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철연에서 현재 운영되는 연구분과의 분과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분과 소개나 분과 세미나 결과물, 또는 분과 개인들의 글을 올리는 공간입니다.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이지

 

1.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결정을 선고하였다. 헌법과 법률에 따라 부여된 공적 권한을 사적으로 남용하여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였고 헌정질서를 유린하였기 때문이다. 선고를 하였던 재판관이 모두발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국가기관의 존립근거는 헌법에 있고, 그 헌법을 만들어 내는 힘의 원천은 바로 국민이다.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파행적인 정치체제와 국정운영이 낳은 폐단을 버텨내는 것은 국민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그 고단한 일상에 함몰되지 않았다. 자기 삶에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고자 하는 의식은 시민의 촛불이 되어 광장을 조용히 밝혔고 강하게 연대하였다. 이를 두고 촛불혁명이라고도 하고 시민혁명이라고도 하며 민주주의의 승리를 감격해한다. 충분히 감격할 일이다. 그러나 혁명은 무혈이건 유혈이건 파괴를 본질로 한다. 이제 무너뜨린 그 자리에 건설을 시작해야 할 때이다. 감격에 취해있기에는 우리 앞에 놓인 숙제가 너무 많다.

 

탄핵심판선고 / 광화문촛불
(사진출처: 연합뉴스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

우리 역사에서 대통령의 탄핵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탄핵된 대통령은 또 있었다. 바로 이.승.만. 우리는 대부분 그를 ‘초대대통령’으로 기억한다. 1948년 정부수립과 동시에 그는 대한민국의 초대대통령으로 취임하여 1960년 4월까지 3대에 걸쳐 연임한다. 그리고 4.19 혁명 직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다. 그 때 이승만은 탄핵된 것이 아니라 하야(下野) 형식을 취했다. 그렇다면 그가 대통령으로서 탄핵되었다는 것은 어떤 사건을 두고 말하는 것인가?

 

이승만이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전에 우리 역사에서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던 이가 3명 있었다. 그 중 첫 번째가 손병희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에 이와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이 기획되었다(<조선독립신문>제2호, 1919년 3월 3일자 보도). 그리고 국내외 여러 곳에 임시정부가 세워졌는데, 그 가운데 러시아령 대한국민의회정부가 가장 먼저 임시정부수립을 선포하였다(1919. 3. 21). 이 곳은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이 외에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던 임시정부가 3곳이 더 있다. (당시 여러 임시정부 중 한성정부(1919. 4. 23)에서는 대통령격인 집정관 총재에 이승만이 추대되었다.)

 

이후 국내외에 다수로 분열되어 있던 임시정부를 통합하여 하나의 통합대한민국임시정부를 상해에 두게 된다(1919. 9. 6). 통합되기 전 다수의 임정 가운데 한 곳이었던 상해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에 수립하면서(4월 13일 언론에 공포),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결정하고 <대한민국 임시헌장>(10개조)를 제정하여 민주공화제를 채택하였다. 처음에는 내각책임제였는데, 이후 통합하면서 임시헌법을 개정하여 전문을 포함한 8장 57개조의 민주공화국 헌법을 만들었다(1919. 9. 6). 개정된 헌법은 대통령중심제와 의원내각제를 절충한 대통령제를 채택하였는데, 이 헌법이 보장하는 임시정부의 초대대통령이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이 손병희 다음에 대통령으로 불린 두 번째 인물이라면, 세 번째가 박은식이다. 1920년경 박은식은 독립운동가로서 상해 임시정부를 적극 후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임정은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을 비롯한 갖가지 문제를 두고 내부 분열이 심화되어 있었다.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젊은 독립운동가들이 박은식을 차기 지도자로 추대하였고, 박은식은 ‘임시대통령 불신임안’, ‘임시대통령 유고안’, ‘임시대통령 탄핵안’ 등이 걸려 있던 이승만 문제를 일단락지은 후 임시정부 2대 대통령으로 추대된다(1925. 3). 그러나 박은식은 곧바로 개헌하여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제를 신설해 내각책임제로 바꾼 후 5개월간의 대통령직을 사임한다. 이후 1948년 정부수립 후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까지 우리 정부에서 대통령으로 불린 인물은 없었다.

