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 ㉞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㉞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 – 시인들이 지켜야할 규범(계속)
[378b-e]
* 소크라테스가 우라노스와 크로노스가 저지른 일이 설사 진실일지라도 이 나라에서는 특히 어린이에게는 들려주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자 아데이만토스도 그런 이야기는 적합하지 않은οὐδὲ ἐπιτήδεια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신들끼리 전쟁을 일으키고πολεμοῦσί 서로 음모를 꾸미며 싸움질을 하는ἐπιβουλεύουσι καὶ μάχονται 것으로 이야기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그것 또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οὐδὲ γὰρ ἀληθῆ.(378b) 게다가 수호자들이 서로 증오하게 되는 것을 가장 부끄러운αἴσχιστον 일로 믿게 만들기 위해서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밖에 신들과 영웅ἥρως들이 자기들의 동족과 친근한 이들에게 취한다는 적대행위ἔχθρας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일찍이 어떤 시민πολίτης도 같은 시민을 미워한ἀπάχθομαι 일도 없거니와 오히려 이런 짓은 경건한ὅσιον 짓이 아니라는 것을 설득πείθειν 하려고 한다면 노인γέρων들과 노파γραῦς들이 아이들τὰ παιδία을 상대로 곧바로εὐθὺς 들려주어야 하고(378c) 이들이 좀 더 나이가 들면 이들을 위해 시인들로 하여금 그와 비슷한 이야기 즉 어떤 시민도 같은 시민을 미워한 일이 없다는 이야기를 짓도록 강제해야 한다ἀναγκαστέον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그리고 호메로스가 지은 온갖 신들의 싸움 이야기들은 숨은 뜻ὑπόνοια이 있게 지어졌건 아니건 간에 이 나라에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어린 사람ὁ νέος은 뭐가 숨은 뜻인지 아닌지 판별κρίνειν할 수도 없으려니와 그런 나이일 적에 갖게 되는 생각δόξα들은 좀처럼 씻어 내거나 바꾸기가 어렵기δυσέκνιπτάτε καὶ ἀμετάστατα때문이라는 것이다.(378d)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들에게 훌륭함ἀρετή과 관련해 가능한 한 가장 훌륭하게 지은 것들κάλλιστα μεμυθολογημένα을 듣도록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말한다.(378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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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도 살폈듯이 신들과 영웅들에 관한 부정적인 이야기들을 금지하는 것은 있는 사실을 은폐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실 자체를 부정 내지 폐기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인들을 감독하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이다. 신을 나쁘게 묘사하는 것은 그 자체로 거짓말인데다가 신의 선성이라는 이 나라 최고의 규범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오늘날 자유주의 국가에서도 최고의 규범적 가치로 확립된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 플라톤은 신들이 서로 싸운다는 것은 물론 일찍이 시민이 같은 시민들을 미워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선조들이 서로 싸우지 않았다는 그의 말은 우리가 아는 그리스 역사만 보더라도 사실과 다르다. 다만 이 말은 신의 자손으로서 신들을 닮은 선조들이 본래부터 서로 싸우지 않고 동족으로서 친근하게 지냈음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적 표현이라 할 것이다. 실제로 이곳에서 플라톤이 기존 신화에서 폐기되어야 할 것으로서 내세우고 있는 것들 모두가 신들끼리 시민들끼리 서로 싸우고 증오하고 분열하는 모습들이라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사실 플라톤은 그 자신 평생 동안 몸소 내전을 겪으며 살아왔을 뿐만 아니라 역사를 통해 특히 기원전 5세기 이래 그리스 사회 전체가 평화의 시기가 거의 없을 정도로 동족상잔과 내전의 비극으로 점철되어 왔음을 뼛속 깊이 알고 있었다. 그런 만큼 지금 염증 상태의 나라를 정화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움에 있어 플라톤이 가장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는 두말할 나위 없이 수호자들과 시민들 모두 그리스인이자 아테네인으로서 긍지를 갖고 서로 친하게 지내고 함께 단합하는 일이었을 것이고, 그것을 위해 어려서 부터 한 나라의 시민이자 동족으로서 서로에 대한 우애와 연대의 정신을 마음 깊이 새겨 놓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에 따라 플라톤은 그것이 갖는 중대성의 크기만큼 어린이에게 미치는 중대한 영향을 고려하여 시가교육과정에서부터 엄격한 규범을 세워 위와 같은 신들과 영웅에 관한 부정적인 내용들을 원천적으로 배격하고 오직 신과 관련한 훌륭한 내용들만 듣도록 설계하였던 것이다.
