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철연에서 현재 운영되는 연구분과의 분과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분과 소개나 분과 세미나 결과물, 또는 분과 개인들의 글을 올리는 공간입니다.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김세리

 

“문간에 검은 말이 끄는 검은 마차가 날 데리러 왔으니 떠나야겠소. 어린이를 두고 떠나니 잘 부탁하오.”

 

평생 어린이를 마음에 품고 불꽃같은 열정으로 살았던 그. 33세 짧은 삶을 마감하는 방정환 선생의 유언이다. 생의 끝자락에서도 그의 생각은 오직 어린이에 대한 염려와 걱정뿐. 과연 그에게 어린이는 어떤 의미인가.

 

조선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어린 사람들은 어른의 예속물 또는 부속물 정도로 간주되어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인간이기 보다는 하나의 소유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차별되고 무시당하는 사례들이 비일비재하였다. 물론 어린이라는 개념도 없었으며 불평등하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입장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린이라는 사회적 약자를 하나의 존재로 이끌어내고 그들의 인격을 존중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몸소 할 수 있는 모든 활동을 시도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소파 방정환(小波, 方定煥, 1899~1931) 선생이다. 우리나라에서 ‘어린이’ 개념이 탄생하고 완성된 것은 1920년대 방정환에 의해서였으며, 그 이전에는 ‘소년’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었다. ‘어린이’라는 말이 근대성을 갖기 시작한 것을 1914년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청춘』 창간호에 ‘어린이의 꿈’을 게재하는 것에 기원을 두나 용어가 근대적 개념으로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1920년대 들어와서이다.

 

 

 

 

 

 

 

 

 

[방정환 사진 – 출처:네이버백과]
[색동회 회원 (앞줄 왼쪽부터) 조재호 고한승 방정환 진장섭,
(뒷줄 왼쪽부터) 정순철 정병기 윤극영 손진태 – 출처:한국잡지백년2]

 

방정환을 떠올리면 다양한 수식어가 함께 따라간다. 한국 근대 아동문학의 선구자, 아동교육가이자 아동문화운동가, 소년운동가, 언론·출판인, 천도교 청년운동가, 동화 구연가, 민족운동가 등 그가 살았던 짧은 인생속에서 어떻게 그 수많은 일들을 해내었는지 참으로 의문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모든 활동들은 결국 ‘어린이’를 위한 운동으로 귀결된다. 독립운동가인 그는 나라운명이 미래어른인 어린이에 의해 좌우될 것으로 예측하였다. 그는 여러 강연에서도 “어른이 어린이를 내리 누르지 말자. 삼십년 사십년 뒤진 옛사람이 삼십 사십년 앞사람을 잡아끌지 말자. 낡은 사람은 새 사람을 위하고 떠 받쳐서만 그들의 뒤를 따라서만 밝은 데로 나아갈 수 있고 새로워질 수가 있고 무덤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라며 당장의 현상이 아닌 미래를 예측하는 눈으로 어린이를 대할 것을 강설하였다. 그리고 미래의 희망인 어린이를 대함에 상당히 주체적인 인격으로 분리해야 함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그의 천도교적 정신이 투영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방정환 동상 – 출처:네이버]

 

[소파 방정환 망우산 연보비]

 

천도교 3대 교주 손병희의 셋째 사위이기도 한 그는 천도교청년회, 천도교소년회의 중심일원이었다. 그리고 이미 어린이 시절부터 천도교의 소년입지회 등의 활동을 통해서 천도교 사상을 자연스럽게 터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1대 교주 최제우의 시천주(侍天主)교리, 2대 교주 최해월의 사인여천(事人如天), 3대 교주 손병희의 인내천(人乃天)사상 등으로 이어지는 천도교의 만민평등사상, 인간존중 사상은 방정환의 사회문화운동, 어린이 운동의 바탕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어린이를 하나의 존중의 대상, 인격으로 보고자 하는 바탕에는 그들이 차별에서 벗어난 존재론적 동등성을 부여 받을 수 있다는 기본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소파의 어린이에 대한 애정과 끝없는 사랑과 존중 이면에는 동학의 정신과 나라의 살리고자 하는 구국정신이 동시에 내포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의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선생의 정신적 배경은 잊혀지고, 그저 어린이의 아버지로만 불리고 있으니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있다.

 

[소파 방정환의 동상을 남산에서 어린이 대공원으로 옮기던 날(1987년), 윤석중 선생 – 출처:네이버]

 

 

‘어린이날의 노래’의 시를 지은 윤석중 선생이 회고하는 방정환을 대표하는 두가지는 말은, “정성스러워라”와 “나를 버리라”였다고 한다. 이는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를 버리고 한울님의 한 마음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천도교의 ‘동귀일체(同歸一體)’의 정신과도 일치하는 부분이다. 나를 버린다는 것은 나의 이기심을 버려 비움의 나를 만드는 것이고, 세상을 정성스럽게 맞이한다는 것은 비워진 나를 그 무엇이라도 담을 수 있는 큰 그릇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를 통해서 그러한 세상을 꿈꾸었던 것 같다. 이기적인 것들을 버리고 타인을 배려하는 사회, 어린이가 그러한 마음을 가진다면 그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도 그러할 것이고 그것을 바라보고 배우는 새로운 어린이들도 자연스럽게 따라 성장할 것임을 꿈꾸었던 것은 아닐까?

 

방정환. 그는 짧았던 인생 내내 어린이를 위해 살았다. 소외되었던 어린이의 존엄과 격(格)을 찾아주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였으며, 나아가 어린이를 통해 건설적인 국가 미래를 꿈꾸고자 하였다. 민족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던 그는 1931년 7월 무리한 활동으로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투병하게 되고 33세의 짧은 삶을 마감 하였다. 타계 직전까지 어린이를 위한 동화 집필과 구연에 몰두하였다.

 

“나는 여태 어린이들 가슴에 ‘잔물결’을 일으키는 일을 했소.
이 물결은 날이 갈수록 커질 것이오.
뒷날에 큰 물결, 대파(大波)가 되어 출렁일 터이니
오래오래 살아 그 물결을 꼭 지켜봐 주시오.”

