 내면에서 서로 다른 요소들끼리의 합심과 우애를 거론하고 있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국가> 2권 이후에 펼쳐질 영혼 3분설의 내용을 미리 선취하여 예고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 나라 또는 개인의 내면을 구성하는 여럿들이 서로 적대적인 것인지 그래서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제거 혹은 변모되어야 마땅한지 아니면 그것들은 서로 의존적인 것이어서 그대로의 모습을 갖는 것이되 다만 관계를 잘 맺어 조화와 공존을 이루는 것이 마땅한지의 문제는 철학사를 통해 다양한 입장과 관점을 가지고 대립해 왔다.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는 타도하거나 심판해야할 죄악 또는 계급이 존재하고 그것들의 존재 자체가 부정의이지만, 플라톤이나 프로이트는 관계맺음의 원리와 목표는 다르지만 그것들은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할 실재하는 현실 조건들이다. 부정의와 정신의 분열은 그것들의 존재가 아니라 그것들 서로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한 무지와 일탈의 소산들이다.

3) * 이곳의 논의 내용에서 의미 있게 주목할 것이 하나 더 있다. 소크라테스가 흥미롭게도 ‘기본적으로 부정의하지만 어떤 형태의 정의가 깃들어 있는 상태’ 즉 ‘어중간한 상태의 못된 자들’τὰ ἄδικα ἀδικίᾳ ἡμιμόχθηροι ὄντες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352c) 사실 소크라테스는 지금까지 첫 번째 논쟁에서 정의와 부정의를 구분할 때도, 그리고 또 두 번째 논쟁의 첫 번째 논제에서 지혜와 무지를 구분할 때도 각각 엄밀한 의미에서의 정의와 그 결핍태로서의 부정의, 결코 능가할 수 없는 객관적 진리로서의 지혜 자체와 그 결핍태로서의 무지를 2분법의 잣대로 엄격하게 나누어 설명해왔다. 이에 따라 정의와 부정의, 지혜σοφία와 무지ἀνεπιστημοσύνη, 덕ἀρετῆ과 악덕κακί은 서로 대립되는 양극단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러한 엄격한 구분은 두 번째 논쟁, 두 번째 논제에 들어오면서 ‘강도단이나 도둑의 무리들도 뭔가를 공동으로 도모할 경우 서로에 대해 부정의한 짓을 저지르면 그 일을 조금도 수행해내지 못하지만,(351c) 만약에 그들이 자기들끼리 서로에 대해 부정의한 짓을 하지 않는다면 한결 더 잘 해낼 수 있다’(351d)고 말하면서부터 뭔가 달라지고 있다. 즉 ‘집단 전체는 비록 정의롭지 못한 일을 도모해도 집단 구성원들끼리는 정의로운 일을 한결 더 잘 해내는 상태’ 즉 한 집단에 정의와 부정의가 함께 존재하는 다시 말해 전적으로 정의로운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부정의한 것도 아닌 것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논제를 마무리하면서 플라톤은 마치 의도적이라고까지 할 정도로 이러한 내용을 더욱 부연해서 설명하고 있다. 사실 논제를 제시한 처음 의도대로 힘에 있어 정의의 우위를 설명하는 것만을 목표로 삼았다면 정의로운 집단과 부정의한 집단, 정의로운 개인과 부정의한 개인만 비교해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왜 강도나 도둑 같은 집단까지 끌어들여 어중간한 상태의 정의, 어중간한 상태의 부정의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 혹시 이것마저도 앞서와 같이 앞으로 <국가>에서 다룰 논의를 위한 준비로서 플라톤이 제1권에 부여한 예고이자 함축이 아닐까? 사실 앞서 1)에서도 언급했듯이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거침없고 무분별할 정도의 탐욕적 속내를 확인한 이후, 트라쉬마코스에 대한 강력한 반박을 통해 그의 반론 의지를 잠재운 데에다, 보다 강화된 검토 방식으로 자신의 핵심 관심사와 관련한 두 번째 논제를 꺼내들어 자신의 주도하에 논쟁을 이끌고 있다. 그러한 점들을 고려한다면 이곳에서도 소크라테스는 이미 논박과 논파의 단계를 넘어 그들을 압도하기 위한 적극적인 대안 구축의 차원에서 냉철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앞으로 정의와 일의 수행 능력에 관한 문제를 다루게 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 사실 우리들은 보통 현실 생활에서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사람을 말할 때 특정 사람과 그룹을 칼같이 나누어 그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정의롭다거나 부정의하다고 말하지 않거니와, 개인적으로도 자기를 언제나 정의롭다거나 언제나 부정의하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정의와 부정의를 혼동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이곳에서 현실에서의 어중간한 정의와 어중간한 부정의를 이야기한다고 해서 완전한 정의와 그 반대로서의 완벽한 수준의 철저한 부정의의 구분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다. 완전한 정의와 그것의 결핍태로서 부정의는 분명 존재하되 플라톤은 이제 그것의 결핍태로서 부정의의 다양한 현실 양태를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플라톤이 인용하고 있듯이(351b-d) 어떤 집단이 부정의한 일을 공동으로 도모하지만 구성원들끼리는 합심과 우애가 있어 한결 더 일을 잘 해내는 경우도 그러한 양태들 가운데 하나이고, 또 극단적으로 참주가 자신은 철저히 부정의하지만 시민들을 완전히 속여 시민들 모두 참주를 정의로운 자로 착각한 채 서로 합심과 우애를 다해 참주에게 충성을 다하는 경우도 그러한 다양한 현실 양태 중 하나일 것이다. 사실 플라톤이 <국가>를 통해 극복하려는 것, 압도하려는 것은 기본적으로 현실에서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그와 같은 부정의의 다양한 현실 양태들이다. 플라톤 철학을 현실 구제론이라 부르는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이다. 물론 그럼에도 지금까지 수행된 완전한 정의와 그 결핍태를 나누는 이분법은 여전히 요구된다. 왜냐하면 부정의한 현실일수록 부정의를 정의로부터 분리하고 구분하기 위한 확고한 정의의 기준과 푯대는 언제든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나라와 개인 차원에서 완벽한 정의의 실체를 완벽하게 구축해내는 일과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여 현실의 정의로운 나라와 정의로운 개인을 실질적이고 실천적으로 구현해내는 일은 별개의 과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제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정의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나고 각 인간에게서 어떻게 현상 되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필수적이고, 이제 그것을 위해서는 그 어중간한 상태에 대한 보다 면밀한 분석과 이해 또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에서의 ‘어중간한 정의’에 대한 언급은 실로 소크라테스의 냉철하고도 균형 있는 현실 인식을 반영함과 동시에 이것 역시 예비적인 수준에서 앞으로 펼쳐질 그의 정치철학의 일단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4) 그리고 그것은 <국가> 본론에 들어가서 살피게 되겠지만 존재론적으로도 존재(to on)와 무(無)(mē on) 그 중간에 있는 무규정적 존재(apeiron)에 대한 플라톤의 숙고와 성찰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전통적으로 무규정적인 존재는 존재도 아니고 무도 아니라는 관점에서 부동의 일자(一者, hen)를 주장하는 자들과 존재자 일체를 무 혹은 또 다른 차원의 존재로서 생성(gignōmenon)으로 환원하려는 자들 모두에게서 비판을 받아 왔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그러한 비판은 곧 무규정자에 대한 인식으로서 현실 인식을 사변에 예속시키는 것으로서 본말이 전도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정당한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하되 현실의 무규정성이 허무주의로 방치되지 않고 역동적인 선과 아름다움(agathos kai kallos)으로 승화할 수 있도록 존재를 인식하는 능력이자 그곳에로의 부단한 운동력으로서 우주 영혼과 인간 영혼의 내적 본질을 직시하고 그것을 구명하여 현실의 나라와 개인에서 그것을 구현해내는 일을 그 자신의 철학의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플라톤 존재론의 핵심과제 내지 관심사는 형상(Idea)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무규정자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이해에 있다할 것이다. 즉 철학의 관제는 존재와 무(無)사이에 있으면서 어떠한 단절도 받아들이지 않는 연속과 관계맺음 그 자체로서 무규정자를 어떻게 차별화하고 그러한 성질을 갖고 있는 현실 존재자들이 형상적 존재로부터 어떤 거리를 두고 어떤 수준에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인식해내는데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존재와 무규정자의 온전한 관계에 대한 인식이자 그 인식이 곧 실천을 필연적으로 담보하는 한, 그것으로 진리 존재로 육박해 들어가는 불굴의 정신이자 지적 실천으로서의 철학 그 자체였던 것이다.

5) * 아무려나 두 번째 논쟁에서 두 번째 논제 즉 부정의는 정의보다 강하다는 주장은 정의가 합심과 우애를 가진다는 것에 기초하여 논박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정의가 합심과 우애를 가져다주는 것은 인정한다 하더라도 현실의 경우들을 보면 오히려 부정의가 정의보다 강하고 그에 따라 부정의가 정의를 이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를테면 역사에서도 부정의한 군주나 독재자가 엄혹한 군기를 내세워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병사들을 향해 패배하면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하여 그것에 두려움을 느낀 병사들이 사력을 다해 싸워 정의로운 군대를 무찌르는 경우도 수없이 많다. 트라쉬마코스도 이곳에서 가장 부정의한 자 즉 참주가 지배하는 나라가 정의로운 나라보다 강하다는 것을 끝까지 고수하고 있다. 이를테면 참주가 지배하는 나라는 그가 참주인 한, 시민을 통제하고 예속화시키는 힘과 권력이 있어 법률도 자기 이익에 맞추어 자기 마음대로 제정한다. 그럼에도 시민들은 시민적 의무 차원의 정의감 때문이건 법률 위반이 가져다주는 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건 법률을 준수한다. 즉 그들로서는 정의로운 일을 한다. 이런 나라는 부정의한 짓을 도모하는 집단이라 할지라도 참주들의 억압에 의해 대립과 갈등이 철저하게 통제되어 있고 때로는 참주의 명령에 따라 일치단결하여 나라가 목표로 하는 일을 해낼 수도 있다. 개인들 역시 스스로를 국가의 법률을 준수하는 정의로운 사람으로 자부하며 내적 갈등을 겪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최근까지도 일상의 착하고 선량하며 나라의 법률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 아무런 갈등이나 거리낌 없이 하물며 자발적으로 부정의한 독재자를 옹호하고 지지하는 행태를 목도하고 있다.

* 이 밖에도 부정의한 나라나 개인이 정의로운 나라나 개인을 압도하고 지배한 역사적 증거들은 넘치고도 남는다.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이 오늘날에서조차 설득력을 얻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덕과 지혜와 상관없이 합심과 우애를 ‘집단을 강하게 만드는 조직 원리’로 생각하는 깡패집단의 논리는 비감스럽게도 오늘날 근대정치 사상사에서 마치 상식이라도 되는 양 국가 및 권력을 정당화하는 당연하고도 적극적 근거로까지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를테면 마키아벨리즘은 시민의 동의나 도덕과 상관없이 전제 군주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해 국가와 시민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야말로 통치 권력이 추구해야할 최고의 목표로 주장하고 있고, 또 홉스주의 또한 개인들은 모두 오로지 이기적인 자기 보전욕구만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신들의 안전한 삶의 보전을 위해 강력한 통제 권력을 자발적으로 원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시민들은 상호 계약의 형식으로 강권 국가를 수립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오늘날 정의는 그러한 폭력성과 비참성을 인간 사회의 불가피한 숙명으로 받아들인 상태에서 다만 그것을 최소화하기 위한 이해관계 및 갈등의 조정책이라는 소극적 원리로 여겨져 ‘정의는 곧 개인들의 이해관계 및 갈등의 조정 내지 부정의에 대한 응징’이라는 근대 이후의 정의 관념을 형성하는 데에 심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그리하여 현대의 권력가들은 고대의 참주 못지않게 부역 지식인들의 주도면밀하고도 충성스런 지원을 받아가며 보다 강력한 통제와 착취 기술은 물론 정의의 평판까지 얻게 해주는 고차원의 기술을 치열하게 연마하고 발전시켜가면서 더더욱 강고한 권력을 구축해가고 있다.

