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8년 8월 1일부터 매주 수요일 ‘그리스 로마 원전을 연구하는 사단법인 정암학당’에서 열리고 있는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상설 강좌”의 강의록입니다. 이 강의록은 매주 열리는 강좌 진행에 맞추어 본 웹진에 정기적으로 연재될 예정입니다. 원고를 게재해 주신 이정호 선생님과 정암학당에 감사드립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강 사 : 이정호(정암학당 이사장,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명예교수)
대 상 : 학당 회원, 방송대 동문, 일반 시민
텍스트 : 플라톤의 『국가』, 박종현 역주, 서광사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㉞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 – 시인들이 지켜야할 규범(계속)

 

[378b-e]

* 소크라테스가 우라노스와 크로노스가 저지른 일이 설사 진실일지라도 이 나라에서는 특히 어린이에게는 들려주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자 아데이만토스도 그런 이야기는 적합하지 않은οὐδὲ ἐπιτήδεια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신들끼리 전쟁을 일으키고πολεμοῦσί 서로 음모를 꾸미며 싸움질을 하는ἐπιβουλεύουσι καὶ μάχονται 것으로 이야기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그것 또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οὐδὲ γὰρ ἀληθῆ.(378b) 게다가 수호자들이 서로 증오하게 되는 것을 가장 부끄러운αἴσχιστον 일로 믿게 만들기 위해서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밖에 신들과 영웅ἥρως들이 자기들의 동족과 친근한 이들에게 취한다는 적대행위ἔχθρας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일찍이 어떤 시민πολίτης도 같은 시민을 미워한ἀπάχθομαι 일도 없거니와 오히려 이런 짓은 경건한ὅσιον 짓이 아니라는 것을 설득πείθειν 하려고 한다면 노인γέρων들과 노파γραῦς들이 아이들τὰ παιδία을 상대로 곧바로εὐθὺς 들려주어야 하고(378c) 이들이 좀 더 나이가 들면 이들을 위해 시인들로 하여금 그와 비슷한 이야기 즉 어떤 시민도 같은 시민을 미워한 일이 없다는 이야기를 짓도록 강제해야 한다ἀναγκαστέον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그리고 호메로스가 지은 온갖 신들의 싸움 이야기들은 숨은 뜻ὑπόνοια이 있게 지어졌건 아니건 간에 이 나라에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어린 사람ὁ νέος은 뭐가 숨은 뜻인지 아닌지 판별κρίνειν할 수도 없으려니와 그런 나이일 적에 갖게 되는 생각δόξα들은 좀처럼 씻어 내거나 바꾸기가 어렵기δυσέκνιπτάτε καὶ ἀμετάστατα때문이라는 것이다.(378d)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들에게 훌륭함ἀρετή과 관련해 가능한 한 가장 훌륭하게 지은 것들κάλλιστα μεμυθολογημένα을 듣도록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말한다.(378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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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도 살폈듯이 신들과 영웅들에 관한 부정적인 이야기들을 금지하는 것은 있는 사실을 은폐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실 자체를 부정 내지 폐기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인들을 감독하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이다. 신을 나쁘게 묘사하는 것은 그 자체로 거짓말인데다가 신의 선성이라는 이 나라 최고의 규범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오늘날 자유주의 국가에서도 최고의 규범적 가치로 확립된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 플라톤은 신들이 서로 싸운다는 것은 물론 일찍이 시민이 같은 시민들을 미워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선조들이 서로 싸우지 않았다는 그의 말은 우리가 아는 그리스 역사만 보더라도 사실과 다르다. 다만 이 말은 신의 자손으로서 신들을 닮은 선조들이 본래부터 서로 싸우지 않고 동족으로서 친근하게 지냈음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적 표현이라 할 것이다. 실제로 이곳에서 플라톤이 기존 신화에서 폐기되어야 할 것으로서 내세우고 있는 것들 모두가 신들끼리 시민들끼리 서로 싸우고 증오하고 분열하는 모습들이라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사실 플라톤은 그 자신 평생 동안 몸소 내전을 겪으며 살아왔을 뿐만 아니라 역사를 통해 특히 기원전 5세기 이래 그리스 사회 전체가 평화의 시기가 거의 없을 정도로 동족상잔과 내전의 비극으로 점철되어 왔음을 뼛속 깊이 알고 있었다. 그런 만큼 지금 염증 상태의 나라를 정화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움에 있어 플라톤이 가장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는 두말할 나위 없이 수호자들과 시민들 모두 그리스인이자 아테네인으로서 긍지를 갖고 서로 친하게 지내고 함께 단합하는 일이었을 것이고, 그것을 위해 어려서 부터 한 나라의 시민이자 동족으로서 서로에 대한 우애와 연대의 정신을 마음 깊이 새겨 놓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에 따라 플라톤은 그것이 갖는 중대성의 크기만큼 어린이에게 미치는 중대한 영향을 고려하여 시가교육과정에서부터 엄격한 규범을 세워 위와 같은 신들과 영웅에 관한 부정적인 내용들을 원천적으로 배격하고 오직 신과 관련한 훌륭한 내용들만 듣도록 설계하였던 것이다.

* 그런데 비판적 사고 내지 그것의 함양을 위한 교육의 화신이라고 부를만한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자기가 틀렸다고 여기는 생각들을 교육 대상에게 알려주길 거부하거나 하물며 은폐라도 하려는 듯 보이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 수가 있다. 사실 제대로 된 비판 교육이라면 설사 잘못된 생각일지라도 그것을 감추기 보다는 그것이 왜 잘못인지를 깨닫게 해야 진정으로 그 뭔가를 온전하게 알고 나아가 그와 관련한 비판적 안목도 갖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들도 종종 순진하고 착하기만 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나쁜 일을 당하기 쉬우므로, 그런 나쁜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마치 몸에서 면역력을 기르듯이 어떤 것이 나쁜 것들인지 알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들을 한다. 물론 감수성이 강한 어린이 교육 과정에서는 플라톤의 생각대로 나쁜 것들이 무엇인지 굳이 미리 배우게 하거나 알려 줄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플라톤은 어린이들을 위한 시가 교육과정에서는 물론 일반 시민들이 접하는 시가 작품에도 이러한 내용이 포함되지 않도록 시인들을 강제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플라톤의 언급에서 나타나는 이와 같은 착종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할까?

* 이것을 위해하기 위해서는 나쁜 것의 원인에 대한 플라톤의 생각을 미리 끌어다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의 지성은 혼의 인식 능력에 기초하므로 제대로 된 앎을 얻기 위해서는 혼의 순수성을 잘 보전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그 일이 힘든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인간 존재가 혼만이 아니라 신체도 함께 가지고 태어남으로써 그 신체의 물질성에 의해 원천적으로 혼의 순수성이 방해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방해를 제대로 이겨내지 못할 경우 혼의 인식능력이 크게 떨어져 제대로 된 앎을 가질 수 없고 그로 인한 무지가 그에게 나쁜 일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늘 지성의 훈련 즉 배움을 통해 이 신체가 혼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나쁜 것의 원인은 무지이고 그 무지의 이면에는 물질성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국 인간의 신체가 나쁜 것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신체가 갖는 물질성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어떠한 목적과도 무관하게 막무가내 자기 식으로 움직이는 이른바 물리적 필연이라는 힘을 갖고 있어 인식 능력으로서 혼의 지향성을 흐트러트림으로써 결과적으로 사람에게 사태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갖게 하여 그에게 나쁜 일을 안겨다 준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나쁜 일에 대한 근본책임은 혼의 순수성을 기르기 위한 지적 훈련에 게을리 하여 신체의 힘을 통제해 내지 못한 그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혼의 순수성을 기르기 위한 훈련 즉 혼의 인식 대상인 이데아에 대한 인식 능력을 제대로 수행하기만 하면 그 사람은 사태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고 그에 따라 어떠한 거짓말이나 허위도 간파하여 제대로 사태를 파악하고 주어진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비판적 안목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 대해 제대로 된 비판으로 그 잘못을 알아낼 수 있었던 것도 소크라테스가 트라쉬마코스가 했던 생각을 자신도 미리 다 경험해 봤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소크라테스 자신 사태의 진실을 인지하고 분별해낼 수 있는 힘으로서 혼의 순수성을 보전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분별의 기준으로서 진실 그 자체가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 물론 플라톤의 이와 같은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영국의 경험론자들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들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상은 물론 그것을 인지하는 순수한 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앎이란 순전히 백지와도 같은 마음 상태에 후천적 경험을 통해서 주어지는 감각자료들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참과 거짓은 이른바 혼에 의해 분별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반복적인 경험을 통해서 마음속에 들어온 감각내용을 토대로 분별되는 것이고 그 분별의 기준 또한 그 후천적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경험론적 사고는 오늘날 인식이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경험론적 사고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플라톤의 관점은 경험적으로 충분히 확인되지 않은 불분명한 지식을 사태와 사물의 진실인 양 강제하는 일종의 나쁜 주입식 교육으로 여겨질 수 있다. 사태에 대한 진실은 시행착오 내지 실험이라는 경험의 과정들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물론 플라톤에게도 경험은 앎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플라톤에 따르면 혼은 그 자신과 닮은 것에 더 잘 반응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경험들 가운데 혼의 순수성을 증진시킬 수 있는 경험들은 교육의 한 수단으로 적극 권장된다. 그렇지만 이른바 나쁜 경험들은 특히 어린이들의 경우 미리 배워서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혼의 순수성을 오염시켜 무지를 초래하고 그로부터 나쁜 일들이 야기된다. 이러한 한, 분별없이 시행착오를 감행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물론 삶의 현실에는 누구라도 혼의 순수성과 상관없이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나쁜 일들에 직면하는 경우가 수없이 많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럴 경우에도 오랜 기간의 훈련을 통해 혼의 순수성을 잘 보전하고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그 나쁜 일에 용이하게 대처하거나 이겨내는 능력을 훨씬 더 잘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종교적인 앎이기는 하지만, 비록 인간사에 대한 경험이 적을지라도 배움과 수련을 통해 마음을 닦아 삶의 참된 이치를 깨달으면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이 그 누구보다도 넓고 그에 기초하여 삶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을 분별하고 대처하는 지혜 또한 더욱 깊어진다고 말하는 불교의 가르침과도 일맥상통한다. 요컨대 플라톤에게 과학 영역에서건 도덕 영역에서건, 단순한 습득을 위한 교육에서건 비판적 사고를 위한 교육에서건, 기본적으로 학습은 혼의 순수성을 통해 함양되고 증진되는 것이다.

* 앞서도 언급했지만 ‘숨은 뜻’과 관련한 언급은 자칫 신들의 모든 행적을 모두 합리화할 수 있는 여지를 노정시킨다는 점에서 문제의 소지가 있다. 그리고 설사 신들의 행위 가운데에는 겉으로는 나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좋은 것 즉 숨은 뜻이 있다할지라도 그것은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이들 교육과정에서는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 ‘어린 나이일 적에 갖게 되는 생각들은 좀처럼 씻어 내거나 바꾸기가 어렵다’는 플라톤의 언급은 그가 어린이 교육과정에서 환경적 요소를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1-2-1-1-1 신은 선하다.(378e-380c)

 

[378e-379c]

* 소크라테스가 어린이들에게 훌륭함ἀρετή과 관련하여 가능한 한 가장 훌륭하게 지은 것들 κάλλιστα μεμυθολογημένα을 듣게 해야 한다고 말하자 아데이만토스는 그게 어떤 것들이며 어떤 설화들μῦθοι인지를 누가 묻는다면 뭐라 답할 것인지를 묻는다.(378e) 이에 소크라테스는 자신들이 시인들ποιηταὶ이 아닌 나라의 수립자들οἰκισταὶ πόλεως임을 환기시킨 후 나라의 수립자들은 시인들이 설화를 지음에 있어 지켜야할 규범τύπος을 세우는 사람들이지 스스로 설화를 지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οὐ αὐτοῖς γε ποιητέον μύθους 말한다.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그렇다면 신들과 관련된 이야기θεολογία에 대한 규범들은 어떤 것인지를 묻고 소크라테스는 서사시ἐπη, 서정시μέλη, 비극시τραγῳδία 어떤 시를 짓건 언제나 신을 신인 그대로 묘사해야 한다.ἀποδοτέος(379a)즉 “신은 참으로 선하므로”ἀγαθὸς ὅ θεὸς τῷ ὄντι 그렇게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아데이만토스가 동의하자 소크라테스는 먼저 <a) 선한 것τὸ ἀγαθόν들은 해롭지 않다. b) 해롭지 않은 것ὃ μὴ βλαβερὸν은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 c) 나쁜 짓κακὸν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쁜 것의 원인κακοῦ αἴτιον일 수 없다.>라는 확답을 얻어내고, 이어서 <a) 선한 것τὸ ἀγαθόν은 유익하다.ὠφέλιμον b) 그러면 선한 것은 잘함의 원인αἴτιονα εὐπραγίας이다.>라는 확답 또한 얻어 낸 후 아래와 같이 결론을 내린다. “그렇다면 선한 것은 모든 것의 원인이 아니라 훌륭한 상태에 있는 것들의 원인τῶν μὲν εὖ ἐχόντων αἴτιον이고 나쁜 것의 원인은 아니다”(379b)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신은 선하기에 ὁ θεός, ἐπειδὴ ἀγαθός 소수의 것들에 대해서ὀλίγων 원인일 뿐 많은 것에 대해서는 원인이 아니며(인간들에게 있어 좋은 것들τἀγαθὰ이 나쁜 것들 보다 훨씬 더 적기ἐλάττω 때문에) 이에 따라 ‘좋은 것의 원인은 신’으로, ‘나쁜 것들의 원인은 신 아닌 다른 것’으로 말해야 한다고 단언한다.(37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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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데이만토스가 소크라테스에게 훌륭한 설화가 뭔지를 묻자 소크라테스는 우리들은 시인들이 아닌 나라의 수립자들로서 시인들이 지켜야 할 규범을 세우는 사람들이지 설화를 스스로 지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답을 한다. 대안이 되는 설화가 무엇인지를 묻는 아테이만토스에게 소크라테스는 직접적인 대답 대신 설화를 짓는 원칙과 규범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장면은 기본적으로 시인들과 철학자들의 일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려는 소크라테스의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 편에서 보면 호메로스 등 큰 규모의 설화를 대신할 만한 설화를 새로 짓는다는 것이 실제로는 어렵다는 플라톤의 현실 인식을 함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앞서도 살폈듯이 플라톤은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면서 수호자 교육에서 당대 아테네 시가 교육 제도를 전면 부인하기보다는 그 기본틀은 유지하되 그것이 갖는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는 방식으로 개혁을 꾀하고 있다. 이것은 기존의 시가 교육이 미치는 영향력이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함부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심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의 이상국가가 백지 상태에서 세워지는 나라가 아니라 염증상태에 있는 현실의 조건들 위에서 그것을 정화하고 개혁하는 방식으로 세워지는 나라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나라의 수립자 즉 철학자란 설화를 짓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에 규범을 세우는 사람임을 강조하고 논의의 국면 또한 그 차이를 드러내는데 있음에도 다른 한편 동시에 철학자가 ‘스스로 설화를 꼭 지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οὐ μὴν αὐτοῖς γε ποιητέον μύθους라고 말하고 있는 부분은 우리의 눈길을 끈다. 왜냐하면 이 말은 이곳의 논의 국면과 어울리지 않게 철학자도 시인들처럼 스스로 설화를 지을 수도 있음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플라톤은 자신의 주장을 보다 깊이 함축적으로 전하기 위해 대화편들 곳곳에서 기존 신화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신화적 표현들을 이용하고 있다. 자신이 직접 신화를 짓고 있는 것이다. 특히 플라톤의 말년의 사상을 가장 깊게 담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는 <티마이오스>편은 가히 이곳에서 가장 훌륭하게 지은 설화들이 무엇인지를 묻는 아데이만토스의 궁금증에 부응이라도 하듯 훌륭함과 관련하여 신들이 행한 최선의 행적들 즉 어떻게 신들이 선한 우주를 만들었는가에 대한 그 자신의 설화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 소크라테스가 언급한 나라의 수립자들이라는 표현은 이곳의 논의가 소크라테스와 아데이만토스가 힘을 합쳐 말로써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는 과정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플라톤의 말년의 대화편 <법률>은 그러한 과정을 한층 구체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법률>에서는 새로운 나라를 수립한다는 전체 구도 하에서 이곳 <국가>가 제시하고 있는 원칙적인 규범들뿐만 아니라 그 규범들에 걸 맞는 세부적인 법률들이 자세하고도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 나라의 수립자들이 신과 관련한 이야기로서 가장 먼저 제시하고 있는 규범 즉 수호자들이 간직해야할 첫째가는 종교적 믿음은 “신은 선하다”, “신은 좋은 것의 원인이고 결코 나쁜 것들의 원인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신과 관련한 이야기’의 원어가 오늘날 ‘신학’의 의미로 쓰이는 θεολογία(theologia)라는 것을 고려하면 위의 규범은 이른바 플라톤 신학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원리이다. 여기서 이 규범은 매우 논리적인 방식으로 제시된다. a)-b)-c)에 이어서 d)-e)를 거쳐 결론에 이르는 추론 과정은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식화한 삼단논법syllogism을 연상케 한다. 실제로 위의 추론 과정은 아래와 같이, ‘신은 선하다’라는 대전제로부터 이어지는 여러 형태의 삼단논법들의 단계를 거쳐 ‘신은 좋은 것의 원인이고 결코 나쁜 것들의 원인일 수 없다’라는 결론을 추론해내고 있다.

우선 a)-b)-c)로 이어지는 추론을 삼단논법들로 분해하면 다음과 같다. <삼단논법 1> 신은 선하다(대전제) 선한 것은 해롭지 않다(소전제) 그러므로 신은 해롭지 않다(결론). <삼단논법 2> 선한 것은 해롭지 않다(대전제) 해롭지 않은 것은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소전제) 그러므로 선한 것은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결론). <삼단논법 3> 선한 것은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대전제) 신은 선한 것이다(소전제) 그러므로 신은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결론). <삼단논법 4> 신은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대전제)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것은 나쁜 것들의 원인이 아니다(소전제) 그러므로 신은 나쁜 것들의 원인이 아니다(결론). 그리고 d)-e)로 이어지는 추론을 삼단논법들로 분해하면 다음과 같다. <삼단논법 4> 신은 선한 것이다(대전제) 선한 것은 유익하고 잘함의 원인이다(소전제) 그러므로 신은 유익하고 잘함의 원인이다(결론). <삼단 논법 5> 신은 유익하고 잘함의 원인이다(대전제) 유익하고 잘함의 원인은 훌륭한 상태에 있는 것들의 원인이다(소전제) 그러므로 신은 훌륭한 상태에 있는 것들의 원인이다(결론). <삼단 논법 6> 신은 훌륭한 상태에 있는 것들의 원인이다(대전제) 훌륭한 상태에 있는 것들의 원인은 나쁜 것들의 원인이 아니다(소전제) 그러므로 신은 나쁜 것들의 원인이 아니다(결론)

* 위 추론들의 결론 즉 ‘신은 선하다’, ‘신은 좋은 것의 원인이고 결코 나쁜 것의 원인일 수 없다’는 결론에서 전자 즉 ‘신은 선하다’ἀγαθὸς ὅ θεὸς라는 말은 그 말 하나만 따로 떼어서 보면 신과 관련한 규범으로서 특별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ἀγαθὸς(agathos)라는 말은 엄격한 의미에서의 도덕적 선morally good의 의미와 함께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좋다good’, ‘유익하다’benefit, ‘능력 있다’capable, ‘훌륭하다’admirable 등의 의미도 두루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에게 ‘신이 선하다’라는 말은 결코 낯선 표현도 틀린 표현도 아니다. 설사 신이 나쁜 일들을 했다하더라도 신은 그들 모두에게 기본적으로 훌륭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신과 관련한 규범으로서 처음 ‘신은 선하다’라고 말했을 때 아데이만토스가 ‘물론이죠!τί μήν;’라고 답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지는 소크라테스의 주장 즉 ‘신은 좋은 것의 원인이고 결코 나쁜 것의 원인일 수 없다’라는 명제는 당대 아테네 사람들로서는 선뜻 이해하기도 동의하기도 힘든 말이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에 의해 앞에서도 지적되었고 이후에도 반복해서 지적되고 있듯이, 기존의 신화에 나타난 신들은 나쁜 일들을 수없이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기서 플라톤이 규범으로 내세우고 있는 ‘신은 선하다’라는 말이 실질적인 의미에서 당대의 신관과 얼마나 거리가 있는 말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실제로 이 말에는 새로 세워지는 정의로운 나라에서 수호자들이 마음속에 간직해야할 가장 중요한 신조, 다시 말해 그들의 삶 전체를 지배할 신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종교적 믿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요컨대 플라톤은 이곳에서 기존 신관의 근간을 부정하고 그 자신의 고유한 새로운 신관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갖는 의미가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는 신화 관련 규범으로서 추가적으로 이어지는 논의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이 명제들을 플라톤 형이상학의 전모를 가장 깊이 있게 그려냈다고 평가되는 그의 말년의 대작 <티마이오스>의 내용과 연관 지어 생각하면, 그 명제들이 갖는 의미는 가히 이곳 <국가>의 논의뿐만이 아니라 대화편들의 논의 전체를 관통하는 플라톤 세계관의 핵심과 바로 직결되어 있다고 말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이곳에서 자세히 길게 논의하기는 우리 강해의 논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아래와 같이 그와 관련한 몇 가지 점만을 음미해보더라도 그 중대성은 지레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우선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는 기본적으로 신들과 관련한 이야기이되 그 내용들 모두 신화의 형식으로 기술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신화를 통해 플라톤이 드러내고 있는 핵심 요체가 다름 아닌 이곳에서 그가 규범으로 제시하고 있는 “신의 선성”과 그 신을 닮은 “우주의 선성”이라는 점, 그리고 그와 같은 우주론적 설화가 그 자신 평생을 통해 구축하고자 한 형이상학적 세계관의 요체를 담고 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신화가 다름 아니라 <국가>에서 다룬 이상 국가를 우주론적 관점에서 뒷받침하기 위한 것임이 <티마이오스> 서두에서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는 점 등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플라톤 철학 연구가들은 <티마이오스>에서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와 그가 자신을 닮은 선한 우주를 만들기 위해 바라본 본paradeigm을 <국가> 제6,7권에서 언급되고 있는 ‘선(좋음)의 이데아’와 연관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플라톤 철학에서 그것이 갖는 중대성만큼 그것이 갖는 철학적 의미에 대한 논쟁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정암고전총서 플라톤 전집 <티마이오스>, 김유석 옮김, 아카넷 2019, 작품 안내 참고)

* 플라톤이 기존의 전통적 신화들은 물론 기원전 5세기 수많은 시인들이 지은 이야기들을 왜 그토록 비판하고 새로운 신관까지 내세울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 그리스인들 특히 아테네인들의 삶과 의식을 지배해온 신화적 세계관 즉 그리스 종교의 기원과 역사 그리고 기원전 5세기의 현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곳 강해수준에서 그것을 다루기에는 너무도 크고 방대한 주제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다만 이곳 논의와 관련하여 그리스의 종교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서만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사실 우리는 신화를 그저 옛날이야기라고만 생각하여 그리스 종교에서 가히 경전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신화의 중요성과 그 의미를 간과하고 있다. 아마도 신화의 내용들이 인간사와 관련된 시문학적 형식을 취하고 있기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리스 종교 역시 체계나 강령은 물론 성직자 같은 사람들도 따로 없었고 굳이 있었다면 다만 신전과 공물을 관리하는 사람 정도만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인들에게 과연 종교라는 것이 있었는지 신화에 나타난 신들을 그들이 과연 믿었는지에 대해 의심을 표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를 사형에 처한 이유가 다름 아닌 신과 관련한 것이었다는 점만을 고려하더라도 아테네인들에게 종교는 비록 오늘날의 기성 종교들이 갖는 양태와 거리가 있어 보여도 오랜 역사 동안 그들의 삶에 깊숙이 자리해 오면서 그들의 삶과 의식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신들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종교로서 특성을 갖추었냐 아니냐를 따지기 이전에 신화의 내용들은 그들의 역사이자 태초 이래 그리스인이자 아테네인으로서 그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 그들의 의식을 규정하고 지배해 온 자명한 사실 그 자체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선조들이 그래왔듯 모두 거리에서건 집에서건 신들의 탁월성과 불멸성을 칭송하며 신들에게 안녕과 행복을 빌었고,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신들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하며 해결책을 구했고 나라의 지도자들 역시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거나 누군가를 비난할 때마다 신들을 끌어들였으며 재판관들 또한 죄를 판정하는 근거로 신들을 인용하였다. 그리고 시인들은 인생사의 제반 일들을 신화를 끌어들이거나 변용해가면서 시로 노래하였고 예술가들 또한 신들을 모형으로 삼아 그들로부터 아름다움의 근거를 찾아냈다.

* 그렇다면 신화를 바탕으로 한 그리스인들의 이러한 종교적 전통은 언제부터 생겨나고 확립된 것일까. 그리스신들 역시 대체로 기원전 3000년 원시시대 이래 그들이 맞이했던 자연에 대한 두려움에서 생겨난 자연신들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후 그것들은 인간들의 소망과 기원에 반응하는 신인동형설적인 존재로 점차 인식되었을 것이고 그것들에 이름이 붙여지고 내력과 성격이 구체화 되면서 불멸성과 탁월성을 가진 신성한 존재로 형상화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우라노스와 크로노스, 가이아와 하데스 등 제우스 이전 신들이 보여주는 다툼과 혼란상은 원시 그리스인들의 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무지 그리고 그것들이 빚어낸 혼돈의 시대를 투영한 것이고, 제우스의 등장 이후 태양신 제우스를 정점으로 나름의 고유한 역할을 갖고 위계를 형성하고 있는 12신들은 자연들에 대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하다고 여겨진 시대 이후에 생겨난 인간의 자연에 대한 이해와 안정감이 투영된 것이라 할 것이다. 이후 이런 경험들이 오랜 기간 반복되고 동시에 집단의 단위가 점차 커지고 사회화되면서 위와 같은 자연신들 이외에 네메시스, 모이라 등 인간의 사회적 삶과 의식을 반영하는 추상적 신들도 생겨나서 도덕과 규범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남하와 정착 과정에서 척박한 환경과 오랜 기간 수많은 전쟁을 겪으면서 부족의 정치적 결속과 단합을 담보하는 이른바 정신적 토대이자 믿음으로서 그리스 종교가 자리 잡게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리스 종교가 제우스를 중심으로 하는 다신론으로 자리 잡게 된 것도 남하 과정에서는 물론 그 과정에서 유입된 이집트 종교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리스인들의 종교적 전통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의 종교 생활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개인의 내면적 구원 의식과 같은 요소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 종교는 근본적으로 씨족이나 부족이라는 집단에 의해 수행되는 전쟁 또는 자연적 재앙이 공동체에 가져다주는 고통으로부터 집단의 공적 제의를 통해 평화와 승리, 안녕과 번영을 비는 것이 기본틀로 자리 잡고 있었고, 개인들과 개별 가문들의 평화와 안정 역시 그러한 공동체의 평안과 직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태초 이래 신들과 관련한 제의 내지 의식의 형태로 발달해왔던 것이다. 그리스인들의 종교가 기본적으로 점술과 예언, 신탁이 중심을 이루고 탄원과 기원에서조차 제의와 제물 봉공이 주축을 이루게 되는 것도 그러한 배경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시원적 배경 하에서 기원전 11세기 이래 발칸 반도에 정착하게 된 아테네인들 역시 매일 신들에게 제의를 행하면서 나라는 물론 그들 자신의 안녕과 행운을 비는 것을 너무도 당연한 일상의 일로 받아들였고 정기적으로 큰 규모의 제의와 함께 축제를 벌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의 이와 같은 내력이 수많은 설화로 구전되어 오다가 기원전 8세기 문자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에 의해 시가의 형식으로 기록되면서 차츰 경전으로서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원전 5세기에 이르면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시는 물론 시인들의 선조 격에 해당하는 시모니데스와 핀다로스의 작품까지 그들의 삶과 의식을 지도하고 이끄는 경전으로 받아들여져 아테네에서는 유년시절부터 청년시절까지 그것들을 의무적으로 암송하며 학습하는 것이 교육과 관련한 중요한 제도이자 관습으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 이처럼 신화는 그리스인들에게 종교적 의식뿐만이 아니라 일상적 삶과 관습 및 행위들에 대한 규범으로서의 성격도 가지게 되면서 사회생활 전반은 물론 개인들에게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아테네의 경우, 기원전 5세기 중반에 접어들어 끊임없이 전란에 휩싸이고 게다가 기원전 5세기 말에 이르러 아테네가 패전을 거듭하면서 시민으로서의 결속도 서서히 무너지고, 파편화된 개인들의 죽음에 대한 공포감도 크게 퍼져나가면서 아테네인들의 종교적 관습도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게다가 기원전 5세기에 들어와 외국과의 잦은 왕래가 이루어지고 거류외인은 물론 외래 사상도 급속하게 유입되면서 오랜 기간 동안 아테네에서 생활종교로서 자리잡아온 신화를 바탕으로 한 전통 종교 이외에, 내세에서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하는 신비주의 전통의 종교들도 하나 둘 생겨나게 되었다. 이른바 디오뉘소스 비의(秘儀) 종교는 그나마 전통적인 종교에서 변용된 신비주의 전통에 속하는 종교이지만, 디오뉘소스 신화의 변용으로서 자그레우스 신화에 뿌리를 둔 오르페우스교와 엘레우시스 비의 종교 등은 비록 유치한 수준이기는 하지만 이른바 원죄에 대한 관념은 물론 대립되는 두 본체 사이의 투쟁으로서 삶의 개념 그리고 신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는 궁극적인 구원의 약속 등 그동안 전통적 아테네 종교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내용들이 이른바 그들의 종교적 신조로 내세워지고 있었다. 게다가 기원전 5세기에는 이오니아에서 발원한 과학과 철학의 흐름이 아테네에 유입된 이래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방식이 제기되면서 기존의 신화에 대한 회의는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파르메니데스의 스승으로 알려진 크세노파네스Xenophanēs(기원전 570-480)가 일찍이 기존의 신들을 냉소한 것은 그러한 변화를 알리는 시작에 불과하였다. 게다가 전통적인 신화에 대한 창조적 변용을 통해 신들을 찬미하던 시인들마저 아테네의 번영과 그 과정에서 급속히 유입된 개인주의와 상대주의 경향을 등에 업고, 신들과 영웅들에 대한 찬미보다는 인간사의 고민과 갈등 들을 작품의 주제로 내세우기 시작하였고, 하물며 신과 영웅들에 대한 냉소와 회의의 눈길도 과감하고도 자유롭게 표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이들의 작품 속에는 전통 신화보다도 더 심각한 수준으로 신들과 영웅들 간의 싸움이 그려져 있음은 물론 인간사와 관련한 그들 사이의 생각과 관점의 차이도 그대로 노출됨으로써 아테네 사회에서 개인주의와 상대주의는 더욱 크게 고취되었다. 당대 아테네에서는 종교적 제의를 거부하거나 임의로 그 형식을 바꾸는 것은 신을 모독하는 것으로 금지되었지만, 기원전 5세기 말 시인들의 신들에 대한 변용이 가히 신성모독에 가까울 정도로 변질되었음에도, 그에 대한 통제는 기이할 정도로 방임되고 있었다. 정치적 통제력이 쇠락해졌기도 하였지만 아테네 지성을 대표하는 막강한 기득권자로서 오랜 기간 공고해질 대로 공고해진 시인들의 지위는 가히 불가침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특권은 소피스트들의 입장과 맞물려 더욱 심화되고 발달되면서 결과적으로 아테네의 멸망을 앞당기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문학의 역사를 통해 수준 높은 문학작품의 저자들이자 자유로운 표현의 자유와 창조적 기풍을 세운 선구자로 높이 평가를 받고 있다.

* 플라톤은 이러한 아테네의 종교적 상황을 목도하면서 오랜 역사 동안 아테네인들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쳐온 신들에 대한 의식과 사고방식을 새롭게 재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다고 플라톤은 그 재편을 위해 전통으로 돌아갈 수도, 당대의 종교적 정황을 그대로 수용할 수도 없었다. 전통으로 돌아가기에는 이미 아테네에 너무나 다양한 사상과 종교들이 유입되어 있었고 당대의 정황을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공동체를 위협하는 상대주의와 개인주의의 그림자가 아테네에 너무도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가히 아테네는 이른바 곪을 대로 곪은 염증상태의 나라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이제 플라톤은 그리스의 기존 종교를 한편으로 계승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 이 과정 모두를 살피는 것은 우리의 논의 범위를 훨씬 벗어난 것이지만 그 과정을 아주 거칠게 요약해서 말하자면, 요컨대 플라톤은 <법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제의의 형식적 측면에서는 전통적인 다신론적 전통종교를 계승하면서도 그 내용과 관련해서는 <국가>가 암시하고 있듯이 철학사적 전통에서 확립된 엘레아적 일원론과 다원론적 세계관과의 조화를 도모하면서 동시에 신비종교를 통해 유입된 영혼불멸에 대한 의식을 토대로 인간의 안녕과 행복 국가 사회의 정의와 번영에 대한 기본 관념을 혁신적으로 바꾸려고 하였던 것이다.

 

 

[379d-380c]

이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은 논거에 의거하여 호메로스나 다른 시인들이 생각 없ἀνοήτως이 신을 나쁜 것들의 원인들로 언급한 것들이 잘못임ἁμαρτάνοντος을 분명히 한 후, 그 사례들을 구체적으로 예시해가며 하나하나 비판한다.(379d-380a)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이런 이야기들은 어린 사람νέος들이 듣도록 허용해서는 안 되며 어떤 사람이 이것들을 신이 한 일로 이야기하도록 허용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하고 설령 그게 신이 한 일ἔργα일지라도 그것을 위한 서술로 지금 우리가 찾고 있는 것과 비슷한 것 σχεδὸν ὃν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380a) 즉 신이 올바르고 좋은 일δίκαιά τε καὶ ἀγαθὰ을 했으며 그들은 응징을 당함으로써 이롭게 된 것οἱ ὠνίναντο κολαζόμενοι으로 이야기해야 하고, 어떤 시인이 벌δίκη을 받은 자들이 비참하며ἄθλιοι 신이 그렇게 했다고 말하도록 허용해서는 아니 되고 그와 달리 만일 어떤 시인들이 나쁜 사람들은 응징을 받을 필요가 있고 그 때문에 비참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처벌을 받음으로써 신한테서 은혜를 입은 것’διδόντες δίκην ὠφελοῦντο ὑπὸ τοῦ θεοῦ이라고 말 할 경우에는 허용돼야 한다고 말한다.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신은 선하지만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나쁜 일들의 원인으로 된다는 주장은 모든 방법으로 맞서 분전해야 하며διαμαχετέον 나라가 훌륭하게 다스려지려면 제 나라에서는 ἐν τῇ αὑτοῦ πόλει 나이에 상관없이 운문, 산문 여부에 상관없이 아무도 그런 것을 말하거나 듣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380b) 그런 이야기는 경건하지도ὅσιος 유익하지도σύμφορος 않으며 그 자체로도 모순된οὔτε σύμφωνα 이야기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자 아데이만토스가 그 법νόμος에 대해 찬성한다σύμψηφος고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그 말을 받아 이제 ‘신이 모든 것의 원인이 아니라 선한 것들의 원인임μὴ πάντων αἴτιον τὸν θεὸν ἀλλὰ τῶν ἀγαθῶν을 시인들과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신들과 관련한 법률νόμος과 규범τύπος들 중의 하나로 분명하게 제시한다.(380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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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뿐만이 아니라 <국가> 곳곳에서 소크라테스는 기존의 신화들을 수시로 인용하고 있다. 현대의 독자들로서는 그러한 인용이 논의 주제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내용을 차지한다고 여겨질 수도 있지만, <국가>의 논의가 우선 당대의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있고 당대의 독자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시가가 그들 자신의 생각과 행위를 지배할 정도로 마음 속 깊이 자리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왜 플라톤이 그토록 때마다 신화를 인용하면서 논의를 진행시켜 나가는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우리 강해에서는 앞에서도 그랬지만 여기서는 물론 앞으로도 신화들의 내용을 일일이 설명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신화와 <국가> 논의의 내용적 연관성은 우리말 역본에 실린 주석만으로도 충분히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 앞에서도 신화가 포함하고 있는 ‘숨은 뜻’에 관해 설명한 바가 있다. 플라톤은 신들이 행한 나쁜 짓들에 우리가 모르는 다른 숨은 뜻이 있다고 해도 일단 어린이들에게 그런 이야기들은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이므로 숨겨야 한다고 말한다. 앞서도 살폈듯이 신들의 나쁜 행위를 숨기는 것은 사실의 은폐 차원이 아니라 신이 나쁜 짓을 했다는 것 자체가 거짓말이기 때문에 거짓말 폐기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신들의 행위들 가운데에는 사람들이 보기에 나쁜 짓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선한 뜻을 숨기고 있는 경우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이들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일단 숨기기는 하지만 철학자들은 그 숨은 뜻을 찾아내서 그 선함을 밝혀야 한다. 그냥 밝히지도 않고 숨은 뜻이 있다고만 말하면 자칫 신들의 나쁜 행위를 모두 정당화할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곳의 논의는 비록 숨은 뜻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내용적으로는 숨은 뜻과 관련한 논의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여기에서 플라톤은, 시인들이 신들이 어떤 나쁜 일을 했다고 이야기하고 설령 그게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경우에는 ‘지금 우리가 찾고 있는 것’ 즉 ‘신들이 선하다는 것’을 찾아내어 실제로는 신이 올바르고 좋은 일을 했다는 것을 밝혀내야 하며, 시인들의 이야기들 가운데에서도 그것을 함께 밝히고 있는 이야기들만 허용해야 한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이를테면 신들이 누군가를 응징했을 경우 그 벌을 받은 자들이 비참하고 그렇게 비참하게 한 것이 신들이라고 말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신들은 나쁜 일들의 원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경우 경건하지도 않고 그 자체로도 모순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들이 주는 벌은 사람을 비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마땅히 응징을 받을 필요가 있어서 벌을 받은 것이되 그렇게 처벌을 받음으로써 은혜를 입은 것이라는 것이다.