* 그런데 비판적 사고 내지 그것의 함양을 위한 교육의 화신이라고 부를만한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자기가 틀렸다고 여기는 생각들을 교육 대상에게 알려주길 거부하거나 하물며 은폐라도 하려는 듯 보이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 수가 있다. 사실 제대로 된 비판 교육이라면 설사 잘못된 생각일지라도 그것을 감추기 보다는 그것이 왜 잘못인지를 깨닫게 해야 진정으로 그 뭔가를 온전하게 알고 나아가 그와 관련한 비판적 안목도 갖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들도 종종 순진하고 착하기만 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나쁜 일을 당하기 쉬우므로, 그런 나쁜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마치 몸에서 면역력을 기르듯이 어떤 것이 나쁜 것들인지 알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들을 한다. 물론 감수성이 강한 어린이 교육 과정에서는 플라톤의 생각대로 나쁜 것들이 무엇인지 굳이 미리 배우게 하거나 알려 줄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플라톤은 어린이들을 위한 시가 교육과정에서는 물론 일반 시민들이 접하는 시가 작품에도 이러한 내용이 포함되지 않도록 시인들을 강제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플라톤의 언급에서 나타나는 이와 같은 착종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할까?
* 이것을 위해하기 위해서는 나쁜 것의 원인에 대한 플라톤의 생각을 미리 끌어다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의 지성은 혼의 인식 능력에 기초하므로 제대로 된 앎을 얻기 위해서는 혼의 순수성을 잘 보전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그 일이 힘든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인간 존재가 혼만이 아니라 신체도 함께 가지고 태어남으로써 그 신체의 물질성에 의해 원천적으로 혼의 순수성이 방해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방해를 제대로 이겨내지 못할 경우 혼의 인식능력이 크게 떨어져 제대로 된 앎을 가질 수 없고 그로 인한 무지가 그에게 나쁜 일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늘 지성의 훈련 즉 배움을 통해 이 신체가 혼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나쁜 것의 원인은 무지이고 그 무지의 이면에는 물질성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국 인간의 신체가 나쁜 것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신체가 갖는 물질성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어떠한 목적과도 무관하게 막무가내 자기 식으로 움직이는 이른바 물리적 필연이라는 힘을 갖고 있어 인식 능력으로서 혼의 지향성을 흐트러트림으로써 결과적으로 사람에게 사태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갖게 하여 그에게 나쁜 일을 안겨다 준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나쁜 일에 대한 근본책임은 혼의 순수성을 기르기 위한 지적 훈련에 게을리 하여 신체의 힘을 통제해 내지 못한 그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혼의 순수성을 기르기 위한 훈련 즉 혼의 인식 대상인 이데아에 대한 인식 능력을 제대로 수행하기만 하면 그 사람은 사태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고 그에 따라 어떠한 거짓말이나 허위도 간파하여 제대로 사태를 파악하고 주어진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비판적 안목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 대해 제대로 된 비판으로 그 잘못을 알아낼 수 있었던 것도 소크라테스가 트라쉬마코스가 했던 생각을 자신도 미리 다 경험해 봤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소크라테스 자신 사태의 진실을 인지하고 분별해낼 수 있는 힘으로서 혼의 순수성을 보전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분별의 기준으로서 진실 그 자체가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 물론 플라톤의 이와 같은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영국의 경험론자들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들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상은 물론 그것을 인지하는 순수한 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앎이란 순전히 백지와도 같은 마음 상태에 후천적 경험을 통해서 주어지는 감각자료들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참과 거짓은 이른바 혼에 의해 분별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반복적인 경험을 통해서 마음속에 들어온 감각내용을 토대로 분별되는 것이고 그 분별의 기준 또한 그 후천적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경험론적 사고는 오늘날 인식이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경험론적 사고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플라톤의 관점은 경험적으로 충분히 확인되지 않은 불분명한 지식을 사태와 사물의 진실인 양 강제하는 일종의 나쁜 주입식 교육으로 여겨질 수 있다. 사태에 대한 진실은 시행착오 내지 실험이라는 경험의 과정들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물론 플라톤에게도 경험은 앎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플라톤에 따르면 혼은 그 자신과 닮은 것에 더 잘 반응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경험들 가운데 혼의 순수성을 증진시킬 수 있는 경험들은 교육의 한 수단으로 적극 권장된다. 그렇지만 이른바 나쁜 경험들은 특히 어린이들의 경우 미리 배워서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혼의 순수성을 오염시켜 무지를 초래하고 그로부터 나쁜 일들이 야기된다. 이러한 한, 분별없이 시행착오를 감행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물론 삶의 현실에는 누구라도 혼의 순수성과 상관없이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나쁜 일들에 직면하는 경우가 수없이 많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럴 경우에도 오랜 기간의 훈련을 통해 혼의 순수성을 잘 보전하고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그 나쁜 일에 용이하게 대처하거나 이겨내는 능력을 훨씬 더 잘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종교적인 앎이기는 하지만, 비록 인간사에 대한 경험이 적을지라도 배움과 수련을 통해 마음을 닦아 삶의 참된 이치를 깨달으면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이 그 누구보다도 넓고 그에 기초하여 삶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을 분별하고 대처하는 지혜 또한 더욱 깊어진다고 말하는 불교의 가르침과도 일맥상통한다. 요컨대 플라톤에게 과학 영역에서건 도덕 영역에서건, 단순한 습득을 위한 교육에서건 비판적 사고를 위한 교육에서건, 기본적으로 학습은 혼의 순수성을 통해 함양되고 증진되는 것이다.