* 정의만이 합심과 우애를 발생시키고 일도 잘 수행해냄으로써 나라와 개인을 더 강하게 만든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서 말과 명분에서만 우위를 점할 뿐 순진한 사람들의 소망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정의를 덕과 지혜, 진정한 의미에서의 합심과 우애의 근원이자 공동체와 개인을 강하게 만드는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야말로 현실과 역사를 직시하지 못한 사람들이나 내뱉는 잠꼬대 같은 소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사를 통해 삶의 진실과 역사의 진보를 일구어 온 사람들에게 이러한 패배주의적 냉소와 그럴듯한 담론들 모두는 권력에 빌붙어 기득권에 안주하는 지식 판매상들이 주구장창 늘어놓는 비겁한 자기변명이자 거짓 구호일 뿐이다. 현실 기득권자들은 공동체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가치의 상대성과 중립을 미명으로 현실 권력을 정당화하고 자유와 정의와 진리를 호도하는 작태를 거듭하며 안존을 도모해왔으나 장구한 인류의 역사는 그들의 권력과 영화, 부와 명예, 거짓과 위선이야말로 한 순간의 거품과도 같은 것이자 그 자신은 물론 그들의 자손들 모두에게 영원한 수치이자 멍에임을 일깨워주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2400여 년 전 이미 그러한 불의와 거짓과 탐욕에 맞서 지성으로 고양된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합심과 우애어린 협동과 나눔이 경쟁과 대립, 증오와 차별보다 강함을 역설하며 우리들 모두에게 ‘순진한 사람들의 희망과 당위가 어때서!’,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고상한 순진성γενναία εὐήθεια이면 어때서!’, ‘그래서 그게 혼이 아닌 몸의 손해이고 죽음이라면 어때서!’라고 외치고 있다. 그리고 그 자신 이미 오래 전 그렇게 외치며 기득권자들이 건넨 독배를 들이켰지만 누구도 그를 결코 패배자라 부르지 않는다.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은 이미 본성적으로 선과 정의에 대한 믿음을 갖고 태어나 그것의 구현을 욕구할 수밖에 없는 우주적 존재이다.

* 선과 정의, 진실과 자유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철학의 존재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러한 믿음을 전파하고 그것의 구현을 향한 힘과 희망을 키워가는 일은 그 자체로 우리 철학적 실천의 본질이자 근원이다. 철학은 그 자체로 불의에 대한 절망과 패배의식을 단호히 거부하는 힘이자 그 절망과 어둠을 뚫고 나갈 빛에 대한 열망이자 사랑이다. 그 열망과 사랑은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우리들을 불의에 대적하는 전장에로 다가서게 한다. 입장의 상대화는 다만 그런 입장이 결코 만만하지 않은 힘으로 아니 강고한 힘으로 우리가 소망하는 철학과 진실과 정의를 가로막고 있다는 걸 직시하게 해주는 것 정도로 유효할 따름이다. 요컨대 철학의 역사와 현실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두 입장이 서로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해왔고 그 싸움에 의해 인간의 삶과 행복이 보전되느냐 유린되느냐가 걸려 있는 것이 현실인 만큼, 우리의 철학은 우리가 어떤 입장에 설 것인지를 판가름하고 결심하고 실천하게 하는 영원한 토대이자 보루이다. 우리가 진정 철학을 하는 한, 철학은 왜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직관적으로 깨닫게 하고 분연히 일어서게 한다. 억압과 거짓과 독단에 순응하는 철학은 이미 그 자체로 가짜 철학이다. 소크라테스적 정신이야말로 철학자들이 영원히 서 있어야할 지고의 당파성이자 가장 순수하고 강력한 당파성이다. 우리의 공부와 사색이 소크라테스의 철학의 우위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의 근거라고 한다면 우리는 단순한 텍스트 내용에 대한 이론적 사색에 머물러 플라톤 사상의 우열여부만을 논하지 말고 그것의 실천적 전략도 함께 모색하고 정치투쟁도 감행해가면서 그의 철학과 사상을 더욱 심화 발전시켜 역사와 현실에서 그 우위를 증명하기 위한 싸움에 전력을 다해야할 것이다. 소크라테스적 믿음에 기초한 열망과 당위는 여전히 중요하다. 신영복 선생이 이야기 했듯이 친분과 혈연 등 사적인 인간관계도 중요하지만 불의한 권력과 싸우는 입장의 같음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마르크스가 철학의 요체는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라 말했지만 이미 플라톤 철학은 그 자체로 이미 정의와 진리를 향한 지적인 긴장과 분투의 철학이다. 플라톤의 열망 이상의 정열이 우리 안에서 불같이 끝까지 타오를 수 있도록 플라톤을 읽는 우리 또한 늘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도 우리의 <국가> 강해는 학술임과 동시에 격정을 동반하는 다짐이기도 한 것이다. 철학은 무지와 탐욕에 휘둘려 가며 현실에 안주하는 자에게는 하염없이 시대착오적이고 불온한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⑳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347e]

*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 대한 논박이 마무리되자 소크라테스는 그 주장보다도 ‘부정의한 사람의 삶이 정의로운 사람의 삶보다도 더 낫다κρείττω는 주장이 훨씬 더 중요한 논쟁점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앞서(344d-e) 소크라테스가 정의에 관한 토론에서 ‘어떤 삶의 방식βίου διαγωγή이 각 개인에게 유익을 가져다주는가?’라는 물음이야말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차대한 문제임을 강조하고 있을 때부터 이미 예견된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논쟁의 주제가 되었던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정치적 차원에서 정치적 강자와 권력지상주의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그가 정의라는 주제를 통해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과연 정의로운 삶이 시민들 각자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가의 문제 즉 시민 각 개인들의 삶의 방식과 행복에 관한 문제임을 보여준다. 물론 시민들 모두 폴리스적 존재라는 점에서 개인의 삶의 방식과 정치적 삶의 방식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서 플라톤의 <국가>는 전편에 걸쳐서 시종일관 정의 문제를 그 통일적 연관 하에서 유기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주장을 둘러싸고 벌어진 앞서의 논쟁 또한 그러한 구도 위에서 이루어진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럼에도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짧은 말 한마디에는 앞으로 <국가>가 다루게 될 핵심 주제가 무엇인가에 대한 중대한 함축이 담겨있다. 소크라테스의 말은 최소한 <국가>에서 플라톤이 펼치는 주요 관심사가 오늘날 흔히들 생각하듯 전체주의적 국가주의 철학과는 거리가 있으며, 오히려 각 개인들의 행복과 이익에 대한 관심이 그 근본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 체제에 관한 논의 또한 그것의 구현 조건을 모색하는 차원에서 제기되는 것임을 미리 예고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제2권에서 소문자와 대문자의 비유를 통해 정의 문제를 개인 차원에서 국가 차원으로 확대하는 과정에서도 다시 한 번 확인되고 있다.

 

4-10(348a~349a): 소크라테스 검토방식을 재정비하고 트라쉬마코스에게 정의와 부정의를 각기 덕과 악덕에 연관시켜 묻자 트라쉬마코스는 정의는 고상한 순진성이고 부정의야말로 덕과 지혜라고 답한다.

 

[348a]

* <국가> 제1권에서 소크라테스와 트라쉬마코스의 논쟁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는 트라쉬마코스가 논의에 끼어들어 불쑥 던진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화두를 중심으로 벌어진 정의와 권력, 권력과 이익에 관한 논쟁(338c-347a)이고, 다른 하나는 앞서 살폈듯이 ‘부정의한 사람의 삶이 과연 정의로운 사람의 삶 보다 나은가?’ 즉 바람직한 삶의 방식에 관한 논쟁(338b-354a)이다. 앞의 논쟁은 기본적으로 트라쉬마코스가 적극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주장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대응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뒤의 논쟁은 비록 트라쉬마코스의 부정의 찬양론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나 소크라테스가 그것을 정의로운 삶의 방식의 우위를 논증하기 위해 논쟁의 적극적인 방편이자 화두로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소크라테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그리고 문답이 소크라테스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만큼 내용 또한 제2권 이후에서 다루어질 내용을 일정 부분 암시 또는 선취하고 있다는 점도 우리가 주목해야할 점이다.

* 그런데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는 삶의 방식과 관련한 두 번 째 논쟁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이 던진 문제와 앞으로 전개할 문답의 방식에 대해 트라쉬마코스를 제쳐두고 글라우콘과 상의하고 있다. 이제 소크라테스는 삶의 방식이라는 보다 적극적 주제를 내세워 자신의 주도하에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보다 확실하게 논파하려는 기세로 글라우콘을 우군으로 끌어들여 함께 검토 방식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에게 정의로운 사람의 삶과 부정의한 사람의 삶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할 것인지 어느 쪽이 더 진실ἀληθής인지를 묻는다. 이에 대해 글라우콘이 정의로운 사람의 삶이 더 유익하며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 납득이 가지 않는다οὐ πείθομαι고 답하자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를 어떻게든 납득시킬 수 있는 길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함께 찾아보자고 제안한다.

* 앞서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가 아무리 부정의를 제한 없이 저지를 수 있다 해도 결코 부정의가 정의보다 더 이득이 된다고 결코 자신을 설득할 수 없을 것이며 그런 심정을 가진 사람이 자기 혼자만은 아니라고 자못 비장하게 언급하고 있다.(345b) 그런데 이곳에서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을 끌어들여 그러한 심정을 가진 사람이 결코 자기 혼자만이 아님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릇된 주장을 논파함에 있어 같은 심정을 가진 사람들끼리 결연한 의지로 함께 연대하는 모습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국가> 전체에 걸쳐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과 연대하여 트라쉬마코스 주장에 대한 논파를 넘어서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는데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348b]

*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에게 트라쉬마코스를 납득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아래의 두 가지 검토방식을 제시하고 그 가운데 어떤 방식이 좋을지를 묻는다. 하나는 토론 양쪽이 번갈아가며 각기 유리한 주장과 반론을 제기하고 그 후 판관들이 평결하는 방식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제껏 해왔듯 서로 합의를 보아가면서 고찰하는 방식ὥσπερ ἄρτι ἀνομολογούμενοι πρὸς ἀλλήλους σκοπῶμεν 즉 우리 자신들이 재판관들δικασταὶ인 동시에 변론인들ῥήτορες이 되는 방식이다. 이 두 가지 검토방식 중 앞의 것은 이른바 당대 아테네에서 이루어진 재판 절차에 따른 방식이다. 즉 원고가 먼저 연설을 통해 고발 이유를 밝히면 피고가 그에 대한 반론을 펼치고 그런 다음 다시 한 번 공방을 펼치고 나면 그것을 지켜보던 재판관들이 판정을 내리되 형벌이 법으로 정해지지 않은 사건의 경우에는 다수결에 의해 판정을 내리는 방식이다. 이에 비해 나중의 검토 방식은 논의 당사자들은 물론 그것에 더해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까지 토론에 가세해 모두가 판관들이자 변론인들이 되어 서로 합의를 통해 서로가 납득을 하는 보다 강화된 문답법적 검토방식이다. 사실 이 방식들은 일정부분 장단점이 있다. 전자의 방식은 법률에 따른 재판의 방식이라는 점에서 어떤 형식이건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구속력 있는 결정이 이루어지는 방식인 반면에, 당사자들의 납득 여부에 상관없이 일반 대중으로 구성되는 재판관들에 의해 판정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연설 능력이 중대 관건이 되는 방식이다. 그리고 후자의 방식은 토론자들의 합의하에 검토가 진행되므로 서로가 납득할 수 있는 실체적 진실에 다가설 수 있는 검토 방식이기는 하지만, 서로 자기주장만 펼치고 감정까지 내세워 합의에 이르지 못할 경우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결론 자체가 불가능한 방식이다. 따라서 이 후자의 검토방식이 가능하려면 검토에 참여한 사람들이 냉철한 이성에 따라 토론의 규칙을 지키고 그에 따라 귀결되는 결론은 자신의 감정과 무관하게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 제안된 두 가지 검토방식 가운데 글라우콘이 마음에 든다고 답한 방식은 두 번째 방식 즉 지금까지 해온 문답 방식에 토론자들이 더해지는 방식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적 방식을 보다 강화한 방식이다. 사실 위 두 가지 방식 가운데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의 경우는 문답법에 기초한 후자의 방식을 선호할 것이고 트라쉬마코스의 경우 연설가인 자신에게 유리한 전자의 경우를 선호할 것이라는 것은 누구라도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이다. 특히 소크라테스에게 전자의 방식은 결코 받아들이기 힘든 검토방식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재판정에서는 당사자들의 납득 여부와 상관없이 양쪽 연설을 들은 재판관들의 판단에 따라 판정이 내려질 뿐만 아니라 판정방식 또한 저마다의 주장을 통해 ’좋은 점들을 세어보고 재어 보는 것’ἀριθμεῖν δεήσει τἀγαθὰ καὶ μετρεῖν’ 즉 양적 계산에 따른 다수결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소크라테스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도 이러한 다수결이었다. 이 부분은 두말할 나위 없이 재판 과정 전체가 연설가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었던 당대 민주정 치하의 재판 절차에 대한 플라톤의 불신을 담고 있다. 진실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연설에 휘둘리는 대중들이 재판관이 되어선 안 되며 어디까지나 주장 자체의 정당함을 냉철하게 분별해낼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재판관들인 동시에 변론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테네 재판 방식에 대한 위와 같은 견해는 앎과 분별에 있어 철학자의 배타적 우월성에 대한 플라톤의 믿음을 나타낸 것이지만 다른 한편 그것은 오늘날 플라톤을 반민주주의자이자 엘리트주의로 규정짓는 주된 빌미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 세계가 대체로 그러했듯이 아테네 당대에도 교육은 기본적으로 소수 귀족들이나 양반 계급이 갖는 특권이었음을 고려하면 플라톤의 엘리트주의는 계급적 편향이라기보다는 무지에 대한 지성의 지배를 지지하고 강조하는 입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마도 오늘날의 발전된 민주주의 국가에서처럼 충분한 교양을 갖춘 깨어있는 시민들의 자발적이고도 실천적인 정치참여와 그것을 통해 그들이 구현하는 집단 지성의 힘을 플라톤이 직접 경험하였다고 가정한다면 플라톤은 결코 단지 대중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폄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폄하한 것은 본질적으로 대중 자체가 아니라 무지였기 때문이다.