* 사람에 대한 신들의 응징과 관련한 이곳에서의 플라톤의 언급은 어떤 경우에서든 신들은 선하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법률 차원에서건 종교 차원에서건 형벌 내지 징벌과 관련한 플라톤의 관점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즉 플라톤에게 벌이란 응징의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니라 벌을 받는 자를 이롭게 하는 것 즉 교정(矯正)의 성격을 갖는 것이다. 이처럼 벌을 처단과 응징의 성격이 아니라 교정을 위한 가르침의 일환으로 보는 플라톤의 생각에는 사람들의 내적 변화에 대한 플라톤의 낙관적 믿음이 깔려 있다. 벌을 받는 사람에게 벌은 고통스럽고 일단 강제의 형식을 갖고 부여되지만 교육을 통해 그 사람 스스로 벌의 이유가 교정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면 그 스스로 잘못을 교정할 수 있으므로 나라의 지도자나 철학자는 잘못을 저지르는 구성원들이나 상대에게 늘 그러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아데이만토스는 앞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한 규범을 법nomos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자기도 그에 찬성투표를 하겠다고 말한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신은 선하다’라는 말이 단순히 당위적 규범이 아니라 말로 세우는 정의로운 나라가 제도적 관습으로 채택해야할 최고의 입법 원리 즉 오늘날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종의 헌법적 규정 내지 헌법 정신임을 말해준다. 소크라테스도 아데이만토스의 말에 이의를 달지 않고 그것을 법률과 규범으로 다시 표현하면서 첫째 규범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하고 이제 수호자들이 종교적 신조 차원에서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둘째 규범에 관해 언급하기 시작한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㉝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376c-d]

* 소크라테스는 수호자의 성향φύσις을 논한 후 이제 그러한 성향을 가진 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양육τρέφειν되고 교육παιδεύειν받도록 할 것인지를 묻는다. 그리고 그러한 논의가 장차 전개할 모든 고찰의 목적 즉 나라에 있어서 정의와 부정의가 어떤 방식으로 생기는지τίνα τρόπον ἐν πόλει γίγνεται;를 알아내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아데이만토스가 동의하자 소크라테스는 설령 다소 길어질μακροτέρα 지라도 이에 대한 고찰σκέψις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후 이 사람들을 논의를 통해 교육시켜보자고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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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문자 대문자 비유를 통해 나라에 대한 논의로 확대된 이후 나라에서 수호자 계층이 등장하면서 수호자의 성향이 거론된 후 이제 정의로운 나라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정의로운 나라에 대한 논의의 시작을 장식하는 것은 수호자에 대한 교육론이다. 앞으로 수행할 모든 고찰의 목적 즉 정의와 부정의가 어떤 방식으로 생겨나는지를 알아내는 데 그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사실 본격적인 국가론을 시작하면서 수호자 교육론이 일차적인 과제로 내세워지는 것은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다소 어색하다. 왜냐하면 현대적인 관점에서 국가론을 다룰 때 우선 논의되는 것은 주로 정부와 권력 구조, 법률과 제도 등 국가 시스템에 대한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치철학의 역사에서 틀에 박힌 물음이지만 아주 오래된 물음 즉 인치(人治)가 먼저인가 법치(法治)가 먼저인가의 논쟁을 떠올리게 한다. 국가론의 시작을 수호자 교육론으로 장식하고 있는 플라톤의 입장은 분명 인치가 먼저라는 입장에 서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인치를 앞세우는 사람들은 정치의 핵심에는 법률과 제도 이전에 누가 권력을 가지고 나라를 통치하느냐가 중요하므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법률과 제도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이거나 그러한 믿을만한 사람의 주도 하에 만들어지고 운용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근대 이후 특히 20세기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 모택동으로 대표되는 독재정치의 폐해를 혹독하게 경험한 이래 현대를 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법치 즉 민주적 절차를 통해 제정된 법률과 제도를 통한 지배만이 가장 안전하고 합리적인 통치 방식이며 모든 정치 행위 또한 그 법률적 시스템에 따라 이루어져한다는 생각이 정치적 상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플라톤이 지금 시작하려고 하는 수호자 교육론은 현대인들에게 시작부터 그 의미가 격하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러나 플라톤이 살아간 당대의 관점에서 보면 플라톤의 생각을 단순히 폄하만 할 일도 아니다. 플라톤은 법률과 제도에 따른 지배가 보편화된 오늘날과 달리 사람에 의한 통치가 당연시되던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고 그에 따라 누가 나라를 통치할 것인가의 문제는 누구를 막론하고 가장 중대하고도 거의 유일한 정치철학적 관심사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물론 플라톤 당대에도 법률과 제도가 존재했지만 오늘날과 같은 헌법적 수준의 법률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고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법률 또한 확고한 구속력을 갖는 오늘날의 실정법과 다른 다소 느슨한 관습법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인치냐 법치냐를 이분법적으로 극단화해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은 인치의 시대를 살던 플라톤은 물론이고 법치가 기반을 잡은 오늘날에서조차 모두가 동의하는 사고방식은 아니다. 아무리 훌륭한 법률과 제도를 갖춘 나라라고 할지라도 누가 정치권력을 행사하느냐에 따라 정치 현실이 전혀 달라진다는 사실에 이의를 다는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인치와 법치는 상호 배척의 문제가 아니라 균형과 조화의 문제라는 데에는 오늘날은 물론이고 우리가 살피게 될 플라톤조차 크게 이의를 달지 않는다. 실제로 플라톤은 이곳에서는 비록 인치를 내세우고 있지만 다른 곳에서는 당대의 관습법적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법률체계를 토대로 법률의 지배 또한 함께 강조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플라톤은 이곳 <국가>의 논의에서는 인치를 강조하는 관점에서 수호자라는 통치 권력자를 핵심으로 이상 국가론을 펼치고 있지만, <국가> 못지않은 만년의 대작 <법률>을 통해 그는 헌법적 개념을 포함하여 구체적이고도 체계적인 입법 과정과 내용을 토대로 인치가 갖는 현실적 한계를 보완함은 물론 법치가 갖는 고유한 중대성을 함께 강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플라톤의 정치철학의 전모를 이해하려면 이곳 <국가>의 논의뿐만 아니라 <법률>의 논의도 함께 살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2) 그러나 일단 이곳 <국가>에서의 논의에서는 정의로운 나라가 되기 위한 필수적 조건으로서 무엇보다도 나라를 다스리는 수호자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므로 수호자의 성향을 갖고 있는 젊은이들을 장차 제대로 된 자질과 능력을 갖춘 훌륭한 수호자로 길러내는 일은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는 데 가장 중차대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따라 정의로운 국가에 대한 논의는 기본적으로 천성적으로 수호자의 성향을 가진 젊은이들에 대한 교육론으로 시작된다. 게다가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수호자의 교육에 대한 논의가 앞으로 전개될 모든 고찰의 목적 즉 정의와 부정의가 어떤 방식으로 생겨나는지를 알아내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앞에서도 살폈듯이 앞으로 전개될 모든 고찰의 목적은 정의와 부정의가 나라와 개인에게서 어떤 작용을 하는 것인지를 밝혀 정의가 왜 부정의보다 나은가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고찰의 목적에 대한 표현이 조금씩 달라져 오긴 했지만 수호자가 어떻게 길러지고 자라나는가를 통해 정의와 부정의가 어떤 방식으로 생겨나는가가 드러나고 그것을 통해 정의와 부정의가 나라와 개인에게서 어떤 작용을 하는가가 함께 드러나는 것이라는 점에서 내용적으로는 크게 차이가 없다.

3) 소크라테스는 수호자의 교육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논의가 다소 길어질지라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국가>에서 수호자의 교육에 대한 논의가 차지하는 분량을 보면 다소 길다는 표현에서 우리가 느끼는 수준을 훨씬 넘어서 있다. 우선 바로 이어지는 수호자의 교육에 대한 논의 부분만 보아도 시가 교육과 체육 교육 모두를 합해 이곳 376e부터 제3권 412b까지 이어진다. 이 분량은 스테파누스 쪽수로 약 35쪽에 가까운 것인데 이 분량은 우리가 제1권 처음부터 지금까지 살핀 분량(스테파누스 쪽수로 48쪽)의 3분의 2에 가까운 분량이다. 게다가 이곳에서 다루어지는 수호자의 교육은 수호자를 선발한 후 본격적으로 수호자의 교육이 다루어지기 이전 단계 즉 18세 이전의 아테네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시행되는 일종의 예비 수호자 교육만을 다루고 있다. 이후 제6권과 제7권에 가면 수호자와 통치자를 단계별로 선발한 후 그들에 대한 본격적인 교육 내용이 다루어지고 있는데 그곳의 분량까지 포함하면(502c~541b) 수호자의 교육을 직접적인 주제로 내세워 집중적으로 다루어지는 부분만 해도 스테파누스 쪽수로 거의 85쪽에 이른다. 이 분량은 <국가> 전체(327a-621d. 스테파누스 쪽수로 약 294쪽) 분량의 거의 30%를 차지한다. 나머지 내용도 거의 다 이러한 수호자 교육이 결과하는 내용들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국가> 자체가 기본적으로 수호자의 교육과 관련한 내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4) 여기서 양육τρέφειν이란 건강한 신체를 갖도록 길러내는 것이고 교육παιδεύειν은 건강한 혼을 갖도록 길러내는 것이다. 플라톤에게 기본적으로 교육은 각자의 혼 안에 있는 힘을, 마치 눈을 어둠에서 밝음으로 향하게 하는 것과 같이, 실재와 좋음으로 향하게 만드는 것 즉 혼의 전환περιαγωγῆ을 위한 방책τέχνη이다.(518c) 다시 말해 플라톤에게 교육의 목적은 영혼 속에 잠재된 최상의 것들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다짐과 습관을 통해 혼 안에 덕을 구현해내는 일이다. 그리고 혼이 근본적으로 자신과 친숙한 것을 닮고자 하는 성향을 갖고 있는 한, 땅에 심은 식물이 토양과 대기에 의존하여 잘 자라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혼 또한 어떤 것들이 교육의 이름으로 함께 하느냐에 따라 좋음과 아름다움에 더욱 다가가고 그에 동화될 수도 있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425c, 492a)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 – 시인들이 지켜야할 규범(376e-392c)

[376e]

* 소크라테스는 ‘그들의 교육παιδεία은 어떤 것일까, 오랜 세월에 걸쳐 고안된 교육방식보다 더 나은 것을 찾아내기는 어려울 것일까’를 물은 후, 현존하는 아테네의 전통적 교육 방식에 준해 몸을 위한 교육으로 체육ἡ ἐπὶ σώμασι γυμναστική을, 혼을 위한 교육ἡ ἐπὶ ψυχῇ μουσική으로 시가μουσική 교육을 제시한 후 이 가운데 시가 교육부터 시작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시가에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그 이야기에 사실적인 것τὸ ἀληθές(alēthes)과 허구적인 것ψεῦδος(pseudos)이 있고 어린이παίδιον들 교육은 그 가운데 허구적인 것들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의아함을 표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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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그들 즉 시가 교육의 대상은 직접적으로는 앞에서 언급된 천성적으로 수호자의 성향을 가진 젊은이들일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수호자 교육을 아테네의 전통적인 방식에 준해 수행할 것을 표명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실제로 교육의 대상은 천성과 상관없이 아테네 시민 계급 젊은이들 모두를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대 아테네에서는 귀족 여부에 상관없이 시민이라면 모두 어려서부터 18세에 이르기까지 위에서 언급된 시가 교육과 체육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교육을 마친 후 수호자를 선발할 때에도 천성적 성향과는 상관없이 오직 교육의 결과에 따른 능력만을 기준으로 선발하고 있다. 현대 비평가들은 종종 플라톤이 태생에 따른 천성의 차이를 언급했다는 이유로 출신성분에 따른 차별주의자로 그를 비난하기도 하지만, 그가 살던 시대가 공고한 신분사회였음을 염두에 둔다면 오히려 가문이나 남녀 성별에 상관없이 오직 능력에만 기초하여 교육의 기회는 물론 통치자의 자격까지 부여한 그의 구상이야말로 정작 우리가 주목해야할 그의 진면목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플라톤에게 교육은 천성적 성향을 더욱 살려 더욱 완전한 모습으로 길러내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천성적 성향이 다소 모자라도 후천적인 교육을 통해 천성적 성향을 가지고 훌륭하게 교육받은 사람 못지않은 수준으로 길러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아무리 천성적으로 수호자의 성향을 가지고 있는 자라고 할지라도 훌륭한 양육과 교육이 수반되지 않으면 훌륭한 수호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2) 참고로 이곳 제2권과 3권에서는 수호자를 기르기 위한 초기 교육의 일환으로 시가 교육과 체육 그리고 초보적인 수준의 과학 교육이 이루어지고(18세까지) 18세부터 2,3년 동안은 수호자로서 군사적 의무를 충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보다 강화된 체육교육이 이루어진다. 이후 20세가 된 수호자들 가운데 통치자가 될 사람으로 선발된 사람들은 30세까지 어린 시절 받았던 기초 수준의 과학 교육에 이어 체계적으로 보다 높은 수준의 과학 교육과 철학 교육을 받으며 다시 선발 과정을 거쳐 35세까지 최고 수준의 철학 교육 즉 변증술 교육을 받는다.(537a-d) 물론 이때에도 시가교육은 지속적으로 부과된다. 그리고 이 모든 교육과정을 성공적으로 통과한 사람들은 명실공한 통치자들로서 15년 동안 도시의 관리와 행정, 군사 관련한 고위 직책을 맡아 나랏일에 봉사하고 50세에 이르면 그러한 모든 일에서 벗어나 철학적 관조에 시간을 보내면서 순번에 따라 철학자왕의 역할을 수행한다.(540a-b) 이때 철학자왕은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가 아니라 정해진 기간 동안만 왕으로 봉사한다. 철학자들이 순번대로 왕이 되는 것을 고려하면 넓게 봐서 일종의 집단 지도체제의 성격을 갖는다고도 하겠다. 이것은 <법률>에 가서 야간위원회hoi nyktōr syllegomenoi라는 집단지도체제로 구체화된다.(<법률> 908a-908a, 672d)

3) 수호자의 교육과 선발에서는 물론 앞으로 펼쳐질 교육의 구체적인 내용과 관련해서 플라톤이 보여주는 모습은 가히 혁명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수호자의 교육 방식 좀 더 정확하게는 장차 수호자 선발을 위한 청소년기의 예비 교육과 관련해서 플라톤이 채택하고 있는 교육방식은 일단 현존하는 전통적인 아테네의 교육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다시 말해 이상국가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수호자 교육과 관련하여 플라톤은 그가 변혁하려는 아테네의 기존의 교육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이 가지고 있는 기본 문제의식은 물론 그 구현 방법론에 있어 그가 가지고 있는 현실 인식을 함께 보여준다. 우선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백지상태에서 그가 꿈꾸는 대로 설계하고 건설되는 이상국가가 아니다. 앞서 나라의 기원과 발달에서도 살폈듯이 그의 이상 국가로서 정의로운 국가는 염증 상태에 빠진 나라를 정화하여 세워지는 나라인 것이다. 그리고 플라톤은 그와 같은 염증 상태의 나라가 쉽게 정화될 수 없다는 것을 당대 아테네는 물론 몇 차례의 쉬라쿠사이에서의 정치실험을 통해 뼈저리게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그가 평생을 통해 목도한 아테네 현실은 정화의 구상조차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너무도 견고하고 그 역사적 뿌리 또한 너무 깊었다. 그래서 플라톤은 자신의 정의로운 이상국가론을 펼침에 있어 피폐한 현실을 정화시킬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인 동시에 실질적이고도 현실적인 방법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이상국가론을 펼침에 있어 그가 찾아낸 가장 핵심적인 과제가 정의로운 수호자를 길러내는 것이었고 그것을 위해 무엇보다도 장차 수호자가 될 젊은이들을 어린 시절부터 바르게 교육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테네 현실에서 어린이는 물론 젊은이들에게 가장 영향력을 미쳐왔던 교육은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고 제일 유연한 어린 시절부터 18세까지 이루어지는 시가 교육이었다. 특히나 시가 교육은 앞으로 살피게 되겠지만 단순한 예술 교육을 뛰어 넘어 평생을 통해 아테네 사람들의 의식과 생활을 지배하는 일종의 이념 교육이자 종교 교육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지금의 아테네 현실 또한 오랜 시간 그와 같은 시가 교육받고 자라난 사람들에 의해 초래된 것이었다. 그런 만큼 플라톤으로서는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시가 교육의 개혁만큼 중요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시가 내용의 토대를 이루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신화는 그 자체의 역사적 권위뿐만이 아니라 이후 여러 시인들에 의해 수많은 작품으로 각색되고 변용되어온 만큼 그것을 모두 폐기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렇다고 그 방대한 분량을 대체할 새로운 시가를 창작해내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래서 플라톤이 자신의 이상국가론에서 채택한 방법은 기존의 시가 교육 방식에 따르되 신화의 근본 축을 이루어야 할 규범들을 새로 마련하여 그것을 기준으로 시가 내용에서 잘못된 내용을 철저히 바로 잡아 장차 수호자가 될 어린이와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일이었다. 소크라테스가 기존 설화들을 비판하자 그 대안이 되는 설화가 무엇이냐를 묻는 아데이만토스에게 ‘자신들은 나라의 수립자로서 신화를 지어내는 시인들이 아니라 그 시인들에게 규범τύπος을 제시하고 감독하는 사람들’임을 밝히고 있는 것도(378e-379a) 그러한 앞뒤의 정황을 잘 보여준다.

4) 여기서 우리는 이제 시가와 시가 교육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아테네 사람들의 역사와 삶을 지배할 정도로 심대한 것인지를 살펴야할 할 때가 되었다. 사실 <국가>를 읽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의 시가 교육을 어린 시절 어린이의 감수성에 맞추어 부여되는 예술 교육 정도로 여기곤 한다. 그러나 고대 아테네에서 시가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예술이나 시문학 정도의 성격을 훨씬 넘어서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시가μουσική(mousikē)는 뜻만으로는 무사(Mousa) 여신 즉 뮤즈 여신들이 관장하는 모든 기예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시가는 직접적으로 그리스의 신들과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신화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들 신화는 아테네의 조상들의 믿음과 삶과 역사를 담고 있는 살아있는 기록으로서 아테네인들에게 전승되고 오랜 동안 그들의 의식과 생활에 깊숙이 자리 잡게 되면서 기원전 5세기 시절에 이르러서는 아테네인들의 생각과 행위를 지배하는 거의 종교적 경전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 신화는 그것이 담고 있는 이야기의 중요성에 따라 여러 시인들에 의해 다양하게 각색되어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 창작되었고 그 작품들 가운데 우수한 작품은 나라의 지원을 받아 정기적으로 혹은 축제 때마다 연주와 합창, 춤을 동반한 연극의 형식으로 상연되기도 하였다. 즉 아테네에서 연극은 단순히 오락을 위한 연극 수준을 넘어서서 일종의 시민 교육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시가는 아테네인들의 종교적 믿음을 담은 시문학적 담론만이 아니라 그 내용을 담은 노래와 춤 모두를 포함한 일종의 종합적인 종교 예술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시가 교육은 단순히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젊은이들의 감성을 풍부하게 만들기 위한 음악이나 예술 교육만이 아니라 아테네인으로서 일반교양은 물론 표준적인 가치관, 세계관을 갖추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 굳이 오늘날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일종의 이념 교육이자 종교 교육이었던 것이다. 이런 점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플라톤은 기존 시가 교육이 갖는 토대 위에서 그 장점들을 수용하고 존중하면서 자신이 구상하는 정의로운 이상 국가의 이념에 맞는 새로운 규범들 특히 신의 선성과 관련한 혁명적인 관념을 내세워 기존 시가의 잘못된 부분을 철저히 부정하고 비판하는 방식으로 젊은이들은 물론 아테네 사람들 모두에 대한 의식의 개혁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5) 그런데 이러한 시가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그것이 담고 있는 담론의 내용 즉 이야기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먼저 어린이들을 위한 시가 교육에 있어 이야기가 갖는 중요성에 주목하고 이야기를 사실과 허구로 구분한 후 어린이들의 시가 교육은 허구적인 것을 이용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허구’라고 번역한 말의 그리스 원어는 ψεῦδος(pseudos)이다. 그런데 pseudos의 원래 의미는 거짓말, 허위의 뜻을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문학적 허구와 거짓말의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사실 문학적 허구도 사실이 아닌 것을 지어낸 것이라는 점에서 보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우리말 역어로 문학적 허구와 거짓말이라는 말은 매우 다른 의미와 뉘앙스를 갖는다. 문학적 허구는 나쁜 것으로 여겨지지 않지만 거짓말은 모두에게 일단 나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소크라테스가 시가 교육에서 pseudos부터 먼저 받아야 한다고 말하자 그에 대해 아데이만토스가 의아해한 것도 아마 pseudos가 갖는 거짓말의 의미 때문이었을 것이다. 교육 특히 어린이 교육에서 거짓말부터 가르쳐야 한다는 것은 누가 들어도 잘못된 것으로 여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pseudos의 원래 뜻인 거짓을 살려 모두 거짓말로 번역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플라톤은 궁극적으로 호메로스 헤시오도스 신화가 최소한 신들과 관련해선 상당 부분 거짓말임을 밝히려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려나 우리는 역본들에서 허구와 거짓말이라는 역어를 함께 접하게 되겠지만 그 두 역어의 그리스어 원어는 모두 pseudos임을 염두에 두고 이 부분을 읽어야 한다.

6)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체육은 몸을 위한 교육으로, 시가는 혼을 위한 교육으로 구분하지만 나중 체육을 따로 논하면서 체육도 궁극적으로 혼을 위한 교육임을 밝힌다.(410c)

 

[377a-378a]

*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에게 처음엔 어린이들에게 설화μῦθος를 이야기해준다는 것을 모르느냐고 반문하면서 설화는 대체로 허구이지만 사실적인 것ἀληθῆ들도 포함되어 있음을 지적한 후 어린이들에게 신체 교육 보다 설화 교육을 먼저 이용하는 이유를 시가 교육을 체육 보다 먼저 착수하는 이유와 등치시킨다. 설화가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어리고 연약한νέῳ καὶ ἁπαλῷ 어린이들에게 있어서는 특히 모든 일의 시작ἀρχὴ παντὸς ἔργου이 중요하다고 말한다.(377a) 그것은 어렸을 때가 가장 유연성이 있고μάλιστα πλάττεται 누군가가 각자에게 새기어 주고 싶은 인상이 제일 잘 받아들여지기ἐνδύεται τύπος ὃν ἄν τις βούληται ἐνσημήνασθαι ἑκάστῳ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나 지어낸 이야기로μύθους πλασθέντας 닥치는 대로 듣게끔 내버려 둠으로써 그들이 커서 반대되는 생각들을 마음속에 지니게 해서는 안 되며(377b) 그에 따라 설화 작가μυθοποιός들을 감독하여ἐπιστατητέον 그들이 짓는 것이 훌륭하면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것을 거부하고(377c) 아이들을 가르치는 보모들과 어머니들에게 훌륭한καλὸν 이야기로 아이παῖς들의 혼을 형성해주도록πλάττειν τὰς ψυχὰς 설득하고πείσομεν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중에서 많은 것은 버려야만 한다ἐκβλητέον고 말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그 버려야하는 설화에는 큰 규모와 작은 규모τούς τε μείζους καὶ τοὺς ἐλάττους가 있지만 그 모두 틀τύπος은 같고 같은 영향을 끼친다고 말하고(377d) 그 큰 규모의 설화가 다름 아닌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및 다른 시인ποιητής들이 구성하여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허구적인ψεῦδος 설화임을 밝힌다.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그 허구적인 설화가 무엇이고 어떤 점을 탓하는 것인지를 묻고 소크라테스는 그에 대해 무엇보다도 제일 비난받아 마땅한 것으로서 ‘좋지 못한μὴ καλῶς 거짓말’(377e) 즉 마치 화가γραφεύς가 전혀 닮지 않은 것을 그리는 것과 같은, 신과 영웅들에 관해 나쁘게κακῶς 묘사한 것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좋지 못한 거짓말로서 가장 큰 거짓말, 가장 중대한 것들에 대한 거짓말τὸ μέγιστον καὶ περὶ τῶν μεγίστων ψεῦδος로서 헤시오도스가 이야기한 우라노스Οὐρανός가 저지른 짓과 크로노스Κρόνος의 행적을 적시한다. (37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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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린이에게 설화를 이야기할 때 허구적인 것을 이용하는 것은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다를 바가 없다. 물론 설화에는 사실도 있지만 어린이들에게 들려주는 이른바 옛날이야기나 동화들은 기본적으로 허구pseudos이다. 그런데 이러한 허구pseudos에는 훌륭한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그런데 그것들이 어리고 연약한 어린이에게 미치는 영향이 아주 크므로 설화 작가들을 감독해야한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큰 규모의 설화 가운데에는 신들과 영웅들에 대한 좋지 못한 거짓말pseudos 즉 나쁘게kakōs 묘사한 것이라는 표현도 나온다.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언급들을 토대로 pseudos를 요즈음 우리가 사용하는 말로 다시 분류하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 a) 사실과 다른 사실 왜곡으로서 pseudos. 이것은 허구가 아니라 우리말 뜻 그대로 거짓말. b) 지어낸 것으로서 훌륭한 것 즉 훌륭한 허구로서 pseudos. c) 지어낸 것으로서 나쁜 것 즉 나쁜 허구로서 pseudos. –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데 우리가 먼저 유념해야 할 근본 전제가 있다. 즉 소크라테스에게 신은 훌륭하고 선한ἀγαθὸς 존재이다.(379b) 그러므로 어떤 설화이든 신을 나쁘게 묘사한 것은 그 자체로 잘못 묘사한 거짓말 즉 위의 구분 상 a)에 해당하는 거짓말이다. 그러므로 호메로스 헤시오도스 신화에서도 신들을 나쁘게 묘사한 것은 모두 거짓말이다. 그리고 신들을 좋게 묘사한 것은 위의 기준으로 b)에 해당하는 신에 대한 진실로서 훌륭한 허구 아니면 사실이다. 그리고 그 후 시인들이 지어낸 이야기 가운데에서도 신을 나쁘게 묘사한 것은 모두 1)에 해당하는 거짓말이다. 다시 말해 이 경우는 a)와 c)의 구분이 따로 없다. 이와 달리 좋게 지어낸 것은 훌륭한 허구 즉 b)에 해당하는 pseudos이다. 요컨대 위의 분류에서 소크라테스의 어법에 따르면 최소한 신과 영웅과 관련해서는 a)의 pseudos와 c)의 pseudos는 모두 우리말 거짓말에 해당한다. 그리고 b)에서처럼 좋게 묘사하면 앞서도 말했듯 훌륭한 것 즉 좋은 pseudos 아니면 사실로 인정된다. pseudos가 어쨌거나 허위의 뜻을 가지고 있는 한, 소크라테스에게는 비록 이곳에서는 신과 관련한 이야기에 국한 되어 있지만 어린이를 위한 설화작가건 시인들이건 정치가이건 간에 좋은 허위, 좋은 거짓말이 허용될 수 있는 여지가 열려 있는 셈이다. 거짓말의 문제는 통치자의 거짓말과 관련하여 나중에 다시 또 다루어질 것이다.

2)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어린이에게 들려 줄 설화 가운데 많은 것을 버려야 하고 또 그러한 것을 지어내는 설화 작가를 감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감독의 대상이 어린이를 위한 설화 작가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런 경우 오늘날에도 감독의 필요성이 요구되듯이 딱히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이후에 이어지는 논의를 보면 기존의 신화나 설화는 물론 새롭게 창작되는 시인들의 작품 모두에 검열의 잣대가 적용되고 있다. 이 때문에 플라톤은 문학과 예술을 검열하는 다시 말해 표현과 창작의 자유를 억압하는 반자유주의자로 비판을 받고 있다. 앞으로 그 해당 부분에 가서도 각각 살피게 되겠지만 우선 이러한 비판은 앞에서 우리가 살폈듯이 아테네에서 시가와 시가 교육이 차지하는 비중과 성격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새로운 규범으로 내세우고자 하는 선한 신의 관념 등을 고려하면 그렇게 적확하고 합당한 비판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앞서 살핀 대로 아테네에서 시가와 시가 교육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시문학 내지 예술 작품의 창작이나 일반적인 예능 교육 차원을 넘어서 당대 사람들의 의식과 생활 전반을 지배하는 일종의 국가 종교 내지 세계관 교육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가와 시가 교육은 하나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아테네 시민으로서 함께 공유해야할 진실이자 함께 지켜나가고 유지해야할 일종의 이념이자 세계관이다. 그러므로 지금 그가 설계하는 이상 국가에서의 시가 교육 과정에서 신들과 영웅들에 대한 부분은 그 어떤 부분보다도 엄중한 잣대가 적용되어야 할 중대한 문제 영역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플라톤이 시가 교육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불어넣으려는 새로운 신관은 이상 국가의 이념에 준하는 매우 중차대한 교육 목표의 하나임을 고려하면 수호자에 대한 시가 교육에서 신들과 관련하여 거짓말을 가르친다는 것은 쉽게 용인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앞서 살폈듯 플라톤의 시가 교육이 오늘날 생각하는 일반적인 교양 교육이 아니라 일종의 국교 교육에 해당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이를테면 오늘날 다종교 국가에서 조차 개신교 교리 교육과정에서 코란이 진리라고 가르치는 교사를 혹은 이슬람 교리 교육과정에서 불교 경전을 진리라고 가르치는 교사를, 그것도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이를 대상으로 가르치는 경우 아무런 감독 없이 자유로운 학술활동으로 방임하기란 상상조차 힘들다. 플라톤의 시가 교육이 갖고 있는 이러한 특수한 성격을 고려하면 이곳에서 수호자 교육과정에서 가장 중차대한 신들과 관련한 거짓말을 감독하는 것과 마치 오늘날 일반 시민 사회에서 자유로운 창작 활동을 통제하고 검열하는 것을 등치해서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요컨대 플라톤은 수호자 교육에 있어 아테네의 시가 교육 방식을 받아들이되 내용에 대한 교육에 있어서만은 아테네 사회에서 경전처럼 받들어지고 있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신화의 핵심 내용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나 그의 이상국가론이 염증 상태의 나라를 정화하기 위한 이론임을 고려한다면, 그것은 기존의 세계관을 배척하고 진정한 신관 내지 세계관을 심어주려는 그 자신의 철학적 실천의 반영으로 보는 것이 이 문맥이 담고 있는 합당한 의미라 할 것이다.

3) 박종현 역본에서 ‘허구적인 설화를 구성해서’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그냥 ‘거짓말로 설화를 구성하여’로 변역하는 것이 더 바람직해 보인다. 그래야 그 후 소크라테스의 말을 뭔가 탓을 하려는 것으로 여기는 아데이만토스의 태도가 이해된다. 앞에서도 설명하였듯이 여기서(377a) ‘좋지 못한 거짓말’은 신화 내용에 대한 가치 평가가 아니라 그냥 ‘사실과 다른 거짓말’을 의미하고 ‘나쁘게 묘사할 경우’ 또한 ‘사실과 다르게 잘못 묘사할 경우’를 의미한다.

 

[378a-b]

* 소크라테스는 헤시오도스가 전하는 우라노스와 크로노스의 이야기가 거짓말이라고 말하면서 설령 그것이 진실ἀληθῆ이라 할지라도 어린 사람νέος에게 그것을 경솔하게 들려줄 것이 아니라 침묵하는 것σιγᾶσθαι이 상책이며 불가피하게 이야기해야 한다면 비밀리에 최소한의 소수ἐλάχιστος만이 듣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이런 이야기는 우리의 이 나라에서ἐν τῇ ἡμετέρᾳ πόλει 들려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어린 아이가 듣고 있는데 누가 그런 극단적인 부정의ἀδικῶν τὰ ἔσχατα를 저지르는데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라는 투로 말해서도 아니 되고 정의롭지 못한 짓을 저지르는 아버지를 온갖 방법으로 응징하는데도κολάζων 위대한 신들도 그런 짓을 한다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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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곳에서의 플라톤의 주장 또한 전체주의 내지 독재시대에 횡행했던 금서 정책 또는 특정 정보에 대한 접근 금지 내지 정보의 독점을 연상케 한다. 물론 이곳에서도 그러한 이야기들이 어린이에게 미치는 영향 때문임을 강조하고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어린이는 물론 극히 소수를 제외한 일반 사람들 모두에게 그러한 방침이 적용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당연히 오늘날 확립된 자유주의적 가치관의 측면에서 보면 분명 지식과 정보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앞서도 살폈듯이 이 역시 정의로운 국가를 설계하면서 장차 수호자가 될 젊은이들에 대한 시가 교육과정에서 나라의 중추적 이념이자 가치관의 기초가 되는 신들에 관한 관념을 바로세우기 위한 작업의 일환임을 고려하면, 기존의 잘못된 신화에 대한 부정과 비판은 당연하고도 필수적인 것일 수 있다. 무엇보다 플라톤에게 신은 선한 존재임에도 헤시오도스가 전하는 우라노스와 크로노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아주 중차대한 거짓말이었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플라톤에게 그것은 신들과 관련한 특정 사실의 은폐가 아니라 신들에 대한 거짓 정보의 폐기 내지 부정이었던 것이다.

* 그럼에도 ‘설령 진실이라 할지라도 침묵이 상책이다’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신이 선하다는 그 자신의 말과 모순될 뿐만 아니라 신과 관련하여 여전히 뭔가 진실을 숨기려 한다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이 부분에 대한 해석과 관련해서는 여러 관점이 있을 수 있다. 우선 이 말은 신이 선하다는 그 자신의 생각과의 모순을 스스로 드러내는 말이기 보다는 우라노스와 크로노스에 관한 이야기 자체가 어린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어린이 교육의 필요상 감추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하려는 일종의 수사적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달리, 이후 신들의 나쁜 이야기에는 뭔가 다른 숨은 뜻ὑπόνοια이 있을 수 있다는 시사를 내비치고 있음(378d)에 기초하여 이 부분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우라노스와 크로노스의 행실은 겉으로 나쁘게 보이지만 뭔가 숨은 다른 뜻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겉으로 드러난 행적은 순진한 어린이들에게는 나쁜 영향을 줄 것이 분명한지라 침묵하는 것이 상책이다.”라고 이해하는 방식이다. 나중에(380a) 소크라테스가 그와 같은 숨은 뜻을 어떻게든 찾아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해를 뒷받침 한다. 그러나 신들의 나쁜 행적을 이런 방식으로 이해하면 기존 신화에 실린 신들의 나쁜 행적 모두가 합리화될 수 있는 위험이 있고 그것은 기존 신화를 비판하고 개혁하려는 플라톤의 의도를 그 자체로 부정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타당성이 떨어진다. 플라톤이 최대한 기존 신화에서 신들의 선성을 살려내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기는 하지만 이미 그는 정의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수호자 교육과정에서 기존 신화를 비판하고 개혁하여 정의로운 국가에 부합하는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을 새로운 규범으로 확립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그것은 일종의 종교 개혁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나중 살피게 되겠지만 그가 내세우고 있는 신에 대한 관념들은 플라톤의 이러한 종교 개혁이 가히 혁명적 성격을 갖는 것임을 새삼 일깨워준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㉜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 서론 강해에서 <국가>의 목차를 언급하며 살폈듯이 우리는 권수를 기준으로 제1권을 <국가>의 서론, 그 이후 제2권부터 9권까지를 본론, 제10권을 에필로그로 나누고, 본론의 첫째 부분을 제2권에서 제4권까지, 둘째 부분을 제5권에서 제7권까지, 셋째 부분을 제8권에서 제9권까지로 구분하여 <국가>를 크게 다섯 단락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권수를 고려하지 않고 실질적인 내용을 기준으로 볼 경우, 제1권부터 호사스런 나라에서 수호자가 등장하는 바로 앞 374e까지를 본격적인 이상국가론에 앞서 진행된 서론적 논의라는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별로 없다.(다만 소소하게는 위의 견해와 같되 수호자의 성향까지를 서론적 논의에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강해는 <국가>의 서론적 논의(제1권부터 제2권 357a-374e까지)를 모두 마무리한 셈이다.