 

이승만은 초대대통령을 두 번 역임한 셈이다. 통합임시정부 초대대통령과 대한민국정부 초대대통령. 그리고 그는 임시정부초대대통령으로서는 탄핵당했고, 대한민국초대대통령으로서는 하야 후 망명하였다.

 

손병희 / 이승만 / 박은식
(사진출처: 네이버)

 

3.

20세기 우리의 독립운동은 두 가지 문제를 떠안고 있었다. 하나는 외세의 위협과 침략으로부터 자주독립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일로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정치사회체제를 건립하는 일이었다. 군주를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왕조체제와 신분질서체계는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해가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물론 군주제와 신분제의 모순에 저항하고 이를 전복시키는 혁명의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어 모든 백성들이 이른바 시민의식을 고취할 만한 확장된 경험의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외세의 식민통치를 받아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데에 요구되는 이념과 체제는 밖으로부터 그리고 위로부터 주어졌다. 백성들은 여전히 신분제의 굴레 속에서 타고난 신분적 제약을 운명으로 받아들였고, 통치체제에는 군주제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민주의 개념과 의식이 성장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어떠한 정부형태의 수장도 왕의 다른 이름으로 간주되기 십상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시대의 독립운동가들은 대중계몽과 교육운동에 헌신했었던 사람들이 많다.

 

박은식(朴殷植, 1859~1925) 역시 경술국치 이후 만주로 망명하기 전에는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활동하면서 많은 논설을 발표하고 학교 설립과 교사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일제의 침략위협이 강하게 압박해올수록 그는 개혁론을 주창했었다. 제도와 형식의 개혁 이전에 국민 개개인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가오는 새로운 사회에서 책임 있게 주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먼저 배워야 한다고 하는, 일종의 교육을 통한 의식개혁을 도모한 것이다. 군주제 몰락 이후 민주공화의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였기에, 국민 개개인의 의식의 개화가 가장 시급한 일이었다. 새로운 사회를 감당할 수 있는 의식이 자생할 수 있는 역사적 경험을 갖지 못한 이들에게 교육은 수단으로서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지배계층이 전유하다시피 하였던 교육의 대상을 확대하고 어려운 한문이 아닌 국문을 사용하여 속도감 있는 교육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또한 그는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전통적 유가지식인들이 스스로 개혁할 것을 촉구한다. 본래 유학의 정신은 군권을 존중[尊君權]하는 데에 있지 않고 백성을 중요시하는[民爲重]하는 데에 있음을 지적하면서 전통성리학자들이 갖는 제왕주의적 사고를 비판하고 “공자의 진정한 정신을 계승하고 이 학문의 공덕을 발휘하여 백성에게 행복을 주고자 한다면, 이것을 개량해 맹자의 학문을 넓혀서 인민사회에 널리 미치는 노력을 해야”한다고 제안한다. 전통적 사고방식의 본래성을 회복하여 민주공화적 의식으로의 개혁을 도모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사고의 바탕에는 양명학이 있다. 그의 개혁론은 양지가 주체가 되는 실천적 변혁이다. 더불어 그는 의식의 개혁과 성장이 선행되지 않은 채 제도와 형식의 변화가 일어난다면 새로운 제도와 형식은 구체제 의존적인 의식에 의해 파행적으로 운영될 것임을 예상하고 그 위험을 경계하였다.