* 앞서도 언급했지만 ‘숨은 뜻’과 관련한 언급은 자칫 신들의 모든 행적을 모두 합리화할 수 있는 여지를 노정시킨다는 점에서 문제의 소지가 있다. 그리고 설사 신들의 행위 가운데에는 겉으로는 나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좋은 것 즉 숨은 뜻이 있다할지라도 그것은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이들 교육과정에서는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 ‘어린 나이일 적에 갖게 되는 생각들은 좀처럼 씻어 내거나 바꾸기가 어렵다’는 플라톤의 언급은 그가 어린이 교육과정에서 환경적 요소를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1-2-1-1-1 신은 선하다.(378e-380c)
[378e-379c]
* 소크라테스가 어린이들에게 훌륭함ἀρετή과 관련하여 가능한 한 가장 훌륭하게 지은 것들 κάλλιστα μεμυθολογημένα을 듣게 해야 한다고 말하자 아데이만토스는 그게 어떤 것들이며 어떤 설화들μῦθοι인지를 누가 묻는다면 뭐라 답할 것인지를 묻는다.(378e) 이에 소크라테스는 자신들이 시인들ποιηταὶ이 아닌 나라의 수립자들οἰκισταὶ πόλεως임을 환기시킨 후 나라의 수립자들은 시인들이 설화를 지음에 있어 지켜야할 규범τύπος을 세우는 사람들이지 스스로 설화를 지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οὐ αὐτοῖς γε ποιητέον μύθους 말한다.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그렇다면 신들과 관련된 이야기θεολογία에 대한 규범들은 어떤 것인지를 묻고 소크라테스는 서사시ἐπη, 서정시μέλη, 비극시τραγῳδία 어떤 시를 짓건 언제나 신을 신인 그대로 묘사해야 한다.ἀποδοτέος(379a)즉 “신은 참으로 선하므로”ἀγαθὸς ὅ θεὸς τῷ ὄντι 그렇게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아데이만토스가 동의하자 소크라테스는 먼저 <a) 선한 것τὸ ἀγαθόν들은 해롭지 않다. b) 해롭지 않은 것ὃ μὴ βλαβερὸν은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 c) 나쁜 짓κακὸν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쁜 것의 원인κακοῦ αἴτιον일 수 없다.>라는 확답을 얻어내고, 이어서 <a) 선한 것τὸ ἀγαθόν은 유익하다.ὠφέλιμον b) 그러면 선한 것은 잘함의 원인αἴτιονα εὐπραγίας이다.>라는 확답 또한 얻어 낸 후 아래와 같이 결론을 내린다. “그렇다면 선한 것은 모든 것의 원인이 아니라 훌륭한 상태에 있는 것들의 원인τῶν μὲν εὖ ἐχόντων αἴτιον이고 나쁜 것의 원인은 아니다”(379b)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신은 선하기에 ὁ θεός, ἐπειδὴ ἀγαθός 소수의 것들에 대해서ὀλίγων 원인일 뿐 많은 것에 대해서는 원인이 아니며(인간들에게 있어 좋은 것들τἀγαθὰ이 나쁜 것들 보다 훨씬 더 적기ἐλάττω 때문에) 이에 따라 ‘좋은 것의 원인은 신’으로, ‘나쁜 것들의 원인은 신 아닌 다른 것’으로 말해야 한다고 단언한다.(37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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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데이만토스가 소크라테스에게 훌륭한 설화가 뭔지를 묻자 소크라테스는 우리들은 시인들이 아닌 나라의 수립자들로서 시인들이 지켜야 할 규범을 세우는 사람들이지 설화를 스스로 지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답을 한다. 대안이 되는 설화가 무엇인지를 묻는 아테이만토스에게 소크라테스는 직접적인 대답 대신 설화를 짓는 원칙과 규범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장면은 기본적으로 시인들과 철학자들의 일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려는 소크라테스의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 편에서 보면 호메로스 등 큰 규모의 설화를 대신할 만한 설화를 새로 짓는다는 것이 실제로는 어렵다는 플라톤의 현실 인식을 함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앞서도 살폈듯이 플라톤은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면서 수호자 교육에서 당대 아테네 시가 교육 제도를 전면 부인하기보다는 그 기본틀은 유지하되 그것이 갖는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는 방식으로 개혁을 꾀하고 있다. 이것은 기존의 시가 교육이 미치는 영향력이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함부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심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의 이상국가가 백지 상태에서 세워지는 나라가 아니라 염증상태에 있는 현실의 조건들 위에서 그것을 정화하고 개혁하는 방식으로 세워지는 나라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나라의 수립자 즉 철학자란 설화를 짓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에 규범을 세우는 사람임을 강조하고 논의의 국면 또한 그 차이를 드러내는데 있음에도 다른 한편 동시에 철학자가 ‘스스로 설화를 꼭 지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οὐ μὴν αὐτοῖς γε ποιητέον μύθους라고 말하고 있는 부분은 우리의 눈길을 끈다. 왜냐하면 이 말은 이곳의 논의 국면과 어울리지 않게 철학자도 시인들처럼 스스로 설화를 지을 수도 있음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플라톤은 자신의 주장을 보다 깊이 함축적으로 전하기 위해 대화편들 곳곳에서 기존 신화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신화적 표현들을 이용하고 있다. 