* 이에 따라 이제 소크라테스의 본격적인 이상국가론이 시작된다. 그런데 이러한 시작에 앞서 소크라테스가 문자의 비유를 내세워 논의를 개인에서 나라로 확대하고 나라의 발전에 따른 계층들의 발생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이미 나라를 구성하는 계층들과 개인의 영혼을 구성하는 내적 부분들이 유기적으로 상응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앞으로 전개될 정의에 관한 새로운 논의가 그것들의 유기적 연관성을 토대로 전개될 것임을 일러 준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살필 본격적인 이상국가론의 첫 부분 또한 그러한 구도에 따라 이루어진다. 즉 소크라테스는 앞서 나라의 성립과 발전을 통해 나라의 구성 요소로 생산자 계층, 수호자 계층(통치자 계층 포함)을 등장시킨 후 → 수호자의 교육 이념을 통해 그 세 계층의 조화를 담보하는 덕으로서 정의를 드러내고 → 그 다음 단계로 개인의 영혼 또한 나라의 세 계층에 상응하는 이성, 기개, 욕구 부분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밝힌 후 → 그 개인의 내적 영혼들에도 나라의 정의와 동일하게 영혼의 조화를 담보하는 덕으로서 정의를 드러내는 순서로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면 우리가 지금부터 다루게 될 위와 같은 논의 내용들을 강해 서론에서 제시한 목차를 기준으로 좀 더 세부적으로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제2권 375a-제4권 끝)

 

  1. 본론 1, A. 터파기와 준비 : 문제제기, 방법, 나라의 기원(357a-374e)
  2. 본론 1, B. 정의로운 나라와 정의로운 개인(375a-445e)
  3. 정의로운 나라의 수립(375a-434d)

1-1 수호자의 성향(375a-376c)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 – 시인들이 지켜야할 규범

{376e-383c(제2권 끝), 제3권 386a -392c}

* 신은 선하다(376e-380c)

* 신은 단순하고 거짓말을 할 수 없다(380d-392c)

1-2-1-2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392c-398b)

1-2-1-3 가사, 선법, 리듬(398c-401a)

1-2-1-3 시가 교육의 목적(401b-403c)

1-2-2 체육 교육(403c-412b)

1-3 수호자가 갖추어야할 조건들(412b-427c)

1-3-1 수호자들의 선발과 자격, 건국 신화(412b-415d)

1-3-2 수호자들의 생활 방식, 사유재산의 금지(415d-417b, 4권 419a-421c)

1-3-3 수호자들의 임무(421c-427c)

1-4 정의로운 국가의 주요 덕목 : ‘지혜’, ‘용기’, ‘절제’, ‘정의’(427d-434c)

  1. 정의로운 개인과 영혼(434d-445e)

2-1 혼의 세 부분(434c-441c)

2-2 정의로운 개인의 주요 덕목 : ‘지혜’, ‘용기’, ‘절제’, ‘정의(441c-445e. 제4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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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부터 <국가> 본론에 해당하는 부분에 대한 강해를 이어가자.

 

  1. 본론 1, B. 정의로운 나라와 정의로운 개인(375a-445e)
  2. 정의로운 나라의 수립(375a-434d)

 

1-1 수호자의 성향(375a-376c)

 

[374e]

* 소크라테스는 수호자들의 일τὸ τῶνφυλάκων ἔργον이 가장 중요하고μέγιστον 그만큼 최대한의 한가로운 태도σχολῆ를 요구하는 한편 그 자체로는 최대의 기술τέχνη과 관심ἐπιμελεία을 요하는 것임을 밝힌 후 곧바로 수호자들에 적합한 성향φύσις들이 무엇인지를 가려낼 것을 제안한다. 그러한 일에 착수하는 것은 사안의 성격상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며 주춤 거릴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375a-b]

* 그런데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는 가문 좋은 젊은이의 성향과 지키는 일의 관점에서φυλακὴν 혈통 좋은 강아지σκύλαξ의 성향은 서로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수호자φύλαξ나 강아지 모두 감각αἴσθησις에 있어서는 예민해야ὀξύν 하고 감지된 것을 추적하는데 날렵해야ἐλαφρός 하며 붙잡고 싸워야 할 때는 힘이 세야만ἰσχυρὸν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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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kyōn라고 해도 상관없음에도 젊은이에 맞추어 새끼 강아지로 표현한 것은 강아지의 원어 skylaks와 수호자의 원어 pylaks의 말미가 같다는 것을 고려한 말놀이일 수도 있다. 개kyōn는 개를 나타내는 명칭 그대로 아테네에서 이른바 퀴니코스kynikos 학파(the cynics 견유학파)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 쓰이기도 했는데 이곳에서 플라톤이 내리고 있는 개의 함축과 견유학파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서 개의 함축이 거의 상반될 정도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도 흥미를 끈다. 플라톤의 개는 나라를 책임지는 수호자에 비유되고 있지만 견유학파의 개는 오히려 나랏일과 거리를 두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사람에 비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375b]

*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개이든 그 밖의 어떤 동물이든 맹렬하지θυμοειδὴς 못한 것이 어찌 용맹한가ἀνδρεῖος를 반문하고 격정θυμός이야말로 그것이 일게 되었을 때 마음ψυχὴ 이 모든 것에 대해 겁이 없고ἄφοβός 꺾이지 않는다ἀήττητος고 말한다. 즉 수호자가 갖추어야할 성향은 신체적으로는τοῦ σώματος 감각에 예민하고 추적하는데 날렵하고 힘세어야 하고 심적으로는τῆς ψυχῆς, 격정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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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ymoeidēs(명사형으로는 thymos)는 동물에 대해 쓰일 때는 맹렬함의 의미를 갖지만 사람에게 쓰일 때는 기본적으로 격정, 분노의 의미를 갖되 생각이 깃든 분노 즉 의분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감정적 격분과는 달리 이지적 측면 즉 자존심에서 우러나오는 기개의 성격을 갖는다. to thymoeidēs는 이후 플라톤에 의해 개인의 영혼에서 ‘기개적인 부분’에 해당하는 말로 사용된다.

 

[375c-e]

* 그런데 이러한 성향들은 수호자 서로 간에 그리고 다른 시민들에 대해 거칠어ἄγριος 서로와 스스로를 파멸할 수도διολέσαι 있으므로 친근한 사람에게는 온순해야하고 적들에 대해서만 거칠어야 한다. 다시 말해 수호자는 온순하면서도 대담한 성품 ἅμα πρᾷον καὶ μεγαλόθυμον ἦθος 즉 서로 대립적인ἐναντίος 온유한πρᾶος 성향과 격정적인θυμοειδής 성향을 함께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처럼 대립적인 성향을 함께 갖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앞서 수호자에 비유한 혈통 좋은 개들의 경우 이러한 대립적인 두개의 성향들을 함께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대립적인 성향들을 함께 갖고 있는 수호자를 찾는 일은 ‘자연에 어긋나는 게 아니’οὐ παρὰ φύσιν라고 말한다.

 

[ 376a-c]

* 그런데 개들의 경우 이러한 대립적인 성향들을 함께 갖추고 있되 친한 사람의 모습과 적의 모습을 식별καταμαθεῖν하여 그 앎과 모름에 의해 친근한 것과 낮선 것을 구별한다는 점에서 개의 천성의 상태는 영리하고κομψός 지혜를 사랑하며φιλόσοφος 배움을 좋아한다φιλομαθὲς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배움을 좋아하는 것과 지혜를 사랑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인간의 경우도 그렇다. 그러므로 장차 우리나라의 훌륭하디 훌륭한καλὸς κἀγαθὸς 수호자가 될 사람은 의당 천성으로 지혜를 사랑하며φιλόσοφος 정적이며θυμοειδὴς 날래며 굳세야ταχὺς καὶ ἰσχυρὸς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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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의 내용과 관련해서 몇 가지 음미할 것이 있다.

 

1) 소문자 대문자 비유를 통해 나라에 대한 논의로 확대된 이후 나라에서 필요한 계층들이 생겨나고 마침내 수호자 계층이 등장하면서 대문자에 해당하는 정의로운 나라를 살필 준비가 갖추어진다. 장차 드러나겠지만 나라를 구성하는 세 계층들은 소문자에 해당하는 개인의 내적 영혼의 세 부분들에 상응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의로운 나라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기본적으로 수호자 계층에만 집중되어 있다. 정의로운 나라의 구축에 수호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구조적으로 교육에서 배제되었던 기층 생산 계층이 지성의 지배로 표징되는 플라톤의 정의로운 국가에 자리를 차지하기란 처음부터 난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논의를 시작하면서 수호자의 성향부터 꺼내든 것 역시 수호자 계층 또한 분업과 전문화 원칙에 따라 무엇보다도 타고난 적성이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호자의 성향을 다루는 이 부분을 잘 들여다보면 나라를 구성하는 세 계층에 상응하는 개인의 내적 영혼들의 부분이 어떤 것들인지가 거의 명시적이다시피 드러나 있다. 수호자의 성향 자체가 수호자의 내적 영혼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수호자의 성향에 관한 서두 부분은 나중에 펼쳐질 개인의 내적 영혼들에 대한 예비적 암시이자 나라의 계층들과 개인의 내적 영혼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상응하는 것임을 아예 미리부터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2) 실제로 수호자의 성향을 강아지에 빗대어 신체적으로는 감각에 예민하고 추적에 날렵하고 싸울 때 힘이 세야 하고, 심적으로는 맹렬해야(격정적이어야)하며 동시에 아는 사람과 낯선 사람을 식별함에 있어서는 지혜롭고 영리해야 한다는 언급들은 앞서 지적한 대로 장차 개인의 내적 영혼들을 나타내는 말과 거의 그대로 일치하거나 거의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우선 ‘격정적’이라는 말 thymoeidēs는 나중 영혼의 ‘격정적인 부분’을 나타내는 to thymoeidēs(명사형으로는 thymos)와 표현부터 그대로 일치하고, 식별하고 헤아리는 능력 역시 영혼의 ‘이성적인 부분’을 나타내는 to logistikon(명사형 logos)와 내용적으로 일치하며, 감각을 뜻하는 aisthēsis나 신체적 능력을 나타내는 ischus라는 말 역시 영혼의 ‘욕구적인 부분’을 나타내는 to epithymētikon(명사형 epithymia)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말이다.(440e 참고) 특히나 개의 능력과 관련하여 친한 사람과 적을 구별하는 능력과 연관해 사용하는 ‘지혜를 사랑하는philosophos’라는 말과 ‘배움을 좋아하는’philomathes라는 말은 수호자의 성향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성향을 나타냄과 동시에 개인의 내적 영혼들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성적인 부분이 갖는 성격과 완전히 동일하다. 이렇듯 이곳에서의 수호자의 성향은 장차 언급될 영혼 3분설에서 언급되는 영혼의 내적 부분들과 그대로 일치한다. 물론 영혼 3분설이 사람 일반에 적용되는 한, 수호자뿐만 아니라 생산자 또한 이성적 부분, 격정적 부분, 욕구적 부분의 영혼들을 가지고 있다. 다만 차츰 밝혀지겠지만 그것들 세 부분의 결합 방식에 따라 그들 각각의 전체적인 성향들은 서로 다른 특성을 갖게 된다. 마치 장기판의 장기 알들은 모두 똑같지만 장기판의 형세는 두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한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3) 소크라테스는 온순함과 대담함, 온유와 격정이라는 대립적 성향을 함께 갖추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한다면 훌륭한 수호자란 불가능하다고 운을 뗀 후, 곧바로 개의 경우를 들어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며 그것이 또 자연에 어긋나는 것이 아님을 간단히 판정해낸다. 그러나 여기 나타난 소크라테스의 자문자답을 곱씹어보면 이 부분은 그렇게 간단하게 읽고 넘어갈 곳이 아님을 이내 직감하게 된다. 물론 상식적 수준에서 나라를 지키는 수호자 즉 전사가 하는 일이 아군과 적을 식별하고 그에 따라 정반대의 태도로 임하는 것이 당연한 한, 그 말에 달리 주목할 만한 의미는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수호자 가운데 통치자가 선발되고 통치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이른바 우리가 말하는 정치 행위임을 고려하면 이 문맥은 한층 중요한 의미로 다가 올 수 있다. 즉 그 말은, 나라에 늘 서로 대립하는 것들이 있고 그것들 모두가 나라에 필요한 것들인 한, 수호자가 하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 즉 통치의 핵심은 그러한 대립적인 것들 중 하나를 편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간의 공존과 조화를 도모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것은 서로 수직으로 교차하는 씨줄과 날줄을 엮어 하나의 옷감으로 만들어 내는 직조술을 정치가의 기술로 언급하고 있는 <정치가>의 내용(281a-283b)과도 그대로 일치한다.

4) 그러나 이 문맥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소크라테스가 그 동안 씨름해왔던 존재론적인 고민들이 압축적으로 담겨있다는 점에서 더욱 만만치 않은 의미와 논쟁거리를 안겨준다. 우선 플라톤 이전 시기까지 그리스 지성계를 지배해왔던 엘레아주의적 사고에서 보면 대립자들이 함께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불가능하다. 엘레아주의자 말대로 있는 것이 있고, 없는 것은 없는 한, 오로지 부동의 일자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보기에 그런 식의 접근은 현실을 공간적 사고에만 가두어 두는 것으로서 시공간 속에서 만상이 엉켜 변화하는 현실에 대한 철학적 해명이 아니라 오히려 엄연한 실재로 우리 앞에 현존하는 현실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원자론자들처럼 운동하는 현실을 구제하기 위해 허공kenos이라는 없는 것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운동을 그저 원자atom들의 물리적 충돌로만 설명하려는 것 또한 혼돈의 현실을 철학적으로 해명하고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구제하는 방안이 될 수 없다. 이에 플라톤은 대립적인 것들이 함께 엉켜 변화무쌍하게 운동을 거듭하는 것이 현실의 진상(眞相)인 한, 그것을 정당화하는 존재론을 제시하고 그 현실의 변화에 인간이 능동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아 내야했다. 그것이야말로 존재론적으로 현실을 해명하는 참된 길이며 동시에 모멸의 현실을 더 이상 방관하지 않고 넘어서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마땅히 가야할 길이다. 요컨대 만물의 근본 원인으로 존재to on와 생성to aei gignomenon이 있다하더라도 현실에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로 환원될 수 없고 그렇다고 없는 것으로 해체되지도 않는 제3의 것이다. 현실 세계는 본질적으로 그런 것이다. 그 속에는 이른바 존재적 성격과 생성적 성격이 무한히 관계 맺으며 서로 엉켜있는 것이다. 인간에게서 그 현실의 단적인 국면이 드러나는 곳이 곧 인간의 욕망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욕망에 어떠한 능동자poioun의 개입이 없는 한 현실은 무규정적apeiron 욕망이 지배하면서 사회적 관계는 해체되고 개인은 불행의식에서 헤어날 수 없다. 그 무규정적 욕망과 그 욕망이 빚어내는 불행한 현실은 어떻게든 다양한 욕망이 함께 공존하는 방향, 즉 질서taxis와 조화harmonia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재편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운동하되 지향과 목적telos을 가져야 한다.

5) 그러나 운동은 해체를 의미할 뿐이라는 종래의 사고로는 그러한 지향을 뒷받침할 수 없다.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운동하되 그 지향의 끝 즉 자기동일성을 동시에 담보해내는 힘이 필요하다. 그런데 플라톤은 부동의 형상을 넘어 그 힘을 생명체의 자기 운동에서 발견한다. 생명체야말로 운동을 통해 오히려 자기 동일성을 보전하고 그 스스로의 합목적성을 구현하기 때문이다. 생명체에게 운동의 정지는 자기동일성의 상실이며 해체일 뿐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형상의 초월성을 인정하되 자기 운동을 통해 오히려 완벽한 자기동일성을 보전하고 다(多polla)의 영원한 조화와 질서를 구현하고 있는 우주적 선(善agahthon)의 실재 또한 진실로 통찰한 연후, 완벽한 생명체로서 그 우주의 내적 생명력으로서 ‘우주 영혼’을, 현상세계와 인간의 욕망을 우주적 질서로 견인하는 지고의 근거이자 힘으로 천착해낸다. 그리고 플라톤은 다행스럽게도 신들이 현실의 생명체를 만들면서 인간을 가장 자신의 영혼과 닮게 했다고 믿었다. 그러한 인간들 가운데 가장 순수한 영혼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우주 영혼을 본 그대로 인식할 수 있으며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혼돈의 현실을 변혁할 수 있는 사람이 곧 철학자들이다. 그러므로 우주 영혼을 본으로 가장 순수한 영혼을 간직한 철학자의 현실 개입이야말로 현실을 구제하는 최선의 방책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곧 플라톤이 말하는 철학자의 지적 실천이자 최선의 정치이다.

6) 이처럼 플라톤은 엘레아적 일자성을 넘어, 헤라클레이토스적인 생성을 넘어 현실을 구제하기를 열망했고 그에 따라 자기동일성과 운동성을 동시에 뒷받침하는 존재론을 마침내 우주에 대한 성찰로부터 천착해냈다. 우주는 끝없이 자기 운동을 지속하면서도 결코 해체되지 않으며 수많은 대립적 요소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들 모두를 하나의 질서 속에서 완벽하게 조화시키고 있는 유일한 실재이자 가장 선하고 완벽한 생명체였던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우주 영혼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존재론을 구축하고 그것을 토대로 인간의 영혼을 존재론적으로 해명하고 그 영혼을 가장 순수한 형태로 발현한 철학자를 통해서 혼돈의 현실이 변혁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플라톤이 그야말로 전래의 엘레아적 일자에 버금가는 존재론적 지위를 우주적 생명력의 기초로서 우주 영혼에 부여하였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하여 철학자의 영혼은 우주 영혼을 본으로 삼아 물질의 필연성에 끝없이 반역하고 거스르는 방식으로 그러나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목적을 향해 가장 능동적으로 가장 적확하고도 분명하게 다가가는 방식으로 모든 부분들과 모든 차이들과 모든 대립자들을 하나의 살아있는 질서로 용융해내는 지고의 영혼, 즉 우주 영혼의 최상의 모상이었던 것이다.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1-2-1 시가 교육(376e-403c)

 

* 수호자의 성향에 대한 논의에 이어 수호자의 교육론이 스테파누스 쪽수로 거의 35쪽에 이를 정도로(376c-412b) 상당히 길게 펼쳐진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정의로운 국가를 구축하려는 그의 언급의 대부분이 바로 이러한 수호자 교육론으로 채워진다는 점이며 게다가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수호자 교육론의 대부분이 시가교육으로 채워진다는 점이다. 이 시가 교육에 관한 내용은 매우 중대하고 독립적인 주제를 이루므로 다음 시간에 다루기로 한다.

 

<공지> 정암학당 강해가 여름 방학을 맞아 일시 휴강함에 따라 본 웹진 강해는 잠시 쉬었다가 8월 15일 경에 다시 이어질 예정입니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㉛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2-6. 호사스러운 나라, 염증상태의 나라(372e-373d)

 

[373a]

* 이후 소크라테스는 호사스런 나라를 ‘염증(부어오른) 상태의 나라’φλεγμαίνουσας πόλις로 다시 명명한 후 그 나라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소크라테스는 건강한 나라에서 염증 상태의 나라로 변하는 원인은 다름 아니라 어떤 사람들에게는τισιν 건강한 나라에서 주어진 것들과 그곳에서의 생활 방식δίαιτα이 충분하다고 여겨지지 않기οὐκ ἐξαρκέσε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 나라에는 의식주 전반에 걸쳐 사치스런 것들이 추가된다.

* 소크라테스가 열거하고 있는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침상κλίνη과 식탁τράπεζα 및 기타 가구σκευή들, 요리ὄψον와 향유μύρον 및 향료θυμιάματα , 기녀ἑταίρα와 생과자πέμμα, 기타 필수적이 아닌 것들οὐκέτι τἀναγκαῖα 즉 회화ζωγραφία와 자수ποικιλία, 황금χρυσός과 상아ἐλέφαντα 등 그와 같은 유의 온갖 것들.

 

[373b-d]

* 이런 것들이 추가되면서 앞의 나라는 규모ὄγκος와 수πλῆθος에서 한층 더 커질 수밖에 없게 되어 건강한 나라는 더 이상 적합하지가 않게οὐκέτι ἱκανή 된다. 그리하여 필요불가결한τοῦ ἀναγκαίου 것을 넘어서는 직능의 사람들이 생겨난다. 이를테면 모든 부류의 사냥꾼θηρευτής과 모방가μιμητής들이 생겨나는데 모방가들 중 일부는 형태와 색채σχήματά τε καὶ χρώματα에 관여하는 사람들(조각가와 미술가)이고 일부는 시가μουσική에 관여하며 이를 돕는 시인ποιητής, 음송인ῥαψῳδός, 배우ὑποκριτής, 합창 가무단원χορευτής, 연출가ἐργόλαβος들이다. 그리고 그밖에 여러 종류의 기구σκευή들 즉 여성들의 꾸밈κόσμον과 관련한 다양한 소품(장신구)들παντοδαπῶν을 포함해 더 많은 봉사자(시종)διάκονος들, 이를테면 가복παιδαγωγός(가정교사), 유모τίτθη(건강 관련 시종), 보모τροφός(음식 시중 시종), 시녀κομμώτρια(의복 관련 시종), 이발사κουρεύς, 일반 요리사ὀψοποιός, 고기 요리사μάγειρος(푸주한)가 생겨나고 육류 공급을 위해 앞서 말한 사냥꾼 이외에 양돈가συβώτης 및 온갖 종류의 가축βόσκημα이 추가로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건강한 나라에서는 전혀 필요하지 않았던 것들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살게 되면 질병에 걸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마련이어서 의사ἰατρός들이 많이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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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사스런 나라가 규모와 수에서 한층 더 커진다고 했을 때 규모와 수가 가리키는 것은 의식주에 있어 필수적인 것 이상의 것들과 그것들을 제공하는 직능의 수는 물론 그런 것들의 확장에 수반하는 인구의 증가까지 포함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이러한 규모와 수의 증가는 이미 호사스런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욕구가 더 이상 생존 욕구에만 만족하지 않고 사치스런 욕구에서부터 문화적 욕구에로까지 확대되었음 보여준다.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을 넘어서 다양한 맛을 추구하고 고기 요리까지 탐닉하며 자수와 회화는 물론 치장 도구까지 욕구하고 있는 양상은 이미 인간의 욕구가 동물적 욕구를 넘어 사치욕의 단계까지 이르렀음을 보여주고 있고 특히 시가μουσική 관련한 욕구의 증대는 이른바 인간의 고유 욕망으로서 문화 예술에 대한 욕망이 본격적으로 분출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보모와 유모는 물론 아이들의 교육을 돌보는 가복의 출현 또한 본능적 돌봄 이상의 양육과 교육에 대한 수요가 생겨났음을 나타낸다. 이른바 우리가 말하는 문명 생활에 대한 욕구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 호사스런 나라에 ‘돼지 치는 사람’συβώτης이 등장하는 것 또한 이 나라에 생존을 위한 식욕 이상의 고급 요리 등 식탐과 미식에 대한 욕망도 생겨났음을 보여준다. 사실 기원전 5세기 만해도 아테네 사람들 대부분은 주로 채식을 했고 육식을 즐기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이곳에서의 고기 요리는 특수 신분이나 즐겼을 법한 고급 요리로 그려진 것이다. 실제로 아테네에서 소와 양은 기본적으로 식량이나 양모 등을 얻기 위해 사육되었던 까닭에 소고기와 양고기가 일상의 식탁에 오르는 일은 그 자체로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돼지는 순전히 식용을 위해서 사육된 동물이다. 그런 점에서 일부 상류 계층의 고기 수요는 주로 돼지고기였을 것이다. 호사스런 나라에 이르면 사냥술도 이제 더 이상 양이나 가축을 짐승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기술만이 아니라 식탐을 충족시키기 위한 기술로도 활용된다.

* 미술가와 조각가 그리고 시인들을 모두 모방가μιμητής로 부르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의 예술의 목표가 다름 아닌 자연에 대한 직접적이고도 사실적인 모사와 모방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사실주의 회화들조차 단순 모사 즉 복제가 아닌 작자 자신의 정신이 창조적으로 반영된 모종의 개념적 추상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여기서 소개되는 자연에 대한 회화적 모사는 저자의 창조적 관점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결핍을 안고 있는 그럴듯한 복제물에 불과한 것으로 폄하되고 있다. 플라톤에게 예술가의 모방은 최소한 인식의 측면에서 보면 본질적으로 진상과 거리가 먼 가상을 추구하는 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 시가(詩歌μουσική, mousikē)는 오늘날 music의 어원이 되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그 말을 음악을 의미하는 말로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349d 강해에서도 언급했듯이 그 말 자체가 원래 음악, 예술, 학문의 여신인 뮤즈μουσαι에서 나왔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가는 이른바 <일리아스>나 <호메로스> 등과 같은 문학적 시가를 비롯해서 그에 수반하여 이루어지는 음악과 연극, 춤 등 일체의 예술 분야 전반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특히 <일리아스>나 <호메로스> 같은 시가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사고와 생활방식의 지침을 제시하는 경전에 준하는 이야기이자 노래였던 까닭에 mousikē에 능하다는 것은 예술 능력은 물론 품위 있는 시민으로서의 교양과 식견을 두루 갖추었음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mousikē는 ‘학예’라는 말로도 번역되고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뜻하는 μουσικός(mousikos) 또한 단순히 음악 관련 전문가만이 아니라 예술인과 지식인의 뜻까지 모두 포함하고 있다.

* 플라톤이 통치자를 언급하며 가장 많이 비유적으로 인용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의사이다. 통치자는 나라의 질병을 치료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기본적으로 신체적 질병이 문제여서 말 그대로 의사가 필요하다.

 

2-7. 전쟁의 기원과 수호자 계층의 발생(373d-374d)

 

[373d]

* 소크라테스는 건강한 나라가 어떻게 호사스런 나라로 변화하는지를 자세하게 이상과 같이 살펴본 후에 이제 이러한 나라에서 왜 전쟁πόλεμος이 일어나게 되는지를 설명한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나라에서는 식량 수요가 크게 늘어나 결국에는 식량을 생산할 영토χώρα가 모자라게 되고, 그에 따라 사람들은 목축하고 경작하기에 넉넉한 땅을 가지려들 것이라고 말한다. 그 경우 이러한 땅을 가지는 방법은 영토를 확장하는 방법 밖에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웃나라 사람들의 땅을 일부분 떼어내야ἀποτμητέον 할 것이고, 이웃나라 사람들 역시 그들대로 ‘필요 불가결한 것들의 한도τὸν τῶν ἀναγκαίων ὅρον를 벗어나 ’재화(돈)의 끝없는 소유에’ἐπὶ χρημάτων κτῆσιν ἄπειρον 자신들을 내맡겨 버릴 때는 우리 땅을 떼어 가져야만 한다. 이런 연유로 전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소크라테스가 발견한 전쟁의 기원πολέμου γένεσιν이다.

 

[373e]

*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이와 같이 전쟁의 원인을 이야기하면서 전쟁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지εἰ ἀγαθὸν ἐργάζεται 나쁜κακὸν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아직은 아무 말도 하지 말고μηδέν γέ πω λέγωμεν 다만 최소한 전쟁의 기원πολέμου γένεσιν 만큼은 발견했다고 말하기로 하자고 언급한 후, ‘나라에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ἰδίᾳ καὶ δημοσίᾳ 나쁜 일들이 생기는 ‘단서는 무엇보다도 그런 것들이다’ἐξ ὧν μάλιστα ταῖς πόλεσιν καὶ ἰδίᾳ καὶ δημοσίᾳ κακὰ γίγνεται, ὅταν γίγνηται라고 단언한다. 이에 글라우콘은 틀림없는 말씀이라고 동의를 표한다.

 

[374a]

* 이런 이유로 소크라테스는 이제 이 나라에는 소규모가 아니고οὔ τι σμικρῷ 나라의 모든 재산과 영토를 지키기 위해 침략자들에τοῖς ἐπιοῦσιν 대항해서 싸울 전체 군대만큼의ὅλῳ στρατοπέδῳ 확대가 요구된다고 말한다. 이에 글라우콘은 그들로써 충분한지 못한지οὐχ ἱκανοί를 묻는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이미 앞서 의견의 일치를 보았듯이 ‘한 사람이 여러 기술 분야에 훌륭하게 종사하기는 불가능하다’ἀδύνατον ἕνα πολλὰς καλῶς ἐργάζεσθαι τέχνας.고 말한 후, 전쟁과 관련한 겨룸ἀγωνία 또한 하나의 전문 기술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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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내용(373d-374a)과 관련하여 몇 가지 음미해볼 것이 있다..

1) 호사스런 나라의 규모와 수가 크게 확대되면서 불가피하게 생겨나는 욕구는 식량 부족으로 인한 영토 확장욕과 필수적인 것 이상에 대한 욕구 증대로 인한 재화의 소유욕이다. 물론 텍스트는 목축과 경작을 위한 영토 확장욕은 이 호사스런 나라 사람들의 욕망으로 기술하고 재화에 따른 소유욕은 다른 나라 사람들의 욕망으로 기술하고 있지만 어쨌거나 그러한 욕망들 모두가 전쟁의 원인들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즉 전쟁의 원인은 목축과 경작을 위한 보다 넓은 땅과 호사스런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재화 즉 땅에 대한 욕망과 돈에 대한 욕망이다. 373e에서 ‘나쁜 일들이 생기게 되는 단서는 그런 것들’이라는 말에서 ‘그런 것들’이 가리키는 것도 바로 그것들이다. 그리고 전쟁을 일으킬 정도로 돈의 소유욕에 자신을 내맡기게 되는 경우를 소크라테스는 호사스런 나라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의 하나로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나라가 호사스런 단계에 들어서면 사람들의 욕망이 모두 화폐가치로 환원될 정도로 질적인 차이가 무화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소비와 사치가 미덕으로 추앙되는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적성과 소질에 따른 다양한 욕망은커녕 모든 욕망들이 화폐가치로 환원되어 서열화 되고 말았다. 불행하게도 오늘날의 다양성은 다만 그러한 서열의 상승을 위한 수단의 다양성에 불과한 것으로 질적으로는 이미 획일화된 것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서 전쟁의 원인으로 재화에 대한 욕망이 제시되고 그에 따라 수호자 계층이 등장하고 종국에는 철인정치가 내세워진 것도 근본적으로 재화에 대한 탐욕이 초래하는 그러한 파행적 종말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것이다.

2) 박종현 역본은 이 부분을 앞서 인용하였듯이 ‘나라에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ἰδίᾳ καὶ δημοσίᾳ 나쁜 일들이 생기는 ‘단서는 무엇보다도 그런 것들이다’ἐξ ὧν μάλιστα ταῖς πόλεσιν καὶ ἰδίᾳ καὶ δημοσίᾳ κακὰ γίγνεται, ὅταν γίγνηται로 옮기고 있다. 이 번역에서는 ‘그런 것들’이 나쁜 일들이 생기게 하는 단서로만 풀이되어 있고 그 나쁜 일들에 전쟁이 포함되는지 여부를 열어 놓고 있다. 이는 아마 ‘그런 것들’이 가리키는 것을 ‘전쟁과 그와 같은 부류의 일들’(war and the like)로 해석하는 일부 주석가(Schneider, Stallbaum)들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가> 연구가들은 위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고 ‘그러한 것들’을 바로 앞의 문장에 나오는 전쟁의 기원πολέμου γένεσιν과 연결시킨다. 그러한 한, ‘그런 것들’은 영토와 재화에 대한 욕망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그 문장을 앞에 나오는 문장과 연결시켜 다시 옮기면 아래와 같다. ‘나라에 있어서 개인적으로나 또는 공적으로나 정작 나쁜 일이 생길 경우에 이 나쁜 일들이 생기게 되는 단서는 무엇보다도 그러한 것들인데 전쟁 또한 그러한 것들로부터 생기는 것일세.’

3) 이 부분에서 소크라테스가 ‘전쟁이 나쁜 결과를τι κακὸν 가져오는지 좋은 결과를ἀγαθὸν 가져오는지는 아직은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하자μηδέν γέ πω λέγωμεν’는 말은 궁금증을 자아낸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하자’는 언급은 나중에 말을 할 것이라는 기대를 불러일으키는데 기대와 달리 <국가> 어디에서도 이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 말의 의미를 그냥 전쟁에서 이기면 좋은 결과를 가져오고 패하면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상투적이고 피상적이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는 최초의 나라가 호사스런 나라가 되고 그 나라 사람들의 욕구 증대는 결국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전쟁이라는 불가피한 현실 경험을 통해 결과적으로 수호자 계층을 비롯해서 철학과 문명이 출현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전쟁은 나쁘기도 하지만 선을 결과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Adam 주석 참고)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어처구니가 없다. 부정의 때문에 철학 통치자가 출현하게 되었다고 부정의를 좋은 것으로 평가할 수는 없는 일이다.

4) 필자 생각으로는 그 말은 평생 동안 플라톤 자신이 경험하고 목도한 아테네 전쟁들에 대한 평가, 무엇보다도 페리클레스가 제국주의를 내세운 이후 아테네가 수행한 수많은 전쟁들에 대한 평가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테네는 페리클레스가 벌인 패권주의적 전쟁 덕분에 사회 경제적 성장은 물론 문학과 철학 예술 분야에서 다른 폴리스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문화적 풍요를 누렸다. 그러나 그러한 성취는 같은 민족인 이웃 나라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와 착취의 기반으로서 이후 스파르타 등 이웃 나라의 반발을 초래하여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야기되면서 종국에는 아테네를 멸망으로 이끄는 단초가 되기도 하였다. 플라톤이 <국가>를 저술한 시기로 추정되는 기원전 385년 전후 역시 아테네의 번영은커녕 재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아테네의 국력이 크게 쇠잔해진 시기였다. 평생 동안 아테네의 이와 같은 흥망성쇠를 지켜보면서 플라톤은, 페리클레스와 그 후계자들이 벌인 패권주의적 전쟁이 비록 사회 경제적, 문화적 풍요는 가져다주었기는 하지만 결국은 아테네를 멸망에 이끈 결정적 원인이 되었음을 뼈저리게 통감했을 것이다. 실제로 플라톤은 <메넥세노스>를 비롯한 여러 대화편에서 틈틈이 페리클레스의 패권주의와 침략 전쟁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곳에서의 플라톤의 언급은 아테네 사람이라면 누구나 추켜세울 법한 기원전 5세기 그 영광스러운 시절에 대한 비판적 반성을 담고 있는 것이라 판단된다.

5) 플라톤은 호사스런 나라 사람들의 욕구의 증대가 결국은 이웃 나라 사람들의 땅을 떼어내려는 전쟁, 즉 침략 전쟁의 배경이 된다고 말을 하면서도 흥미롭게도 정작 그 때문에 새롭게 생기는 군대를 침략자가 아니라 반대로 침략자들에 대항해서 싸우는 수호자 즉 방어를 위한 군대로 묘사하고 있다. 호사스런 나라가 땅을 떼어내기 위해 벌이는 침략 전쟁은 생략되어 있다. 이것은 전후 맥락상 어색한 일이다. 왜냐하면 드러난 문맥만 보면 호사스런 나라는 욕구가 증대해도 어떤 영토도 침략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나라로부터 침략을 당하는 형국으로 읽혀질 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맥을 플라톤의 관점에서 다시 들여다보면 플라톤의 속내를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호사스러운 나라에 이르면 그 증대된 욕구로 말미암아 전쟁에 대한 욕구가 생기는 게 불가피하다. 그러나 설사 그럴 지경에 직면했을지라도 플라톤은 어떻게든 이웃 나라를 침략하는 전쟁을 통해 그 욕구를 해결해서는 안 되며, 다만 전쟁을 해야 한다면 이웃 나라가 침략할 경우 방어를 위한 전쟁에 한해 허락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플라톤을 편들어 이 문맥에서 그러한 함축을 찾아낸다고 하더라도 그럴 경우 호사스런 나라에서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는 침략 전쟁에 대한 욕구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의 문제가 플라톤에게 남는다. 물론 여기서 그에 관한 플라톤의 언급은 없다. 그러나 전후 문맥들을 종합적으로 살펴가며 생각을 기울이면 우리는 플라톤이 호사스런 나라의 등장을 불가피한 현실로 인정하고 전쟁 욕구도 상존하고 있음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 해결책을 전쟁에서 찾기 보다는 정의로운 나라의 구축을 통해 호사스런 나라 사람들의 욕망들과 직능들을 합리적으로 조절하고 관리하는 방식으로 그 출구를 모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사실 호사스런 나라가 직면하는 문제들이 비록 전쟁 욕구를 촉발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전쟁을 통해서만 해결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을 해결하는 데에는 그들 내부의 욕망들을 규모와 수, 종류와 형태의 측면에서 서로 조율하고 조화시키는 이른바 정치적인 해결 방식도 있는 것이다. 플라톤이 수호자 계층의 등장을 설명하기 위해 최초의 나라에 이어 호사스런 나라를 등장시키고 전쟁에 대한 욕구와 그에 대처하는 군대의 필요까지 끌어들이고 있기는 하지만, 그는 이미 나라를 수호하는 일에 단지 전쟁관련 전문가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 관련 전문가도 필요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여기서 수호자 계층의 등장이 이루어진 후 나중에 가면 수호를 위한 최고의 직능으로서 정치를 담당할 통치자 계층의 등장이 이루어지고 있다. 요컨대 이들 통치자가 나라를 정의롭게 다스리는 한, 최소한 침략 전쟁은 없으며 전쟁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나라를 수호하는 방어 전쟁만 있을 뿐이다.