 

1911년 만주로 망명한 후에 박은식은 역사서 집필에 주력하며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여 항일투쟁를 적극 후원하였다. 그가 저술한 『한국통사(韓國痛史)』(1915)는 1864년부터 1911년까지 한국의 애통한 역사, 그러니까 일제침략사를 중심으로 서술한 것이다. 그는 최근의 우리 역사를 동포 한 사람 한 사람이 읽고 제대로 이해하기를 간절히 바랬다. 이 책은 국내외에서 크게 반향을 일으켰고 일제는 이에 당황하여 조선사편수회를 설립하게 된다. 1920년에 저술한 『독립운동지혈사(獨立運動之血史)』는 1884년 갑신정변부터 1920년 독립군전투까지 일제침략에 대한 한국인의 독립투쟁사를 3.1운동을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여기서 동학농민혁명을 ‘우리나라 평민의 혁명’으로 평가하고, 의병을 자세히 다루면서 민중의 역할과 민권의 중요성을 두드러지게 강조한다. 이처럼 혁명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개진하면서 3.1운동의 의미를 밝히는 데에 주력하였다.

 

그는 임시정부에 전면에 나서서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신한청년단의 기관지를 맡았고, 여운형 등이 중심이 되어 있는 상해거류민단의 활동을 지도하였다. 상해임시정부의 내부분열을 수습하기 위하여 부득이 대통령직을 받아들였던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그는 통합된 민족의 독립과 독립된 대한민국에서 민주와 공화의 정신을 민중 속에서 실현할 수 있는 체제를 고민하고 준비하였던 것이다.

 

박은식이 작성하고 한국 민족대표 26인의 명의로 발표한 선언서.  
(출처. 네이버)

 

4.

탄핵된 대통령들은 대통령을 왕의 다른 이름쯤으로 여겼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통령의 이름으로 군림하던 군주를 끌어내린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패한 독재자를 처단하기 위함이 아니라 민주공화의 정신을 실현하는 일이다. 본래적으로 평등한 이들이 자유롭게 연대하여 본래의 평등을 사회적으로 구현하려는 것이다. 신분제적 질서를 바탕으로 군주가 통치하는 왕조체제는 이미 종식되었다. 그러나 체제는 변하였어도 의식이 여전하다면 유사왕조체제가 운영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20세기 초 독립운동가들은 끈질기게 고민하였다. 독립이후 건설해야 하는 민주공화적인 대한민국을 말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해방 후에도 오랜 시간동안 변형된 유사왕조체제가 거듭되었다. 또한 역시 자주적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끈질기게 분투해왔다. 그리고 지금 오랜 왕조의 종식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20세기 초 독립운동가들이 했던 민주와 공화의 고민은 지금 우리의 고민이다. 

 

기고자: 이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이화여대)

왕양명 철학과 최한기 철학을 연구하여 석박사를 받았다. 철학은 역사와 더불어 생성되고 철학 연구도 역사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현재 이화여대에서 동양철학을 강의하고 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 다음에는 “최시형과 장일순”(구태환) 에 대한 글이 이어집니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 박영미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 1

 

박영미

 

1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루쉰의 「고향」중에서)

 

광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함께 분노를 외치고 희망을 노래했다. 그들의 분노와 희망은 길을 만들었다. 그 길은 현재로부터 미래를 여는 것이었으며 또한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어진 것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광장의 촛불 속에서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진 길을 기억했고, 현재에서 미래로 열릴 길을 만들었다. 우리에게 광장은 그렇게 ‘길’이 되었다.

 

(국민일보)

 

2

광화문 광장에는 두 개의 동상이 일렬로 서 있다. 하나는 이순신, 다른 하나는 세종대왕. 나는 촛불 광장의 한 가운데 우뚝 서 있었던 이순신 동상을 보면 오늘의 박근혜와 어제의 박정희가 오버랩 된다. 광장의 동상이 오늘의 박근혜가 곧 어제의 박정희임을 보여주는 상징물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후 집권한 박정희는 1968년 광화문 앞 세종로에 6미터가 넘는 이순신 동상을 세운다. 정권의 정당성을 설득해야 하는 박정희에게는 뛰어난 무장이자 임진왜란의 영웅인 이순신의 이미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 해 12월에는 <국민교육헌장>이 반포된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되살려 안으로는 자주 독립에 힘쓰고, 밖으로는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로 시작되는 <국민교육헌장>은 1994년에 폐지될 때까지 누구나 반드시 읽고 외어야 하는 주문(?)이었다. 박정희는 이 주문을 공포하고 관련 교육을 강화했다. 이는 국가가 국민의 정신을 개조하고 통제한다는 국가주의적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순신 동상의 건립과 <국민교육헌장>의 공포는 이미 계획된 ‘10월 유신’을 위한 포석이었다. 박정희는 1969년 3선 개헌과 1972년 10월 헌법효력의 일부 정지, 국회해산, 정당활동 금지를 내용을 한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후 직선제가 아닌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유신헌법’을 제정하면서 장기집권의 토대를 마련한다. 바로 이 시기 <국민교육헌장>의 초안을 기초하고, 대통령 특별보좌관을 5년간 수행하면서 10월 유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박정희의 국가주의를 철학적으로 뒷받침한 사람이 박종홍(1903~1976)이었다.