* 소크라테스는 서로 합의를 보아가면서 고찰하는 주체를 우리들σκοπῶμεν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348b) 이는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앞으로의 검토 방식이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 등 참관인들을 포함한 보다 강화된 문답방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이 이후 곧바로 실제 논의와 검토 과정에 참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플라톤이 347e에서도 트라쉬마코스 주장에 대한 검토 주체를 우리σκεψόμεθα라고 말했던 데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여기서 우리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 역시 앞으로 제2권 이후에서 진행될 본격적인 검토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제2권 서두에서부터 이미 확인할 수 있듯이 글라우콘과 아테이만토스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대변하는 방식으로 소크라테스와 함께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 대한 검토에 참여하고 있고, 그 이후에도 ‘우리 자신이 판관들인 동시에 변론인’δικασταὶ καὶ ῥήτορες이라는 표현 그대로 온 힘을 기울여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대한 판관의 역할을 물론 그의 견해를 지지하는 변론인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348c]

*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과 검토방식에 대한 대화가 마무리되자 이제 자신이 던진 삶의 방식에 대한 문제를 화두로 꺼내들어 본격적으로 트라쉬마코스와 문답을 재개한다. 사실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쳐 자신의 현실론이 논파된 이후(346d) 위축된 듯 입을 다문 채 지금까지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의 대화를 조용히 지켜만 보고 있고 검토 방식과 관련해서도 아무런 의견도 내놓고 있지 않다. 자신의 기본 주장이 소크라테스의 강력한 반론에 의해 논박된 것에 따른 위축감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소크라테스적 문답방식에 대한 냉소와 거부감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아무려나 이제 트라쉬마코스는 앞서와 달리 소크라테스의 주도하에 그가 택한 검토방식에 따라 그가 던진 문제에 대해 자신이 대답을 해야 하는 수세적인 지위에 처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의 요구에 의해 다시 문답에 참여한 이후(348b)에는 거의 소크라테스의 물음에 수동적으로 대답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 트라쉬마코스와 문답을 재개하면서 우선 소크라테스는 처음으로 돌아가 트라쉬마코스에게 여전히 ‘완벽한 부정의가 완벽한 정의보다도 더 이득이 된다고 주장하는지’τὴν τελέαν ἀδικίαν τελέας οὔσης δικαιοσύνης λυσιτελεστέραν φῂς εἶναι;’를 확인하듯 묻는다. 이에 트라쉬마코스는 당연히 그렇게 주장하고 이미 그 이유도 밝혔다고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348c]

*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부정의와 정의 중 하나는 훌륭함(덕, ἀρετὴ)으로 다른 하나는 나쁨(악덕,κακία)으로 일컬을 수 있다면 자기는 정의가 훌륭함(덕)이라고 일컫겠노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트라쉬마코스는 자기는 여전히 부정의가 득이 되고λυσιτελεῖν 정의는 그렇지 못하다는 점에서 그와 정반대οὐναντίον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348d]

* 소크라테스의 견해와 정반대라면 정의는 악덕, 부정의는 덕으로 일컬어야 하지만, 트라쉬마코스는 악덕이란 말 대신에 아주 고상한 순진성(아주 고매한 선의πάνυ γενναίας εὐήθεια)으로, 덕이란 말 대신에 훌륭한 판단εὐβουλία이라고 부르겠다고 말한다.

* εὐήθεια는 좋게는 정직함, 순박함의 뜻을 갖고 있지만 나쁘게는 단순함, 우둔함의 뜻도 갖고 있다. εὐβουλία는 사리분별의 뜻을 가지고 있지만 여기서는 자기에게 득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전후사정과 이해관계를 잘 따져 대처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요컨대 트라쉬마코스에 따르면 정의로운 사람은 순진하고 아둔한 사람이고 부정의한 사람이야말로 세상 이해관계에도 밝고 그 유불리에 따라 처신도 잘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 이에 소크라테스는 부정의한 자가 ‘분별 있고 훌륭한 사람’φρόνιμοί καὶ ἀγαθοὶ이란 말인가라고 반문한다. 그러자 트라쉬마코스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바로 이어 분별 있고 훌륭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속내를 드러낸다. 즉 분별 있고 훌륭한 사람이란 완벽하게τελέως 부정의를 행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나라와 부족을 자신들 밑에 종속시킬 수 있는 사람’οἵ πόλεις τε καὶ ἔθνη δυνάμενοι ἀνθρώπων ὑφ᾽ ἑαυτοὺς ποιεῖσθαι이라고 말한다. 한 마디로 트라쉬마코스가 생각하는 분별 있고 훌륭한 사람이란 소매치기 같은 수준의 부정의한 자가 아니라 다름 아닌 통치자 수준에서 부정의한 자 요컨대 참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트라쉬마코스는 논의 주제가 삶의 방식으로 전환되었음에도 그야말로 조금도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고 부정의 찬양론을 토대로 정치 권력지상주의에 강고하게 매달려 있다.

 

[348e]

*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이러한 주장을 의아해하면서ἐθαύμασα 그가 말한 훌륭함과 분별의 문제를 덕과 지혜ἀρετῆ καὶ σοφία의 문제로 연결시켜 트라쉬마코스에게 ‘혹시 그렇다면 그 자신 부정의를 덕과 지혜 부류μέρει로, 정의를 그 반대 부류로 간주하는 것인지’를 묻는다. 이 물음 역시 앞으로 전개할 소크라테스의 논박 전략의 일환으로 던져진 것임에도 트라쉬마코스는 ‘전적으로 그렇게 간주한다’πάνυ οὕτω τίθημι고 동의를 표한다.

*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이 한결 더 다루기 어려워(더 까다로워,στερεώτερον) 그에 대해 뭐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길게 이유를 밝히고 있지만 우리말 역문으로는 금방 들어오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 내용을 좀 풀어서 말하자면 아래와 같은 내용일 것이다. 즉 ‘트라쉬마코스가 부정의가 득이 된다λυσιτελεῖν 고 간주하더라도 남들이 그러하듯 실제 속으로는 악덕이고 수치스러운 것αἰσχρὸν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런 생각은 세간의 통념과도 상통하는 것이라 그런 통념에 따라κατὰ τὰ νομιζόμενα 이렇다 저렇다 무슨 말이든 할 수가 있겠지만, 트라쉬마코스 당신은 통념과도 다르게 그것을 수치스럽기는커녕 아름답고 강력한καλὸν καὶ ἰσχυρὸν 것으로 간주할 뿐만 아니라 하물며 우리들의 생각과는 아예 정반대로 겉으로나 속으로나 부정의를 감히τολμᾶν 덕과 지혜ἀρετῆ καὶ σοφία로 여기고 있음이 분명하니δῆλος 그러한 대담하고 극단적인 주장에 대해 뭐라 말하기가 아주 힘들다’는 것이다.

* 이 부분은 트라쉬마코스가 얼마나 강고하고도 뻔뻔하게 일상의 통념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기 아집에만 매달리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고대 아테네에서나 오늘날 그 어느 사회나 이런 극단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문제는 세간의 보통 사람이 아니라 지식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 혹은 사회 지도층이라고 일컫는 사람들 가운데 이러한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들의 존재를 없애는 것은 신의 몫이고 우리들이 할 일은 지금의 소크라테스처럼 그들의 주장이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치열한 논리와 실천으로 그들을 압도하는 것이다.

 

[349a]

* 소크라테스의 이런 지적에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가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더 없이 정확하게 알아맞힌다ἀληθέστατα μαντεύῃ고 말한다. ‘알아맞힌다’의 원어μαντεύῃ의 원형동사 μαντεύομαι는 ‘신이 속내까지 다 들여다 볼 정도로 알아맞힌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트라쉬마코스가 제 생각 그대로를 말하고 있음λέγειν ἅπερ διανοῇ을 알게 된 이상, 그 주장을 논의를 통해τῷ λόγῳ 끝까지 검토하기를 주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트라쉬마코스는 자기 말과 생각이 일치되는 것으로 여겨지는지 아닌지가 무슨 상관이냐, 어찌되었건 자기가 한 ‘말(주장)에 대해 논박하려는 것 아니냐’οὐ τὸν λόγον ἐλέγχεις;라고 묻고 소크라테스는 그야 상관없다οὐδέν고 말한다.

* 소크라테스는 앞서(346a) 트라쉬마코스에게 어떤 형태로든 결론에 이를 수 있도록 자신의 생각과 어긋나게 대답하지 말 것을 요구한 적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트라쉬마코스가 제 생각 그대로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소크라테스의 앞서의 요구를 트라쉬마코스가 최소한 충족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트라쉬마코스는 자기의 속내는 변함이 없는데 소크라테스가 자기의 말만 가지고 논박하는데 대해 불만을 품고 소크라테스의 그 말에 항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트라쉬마코스의 반문에 대해 상관없다고 말하고 바로 뒤이어 다음 질문에 대한 답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그의 속내는 속내대로, 말은 말 대로 모두 논박할 수 있으므로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결론을 위해서 지금처럼 진실과 관련한 자신의 생각대로 대답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로부터 정의와 덕과 부정의와 악덕과 관련한 기본적인 견해를 확인한 후 이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주장에 대한 첫 번째 논쟁에 이어 두 번째 논쟁 즉 ‘과연 부정의한 사람의 삶의 방식은 정의로운 사람의 삶의 방식보다 나은가?“에 대한 논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제1권의 끝까지 이어지는 이 두 번째 논쟁 부분은 아래와 같이 크게 세부분으로 나누어진다. 1) 지혜와 관련하여 부정의가 정의보다 나은가?(349b-350c) 2) 힘과 관련하여 부정의가 정의보다 나은가?(350d-352c) 3) 덕과 관련하여 부정의가 정의보다 나은가?(352d-354a)

 

4-11(349b~350c): 소크라테스 능가개념을 토대로 정의가 덕과 지혜임을 밝히다.

 

[349b]

*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이 워낙 대담하고 의아스러운 것이어서 그것이 정말 그의 생각 그대로인지를 확인하기 위한 예비적인 대화가 마무리 되자,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에게 부정의가 덕과 지혜라는 앞서의 대답을 검토하기 위해 ‘정의로운 사람은 뭔가에서건 정의로운 사람을 능가하고 싶어 한다고 여기는지’ὁ δίκαιος τοῦ δικαίου δοκεῖ τί σοι ἂν ἐθέλειν πλέον ἔχειν; 대답해달라고 말한다. 이 물음은 장차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논박하기 위한 시금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질문이다. 특히 ’능가하고‘πλέον ἔχειν’라는 말이 그러하다. 그러나 아직 트라쉬마코스는 이 질문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능가하고’의 의미를 일상적인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대답을 이어간다.