6) 그리고 욕구의 증대가 초래하는 과정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설명에는 뭔가가 생략되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사실 호사스런 나라에서의 욕구의 증대가 이웃 나라와의 전쟁의 원인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그가 구상한 논의 전체 틀에서 수호자 계층의 등장을 설명하기 위한 사전 포석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럼에도 호사스런 나라에서의 욕구의 증대가 곧바로 이웃 나라에 대한 전쟁으로 이어진다는 설명에는 과정상 뭔가 간과되어 있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왜냐하면 호사스런 나라에서의 욕구가 372e-a에서 보듯이 어떤 일부 사람들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라면 이웃 나라에 대한 침략 이전에 내부 사람들 사이의 갈등도 분명 있을 것이고 그것이 심해지면 이른바 내전도 일어날 수 있을 텐데 그런 내부의 갈등이나 내란에 대한 언급은 나타나 있지 않다. 굳이 그것이 생략된 이유를 찾아본다면 내란이나 내분, 분쟁 등으로 번역되는 stasis라는 말 자체가 이른바 전쟁을 의미하는 polemos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지금 전쟁의 발생 배경을 언급하는 단계에서 그것까지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부 갈등이나 다툼도 호사스런 나라가 필연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인 한, 호사스런 나라에는 전쟁에 대한 욕구뿐만이 아니라 그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통치에 대한 욕구도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실제로 <국가> 전체를 보면 내분이나 내란의 문제는 플라톤에 의해 현실 국가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의 하나로서 이곳저곳에서 수도 없이 반복해서 거론되고 있다. 사실 역사를 살펴보면 전쟁은 종종 내부의 분열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촉발되기도 한다. 아테네 역시 그랬다. 그런 점에서 호사스런 나라에서의 전쟁에 대한 욕구에는 그러한 이유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아무려나 호사스런 나라에서의 욕구의 증대가 군인만이 아니라 통치자에 대한 요구도 포함하고 있다는 추정은 이후의 플라톤의 논의 전개와 아무런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

7) 최초의 나라가 호사스런 나라로 발전하고 그 나라 사람들의 욕구의 증대가 전쟁을 촉발시킨다는 소크라테스의 발언은 앞서도 살폈듯이 이곳 논의 단계의 전체적인 틀에서 보면 최초의 나라에서의 생산자 계층의 성립 단계에 후속해서 호사스런 나라에서의 수호자 계층의 성립 단계를 설명하기 위해 애초부터 계획된 것임이 분명하다. 즉 작은 글씨인 개인의 영혼들을 나라라는 큰 글씨를 통해 순차적으로 설명하는 과정에서 개인 영혼의 욕구적인 부분에 상응하는 나라에서의 생산자 계층에 대한 설명에 이어, 그 상위 부분인 기개적인 부분에 상응하는 것으로서 나라에서의 수호자 계층에 대한 설명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곳에서 등장하는 수호자 계층에 이어 장차 통치자 계층의 등장과정에 대한 설명도 이루어질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 역시 전체적인 논의 구조상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8) 이곳에서(375e) 군대의 등장을 ‘소규모가 아니라 침략자들에 대항해서 싸울 전체군대만큼의 확대’라는 표현 또한 이곳에서 요구되는 직능의 확대가 단지 전쟁 발발에 따른 특정 전쟁 기술들이 일부 추가되는 수준이 아니라 침략자 전체에 대항할 만한 규모 즉 생산자 계층의 규모에 상응할 만한 새로운 계층의 등장임을 보여준다. 즉 호사스런 나라에서 전쟁의 발발을 배경으로 요구되는 전쟁 관련 기술은 생산자 계층에서의 특정 직능과 동급 수준의 직군이 아니다. 생산자 계층에 농부와 제화공, 벽돌공, 무역상 등이 내부 세부 직군으로 소속되어 있듯이 전쟁 관련 기술 또한 이를테면 각기 다른 기술을 가진 중무장 보병, 기마병, 해병, 노수 등 전투 형태별 기술은 물론 장비별로도 각기 다른 기술을 가진 세부 기술들이 그 내부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다. 즉 ‘전체 군대만큼의 확대’라는 말은 단순히 어떤 특정 직능 수준의 군인이나 군대의 확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침략자와 싸울 전체 기술들과 직군들을 총망라한 모든 군대만큼의 확대 즉 계층 차원에서의 확대임을 나타내기 위해 쓰인 말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소크라테스는 논의의 전체 틀을 염두에 두고 순서에 따라 생산자 계층에 이어 수호자 계층을 등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9) ‘그들로써 충분하지 못한가요?’라는 글라우콘의 물음은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 따로 군대라는 별도의 전문적인 직군이 아니라 일상적 생활인으로서 일반 시민들 모두가 군인으로 나서 싸우면 충분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담고 있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이미 앞에서(370c) 한 사람이 여러 가지 기술 분야에 훌륭하게 종사하기는 불가능하다고 의견 일치를 보았음을 환기시킨다. 사실 이러한 언급은 생산자 계층의 구성에서도 확인되었듯이 플라톤의 분업과 전문가 주의 원칙을 재확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내용은 아니다. 그럼에도 글라우콘의 질문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답변은 플라톤의 이상국가가 스파르타를 이상적인 모델로 삼은 것이라는 플라톤 비판가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주요 근거로 종종 인용된다. 왜냐하면 스파르타야 말로 이곳에서 글라우콘이 언급한 대로 직업적인 군인들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시민들 모두가 군인이고 생산 관련 일은 그러한 군인들이 틈날 때에 종사하던 이른바 전사들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소크라테스는 분명 그러한 나라를 거부하고 있다. 실제로 플라톤은 정의로운 나라에서 생산자 계층과 군인 계층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고 군인 계층조차 전술과 무기 등에 따라 각기 다른 전문적인 직군들로 구분하고 있다.

 

[374b-c]

* 이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전쟁과 관련된 겨룸ἀγωνία 역시 기술적인 것임을 분명히 하고 그러한 ‘전쟁 관련 기술’πολεμικῆ이 제화 기술 등 일반 기술보다 더 신경을 써야하는κήδεσθαι 일임을 밝힌다. 그리고 최초의 나라에서 여러 전문 기술자들에게 각각이 적성에 따라 한 가지 일을 맡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일생을 통해 다른 일들에 대해서는 한가σχολὴ로이 대하고 오직 그 일에만 종사하게 한 것은 각자 자기 일을 적기καῖρος에 훌륭하게καλῶς 수행하기 위한 것임을 재확인 한다. 그런 연후 그는 전쟁에 관한 일이야말로 잘 수행되어야 할 가장 중대한πλεῖστος 일인 만큼 전쟁 관련 기술 역시 철저하게 분업과 전문가 원칙에 따라 수행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전쟁과 전쟁 무기와 관련한 기술들의 경우를 구체적으로 예시한다. 즉 전쟁이 났을 때 사람들이 방패ἀσπίς 등 전쟁 무기πολεμικῶν ὅπλον나 장비들ὀργάνων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고 해서 그날로 중무장 병기 사용술ὁπλιτικός이나 다른 형태의 전투μάχη에서 유능한 전사ἀγωνιστής가 되는 것은 아니며, 어떤 도구든 그 각각에 대한 지식ἐπιστήμη을 지니고 있지 못하고 충분한 연습을τὴν μελέτην ἱκανὴν 하지 않을 경우 아무런 쓸모χρήσιμος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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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룸(경쟁)의 원어 ἀγωνία(agōnia)는 오늘날 번뇌를 뜻하는 영어 agony의 어원이 되는 말이다. 경쟁이 곧 번뇌임은 그제나 오늘날에서나 불변의 진실이 아닐 수 없다.

* 박종현이 옮긴 ‘제화 기술이 전술보다도 더 신경을 써야만 되는 것인가?’라는 역문에서 ‘전술’이라는 말은 ‘전쟁 관련 기술’이란 말로 고치는 것이 좀 더 적합하다고 판단된다. 그 말의 원어 πολεμικῆ(polemikē)는 전쟁 관련 기술 일반을 총칭하는 말로서, 생산자들의 기술이 제화 기술, 농업 기술 등 범주 상 하위 기술들을 포괄하고 있듯이 polemikē 역시 중장비 병기 사용술, 해전술, 기마술 등 범주 상 하위 기술들을 포괄하고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전쟁관련 기술을 총칭하는 그 말을 생산 기술의 어떤 하나인 제화 기술과 동급수준에서 비교할 수 없다. 그런 측면에서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그 말 자체로 전쟁 관련 기술이 나라의 존망과 관련된 기술이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범주 차원에서도 당연히 훨씬 많이 신경을 써야할 계층 차원의 기술임을 의도적으로 담고 있는 말이다. 그리고 ‘전술’이란 역어가 전쟁관련 기술의 하나인 전술(tactic)의 의미로 읽힐 수도 있다는 점에서도 그 말의 원래 뜻과 어울리지 않는다.

* ‘다른 형태의 전투’는 중장비장갑보병 및 기마병 등이 수행하는 육상 전투 형태들 그리고 삼단노선을 이용한 해상전투 형태를 망라해서 표현한 말이다.

* 지식과 연습에 대한 언급은 기술의 탁월성이 선천적인 적성만이 아니라 후천적인 연습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보여준다. 플라톤의 기술은 앎이자 지식이되 단순한 앎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실천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앎이다.

 

[374d]

* 전쟁을 수행하는 기술은 그에 적성이 맞는 사람이 따로 있으며, 게다가 무엇보다도 전쟁에 관한 일이야말로 잘 수행되어야할 가장 중대한πλεῖστος 일인 만큼(374c) 이 나라에는 그러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사람들이 곧 수호자φύλαξ들이다.

*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수호자들의 일들이 나라의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μέγιστον 것인 만큼 다른 일에 대해서는 최대한의 한가로운 태도가 요구되고 그 자체에 대해서는 최대의 기술과 관심을 요한다고 말한다.

 

[374e]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수호자의 업무에도 그에 걸 맞는 적성이 요구되는 만큼 나라의 수호에 어떤 사람들이 그리고 어떠한 성향들이 적합한지를 가려낼 것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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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에서 매우 중대한 개념으로 등장하는 ‘수호자’라는 말이 이곳에서 처음 나온다. 호사스런 나라에서의 욕구의 증대가 전쟁을 촉발하게 되면서 생산자 계층에 이어 마침내 수호자 계층의 등장을 가져다 준 것이다. 이러한 수호자 계층이 수행하는 일ἔργον은 단순히 어떤 특정 기술과 비교될 수 없는 나라의 수호와 관련된 기술 내지 일 전반에 걸쳐 있다. 그러한 한, 수호자의 일은 가장 중요한 일이고 그 만큼 다른 일에 대해 최대한 한가로운 태도와 그 자체로 최대의 기술과 관심이 요구되는 일이다.

* 수호자 계층은 나중에 드러나게 되겠지만 직접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들(전사들)stratiōtai과 통치자들archontes이 될 사람들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우리가 플라톤의 국가 구성을 거론하면서 흔히들 이야기하는 통치자 계층은 이 수호자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 중에서 따로 선발된 사람들이고 전사 계층은 그 나머지 사람들이다. 실제로 <국가> 제3권 414b, 제4권 428b에 가면 수호자 계층이 두 부류로 나누어져 각기 다른 이름들로 불리어진다. 통치자들로 선발된 사람들은 ‘완벽한 수호자들’(phylakes panteleis), ‘완전한 수호자들teleoi phlakes’, ‘참된 수호자들alēthino phylakes’로 불리어지고 나머지 사람들 즉 전사들은 ‘보조자들’epikouroi 또는 ‘협력자들’boēthoi로 불린다. 요컨대 정의로운 나라는 통치자 계층과 전사 계층, 생산자 계층으로 구성되고 이른바 수호자 계층이란 그곳에서 통치자 계층과 전사 계층을 합쳐서 일컫는 말이다.

* 이후에는 수호자들의 성향 내지 적성들에 대한 논의가 이어진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제2권 처음부터 여기(374e)까지를 <국가>를 구성하는 큰 단락들 가운데 하나로 구획 짓고 있다. 그러나 또 어떤 연구자들은 앞서 생산자 계층의 사람들을 거론하면서 그들의 적성과 성향을 같이 언급했듯이 다음에 이루어지는 수호자들의 성향에 관한 논의까지(376c)를 하나의 큰 단락으로 묶고 이후의 내용부터 수호자의 교육을 다루는 새로운 단락으로 구획 짓기도 한다.

* 우리의 강해는 제2권 강해 서두 목차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전자의 구분에 따르고 있다. 그래서 실제 학당 강의는 이후의 내용까지 일부 다루었지만 위의 단락 구분을 고려하여 이번 웹진 강해록은 여기서 마무리하기로 한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㉚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2-4. 무역상, 소매상, 임금 노동자 등 서비스업과 화폐의 발생(371a-371e)

 

* 앞서 문자의 비유가 보여주듯 최초의 나라가 유기체적 성격을 갖는 것임을 고려하면 최초의 나라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자기 성향에 있어서 서로가 다르게 태어나서 저마다 다른 일을 한다’(370b)는 플라톤의 언급은 매우 자연스런 귀결이다. 그것은 적성에 따른 분업을 정당화하는 중대한 전제로서 장차 정의로운 나라의 속성을 규정하는 핵심 토대가 된다. 플라톤에게 인간은 소피스트들의 생각과 달리 결코 이기심을 본성으로 갖고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혼자서는 살 수 없고 그에 따라 서로 필요에 따라 의존하고 협동하지 않으면 안 될 사회적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적성 또한 서로 다르게 가지고 태어나 기꺼이 서로의 필요에 부응하는 자질 또한 갖추고 있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라는 소피스트들의 생각은 단지 당대 아테네가 패권주의를 지향한 이래 상업화되고 개인주의화되면서 마치 이기심이 자연적 본성인 양 왜곡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정의로운 국가는 근본으로 되돌아가 협동적 존재로서 인간의 사회적 본성을 토대로 새롭게 다시 구축되지 않으면 안 된다.

 

[371a-b]

* 상대국과의 거래 즉 수입εἰσάγειν 및 수출ἐξάγειν이 요구되는 한, 나라는 상대국 사람들에게 필요한 종류의 것들도 필요한 만큼 생산해야 한다. 이에 따라 더 많은 농부들과 장인들이 필요하다. 게다가 각 종류의 물건들의 수입과 수출을 도와 줄 심부름꾼διάκονος 즉 무역상ἔμπορος도 필요하고 해상 운송에 정통한 사람τῶν ἐπιστημόνων τῆς περὶ τὴν θάλατταν도 필요하다. 그리고 서로의 필요 때문에 협력 관계κοινωνία를 맺고 나라를 수립했으므로 나라 안에서도 물건들을 서로 팔고 사는 일이 필요하여 시장과 교환을 위한 표σύμβολον로서 화폐νόμισμα가 생겨난다.

 

[371c-e]

* 그리하여 시장ἀγορά에서 생산물의 유통을 위해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생산물을 교환해줄 심부름꾼으로서 소매상πρᾶσιν διακονοῦντας이 나타나고 짐 운반 등 체력의 사용을 파는 사람들οἳ δὴ πωλοῦντες τὴν τῆς ἰσχύος χρείαν 즉 체력 사용의 대가로서 임금μισθός을 받는 임금노동자(고용인)μισθωτοί도 생겨난다. 소크라테스는 소매상을 ‘제대로 다스려지는 나라들의 경우 대개 신체적으로 가장 허약하고 그 밖의 다른 일을 하는 데에는 무용한 사람들’πόλεσι σχεδόν τι οἱ ἀσθενέστατοι τὰ σώματα καὶ ἀχρεῖοί τι ἄλλο ἔργον πράττειν로 묘사하고 있고(371c) 임금노동자는 ‘지적인 일에서 동반자 관계에 그다지 어울리지는 않는’τὰ μὲν τῆς διανοίας μὴ πάνυ ἀξιοκοινώνητοι ὦσιν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371e)

* 소크라테스는 이처럼 농부와 건축공, 직물공, 제화공, 목부 그리고 무역상과 소매상, 임금노동자를 최초 국가의 정원(구성원)πλήρωμα πόλεώς 즉 최소한도의 필요에 따른 국가로 언급하고 그 최소한도의 필요를 충족하는 만큼 ‘완전 하리 만치 성장한 나라’ἡ πόλις, ὥστ᾽ εἶναι τελέα라고 말한다.(371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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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무역상ἔμπορος은 수출입을 전문으로 하는 상인이고, ‘해상 운송에 정통한 사람’은 선박으로 사람과 화물을 운반하는 해운업자ναύκληρος이다.

* 보통 화폐νόμισμα가 가지고 있는 기능으로 가치의 교환, 가치의 척도, 가치의 저장 기능을 든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플라톤의 언급은 화폐가 처음에 교환을 위한 물표로 생겨났음을 보여준다. 이후 화폐는 우리가 주지하다시피 언제라도 필요한 물건과 바꿀 수 있는 가격 즉 가치의 저장 기능을 갖게 되었고 시장에서도 거래를 전문으로 하는 상점과 상인이 생겨났고 그에 따라 화폐는 거래 물건들의 경제적 가치를 표시하는 척도가 되었다. 특히 화폐가 가치의 저장 기능을 갖게 된 이후 화폐는 교환 수단을 넘어서 장차 높은 가격으로 되팔기 위한 매점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화폐 자체가 이윤을 창출하는 상품이 되면서 화폐의 소유욕의 증대에 비례하여 차입의 욕구 또한 증대되었다. 이에 따라 이른바 돈으로 돈을 버는 직종 즉 사용가치가 아닌 교환가치의 유통과 판매를 통해 부를 축적하는 금융업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화폐의 발생을 통해 사용가치를 갖는 구체적 물건들이 화폐로 추상화되고 가격으로 일원화되면서 사용가치에 대한 교환가치의 우위가 초래된 것이다. 게다가 금융의 발달에 따른 사용가치에 대한 교환가치의 절대적 우위는 생산자 계층에 대한 관리 계층의 우위는 물론 인간의 욕망을 부에 대한 욕망으로 일원화함으로써 금전만능주의를 탄생시켰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말대로 인간이 자신을 위해 만든 수단에 거꾸로 종속되는 이른바 소외(Entfremdung)가 발생한 것이다.

* 아테네 당대에만 해도 이미 은행이 존재했고 개인들 간의 금용 거래는 물론 고리채 또한 성행했다. 플라톤은 이미 그 점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플라톤이 여기서 화폐의 기능을 교환 기능으로 한정하여 언급하고 있는 이유가 단지 일반론 차원에서 최초국가 단계에서의 화폐의 기원을 언급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화폐의 사적 소유욕의 증대와 고리채 등 금융을 통한 부의 축적이 일상화된 당대 아테네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 때문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플라톤의 정의로운 국가에서는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배 계층에 속한 사람들에게 아테네 당대의 상황과는 전혀 다르게 극단적이라 할 정도로 재물의 사적 소유가 금지되고 있다. 재물의 소유와 축적은 오직 생산자계층에게만 허용되고 있고 통치자 계층에게는 최소 필수품 이외의 어떠한 소유도 허락되지 않는다. 권력과 부를 함께 갖는 것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다. 권력은 순수하게 시민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자신의 덕이자 행복으로 여기는 자의 몫이다.

* 플라톤이 소매상을 ‘가장 허약하고 그 밖의 다른 일을 하는데 무용한 사람들’로 묘사하고 있다고 해서 플라톤이 소매상이나 허약한 사람을 폄하하고 있다고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이곳에서는 최초국가에서 소매상도 나라 안에서 서로를 위해 필요한 사람이고 그 또한 그 일을 맡기에 가장 적절한 사람이 수행해야 한다면 그 일은 태생적으로건 후천적으로건 신체가 약한 사람들이 맞기에 적합하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무용하기로 말하면 철학자들 역시 농사나 소매상 등 생산이나 유통 관련 일에서는 무용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플라톤이 소매상을 ‘그 일을 눈여겨보고 스스로 떠맡는 사람εἰσὶν οἳ τοῦτο ὁρῶντες ἑαυτοὺς ἐπὶ τὴν διακονίαν τάττουσιν ταύτην(371c)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도 소매상이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부여된 일이 아니라 필요와 적성에 근거하여 자발적으로 선택된 것임을 뒷받침해준다. 체력의 사용을 파고 사는 사람들 즉 임금 노동자들에 대한 묘사 또한 소매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적성과 소질에 따라 그 일을 스스로 떠맡는 사람들이며 그들 또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최소한도의 필요에 따라 최초의 나라의 정원에 속한 사람들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소매상과 임금 노동자에 대한 플라톤의 언급은 그들에 대한 폄하를 포함하고 있다기보다는 신체적 능력과 지적 능력의 차이가 현실적으로 현존하고 그러한 사정이나 여건이 달리 변화할 가능성이 거의 힘들다면, 그들의 사정과 적성에 따라 그들에게도 서로가 필요한 사회적 역할이 주어질 수 있고 주어져야 함을 언급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여기에 나오는 임금 노동자들이 노예가 아니라는 점이다. 자신의 노동의 대가를 전혀 받지 못한 채 예속되어 강제로 노동하는 노예와 달리 최소한 이들은 그 일을 강제가 아닌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그 일에 대한 대가도 받고 있다. 실제로 완전하리만치 성장한 이곳 최초의 국가의 정원에는 노예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것에 근거해서 플라톤이 그리는 정의로운 국가에 아예 노예 자체가 없다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비록 노예가 맡은 일의 대부분이 체력을 쓰는 일이지만 시민 가운데에도 체력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의 임금 노동자가 바로 그 시민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게다가 고대 사회에서는 노예를 사람이 아닌 마소로 여겼고 플라톤 역시 당대의 시대적 한계를 넘어서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면 노예의 존재는 이미 정의로운 국가에서도 당연한 존재로 전제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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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이 언급하고 있는 최초 나라의 정원(구성원)πλήρωμα πόλεώς을 보면 결국 최소한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나라는 농부, 직물공, 건축공, 목부 외에 무역상과 해운업자 그리고 소매상과 임금 노동자로 구성된 나라이다. 이들 모두는 직접 생산과 유통을 도와주는 이른바 물적 기반을 마련해주는 심부름꾼들로서 장차 플라톤이 그리고 있는 정의로운 나라를 기준으로 보면 크게 생산자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흥미롭게도 아직 정치가나 지식인, 철학자가 없는 이와 같은 최초 국가를 ‘완전하리 만치 성장한 나라’로 묘사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 이쯤에서 우리는 아테이만토스 형제가 소크라테스에게 요구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그 요구에 대한 답변을 시작하면서 문자의 비유를 통해 이야기를 나라에 관한 이야기로 확대시키고 있는 배경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아테이만토스 형제의 요구는 한 마디로 ‘정의와 부정의 각각이 개인과 나라 안에서 어떤 힘(dynamis)으로 작용하기에 정의가 부정의보다 강하고 낫다는 것인지’를 설명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말하는 어떤 힘이란 개인의 경우 영혼들의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이라는 것이 이미 언급된 바 있다.(358b) 사실 그것은 장차 개인의 정의를 설명하는 키워드로서 영혼 3분설에 따른 영혼의 이성적인 부분, 기개적인 부분, 욕구적인 부분임을 예고하는 것이자 소크라테스가 답변을 시작하면서 다룰 대상이 다름 아닌 개인의 영혼임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다. 그리고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개인을 살피는 것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는 개인을 살피되 그것을 보다 잘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같은 성격을 갖는 나라를 들여다보고 그 다음에 다시 개인을 살피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한다. 물론 이러한 제안은 장차 개인과 나라를 유기적이고 통일적인 관점에서 살피려는 플라톤의 주도면밀한 의도를 반영하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어쨌거나 일단 이 제안이 개인의 영혼들을 보다 더 잘 들여다보기 위한 방편으로 끌어들여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나라에 대한 고찰이 내용적으로 개인의 영혼들에 대응해서 제시될 것이라 예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개인 영혼의 세 부분은 나중에 드러나듯이 나라의 세 계층 즉 통치자 계층, 전사 계층, 생산자 계층과 그대로 대응된다. 이와 같은 논의 구도상의 전후 맥락을 염두에 두고 최초국가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을 살필 경우, 결국 소크라테스가 그 최초의 국가를 생산자들로 구성된 나라로 구성하고 그것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하고 있는 것은 이 최초의 나라가 결국 플라톤의 정의로운 나라를 구성하는 생산자 계층의 성립을 보여주기 위한 포석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실제로 최초 국가에 이어 사치스런 나라가 소개되고 그 사치스런 나라에서 수호자 계층이 나오고 장차 그곳에서 다시 통치자 계층이 등장하게 되는 것도 그것을 뒷받침해준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최초의 나라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나라의 기원과 관련한 역사적 사실에 관한 언급이라기보다는 애초부터 정의로운 나라의 세 계층이라는 전체 구도를 염두에 두고 그 가운데 우선 생산자 계층의 성립과정부터 설명하기 위한 일종의 기획된 언급으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해 보인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최초의 나라가 장차 사치스런 나라로 계속 변화 발전함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가 이 최초의 나라를 ‘완전하리만치 성장한 나라’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은 전체 논의 구도에서 우선 일차적으로 생산자 계층에 관한 논의가 마무리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요컨대 플라톤은 최초국가에 대한 기술을 통해 부정의가 생기기 직전 단계까지 즉 필요에 있어서 최소한도의 수준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장차 드러날 정의로운 국가를 구성하는 3계층 가운데 물적 기반의 토대를 이루는 생산자 계층의 성립 단계를 우선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371e]

* 이러한 나라를 수립한 후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이 나라 안 어디에 정의와 부정의가 있으며,ποῦ οὖν ἄν ποτε ἐν αὐτῇ εἴη ἥ τε δικαιοσύνη καὶ ἡ ἀδικία; 그 각각은 우리가 이제껏 검토해온 것들(주민들 또는 기능들)중 어느 것과 더불어 생겨났을까”καὶ τίνι ἅμα ἐγγενομένη ὧν ἐσκέμμεθα;를 묻는다. 그에 대해 아데이만토스는 “사람들 상호간의 어떤 필요” χρείᾳ τινὶ τῇ πρὸς ἀλλήλους에 의해서 그 각각이 생겼다고 답을 한다. 즉 위의 나라는 사람들 상호간의 필수적인 필요χρείᾳ에 입각하여 수립된 나라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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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 최초의 나라는 앞서 우리가 살핀 전체 논의 구도상 첫 단계의 완결일 뿐 종결은 아니다. 실제로 최초의 나라는 그 상태 그대로를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고 변화를 맞이한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유기체의 경우, 순진무구하게 생존의 욕구만 충족되면 불만이나 고민도 없는 어린이 상태로 계속 있을 수 없고 점차 신체적으로 성장하고 욕구 또한 다양화되고 증대되면서 어른으로 자라나게 될 수밖에 없는 이치와도 같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 소크라테스가 완전하리만큼 성장한 최초의 나라를 언급한 후에 느닷없이 글라우콘에게 이 나라 안에서 정의와 부정의가 어디에 있고 무엇 때문에 정의와 부정의가 생기는 지를 묻고 그 원인이 ‘필요’chreia임을 재차 확인하고 있는 장면은 나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최초의 나라는 완결되었지만 최초의 나라를 성립시켰던 필요는 완결을 넘어 계속 나라의 변화를 낳는 근본 원인임이 다시 한 번 강조되고 재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즉 이들의 대화는 최초의 나라는 일단 마무리되었지만 그 다음의 단계 즉 정의와 함께 부정의가 발생하는 단계가 계속 이어질 것이며 그 원인은 하나같이 ‘필요’ 때문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2-5. 건강한 나라, 참된 나라 그리고 돼지들의 나라(372a-372d)

 

[372a]

* 소크라테스는 최초의 나라가 완전하게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을 마무리하면서 필요의 확대에 따라 등장하게 될 나라를 다루기 전에, 최소한도의 필요를 충족시키면서 성립한 최초 나라의 모습 즉 서로에게 필요를 제공할 준비가 된 최초의 나라의 사람들οἱ οὕτω παρεσκευασμένοι이 어떤 방식으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지를 먼저 고찰한다.πρῶτον οὖν σκεψώμεθα τίνα τρόπον διαιτήσονται.

 

[372b-c]

* 소크라테스는 이 나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아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 묘사를 요약하면 이와 같다. “그들 모두 좋은 자리에 누워 충분하게 먹고 마시면서 신들을 찬송하며ὑμνοῦντες τοὺς θεούς 서로들 즐겁게 교제하고ἡδέως συνόντες ἀλλήλοις, 가난이나 전쟁πενίαν ἢ πόλεμον을 ‘유념하여’εὐλαβούμενοι. 재력 이상으로ὑπὲρ τὴν οὐσίαν 자식을 낳지도 않으면서 건강과 함께 평화로움 속에서ἐν εἰρήνῃ μετὰ ὑγιείας 일생을 보내다가 아마도 늙은이로서 고령에 죽으면서 그와 같은 또 다른 인생을 후손에게 물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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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묘사되고 있는 먹거리들 즉 주식인 보리 가루ἄλφιτον와 밀가루ἄλευρον[372b] 그리고 부식(요리ὄψον)으로서 소금ἅλας과 올리브ἐλαία, 치즈τυρός, 삶은 구근βολβός과 채소λάχανον 요리, 그리고 후식τράγημα으로서 무화과σῦκον와 콩류ἐρέβινθος(완두콩) καὶ κύαμος(콩), 포도주οἶνος, 도금양μύρτη(방향성의 상록 관목, 아프로디테의 신목)의 열매μύρτον나 도토리φηγός 등(372c)은 당시 그리스의 일반 가정의 식생활을 짐작하게 한다. 주목할 점은 그리스가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이고 그에 따라 실제로 그리스인들 모두 반도에 정착한 이래 문어와 조개류 등 많은 어류들을 섭취했음에도. 플라톤이 서술하고 있는 식품에는 육류는 물론 어떠한 어류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사실 제1권 강해에서도 언급했듯이(338c 강해 참고) 그리스인들은 육류는 즐겨 먹지 않았다. 그러나 호사스런 나라에서는 육류의 수요가 생겨난다.(373c 참고)

* ‘요리’의 원어 ὄψον(opson)은 기본적으로 익힌 주식에 곁들여 먹는 부식을 뜻하지만 익힌 음식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어 어떤 사람은 이것을 좁은 의미에서 육류와 어류 음식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래서 이들은 글라우콘이 앞에서 ‘요리도 없이 잔칫상을 받게 한 것 같다’고 말한 것은 플라톤이 언급한 음식들에서 육류나 어류 등 고급 먹거리가 빠져 있는 것을 지적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그러한 지적을 듣고 이어지는 설명이 그에 대한 보완 설명이라고 본다면 글라우콘이 빠졌다고 지적한 것은 그 내용으로 보아 육류나 어류가 아니라 뒤에 이어지는 부식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보인다.

* 이곳에서의 플라톤의 세부 묘사들은 당시 그리스인들의 최소한 의식주에 있어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만족스러운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줌과 동시에 비록 그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는 없지만 플라톤이 생각하고 있는 자연적 정의 즉 정의의 원초적 상태가 무엇인지를 함께 보여준다. 그들이 유일하게 조심하는εὐλαβούμενοι 것은 가난이나 전쟁이지만 그것조차 말 그대로 ‘조심’ 또는 ‘유념’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것은 마치 기독교가 말하는 인간의 타락이전의 삶 즉 에덴동산의 삶을 연상시키기까지 한다. 요컨대 그 요체는 건강과 평화이다. 건강은 말 그대로 신체적인 강건함이요 평화는 나라 사이에서건 개인 사이에서건 그리고 개인의 내면에서건 갈등과 분열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사실 최초 국가의 사람들처럼 최소한도의 필요만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의 경우, 인생을 살아가며 목표하는 것으로서 이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소크라테스가 바로 이어 이런 나라를 일컬어 ‘건강한 나라’라고 묘사하는 것은 일종의 유기체로서 이 나라가 갖고 있는 신체적 건강 때문일 것이고 나아가 ‘참된 나라’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 또한 이 나라가 보전하고 있는 자연적 정의 즉 분열과 갈등이 없는 평화의 상태 때문일 지도 모른다.

 

[372d]

* 그러나 글라우콘은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에 대해 그렇게 수립된 나라는 “돼지들의 나라ὑῶν πόλις”라고 폄하한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최초 나라 사람들의 생활은 주로 먹고 사는 일인데 그것은 돼지들의 삶과 다를 바가 없으며 소크라테스가 그런 식으로 돼지의 나라를 수립하려했다면 과연 그런 것들만으로 돼지들을 살찌울 수 있겠느냐 그 밖에 다른 것들도 주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반문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되는가를 되묻고 글라우콘은 ‘흔히 하는 대로ἅπερ νομίζεται 그들이 불편을 감수할 사람들τοὺς μέλλοντας μὴ ταλαιπωρεῖσθαι이 아닌 한, 그들은 땅바닥 돗자리 위가 아닌 침상에 누워 식탁에 차려진 식사도 하고 요즘 사람들이 먹는 요리와 후식 즉 좀 더 고급스런 음식을 먹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의 반문을 호사스런 나라가 어떻게 성립되는가 하는 것도 고찰해보자라는 요구로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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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가 앞에서 글라우콘에게 나라에서 정의와 부정의가 생기는 원인을 묻고 그 답이 ‘필요’chreia라는 것을 확인하는 장면(372a)과 이곳에서 글라우콘이 소크라테스가 세우려는 나라가 돼지들의 나라인 한, 그가 말한 것들만으로는 충족될 수 없다고 말하는 장면은 논의 구도상 최초의 나라에서 호사스런 나라로 이행하기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즉 소크라테스가 말한 최초의 나라는 돼지들의 나라와 진배없으며 그에 따라 마치 돼지가 일정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필요를 추가해서 더 안락한 삶을 욕구하듯이 최초의 나라는 결코 그것으로 완결되지 않고 욕구가 증대하여 종국에는 사치스런 욕구까지 발생하여 결국 다른 나라로 불가불 변화하게 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유기체의 성장이 필연이듯 사람의 욕구는 결코 일정 단계에서 멈추지 않고 늘 필요를 생산하며 그에 따라 욕구 또한 필연적으로 확대된다는 것이다. 즉 플라톤은 인간의 본성과 관련하여 최소한 인간의 욕구는 어떻든 간에 일단 다양한 형태로 확대된다는 것을 진실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나아가 만약 그 증대된 욕구가 충족되지 못할 경우 서로의 갈등은 물론 전쟁까지 초래될 수 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인다. 즉 최초의 나라가 사치스런 나라로 변모하고 그에 따라 갈등과 다툼이 생겨나는 것은 불가피한 현실인 것이다.

* 여기서 인간의 욕구가 다양한 형태로 확대되는 것이 필연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곧 인간은 근원적으로 이기적이라는 주장으로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다. 욕망의 증대가 제한된 가치 총량을 넘어설 때는 갈등과 다툼이 일어나지만 인간의 가치에 대한 관념이 결코 일원적으로 환원되지 않는 한, 가치의 총량이란 말은 그 자체로 무의미하다. 정신적 가치 내지 서로 다른 가치에 대한 욕망은 따로 총량이 없다. 일부 물질적 가치 영역에서 갈등과 다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인간의 이기적 본성이나 행태를 뒷받침하는 일반적 근거로 확대 해석할 수는 없는 것이다.