자신이 직접 신화를 짓고 있는 것이다. 특히 플라톤의 말년의 사상을 가장 깊게 담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는 <티마이오스>편은 가히 이곳에서 가장 훌륭하게 지은 설화들이 무엇인지를 묻는 아데이만토스의 궁금증에 부응이라도 하듯 훌륭함과 관련하여 신들이 행한 최선의 행적들 즉 어떻게 신들이 선한 우주를 만들었는가에 대한 그 자신의 설화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 소크라테스가 언급한 나라의 수립자들이라는 표현은 이곳의 논의가 소크라테스와 아데이만토스가 힘을 합쳐 말로써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는 과정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플라톤의 말년의 대화편 <법률>은 그러한 과정을 한층 구체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법률>에서는 새로운 나라를 수립한다는 전체 구도 하에서 이곳 <국가>가 제시하고 있는 원칙적인 규범들뿐만 아니라 그 규범들에 걸 맞는 세부적인 법률들이 자세하고도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 나라의 수립자들이 신과 관련한 이야기로서 가장 먼저 제시하고 있는 규범 즉 수호자들이 간직해야할 첫째가는 종교적 믿음은 “신은 선하다”, “신은 좋은 것의 원인이고 결코 나쁜 것들의 원인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신과 관련한 이야기’의 원어가 오늘날 ‘신학’의 의미로 쓰이는 θεολογία(theologia)라는 것을 고려하면 위의 규범은 이른바 플라톤 신학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원리이다. 여기서 이 규범은 매우 논리적인 방식으로 제시된다. a)-b)-c)에 이어서 d)-e)를 거쳐 결론에 이르는 추론 과정은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식화한 삼단논법syllogism을 연상케 한다. 실제로 위의 추론 과정은 아래와 같이, ‘신은 선하다’라는 대전제로부터 이어지는 여러 형태의 삼단논법들의 단계를 거쳐 ‘신은 좋은 것의 원인이고 결코 나쁜 것들의 원인일 수 없다’라는 결론을 추론해내고 있다.
우선 a)-b)-c)로 이어지는 추론을 삼단논법들로 분해하면 다음과 같다. <삼단논법 1> 신은 선하다(대전제) 선한 것은 해롭지 않다(소전제) 그러므로 신은 해롭지 않다(결론). <삼단논법 2> 선한 것은 해롭지 않다(대전제) 해롭지 않은 것은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소전제) 그러므로 선한 것은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결론). <삼단논법 3> 선한 것은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대전제) 신은 선한 것이다(소전제) 그러므로 신은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결론). <삼단논법 4> 신은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대전제)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것은 나쁜 것들의 원인이 아니다(소전제) 그러므로 신은 나쁜 것들의 원인이 아니다(결론). 그리고 d)-e)로 이어지는 추론을 삼단논법들로 분해하면 다음과 같다. <삼단논법 4> 신은 선한 것이다(대전제) 선한 것은 유익하고 잘함의 원인이다(소전제) 그러므로 신은 유익하고 잘함의 원인이다(결론). <삼단 논법 5> 신은 유익하고 잘함의 원인이다(대전제) 유익하고 잘함의 원인은 훌륭한 상태에 있는 것들의 원인이다(소전제) 그러므로 신은 훌륭한 상태에 있는 것들의 원인이다(결론). <삼단 논법 6> 신은 훌륭한 상태에 있는 것들의 원인이다(대전제) 훌륭한 상태에 있는 것들의 원인은 나쁜 것들의 원인이 아니다(소전제) 그러므로 신은 나쁜 것들의 원인이 아니다(결론)
* 위 추론들의 결론 즉 ‘신은 선하다’, ‘신은 좋은 것의 원인이고 결코 나쁜 것의 원인일 수 없다’는 결론에서 전자 즉 ‘신은 선하다’ἀγαθὸς ὅ θεὸς라는 말은 그 말 하나만 따로 떼어서 보면 신과 관련한 규범으로서 특별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ἀγαθὸς(agathos)라는 말은 엄격한 의미에서의 도덕적 선morally good의 의미와 함께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좋다good’, ‘유익하다’benefit, ‘능력 있다’capable, ‘훌륭하다’admirable 등의 의미도 두루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에게 ‘신이 선하다’라는 말은 결코 낯선 표현도 틀린 표현도 아니다. 설사 신이 나쁜 일들을 했다하더라도 신은 그들 모두에게 기본적으로 훌륭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신과 관련한 규범으로서 처음 ‘신은 선하다’라고 말했을 때 아데이만토스가 ‘물론이죠!