* πλέον ἔχειν(pleon echein)은 ‘더 많이 차지한다’, ‘능가한다’, ‘넘어선다’의 의미를 갖는다. 위의 말은 이후부터 350c까지 그것의 명사적 표현인 ‘능가함’, ‘넘어섬’πλεονεκτεῖν으로 바뀌어 사용된다. 트라쉬마코스로선 이제까지 주장해왔듯 부정의한 사람이 정의로운 사람보다 뭔가를 더 많이 갖는 사람이고 더 강한 사람이므로, ‘능가’라는 말은 부정의한 사람에게 해당하는 말이지 정의로운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예의나 찾고ἀστεῖος 순진하기 그지없는εὐήθης 정의로운 사람이 상대가 정의로운 사람이건 부정의한 사람이건 간에 그 누구를 능가하거나 넘어서려 한다는 것은 트라쉬마코스로서는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그는 정의로운 사람이 정의로운 사람을 능가하고 싶어 하는지를 묻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당연히 ‘아니다’라고 대답하고 올바른 행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사람이 부정의한 사람을 ’능가할 자격이 있고‘ἀξιοῖ πλεονεκτεῖν 그것을 정의롭다고 생각할까 하지 않을까’를 묻는다. 이에 대해 트라쉬마코스가 능가할 자격이 있다고 여기겠지만 능가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묻는 것은 ‘정의로운 사람은 정의로운 사람을 능가할 자격이 있다고 여기지도 않고 그러고 싶어 하지도 않지만, 부정의한 사람에 대해서는 능가할 자격도 있고 능가하고 싶어하며 그것을 정의롭다고 여긴다는 것’이라 말하고 트라쉬마코스는 ‘그야 그렇겠죠’ ἀλλ᾽ οὕτως, ἔφη, ἔχει. 즉 ‘그런 생각이야 가지고 있겠죠.’라고 답한다.

* 요컨대 이 논의국면에서 소크라테스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아래와 같은 것이다. 1) ‘정의로운 자는 정의로운 자를 능가하려하지 않는다.’ 2) ‘정의로운 사람은 부정의한 사람을 능가할 자격도 있고 능가하려는 의지도 있다. 그리고 그것을 정의로운 것이라 여긴다’

 

[349c]

* 그런 다음 소크라테스는 부정의한 자의 경우는 어떠한 가에 대해서 트라쉬마코스로부터 아래와 같은 점을 동의 받는다. 1) 부정의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건 어떤 행위이건 모든 것에 대해 능가할 자격이 있고 능가하려 한다. 2) 부정의한 사람은 모든 것에 대해 ‘자신이 취할 수 있는 한, 최대의 것을 얻으려 경쟁한다.’ ἁμιλλήσεται ὡς ἁπάντων πλεῖστον αὐτὸς λάβῃ.

* 소크라테스가 트라쉬마코스로부터 확인한 부정의한 사람의 태도는 비감스럽게도 오늘날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태도로 강조되는 것이기도 하다. ‘넌 어떤 사람도 넘어설 수 있으며 어떤 것이든 이룰 수 있다. 네가 가질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최대의 것을 얻기 위해 과감히 무한 경쟁에 뛰어 들어라’

 

[349d]

* 이로써 검토를 위한 테제가 정리 확인되자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바탕으로 앞에서(348d) 트라쉬마코스가 주장한 것 즉, ‘부정의한 사람은 ‘분별 있고 훌륭한 사람이다’φρόνιμοί καὶ ἀγαθοὶ라는 주장을 검토하기 시작한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에게 시가에 능한 사람μουσικὸν 과 시가를 모르는 사람ἄμουσον 가운데 어느 쪽을 분별력 있는 사람τὸν φρόνιμον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묻는다.

* 시가(詩歌μουσική, mousikē)는 music의 어원으로 종종 음악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그 의미는 말부터가 음악, 예술, 학문의 여신인 뮤즈μουσαι에서 나왔듯이 이를테면 <일리아스>나 <호메로스> 등과 같은 시가를 비롯해서 음악과 연극, 춤 등 일체의 조화와 관련한 예술 영역은 물론 학문적 지식 내지 교양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사실 문자시대 이전에는 삶에 필요한 모든 정보는 구술로 전승되었고 그러한 구술은 노래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노래를 의미하는 시가가 μουσική라는 이름으로 지식의 뜻도 가지고 있고 종종 학예(學藝)로 번역되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 이다. 이에 따라 <일리아스>나 <호메로스> 같은 시가는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그들의 사고와 생활방식의 지침을 제시하는 경전과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μουσική에 능하다는 것은 곧 지적 능력과 교양을 두루 갖추었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즉 μουσικός(mousikos)는 음악가뿐만 아니라 지식인의 뜻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고대 동양에서 군자가 갖추어야할 교양으로서 여섯 가지 기예(技藝) 즉 육예(六藝)에 음악(樂)은 물론 예(禮), 사(射, 궁술), 어(御, 말 타는 기술), 서(書), 수(數)가 포함되어 있는 것과도 비슷하다.

 

[349e]

* 이에 대해 트라쉬마코스가 시가에 능한 사람이 분별력 있는 사람이라고 대답하자 소크라테스는 바로 의술에 능한 사람ἰατρικόν도 그와 마찬가지로 분별력 있는 사람인가를 묻고 트라쉬마코스의 동의를 받는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시가에 능한 사람이 리라를 조율할 때 다른 시가의 능한 사람을 능가하려고 하거나 능가할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지를 묻고 트라쉬마코스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다고 답한다.

* 트라쉬마코스의 대답은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시가에 능한 사람이 조율 능력에 능하다 해도 시가가 능한 사람끼리도 능력차이가 있고 그런 이유로 능한 사람끼리도 다른 사람을 능가하여 자기가 최고가 되려고 노력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트라쉬마코스는 앞에서 부정의한 자는 강한 자로서 모든 것을 능가하려 하고 경쟁도 한다고 말해 놓고서 이제 와서 시가에 능한 사람이 시가에 능한 다른 사람을 능가하려 하지도 능가할 자격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350a]

* 능가개념을 검토의 시금석으로 삼아 펼쳐지는 소크라테스의 이 논박은 350c까지 이어진다. 트라쉬마코스의 동의를 얻어가며 전개되는 그 논박의 진행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온갖 지식ἐπιστήμη 및 무지ἀνεπιστημοσύνη와 관련해서도 전문적 지식이 있는 사람τίς ἐπιστήμων은 다른 전문가가 행하거나 말하는 바를 능가하지 않는다. 반면에 전문지식이 없는 자는 다른 전문지식이 없는 자를 능가하려 한다.

 

[350b]

2) 그런데 전문지식이 있는 사람은 지혜롭고 훌륭한 사람ὁ σοφὸς ἀγαθός;이다. 이들은 같은 전문지식이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능가하려 하지 않지만 전문지식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능가하려고 한다. 반면에 못되고 무지한 자ὁ κακός τε καὶ ἀμαθὴς는 같은 사람에 대해서도 반대되는 사람에 대해서도 능가하려고 한다.

3) 부정의한 자도 같은 사람에 대해서도 같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도 능가하려고 한다. 반면에 정의로운 사람은 같은 사람에 대해서는 능가하려 하지 않지만 같지 않은 자에 대해서는 능가하려 한다.

 

[350c]

4) 그렇다면 ‘정의로운 사람=지혜롭고 훌륭한 ἀγαθός τε καὶ σοφός 사람, 부정의한 사람=못되고 무지한 자τῷ κακῷ καὶ ἀμαθεῖ.’라는 결론이 나온다.

* 이로써 348e에서 부정의를 훌륭함(덕)과 지혜ἀρετῆ καὶ σοφία의 부류로 간주했던 트라쉬마코스의 생각은 그 자신의 동의하에 진행된 논의 과정을 통해 자기모순에 빠지고 만다. 논박이 이루어진 것이다.

* 350c에서 ‘정의로운 사람은 지혜롭고 훌륭한 ἀγαθός τε καὶ σοφός 사람, 부정의한 사람은 못되고 무지한 자τῷ κακῷ καὶ ἀμαθεῖ.’라는 결론은 350d에서 ‘정의는 훌륭함(덕)과 지혜ἀρετῆ καὶ σοφία고 부정의는 악덕κακία과 무지ἀνεπιστημοσύνη’라는 말로 서로 합의된 것으로 표명된다. 이러한 논의 과정 전체에 기초하여 정의와 부정의 부류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정의의 부류 = 덕ἀρετῆ, 지혜σοφία, 훌륭함ἀγαθόν, 지식 ἐπιστήμη, 유식μαθὴ

부정의의 부류 = 악덕κακία, 무지ἀνεπιστημοσύνη , 무식 ἀμαθ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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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은 소크라테스의 논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크라테스가 능가πλεονεκτεῖν라는 개념을 끌어들인 그의 의도와 그가 생각하는 능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우리는 보통 ‘ 능가’라는 말을 ‘뛰어난 자가 경쟁에서 상대를 능가한다’할 때처럼 상대를 ‘이긴다’, ‘넘어선다’의 의미로 생각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겐 앞에서도 엄밀한 의미에서의 통치자,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술 등에 관해서도 그랬듯이 어떤 기술이 그 기술인 한에 있어서는 기술이 이루는 최고의 것을 제공할 수 있다. 즉 그 기술의 전문가는 그 최고의 것을 달성하는 사람이다. 전문가는 그런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산술에 능한 사람은 산술과 관련한 문제에 대해 정답을 내놓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정답을 내놓는 사람이 다른 정답을 내놓는 사람을 능가할 필요도 없고 따로 자기가 더 산술 자격이 있다고 말할 것도 없다. 의술의 경우도 전문가라면 질병에 딱 맞는 처방을 내놓는 사람이다. 다른 의사도 그가 전문가인 한 똑같은 처방을 내놓을 것이기 때문에 서로를 능가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 소크라테스가 시가에 능한 사람이 리라 조율에 있어 다른 시가에 능한 사람을 능가하려하지 않고 또는 능가할 자격이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의미이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전문가들끼리도 수준 차이, 능력의 정도차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만약 해당 기술에 조금이라도 결함이 있는 사람은 이미 전문가가 아니라고 말한다. 요컨대 무언가를 할 줄 안다, 안다는 것은 완전하게 할 줄 한다, 완전하게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플라톤의 앎ἐπιστήμη은 능력δύναμισ과 탁월함ἀρετῆ을 포함한다. 이론과 실천, 지행합일이 진정한 앎인 것이다.

* 플라톤의 이런 사상을 존재론적 관점에서 설명하면 ‘무엇이 무엇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 무엇이 그것으로 정의될 수 있는 고유의 것이 존재하고, 그 무엇과 다른 무엇 사이에는 그것들 서로를 구분하는 명확한 경계선, 한계선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플라톤은 그 경계선을 peras라고 부른다. 즉 어떤 것의 peras는 그 어떤 것의 내적 규정이다. 그것들 서로에는 모순율이 적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무엇은 그 무엇인 한 그 경계를 넘어설 수 없으며 그 경계를 넘을 경우 그것은 이미 그 무엇이 아니다. 플라톤의 이러한 생각은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경우처럼 인간 행위나 기술의 경우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행위나 기술의 경우도 그것이 어떤 행위이고 어떤 기술인 한, 그것을 그것으로 정의할 수 있는 경계가 있고 그것의 완전성, 최선의 상태를 규정할 수 있는 객관적 척도가 있고 그 척도에 충족한 상태로서 최고의 상태 즉 적도(適度metrion)가 있다. 요컨대 플라톤은 그러한 적도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철학일반의 가치론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그것은 모든 인간의 행위 특히 도덕적 행위에는 넘어서는 안 될 당위의 척도, 한도가 있다는 도덕 객관주의의 입장인 것이다. 플라톤이 그러한 입장에 서 있는 한, 그의 주장대로 분별 있고 훌륭한 사람이란 기술에서건 행위에서건 이러한 한도를 정확히 하고 그 한도를 지키는 사람인 반면에 모든 것에 대해 능가하려는 사람은 정해진 한도나 고유의 몫도, 분수도 모르고 제멋대로 행하는 무지한 자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논의 국면 서두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능가 개념은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사람, 분별 있고 훌륭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시금석이 되는 것이다.