 

기고자: 김세리(한국철학사상연구회)

다산 정약용의 소통과 관련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본 분과에서 동학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으며, 다도(茶道)철학과 오감(五感)을 통한 인간미감(人間美感)을 연구 중에 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이병태

 

‘대학로’는 정확하게는 종로 5가 사거리에서 혜화동 로터리로 이어지는 길을 일컫는다. 글쓴이에겐 이래 저래 인연이 많은 곳이다. 장장 두 세기(世紀)에 걸쳐 인근의 학교를 다녔을 뿐 아니라, 원천징수가 이뤄지는 첫 직장도 같은 동네였다. 필자가 대학을 다닌 곳임을 기려 ‘대학로’란 이름이 붙여진 거라고 강변하고 싶지만, 탄핵 당한 대통령은 자신을 희생하여 기면(嗜眠)에 빠진 우리의 역사 의식을 일깨운 큰 스승이라 지껄이는 것만큼이나 공분(公憤)을 살 일이니 자제하고자 한다. 실제로 이 동네에는 여러 대학들이 몰려 있고 문화·예술 관련 기관이나 공연장도 많아 대학생들이나 청년층 유동인구가 압도적이다. 그러니 ‘대학로’는 꽤 어울리는 명칭이다. 하지만 ‘대학로’의 ‘대학’은 그 뿌리를 더듬을 때 사실 ‘경성제국대’다. 1960년대 지역명이 결정될 무렵엔 이 지역에 서울대학교가 자리잡고 있었고 이 학교의 이미지가 ‘대학로’란 명칭에 가장 강하게 녹아 있긴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그 터와 건물을 비롯하여 서울대학교의 전신은 고스란히 경성제국대학이기 때문이다. 1920년대 민족 지사들의 민립대학 건립운동을 단번에 좌절시키면서 설립된 경성제국대학은 이렇듯 일개 지명 속에서도 여전히 유령처럼 떠돈다.

(사진 1: 경성제국대학의 모습. 본관 등 현재까지 보존된 건물도 있다.)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의 설립은 한국지성사의 지평에서 되돌아 볼 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대사건이었다. 유구한 지적 전통을 삽시간에 뒤흔들어 무너뜨린 까닭이다. 제국 권력의 공식적인 학문·교육 기관이 탄생하면서 한국지성사는 그 정향을 근본적으로 달리하게 된 것이다. 이전에 학문과 교육의 중심이던 지적 전통은 순식간에 시대착오적이며 구태의연한 것으로 위축되었으며, 일본을 경유한 서구발(-發) 전통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식민화의 쐐기랄 수 있는 이 사건에는 피한방울 튀지 않았지만, 참혹하기가 포연 자욱한 전장 못지않았다. 식민지 조선의 인재들은 이제 경전을 덮고 사각모를 쓰기 위해 앞 다퉈 제국의 대학에 입학하려 했지만, 그곳에는 이들을 자기부정으로 이끌 기만의 논리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새롭고도 휘황찬란해 보이는 과학·기술·이론들 이면에는 ‘굴욕’을 ‘영광’으로 여기게 하거나 억압과 굴종의 심화를 ‘진보’와 ‘계몽’으로 나아가는 역사적 숙명이라 강변하는 목소리가 항상 함께 했다. 더욱이 제국이 저작(咀嚼)하여 다시 내뱉은 설익은 서구의 이론들을, 녹녹찮은 지적 전통 위에서 거경(居敬)과 궁리(窮理)를 좇던 인재들이 속속 받아 삼키고 있었다.

탕건 자국이 문신처럼 남아있을 정도로 한학을 깊이 공부한 학생들이 많아 당시 한문 교수였던 다카다 신지(高田眞治)의 실수를 바로잡아준 일화나, 또 다른 한문 교수 다다 세이지(多田正知)가 성균관 후신인 경학원의 대제학 정봉시(鄭鳳時)에게 몰래 과외를 받다 정봉시의 친척이었던 학생에게 들켰던 일 등은 제국대학 설립 이전 조선의 지적 전통이 그 공과를 차치하고 얼마나 단단한 것이었는지 잘 말해준다. 당시 경성제대 입학생 가운데 조선인 학생의 비율은 1/3~1/2 정도였는데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새로운 이론에 젖어들면서도 제국의 논리에 완전히 공감하거나 동화되지는 않았다. 물론 학문권력의 중심지에 몰려든 이들이 대체로 영달의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리라는 점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일부는 서구적 지성사에서 현실의 질곡에 맞서도록 이끌 단초를 애타게 찾았으며 이는 당연히 역사적 상황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겠지만 일정 정도는 옛 지적 전통의 잔향(殘響)이 작동한 결과이기도 했다.

신남철은 1927년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해 ‘철학’을 전공한 이였다. 그의 삶 전체에서 특별히 전통적인 학문적 훈련을 받았다고 여길만한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그의 조선인 동학(同學)들 일부에게 공통적이었던 시대적 정향은 그에게도 여지없이 나타났다. 외려 더 뚜렷했다. 그가 가장 집요하게 매달린 학문적 주제는 ‘역사’였고, 그의 주저 역시 ‘『역사철학』’임은 우연한 사실이 아닌 셈이다. 그는 현실의 억압을 딛고서는 인류의 시간을 집요하게 응시했던 것이다.

(사진 2 : 동아일보 1939년 1월 1일자 ‘新建(신건)할 朝鮮文學(조선문학)의 性格(성격)’이란 기사에 실린 신남철의 사진)

 

주지하다시피 마르크스주의는 그와 같은 신남철의 시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서구 사조였다. 당시 그가 받아들여 체화한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주의의 모국 또는 대국들이 정식화한 역사 인식, 그리고 이에 기반하는 실천적 노선과 다르다는 점에서 ‘수정주의적’이라거나 ‘자유주의적’이라는 수사(修辭)를 받곤 했다. 하지만 달리 보면, 그는 교조적 이론의 기계적 수용과 적용보다 현실을 고려한 창조적 수용을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이같은 변용은 이론과 실천을 아우르는 고뇌의 무게나 상상력의 깊이 없이 불가능함에 틀림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마르크스주의는 신남철 사유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가장 중요한 기반이었고 이 무기를 평생 갈고 닦았던 것인데, 그에게 처음 이 무기를 손에 쥐어준 이는 경성제국대 교수였던 미야케 시카노스케(또는 미야케 로쿠지죠, 三宅鹿之助)라는 인물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신남철은 반(反)‘제국’적 사유의 토대를 ‘제국’ 대학에서 처음 접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미야케는 1928년 4월 18일부터 1934년까지 법학부에서 재정학 강좌를 담당했다. 하지만 미야케는 이 수업을 통해 주로 마르크스주의 강의를 했다고 전해진다. 미야케의 영향력은 적지 않아서 신남철은 물론 유진오를 비롯하여 이강국, 최용달, 박문규 등 해방정국의 굵직한 인사들이 모두 그의 수업을 들었으며, 경성트로이카의 핵심 인물 인 이재유와도 깊은 인연이 있었다.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사건 당시 이재유가 탈옥했을 때 미야케는 그를 자신의 집에 숨겨주었다 발각되어 급기야 이 일로 파면된다. 미야케의 진심, 그리고 그와 인연이 있던 모든 이들의 열정은 차치하고, 이 아이러니 속에서 우리가 생각해볼 지점은 제국을 향한 이론적 무기가 ‘제국’의 대학을 통해 전달되는 이 ‘어긋남’이 신남철은 물론 지금의 우리에게도 일정하게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사진 3 : 동아일보 1935년 8월 24일자 이재유 탈옥 및 은닉 사건 기사에 실린 미야케의 사진)