τί μήν;’라고 답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지는 소크라테스의 주장 즉 ‘신은 좋은 것의 원인이고 결코 나쁜 것의 원인일 수 없다’라는 명제는 당대 아테네 사람들로서는 선뜻 이해하기도 동의하기도 힘든 말이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에 의해 앞에서도 지적되었고 이후에도 반복해서 지적되고 있듯이, 기존의 신화에 나타난 신들은 나쁜 일들을 수없이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기서 플라톤이 규범으로 내세우고 있는 ‘신은 선하다’라는 말이 실질적인 의미에서 당대의 신관과 얼마나 거리가 있는 말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실제로 이 말에는 새로 세워지는 정의로운 나라에서 수호자들이 마음속에 간직해야할 가장 중요한 신조, 다시 말해 그들의 삶 전체를 지배할 신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종교적 믿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요컨대 플라톤은 이곳에서 기존 신관의 근간을 부정하고 그 자신의 고유한 새로운 신관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갖는 의미가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는 신화 관련 규범으로서 추가적으로 이어지는 논의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이 명제들을 플라톤 형이상학의 전모를 가장 깊이 있게 그려냈다고 평가되는 그의 말년의 대작 <티마이오스>의 내용과 연관 지어 생각하면, 그 명제들이 갖는 의미는 가히 이곳 <국가>의 논의뿐만이 아니라 대화편들의 논의 전체를 관통하는 플라톤 세계관의 핵심과 바로 직결되어 있다고 말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이곳에서 자세히 길게 논의하기는 우리 강해의 논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아래와 같이 그와 관련한 몇 가지 점만을 음미해보더라도 그 중대성은 지레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우선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는 기본적으로 신들과 관련한 이야기이되 그 내용들 모두 신화의 형식으로 기술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신화를 통해 플라톤이 드러내고 있는 핵심 요체가 다름 아닌 이곳에서 그가 규범으로 제시하고 있는 “신의 선성”과 그 신을 닮은 “우주의 선성”이라는 점, 그리고 그와 같은 우주론적 설화가 그 자신 평생을 통해 구축하고자 한 형이상학적 세계관의 요체를 담고 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신화가 다름 아니라 <국가>에서 다룬 이상 국가를 우주론적 관점에서 뒷받침하기 위한 것임이 <티마이오스> 서두에서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는 점 등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플라톤 철학 연구가들은 <티마이오스>에서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와 그가 자신을 닮은 선한 우주를 만들기 위해 바라본 본paradeigm을 <국가> 제6,7권에서 언급되고 있는 ‘선(좋음)의 이데아’와 연관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플라톤 철학에서 그것이 갖는 중대성만큼 그것이 갖는 철학적 의미에 대한 논쟁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정암고전총서 플라톤 전집 <티마이오스>, 김유석 옮김, 아카넷 2019, 작품 안내 참고)
* 플라톤이 기존의 전통적 신화들은 물론 기원전 5세기 수많은 시인들이 지은 이야기들을 왜 그토록 비판하고 새로운 신관까지 내세울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 그리스인들 특히 아테네인들의 삶과 의식을 지배해온 신화적 세계관 즉 그리스 종교의 기원과 역사 그리고 기원전 5세기의 현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곳 강해수준에서 그것을 다루기에는 너무도 크고 방대한 주제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다만 이곳 논의와 관련하여 그리스의 종교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서만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사실 우리는 신화를 그저 옛날이야기라고만 생각하여 그리스 종교에서 가히 경전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신화의 중요성과 그 의미를 간과하고 있다. 아마도 신화의 내용들이 인간사와 관련된 시문학적 형식을 취하고 있기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리스 종교 역시 체계나 강령은 물론 성직자 같은 사람들도 따로 없었고 굳이 있었다면 다만 신전과 공물을 관리하는 사람 정도만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인들에게 과연 종교라는 것이 있었는지 신화에 나타난 신들을 그들이 과연 믿었는지에 대해 의심을 표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를 사형에 처한 이유가 다름 아닌 신과 관련한 것이었다는 점만을 고려하더라도 아테네인들에게 종교는 비록 오늘날의 기성 종교들이 갖는 양태와 거리가 있어 보여도 오랜 역사 동안 그들의 삶에 깊숙이 자리해 오면서 그들의 삶과 의식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신들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종교로서 특성을 갖추었냐 아니냐를 따지기 이전에 신화의 내용들은 그들의 역사이자 태초 이래 그리스인이자 아테네인으로서 그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 그들의 의식을 규정하고 지배해 온 자명한 사실 그 자체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선조들이 그래왔듯 모두 거리에서건 집에서건 신들의 탁월성과 불멸성을 칭송하며 신들에게 안녕과 행복을 빌었고,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신들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하며 해결책을 구했고 나라의 지도자들 역시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거나 누군가를 비난할 때마다 신들을 끌어들였으며 재판관들 또한 죄를 판정하는 근거로 신들을 인용하였다. 그리고 시인들은 인생사의 제반 일들을 신화를 끌어들이거나 변용해가면서 시로 노래하였고 예술가들 또한 신들을 모형으로 삼아 그들로부터 아름다움의 근거를 찾아냈다.