* 어쨌거나 이곳에서 시가에 능한 자가 리라 조율에 있어 시가에 능한 다른 자를 능가하려 하는지를 묻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트라쉬마코스가 능가하려 하지 않는다고 대답하고 있는 것은 그가 아직도 엄밀론을 견지하고 있다고 전제하면 몰라도 쉽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부정의한 사람은 모든 것을 능가하려 하고 경쟁하려 한다는 점에 그가 동의했을 때(349c) 그는 분명 행위나 기술의 한도나 척도 따위를 염두에 두지 않았음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보다 결정적인 문제는 그의 논박이 성공했다는 것이 그가 논증 과정에서 제시한 생각들 자체의 완전성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의 논박은 행위나 기술의 최고의 상태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대전제가 진실임을 전제한 상태에서 성립할 수 있는 논박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능가라는 시금석 또한 소크라테스의 입장에서 성립하는 시금석이고 논리적인 차원에서 성립하는 시금석일 뿐이다. 소크라테스의 주장대로 만약 행위나 기능, 기술의 최고상태가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전제하면, 당연히 그것을 능가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것을 능가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여기서 그 대전제의 정당성은 논증되고 있지 않다. 설사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누군가 그것을 실제로 완전하게 인식하거나 완전하게 행위나 기술을 통해 달성할 수 있는지 달성했다고 하더라도 그 완전성, 그 적도성을 객관적으로 확인하고 증명할 수도 없다. 척도 자체가 존재한다는 것과 과연 그것이 모두가 동의할 수밖에 없는 척도인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수학과 기하학의 경우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척도가 있고 답이 있다고 해도 우리가 아직 풀지 못하고 있는 수학과 기하학 문제도 있을 뿐만 아니라 수학과 기하학 자체도 일정하게 전제를 가지고 있는 학문이다. 하물며 도덕적 정치적 행위의 경우에야 더 말할 것도 없다. 물론 플라톤은 그러한 완전한 앎, 완전한 형상적 진리를 직관적으로 체득하는 변증술dialektikē의 능력을 제시하고는 있지만 그러한 능력을 갖는 철학자가 실제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실제 존재하여 완전한 진리를 한 치의 오차나 실수 없이 모든 국면에서 체득하거나 또 설사 체득했다고 하더라도 그 체득된 것이 과연 완전하고 절대적인 진리인지를 확인 검증하기도 실로 난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진리를 완전히 체득해낸 완전한 의미의 철학자나 지자의 존재는 현실의 무지와 결핍을 진리로 견인해내기 위한 하나의 지향이자 최선의 목표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무지의 지는 진리에 대한 믿음과 그 믿음이 필연적으로 추동하는 지적 긴장과 열망 그 자체인 것이다.

* 완전한 진리의 존재 여부가 이성적 검증 너머의 것이라고 해서 그것에 대한 믿음이나 지향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결단코 아니다. 비록 어떤 것이 완전하지 않다거나 설혹 그것이 갖는 가치가 상대적인 것이라고 해도 그것으로 바람직한 것과 바람직하지 않은 것, 보다 좋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그 가치의 우열마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가치의 상대화와 등치화는 다른 것이다. 철학은 독단과 아집에 대한 비판적 거부는 물론 다양한 생각과 가치들의 우열의 기준과 근거를 찾아내기 위한 끈질긴 숙고와 천착의 작업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서 전개되는 소크라테스의 논박도 그러한 작업의 일환이다. 소크라테스의 논박은 일방적인 주장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 논거와 상대방의 동의와 이해를 바탕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런 이성적 바탕위에서 상대의 주장을 검토하고 비판하는 태도야말로 시대를 불문하고 진실에 다가서는 지식인들의 올바른 태도라 할 것이다. 게다가 제1권에서 이루어지는 트라쉬마코스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논박은 소크라테스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의 완전성을 드러내는 데에 목표가 있었다기보다는 다만 상대방의 주장이 갖는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데에 목표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에서의 소크라테스의 논박은 일단 논박 그 차원에서 분명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적극적으로 논증하지 않은 채 전제되고 있는 행위나 기술과 관련한 소크라테스, 플라톤의 생각과 사상 또한 앞으로 보다 정치하게 전개되는 그의 주장을 통해 보다 명료한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특히나 그런 과정에서 드러나게 될 그의 사상을 그가 살던 역사적 현실과 관련시켜 즉 시대정신의 살펴볼 경우, 우리는 그가 얼마나 그 시대와 역사, 삶의 진실을 고민한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그 고뇌를 바탕으로 얼마나 뛰어난 철학적 성찰과 성취를 이루었는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역사와 현실에 대한 치열한 사색과 실천적 모색 그것이야말로 철학 사상이 사상으로서 갖는 진정한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게다가 플라톤의 사상이 그 어떤 다른 사상보다도 인류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그의 사상이 당대의 시대정신으로서만이 아니라 시대를 뛰어넘는 그야말로 그가 제시한 진정한 앎 그 자체를 보여주고 있는 것임을 증명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도 삶의 진실 특히 정치와 도덕과 관련한 진실은 현실과 역사, 우리의 구체적 삶을 통해 증명되는 것이다.

 

『니체와 악순환』을 읽는 한 가지 방법 – 니체와 광기 ‘사이’ [철학자의 서재]

 

『니체와 악순환』을 읽는 한 가지 방법

니체와 광기 ‘사이’

 

니체는 도덕과 의식, 동일성에 반대하고 비도덕, 의식 이전의 충동이나 무의식, 비동일성을 중시한다. 우선, 책을 좀 따라가 볼 필요가 있다. 그에게 도덕이란 결정적 한 번으로 채택된 관습에 인간을 종속시키는 장치일 뿐이다(p. 22). 우리는 이런 도덕에 맞서 쉼 없는 성찰, 반성에서 나오는 근원적 요구들에 따라서 행동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충동’에 따라 살아야 한다. 하지만 실상은 어떤가. 우리는 충동을 억압하고 의식이 만들어낸 온갖 억압 장치에 따라 자신을 억압하고 산다. 교육과정을 통해 인간은 이렇게 문명화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억압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증상’에 시달리기도 한다. 우리는 교육받고 문명인이 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동일한 ‘하나의 주체’(인격체)로 구성한다. 하지만 이렇게 구성된 자기 동일성은 실재일까. 니체에 의하면 그것은 만들어진 동일성일 뿐이다. 니체는 모든 동일성을 부정한다. 니체는 광기에 사로잡히면서 스스로 니체 자신이길 그만두었다(p. 297). 동일성의 부재, 이것이 니체를 광기로 이끌었을까.

‘만들어진 동일성’ 그 아래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충동’이다. 충동은 인간의 삶을 위해 개인화되었으므로 오로지 탈개인화되기만을 갈망한다(p. 51). 한 인간은, 인격은 ‘결정적 한 번’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끊임없이 파괴되고 다시 표현되는 영원회귀의 체험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 체험은 악순환이고 목적과 방향도 없다(p. 54). 니체는 이러한 영원회귀의 체험을 긍정한다.

니체는 주체도 객체도 의지도 목적도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p. 66). 우리의 토대에는 카오스와 충동, 무의식만이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니체에게 이러한 우리의 조건은 부정적인 게 아니다. 의식과 이성의 감옥에서 벗어나 우리는 카오스와 충동에서 무한히 새롭게 생성될 수 있다. 그것은 우연을 긍정하는 것이다. 충동이라는 힘의 의지(p. 74)를 긍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자신을 유지하려는 것은 ‘주체’라는 일체성이 아니라 ‘충동의 투쟁’이라고 말한다(p. 78).

‘나’라는 동일성은 영원회귀가 계시할 때 파괴된다(p. 89). 영원회귀는 하나의 동일성, 정체성을 완료되지 않은 것으로 바꾸기, 망각하고 무한히 창조하기를 시도하는(p. 100) 것이다. 그리하여 너는 너 자신이기를 그치고 다양한 개인들 모두가 되어야 한다(p. 102). 위버멘쉬는 이러한 힘에의 의지, 영원회귀의 의미이자 목적에 다른 아니다(p. 103). 영원회귀는 충동이고 창조이며 영속적 동일성의 말소(p. 104)이다. 영원회귀의 힘은 끊임없는 변화하며 균형을 파괴한다. 그래서 니체에게는 개인도 없고 종도 없으며 동일성도 없다(p. 130).

그래서 니체의 영원회귀의 세계에는 교환가능한 것도 없고 우연만 있으며 황홀한 비밀스런 체험이다(p. 131). 초인이 아니고서야 동일성의 초극, ‘모두가 되는’ 경험을 아무나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 모든 것은 비밀로 남아 있는 게 정상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일상에 영원회귀를 적용할 수 있을까. 이 불가능성 앞에서 니체가 광기에 사로잡힌 것은 아닐까. 영원회귀라는 현기증 앞에서 말이다.

우리의 시각에서 영원회귀는 악순환이고 부조리하다. 그것은 카오스이고 비동일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균형의 파괴이며 초과하는 힘이고 이는 우리를 개인 이상의 존재로 끌어올린다(p. 157). 이 힘은 모든 것을 교환의 원리로 대체하는 자본주의 논리에 맞설 수 있게 할지 모른다. 이것은 하나의 위험이다. 그리고 영원회귀는, 창조는 위험상태를 유발해야 한다(p. 172).

이 위험은 현실원칙의 중지를 불러올지 모른다는 위험이다. 현실원칙을 중지하는 유희에 자신을 거는 것은 바로 ‘예술’이다. 예술은 충동의 강도들의 조건들을 자신의 고유한 형상들 안에 복원한다(p. 177). 예술의 충동은 하나의 ‘환영’을 창조한다. 그것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자신의 실존에 목적을 주는 어떤 존재, 모든 의지의 자유이다(p. 192). 이때의 ‘환영’은 재현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재현을 넘어서고 ‘초과’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성 질서의 통념이나 지배적 규범 체계와 관습들을 전복시키는 미지의 가능성이며 시인 김수영은 바로 이곳에서만 시의 존재가 있다고 보기도 했다.

(예술적)환영 그리고 충동, 영원회귀는 평균 이상이길 원하고 영원한 낯섦(p. 220)이길 원한다. 광기에 빠져서 니체는 이 환영 속에 살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 같은 세인들에게 니체의 이러한 사상은 받아들이기 쉬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니체가 본 진실, 현실의 균열, 틈, 부조리, 현실의 상처를 애써 회피하고 눈감는 것은 안일한 태도일지 모른다. 그것들은 증상으로 우리에게 언제든 찾아올 것이다. 우리는 이성이나 의식이 아니라 우리의 무의식에, 충동에, 정서에 호소해야할 지 모른다. 이성의 감옥에서 탈출해서 놀이와 우연의 세계, 영원회귀의 세계, 자유의 세계로 도피해야할 지 모른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부르짖어야 할지도 모른다. 결정적 한번으로 삶이 결정되어 꼼짝도 못하는 삶이 아니라 유동하는 삶을 갈망하게 될 지 모른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이성과 정신이 아니라 느낌으로 정서로 어떤 것을,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어떤 예술이나 예술가에게 빠져 허우적 거릴수도 있다.

이런 순간이 왔을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어떤식으로든 ‘책임’져야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사랑하고 예술을 만나고 하는 일은 적당히 해도 되는 것일까, 아니면 광기에 빠져서 해야 하는 것일까. 니체는 영리하지 못하게 정말 광기에 빠져버렸다. 이렇게 말해버리면 되는 것일까. 라캉은 자신의 박사논문 <개인의 형성에서 가족 콤플렉스>에서 법의 판결이, 그러니까, 상징계의 법과 금지가 개인의 정신병적 정체성 혼돈을 정지시키는지를 증명했다. ‘아버지의 이름’과 그 권위에 의존하는 주체를 만드는 일, 그것은 법의 역할이었다. 법이라는 동일성을 해체하고(법이든 주체이든 해체하고) 기존의 관습과 상식을 깨려고 했던 니체에게는 ‘법’과 ‘아버지’가 힘을 쓰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니체에게, 우리에게 항상 되돌아오는 문제는 상징계의 법이고 아버지다. 여기에 대응하고 저항하는 것만이 능사일까.

광기와 정상 사이, 정상과 정상 ‘사이’를 방황하고 유동하는 것, 그 ‘사이’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어쩌면 우리가 니체와 라캉 사이에서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아닐까. 다른 건 모르겠고 한동안 그 ‘사이’에서 유령처럼 배회하며 즐길 수는 있을 것 같다.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끝나지 않아도 좋다. 좋은 놀잇감이다. 이 책, 쉬운 책은 아니지만 새해를 맞이하여 일독을 권한다.

 

-글, 엄진희(시인, 문학평론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⑲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4-8(345e~346e): 기술과 그 기술에 수반하는 보수획득술은 구분해야 한다.