 

신남철은 우리에게 주로 ‘철학’의 권역에 속하는 이로 기억된다. 팔이 안으로 굽기도 하거니와 어쨌거나 ‘철학’과 졸업생인 까닭에 이 특출한 지식인을 ‘철학사’ 또는 ‘철학’의 경계 밖으로 내보내기란 철학도로서 일단은 마뜩잖다. 하지만 신남철을 철학의 영역에만 배타적으로 귀속시키는 일이 개운치 않을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가 대단히 ‘문학’적인 인물이었다는 데 있다. 실제로 신남철의 글은 현재 『역사철학』(김재현 해제, 2010)과 『신남철 문장선집』 I, II(정종현 엮음, 2013)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 『역사철학』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신남철 문장선집』’은 한 지식인의 글모음집 치고는 제목이 좀 어색하지 않은가? 조선시대 지식인도 아니고 일제강점기에서 해방이후까지 활동했던 이의 글을 모아 놓고 ‘문장선집’이라 했으니 말이다.

엮은이의 말로는 『역사철학』의 경우 해제도 그렇고 완성도가 높은 판본이 김재현에 의해 이미 출간되었기 때문에 이를 제외한 모든 글을 수록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전집’이라 하기는 어려우니 『신남철 선집』 정도면 무난할 것이다. 그럼에도 ‘문장선집’이라 이름 한 까닭을 엮은이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신남철은 철학, 역사, 문학의 인문학과 마르크시즘을 위시한 당대의 사회과학의 영역을 넘나들며 자신의 지식을 형성하고 실천하고자 한 종합지식인이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종합적인 인문지식과 실천을 추구했던 동아시아의 지식 전통과도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 책의 제목을 ‘문장’ 선집이라 명명했다.”

신남철은 우리 역사에서 ‘철학’을 ‘전공’한 최초의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만, 상술했듯이 일정하게 옛 지적 전통의 간접적인 영향 하에 있었다. 의분에 찬 역사 인식과 실천 외에, 이 시대의 지식인들이 대개 그러했듯 전공의 벽에 갇혀 있지도 않았거니와 그러기에는 문학적 감수성과 지적 호기심 또한 깊고 또 폭넓었던 까닭이다. 개인적 성향과 지성사적 특수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함으로써, 그는 창조적인 상상과 자유로운 글쓰기를 거침없이 자신의 이론적·실천적 삶 속에 삽입할 수 있었다. 동시에 이러한 기질은 그를 북으로 이끌었고 다시 ‘자유주의자’로 낙인찍히게 되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급진의 붉은 빛이 선명했음에도 그의 사유와 삶은 구와 신, 남과 북, 식민지와 제국, 이론과 실천, 정통과 이단, 타협과 저항 사이에 가로 놓여 동요했고, 이 떨림은 다시 ‘전공’과 ‘강단’의 병속에 갇힌 이 시대의 학문과 지성에게 출구를 가리키는 애절한 손가락임에 틀림없다.

(사진 4 : 경성제국대학 예과학생들이 발행한 문학잡지 『文友』 5호. 신남철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사진출처 : 아단문고 웹사이트)

 

 

블로그분과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3

구태환

 

1.

최시형 기념비
(사진출처: 구태환)

 

원주역에서 자동차로 20분 거리인 호저면 송곡의 길가에는 기념비가 하나 서있다.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을 기리는 무위당(无爲堂) 장일순(張壹淳, 1928~1994)의 마음이 표현된 기념비이다. 여기에서 해월 최시형이라는 사상가에 관한 글을 시작한다.

 

기념비의 검은 돌에 희게 음각한 상단의 글은 “모든 이웃의 벗 崔보따리 선생님을 기리며”이다. 여기에서 ‘최보따리 선생님’은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을 가리킨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많이 배우지도 못해 품팔이로 생활해나가던 도중 나이 서른 다섯에 동학에 입도한다. 최시형이 입도한지 얼마 되지 않아 동학의 교주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는 조선 정부에 의해 처형된다. 모든 인간이 ‘천주를 모시고 있으며(侍天主 시천주)’, 기존의 질서가 전복되고 ‘다시 개벽(開闢)’되는 새 세상이 도래했음을 선포한 최제우를 조선의 기득권 세력은 ‘좌도난정(左道亂正. 사이비 도로 올바른 유학을 어지럽힘)’이라는 죄목으로 처형한 것이다. 최제우로부터 도통을 전수하여 세상에 동학사상을 전파할 임무를 띤 최시형은 ‘이단’으로 규정된 동학에 대한 탄압을 피해 각지를 떠돌 수밖에 없었고, 그때 언제나 등에 보따리 하나를 지고 다녔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성인 ‘최’에 ‘보따리’가 합쳐진 ‘최보따리’라는 별칭을 얻게 된 것이다.

 

이 글귀에서 필자의 눈길을 끈 것은 ‘모든 이웃의 벗’이라는 표현이다. 이 간단한 표현은 최시형의 사상과 행적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기념비 하단의 글을 살펴보면서 이야기해보겠다. 흰 돌에 검게 음각한 하단의 글은 “天地卽父母요 父母卽天地니 天地父母는 一體也니라 海月先生님 法說에서(천지는 곧 부모이고 부모는 곧 천지이니, 천지와 부모는 한 몸이니라. 해월선생님 법설에서).”로, 최시형의 사상을 압축적으로 잘 보여준다. 최시형은 모든 사람이 한울님을 모신 존재라는 최제우의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발전시킨다. 여기에서 ‘천주’는 한울님으로서 우주 만물의 근원, 시원, 출발을 가리킨다. 모든 것의 근원을 궁구해보면 거기에는 한울님이 있으며, 인간 개개인들도 자신의 근원을 따져보면, 부모→조부모→시조…→한울님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울님을 뜻하는 천지는 부모와 마찬가지로 나의 근원이다. 그리고 모든 인간이 이 근원으로서의 한울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한울님이며, 따라서 사람을 한울님처럼 섬겨야 한다(人是天 事人如天. 인시천 사인여천).” 모든 이웃은 나와 같은 근원을 가진 존재요, 나의 벗이요. 나의 한울님이다.