 

박종홍은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한 후 활동했던 서양철학 1세대로, 서양철학 1세대 중에서 드물게 전통철학의 현대적 계승이 필요함을 인식했으며, 서양철학과 전통철학이 결합된 ‘우리철학’을 모색한 철학자였다. 또한 경성제대부터 서울대학교까지 철학과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면서 한국 강단철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박종홍이 학문 생애 전체를 통해 노력한 ‘우리철학’의 모색은 의도의 선의여부와 상관없이 결국 국가권력과 결탁되며 일그러졌다.

 

그가 주장한 ‘부정성-주체의 자각-창조’의 논리는 전통철학과 결합하여 ‘천명-주체의 자각-참여’로 해석되었고, 다시 <국민교육현장>에서 ‘역사적 사명-민족적 자각-민족중흥’으로 구체화되었다. 더 나아가 천명과 역사적 사명은 ‘국가’로, 주체와 민족적 자각은 ‘국민정신’으로, 참여와 민족중흥은 ‘근대화’로 바꿔도 무방해지게 되었다. 따라서 ‘부정성’은 역사적 사명이 된 절대적인 국가에게 자리를 내어주었고, ‘주체의 자각’은 교육과 지도로 내면화된 국민의 정신으로 전락하였으며, ‘창조’는 개발 반공 민주 애국 애족을 내용으로 하는 편협한 근대화로 축소되었다.(『처음 읽는 한국현대철학』, 300쪽)

 

지난 4년간 박근혜 정권이 보여줬던 국가의 모습은 이렇게 박정희가 꿈꾸고 계획했던 국가의 다름 아니었다. 따라서 박근혜의 탄핵과 구속을 ‘박정희 시대의 종언’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그들 부녀의 불온한 꿈을 저지했다는 의미에서는 타당할 수 있다. 그러나 박정희 사후 30년이 지나 다시 박근혜가 선택(?)되었던 것을 상기한다면 ‘박정희 시대의 종언’은 성급한 희망일 수 있다. 박정희 시대는 한 개인의 권력욕과 이를 도운 철학이 우리의 정신을 지배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진정한 ‘박정희 시대의 종언’은 절대 국가가 아닌 민주적 가치와 절차를 갖춘 국가, 복종하는 국민이 아닌 언제나 깨어있는 시민, 국가의 강요된 목표가 아닌 개인들의 바람과 꿈을 사회의 목표로 만들기 위한 쉼 없는 노력으로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3

우리는 과거로부터 미래로 열려진 길 위에서 시선을 미래보다는 과거에 두고자 한다. 우리철학, 한국근현대철학은 역사의 길을 뚜벅뚜벅 걸으면서 때로는 열려 있지 않은 길을 만들려고 노력했고, 때로는 잘못된 방향으로 길을 바꾸기도 했다. 이렇게 역사 속에서 분투했던 우리철학은 오랫동안 잊혀 있었고 이제는 이에 대한 정리와 성찰이 필요하다. 그 노력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잘못에 대한 냉철한 비판이 없다면 철학에서의 ‘종언’은 요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첫 걸음은 한국근현대철학을 소개한 책 『처음 읽는 한국현대철학』(동녘, 2015)의 출간이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여기서부터 역사이다
역사란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부터
미래의 험악으로부터
내가 가는 현재 전체와
그 뒤의 미지까지
그 뒤의 어둠까지이다
어둠이란
빛의 결핍일 뿐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고은의 「길」 중에서)

 

기고자: 박영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한양대) 

중국 청대 대진의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7세기이후 동아시아 철학의 변화와 교류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는 한국현대철학과 중국현대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 다음에는 “박은식”(이지)에 대한 글이 이어집니다.