(전 시간에 이어 계속)

 

* 통치를 자진해서 맡지 않고 기피하는 이유는 소크라테스가 말하는(345d) 참된 의미에서의hōs alētōs 통치자와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참된 의미에서의hōs alētōs 통치자 즉 현실 통치자(343b)가 서로 정반대이다. 소크라테스는 통치는 자기 이익과 무관하므로 참된 통치자는 통치를 자진해서 맡지 않고 기피한다고 말한다. 이에 트라쉬마코스도 그런 경우라면 누구도 통치를 자진해서 맡지 않고 기피한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그는 소크라테스와 반대로 통치는 철저히 자기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이므로 현실 통치자는 누구나 다 통치를 기피하지 않고 자진해서 맡는다고 생각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일반 다스림을 맡는 사람들이 보수를 요구하는 경우를 들어 현실 통치자들의 이익은 통치술 자체와는 무관하고 다른 곳에서 나오는 것임을 밝힌다. 그러니까 통치술이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생각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통치술은 의술이나 조타술 등 다른 기술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이익이 아닌 대상의 이익을 제공하는 것이지 자기 이익과는 무관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통치자들의 이익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346b]

* 이에 소크라테스는 보수 획득술μισθωτικὴ을 끌어들인다. 즉 보수 획득술도 하나의 기술이자 능력δύναμις으로서 다른 기술들과 마찬가지로 대상에게 그 기술 특유의 이익을τήν ὠφελίαν ἑκάστης τῆς τέχνης ἰδίαν 제공한다고 말한다. 즉 의술이 의술로 불리면서 특유의 이익으로 건강을 제공하고 조타술이 조타술로 불리면서 특유의 이익으로 항해의 안전을 제공하듯이 보수 획득술도 보수 획득술로 불리면서 그 특유의 이익으로서 보수τὸ μισθὸν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346c]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의사나 선장 등 ‘모든 분야의 전문가들이 무슨 이익을 얻든 그것이 공통된κοινῇ 것이라면 그들은 무엇인가 동일한 것을 공통되게 추가로 이용함으로써προσχρώμενοι 이득을 얻게 되는 것’임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곧 전문가들이 보수를 받아서 이득을 보는 것은 공통적으로 보수 획득술이라는 추가적인 기술을 사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346d]

* 요컨대 각자의 전문적인 기술은 대상의 이익을 도모하고 보수 획득술이 보수를 생기게 하는 것이다. 이렇듯 보수 획득술은 별도의 기술이다. 이를테면 건축술은 집을 만드는 반면에 이에 부수되는 보수 획득술이 보수를 생기게 한다. 이처럼 전문 기술에 보수 획득술이 추가되지 않으면 전문가는 그 기술로 자기 이익을 얻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346e]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전문가가 무상으로 일을 할 때는 이득을 주지 못하나요?ἆρ᾽ οὖν οὐδ᾽ ὠφελεῖ τότε, ὅταν προῖκα ἐργάζηται;’라고 묻고 트라쉬마코스는 그럴 때도 대상에 이익을 준다고 대답한다. 무상 즉 자기 이익을 빼고도 기술이 대상에게 온전하게 이익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기술의 이익은 모두 대상의 이익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이런 논의를 토대로 어떤 다스림ἀρχὴ도 자기가 아니라 그 다스림을 받는 쪽에 이득이 되는 것을 제공하며παρασκευάζει 지시를 내린다ἐπιτάττει는 것 즉 약자의 이익을 생각하지σκοποῦσα 강자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δῆλον해졌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다스리는 일을 맡는 사람들이 왜 자진해서 맡으려 않고μηδένα ἐθέλειν ἑκόντα ἄρχειν 왜 보수를 요구하는지를 앞에서와 마찬가지로의 논리 즉 통치자들은 자신을 위한 최선의 것τὸ βέλτιστον이 아니라 오로지 대상만을 위해 최선의 것을 한다는 점을 근거로 다시 한 번 부연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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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밀론을 포기하고 현실론으로 돌아가 양치기 기술을 예로 들어 통치술이 피지배자가 아닌 지배자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이처럼 또다시 논박을 당한다. 그 논박의 기초에는 우리가 이제까지 살펴보았듯이 보수 획득술μισθωτικὴ이라는 개념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말하고 있는 보수 획득술과 관련하여 몇 가지 논쟁점이 있다. 그 점에 대해 간략히 생각해보기로 하자.

1) * 우선 보수 획득술에 관한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기술과 이익에 관한 기존의 입장과 부딪친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모든 기술은 자기 이익과는 무관하게 오로지 대상에게 최선의 이익을 제공하며 그와 마찬가지로 보수 획득술도 기술로서 대상에게 최선의 이익으로서 보수를 제공한다. 그런데 여기서 보수 획득술이 최고의 것을 제공하는 대상은 자기 자신이다. 요컨대 보수 획득술이 제공하는 최선의 이익 즉 보수는 자기의 이익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모든 기술은 자기 이익과 무관하다는 그 자신의 말과 모순된다. 설사 보수 획득술의 대상을 ‘보수의 획득을 잘 하게 하는 것’ 즉 보수 획득이라는 기능의 향상으로 규정하여 일단 개념상 자기 이익과 분리시킨다 해도 보수 자체가 자기 이익을 뜻하는 한 그 또한 ‘자기 이익의 획득을 잘 하게 하는 것’이 되어 결국 자기모순을 피할 수가 없다.

*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다른 전문 기술들이 대상의 이익을 위한 것인데 비해 보수 획득술은 전문 기술자의 이득과 관계된 것임을 (346c-d)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물론 그러한 언급은 기술 일반에 대한 앞의 언급과 일관되지는 않지만, 다른 기술들과 달리 보수 획득술은 기술의 대상 자체가 자기 자신인데다 보수라는 말 자체가 자기 이익을 의미하는 한, 내용상 불일치는 불가피한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최소한 자기 이익과 관련해서는 보수 획득술이 다른 기술과 차이가 있음을 미리부터 밝히고 들어간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어쨌거나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면 기술에 관한 이전의 언급과 모순되는 말을 한 것만은 사실이긴 하다. 그러나 설사 그 점을 인정한다하더라도 보수 획득술이 제공하는 자기 이익과 우리가 문제 삼는 트라쉬마코스적 통치술이 제공하는 자기 이익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트라쉬마코스가 통치술을 통해 추구하는 자기 이익은 ‘다른 사람들의 몫까지 빼앗아 얻은, 자기 몫 이상의 이익 즉 부도덕한 자기 이익’이다. 그런데 보수 획득술이 가져다주는 자기 이익은 탐욕과 강탈에 의한 이익도 아니고 자기 몫 이상의 것(pleonexia)도 아니며 다만 기술 전문가로서 자신의 노동에 정당한 대가이자 보수로서 자기 이익이다. 그것은 열심히 일한 사람들이 제공받아 마땅한 그 자신의 몫인 것이다. 이런 몫은 생존 자체를 위한 것이므로 생명체로서 당연히 추구해야할 일이지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그러한 행위까지 부도덕한 이기주의의 범주에 넣는다면 생명체의 행위 가운데 부도덕하지 않은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의 자기모순을 지적하면서 보수 획득술이 대상으로 하는 자기 이익과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통치술을 통한 자기 이익을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부터가 이미 논리적으로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자기 이익 각각은 말 만 동일하지 내포하는 내용은 전혀 다른 것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자기 사랑이자 당위이지만 하나는 타인의 희생을 무릅쓰고 자기의 이익만을 노리는 탐욕으로서 부도덕한 것이다.

2)* 둘째는 보수 획득술이 과연 기술 일반론적 관점에서 기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에 대한 논쟁이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보수 획득술 역시 기술로서의 능력을 갖고 대상에 대해 자기 특유의 이득 즉 보수를 제공하는 하나의 기술임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346b-c) 그런데 기술 일반론적 관점에서 보면 기술은 그 기술 고유의 기능을 활동을 통해 발현한다. 이런 의미에서 기술은 모종의 활동이다. 소크라테스가 지금까지 언급했던 기술들 역시 모종의 활동으로서 각기 고유의 활동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기술들에 비해 소크라테스가 제시하는 보수 획득술이라는 기술은 그것이 갖는 고유한 활동이 없다. 실제로 전문 기술자들은 자기 전문 기술 활동을 하면서 혹은 기술 활동을 마친 후에 보수의 획득을 위해 별도의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다. 고유한 활동이 있는데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활동 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럼 점에서도 보수 획득술은 기술이 아니다. 그리고 모든 기술들은 기술사용에 따르는 가치 즉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는데 비해 보수 획득술은 사용 활동이 없으므로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게다가 모든 기술들은 바로 그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용역 상품으로서 교환가치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기술은 사용가치 뿐만 아니라 그것에 자동으로 부수되는 교환가치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언급되는 보수란 이러한 기술 용역에 대한 대가로서 주어지는 기술의 교환가치라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보수는 보수 획득술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전문 기술이 상품으로서 교환가치를 갖게 됨에 따라 자동적으로 부수되는 것으로서 별도의 독립적인 기술적 활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요컨대 보수 획득술이란 기술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보수 획득술을 마치 다른 기술과 마찬가지의 기술인 양 언급하고 있는 소크라테스는 그 자체로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 그런데 텍스트를 잘 들여다보면 소크라테스도 이런 점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비록 보수 획득술을 일단 다른 기술들처럼 기술이라고 부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보수 획득술을 다른 기술들과 분명하게 차별을 두고 있다. 우선 앞서도 언급하였듯이 소크라테스는 다른 전문 기술들이 대상의 이익을 위한 것인데 비해, 보수 획득술은 전문 기술자 자신의 이득과 관계된 것임을 (346c-d) 미리 밝히고 있고, 또 보수 획득술은 독자적인 기술이 아니라 각기 다른 기술들이 공통으로κοινῇ 가지고 있는 기술이자, 각 기술이 추가로 이용하는προσχρώμενοι 기술(346c) 즉 일반적인 전문 기술들에 부수되는ἑπομένη 기술(346d)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요컨대 소크라테스도 그 자신 보수 획득술이 독립적인 기술이 아니라 기술에 부차적으로 따라 붙는 부수적인 기술 즉 예외적인 기술임을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비록 독자적인 활동은 없지만 의존하는 보수의 획득이 모태 기술의 활동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보수 획득술도 기술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입장 또한 일정부분 받아들여질 수 있는 여지도 있어 보인다. 즉 보수 획득술은 비록 그 자체로는 독립적인 활동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모태가 되는 기술 활동에 의존하고 있고 그 활동 과정을 통해 보수가 획득된다는 점에서 의존의 형식으로 모태 기술 활동에 포함되어 있거나 모태 기술의 활동을 공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술 일반론의 입장에서도 보수 획득술 역시 의존적이지만 모종의 활동으로서 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보수 획득술은 일반 전문 기술과 달리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분명 차이가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보수 획득술이 전적으로 기술이 아니라는 근거는 되지 않는다. 기술의 활동이 사용가치 뿐만이 아니라 상품으로서 교환가치도 가지고 있고 보수 획득술도 의존적이나마 모종의 활동이자 기술임을 인정한다고 하면, 보수 획득술은 사용가치 대신 교환가치를 특유의 이익으로 발생시키는 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여기에서 언급된 보수 획득술을 지금까지 말해온 기술들과 아주 똑같은 차원에서 비교하여 자기모순으로 비판하고 기술의 범주에서 배제하기 보다는, 소크라테스 자신 ‘기술론의 입장을 유지하면서 다만 트라쉬마코스의 통치술의 잘못된 이해를 드러내려고 대상 쪽의 이익이 아닌 기술 쪽의 이익을 도모하는 예외적인 기술로 제시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균형 있는 이해가 아닐까 싶다.

3) 어찌되었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보수 획득술은 입장에 따라 여전히 논란의 여지를 안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보수 획득술을 고대 아테네가 아닌 오늘날의 경쟁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에서 보면 나름 독립적인 기술로서 고유의 활동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볼 여지도 없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현대인은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기의 능력과 기술을 잘 알리고 틈틈이 스펙도 쌓아야 하고 이미지 관리에도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능력과 가치를 가지고 있어도 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경쟁에서도 밀리고 취업도 어려워져 보수획득도 실패한다. 그리고 경쟁에서 이겨 취업을 한 경우에도 자기 능력을 인정받기 위한 노력은 멈출 수 없다. 실적도 올려야 하고 임금협상 능력도 길러야 하고 자신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노조활동도 해야 한다. 현대를 자기 PR의 시대, 이미지 시대, 광고의 시대, 마케팅의 시대라고 말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위와 관련한 활동 모두가 자기 일에 대한 보수의 획득과 관련된 일이라면 그리고 그와 관련된 기술을 가칭 자기 마케팅 기술이라고 부른다면 분명 그 기술은 분명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보수 획득술과 다름이 없다. 게다가 그 기술은 고유한 활동을 가지고 있으므로 부수적인 기술이 아닌 독립된 기술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고대 양치기의 경우도 현대 노동자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긴 하더라도 다른 양치기 보다 자기가 더 잘 인정받으려고 주인에게 더 잘 보여 양치기 일을 계속 맡으려고 양치기 기술 이외에 자기를 잘 알리려는 모종의 활동들을 했을 것이다. 플라톤을 이해하려는 동기가 낳은 지나친 발상일까?