 

처형당하기 직전의 최시형
(이미지 출처: http://blog.daum.net/ky1002027/6582293)

 

최시형의 인간에 대한 존중은 특히 사회적 약자에 집중되어 있었다. ‘베 짜는 한울님’이라는 유명한 일화가 이를 잘 보여준다. 그가 청주의 서택순이라는 동학교도 집에 갔을 때 베를 짜는 소리가 들렸다. 이에 서택순에게 누가 베를 짜는 것인가를 물었는데, 최시형의 질문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서택순은 자기 며느리가 베를 짜고 있다고 답한다. 하지만 최시형에게 그 베 짜는 소리는 며느리의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며느리는 사람이고, 사람은 한울이니, 며느리가 베 짜는 소리는 한울님이 베 짜는 소리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어린아이에 대한 그의 언급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그는 특히 아이를 때리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는데, 아이를 때리면 아이에 깃든 한울님이 다치기 때문이다. 이처럼 당시 사회의 약자들에게도 한울님이 깃들어 있음을 설파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존중을 강조했다.

나아가 산에서 우는 새 소리를 듣고 ‘시천주’의 울음소리라고도 한다. 인간만이 아니라 우주 만물에도 우주의 근원인 한울님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의 모든 대상을 대할 때 한울님을 대하듯 해야 한다. 그 대상에는 음식도 포함된다.

 

2

우리는 밥 없이는 살 수가 없다. 밥은 그야말로 하늘과 같은 존재이다. 따라서 한때 한국 사회의 병폐를 날카롭게 지적했던 시인 김지하의 “밥은 하늘입니다”라는 시구는 어떤 해설도 필요없이 우리에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이 시구의 연원을 따져보면, 김지하의 스승 장일순 그리고 최시형에게 닿게 된다. 우주 만물에 한울님이 깃들어있다는 최시형의 사상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우주 만물에 한울님이 깃들어 있다면, 우리가 접하는 밥, 먹을거리에도 한울님은 깃들어 있다. 따라서 우리가 먹는 음식은 한울님이기에, 최시형은 “곡식은 천지의 젖이다”고 한다. 아이가 어머니의 젖으로 살아가듯이 우리는 천지가 주는 곡식을 먹고 살아간다.

 

장일순의 제자 부부가 운영하는 원주 한 식당에 걸려있는 장일순의 글씨
(사진출처: 구태환)

 

이처럼 우리가 먹는 곡식, 즉 밥이 한울이므로 밥을 먹는 행위는 곧 한울님을 접하는 행위이다. 최시형은 이를 한울님으로써 한울님을 먹이는 행위, 즉 ‘이천식천(以天食天)’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밥을 먹는 행위는 단순히 주린 뱃속을 채우는 행위를 넘어 한울님을 접하는 행위이다. 한울님은 우주의 근원이고, 우주의 진리이다. 따라서 최시형은 “모든 일을 아는 것은 밥 한 사발을 먹는 것에 달려있다(萬事知, 食一碗. 만사지, 식일완).”고 한다. 위의 사진에 나오는 장일순의 글 “일완지식 함천지인(一碗之食 含天地人. 한 사발의 밥에는 하늘과 땅과 인간이 담겨 있다)”은 최시형의 이 말을 변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 사발의 밥에 우주의 근원, 진리가 담겨 있으니, 밥 먹는 행위는 진리에 접근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흔히들 우주의 근원, 진리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학문 등 수행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수행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기 때문에, 결국 생존을 위한 노동으로 인해 시간과 여력이 부족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학문과 수련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최시형이 제시하는 수련은 아주 단순하다. 밥에 담긴 한울님을 접하면 된다. 물론 밥을 짓는 과정, 밥 먹기 전에 한울님께 고하는 행위 등 몇 가지 격식을 갖출 것을 요구하여, 한편으로는 번거롭게 여겨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낳기는 한다. 하지만 “밥이 한울이다”라고 입으로 떠들지 않더라도, 쌀 한 톨을 얻기 위해 수많은 땀을 흘린 노동하는 민중들에게 이미 밥은 한울과 같은 존재이며, 그러한 밥을 대할 때 요구되는 약간의 격식은 결코 번거로운 것이 아니리라. 밥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땀 흘리지 않고 밥을 얻는 이들의 그것과는 애초에 다를 수밖에 없다. 최시형은 그러한 태도에 격식을 더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노동하는 인민들이 진리에 접근할 길을 열어준 것이다.

 

해월이 관군에 체포된 곳(해월피체지), 원진녀의 생가
(사진출처: 구태환)

 

최제우가 열고 최시형이 넓힌 이 길을 그때까지 진리로 나아가는 길을 독점했던 조선 사회의 기득권자들이 좋아했을 리가 없다. 진리에 대한 접근권은 세상을 해석하고 운영할 권리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기득권자들의 탄압은 이어졌고, 최시형은 탄압을 피해 조선 각지의 길을 떠돌았다. 그 결과 동학사상을 널리 전파했고,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사건을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모든 이웃들과 벗하여 ‘다시 개벽’된 세상을 맞이하려는 그의 꿈은 실현되지 않았고, 결국 위 사진 속 원진녀의 집에서 인생행로를 끝마친다. 이곳은 최시형 당시 동학교도인 원진녀라는 사람의 집으로서 최시형이 관군에게 체포된 곳(이곳을 ‘해월피체지’라고 한다)이다. 이 생가는 1990년 원주의 ‘치악고 미술동우회’에서 복원한 것으로, 첫 사진의 기념비는 바로 이곳 초입에 세워진 것이다. 최시형이 꿈꾸던 ‘다시 개벽’된 세상에 대한 꿈은 이곳에 기념비를 세우고, 피체지를 복원하고, 그의 말을 실천해나가는 여러 사람들에 의해 다시 꿈꿔지고 있는 것이다.

 

에필로그

원래는 해월 최시형과 함께 무위당 장일순도 다룰 예정이었다. 장일순은 ‘걸어다니는 동학’(전호근, 한국철학사, 메멘토)이라고 불릴 정도로 동학적인 삶을 살았으며, 앞에서의 해월 기념비 건립, 원진녀 생가 복원, 글씨 등에서 보이듯이 최시형에 대한 그의 애정이 각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사상가를 한꺼번에 다루기에는 지면이 부족했다. 이번에는 먼저 해월 최시형에 대해 이야기 하고, 무위당 장일순은 다음 기회에 다루기로 한다.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기고자: 구태환(한국철학사상연구회)

최한기의 인체론과 관련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본 분과에서 동학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으며, 배타적 소유권에서 벗어난 ‘인권’의 가능성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 다음에는 “신남철(이병태)”의 글이 이어집니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이지

 

1.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결정을 선고하였다. 헌법과 법률에 따라 부여된 공적 권한을 사적으로 남용하여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였고 헌정질서를 유린하였기 때문이다. 선고를 하였던 재판관이 모두발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국가기관의 존립근거는 헌법에 있고, 그 헌법을 만들어 내는 힘의 원천은 바로 국민이다.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파행적인 정치체제와 국정운영이 낳은 폐단을 버텨내는 것은 국민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그 고단한 일상에 함몰되지 않았다. 자기 삶에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고자 하는 의식은 시민의 촛불이 되어 광장을 조용히 밝혔고 강하게 연대하였다. 이를 두고 촛불혁명이라고도 하고 시민혁명이라고도 하며 민주주의의 승리를 감격해한다. 충분히 감격할 일이다. 그러나 혁명은 무혈이건 유혈이건 파괴를 본질로 한다. 이제 무너뜨린 그 자리에 건설을 시작해야 할 때이다. 감격에 취해있기에는 우리 앞에 놓인 숙제가 너무 많다.