* 그렇다면 신화를 바탕으로 한 그리스인들의 이러한 종교적 전통은 언제부터 생겨나고 확립된 것일까. 그리스신들 역시 대체로 기원전 3000년 원시시대 이래 그들이 맞이했던 자연에 대한 두려움에서 생겨난 자연신들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후 그것들은 인간들의 소망과 기원에 반응하는 신인동형설적인 존재로 점차 인식되었을 것이고 그것들에 이름이 붙여지고 내력과 성격이 구체화 되면서 불멸성과 탁월성을 가진 신성한 존재로 형상화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우라노스와 크로노스, 가이아와 하데스 등 제우스 이전 신들이 보여주는 다툼과 혼란상은 원시 그리스인들의 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무지 그리고 그것들이 빚어낸 혼돈의 시대를 투영한 것이고, 제우스의 등장 이후 태양신 제우스를 정점으로 나름의 고유한 역할을 갖고 위계를 형성하고 있는 12신들은 자연들에 대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하다고 여겨진 시대 이후에 생겨난 인간의 자연에 대한 이해와 안정감이 투영된 것이라 할 것이다. 이후 이런 경험들이 오랜 기간 반복되고 동시에 집단의 단위가 점차 커지고 사회화되면서 위와 같은 자연신들 이외에 네메시스, 모이라 등 인간의 사회적 삶과 의식을 반영하는 추상적 신들도 생겨나서 도덕과 규범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남하와 정착 과정에서 척박한 환경과 오랜 기간 수많은 전쟁을 겪으면서 부족의 정치적 결속과 단합을 담보하는 이른바 정신적 토대이자 믿음으로서 그리스 종교가 자리 잡게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리스 종교가 제우스를 중심으로 하는 다신론으로 자리 잡게 된 것도 남하 과정에서는 물론 그 과정에서 유입된 이집트 종교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리스인들의 종교적 전통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의 종교 생활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개인의 내면적 구원 의식과 같은 요소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 종교는 근본적으로 씨족이나 부족이라는 집단에 의해 수행되는 전쟁 또는 자연적 재앙이 공동체에 가져다주는 고통으로부터 집단의 공적 제의를 통해 평화와 승리, 안녕과 번영을 비는 것이 기본틀로 자리 잡고 있었고, 개인들과 개별 가문들의 평화와 안정 역시 그러한 공동체의 평안과 직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태초 이래 신들과 관련한 제의 내지 의식의 형태로 발달해왔던 것이다. 그리스인들의 종교가 기본적으로 점술과 예언, 신탁이 중심을 이루고 탄원과 기원에서조차 제의와 제물 봉공이 주축을 이루게 되는 것도 그러한 배경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시원적 배경 하에서 기원전 11세기 이래 발칸 반도에 정착하게 된 아테네인들 역시 매일 신들에게 제의를 행하면서 나라는 물론 그들 자신의 안녕과 행운을 비는 것을 너무도 당연한 일상의 일로 받아들였고 정기적으로 큰 규모의 제의와 함께 축제를 벌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의 이와 같은 내력이 수많은 설화로 구전되어 오다가 기원전 8세기 문자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에 의해 시가의 형식으로 기록되면서 차츰 경전으로서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원전 5세기에 이르면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시는 물론 시인들의 선조 격에 해당하는 시모니데스와 핀다로스의 작품까지 그들의 삶과 의식을 지도하고 이끄는 경전으로 받아들여져 아테네에서는 유년시절부터 청년시절까지 그것들을 의무적으로 암송하며 학습하는 것이 교육과 관련한 중요한 제도이자 관습으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 이처럼 신화는 그리스인들에게 종교적 의식뿐만이 아니라 일상적 삶과 관습 및 행위들에 대한 규범으로서의 성격도 가지게 되면서 사회생활 전반은 물론 개인들에게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아테네의 경우, 기원전 5세기 중반에 접어들어 끊임없이 전란에 휩싸이고 게다가 기원전 5세기 말에 이르러 아테네가 패전을 거듭하면서 시민으로서의 결속도 서서히 무너지고, 파편화된 개인들의 죽음에 대한 공포감도 크게 퍼져나가면서 아테네인들의 종교적 관습도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게다가 기원전 5세기에 들어와 외국과의 잦은 왕래가 이루어지고 거류외인은 물론 외래 사상도 급속하게 유입되면서 오랜 기간 동안 아테네에서 생활종교로서 자리잡아온 신화를 바탕으로 한 전통 종교 이외에, 내세에서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하는 신비주의 전통의 종교들도 하나 둘 생겨나게 되었다. 이른바 디오뉘소스 비의(秘儀) 종교는 그나마 전통적인 종교에서 변용된 신비주의 전통에 속하는 종교이지만, 디오뉘소스 신화의 변용으로서 자그레우스 신화에 뿌리를 둔 오르페우스교와 엘레우시스 비의 종교 등은 비록 유치한 수준이기는 하지만 이른바 원죄에 대한 관념은 물론 대립되는 두 본체 사이의 투쟁으로서 삶의 개념 그리고 신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는 궁극적인 구원의 약속 등 그동안 전통적 아테네 종교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내용들이 이른바 그들의 종교적 신조로 내세워지고 있었다. 게다가 기원전 5세기에는 이오니아에서 발원한 과학과 철학의 흐름이 아테네에 유입된 이래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방식이 제기되면서 기존의 신화에 대한 회의는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파르메니데스의 스승으로 알려진 크세노파네스Xenophanēs(기원전 570-480)가 일찍이 기존의 신들을 냉소한 것은 그러한 변화를 알리는 시작에 불과하였다. 