4) 그리고 통치술이 자기 이익과 무관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소크라테스가 제시하는 논거들 중 일부도 논쟁거리가 될 수 있다. 이를테면 소크라테스는 일반 관직을 맡은 사람들이 통치를 맡고서 별도로 보수를 요구한다는 점을 들어 통치술과 자기 이익과의 무관성을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 그 반대의 입장을 가진 사람들에게 설득은커녕 오히려 코웃음을 치게 만들 수도 있다. 우선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에서 보면 소크라테스가 최고의 권력을 갖는 통치자와 일반 관리들을 같은 다스림 차원에서 비교하고 있는 것부터가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일반 관직을 맡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이란 일반 행정 차원의 권력 정도라서 따로 자신의 수고에 따른 보수를 요구하겠지만, 자기가 말하는 통치자의 경우는 통치를 맡는 순간부터 그 자리 자체로 그와 비교할 수 없는 특권과 이익은 물론 명예까지 거머쥘 수 있기 때문에 보수는 그냥 푼돈에 불과하다. 그리고 일반 관직을 맡은 사람들 역시 소크라테스의 말에 코웃음을 칠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들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권력이 지금과 같은 일반 관리직 정도가 아니라 그야 말로 최고 통치자가 누리는 권력이라면 전혀 생각과 태도가 달라질 것이라는 것은 누구라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보통의 경우 그러한 권력이 자신에게 주어질 수만 있다면 보수를 요구하기는커녕 자기의 보수를 뇌물로 다 바쳐서라도 통치를 맡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고 내세우기 위한 논변을 위한 논변은 될 수 있을지언정 설득력은 고사하고 도리어 일반 사람들에게는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사람들의 허황된 꿈 정도로만 들릴 가능성이 높다고 할 것이다.

* 사실 트라쉬마코스 같은 부류의 세력들을 무찌르기 위해서는 단순히 그들을 비난하면서 자신들의 순결성을 내세우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부정의한 현실을 변혁해내기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도 설득력 있는 담론과 힘을 길러,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날 수 밖에 없는 대중들의 마음을 읽어내고 그 마음과 열망에 불을 지르고 희망을 갖게 하여 함께 변혁을 이룰 세력으로 연대하고 함께 성장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일반 민중에게까지 코웃음이 될 만한 주장으로는 어떤 변혁도 이끌어 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가 자기 한계까지 엿보이는 이런 주장들까지 하나하나 세심하게 드러내놓고 검토하고 살피는 까닭은 무엇일까? 어쩌면 소크라테스는 부정의한 자들이 가지고 있는 뿌리 깊은 탐욕의 실체를, 그리고 또 현실에서 그것을 대하는 일반 사람들의 본성과 태도를 그리고 자신의 미흡한 태도마저 그 일체를 반성적으로 객관화하여 최대한 샅샅이 있는 그대로 살피고 드러내려 한 것은 아닐까? 그러한 방식으로 앞으로 그들의 탐욕이 철두철미한 그 만큼 그에 맞서 그 철두철미함 이상으로 철저히 변혁해내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점에서 보면 제1권에서 노정되는 논쟁점들은 소소한 것들이건 아니건 그 모두 정의로운 나라의 건설을 위한 조건들의 세밀한 탐색이자 그것의 기초를 다지기 위한 온갖 용도의 고임돌이자 디딤돌이자 받침돌들이라 할 것이다.

 

4-9(347a~.347e) : 통치자에게 보수는 강제나 벌이다.

 

[347a]

* 소크라테스는 앞서 이야기한대로 통치기술 자체가 대상 쪽 이익에 관계되고 자기 이득과는 무관하므로 아무도 자진해서 통치를 맡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 후 그것이야 말로 관직을 맡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보상μισθός이 있어야 하는 까닭이라고 말을 한다.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그 보상의 예로 돈ἀργύριον과 명예τιμή를 들면서 흥미롭게도 누가 그 일을 맡으려 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 보상이 벌ζημία(벌금, 벌칙, 손실이라는 뜻도 있다)이 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이에 글라우콘이 논의에 끼어들어 보상의 부류에ἐν μισθοῦ μέρει 벌이 포함된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의 주제는 최선의 인간들이 받는 보상에 관한 문제로 넘어 간다.

 

[347b]

* 앞서도 언급했듯이(345e-346e) 참된 통치자는 통치를 자진해서 맡으려 하지 않고 기피한다. 그 참된 통치자들은 여기서 ‘최선의 인간들’τῶν βελτίστων, ‘가장 훌륭한 사람들’οἱ ἐπιεικέστατοι(ἐπιεικής, ‘적합한’, ‘능력 있는’의 뜻도 있다) ‘훌륭한 사람들’οἱ ἀγαθοὶ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통치를 기피하던 이 사람들이 통치를 맡게 되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보상μισθὸν(앞에서는 ’보수‘로 옮겼다)’때문이라고 말한다. 전 시간 이야기 했듯이 참된 통치자들이 통치를 기피하는 이유는 통치가 자기 이익과 무관하기 때문이었음을 고려하면 여기서 통치를 하게 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보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일단 자연스럽다. 그리고 이것은 ‘통치자들은 통치에 대한 보수를 요구한다’는 앞서의 언급(346e)과도 일치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그것을 벌이나 강제라고도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글라우콘도 의아해 하는 것이다.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밝히는 그 이유는 이러하다. 우선 통상 통치를 맡으려는 사람들은 보상으로서 명예나 금전을 원한다. 그런 인간들은 명예에 대한 사랑과 금전에 대한 사랑τὸ φιλότιμόν τε καὶ φιλάργυρον을 추구한다. 그러나 훌륭한 사람들에게 명예나 금전은 수치스러운 것ὄνειδος이다. 즉 그들에게 그것은 통치를 하게 만드는 보상이 아니라 오히려 통치를 기피하게 만드는 나쁜 것들인 셈이다. 게다가 그들은 드러내놓고φανερῶς 보상을 요구함으로써 고용인들μισθωτοὶ로 불리기를 바라지도 않고 통치를 구실로 몰래λάθρᾳ 보상을 취하는 도둑들κλέπται로 불리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 훌륭한 사람들의 이러한 태도는 어떤 오해조차도 받지 않으려는 결벽 수준의 자기 반성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서 고용인으로 불리길 원하지 않는다는 말은 고용인들에 대한 고대인들의 계급적 비하를 일정부분 반영하고는 있지만 보다 적극적인 의미는 통치 업무에 대한 통치자로서의 주인 의식과 주체적 자발성을 강조하는 말이라 할 것이다. 아무려나 시민이 주권자고 통치자는 주권자의 고용인 역할을 하는 오늘날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이 말은 오히려 반대가 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통치자와 관리들은 거꾸로 고용인으로 불리길 자처해야 하고 나아가 그 점을 시민을 위한 통치자의 기본자세로서 마음속에 깊이 명심해야할 것이다.

 

[347c]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통치자에게 주어지는 명예와 금전이라는 보상 자체가 훌륭한 사람들에게는 창피한 일이라서 훌륭한 사람들로 하여금 통치하려는 마음을 갖게 하려면 그들에게 강제ἀνάγκη나 벌ζημία이 가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그들이 강제 당하기까지 기다리지 않고μὴ ἀνάγκην περιμένειν 자진해서 통치하려고 나서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αἰσχρὸν νενομίσθαι도 그 때문인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들에게 그러한 강제나 벌로서 최대의 벌τῆς ζημίας μεγίστη은 ‘스스로 통치에 나서지 않을 경우 그에 대한 최대의 벌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한테 통치를 당하는 것’τῆς δὲ ζημίας μεγίστη τὸ ὑπὸ πονηροτέρου ἄρχεσθαι, ἐὰν μὴ αὐτὸς ἐθέλῃ ἄρχει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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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훌륭한 사람들은 강제 당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자진해서 통치하려 나서는 것을 창피한 일로 생각한다. 명예나 금전에 대한 사랑으로 통치에 나서는 것은 보상은 커녕 수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의한 현실에 신음하는 시민들을 위해 어떻게든 빨리 통치에 나서야 함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사람들은 단지 자기 자존심 때문에 강제를 기다렸다가 그제에서야 통치에 나선다는 것일까? 그러나 그렇게 시간 순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들이 정의로운 사람들인 한, 그들이 느끼는 수치감에는 이미 부정의한 통치자들에 의해 나라가 다스려짐으로써 시민들이 불이익을 당하며 신음하고 있는 것에 대한 수치와 두려움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러한 수치와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벌로서라도 통치를 맡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여기서 강제가 있기 전에 자진해서 통치를 맡지 않는다는 말 역시 강제가 주어진 연후에야 통치를 맡는다는 시간적인 선후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훌륭한 사람들이 자진이 아닌 강제로 통치를 맡게 될 수밖에 없는 논리적인 선후관계를 말할 뿐이다. 굳이 시간적으로 보자면 훌륭한 사람들은 자신들 보다 못한 사람들에 의해 통치가 이루어지는 순간 수치심을 느끼고 그 수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즉시 자기가 싫어하는 통치를 벌로라도 받아서 통치에 나서는 것이다. 즉 수치심이 발생하고 통치가 벌로서 주어지는 강제의 시점과 그것을 맡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통치에 임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동시적인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통치를 강제하는 것이 누구인지도 별로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것은 부정의한 통치일 수도 있고, 그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요구일 수도 있고 그러한 현실을 목도한 통치자들 자신일 수도 있고 그것들 전부일 수도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훌륭한 사람들이 통치를 맡을 수밖에 없는 메카니즘을 굳이 정리해서 말하자면 일단 통치가 벌로서 주어진다는 점에서 강제이지만 그 벌을 통해 수치심의 면제라는 혜택이 주어진다는 점에서 보상이 주어지며 동시에 통치를 벌로서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그들이 자각하고 그에 따라 자진해서 통치에 나서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통치 참여는 그들의 자발성이자 자유이기도 한 것이다. 요컨대 훌륭한 사람들은 비록 통치는 싫지만 불의한 현실이라면 늘 그렇게 통치자로 강제당하기를 자진해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347d]

* 그리고 이런 사정을 거쳐 결국 강제에 의해 훌륭한 사람들이 통치를 맡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이르렀을 때조차 그들은 무슨 좋은 일이나 안락 때문에서가 아니라οὐδ᾽ ὡς εὐπαθήσοντες 통치를 맡아하는 수고를 다른 동료에게 떠맡기는 것ἐπιτρέψαι이 싫어서 자기부터 나서서 통치에 임하려 한다. 그리고 훌륭한 사람들의 나라πόλις ἀνδρῶν ἀγαθῶν가 되었을 경우에는 마치 오늘날 현실 통치자들이 통치를 맡으려고 싸우는 것과는 정반대로 서로 통치를 맡지 않으려고 싸운다고 한다.