* 플라톤이 그리고 있는 인간 욕구의 증대에 따른 나라 내지 사회 계층의 변화는 사회적 변화를 생산관계의 모순에서 찾고 있는 마르크스의 변증법을 연상시킨다. 최초의 나라는 시민들의 욕구 증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모순을 드러내면서 호사스런 나라로 변모하고 호사스런 나라는 호사를 추구하는 시민들의 욕구 증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모순을 드러내면서 비로소 최고 단계인 자기 정화가 가능한 이상 국가의 등장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 결국 글라우콘의 냉소적 태도는 이러한 나라는 자신들이 듣고자 하는 정의와 부정의가 문제되는 현실의 나라도 아니고 부정의를 정화하여 정의를 구현하는 나라도 아님을 내비친 것이다. 사실 최초의 나라는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의 나라와 거리가 멀다. 비록 건강과 평화 상태가 존재하고는 있지만 나라나 개인이 질병과 분열을 적극적으로 이겨내고 성취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의식주 등 필수적인 욕구에 만족한 채 살아가는 돼지 같은 삶이 가져다주는 건강과 평화이다. 그에 따라 이 나라에는 타자에 대한 긴장도 고민도 문제도 없으며 그런 까닭에 아직 정부도 정치도 철학도 없다. 물론 최초의 나라에는 비록 각자가 서로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자기 적성에 맞는 일을 스스로 선택하여 수행하는 상태 즉 자연적인 정의가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의 욕구는 지속해서 증대하고 그에 따라 나라가 규모나 수에서 확대 되고 필요가 충족되지 않음에 따라 필연적으로 다툼과 갈등이 생기고 그로부터 부정의가 발생하며 그에 따라 그에 대한 대책 또한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다시 말해 부정의를 다스리고 정의를 보전하기 위한 장치가 새롭게 요구되면서 그 일을 맡을 심부름꾼으로서 수호자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이다. 결국 철학과 정치·문명은 정의와 부정의가 함께 현존하는 위와 같은 현실 국가에서 요구되는 불가피한 필요인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의로운 나라란 부정의가 생겨나기 이전에 이른바 자연적 정의 상태가 존재하는 최초의 나라 같은 나라가 아니라 부정의가 함께 현존하는 현실에서 그것을 통제하고 이겨내면서 정의를 보전해내는 그러한 나라를 말하는 것이다. 장차 플라톤이 구축하려는 나라가 바로 이러한 나라이다. 그러한 한에서 플라톤이 목표로 하는 것은 최초의 나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호사스런 나라를 최대한 정화하여 최대한 정의를 보전하고 구현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나라라 할 것이다.

* 앞서도 간단히 언급했지만 플라톤의 이상국가가 통치자 계층, 수호자(전사) 계층, 생산자 계층으로 이루어진 국가라면 소크라테스가 이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최초의 나라는 정의로운 나라의 형성 단계상 초기 단계의 국가 즉 생산자 계층으로만 구성되는 국가이다. 나라를 구성하면서 이처럼 생산자 계층의 나라를 최초의 나라로 상정하고 있는 것은 국가 수립에 있어 가장 먼저 고려되어야할 요소가 다름 아닌 의식주라는 물적 기반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 또한 유기체인 한, 먹고 사는 것이 해결되어야 그 다음 정치도 철학도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물적 토대라는 하부구조 없이 정신과 문화 등 상부구조는 세워질 수 없는 것이다. 물론 토대와 상부구조가 모두 성립한 이후에 어느 것이 구조 전체를 지배하고 구조의 보전과 지속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가의 문제는 별개의 논점을 구성하는 것이라 해도, 플라톤 역시 물적 조건 내지 생산자 계층의 역할이 나라 자체의 성립을 위한 일차적이고도 필수적인 기반인 것만은 결코 부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 그리고 이 나라는 비록 생물학적 자기 보전 자체에 만족하는 이른바 돼지들의 나라이긴 할지라도 이 나라를 구성하는 생산자 계층들 사이에는 협동적 삶이 유지되고 있고 그에 따라 고민과 갈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하면, 일단 플라톤은 부정의의 원인을 생산자 계층의 고유한 특성과 연계시키고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국가>에서 정의를 다루면서 왜 수호자 계층만을 주로 다루고 생산자 계층은 크게 다루고 있지 않는가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다. 물론 플라톤은 부정의를 바로 잡는 주체에서 생산자 계층을 배제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비판했던 민주정의 중심 세력으로서 민중이 기본적으로 생산자 계층임을 고려하면 플라톤은 여전히 생산자 계층을 불신하고 있음을 부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플라톤의 대중에 대한 불신은 생산자 계층의 고유한 역할 자체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그 고유 영역을 넘어서 정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데서 온 것이다. 플라톤은 근본적으로 정의로운 나라를 구성하는 물적 토대로서 생산자 계층의 역할과 협동적 삶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신뢰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플라톤은 생산자 계층이 자기 고유 역할을 넘어서 정치에 참여하게 된 원인을 생산자 계층에서 찾지 않고 그 이전에 그들로 하여금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될 수밖에 없게 만든 지배 계층의 탐욕적 욕망에서 찾고 있다. 실제로 플라톤은 제8권 정치체제의 타락과정을 설명하면서 민주정 치하에서 기본적으로 생산자 계층인 대중이 드러낸 욕망의 왜곡이 생산자 자신 때문이 아니라 통치자 계층의 그릇된 욕망과 잘못된 정치행태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부정의의 근원은 소수의 지배계층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해 나라에서 발생하는 모든 해악의 뿌리는 근본적으로 생산자 계층이 아닌 지배 계층의 탐욕에 있었던 것이다. 다만 플라톤은 통치가 소수의 권력자들의 전유물이었던 시대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까닭에 소수 권력 계층의 지성화를 유일한 해결책으로 열망하게 되었고 그 방책을 구축하는 데 온 힘을 쏟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역사는 오히려 권력의 지성화가 소수 기득권 계층이 아니라 시민의 지성화, 다중 집단의 지성화를 통해 달성되어야 하고 달성될 수 있으며 달성되는 것임을 증명하고 있다. 플라톤 정치 철학의 핵심이 양적 차원에서 소수 권력에 의한 지배를 정당화하는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질적인 차원에서 지성에 의한 권력의 지배 즉 권력의 지성화에 있었음을 고려하면 플라톤의 정치철학은 오늘날 민중의 지성화를 위한 철학적 원리로도 여전히 유효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그러나 플라톤이 생산자들로 구성된 최초 나라를 건강과 평화가 담보된 나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근거로 플라톤이 생산자 계층에 대해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는 해석에 대해서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그것은 생산자 계층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전체 논의 구도를 염두에 두고 정의와 부정의의 발생 과정을 설명하려는 차원에서 부정의가 발생하기 직전까지의 상황을 보여주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체 논의 구도 하에서 최초의 나라를 넘어서, 즉 물적 토대로서 생산자들로 구성되는 단계를 넘어서 문명과 문화적 욕구의 단계에 들어와야, 비로소 정의와 부정의가 생기는 것임을 말해주기 위한 포석일 뿐이라는 것이다.

* 젤러(E. Zeller)는 ‘돼지의 나라’라는 글라우콘의 언급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견유학파의 시조로 평가되고 있는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 기원전 445?-365?)에 대한 경멸을 담고 있다고 해석한다. 안티스테네스는 플라톤과 달리 소크라테스의 실천적인 면모에 주목하여 강건한 정신과 몸으로 소박한 삶에 자족하는 삶을 이상으로 여긴 사람이다. 즉 글라우콘의 냉소는 그와 같은 잘못된 이상에 대한 일종의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여기서 플라톤이 그리고 있는 최초 나라의 모습은 안티스테네스가 꿈꾸는 그러한 삶을 담고 있다. 그러나 아담과 헨켈(Stud zur Gesch, Lehre vom Staat, 8 f.)등은 이러한 젤러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최초의 국가는 다만 이상 국가의 성립 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첫 단계로 그려진 것으로서 일부 아이러니가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곳에서 언급된 필요와 분업, 협동의 원리는 이후에도 수정되고 대체되면서 논의 기본 바탕이 된다. 그러한 점에서 최초의 국가는 아직 이상적인 나라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생산자 계층의 삶에 대한 불쾌함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최초 나라의 편안한 삶(εὐχερὴς βίος Pol. 266 C)을 돼지의 삶에 비교한 것은 나름 적절하다. 다만 소크라테스와 달리 글라우콘이 냉소를 표하고 있는 것은 그 최초의 나라가 자신이 소크라테스의 답변을 통해 기대하고 있었던 현실 국가와 아주 동떨어져 있는 것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 것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기개θυμοειδής를 크게 중시하는 글라우콘으로서는 그러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물질적 욕구ἐπθυμμα 이상으로 상승하지 않는 나라의 삶을 경멸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아담 주석 참고)

 

2-6. 호사스러운 나라, 염증상태의 나라(372e-373d)

 

[372e]

* 이처럼 글라우콘의 냉소를 접한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의 요구가 그러한 나라만이 아니라 호사스런 나라도 어떻게 성립하는지를 고찰해보자는 요구로 받아들인다.[372e] 즉 글라우콘이 원하는 나라는 그러한 현실에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는 나라가 아니라, 늘 정의와 부정의가 문제될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자신들의 요구나 관심사도 충분히 다루어질 수 있는 현실에서 엄연히 현존하고 있는 나라 즉 ‘호사스런 나라’τρυφῶσας πόλις인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보기에 참된 나라ἀληθινὴ πόλις는 앞서 서술한 건강한 나라ὑγιής πόλις인 것 같지만 글라우콘이 정 그러한 나라를 살피기를 원한다면 ‘호사스런 나라’를 살피는 것도 그리 나쁠 것도 없다고 말한다. 정의와 부정의가 어떻게 해서 나라들에 있어서 생겨나는지를 알아낼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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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앞서도 간단히 살폈듯이 소크라테스가 필수적인 필요에 입각한 나라를 먼저 말한 것은 장차 부정의가 문제되면서 수호자 계층이 요구되는 현실 국가를 끌어들이기 이전에 그 첫 단계로서 생산자 계층의 성립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최초국가와 호사스런 나라의 모습을 보다 대조적으로 잘 드러내기 위한 밑 작업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가 언급하고 있듯이 이른바 ‘참된 나라’ἀληθινὴ πόλις, ‘건강한 나라’ὑγιής πόλις를 먼저 두고 그 다음에 호사스런 나라를 살펴야 정의와 부정의가 처음에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보다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깨끗한 흰 백지 위에 뭔가를 그려 넣어야 더 분명하게 보이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 그런데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최초의 나라를 ‘참된 나라’, ‘건강한 나라’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두고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우선 어떤 이는 이곳 최초의 나라가 자연적 적성과 서로의 필요에 따라 각자 자기가 할 일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일을 맡아 수행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장차 밝혀지겠지만 자연적 본성에 따라 각자 자기가 할 일을 잘 수행해내는 것이 플라톤의 정의인데 이 나라는 이미 그러한 정의가 자연적으로 구현된 나라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건강한 나라’라는 표현은 몰라도 ‘참된 나라’라는 표현은 일종의 아이러니로 해석한다. 참된 나라는 종국적으로 철학을 통해 부정의가 극복되고 정의가 구현되는 나라를 말하는데 이 최초의 나라는 철학적 사유는커녕 그저 먹고 사는 것에 만족을 드러내는 일차원적인 인간들로만 구성된 나라이기 때문이다. 또 한편 앞서 소개하였듯이 안티스테네스 같은 사람들은 소크라테스가 필수적인 욕구에 만족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나라를 ‘참된 나라’ἀληθινὴ πόλις, ‘건강한 나라’ὑγιής πόλις라고 부른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이러한 나라야말로 실제로 그가 꿈꾸었던 이상국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안티스테네스와 달리, 그저 생산자 계층만이 존재하는, 실제 현실과 거리가 먼 그런 나라가 아니라, 다양한 계층과 욕구가 이글거리고 서로 부딪치는 현실 그 조건 위에서 그것들 모두가 가장 이상적으로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나라를 이상적인 나라로 꿈꾸고 있다. 문제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나라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런 나라를 꿈꾸는 것은 사실 공허한 일이다. 플라톤의 이상국가는 현실 조건에서 가장 이상적인 나라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본(paradeigma)으로 제시될 수 있는 현실의 조건 위에 선 이상국가인 것이다. 오히려 앞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한 건강한 나라, 돼지들의 나라는 어쩌면 루소(J. Rousseau)가 ‘자연으로 돌아가라’라고 외쳤을 때 그가 염두에 둔 최초 자연 상태의 인간 사회, 또는 무정부주의자들이 꿈꾸는 이상향, 또는 노자(老子)가 말하는 이상적인 과소(寡少)국가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㉙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2-2. 나라의 기원: 자족하지 못함, 서로의 필요에서 생긴다(369a-369c)

 

* 문자의 비유는 이미 국가가 유기체적 성격을 갖는 것임을 내포하고 있다. 근대의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사회란 다만 이기적 개인들의 집합체일 뿐이며 개인이 사회에 빚진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국가는 개인들의 단순한 집합체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체처럼 부분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구조화된 전체로서 각 부분은 각기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보전의 기초로서 생명의 유지를 위한 내적인 통일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 즉 사회는 단순히 분리되어 고립된 단위들로 간주되는 부분들의 합이 아니다. 사회는 부분들의 속성들의 합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유기적 전체로서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공동체는 그것을 구성하는 개인들의 이익의 합으로 환원될 수 없는, 그 이상의 이익 즉 공동체 자체의 이익을 갖는다. 이것이 곧 독립적인 개인들의 이익의 단순한 통합과는 구별되는 사회적 이익 내지 공공의 이익이다. 그러나 이 공공의 이익이 개인의 이익과 별개의 것일 수 없다. 공공의 이익 또한 개인들의 이익이되 개인 모두가 공유하는 이익이다. 유기체의 경우 기관들의 기능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야 몸 전체의 건강이 담보되고 몸 전체의 건강이 담보되어야 각 기능의 온전성도 담보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국가 또한 각 개인 또는 계층들이 서로의 유기적 의존성을 토대로 본성에 따라 자기들 고유의 역할을 잘 수행해야, 국가 공동체의 행복이 구현된다. 그리고 공동체의 행복이 담보되어야 각 개인들과 계층 또한 자신들의 본성에 맞는 욕망의 구현이 담보될 수 있다. 이처럼 플라톤은 논의 방법론과 관련한 논의에서부터 이미 단순한 논의 방법론을 넘어 그가 펼칠 정의로운 국가의 기본 성격까지 함께 제시하고 있다. 곧 이어 펼쳐지는 나라의 기원에 관한 주장 역시 이러한 국가의 유기체적 성격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된 것이다,

 

[369b]

* 소크라테스는 먼저 나라를 수립시키는 기원ἀρχὴ부터 언급한다. 즉 나라의 기원은 “우리 각자가 자족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것이 필요하게 되기 때문”ἐπειδὴ τυγχάνει ἡμῶν ἕκαστος οὐκ αὐτάρκης, ἀλλὰ πολλῶν ὢν ἐνδεής이라고 말한다.

 

[369c]

* 이런 경위를 통해 각자 필요 때문에 다른 사람을 맞이하게 되어 동반자κοινωνός 및 협력자βοηθός로서 한 거주지에 모이게 되었고 이 공동생활체συνοικίᾳ에다 ‘나라’πόλις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고 말한다. 즉 이론상으로 수립되는 나라는 필요χρείᾳ로부터 그 수립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369d]

*그에 따라 첫째이자 가장 중요한 것πρώτη γε καὶ μεγίστη으로 생존을 위한 음식물τροφή, 둘째는 주거οἴκησις, 셋째는 의복ἐσθής 및 그와 같은 유의 것들이 필요하고 그것을 마련하기 위해 농부ὁ γεωργός, 집짓는 사람ὁ οἰκοδόμος, 직물을 짜는 사람ὁ ὑφάντης 그밖에 제화공ὁ σκυτότομος이나 신체와 관련되는 것을 보살피는 사람ἤ τιν᾽ τῶν περὶ τὸ σῶμα θεραπευτήν 즉 최소 다섯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즉 최소한도의 나라, 최소 필요국ἥ ἀναγκαιοτάτη πόλις은 다섯 사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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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 이야기는 겉보기에는 나라의 기원에 대한 역사적 설명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다루어지는 내용은 대홍수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로부터 나라체제의 기원을 설명하는 <법률> 3권 서두부분(676a~)의 내용과도 비교해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곳 이야기가 나라의 기원에 관한 역사적 서술인지 아닌지에 대해 논란이 제기되어왔다. 우선 역사적 서술로 생각하는 사람은 실제 최소한도 국가에서 호사스런 나라로의 변화가 규모의 증대에 기초하고 있고 규모의 증대는 인구의 증가 등 시간적 흐름과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게다가 나라가 개인을 설명하기 위한 큰 문자임을 고려하면 이곳에서의 나라의 변화는 소문자인 개인의 측면에서 보면 개인의 성장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즉 최초의 국가와 그 이후의 국가의 변화는 생존만 충족되면 더 이상을 바라지 않는 어린 아이의 욕망 단계를 넘어 점차 욕구가 확대되고 사치심이 생겨나면서 그에 따라 타자의 욕망과의 갈등을 유발하는 성인들의 욕망 단계로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이곳 이야기는 겉으로는 역사적 서술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장차 논하게 될 현실의 국가가 어떤 배경에서 정의와 더불어 부정의가 함께 생겨나는 것인지 그 인과관계를 드러내기 위한 논리적 설명에 강조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하나의 생명체에서 질병의 이유를 밝히려면 질병이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질병이 생기는가를 살펴야 하는 것처럼, 장차 현실의 나라에서 부정의가 생기는 이유를 밝히려면 부정의가 생기기 이전의 최소한도의 국가부터 먼저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질병이 생기는 것은 성장 때문이 아니라 생명체라는 사실 때문이므로 이곳 이야기는 나라와 개인들의 기원이나 성장 과정에 대한 역사적 진술이 아니라 개인과 나라의 요구가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하는지에 대한 인과적 설명에 방점이 찍혀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소한도의 나라가 최초의 나라라면 이 나라가 다섯 사람으로 구성된다는 서술 자체부터 이치에 맞지 않는다. 최초에는 가족이 있었을 텐데 한 가족을 나라로 보기도 힘들거니와 가족의 구성원에는 일을 하지 못하는 유아도 있었을 것이고 게다가 나라가 최소한 한 가족 이상으로 구성되는 한, 다섯 사람은 넘었을 것이다. 설사 일하는 사람들로만 구성되었다 해도 가족 단위에서 서로 다른 일을 전문으로 했다고 보기도 힘들거니와 무엇보다도 농사라는 일 자체가 원시시대 수렵채취 시기 이후에 나타난 것임을 고려하면 이미 이곳 이야기는 나라의 기원에 관한 역사적 기술과 거리가 멀다. 그렇게 본다면 이것은 실제 나라의 기원에 대한 역사적 서술이 아니며 다섯이란 숫자 또한 최초의 나라를 구성하는 최소한도의 사회적 기능들의 종류를 나타내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두 주장 가운데 어떤 것이 플라톤의 의도인지 단적으로 가려내기는 그리 쉽지 않다. 인과적 설명에는 보편적 사실에 대한 일반적 설명도 있지만 시간적 선후를 갖는 특수한 사실에 대한 인과적 설명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 <국가>에서 역사적 변화 과정을 그린 것인지 아닌지의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은 이곳 이외에 또 있다. 정의로운 국가가 타락하여 참주정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 제8-9권의 내용이 그것이다. 앞선 강해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토인비(A. Toynbee)는 이 내용을 기초로 플라톤의 역사관을 쇠퇴사관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가의 쇠락을 개인 영혼의 타락과 병행해서 설명된 것에서도 시사되듯이 그것은 정치체제의 변화와 개인의 욕망 간의 상호 유기적 연관성을 드러내는 일종의 역동적인 체제 변동론 내지 도덕 심리학으로서 무엇보다도 그 변화의 방향이 쇠퇴와 진보 내지 회복 양쪽 방향에 다 열려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고찰이라기보다는 부정의와 불행의 근본 원인과 양상에 대한 일종의 반성적 고찰이라 할 것이다.

* 그런데 나라의 기원과 관련하여 무엇보다도 주목할 것은 나라의 기원이 개인들 각자가 자족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구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즉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근본적으로 타인의 도움에 의지하며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될 상호 의존적 존재라는 것이다. 즉 인간은 본질적으로 삶의 보전을 위해 상호 협동적이며 의존적인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고 나라 또한 그에 따라 본질적으로 그러한 개인들의 본성에 기초하여 상호 호혜적인 협동체 즉 공동체의 성격을 갖는다. 이것은 장차 플라톤의 국가 구성 원리의 핵심적인 기초를 구성한다. 즉 플라톤은 앞서 글라우콘이 나라의 기원으로서 주장한 사회계약설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글라우콘은 강자가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현실에서 지배 능력이 없는 다수의 약자들이 소수의 강자들로부터 최소한의 안전과 공존을 담보하기 위해 서로 약정을 맺은 데서 나라가 생겨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나라는 본성적으로 상호 협동적인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서로에게 다가가 스스로의 삶을 적극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본성적으로 배타적 이기심을 가지고 있는 개인들이 그것을 관철할 힘이 없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최소한의 자기 보전을 위해 상호 약정을 맺어 성립시킨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들 모두 만약 자기에게 힘이 생기면 언제라도 이러한 약정을 몰래 어기거나 뒤집으려 한다는 사실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앞서도 설명했듯이 글라우콘의 이러한 견해는 자연 상태로부터의 최초 국가가 어떻게 생겨났는가에 대한 주장을 담고 있다기보다는 참주를 비롯해 사회적 강자의 전횡을 막아내고 어느 정도 대중의 연대가 가능하게 된 기원전 4세기 당대 아테네의 현실을 배경으로 어떻게 민주정이 나타나게 되었는가에 대한 주장을 담고 있다. 소피스트들이 당대 아테네 민주정을 배경으로 득세했음을 고려하면 나라의 기원에 대한 이곳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그러한 당대 아테네인들의 이기적 욕구와 맞물려 등장한 포퓰리즘적 민주정과 그것에 기생하고 있는 소피스트들에 대한 비판도 함께 내포하고 있다.

* <법률> (676a~680e)에서도 플라톤은 나라 체제의 기원을 인간의 사회적 본성을 토대로 설명하고 있다. 이에 비해. <프로타고라스> 322b에서 프로타고라스는 나라의 기원을 야생의 사나운 동물들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모여 살게 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야생의 사나운 동물들을 폭력적인 사회적인 강자로서 참주에 비교한다면 나라의 기원에 관한 프로타고라스의 견해와 이곳에서 글라우콘이 대변하고 있는 트라쉬마코스 등 소피스트들의 견해는 크게 다르지 않다.

* 플라톤이 그리는 최초의 국가는 마치 질병이 없는 건강한 몸과 같다. 소크라테스가 후에(372e) 이 나라를 ‘건강한ὑγιής 나라’라고 부르고 있는 것도 그러한 의미에서이다. 그러나 평생 동안 몸에 질병이 전무할 리 없다. 질병이 없는 몸은 현실의 몸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최초의 국가는 현실에서 상존하는 국가로 보기 힘들다. 그렇다고 그러한 국가가 우리가 추구할 이상국가도 아니다, 질병이 없는 상태로 상존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상적인 국가는 질병이 있되 그것을 잘 억제하고 대응하여 최대한 건강을 유지하는 나라이다. 다만 질병을 달고 사는 현실의 몸을 설명하려면 건강한 몸에서 어떻게 질병이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살펴야 하듯이, 장차 정의와 부정의가 함께 현존하고 있는 현실국가를 논의하려면 나라에서 부정의가 어떻게 생겨나는지 그 시원적 배경과 원인을 살펴야 하므로 사회적 갈등 이전 상태의 나라 즉 최소한도의 국가, 최초의 국가가 제기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흔히들 우리가 말하는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는 위와 같은 최초의 국가도 아니고 아예 실현 자체가 불가능한 상상의 나라는 더욱 아니다. 그가 말하는 정의로운 국가는 현실의 조건 위에서 최선으로 실현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최선의 나라를 의미한다. 실제로 플라톤의 <국가>에는 이상국가라는 말은 나오지 않으며 다만 ‘아름다운 나라’(kallipolis)(527c)라는 표현만 나온다.

 

2-3. 최소한도의 나라와 분업의 발생(369e-371a)

 

[369e-370a]

*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최소한의 나라에서 분업이 생기는 배경을 설명한다. 즉 나라에서 한 사람은 자신의 일ἔργον을 모두를 위한 공동의 것으로 제공해야한다ἕνα ἕκαστον τούτων δεῖ τὸ αὑτοῦ ἔργον ἅπασι κοινὸν κατατιθέναι는 것이다. 이를테면 농부는 나머지 네 사람의 식량을 함께 생산하여 그것을 그들과 나누고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일을 그런 방식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370b-c]

*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첫째πρῶτον , 사람은 각자 성향에 있어서 다르게 태어나서ἡμῶν φύεται ἕκαστος οὐ πάνυ ὅμοιος ἑκάστῳ, ἀλλὰ διαφέρων τὴν φύσιν 일 또한 저 마다 자신의 성향에 맞는 일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둘째πότερον, 각각의 것이 더 많이πλείω, 더 훌륭하게κάλλιον, 그리고 더 쉽게ῥᾷον 이루어지는 것은 한 사람이 한 가지 일을 성향에 따라κατὰ φύσιν 적기에ἐν καιρῷ 하되, 다른 일에 대해서는 한가로이 대할 때이기 때문이다σχολὴν τῶν ἄλλων ἄγων, πράττ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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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이 수행하는 일들의 기능적 고유성과 전문성, 분업의 효율성을 강조하는 이 부분은 나라의 기원을 개인의 비자족성, 상호 호혜적 의존의 필요성에서 구하는 앞서의 주장과 더불어 장차 제시될 정의로운 국가의 핵심 원리를 구성한다. 그리고 앞서 설명했듯이 그러한 주장의 필연성은 이미 플라톤이 큰 글씨 작은 글씨 비유에서 나라를 유기체인 개인의 확대로 보고 있는 것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다. 유기체로서 개인을 구성하는 부분들은 모두 하나 같이 서로 태생적으로 다르고 각기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최선으로서 자신의 건강한 보전을 위해 유기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 적기(適期)καῖρος(kairos)와 한가함에 대한 설명 또한 분업의 효율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테면 농부가 자신의 고유한 기능을 잘 수행한다는 것은 파종과 양육과 추수의 적기를 놓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적기를 놓치지 않으려면 언제든 그 적기에 임할 수 있도록 그것을 방해하는 일로부터 해방되어 있어야 한다. 즉 적기를 놓치게 하는 일로부터 손을 뗄 수 있는 한가로움이 보장되어야 한다. 농부의 일은 자연의 순환에 바탕하고 매년 반복되는 일이므로 어느 정도 적기를 예상할 수 있지만 의사와 같이 병을 치료하는 경우에는 적기를 예상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적기를 예측하기 힘든 일일수록 적기를 놓치지 않는 방안이 강구되어야 한다. 환자가 언제 찾아올지도 모르는데 넋 놓고 다른 일에 부름을 당하거나 그곳에 매달린다면 제대로 질병을 치료할 수 없고 자신의 기능을 발휘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의사는 치료를 위한 것 이외의 어떤 일로 부터도 한가로움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농부나 의사 모두 한가로운 사람은 아니다. 농부는 농한기를 맞이하더라도 지난 농사일을 뒤돌아보면서 시행착오와 경험을 정리 기록하는 등 내년 농사를 준비해야 하고 의사 역시 환자가 찾아오지 않는 동안에는 보다 효율적인 치료술 연마에 힘써야 한다. 다만 이곳에서 말하는 한가로움σχολή(scholē)은 ‘그것을 저해하는 일로부터 손을 뗀다’, ‘그곳에 시간을 쓰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한가로움이다. 이른바 지식인이 한가로움의 뜻을 가진 scholar로 불리게 된 연유도 이것과 연관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원래 지식인 계급은 왕이나 사제, 귀족 등 권력자가 나랏일이나 자신의 일을 혼자 감당하기가 힘들어 일부 지능이 높은 사람을 불러들여 다른 일에 시간을 쓰지 말고 머리로 자신을 돕는 일에만 신경 쓰라고 한데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식인은 머리 쓰는 일 이외에는 한가함을 누린다는 점에서 그리고 일반인들이 보기에도 일단은 고역스런 육체적 노동에서 벗어나 한가함을 누린다는 점에서 scholar로 불리어졌을지도 모른다. 시원적인 측면에서만 보자면 지식인 계급이 본질적으로 권력자들의 참모 역할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은 제법 그럴듯하게 들린다. 아무려나 지식인은 공동체적 삶의 보전을 위해 진리를 탐구하고 진실만을 고하는 참된 심부름꾼이자 정직한 충신일 수도 있지만 언제라도 권력이나 기득권에 빌붙어 권력의 아류이자 부역자로 전락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 이곳에서 언급되는 분업은 이른바 마르크스(K. Marx)가 말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분업과 다르다. 우선, 플라톤의 분업은 본성에 따른 것으로서 자기 삶과 공동체의 적극적 보전의 방책이다. 즉 분업의 효율성은 자기와 공동체의 이익이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비판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분업은 생산의 효율을 통한 자본의 확대 즉 자본가의 이익 창출을 위해 자본가가 계획한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노동자의 욕망에 거슬러 불가피한 임노동 조건에 따라 강제된 단순 반복적인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효율성이 가져다주는 이익이 온전하게 노동자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자본가에게 귀속된다. 즉 분업은 자본가의 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착취의 방책이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분업은 단순히 분업이 지향하는 경제적 효율성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자신의 본성에 따른 욕망을 구현하고 그것을 토대로 자기와 공동체의 건강한 보전에 기여 한다는 점에서 경제적 원리 이전에 도덕의 원리이자 건강한 사회관계의 원리이다. 아무려나 ‘한 사람이 한 가지 기술에 종사 한다’는 원칙은 인간의 자연적 본성에 기초한 것으로서 장차 정의로운 국가의 핵심 원리로 제시된다. 그리고 이 원칙은 정치라는 중대사에 따로 전문성을 두지 않고 시민이라면 아무나 간여할 수 있었던 당대 아테네 민주정의 비전문성과 반공공성을 공격하는 기본 근거가 된다. 이 원칙은 <법률> 846d-847b에서도 재차 강조되고 있다. 현대 민주주의 역시 다른 모든 분야에서는 전문가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정치의 영역에서만은 전문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전히 플라톤의 비판에 열려 있다. 플라톤에게는 정치의 민주화 이전에 정치의 질적 토대로서 정치의 지성화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정치의 지성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참주정은 두말할 나위가 없고 민주정 역시 당시 아테네 현실이 보여주듯이 포퓰리즘의 늪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기 때문이다.

*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성향φύσις(physis)이라는 말은 인간의 본성, 인간 영혼의 본성을 의미하며 제2권에서 제4권까지 핵심용어를 구성한다. 이것은 플라톤과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참되고 고유한 개인성이다. 물론 그것은 객관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전제이지만 최소한 플라톤에게는 그것은 피폐한 현실을 넘어서는 근본 바탕이자 힘이며 앞으로 건설할 정의로운 국가의 기초로 선언되고 유포되어 소피스트적 담론을 압도하지 않으면 안 될 시대적 요구이자 사람이라면 마땅히 받아 들여야 할 진실인 것이다.

 

[370d-e]

* 그런데 농부는 쟁기나 괭이 그 밖에 농사와 관련되는 다른 도구ὄργανον들이 필요한데 스스로 만들 수 없다. 그러므로 자기 이외에 더 많은 시민이 필요하다. 나머지 일도 마찬가지이다. 이에 따라 목공τέκτων, 대장장이χαλκεύς, 목동βουκόλος과 목부νομεύς 등 이런 부류의 많은 장인들δημιουργοί이 작은 나라πολίχνιον의 동반자들이 되어 나라는 커진다. 게다가 쟁기질을 위한 소βοῦς, 제화공을 위한 가죽δέρμα과 양모ἔριον 그리고 건축 재료 등의 이용과 운반을 위한 짐승ὑποζύγιον들도 필요하다. 나아가 나라에 필요한 것들을 다른 나라로부터 조달 받고 그런 것을 조달해주는κομιοῦσιν 사람도 필요하다. 이른바 유통을 담당하는 무역상ἔμπορος도 필요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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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로 <법률>이 세우려는 바람직한 나라에서는 다른 나라에 수출할 정도의 잉여를 생산하는 것 자체를 지향하고 최대한 자급자족을 강조한다. 그곳에 세워지는 나라는 가까이에 이웃 나라가 없다.(<법률> 704a-705b)

*‘상대방 나라에 빈손으로 가면 빈손으로 온다’는 말 또한 상호 호혜적 의존성을 내포하는 본성의 연장선상에서 언급된 말이다. 이 말에는 외국과의 모든 거래는 물물 거래이고 외환 거래는 없으며 화폐는 국내에서만 유통되었다는 당대 역사적 사실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 이제 최초국가에서의 필요가 제조업을 넘어서 상업 및 유통 등을 비롯한 서비스업으로 확대된다. 그리고 이런 요구는 바로 이어 화폐에 대한 요구로 이어진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㉘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2. 나라의 기원과 발달(368a-374d)

 

[368a]

*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의 반론과 요구를 들은 소크라테스는 크게 기뻐하면서 그들을 ‘그 어르신의 자제들’이라 부르며 그들의 자질φύσις을 칭송한다. 그리고 글라우콘을 사랑하는 사람이 메가라 전투에서 그들이 세운 수훈을 칭송하며 지었다는 시의 첫 구절도 인용한다. 그처럼 훌륭하게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대변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부정의가 정의보다 낫다ἄμεινον는 것에 설복당하지 않고 있는 것은 실로 아주 비범한θεῖος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나 자신이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가 다름 아닌 그들의 생활방식τρόπος 때문임도 함께 밝힌다.

 

[368b-c]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그들이 그러한 믿음을 가지면 가질수록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과연 정의를 제대로 구조βοηθεῖν해낼 것인지 당혹스럽고 또 걱정이 된다고 말한다. 자신은 트라쉬마코스를 상대로 말로써 정의가 부정의보다 낫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아직 숨을 쉬고 있고 말도 할 수 있는 자로서ἔτι ἐμπνέοντα καὶ δυνάμενον φθέγγεσθαι 그것을 포기하고ἀπαγορεύειν 정의를 구조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이 믿음ὅσιον이 없는 것이 아닐까라는 두려움τὸ δεδιός을 안겨 주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정의를 구원ἐπικουρεῖν하는 것이 상책κράτιστον 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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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가 아데이만토스 형제를 가리켜 ‘그 어르신의 자제들’ὦ παῖδες ἐκείνου τοῦ ἀνδρός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 어르신’을 트라쉬마코스로 보는 주장도 있다.(J. Adam 각주 참고) <필레보스> 36b을 보면 소크라테스는 필레보스로부터 논의의 권한 일체를 이어받은 프로타르코스를 두고 그와 똑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도 폴레마르코스가 부친의 논의를 이어받듯 아데이만토스 형제 역시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마치 자식처럼 이어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데이만토스 형제가 논의를 이어받은 것과 폴레마르코스나 프로타르코스가 논의를 이어 받은 것은 동기와 사정이 전혀 다르고 이곳에서의 소크라테스의 칭찬 또한 짓궂은 말투가 아니라 진지함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그 표현은 바로 뒤에 나오는 ‘아리스톤의 아들’παῖδες Ἀρίστωνος에 대응되는 것으로 그 어르신 또한 그들의 부친 아리스톤Ἀρίστον으로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 플라톤의 어머니 페리크티오네Periktionē는 솔론의 가계를 잇는 명문 귀족 집안 출신이고 아버지 아리스톤은 자진해서 목숨을 바쳐, 헤라클레스 형제들의 아테네 침공 계획을 스스로 포기하게 만든 전설의 인물이자 아테네의 마지막 왕이었던 코드로스(Kodros, 기원전 1089 ~ 기원전 1068년)의 자손으로 알려져 있다.

* 소크라테스가 인용한 시를 지었다는 이른바 ‘글라우콘을 사랑하는 사람’ἐραστής이 글라우콘의 외삼촌인 크리티아스Kritias라는 주장도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이곳에서 ‘사랑하는 사람’은 동성애 관계에서 성인 남성을 가리키는 말 erastēs를 옮긴 것이다. 그의 상대인 소년 애인은 paidika라 불린다. 글라우콘도 관습대로 소년시절 소년 애인 역할을 한 것이다.

*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간 동안 아테네와 메가라 사이에 벌어진 전투로는 기원전424년과 기원전 409년에 일어난 전투가 대표적인 전투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 언급된 메가라 전투가 그 가운데 어느 시기의 전투인지는 불확실하다. 서두 강해에서도 언급했듯이 <국가>의 대화상정시기를 기원전 410년경으로 추정한 초기 연구자들의 주장이 오늘날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고, 오히려 기원전 420년 전후, 또는 멀게는 기원전 430년 이전까지도 상정 가능하다는 것이 오늘날의 연구 결과임을 고려하면 이곳에서 언급된 메가라 전투가 최소한 기원전 409년에 벌어진 전투일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그렇다고 기원전 424년 전투로 보는 것도 어려움이 따른다. 만약 <국가>의 대화상정시기가 기원전 430년 이전이라면 그 자체로 이미 시대착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생 글라우콘이 기원전 424년 전투에 참여했다면 최소한 18살이 넘어 탄생연도가 기원전 442년 이전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상정할 경우 기원전 427년에 태어난 동생 플라톤과 형들의 나이가 최소한 15살 이상 크게 벌어지는 문제점이 있다. 그래서 일부 연구자들은 이 부분의 언급은 시기와 상관없으며 다만 플라톤이 형들을 <국가>에 주요 인물로 등장시키면서 미화의 일환으로 언급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또 일부 연구자들은 아테네와 메가라 사이에는 위의 두 전투뿐만이 아니라 간단없이 크고 작은 전쟁들이 있었으므로 여기서 언급된 전투를 굳이 위 두 시기의 전쟁 가운데 하나로 국한하여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무려나 이곳의 메가라 전투 시기는 케팔로스와 프로타고라스, 프로디코스의 생존, 다몬, 소크라테스의 추정 연령대, 트라쉬마코스의 전성기, 폴레마르코스와 뤼시아스의 투리오이 이주와 귀환 시기 등과 더불어 대화상정시기를 추정하는 주요 요소들이기는 하나 이들 요소들이 서로 앞뒤가 맞지 않는 까닭에 대화 상정시기를 추정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낳고 있다.