 

(시평) 판결문의 정치와 세월호의 정치 [더 맑스]

판결문의 정치와 세월호의 정치

 

김종곤

 

2017년 3월 10일 오전 11시 경. 박근혜의 탄핵을 찬성하든 반대하든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이 숨죽이면서 이정미 재판관이 읽어 내려가는 판결문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일상적이지 않은 법률용어와 법률적 논리로 인해 결론을 예측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몇 번의 ‘그러나’가 반복되면서 손에 땀이 흐르고, 조급한 마음이 들어 ‘그래서 결론이 뭔데?’라는 혼잣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피청구인을 대통령직에서 파면한다.”라는 간결한 문장이 읽혀지는 그 순간에야, 박수와 함께 가슴을 쓸어내리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통신을 통해 기쁨의 순간을 나눴다.

 

그랬다. 기뻤다. 스스로에게, 또 추운 겨울날 광장을 함께 메웠던 사람들에게 수고했다고, 고맙다고, 축하한다고 인사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해 보였다. 이 날 만큼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고 지인들과 함께 축배를 드는 것이 투쟁의 승리를 자축하는 성스러운 의식처럼 보였다.

 

 

그런데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흥분된 마음이 가라앉을 즈음, 복기되는 내용이 있었다. 판결문을 들으면서 의아했고, 실망했고, 가슴 아팠고, 화났던 내용을 잠시 망각하고 있었는데 다시 생각이 난 것이다. 그것은 다음의 말이었다.

 

“그러나 국민의 생명이 위협받는 재난상황이 발생하였다고 하여 피청구인이 직접 구조 활동에 참여하여야 하는 등 구체적이고 특정한 행위의무까지 바로 발생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 그런데 성실의 개념은 상대적이고 추상적이어서 성실한 직책수행의무와 같은 추상적 의무규정의 위반을 이유로 탄핵소추를 하는 것은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요컨대, 재난상황이 발생하였을 때 첫째,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이 법률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아서 위법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고 둘째, 박근혜의 대응이 성실하지 않았다고 판단하더라도 ‘성실’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기에 법리적 판단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세월호 참사는 대통령 탄핵을 물을 수 있는 사안에 해당하지 않는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전문을 포함해 판결문을 다시 읽어보았다.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대통령으로서 박근혜에게 “직접 구조 활동에 참여하여야 하는 등 구체적이고 특정한 행위의무”가 세월호 참사 당시 발생하였다고 보기 어렵다는 판단이다. 우리는 누구도 대통령이 재난상황 발생 시 현장으로 달려가 장비를 착용하고 직접 구조 활동을 하는 직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박근혜에게 따져 묻는 내용 역시 ‘왜 당신은 바로 팽목항으로 달려가 해경과 잠수부를 비롯한 인력들과 함께 구조 활동을 하지 않았냐?’가 아니다. 우리가 묻는 것은 대통령은 행정부의 최고권한자로서 국가 재난상황 발생 시 구난과 구조를 위해 국가의 재원이 원활하게 동원될 수 있도록 지휘감독을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상식적’이면서도 ‘법률적’인 의무에 대해서이다. 그것은 판결 전문(2016헌나1 대통령 박근혜 탄핵)에서도 인용하고 있듯이 우리 헌법 제10조와 판례(헌재 2008. 12. 26. 2008헌마419등 참조)가 확인하는 ‘국민의 생명과 신체의 안전 보호’ 의무를 다했는지 안했는지 따져보자는 것이다. 이러한 사항에 따라 실제로 이정미 재판관은 “피청구인은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신체의 안전 보호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할 수 있도록 권한을 행사하고 직책을 수행하여야 하는 의무를 부담합니다.”라고 앞서 말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점은 세월호 참사 당시 박근혜가 대통령으로서의 의무를 다했는지 그 행적을 따라가면서 검토하는 것이다. 박근혜가 성실하였는지 아니었는지는 둘째 치더라도 ‘뭐라도’ 했는지를 묻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날 판결문 낭독에는 이러한 검토 내용은 없었다. 전문의 < 피청구인의 대응> 부분을 보더라도 대통령 측 주장만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열거하고 있을 뿐 그 주장이 신빙성이 있는지에 대한 판단은 기술되어 있지 않다.