 

탄핵심판선고 / 광화문촛불
(사진출처: 연합뉴스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

우리 역사에서 대통령의 탄핵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탄핵된 대통령은 또 있었다. 바로 이.승.만. 우리는 대부분 그를 ‘초대대통령’으로 기억한다. 1948년 정부수립과 동시에 그는 대한민국의 초대대통령으로 취임하여 1960년 4월까지 3대에 걸쳐 연임한다. 그리고 4.19 혁명 직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다. 그 때 이승만은 탄핵된 것이 아니라 하야(下野) 형식을 취했다. 그렇다면 그가 대통령으로서 탄핵되었다는 것은 어떤 사건을 두고 말하는 것인가?

 

이승만이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전에 우리 역사에서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던 이가 3명 있었다. 그 중 첫 번째가 손병희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에 이와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이 기획되었다(<조선독립신문>제2호, 1919년 3월 3일자 보도). 그리고 국내외 여러 곳에 임시정부가 세워졌는데, 그 가운데 러시아령 대한국민의회정부가 가장 먼저 임시정부수립을 선포하였다(1919. 3. 21). 이 곳은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이 외에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던 임시정부가 3곳이 더 있다. (당시 여러 임시정부 중 한성정부(1919. 4. 23)에서는 대통령격인 집정관 총재에 이승만이 추대되었다.)

 

이후 국내외에 다수로 분열되어 있던 임시정부를 통합하여 하나의 통합대한민국임시정부를 상해에 두게 된다(1919. 9. 6). 통합되기 전 다수의 임정 가운데 한 곳이었던 상해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에 수립하면서(4월 13일 언론에 공포),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결정하고 <대한민국 임시헌장>(10개조)를 제정하여 민주공화제를 채택하였다. 처음에는 내각책임제였는데, 이후 통합하면서 임시헌법을 개정하여 전문을 포함한 8장 57개조의 민주공화국 헌법을 만들었다(1919. 9. 6). 개정된 헌법은 대통령중심제와 의원내각제를 절충한 대통령제를 채택하였는데, 이 헌법이 보장하는 임시정부의 초대대통령이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이 손병희 다음에 대통령으로 불린 두 번째 인물이라면, 세 번째가 박은식이다. 1920년경 박은식은 독립운동가로서 상해 임시정부를 적극 후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임정은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을 비롯한 갖가지 문제를 두고 내부 분열이 심화되어 있었다.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젊은 독립운동가들이 박은식을 차기 지도자로 추대하였고, 박은식은 ‘임시대통령 불신임안’, ‘임시대통령 유고안’, ‘임시대통령 탄핵안’ 등이 걸려 있던 이승만 문제를 일단락지은 후 임시정부 2대 대통령으로 추대된다(1925. 3). 그러나 박은식은 곧바로 개헌하여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제를 신설해 내각책임제로 바꾼 후 5개월간의 대통령직을 사임한다. 이후 1948년 정부수립 후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까지 우리 정부에서 대통령으로 불린 인물은 없었다.

 

이승만은 초대대통령을 두 번 역임한 셈이다. 통합임시정부 초대대통령과 대한민국정부 초대대통령. 그리고 그는 임시정부초대대통령으로서는 탄핵당했고, 대한민국초대대통령으로서는 하야 후 망명하였다.

 

손병희 / 이승만 / 박은식
(사진출처: 네이버)

 

3.

20세기 우리의 독립운동은 두 가지 문제를 떠안고 있었다. 하나는 외세의 위협과 침략으로부터 자주독립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일로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정치사회체제를 건립하는 일이었다. 군주를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왕조체제와 신분질서체계는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해가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물론 군주제와 신분제의 모순에 저항하고 이를 전복시키는 혁명의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어 모든 백성들이 이른바 시민의식을 고취할 만한 확장된 경험의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외세의 식민통치를 받아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데에 요구되는 이념과 체제는 밖으로부터 그리고 위로부터 주어졌다. 백성들은 여전히 신분제의 굴레 속에서 타고난 신분적 제약을 운명으로 받아들였고, 통치체제에는 군주제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민주의 개념과 의식이 성장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어떠한 정부형태의 수장도 왕의 다른 이름으로 간주되기 십상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시대의 독립운동가들은 대중계몽과 교육운동에 헌신했었던 사람들이 많다.

 

박은식(朴殷植, 1859~1925) 역시 경술국치 이후 만주로 망명하기 전에는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활동하면서 많은 논설을 발표하고 학교 설립과 교사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일제의 침략위협이 강하게 압박해올수록 그는 개혁론을 주창했었다. 제도와 형식의 개혁 이전에 국민 개개인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가오는 새로운 사회에서 책임 있게 주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먼저 배워야 한다고 하는, 일종의 교육을 통한 의식개혁을 도모한 것이다. 군주제 몰락 이후 민주공화의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였기에, 국민 개개인의 의식의 개화가 가장 시급한 일이었다. 새로운 사회를 감당할 수 있는 의식이 자생할 수 있는 역사적 경험을 갖지 못한 이들에게 교육은 수단으로서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지배계층이 전유하다시피 하였던 교육의 대상을 확대하고 어려운 한문이 아닌 국문을 사용하여 속도감 있는 교육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또한 그는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전통적 유가지식인들이 스스로 개혁할 것을 촉구한다. 본래 유학의 정신은 군권을 존중[尊君權]하는 데에 있지 않고 백성을 중요시하는[民爲重]하는 데에 있음을 지적하면서 전통성리학자들이 갖는 제왕주의적 사고를 비판하고 “공자의 진정한 정신을 계승하고 이 학문의 공덕을 발휘하여 백성에게 행복을 주고자 한다면, 이것을 개량해 맹자의 학문을 넓혀서 인민사회에 널리 미치는 노력을 해야”한다고 제안한다. 전통적 사고방식의 본래성을 회복하여 민주공화적 의식으로의 개혁을 도모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사고의 바탕에는 양명학이 있다. 그의 개혁론은 양지가 주체가 되는 실천적 변혁이다. 더불어 그는 의식의 개혁과 성장이 선행되지 않은 채 제도와 형식의 변화가 일어난다면 새로운 제도와 형식은 구체제 의존적인 의식에 의해 파행적으로 운영될 것임을 예상하고 그 위험을 경계하였다.