게다가 전통적인 신화에 대한 창조적 변용을 통해 신들을 찬미하던 시인들마저 아테네의 번영과 그 과정에서 급속히 유입된 개인주의와 상대주의 경향을 등에 업고, 신들과 영웅들에 대한 찬미보다는 인간사의 고민과 갈등 들을 작품의 주제로 내세우기 시작하였고, 하물며 신과 영웅들에 대한 냉소와 회의의 눈길도 과감하고도 자유롭게 표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이들의 작품 속에는 전통 신화보다도 더 심각한 수준으로 신들과 영웅들 간의 싸움이 그려져 있음은 물론 인간사와 관련한 그들 사이의 생각과 관점의 차이도 그대로 노출됨으로써 아테네 사회에서 개인주의와 상대주의는 더욱 크게 고취되었다. 당대 아테네에서는 종교적 제의를 거부하거나 임의로 그 형식을 바꾸는 것은 신을 모독하는 것으로 금지되었지만, 기원전 5세기 말 시인들의 신들에 대한 변용이 가히 신성모독에 가까울 정도로 변질되었음에도, 그에 대한 통제는 기이할 정도로 방임되고 있었다. 정치적 통제력이 쇠락해졌기도 하였지만 아테네 지성을 대표하는 막강한 기득권자로서 오랜 기간 공고해질 대로 공고해진 시인들의 지위는 가히 불가침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특권은 소피스트들의 입장과 맞물려 더욱 심화되고 발달되면서 결과적으로 아테네의 멸망을 앞당기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문학의 역사를 통해 수준 높은 문학작품의 저자들이자 자유로운 표현의 자유와 창조적 기풍을 세운 선구자로 높이 평가를 받고 있다.
* 플라톤은 이러한 아테네의 종교적 상황을 목도하면서 오랜 역사 동안 아테네인들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쳐온 신들에 대한 의식과 사고방식을 새롭게 재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다고 플라톤은 그 재편을 위해 전통으로 돌아갈 수도, 당대의 종교적 정황을 그대로 수용할 수도 없었다. 전통으로 돌아가기에는 이미 아테네에 너무나 다양한 사상과 종교들이 유입되어 있었고 당대의 정황을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공동체를 위협하는 상대주의와 개인주의의 그림자가 아테네에 너무도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가히 아테네는 이른바 곪을 대로 곪은 염증상태의 나라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이제 플라톤은 그리스의 기존 종교를 한편으로 계승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 이 과정 모두를 살피는 것은 우리의 논의 범위를 훨씬 벗어난 것이지만 그 과정을 아주 거칠게 요약해서 말하자면, 요컨대 플라톤은 <법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제의의 형식적 측면에서는 전통적인 다신론적 전통종교를 계승하면서도 그 내용과 관련해서는 <국가>가 암시하고 있듯이 철학사적 전통에서 확립된 엘레아적 일원론과 다원론적 세계관과의 조화를 도모하면서 동시에 신비종교를 통해 유입된 영혼불멸에 대한 의식을 토대로 인간의 안녕과 행복 국가 사회의 정의와 번영에 대한 기본 관념을 혁신적으로 바꾸려고 하였던 것이다.
[379d-380c]
이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은 논거에 의거하여 호메로스나 다른 시인들이 생각 없ἀνοήτως이 신을 나쁜 것들의 원인들로 언급한 것들이 잘못임ἁμαρτάνοντος을 분명히 한 후, 그 사례들을 구체적으로 예시해가며 하나하나 비판한다.(379d-380a)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이런 이야기들은 어린 사람νέος들이 듣도록 허용해서는 안 되며 어떤 사람이 이것들을 신이 한 일로 이야기하도록 허용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하고 설령 그게 신이 한 일ἔργα일지라도 그것을 위한 서술로 지금 우리가 찾고 있는 것과 비슷한 것 σχεδὸν ὃν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380a) 즉 신이 올바르고 좋은 일δίκαιά τε καὶ ἀγαθὰ을 했으며 그들은 응징을 당함으로써 이롭게 된 것οἱ ὠνίναντο κολαζόμενοι으로 이야기해야 하고, 어떤 시인이 벌δίκη을 받은 자들이 비참하며ἄθλιοι 신이 그렇게 했다고 말하도록 허용해서는 아니 되고 그와 달리 만일 어떤 시인들이 나쁜 사람들은 응징을 받을 필요가 있고 그 때문에 비참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처벌을 받음으로써 신한테서 은혜를 입은 것’διδόντες δίκην ὠφελοῦντο ὑπὸ τοῦ θεοῦ이라고 말 할 경우에는 허용돼야 한다고 말한다.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신은 선하지만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나쁜 일들의 원인으로 된다는 주장은 모든 방법으로 맞서 분전해야 하며διαμαχετέον 나라가 훌륭하게 다스려지려면 제 나라에서는 ἐν τῇ αὑτοῦ πόλει 나이에 상관없이 운문, 산문 여부에 상관없이 아무도 그런 것을 말하거나 듣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380b) 그런 이야기는 경건하지도ὅσιος 유익하지도σύμφορος 않으며 그 자체로도 모순된οὔτε σύμφωνα 이야기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자 아데이만토스가 그 법νόμος에 대해 찬성한다σύμψηφος고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그 말을 받아 이제 ‘신이 모든 것의 원인이 아니라 선한 것들의 원인임μὴ πάντων αἴτιον τὸν θεὸν ἀλλὰ τῶν ἀγαθῶν을 시인들과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신들과 관련한 법률νόμος과 규범τύπος들 중의 하나로 분명하게 제시한다.