 

아주 기초적인 논리적 판단조차 수행하지 않았거나 의도적으로 누락시켰다는 의심이 든다. 더구나 전문에는 전원 구조 오보가 정정된 2014년 4월 16일 오전 11시 50분 경 국가안보실은 “구조가 순조롭지 못한 사실을 알고 있었고 학생 전원이 구조되었다는 방송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적어도 오후 5시경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방문할 때까지 ‘대통령’으로서 박근혜가 어떠한 지휘감독을 했는지를 이들의 주장과 대조하여 사실관계를 확인하여야 한다. 하지만 이 조차도 기술되어 있지 않다. 논리가 실종되어 있다.

 

재판관 김이수와 이진성의 보충의견(소수의견)을 보면 세월호 관련 내용이 파면사유에서 누락된 것이 더 납득이 되지 않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들은 “헌법상 대통령의 성실한 직책수행의무 및 국가공무원법상 성실의무를 위반하였”다면서 이정미 재판관이 읽었던 종합결론과 다르게 판단하고 있다. 이들은 세월호 참사 당시를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중대하고 급박한 위험이 가해지거나 가해질 가능성이 있는 국가 위기 상황에 해당함이 명백”하다고 보면서 그와 동시에 “피청구인은 상황을 신속히 인식하고 시의적절한 조치를 취하여 국민의 생명, 신체를 보호할 구체적인 작위의무를 부담하게” 됨을 인정하고 있다. 즉, 헌법 제66조 제2항 및 제3항, 제69조(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의무), 헌법 제34조 제6항(국가의 재해 예방과 국민보호), 국가공무원법 제56조(모든 공무원은 성실히 직무를 수행하여야 한다.)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라는 것이다.

 

그럼 이러한 판단은 어떻게 나왔는가? 이들(김이수, 이진성 재판관)은 박근혜 측의 주장에 대해 “위기상황의 인식”, “피청구인의 대처”로 항목을 나누어 살피고 있다. 간략하게 핵심 판단 내용만 전하자면 당일 박근혜가 집무실에 출근하였으면 오전에 이미 상황을 심각성을 파악할 수 있었으며, 오보 때문에 대응이 늦었다는 박근혜 측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당일 박근혜의 지시라 해봤자 원론적이었으며 대부분의 지시 내용은 사실관계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명백한 성실의무 위반이자 작위의무 위반이라는 것이다.

 

이들 보충의견은 ①(전제)성실한 직책 수행의무 위반=탄핵사유 → ②(사실관계)세월호 참사에 대한 박근혜 성실/작위 의무 위반이라는 논리를 따르고 있다. 그렇다면 ①, ②에 따라 탄핵사유로서의 부합성에 대한 판단, 즉 최종 결론은 ③‘탄핵사유가 된다.’가 되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들의 결론은 너무나도 엉뚱하게도 “이 사유만으로는 파면사유를 구성하기 어렵다고 판단”한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출처 : 프레시안 ⓒ사진공동취재단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55672)

 

 