* 아데이만토스 형제를 비범한(신적인)θεῖος 사람들로 평가하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아데이만토스 형제가 앞서 366c에서 정의가 최선임을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의 두 부류 즉 ‘하늘이 내린 성품θεῖος φύσις’을 가진 자와 ‘지혜를 얻은 자’ 가운데 전자에 속하는 사람들임을 보여준다. 게다가 이들이 보여주고 있는 생활방식τρόπος은 이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믿음을 뒷받침 해준다. 절도 있고 훌륭한 생활방식의 중요성은 앞서 케팔로스도 주장하고 있다.(329d)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아데이만토스 형제의 생활방식은 하늘이 내린 성품에 기반한 것인데 비해 케팔로스가 내세우는 생활방식은 부(富)에 기반을 둔 것이다.

* 소크라테스는 앞으로 자신이 행할 일을 ‘정의를 구조βοηθεῖν하는 일’로 표현하고 있다. 구조의 원어 boēthein은 구조(rescue)라는 뜻과 도움(help)의 뜻을 다 가지고 있지만 여기서는 구조의 의미가 더 적절할 것이다.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물론 아데이만토스 형제가 실감나게 전해주는 당대 아테네의 부정의한 현실은 그야말로 정의가 나락에 빠졌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도움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구해내야 하는 것이다. 이곳에서 소크라테스가 정의의 우위에 대한 제1권에서의 자신의 논증이 아데이만토스 형제를 제대로 설득하지 못했다는(358b) 점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것은 소크라테스 제1권에서의 논의가 갖는 불완전성과 한계를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백은 일시 그를 당혹하게ἀπορῶ 만들었지만 그러한 당혹감은 오히려 정의의 구조를 향한 새로운 다짐과 불퇴전의 각오로 이끄는 발판이자 도화선이 된다. ‘아직 숨을 쉬고 말을 할 수 있는 한. 결코 정의를 구조하는 일은 포기되어서는 안 된다. 정의를 구조하지 않는다는 것은 믿음이 없는 두려운 일이다.’라는 소크라테스의 선언은 부정의한 현실에 안주하고 타협하는 삶을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변명하는 우리들의 비겁한 마음에 준엄한 칼날을 겨눈다.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숨 쉬고 말을 할 수 있는 한, 정의를 구원하라. 정의에 눈을 감고 안주하는 것이 상책(가장 강력한 방책)κράτιστον이 아니라 비난받고 있는κακηγορουμένῃ 정의를 구원ἐπικουρεῖν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들의 삶과 행복을 위한 가장 막강한 방책이다.’

 

 

2-1. 나라와 개인의 유비(368c-369a)

 

[368c]

*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한 답을 내놓기에 앞서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가 요구한 내용을 아래와 같이 간명하게 정리하여 제시한다. ‘모든 방법을 다해 정의를 구조할 것. 논의를 포기하지 말고 정의와 부정의 각각이 무엇이며τί ἐστιν ἑκάτερον 이들 둘의 이득ὠφελία과 관련된 진실τἀληθὲς이 어떤 것인지 자세히 검토해 줄 것’

 

[368d]

* 이를 위해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탐구 과제를 보다 잘 탐구ζήτησις하기 위한 방법을 먼저 제안한다. 왜냐하면 착수하려는 탐구 과제가 눈이 나쁜 자가 아니라 예리하게 보는 사람의 것τὸ ζήτημα οὐ φαῦλον ἀλλ᾽ ὀξὺ βλέποντος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유능하지도 않고οὐ δεινοί, 그다지 시력도 좋지 못한 사람들이므로 같은 글자일 경우 큰 글씨를 먼저 보고 난 다음에 작은 글씨를 보면 잘 이해할 수 있듯이 먼저 큰 글씨부터 보자고 제안한다. 즉 누군가가 그다지 시력이 나쁜 μὴ πάνυ ὀξὺ βλέπουσιν 사람들더러 먼 거리에서 작은 글씨γράμματα σμικρὰ로 적혀있는 것을 읽도록 지시했을 경우, 그것과 똑같은 글씨들τὰ αὐτὰ γράμματα이 어딘가 ‘큰 곳에 더 큰 글씨로’μείζω τε καὶ ἐν μείζονι 적혀있다면 먼저 그 큰 글씨를 읽고 난 후 그것들이 작은 글씨와 같은지 아닌지를 살피게 된다면 아주 천행ἕρμαιον이라는 것이다.

 

[368e]

* 그러자 아데이만토스가 정의에 관한 탐구에서 그런 유사점τί τοιοῦτον이 있는 그 큰 곳을 발견했는지를 묻고 그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그 큰 곳이 다름 아닌 나라πόλις임을 밝힌다. 즉 정의에는 ‘개인의 정의’δικαιοσύνη ἀνδρὸς ἑνός도 있지만 ‘나라 전체의 정의’δικαιοσύνη ὅλης πόλεως도 있다는 것이다.

 

[369a] 그러므로 먼저 나라들에 있어서 정의가 어떤 것인지를 탐구하고 그런 다음 작은 것과 큰 것의 유사성ὁμοιότητα 을 검토하면서 개인의 정의를 검토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제안에 아데이만토스는 아무런 이의도 달지 않고 훌륭한 말씀καλῶς λέγειν인 것 같다고 동의를 표한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앞으로 살펴보게 될 나라를 ‘이론상으로 수립되고 있는 한 나라’ γιγνομένην πόλιν λόγῳ라고 부르고 그 나라를 관찰하게 되면θεασαίμεθα 그 나라에서 정의와 부정의가 어떻게 생겨나는지γιγνομένην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369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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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에서 수행된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의 요구가 앞으로 소크라테스가 해결해야할 과제들임을 고려하면 이곳에서 소크라테스가 간명하게 정리한 내용은 그 자체로 그들 요구의 핵심은 물론 장차 <국가>가 다룰 기본 주제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것을 내용적으로 구분하면 아래와 같다. 1) 모든 방법을 다해 정의를 구조할 것 2) 논의를 포기하지 말 것. 3) 그 각각(정의와 부정의)가 무엇인지 밝힐 것 4) 정의와 부정의의 이익과 관련한 진실이 무엇인지 자세히 검토할 것. 어떤 일을 수행할 때 과제 수행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수행에 임하는 태도와 수행해야할 과제의 내용이다. 아무리 태도가 훌륭해도 내용이 부적절하면 무의미하고, 아무리 내용이 적절해도 태도가 뒷받침해주지 않으면 부실을 면치 못할 것이다. 1)과 2)는 과제 수행에 임하는 태도로서 적극적인 의미에서건 반성적인 의미에서건 소크라테스에 의해 여러 차례 표명된 바가 있다.(348a-b, 352d, 354b, 368b-c 등) 앞에서 ‘숨을 쉬고 말을 할 수 있는 한, 논의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다짐은 과제 수행자가 가질 수 있는 태도의 극한치를 보여준다. 그 만큼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인 것이다.

* 특히 3)과 4)는 앞으로 소크라테스가 수행해야할 핵심 과제로서 그 표현부터 매우 중요한 철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3)에서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 형제의 요구를 정리하는 차원에서 언급한 것이기는 하지만 흥미롭게도 ‘그것은 무엇인가?ti esti’라는 물음의 대상에 부정의를 포함시키고 있다. 전기 대화편 이래 ‘그것은 무엇인가?ti esti’라는 물음은 사태를 우연적인 속성의 차원이 아니라 본질 그 자체의 측면에서 엄밀하게 규정해줄 것을 요구하거나 물을 때 쓰는 표현이다. 글라우콘 역시 자기가 말하는 것은 정의의 본질적 규정이 아니라 정의가 갖는 여러 우연적 속성들을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여 그 자신이 언급하는 것은 정의의 ‘어떤 것’hoion einai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고(358c) 그 대신 ‘그것이 무엇인지’ti esti라는 표현은 소크라테스에게 엄밀한 의미의 규정 내지 본질을 물을 때 쓰고 있다.(358b) 소크라테스도 제1권을 마무리하며 그간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논의를 이끌어 왔다고 후회하면서(354c) 그 말을 정의에만 한정하여 사용하고 있다. 요컨대 ‘그것은 무엇인가?’ti esti라는 물음은 엄밀한 의미 규정을 자체로 내포하는 실재적 대상에 대해 그것의 정의 내지 규정을 물을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이런 이유로 제1권에서 소크라테스는 부정의를 비판할 때마다 부정의가 엄밀성을 결여하고 있는 무규정적 비실재임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아예 ti esti의 물음 대상에 포함시키지도 않았고 하물며 그러한 결함 하나에 기초하여 부정의에 대한 트라쉬마코스의 입장 자체를 부정하곤 했다. 그런데 글라우콘은 이제 제2권에 들어와 제1권에서 소크라테스가 수행한 논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직격탄을 날린 후에(358b) 소크라테스에게 정의의 규정차원에서 정의가 무엇인가를 물을 때나 쓰던 ti esti를 놀랍게도 부정의에 대해서 물을 때도 함께 사용하고 있다.(358b) 그리고 이런 연후 아데이만토스도 그에 이어 소크라테스에게 정의가 혼 안에서 어떤 작용을 하는지를 물을 때마다 매번(366e, 367b, 367e, 368c) ‘정의와 부정의 각각’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부정의도 정의와 마찬가지로 실체적인 힘을 갖고 현존하는 것임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앞선 강해에서도 수차례 강조했듯이, 부정의가 근본적으로 형상적 실재성을 가질 수 없는 비존재라는 것에 기초하여 논리적 규정차원에서 그 결핍을 드러내고 비판하는 방식만으로는 결코 현존하는 부정의의 힘을 제거하거나 혁파해내지 못한다는 것을 이제 소크라테스와 아데이만토스 형제들 모두 깨닫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이제 정의의 결핍으로서 부정의의 한계를 비판하는 것을 넘어서서, 부정의가 현실에서 그 자체로 가지고 있는 힘과 영향력의 실체적 현존을 인정한 연후에 그것도 함께 규명되고 비판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 역시 글라우콘의 요구를 받는 형식으로 직접 부정의에 대해서도 ti esti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ti esti는 형상적 실재성을 가진 대상에 대한 정의(定義) 차원의 물음을 넘어 비록 형상적 실재성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나 현실에서 엄연히 실재하는 힘으로 현존하는 한, 그것들에 대한 실질적인 구별과 구분, 이해를 확보하고 그 성격을 최대한 실체적으로 규명하기 위한 물음으로 확대 사용되기에 이른 것이다.

* 정의와 부정의의 이익과 관련한 진실이 무엇인지 자세히 검토할 것이라는 요구 또한 중차대한 의미를 갖는다. 정의가 어떤 좋은 것에 속하는 것인지를 묻는 글라우콘에게 소크라테스는 그 자체로도 좋은 것이지만 결과로도 좋은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에 대해 글라우콘은 정의가 그 결과 때문에 값어치가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 때문에 좋은 것인지에 방점을 두고 대답해주기를 요구한다.(367c) 그러나 여전히 정의가 결과 때문에도 좋은 것임이 밝혀져야 한다. 즉 정의는 현실적으로 이득을 가져다주는 것이어야 한다. 어쩌면 이 점이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더 큰 관심사이다. 4)의 요구는 제1권 마지막 부분에서 단편적으로 다루어진 이익과 행복과 관련하여 정의가 갖는 우위를 이제 본격적이고도 실질적으로 다루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플라톤의 정의론은 이른바 오늘날 윤리학적 기준에 따른 동기주의 내지 법칙주의 또는 결과주의 그 둘의 성격을 모두 함께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그 둘을 함께 통일적으로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원천적으로 그 구분 어디에도 선택적으로 귀속될 수는 없다할 것이다.

* 소크라테스는 이처럼 아데이만토스 형제의 요구를 간명하게 정리한 후에 그들의 요구대로 정의와 부정의가 각각 무엇이고 어떤 힘을 갖는 것인지를 보다 잘 탐구하기 위한 방법을 제안한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탐구 과제가 날카로운 관찰력을 가진 사람이어야 잘 검토할 수 있는 것인데 우리가 그 정도의 유능함을 갖추지 못한 터라 우리 수준에서 해당 과제를 잘 검토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고 말한다. 이때 제시되는 것이 잘 알려진 소문자·대문자 비유이다. 즉, 시력이 나쁜 사람이 어딘가 같은 글씨로 큰 글씨가 있을 경우 그것을 본 다음에 나중에 작은 글씨를 보면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듯이 큰 글씨에 해당하는 것부터 먼저 살펴보자는 것이다.

* 여기서 ‘탐구 과제가 눈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 예리하게 보는 사람의 것’이라는 역문은 원어 paulon(쉬운, 사소한, 낮은 수준의)을 ‘예리한’oksy에 대비시켜 옮긴 것이지만 그와 달리 ‘일거리’τὸ ζήτημα를 수식하는 말로 해석하면 ‘쉬운 과제가 아니라 예리한 관찰력을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거리’로 옮길 수도 있다.

*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흥미롭게도 작은 글씨 즉 ‘개인’ἑνός에 대응되는 큰 글씨가 다름 아닌 ‘나라’πόλις라고 말하고 그 둘의 유사성을 검토해보면서 애초의 과제인 ‘개인의 정의’를 탐구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제안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아래와 같은 측면에서 이해하기 힘든 것이 아닐 수 없다. 1) 개인은 개체인데 반해 나라는 집합체이다. 2) 개인은 유기체인데 반해 나라는 비유기체이다. 3) 개인과 나라는 오늘날 개인주의와 국가주의 내지 전체주의가 그렇듯이 서로 대립적이다. 요컨대 같은 성격을 갖는 것으로 단순하게 대응 확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의아하게도 아데이만토스 형제는 위와 같은 그의 제안에 이의는 고사하고 훌륭한 말씀이라고 호응한다. 어쨌거나 오늘날의 우리로서는 의아하기는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제안과 아데이만토스의 호응 모두가 플라톤의 주도면밀한 의도를 반영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착종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할 것인가? 그곳에 숨겨진 플라톤의 의도는 무엇일까? 이 점과 관련하여 일단 최대한 플라톤의 생각을 이해하고 다가가는 방식으로 간단히 음미해보기로 하자

* 소크라테스의 제안은 일단 겉으로는 개인과 나라는 크기만 다를 뿐 같은 성격의 것으로서 1대1로 대응된다는 생각을 담고 것으로 들린다. 도대체 개인은 개체이고 나라는 집합체인데 어떻게 1대1로 대응한다는 것일까? 1대1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만약 대응된다면 개인이 모인 그 개인들의 집단과 나라가 대응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우리가 유념할 것은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개인과 나라의 유사성은 모든 면에 걸쳐 있는 것이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탐구하려는 과제는 우리가 앞서 살폈듯이 정의와 부정의가 개인의 혼속에서 어떤 힘을 갖고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해서이다. 그렇게 본다면 소크라테스가 개인과 나라에서 서로 비교해가며 들여다보려고 하는 것은 정의와 부정의가 개인과 나라 각각에서 작용하는 방식과 관련한 유사성이다. 이미 제1권에서도 비록 단편적이나마 개인과 개인들로 이루어진 집단에서 정의와 부정의가 작용하는 방식이란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가 다루어지고 있다. 즉 개인은 물론 나라이건 씨족이건 군대이건 정의가 그 안에 깃들어 있으면 우애와 협동을 일으키는 작용을 하며 부정의가 깃들어 있으면 대립과 불화를 일으키는 작용을 한다. (351e-352a). 그런데 우애와 협동, 대립과 불화는 복수의 것 즉 여럿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인데 어떻게 개인에게서 그런 작용이 일어나는지 제1권에서도 우리는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그리고 그 대답으로서 우리는 제2권 이후에 펼쳐질 개인 영혼의 3분설이 그곳에 전제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 바 있다. 그렇다. 플라톤은 앞으로 드러나게 되겠지만 개인은 3가지 서로 다른 영혼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런 점에서 모종의 집합체이고, 그와 마찬가지로 나라 또한 서로 다른 계층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둘은 서로 유사성을 갖고 있는 집합체인 것이다. 결국 이곳에서 소크라테스가 개인과 나라가 서로 크기만 다를 뿐 1대1로 대응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의와 부정의가 혼들의 집합체로서 개인 내부에서 작용하는 방식과 계층들의 집합체로서 나라 내부에서 작용하는 방식의 유사성인 것이다. 요컨대 개인은 생명체로서는 개체이지만 혼의 구성에 있어서는 나라와 마찬가지로 집합체인 것이다. 이러한 개인 내부에서의 관계방식과 나라 내부에서의 관계 방식 사이의 대응은 이미 본 강해 서두부분에서도 살폈듯이 politeia라는 말 자체가 개인이 자신의 혼들을 다스리는 개인의 삶의 방식이자 동시에 나라가 나라의 계층들을 다스리는 나라의 정치 운영 방식을 의미한다는 점에서도 그 주장은 일단 내적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 그러나 모종의 같은 집합체라고 하더라도 생명체로서 개인들의 혼이 갖는 집합적 성격과 비생명체로서 나라의 계층들이 갖는 집합적 성격을 같은 차원의 것으로 비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전자는 그 자체로 생명의 보전을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며 협동하는 그야말로 생명체이지만 후자의 경우 생물학적 생명체가 아니므로 서로 다른 계층들이 그 자체로 협동적이고 의존적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그것들은 서로 배타적이고 대립적이다. 그래서 일부 메타윤리학자들은 이것은 사상가 개인의 소망과 당위를 사실과 자연으로 여기는 일종의 자연주의적 오류(naturalistic fallacy)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 비판한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이러한 비판이 갖는 타당성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게다가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개인주의적 국가관은 차치하고서라도 이미 이곳에서도 글라우콘은 정의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소크라테스와 다르게 사회계약설적 국가관을 내세우고 있다.(358e-359b) 글라우콘에 따르면 개인들은 개인 내부의 영혼들이 그러하듯 서로 의존적이고 협동적이지 않다. 그들이 모여 약정을 맺고 법률을 만드는 이유만 보더라도 그것은 분명한 사실로 확인된다. 개인들은 모여 살면서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그리고 그에 따라 서로가 서로에 대해 이기적이고 배타적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경험하면서 서로에게서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결국 약정을 맺고 법률을 제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글라우콘의 생각에는 당대 아테네 현실은 물론 당대 주류 지식인들이었던 소피스트들의 국가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소크라테스가 이것을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이곳에서 왜 유기체인 개인과 나라를 내적 관계 맺음의 방식에서 동일한 성격을 갖는 것이라 주장하는 것일까? 사실 이곳은 소크라테스가 그 자신의 정의론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우선 탐구 방식과 관련한 제안을 담고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제안에는 단순히 탐구 방식의 효율성 차원의 내용만 담겨 있지 않다. 소크라테스는 탐구방식을 위한 제언 자체에서부터 이미 글라우콘의 생각을 뿌리 채 부정하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이 부분을 읽어가면서 플라톤의 제안이 갖는 문제점에 대한 의문을 표하기에 앞서 도대체 플라톤은 왜 당대의 주류 지식인들의 생각에 거슬러서까지 유기체인 개인과 비유기체인 나라를 1대1로 대응시켰는가를 들여다보았는지에 대해 우선 숙고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미 탐구 방식과 관련한 제안에는 글라우콘이 대변하는 소피스트 부류의 사회계약설적 국가관과는 정반대의 국가관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플라톤은 나라 또한 생명체인 개인과 동일하게 당연히 유기체적 성격을 갖는 것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더 이상 부정할 수도, 부정해서도 안 될 중차대한 진실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즉 나라와 법률은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개인들이 관습과 타성에 따라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약정을 맺어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나라는 태어날 때부터 본성적으로 서로에게 의존하고 서로에게 다가갈 수밖에 없는 개인들이 협동적 본성을 바탕으로 적극적으로 자신의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성립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바람직한 국가는 이러한 개인의 자연적 본성에 입각하여 그러한 본성을 최대한 구현할 수 있도록 운영되어야 하며 국가의 구성원들 모두 그러한 국가의 기능을 유기적으로 극대화할 수 있는 내적인 협동심과 우애 또한 갖추고 있다. 그러한 한, 각자의 행복을 위한 가장 바람직한 계층 구성 내지 공동체의 성립은 그 자체로 본성에 일치하는 자연적 욕구의 발현이다. 혹자는 플라톤의 이러한 생각이 그의 사상 자체가 국가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것임을 고백하는 것이라고 비난을 한다. 국가주의와 전체주의에서는 개인 보다 나라를 우선으로 생각하고 모든 개인의 행복 또한 나라의 보전과 안녕에 의해 좌우되며 그에 따라 어떤 경우에서건 나라를 위해 충성하고 희생하는 것은 개인들의 당연한 의무로 여긴다. 플라톤이 말하는 나라와 개인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논의에만 기초하더라도 플라톤의 생각은 위와 같은 국가주의 내지 전체주의와 거리가 멀다. 우선 나라와 국가가 유기체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한, 둘의 의존성은 선후상하가 없는 하나의 통일체이다. 그리고 그 유기적인 성격을 개인과 나라로 분리하여 생각하더라도 그들 간의 예속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나라가 행복하려면 각 계층들이 계층 스스로의 욕망에 부응하여 자신들의 기능을 가장 잘 발휘하는 방식으로 그들 서로 완벽한 협동과 조화를 이루어 내야 한다. 즉 나라가 행복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각 계층들의 욕망 구현과 그것을 통한 행복이 담보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계층들의 욕망 구현은 그 계층을 구성한 개인들의 욕망 구현 즉 각 개인의 내면에서 영혼들 간의 조화가 구현되어야 한다. 그런데 개인의 내적 영혼의 조화는 그 자체로 이미 그 개인의 평화와 행복이다. 결국 나라가 행복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이고 궁극적인 조건이자 전제는 결국 개인이 구현하는 개인들 각자의 내적 평화와 행복이다. 이들이 불행하면 개인의 기능이 제 역할을 못하고 개인의 기능이 제 역할을 못하면 계층의 기능이 제 역할을 못하고 계층의 기능이 제 역할을 못하면 나라의 행복은 담보될 수 없다. 물론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개인이 희생될 수 있다. 그러나 그 희생도 자신의 행복을 위한 그 자신의 자발적인 선택의 결과로 받아들여질 수 있어야 하며 그 어떤 강제도 주어져서는 안 된다. 나라의 통치자들 또한 스스로의 본성과 기능에 역행하여 자기만의 권력과 부를 누리면 이미 그 개인 자체가 행복감을 느낄 수 없으며 그 자체로 그 자신은 물론 다른 계층들과 개인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그리고 다른 계층들은 상처나 위협에 대한 자기 방어 능력 내지 복원력이 그렇듯이 그들 스스로의 행복을 위한 자구 노력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며 그들 각자가 건강할수록 그러한 부정의한 권력을 축출하고 정의로운 나라를 회복하는 것도 그 만큼 빨라진다.

* 물론 플라톤의 이러한 생각은 그의 소망을 반영한 것이고 현실에서 그의 생각대로 이루어지기는커녕 그 반대의 경우가 다반사이다. 플라톤 역시 그러한 정의로운 개인과 나라를 구축해내는 것이 당대 아테네 현실 자체가 보여주듯이 결코 쉽지 않은 과제이고 설사 그러한 능력이 자신의 생각대로 인간에게 본성으로 구유되어 있더라도 그것의 발현이 필연적으로 담보되는 것도 아님을 익히 알고 있다. 이런 점에서 소크라테스가 바로 이어서 위와 같은 방식으로 한 나라를 관찰하게 된다면 이 나라의 정의는 물론 부정의 역시 생겨나게 되는 걸 보게 될 것이라고 언급하는 것 또한 의미심장하다. 즉 그는 지금부터 말로써 정의로운 나라를 탐구하되 그저 이상적인 관점에서 낭만적으로 선언하듯 정의를 논하지 않는다. 앞에서도 시시때때로 언급하고 있듯이 이제 정의뿐만 아니라 그러한 정의를 구축해나가는 과정에 수도 없이 도사리고 장애로 부딪칠 수밖에 없는 부정의도 함께 살펴야 한다. 그래야만 당대 소피스트들이 내세우고 있는 주장들이 얼마나 단견에 불과한 것이며 종래는 개인과 나라 모두를 불행과 파국에 빠트리는 것인지가 실질적으로 드러난다. 다시 말해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이 현실에서 제대로 구현되려면 부정의와 그것이 갖는 힘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이해가 병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그가 앞으로 펼칠 국가론은 말 그대로 가장 바람직한 상태의 이상적인 ‘정의론’인 동시에 현실에서 늘 정의를 위협하고 강력한 힘으로 그 쇠락과 변질의 힘으로 작용하는 가장 피폐한 ‘부정의론’이기도 하다. 물론 개인과 나라가 유기체라는 진실은 본질적으로 이미 그것을 구성하는 구성 요소들의 본성적이고도 자발적인 협동성을 전제하므로 그 자체로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을 실현하는 가장 강력한 실천적 조건이다. 그러나 그러한 진실을 전제하더라도 유기체는 언제라도 질병에 걸릴 수 있는 것 또한 진실이다. 그러므로 그 질병의 실체와 극복 방안 또한 함께 논의되지 않으면 건강을 보전할 수 없다.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부정의가 생겨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한 언급은 그러한 배경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나라의 구축이 이루어진 후에 제8권에서 제9권에 걸쳐 정의로운 나라가 직면할 수 있는 현실적인 위협들과 타락의 양상들을 구체적으로 살피고 분석한다.

* 혹자는 이 부분에서 장차 수립될 정의로운 나라에서 어떻게 부정의가 생겨나는 것일까? 부정의가 생겨나는 나라라면 그것은 이미 그것으로 그 나라가 아직 정의로운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의문을 표할 수도 있다. 그러나 누누이 말하지만 지금부터 거론 되는 정의는 형상으로서 정의가 아니라 현실에서 가장 형상에 가까운 상태로 구현된 정의이므로 그것은 다른 한편 늘 부정의로 변할 가능성에 열려 있다. 존재론적으로 말하면 본질적으로는 무규정적인(apeiron) 것이되 그 무규정적인 상태에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자기 동일적인 것(tauthon) 즉 형상 쪽과 닮은(homoion) 상태가 이른바 앞으로 각각 논의될 대상 가운데 하나로 정의이고, 그 무규정 상태에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타자적인 것(heteron), 즉 형상 쪽과 가장 닮지 않은(anhomoion) 상태가 역시 앞으로 각각 논의될 대상 가운데 다른 하나인 부정의인 것이다. 요컨대 정의도 언제든 부정의로 변질될 가능성에 열려 있는 것이고 부정의 또한 언제든지 정의로 회복되고 극복될 수 있는 가능성에 열려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제8권에 실린 나라의 쇠락과정을 플라톤의 쇠퇴사관으로 해석하는 토인비(A. Toynbee)의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플라톤의 정의론은 결코 필연을 담보하는 낭만적 이상론이나 결정론의 체계가 아니며 노력이 수반되지 않으면 언제든 쇠락할 수도, 아니면 그 반대일 수도 있는 가능성의 체계인 것이다. 다만 완전하게 열린 비결정론과 차이가 있다면 플라톤은 그 열린 가능성에서 우리가 지향하고 다가 가야할 목적이 무엇이고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가는 분명하고도 확고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박홍규 선생이 플라톤의 이론을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목적론과 구분하여 ‘동적인 목적론’으로 부르는 것도 그러한 배경에서 일 것이다.(박홍규 <희랍철학논고> 121쪽 참고) 인간은 동적 목적론에 기초하는 한, 끊임없이 결핍에서 충만으로 곧 선을 지향하고 그곳으로 다가간다. 그러나 결핍을 채우려는 노력과 행동이 없거나 참된 지식 대신 무지가 행위를 인도할 경우 인간은 결코 목적으로서 선에 도달하지 못한다.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행동력과 올바른 지식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도 플라톤의 철학은 해체와 무질서, 부정의에 저항하는 끊임없는 지적 노력과 교육, 실천적 연마가 수반되지 않으면 다다르기 힘든 긴장의 체계, 치열한 지적 긴장의 체계, 끊임없는 분투의 체계이다. 플라톤에게 운명론은 끼어들 자리가 없는 것이다.(이정호, ‘박홍규의 존재론적 사유에 담긴 플라톤의 정치철학’, <박홍규의 형이상학> pp.137-142 참고)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㉗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E. 아데이만토스의 결론[366b-367a]

 

[366b]

* 아데이만토스는 보완을 마무리하며 더 이상 무슨 근거로 최대의 부정의보다 정의를 선택할 것인지 반문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최정상의 사람ἄκρων들이 말하듯 부정의를 기품으로 기만해가면서 최대의 부정의를 저지를 수만 있다면 그는 생시에도 죽어서도 신들 앞에서든 인간들 앞에서든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을 것πράξομεν κατὰ νοῦν이라고 말한 후 이 모든 언급을 토대로 아래와 같이 결론을 내린다.

 

[366c-367a]

1) 영혼ψυχῆ이나 육체σῶμα 또는 금전χρῆμα이나 가문γένος에서 남다른 능력이 있는 사람은 정의를 존중하는 마음이 생길 수 없다.

2) 설사 우리가 말한 것들이 거짓이고 정의가 가장 좋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는 부정의한 자들에 대해 상당한 이해심συγγνώμη을 가질 것이며 분노하지도 않을 것이다οὐκ ὀργίζεται.[366c]

3) 신과도 같은 본성을 타고나거나θείᾳ φύσει 또는 부정의가 뭔지 알게 되어서ἐπιστήμην λαβὼν 부정의를 멀리하는 사람을 제외하면 누구도 자발적으로ἑκών 정의롭게 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366d]

4) 다만 용기부족ἀνανδρία, 노령γῆρας, 무력함ἀσθένεια 때문에 부정의를 저지를 수 없는 사람만이 부정의를 비난한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누가 부정의를 저지를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면 그가 가장 먼저, 가능한 한 가장 최대한으로 부정의를 저지른다.[366d]

5) 우리의 이 모든 언급의 원인은 정의의 칭송자들ὅσοι ἐπαινέται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평판δόξα이나 명예 τιμή또는 그로부터 주어지는 혜택δωρεά과 무관하게 부정의를 비난하거나 정의를 칭송하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366e]

6) 정의 부정의 각각이 그것을 지닌 자의 영혼에서 그 자체의 힘으로τῇ αὑτοῦ δυνάμει 무엇을 하는지 신들도 인간들도 주목하지 않았다. 시를 통해서든 사사로운 이야기를 통해서든 혼이 부정의하면 나쁜 것들 가운데 가장 나쁜 것인 반면 정의는 가장 좋은 것임을 논변으로τῷ λόγῳ 충분하게 피력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366e]

7) 여러분들이 이 점을 주장하고 젊은이νέος들을 젊은 시절부터 설득해왔다면ἐπείθετε 젊은이들이 부정의를 행하지 않을까 서로 경계할φυλάσσω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오히려 부정의를 저질러 가장 나쁜 것과 동거하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서 각자가 스스로 각자의 가장 훌륭한 감시자(수호자)φύλαξ가 되었을 것이다.[367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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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생에서 죄를 지으면 죽은 다음일지라도 반드시 천벌을 받는다는 인과응보의 관념은 역설적으로 선이 행복을 가져다주지도, 악이 응징되지도 않는 이승에서의 절망감을 표현한 것이리라. 법칙주의적 도덕론을 대표하는 칸트(I. Kant) 조차 선과 행복의 일치 즉 최고선의 필연성을 담보하기 위해 혼의 불멸과 신적 자유를 요청(Postulat)하고 있다. 아무리 선의지가 보상과 무관한 정언명령으로 주어지는 것일지라도 최소한 선과 행복의 일치는 이승에서든 저승에서든 진실로서 함께 담보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이승이건 저승이건 인과응보의 가능성 그 자체가 부정되고 있을 정도로 정의나 정의로운 신이 자리할 곳이 없다. 부정의한 자는 살아서 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제 뜻대로 산다. 신은 다만 시인들이 일러주듯 오히려 사람들 특히 강자들의 서원과 공물에 지배되는 인위적 관습의 산물일 뿐이다. 아데이만토스의 이러한 언급은 당대 아테네 현실에서 구원과 의지의 마지막 보루인 종교의 영역마저 얼마나 심각하게 물신주의에 젖어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 1)에서 언급되고 있는 사람은 강자 4)에서 언급되고 있는 사람은 약자이다. 그런데 아테이만토스는 의아스럽게도 설령 어떤 이가 앞서의 언급들이 모두 거짓된 것임을 증명할 수 있고 정의가 최선임을 알고 있다 해도 그들에 대해 상당한 이해심을 가지고 있고 분노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정의가 최선임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 라면 오히려 그는 부정의한 사람을 꾸짖고 분노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 이유가 3)에서 해명된다. 그 어떤 이는 정의가 최선임을 알고 있고 증명도 할 수 있지만 이미 그는 당대의 현실에서 강자가 정의로운 사람일 수 있는 경우는 기대하기 힘들 만큼 거의 희박하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그가 말하는 ‘천성적으로 신과도 같은 성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정의가 최선임을 깨달은 지혜로운 사람’이란 극히 소수이며 그 자체로 극히 예외적이고 특수한 경우의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보통의 일상에서 그저 시류에 따라 기득권적 관성에 따라 별 반성 없이 부정의하게 살아가는 대부분의 강자들에게 예외적인 경우를 들어 그들의 부정의를 탓한들 그들이 받아들일 리도 없고 이해할 리도 없다. 물론 약자들은 강자들과 달리 정의를 찬양하고 부정의를 비난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하는 것도 정의 자체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 부정의를 저지를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이며 만약 그들도 힘을 갖게 되면 누구보다도 맨 먼저 그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부정의를 저지른다. 이렇게 보면 이곳에서의 아데이만토스의 언급은 강자이건 약자이건 간에 정의가 최선임을 깨닫는 것 자체가 이미 아테네에서는 낙타가 바늘구명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힘들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종의 아이러니라 할 것이다.

* 그런데 흥미롭게도 아데이만토스는 이렇게 된 현실과 관련하여 강자와 약자들을 탓하고 비난하기보다는 이렇게 되기까지 그들에게 정의가 그 자체로 최선이며 부정의가 최악임을 일깨워주지 못한 정의의 칭송자들에게 그 책임을 묻고 있다. 즉 정의의 칭송자들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부정의를 비난하거나 정의를 칭송함에 있어 평판이나 명예 또는 그로부터 주어지는 혜택과 무관하게 정의를 칭송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현실이 초래되었다는 것이다. 정의 부정의 각각이 그것을 지닌 자의 영혼에서 그 자체의 힘으로 무엇을 하는지를 토대로 정의와 부정의를 찬양하거나 비난해야 마땅함에도 인간은 물론 신들조차 시를 통해서든 사사로운 이야기를 통해서든 누구도 그 점을 논한 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만약 정의의 칭송자들이 정의가 최선임을 젊은이들이 어렸을 적부터 논변으로 충분하게 피력하고 설득해왔다면 젊은이들이 부정의를 행하지 않을까 서로 경계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오히려 부정의를 저질러 가장 나쁜 것과 동거하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 각자가 스스로 각자의 가장 훌륭한 감시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 이러한 아데이만토스의 언급은 장차 펼쳐질 바람직한 정의론의 구축이 타인들의 부정의에 대한 배타적 의심과 배제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 내면에서 정의 자체가 드러내는 힘을 스스로 깨닫고 그것을 토대로 타인이 아닌 자신에 대한 감시자가 되어 부정의를 늘 스스로 경계하면서 그 정의의 온전한 힘을 길러내고 함양하는데 있음을 미리 보여준다. 즉 정의는 이기적인 개인들의 배타적 공존이 아니라 사회협동체의 일원으로서 시민 각자의 내적 반성을 토대로 타자에 대한 적극적이고 자율적인 선의를 구현하는 공동체적 공존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서로를 경계한다’, ‘자신에 대한 감시자’라는 표현에서 ‘경계한다’φυλάσσω와 ‘감시자’φύλαξ라는 표현은 나중 수호자를 나타내는 말 φύλαξ(pylax)와 뿌리가 같거나 같은 말이다. 정의는 타자를 배타적으로 경계하고 타자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늘 자신을 되돌아보며 그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진정으로 이기는 자만이 적으로부터 나라를 수호하는 진정한 수호자이자 자신의 수호자가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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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데이만토스는 언급을 마무리하면서 마침내 소크라테스에게 아래와 같이 요구한다. 아데이만토스의 요구는 곧 이어 살펴보겠지만 지금까지의 자신들의 문제제기가 종국적으로 노리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임과 동시에 새로운 정의론을 펼침에 있어 소크라테스가 대답해야할 핵심 과제, 다시 말해 플라톤이 <국가>를 통해 제시하려는 정의론의 과제가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다.