 

1911년 만주로 망명한 후에 박은식은 역사서 집필에 주력하며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여 항일투쟁를 적극 후원하였다. 그가 저술한 『한국통사(韓國痛史)』(1915)는 1864년부터 1911년까지 한국의 애통한 역사, 그러니까 일제침략사를 중심으로 서술한 것이다. 그는 최근의 우리 역사를 동포 한 사람 한 사람이 읽고 제대로 이해하기를 간절히 바랬다. 이 책은 국내외에서 크게 반향을 일으켰고 일제는 이에 당황하여 조선사편수회를 설립하게 된다. 1920년에 저술한 『독립운동지혈사(獨立運動之血史)』는 1884년 갑신정변부터 1920년 독립군전투까지 일제침략에 대한 한국인의 독립투쟁사를 3.1운동을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여기서 동학농민혁명을 ‘우리나라 평민의 혁명’으로 평가하고, 의병을 자세히 다루면서 민중의 역할과 민권의 중요성을 두드러지게 강조한다. 이처럼 혁명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개진하면서 3.1운동의 의미를 밝히는 데에 주력하였다.

 

그는 임시정부에 전면에 나서서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신한청년단의 기관지를 맡았고, 여운형 등이 중심이 되어 있는 상해거류민단의 활동을 지도하였다. 상해임시정부의 내부분열을 수습하기 위하여 부득이 대통령직을 받아들였던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그는 통합된 민족의 독립과 독립된 대한민국에서 민주와 공화의 정신을 민중 속에서 실현할 수 있는 체제를 고민하고 준비하였던 것이다.

 

박은식이 작성하고 한국 민족대표 26인의 명의로 발표한 선언서.  
(출처. 네이버)

 

4.

탄핵된 대통령들은 대통령을 왕의 다른 이름쯤으로 여겼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통령의 이름으로 군림하던 군주를 끌어내린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패한 독재자를 처단하기 위함이 아니라 민주공화의 정신을 실현하는 일이다. 본래적으로 평등한 이들이 자유롭게 연대하여 본래의 평등을 사회적으로 구현하려는 것이다. 신분제적 질서를 바탕으로 군주가 통치하는 왕조체제는 이미 종식되었다. 그러나 체제는 변하였어도 의식이 여전하다면 유사왕조체제가 운영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20세기 초 독립운동가들은 끈질기게 고민하였다. 독립이후 건설해야 하는 민주공화적인 대한민국을 말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해방 후에도 오랜 시간동안 변형된 유사왕조체제가 거듭되었다. 또한 역시 자주적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끈질기게 분투해왔다. 그리고 지금 오랜 왕조의 종식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20세기 초 독립운동가들이 했던 민주와 공화의 고민은 지금 우리의 고민이다. 

 

기고자: 이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이화여대)

왕양명 철학과 최한기 철학을 연구하여 석박사를 받았다. 철학은 역사와 더불어 생성되고 철학 연구도 역사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현재 이화여대에서 동양철학을 강의하고 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 다음에는 “최시형과 장일순”(구태환) 에 대한 글이 이어집니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 박영미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 1

 

박영미

 

1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루쉰의 「고향」중에서)

 

광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함께 분노를 외치고 희망을 노래했다. 그들의 분노와 희망은 길을 만들었다. 그 길은 현재로부터 미래를 여는 것이었으며 또한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어진 것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광장의 촛불 속에서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진 길을 기억했고, 현재에서 미래로 열릴 길을 만들었다. 우리에게 광장은 그렇게 ‘길’이 되었다.

 

(국민일보)

 

2

광화문 광장에는 두 개의 동상이 일렬로 서 있다. 하나는 이순신, 다른 하나는 세종대왕. 나는 촛불 광장의 한 가운데 우뚝 서 있었던 이순신 동상을 보면 오늘의 박근혜와 어제의 박정희가 오버랩 된다. 광장의 동상이 오늘의 박근혜가 곧 어제의 박정희임을 보여주는 상징물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후 집권한 박정희는 1968년 광화문 앞 세종로에 6미터가 넘는 이순신 동상을 세운다. 정권의 정당성을 설득해야 하는 박정희에게는 뛰어난 무장이자 임진왜란의 영웅인 이순신의 이미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 해 12월에는 <국민교육헌장>이 반포된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되살려 안으로는 자주 독립에 힘쓰고, 밖으로는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로 시작되는 <국민교육헌장>은 1994년에 폐지될 때까지 누구나 반드시 읽고 외어야 하는 주문(?)이었다. 박정희는 이 주문을 공포하고 관련 교육을 강화했다. 이는 국가가 국민의 정신을 개조하고 통제한다는 국가주의적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순신 동상의 건립과 <국민교육헌장>의 공포는 이미 계획된 ‘10월 유신’을 위한 포석이었다. 박정희는 1969년 3선 개헌과 1972년 10월 헌법효력의 일부 정지, 국회해산, 정당활동 금지를 내용을 한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후 직선제가 아닌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유신헌법’을 제정하면서 장기집권의 토대를 마련한다. 바로 이 시기 <국민교육헌장>의 초안을 기초하고, 대통령 특별보좌관을 5년간 수행하면서 10월 유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박정희의 국가주의를 철학적으로 뒷받침한 사람이 박종홍(1903~1976)이었다.

 

박종홍은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한 후 활동했던 서양철학 1세대로, 서양철학 1세대 중에서 드물게 전통철학의 현대적 계승이 필요함을 인식했으며, 서양철학과 전통철학이 결합된 ‘우리철학’을 모색한 철학자였다. 또한 경성제대부터 서울대학교까지 철학과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면서 한국 강단철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박종홍이 학문 생애 전체를 통해 노력한 ‘우리철학’의 모색은 의도의 선의여부와 상관없이 결국 국가권력과 결탁되며 일그러졌다.

 

그가 주장한 ‘부정성-주체의 자각-창조’의 논리는 전통철학과 결합하여 ‘천명-주체의 자각-참여’로 해석되었고, 다시 <국민교육현장>에서 ‘역사적 사명-민족적 자각-민족중흥’으로 구체화되었다. 더 나아가 천명과 역사적 사명은 ‘국가’로, 주체와 민족적 자각은 ‘국민정신’으로, 참여와 민족중흥은 ‘근대화’로 바꿔도 무방해지게 되었다. 따라서 ‘부정성’은 역사적 사명이 된 절대적인 국가에게 자리를 내어주었고, ‘주체의 자각’은 교육과 지도로 내면화된 국민의 정신으로 전락하였으며, ‘창조’는 개발 반공 민주 애국 애족을 내용으로 하는 편협한 근대화로 축소되었다.(『처음 읽는 한국현대철학』, 300쪽)

 