도대체 이러한 판결문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종합판결도 보충의견도 처음부터 세월호 참사는 파면 사유에서 배제되어야 하는 것처럼 논리 없음과 모순을 감행하고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날 박근혜의 탄핵사유 중 가장 핵심이 ‘기업의 자율성 침해’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월호에 대한 사안은 파면사유에 해당할 만큼 (판결문에서 반복하고 있는) “중대한” 사안이 아닌 반면 기업의 자율성 침해는 파면사유에 해당하는 “중대한 법 위반 행위”이라는 것이다. ‘성실’이라는 용어를 추상적이고 상대적이라고 말했던 판결문은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 보다 기업의 돈벌이가 더 ‘중대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는 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1990년 헌법재판소는 사유재산과 시장경제원리를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정식화하였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판결문이 치명적인 논리적 오류를 만들어내면서까지, ‘중대한’이라는 말을 이용하여 부정하였던 것은 바로 시민들의 ‘정치’였다는 것이다. 광장의 시민들은 국민의 생명권 보장을 위한 대통령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에 대한 책임을 물으면서 생명이 살아 숨 쉬는 국가를 요구하였지만 판결문은 그것이 한낱 분노에 찬 ‘소리’에 지나지 않으며 책임을 묻기 위한 ‘말’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판결문은 안정적인 시장경제질서의 회복이 너희가 아우성치는 생명보다 더 중대하다고 보면서 이제 그만 광장을 떠나라고 말하는 것이다. 판결문은 우리의 시간을 광장의 촛불이 등장하기 이전으로 돌려놓고 있다. 대통령의 자리에 박근혜가 아닌 다른 사람을 들여놓는 것 외에 달라진 것이 없는 그 시간으로 말이다. 그래서 랑시에르가 『불화』에서 한 말은 이 상황에서 너무나도 적합해 보인다. “헌법은 변혁의 열망을 지속적으로 수용하는 한에서 헌법으로 기능하는 것이고, 국민의 열망을 배제하고 기성질서를 고착화하는 한에서는 치안법이다.(자크 랑시에르 지음/진태원 옮김, 불화, 도서출판 길, 2015, 51쪽 이하.) 판결문은 헌법을 치안법으로 대체하고 있다.

 

 

광장을 통해 나온 변혁의 열망이 ‘판결문의 정치’ 속에서 용해되어 버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해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는 세월호 참사 관련 내용을 판결문 전면에 배치한 의도가 ‘대통령 파면’이라는 고기를 던져주면 시민들은 자신들의 논리 없음과 모순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기뻐하면서 그 고기를 즐길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재판관 안창호는 보충의견에서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아모스 5장 24절)’라는 구절을 인용하고 있지만 이 구절을 다시 판결문에 돌리고 싶다. 판결문은 이 구절에 따르고 있는가?

 

 

 

그래서 나는 이 판결문에 불복한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불복’이 보수단체가 말하듯 박근혜의 탄핵자체를 부정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이 불복은 ‘자본주의 시장질서가 그 무엇보다 중대하다’는 점을 인정하며 ‘분노도 열정도 없이(sine ira et studio)’ 살아가라는 판결문의 ‘말씀’에 따르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우리는 또 죽게 내버려두거나 죽게 만드는 세상에 나 자신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던져놓게 되기 때문이다. 1072일 만에 물위로 인양된 세월호와 마주할 면목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판결문의 정치’에 맞서 국가폭력과 자본, 제왕적인 권력정치에 맞서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말하는 ‘세월호의 정치’를 맞세우고 싶다. 그러한 정치가 승리가 하였을 때에만 오로지 축배를 들고 싶다.

 

 

 

오늘부터 맑스분과블로그진을 시작합니다! [더 맑스]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맑스분과블로그진을 시작합니다.
블로그진의 타이틀은 ‘더 맑스’ 인데요. 영어 정관사(The) 의미를 살려 잊혀진 듯한 그 맑스를 되살릴 뿐 아니라 한발 더 나아가(More) 오늘의 현실에서 재현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었습니다.
더 맑스 블로그진은 한철연 맑스분과원들이 돌아가면서 글을 올릴텐데요. 일종의 two track으로 운영됩니다.
우선, 분과원들의 ‘시평’ 이 올라가고, 또 지금 분과에서 열심히 하고 있는 ‘공산당선언 번역’과 관련된 짚어볼 이야기, 후일담 등도 올릴 예정입니다.

 

e-시철 독자 여러분, The 맑스, More 맑스!  앞으로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