* 위의 두 상황은 훌륭한 사람들이 통치에 임하게 되는 각기 다른 배경을 보여준다. 하나는 불의한 현실에서 참된 통치자의 수고가 크게 요구되는 상황을, 다른 하나는 통치가 잘 되어 통치자가 크게 수고를 겪지 않아도 될 상황을 보여준다. 전자의 상황에서는 체질상 통치를 싫어하는 다른 동료들을 생각해서 자기가 먼저 나선다는 것이고 후자의 상황에서는 어차피 참된 통치자ἀληθινὸς ἄρχων가 본성상πέφυκε 오직 피지배자의 이익을 생각하며 통치를 잘할 것이 명백한 이상, 수치스러운 일도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고, 통치 또한 수고로움으로까지 여겨질 일도 아니므로 그 때는 자기가 좋아하는 철학에 전념하려고 서로 나서기를 꺼려한다는 것이다. 물론 전자의 상황은 우리가 맞이하는 일상적인 현실의 경우이고 후자의 상황은 이상적인 국가가 실현된 경우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 아무려나 훌륭한 사람들에 대한 강제는 결과적으로 수치를 면하는 혜택을 훌륭한 사람들에게 가져다준다. 그런 의미에서 그 강제는 앞서(347a) 소크라테스가 말했듯이 소극적이나마 ‘최선의 인간들이 받는 보상’이 되는 것이다. 사실 철학자에게 수치심은 너무도 큰 치명적인 손실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그 손실을 면하게 되는 것은 역으로 그에게 큰 이득이 되는 것이나 진배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명예나 금전에 기초한 유인과 그에 대한 자발적이고도 적극적인 호응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그와 정반대이다. 그것은 ‘네가 통치자로 나서지 않으면 너는 수치감 속에 살아야 할 거야’라고 하는 손실 회피에 기초한 강권과 그것을 의식한데 따른 부득이하지만 다른 한편 적극적인 수용의 결과일 뿐이다. 철학자가 요구하는 보상과 다른 한편 두렵고 수치스러운 강제와 벌ἀνάγκη καὶ ζημία이 연계되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수치심을 피하기 위해 기꺼이 통치자가 되는 벌을 감내하는 것이다. 그에게 보수는 곧 철학자로서 그 자신의 자기 정체성과 자존감의 보전인 것이다.

*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식견이 있는(지각 또는 분별이 있는) 이ὁ γιγνώσκων라면 누구나 다 남을 이롭도록 수고를 하느니보다는 오히려 남의 도움으로 자신이 이롭도록 되는 쪽을 택할 걸세.’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남을 돕는 노고를 하지 말고 남한테 의지하여 자기 이익이나 챙길 것’을 권하는 말 같이 들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이 말을 바로 앞 상황과 연결 지어 아래와 같은 의미로 이해하기도 한다. ‘나라 상황이 태평천하일 때는 식견이 있는 사람(훌륭한 사람)이라면ὁ γιγνώσκων 누구나 남(시민들)을 위해서 수고를 하느니보다는 오히려 남(동료 수호자들)의 도움으로 자신이 이롭도록 되는 쪽(철학을 공부하는 쪽)을 택하게 된다.’

* 그러나 이 부분은 트라쉬마코스가 양치기 예를 들어가며 엄밀론에서 현실론으로 돌아와 ‘정의는 남에게 즉 강자에게 좋은 것이며 자기 즉 피지배자에게 좋은 것’이라고 주장한(343b,c) 이래 둘 사이에서 펼쳐진 논의들에 대한 마무리임을 고려하면 아래의 의미를 갖는 것이라 할 것이다. ‘트라쉬마코스의 말대로 정의는 남 즉 강자의 이익이고 자기 즉 피지배자의 손해라면 식견 있는 사람들 그 누가 남 좋은 일 그러니까 강자 좋은 일을 위해 생고생을 하겠느냐. 소크라테스 말대로 우리 피지배자들의 이익만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그런 통치자가 있다면 그런 사람들의 도움으로 우리들이 이롭게 되는 쪽이 것이 훨씬 좋은 일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최소한 분별 있는 사람들이라면 트라쉬마코스 주장보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이 자신들에게 더 유익하고 합당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347e]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결론적으로 ‘그러므로 나로서는 이 점에 대해 즉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것에 대해서 트라쉬마코스와 도저히 의견을 같이 할 수 없다τοῦτο μὲν οὖν ἔγωγε οὐδαμῇ συγχωρῶ ὡς τὸ δίκαιόν ἐστιν τὸ τοῦ κρείττονος συμφέρον.’고 단언한다. 그리고 ‘그 점에 대해 다시 또 우리가 검토하게 될 것’τοῦτο μὲν δὴ καὶ εἰς αὖθις σκεψόμεθα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하여 344d 이후 기술론에 입각하여 전개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트라쉬마코스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논박, 즉 기술론적 논박은 여기에서 일단락된다.

* ‘그 점에 대해 다시 또 우리가 검토하게 될 것’이라는 그의 예고가 <국가>편 아니면 다른 대화편 어디에서 과연 실행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다.(J. Adam. 347e note 참고. 박종현 선생과 천병희 선생은 공히 Adam의 견해에 따라 이 부분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스쳐가는 말 또는 상투적인 말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앞에 트라쉬마코스와 도저히 의견을 같이 할 수 없다는 결론적 발언의 직접적인 근거가 앞의 논의 전체에 대한 식견 있는 사람들의 판정임을 고려하면 달리 해석할 여지도 있다. 앞에서 살폈듯이 누가 보더라도 그 자신이 식견 있는 사람이라면 통치가 강자만을 위한 이익이라는 트라쉬마코스의 입장보다는 통치가 시민을 위한 이익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입장을 선택할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바보가 아닌 한 자기 이익을 위한 통치를 바라지 누가 남이자 강자만을 위한 통치를 바라겠는가? 이 점에서도 식견 있는 사람들의 판정에 기초해서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입장이 옳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그러나 식견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러한 판정에 이어 아래와 같이 물을 것이다. ‘소크라테스 선생! 우리들은 당신의 말하는 통치 쪽을 선택할 것이오. 그런데 그런 통치가 가능하기나 한 것이오. 가능하다는 전제하에서 우리가 그 쪽을 선택한 것인데 그런 것이 옳다는 주장만 했지 가능하다는 근거는 아직 제시하지 않으셨잖아요. 이제 그 점을 말해 주셔야죠.’ 소크라테스 역시 바보가 아닌 한, 식견 있는 사람들이 이러한 요구를 할 것이라 당연히 예상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그 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소크라테스가 이곳에서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검토해보게 될 걸세’라는 말은 결코 상투적인 말이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식견 있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궁금해 할 수 있는 문제들을 소크라테스 역시 당연히 의식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이 점’의 내용은 다름 아니라 ‘정의로운 통치의 가능성에 관한 문제’라고 해석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고 실제로도 그에 관한 문제가 <제2권> 이후에서 검토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상투적인 말이 아니라 바로 앞에서(347d)에서 말한 ‘훌륭한 사람들의 나라’πόλις ἀνδρῶν ἀγαθῶν(정의로운 나라와 관련한 표현으로서 처음 나오는 말이다) 즉 ‘정의로운 국가에 관한 논의’를 예고하는 말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해석이 타당하다면 이 부분은 이러한 예고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제1권’은 결코 <국가>와 별개로 따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국가>의 서론으로서 처음부터 계획된 것임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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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에서 이루어진 트라쉬마코스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기술론적 논박은 우리들에게 정치의 이념은 물론이고 기술과 기술문명이 지향해야할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반성을 요구하고 있다. 플라톤은 앞으로 <국가>의 논의를 통해 그 가치의 실현을 위한 조건 탐색에 심혈을 기울이고 우리 또한 그 구체적인 내용들을 접하게 되겠지만 그의 기술론적 입장이 갖는 낙관성은 낙관적인 그 만큼 현실에서 늘 도전과 난관에 직면한다. 앞으로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그 도전과 관련한 몇 가지 상념을 함께 나누어 보기로 한다. 우선 소크라테스의 기술론적 논박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내용은 ‘기술은 대상의 결함을 채워주는 것, 대상에게 최선의 것, 최선의 이익을 제공한다’는 생각이다. 이 점은 엄밀론의 토대를 이루는 것으로 트라쉬마코스도 어쨌거나 동의를 표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기술 일반론의 관점에서 엄격하게 말하자면 기술은 기술의 대상의 결함을 채우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결함이 무엇인지는 미리부터 정해져 있지 않다. 앞서도 살폈듯이(342b-c 강해) 그것은 기술을 행사하는 자의 기술자체의 본질에 대한 생각과 그 생각에 기초한 기대와 욕망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고 기술은 그런 기준 하에서 결정된 부족부분, 결핍을 채우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실제 따져 봐야할 문제는 기술을 수행하는 자가 그 기술의 본질을 무엇이라 생각하고 그 기술을 통해 기대하고 욕망하는 것 즉 동기와 목적이 과연 무엇인지가 될 것이다. 사실 통치술의 경우만 해도 그것의 결함과 부족함, 바람직함과 그렇지 않음을 결정하는 기준이 플라톤의 생각대로만 정해지는 것도 아니고 그러한 기준 자체가 절대적으로 존재한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오히려 실제 현실을 보면 기술의 결함 여부는 기술을 수행하는 자가 그 기술의 본질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다시 말해 그 기술에 거는 욕망과 기대의 충족 여부에 따라 상대적으로 규정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그렇게 본다면 통치술의 경우도 마키아벨리나, 스탈린이 생각하듯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대상이 되는 국민에 대한 완전한 통제를 그 기술의 본질로 규정할 경우, 그리고 플라톤의 말대로 기술은 대상의 결함을 최선으로 채워주는 것이라 규정할 경우, 그 기술의 최선은 대상에 대한 완전한 통제를 관철시키는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기술이라고 다 좋은 기술만 있는 것도 아니고 기술자라고 해서 다 선한 기술자만 있는 것도 아니다. 기술에는 기만의 기술도 있고 독재의 기술도 있고 하물며 학살의 기술도 있으며 같은 기술일지라도 악한 목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플라톤이 말하는 참주가 가장 부정의한 자로서 자기이익을 극대화시키고 게다가 가장 정의롭다는 평판까지 누리는 자라면, 참주 또한 그러한 것을 가능하게 할 정도로 탁월한 능력과 기술을 가지고 있는 전문 기술자이다. 그리고 참주가 참주인 한, 최대의 통제와 착취를 자신의 통치 기술의 본질로 여기고 있으므로 그에게는 시민이 자기 통제 하에 있지 않거나 그가 아직 빼앗지 못한 뭔가가 남아 있다면 그것들 모두를 자기의 통치술이 해결해야할 결함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따라서 참주의 입장에서 대상에게서 그 결함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국민을 완전히 자기 밑에 종속시키고(348d) 국민이 누리고 있는 그것을 완전히 탈취해내는 것이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그런 참주들이 수없이 존재해왔고 그들의 그러한 통치 기술의 발명과 완전성을 위해 이른바 수많은 전문가가 동원되었다. 비감스럽게도 그러한 상황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것이다.

* 이렇게 보면 통치술과 기술에 대한 플라톤의 낙관적인 생각은 어찌 보면 하나의 입장이고 세계관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악과 부정의한 현실이 엄연히 위력을 발휘하고 또 자본 주도의 기술문명이 현재 진행형인 한, 그것은 플라톤적 세계관의 상대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플라톤의 낙관론적 기술관과 세계관이 얼마나 중요하고 그것의 정당성을 구축하기 플라톤의 노력과 열정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차대한 것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고단하고도 힘든 삶의 현실들을 감당하며 고난의 역사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세계관의 문제는 단순히 상대적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그야말로 선과 정의를 관철하는 나라와 영혼을 향한 전면적인 선택과 결단과 실천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진정한 철학은 선과 정의의 문제를 절대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것들 모두를 상대화하여 대립되는 가치 그 모두를 동등하게 취급하는 형식적 상대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철학은 권력과 탐욕, 부조리와 이기심이 자기 증식하듯 뿌리를 내려 마치 그 자체로 삶과 역사의 진실인 양 으스대며 우리 앞에 서 있는 이기주의적 세계관에 결연히 맞서 불타협의 정신으로 그것을 압도하고도 남을 만한 공동체적 세계관을 새롭게 구축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왜 우리가 권력지상주의와 부정의 찬양론으로 찌든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을 거부하고 서로 다른 욕망들의 공존과 조화를 꿈꾸는 플라톤의 정의론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그의 기술론적 입장을 지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한 의미에서도 우리는 플라톤의 <국가>를 통해 그의 치밀한 논리뿐만 아니라 트라쉬마코스적 세계관에 대한 그의 치열한 분노와 적대감 그리고 그것을 깨부수고 말겠다는 의지의 간절함 또한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이 곧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서 철학의 참된 의미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국가>를 읽고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를 공부하는 목적 또한 정의로운 나라와 혼의 평화와 행복을 위한 세계관의 구축과 내재화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우리가 늘 마주하고 있는 트라쉬마코스적 세계관과 그것을 지지하는 세력에 대한 끊임없는 거부와 투쟁 그리고 그들에 대한 압도적인 승리에 있다고 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지금도 외치고 있다. ‘타협하지 말라! 그 뿌리를 뽑아라!’


<공지 사항> 2018년 12월 26일과 2019년 1월 2일은 연말연시를 고려하여 학당 강의를 일시 휴강하기로 함에 따라 이곳에 연재되는 강의록도 잠시 쉬었다가 2018년 1월 중순에 다시 연재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