(380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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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뿐만이 아니라 <국가> 곳곳에서 소크라테스는 기존의 신화들을 수시로 인용하고 있다. 현대의 독자들로서는 그러한 인용이 논의 주제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내용을 차지한다고 여겨질 수도 있지만, <국가>의 논의가 우선 당대의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있고 당대의 독자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시가가 그들 자신의 생각과 행위를 지배할 정도로 마음 속 깊이 자리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왜 플라톤이 그토록 때마다 신화를 인용하면서 논의를 진행시켜 나가는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우리 강해에서는 앞에서도 그랬지만 여기서는 물론 앞으로도 신화들의 내용을 일일이 설명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신화와 <국가> 논의의 내용적 연관성은 우리말 역본에 실린 주석만으로도 충분히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 앞에서도 신화가 포함하고 있는 ‘숨은 뜻’에 관해 설명한 바가 있다. 플라톤은 신들이 행한 나쁜 짓들에 우리가 모르는 다른 숨은 뜻이 있다고 해도 일단 어린이들에게 그런 이야기들은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이므로 숨겨야 한다고 말한다. 앞서도 살폈듯이 신들의 나쁜 행위를 숨기는 것은 사실의 은폐 차원이 아니라 신이 나쁜 짓을 했다는 것 자체가 거짓말이기 때문에 거짓말 폐기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신들의 행위들 가운데에는 사람들이 보기에 나쁜 짓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선한 뜻을 숨기고 있는 경우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이들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일단 숨기기는 하지만 철학자들은 그 숨은 뜻을 찾아내서 그 선함을 밝혀야 한다. 그냥 밝히지도 않고 숨은 뜻이 있다고만 말하면 자칫 신들의 나쁜 행위를 모두 정당화할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곳의 논의는 비록 숨은 뜻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내용적으로는 숨은 뜻과 관련한 논의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여기에서 플라톤은, 시인들이 신들이 어떤 나쁜 일을 했다고 이야기하고 설령 그게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경우에는 ‘지금 우리가 찾고 있는 것’ 즉 ‘신들이 선하다는 것’을 찾아내어 실제로는 신이 올바르고 좋은 일을 했다는 것을 밝혀내야 하며, 시인들의 이야기들 가운데에서도 그것을 함께 밝히고 있는 이야기들만 허용해야 한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이를테면 신들이 누군가를 응징했을 경우 그 벌을 받은 자들이 비참하고 그렇게 비참하게 한 것이 신들이라고 말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신들은 나쁜 일들의 원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경우 경건하지도 않고 그 자체로도 모순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들이 주는 벌은 사람을 비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마땅히 응징을 받을 필요가 있어서 벌을 받은 것이되 그렇게 처벌을 받음으로써 은혜를 입은 것이라는 것이다.
* 사람에 대한 신들의 응징과 관련한 이곳에서의 플라톤의 언급은 어떤 경우에서든 신들은 선하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법률 차원에서건 종교 차원에서건 형벌 내지 징벌과 관련한 플라톤의 관점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즉 플라톤에게 벌이란 응징의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니라 벌을 받는 자를 이롭게 하는 것 즉 교정(矯正)의 성격을 갖는 것이다. 이처럼 벌을 처단과 응징의 성격이 아니라 교정을 위한 가르침의 일환으로 보는 플라톤의 생각에는 사람들의 내적 변화에 대한 플라톤의 낙관적 믿음이 깔려 있다. 벌을 받는 사람에게 벌은 고통스럽고 일단 강제의 형식을 갖고 부여되지만 교육을 통해 그 사람 스스로 벌의 이유가 교정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면 그 스스로 잘못을 교정할 수 있으므로 나라의 지도자나 철학자는 잘못을 저지르는 구성원들이나 상대에게 늘 그러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아데이만토스는 앞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한 규범을 법nomos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자기도 그에 찬성투표를 하겠다고 말한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신은 선하다’라는 말이 단순히 당위적 규범이 아니라 말로 세우는 정의로운 나라가 제도적 관습으로 채택해야할 최고의 입법 원리 즉 오늘날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종의 헌법적 규정 내지 헌법 정신임을 말해준다. 소크라테스도 아데이만토스의 말에 이의를 달지 않고 그것을 법률과 규범으로 다시 표현하면서 첫째 규범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하고 이제 수호자들이 종교적 신조 차원에서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둘째 규범에 관해 언급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