지난 4년간 박근혜 정권이 보여줬던 국가의 모습은 이렇게 박정희가 꿈꾸고 계획했던 국가의 다름 아니었다. 따라서 박근혜의 탄핵과 구속을 ‘박정희 시대의 종언’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그들 부녀의 불온한 꿈을 저지했다는 의미에서는 타당할 수 있다. 그러나 박정희 사후 30년이 지나 다시 박근혜가 선택(?)되었던 것을 상기한다면 ‘박정희 시대의 종언’은 성급한 희망일 수 있다. 박정희 시대는 한 개인의 권력욕과 이를 도운 철학이 우리의 정신을 지배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진정한 ‘박정희 시대의 종언’은 절대 국가가 아닌 민주적 가치와 절차를 갖춘 국가, 복종하는 국민이 아닌 언제나 깨어있는 시민, 국가의 강요된 목표가 아닌 개인들의 바람과 꿈을 사회의 목표로 만들기 위한 쉼 없는 노력으로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3

우리는 과거로부터 미래로 열려진 길 위에서 시선을 미래보다는 과거에 두고자 한다. 우리철학, 한국근현대철학은 역사의 길을 뚜벅뚜벅 걸으면서 때로는 열려 있지 않은 길을 만들려고 노력했고, 때로는 잘못된 방향으로 길을 바꾸기도 했다. 이렇게 역사 속에서 분투했던 우리철학은 오랫동안 잊혀 있었고 이제는 이에 대한 정리와 성찰이 필요하다. 그 노력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잘못에 대한 냉철한 비판이 없다면 철학에서의 ‘종언’은 요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첫 걸음은 한국근현대철학을 소개한 책 『처음 읽는 한국현대철학』(동녘, 2015)의 출간이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여기서부터 역사이다
역사란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부터
미래의 험악으로부터
내가 가는 현재 전체와
그 뒤의 미지까지
그 뒤의 어둠까지이다
어둠이란
빛의 결핍일 뿐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고은의 「길」 중에서)

 

기고자: 박영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한양대) 

중국 청대 대진의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7세기이후 동아시아 철학의 변화와 교류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는 한국현대철학과 중국현대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 다음에는 “박은식”(이지)에 대한 글이 이어집니다.

 

(시평) 판결문의 정치와 세월호의 정치 [더 맑스]

판결문의 정치와 세월호의 정치

 

김종곤

 

2017년 3월 10일 오전 11시 경. 박근혜의 탄핵을 찬성하든 반대하든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이 숨죽이면서 이정미 재판관이 읽어 내려가는 판결문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일상적이지 않은 법률용어와 법률적 논리로 인해 결론을 예측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몇 번의 ‘그러나’가 반복되면서 손에 땀이 흐르고, 조급한 마음이 들어 ‘그래서 결론이 뭔데?’라는 혼잣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피청구인을 대통령직에서 파면한다.”라는 간결한 문장이 읽혀지는 그 순간에야, 박수와 함께 가슴을 쓸어내리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통신을 통해 기쁨의 순간을 나눴다.

 

그랬다. 기뻤다. 스스로에게, 또 추운 겨울날 광장을 함께 메웠던 사람들에게 수고했다고, 고맙다고, 축하한다고 인사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해 보였다. 이 날 만큼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고 지인들과 함께 축배를 드는 것이 투쟁의 승리를 자축하는 성스러운 의식처럼 보였다.

 

 

그런데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흥분된 마음이 가라앉을 즈음, 복기되는 내용이 있었다. 판결문을 들으면서 의아했고, 실망했고, 가슴 아팠고, 화났던 내용을 잠시 망각하고 있었는데 다시 생각이 난 것이다. 그것은 다음의 말이었다.

 

“그러나 국민의 생명이 위협받는 재난상황이 발생하였다고 하여 피청구인이 직접 구조 활동에 참여하여야 하는 등 구체적이고 특정한 행위의무까지 바로 발생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 그런데 성실의 개념은 상대적이고 추상적이어서 성실한 직책수행의무와 같은 추상적 의무규정의 위반을 이유로 탄핵소추를 하는 것은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요컨대, 재난상황이 발생하였을 때 첫째,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이 법률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아서 위법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고 둘째, 박근혜의 대응이 성실하지 않았다고 판단하더라도 ‘성실’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기에 법리적 판단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세월호 참사는 대통령 탄핵을 물을 수 있는 사안에 해당하지 않는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전문을 포함해 판결문을 다시 읽어보았다.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대통령으로서 박근혜에게 “직접 구조 활동에 참여하여야 하는 등 구체적이고 특정한 행위의무”가 세월호 참사 당시 발생하였다고 보기 어렵다는 판단이다. 우리는 누구도 대통령이 재난상황 발생 시 현장으로 달려가 장비를 착용하고 직접 구조 활동을 하는 직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박근혜에게 따져 묻는 내용 역시 ‘왜 당신은 바로 팽목항으로 달려가 해경과 잠수부를 비롯한 인력들과 함께 구조 활동을 하지 않았냐?’가 아니다. 우리가 묻는 것은 대통령은 행정부의 최고권한자로서 국가 재난상황 발생 시 구난과 구조를 위해 국가의 재원이 원활하게 동원될 수 있도록 지휘감독을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상식적’이면서도 ‘법률적’인 의무에 대해서이다. 그것은 판결 전문(2016헌나1 대통령 박근혜 탄핵)에서도 인용하고 있듯이 우리 헌법 제10조와 판례(헌재 2008. 12. 26. 2008헌마419등 참조)가 확인하는 ‘국민의 생명과 신체의 안전 보호’ 의무를 다했는지 안했는지 따져보자는 것이다. 이러한 사항에 따라 실제로 이정미 재판관은 “피청구인은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신체의 안전 보호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할 수 있도록 권한을 행사하고 직책을 수행하여야 하는 의무를 부담합니다.”라고 앞서 말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점은 세월호 참사 당시 박근혜가 대통령으로서의 의무를 다했는지 그 행적을 따라가면서 검토하는 것이다. 박근혜가 성실하였는지 아니었는지는 둘째 치더라도 ‘뭐라도’ 했는지를 묻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날 판결문 낭독에는 이러한 검토 내용은 없었다. 전문의 < 피청구인의 대응> 부분을 보더라도 대통령 측 주장만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열거하고 있을 뿐 그 주장이 신빙성이 있는지에 대한 판단은 기술되어 있지 않다.

 

아주 기초적인 논리적 판단조차 수행하지 않았거나 의도적으로 누락시켰다는 의심이 든다. 더구나 전문에는 전원 구조 오보가 정정된 2014년 4월 16일 오전 11시 50분 경 국가안보실은 “구조가 순조롭지 못한 사실을 알고 있었고 학생 전원이 구조되었다는 방송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적어도 오후 5시경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방문할 때까지 ‘대통령’으로서 박근혜가 어떠한 지휘감독을 했는지를 이들의 주장과 대조하여 사실관계를 확인하여야 한다. 하지만 이 조차도 기술되어 있지 않다. 논리가 실종되어 있다.