1-3-2. 아데이만토스의 요구(367a-e)

 

*아테이만토스가 끝으로 소크라테스에게 요구한 사항은 아래와 같다.

  1. a) 정의가 부정의보다 낫다는 것을 주장만 밝힐 것이 아니라 이들 각각이 그것을 지니고 있는 당사자에게 그 자체로αὐτὴ δι᾽ αὑτὴν 무슨 작용ποιοῦσα을 하기에 한쪽은 나쁜 것이지만 다른 한 쪽은 좋은 것인지를 밝혀 줄 것.[367b]
  2. b) 글라우콘이 요청했듯이 평판은 배제해 줄 것. 정의와 부정의 양쪽 각각에서 진짜 평판τὰς ἀληθεῖς δόξας은 제거하지 않고, 그 각각에 거짓된 평판τὰς ψευδεῖς δόξας을 덧붙인다면,εἰ γὰρ μὴ ἀφαιρήσεις ἑκατέρωθεν τὰς ἀληθεῖς, τὰς δὲ ψευδεῖς προσθήσεις, 정의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듯이 보이는 것τὸ δοκεῖν을 찬양하고, 부정의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듯이 보이는 것을 비난하는 것으로 것이라고 그대로 들키지 않고 부정의하게 지낼 것을 권고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겠다. [367b]
  3. c) 동시에 그것은 “정의는 강자의 이익, (자기가 저지르는) 부정의는 자신의 이익, (강자가 행하는) 부정의는 는 약자의 불이익”이라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과 같이 하는 것이라 단언하겠다.[367c]
  4. d) 그러니 정의가 가장 좋은 것, 즉 결과 때문에도 가치가 있지만 오히려 그것들 자체 때문에 가치가 있다는 것, 평판이 아니라 그 자체의 본성으로 인해 좋은 것이라는 점을 찬양해 줄 것.[367d]
  5. e) 정의는 그 자체로 그것을 지닌 자를 이롭게 하고, 거기에서 파생되는 보상이나 평판 따위에 대해 칭찬하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겨라. 정의와 부정의에 관한 어떤 내용의 평판이건 하지 말 것. 소크라테스께서 이 문제를 고찰하시면서 온 생애를 보내셨기 때문이다.[367d]
  6. f) 정의가 부정의보다 더 낫다는 주장만 밝히지 말고 신들이나 남들에게 발각되건 말건 간에 무슨 작용을 하기에 한 쪽은 좋은 것이지만 다른 한 쪽은 나쁜 것인지도 밝혀 줄 것.[367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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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내용과 관련하여 몇 가지 철학적으로 생각해보아할 것들이 있다.

1) 우선 위에서 a)는 아데이만토스가 소크라테스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핵심 내용을 담고 있다. 요컨대 정의와 부정의 각각이 사람의 혼 안에서 그 자체로 무슨 작용을 하기에 한쪽은 나쁜 것이지만 다른 한 쪽은 좋은 것인지를 밝혀 달라는 것이다. 요컨대 ‘정의와 부정의가 혼 안에서 그 자체로 갖는 힘이 무엇인지’가 그의 요구의 핵심 키워드이다. 그런데 아데이만토스의 이러한 요구는 이미 이전의 언급에서도 틈틈이 반복해서 언급되고 있을 정도로 플라톤이 앞으로 펼칠 정의론의 요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중차대한 시사를 담고 있다. 특히 ‘그 자체’αὐτὴ란 말은 간단없이 수차례 반복되고 있다. 글라우콘도 소크라테스로부터 ‘그 자체 때문δι᾽ αὑτὸ만이 아니라 그것에서 생기는 결과 때문에도 좋은 것’이란 답을 끌어낸 후 곧바로 정의와 부정의 각각이 ‘그 자체로’αὐτὸ καθ᾽ αὑτὸ 혼 안에서 어떤 힘을 갖는지(358b)를 듣고 싶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고 또 한 단락 지나가서도 다시 같은 표현을 써서 정의가 ‘그 자체로’αὐτὸ καθ᾽ αὑτὸ 찬양받는 것을 듣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358d) 그리고 아데이만토스 역시 정의를 그 자체로 다루지 않은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글라우콘이 위에서 한 말과 똑같이 ‘그 각각이 그걸 지니고 있는 자와 혼 안에서 있으면서 그 자체의 힘으로τῇ αὑτοῦ δυνάμει 무엇을 하는지’ 답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366e) 마침내 문제제기를 마무리하는 이곳 마지막 부분에서도 단적이고도 결론적인 요구로서 테제의 형식(위 요약문 a)으로 앞서 말한 똑같은 요구를 반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367b) 그것이 갖는 중요성에 대한 부연설명이 주어진 후(367 c~d) 언급 끝부분에서도 다시 한 번 그 테제가 똑같은 내용으로 반복해서 요청되고 있다.(위 요약문 f). 367e) 이처럼 이례적일 정도로 동일 내용을 수차례 반복해서 요청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소크라테스가 앞으로 펼칠 정의론의 방향과 요체는 물론 <국가>의 논의 계획과 관련한 플라톤 자신의 주도면밀한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아데이만토스는 이곳에서 정의가 부정의보다 낫다는 것을 주장만으로 내세울 것이 아니라 실제로 혼 안에서 어떤 작용을 하는지를 보여 달라고 마치 자신의 의견인 언급하고 있지만(367b) 사실 뒤돌아보면 소크라테스 자신 이미 제1권에서 정의가 부정의보다 낫다는 것을 논증하면서 그 스스로 ‘정의와 부정의 각각이 개인 안에서 뿐만 아니라 나라이건 씨족이건 군대건 간에 그 집단 안에 깃들어 있을 경우 어떤 힘과 기능을 가지고 있는지’를 이미 묻고 있다.(351a~352a) 물론 그곳에서는 ‘혼 안에서’라는 말 대신 ‘개인 안에서’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지만 전후 문맥상 그러한 힘과 기능이 혼의 기능임이 충분히 암시되고 있고(352d) 마무리 즈음에 가면 마침내 그것이 혼의 덕ἀρετή ψυχῆς임이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다.(353e)

2) 이전 강해에서도 언급하였지만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가 정의와 부정의 각각에 대해 계속 ‘그 자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눈여겨볼 부분이다. 사실 제1권에서 소크라테스는 ‘그 자체’αὐτὴ라는 말을 엄밀한 의미의 기술 즉 형상적인 것에 대해서만 사용하고 있을 뿐(342a) 아데이만토스의 요구와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문맥에서는(351e~352a) 정의와 부정의에 대해 ‘그 자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 물론 이곳에서도 ‘그 자체’라는 말은 아데이만토스와 글라우콘이 사용한 말이지 소크라테스가 한 말은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면 크게 주의를 기울일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데이만토스 형제의 문제제기가 소크라테스의 정의론을 드러내기 위한 사전 포석의 의미를 갖고 있고 그 포석이 플라톤의 주도면밀한 의도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제2권에 와서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가 정의와 부정의 각각에 그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그냥 흘려보내기 힘든 모종의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게다가 잠시 후(368c) 소크라테스 또한 비록 그들의 요구를 받아 다시 정리하는 형식이기는 하지만 엄밀한 규정 차원의 것을 언급할 때 쓰던 ‘그것은 무엇인가?(ti esti)라는 물음을 정의는 물론 부정의에도 함께 사용하고 있다는 것도 눈여겨 볼 부분이다. 분명 이곳에서 언급되는 정의와 부정의는 개인과 나라에 깃들어 있는 현실의 정의와 부정의로서 이미 형상적인 것은 아니다. 특히 부정의는 정의의 결핍으로서 원천적으로 형상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둘에 ‘그 자체’라는 말은 사용한 것은 부정의에 대한 제1권에서의 엄밀론적 비판이 단지 논파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데 따른 반성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부정의에 대한 혁파와 정의의 수립 내지 정의가 부정의보다 낫다는 진실은 단순히 부정의가 엄밀한 지혜도 덕도 아니라는 비판만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제 정의와 부정의가 개인과 나라 안에서 실제 어떤 힘을 갖느냐를 실질적으로 비교해서 그것을 토대로 정의의 우위성을 증명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위해서는 단지 부정의를 정의의 결핍이라는 소극적 관점에서 접근할 것이 아니라 그 또한 작용력을 갖는 적극적인 현실태이자 모종의 실체적인 성격을 갖는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참주의 통치가 참된 기술도 아니고 참된 앎도 아니라는 것은 누구도 인정한다. 그렇다고 그것이 허위이자 비존재라고 해서 아무런 힘이 없는 것이라고 무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도 있는 막강하고도 주도면밀할 정도의 힘과 기술력을 동반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는 앞으로 펼쳐질 소크라테스의 정의론에 새롭게 부응하기 위해 그 둘 각각에 ‘그 자체’라는 말을 사용하여 실체적 현존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현실에서의 실질적 비교우위를 논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3) 물론 이것이 정의의 형상성과 실체성과 관련하여 플라톤이 견지하고 있었던 기존 입장의 후퇴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부정의는 원천적으로 정의의 결핍이며 억견의 소산이며 그런 의미에서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술도 앎도 아니며 어떤 이유에서든 존재론적으로 실재의 위상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부정의가 그처럼 원천적으로 억견이자 허위일 수밖에 없는 가장 치명적인 근거는 단지 그것이 형상적 일자성을 결여하고 있다는데서 주어진다기보다는 그것이 실재성의 조건으로서 가장 일차적인 선(좋은 것 to agathon)을 결핍하고 있다는데서 주어진다. 요컨대 플라톤에게 있어 진리성과 존재성 여부를 가르는 지고의 기준은 선성의 존재 여부이다. 선성을 제외한 채 엘레아적인 일자성만을 기준으로 현실의 부정의를 들여다 볼 경우 부정의는 그저 무규정적인 비존재일 뿐 그것이 갖고 있는 현실적 작용력의 현존성은 간과되기 마련이다. 이제 그것이 갖는 힘의 현존성을 분간해내야 하고 그 무규정적인 힘들의 분간을 위한 존재론적 토대를 구축하지 않으면 안 된다.

4)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학자와 참주를 사물과 거울에 비친 상으로 비유해서 생각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거울에 비친 상이 사물과 동일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그 상을 사물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그 상은 실재가 아니고 허상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들은 보통 그 거울에 비친 상이 실제 사물이 아니라는 근거를 그것이 실재성을 결여한 허상이라는 데서 찾는다. 그러나 그 상이 실재성을 결여한 것임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근거로서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그 거울상이 허상이기 이전에 이미 철저하게 사물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역상이라는 점이다. 즉 그 거울상은 사물의 모습과 일대일 대응되어 있지만 결정적으로 그 방향이 정반대인 것이다. 굳이 이러한 비유를 드는 이유는 앞에서 거울상이 허상이기도 하지만 역상이기도 하듯이 이른바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참주의 지혜를 무지이자 결핍이라는 이유로 칼같이 부정하기 보다는 일단 사물의 모습을 일대일로 하나하나 대응하는 형식으로 전부 가지고 있되 방향만 정반대인 것 즉 참주 역시 철학자의 지혜에 대응되는 모종의 지혜를 가지고 있되 다만 그 지혜의 방향이 정반대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참주의 지혜와 철학자의 지혜는 모든 면에서 서로 동일하게 대응하고 있지만 방향만은 정반대인 것이다. 그리고 굳이 비유에 기초해서 말하자면 이 방향에 해당하는 것이 곧 선성(to agathon)이다. 다시 말해 이른바 참주의 지혜가 참된 기술이 아니고 참된 앎과 힘이 아닌 근거는 그것이 실재성을 결여한 허상과도 같은 것이기 이전에 실재와 정반대의 역상이라는 점 즉 원천적이고도 결정적으로 선성을 결핍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정의가 정의의 결핍으로서 허위라는 것도 단순히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실재성의 결핍에서 구해지기 이전에 결정적으로는 선의 결핍이라는 관점에서 포착되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부정의는 내지 이른바 참주의 지혜는 선을 결핍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실재성을 갖는 것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 자체로 가지고 있는 힘과 작용력까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일단 철학자와 모든 면에서 일대일로 서로 대응되는 측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 현실에서도 참주는 철학자 왕과 마찬가지로 모두 통치에 있어 막강한 기술과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참주는 선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철학자와 완전하고도 분명하게 구별되고 그 기술과 힘 또한 정반대의 목적을 지향한다. 플라톤에게 그 만큼 선성은 실재성을 가르는 중차대한 지고의 기준이다. 이런 점에서도 선성은 이미 형상 일반의 실재성의 기초로서 엘레아적 일자성을 넘어서 있다.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선(좋음)의 이데아가 이데아들 가운데에서 가장 고차적이며 그 이데아들의 내적 통일성의 근거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그곳에 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플라톤에게 있어 이데아 세계는 물론이고 그것의 모사물로서 우주 역시 이미 그 자체로 선한 것이다. 선성이 곧 존재성의 최고 가치이자 그의 철학의 대전제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여전히 참된 앎이 곧 가장 훌륭한 상태로서 덕이며 덕이 곧 앎이다.(353e) 다만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는 이러한 배경과 구도 위에서 현실의 정의와 부정의 그것들 각각에 그 자체라는 말을 붙여 그것들이 갖는 현실에서의 실체적 힘들의 현존을 인정한 것이고 나아가 철학자와 참주가 각기 가지고 있는 힘을 실질적으로 비교하기 위해 부정의에도 모종의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한 것이다. 그런 토대가 마련되어야만 실질적인 작용력에 기초한 정의의 우위를 증명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5)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이 요구에는 또 하나 의미 있게 주목해야할 것이 담겨 있다. 그것은 그들이 새로운 정의론을 요구하면서 정의의 문제를 개인의 내면 차원 즉 혼의 문제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문제제기는 제1권에서도 암시되었듯이(351e) 바로 이어서 문자의 비유를 통해 나라와 집단의 정의로 확장되고 나중에는 그것들의 유기성이 주도면밀하게 고찰된다. 그러나 어쨌거나 출발은 개인의 정의이고 나라의 정의는 개인의 정의를 보다 잘 살피기 위한 방편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플라톤의 정의론의 토대를 구성하는 것은 행복과 관련하여 정의로운 개인이 갖는 부정의한 개인에 대한 우위성이다. 이 점만 보더라도 오늘날 일단의 정치철학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플라톤의 정의론을 개인이 무화된 전체주의로 몰아가는 것이 얼마나 왜곡된 접근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6) * 위 b)의 내용과 관련하여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갈린다. 해석이 갈리는 배경에는 기본적으로 진짜 평판과 가짜 평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둘러싼 이견이 자리하고 있다. 우선 진짜 평판을 ‘정의와 부정의에 대한 올바른 평판 즉 진실한 의미의 평판’으로, 거짓된 평판을 ‘정의와 부정의에 대한 일반인들의 잘못된 평판’으로 해석하는 경우부터 살펴보자. 이 경우 ‘진짜 평판을 제거하는 것’이 나쁘지 ‘진짜 평판을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은 좋은 태도라고 한다면, 전체 문장 내용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한 태도는 나쁜 태도를 가리키는 ‘정의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그 뒤의 귀결절과 내용적으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바로 앞에 나온 글라우콘의 요청 내용을 360e~361d에서 행해진 요청 내용으로 해석한다. 그곳에서 글라우콘은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사람을 제대로 대비시켜 보기 위해서는 정의로운 사람은 부정의하다는 평판을 받고, 부정의한 사람은 완벽하게 부정의해서 정의롭다는 평판을 받는 경우를 상정해야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곳에서의 요청이 바로 그것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가 정의와 부정의 각각에서 진짜 평판을 제거하고 그것들에 거짓된 평판을 덧붙인 상태 즉 전도된 정반대의 현실 상황을 상정한 상태에서(361c) 그것을 논파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정의를 찬양하는 것이 아님을 여기서 다시 상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입장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원문에서 μὴ(mē)라는 부정어가 수식하는 말을 ‘덧불인다’προσθήσεις에 걸어 번역하고 있다. 우리말 역본에서도 천병희 역본이 그러하다. 즉 천병희 역본은 박종현 역본과 다르게 ‘각각(정의와 부정의)에서 진짜 평판을 제거하고 가짜 평판을 덧붙이지 않는 한, 정의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로 옮기고 있다. 요컨대 가짜 평판이 덧붙여진 정반대의 현실 상황을 상정한 상태에서 그 가짜 평판을 논파를 해야 제대로 정의를 찬양하는 논증이 된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이러한 입장과 달리 진자 평판과 가짜 평판의 의미를 반대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즉 진짜 평판이란 ‘현실 세계에서 현존하는 정의와 부정의에 대한 실제 평판’을 가리키며 가짜 평판은 그러한 현실에서 실재하는 평판과 거리가 먼 ‘소크라테스가 내세우는 평판’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무엇보다 이들은 평판(doxa)이란 이미 그 자체로 진실과 거리가 있는 것이므로 진짜 평판의 의미를 진정한 평판이라는 의미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은 앞의 글라우콘의 요청도 358에서 제기되고 있는 글라우콘의 요청 즉 보수나 평판 차원이 아니라 정의 그 자체의 측면에서 정의의 우위성을 논증해달라는 요청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이들은 μὴ(mē)라는 부정어가 수식하는 말을 앞의 입장과 달리 제거하다ἀφαιρήσεις에 걸어 번역하고 있다. 우리가 읽고 있는 박종현 역본은 그러한 입장에 서있는 것으로 보인다. 박종현 역문을 원문과 비교해가며 옮기면 아래와 같다. ‘이들 양쪽 각각(정의와 부정의)에서 진짜 평판은 제거하지 않고, 그 각각에 거짓된 평판을 덧붙인다면,εἰ γὰρ μὴ ἀφαιρήσεις ἑκατέρωθεν τὰς ἀληθεῖς, τὰς δὲ ψευδεῖς προσθήσεις’ 정의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듯이 보이는 것τὸ δοκεῖν을 찬양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 위의 두 가지 입장 가운데 어느 것이 맞는 것인지 쉽사리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강해자가 보기에는 후자의 입장이 이어지는 문맥과 보다 더 자연스럽게 상통하고 원문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무리가 적다고 판단된다. 이후에 이어지는 내용으로서 앞서 요약문 d), e), f)에 담긴 내용 또한 이제 더 이상 평판 따위를 거론하면서 정의의 우위를 논하지 말고 정의와 부정의 그 자체가 갖는 현실에서의 작용력을 가지고 논해달라는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런 관점에서 b)의 내용을 이후의 내용과 연관시켜 풀어서 해석하면 아래와 같다. “글라우콘이 요청했듯이 평판 따위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배제하십시오. 만약 선생님께서 이들 양쪽에서 현존하는 평판을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둔 상태에서 선생님이 생각하는 현실과 거리가 먼 평판만 그 각각에다 덧붙이신다면 그것은 평판을 평판으로 맞대응하는 잘못된 대응으로 그 또한 실재 정의에 대한 진정한 찬양이 아니라 그저 그런 듯이 보이는 정의의 평판을 찬양한다는 점에서 평판만 가지고 주장하는 트라쉬마코스의 입장과 다를 게 없습니다. 보상이나 평판 따위에 대해 칭찬하는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십시오.”

* ‘선생님께서 이 문제를 고찰하시면서 온 생애를 보내셨기 때문입니다’라는 문장은 플라톤 철학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플라톤 자신의 고백이라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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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보다 강화하여 그를 대신하여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이 수행한 소크라테스 주장에 대한 반론과 요구는 이것으로 마무리된다. 이제 이들의 문제제기에 대한 답변으로서 새로운 차원에서의 소크라테스의 본격적인 정의론이 시작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㉖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 글라우콘은 소크라테스에게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 대한 논파를 넘어서 대안의 구축을 요구하기 위해 트라쉬마코스가 내건 부정의한 현실 그대로를 그 실질적인 내용의 측면에서 실감나게 되살려 낸다. 논의를 시작하면서 정의가 세 가지 ‘좋은 것’τὸ ἀγαθόν, to agathon들 가운데 어디에 속하는 것인지를 묻는 것 역시 소크라테스적 정의의 본질을 드러냄과 동시에 다른 한편 당대의 아테네 현실이 그러한 소크라테스적 정의와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인지를 극명하게 드러내려는 사전 포석의 성격을 갖고 있다. 글라우콘이 소크라테스에게 요구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엄밀론에 입각한 개념적인 차원에서 부정의가 갖는 그 자체로서의 한계에 대한 논리적 논파가 아니다. 제1권에서 트라쉬마코스의 통치자가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트라쉬마코스의 양치기 기술이 엄밀한 의미의 양치기 기술이 아니라는 이유로, 트라쉬마코스의 지혜가 능가 불가능한 엄밀한 의미의 지혜가 아니라는 이유로 각각 거부되고 논파되었지만, 트라쉬마코스의 혼 속에서 작용하며 끊임없이 부정의를 생산하는 힘(dynamis, 351e, 358b)들은 결코 그러한 이유만으로 제거되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부정의는 엄밀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은 제멋대로의 이기적 욕망을 등에 업고 우리의 피폐한 현실을 지배한다. 오히려 일상적 부정의의 양태들의 경우 대부분 논리적으로 어설프고 애매하며 얼마간은 합리적이고 얼마간은 불합리한 것들이 그 근간을 이룬다. 현실은 기본적으로 반대적인 것들이 엉켜있는 무규정적인 것이다. 소크라테스도 결국 자신이 펼친 논증 방식이 갖는 한계를 받아들인다. 제2권에 들어와 소크라테스와 대화자 모두가 이제 목표로 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의 논리적 규정 차원에서의 정의만이 아니다. 그에 못지않은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현실 차원에서 트라쉬마코스 부류의 부정의한 자들의 혼속에서 그 자체로서 현존하며 최대의 작용력을 발휘하는 실질적인 부정의에 대한 혁파이자 그것을 담보하는 실질적인 정의론의 구축이다. 이에 따라 글라우콘은 현실 차원에서 부정의한 자들의 혼속에서 하나같이 정의와 정반대의 힘으로 작용하는 그 자체로서의 실질적인 부정의 즉 현실에서의 부정의의 극단치를 제시하고 그것에 대한 전면적 혁파를 요구한다. 그 극단적 부정의의 현존이 정의 자체에 의해 그 자체로 부정되는 것이야말로 곧 소크라테스적 정의관의 정당성을 드러내는 확실한 증거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제1권에서 엄밀한 의미에서의 형상적 기술에다 붙였던(342a. ‘기술 자체’ἐν αὐτῇ τῇ τέχνῃ, ‘의술 자체’αὐτὴ ἡ ἰατρική) ‘그 자체’αὐτὴ라는 말이 이제 제2권에서는 글라우콘에 의해 현상계의 영역 즉 현실에서 성립 가능한 정의와 부정의의 양 극단치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는 것도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358b. ‘그 각각(정의와 부정의)이 혼 안에 깃들임으로써 그 자체로서는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τί τ᾽ ἔστιν ἑκάτερον καὶ τίνα ἔχει δύναμιν αὐτὸ καθ᾽ αὑτὸ ἐνὸν ἐν τῇ ψυχῇ, 367d. ‘그 자체로 그것을 지니고 있는 자’ὃ αὐτὴ δι᾽ αὑτὴν τὸν ἔχοντα) 이제 플라톤의 기획에 따라 제1권의 엄밀론이 마무리되고 글라우콘을 통해 제2권의 현실론이 개시되면서 부정의에 대한 실질적인 논파의 장은 물론 정의에 대한 실질적인 구축의 장이 열리게 된 것이다.

* 그러나 글라우콘이 제시한 부정의 최대 극단치는 비록 현실의 부정의를 토대로 한 것으로서 그것에 대한 혁명적 대안으로서 소크라테스적 정의관의 극명성을 드러내는 잣대의 성격을 갖는 것이기는 하지만 트라쉬마코스가 내건 부정의한 현실의 실상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의 부정의는 부정의 찬양론자들이 주장하는 극단적인 부정의의 경우들보다 어쩌면 겉으로는 정의 찬양론을 표방하면서 실제적으로는 하나같이 부정의한 경우들이 더 심각하고도 중차대한 부정의의 실상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아데이만토스는 동생 글라우콘의 문제제기에 이어 현실에서 펼쳐질 수 있는 다양한 부정의의 사례들을 당대 아테네 현실을 토대로 다각적으로 펼쳐낸다. 그야말로 두 형제를 통해 현실의 부정의 양상들 모두가, 소크라테스가 물리치고 극복해야할 대상이자 새로운 정의론의 구축을 위한 터파기의 대상들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정의론이 왜 혁명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는지는 그의 정의론이 엄밀한 규정 차원에서 정의가 갖는 전면적 보편성뿐만 아니라 현실 차원에서 이와 같은 부정의가 노정하는 실질적 전면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 당대 아테네의 현실상으로서 앞서 분류한 것들 가운데 <C. 비주류 신비주의 밀의 종교 생활 영역>에서의 부정의의 실상에 대해서는 앞서 예고한 대로 좀 더 보충설명이 필요하다. 363c와 364d에서 언급되고 있는 무사이오스와 그의 아들은 오르페우스교와 엘레우시스 비교와 직접적인 연관을 갖는 인물들이다. 무사이오스는 오르페우스의 제자 또는 동료로, 그의 아들 에우몰포스(Eumolpos)는 엘레우시스 비의(秘儀, τελετή)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그리스의 종교 전통에서 중심을 이루는 것은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신화를 통해 전승된 제우스를 정점으로 하는 올림포스 신들에 대한 신앙이다. 그런데 7세기 이후 점차 다소 이질적인 신비주의적 전통이 아테네로 유입되면서 기원전 5세기에 이르면 아테네의 피폐한 현실을 배경으로 다양한 신앙 양태들이 특히 민간 신앙 영역에서 전통 올림포스 종교 못지않은 영향력을 갖기에 이른다. 오르페우스교와 엘레우시스 비의는 그러한 신비주의 전통의 신앙 양태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들이 힘을 얻게 된 것은 이 두 종교 전통 모두 올림포스 종교에서는 크게 부각되고 있지 않은 수난과 부활, 이승과 저승, 영혼과 육체의 분리, 혼의 불멸에 대한 상념과 믿음을 신조의 근본바탕으로 깔고 있기 때문이다.

* 물론 올림포스 종교에서도 디오뉘소스는 주어진 운명을 감당하면서도 두 번이나 다시 태어나 마침내 신적 영원성을 획득했다는 점에서 온갖 수난을 이겨낸 상징적인 사람으로서 아테네인들에게 희망과 구원의 상징으로 추앙되었다. 그러나 그 구원의 핵심을 구성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신적 영원성이고 이른바 이승과 저승의 분리 그리고 이승에서의 행위에 대한 저승에서의 인과응보에 대한 관념이나 혼의 불멸에 대한 상념은 그렇게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오랜 기간 전쟁을 치루며 영웅적인 삶을 살고 영예로운 기억 속에서 영원성을 획득하는 일부의 귀족들을 제외하면, 소박한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늘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그 만큼 사후 세계와 혼의 불멸에 대한 소망은 점차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육체적 고통을 운명으로 안고 살아간 트라케 지방 광산노예들의 경우, 디오뉘소스처럼 운명을 잘 감당하여 신적 지위에 오르는 것은 물론 죽은 후에도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은 가히 본능수준의 열망을 반영한 지고의 믿음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디오뉘소스 신앙은 기원전 5세기 초 아테네 라우리온 지방에서 은광이 발견된 이후 트라케 사람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디오뉘소스 신앙에 기반한 오르페우스교가 민간 신앙 영역에서 뿌리를 내리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특히 오르페우스교에서 디오뉘소스는 올림포스 전통에서의 디오뉘소스와 달리 근동의 영향을 받아 자그레우스 영혼의 현신으로 일컬어지면서 전통 올림포스 종교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의 수난과 부활의 상징으로서 크게 추앙을 받았다. 무엇보다 오르페우스교는 디오뉘소스의 수난과 부활을 토대로 인간의 본질과 관련하여 혼의 불멸과 정화, 저승에서의 인과응보, 윤회전생에 대한 믿음을 근본 신조로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 올림포스 종교에서의 디오뉘소스 신앙과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 이미 오르페우스부터가 저승에 갔다 이승으로 돌아온 사람이다.

* 오르페우스교가 전하는 자그레우스 신화에 따르면 디오뉘소스는 제우스와 페르세포네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제우스가 디오뉘소스에게 자신과 같은 지배자의 지위를 부여하려 하자 티탄족이 그것을 시기하여 디오뉘소스를 찢어 삼켰다고 한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제우스가 티탄족을 번개로 태워 죽였고, 채 삼켜 지지 않은 디오뉘소스의 심장으로 디오뉘소스를 다시 되살려 낸다. 그리고 인간은 그 때 티탄의 몸이 타버려 남긴 재로부터 생겨났다. 이에 따라 인간은 디오뉘소스의 몸에서 나온 재로 인하여 신적인 영혼을 갖게 되었고 동시에 티탄의 몸에서 나온 재로 인하여 육체를 갖게 되면서 끊임없이 육체라는 티탄적 굴레를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을 타고 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비밀스런 입교의식을 통해 자기 정화를 수행해야 하며 그 정화가 온전히 완성되어 순전한 혼으로서 별로 다시 돌아가기 전까지 정화의 정도에 따라 죽은 다음 인과응보의 대가를 치루고 다시 또 윤회전생을 반복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오르페우스교는 올림포스 종교의 디오뉘소스 신앙에 바탕을 두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전통 올림포스 신앙에는 없었던 영육의 분리와 혼의 불멸, 윤회전생에 대한 믿음을 아테네에 뿌리내리게 한 근본 배경이 되면서 플라톤의 철학은 물론 훗날 신의 아들이 겪는 수난과 부활, 저승에서의 심판과 혼의 불멸과 관련하여 기독교 사상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주요 사상적 흐름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물론 플라톤은 오르페우스교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오르페우스교를 보다 합리적인 차원에서 계승하고 개혁했다고 평가되는 피타고라스 교단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이다. 왜냐하면 플라톤은 오르페우스교의 비밀의식이 내포하고 있는 감정적인 체험들과 광란적 행위들에 대해 늘 비판적이었던데 반해 오르페우스교의 정화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던 감정적 요소들 대신 이성을 통한 정신의 고양을 정화의 근본 바탕으로 발전시킨 피타고라스 교단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크게 동감을 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르페우스교는 플라톤이 우려한 대로 기원전 5세기말 피폐한 아테네 현실을 극복하는데 기여하기보다는 이곳에서(364e-365a) 언급되고 있듯이 물질주의에 편승하여 입교 의식(비의秘儀, τελετή)을 기복 신앙과 세속적 서원과 면죄의 방편으로 이용함으로써 아테네 사회를 더욱 피폐하게 하는데 일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 엘레우시스 신앙 역시 비록 오르페우스교와 같은 교단의 성격이 아니라 지모신(地母神) 데메테르를 모시는 정기적인 제의의 성격을 가지면서 수확과 생산을 기원하는 종교적 전통으로 자리 잡은 것이기는 하지만, 그 신앙의 근저에는 저승으로 끌려갔음에도 이승과 저승을 정기적으로 오고 가는 데메테르의 딸 페르세포네에 대한 믿음과 하데스로 납치된 이후 페르세포네를 찾아 헤매다 엘레우시스에서 비의를 통해 켈레우스 왕의 아들을 불사신으로 만들려고 했던 데메테르의 비의에 대한 믿음이 근본 신조로 자리 잡고 있다. 요컨대 엘레우시스 비의 역시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페르세포네적 삶에 대한 소망과 불사에 대한 열망을 바탕으로 민간 영역에서 제의와 기복신앙의 형태로 아테네에 뿌리내렸지만 오르페우스교와 마찬가지로 기원전 5세기말 아테네의 현실을 피폐화하는데 일조했다는 점에서 여기에서 플라톤에 의해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1-3-2. 젊은이들이 직면하게 될 번민과 갈등[365b-366b]

 

*아데이만토스는 이상과 같이 언급한 후, ‘이 모든 언급을 젊은이들νέων이 듣고 마치 날아서 옮겨 앉듯 스치고 이것들을 근거로 자기가 어떠한 사람으로 되어 어떻게 살아감으로써 인생을 가장 훌륭하게 완주하게πορεύω 될 것인지를 능히 결론 내릴 수 있는συλλογίσασθαι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할지’에 관해 서술하기 시작한다. 아테네 젊은이들 모두 마치 핀다로스가 말한 것처럼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자문자답 즉 스스로 묻고서 스스로 대답할 법하다는 것이다.

그 자문자답의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자문 1> ‘높은 성벽τεῖχος으로 오르기 위해 정정당당해야 할까 아니면 부정한σκολιός 속임수ἀπάτη를 써서라도 성벽에 올라 성채 안에서 안전하게 일생을 보낼까?’περιφράξας διαβιῶ[365b]

<자답 1> 사람들은 실제로는 정의롭지만 그런 사람으로 보이지 않으면 아무런 이익도 없고 고역과 손해만 있다고 하지만 현자들이 일러주듯 ‘보이는 것(평판)τὸ δοκεῖν이 진실을 제압하고 행복을 좌우하니 보이는 것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겠다. 앞쪽과 외양은 훌륭함의 음영화σκιαγραφία로 빙 둘러 그려놓되 뒤로는 가장 지혜로운 아르킬로코스의 이악하고 교활한 여우를 끌고 다녀야만 한다. [365c]

<자문 2> 어떤 이는 나쁘면서도 언제까지나 남의 눈을 피하기는 정말 쉽지 않다고 말한다.[365c]

<자답 2> 큰일 치고 쉬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남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정치적 결사συνωμοσία나 당파ἑταιρεία를 결성할 수도 있다. 설득의 교사에게 대중연설δημηγορική과 법정변론δικανική의 지혜를 배워 말로 설득하거나 폭력βιά을 행사하면 욕심을 부리고서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있다.[365d]

<자문 3> 어떤 이는 신들의 눈을 피한다거나 신들에게 폭력을 쓴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365d]

<자답 3> 신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들의 눈을 피하는데 마음 쓸 이유가 없다. 신들이 존재한다면 관습들τῶν νόμων 그리고 시인ποιητής들이 일러준 대로 신들은 제물과 서원, 봉납물에 의해 마음이 동하므로 그것들로 신들의 마음을 돌리게 하면 된다. 이들 양쪽 모두의 이야기를 믿거나 아니면 어느 쪽도 믿지 않거나 해야만 하는데 만약 믿어야만 한다면 우리는 부정의를 저질러야 하며 그런 짓으로 재물을 얻어 공물로 바쳐야만 한다. 정의로울 경우 신들한테 벌을 받지 않을 뿐이지만, 부정의는 갖가지 이득을 가져다준다. 도가 지나친 짓을 하고ὑπερβαίνοντες 잘못을 저질러도ἁμαρτάνοντες 탄원을 하여 신들의 마음을 움직여 벌을 받지 않고 풀려나면 된다.[365d-e]

<자문 4> 어떤 이는 이승ἐνθάδε에서 부정의하면 저승Ἅιδης에서 자신 아니면 자손들이 벌을 받는다고 말한다.[366a]

<자답 4> 입교의식과 사면해 주는 신들이 크게 힘을 쓸 수 있다는 것은 가장 강대한 나라들이 주장하는 바이고 신들의 자손인 시인들, 예언자들 또한 그러하다고 말한다.[366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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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자문자답은 당대 아테네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고민과 갈등의 내용을 적나라하게 담고 있다. ‘마치 날아서 옮겨 앉듯 이것을 근거로 …결론 내릴 수 있는’은 꿀벌들이 빠른 움직임으로 꽃가루들을 수집하여 꿀로 만들어 내는 것에서 착안한 표현으로서 젊은이들이 갖는 높은 수준의 지적 흡입력과 감수성을 표현한 말이다. ‘결론을 내리다’로 옮긴 συλλογίζομαι는 여러 전제들을 토대로 결론을 내리는 추론행위를 나타내는 말로 오늘날 삼단논법(syllogism)의 어원이 되는 말이다.