 

재판관 김이수와 이진성의 보충의견(소수의견)을 보면 세월호 관련 내용이 파면사유에서 누락된 것이 더 납득이 되지 않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들은 “헌법상 대통령의 성실한 직책수행의무 및 국가공무원법상 성실의무를 위반하였”다면서 이정미 재판관이 읽었던 종합결론과 다르게 판단하고 있다. 이들은 세월호 참사 당시를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중대하고 급박한 위험이 가해지거나 가해질 가능성이 있는 국가 위기 상황에 해당함이 명백”하다고 보면서 그와 동시에 “피청구인은 상황을 신속히 인식하고 시의적절한 조치를 취하여 국민의 생명, 신체를 보호할 구체적인 작위의무를 부담하게” 됨을 인정하고 있다. 즉, 헌법 제66조 제2항 및 제3항, 제69조(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의무), 헌법 제34조 제6항(국가의 재해 예방과 국민보호), 국가공무원법 제56조(모든 공무원은 성실히 직무를 수행하여야 한다.)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라는 것이다.

 

그럼 이러한 판단은 어떻게 나왔는가? 이들(김이수, 이진성 재판관)은 박근혜 측의 주장에 대해 “위기상황의 인식”, “피청구인의 대처”로 항목을 나누어 살피고 있다. 간략하게 핵심 판단 내용만 전하자면 당일 박근혜가 집무실에 출근하였으면 오전에 이미 상황을 심각성을 파악할 수 있었으며, 오보 때문에 대응이 늦었다는 박근혜 측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당일 박근혜의 지시라 해봤자 원론적이었으며 대부분의 지시 내용은 사실관계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명백한 성실의무 위반이자 작위의무 위반이라는 것이다.

 

이들 보충의견은 ①(전제)성실한 직책 수행의무 위반=탄핵사유 → ②(사실관계)세월호 참사에 대한 박근혜 성실/작위 의무 위반이라는 논리를 따르고 있다. 그렇다면 ①, ②에 따라 탄핵사유로서의 부합성에 대한 판단, 즉 최종 결론은 ③‘탄핵사유가 된다.’가 되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들의 결론은 너무나도 엉뚱하게도 “이 사유만으로는 파면사유를 구성하기 어렵다고 판단”한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출처 : 프레시안 ⓒ사진공동취재단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55672)

 

 

도대체 이러한 판결문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종합판결도 보충의견도 처음부터 세월호 참사는 파면 사유에서 배제되어야 하는 것처럼 논리 없음과 모순을 감행하고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날 박근혜의 탄핵사유 중 가장 핵심이 ‘기업의 자율성 침해’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월호에 대한 사안은 파면사유에 해당할 만큼 (판결문에서 반복하고 있는) “중대한” 사안이 아닌 반면 기업의 자율성 침해는 파면사유에 해당하는 “중대한 법 위반 행위”이라는 것이다. ‘성실’이라는 용어를 추상적이고 상대적이라고 말했던 판결문은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 보다 기업의 돈벌이가 더 ‘중대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는 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1990년 헌법재판소는 사유재산과 시장경제원리를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정식화하였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판결문이 치명적인 논리적 오류를 만들어내면서까지, ‘중대한’이라는 말을 이용하여 부정하였던 것은 바로 시민들의 ‘정치’였다는 것이다. 광장의 시민들은 국민의 생명권 보장을 위한 대통령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에 대한 책임을 물으면서 생명이 살아 숨 쉬는 국가를 요구하였지만 판결문은 그것이 한낱 분노에 찬 ‘소리’에 지나지 않으며 책임을 묻기 위한 ‘말’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판결문은 안정적인 시장경제질서의 회복이 너희가 아우성치는 생명보다 더 중대하다고 보면서 이제 그만 광장을 떠나라고 말하는 것이다. 판결문은 우리의 시간을 광장의 촛불이 등장하기 이전으로 돌려놓고 있다. 대통령의 자리에 박근혜가 아닌 다른 사람을 들여놓는 것 외에 달라진 것이 없는 그 시간으로 말이다. 그래서 랑시에르가 『불화』에서 한 말은 이 상황에서 너무나도 적합해 보인다. “헌법은 변혁의 열망을 지속적으로 수용하는 한에서 헌법으로 기능하는 것이고, 국민의 열망을 배제하고 기성질서를 고착화하는 한에서는 치안법이다.(자크 랑시에르 지음/진태원 옮김, 불화, 도서출판 길, 2015, 51쪽 이하.) 판결문은 헌법을 치안법으로 대체하고 있다.

 

 

광장을 통해 나온 변혁의 열망이 ‘판결문의 정치’ 속에서 용해되어 버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해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는 세월호 참사 관련 내용을 판결문 전면에 배치한 의도가 ‘대통령 파면’이라는 고기를 던져주면 시민들은 자신들의 논리 없음과 모순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기뻐하면서 그 고기를 즐길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재판관 안창호는 보충의견에서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아모스 5장 24절)’라는 구절을 인용하고 있지만 이 구절을 다시 판결문에 돌리고 싶다. 판결문은 이 구절에 따르고 있는가?

 

 

 

그래서 나는 이 판결문에 불복한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불복’이 보수단체가 말하듯 박근혜의 탄핵자체를 부정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이 불복은 ‘자본주의 시장질서가 그 무엇보다 중대하다’는 점을 인정하며 ‘분노도 열정도 없이(sine ira et studio)’ 살아가라는 판결문의 ‘말씀’에 따르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우리는 또 죽게 내버려두거나 죽게 만드는 세상에 나 자신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던져놓게 되기 때문이다. 1072일 만에 물위로 인양된 세월호와 마주할 면목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판결문의 정치’에 맞서 국가폭력과 자본, 제왕적인 권력정치에 맞서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말하는 ‘세월호의 정치’를 맞세우고 싶다. 그러한 정치가 승리가 하였을 때에만 오로지 축배를 들고 싶다.

 

 

 

오늘부터 맑스분과블로그진을 시작합니다! [더 맑스]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맑스분과블로그진을 시작합니다.
블로그진의 타이틀은 ‘더 맑스’ 인데요. 영어 정관사(The) 의미를 살려 잊혀진 듯한 그 맑스를 되살릴 뿐 아니라 한발 더 나아가(More) 오늘의 현실에서 재현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었습니다.
더 맑스 블로그진은 한철연 맑스분과원들이 돌아가면서 글을 올릴텐데요. 일종의 two track으로 운영됩니다.
우선, 분과원들의 ‘시평’ 이 올라가고, 또 지금 분과에서 열심히 하고 있는 ‘공산당선언 번역’과 관련된 짚어볼 이야기, 후일담 등도 올릴 예정입니다.

 

e-시철 독자 여러분, The 맑스, More 맑스!  앞으로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