* 위의 젊은이의 자문자답은 사회진출을 앞둔 당대 젊은이들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심적 갈등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오늘날 사회진출을 앞두고 고민하고 있는 일반 젊은이들과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비록 장래에 관한 문제는 고금을 막론하고 젊은이들의 공통 관심사이기는 하지만 이곳에서의 젊은이들은 명문 가문 내지 귀족 계급에 속하는 젊은이들로서 당대 일반적인 경향이 그랬고 청년 플라톤도 그랬듯이 기본적으로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정계 입문을 앞둔 젊은이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야망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고사하고 다만 혹독한 경쟁 사회에서 어떻게 먹고 살 것인지 그 생존 자체를 고민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언급되는 젊은이들은 장차 폴리스의 미래를 좌지우지하게 될 명문가 자제들로서 정계 입문을 목전에 두고 장차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와 관련하여 기본적으로 세상 권세와 평판의 문제를 주요 관심사로 삼고 있는 자들이다. * 어떤 사람들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세상권세와 평판에 대한 이곳에서의 젊은이들의 고민과 유혹을 공생애를 앞두고 예수가 광야에서 맞이하고 있는 시험과 비교하기도 한다. 어느 시대 누구를 막론하고 지도자로 세상에 나설 사람이라면 세상 권세와 재물, 평판의 문제는 그 스스로 넘어서야할 가장 큰 시험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 <자답 1>에서 현자들οἱ σοφοί은 4세기말 시인들의 선조격에 해당하는 시모니데스 등을 가리킨다. 365c에 인용된 ‘보이는 것이 진실을 제압하며’ 또한 시모니데스의 말이다.(단편 598 Campbell) 음영화σκιαγραφία는 음영을 부각시켜 사물을 표현하는 일종의 스케치화로서 이곳에서는 가식과 환영의 의미를 갖는 부정적인 뜻으로 쓰여 지고 있다.

* <자문 1>에서 성벽으로 옮긴 τεῖχος는 성채의 의미도 갖고 있다. 높은 성벽은 말 그대로 높은 지위와 권력을 의미한다.

* <자답 2>는 당대 젊은이들이 얼마나 소피스트들의 영향 하에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얼마나 연설을 잘 하느냐와 어느 권력가에게 줄을 서느냐는 당대 출세를 꿈꾸는 명문가 청년들의 최우선의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설득이 안 되면 음해성 소송을 걸거나 폭력을 사용하는 일 또한 기원전 5세기 말 아테네 현실에서는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정치적 결사와 당파, 대중연설과 법정변론이 옳고 그름의 잣대가 되어 있는 현실은 오늘날의 부정한 정치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 <자답 3>은 이미 무신론적 사고가 아테네 현실 깊숙이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젊은이들에게 신들은 더 이상 실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단지 관습과 시인들이 지어낸 존재들이다. 그러한 한 종교는 물신주의에 기초한 세속적 서원과 기복양태에 불과한 것이다. 이들 양쪽 다의 이야기를 믿거나 아니면 어느 쪽도 믿지 않거나 해야 한다는 것은 시인과 관습들 모두 내용적으로 서로 다르지 않은 한 통속의 것들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믿어야 한다면 부정의를 저질러야 한다’는 말 또한 당대 시인과 관습들이 얼마나 현실 부정의의 토대 역할을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 <자문 4>, <자답 4> 역시 당대 종교가 특히 아테네와 스파르타 등 최고 강대국 사회에서 얼마나 물신주의, 기복주의에 물들어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른바 일부 신들이(제우스, 디오뉘소스, 헤카테, 데메테르 등) ‘사면해주는 신들’로 따로 지정되어 불리게 된 것도 그러한 배경에서이다. 앞서도 살폈듯이 저승에서의 인과응보 사상은 전통 올림포스 종교에서 보다는 이른바 비주류 전통으로서 신비주의 오르페우스교가 아테네에 자리 잡으면서 광범위하게 유포된 사상이다. 예언자들προφῆται에는 국가가 신전사제로 임명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민간 일반에서 시인들에 대한 앎을 내세워 예언자로 자처하며 금전과 물품을 대가로 서원을 풀어주며 생계를 유지하던 수많은 탁발승들 등 사이비 사제들 모두가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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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데이만토스는 기원전 5세기 말 당대 아테네의 사회 현실 곳곳에 편만해있는 정의의 전도 현상과 사례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후에 그러한 당대 현실에 대한 젊은이들의 내적 고민과 갈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당대 현실이 처한 심각성을 총체적으로 다시 종합 정리 평가하고 있다. 당대 현실이 가져다주는 위기 국면이 사회 전반에 걸쳐 있는 것임에도 아테이만토스가 유독 젊은이들의 생각을 전면에 내세워 논의를 총론적으로 마무리하고 있는 데는 다분히 플라톤의 의도가 숨어 있다할 것이다. 요컨대 아테네의 정의의 전도현상이 아테네가 맞이한 절체절명의 위기국면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 무엇보다 아테네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젊은이들의 위기를 의미하고 또 장차 아테네의 위기가 극복되어야 한다면 그 또한 그 누구보다 젊은이들이 바로 서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나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젊은이들은 장차 사회 지도자급 역할을 수행해야 할 인물들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가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전면적으로 논파하고 규정에서나 실질적 힘에서나 정의를 바로 세우려면 그 무엇보다 이러한 젊은이들을 트라쉬마코스 부류의 주장들로부터 격리시키고 왜 그들과 멀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왜 그렇게 살면 안 되는지를 단적으로 증명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글라우콘이나 아데이만토스가 보기에, 현실은 소크라테스의 기대와 정반대로 젊은이들 대부분이 트라쉬마코스 부류가 주장하는 생각들과 처세관에 기울대로 기울어져 있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에게 새로운 정의론의 구축을 요구하는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의 입장에서는 당대 젊은이들의 내적 고민과 갈등을 소크라테스가 답변해야할 안티테제로 있는 그대로 극명하게 제시하는 것이고, 소크라테스로서는 그 무엇보다 그러한 젊은이들로 하여금 정의와 정의로운 삶에 대한 참된 앎을 일깨우고 그러한 앎을 평생을 통해 견지해나갈 수 있는 굳건한 방편과 체제를 확고하게 구축해내는 것이었다. 글라우콘과 아테이만토스의 문제제기가 마무리된 후에 소크라테스가 본격적으로 그들의 요구에 대한 답변으로 문자의 비유를 통해 정의론을 새롭게 구축하면서 다름 아닌 수호자 교육 즉 젊은이들에 대한 교육부터 시작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실제로 그러한 젊은이들을 철학자로 키워내는 교육 프로그램과 그러한 철학자들에 의한 정치체제의 구축이야말로 플라톤이 종국적으로 제시하고자 했던 정의론의 요체였던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㉕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2-4. 논제3: 부정의한 삶이 정의로운 삶보다 낫다(360e-362c)

 

[360e]

* 글라우콘은 이제 세 번째로, 앞서의 사람들이 왜 부정의한 삶이 정의로운 삶보다 낫다고들 말하는지 사람들의 그러한 생각들이 왜 온당한지에 대해 언급한다. 이를 위해 그는 완벽한τέλεον 정상급의ἄκρος 정의로운 사람이 맞이하는 최악의 경우와 가장 완벽한τελεωτάτη 최상급의ἐσχάτη 부정의한 자가 누리는 최선의 경우를 상정하여 서로 대비시킨다.

* 우선 글라우콘은 정의로운 사람이건 부정의한 사람이건 각자가 하고 있는 일에 있어서 완벽한 사람으로 상정하자고 제안한 후, 실제로는 부정의하지만 정의롭게 보이는 최상급의 부정의ἐσχάτη ἀδικία한 자가 맞이하는 최선의 경우와 정의로운 사람이지만 가장 부정의한 자라는 악명을 얻는 최상급의 정의로운 자가 맞이하는 최악의 경우를 아래와 같이 대비시킨다.

 

[361a-c]

 

  1. 가장 완벽한 최상급의 부정의한 자가 맞이하는 최선의 경우

1) 자신의 전문기술에 있어 가능한 기술과 불가능한 기술을 판별할 줄 안다.τά τε ἀδύνατα ἐν τῇ τέχνῃ καὶ τὰ δυνατὰ διαισθάνεται

2) 정상급의 전문기술자의 경우 실수를 하더라도 능히 그것을 바로 잡을 수 있듯이ἐὰν ἄρα πῃ σφαλῇ, ἱκανὸς ἐπανορθοῦσθαι 부정의한 자도 부정의한 짓들을 꾀하되 감쪽같이 제대로 해낸다.

3) 최대의 부정의를 저지르고도 정의롭게 보여δοκεῖν 가장 정의로운 자라는 평판을δόξαν 누린다.

4) 실수를 하여 발각될 경우에도 충분하게 납득시킬 수 있을 정도로ἱκανῷ ὄντι πρὸς τὸ πείθειν 말을 할 줄 안다.

4) 용기와 완력ἀνδρείαν καὶ ῥώμην, 친구와 재산을 통해διὰ φίλων καὶ οὐσίας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최상급의 부정의한 자가 맞이하는 최선의 경우를 상정한 후에 글라우콘은 정의로운 사람을 훌륭한 사람으로 보이기δοκεῖν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훌륭한 사람이기εἶναι를 바라는 사람으로 규정하고 그에게서 정의를 제외하고는 일체의 것을 벗겨 버려서γυμνωτέος 그야말로 가장 완벽한 최상급의 정의로운 자가 맞이하는 최악의 경우를 아래와 같이 상정한다.

 

  1. 가장 완벽한 최상급의 정의로운 자가 맞이하는 최악의 경우

1) 실제로 훌륭하고ἀγαθὸν 가장 정의로운 사람이지만 가장 부정의한 사람이라는 악명κακοδοξία을 얻는다.

2) 이 악명이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아 ἴτω ἀμετάστατος μέχρι θανάτου 남들에게 평생διὰ βίου 부정의한 자로 보인다.

 

3) 이 악명으로 말미암은 결과들로 인하여 유약해지 않도록 하여 정의와 관련된 시험을 받게 한다.

 

[361d]

* 글라우콘은 위와 같은 극단적인 경우들에 대한 대비를 통해 두 경우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행복한지를 판정받게 하자고 제안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두 사람을 판정받도록 함에 있어 어쩌면 그렇게 기운차게 마치 조상(彫像)ἀνδριάς을 닦아내듯 각자를 깨끗이 드러내놓는지ἐκκαθαίρεις 칭찬을 한다. 그러자 글라우콘은 마침내 어떤 삶이 각자를 기다리고 있는지를 서술하는 것은 더 이상 어려울 게 조금도 없다고 말하고 이들이 결국 맞이하는 처지를 아래와 같이 결론 삼아 적나라하게 기술한다. 이것이 부정의가 정의보다 낫다는 사람들의 생각이 온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는 것이다.

 

[361e-361a]

  1. 가장 완벽한 최상급의 정의로운 자가 맞이하는 최악의 삶

1) 태형을 당하고 사지를 비틀리는 고문과 결박을 당하며,μαστιγώσεται, στρεβλώσεται, δεδήσεται, 두 눈이 불 지짐을 당한다.ἐκκαυθήσεται τὠφθαλμώ,

2) 마침내는 온갖 나쁜 일을 겪은 끝에 책형까지 당한다.ἀνασχινδυλευθήσεται

3) 그제야 정의로운 사람이기 보다는 정의로운 사람처럼 보였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γνώσεται ὅτι οὐκ εἶναι δίκαιον ἀλλὰ δοκεῖν δεῖ ἐθέλειν.

 

* 이어서 사람들은 부정의한 자야말로 실제(진실)에 집착하며 일을 처리하는 사람으로서 보이기δοκεῖν(평판)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사람이기εἶναι를 바라는 사람이라고 언급한다. 이러한 글라우콘의 언급은 부정의한 자들 역시 현실에서는 정의로운 자 못지않게 자기 확신에 불타있는 자들임을 반어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것이다. 이후 글라우콘은 이들 최상급의 부정의한 자들이 현실에서 누리는 일들을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1. 가장 완벽한 최상급의 부정의로운 자가 맞이하는 최선의 삶

1) 나라의 통치자가 된다.

2) 자기 자신이 원하는 가문과 혼인을 맺고, 자녀들도 자기가 원하는 사람과 혼인시킨다.

3) 자기가 원하는 누구와도 교제하고συμβάλλειν 거래κοινωνεῖν를 한다.

4) 거리낌 없이 부정을 저질러 이득을 취하여 모든 면에서 덕을 본다.ὠφελεῖσθαι

5) 공적인 경쟁에서나 사적인 경쟁에서εἰς ἀγῶνας나 모두 상대를 압도하고 능가한다.περιγίγνεσθαι καὶ πλεονεκτεῖν

6) 이에 따라 부유하게 되어 친구들은 잘 되게 해주고, 적들은 해롭게 해준다.

7) 신들에게 제물θυσίας과 봉납물ἀναθήματα을 넉넉하고 호사스럽게 바치고 봉납한다.

8) 신들과, 자신이 돌봐주고 싶은 사람들을 정의로운 사람보다 훨씬 더 잘 돌봐 준다.θεραπεύειν

9) 결국 정의로운 사람보다 부정의한 사람이 ‘더 신의 사랑을 받기’θεοφιλέστερον에 적절한 사람이 된다.

 

  1. 결론 : 신들 쪽에서건 인간들 쪽에서건 정의로운 자들보다 부정의한 자들에게 더 나은 삶τὸν βίον ἄμεινον을 준비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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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과 같은 글라우콘의 세 번째 문제 제기에는 우리가 음미해보아야 할 몇 가지 중요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1) 글라우콘은 위와 같은 극단적인 경우를 통해 부정의가 정의보다 낫다는 사람들의 생각을 단적으로 드러낸 후, 소크라테스에게 그러한 사람들의 생각이 과연 맞는지 그른지 완벽하게 판정해줄 것을 요구한다. 사실 위와 같은 극단적인 경우까지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위와 같은 경향성 자체가 현실에서 비일비재하는 한, 그것만으로도 부정의가 정의보다 낫다는 사람들의 생각은 온당하다. 그러나 글라우콘이 여기서 소크라테스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순히 그러한 경향성에 대한 부정과 논파 수준이 아니다. 그것은 정의로운 삶이 부정의한 삶보다 낫다는 것에 대한 완전하고도 압도적인 증명이다. 다시 말해 글라우콘은 그러한 극단적인 경우에서조차도 정의로운 사람이 부정의한 사람보다도 행복하다는 것을 소크라테스가 증명해야만 그야말로 정의가 부정의보다도 낫다는 판정이 바르게κρῖναι ὀρθῶς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2) 이러한 글라우콘의 문제제기는 제1권에서 소크라테스가 엄밀론을 토대로 트라쉬마코스를 논파한 것에 대한 글라우콘 나름의 불만과 그 불만을 토대로 새로 보완 강화된 재반론의 성격을 갖는다. 우리가 앞서 살폈듯이 제1권에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법룰 제정상의 실수 가능성과 관련한 소크라테스의 엄밀론에 기초한 논박에 부딪쳐 결국은 자가당착에 빠지고 만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논박의 토대가 된 엄밀론에 입각한 엄밀한 의미에서의 통치자 즉 실수를 하지 않는 통치자나 기술자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실의 통치자와 유리된 추상적 개념적 존재일 뿐이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그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그 개념적 존재자에 기대어 다만 트라쉬마코스의 논리적 허점만 파고들어 마침내 논파에 성공한다. 사실 제1권에서 트라쉬마코스의 관심사는 처음부터 정의의 엄밀한 규정과 관한 추상적 논변이 아니라 다만 그 자신이 목도한 현실적 정의관의 엄연한 현존을 드러내는데 있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순전히 자기 방식대로 엄밀론을 토대로 정의의 규정 관련 논의로 논쟁을 이끌어 가고 있고 그에 트라쉬마코스가 휘말려 들어감으로써 결국 소크라테스에게 철저히 논파를 당하게 된 것이다.

3) 그런데 제1권의 위와 같은 귀결은 앞서도 살폈듯이 트라쉬마코스는 물론이고 논쟁에서 이긴 소크라테스에게조차도 불만족을 안겨다 주는 것이었다. 사실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정의관을 그들 소피스트들이 자주 사용했던 엘레아적인 이분법적 논리주의를 역이용하여 논쟁을 성공으로 이끌었지만 정작 트라쉬마코스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트라쉬마코스의 부정의는 논리적으로 논파는 되었을망정 파괴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트라쉬마코스 역시 비록 논쟁은 접었지만 속으로는 자기 생각을 그대로 고수한 채 자신이 펼친 논쟁 과정을 뒤돌아보며 왜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는가 후회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물론 트라쉬마코스가 과연 후회를 했는지 그 후회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트라쉬마코스를 대신하여 소크라테스에게 새로운 도전을 펼치고 있는 글라우콘의 문제제기를 잘 들여다보면 최소한 트라쉬마코스가 소크라테스와의 논쟁을 되돌아보며 했을 법한 불만 내지 후회의 일단이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들어 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이곳에서 글라우콘은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을 이어가면서도 트라쉬마코스와 달리 더 이상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 기술자 개념을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글라우콘은 앞서의 소크라테스와 트라쉬마코스의 논쟁을 지켜보면서 트라쉬마코스가 소크라테스에게 여지없이 논박 당할 수밖에 없게 된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앞서도 지적했듯이 트라쉬마코스가 얼떨결에 소크라테스의 엄밀론에 휘말려 들어갔기 때문이다. 엄밀론이 지향하는 엄밀성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다. 문제는 정의가 문제되고 있는 현실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와 현실의 통치자가 다를 수밖에 없음에도 그 차이가 노정한 논리적 자기모순만을 근거로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논박하고 있다는 점이다. 글라우콘이 제1권에서의 소크라테스의 논박에 대해 불만을 표한 것(358b)도 그러한 논변의 추상성 때문이다. 그러므로 글라우콘은 이른바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 개념을 더 이상 형식 논리 차원에서 규정하기를 거부하고 그것을 아예 현실에 실제로 존재하는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의 완벽한 통치자 개념으로 등치시킨다. 소크라테스 역시 비록 논박에는 성공했지만 그 성공은 트라쉬마코스의 마음속에 있는 현실의 통치자를 부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통치자가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가 아니라는 것을 단지 논리적 차원에서 부정한 것에 따른 결과임을 깨닫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글라우콘이나 소크라테스는 모두 이제 형식논리적인 엄밀론적 논의를 반복해야 할 이유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동일한 입장에 처해 있다. 그래서 글라우콘은 제2권에서 새로운 문제제기를 함에 있어 ‘각자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있어서 각자 완벽한 사람’(360e)의 의미를 제1권에서처럼 전혀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실수도 저지르되 그 실수를 능히 바로잡을 수 있는 자로 바꾸어 제시하고 소크라테스 또한 완전한 기술자에 대한 그러한 글라우콘의 언급에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4) 글라우콘과 소크라테스가 보여주는 이러한 모습들은 이제 정의에 관한 논의가 단순히 정의의 추상적 규정 차원의 논리적 문제가 아니라 현실의 삶에 현존하는 실제 정의에 대한 논의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와 기술자는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현실의 통치자와 지배자가 실수를 저지른다는 것을 근거로 그들은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와 기술자는 아니다라는 비판은 논리적 차원에서는 의미가 있어도 그것으로 트라쉬마코스가 주장하는 부정의한 현실의 통치자와 기술자의 실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의 부정의한 통치자와 기술자는 있는 그대로의 엄연한 현실 차원에서 그들이 잘못되었음이 비판되어야 한다. 실수는 기술자를 포함한 인간 존재의 실존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소크라테스가 제대로 비판해야할 부정의한 통치자 내지 기술자는 현실적 차원에서 완벽하다고 일컬어지는 그러한 부정의한 통치자이자 기술자이어야 한다. 그런데 실수의 가능성과 기술의 완벽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현실적인 의미에서의 완벽한 통치자와 기술자란,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그 경우 그것을 즉시 바로잡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로 재설정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도 완벽한 부정의한 자의 의미설정과 관련한 글라우콘의 보완은 보다 강력한 설득력을 갖게 된다. 요컨대 글라우콘은 트라쉬마코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비판이 논리적으로는 설득력이 있으나 비현실적이라는 점을 깨닫고 있었고, 소크라테스 역시 자신의 엄밀론에 입각한 비판이 논파에는 효율적인지 몰라도 어떠한 실제적 태도 변화도 담보할 수 없는 공허한 것임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5) 게다가 글라우콘은 정의로운 자이건 부정의한 자이건 각자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서 각자 완벽한 사람으로 상정하고 있다. 제1권에서(350a-c) 소크라테스는 엄밀론에 입각하여 기술을 지식 내지 지혜와 등치시키고 정의로운 자를 지혜 있는 자로, 부정의한 자는 지혜를 가지고 있지 않은 무지한 자로 규정하여 부정의한 자를 원천적으로 전문 기술자의 분류에서 배제하고 있다. 그러나 글라우콘은 여기서 부정의한 자 역시 정의로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각자 자기가 하고 있는 일 즉 각자의 전문영역에서 완벽한 기술 내지 지혜를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상정하고 있다. 사실 부정의한 자들 역시 현실적으로 권력과 능력, 나름의 지혜와 기술을 가지고 자신의 일을 수행하고 있음에도 소크라테스는 단지 논리적 차원에서 결함을 안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그들의 능력이 가지고 있는 기술적 성격을 원천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그러나 글라우콘이 보기에 그러한 소크라테스의 논법은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의 부정의를 도외시하는 추상적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즉 현실에서는 완벽한 정의와 완벽한 부정의라는 기준에 엄밀하게 부합하는 경우는 없으므로 단지 논리적 부정합성만을 근거로 부정의한 자를 무지한 자로 일괄 추론하는 것은 현실과 유리된 공허한 사변일 뿐이다. 그러므로 부정의한 자들 또한 현실적으로 그 결함을 극복해가며 완벽을 도모하는 자들로 받아들이되 다만 그러한 상태 하에서 정의로운 자와 부정의한 자 가운데 누가 과연 현실적으로 더 행복한지를 판정하자는 것이다.

6) 요컨대 글라우콘은 제1권에서 엄밀론을 토대로 전개된 정의에 관한 추상적 논의를 거부하고 현실론을 토대로 하는 실질적인 정의론으로 대체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다시 말해 글라우콘은 트라쉬마코스를 이어 받되 정의가 문제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고 보완하는 방식으로 보다 실질적으로 정의에 관한 논의를 전개해갈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정의에 관한 논의에서 논리적 추상성에만 매달리는 것에 대한 한계는 글라우콘 뿐만 아니라 소크라테스 역시 동감하고 있다. 사실 제1권에서 논쟁의 바탕을 이루는 엄밀론이 종국적으로 판정하는 진리치는 참과 거짓, 있는 것과 없는 것 두 가지 가운데 하나가 배타적 선택지로 주어지지만, 실질적인 현실론에서는 참과 거짓이 섞여 있는 것,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있다는 것이 선택지로 포함되면서 그것의 유동성, 변화성, 양태성, 잠재적 지향성도 학문적 판정의 대상으로 함께 다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글라우콘이 완벽한 사람을 정의함에 있어 실수의 가능성과 완벽성을 공존시키고 있고 소크라테스도 그에 어떤 이의도 달지 않고 있다는 점은 그 자체로 이미 앞으로 전개될 정의론이 현실의 정의를 다루는 실질적 정의론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도 글라우콘의 주장은 제1권의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을 그대로 이어받으면서도 다른 한 편 전혀 그 바탕을 달리하는 재편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러한 재편은 그 자체로 앞으로 전개될 정의론의 토대를 이룰 플라톤 나름의 존재론적 사유의 기본틀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즉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정의론을 위한 사전 터파기 작업으로서 글라우콘의 문제제기를 통해 당대 아테네 사회를 압도하고 있었던 엘레아의 이분법적 존재론이 갖는 한계를 비판하고 그들에 의해 부정되었던 현실의 실재성을 복구하여 그것에 정당한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플라톤 고유의 현실 구제론적 존재론의 지평을 새롭게 열고자 했던 것이다. 요컨대 플라톤에게 자연과 우주는 물론 정의와 부정의가 부딪치고 갈등하는 우리의 현실 역시 존재와 무, 정지와 운동이라는 대립적 요소들이 영혼과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 속에서 운동과 변화의 원인으로 함께 공존하고 작용하면서 서로 다양하고도 복잡한 형태로 상호 관계를 맺어가며 모종의 합목적적 질서를 유지 보존하는 살아있는 유기체였던 것이다.

7) “정상급의 전문 기술자들이 자기의 전문적인 기술에 있어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판별할 줄 알아서 가능한 것들은 하려들되 불가능한 것을 내벼려 둔다.”는 언급도 제1권에서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었던 아래와 같은 언급 즉 ‘기술 자체는 더 이상 결함이 없는 어떤 훌륭한 상태’(342a)라는 언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드러내 준다. 제1권에서도 살폈듯이 엄밀한 의미의 기술이 결함이 없다는 언급은 모든 기술들이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서 보다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 그 자체를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언급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글라우콘의 말은, “플라톤이 말하는 전문기술들이란 각기 고유의 전문 영역을 갖는 것이자 그 고유 영역 내에서 완벽한 수준의 기술력(실수를 바로 잡는 기술도 포함)을 갖고 있는 것”임을 확인해주고 있다. 이를테면 수동 드라이버 기술과 전동 드라이버 기술의 경우, 후자는 전자의 기능적 한계를 넘어서는 보다 발전된 기술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플라톤에게 있어서 그 기술들은 각기 영역을 달리하는 서로 다른 전문 기술일 따름이며 그에 따라 각각의 완벽성을 가늠하는 기준이 따로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그에 따른 전문가도 따로 있는 것이다. 즉 전문가는 인접 기술과 비교하여 자기 기술의 결핍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이 다른 기술임을 인지하고 구별하면서 그 상관관계 하에서 자기 기술에 최선을 기울이는 기술자인 것이다. 즉 플라톤이 말하는 전문 기술자들은 다른 영역의 기술자들 대해 누가 더 뛰어난 기술자인지 아닌지는 관심을 두지 않고 다만 자기와 다른 기술임을 인지하고 구별해가면서 자기 기술 그 자체의 고유한 완벽성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미 그들 모두는 형상계에서나 존재할 법한 엄밀한 의미의 기술자들이 아니라 서로 관계를 맺으며 각기의 영역에서 최선의 전문 기술을 추구하고 구사하는 현실계의 기술자들인 것이다.

8) 가장 완벽한 최상급의 정의로운 자와 부정의한 자들이 맞이하는 삶에 대한 글라우콘의 극단적 대비는 당시 아테네의 현실이 갖는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것으로 제시된 것이긴 하지만, 오늘날의 현실에서도 놀라울 정도로 똑같이 반복되고 재현되고 있다. 플라톤의 통찰에 대한 감탄에 앞서 비감스러운 절망감과 통탄이 우리들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른다. 글라우콘이 열거한 내용들을 하나하나 읽어 가다보면 너무도 자연스럽게 우리들 주변에서 경험하고 목격한 사람들과 사건들이 선연하게 떠오른다. 이런 점에서 글라우콘의 문제제기는 당대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 대해서도 너무도 하나같이 유효하고 심각한 도전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글라우콘의 도전에 과연 소크라테스는 어떠한 답을 내놓을 것인가?

9) 글라우콘이 제시한 극단적 대비는 최선의 정의가 맞이하는 최악의 경우와 최악의 부정의가 맞이하는 최선의 경우를 대비하고 있지만 사실 다른 한편 소크라테스가 지향하는 최선의 상황 즉 최선의 정의가 맞이하는 최선의 경우와 최악의 부정의가 맞이하는 최악의 경우도 함께 대비될 수 있다. 그러나 후자는 글라우콘이 보기에 정의를 찬양하는 입장에서나 제기할 수 있는 것으로서 전자에 비해 현실성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트라쉬마코스를 대변하여 소크라테스에게 도전하는 그의 처지에서 설정자체가 불가능한 대비일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게 그와 같은 최선의 상황과 그것의 현실적 구현 가능성은 그야말로 그 자신 반드시 증명 내지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될 궁극적인 목표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도 <국가>의 논의는 글라우콘의 도전에 대한 극복을 넘어서 당대 현실에 대한 혁명의 성격을 갖는 것이기도 하다.

 

1-3. 글라우콘의 견해에 대한 아테이만토스의 보완(362d-367e)

 

[362d]

* 글라우콘이 이상과 같이 말을 마치자 아테이만토스가 나서서 무엇보다도 마땅히 언급되었어야할 게 언급되지 않았다고 자기 이야기도 마저 들어 달라고 소크라테스에게 부탁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형제가 옆에 있게(돕게) 하라’ ἀδελφὸς ἀνδρὶ παρείη라는 속담을 인용하며 그의 부탁을 허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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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살폈듯이 제1권의 논쟁은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가 활용하던 이분법적 흑백논리를 이용하여 거꾸로 트라쉬마코스 주장을 논파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지만 그 소피스트적 흑백논리가 갖는 허망함만큼 트라쉬마코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반박 또한 허망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의 반박에도 불구하고 트라쉬마코스의 생각은 조금도 바뀐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제2권에 들어와 글라우콘은 정의의 논리적 규정 차원에서 모순을 드러내는 데만 초점이 맞추어진 소크라테스의 논증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고 이제 현실의 삶의 세계에서 엄연히 현존하는 그대로의 부정의의 실상을 소재로 그것의 실질적인 부당성을 증명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따라 글라우콘은 현실에서 가능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대비 즉 최상급의 정의가 맞이하는 최악의 경우와 최상급의 부정의가 맞이하는 최선의 경우를 대비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제 글라우콘이 소크라테스에게 판정을 요구하고 있는 경우들은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 삶아 숨쉬는 현실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목도할 수 있는 사실 차원의 것들이다. 글라우콘의 문제제기는 이러한 점에서 트라쉬마코스의 도전 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갖는다. 그러나 글라우콘이 제기한 사례들은 부정의를 찬양하는 자들이 경험하는 극단적인 경우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에서 부정의의 부당성을 단적으로 드러내기에 가장 좋은 방편들을 제공해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에 대한 비판만으로 현실에서 존재하는 부정의의 양상 모두가 다 드러나고 또 극복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벌어지는 부정의의 양상들은 그밖에도 여러 가지 다양한 양태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정의와 부정의의 전도 양상은 글라우콘이 제기한 사례들에서처럼 부정의를 찬양하는 자들의 생각과 경험 속에만 드러나 있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찬양하는 자들의 생각과 경험 속에서도 엄연히 존재하고 또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경험 속에서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라우콘의 문제제기는 일단 정의론의 문제 영역이 현실의 영역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정의가 전도된 그 현실의 문제 영역 전체를 다 들여다보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려면, 글라우콘이 말한 극단적 정의의 전도 양상들만이 아니라 그것 이외의 나머지 양상들도 모두 다루어져야 한다. 이제 아테이만토스의 문제 제기는 현실 곳곳에 현존하는 그러한 나머지 양상들을 토대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글라우콘의 문제제기를 보다 더 완벽하게 보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제1권에서 소크라테스가 채택한 엄밀론이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의 자기모순을 들추어내는데 머무는 것이었다면 제2권에서 새롭게 채택된 현실론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부정의의 양상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그것들 전체에 대한 진단과 극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아데이만토스의 보완적 문제제기에는 글라우콘이 제시한 극단적인 경우 보다는 다소 강도가 떨어지지만 아테네의 일상적 현실 영역에서 누구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정의의 전도 양상 들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를 끈다. 이를테면 일상의 우리의 가정 영역은 물론이고 생활 속 깊이 침투해 있는 종교 생활 영역 그 중에서도 신비주의적 밀교 영역을 포함해서 일상의 기복주의적이고 물신주의적인 신앙 양태 전역이 아데이만토스의 보완 대상에 포함되어 있다.

 

1-3-1. 정의와 평판(362e-366e)

 

[362e]

* 아데이만토스는 부정의를 찬양하는 쪽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글라우콘의 논지를 한결 더 분명하게하기 위해서는 반대로 정의를 찬양하는 쪽 사람들의 생각도 검토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검토 결과 정의를 찬양하는 사람들조차도 정의 자체 때문이 아니라 뭔가 다른 이유 때문에 그러는 것임이 밝혀진다면 글라우콘의 논지가 더 강해지고 그에 비례하여 소크라테스의 반론의 부담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타 다양한 일상 영역에서도 그러한 정의의 전도 양상이 현존하는 게 사실이라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고 중대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아테네의 일상의 현실 영역 전체에 걸쳐 다소 길게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아버지 혹은 누군가를 돌보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충고 – 가정 영역

* 이들은 자식과 그들의 돌봄을 받는 사람들에게 정의롭게 살라고 충고하며 정의를 찬양한다. 그런데 그 이유는 정의 자체 때문이 아니고 정의로 인해 생기는 명성εὐδοκίμησις 때문이다. 글라우콘이 열거한 좋은 삶의 모습들도 모두 정의롭게 보여서 얻은 명성 때문에 가능한 것들이다. [363a]

 

  1. 전통 종교 생활 영역

* 명성과 평판은 사람들로부터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신들로부터도 주어진다. 그러므로 신들에게 정의롭게 보여 신들로부터 경건한 자라는 평판과 명성을 얻으면 사람들로부터 명성으로 인해 얻은 좋은 혜택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혜택을 신들로부터 받는다.[363a-b]

* 헤시오도스와 호메로스가 전하는 수많은 이야기는 신들에게 정의롭게 보여 신들로부터 평판과 명성을 얻을 경우 얼마나 많은 혜택이 주어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363b-c]

 

  1. 비주류 신비주의 밀의 종교 생활 영역

* 신들로부터 주어지는 혜택들로서 무사이오스와 그의 아들이 들고 있는 것은 앞의 것들보다 더 참신하다. 즉 신들은 정의로운 사람들을 하데스로 인도하여 침상에 기대앉게 하고 머리에 화환을 두르게 한 후 잔치를 베풀고 영원히 술 취한 상태로 지내게 하는데 이런 술 취한 상태를 훌륭함에 대한 가장 좋은 상(賞)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경건한 자들과 신들에 대한 서약에 충실한 자에게는 자손의 자손과 씨족을 뒤에 남게 해준다. 그리고 반대의 경우의 사람들에게는 진창 속에 파묻히게 하고 체로써 물을 떠 나르게 하고 생전에도 나쁜 평판을 갖게 하여 글라우콘이 정의로우면서도 부정의한 자로 평판을 얻은 사람들이 받게 되는 것으로 열거했던 온갖 것들을 받게 된다.[363d-e]

* B에서 나타난 양상은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로 대표되는 아테네의 공식적인 종교 담론에 기초한 것들임에 비해 이곳에서의 양상은 이른바 아테네의 비주류 종교 담론 즉 신비주의적이고 밀의적인 오르페우스 신앙과 엘레우시스 신앙 영역에서 나타나는 것들이다. 이들 신비주의 종교 전통은 추후 자세히 다시 다루기로 한다.

 

  1. 사람들과 시인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되풀이 하는 말. – 양비론적 사고 영역

* 정의는 아름다운 것이긴 하나 힘들고 수고롭다. 무절제와 부정의는 달콤하고 얻기 쉽다. 다만 평판과 법에서만 수치스럽다. (요컨대 무절제하고 부정의하지만 법망을 피하고 정의롭다는 평판만 얻으면 아름다운 것과 달콤한 것을 쉽게 얻고 수치스러울 것도 없다.[364a]

* 대개의 경우 부정의가 정의보다 이득이 된다. 나쁘지만 부유하고 힘을 가진 자들은 행복하고 예우도 받지만 무력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 나은 사람일지라도 업신여기며 깔본다.[364a-b]

* 신들조차 많은 선량한 사람에게 불운과 불행한 삶을 배정하고 반대되는 사람들엔 그 반대의 운명을 내린다.[364b]

* 여기서는 정의를 찬양하는 것도 부정의를 찬양하는 것도 아닌 양비론적 태도를 갖는 자들이 다루어지고 있다. 양비론의 경우 대체로 부정의를 찬양하는 자들이지만 명분상으로는 정의를 찬양하는 자로 보이고 싶은 자들의 행태에서 나타난다. 기회주의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정의의 전도현상인 것이다. 이러한 자들에 신들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당시의 종교 생활 자체가 타락했음을 보여준다.

 

  1. 탁발승과 예언자들이 하는 말.[364c-365a] – 기복주의와 물신주의적 신앙 생활 영역

* 부자들은 그들 자신이나 조상이 저지른 잘못이 있을 경우 제물과 주문 암송 등의 신통력과 연락(宴樂)을 통해 보상받을 수 있다. 사람들은 적은 비용으로 주술과 마법으로 신의 도움을 받고 적을 해칠 수 있다.[364c]

* 신들에 관한 헤시오도스와 호메로스 이야기는 이를 뒷받침해준다.[364d]

* 무사이오스와 오르페우스의 책에 제시된 대로 개인들과 나라는 면죄와 정화의식을 치러야 한다.[364e]

* 제물과 즐거운 놀이를 통한 면죄와 정화의식 즉 입교의식은 저승의 나쁜 일들(벌)에서 벗어나게 해주지만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치르지 않은 자들에게는 무서운 일이 기다리고 있다.[365a]

* 탁발승과 예언자들에 관한 이야기는 현대 사회에서도 자주 목격되는 현상이기도 하지만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공식 종교 생활에 기복신앙과 물신주의가 얼마나 심각하게 스며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앞에서 말한 연락(宴樂)μεθ᾽ ἡδονῶν τε καὶ ἑορτῶν은 의미상 흥과 잔치를 포함한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무속신앙에 나타나는 무당굿을 연상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